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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22화 (22/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22화

하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심호흡하듯 숨을 골랐다. 그래도 한 번만 더 참아야지. 그렇다고 정말로 저 어린 청년이랑 싸울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하진의 노력을 몰라주고 한지우는 인상을 구기며 점점 언성을 높였다.

“이봐요. 내 말 못 알아듣겠어요? 눈치가 없는 거야, 뭐야. 그냥 알겠다고 대답하면 되는데 그게 힘들어요?”

차라리 하진이 가이드라는 걸 몰랐을 때 마주했던 한승호가 더 예의 바르지 않았을까.

결국 그 마지막 인내심까지도 날려 먹게 한 한지우를 보며 하진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그쪽 말대로는 못 해주겠군요.”

하진은 앞으로는 한승호가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놓고 개념을 밥 말아 먹은 이도 있는데 무의식중에 나오는 반말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한지우는 자신의 예상과 다른 대답에 입을 다물고 하진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하진은 돌연 궁금해졌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자신을 미워하는 건지.

“뭐가 그렇게 겁이 납니까?”

툭 던져진 말에 한지우의 미간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허, 내가 겁을 먹었다고?”

“그게 아니면 굳이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가 없죠. 내가 S급 가이드라고 해서 그쪽이 쫓겨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하진의 말이 맞았다. 하진이라는 존재가 나타났다고 해서 한지우가 쫓겨나는 건 아니었다. A급 가이드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한지우에게는 그게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지우는 S급 에스퍼를 가이딩하기 위해 정말이지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

S급이 될 수 있었던 A급. 그가 처음 측정했을 때 받았던 평가였다.

처음엔 그게 S급에 필적한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뜻에 담긴 진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S급이 ‘될 수 있었던’ A급. 그건 그래봤자 A급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지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가이딩하다가 코피를 쏟는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덕에 미세한 영향력이나마 S급 에스퍼를 가이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랬는데 하진의 존재로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 자식만 아니었어도 S급 전용 가이드 자리를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

그 때문에 A급 에스퍼들이 가이딩을 제대로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협회 입장에선 한지우의 가이딩이 미약하더라도 S급 에스퍼의 폭주 수치를 낮출 수 있으니 A급 에스퍼들의 불만을 외면하더라도 그를 지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존재가 나타나 버린 것이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한지우는 억울했다. 자신은 백날을 노력해도 겨우 폭주 수치를 낮추는 게 겨우인 가이딩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가이드는 그 S급 에스퍼를 재우기까지 했다.

“무슨 심정인지는 알겠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전 적당히만 일할 건데요.”

‘내 심정을, 안다고……?

한지우에게는 기만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이 찢어져도 하진의 존재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어서 그런다는 말을 어떻게 스스로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대답하는 대신 말을 돌려버렸다.

“그, 그러니까, S급 에스퍼를 몽땅 차지해서 영향력을 넓혀보겠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게 그 뜻이지!”

하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문득 회의감이 느껴졌다.

슬슬 강의실로 가봐야 하는데 내가 왜 굳이 저 사람을 설득하려고 하는 걸까.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진 하진은 이 대화를 끝내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해도 저 좋을 대로 해석할 텐데 굳이 더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바빠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돌아서는 하진을 한지우가 붙잡았다.

“아직 내 말 다 안 끝났는데 어딜 가!”

어찌나 꽉 잡았는지 차진우에게 선물 받은 새 옷이 잔뜩 구겨져 보기 싫게 주름이 잡혔다.

드물게 미간까지 찌푸린 하진이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한지우의 손을 떼어냈다.

얼핏 정중해 보이기까지 한 느린 동작이지만, 손을 붙잡힌 한지우는 그 힘에 순간 긴장했다. 주름진 부분을 털어 그나마 깔끔하게 편 하진은 그대로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혼자 남겨진 한지우만이 수치심과 패배감에 애꿎은 입술만 깨물며 파들거렸다.

* * *

“이하진 가이드!”

서둘러 걸음을 옮겨 강의실로 향하던 하진은 문 앞에서 이수연과 마주쳤다. 강의 시간에도 도착하지 않은 하진을 찾으러 나온 듯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어휴,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놀랐어요.”

농담이 아닌지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수연을 보자니 조금 미안해졌다.

“죄송합니다. 잠시 한지우 가이드를 만나 대화를 좀 했더니.”

“한지우 가이드요? ……괜찮아요?”

이수연이 눈으로 하진을 살폈다. 혹시라도 해코지라도 당하지는 않았나 걱정하는 듯했으나 하진은 그 시선이 못내 부담스럽고 민망했다.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나요. 같은 가이드인데.”

