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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39화 (39/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39화

소파 앞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놓인 리모컨을 든 하진은 TV를 틀었다. 소음을 위해서였으니 채널은 상관없었다.

TV에서 나오는 소음으로 정적을 치운 하진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이제는 알파 팀 전체가 움직이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서 그런지 괜한 걱정이 들었다.

멍하니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던 그때였다.

삐-!

“……깜짝이야.”

아까와 다를 것 없는 호출음이 하진의 주머니에서도 울렸다. 진동으로 해놓아도 호출만큼은 그걸 무시하고 시끄러운 소리로 울렸다. 깜짝 놀라 벌렁거리는 심장 부근을 꾹 누른 하진이 호출을 확인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까지 호출이 온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긴급 호출 S급 에스퍼 폭주…….”

순간 알파 팀의 얼굴들이 떠올랐으나 숙소를 나선 지 삼십 분도 안 된 그들일 가능성은 낮았다. 게다가 빵빵하게 가이딩까지 받고 갔으니 그들일 리는 없었다.

하진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행이라고 여기며 겉옷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교육장에서 만난 후 협회 차량을 타고 폭주 현장으로 향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한차례 폭주 에스퍼를 마주한 적이 있는 하진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나중엔 반쯤 뛰어서 도착한 하진은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량은?’

급한 사안인 만큼 준비가 먼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차량은 물론이고 직원도 없어 의아하게 여기던 차였다.

“하진 형도 가세요?”

“한지우 씨.”

숨을 완전히 고른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출을 받고 왔는데 차량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오고 계세요. 말하기 무섭게 오네요.”

새까맣게 선팅한 차 한 대가 그들의 앞에 멈춰 섰다. 한지우가 먼저 오르고 하진이 뒤를 따랐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운전이 조금 거칠어도 양해 바랍니다.”

“물론이죠.”

한지우의 대답에 맞춰 하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통수를 살짝 박을 정도로 빠르게 출발한 차량에 하진은 안전벨트를 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다른 가이드들은 가지 않는 건가요?”

대답은 한지우에게서 돌아왔다.

“낮은 등급은 소용이 없어요. 오히려 다치기만 할 거예요. 사실 형이 있으니 저도 갈 필요는 없는데 협회에서 만일을 대비해 저도 불렀나 봐요.”

“그런 거군요.”

차는 그러고도 한참을 달렸다. 도심을 지나고 고속도로를 달려 점점 산길이 나타났다.

‘이런 곳에도 던전이 터지는군.’

벌써 몇 시간을 달려 해가 지고 말았다. 그리고 드디어 차가 멈췄다. 하진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주변을 연신 살폈다. 어딘가 이상했다.

“……이곳이 맞는 겁니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진은 던전이 생겨난 곳에 협회 직원들이 얼마나 많이 포진하는지 한 번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차로는 갈 수 없어서 잠시 멈춘 것뿐입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하는 직원에 하진은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폈다. 저 말을 믿지 않았다.

에스퍼가 폭주 중이라면 아무리 먼 곳에 있다고 해도 폭음이 들려야 했다. 그런데 이 산에선 폭음은커녕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차하면 데리고 튀어야겠군.’

하진은 한지우를 힐끔 살피고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온 길을 되돌아 도망가 봤자 금방 붙잡힐 게 분명했다.

‘위험하더라도 산길을 타야 하나…….’

“저는 잠시 상황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얌전히 계십시오.”

도망갈 타이밍을 재고 있던 하진은 갑자기 자리를 비워주는 직원에 당황했다.

도망가더라도 잡을 자신이 있는 건지, 정말 근처에 폭주 에스퍼가 있는 게 맞는 건지 헷갈렸다.

‘아냐. 나중에 생각해. 일단은 자리를 뜬다.’

잠시 헷갈릴 뻔했던 하진은 다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갑자기 자리를 비운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직원의 행동이 수상쩍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하진은 직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입만 움직여 한지우에게 말을 걸었다.

“한지우 씨. 상황이 뭔가 이상합니다.”

“네?”

“에스퍼가 폭주했다는데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잖습니까. 저 사람이 좀 더 멀어지면 저희도 도망치죠.”

“왜요?”

그 대답에 하진이 한지우를 돌아보기도 전이었다. 하진 쪽에 있는 문이 열리더니 이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 자기야.”

하진은 그제야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들을 깨달았다.

한지우는 그보다 경험이 더 많으면 많았지, 없을 리가 없는 사람인데 그런 그가 하진도 느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 그가 조용한 것부터를 수상하게 여겼어야 했는데.

“……손을 잡은 겁니까, 아니면 원래 저쪽 인간이었던 겁니까.”

“그걸 그쪽이 알면 뭐 어쩌게.”

한지우를 돌아보자 그는 다시 처음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그에 하진은 헛웃음보다는 감탄이 먼저 나왔다. 저 정도 연기력이면 속지 않는 게 귀신이고 무당일 터였다.

