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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64화 (64/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64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협회가 아무리 에스퍼보다 가이드를 우선시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잃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심지어 한지우에게 가이딩받은 S급이 어디 한둘인가.

오히려 한둘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한지우에게 가이딩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이럴 게 아니라 얼른 해결 방안을 찾아보죠. 저는 보고를 올리고, 연구동으로 가겠습니다. 선생님들께서도 협조 부탁드립…….”

그 순간, 죽은 사람처럼 누워만 있던 한지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엎어지듯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곧장 문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엎어지면서 함께 떨어진 이불을 밟아 넘어지고 말았고, 돌발행동에 놀랐던 하성진이 곧바로 한지우를 제압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악! 놔! 놓으란 말이야!”

모든 게 끝났다. 혹시라도 가이딩만 괜찮다면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모두 헛된 것이었다. 제게 남은 미래에 대한 공포심을 느낀 한지우는 이성을 놓은 채 발버둥 쳤다.

“아악! 안 돼, 안 돼!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발광하던 한지우는 진정제를 맞고서야 힘이 빠져 몸을 축 늘어졌다. 강제로 소란을 가라앉히고서야 남은 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안심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삐-! 삐-! 삐-!

각자가 가지고 있는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동시다발적으로 울리는 소음에 화들짝 놀란 이들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울리는 호출에도 그들은 쉽사리 연락을 받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좋은 소식이 아닐 거라는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그중 가장 연장자인 정 선생이 전화를 받았다. 그를 시작으로 다른 이들 또한 차례차례 전화를 받았다.

굳이 서로의 대화를 궁금해할 필요도 없을 만큼 커다란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선생님! 긴급 상황입니다!

-하성진 대리! 지금 당장 한지우 가이드 데리고 와!

우려했던 폭주가 일어나고 말았다.

* * *

그렇게 뛰쳐나갔던 강아지는 어쩐 일인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경계해야 할 사람이라도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보이지 않으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강아지 씨는 자리를 비운 겁니까?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네요.”

거실로 물을 마시러 나온 김에 최지형에게 물으니 또다시 임무를 나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아지가 신경 쓰이세요?”

이번엔 반대로 최지형이 하진에게 물었다.

“음, 쓰이긴 하죠.”

괜히 어디 가서 자신의 얘기를 꺼내는 건 아닌지 신경 쓰이긴 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최지형이 머뭇거리며 다시 물었다.

“아지를…… 조, 좋아하세요?”

축 늘어진 눈썹과 젖은 눈망울, 그리고 기운 없는 목소리까지.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청년이나 다름없는 모양새였으나 그의 눈빛은 음험하고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물을 마시느라 그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인 하진은 그 눈빛의 이상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강아지를 좋아하냐는 터무니없는 오해에 반박하기 바빴다.

“설마 제가 강아지 씨를 좋아하는 걸로 보였습니까?”

차분한 물음이었지만 눈빛만은 어떻게 그런 착각을 할 수 있냐는 듯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최지형의 기준이 이상한 건지, 이곳의 에스퍼들 자체가 이상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하진은 우선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풀기로 했다.

우습게 보고 그냥 넘어갔다가 다른 이들에게, 특히나 강아지에게 이 말이 전달되어 오해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그건 절대 안 되지.’

그렇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독선적이고 제멋대로인 사람인데 하진이 그를 좋아한다는 오해를 전해 듣기라도 하면 하진이 무어라 변명을 해도 듣지 않을 게 분명했다.

“왜 그런 오해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전혀 아니니 혹시라도 다른 데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하진은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방지하고자 한 말이었으나 단호하기 그지없는 부정에 최지형의 얼굴빛이 환해졌다.

“네, 네에. 그럴게요.”

그는 마치 자신에게 기회가 생긴 것처럼 수줍게 굴었다.

“그, 그러면요……. 저는…….”

저는 어떠세요?

그 질문에 물을 마시던 하진이 사레가 들렸다. 기도로 넘어간 물에 허리를 굽히고 콜록거리는 하진의 뒤로 최지형이 화들짝 놀라 뛰어왔다.

“괘,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안절부절못하며 아기를 다루듯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등을 토닥이는데 너무 조심스러워서 도움이라고는 전혀 되지 않았다.

결국 하진은 숨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침하고 연신 숨을 들이마시면서 스스로 본인을 진정시켰다.

힉힉 내쉬는 소리가 가라앉고 나서야 그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았다. 미처 다 마시지 못하고 사레가 들린 바람에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콜록. ……일단 좀 닦아야겠군요.”

