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65화
“네?”
같은 에스퍼끼리면 몰라도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중얼거리는 말을 하진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웅얼거리는 소리에 하진이 미간을 찡긋거리며 고개를 기울이자 강아지가 다시 반복해 말했다.
“나보다 최지형 새끼가 더 좋다고 했다며!”
아무리 철이 없어도 성인 남성이 하기에 창피한 말이라는 건 아는지 얼굴이 붉었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 숨을 내쉬는 강아지를 보며 하진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스물다섯 먹은 사내놈이라니.’
일전에 강아지가 제멋대로 늘어놓은 개인정보를 기억하고 있던 하진은 자기를 더 안 좋아해서 삐졌다고 티라는 티는 다 내는 스물다섯 먹은 남성을 보며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문득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왜, 무슨 상관이라고 저들 사이에 껴서 편 가르기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그런 질문을 받아줄 사람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줄 사람도 없었다.
이렇게 귀찮을 줄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을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듯이 어른은 본인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하진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좋다고 표현한 적은 없습니다만.”
가장 낫다고만 했지, 좋다는 표현은 전혀 쓴 적이 없었다. 그러자 강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하진을 올려다보았다.
“어? 진짜?”
이제는 대답할 기운도 없어서 하진은 고개만 끄덕였다. 체력적으로 지친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지친 기분이었다.
평소의 하진이었다면 이 정도 스트레스는 가볍게 넘길 수 있었겠으나, 납치부터 이어진 몇 주간의 감금 생활은 남들보다도 단단한 정신력을 가진 하진까지도 흔들어놓기 충분했다.
하진이 지치든 말든 강아지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또다시 되물었다.
“최지형이 싫다 이거지? 근데 그 새끼가 음침하게 날 속인 거네?”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
“뒤졌어.”
그림으로 그린 듯한 선동과 왜곡에 하진이 곧바로 부정했으나 저 좋을 대로만 들은 강아지는 하진의 대답을 듣지 않고 최지형을 찾으러 달려 나갔다.
뒤에서 강아지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던 하진은 이내 무슨 상관인가 싶어져 그만두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 먹지 않으니 포기가 빨라졌다.
아무튼 저 일과 자신은 관계가 없다 생각하고 신경을 껐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한참 후에 최지형이 돌아왔다.
신경을 끄겠다고 했지만, 강아지가 그렇게 나간 터라, 다치지는 않았는지 저도 모르게 시선이 향했다.
“얼굴이…….”
“아, 하하…….”
역시나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입술이 터지고 뺨이 붓고 여기저기 생채기가 가득했다. 얼굴이 터지든, 팔이 부러지든 상관하지 않을 하진이지만, 어느 정도 원인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생각하니 뻔뻔하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냉정해지려고 해도 하진은 자신의 양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강아지 씨가 그런 겁니까?”
“어어, 네…….”
예상했던 대로여서 하진은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까지 사람을 피떡으로 만들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적극적으로 말렸을 것이다.
양심의 가책에 표정이 안 좋아진 하진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최지형이 손사래를 쳤다.
“근데 괘, 괜찮아요. 이정도야 약 바르면 그, 금방 나아요.”
그러면서 서랍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드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해 보여서 하진은 차마 그를 혼자 두고 돌아설 수 없었다.
S급 에스퍼가 다쳤다고 약을 바를 일이 뭐 얼마나 있겠는가. 어지간해선 생채기도 나지 않는 이들인데 말이다.
“약이 효과가 있습니까?”
“어, 어느 정도는요. 안 바르는 것보단 나아서요.”
하진은 결국 더는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최지형에게 향했다. 그러고는 거울도 없이 손으로 상처를 더듬으며 약을 바르는 최지형의 손에서 약을 뺏어 들었다.
“발라줄 테니 얼굴 대요.”
그러자 최지형이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하, 하진 씨가요?!”
“싫다면 그냥…….”
너무 기겁하는 반응에 양심의 가책까지도 사라진 하진이 그대로 돌아가려고 하자 최지형이 이번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잘못했다며 빌었다.
“아,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제발 발라주세요!”
바짓가랑이까지 잡을 기세에 하진은 알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소파 위에 앉히고 손끝에 약을 짜냈다.
따가우면 말하라든가 하는 상냥함은 없었다. 하진의 입장에서는 납치범의 상처를 봐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양심의 가책에 따른 도리를 행하는 중이었다.
“……가만히 좀 있어요.”
“네, 네에.”
터진 입가에 약을 바르는 중이었던 하진은 자꾸 씰룩거리는 입가에 헛손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애먼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꼴이라 참다못해 한마디 하는데도 최지형은 말로만 알겠다고 할 뿐, 씰룩임을 멈추지 못했다.
