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72화
‘근데 왜 불쾌하지…….’
이들이 자신의 소유물도 아닐진대 마치 무언가 침범당한 기분에 불쾌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아무런 잘못도 없는 이들에게까지 서운하려고 했다.
‘미쳤네. 애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이성적인 하진은 얼른 자신의 눈치를 살피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저들에게 괜찮다고 말할 참이었다.
에스퍼가 물건도 아니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란 걸 그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상태로 입을 열면 괜히 그들을 탓하는 말이나 투덜거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굴었으면서.’
역시 입 다물고 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열었더라면 분명 저 말이 튀어나왔으리라.
“형…… 그, 그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진은 내려다보는 이도윤이 가장 안절부절못했다. 하진은 나름 표정을 숨기고 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 있는 에스퍼였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말하다 말고 무언가 깨닫더니 입을 꾹 다물어 버리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것도 그들에게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말이다.
하진이 시선을 내리깐 채 뚱한 얼굴로 사색에 잠긴 사이, 그들 사이에선 무언의 공방이 오고 갔다.
‘내가 그러니까 가이딩받지 말자고 했잖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게 다 망할 영감탱이 때문이야. 하진 형이 나 미워하면 어떡할 거냐고!’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가이딩을 받지 말자고 했던 한승호와 그에 동조했던 이도윤은 소리만 치지 않았을 뿐 거의 화를 냈고.
하진을 찾기 위해선 다른 가이드의 가이딩도 불사하지 않았던 차진우와 백자안은 차마 고개 들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물론 그들이 눈치를 살핀 대상은 하진에 국한되었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하진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에 알파 팀은 더욱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근데…… 지금 하진이 형 그 가이드한테 질투하는 거지?’
이도윤의 입꼬리 작게 씰룩거렸다. 하마터면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바보같이 웃을 뻔했다. 하진은 여전히 뚱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도윤은 그 얼굴을 계속 바라봤다간 참지 못하고 환하게 웃어버릴 것 같아 억지로 고개를 들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같은 타이밍에 고개를 든 다른 팀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저마다 표정은 달랐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사이 하진은 심각한 고민에 직면해 있었다.
‘그 가이드에게도 나한테 했던 것처럼 했을까?’
유치하다고 욕해도 지금의 하진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하진은 무척이나 슬플 것 같았다.
‘하…… 젠장. 이래선 한지우를 욕할 게 아니었잖아.’
에스퍼를 물건 취급하지 말라고 일침을 놨으면서 불과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자신이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우습지도 않았다.
‘이젠 내가 더는 첫 번째가 아닌 건가?’
저들이 아직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건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중하지 않았다면 구하러 왔을 리도 없으니까.
하지만 더는 하진이 그들에게 있어서 첫 번째가 아니라면,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 거라면, 하진은 무척이나 슬플 것 같았다.
‘못돼 먹었네, 진짜.’
뚱하던 하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자 질투하는 듯한 반응에 좋아 어쩔 줄 모르던 에스퍼들, 특히 한승호와 이도윤이 깜짝 놀라 소리라도 지르듯 말을 뱉어냈다.
“아니야!”
“……아니라고요?”
“아니, 그게 가이딩을 받은 건 맞긴 한데…….”
아니라는 말에 잠시 얼굴을 펴는 듯했던 하진이 도로 우울해졌다. 그러자 이도윤이 이를 드러내며 한승호를 욕했다.
“형은 닥쳐! 입 열지 마. 듣는 사람 화나니까!”
말 한마디로 하진을 도로 슬프게 만든 죄가 있는 한승호는 욱하면서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하진의 앞에서나 어린 막내지, 거칠기 짝이 없는 성정인 이도윤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다 다시 스물세 살 어린 막내로 돌아간 이도윤은 안고 있는 하진을 달래듯 품으로 더욱 끌어안으며 변명을 내뱉었다.
“가이딩을 받긴 했는데 협회장, 그 할배가 수치 안 낮추면 안 보내줄 거라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받은 거였어.”
이끄는 거면 몰라도 달래는 것엔 영 재주가 없는 차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윤 다음으로 가까운 곳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백자안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형……. 저도 형이 아닌 다른 사람은 싫었는데 형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세 사람의 노력에 하진의 표정이 점점 돌아오는 듯했다. 온몸으로 네가 제일 소중하다고 말하니 불안감이 가시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머리를 스친 의문이 있었다.
‘협회에 S급 에스퍼 가이딩이 가능한 가이드가 있었나?’
하진이 알기로는 없었다. 그랬더라면 하진의 등장에 그 난리가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사라진 사이 그런 가이드가 나타났다는 건데 그게 묘한 찝찝함을 남겼다.
