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26화
하진의 머리가 한승호의 위쪽에 자리하자 키스는 또 다른 자극을 주었다.
마치 하진이 한승호를 내리누르고 지금의 키스를 주도하는 것 같은 자세에 이전과는 조금 다른 열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그 열기는 하진의 이성을 조금씩 마비시켰다.
그저 한승호가 하는 대로 휘말리기만 했던 하진은 열에 들떠서는 저도 모르게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제가 움직이는 대로 휘말리듯 따라오는 것에 급급하던 것도 좋았으나 하진 스스로 혀를 움직이는 것은 정말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하진의 온몸을 씹어 먹고만 싶었다.
한승호는 식욕을 닮은 성욕인지, 성욕을 닮은 식욕인지 모를 것을 참기 위해 하진의 혀가 움직이는 것에 집중했다.
미치도록 좋았다. 이렇게까지 좋아도 되는 건가? 어떻게 이걸 모르고 살았지? 한승호의 눈빛이 점점 더 깊게 가라앉았다.
‘이거보다 더 좋은 게 있단 말이지.’
얌전하기만 하던 한승호의 손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스멀스멀 움직이려 할 때였다.
쾅!
대포를 쏜 것 같은 큰 소리와 함께 두꺼운 문짝이 구겨진 채 바닥을 굴렀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하진이 정신을 차리자 시간을 잊고 영영 이어질 것만 같았던 키스가 끊어졌다.
한승호는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문을 부순 범인인 백자안이 싸늘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동료고 뭐고 당장에 덤벼들 것 같은 얼굴이면서 용케 말을 먼저 꺼냈다.
“한승호. 이제 하진 씨 내놔.”
“허, 네 거냐? 하진 형이 네 거야? 저 또라이 새끼.”
두 에스퍼가 으르렁거리거나 말거나 하진은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정신이 드니 조금 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미쳤지, 내가 미쳤어.’
의료 행위가 어쩌고저쩌고했지만, 조금 전 하진이 한승호와 나눈 것은 키스에 불과했다. 가이딩은 할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백자안에게 끌려가듯 했던 키스와는 달리 이번엔 하진이 먼저 혀를 움직여댔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가이딩을 위한 행위였다고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진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자극에 약한 사람이었나 싶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한승호와 백자안의 신경전은 위태로운 지경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내려놓으라고.”
“네가 뭔 상관인데.”
“하, 그래 승호 넌 멍청해서 말로 해선 도저히 알아듣지를 못했지.”
“……덤벼, 이 새끼야.”
하진은 도저히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결국 생각을 멈추고 한승호를 불렀다.
“한승호 씨.”
“어? 왜?”
그러자 언제 백자안을 노려보고 있었냐는 듯 멀끔한 얼굴이 하진을 돌아보았다. 백자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한승호의 이름을 부른 것이 불만이면서도 서러워 보였으나 적어도 아까 보였던 살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내려주세요.”
“그러지 말고 더 하자. 형도 좋았잖아.”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덩치만 큰 애를 어째야 할까. 하진은 이런 한승호를 상대로 제가 흥분해서 혀를 섞어댔다는 것에 다시 회의를 느꼈다.
“내려 달라니까요.”
하진은 자신을 받쳐 안은 손을 툭툭 쳤다. 그 와중에 해주겠다고 했던 가이딩을 잊지 않고 흘려보냈다.
그 깔끔한 태도에 지금은 완전히 텄다는 걸 깨달은 한승호가 아쉬워하면서도 그를 내려놓았다.
“저는 쉴 거니까 싸우지 마세요. 두 사람이 싸우면 집이 무너질 테고, 그럼 저는 그대로 깔려 죽을지도 모르니까.”
정신적으로 지칠 대로 지친 하진은 두 사람에게 그렇게 일갈한 후,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하진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두 에스퍼는 서로를 죽어라 노려보면서도 얌전히 발길을 돌렸다.
“아! 문 어쩔 거냐고! 백자안 이 개또라이 새끼야!”
한승호의 분노에 찬 괴성이 집을 울렸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 * *
그날 밤은 물론이고 다음 수업 시간이 올 때까지 하진은 거의 자신의 방에서만 생활했다. 며칠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하진은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는 내상 입는 거 말고는 절대 키스 안 한다.’
누구는 해주고 나는 왜 안 해주냐고 해도 절대 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겨우 두 번째인 한승호와의 키스에서도 이성을 놓을 뻔했는데 세 번째, 네 번째에서 일 치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차진우가 이미 알고 있긴 하지만 하진은 그가 설마하니 저런 식으로 떼를 쓸 인물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나마 이도윤은 이 기묘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다행이었다.
“후우…….”
오늘도 백자안과 한승호가 하진을 따라나서려 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그들을 떼어내고 혼자 나섰다.
