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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57화 (57/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57화

“최지형 이 새끼 어디 갔어?!”

책을 읽고 있던 하진이 갑작스러운 큰소리와 함께 나타난 강아지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

문을 부술 기세로 들어오더니 기어코 경첩이 부서져 반쯤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 변태 새끼가 기어코 내 일을 방해해?”

하지만 강아지는 덜렁거리는 문짝 따위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이 잡듯 눈을 굴리며 최지형을 찾아댔다.

‘왜 아침부터 나가나 했더니 이럴 줄 알았던 건가?’

어지간해선 자리를 비우지 않고 거실에 앉아 집요하리만치 하진을 관찰하며 얼굴을 붉혀대는 최지형이 오늘따라 눈뜨기 무섭게 사라지더라니, 이런 이유에서였나 보다.

강아지는 남의 침실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하지만 이미 자리를 비운 이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걸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도 굳이 집안을 한차례 뒤집어엎은 강아지가 하진의 방 앞에서 멈춰 섰다.

금방까지만 해도 인질을 놓친 살인범처럼 섬뜩한 얼굴이었는데 하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심통 난 어린애처럼 얼굴이 바뀌었다.

신기하기 그지없는 광경에 하진이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쥐고 있던 책을 덮었다.

눈이 마주쳤으니 책 읽기는 글렀다는 걸 안 것이다. 역시나 그는 하진을 발견하기 무섭게 징징대기 시작했다.

함부로 하진의 방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사실이 용케도 머릿속에 박혀 있긴 한지 문턱은 넘지도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저게 무시가 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최지형 그 새끼랑 산책했다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하고만 하기로 했으면서!”

그랬던가. 하진은 기억도 나지 않는 대답으로 자신을 책망하는 강아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당시에는 비위 맞춘답시고 그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다간 삐졌다는 이유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하진은 적당히 달래기로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강아지 씨는 워낙에 바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산책이랍시고 겨우 주변을 맴도는 것밖에 못 하는데 그걸 그냥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원래 생각이라는 걸 깊게 하지 않고, 일단 행동하고 보는 강아지는 하진이 논리정연하게 이유를 설명하고 들자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치만…….”

“물론 그쪽 탓을 하는 건 아닙니다. 능력이 좋으면 바쁜 게 당연하죠.”

시무룩해진 강아지에게 하진이 자연스레 당근을 물렸다. 이 정도 비위 맞추는 것쯤이야 어려울 것도 없었다.

가이드 이전에 하진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신입을 어르고 달래는 동시에 가진 능력에 비해 떵떵거리기 좋아하는 상사를 적당히 치켜세워야 하는 중간 직급이었으니까.

“그러니 강아지 씨가 부디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 내가 도망가지 않겠다고 약속해도 날 혼자 돌아다니게 하진 않을 거잖아요.”

“그건, 그렇지.”

강아지는 하진의 시선을 피하며 긍정했다. 새삼 양심에 찔리길 바라며 한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노린 건 다른 부분에 있었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해도 그쪽이 오히려 날 못 믿을 거라는 말. 확실하게 마음을 돌린 것은 아니지만, 어? 이제 조금 마음이 바뀌었나? 싶어질 것이다.

하진은 조금씩 가랑비에 젖듯 스며들 수 있도록 조심스레 밑밥을 깔았다.

자신을 온전히 믿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단 한 순간의 방심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살랑거려줄 용의가 있었다.

하진이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고 강아지는 어느새 설득되어선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불만스럽긴 한지 투덜거림은 멈추지 못했다.

“쳇, 그럼 나하고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잖아.”

“그럼 강아지 씨하고도 산책하러 가면 되죠. 굳이 한 번만 나갈 필요는 없잖아요.”

솔직한 마음으로는 어쩌라는 건지 싶었다. 강아지가 투덜거리든 말든 이미 지난번의 대화 이후, 강아지에 대한 아주 작은 호의마저도 사라진 하진은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달래놓지 않으면 언제가 되었건 저 거칠기 짝이 없는 성미는 터질 게 분명했다.

만약 강아지가 최지형과 하진의 사이에 끼어들어 소란이라도 만들면 마지막 하나 남은 탈출 방법이 막히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차라리 귀찮음을 감수하고서라도 강아지를 달래놓는 게 미래에 더 도움이 될 터였다.

역시나 그 선택이 옳았는지 강아지는 자신과도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는 하진의 말에 반색하며 언제 짜증 냈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정말? 그럼 지금 나가자. 최지형 그 새끼가 어디까지 데려갔어? 내가 더 좋은 곳에 데려가 줄게.”

‘오?’