“한 번만 더 움직이면 그냥 가겠습니다.”
“허업!”
마지막 경고에서야 최지형은 입을 꾹 다물고 버텼다. 다문 정도를 넘어 입안의 살이라도 씹는 건지 볼이 안쪽으로 파인 게 선명히 보였다.
그러나 졸지에 최지형의 입술 감촉이 어떤지나 알게 되어 불쾌해진 하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진은 필요한 말이 아닌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최지형은 입술을 움직이면 가버리겠다는 말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해 조용한 시간이 이어졌다.
“저…….”
정정한다. 조용한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입술에 약을 다 바르고 나자 귀신같이 최지형이 입을 열었다.
입술의 치료는 끝났지만 입을 움직였으니 그냥 갈까 말까 고민하던 하진에게 최지형이 물었다.
“저, 정말로 아지가, 더 좋으신 건가요……?”
“예?”
못 알아들어서 되물은 건 아니었다. 다만 최지형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도 풋풋한 하이틴 로맨스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어서 하진은 저도 모르게 되물은 것이다.
그 얘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던가? 대답까지 들어놓고 왜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지가…… 하진 씨가 자기를 더,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그게 진짜인지…….”
하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문득 아득해지고 말았다.
‘아니, 애초에 내가 왜 누가 더 좋은지 말해줘야 하는 거지?’
둘 다 싫었다. 누구 하나 좋은 사람이 없었다. 좋다는 말은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데 왜 없는 말을 창조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아지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하진 씨는 날 좋아하는데…….”
그 주제에 관한 대화 자체를 사양하려 했던 하진은 갑자기 말도 더듬지 않고 중얼거리는 최지형의 반응에 고개를 돌렸다.
하진은 순간 묘해진 분위기에 긴장했으나 최지형은 여전히 혼자 중얼거리기 바빴다.
“이게 다 하진 씨가 너무 상냥해서 그런 거겠죠?”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최지형의 상태를 살피던 하진이 갑자기 튄 불똥에 작게 인상을 썼다. 그러나 잘못 건드렸다가 무슨 폭탄이 터질지 몰라 지켜볼 뿐이었다.
‘가이딩할까?’
“하진 씨.”
하진은 언제든 최지형이 허튼짓을 하려고 하면 당장이라도 방사 가이딩을 할 준비를 마치며 대답했다.
“예.”
“역시 둘만 있는 게 좋겠죠? [잠들어라]”
하진은 마치 전원을 끈 컴퓨터처럼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처음 보는 새로운 공간에서 손발이 죄다 묶인 채 눈을 뜬 것이다. 하진은 다시 돌아와 자연스레 자신이 누운 침대 옆에 자리 잡은 최지형을 노려보았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시선에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 그렇게 불쌍하게 쳐다봐도 풀어주지 않을 거예요!”
‘미친놈인가……? 아, 미친놈 맞았지.’
어쨌거나 최지형이 손발을 풀어주지 않겠다고 단언한 이후로 두 사람은 계속해서 대치 상태였다.
하진이 없어진 상황에 이렇게 조용한 걸 보면 아무래도 중간중간 최지형이 사라지는 걸 보아하니 능력을 쓴 듯했다.
“……지금 이러는 거 배신이나 반역 아닙니까?”
같은 소속에게 능력을 사용하면서까지 하진을 차지하려 드는 행위가 용납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맞았는지 최지형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굳이 거짓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순순히 인정했다.
“마, 맞아요……. 대표님이 아시게 되면 저, 저는 죽은 목숨일 거예요.”
“그러면 지금이라도 수습하면 되잖습니까.”
그러나 최지형은 싫다는 듯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하진은 고집스럽게 구는 최지형을 보며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차갑게 질린 손발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같잖은 자존심이라도 최지형의 앞에서 우는소리만은 하기 싫었던 하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손발을 잘라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보랏빛으로 질려가는 자신의 사지를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럼 이 끈만이라도 좀, 풀어주시죠.”
혈액이 돌지 않자 힘이 점점 빠지고,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피가 돌지 않는데 오히려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물거리는 눈에 억지로 힘을 주고 최지형을 올려다보자 눈이 마주친 그가 흠칫 몸을 떨었다.
“하, 하진 씨, 지금 저를 유, 유혹하시는 건가요? 이런 상황에서도……?”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저 변태 새끼가!’
상태만 멀쩡했더라면 평소엔 하지도 않는 상스러운 욕과 함께 얼굴에 주먹을 날려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끝까지 경계했어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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