81화
자신을 책망하려던 백자안의 입이 불쑥 올라온 하진의 손바닥에 막혔다. 하진은 눈만 데구루루 굴리는 그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잘못도 아니지만, 백자안 씨 잘못도 아닙니다. 우리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납치한 새끼 잘못이지 그게 왜 우리 탓이 됩니까?”
하진의 입에서 나온 욕설에 백자안이 놀라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그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끄덕였다.
그러나 하진은 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대답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이러다 동트겠네.’
하진은 나중에 낮잠이라도 자기로 마음먹고 이 순간 완전히 백자안의 삽질을 막기로 했다.
“백자안 씨. 뭐가 그렇게 불안합니까?”
위로가 통하지 않으니 하진은 직설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좀 더 말주변이 있었더라면 굳이 상처를 파헤치지 않고 위로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하진에게는 그런 말주변이 없었다.
백자안은 하진의 물음에도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진은 잠들지도 않고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형이, 제 곁을 떠나버릴까 봐 무서워요. 저는 형이 없으면 살 수 없는데, 형을 또 잃어버리거나 형이 떠나버리면……. 차라리 가둬놓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진한 아쉬움이 담긴 마지막 말에 순간 하진의 몸이 떨려 왔다.
순간 최지형이 떠올랐지만, 백자안과 그는 전혀 달랐다. 하진에게 털어놓는 것부터가 괴롭게 할 마음이 없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하진은 어떻게 해야 백자안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원하는 걸 들어주면 바로 해결될 테지만, 감금을 원하니 그건 들어줄 수 없었다.
‘이를 어쩐다…….’
머리를 굴리던 하진은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가두는 건 안 돼요. 대신 불안할 때마다 안아줄게요.”
백자안의 허리 뒤로 하진의 팔이 감기고, 두 사람의 몸이 조금 더 강하게 맞닿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하진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느껴져 백자안은 질끈 눈을 감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진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니 놀랍게도 불안함으로 술렁이던 가슴이 진정되었다. 백자안은 저도 모르게 애원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불안하다고 하면 언제든 안아주실 건가요?”
“네. 언제든지요.”
“……귀찮게 할지 몰라요.”
모르는 게 아니라 확실했다. 그가 허락하는 순간부터 백자안은 만족을 모르고 하진을 원할 터였다.
“음, 화장실 정도는 자유롭게 가게 해줘요.”
하진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똑같이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러나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하진이 농담으로 생각해도 좋았다.
어쨌거나 그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뜻이 아닌가.
하진은 마치 응석을 부리듯 자신을 끌어안고 머리 위에 입을 맞추는 백자안의 행동에 불안함이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다는 걸 파악했다. 다행히 동이 트기 전에 끝낼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좀 자요.”
문제 하나를 해결하고 나니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그러나 백자안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하진의 이곳저곳에 입을 맞춰댔다.
부드럽고 나붓한 입맞춤이었으나 잠들기 직전의 하진에게는 방해였다. 결국 하진은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여잡고는 그대로 자신을 향해 당겨 입을 맞췄다.
생각지도 못한 접촉에 백자안이 당황한 것도 잠시, 그는 하진의 입술이 열리자 오히려 더욱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으응…….”
소동으로 인해 깜빡해버린 치료도 할 겸 가이딩으로 재워버릴 생각이었다. 마치 그 속셈을 간파했다는 듯, 백자안은 요리조리 혀를 피하며 제 욕심껏 움직여댔다.
건조한 공기에 말라버린 입술을 살살 깨물어 적시고, 당황한 틈을 타 입안을 유영하다가 하진이 혀를 움직이려 하면 귀신같이 빠져나와 다시 입술을 괴롭혔다.
숨만 가빠질 뿐 가이딩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길어지자 하진은 울컥했다. 기분 좋은 것과 별개로 졸려 죽겠는데 잠들지 못하니 말이다.
“흐읏…….”
게다가 혀를 섞는 시간이 길어지며 흥분한 백자안이 점점 성적인 의도를 담고서 몸의 이곳저곳을 만져오기 시작해 난감했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간지러운 동시에 야릇한 기분이 들어 점점 몸이 배배 꼬였다.
그러는 중에도 욕심 많은 백자안의 입술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하진의 정신은 점점 몽롱해져 갔다.
“으응…… 하아.”
이대로는 안 된다. 하진의 생존본능이 경고를 울렸다. 이대로 넘어가 버리면 내일의, 아니 일을 치른 이후의 하진이 개고생할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하진이 속수무책으로 끌려만 다녀서인지, 아니면 그의 몸을 탐하느라 정신을 빼앗기기라도 한 것인지 혀의 움직임이 단순해졌다.
