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70화
평범한 부자간의 대화를 바란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선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하진을 가족이 아닌 위험인물로만 대하는 태도가 그를 울컥하게 했다.
‘정말로 내가 알던 아버지가 맞긴 한 건가?’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닮았을 뿐, 다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진은 곧바로 믿을 수 있었다. 그만큼 하진이 알던 아버지와 지금의 이하성 간의 괴리감이 컸다.
다정다감하고 가족을 아끼던 아버지는 가짜였던 걸까. 아니면 하진은 알지 못하는 그 긴 세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하성이 설명해 준다고 해도 지금의 하진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문제에 있어서 회피한 적이 없었던 하진이건만, 지금의 상황에선 그도 모든 의문과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겨우 진정되었던 두통이 다시 하진을 괴롭혔다. 심장을 똑 떼어다가 머릿속에 집어넣은 기분이었다. 이러다가 머리가 터져버려도 이상할 게 없을 듯했다.
하진은 자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아버지의 손목을 붙들었다.
“제발, 좀 놔요…….”
이하성 또한 에스퍼이니 가이딩만 한다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진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고, 가이딩 또한 제 맘대로 다룰 수 없었다.
어쩌면 조금쯤은 아버지이기에 가이딩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몰랐다. 하진은 격해진 감정에 작게 숨을 헐떡였다.
“이것 좀……!”
단호하게 말하려 했으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힘없이 떨리는 음성이었다.
아들이 아닌 남이라고 해도 저렇게까지 괴로워하면 안쓰러울 법도 했다. 그러나 이하성은 눈앞의 남자가 자기 아들임에도 변함없는 무표정이었다.
“기어코 가겠다는 거니?”
얼핏 다정한 물음이었다. 마치 그러겠다고 대답만 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며 보내줄 것같이 가벼운 말투였다. 그러나 곧 이어진 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널 여기서 죽여 두는 수밖에 없겠구나.”
“뭐……?”
하진의 뇌가 그 말을 해석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눈앞에 다가왔다. 언젠가 아주 먼 옛날에는 이 손을 잡고 길을 걸었던 적도 있었다. 커다랗고 거친 손이지만, 따뜻했었다.
그러나 그 손이 지금은 하진을 죽이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진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을 해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바보 같은 말이지만, 하진은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다. 눈을 뜨면 다시 그곳에 있어도 좋으니 눈앞에 있는 아버지가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아무리 함께하지 못한 세월이 길다고 한들 좋은 기억을 가지고 살았던 아버지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는데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진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게 유감이구나.”
하진은 다가오는 이하성의 손을 보며 차라리 눈을 감기로 했다.
“시발! 손 떼!”
이 또한 무척이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하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한승호 씨!”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울컥하고 올라오고, 코가 찡해지며 눈물이 고였다. 자신의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이곳에서 드디어 믿을 수 있는 이를 만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온전한 편.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연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에스퍼와 가이드. 앞서 말한 관계와 비교하면 얄팍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관계에서 하진은 더없이 안정감을 느꼈다.
단순히 에스퍼여서가 아니었다. 알파 팀이기에 하진은 안심할 수 있었다. 한승호의 등장에 이하성 또한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극적인 재회를 맞이한 하진을 바라보았다.
“저게 네 에스퍼인가 보구나.”
그러고는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 한승호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한승호는 지독히도 닮아 있는 두 사람에 당황했다. 하진에게 남은 가족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 닮은 얼굴은 뭐란 말인가.
“겨우 저 정도 수준에 안심하다니.”
하지만 태평하게 궁금증 해소나 할 시간은 없었다. 이하성이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하진에게 뻗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덜미를 향해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손짓에 겨우 붙들던 한승호의 이성이 끊어지고 말았다.
“죽여달라고 사정을 하는군.”
소리를 지를 수도 없을 정도로 분노한 한승호가 빛과 같이 몸을 움직여 이하성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하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하진을 방패막이로 삼듯 제 앞으로 끌어왔다.
“큭!”
한승호는 이미 내뻗은 주먹의 궤도를 억지로 틀었다. 하진과의 거리가 가까운 만큼 손목과 팔꿈치를 과하게 꺾어야 했던 탓에 아무것도 타격하지 못했음에도 팔이 욱신거렸다.