“……한지우 씨는 연기를 해도 잘하겠네요.”

“칭찬으로 듣지.”

전혀 칭찬으로 듣지 않는 얼굴로 대답한 한지우는 서주안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야, 빨리 가지고 꺼져.”

“끝까지 까탈스럽다니까.”

너스레를 떤 서주안이 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하진 스스로 그를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하진이 모든 것을 비뚤게 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마치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민 채 살랑살랑 웃고 있는 얼굴은 도무지 착각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반항은 하지 말자. 물론 내가 자기를 다치게 할 리는 없지만……. 저쪽은 또 모르지.”

서주안이 시선으로 가리킨 곳에는 기절한 운전수가 있었다. 하진은 이를 악물었다. 가이딩으로 재우는 것도 섣불리 행할 수 없었다.

서주안의 능력도 능력인 데다가 가이딩이 통하지 않는 한지우라는 협력자가 함께 하니 말이다. 하진은 눈을 감고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 쏘아붙였다.

“내리게 좀 비키시죠.”

“아아, 기껏 손도 내밀고 기다렸는데 무시하는 거야? 나 슬퍼.”

‘슬프든가 말든가.’

도망칠 수 있을 리는 없지만, 순순히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지도 않았던 하진은 내민 손을 무시했다.

하진은 상처받은 척하는 서주안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고 누군가를 찾았다.

“저 녀석 찾아? 저기 있네. 저어기.”

어떻게 알았는지 서주안이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킨 덕에 하진은 차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쓰러진 직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진은 적어도 속은 게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협회의 경계가 이렇게 쉽게 뚫렸다는 것에 통탄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이제 확인 다 했으면 갈까?”

“뭘 산책하고 돌아가는 것처럼 말합니까?”

날카롭게 튀어나온 말에도 서주안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하진은 그 얼굴은 같은 표정으로 고정이라도 된 거냐고 비꼬려다가 말았다.

그렇게 해봤자 처지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겁을 먹었다는 방증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됐습니다. 가죠.”

노려보는가 싶더니 이내 한숨을 쉬고는 순순히 협조하기 시작하는 하진에 서주안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흠, 협박을 하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도 순순하네? 그래, 그래. 협회가 뭐라고 했는지 몰라도 우리 쪽도 괜찮거든. 거친 애들이 있긴 한데 그런 애들이야 뭐 자기한테 아무런 쪽도 못 쓸 거고.”

“착각은 하지 마시죠. 내 마음이 바뀐 게 아니라 쓸데없는 힘을 빼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내 에스퍼들이 구하러 올 테니까.

마지막 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그러나 서주안은 마치 뒤에 이어질 말을 들은 사람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쾌해했다.

“그사이에 많이 친해졌나 보네? 쯧.”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서주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러나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렇게 쉽게 찾을 순 없을걸?”

조금은 냉소적인 목소리가 이어지고 다시 서주안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렸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하진은 그 웃음이 마치 가면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서주안은 그런 하진과 눈을 맞추며 진하게 웃은 뒤, 그를 안듯이 붙들고 모습을 감추었다.

고작 두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 사방이 고요해졌다. 들리지 않았던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바람에 나뭇잎이 나부끼는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그 속에서 한지우는 조용히 전율했다.

“드디어…….”

한지우는 서주안과 함께 사라진 하진의 빈자리를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감격을 억누르기 바빴다.

단순히 감격이라고 표현하기엔 추잡스럽고 저열했다.

드디어 하진을 이겼다는 우월감과 눈엣가시나 다름없는 그를 치워버렸다는 만족감에 취할 것만 같았다.

“아니지, 아니야. 여기서 끝이 아니지.”

한지우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 꾹 참아내고 차에서 내려 운전석으로 향했다. 다시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꾼 한지우는 내리막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바퀴를 돌리고 내렸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 같던 차가 점점 기울어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속도를 받더니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자동차가 땅에 처박히는 커다란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폭발이 일어나며 한지우가 서 있던 땅을 뒤흔들었다.

협회에서 나온 모든 차량에는 블랙박스뿐만 아니라 녹음기와 위치추적기까지 달려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모든 걸 처리하려면 차량 자체를 터트리는 수밖에 없었다.

“후우…….”

그러나 한지우는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를 맞으며 한지우는 스스로 바닥을 굴렀다. 돌멩이에 긁히고, 박은 무릎이 아플 법도 한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만족할 수준까지 구른 그는 차가 원래 있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엎어져 누웠다.

차갑고 축축한 흙바닥이 얼굴은 물론이고 옷을 점점 적셔가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잠이라도 잘 것처럼 눈을 감았다.

‘이걸로 날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죽기 살기로 도망을 치려다가 다쳐서 기절한 가이드가 반정부와 손을 잡고 하진을 넘겼다고 의심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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