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31화
그는 한승호와 백자안이 임무에 나갈 거라는 건 어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차진우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도윤과 하진의 둘만의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그동안 좀 더 하진이 제대로 자신을 신경 쓰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옷은 안 입습니까?”
“……입어요.”
이도윤은 어쩐지 험난한 길이 될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꾸역꾸역 옷을 입고 내려온 이도윤은 생각보다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가 챙겨주는 밥을 먹은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났다.
가슴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이도윤은 괜히 뒷머리를 털었다.
“이거 좀 놔주세요.”
어느새 국을 뜬 하진은 이도윤에게 국그릇을 내밀었고 그는 냉큼 달려가 그릇을 받았다.
시키는 대로 착착 그릇을 내려놓은 이도윤은 하진과 마주 앉아 수저를 들며 말했다.
“이러니까 신혼부부 같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저는 얼마나 양심 없는 사람이 되는 걸까요.”
헤실헤실 좋아하는 이도윤과 달리 하진은 상상만으로도 죄스러운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반응에 기분 좋게 웃던 이도윤이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보면 열댓 살은 차이 나는 줄 알겠네.”
하진은 아홉 살 차이도 사회에서는 욕먹을 나이 차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이도윤이 제대로 삐질 것 같아 참았다. 실제로 그들이 사귀는 사이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가 알았더라면 답답함에 비명을 질렀을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한 하진과 그 사실을 모르는 이도윤은 그렇게 평화롭게 식사를 마쳤다.
이도윤은 얼마 남지 않았을 이 시간을 어떻게 잘 써야 할지 의욕적으로 고민했다. 차진우가 복귀하면 둘만 있을 시간도 끝나버리니 이 순간을 놓쳐선 안 된다.
그는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하진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을지 생각하다가 일전에 하진의 선물로 샀지만, 여태 개시도 못 하고 있던 게임팩을 가지고 왔다.
“형, 같이 게임 할래요?”
“저는 게임을 해본 적이 없는데 괜찮겠습니까?”
오히려 환영이었다. 이도윤은 최대한 웃는 입꼬리를 끌어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재미로 하는 거죠, 재미로.”
“그렇다면…….”
하진이 고개를 끄덕인 것을 확인한 이도윤은 재빨리 게임 기계를 TV와 연결했다.
패드를 잡는 것조차도 어색한 하진과 달리 이도윤은 한 손으로 패드를 쥐고 게임을 고르는 것까지 능숙해 보였다.
“무슨 게임부터 할까요? 처음 하는 거니까 가볍게 할 수 있는 것부터 할래요?”
그렇게 고른 게임이 마x오 카트였다. 멀뚱멀뚱 패드를 양손에 쥔 하진은 이도윤의 설명을 최대한 알아들으려 했지만, 그게 맘처럼 쉽지가 않았다.
“일단 해보자고요. 원래 게임은 하면서 느는 거예요.”
“예…….”
과연 늘기는 할까. 하진의 솔직한 심정이었으나 이렇게 신나 하는 모습을 보니 섣불리 입을 떼는 것도 어려웠다.
‘몇 판만 하면 되겠지.’
그러나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시작했던 게임에 하진은 점점 몰입하기 시작했다.
“잠깐, 이거 어떻게 나가는 겁니까?”
“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윽, 이거 고장 난 거 아닙니까?”
막상 제 맘대로 되지 않고 아이템에 공격당하고 꼴찌만 하다 보니 울컥하는 마음에 욕심이 생긴 것이다.
오히려 생각 이상으로 집중하는 바람에 이도윤이 당황할 정도였다.
“형, 차라리 다른 게임 할까요?”
“아뇨. 좀 더 하죠.”
“으응…….”
하진에게 이런 승부욕이 있는 줄 몰랐던 이도윤은 괜히 게임을 하자고 했나 후회했다. 원래 계획은 적당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하진을 보면 거리감이 좁혀지기는커녕 이도윤을 이기겠다는 열기로만 가득했다.
‘평소엔 이러나저러나 별 반응도 없었으면서 승부욕이 있을 줄이야.’
패드를 힘껏 쥐고 코스를 도는 캐릭터에 맞춰서 어깨를 움찔거리는 모습은 어떻게든 이겨보겠다고 용을 쓰는 사람의 것이었다.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네.’
들키지 않게 눈으로는 하진을 구경하며 손가락만 움직이던 이도윤이 순간 실수를 하고 말았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하진이 드디어 역전에 성공했다.
하진은 자신의 캐릭터가 이도윤의 캐릭터를 스쳐 지나가 결승선에 통과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좋아했다.
그러나 이내 진한 회의감이 찾아왔다.
‘……내가 뭐 하는 거지.’
소리만 지르지 않았지, 온몸으로 좋아하던 하진은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몰입한 상태라는 걸 깨닫고 회의감에 주먹을 풀었다.
고작 게임이었고, 심지어 상대는 아홉 살이나 어렸다. 아무리 두 사람 간에 숙련도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어린 상대랑 게임 하면서 진심으로 이겨 먹으려 한 자신이 창피했다.
“와, 그걸 안 놓치고 들어가네.”
치켜세워 주려는 저 말에도 창피함을 느꼈다. 하진은 붉어지려는 얼굴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패드를 내려놓았다.
“크흠, 여기까지만 하죠.”
“벌써?”
“이 정도면 즐길 만큼은 한 것 같네요.”
