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44화
“그 정도 가이딩이라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왜 도망치지 않은 거지?”
서지한의 의문은 타당했다. 그의 말대로 하진의 능력이라면 에스퍼가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해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진은 무시할까 하다가 문짝이 없어 온전히 찔러오는 시선에 결국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날 노리는 게 에스퍼만이라면 나도 진즉에 탈출했을 겁니다.”
그렇다. 하진을 노리는 이들 중에는 에스퍼 반대 단체도 있었다.
그는 옥상에서 겪었던 총격전을 잊지 못했다. 몬스터나 이능력보다도 하진에게는 이쪽이 더 현실적인 공포로 남았다.
게다가 에스퍼들은 가이딩으로 어떻게 다룰 수라도 있는데 에스퍼 반대 단체는 소수의 가이드와 민간인으로 이루어진 단체라 하진 혼자는 어떻게 상대할 수 없었다.
“혼자 찾아가겠다고 나갔다가 대가리에 총 맞고 죽고 싶진 않거든요.”
그러자 서지한 또한 납득했는지 시선을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하진도 읽던 책의 다음 권을 찾아 다시 책장을 펼쳤다.
두 사람 사이를 채우는 정적은 강아지가 새로운 문짝을 들고 돌아올 때까지 이어졌다.
“문 달아줄게.”
영 어수룩한 성격 같더니 생각보다 손재주가 좋은지 금세 뚝딱 새로운 문이 달렸다.
하진이 작게 오 하고 감탄을 내뱉자 강아지가 턱을 치켜들었다. 뿌듯한지 표정도 좋았다.
그러나 그 뿌듯함은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이 매정하게 문을 닫아 그들과 자신을 분리해버린 하진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무리 연하에 약한 하진이라도 납치범에게 약해질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았다.
하루가 길었다. 그의 에스퍼들은 언제쯤 그를 구하러 올까. 하진은 깊어지려는 생각을 끊어내며 책에 집중했다.
* * *
하진이 납치당한 지난 며칠, 협회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날 선 채 언제 터질지 모를 알파 팀과 그에 못지않게 화가 나선 당장에 하진을 찾아오라고 소리를 쳐대는 협회장까지.
‘사이에 낀 우리 같은 사람들만 개고생이지…….’
지난 일주일 동안 10시간도 채 자지 못한 임준은 이제는 통하지도 않는 카페인을 습관적으로 때려 부었다. 이대로 머리를 처박고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번에 찾은 곳에선 성과가 있었대……?”
“아뇨……. 이번에도 허탕이래요.”
“아아악! 미친 새끼들! 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 거냐고!”
바로 하진을 납치한 반정부 세력의 꼬리가 도무지 잡히질 않기 때문이었다.
미리 조사해둔 그들의 아지트는 물론이고, 새로 찾은 곳까지도 모조리 급습했지만, 마치 그들이 올 것을 안 것처럼 텅 빈 공간만이 반겨줄 뿐이었다.
일주일이나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직원들의 사기는 땅으로 꺼졌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서는 협회 내에 첩자가 있는 것은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엔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반정부 세력이 바보도 아니고, 협회의 에스퍼들이 날뛸 걸 알면서도 뿔뿔이 흩어져 있을 리 없으니까.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못 찾는 게 가능한 건가?’
연이은 허탕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몇 번은 타이밍 좋게도 서주안이 나타나 얄밉게 손을 흔들고 눈앞에서 반정부 세력들을 데리고 사라졌다는 소식까지도 있으니 의심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협회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몇 번은 직접 나서서 헛소문을 퍼트리지 말라는 말도 했으나 조용해지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알파 팀은 어쩌고 있지?”
“수치가 아슬아슬해서 약을 먹이고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했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협회에서 가장 하진을 찾는 데 열심인 사람들을 꼽으라면 단연컨대 알파 팀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미친 듯이 하진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몸이 축나는 건 당연했고, 폭주 수치 또한 몸에 쌓이는 피로에 비례해 높아져 갔다.
이대로 폭주가 일어날까 염려되어 다른 S급들도 있으니 교대로 쉬면서 폭주 수치를 관리하라고 해도 도무지 듣지를 않았다.
“하아…….”
협회장은 벅벅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흐트러져 엉망이었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대로 알파 팀이 폭주라도 일으키면 협회는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물론 S급 에스퍼들에게 폭주 위험은 언제나 품고 다니는 폭탄이나 마찬가지긴 했다. 그러나 스스로 조심하며 폭주 수치를 관리할 때와 지금처럼 미친놈처럼 돌아다닐 때가 같을 순 없었다.
