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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27화 (27/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27화

저렇게 웃을 수 있으면서 그런 표정만 구사하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 형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수업이 있어서 가 보겠습니다.”

“네, 형! 들어가세요!”

하진은 몇 번이나 꾸벅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한지우에게서 등을 돌리고 강의실로 향했다.

다행히 대화가 그리 길지 않았던 덕분에 수업 시간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두 번 연속 지각했더라면 하진은 민망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수업도 방사 가이딩을 단련하는 것으로 흘러갔다.

연습에 들어가기 전, 이수연은 저번엔 익숙하지 않아서 힘들었던 거지 이번에야말로 잘할 수 있을 거라며 하진을 응원했으나 그녀의 말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집중력이 깨지자 겨우 옅어지나 싶었던 농도가 오히려 이전보다 진해졌다.

답답함에 하진이 미간을 구기고 눈을 감는데 안경을 쓴 채 방 안을 살피던 이수연이 중얼거렸다.

“설마?”

강의실 안이 넓다고 해도 두 사람이 전부였기에 하진의 귀에도 그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하진 가이드.”

“예.”

“피곤하시겠지만 계속 방사 가이딩해 보시겠어요? 최대한 옅게 내려고 하면서요.”

어쩐지 진지해 보이는 이수연에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자꾸 실패해서 기분이 저조해진 것뿐, 딱히 피곤한 건 아니었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진은 계속해서 최대한 옅게 가이딩을 퍼트리려 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깨진 집중력에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결국 또 한 번 진한 가이딩이 강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하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특수 안경을 쓴 이수연에게는 그 농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하진의 가이딩을 기록해둔 차트와 눈앞의 가이딩 농도를 번갈아 보던 이수연이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탄성을 질렀다.

“아!”

또 한 번의 실패에 눈을 가늘게 뜨고 불만스러워하던 하진의 시선이 이수연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하진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이게…… 이게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러나 하진은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일인데 어련히 알아서 설명해줄까 해서.

오히려 이 틈을 타 괜히 뻐근해진 목을 돌리며 가이딩에 집중하느라 굳은 몸을 풀어주었다.

하진이 스트레칭을 다 끝낼 때쯤, 이수연도 확실히 결론을 내렸는지 안경을 벗으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이하진 가이드! 이제 알았어요!”

“무얼 말씀이시죠?”

“방사 가이딩이요! 이하진 가이드의 실력이라면 이렇게까지 갈피를 못 잡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갈피를 못 잡는 게 아니었어요!”

“예?”

“그게 최소치였던 거예요! 저도 살면서 이렇게까지 총량이 많은 사람은 처음 봐서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이하진 가이드의 총량이 너무 많아서 최대한 옅게 내려고 해도 그 정도였던 거였어요!”

잔뜩 흥분한 이수연과 달리 하진은 허탈했다. 그럼 내가 그동안 한 고생은 뭐가 되는 거지.

“다만 문제가 있는데요.”

하진이 다시 이수연의 말에 집중했다.

“이렇게 되면 방사 가이딩은 못 쓰겠네요.”

“네?”

못 쓴다니. 그럼 왜 연습했는가. 이수연은 허망해 보이기까지 한 하진에게 재빨리 설명했다.

“물론 아주 못 쓰는 건 아니에요. 숙소나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다수의 에스퍼를 가이딩해야 할 때면 쓸 수 있겠지만…… 이 정도 농도면 에스퍼가 잠들진 않더라도 긴장을 풀어버릴 정도라 아마 딱히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너무 뛰어나서 못 쓴다니. 하진은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수연의 팩트 폭행을 빙자한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지정 대상을 향한 방사 가이딩도 못 쓸 것 같네요. 주로 전투 상황이나 긴박한 상황에서 급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이하진 가이드가 했다간 전투 중에 긴장이 풀려버릴 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결국 하진에게 남는 것은 접촉 가이딩밖에 없었다.

방사 가이딩을 완벽하게 익혀 최대한 접촉을 줄일 생각이었는데 그 계획부터 망가졌다.

‘아니지. 안전한 곳에서는 상관없다고 했으니 괜찮은 거 아닌가?’

숙소 안에서 사용한다면 위험할 것도 없을 테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희망이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입을 맞추자 어떻게든 더 해보려고 수작 부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효과가 과하게 좋다면 오히려 하진에게는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 * *

방사 가이딩에 관한 건 허무하게 끝나버렸지만, 소득은 나름 있었다.

다만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수연과의 수업은 끝이 났는데 그녀는 하진의 가이딩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끝났다는 사실이 퍽 아쉬운 듯했다.

