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60화
최면과 세뇌라니. 생각보다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주안이 어떻게 한지우와 내통했나 했더니 이 사람 능력을 이용한 건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까지도 최지형의 능력을 생각하니 납득이 갔다. 하진은 태연한 척하기 위해 표정에 좀 더 신경 써야 했다.
최지형이 알아서 넘어와 준 마당에 괜히 경계하는 티를 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최지형의 말대로 두 사람, 아니 잠든 강아지까지 세 사람이 거주 공간으로 돌아오기까지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진은 속내를 감추고서 최지형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오늘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이,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이러는 걸 보면 그냥 소심한 청년인데 그런 무시무시한 능력이라니.’
헤헤 웃는 순박한 모습으로 다른 이들에게 최면을 걸고, 세뇌한다니 어쩐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유독 최지형에게 경계심이 생각보다 빠르게 사그라진 이유 말이다. 하진은 그런 작은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 앞으로는 아지와 단둘이 있지 마세요. 위험, 하니까요.”
하진도 같은 생각이었다. 알파 팀은 해달라고 조르긴 했어도 멋대로 손을 댄 적은 없어서 모든 에스퍼들이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제 마음대로 될까요?”
그것도 말이라고는 지지리도 듣지 않는 사람에게 떨어져 달라고 해도 과연 그 말을 들을 것인가. 하진은 단언컨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었다면 제가 하지 말라고 했을 때 들어줬겠죠.”
강압적으로 당한 바람에 퉁퉁 부은 입술에 열감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매만지는 하진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최지형의 눈빛이 일순 서늘해졌다. 그러나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치느라 바쁜 하진은 미처 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제가 곁에 있어 드릴게요.”
“최지형 씨가요?”
하진이 놀랍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만 해도 강아지의 화를 피하려 모습을 감추지 않았던가.
‘무서워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설마 하진을 위해 용기라도 내는 것인가? 그 생각이 스치자 하진은 떨떠름해지지 않기 위해 표정을 가다듬어야 했다. 하진에게 있어 최지형은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가장 수상한 사람은 서주안이었다. 서지한은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하진을 경계하고 있고, 강아지는 순간 방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순하고 폭력성이 짙은 성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지형만큼은 파악했다 싶으면 새로운 면모를 보이니 뭐가 진짜 모습인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이상한 변태인가 하면 소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가도 또 이렇게 다른 면모를 보였다.
빠르게 상대를 파악하고 다음 수를 생각해야 하는 하진에게 있어서는 까다로운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아예 멀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상황은 그를 이용할 수밖에 없게끔 흘러만 갔다.
‘그나마 이 사람이 제일 나은 선택지인 내 현실이 제일 처참하네.’
하진은 씁쓸한 현실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최지형 씨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요?”
“전혀요!”
고개를 붕붕 젓느라 안경이 흐트러진 최지형은 안경을 바로 쓰며 하진을 안심시키는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감히 멋대로 하진 씨를 건드렸는걸요.”
처음으로 목소리도 떨지 않고, 더듬거리지 않고 나온 말이었다. 어딘가 소름이 끼치는 느낌에 하진이 그를 쳐다보는데 최지형의 눈은 말갛기만 했다.
“그, 그리고 이렇게라도 하진 씨에게 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는 좋아요…….”
그러나 잠시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도로 말을 더듬는 수줍음 가득한 청년으로 돌아간 그를 보며 하진은 조금 전의 소름은 착각이었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부탁해도 될까요?”
“그럼요!”
그의 능력이 꺼림칙하긴 했으나 도와주는 쪽이 되레 더 감사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위협은 되지 않을 거라는 작은 믿음이 생겨났다.
조금만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가이딩으로 재워버리면 될 것이다. 이미 한차례 방사 가이딩만으로도 에스퍼들을 재운 전적이 있으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다만 마음을 놓은 척, 경계심을 숨긴 채 경계해야 하는 게 피곤할 뿐이었다.
* * *
“허억!”
한지우는 한참 숨을 참았던 사람처럼 다급하게 숨을 삼키며 눈을 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익숙한 숙소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라도 상태가 이상해 보여서 누군가 멋대로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하아, 하아…….”
한지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쓰러지기 전과 달리 시야는 멀쩡했고, 더는 어지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지우는 그 사실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폭주한 S급 에스퍼를 가이딩해서 그랬던 거라고 여기고 넘어가기에는 한지우는 경험이 많은 가이드였다.
기절하기 전의 반응은 결코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애초에 A급일 때도 이랬던 적이 없었다. 난이도만 따지면 지금 폭주한 S급 에스퍼를 가이딩한 것과 A급일 때 S급 에스퍼를 가이딩한 것은 비슷한 수준이었다.
‘힘들긴 했어도 이렇게 코피를 쏟고 혼절한 적은 없었는데…….’