협회장은 마치 발 달린 폭탄이 불길에 뛰어드는 걸 보는 기분에 위가 아파왔다.
‘한지우 그 녀석이 S급만 됐었어도…….’
A급 가이드이면서도 S급 에스퍼를 가이딩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아쉬웠다.
등급을 뛰어넘어 S급을 가이딩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좋다는 뜻인데 그런 한지우가 S급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직까지 하진의 위치에 대한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상황에서 알파 팀이 날뛰고 있으니 있지도 않았던 아쉬움이 들었다.
“혀, 협회장님!”
그때, 노크도 없이 큰소리를 내며 송 박사가 협회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소란이란 말인가.
“송 박사, 이게 지금 무슨 짓인가. 아무리 자네가 뛰어나다고 한들, 내 사무실이 놀이턴 줄 아나?”
협회장이 괜히 송 박사에게 화풀이를 했으나 송 박사에게는 전혀 닿지 않았다.
“지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에, 에.”
촐싹 맞게 침을 튀기며 말을 더듬는 송 박사에 협회장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뭐! 뭔데! 말을 똑바로 하게!”
“에, S급! S급 가이드입니다!”
“뭐?!”
송 박사는 횡설수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려 했으나 협회장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송 박사가 농담으로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이, 일단 가면서 듣지.”
이하진이 돌아왔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의 등급이 측정 불가 수준이라는 걸 가장 먼저 눈으로 확인한 것이 송 박사이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S급 가이드가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무너진 하늘에 한줄기 빛이 내려왔다.
“새로운 가이드인가?”
“아닙니다. 이미 등급을 측정했던 가이드의 등급이 올랐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늘로 던진 물체가 끝없이 올라갈 순 없는 것처럼 한 번 측정한 등급은 바뀌지 않는다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그 상식을 깬 존재가 나타났다니. 만약 찾아온 것이 송 박사가 아니었더라면 믿지도 않았을 소리였다.
송 박사가 그를 데려간 곳에는 한지우가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연구원들이 잔뜩 포진한 채 이런저런 질문을 퍼붓고 있었는데, 그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하는 중이었다.
“크흠.”
협회장이 헛기침으로 시선을 끌자 연구원들이 아쉬워하면서도 한지우의 곁에서 물러났다.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송 박사를 닮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일단 어떻게 된 건지 설명부터 듣지.”
협회장의 말에 물러났던 연구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놀랐을 뿐, 어디 다치거나 한 건 아닌 한지우는 자신도 도움이 되고 싶다며 수색 후 돌아오는 에스퍼들을 가이딩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중에는 S급 에스퍼도 있었다.
에스퍼 관리팀은 한지우에게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나 한지우는 가이딩하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냐며 논리적인 이유를 들며 물러나지 않았고, 결국 관리팀은 그에게 S급 에스퍼의 가이딩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상 현상은 그때 발견되었다.
“오늘따라 가이딩 좋다?”
한 S급 에스퍼의 말을 시작으로 한지우에게 가이딩받는 에스퍼들 대부분이 가이딩 효율이 좋다는 말을 한 것이다. 한 사람에 그치는 말이었다면 컨디션이 좋았다고 여기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한지우에게 가이딩받은 에스퍼들 대부분 그런 말을 해대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한 연구원이 끈질기게 한지우를 붙들고 재측정을 해보자고 했고, 해서 나쁠 건 없었기에 한지우 또한 가볍게 승낙한 것이다.
그랬는데 여기서 잭팟이 터질 줄이야.
몇 번이나 재검사를 했지만 그때마다 등급은 S급이 떴다.
한지우가 S급에 버금가는 A급이라는 말을 듣긴 했어도 절대로 S급은 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이들은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눈을 부릅떴다.
곧바로 협회장에게 알려야 한다고 난리 치는 이들을 말린 것은 한지우였다.
한지우가 등급에 목숨 걸었던 건 협회 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말이다.
아무튼 혹시나 일시적인 현상은 아닌지 파악하기 위해 며칠 정도는 기다려 보자는 말에 소태를 씹는 듯한 심정으로 며칠을 기다렸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한지우의 등급은 여전히 S급으로 측정되었고, 가이딩 효율 또한 말도 안 되게 좋았다.
또 다른 S급 가이드의 탄생이었다.
“허어……. 정말, 정말 놀랍군…….”
설명을 모두 들은 협회장은 애써 평정심을 찾으려 했지만, 놀란 표정은 수습이 되지 않았다. 작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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