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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76화 (76/136)

76화

협회가 설립된 이후 처음 있는 긴급 상황에 검사는 꽤 오래 진행되었다. 검사는 연구원들과 의료진이 함께 진행했는데 그들은 하진의 존재에 자꾸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이미 한차례 하진의 가이딩이 필요하다고 했다가 하진에게도 거절당하고 알파 팀에게도 눈빛으로 욕을 얻어먹은 후라 검사만 서둘러 진행할 뿐이었다.

“으음. 파장은 안정적이지만, 역시나 알파 팀의 체내에도 bx15 성분이 검출되었네요.”

“그게 뭐죠?”

하진이 마치 보호자처럼 나서서 설명을 요구하자 알파 팀은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의 만족감을 느꼈다.

차진우를 제외하고는 저마다 실실 웃거나 하진에게 슬쩍 달라붙으며 애정을 표현할 정도였다.

자기 일인데도 헤실헤실 웃기나 하고 진지하지 못한 이들을 보며 하진은 한숨을 삼켰다. 자신이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설명에 집중했다.

“한지우 가이드의 몸에서 검출된 성분입니다. 저희도 처음 보는 성분이라 아직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현재 이 성분이 에스퍼의 파장에 영향을 끼친다는 건 파악했습니다.”

한지우의 이름이 나오자 한승호가 정색하며 물었다.

“아, 그래. 그 새끼 지금 어디 있어? 설마 곱게 모셔 두지는 않았겠지?”

하진에게 진상을 들었을 때부터 벼르고 있던 한승호가 주먹을 꽉 쥐며 한지우를 찾았다. 그러자 의료진들이 난감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영 시원치 않은 반응에 한승호만큼이나 그를 벼르고 있던 이도윤이 다시금 되물었다.

“한지우 어디 갔냐니까요? 설마 협회장 영감탱이가 우리한테 알려주지 말라고 지시했어요?”

만약 그런 거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하자 깜짝 놀란 의료진들이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실은 한지우 가이드가 사망했습니다. 협회에서 이상 현상을 파악했을 때쯤엔 이미 약물에 의한 부작용으로 몸이 망가진 지 오래였던 터라…….”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협회가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한 것도 없고, 처벌받아야 할 한지우조차도 죽어버렸다는 뜻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상황을 이렇게 만든 한지우를 처리할 생각으로 잔뜩 벼르고 있던 이들만 갈 곳 없어진 분노에 인상을 쓸 뿐이었다.

“지금 장난해? 서주안 그 개새끼랑 손잡아서 하진 형을 팔아넘겨 놓고 그냥 죽었다고 하면 다야?”

한승호가 위협적으로 목을 울렸다. 살기가 섞인 기세에 의료진들이 저마다 숨을 삼키며 뒷걸음질 치자 하진이 그의 손을 잡아 진정시켰다.

“진정해요. 이 사람들한테 화낸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건 아니잖습니까?”

물론 하진도 사태 파악이 늦은 협회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이미 납치를 당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잃은 지 오래였다. 기대라는 게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의료진들은 한결 환해진 얼굴로 하진을 구세주 바라보듯 했으니 동상이몽도 이런 동상이몽이 없었다.

그런 시선을 적당히 거르며 하진은 정말로 물어야 할 것을 질문했다.

“그래서 치료 약은 만들어졌습니까? 부작용이 남지는 않고요?”

질문을 받은 의료진들이 시선을 피하듯 들고 있는 서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저희도 처음 보는 새로운 약물이다 보니 아직 치료 약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치료 약이 없다는 말에 하진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알파 팀의 분위기 또한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 분위기에 의료진들이 입을 다무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대로 쭉 입을 다물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무거워진 분위기를 어떻게 해볼 심산인 건지 그중 젊어 보이는 의료진 하나가 눈치 없이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이하진 가이드가 돌아왔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진짜 S급 가이드이시니 점막 가이딩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시발, 그걸 말이라고 지껄여?”

말을 꺼냈던 의료진, 박성준은 불같이 화를 내는 한승호의 반응에 진심으로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왜, 왜 그러십니까?”

그는 영문 모른 채 제 선배들을 바라보았으나 그들 또한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박성준은 연신 제 선배들과 무섭게 화내는 한승호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그를 위해 한승호가 직접 입을 열었다.

“협회가 무능해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하진 형한테 뒤처리를 맡기겠다고? 시발, 그 하진 형이 어떤 상태인지는 보이지도 않지?”

그 말에 그제야 박성준의 눈에 하진의 몰골이 들어왔다.

안색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머리는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고, 셔츠의 가슴팍에 흘린 코피가 굳어 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아…….”

하진은 누가 봐도 당장에 검사와 입원이 필요한 환자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는 납치당했던 당사자가 아닌가.

그런 그에게 다른 에스퍼들을 전부 네가 직접 치료하면 되겠다는 말이나 했으니 한승호가 불같이 화내는 것도 당연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박성준이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사죄했으나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한승호는 여전히 화가 난 상태였고, 다른 이들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괜히 돌아왔나…….’