‘대체 뭐지?’
그 의문은 이대로 하진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죄만 안고 갈 수 없었던 한승호에 의해 해소되었다.
“맞아! 그리고 그 새끼 가이딩은 별로 좋지도 않더라.”
“그 새끼라뇨?”
마치 익히 아는 이를 칭하는 표현에 하진이 되물었다. 그러자 한승호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한지 미간을 잔뜩 구기며 답했다.
“한지우 그 새끼 말이야.”
하진이 눈을 크게 떴다.
“한지우……?”
“갑자기 S급 가이드가 됐다면서 그 의심스러운 새끼를 제대로 조사도 안 하고 가이딩을 시키더라고. 근데 이상하게 그 새끼 가이딩은 아무런 감흥도 없었어.”
한승호의 말에 하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한지우가 S급 가이드가 되었다. 서주안과 손을 잡고 자신을 넘기고 난 후의 일이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서주안의, 아니 반정부 세력의 작품일 터였다. 하진은 황급히 다른 이들에게 물었다.
“전부 다 그 사람에게 가이딩을 받은 겁니까?”
“그으게…….”
추궁한다고 생각했는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다들 시선을 피했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되는 반응에 하진이 백자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빨리 안아요.”
“네?”
반문하면서도 백자안의 손은 착실히 하진을 품에 안았다. 화가 난 게 아닌 건가? 어리둥절하면서도 백자안은 더욱 소중히 하진을 품에 안았다.
그러자 하진도 양팔로 백자안의 목을 끌어안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혀, 형?”
이런 적은 처음이라 백자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하진을 불렀으나 그는 방사 가이딩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많이 백자안에게 스며들 수 있게 집중할 뿐이었다.
어떻게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반정부 세력이 순순히 한지우의 등급을 올려줬을 리가 없었다. 분명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고, 가이딩을 받고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은 그 증거일 터였다.
‘마음 같아선 직접 가이딩하고 싶지만…….’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방사 가이딩을 조절하지 못하는 지금, 괜히 접촉 가이딩을 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었다.
백자안을 안고 있는 지금도 맨살이 닿지 않게끔 하느라 바빴다.
하진에게선 대답이 없었지만, 적극적인 태도에 기꺼워진 백자안은 그저 헤실헤실 웃었다.
“형, 미안해요. 다시는 다른 사람한테 가이딩받지 않을게요.”
하진이 이렇게 슬퍼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협회에서 탈주했으면 했지, 절대로 한지우에게 가이딩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젠 폭주해서 죽는다고 해도 하진 형이 아니면 가이딩 안 받을게요.”
살벌한 말을 마치 사랑을 속삭이듯 말한 백자안에 하진이 입을 달싹였다.
“그 정도면…… 음…….”
그 정도면 누가 되었든 가이딩부터 받으라고 말하려 했는데 이번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하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과였다.
“미안합니다. 필요하면 다른 사람에게라도 가이딩받으라고 말해야 하는데…….”
자신은 정말 이기적이고, 못돼 먹은 소인배였다. 그 사실에 우울해져 고개를 푹 숙이는데 머리 위에서 백자안의 황홀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저는 더 좋아요. 형이 저를 독점하고 싶으신 거잖아요. 저는 그게 더 좋아요. 저는 형 거니까 다른 사람한테 절대 넘겨주지 마세요.”
무언가 잘못 건드린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말을 취소할까 고민하며 말려 달라는 의미로 나머지 세 사람을 바라보는데 그들의 반응도 다를 건 없었다.
그러나 난생처음으로 느껴본 소유욕 탓일까. 하진은 그런 반응들이 부담스럽거나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전히 이들에겐 내가 최우선이구나, 안심이 되었다.
“……일단 다시 움직이죠. 해줄 말이 있으니 가면서 합시다.”
* * *
에스퍼 폭주 소식을 접한 하성진 대리는 평소와 달리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본부에선 당장 한지우를 데리고 오라고 성화였으나 수치가 엉망인 가이드를 데려가선 되는 것일까.
심지어 의사들 사이에선 최근 에스퍼들의 이상 현상이 한지우의 가이딩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건 좀 더 정확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정밀 검사였다. 머리를 아플 정도로 세게 긁어 정신을 차린 하성진은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외쳤다.
“한지우 가이드의 가이딩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당장 문제없는 에스퍼들도 독방으로 보내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상황을 몰라 어이없어하는 동료에게 하성진이 소리를 쳤다.
“에스퍼 이상 현상이 한지우 탓인 거 같다고! 지금 당장 정밀 검사 하러 가야 하니 끊어!”
-뭐? 그게 무슨, 하성진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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