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69화
감사 인사가 낯간지럽기라도 했는지 하진답지 않게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서지한은 오히려 그 말에 웃으며 그를 보낼 수 있었다.
돌아선 것은 마지막에라도 혹시 자신이 하진을 붙잡을까 봐서였다.
하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지한이 말한 통로를 향해 달렸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미련스레 붙들고 있던 서지한은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몸을 움직였다.
* * *
“하아, 하아.”
하진은 거칠어진 숨결에 목이 바짝 말라 찢어질 듯이 아픈데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꽤 많이 올라온 것 같았지만 아직 귀에는 전투의 굉음이 들려왔다.
쾅! 콰과광!
“윽!”
강한 진동에 하진이 비틀거리다가 빠르게 주저앉았다.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한 하진은 숨을 몰아쉬다 다시 일어났다.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탈출이 코앞이기도 했지만, 그전에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게 먼저일 것 같은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젠장, 언제까지 올라가야 하는 거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위를 올려다보았으나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 땅을 파서 건물을 짓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만한 깊이라면 압력도 만만치 않을 텐데 견디는 내구성도 대단했고, 그런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싸워대는 에스퍼들도 대단했다.
‘에스퍼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이렇게 침도 못 삼킬 정도로 힘들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물론 가장 최고는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지만 말이다.
“허억, 허억!”
하진은 또다시 무아지경으로 계단을 올랐다. 어느새 전투의 굉음도 멀어져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계단에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진은 쉬지 않고 움직인 탓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먹으로 때려 진정시키고 다시 계단을 딛고 올랐다.
“……부디 얌전히 있기를 바랐건만.”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에 하진이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굳어버렸다. 한순간 멈춘 것만 같았던 심장이 다시 뛰며 강하게 박동했다.
‘그럴 리가…….’
분명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일 텐데 심장이 크게 반응했다. 머리로는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진아.”
‘하진아.’
이름이 불린 하진의 고개가 서서히 위를 향했다. 자신을 부른 이가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
십수 년이 지났음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래된 사진 속 모습과는 달리 웃지도 않고, 주름도 생겼으나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날 알아보는구나.”
아니다. 아버지일 리가 없었다. 하진은 냉정하게 판단하려 했다. 그러나 그런 판단과 달리 하진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 어떻게……? 죽었, 잖아요.”
그 순간 이 모든 것이 에스퍼의 능력에 의한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환상이라면 사진에 남은 젊은 모습으로 나와야 하건만 당황한 하진은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니, 살아 있을 리가 없지.”
이미 누군가의 능력으로 세뇌가 된 걸 수 있다고 결론 내리자 하진은 빠르게 차분해질 수 있었다.
‘그래. 저건 다 환상이다.’
상상도 못 한 이의 모습에 당황하여 발을 멈췄던 하진이 다시 움직이며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이전처럼 빠르게 오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저런 모습이셨을까.’
하진은 저도 모르게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것보다는 주름이 많았을 것이다.
살아 있었다면 예순에 가까울 나이이건만 환상 속 아버지는 고작 쉰을 넘겼을까 싶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게다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아들인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다정했던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무미건조하게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조금씩 다리에 힘이 돌아왔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더니 놀라 전신에 힘이 빠졌던 게 점점 나아졌다.
아버지의 환상이 있는 곳까지는 단 다섯 계단만이 남아 있었다. 위로 향하기 위해서는 그를 지나쳐야 했다. 하진의 걸음이 또다시 멈췄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환상이라 할지라도 그리운 얼굴을 마주했기에 조금, 아주 조금만 더 눈에 담고 싶었다.
하진은 그의 얼굴을 아주 자세히 관찰했다.
‘내가 아버지를 닮긴 닮았군.’
사진 속 아버지는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었기에 하진은 한 번도 그를 닮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웃지 않고 있는 서늘한 얼굴에서 자신과 닮은 모습이 보이니 신기했다.
“……이왕이면 웃고 계시지. 아무리 환상이라도 너무 뚱하신 거 아니에요?”
자신이 아버지를 닮긴 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건 좋지만,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무표정하기만 한 것에 불만을 품은 하진이 혼잣말을 뱉었다.
어차피 환상에 불과하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데 혼잣말이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환상? 내 아들치고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세 계단을 남겨뒀을 때 들려온 대답에 하진이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체력을 모조리 소진한 몸뚱이가 그 반동에 뒤로 넘어갈 정도였다.
“……!”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우뚱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주 약해.”
계단 세 칸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온 하진의 아버지, 이하성이 하진을 붙잡았다. 높디높은 계단을 그대로 구를 뻔했음에도 하진의 시선은 자신을 붙든 손에 박힐 뿐이었다.
‘진짜라고……?’
셔츠 너머로 자신을 붙든 강한 힘과 함께 분명 온기가 느껴졌다. 하진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환상이 아니라면 정말로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는 것인데…….
‘아니야……. 진짜일 리가 없어.’
