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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77화 (77/136)

77화

아직 집에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온몸에 힘이 풀리며 안심이 되었다. 하진은 그제야 자신이 이들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었다는 걸 몸소 체감했다.

‘기분이 이상하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서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연 적이 없었다. 열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사람이 사회적인 동물이 아니군.’

하진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아무 생각이나 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엇.”

하진은 땅을 딛고 서기 무섭게 힘이 풀리는 다리에 당황하며 엎어질 뻔했다. 다행히 휘청거리는 동시에 달려온 이들이 잡아주어 꼴사납게 넘어지는 모습은 면할 수 있었다.

“뭐야?! 결과는 아무 이상 없다며! 근데 왜 이래!”

스트레스와 긴장 수치가 높을 뿐, 큰 문제는 없다는 것을 확인받은 후였다.

그런데 하진이 갓 태어난 사슴처럼 제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엎어지려 하자 한승호가 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누구보다도 먼저 튀어와 하진을 안아 들었던 백자안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하진은 놀란 이들을 진정시키고, 당장에 의료진을 호출하려는 차진우를 만류했다.

“아무리 병원이 무서워도 검사는 받아야지!”

집에 가고 싶다고 한 걸 병원이 무서워서 한 핑계로 둔갑시키는 행태에 하진이 한승호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하진의 입에서 나올 말에 주목했다. 아무리 엎어질 뻔했다고 해도 과한 집중이었다.

하진은 또다시 창피한 말을 제 입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에 얼굴을 붉히며 작게 속삭이듯 털어놓았다.

“안심돼서, 그래서 힘이 풀린 것뿐입니다…….”

그러자 쏟아지는 시선이 강렬해졌다. 고개를 푹 숙였는데도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 훤했다.

그들은 결국 하진이 젠장, 내가 다 쫓아내야 그만 쳐다볼 겁니까? 라고 말하고서야 시선을 돌렸다.

“어어, 이제 안 볼게. 안 봐, 안 봐.”

한승호는 정말로 하진이 자신들을 쫓아내고 병실에 남으려 할까 싶어 황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다. 차 한 대가 병동 앞에서 멈춰 서더니 협회장이 내리는 것을.

뒤뚱뒤뚱 살찐 몸을 이끌고 황급히 뛰어오는 협회장을 발견한 한승호가 있는 대로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 사실을 알렸다.

“협회장 오는데?”

“협회장님이?”

“‘협회장님’은 무슨. 하진 형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나 보네. 귀신같은 영감탱이…….”

차진우의 말을 받은 이도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들 모두 비슷한 마음이었다.

한지우의 등장에 간을 보며 하진을 구하는 데 있어서도 줄다리기를 했던 협회장이었다. 이제 와서 헐레벌떡 뛰어온다 한들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그냥 돌아갈까요? 형이 원하시는 대로 할게요.”

백자안이 하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얼굴에는 한동안 볼 수 없었던 화사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의견에 드물게 한승호가 동조하고 나섰다.

“그래, 그냥 가자. 만나 봤자 사과는커녕 자기가 형 구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이나 늘어놓을 텐데 뭐 하러 들어 줘.”

“아예 만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하진 씨의 휴식이 먼저이니 굳이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차진우까지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도윤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아까부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나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여기서 협회장을 맞이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진은 모르지만, 협회장이 어떤 식으로 간을 봤는지 아는 알파 팀은 그런 결정에 불만을 가졌다.

“왜 굳이 만나줘? 지금은 말 안 하려 했는데 한지우 그 새끼가 S급 되자마자 협회장이 바로 조사도 중지하고 싸고돌았다고!”

알파 팀은 여전히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지우를 대상으로 계속해서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하진의 구출이 우선이라는 말로, 그다음에는 한지우가 S급이 되었다는 말로 차일피일 조사를 미루는 게 아닌가.

협회장은 그때마다 당장에 중요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미 알파 팀의 신뢰를 잃은 지 오래였다.

하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건 알파 팀뿐이었고, 끝내 그를 구해낸 것도 그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꼴이라니.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뛰어내리면 피할 수 있어. 그냥 가자.”

하진도 한승호가 단순히 본인의 호불호만 가지고 떼를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진이 만만하게 보여지는 게 싫은 거였다.

대놓고 홀대했는데도 만나주면 그 성격에 금세 제 공로도 아닌 걸로 어깨를 으쓱일 게 분명했다.

“생각해줘서 고맙습니다.”

