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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38화 (38/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38화

하진의 요즘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보장된 개인 시간과 차진우와 어딘가 다녀오더니 적당한 선이라는 걸 지키게 된 에스퍼들까지 평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혀엉, 오늘은 나가지 말고 나랑 놀면 안 돼?”

“야, 이도윤. 대가리도 큰 게 어디 형 어깨를 짓눌러? 떨어져.”

“뭐라는 거야. 형 머리보다 내 머리가 더 작거든?”

자신을 사이에 끼고 다투는 것쯤이야 이제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모처럼 숙소에는 알파 팀 네 사람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널찍한 소파가 좁게 느껴졌다. 하진은 차진우가 타 준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그럴까요.”

“진짜?”

이도윤은 하진이 숙소에 있겠다고 대답하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하더니 얼굴을 활짝 폈다.

그 모습이 마치 부모와 오랜만에 주말에 시간을 보내는 어린아이가 떠올라서 하진은 자신이 너무 그동안 제 생각만 했는지 반성했다.

숙소에 남겠다는 말에 기뻐한 것은 이도윤뿐이 아니었다.

옆에 찰싹 달라붙어 남은 손을 조몰락거리고 있던 백자안은 물론이고, 자리가 없다면 다른 소파에 앉으면 될 텐데 굳이 하진의 뒤에 서 있는 한승호까지도 얼굴에서 그 감정이 다 티가 났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차진우까지 무뚝뚝한 얼굴에 미소를 걸쳤다.

그는 그날의 일이 있고 난 후, 마치 배부른 사자처럼 어린 에스퍼들 사이에 끼지 않고 관망하듯 굴었는데 그러면서도 하진과 눈이 마주칠 때면 눈을 접어 웃으며 잘생긴 얼굴을 십분 활용했다.

지금도 그와 시선이 마주친 하진은 해맑은 이들과는 달리 여유로우면서도 느른한 미소를 짓는 차진우의 시선을 피했다.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했다. 왜냐면 그 미소가 꼭 하진의 위에 올라탔을 때 지었던 미소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 젠장.’

또 떠오른 잔상에 하진이 커피 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표정을 관리한 다음에야 잔을 내려놓은 하진은 뭘 할 건지 물었다.

“저는 그냥 이렇게 있어도 좋지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진은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체력이 넘쳐나서 탈인 이들이 있으니 어디든 나가거나 뭐라도 하려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나도 좋아.”

한승호를 시작으로 다른 이들도 숙소에 남아 있어도 좋다는 의견을 낸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승호는 나가려 할 줄 알았던 터라 하진은 좀 많이 놀란 상태였다.

“……표정이 왜 그래?”

한승호의 지적에 그제야 표정을 고치고 대답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끼어든 이가 있었다.

“형이 그동안 했던 행동들을 생각해 봐. 그동안 그렇게 사람을 귀찮게 굴었으면서 갑자기 얌전해 구니까 하진 형이 놀란 거지.”

하진의 어깨에 기댄 고개를 돌려 한승호를 바라본 이도윤이 얄밉게 말했다. 비아냥거리는 말에 한승호의 목소리도 곱지 않았다.

“네가 형이냐? 왜 지레짐작으로 대답하고 지랄이야.”

아직 모든 성격을 파악한 건 아니지만, 한승호의 입에서 욕이 나오기 시작하면 열에 아홉은 시끄러워지는 걸 깨달은 하진은 그 사이에 끼어들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형이 집에 있는 걸 좋아하니까 나도 있으려는 거야.”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던 한승호가 화를 삼키듯 숨을 한 번 내쉬더니 욕도 섞지 않고 얌전히 대답한 것이다.

한승호가 화를 참다니. 그와 오랜 시간을 보낸 에스퍼들은 물론이고, 숙소 생활을 그리 길게 하지 않은 하진마저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뭘 보는데.”

제게 몰린 시선에 한승호가 당황했다.

“승호 형,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갑자기 그렇게 정상인처럼 굴 필요 없어.”

“뭐 인마?”

이도윤이 또 자신을 놀려먹는다고 생각한 한승호가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았으나 놀랍게도 이도윤은 진심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도윤이도 그렇고 자안이 너도 앞으로 승호 적당히 건드려라.”

“네…….”

저게 더 그를 화나게 했다. 사람이 기껏 얌전하게 구는데 말이다. 더 짜증나는 건 저것들이 다 진심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백자안. 저 또라이는 진심으로 자기가 너무 건드려서 한승호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부글부글 끓는 속에 안 하던 짓은 집어치워 버리려고 할 때였다.

“저는 좋은데 왜 애를, 아니 사람을 놀리고 그러세요.”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음성에 부글부글 끓던 속이 가라앉았다. 하진이 한승호의 편을 든 것이다.

하진은 저들이 진심으로 한승호를 걱정하고 있는 줄 모르고 놀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렴 어떤가. 하진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데.

한승호는 흐물흐물 풀어져선 제멋대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들고 뒤에서 끌어안다시피 하며 하진에게 칭얼거렸다.

“형, 역시 형밖에 없어.”

