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61화
정말이지 욕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시발, 진짜…….”
더는 가이딩이고 뭐고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닌데 가이딩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커다란 짐으로 굴러오게 되니 더는 몸을 뺄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협회 직원을 따라나서야 했다.
“이번 일 끝나면 며칠간은 찾아오지 마세요. 안 그래도 어제 폭주 에스퍼 가이딩 하는 바람에 힘들단 말입니다.”
“예? 주성원 에스퍼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성원 에스퍼는 폭주 위험군 아니었나요? 그리고 어제가 아니라 이틀 전인데…….”
직원의 말에 한지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틀 전이라니. 그럼 그가 이틀이나 기절한 상태였다는 소리가 아닌가. 한지우는 제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직원 또한 한지우가 입을 다물어 버리니 무어라 말을 걸지도 못하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차량은 빠르게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지우는 귀찮았던 처음과는 달리 상황을 제 눈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해진 걸음을 옮겼다.
“한지우 가이드! 이쪽입니다.”
다행히 그리 소란스럽진 않은 분위기였다. 한지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직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에스퍼는 주성원 때와 마찬가지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독방에 들어가 있었다.
“그럼 한지우 가이드 부탁합니다.”
“네.”
한지우는 함께 온 직원을 뒤로하고 독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처음으로 가이딩을 하기에 앞서 긴장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폭주한 에스퍼는 아니지만, S급 에스퍼를 상대로 가이딩을 조금만 강하게 했다간 또다시 코피를 쏟아낼 것이라는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조금만, 진짜 조금만 하는 거야.’
가이딩 조절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제아무리 잘난 하진이라 하더라도 가이딩 조절에 있어서는 한지우보다 못할 터였다.
“어, 왔냐? 가이딩 좀 해봐.”
심드렁한 말투에 인상을 쓰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양 무릎에 팔을 걸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인철이 깊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뭔가 이상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도 일렁거린다.”
한지우는 저도 모르게 짧게 놀란 숨을 삼켰다가 박인철의 눈치를 봤다. 순간 놀라는 바람에 뭔가 알고 있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한지우에게는 천만다행이게도 박인철은 상태가 좋지 않아 한지우의 작은 행동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랑 똑같은 증세잖아…….’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한지우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되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건 알겠는데 그 문제가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이 한지우를 겁먹게 만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해야 대처를 할 텐데 지금 상황은 대처할 틈도 없이 문제만 생겨나고 있었다.
“가이딩 안 해? 쿨럭, 멀쩡해 보여도 지금 상태가 별로거든?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한지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가이딩을 해야 했다.
고개를 한 번 털어낸 한지우는 박인철의 앞에 섰다.
“내가 알아서 가이딩할 테니까 내 몸에 손대지 마. 강제로 가이딩 뺏어갔다간 두 번 다시 가이딩하지 않을 거니까.”
평소였더라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태연한 척 연기했을 한지우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연속해서 벌어지자 잔뜩 예민해졌다.
“알았으니까 빨리…….”
그러거나 말거나 박인철은 누군가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고 뇌를 주무르고 흔드는 것 같은 이 끔찍함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후우…….”
한지우는 꽉 쥐고 있느라 하얗게 질린 주먹 위에 손가락 끝을 가져다 댔다. 언제든 박인철이 제 몸에 손을 대려 하면 몸을 뺄 수 있도록 말이다.
박인철의 손은 뜨거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차가웠다. 얼음장 같은 온도에 흠칫 놀란 한지우는 이내 신경을 끄고 가장 옅게 가이딩을 내기 위해 집중했다.
눈으로 볼 수만 있었다면 명주실처럼 가느다란 가이딩이 박인철의 몸 안에 스며드는 것을 볼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중 그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박인철의 손목에 있는 기기로 수치를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가이딩하던 한지우는 수치가 위험군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손을 떼어냈다.
실제로 가이딩한 양을 따지면 평소에 비해 미미하기 그지없는 양인데도 내쉬는 숨이 거칠었다.
“하아, 이제 괜찮아졌을 테니 난 간다.”
가이딩을 받으니 그나마 살 것 같은지 표정이 풀렸던 박인철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벌써 끝이라고? 안정권도 아닌데?”
“위험군에서 벗어났으면 된 거 아냐? 나머지는 약 먹든가.”
따갑게 쏘아붙이는 말에 박인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미처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한지우는 쌩하니 독방을 빠져나갔다. 박인철의 반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었다.
한계까지 바람을 집어넣은 풍선을 품에 안고 있는 것처럼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지우는 적어도 며칠 정도는 가이딩도 하지 않고 숙소에만 박혀 휴식을 취하리라 마음먹었다.