하진은 자신을 생각해서 저렇게 불같이 화내는 한승호에게 기특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기특해하는 걸 티를 내면 또 어린애 취급한다고 생각할 테니 속으로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저도 마냥 받아만 주려고 만나려는 건 아니어서요.”

알파 팀은 하진이 협회장에게 호구 잡힐까 봐 걱정인 모양이었으나 하진은 당해줄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화가 나기로는 피해자인 하진이 가장 많이 나지 않았겠는가. 그는 차라리 협회장이 제 발로 찾아온 걸 기회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복도를 울리더니 병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협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헉, 이, 이하진 가이드가 돌아왔다고!”

무거운 몸으로 계단을 뛰어오르기라도 했는지 협회장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흐르는 땀을 닦지 않는 건 자신이 이렇게나 너를 걱정하고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노라, 티 내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있는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았다.

알파 팀은 하진의 앞을 막아서려다가 그의 고갯짓에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에 머물렀다. 협회장은 그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귀찮게 가시를 세우면 어쩌나 했는데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은 것 같았다.

“크흠!”

땀을 내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정말로 계단을 직접 올랐던 협회장은 바짝 마른 목을 헛기침으로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무사해서 정말로 다행일세. 정말로 다행이야…….”

마치 감격이라도 한 듯 말끝을 흐리던 협회장은 그에 그치지 않고 성큼성큼 하진이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알파 팀은 그때까지도 하진의 눈짓에 그를 막지 못하고 얌전히 뒤에서 노려만 봐야 했다.

힘에 부치는지 질펀한 엉덩이를 침대에 기댄 협회장이 덥석 하진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하염없이 그 손을 쓰다듬으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손이 많이 거칠어졌구먼…….”

하진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묶였던 손목이라면 모를까, 하진의 손 자체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하마터면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뻔히 붕대까지 감고 있는데도 애먼 손등이나 만져대다니.

‘딱히 호구처럼 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하진은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협회장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일단 오랜만에 뵙습니다.”

협회장은 자신의 걱정 어린 물음에는 반응도 하지 않는 하진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감정을 유지했다.

“그래……. 무척이나 오랜만이지. 내가 미안합니다.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이하진 가이드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어…….”

협회장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선 무척이나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성성한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리자 안쓰러움이 배가 되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협회장이 이렇게까지 나온 순간 더는 화내지 못하고 화가 누그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고작 말 한마디, 꾸며진 표정 하나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하진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에 협회장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무리 하진이 사회 물을 먹었다 해도 어리지 않은 것뿐, 협회장인 자신의 앞에선 꼬맹이나 다름없을 거였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하진의 말은 협회장의 예상을 벗어나는 말이었다.

“아닙니다. 협회 직원이 조종당하고, 소속 가이드가 같은 가이드를 적 세력에 팔아먹을 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반대로 말하고 있지만 전부 하나같이 협회의 치부를 들쑤시는 말이었다. 하마터면 표정 관리를 못 할 뻔했으나 이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래. 고작 화내는 정도야 못 받아줄 것도 없지.’

협회장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넓게 쓰기로 했다. 그러나 하진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 제 잘못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안전하다는 말을 들었어도 정말로 마음을 풀고 있어선 안 됐던 거죠. 제가 방심했다가 벌어진 일을 누굴 탓하겠습니까.”

“이, 이하진 가이드……!”

하진의 믿음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협회장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말로 반박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막지 못했으니까.

반정부 세력에 세뇌 능력자가 있는 줄도 몰랐고, 서주안이 들락날락하는 것도 심지어는 협회 소속 가이드와 모종의 거래를 나누는 것까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하진의 앞에서 안전성을 논할 수 있겠는가. 협회장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어떠한 말로도 하진을 설득할 수 없을 터였다. 단순히 실책이라고만 생각했던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협회장의 안색이 하얘졌다.

‘이대로 이하진이 협회를 떠난다면? 그것도 에스퍼들을 이끌고 가버리면?’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더라면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협회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상태였다.

내부 정보를 털린 바람에 수습하기도 바빴고, 한지우에 의해 S급 에스퍼들은 폭주 직전이었다.

S급이 죄다 발이 묶여버리니 자연스레 처리해야 할 던전은 방치되었고 그 아래 등급의 에스퍼들 또한 과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악순환이었다. 이런 상황이면 하진이 알파 팀을 이끌고 협회를 떠난다고 해도 막을 수도 없었다.

