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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80화 (80/136)

80화

“한승호 씨도 다음에 저랑 같이 해보죠.”

뭐가 문제인지 파악해야 두 번 다시 칼을 못 쥐게 하든지 할 테니까 말이다. 마지막 속내를 감춘 채 달래는 말에 한승호가 금세 또 헤헤 웃었다. 참 단순한 친구였다.

“하진 씨, 사온 도시락이 다 식겠습니다.”

“아, 그렇죠.”

현관을 넘어서기 무섭게 달려든 세 사람 탓에 포장한 음식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들은 하진이 사온 거라는 것에 집중하며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 주려고 사온 거야?”

“돈은 차진우 씨가 썼지만요.”

깜빡하고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 하진이 사자고 해놓고 남의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진은 차진우에게 나중에 갚겠다고 했으나 그가 정색하고 우리 사이에 그런 표현은 쓰지 말아 달라고 하는 바람에 우선은 물러서야 했다.

“혀엉…….”

“잘 먹을게요, 형.”

차진우의 돈으로 산 거라는 데도 세 사람은 하진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기분이 상했을까 싶어 힐긋 차진우를 바라보는데 시선이 마주친 그는 작게 웃을 뿐, 다행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다.

정확히는 차진우도 저 세 사람보다는 하진에게 더 신경을 쏟는 것뿐이지만, 알 리 없는 하진은 다행이라며 넘어갔다.

세 사람은 마치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도시락을 먹었다. 하진이 돌아오고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안정되자 그제야 배고픔이 찾아온 것이다.

차진우까지도 말없이 식사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하진은 물이라도 챙겨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왜 가요?”

그러나 일어나기 무섭게 눈으로 하진을 좇으며 어디 가는지, 왜 가는지 따위를 묻는 바람에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아야 했다.

물을 가져다주겠다고 했는데도 안 그래도 되니까 그냥 옆에만 있어 달라고 하니 억지로 가기도 그랬다.

한차례 시도가 막힌 이후로는 딱히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뭐가 그리 불안한지 알파 팀은 급하게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분리 불안 증세였으나 그건 하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참을 거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계속해서 대화하는 것도 아니었으나 밤이 늦도록 한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가 이곳에 있음을 각인했다.

“하암.”

그리고 시간이 새벽 한 시가 다 되었을 때야 그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사실 알파 팀은 잠까지도 하진과 같은 공간에서 자고 싶어 했지만, 잠만큼은 혼자 자야 하는 하진이 거절했다.

‘으음……. 그냥 같이 자자고 할 걸 그랬나.’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던 하진은 현재 침대에 누워서 두 시간째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엄청나게 졸리긴 졸렸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감고 머리를 비워도 잠들 수가 없었다.

자신의 방이 분명한데도 혼자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이곳이 협회인지 반정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두근두근.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더 불안하게 뛰는 심장에 하는 수 없이 거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한 하진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백자안 씨?”

“……안 주무셨네요.”

잔뜩 가라앉은 기색의 백자안이었다. 하진은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백자안은 몰래 문을 열 땐 언제고 문턱도 넘지 못한 채 불쌍하게 하진을 바라보았다.

“들어가도 돼요……?”

“아, 네. 들어오세요.”

하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백자안이 조심스레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저 오늘만 여기서 자면 안 될까요?”

베개까지 야무지게 챙겨온 걸 보니 만일 하진이 자고 있었더라면 그냥 몰래 자고 갈 생각이었던 듯했다.

평소였더라면 몰래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한마디 했을 하진이지만, 그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진은 혼내는 대신 침대 끝으로 조금 몸을 이동하며 백자안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백자안은 자신의 베개를 내려놓은 뒤 조심스레 하진의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형.”

“백자안 씨도 잘 자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거슬릴 법도 하건만 하진은 오히려 안심이라도 한 듯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쏟아지는 수마에 몸을 맡긴 채 완전히 잠이 들려던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백자안이 움직이는 듯하더니 단단한 팔이 허리에 감겼다.

순간 잠이 달아난 하진이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등과 맞닿은 탄탄한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쿵쾅거림이 느껴져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점차 등에서 느껴지는 고동이 느려지더니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아…… 졸려.’