“그, 음……. 일단 들어가시죠.”

이런 곳에서 할 말은 아닌지 이수연이 문을 열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문까지 꼭 닫은 이수연이 끊었던 말을 이었다.

“솔직히 가이드 교육 담당인 제가 이렇게 말하면 제 얼굴에 침 뱉는 거밖에 안 되지만, 여기 가이드들은 대부분 성격이 좋지 않아요.”

하진도 충분히 공감하는 바였다. 순간 누구보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일 뻔한 하진은 겨우 움직이려는 고개를 붙들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지난 수업 때도 말했지만, 능력에 따라 등급 매겨놓은 애들을 모아놨는데 착하게 자랄 리가 없죠. 게다가 매칭률 높은 에스퍼까지 만나면 아주 무서울 게 없다니까요.”

“협회에선 딱히 인성 교육에는 신경 쓰지 않는 건가요?”

협회 소속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하진이 꺼내기엔 민감한 주제였지만, 이수연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저도 말 많이 꺼내 봤죠. 그런데 굳이 그런 게 없어도 잘 돌아가니까요. 가이드들 성격이 아무리 사나워 봤자 에스퍼만 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만의 왕국이 있으니 다른 데 눈 돌릴 일도 없으니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거죠.”

하진이 작게 혀를 찼다.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이수연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런 가이드 중에서도 한지우 가이드는 특히나 욕심이 많아요. 보통은 매칭률 높은 자기 에스퍼 하나 있으면 만족하는 편인데 한지우 가이드는 A급임에도 S급 에스퍼를 가이딩하겠다고 죽어라 노력할 만큼 독하기도 하고요.”

하진의 고개가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끄덕끄덕 움직였다. 욕심 한번 더럽게 많아 보이더라.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협회에서는 한지우 가이드에게 더 투자해서 S급 전용 가이드로 만들어 보자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

“그런데 제가 나타났군요.”

이수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마 그래서 한지우 가이드가 이하진 가이드를 더 미워하는 걸 거예요. 물론 직접적으로 폭력을 가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러니 한지우 가이드와는 거리를 좀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그렇게까지 하진을 미워하나 했더니 그런 비화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그렇다고 딱히 미안한 마음이 생긴 건 아니지만 말이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지난 수업 때 가이딩의 방법에 대한 걸 배우셨을 거예요.”

가이딩 방식은 주로 두 가지로 나뉘었다. 방사 가이딩과 접촉 가이딩. 둘 다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방사 가이딩은 신체 접촉 없이 가이딩을 퍼트리는 방식이었다.

오히려 접촉 가이딩이 그 방법이 좀 더 다양했다. 가볍게 손을 잡는 것에서부터 극한의 효율을 내기 위해서 잠자리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말에 하진은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었다.

“이하진 가이드의 경우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에스퍼를 재울 수 있는 정도니 원하지 않는다면 잠자리를 통한 가이딩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예요. 다만…….”

“다만? 뭔가 문제가 있나요?”

말끝을 흐리는 이수연의 뒷말이 궁금한 하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뇨. 문제라고 할 건 없는데요. 아니 문제인가? 으음, 에스퍼들과 점막 접촉을 통해 가이딩을 해야 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진은 개인의 호불호와는 관계없이 의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에 의문이 더더욱 깊어졌다.

“좀 더 정확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수연의 설명이 이어졌다.

“에스퍼들이 외상을 입을 경우에는 의료 에스퍼에게 치료를 받으면 되지만, 내상을 입었을 땐 좀 달라요.”

“내상이요?”

“네. 상대 에스퍼의 힘으로 인해 내상을 입거나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해 입은 내상의 경우에는 점막 접촉을 통한 가이딩만이 에스퍼를 치료할 수 있죠.”

이수연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는 하진을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이해가 잘 안 되시죠? 부끄럽지만 사실 이 부분은 아직 제대로 연구가 안 된 분야예요. 오랜 시간을 들였음에도 아직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죠.”

그게 이수연의 잘못인 것도 아니니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저도 입맞춤 정도는 해야 할 수 있으니 각오해 두라는 거군요.”

“네. 물론 이하진 가이드가 있는 알파 팀은 어지간해선 내상을 입는 경우가 없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이수연은 하진이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쓰고 있었다. 어릴 때 들어와서 교육받은 가이드들은 성인이 된 후에 입을 맞추거나 때로는 성관계를 통해 가이딩해야 한다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게다가 같은 성별이라는 것도 문제 삼진 않는다. 하지만 하진은 서른둘이 될 때까지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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