“제, 제가 닦을게요!”

하진이 움직이기도 전에 후다닥 달려가 휴지를 가져온 최지형이 바닥을 닦았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흘린 물을 닦으면서 물었다.

“그으, 아까 질문,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까 질문?’

턱에 흐른 물을 닦아내며 하진이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답을 기어코 듣고 싶다는 건가?

하진은 그 질문 때문에 이 꼴이 됐는데도 포기할 줄 모르는 최지형을 잠시 떨떠름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반대로 하진을 올려다보는 최지형은 소심한 태도와는 달리 눈을 피하면서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심한 주제에 고집은 있는 그를 보며 하진은 문득 모든 게 귀찮아졌다.

‘대답 좀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하진은 물을 다 흘려버린 컵에 다시 물을 받으며 대답했다. 굳이 대답을 들어야겠다면 그냥 해주고 말아야지.

“여기 사람들 중에선 그나마 최지형 씨가 제일 낫네요.”

좋다, 싫다로 표현된 대답이 아니었으나 최지형은 자신이 제일이라는 표현만 쏙쏙 뽑아 들었다.

“제, 제가요……?”

얼핏 황홀하기까지 한 목소리였으나 하진은 물을 받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물을 다 받은 하진은 그제야 컵에서 눈을 뗐다.

“네.”

하진은 ‘그나마’라는 표현을 강조하고 싶었으나 그간 최지형이 보여준 소심한 태도가 떠올라 차마 강조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굳이 저런 질문을 하지도 않겠지만, 하진이 어떤 대답을 하든 상처받지 않을 확신이 있었으나 최지형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최근 들어 하진과 시간을 가장 오래 보낸 사람은 최지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하진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있었고, 말 한마디 건네는 것도 더듬거리고 있었으니 무의식중에 말을 고르게 된 것이다.

* * *

‘……그래선 안 됐는데.’

하진은 손발이 묶인 채 불과 하루 전의 일을 후회했다. 얼마나 세게 묶었는지 벗어나려고 강하게 힘을 주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작정하고 세게 묶었더라면 꿈쩍도 안 하는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손목이 부러졌겠지만, 하진에겐 그게 그거였다.

하진은 피가 통하지 않아 저려 오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어떻게든 피가 통하게끔 노력했다.

효과는 미미했지만 하지 않는 것보단 나았다. 조금씩 꼼지락거리다 보니 손목을 묶은 끈이 조금 느슨해진 것도 같았다. 아주 조금.

“젠장. 그럴 리가 있나.”

플라세보 효과라도 노려보려고 했으나 이성적인 하진의 뇌는 그런 같잖은 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손끝이 점점 보라색으로 질릴 때쯤이었다.

“하, 하진 씨.”

하진을 이렇게 만든 범인, 최지형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침대에 다소곳이 누워 있는 하진을 보며 황홀하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하진은 그런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방심해선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으면서 이런 식으로 당해버린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아, 하진 씨……. 너, 너무 예뻐요.”

눈물까지 글썽이는 추태에 하진은 욕이라고 할까 싶었으나 그런 반응마저도 즐길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피가 통하지 않은 손발에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거나 풀어주시죠.”

“아, 안 돼요. 버, 벌이에요. 하진 씨가 잘못한 거니까…….”

하진은 기가 막혔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벌씩이나 준단 말인가.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놈이 말이다.

하진은 불과 하루 전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분명 최지형과의 짧은 대화가 끝난 후 자신은 방에 틀어박혀 새로 받은 책을 읽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최지형이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고, 때마침 임무 때문에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던 강아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뭘 그렇게 봅니까?”

“흥.”

강아지는 하진이 말을 걸 때마다 새침하게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팩 돌려댔는데 그게 참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문 앞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던가.’

그 와중에도 문턱은 절대 넘지 않으면서 바로 앞에 앉아 하진을 뚱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으니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남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결이 달랐다. 대놓고 관심을 달라고 쳐다보고, 흥흥대니 무시가 힘들었다.

결국 하진은 더는 눈에 들어올 리 없는 책을 덮고 강아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요.”

그렇게 거슬리게 있지 말고. 뒷말은 삼켰다.

안 그래도 어린애처럼 자기 토라진 거 알아달라고 시위하는 사람에게 저런 말을 했다간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더 이 사태가 이어질 거 같았다.

하진이 제대로 자신에게 집중하자 그제야 강아지가 입을 열고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했다.

“……나보다 그 새끼가 더 좋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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