하진은 쿵 하고 떨어진 심장을 달래며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반응할 만큼 기억 속 아버지와 흡사한 목소리에 놀라긴 했으나 전부 가짜일 게 분명했다.
‘설마 서지한의 능력이 환상이었던 건가? 보내주는 척 날 속이고 이런 짓을……?’
눈앞의 존재를 환상이라고 결론 내린 하진은 계속해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아버지를 무시한 채 능력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았다.
‘벽에 머리라도 박으면 되려나…….’
이하성은 자신의 존재를 무시한 채 주변을 둘러보던 하진이 벽 한곳을 빤히 쳐다보자 한숨을 쉬었다.
“날 믿지 못하는구나.”
그러고는 그 말을 입에 담았다.
“가이드인 걸 들켜서는 안 된다.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
시선을 돌릴 수는 있어도 열린 귀는 막지 않는 이상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진이 크게 숨을 삼켰다.
“그, 건…….”
아직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적, 하진이 가이드임을 알게 되었을 때 했던 말이었다. 하진의 인생의 방향이 되기도 했던.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딱히 비밀로 할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환영에게서 그 말이 나온단 말인가. 하진은 혼란스러웠다.
‘진짜라고……?’
하진은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기억을 뒤진 걸지도 몰랐다.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믿을 수 없었다.
“……내 신체 부위 중에 아버지를 닮은 부분이 있죠.”
대놓고 던지는 질문에도 이하성은 담담히 대답했다.
“네 번째 발가락 왼쪽 측면에 점을 말하는 거니?”
대답을 들은 하진의 눈동자가 떨렸다. 더는 부정할 수도 없었다. 제 손을 잡은 온기도, 흐릿한 기억에만 남아 있던 목소리도 모두 진짜였다.
“왜, 왜 여기에…….”
그러나 반갑다거나 애틋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하진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으나 손목을 잡힌 탓에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곳이었다면 모를까, 이곳은 반정부 세력의 본거지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하성이 반정부 세력 소속이라는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제 정체를 알고도 오히려 경계하는 하진을 보며 이하성이 건조하게 웃었다.
“곧바로 내가 적이라고 단정 짓는구나. 내가 사정이 있어 모습을 감췄던 정부 소속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니?”
이하성을 마주하고서는 시종일관 얼이 빠지고 멍청한 얼굴이었던 하진이 처음으로 인상을 썼다.
“절 아주 바보로 보시는군요. 그랬더라면 제가 정부 소속이 되었을 때 모습을 드러내셨어야죠.”
“너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임무가 있었을 수도 있지?”
하진은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여놓는 이하성에게 그만하라는 듯 쏘아붙였다.
“그 임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도 측정 불가 가이드보다 대단할 거 같진 않네요.”
이하성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일순 슬퍼 보이기도 했던 찰나의 변화는 하진이 눈치채기 전에 사라졌다.
“S급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아득히 뛰어넘을 줄은 몰랐구나.”
“지금 아버지를 재워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니 놓으시죠. 그리고 비켜요.”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었지만, 하진은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하성은 반정부 소속이다. 그러니 자신은 여차하면 그를 재워서라도 이곳을 달아나야 했다.
하진의 협박에 이하성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비에게 협박이라니 슬프구나.”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하성은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고 멀끔한 얼굴이었다. 하진은 동요하려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누를 수 없다면 차라리 외면하는 게 나았다.
“당장 놓으세요.”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신의 납치 소식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과연 몰랐을까. 지금 이 소란 속에서도 유유히 개인행동을 할 정도면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듯한데 그런 사람이 자신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하진은 막을 새도 없이 떠오른 생각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코끼리를 떠올리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레 코끼리를 떠올리듯, 이미 떠오른 생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하성이 이하진의 납치를 지시했을 수도 있다.
그 단계까지 떠올린 하진은 그럴 상황이 아닌 걸 알면서도 눈을 질끈 감았다. 부디 그것만은 아니기를 바랐다.
아무리 함께 산 세월보다 아버지 없이 살아온 세월이 아득히 길다고 해도 하진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였다.
하진은 부디 자신이 아버지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기를 빌었다.
“더는 경고하지 않습니다. 놓으세요.”
속내를 감추기 위해 부러 더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이하성은 잡은 하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가깝게 자기 쪽으로 당겼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힘을 주고 버텼으나 이하성 또한 에스퍼였다. 나이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이하진에게 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곳에 남거라. 내가 아들인 네게 주는 마지막 기회란다.”
이하성은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하진은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말 같은 소리를 하세요. 고작 한다는 말이 그겁니까? 내가 남지 않으면 어쩔 건데요.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라도 부러뜨릴 겁니까?”
하진은 통제되지 않는 감정을 마구잡이로 터트렸다. 사춘기 때도 이렇게 예민하지 않았었는데 그간 쌓인 스트레스와 연속되는 충격적인 상황이 하진을 이렇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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