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79화 (79/136)

79화

하진이 겉옷을 가지고 오는 동안에도 결판은 나지 않았다. 그들은 비기거나 승패가 날 때까지 순식간에 다시 패를 내밀었다.

도저히 하진의 동체시력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속도여서 그는 그저 결과가 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아악! 다시 해!”

“뭐래. 패배자는 꺼져!”

가장 먼저 탈락한 사람은 한승호였다.

그는 자신이 내민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비척비척 하진에게 다가갔다. 탈락한 걸로 위로라도 받아볼 속셈이었다.

“젠장……. 형이랑 오랜만에 같이 있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하진은 커다란 덩치를 구겨 제 어깨에 기대는 한승호를 토닥였다.

“다음에 같이 가죠.”

“진짜지? 약속했다? 다음엔 무조건 내가 먼저야.”

“그래요. 그렇게 해요.”

한승호는 부드러운 음성에 헤벌쭉 웃으며 기댄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하진을 잃어버렸던 시간은 끔찍했으나 돌아온 그가 좀 더 자신들에게 너그러워진 건 좋았다.

‘혹시라도 거기서 마음에 드는 놈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죽여야 할 놈들인데 하진의 마음에 들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는가. 한승호는 만족스러움에 웃으며 하진의 온기를 즐겼다.

그러는 사이 승자가 정해졌다.

“아! 팀장은 음식도 안 도와줬으면서!”

“치사해…….”

두 사람의 공격에도 차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진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하진을 꼭 끌어안고 있는 한승호를 떨어트린 그는 하진의 어깨를 감싸고 현관으로 향했다.

“설거지까지 확실하게 마쳐 놓도록.”

끝까지 속을 긁어놓고 가는 행태에 세 사람이 뒤에서 이를 갈았지만, 패배자의 으르렁거림이 무서울 리 없었다.

하진은 남은 이들에게 눈인사를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속이 더부룩해서 1초라도 빨리 나가서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가 떨어져 서늘한 바람이 하진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젠 제법 쌀쌀해진 날씨였으나 하진은 오히려 그 찬 공기를 기껍게 맞이했다.

반복적으로 들이마시고 내쉬니 속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하진이 깊게 한숨을 내쉬자 차진우가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속은 괜찮습니까? 맛이 없었던 것 같은데.”

“체하진 않을 것……. 그게 티가 났습니까?”

하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차진우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놀라 커진 눈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진은 설마 나머지 세 사람에게도 들켰을까 걱정되어 대답을 재촉했다.

“심하게 티 났습니까? 억지로 먹은 거 알아챘을까요?”

하진의 속도 모르고 차진우는 그가 질문하면 할수록 더욱 웃음을 참지 못했다.

결국 한참을 웃던 차진우는 하진의 눈이 가늘어지자 그제야 웃음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티 안 났습니다. 그놈들은 하진 씨가 잘 먹는 거에 정신 팔려 있었으니까요.”

“그럼 차진우 씨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저야 하진 씨만 신경 쓰면 됐으니까요. 음식이 입에 맞을지, 하진 씨가 좋아할지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녀석들과는 달리요.”

밥 먹는 모습을 누군가 관찰했다는 게 못내 민망해서 하진이 괜히 뺨을 긁었다. 그러다 이내 작게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럼 좀 도와주시지 그랬습니까? 설마 일부러 저 골려주려고 그런 건 아니겠죠?”

“당연히 아닙니다. 저도 그 녀석들 실력이 어떤 수준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맛이 없었습니까? 하는 물음에 하진은 길게 목소리를 끌었다.

솔직하게 말할 것인가, 조금 포장을 해줄 것인가. 결국 선택한 건 후자였다.

“그렇게까지 못 먹을 음식은 아닙니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대답이었다. 실제로 배부르게 먹긴 하지 않았나.

물론 다시 먹고 싶진 않지만 말이다. 그 말장난을 눈치챈 차진우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엔 막아 드리겠습니다. 아예 부엌에 못 들어가게 할까요?”

“으음…… 가능하다면요.”

끝내 튀어나온 진심에 차진우가 크게 웃어버렸다. 웃음소리가 가라앉고 차분해진 차진우는 제 옆에 있는 하진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짜가 맞겠지……?’

현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한 불안감이 들었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또다시 하진을 허망하게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망설이던 차진우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하진의 손을 잡았다. 저녁 공기에 차가워진 손끝이 닿으니 현실감이 확 살아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하진이 고개를 돌려 맞잡은 차진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아예 꽉 잡은 것도 아니고 조심스레 손끝만 잡은 낯간지러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손끝에 닿은 온기에 굳었던 어깨가 사르르 풀어졌다.

잠시 그 온기를 만끽하듯 가만히 있던 하진은 차진우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것을 얽어 손깍지를 꼈다.

‘남들이 보면 꽤 웃긴 광경이겠군.’

서른을 넘긴 사내 둘이서 깜찍하게 손깍지를 끼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어디서 또 볼 수 있겠는가.

