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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78화 (78/136)

78화

차진우는 하진 없이 이들을 이끌어왔던 수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을 이 상태로 뒀다간 끝도 없이 다툴 거라는 걸 직감했다.

“할 일이 없다면 하진 씨가 일어났을 때 먹을 음식이나 준비하는 건 어때,”

차진우가 던진 떡밥에 세 사람이 곧바로 반응했다. 다만 그 방향이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하진 형이 누가 만든 걸 더 좋아하는지 보자고.”

“네 그 똥손으로 가당키나 하겠냐? 괜히 형 입맛 버리지 말고 꺼져.”

똑같이 요리라고는 한 적 없는 놈들이니 힘을 합치지 않을까 싶어 해본 말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서로 경쟁하려 드는 그들을 보며 차진우는 더는 말리기를 포기했다.

“사고나 치지 마라.”

“당연하지.”

다시 생각해보니 차라리 저렇게 얌전하게 싸우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하진을 깨우지만 않는다면야.

백자안은 하진에게 먹일 음식을 준비하라는 말에 이미 부엌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제법 널찍한 부엌이었는데 커다란 장정 세 명이 들어서자 가득 차고 말았다. 차진우는 그런 세 사람을 뒤로하고 소파에 자리 잡았다.

‘굳이 저기 낄 필요는 없지.’

협회장이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했으니 여차하면 사람을 불러 준비하면 되었다. 이게 바로 어른의 지혜라는 거였다.

* * *

하진은 그야말로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깨어났다. 눈을 뜬 그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납치당한 후 생긴 버릇 아닌 버릇이었다.

처음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아무 생각 없이 문밖을 나섰을 때, 낯선 공간에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을 느꼈었다.

그때 이후로 하진은 그곳에서 자고 일어날 때마다 먼저 눈을 굴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머릿속에 한 번 되새긴 후 움직이는 게 습관으로 남아버렸다.

“내 방이네…….”

얼마나 푹 잤는지 목이 다 잠겨 깔깔한 목소리가 나왔다. 하진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자리를 비운 지 오래인데도 자신의 냄새가 남은 방에 마음이 놓인 하진은 잠시 그 기분을 만끽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잠이 덜 깬 몸을 움직인 하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아래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확 밀려 들어왔다.

“불 좀 쓰자고!”

“여태까지 네가 썼거든? 나도 좀 쓰자!”

역시나 소음의 주인들은 한승호와 이도윤이었다. 하진은 대체 뭘 하기에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싶어 계단을 내려갔다.

“아, 하진 씨. 몸은 좀 어떻습니까?”

“푹 잤더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남아 있던 피곤함마저도 싹 사라진 하진이 멀끔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며 미소 짓는 차진우에게 마주 웃어주는데 부엌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형이야? 좀만 기다려!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거의 다 했어!”

“형! 승호 형 거는 먹지 마요!”

끝까지 다투는 두 사람 사이로 백자안이 쏙 빠져나왔다. 앞치마까지 둘러매고 화사하게 웃는 모습이 나중에 결혼하면 부인에게 제법 사랑받는 신랑이 될 거 같았다.

‘물론 안 할 것 같지만.’

“형, 여기 물이요.”

마침 목이 말랐던 터라 하진은 고맙게 컵을 받아 들었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 비우자 자연스레 컵을 받아 든 백자안이 하진을 이끌고 식탁으로 데려갔다.

매너 좋게 의자까지 뒤로 끌어당겨 준 그는 하진에게 물 한 컵을 더 가져다주며 말했다.

“식사 데우기만 하면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 고맙습니다.”

그때 한승호와 이도윤이 끼어들었다. 자연스럽게 백자안이 준비한 식사로 배를 채우게 되었는데 그 꼴을 얌전히 지켜볼 두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커다란 식탁 위에 음식이 한가득 놓였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양에 하진이 고개를 돌려 식사를 준비한 이들을 바라보았다.

“……여러분은 안 먹습니까?”

혼자 먹기엔 너무도 많은 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 먹으라고 준비한 거니까.”

‘기특하긴 한데…….’

여섯 명이 먹어도 배부를 정도의 양을 차려놓고 혼자 먹으라니 부담스러웠다. 직접 만들었는데 남기면 섭섭할 게 아닌가.

하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차진우에게 향했다.

안타깝게도 수신이 좋지 못했는지 차진우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결국 이 부담스러운 양 모두가 고스란히 하진의 몫이 되었다.

‘음, 일단 최선을 다해 먹어 보자.’

위가 텅텅 빈 게 느껴질 정도이니 어느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진은 비장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우선은 텅 비었을 속을 달래기 위해 죽으로 먼저 손을 뻗었다.

이도윤이 주먹을 불끈 쥐는 걸 보아하니 그가 만든 음식인 듯했다. 하진은 하얗기만 한 죽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에 넣었다.

‘……?’

죽이라고 해도 씹어서 삼켜야 했기에 딱 한 번 씹은 하진의 턱이 멈추고 말았다. 씹을 것도 없이 후루룩 목구멍으로 넘어간 탓이었다.

분명 눈으로 볼 땐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쌀알들이 어떻게 혀에 닿는 순간 바스러질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맛도 없어.’

끔찍하다는 뜻이 아니라 없을 무, 말 그대로 맛이 없었다. 간이라고는 하나도 하지 않았는지 그냥 김장용으로 만든 풀을 묽게 만들어 먹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요리를 못하는 편이구나…….’