오히려 협회에 남은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에스퍼들이 탈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생각을 마친 협회장이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이하진 가이드! 내가, 내가 잘못했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단속할 걸세! 그리고 어떠한 보상이든 해줄 테니까……!”

어려서부터 협회장을 봐왔던 알파 팀은 무릎까지 꿇고 비는 그의 모습에 적지 않게 놀랐다.

S급 에스퍼를 앞에 두고도 언제나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들을 자신의 도구 취급하던 이가 눈물까지 흘리며 빌다니.

그러나 놀라울 뿐, 안타깝진 않았다. 오랜 세월 봐왔다고 한들 그런 취급하는 이와 돈독해봤자 얼마나 돈독할 거라고 불쌍하게 여긴단 말인가.

게다가 그 어떤 누군가라고 해도 하진이 상대라면 전혀 중요치 않았다.

하진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순순히 넘어가지 않을 생각으로 꺼낸 말이긴 한데 대체 무슨 상상을 했기에 무릎까지…….’

그러나 그 또한 마음이 약해지진 않았다. 하진은 제 손을 마치 동아줄처럼 붙잡고 비는 협회장에게서 손을 빼냈다.

절망에 빠진 노인네를 보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라 하진은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글쎄요. 신뢰가 말로 쌓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에 협회장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신뢰는 시간이 쌓아주는 거지. 그러니 이하진 가이드, 부디 내게 그 신뢰를 다시 쌓을 수 있는 시간을 주게나.”

하진은 잠시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협회장은 당장에라도 하진이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하진은 떠날 생각이 없었다.

진짜 호구냐고 욕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가 호구라거나 정이 많아서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이하성 때문이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이를 떠올린 하진의 얼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 해…….’

어째서 죽음을 가장한 채 반정부 세력에 속해 있는지 하진은 알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협회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고, 하진은 이왕이면 좀 더 움직이기 수월하기 위해 약점을 잡기로 한 것이다.

협회장이 하진의 눈치를 보면 볼수록 유리해질 것이다. 하진은 속내를 감추고 입을 열었다.

“일단은 좀 쉬고 싶습니다. 이제 막 돌아온 터라 고단하네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 그래! 일단은 쉬어야지.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만 하게.”

하진의 축객령에도 협회장은 그가 당장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물러났다.

하진 또한 협회장이 떠나기 무섭게 돌아가자며 매달려 오는 에스퍼들을 데리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하, 드디어 돌아왔네…….”

하진은 오랜만에 찾은 익숙한 공간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제 옆에서 부산스레 움직이는 에스퍼들을 보았다.

“배는 안 고파?”

“죽이라도 드실래요? 저 요리 잘해요.”

백자안의 말에 이도윤이 속지 말라며 끼어들었다.

“백자안 형 요리 존, 아니 겁나 못해요. 속지 마요.”

“아냐, 도윤아. 그땐 네가 귀찮게 굴어서 일부러 맛없게 한 거야.”

“뭐?! 형 진짜 쓰레기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충격에 빠진 이도윤을 뒤로하고 차진우가 다가왔다.

“애들 말대로 뭘 좀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지만, 하진 씨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하진은 역시 이 공간이 그리웠다기보단 제 곁에 있는 이들이 그리웠다는 걸 새삼스레 자각했다. 그러자 의식하지 못했던 피곤함과 배고픔이 찾아왔다.

동시에 찾아온 탓에 뭐부터 해야 하나 고민하던 하진은 결국 잠을 택했다.

진짜 애도 아니고 먹다가 잠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일단…… 좀 자고 먹겠습니다. 피곤하네요.”

자각하고 나자 쏟아지기 시작하는 졸음에 눈을 비비며 말하자 누군가가 쏜살같이 하진을 방으로 옮겨주었다.

머리가 푹신한 베개에 닿았다. 하진이 자리를 비운 지 오래되었는데도 먼지 한 톨 올라오지 않았다. 하진은 괜히 또 가슴이 뻐근해졌다.

청소는 다른 사람이 했을 걸 아는데도 당연히 자신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느껴져서 좋았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게다가 가이딩도…….’

해야 할 게 많았다. 데리러 와줘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고, 점막 가이딩으로 체내에 남은 약물을 없앨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의료진은 할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확신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한지우의 잔재가 그들의 몸속에 남아 있는 게 싫었다. 하진은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손을 허우적거리며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불렀다.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이도윤이었다. 아마 하진을 들고 옮긴 것도 그였으리라. 하진은 웅얼거리는 말로 이도윤을 불렀다.