하진은 혼자만의 생각에 작게 웃으며 잡은 손을 이끌고 걸었다.

“손 정도는 그냥 잡아도 됩니다.”

맞잡은 손을 통해 조금씩 가이딩을 흘려보내자 차진우가 마치 앓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꾹 하진의 손을 맞잡았다.

하진은 접촉 가이딩을 했음에도 맞잡은 손을 조금 강하게 잡을 뿐인 차진우의 행동에 안도했다.

안도하고 나서야 자신이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어지간히 당했어야지.’

특히나 마지막 순간은 에스퍼에게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나마 서지한의 도움이 있었고, 하진의 멘탈이 튼튼해 오기가 생겨 기를 쓰고 탈출한 게 다행이었다.

하진은 다시 떠오르려는 불쾌한 기억을 떨치기 위해 차진우의 손을 부러 더 꼭 잡았다.

가이딩을 더는 보내지 않는 순간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한참을 걸었다.

그러던 중에 하진이 네 사람이 식사조차 못 했다는 걸 알게 된 바람에 문을 연 식당을 찾아 헤맸다.

네 개의 도시락을 사 들고 숙소로 서둘러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튀어나온 세 사람이 하진의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형! 그걸 왜 먹었어!”

“죄송해요, 형……. 그런 맛없는 걸 형에게 먹였다니…….”

“체한 건 아니죠? 나가서 소화제라도 사올까요?”

그러지 않기를 바랐건만 남은 음식을 맛본 듯했다. 다행히 혀는 제 기능을 하는지 세 사람은 어떻게 이런 걸 먹었느냐며 하진의 혀를 걱정했다.

‘잠깐만. 혀가 멀쩡한데 왜 저런 음식이 나온 거지?’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다들 요리할 때 간을 보지 않은 겁니까?”

설마 해서 물어보자 저마다 민망한지 하진의 시선을 피했다.

“으음, 그게…….”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집중하다 보니까 까먹었달까…….”

머쓱해하는 한승호와 이도윤과 달리 백자안은 여전히 시무룩해선 하진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저는…… 간을 봤어요.”

“엥?”

그의 옆에 있던 두 사람의 시선까지도 백자안에게 향했다. 백자안의 음식도 맛본 모양이었다.

“맛을 봤는데도 그렇게 달게 만들었다고?”

“형, 그러다 당뇨 걸려……. 아, 형은 S급이라서 괜찮나? 그럼 하진 형이 당뇨 걸려.”

이때다 싶은 놀림에도 백자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진이 먹을 음식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는 충격이 그만큼 큰 듯했다.

“앞으로는 부엌에 안 들어갈게요…….”

그러나 하진의 생각은 달랐다. 정말로 하기 싫은 거면 모를까, 한 번의 실패로 아예 포기하기에는 저들 중 백자안의 실력이 가장 나았다.

설탕량만 조절한다면 요리를 꽤 잘한다고 할 수 있을 실력인데 말이다.

하진은 나머지 두 사람이 조금 징징대겠지만, 백자안의 기를 살려주기로 했다. 사실 특별할 건 없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것뿐이었다.

“백자안 씨는 설탕량만 조절하면 될 것 같은데요. 너무 단 것만 빼면 맛있었어요.”

그러자 백자안은 마치 시든 꽃이 물을 머금고 살아나듯 화사하게 피어났다.

“정말요? 다음에 제대로 만들면 다시 먹어주실 건가요?”

“어려울 게 뭐 있다고요.”

하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간 보는 게 어렵다면 옆에서 같이 봐드릴까요?”

“정말요?”

하진에게 쓰레기를 먹였다는 자괴감은 사라지고, 둘만의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꽉 들어찼다. 하진과 부엌에서 단둘이 요리라니. 마치 신혼부부 같지 않나.

“나는? 나도 알려줘.”

“형, 저도요.”

그러나 행복한 백자안을 그냥 두고 볼 두 사람이 아니었다. 백자안은 승냥이처럼 기회를 놓치지 않는 둘을 서늘하게 노려보았으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진에게 매달렸다.

“나도 알려주면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어.”

“저도 노력했는데 저만 따돌리려는 건 아니죠?”

하진은 묵직해진 어깨 양옆에 붙은 둘을 잠시 바라보았다. 둘 다 음식의 모양새는 그럴싸했다.

특히나 이도윤이 만든 죽은 입에 넣자마자 바스러진 걸 보면 오래 끓인 게 분명한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도윤의 경우, 흰죽이라 간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이라 오히려 회생의 여지가 있었다.

“한승호 씨는…….”

하진이 말끝을 흐리자 이도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학! 승호 형은 아예 꽝이구나?!”

“형!”

본인이 만든 음식을 직접 먹어봤으니 억울해할 것도 없을 텐데 막상 눈앞에서 자신만 쏙 빼놓으니 서럽고 억울한 한승호였다.

저러다 울겠다 싶어진 하진은 서둘러 한승호를 달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