하진은 숟가락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배고파 죽을 것 같은데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밍밍한 죽으로 배를 채우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감상을 기대하는 초롱초롱한 눈을 마주하자 차마 한 숟갈만 먹고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 못 먹을 정도로 맛없는 것도 아니니까 조금만 더 먹자.’

하진은 결국 세 숟가락을 더 먹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죽을 꿀꺽꿀꺽 삼킨 하진은 이도윤을 바라보았다.

“……맛있네요. 속이 비었을 걸 생각해서 죽을 만든 겁니까? 고맙습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하진의 음성에 이도윤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양 입꼬리가 치솟았다.

“아니, 뭐. 맛있다니 다행이네. 다음에 또 해줄게요.”

“형, 이제 내 것도 먹어 봐.”

밍밍한 죽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하진은 순순히 한승호가 내민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자랑스레 내민 음식은 김치볶음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혀가 너무 밍밍해서 김치가 당겼던 하진은 속으로 반색하며 숟가락을 움직였다.

후후 불어 식힌 뒤 입에 넣는데 혀에 닿는 순간 하진은 턱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데자뷔가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짜고 달고 셔. 그리고 이 쓴맛은 뭐지?’

그야말로 온갖 맛이 다 나는 김치볶음밥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맛이 날 수 있나 싶어 김치볶음밥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갑자기 턱을 멈춘 하진의 모습에 한승호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맛없어……?”

차마 씹지도 못하고 있던 하진이 미간을 피며 꿀꺽 삼켰다.

“아뇨.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라서요.”

하진은 차마 풀 죽은 강아지처럼 구는 한승호를 두고 솔직한 감상을 내놓을 수 없었다.

방사 가이딩밖에 받지 못해 이상한 약 성분이 몸에 남아 있다는 데에도 자신의 밥이 더 급하다고 이렇게 준비하지 않았나.

‘죽은 밍밍하니까 번갈아 먹으면 괜찮을지도…….’

죽과 마찬가지로 김치볶음밥도 몇 숟가락을 더 떠먹은 하진은 마지막 남은 백자안의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놀랍게도 이 넓은 식탁을 채운 음식들 대부분이 백자안의 작품이었다. 겉보기에 한승호의 김치볶음밥도 그럴싸했으니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음식을 만들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진은 거기서 희망을 보았다.

“백자안 씨 혼자 이 많은 걸 다 한 겁니까? 대단하네요.”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아무리 하진이 오래 잠들어 있었다지만 혼자서 어떻게 이 많은 요리를 다 했을까.

“형을 위해서 열심히 했어요.”

백자안이 수줍게 웃었다. 하진은 기대감을 가지고 젓가락을 들었다. 온갖 맛에 시달린 혀를 진정시키기 위해 시금치무침을 먼저 집었다.

참기름의 고소함과 적절한 짭짤함을 기대했던 하진은 혀에서 느껴지는 단맛에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뭐…… 설탕을 쓰기도 하니까. 조금 많이 넣었나 보지.’

앞선 두 음식에 비하면 조금 달콤할 뿐 멀쩡한 음식이었기에 하진은 다른 반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겉절이를 먹어도, 불고기를 먹어도, 심지어는 생선구이를 먹어도 단맛이 느껴졌다.

시금치 무침의 단맛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에 하진은 해탈했다. 하진은 숟가락으로 죽을 한가득 퍼먹었다.

이도윤의 밍밍한 죽은 사실 이걸 위한 큰 그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다시 먹으니 좀 살 것 같았다. 그렇게 하진은 의외로 합이 잘 맞는 음식들을 번갈아 먹으며 배를 채웠다.

“배불러…….”

평소에도 과식하는 편이 아니었던 하진은 음식이 목구멍까지 들어찬 것 같은 기분에 하는 수 없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맛있다고 거짓말을 해버렸으니 어지간해서는 음식을 다 먹어 치워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했으나 이 많은 걸 혼자서 먹기는 불가능했다.

“잘 먹었습니다. 챙겨줘서 고마워요.”

하진의 감사 인사에 세 사람은 저마다 뿌듯해하고 쑥스러워했다.

하진이 음식을 남긴 게 아쉽긴 했으나 그들이 봐도 혼자 먹을 양은 아니었기에 조금만 더 먹으라는 권유는 하지 않았다.

“배가 너무 불러서 산책을 좀 하고 싶은데 같이 가주실 분?”

안 좋은 기억 탓에 어지간하면 당분간은 이들과 함께 숙소에 콕 박혀서 나가지 않으려 했건만 도저히 이 음식을 소화시키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하진의 권유에 네 사람이 거의 동시에 손을 들었다.

뒷정리를 해야 했기에 하진과 나갈 사람은 한 사람으로 정해졌고, 그 행운아는 공평성을 위해 가위바위보로 선별하기로 했다.

“가위…… 바위…… 보!”

후웅!

네 사람이 동시에 손을 내미는 순간 하진이 있는 곳까지 바람이 밀려와 앞머리가 살랑거렸다. 하진은 조금 질린 얼굴로 자리를 피했다.

생각 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더니 하진이 그 꼴이 날 수도 있었다. 가위바위보 풍압에 다치면 아픈 것보다 창피해서 고개도 못 들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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