독방에서 이어진 복도를 지나 문을 열고 나가자 내내 한지우를 기다리고 있던 사원이 그를 맞이했다.
“잘 끝났습니까?”
“일단 위험군에서만 벗어나게 했으니 나머지는 약을 처방해 주세요.”
“한지우 가이드가 마저 가이딩하지 않고요?”
사원의 말에 한지우는 한바탕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저 머저리는 자신이 불과 이틀 전에 폭주 에스퍼를 가이딩했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걸까.
그 후 하루 동안 기절까지 했던 한지우는 제 일이 아니라고 막말하는 사원의 뺨을 주먹으로 치고 싶었다.
그러나 약점을 쥘 수 있는 에스퍼면 몰라도 아직까진 협회 직원과 틀어져선 안 됐다. 특히나 지금처럼 언제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이틀 전에 주성원 에스퍼 가이딩한 피로가 아직 덜 풀려서요. 당분간은 좀 쉬고 싶네요.”
화는 참았지만, 말이 차갑게 나가는 것까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직접적으로 이틀 전 이야기를 꺼내고서야 상황을 파악한 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당분간은 쉬실 수 있도록 조치해 두겠습니다.”
그 말만큼은 마음에 드는지라 한지우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자신을 태우고 왔던 차량에 다시 몸을 실었다. 남겨진 사원은 멀어지는 차량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다. 분명 이하진 가이드는 알파 팀을 재우고도 멀쩡했다고 했는데.”
소문에 어두운 하진은 몰랐던 일이지만, 그가 알파 팀을 가이딩으로 재워버리고 유유히 사라졌던 날, 협회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폭주 직전의 에스퍼 셋과 이미 폭주한 에스퍼를 모두 재우고도 제 발로 걸어 나간 가이드라니.
그 후 하진의 등급이 밝혀지면서 모두가 S급 가이드라면 저런 게 가능하다고 알게 되었다. 그런데 같은 S급인 한지우가 폭주 에스퍼 가이딩 후, 힘들어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원은 이 사실을 보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비교군이 두 사람밖에 없어서 섣부른 판단이 될 수도 있었고, 괜히 말했다가 한지우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협회 내에서 높은 등급의 가이드만큼 권력이 높은 이들도 없었으니 눈치를 보는 게 당연했다.
* * *
강아지는 정확히 24시간 동안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잠든 사이에 호출이 와서 들키면 어쩌나 불안했는데 최지형이 무슨 조치를 취하기라도 했는지 다행히 그사이에 연락이 오거나 누군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제게 있었던 일을 복기한 강아지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더니 후다닥 뛰쳐나가 하진의 방 앞에 섰다.
평소와 달리 굳게 닫힌 문을 힘 있게 두드리자 안쪽에서 하진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강아지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천으로 온몸을 감싼 기분이었다. 좋아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 좋은 소름에 침을 삼킨 강아지가 목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나야.”
그러나 문을 열어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하진에게서는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응? 왜 대답이 없어? 설마 무슨 일 생겼어?!”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생길 리가 없는데도 강아지는 냉정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제 판단에 불과한데도 정말로 하진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들어갈게!”
만약 하진을 제게서 빼앗으려는 이가 있다면 멱을 따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강아지는 주먹을 들었다. 그러나 그 단단한 주먹이 문을 내리찍기 전에 하진의 목소리가 먼저 끼어들었다.
“아무 일도 없으니까 들어오지 마세요.”
하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얼굴을 보지 못한 강아지는 여전히 불안함에 안절부절못했다.
“얼굴 보여주면 안 돼? 왜 문 닫았어?”
방 안에 있던 하진은 그 말에 어이가 상실되는 기분을 맛봤다. 지금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하진은 그런 반응에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걸 진짜 몰라서 묻습니까?”
“어? 당연하지. 설마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하진은 정말이지 질리고 말았다. 뻔뻔하게 나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기가 한 짓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였다.
차라리 뻔뻔한 쪽이었다면 욕이라도 해줄 텐데 진짜 모르겠다는 듯이 구니 화내고 욕하는 쪽이 오히려 바보처럼 느껴졌다.
상상 이상의 몰염치에 하진은 그냥 이대로 강아지를 무시해 버리고 싶었으나 도로 입을 다물었다간 이번엔 말릴 새도 없이 문을 뜯고 쳐들어올 게 분명했다.
그는 참을 인을 마음으로 수도 없이 되새기며 설명했다.
“억지로 입 맞추지 않았습니까.”
“아, 그거.”
설명을 해줘도 여전히 반성이라고는 없는 태도에 하진은 다시 화가 울컥 올라왔다. 이쯤이면 하진을 화나게 해서 밖으로 꺼내려는 심산이 아닌가 싶었다.
“좋지 않았어? 난 좋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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