지난번에는 차를 타고 이동했지만, 사실 거리만 따지자면 가까운 편이라 굳이 차를 탈 필요가 없었다. 다만 에스퍼들도 그렇고 협회에서 어떻게든 차에 태우려고 해서 탔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좀 혼자 걷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결론은 내렸지만, 심란한 마음이 고작 반나절 만에 가라앉지 않았던 탓이다.
물론 아무런 조치가 없었더라면 하진도 고집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협회가 조성한 이 작은 도시에는 에스퍼도 거주하지만, 가이드 또한 거주하기 때문에 침입자를 대비해 땅은 물론이고 하늘까지도 협회가 주시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따라오려던 한승호와 백자안도 그걸 잘 알기에 못 이기는 척 하진을 혼자 보내주었던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하진이 화를 냈더라도 따라나섰을 이들이었다.
하진은 산책이라도 하듯 느긋하게 걸었다. 그러자 어느 정도 잡념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는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래. 가이딩이든 뭐든 혀를 그렇게 섞는데 느낄 수밖에 없지.’
앞으로 조심하면 될 것이다. 과연 하진의 생각대로 될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저의 정신 건강을 위해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잡생각이 길었는지 벌써 교육장 건물 앞이었다. 그때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하진의 앞을 막은 이가 있었다.
“그쪽은…….”
“잠시 얘기 좀 해요.”
한지우였다. 분명 저번에도 비슷한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말이다.
‘한지우 가이드는 특히나 욕심이 많아요.’
그날의 기억과 함께 이수연의 충고를 떠올린 하진은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그러자 한지우가 마치 그런 하진의 마음을 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그렇게 안 해요. 사, 사과하려고 온 거예요.”
확실히 목소리도 그렇고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진은 힐긋 건물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으나 곧 한지우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만약 저게 연기라고 해도 한지우가 제게 상해를 입힐 수 없으니 한 번 정도 더 속아주는 셈 치기로 했다.
저번처럼 아예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으로 향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한지우는 오히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적당히 사람이 몇 없는 곳으로 갔다.
자판기에서 음료를 두 개 뽑은 그가 하나를 하진에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제 몫의 캔을 따고는 그대로 한 번에 다 들이켰다.
그 모습은 마치 무척 중요한 일을 앞둔 사람이 긴장을 풀기 위한 행동처럼 보였다.
‘흠, 정말로 반성이라도 한 건가?’
푸식- 하진 또한 캔 뚜껑을 따 음료수를 마셨다. 탄산이 입안을 아프게 때려 와서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한지우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더니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하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그때는 죄송했어요.”
정말로 사과하는 모습에 하진은 조금 놀랐다. 곧 죽어도 제 뜻을 바꾸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사람을 잘못 봤던 걸까.
문득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마음을 바꿔 먹은 건지 궁금해졌으나 당사자에게 물어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한지우는 하진에게서 대답이 없자 자신의 사과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횡설수설 말을 이어 붙였다.
“내가 갑자기 이러는 게 이상해 보일 거라는 건 나도 잘 알아요. 그, 그렇지만 내 사과는 정말 진심이에요.”
“솔직히 말하자면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더 궁금하네요. 나라고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한지우 가이드는 나를 무척 미워하는 것 같았거든요.”
이유를 듣지 않고서 상대의 말만 듣고 납득하기 힘들었다. 한지우는 그런 하진의 말에도 화내지 않고 오히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실은 그날 제가 이하진 가이드에게 그러는 걸 본 사람이 있었어요. 처음 협회에 왔을 때부터 챙겨주시던 분이었는데…… 그분한테 혼나고 나니 그제야 제가 한 짓이 치졸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인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한지우는 표정의 변화가 없는 하진을 보더니 힘없이 웃었다.
“웃기죠? 고작 혼난 걸로 바꿔 먹을 마음이었으면서 그렇게나 이하진 가이드를 미워했다는 게…….”
“아뇨, 뭐. 이해는 못 해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하진은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저 마음이 어떤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지만, 어찌 되었건 머리로는 알아들었다.
게다가 하진은 차진우를 제외한 다른 세 명의 에스퍼를 겪으면서 이들이 나이에 비해 유치하고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는 걸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받아들이는 것과 그게 잘못된 행동을 한 건 별개의 문제지만.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죄송했습니다.”
한지우는 하진에게 정수리를 보이며 다시 사과했다. 하진은 진심으로 사과하는 상대를 두고 마음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야박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과했으니 됐습니다.”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용서라는 단어를 쓸 만큼 거창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해진다면, 예. 용서해 드렸습니다.”
하진의 말에 한지우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표독스럽게 노려보던 얼굴만 봤던 하진으로서는 그 표정 변화가 놀랍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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