“고작 세 번의 수업이었지만, 잘 따라와 주셔서 감사했어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죠.”

“어휴, 정말이지. 앞으로 가르치게 될 학생들도 다 이하진 가이드 같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쉰 이수연은 곧 까르르 웃었다.

“저와의 수업은 이게 끝이지만, 아마 교육장은 계속 오셔야 할 거예요.”

하진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유사시를 대비해 가이드들 또한 평소에 체력을 키워야 한다고 첫 수업 때 들은 기억이 났다.

“가이드에게야말로 체력이 제일 중요해요. 유사시를 대비해서이기도 하지만, 가이딩은 체력이에요. 아, 솔직히 이건 이하진 가이드에게는 필요 없겠네요. 그래도 체력 단련은 꾸준히 하세요. 아셨죠?”

그는 이수연의 마지막 당부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 또한 자신의 체력에 유감을 느낀 적이 있지 않은가.

적당한 관리로는 던전에서 몬스터에게 쫓길 때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잘 지내세요.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 연락 주시고요. 수업이 종료된 것뿐이잖아요?”

“예. 그러겠습니다.”

하진은 이수연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강의실을 나섰다. 중간에 방사 가이딩이 흐지부지되는 바람에 평소보다도 일찍 끝나버렸다.

‘흠, 시간이 남는군.’

이 동네에 오고서 여태껏 하진이 가본 곳이라곤 숙소와 교육장 강의실이 전부였다. 아, 한지우를 따라간 으슥한 곳도 포함할 수 있다면 세 곳이 전부였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사는 동네라 소도시 정도의 크기라고 해도 진짜 도시 같은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카페라거나 식당, 공원 등 나름 있을 건 다 있는데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카페는 일단 다음에 가고, 우선은 체력 단련실에 가볼까.’

그렇지 않아도 체력의 부족함을 여실히 체감하던 중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뒤처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혼자는 안 보내줄 거고, 그렇다고 데려가자니 귀찮은데.’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나가서 놀지도 않고 숙소에 틀어박혀서 하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에스퍼들을 떠올리자 괜히 한숨이 나왔다. 어린애도 아니고 데려갈 생각을 하니 귀찮은 마음이 들었다.

하진은 우선 그 생각은 뒤로 넘겨두었다.

‘일단은 체력 단련실 먼저.’

“……그런데 거기가 어디지.”

하진은 우선 1층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면 안내판을 안내해줄 직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층에 도착한 하진이 안내판을 찾아 주위를 살필 때였다.

“뭐 찾으세요?”

“한지우 가이드군요.”

우연히 지나가던 중이었는지 멀리서 한지우가 다가왔다. 매끈한 미간을 보니 하진에 대한 유감을 지워낸 건 사실인 것 같았으나 여전히 어색하긴 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그러나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다가오는 이를 냉정하게 내칠 이유도 없었다.

“안내판을 찾고 있는데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여긴 외부 사람이 올 일이 없어서 안내판 같은 게 없어요.”

“예? 그럼 새로 온 가이드는 어떻게 합니까?”

수업 시간에 배우는 거였다면 이수연이 알려주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하진은 그녀에게 건물 소개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게…….”

한지우는 하진의 물음에 면목 없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보통은 다른 가이드들이 알려주는데…… 제, 제가 그러지 못하게 막았, 거든요…….”

한지우는 그 말을 제 입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창피하다는 듯 더듬더듬 말을 끝마쳤다. 하진 또한 납득했다.

하진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한지우는 철천지원수를 보듯 했으니 그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그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죄송해요. 대신에! 제가 지금이라도 안내해 드릴게요!”

한지우는 과거의 잘못을 어떻게든 만회하기 위해 간절한 목소리로 청했다. 하진이 안내를 부탁하는 게 아니라 한지우가 안내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상황이 어딘가 이상했지만.

안내가 필요한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합니다.”

“아뇨. 오히려 제가 해드렸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어요.”

한지우는 하진을 이끌고 건물 곳곳을 소개해 주었다. 단순히 뭐가 어디에 있다는 식의 설명을 넘어서 어떠한 상황에는 이곳에 오면 되고, 어떤 곳은 들어가면 안 되고 같은 필요한 정보까지 세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하진은 한지우의 뒤를 따라다니며 중요해 보이는 정보들은 머리에 확실히 집어넣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도움이 되었다.

처음 안내를 해준다고 했을 땐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건 아닌가 걱정이었는데 그건 기우였다. 정말로 반성을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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