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36화
하진의 얼굴에 솔깃함이 서리기 시작하자 이도윤이 사색이 되어 달려와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혀, 형! 내가 잘못했어요, 응? 당연히 놀러 다니고 할 수 있지. 그렇죠, 팀장?”
이도윤의 헬프 요청에 차진우 또한 다가와 하진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굳은 근육을 풀어내는 손길에 조금씩 몸에 힘이 풀렸다.
“당연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하진 씨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욕심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렇지. 형이 좋아서 그런 거니까 너무 화내지 마라, 응?”
차진우가 부지런히 안마하고, 이도윤이 열심히 애교를 부리는 상황에 하진은 그만 작게 웃어버렸다.
덩치는 산만 한 사내들이 제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고 이렇게 죽을 듯이 구는 게 나쁘지 않았다.
하진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흘러나온 웃음소리를 들은 이도윤이 재빠르게 쐐기를 박았다.
“형, 이제 화 풀린 거지? 나 안 미워할 거지?”
애 취급당하는 건 싫지만, 하진이 가장 어린 제게 유독 약하다는 걸 이용할 줄 아는 이도윤은 예쁜 얼굴을 갸웃갸웃 이리저리 움직이며 하진에게 끼를 부렸다.
그 노력이 가상했는지 하진은 이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땐 정말 진지하게 숙소 이동을 고려할 겁니다.”
이도윤의 고개가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하진이 숙소를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지 놀란 기색이 여전했다.
“그럼 이제 도넛이나 먹죠. 진우 씨도 드시나요?”
어깨를 주무르는 것은 멈췄지만, 손을 떼지 않고 있는 차진우를 돌아보며 말하자, 한 박자 늦게 차진우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아, 하진 씨가 주신 거라면 뭐든.”
생각에 잠겼던 것 같은데 하진이 물어볼 만한 건 아닌 것 같아 그는 도넛 상자와 세 사람 몫의 접시를 챙겼다.
그런 하진과 그 뒤를 졸졸 따르는 이도윤을 지켜보며 차진우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무래도 한번 날을 잡아야겠군.’
알파 팀의 팀장이기도 하고 그나마 말이 통하는 차진우는 다른 팀원들에 비해서도 유독 협회에 많이 불려 다녔다.
불만은 없었다. 그가 생각해도 그의 팀원들은 말이라고는 지지리도 듣지 않는 애새끼들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그것 때문에 하진이 스트레스를 받고 숙소를 옮길지도 모른다는 선택지까지 떠올리게 된 이상, 차진우는 이 사태를 마냥 손 놓고 지켜볼 수 없게 되었다.
차진우는 협회에 적당한 날짜를 통보하기로 생각하며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단 걸 즐기지는 않지만, 하진이 준 것이라면 그게 뭔들 먹지 못하겠는가.
* * *
한 번 화를 낸 게 효과가 있었는지 그날 이후, 알파 팀은 과하게 하진의 곁에 맴도는 것을 그만두었다.
한승호와 백자안이 임무에서 돌아오고 차진우가 알파 팀 전원을 데리고 어딘가에 다녀온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
물론 팀원들의 불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진의 으름장을 직접 보지 못했던 한승호와 백자안은 저들이 한 짓은 생각도 않고 왜 이도윤이 하진 형을 화나게 했는데 피해는 자신들이 같이 봐야 하는지 투덜거렸다.
물론 그 투덜거림은 차진우의 기합과 이도윤의 진짜 양심은 어디다 팔아먹었냐는 팩트 폭행으로 인해 얼마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덕에 하진의 스트레스 수치 또한 나날이 쭉쭉 내려가는 중이었다.
체력 단련을 핑계로 교육장에 들렀다가 느긋하게 산책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그런 시간들을 편하게 누리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저녁은 꼭 함께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도윤의 애교 아닌 애교 섞인 말에 저녁 전에는 꼭 숙소로 돌아가지만, 그 정도 애교는 받아줄 수 있었다.
‘오늘은 서점을 들를까.’
이제는 카페에서 그냥 멍하게 있는 것도 점점 심심해지던 차였다. 하진은 젖은 머리를 말리며 순식간에 이후 일정을 정리했다.
“그, 안녕하세요.”
이제는 눈인사 정도는 주고받게 된 이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하진은 교육장을 빠져나갔다.
‘한지우?’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었다.
그들 사이에서 한지우는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다녔는데 지금의 그는 주눅 들지는 않았지만, 홀로 외롭게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건 하진의 마음이 쓰여서일까.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하진의 영향이 없었을 거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하진은 잠시 고민했다. 한지우를 부를 것인가, 말 것인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일전에 이런저런 동네 정보도 얻고, 식사까지 얻어먹었는데 그걸 갚지 않고 넘어가자니 찝찝했던 탓이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몇 번인가 마주쳐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눈 기억들도 하진의 발을 붙잡았다.