그러나 이도윤은 하진을 이렇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멋쩍어하는 걸 보아하니 가까워지기는 개뿔, 더 멀어지게 생겼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안 되지. 마지막에 형이 이기고 쏙 빠져나간다고요? 한 판만 더 해요. 대신에 이번엔 이긴 사람이 진 사람 소원 들어주기.”
내기라는 말에 거절하려던 하진이 이도윤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보통은 반대 아닙니까?”
그러자 이도윤이 씨익 웃으며 잘난 척을 했다.
“보통은 그렇지. 그런데 형은 이제 겨우 한 번 이겼잖아요. 질 게 뻔한데 소원까지 들어줘야 하면 억울할 거 같아서.”
저 잘생긴 얼굴로 저렇게 재수 없어 보이는 것도 재주라고 하진은 생각했다.
“무슨 소원을 빌 건지 생각이나 해두시죠.”
하진은 내려놓았던 패드를 다시 집어 들었다. 평소의 하진이라면 이도윤이 도발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진은 수차례 이어진 패배 끝에 겨우 한 번 승리했고, 평소와 달리 흥분한 상태였다.
이래서 옛날부터 어른들이 도박은 하지 말라고 했던 건데 아이러니하게도 게임을 해보지 않았던 하진이라 그 승부욕에 쉽게 취해버렸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죠.”
이도윤은 진지하게 패드를 잡은 하진을 보며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용을 썼다.
팀장이랑 비슷한 나이면서 저렇게 귀여워도 되는 걸까.
순간 확 이겨버릴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노리는 바가 있는 이도윤은 고개를 저어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왜 굳이 하진에게 도발까지 했는가.
3, 2, 1, START!
출발 신호와 함께 이도윤이 빠르게 치고 나갔다. 하진 또한 익숙해진 듯 버벅거리지 않고 출발했다. 그러나 이도윤보다는 늦은 출발이었다.
한 바퀴, 두 바퀴째까지도 이도윤은 하진의 앞에 있었다. 게임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코너링은 여유로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상황은 마지막 바퀴에 들어섰을 때 뒤바뀌었다.
스피드전이었다면 무난하게 이도윤이 그대로 결승선까지 통과했을 테지만, 이건 아이템 전이었다.
“어?!”
한 번의 운으로 상황이 역전될 수 있는 판이라는 뜻이었다. 유유히 하진을 놀리기라도 하듯 느긋하게 속도를 조절하며 아슬아슬하게 선두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 여유도 잠시, 이도윤의 캐릭터는 하진이 날린 아이템에 당해 그 자리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하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도윤의 캐릭터가 멈춘 것은 일이 초에 불과했지만, 역전을 하고 거리를 벌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결국 이도윤은 토끼와 거북이 간의 경주처럼 방심한 탓에 하진에게 지고 말았다.
하진은 결승선을 통과한 자신의 캐릭터를 보며 작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러나 옆에서 들려온 이도윤의 웃음소리에 이내 현실을 깨달았다.
“형이 이겼네?”
‘이런 멍청한…….’
그랬다. 내기의 내용은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건드려지는 바람에 그 말이 어떻게 작용할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업보를 지금의 하진이 몽땅 뒤집어쓰게 생겼다.
분명 하진이 이기고 이도윤이 진 게 분명한 상황인데도 두 사람의 반응은 반대되었다.
하진은 뒤늦게 깨달은 자신의 멍청함에 한숨을 내쉬고 있었고, 이도윤은 마치 이긴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하진은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게임 하자고 하지 마세요.”
“에이, 잘하면서 왜 그래요~”
저 말이 더 얄미웠다. 하진은 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패드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소원이 뭡니까? 이상한 거면 안 들어줄 거예요.”
“그 정도야 나도 알죠. 내 소원은 말이지…….”
이 함정을 팔 때부터 생각했던 소원을 입에 담으려 할 때였다. 이도윤의 주머니에서 알람음이 요란스레 울렸다.
“아, 하필 이때…….”
주머니에 쑤셔 박아둔 휴대폰을 꺼낸 이도윤은 거칠게 전화를 받았다.
“네. 이도윤입니다.”
전화를 받은 이도윤의 표정은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구겨졌다.
“그래서 지금 오라고요? 그러면 하진 형 혼잔데? 아니! 나 쉬는 날이라고!”
이도윤이 목소리를 높이며 무어라 항의했으나 그게 딱히 소용이 없는지 그의 표정은 여전히 구겨진 호일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알았어요. 간다고.”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이도윤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뚱한 얼굴로 하진을 돌아보았다.
“나 협회 가봐야 해요……. 망할 인간들, 일 처리는 자기들이 못해놓고 누구 탓을 하는 거야.”
휴일에 출근이라니. 그 끔찍함을 잘 아는 하진이 이도윤의 어깨를 두드려 위로했다.
“오래 걸리는 일입니까?”
“멍청한 놈들이 괜한 걸 건드리는 바람에 하루는 걸릴 거 같아요. 그나마 팀장이 복귀해서 돌아오는 중이라니까 둘이서 너무 친해지지는 말고.”
이어지는 말의 앞뒤가 이상하긴 했으나 그만큼 출근하는 게 싫어서라고 생각한 하진은 현관까지 이도윤을 배웅했다.
“몸조심해요.”
“다녀올게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억지로 떼는 이도윤을 보내고 하진은 어질러진 게임팩을 정리했다.
정리가 끝나고 커피까지 한 잔 해치울 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현관 쪽으로 가자 어쩐지 지쳐 보이는 차진우가 신발을 벗고 있었다.
“아, 하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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