웃음을 한계까지 참아내자 오히려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안쓰러움을 더하는 부가 효과를 가지고 왔다.

그에 하진은 한승호가 제 생각보다도 마음이 여리다는 크나큰 착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하진으로선 착각할 수밖에 없는 게 예전엔 백자안에게만 키스를 해줬다고 대놓고 서운해하지 않았던가. 그 기억이 있는 하진이 그런 오해를 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래요?”

비록 달래는 수준 또한 유아틱해졌으나 한승호는 아무래도 좋았다.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애새끼들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음은 물론이고, 어쩐지 자꾸 여유롭게 굴며 신경을 살살 긁던 팀장 또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처음으로 인상을 굳혔기 때문이다.

“응, 먹을래.”

“지갑만 가지고 올게요.”

“내가 사면 되는데.”

“사주겠다고 했는데 얻어먹을 순 없죠.”

하진이 이젠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겉옷을 가지러 갈 때였다.

삐-! 삐-! 삐-!

동시다발적으로 울리는 소리에 하진의 어깨가 들썩였다. 놀란 얼굴로 뒤돌아보자 알파 팀 전체가 제각기 불만스러운 얼굴로 호출을 확인하고 있었다.

‘저런.’

하진은 안쓰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임무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호출이란 말인가.

게다가 팀 전체가 받은 호출이면 일전의 하진이 휘말렸던 던전처럼 민간인이 많이 엮여 있거나, 난이도가 높은 임무일 게 분명하니 더욱 안쓰러웠다.

“아! 뭔 또 임무야!”

이도윤의 짜증 섞인 외침을 시작으로 알파 팀은 제각기 불만을 드러냈다.

특히나 하진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러 갈 생각에 잔뜩 들떴던 한승호는 입까지 꾹 다물고 온몸으로 화를 참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임무에서 돌아온 지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았다. 하진과 떨어져 있었던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었는데 망할 호출이 그걸 방해한 것이었다.

“팀장, 이번 임무 끝나면 휴식 시간을 보장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평소 호출에 관해 큰 불만을 가지지 않던 백자안도 하진과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퍽 기분이 상했는지 고운 미간이 구겨져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차진우도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임무도 좋지만, 하진의 마음을 사로잡으라며 협회장이 직접 알파 팀의 임무를 한동안 막은 것이다.

‘뭔가 이상한데.’

에스퍼들은 가이드와 관련되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이상하다는 느낌만으로 호출을 무시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단 호출에 응해야 했다.

“후, 그만 투덜거리고 준비해라.”

“하아…….”

팀원들을 보낸 차진우는 하진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호출이 오는 바람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보다는 여러분이 고생이죠.”

하진은 진심으로 그들을 안쓰럽게 여겼다. 따지자면 휴가 중인데 급한 일이 터져서 다 취소하고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 끔찍했다.

차진우는 다시금 울리는 호출에 미간을 슬쩍 찌푸리더니 본인도 정복으로 갈아입으러 갔다.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알파 팀은 현관 앞에서 뭉그적거렸다.

“별일 아니기만 해. 그냥 다 뒤집어엎어 버릴 거야.”

특히나 아쉬움이 더욱 크게 남은 한승호는 하극상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핀잔 하나 주지 않았고, 하진 또한 별말 하지 않았다.

다만 하진은 반장갑을 착용해 드러난 손가락을 붙잡고 가이딩할 뿐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 뭉친 응어리를 매만지는 것 같은 가이딩이 흘러들어오자 불만으로 구겨졌던 한승호의 미간이 깨끗해졌다.

“으으, 역시 좋아.”

눈을 감고 흘러들어오는 가이딩을 만끽하던 한승호가 참지 못하고 하진을 꼭 끌어안았다. 마음 같아선 꽉 끌어안고 싶은데 하진이 부러질까 싶어 최대한 가볍게 끌어안는 게 착하다면 착했다.

그런 한승호의 마음이 기특해 하진은 등을 몇 번 토닥이며 잠시 얌전히 안겨 있어 주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질투에 못 이기고 한승호를 떼어낸 후에야 하진은 다른 이들에게도 가이딩해 주었다.

잠들지 않을 정도로만 넉넉하게 가이딩한 하진은 아까보다 한결 기분이 좋아진 에스퍼들을 배웅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아이스크림 올 때 내가 사올까? 아니지. 나 다녀오면 같이 사러 가.”

“하진 형, 다녀올게요.”

“협회에 부탁해 숙소 주변을 더 경계하라고 해두겠습니다.”

마지막 차진우의 말에는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괜히 신경 쓰게 했다간 오늘 안에 숙소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것 같아서 그저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하진은 숙소에만 있을 생각이니 주변 경계쯤은 상관없으리라.

에스퍼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숙소는 무척이나 넓게 느껴졌다. 게다가 어쩐지 아무런 소음도 없으니 조금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하진은 이 광경과 정적이 더 익숙한데도 불구하고 어색함을 느끼는 자신에 픽 웃어버렸다.

귀찮다고 생각했어도 그들의 존재에 익숙해져 버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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