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46화
그는 일주일이 넘도록 입을 다물고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쩡한 목소리로 한승호에게 되물었다.
“나도 알아. 그 새끼에게 뭔가 있다는 거. 가이딩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
한승호가 또라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 정도로 하진과 연관된 백자안은 미친놈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백자안은 그 누구보다도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한승호는 그가 아주 미쳐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데 그러면 하진 형을 찾으러 갈 수가 없잖아. 난 상관없어. 가이딩받고 죽는다고 해도 폭주 수치를 떨어트리고 다시 하진 형을 찾으러 갈 수만 있으면 가이딩받을래.”
그 말에 한승호는 힘이 빠진 것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결국에 선택지는 없었다. 다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떼를 썼을 뿐이었다.
이도윤 또한 거칠게 머리를 털면서도 더는 반대 의견을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잇지 않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협회장이 말한 곳으로 향하자 대기하고 있던 한지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누구도 그 인사를 받지 않자 잠시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걸었다.
“저, 잘 부탁드려요.”
그러나 그마저도 무시당하자 한지우도 더는 말하지 않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너무하다며 작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한지우는 고개를 숙였다. 잘못하다간 웃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역시 S급이 좋긴 좋네.’
분위기가 한지우에게 우호적으로 흘러가는 걸 알았지만, 차진우는 이렇다 할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를 포함한 모두 쓸데없는 알력 다툼을 할 시간에 가이딩을 받고 하진을 찾으러 가고 싶었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죠.”
“잠깐만.”
한승호였다. 납득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차진우의 시선을 받은 한승호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이딩에 문제없는 건 확인했겠지?”
가이딩을 하기 전에 안전한지 확인 정도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한승호의 물음에 주위에 포진해 있던 연구원 중 하나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가이딩 효율이 오른 것을 확인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확인까지 받았어도 이상하게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가이딩을 받기로 마음먹었으니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의심하는 모습을 보였던 한승호가 가장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지우가 손을 맞잡자 순간 뿌리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하진을 떠올리며 참았다. 맞닿은 손에서부터 가이딩이 밀려들어 왔다.
한승호를 비롯한 알파 팀은 하진과 만나기 전에도 한지우를 찾지 않았다.
다른 S급에게도 그다지 효과가 없는 가이딩을 굳이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지우가 S급 에스퍼에게도 가이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을 때, 딱 한 번 그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바짝 마른 대지에 스포이트로 물을 떨어트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가이딩에 한지우라는 선택지를 치워버렸다.
효과도 미미한 가이딩을 받겠다고 꼬박꼬박 협회에 들를 바에야 약으로 다스리는 게 나았다.
그런데 S급이 된 한지우의 가이딩은 그때와 달랐다. S급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확실한 효과를 보였다. 예민하게 날 선 감각이 차분해지고 폭주 수치가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하진에게 가이딩받았을 때와 같은 느낌은 전혀 없었다. 부드럽게 몸을 감싸고, 타는 듯한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은 쾌감이 없었다.
그저 수치가 떨어졌네. 감상이라곤 이게 다였다.
하진이 특별한 걸까, 아님 한지우가 떨어지는 걸까. 한승호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생겼으나 이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한승호는 수치가 떨어진 것을 확인하자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남은 세 사람도 별다른 감상도, 미련도 없이 수치가 떨어지자마자 한지우의 손을 놓았다.
‘반응이 왜 저래?’
그에 한지우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파장이 잘 맞는 가이딩을 받은 에스퍼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수치가 떨어지는 속도를 봐선 매칭률이 낮은 게 아닌데, 대체 왜……?’
마치 지나가는 사람과 악수 한 번 했다는 듯한 반응에 한지우는 당황했지만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하진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그가 예상하는 미래가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진만 없다면 협회 내 유일한 S급 가이드는 한지우가 될 것이고, 그러면 지금은 고개가 뻣뻣한 저들조차 자신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협회 또한 한지우가 그들을 가이딩할 수만 있다면 상관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 달라지는 건 없어.’
한지우는 잘게 떨리는 손끝을 감추고자 주먹을 쥐었다.
* * *
심심하다.
벌써 일주일째 방 안에만 있었다. 아무리 하진이 집돌이라고 해도 자의도 아닌 타의로 방 한 칸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 읽기 싫어지는 날이 오네.’
그 좋아하던 책도 일주일 내내 읽고 있으니 더는 쳐다보기도 싫어져 손에서 놓아버렸다.
