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알파 팀을 만나고서 잠시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잠시 불길한 생각을 했던 하진은 이내 아닐 거라고 결론 내렸다. 마지막에 도와주었다고 해서 그를 좋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뒤돌아서기 전 마주쳤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애처로운 시선을 보낼 만큼 가까운 관계도 아닐뿐더러, 서지한 본인은 죽어라 하진을 피하기까지 했다. 그랬으면서 다시는 못 볼 연인을 보듯 할 건 뭐란 말인가.
하진은 사진처럼 뇌리에 남은 눈빛에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고는 제 대답을 기다리는 차진우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압니다.”
차진우는 대답을 들으며 알파 팀에게 다시 달린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또다시 하진의 귓가에 바람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바람 소리 사이로 차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진 씨를 구했다는 연락을 받기 전, 서지한과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평소와 달리 전투에 소극적이더군요. 심지어 교묘하게 저희를 돕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하진을 바라보았다.
“혹시 서지한과…….”
하진은 말끝을 흐리는 차진우에 그제야 그러한 과정이 의심스러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을 의심할 거라는 불안감은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진은 차분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여러분이 오기 전에 반정부 측 에스퍼 둘에게 잡혀 있었습니다. 가이딩도 차단당하고 하마터면 끌려갈 뻔했는데 서지한 씨가 구해 주더군요.”
순식간에 터진 폭탄과도 같은 발언에 듣던 이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 잠시만. 그럼 지금 몸 상태가 안 좋은 게 그 새끼들 때문이라고?”
“네.”
최지형이 팔다리를 무식하게 묶어놓지 않았더라면, 강아지가 그의 도움 요청을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하진은 훨씬 건강한 모습으로 알파 팀과 만났을 것이다.
“……그 새끼들 이름이 뭔데요?”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미쳐 있는 백자안이 물었다.
만약 하진이 그의 표정을 보았더라면 이름을 알려주는 걸 망설였겠으나 그는 현재 차진우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하진은 얼굴에 밀려오는 바람에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파 팀의 분위기가 흉흉한 것도 모르고 태연히 그들의 이름을 털어놓았다.
“최지형과 강아지요.”
알파 팀의 기세가 낯선 이름에 잠시 가라앉았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팀장은 들어봤어요?”
이도윤이 물었으나 차진우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알파 팀의 이러한 반응은 당연한 거였다.
강아지는 자신의 이름을 부끄러워해 다른 이들에게는 자신을 블랙 독이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그리고 최지형은 그 능력으로 인해 존재 자체를 비밀에 부쳐야 했던 존재였으니 두 이름 다 알파 팀에게는 낯설 거였다.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죽여 버릴 건데.”
한승호가 심드렁하게 말을 뱉었다. 허세에 찌든 이들이 자주 쓰는 표현도 그럴 힘이 있는 사람이 사용하니 묵직한 무게감을 가졌다.
하진이 저도 모르게 몸을 굳힐 정도였다.
짧은 순간의 변화를 알아챈 차진우가 좀 더 단단히 하진을 안으며 말했다.
“하지만 협회로 돌아가 하진 씨 상태를 살피는 게 먼저다. 우선순위를 잊지 마라.”
“당연하지. 팀장, 좀 더 빨리 못 달려? 벌써 그럴 나인가?”
한승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다가 이죽거렸다. 하진이 납치당했을 때의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 기분이 좋았던 이는 누구도 없지만, 그렇기에 그 기분이 어땠는지 잘 알았다.
“까불지 마라. 하진 씨를 안고도 너 정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차진우는 평소라면 까불지 마라는 말만 남기고 끝냈을 걸 조금 더 받아주었다. 차진우의 무시가 섞인 도발에 한승호가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허어? 너무 자만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팀장 나이도 나인데 말이야.”
계속되는 나이 공격에도 차진우는 코웃음만 쳤다.
“그 말, 취소하는 게 좋을 거 같군.”
차진우로서는 나름의 친절을 베풀었으나 한승호는 오히려 처음으로 그를 상대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그보다 더 큰 코웃음을 쳤다.
“팀장답지 않게 왜 이렇게 혀가 길어?”
한승호의 어깨가 의기양양함에 하늘 높게 치솟았다. 다혈질인 성격 탓에 언제나 말싸움에서는 지는 게 일이었는데 처음으로 이겨서 꽤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러나 그 기분은 곧바로 들려오는 하진의 목소리에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나이……. 아무래도 그렇죠.”
“어……?”
한승호의 고개가 빠르게 하진에게 향했다.
차진우의 품에 고개를 묻고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분명 힘이 없었다.
