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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55화 (55/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55화

폭주라는 말을 듣고도 휴가 중이라는 핑계를 댈 수 없었던 한지우는 얌전히 그를 따라 차로 향했다.

“주성원 에스퍼라면 약을 받지 않았나요? 왜 폭주를 일으키려고 하는 겁니까?”

폭주를 일으키고 싶은 에스퍼는 없었다. 가이드와 일반인은 경험할 수 없지만 에스퍼는 폭주할 때 전신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낀다고 했다.

약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폭주만큼은 아니었으니 에스퍼들이 약을 싫어하면서도 먹는 거였다.

한지우의 질문에 직원은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실은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주성원 에스퍼는 시간마다 제때 약을 챙겨 먹었고 그걸 확인까지 했고요. 갑자기 파장이 불안정해지더니 폭주가 일어날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는 중에도 언제 폭주가 시작될지 몰라 두렵다는 듯 직원은 짧은 거리임에도 강하게 액셀을 밟았다.

에스퍼들은 매칭 가이드가 있거나 상대적으로 가이딩받기 쉬운 등급의 에스퍼라면 중심부에 가까운 곳에서 생활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등급이 높아 가이딩받기 어려운 에스퍼들은 외곽에 속하는 곳에 만들어진 숙소에서 생활한다.

주성원은 후자에 속하는 쪽이었다. 빠르게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다가왔다. 한지우의 등장에 그들의 만면에 살았다는 안도감이 퍼졌다.

함께 차에서 내린 직원이 그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폭주는?”

“다행히 아직 전조만 보일 뿐입니다. 한지우 가이드, 얼른 가주세요.”

“네.”

한지우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다가갈수록 폭주 에스퍼의 불안정한 파장이 짙어지고 있건만 한지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드디어 이 순간이 온 것이다. 자신의 입지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줄 순간이.

한지우는 주변에 사람과 감시 카메라마저 없는 것을 확인하자 굳이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한지우가 신중하고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움직인다지만, 폭주까지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의 필요성을 그 뼈에 새겨줄 생각이었을 뿐이었는데 이렇게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줄이야.

에스퍼에게 가까워질수록 주변 공기가 실제로 묵직해지는데도 한지우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가벼웠다.

“허억…… 크흑……!”

“어이고, 고생하네.”

“하, 한지우……?”

그의 이름을 부르는 주성원의 목소리에는 얼핏 환희가 서려 있었다.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 한지우라면 이 폭주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그의 표정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주성원은 정말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깎이는 것 같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폭주하지 않겠다는 그 의지만큼은 한지우에게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이, 딩……. 어서, 허억, 가이딩……!”

한지우가 눈앞에서 있어서인지 주성원은 다급해졌다. 어서 이 지옥 같은 고통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주길.

한지우라는 탈출구를 발견한 그는 더 이상 얌전히 기다리기만 할 수가 없었다.

“어어, 움직이지 말고. 파장이 그렇게 불안정한데 괜히 움직였다가 진짜 폭주하면 어쩌려고?”

주성원은 그의 목소리가 태연하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폭주 전조는 그리 흔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지만,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전조는 뭔가 달랐다.

평소보다도 더욱 불안정하게 날뛰는 파장은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통증은 이미 폭주가 시작된 것처럼 찾아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주성원의 본능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 찰나의 감정은 다시 한번 거칠게 일렁이는 파장과 함께 찾아온 고통에 빠르게 날아가고 말았다.

그는 거칠고 빠르게 뛰느라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심장 부근을 움켜쥐고 거친 숨을 헐떡였다.

“알겠, 흐으, 으니까. 빨리, 가이딩을…….”

말을 이어 나가는 것마저도 고통스러웠다. 혀를 움직일 때마다 치아가 뽑혀 나가고 혀를 한 점, 한 점 저미는 듯한 고통이 그의 뇌를 강타했다.

“그래, 가이딩. 해야지.”

그렇기에 심드렁한 한지우의 태도에도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드디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그러나 곧 이어진 한지우의 음성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태도가 조금 불순한데?”

“……뭐?”

처음 주성원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공기가 스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몸을 억지로 움직여 올려다본 한지우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는 일절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가이, 가이딩을, 커헉!”