한승호는 손만 뻗으면 하진이 닿을 위치에 착지했다. 그러나 손끝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다.
‘저 움직임은 일반인이 아니다.’
하진과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에스퍼인 사내는 한승호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도 알아챌 게 분명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하진이 다치는 꼴을 한승호가 지켜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적막이 이어졌다. 움직임 없이 대치를 이어가던 한승호가 길어지는 상황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지?”
단 한 번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반정부 놈들과 협상이라니.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한승호만은 그들과의 타협은 죽어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상황이 불리해 본인이 다칠 확률이 더 큰 상황에서도 한승호는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진이 걸린 상황에서 한승호는 더는 대담하게 굴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것으로 하진을 구할 수 있다면 물러서지 않았겠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내가 원하는 거?”
이하성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까딱 넘어가는 고갯짓은 하진이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저러니 그렇지 않아도 닮은 이들이 더욱 닮은 듯했다.
이하성은 고민하는 척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 하진이를 없애 두는 거. 방해 요소는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없애는 게 좋거든.”
“시발! 손끝 하나 움직여만 봐. 하진 형한테 손대기도 전에 내가 찢어 죽일 거니까.”
하진의 목에 한층 더 가까워진 이하성의 손끝에 한승호가 발작하듯 욕설을 뱉고 으르렁거렸다. 심장이 아래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진을 자신이 데려오겠노라 호언장담하고 먼저 빠져나온 것인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미안하지만 내가 그 말을 들어줄 이유가 없구나.”
그러나 한승호의 경고에도 이하성은 멈추지 않았다.
“이 새……!”
욕을 다 뱉는 것도 시간이 아까운 한승호는 이를 악물고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여태껏 잠잠하던 하진이 입을 여는 게 먼저였다.
“아버지의 뜻은 변함이 없군요.”
“아버지……?”
한승호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랐으나 하진은 가라앉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유가 궁금하다고 해도 말해주지 않겠죠.”
“헤어진 지 오래인데도 나에 대해 잘 아는구나.”
그 말에 하진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했으나 아주 잠시였다. 눈을 감고 스스로 진정한 그가 다시 눈을 떴다.
“그렇다면 저도 그에 맞춰 대우해 드려야죠.”
한승호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당황한 중에도 이하성은 하진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챘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 몸으로도 이런 가이딩을…….’
이하성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하진이 갈무리하지 못해 깨진 그릇에서 물이 새듯 가이딩이 제멋대로 흘러나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가이드인 하진에게 다가가는 게 가능했다. 가이딩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상태이니 그 능력으로 자신을 재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윽…….”
생각을 더는 잇지 못하고 이하성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무너졌다. 계단 아래로 험하게 굴러떨어졌음에도 이하성은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였다.
하진이 작정하고 가이딩했으니 코앞에서 핵폭탄이 터진다고 해도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진은 한참 위에서 쓰러진 자신의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으나 한승호는 하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슬퍼 보인다고 느꼈다. 무슨 생각 중인지 알 수 없는 하진은 오랫동안 자신의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형. 이만 돌아가자.”
“잠깐만요.”
사정은 알 수 없으나 하진이 아버지라고 부른 남자가 하진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만은 명확하게 파악했다.
그는 하진이 받았을 상처를 고려해 이 상황에서 빠르게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하진이 거부하자 강요할 수 없었다.
하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한승호는 뒤돌아선 하진의 얼굴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이하성을 내려다보던 하진이 느릿하게 무릎을 굽혔다.
“윽…….”
몸 상태는 여전히 최악이었기에 그 간단한 동작에도 비틀거렸으나 하진은 이하성의 몸 위에 올라탔다.
“형……?”
한승호는 대체 하진이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곧 해소되었다. 하진의 양손이 이하성의 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금 전 두 사람의 상황과는 반대였다.
“형!”
한승호가 깜짝 놀라 그를 불렀으나 하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치챘겠지만, 내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반정부 세력의 요직에 있을 테고요. 이대로 살려두면 나중에 큰 위협이 될 겁니다. 그러니,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였다. 하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승호의 귀에는 그런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불쌍하게 몸을 떨고 있는 하진만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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