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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56화 (56/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56화

정확히는 폭주가 일어나기 전이었으나 한지우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많았고, 그는 마치 탈진이라도 한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협회는 주성원의 폭주를 막아낸 게 한지우라고 착각한 것이다.

“일단 한지우 가이드를 이쪽으로.”

협회 직원은 마치 주성원이 한지우를 넘기지 않을 것처럼 경계하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으나 주성원은 미련 없이 한지우를 그에게 넘겼다.

한지우를 넘겨받은 것에 그저 안도한 직원은 주성원 또한 상태 확인과 치료를 위해 의료진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오오, 파장도 안정적이고 수치 또한 다시 안정권으로 내려왔습니다.”

“역시 S급 가이드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주성원을 앞에 두고도 의료진은 한지우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대꾸하는 것조차 지쳐서 그저 멍하니 제 팔뚝에 꽂히는 주사를 맞았다.

“진정제입니다. 회복력이야 약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이니 돌아가는 대로 쉴 수 있도록 진정제를 놓았습니다.”

그것 하나는 고마웠다. 약효는 십 분 내로 돌 거라는 말에 주성원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걱거리는 몸이 연신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더 중요했다.

반면 한지우는 제게 달라붙은 의료진과 협회 직원들의 찬사에 삐뚜름하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속하기 바빴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한지우 가이드.”

“S급 에스퍼의 폭주를 막다니. 역시 S급 가이드는 대단하군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한지우는 최대한 겸연쩍은 얼굴로 겸양을 떨었다. 이젠 눈치를 볼 것도 없지만, 그래도 약간의 귀찮음을 감수하면 알아서 좋게 봐주는 게 편하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몸이 상할 줄은 몰랐습니다. 다음부턴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에스퍼들을 관리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이어진 직원의 말에 한지우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하마터면 정색할 뻔한 상황에 그는 조금 더 표정에 신경 쓰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 이 와중에도 내 기를 잡아보겠다고 지랄을 하는군.’

걱정스레 하는 말이지만, 그 속에 담긴 말뜻이 그러게 왜 휴가 같은 걸 받아선 일을 크게 만드냐, 앞으로는 알아서 에스퍼들 수치 관리 좀 하라는 뜻인 걸 알아듣지 못할 한지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에스퍼라면 모를까, 협회 직원을 상대로 섣불리 기 싸움을 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솔직히 이번 일은 한지우도 당황했을 정도로 갑작스럽고 자칫했으면 그의 입지에 위험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오히려 지금은 한 수 접어줄 때였다.

만약 여기서 그가 괜히 힘든 척하며 슬금슬금 몸을 뺐다가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일이 잘 해결되어도 폭주 위기 자체가 그의 탓이 될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체력 관리를 더 잘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불쾌한 건 불쾌한 거라, 한지우는 고작 이틀 쉬었다고 이 지경이 된 게 내 탓이냐는 뜻을 깔고서 반성하는 척했다.

그 뜻을 알아채도 상관없었지만, 협회 직원은 한지우만큼의 눈치는 없는지 숨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미안함을 표시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협회에서 좀 더 돕지 못해서 죄송하죠. 이하진 가이드를 빨리 찾아야 한지우 가이드의 짐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텐데 말입니다.”

금기나 다름없는 이름을 들은 한지우의 미간이 순간 굳어버렸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아, 이런. 한지우 가이드의 탓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하진 가이드도 곧 찾을 수 있을 거고요.”

다만 협회 직원은 눈치가 좋지 못한 수준을 넘어서 그냥 없는 모양인지 한지우가 정색하는 이유를 죄책감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제야 한지우가 자신이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억지로 표정을 꾸미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저, 일이 끝났다면 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좀 피곤하네요.”

폭주한 S급 에스퍼를 가이딩하느라 이틀간의 휴가로 비축해 두었던 체력이 순식간에 바닥났다.

거기에 하진의 이야기까지 들은 바람에 지금 기분은 그야말로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요.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차량을 대기시켜 놨으니 타고 가세요.”

“네.”