이건 예상외의 수확이었다. 경쟁 심리를 부추길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본인이 먼저 데려가 주겠다고 하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최지형 씨에게 실내 정원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아직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 새끼 하는 짓이 그렇지 뭐. 느려 터졌다니까. 내가 데려가 줄게! 가자!”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사람이 된다면 아마 강아지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빠른 결정이었다. 하진은 냉큼 따라나서기보단 한 번쯤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임무에서 바로 돌아온 거 아닙니까? 쉬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마음의 문을 닫고, 연신 경계만 해대던 하진이 걱정하는 투로 말하자 강아지의 얼굴 근육이 헤벌쭉 풀어졌다.

“지금 내 걱정해주는 거야?”

“괜히 내가 고집을 부린 걸로 보이면 안 되니까요.”

하진은 연애는 해본 적도 없으면서 강아지를 상대로 잘도 밀당을 해댔다.

강아지는 하진이 괜한 말로 아닌 척을 해도 이미 혼자서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양아치 같지만 잘생긴 얼굴로 한껏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 정도는 끄떡없으니까.”

하진은 여전히 신경 쓰이는 척 강아지를 살피더니 살짝 망설임을 담고 입을 열었다.

“……가이딩, 안 해도 됩니까?”

하진의 입에서 그 단어가 먼저 나올 줄은 몰랐던지라 강아지의 고개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돌아갔다. 저러고 목이 멀쩡한 게 신기할 정도라 순간 하진이 움찔 놀랄 정도였다.

강아지는 제가 들은 게 맞냐는 듯 되물을 뿐이었다.

“가이딩이라고? 지금 가이딩해 주겠다는 거야?”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한테라도 받고 오던가요.”

하진의 말에 강아지가 헛웃음을 흘렸다.

“농담이지? 이곳에 S급 가이딩이 가능한 녀석이 있었으면 널 굳이 납치했을까?”

그 말이 옳았다. 하진은 여기서 잠시 고민해야 했다. 자신이 가이딩해 주겠다고 하면 과연 강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순순히 해주겠다고 손 내밀어봤자 그다지 믿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순순히 믿을 거였다면 방사 가이딩을 받았을 때 그에게 어떻게든 손대고 싶어서 안달이 나야 했다.

물론 S급 가이드인 하진을 향한 욕망이야 뚜렷했다. 하지만 여전히 하진을 믿지 못하는 게 그의 눈에도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가이딩을 해주겠다고 말하면 저들이 자신을 믿으려 할까? 오히려 의심하지 않을까?

‘젠장, 더럽게 복잡하네.’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던 하진은 마치 가위바위보의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 같은 막막함에 생각하기를 멈췄다.

하진은 도시적이고 예민할 것처럼 생긴 것과 달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회사원으로 지내면서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

사람은 어느 정도 생각 없이 사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생각이 많으면 출근부터가 힘들어진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아야 그 거지 같은 회사를 견딜 수 있었다.

하진은 점점 복잡해지다 못해 나중에는 논리마저 뒤엉킨 생각의 타래를 끊어내고 그냥 질러버렸다.

“그래서 가이딩받을 겁니까, 말 겁니까. 이쪽은 폭주 에스퍼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요.”

미안합니다. 백자안 씨. 하진은 속으로 백자안에게 사과를 보냈다.

폭주 에스퍼에 대한 트라우마 따위는 없었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로는 그럴싸했기에 덧붙인 말이었다.

협회와 비슷한 시기에 하진을 찾아낸 이들이니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역시나 백자안의 이야기를 떠올렸는지 강아지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럼 가이딩해 줄래?”

최선을 다해 접촉 가이딩을 피하던 강아지였으나 하진이 대놓고 가이딩으로 유혹하니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서주안이 정색하며 뭐라 할 게 눈에 훤했으나 그도 막상 이 상황에 놓이면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합리화했다.

생각을 마치고 나니 남은 것은 이후에 찾아올 가이딩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으면 하급 놈들이 가이딩에 목을 매고 하루가 멀다고 가이드를 찾아가 박아대는 걸까. 얼마나 좋기에 서지한이 병신 꼴이 된 걸까.

그들처럼 되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이미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가이딩을 맛봤던 강아지는 하진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하진이 건넨 것은 방사 가이딩이었다. 내민 손이 무색하게 전신에 퍼지는 방사 가이딩에 강아지는 전율하면서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아, 미친 존나 좋아……. 근데 접촉 가이딩해 주는 거 아니었어? 해주면 안 돼? 끝내주게 좋을 거 같은데.”

“방사 가이딩으로 충분한데 뭐 하러요.”

태연하게 대답하면서도 하진은 속으로 질색하는 중이었다.

미쳤다고 그가 접촉 가이딩을 해주겠는가. 그랬다가 흥분한 강아지에게 무슨 짓을 당하게 될지 하진은 이제 너무도 잘 알았다.

탈출을 목전에 둔 순간이 아니고서는 하진이 접촉 가이딩을 할 일은 없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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