급이 맞지 않는 에스퍼를 가이딩하는 것이니 고통스럽긴 했으나 단 한 번도 괴로워하다가 기절한 적은 없었다. 그의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그러나 한지우는 간단한 검사조차도 받을 수 없었다. 현재로서는 하나뿐인 S급 가이드의 몸에 이상이 생겼는데 협회가 그저 감기약 처방하듯 대충 넘길 리가 없었다.
게다가 코피를 줄줄 쏟는 걸 본 이가 있으니 그 증언까지 더해지면 핏줄 하나까지도 세세하게 살펴보려고 할 것이다.
만약 그러다가 한지우가 가이딩 등급을 올려주는 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젠장!”
한지우는 답답함에 욕을 뱉었다. 서주안은 일주일이면 약 기운이 모두 체내에 흡수될 거라고 했지만, 한지우는 믿을 수 없었다.
애초에 부작용이 있다는 말도 숨긴 이의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머리를 쥐어뜯을 기세로 고민하던 한지우는 고개를 숙였다가 피가 굳어 갈색이 되어버린 상의를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볼까 무서운 꼴이었다.
‘이만큼 피를 흘렸으니 기절하는 게 당연한가.’
기절한 게 납득이 될 정도로 많은 양의 피였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이렇게까지 많은 피를 흘릴 정도로 한지우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역시 검사는 절대 안 돼.’
평소 제 몸을 끔찍이도 생각하는 한지우지만, 이 순간만큼은 제 건강보다도 안위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필연적으로 약의 출처 또한 알아내려 할 텐데, 반정부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협회 내부를 뒤집어엎은 사건까지 한지우가 뒤집어쓸 게 분명했다.
아무리 협회가 가이드를 아끼고, 한지우가 현재 유일한 S급 가이드라고 해도 화를 면치 못할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하진을 그들에게 넘긴 것이 한지우가 아닌가.
‘절대, 절대로 들켜선 안 돼…….’
한지우는 전신에 끼친 소름에 부르르 떨었다. 어쩌면 협회는 자신을 살리려고 할지도 모른다.
몸을 결박하고 죗값을 치른다는 명목으로 가이딩을 착취당하게 되겠지만, 어쨌든 살아는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진의 에스퍼들이 그를 가만히 두려고 할까?
그럴 리가.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당장에 돌아와서 한지우를 뼛가루도 남기지 않고 손수 찢어발길 이들이었다.
절대 있어선 안 될 미래를 상상하던 한지우는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아직 어지러움이 남아 있긴 했으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옷은…… 그냥 버려야겠군.”
아예 태워버리면 마음이 편하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최대한 핏물을 뺀 다음 꼭꼭 숨겨서 버릴 생각이었다.
잠든 사이 굳어버린 핏자국은 잘 지워지지 않았다. 버석하게 가루가 된 피가 날리는 바람에 한지우는 좋지 않은 몸 상태로 욕실 청소까지 해야 했다.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이들이 찾아오다 보니 욕실 청소가 처음인 한지우는 쉴 새 없이 욕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욕실 청소를 끝마쳤다. 그러기 무섭게 숙소의 벨이 울렸다.
한지우는 벌떡 몸을 일으켜 거울을 살폈다. 몸을 움직인 덕인지 거무죽죽하기만 하던 얼굴이 발그레하니,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다.
안도한 한지우는 옷을 걸치고,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운전하던 새끼가 꼰지른 건가?’
“무슨 일이시죠?”
만약 검사 얘기를 꺼낸다면 어떤 변명으로 넘어가야 할지 고민하는데 어제와는 다른 협회 직원이 다급하게 본론부터 꺼냈다.
“한지우 가이드! 급한 일입니다. 박인철 에스퍼 수치가 너무 높아요.”
“예? 그게 무슨, 그 사람은 가이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한지우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목소리를 높였다. 등급이 높은 에스퍼들의 이름은 어지간해선 다 외우고 있는 한지우는 협회 직원이 말한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가이딩한 에스퍼의 이름이었다.
‘지가 이하진의 에스퍼도 아니면서 능력 쓸 일이 뭐가 있다고 벌써 수치가 아슬아슬하다는 거야?!’
게다가 주성원을 가이딩한 게 고작 하루 전이었다. 이 상태에서 또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했다간 이번엔 무슨 반응을 보이며 쓰러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완강한 그의 태도에도 직원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강압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본인도 잔뜩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하고 심지어는 울먹이기까지 했다. 얼굴이 낯설더라니 이곳에 배정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저, 저희도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잠깐, 아주 잠깐만이라도 안 될까요? 수치를 완전히 낮출 필요는 없으니 조금만이라도 가이딩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대로 두면 폭주 위험 단계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말에 한지우는 결국 표정 관리도 포기한 채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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