표정 연기를 할 여력이 없어 거절하고 싶었으나 가장 외곽에 붙어 있는 이곳과는 반대로 가이드 숙소는 가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이 상태로 숙소까지 걸어서 돌아가면 반나절은 걸릴 게 분명해 한지우는 귀찮아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불쾌함이지만, 피곤함을 감추지 않고 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아버리니 다행히 운전석에 앉은 이도 별말 하지 않고 차를 움직였다.

‘망할, 망할 이하진!’

한지우는 눈을 감은 채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팔자에도 없는 협회 놈들 비위나 맞추고 있는데 그의 존재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한지우를 괴롭게 했다.

‘젠장,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이상 뭘 더해야 이하진 그 새끼를 지울 수 있냐고.’

더 이상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한지우는 현재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 이상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정도로 말이다.

‘에스퍼들을 더 애태워야 하나?’

당장에 떠오른 생각이었으나 한지우는 곧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저의 뼈와 살도 깎아야 하는 방식이었다.

폭주가 그의 사정에 따라 터지는 것도 아니고, 연달아 터져버리면 다 된 밥에 잿가루를 쏟다 못해 그냥 바닥에 엎어버리고 발로 짓밟는 수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냥 콱 뒤져버렸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무리겠군.’

반정부에서 가이드가 필요해서 데려간 것이니 알아서 콱 뒤졌으면 하는 소망도 영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머리는 터질 것같이 복잡한데 해결 방안이 없으니 괜한 두통만 밀려오는 듯했다.

“하, 한지우 가이드! 코피가!”

“네?”

기겁하는 운전자의 음성에 코밑을 닦아내자 코피가 한가득 묻어나왔다. 피를 보고 나니 그제야 코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코피가 느껴졌다.

어떻게 이걸 못 알아챌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병원으로 차를 돌리겠습니다. 아무래도 폭주 에스퍼를 가이딩해서 몸이 상한 것 같습니다.”

한지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맛이 느껴지는데도 이에 힘을 풀지 못했다.

“아뇨. 그냥 피곤해서 그런 겁니다. 쉬면 괜찮아져요. 그냥 숙소로 가주세요.”

폭주 에스퍼를 가이딩했음에도 이하진의 존재감을 지워내지 못했다. 그게 마치 한지우로는 하진을 대체할 수 없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한지우는 더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고작 이 정도에 치료를 받았다간 제 한계가 정해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진은 더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기분이라 한지우는 괜한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예? 그러지 말고 치료를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협회 직원의 입장에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흘러내린 코피가 가슴팍을 적시고 있는데 뭐가 괜찮다는 말인가.

“이하진 가이드도 없는 지금, 한지우 가이드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그놈의 이하진! 난 괜찮으니 그냥 좀 가라고!”

일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가 싶더니 한지우에게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창백하게 질려선 코피를 쏟느라 손끝을 떨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기백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직원이 반사적으로 백미러를 살피자 얼굴에 피를 한가득 묻힌 채 서슬이 퍼렇게 눈을 뜬 한지우가 있었다.

이대로 치료를 위해 강제로 차를 돌렸다간 목이 졸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그는 제안을 굽히고 한지우의 숙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배기음조차도 없는 차 안에서 침묵만을 지키고 있던 한지우는 차가 멈춰 서기 무섭게 제 숙소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직원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성질머리가 좀 죽은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네…….”

견고하게 쌓은 줄 알았던 탑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편 숙소에 들어선 한지우는 한참을 거실에 우두커니 서선 몸을 떨었다. 아직 멎지 않고 흐르는 코피가 뚝뚝 거실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드는데도 그는 거친 숨을 토해낼 뿐이었다.

“이하진, 이하진! 아아악!”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른 한지우는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부숴댔다.

그러다 너무 많이 흘린 코피에 일순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온몸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으, 욱……!”

어지러운 탓일까, 속까지 좋지 않아 결국 헛구역질까지 한 한지우는 한참을 토할 것처럼 괴로워하더니 기력을 다한 사람처럼 축 늘어졌다.

뭔가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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