나가고 싶다. 하지만 저들과 얼굴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아가 분열이라도 한 것처럼 두 개의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던 하진은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갔다.
침대에 너무 앉아 있었더니 허리도 슬슬 아파지는 게 후자를 선택하는 데 한몫 단단히 했다.
“어? 왜? 뭐 필요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강아지가 하진을 발견하곤 쪼르르 달려왔다.
그간 하진이 방에만 박혀 있으면서 물이나 식사 등 필요한 것들을 방문 앞에다 놓아 달라 부탁했다. 그는 이젠 하진의 심부름이 퍽 익숙해 보였다.
‘어린애 데리고 빵셔틀이라도 시키는 것 같네.’
실상은 납치범 일행이지만, 저렇게 맹하게 굴 때면 괜히 자신이 못된 어른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래서 얼굴 보기 싫었던 건데.’
하진은 스톡홀름 증후군을 경계했다. 머리로는 저들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도 익숙해지는 건 조절이 가능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젠 강아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하진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습니까?”
“날 앞에 두고 딴 놈을 찾는다고?”
‘음. 저놈도 정상은 아니야.’
다른 이를 찾는 모습에 삼백안을 희번덕 뜨는 강아지를 보며 하진은 혹여나 걱정했던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한 경계를 조금 내렸다.
길을 걷다 마주치면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할 것처럼 생긴 얼굴로 저러고 있으니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지만, 하진은 여간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저놈이 에스퍼고 내가 가이드인 이상 무서울 것도…….’
아니다. 눈 돌아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게 에스퍼였다.
물론 그들이 하진을 해치거나 때리는 일은 없을 테지만, 그 ‘무슨 짓’이라는 건 폭력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이기에 하진은 다시 경계심을 끌어 올렸다.
“다른 사람이 없다면 그쪽도 괜찮겠죠. 물어볼 게 있는데 말입니다.”
“응. 뭔데?”
자신도 괜찮다는 말에 눈빛이 멀쩡하게 돌아온 강아지가 다시 순한 얼굴을 했다. 생긴 건 전혀 순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 빠른 태세 전환에 질색한 하진은 속내를 감추고 물었다.
“집 밖으로 나가보는 건 안 됩니까?”
“밖으로?”
반사적으로 인상을 쓰는 강아지에 하진이 뒷말을 이었다.
“어차피 혼자는 안 보낼 거잖습니까. 따라와도 돼요. 그냥 갇혀만 있으려니 심심해서요. 산책이라도 좀 하고 싶은데요.”
“으음…….”
혼자를 고집하지 않으니 강아지가 고민하는 듯 턱을 매만졌다.
“나랑 간다면 괜찮긴 하겠지만……. 그래도 밖으로는 못 나가.”
“그러죠.”
협회처럼 인공 단지가 조성되어 있지는 않나 보군.
하진은 강아지가 흘린 말을 주워 담으며 정보를 찾아냈다.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집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반정부 세력 본부 안에 만들어진 공간인 듯했다.
‘우선은 돌아다녀 봐야겠네.’
딱히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조차 심심해서 할 수 없어진 지금, 나갈 거라면 뭐라도 알아내는 게 나중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 지금 나갈래?”
“지금요? 서주안이 허락합니까?”
하진은 별생각 없이 당연히 서주안이 이 팀의 리더 같아 보여서 한 말이었는데 강아지의 자존심을 긁었는지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그 새끼 허락을 받아?! 그딴 거 필요 없어! 그냥 나가도 돼.”
낚을 생각도 없었는데 알아서 낚싯바늘에 걸려준 강아지에 당황스러웠지만, 하진은 거절하지 않고 옷을 챙겨 입었다.
당당하게 문을 열고 나가는 강아지의 뒤를 따르자 예상했던 대로 더 넓은 실내가 펼쳐졌다.
‘그리고 생각보다 사람이 많군.’
길을 전부 외운다고 하더라도 몰래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겠다 싶었다. 미련 없이 탈출 계획을 폐기한 하진은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하며 주변을 구경했다.
‘구조가 특이해 보이는데…….’
일반 건물과는 달라 보였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터널 같은 복도 곳곳에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진이 있었던 곳과 비슷한 공간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자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개미굴 같네.’
바깥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그랬고, 하나의 큰 통로를 기점으로 곳곳에 문이 있는 것도 개미굴을 떠올리게 했다.
하진은 아무래도 자신이 있는 곳이 지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하라니.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지하가 맞다면 하진이 구출되는 데에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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