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35화
서주안은 마치 한지우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분명 협회에선 S급 가이드가 사라지면 난리가 나겠지. 그러나 협회 놈들은 절대 우리를 못 찾아. 그렇게 쓸데없이 시간만 버려가겠지.”
한지우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다 안다는 듯한 말이었다. 듣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서주안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방 안을 배회하며 서주안이 한지우와 시선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그런데 그때! 새로운 S급 가이드가 나타나는 거야.”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한지우의 눈앞에 그 광경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서주안이 오기 전에도 이미 자주 하던 상상이었으니까.
서주안은 여전히 협회를 두려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희열을 느끼는 한지우에게 쐐기를 박았다.
“네가 원한다면 계약서도 쓸 수 있어. 나를 포함해 이 거래를 아는 반정부 측 인사들은 너와 한 계약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겠다는.”
그 말에 완전히 흔들리는지 한지우의 눈동자가 주체하지 못하고 떨렸다. 그렇지 않아도 가장 신경 썼던 문제였다.
한지우가 협력한다고 해도 저들이 먼저 배신하면 그 죗값은 모조리 그가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계약서까지 쓰겠다고 하니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순한 법적 효력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정부에 반하는 놈들이 법을 지킬 리도 없다.
서주안이 말하는 계약서란 특수보조 계열 에스퍼가 만든 것으로 그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이수하지 않으면 저주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계약서의 등급 또한 중요한데…….
“물론 계약서는 S급이야.”
한지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조작이 불가능한 인증 마크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진짜 S급 계약서였다.
“……그런데 그 약이 진짜 가이딩 등급을 높여준다면 너네 가이드한테 먹이면 되는 거 아닌가? 왜 굳이 날 찾아온 거지?”
서주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반정부 측에 가이드가 풍족할 거라고 생각해?”
아니었다. 정부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가이드를 갈퀴로 긁어모으다시피 하고 있고 또한 해달라는 것도 다 해주니 굳이 이 안락함을 버리고 반정부 측에 넘어갈 가이드는 없었다.
“물론 있기야 하지. 정부 놈들이 상대적으로 덜 신경 쓰는 하급들은 슬쩍 납치…… 아, 실수. 스카우트 해와도 별문제도 없거든. 그런데 상급은 다르단 말이지. A급은 고사하고 B급도 아쉬운 마당에 어떻게 함부로 약을 먹여보겠어.”
“하, 그래서 나는 뒤져도 괜찮은 새끼니까 먹어보라 이거냐?”
사나운 대답에 서주안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삐딱할까. 설마 먹고 뒤지는 걸로 내가 거래를 하려 들겠어? 성공 확률은 80퍼센트야. 성공 확률이 더 높지.”
“그럼 너네 가이드한테 먹이면 되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그 20퍼센트의 확률에도 벌벌 떨어야 할 만큼 인재가 없거든. 게다가 B급이 먹어서 성공해봤자 A급밖에 안 되는데 아쉽게도 이 약은 두 번은 못 먹어. 그러니 우리 쪽에선 먹을 만한 사람이 없다 이거지.”
잠시 입을 다문 서주안은 여기까지 와서도 망설이는 한지우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 않을 거라면 빨리 결정하지 그래? 나도 여기 있는 게 편하지만은 않거든.”
이미 마음은 기울었지만, 일말의 작은 양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망설이던 한지우가 괜히 괴롭히던 입술을 놓고 대답했다.
“……그냥 쳐들어오는 새끼가 구라 치고 있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자.”
“마지막이라니 다행이네. 뭔데?”
비아냥에도 한지우는 화조차 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지우는 머뭇거리던 입술을 열었다.
“확률이 80퍼센트라면 A급을 납치해도 될 텐데, 그리고 그편이 훨씬 쉬울 텐데 왜 내게 약을 넘기고 그 사람을 데려가려고 하는 거지?”
영 멍청하지만은 않네. 서주안이 시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편이 더 편하지.”
그는 한지우의 의문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연극 무대 위 배우의 움직임 같았다.
“그런데…… 협회 놈들이 두 눈 부릅뜨고 있는 곳에서 S급 가이드를 데려가면 그 새끼들이 얼마나 열불이 나겠어. 이왕 할 거라면 상대를 좀 더 화나게 하는 쪽이 좋지. 아, 그리고 이하진 가이드 얼굴이 내 취향이기도 하고. 몸도 내 취향일 거 같은데 어떠려나.”
뒤바뀐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한지우는 마지막에 이어진 말에 맥이 탁 풀렸다.
저런 놈에게 겁먹고 긴장했다는 게 괜히 억울해서 그는 욕을 지껄였다.
“시발, 네놈 취향 같은 건 안 궁금해.”
“이유를 물어봐 놓고는……. 어쨌든 난 네가 묻는 거에 다 대답했어. 이젠 결정해. 더는 시간 안 줄 거니까.”