백자안의 심장 박동에 집중하고 있으려니 달아났던 졸음이 다시 찾아왔다. 하진은 이러다 버릇이 들면 어쩌나 걱정하며 스르륵 잠에 빠졌다.

하진이 잠든 것을 확인한 백자안은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하진의 향, 심장 고동, 색색 내쉬는 숨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어떠한 진정제보다도 효과가 좋았다. 백자안은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하진의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무서워. 형을 또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하진을 한 번 잃어본 백자안은 이젠 그가 없이는 자신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체감했다. 만약 하진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차라리 쉬웠다. 하진이 없는 세상이라면 백자안이 살아 있을 이유도 없으니까. 그런데 하진이 스스로 떠나거나 되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해답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엔 하진을 되찾기만 하면 아무도 올 수 없는 곳에다가 숨겨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돌아온 하진을 마주하자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진이 싫어할 테니까.

백자안은 그게 더 무서웠다. 하진이 싫어하는 행동은 할 수도 없는 데다가 또다시 하진을 잃게 되면 어쩌나 하는 딜레마가 그를 괴롭혔다.

타들어만 가는 속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그는 그저 품 안의 하진을 더욱 끌어당겨 안을 뿐이었다.

마치 이렇게 하면 하진을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는 듯이.

그런데 무의식중에 힘을 너무 주기라도 한 것일까. 곤히 잠들었던 하진이 눈을 뜨고 말았다. 갑갑함에 눈을 뜬 그가 제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는 팔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왜 아직 안 자고 있습니까.”

“……잠이 안 와서요.”

하진은 가물거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백자안은 여전히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토닥이던 손도 느려지고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 같았던 하진이 그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뒤통수가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게 된 백자안이 놀라 움찔 떨었다.

“자요……. 늦었습니다…….”

잠이 들지만 않았지, 눈을 감은 하진은 얼른 자라며 백자안을 마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심장이 뛰는 박자와 엇박자여서 오히려 예민한 S급 에스퍼에게는 그 손길이 방해였으나 백자안은 눈을 꼭 감았다.

“형……. 이제 어디 가지 마요.”

저도 모르게 진심을 내뱉은 백자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진의 잘못이 아닌데 마치 그의 탓인 것처럼 말해버렸다. 이 모든 건 자신이 그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생긴 일인데…….

하진이 화를 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휘몰아쳤다.

“그, 그게 아니라…….”

황급히 뒤늦게라도 수습해보려 하던 찰나, 하진이 중얼거렸다.

“안 갈게요…….”

그 대답에 백자안의 입이 꾹 다물렸다. 저를 탓하는 말이 아니라 위로하는 말이 나오자 조금 더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입을 열어 욕심을 내보였다가 하진이 자신을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가만히 잠든 척했다.

마치 대답을 듣고 안심한 척,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내쉬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하진이 말을 이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들뿐이니까…… 어디 안 갈 거예요…….”

믿음. 어쩌면 백자안 인생에서 가장 익숙한 감정이고,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이었다. S급 에스퍼 중에서도 강한 이들로만 구성된 팀. 그 팀의 일원으로 사람들은 언제나 그에게 믿음을 보냈다.

‘에스퍼님만 믿을게요!’

‘자네만 믿겠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었고, 믿음이란 백자안에게 있어서 얄팍하기 그지없는 감정이었다.

“형을…… 못 지켰는데도 믿어주는 거예요?”

그런데 어째서 하진의 믿음은 이렇게도 무거울까. 너무 무거워서 숨을 쉬는 것도 벅찬 기분이었다.

“구하러 왔잖아요.”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잦아들던 목소리가 일순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에 고개를 내리자 어느새 그를 올려다보는 하진과 눈이 마주쳤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잠이 깨기라도 한 건지 하진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는 너무 가까워 눈을 마주치기 힘들었다. 조금 몸을 떼어내려 했으나, 멀어지기 무섭게 하진이 백자안을 도로 끌어당겼다.

결국 하진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못 지킨 건 아니죠. 24시간 1초도 쉬지 않고 붙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아니지. 그러려고 했는데 거절한 건 나였죠.”

하진의 노력에도 백자안의 기분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1초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거, 그거야말로 백자안이 원하는 바였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 잘못이냐고 하면 난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물론이죠. 형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제가…… 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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