하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뒤로 뺄 수도 없게끔 목에 팔을 걸어 끌어안고서 백자안의 혀를 살살 물었다. 그대로 가이딩을 불어넣었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아찔한 쾌감에 백자안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는 게 아쉽긴 했으나 나른하면서도 발끝까지 찌릿한 쾌감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백자안이 잠들었다. 하진은 잠들기 직전까지도 느릿하게 혀를 움직이던 행동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잘 수 있겠네.”
그 말을 끝으로 하진은 마치 기절하듯 잠들었다.
거의 동이 트기 직전에 잠들었던 만큼 눈을 떴을 땐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때였다. 휴일일 때도 이렇게까지 늦게 일어난 적이 없던 하진은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윽!”
차진우가 걱정했던 근육통이 찾아왔다. 하진은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찌릿한 통증에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마치 열 명의 사람에게 작신작신 밟힌 것 같은 통증이었다.
“끄응…… 아, 생각보다 심하게 아프네.”
전신에서 멀쩡한 부위가 몇 없었다. 어깨부터 등, 허리, 허벅지 등 거의 모든 부위가 아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통증을 줄여보겠다고 팔을 들어 어깨를 주무르려다 등허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앓는 소리와 함께 팔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며칠 고생하겠는데…….’
“하아…….”
한숨을 쉰 하진은 그제야 옆에서 잠들었던 백자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가이딩으로 재웠으니 그 또한 여전히 잠들어 있어야 하는데 자리에 없으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몸으로는 백자안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러 가는 것도 힘들었다.
결국 하진은 억지로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고 조심스레 다시 침대에 누웠다.
똑똑.
“하진 씨, 차진우입니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도 차진우가 찾아왔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들어온 차진우는 여태껏 누워 있는 하진을 마주하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제가 자는 걸 깨운 겁니까?”
“아뇨. 으음…….”
병원에 입원해 있자는 권유를 거절했던 터라 어쩐지 민망했다.
“근육통 때문에…… 못 움직이겠습니다.”
혀를 차거나 핀잔을 줘도 할 말이 없는데 차진우는 잔뜩 걱정 어린 얼굴로 다가와 하진을 살폈다.
“못 움직일 정도라니, 많이 아픕니까? 당장 의료진을, 아니, 치료 에스퍼를 부르죠.”
“네? 잠깐만요!”
그러나 하진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차진우가 훌쩍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다가 근육통에 신음하며 도로 누워버린 하진은 지끈거리는 허리에 차라리 에스퍼를 부르는 게 낫겠다며 포기했다.
차진우가 쏜살같이 달려 나가자 곧이어 한승호와 이도윤이 찾아왔다. 그 와중에 경쟁이라도 하는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쿵쾅쿵쾅 바닥을 울려댔다.
“형! 아프다며!”
“그러니까 병원에 있자니까는!”
후다닥 달려와 양옆에서 낑낑거리는 둘을 하진이 달랬다. 진정하라고 두 사람의 팔이라도 두드리고 싶은데 제 팔조차 들어 올릴 수 없는 상황이라 손만 간신히 들어 보였다.
“근데 백자안 씨는 왜 안 보입니까?”
“계속 쳐 자라고 방에 넣어놨어. 치사한 새끼. 혼자만 차지하고…….”
뒤에 덧붙여 중얼거린 말로 인해 어떻게 된 상황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침에 하진을 깨우러 왔다가 함께 잠든 백자안을 발견한 것이리라.
보지도 않았는데 백자안을 집어 던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뭐…… 에스퍼니까 다치지도 않았겠지.’
“백자안 형 집어 던져도 안 깨던데 가이딩해준 거예요?”
이도윤이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여전히 민망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숨길 것도 없었기에 하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물어본 이도윤보다도 한승호가 더 서운해했다.
“나는?!”
“아…… 물론 할 겁니다. 한승호 씨와 차진우 씨 체내에는 여전히 그 성분이 남아 있을 테니까요.”
다만 지금은 근육통 때문에 몸을 일으킬 수 없으니 차진우가 데려온 에스퍼에게 치료를 받고 난 다음에 하자는 말을 이으려고 할 때였다.
“그럼 지금 해.”
“네? 잠, 잠깐……!”
하진이 말리려 했으나 이미 이도윤과 백자안에게 순서를 뺏겼다는 것에 눈이 벌게진 한승호는 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도 안 닦았다고……!’
몸이 아픈 건 둘째 치고서라도 일어나서 아직 이도 닦지 않은 상태였다. 하진은 최선을 다해 방어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팠던 팔이 잘만 움직였다.
그러자 아무리 눈이 돌았어도 하진의 허락 없인 몸에 억지로 손댈 수 없는 한승호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가린 그의 손등에만 입술을 꾹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