가까이 오라는 말이었으나 이미 반쯤 잠든 거나 마찬가지인 하진은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응? 뭐라고요?”

그러나 그 말을 자세히 듣기 위해 이도윤이 다가왔으니 소정의 목적은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겨우 뜬 눈꺼풀 사이로 다가온 이도윤을 확인한 하진이 마지막 힘을 짜내서 그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우웁……!”

남은 세 사람이 저마다 놀랐는지 불만 섞인 반응을 보였다.

“형?!”

“치사해!”

“으음.”

한 사람이라도 치료하고 자겠다는 것에 집중한 하진은 다물린 입을 여는 것에 신경을 기울였다.

불시에 당한 이도윤은 당황했으나 하진의 입술이 열리며 혀가 닿자 언제 당황했냐는 듯 반갑게 입을 열어 맞이했다.

시작은 하진이었으나 기다렸다는 듯 반응하는 건 이도윤이었다. 하진은 그가 제 혀를 옭아매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내버려 두고 가이딩에 집중했다.

“으음…….”

이도윤은 힘없는 혀를 제 맘대로 가지고 놀며 키스에 몰입했다.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으나 정말이지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다.

말랑말랑한 혀는 온종일 가지고 놀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혀가 닿는 곳마다 가이딩이 퍼져 나오는데 조금이라도 놓치기 싫어 자꾸만 매달리게 되었다.

‘아아, 이게 그리웠어…….’

이도윤은 창피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만큼 그리웠던 하진의 가이딩이었다. 하진을 두고 한지우의 가이딩이나 받아야 했던 과거가 떠오르자 서러움이 울컥 밀려왔다.

커다란 양손으로 하진의 얼굴을 감싼 이도윤은 조금만 더 그에게 가까이 닿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꺾어가며 입술을 핥고 혀를 당겨 물었다.

키스만으로 외설스러운 소음이 울렸다.

남은 이들은 하진이 먼저 한 접촉이라 차마 말리지 못하고 주먹만 꽉 쥐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진이 잠들어 침대 위로 손이 풀썩 떨어지자 곧장 달려들어 이도윤을 떼어놓았다.

“아…… 좀만 더 버텨주지.”

이도윤이 아쉽다는 듯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핥았다. 가이딩은 모조리 자신이 흡수했으나 하진의 온기가 남은 입술을 핥으니 괜히 충족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좋냐? 좋냐고.”

“그럼 안 좋겠냐?”

한승호가 시비를 걸었으나 하진과의 키스로 날아오를 듯 기분이 좋아진 이도윤은 실실 웃으며 받아쳤다.

어떻게 해도 한승호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이를 갈며 이도윤을 노려보던 한승호는 이내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려 웃었다. 하진이 보았더라면 무슨 악당이냐고 질색했을 미소였다.

“아, 그래. 우리 막내는 처음이었나? 그럼 좋을 만도 하지.”

만족감에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던 이도윤이 그 말에 정색했다.

“뭐야, 그 말? 그럼 나 빼고 다 하진 형이랑 키스했었다는 거야?!”

“하진 씨 깨겠다. 조용.”

차진우의 말에 언성을 높였던 이도윤이 이익, 소리를 내면서도 착실히 목소리를 줄였다.

“와 씨, 나만 처음이라고? 다들 언제……!”

그는 억울해 미칠 것처럼 굴면서도 용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이도윤의 시선이 차진우에게 향했다.

“형들이야 그렇다 치고 팀장까지? 설마 나 임무 하러 갔을 때 그때에요?”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차진우는 어깨만 으쓱거렸으나 아니었으면 아니라고 말했을 그를 알기에 이도윤만 속이 터졌다.

“억울해. 치사해.”

“참나, 뭐가 억울하고 치사하냐? 쫌생이처럼 굴기는.”

하늘 끝까지 치솟았던 기분을 끌어 내린 게 퍽 만족스러운지 한승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아는 이도윤은 그를 노려보다가 다짐했다.

“하진 형 일어나면 한 번 더 해달라고 할 거야.”

“뭐? 다 나았으면 꺼져.”

“싫어. 내가 모를 거 같냐? 형들이나 팀장이 한 번만 했을 거 같진 않거든?”

귀신같은 눈치였다. 순간적으로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한 한승호를 보며 이도윤이 그럴 줄 알았다고 화를 냈다가 결국 둘이 사이좋게 쫓겨나고 말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를 깨우고 말 거라는 걸 직감한 차진우는 백자안까지 데리고 하진의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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