평소라면 화를 내는 한승호를 말렸을 하진이 다른 생각에 잠겼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협회에 너무도 많이 실망한 탓이었다.

서주안의 침입을 너무도 쉽게 허용한 것부터 하진이 납치된 지 오래인데도 적극적인 구출 시도조차도 없었던 점, 그리고 하진을 구하러 온 이들이 알파 팀뿐이었다는 점까지.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알파 팀만 데리고 협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아…… 그런데 돌아올 곳이 여기밖에 없다니.’

하진은 불현듯 떠오른 아버지의 얼굴에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협회로 돌아와야 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아마 앞으로는 반정부 세력에서도 자신을 없애려고 할 것이다. 그곳에도 하진의 가이딩을 받은 에스퍼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의 존재가 큰 영향을 끼치진 못할 것 같았다.

하진이 그곳에서 탈출했을 뿐, 반정부 세력을 무너뜨린 게 아니었다.

알파 팀이 본부를 헤집어놓긴 했으나 목적은 하진을 구출하는 거였지, 저들의 본거지를 없애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할 터였다.

그리고 에스퍼 반대 세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진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세력이 가장 건재하게 남아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협회로 돌아와야 했다.

엉망진창이라 하더라도 협회라는 이름하에 모인 이들이 있으니 외따로 떨어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내 팔자야…….’

속으로 한숨을 삼킨 하진이 여전히 박성준을 무섭게 몰아세우는 한승호를 말렸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다 큰 사내가 엉엉 우는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았다.

“한승호 씨, 이제 그만해요.”

“……형은 화도 안 나?”

하진의 만류에 억지로 화를 죽이느라 한승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러자 귀신같이 그 마음을 알아챈 하진이 손을 들어 등을 작게 두드렸다.

동동 울리는 감각에 참을 새도 없이 한승호의 입꼬리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하, 참나, 이러면 누가 좋은 줄 알아? 나 아직 화났는데?”

한승호가 바보같이 풀어진 얼굴로 여전히 화가 났노라 주장했다. 더 해달라는 뜻이었다. 이제는 알파 팀에게 마음을 한껏 열게 된 하진은 되지도 않는 연기에 픽 웃었다.

더 미친놈들을 겪고 와서 그런지 이 정도는 귀엽게만 느껴졌다. 하진은 커다란 몸을 수그리는 한승호의 머리로 손을 뻗어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어쩐지 대형견을 쓰다듬는 것 같은데, 괜찮나?’

순간 하진은 그런 생각이 들어 한승호를 살폈으나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실실 웃으며 손길을 즐기고 있었다.

적당히 한승호를 만져주고 팔을 내린 하진이 집중 포격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는 박성준을 비롯한 의료진들에게 말했다.

“일단은 검사를 좀 받고 싶군요. 제가 멀쩡해야 가이딩을 할 테니까요.”

가시가 있는 말에도 의료진들은 한승호를 말려준 게 더 고마운지 당장에 하진을 데리고 검사실로 향했다.

검사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이루어졌다.

기다리던 알파 팀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고 물을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르고서야 검사를 마친 하진이 나왔다.

더러워진 옷을 계속 입고 있을 수는 없어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것뿐인데 그들은 며칠 입원까지 해야 한다며 강하게 주장했다.

“예? 전 괜찮습니다. 입원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긴장이 풀리면 그제야 아플 수도 있습니다.”

어지간해선 하진의 말에 반대하지 않는 이들이 이번만큼은 반대하고 들었다.

차진우야 워낙에 이성적이니 그다지 놀랍지 않았으나 백자안이 그의 편을 들고 섰을 땐 하진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팀장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형. 몸에 무슨 문제가 있을지 모르는 거잖아요.”

하진이 콩으로 초콜릿을 만든다고 해도 믿을 백자안까지 차진우의 편에 섰다. 그러나 하진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입 밖으로 꺼내기엔 민망했던 진심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작게 흘러나온 말에도 에스퍼들은 귀를 열고 집중했다. 그러자 오히려 그 집중력에 더욱 민망해진 하진이 붉어진 얼굴로 뒷말을 이었다.

“집에 가야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린애도 아니고 집에 가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게 창피해 하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얼굴을 넘어 목덜미와 귀까지 빨개진 걸 감출 수는 없었다.

“당장 가자.”

“우리 형이 무서웠구나. 그럼 가야죠. 얼른 가요.”

처음으로 확인한 하진의 솔직한 마음에 한승호와 이도윤이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죄송해요, 형. 그런 것도 모르고……. 얼른 돌아가요. 오늘은 저랑 같이 잘까요? 아니, 같이 자요. 제가 형 지켜줄게요.”

세 사람이 하진의 곁에 붙어서 부둥부둥 달래는 사이 차진우가 하진을 담당하는 의료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차진우 에스퍼입니다. 입원 수속 취소해 주시죠. 네. 이하진 가이드는 저희와 함께 돌아갈 겁니다.”

물론 백자안과 차진우라고 다를 건 없었다. 하진은 에스퍼들의 호들갑에 민망한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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