끝의 끝까지 망설이고 고민했으면서 막상 결정해야 할 때가 오자 한지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 계약, 하자.”
결연한 표정을 마주하며 서주안이 환하게 웃었다.
“탁월한 결정이야.”
* * *
처음엔 서주안이 사라지자마자 그와 손을 잡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지우는 결국 그 계약을 무르지 않았고, 협회를 배신한다는 죄악감과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다.
겉보기와는 달리 한지우는 겁이 많았다. 그렇기에 이번 일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한지우는 누가 보지 않아도 기가 죽은 것처럼 얌전히 굴었다.
목표는 하진이었으나 한지우가 속여야 하는 것은 협회 전체였다.
하진이 사라지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사람은 한지우였다. 당연한 의심이었다.
하진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언급만으로도 그를 경계했고, 굳이 그를 찾아가 비아냥거렸으며 그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등 미워하는 티는 다 냈으니 말이다.
그러니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됐다. 하진의 경계를 풀어 협회 내의 사람들도 더는 그가 하진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야 했다.
물론 하진에게 방긋방긋 웃고, 그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살랑거리고 돌아온 후에는 이렇게 구역질을 해대고 있지만, 목표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는가.
한지우의 손이 무의식중에 가슴팍에 숨겨둔 약통으로 향했다.
* * *
한편 한지우가 추천해준 도넛 가게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는 하진은 느른함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어색하다는 이유로 한지우를 피한 게 무색하게끔 지금 이 여유를 백이십 퍼센트 즐기고 있었다.
어느 정도로 마음에 들었냐면 사적인 만남은 잘 가지지 않는 하진이 다음엔 한지우가 먼저 식사 요청을 하면 거절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진은 딱히 무언가 하지 않았다.
혼자서 뭘 하기 위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원한 게 아니라 그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적당한 백색 소음에 갇혀 있는 걸 즐겼다.
커피 한 잔을 느긋하게 해치울 시간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본 하진은 마침내 커피가 바닥을 드러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도윤이 말했던 도넛은 물론이고 다른 세 사람에게 줄 것까지 양손에 한가득 도넛 상자가 든 봉투를 쥔 하진은 숙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부리나케 이도윤이 튀어나왔다.
“형!”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하진이 혹시나 하며 도넛 상자를 내밀자 이도윤이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그거겠냐고! 연락은 왜 안 받아?”
“연락이요?”
그제야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살피자 부재중 통화가 10건 정도 찍힌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진은 그 숫자에 조금 떨떠름해졌다. 자신이 세 살도 아니고 앞자리가 3으로 시작하는데 놀고 들어가겠다는 것만으로 이게 무슨…….
연락을 남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데 돌아오는 게 조금 늦어졌다고 이렇게 닦달을 당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이도윤.”
차진우가 엄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이도윤이 어깨를 찔끔하는 듯했으나 꿍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전화도 안 받아서 얼마나 놀랐는데. 게다가 나는 그냥 보내놓고 다른 놈이랑은 놀아주고…….”
잠시 기분이 상했던 하진은 그 중얼거림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려던 화도 사그라졌다.
“진동으로 해둔 데다가 양손이 비지 않아서 연락한 줄도 몰랐네요.”
양손에 쥔 봉투를 들어 보인 하진이 부엌에 가져다두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 그 반응에 오히려 불안해진 이도윤이 뒤를 졸졸 쫓았다.
“내가 소리 질러서 화났어……? 미안해요, 형. 나는 그냥 걱정도 되고, 서운해서…….”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면서 주변을 졸졸 맴도는 게 딱 잘못한 어린애 꼴이라 하진은 뒤돌아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하는 짓은 어린앤데 하진보다 머리는 하나 더 높은 곳에 있으니 조금 억울해졌다. 그도 작은 키는 아닌데 말이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내 나이가 서른둘입니다.”
하진의 말은 본격적으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도윤은 이미 잔뜩 혼난 강아지처럼 굴었다.
눈높이가 비슷해질 때까지 쪼그라든 그를 보다 하진은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을 줄이고 줄였다.
답답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누군가가 걱정해준 게 언제였는지를 떠올리면 감정만 앞서는 꼬맹이를 심하게 혼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난 이 나이까지 혼자 살아온 사람이고 또 그게 익숙한 사람입니다.”
“……숙소에서 나가서 살겠다는 건 아니지?”
“그런 뜻은 아니지만, 이 정도 자유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면 고려해 봐야죠. 마침 가이드 숙소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가이드가 모여 사는 곳이니 안전하기는 거기가 더 안전하겠죠.”
하진이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색이 된 이도윤을 놀려주기 위해 순간적으로 발휘한 기지였으나 막상 말하고 보니 괜찮은 생각이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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