마음이 흔들려서 그런 것일까. 파장이 마치 그에 반응하듯 더욱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S급 에스퍼의 불안정한 파장은 아무리 같은 S급이 되었다고 해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한지우의 표정도 좋지 않아졌다.

이틀간의 휴가로 좋아졌던 안색이 다시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하자 버티다 못한 그가 주성원에게서 훌쩍 멀어졌다.

그러자 주성원의 얼굴에 절망이 스며들었다. 이대로 한지우가 정말로 떠나버리기라도 하면 그는 끝이었다.

한지우가 밖으로 나가 가이딩을 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폭주가 시작되어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면 협회의 누가 의심하겠는가.

현재로선 협회의 하나뿐인 S급 가이드와 대체 가능한 S급 에스퍼 중 그들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아, 안 돼.’

주성원은 자신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자각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정말로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되니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상황이었더라면 이렇게 덜컥 겁을 집어먹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억겁과 같은 몇십 분 동안 그 고통을 홀로 버텨낸 주성원에게 더는 이성이라는 게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흐억, 내가 어떻게, 해야…….”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 상대에 한지우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별 건 없고. 그냥 앞으로 태도를 좀 바꾸라 이 뜻이지. 가이딩 없으면 죽어가는 네 입장을 좀 더 확실히 머리에 새겨두라고.”

한지우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였다. 알아서 기는 것. 제 위치를 확인하고 감히 건방지게 굴지 말 것.

생각이라는 게 힘든 머리로도 그 숨은 뜻을 알아들은 주성원은 힘겨워하면서도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챙겨야 할 자존심 따위는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알겠, 흑, 으니까. 제발, 제발 가이딩을…….”

심지가 얼마 남지 않은 초처럼 주성원의 생명의 빛이 점점 꺼져갔다.

그는 더는 고개를 들 힘조차 남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더듬더듬 힘없는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복종을 받아낸 한지우는 드디어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가까워질수록 그가 내뿜는 불안정한 파장에 살갗이 따끔거렸지만,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살이 찢어지는 것을 한지우는 오히려 반겼다. 심각하지 않지만, 눈에 띄는 상처는 오히려 그의 노력을 부각시킬 뿐이었다.

드디어 한지우가 주성원의 손을 잡았다.

“허억!”

하진과 달리 가이딩을 차단하는 법을 모르는 한지우는 손을 맞잡기 무섭게 빠져나가는 가이딩에 숨을 들이 삼켰다. 약을 복용한 이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부담감이 느껴졌다.

‘내가, 내가 질 것 같아?’

몸 안의 피를 빨리는 것처럼 무섭게 가이딩이 소모되고 있는데도 한지우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꼿꼿하게 섰다.

두 눈에 실핏줄이 터져 벌게진 눈을 하고 버텨낸 한지우는 주성원의 파장이 돌아오고 수치가 안정권으로 내려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손을 팽개치듯 놓아버렸다.

“아……!”

손을 놓친 주성원은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여전히 한지우의 가이딩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족감도, 충족감도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옥 같은 시간에서 홀로 버티던 주성원에게는 그 무미건조한 가이딩마저도 단물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그에게서 멀어져 주인에게 돌아가는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팔을 지나 이윽고 한지우의 얼굴에 닿았다.

한지우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코피를 흘리면서도 안광을 빛내며 웃었다.

‘잘못 걸렸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저 인간 말종에게 잘못 걸렸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용당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을.

“멀쩡해졌으면 일어나. 가이딩하느라 힘이 다 빠져버렸으니까.”

그 말만은 사실인지 한지우는 주성원이 몸을 세우기 무섭게 휘청거리더니 이내 끈이 떨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만약 주성원이 빠르게 붙잡지 않았더라면 볼썽사납게 자빠졌으리라.

“뭐 해. 나가지 않고.”

주성원 역시 폭주의 여파로 몸이 엉망진창이었으나 아무 말 없이 한지우를 안아 든 채 밖으로 향했다. 새삼 한지우에게 애정을 느낀 게 아니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또 폭주가 일어났을 때, 가이딩해 주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또다시 그 지옥 같은 고통에서 홀로 허덕여야 할까 봐 두려워서 그는 명령에 가까운 말에도 군말 없이 움직였다.

독실을 빠져나가고 바깥과 이어진 문을 열자 협회 직원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시선을 모았다.

한지우가 S급 에스퍼의 폭주를 막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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