한승호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차진우가 왜 저렇게 말했는지 깨달았다. 고개를 반대로 돌려 백자안과 이도윤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 둘도 하진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살벌한 표정으로 한승호와 눈을 마주해왔다.
“형! 그, 그게 아니고!”
한승호가 어떻게든 본인이 했던 말을 바꾸려 했지만, 무슨 말을 떠올려도 전부 자신이 했던 말로 받아칠 수 있었다.
“으윽! 형! 미안해!”
원래도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던 한승호는 결국 듣기 좋게 말을 바꾸지 못했다.
펄쩍 뛰어서 하진에게 다가간 그는 연신 미안하다며 사죄했으나 그럴수록 분위기는 더욱 돌이킬 수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바보야……!”
결국 이도윤이 뒷덜미를 잡고 끌어낸 뒤 무어라 속닥거린 후에야 한승호의 입이 다물렸다. 한승호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려버렸다.
처참해진 분위기를 정리한 건 유일하게 하진과 동년배이고 연상인 차진우였다.
“하진 씨가 그렇게 반응하시면 제가 더 민망해지는데요.”
“아…….”
한승호의 호들갑에 휘말려 순간 숙연해졌던 하진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하진이 진지하게 반응할수록 그보다 연상인 차진우를 민망하게 만드는 거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차진우는 한승호가 한 말에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으나 하진이 신경 쓰고 말았다.
그는 하진의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한승호의 기강을 잡으리라 다짐하며 좀 더 박차를 가했다.
쉬지 않고 달린 덕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진은 멀리서 보이는 익숙한 건물에 새삼 감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정부 측 본부가 그다지 멀지 않은 지방에 위치한 것도 있었으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지 신기했다.
마치 차를 타고 이동한 것과 같은 소요 시간에 하진은 좀처럼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벽을 부수고, 집채만 한 몬스터를 잡는 것도 봤으나 이쪽이 좀 더 현실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던 탓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알파 팀은 빠르게 움직였다.
“……근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아?”
주변을 살피던 이도윤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을 발견한, 정확히는 품 안에 하진을 확인한 이들이 비명이라도 지르듯 그들을 반겼다.
“이하진 가이드다!”
누군가 소리치자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의 고개가 동시다발적으로 하진을 향했다. 기괴하기까지 한 광경에 하진이 몸을 떨자 백자안과 한승호가 시선을 가리듯 앞을 막아섰다.
“흐어어엉! 이하진 가이드!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한승호는 심상치 않은 반응에 일단 경계부터 하고 봤다.
“뭔데. 왜 이렇게 반기는 건데.”
마치 사고를 치고 자신들을 찾을 때와 같은 반응에 한승호가 예민하게 반응했으나 협회의 직원은 반쯤 돌기라도 했는지 S급 에스퍼의 경계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흐엉…….”
그 사이 차진우의 품에서 내려온 하진은 고개를 돌려가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파악했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퀭한 얼굴에 옷은 죄다 구겨져 있었다.
‘단체로 야근이라도 했나?’
실제로 눈물을 흘리는 이까지 있었다. 하진을 언제 봤다고 단순히 그의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뭔가, 돌아오자마자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은데.’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차진우가 상황 설명을 요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직원의 입에서 상세하고도 방대한 양의 이야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직원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전해 들은 하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지우의 가이딩을 받은 이들 모두 파장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니 끔찍했다.
마치 가이딩에 바이러스를 심어둔 것 같지 않나.
그러다 하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에스퍼들도 한지우에게 가이딩을 받지 않았는가. 하진이 불안정한 파장을 잠재웠다지만, 입을 맞춘 게 아니니 불안했다.
하진의 손이 바로 옆에 있는 차진우의 팔을 붙잡았다.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하진에게 닿았다.
“여러분도 가이딩받았다고 했잖습니까. 얼른 검사받으러 가죠.”
“저희보다는 하진 씨가 먼저입니다.”
“저는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요.”
“그래도 하진 씨 검사가 먼저입니다.”
하진과 차진우의 언쟁은 팽팽하게 이어졌다. 사실 1대1 상황은 아니었다. 하진의 검사가 먼저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알파 팀 전체 네 명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하진이었다. 알파 팀이 네 명이든 여덟 명이든 하진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하진이 먼저 검사를 받지 않으면 자신도 하지 않겠다는 강수를 두고서야 알파 팀이 두 손을 들었다.
그들은 하진의 손에 이끌려 온갖 검사를 받아야 했다. 알파 팀은 폭주 수치가 아슬아슬할 때도 이렇게 집중 검사를 받은 적은 없었던 터라 내내 어색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