서점에 갈 것인가, 한지우를 불러 그에게 뭐라도 사 먹이고 티끌만 하더라도 남아 있는 마음의 빚을 없앨 것인가.
‘그렇게 오래 같이 있지는 않을 거니 괜찮겠지.’
그렇지 않아도 알파 팀이 자꾸 자신이 혼자 다니는 것을 불안해하는 듯하니 오늘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도 좋을 듯했다.
결정을 마친 하진은 한지우를 놓칠세라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한지우 씨.”
“어? 형! 안녕하세요. 운동 마치고 가는 길이세요?”
한지우는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는 듯 밝은 얼굴로 하진을 맞이했다.
“예. 혹시 시간 괜찮습니까? 예전에 식사를 얻어먹었으니 이번엔 제가 사고 싶은데요.”
하진의 질문에 한지우는 눈을 크게 떴다. 단순히 식사 제안에 보이기는 과한 반응에 하진이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 죄송해요. 형이 저한테 그런 제안을 해주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저는 좋아요!”
이미 한 번의 성공을 경험한 적 있는 하진은 메뉴 선정은 전적으로 한지우에게 맡겼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하진을 이끌고 파스타 가게로 향했다.
“먹고 싶은 걸로 시키세요.”
“저 많이 먹는데 괜찮으세요?”
하진은 기껏해야 스물 몇밖에 먹지 않은 이가 대신해 주는 돈 걱정에 그만 작게 웃어버렸다.
“그런 거 신경 쓸 나이는 아닌 것 같네요. 먹고 싶은 걸로 시켜요.”
“와, 형 대박 멋있으세요. 그럼 저 피자도 먹을래요.”
하진이 웃어서 그런지 한지우는 좀 더 그를 편하게 여기게 된 듯했다.
한지우는 이전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아무래도 이전의 적당한 침묵은 하진이 어려워 나온 반응이었나 보다.
하진은 그의 말을 적당한 리액션과 함께 받아주었다. 말이 조금 더 늘었다고 해도 한지우는 나쁘지 않은 대화 상대였다.
여전히 개인적인 주제는 꺼내지 않고, 주변 상황이나 자신의 일상에서 대화 주제를 찾았다.
“그래서 요즘은 운동량을 더 늘려야 하나 고민이에요.”
어느새 대화는 파스타를 맛있게 먹다가 돌연 한숨을 쉬며 살이 쪘는데 이런 걸 먹고 있다고 한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하진은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한지우의 몸을 훑었다.
“지금도 충분히 몸 좋아 보이는데요.”
“하하, 빈말이라도 감사해요.”
빈말이 아니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한지우의 몸은 체력 단련실에서 자주 보는 이들과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아예 대회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운동하는 이들에 비할 건 아니지만 하진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생각했다.
“살을 뺄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요.”
하진의 질문에 한지우가 조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관계로 가이딩해야 할 때는 체력이 진짜 중요하거든요.”
가게는 점심 시간대가 지나서 한적했다. 식사 중인 이들이라곤 두 사람밖에 없었지만, 막상 한지우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그래서 더 목소리를 줄였어야 했다는 걸 납득했다.
“가이딩도 빨리는데 몸까지 고생하니 까딱하면 가이딩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기절할 때가 많아서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
하진은 민망함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같은 직종(?)이라지만, 그런 은밀한 부분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굳이 되물었던 건 하진이었기에 그는 최대한 티 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리고 곧 하진은 티 내지 않았음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가 같은 가이드여서 그런지 한지우가 좀 더 편하게 여기고 이런저런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진짜 힘들지 않아요? 아, 형은 아직 안 해보셨겠군요.”
“아…… 그렇죠.”
“해보셨어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하진은 잘 대답했다고 생각했는데 대답이 끝나자마자 들켜버려 당황스러웠다.
“와…… 형 정도 되는 등급이면 안 해도 되실 텐데요.”
“그게 아니고요.”
틀렸다. 이미 한지우는 하진을 보기보다 개방적인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았다.
하진은 이런 대화 자체도 처음이고, 심지어는 그 상대가 친한 사이도 아닌 것에 한껏 당황해 평소와 달리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진은 괴로웠다. 변명을 하자니 그게 또 사실이긴 했다. 그런데 자신의 이미지가 이상하게 변질되는 건 억울했다. 이걸 또 변명하자니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 싶었다.
이런 기분이 처음인 하진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다가 이윽고 모든 걸 해탈한 사람처럼 놓아버렸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굳이 해명해봤자 자신의 꼴만 더 우스워지는 셈이었다.
그리고 한지우는 하진이 당황하다 말고 표정을 가다듬자 여기까지가 선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흠흠, 저번에 들렀던 도넛 가게는 괜찮으셨어요?”
“네. 맛있더군요.”
이도윤이 거의 혼자서 한 상자를 다 먹었을 정도였다.
임무로 바쁘고 쉬는 날에도 집에만 붙어 있어서 그런지 하진보다도 오래 살았으면서 그런 가게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게 안쓰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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