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21화
액자가 깨지지 않게 옷으로 감싼 하진은 캐리어를 닫고 거실로 나갔다.
“다 됐습니다.”
“그 정도만 챙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차진우의 물음에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나중에 필요할 때 사면 됩니다.”
“그럼 그냥 말 나온 김에 사러 가자, 형!”
뭐지……? 하진은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백화점에 서 있는 현 상황에 눈을 깜박였다.
그것도 딱히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만 했을 뿐인데 그대로 납치라도 당하듯 차에 태워져 백화점에 도착했다.
텅텅 비어 있는 백화점에 설마 그 짧은 사이에 백화점을 통째로 예약하기라도 한 것인가 의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한 팀이 된 기념으로 자기가 사주겠다고 하자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선물이라는 이름의 살림살이를 쓸어 담는 걸로 변질되어 버렸다.
“이거 어때?”
한승호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때까지도 멍하니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의자에 앉아 있는 하진에게 뛰어와 제가 고른 것을 보여줬다.
“제습기가 왜 필요하죠?”
심지어 크기도 커다랬다. 힘도 좋지. 저걸 그냥 냅다 들고 오다니.
하진의 목소리가 조금 망연자실한 줄도 모르고 한승호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습하면 찝찝하잖아.”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름도 아니었고, 여름이라 할지라도 쓸데없는 소비는 하지 않는 하진의 성향에 따르면 제습기 딱히 쓸 일이 없을 게 분명했다.
“정 찝찝하면 에어컨을 틀면 됩니다.”
에어컨에 제습 기능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제습기를 따로 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쳇.”
결국 그에게서 불합격을 받은 한승호는 장난감을 도로 갖다 놓으러 가는 아동처럼 터덜터덜 제습기를 들고 되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이번엔 백자안이 다가왔다.
“하진 형, 이건 어떠세요?”
“침구 세트네요. 숙소에 있지 않나요?”
하진의 말에 백자안이 수줍게 웃었다.
“하진 형이 제가 사준 걸 썼으면 해서요.”
“……다른 걸로 골라주세요.”
“힝.”
하진은 백자안이 눈썹을 늘어트리며 불쌍한 척을 했으나 단호했다. 침구 세트 정도면 퍽 정상적인 선택이었으나 저렇게 말하면 찝찝해서 어떻게 쓰겠는가.
제 가이딩이 좋은 건 알겠으나 저럴 때면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부담스러웠다.
“형! 형!”
이번엔 이도윤이었다. 그나마 차례대로 와서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이거 완전 좋아 보이지 않아요?”
“……게임기네요.”
“이번에 새로 나온 거예요! 2인 플레이도 되는데 같이 할래요?”
하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진은 게임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선 두 사람이 가져온 것과 비교하면 제일 쓸모없었다. 그런데 눈을 잔뜩 빛내며 흥분한 모습을 보니 갖다 놓으라는 말이 안 나왔다.
그나마 성인 남성 티가 물씬 나는 한승호와 백자안과는 달리 이도윤은 아직 어린 티가 묻어나서 그런지 그 두 사람에게 했던 것만큼 모질지 못한 하진이었다.
‘그래도 자기가 생각했을 때 제일 좋아 보이는 걸 가지고 온 것 같은데.’
게다가 같이 하자는 걸 봐선 하진도 저 게임을 하면 분명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막내인데 제 나름대로 생각해서 가져왔으려니 생각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밌겠네요. 다음에 같이 하죠.”
결국 하진은 냉정해지지 못했다. 형제자매의 여부를 떠나, 아홉 살 어린 막내가 생각해서 고른 선물을 거절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도윤은 제 선물이 합격 처리가 되자 씨익 웃으며 좋아했다.
“하진 씨. 도윤이도 있었군. 뭘 골랐…….”
이도윤의 손에 들린 게임기를 본 차진우가 시선을 돌려 하진과 눈을 맞췄다. 그의 시선이 정말 저걸로 괜찮냐고 묻고 있었다.
시선에 담긴 뜻을 감지한 하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진우도 말끝을 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 씨 마음에 들었으면 됐다.”
냉정하고 엄한 팀장이지만, 차진우도 열 살 어린 팀의 막내에게 이런 순간까지 엄하진 못했다.
“팀장은 뭐 골랐는데요?”
이도윤의 질문에 하진도 기대된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간 그가 보여준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나마 가장 기대할 만한 사람이 차진우였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아직 안 골랐어요?”
“골랐다. 그런데 양이 많아서 숙소로 배송 부탁했지.”
“뭐 골랐는데요?”
“옷.”
차진우의 시선이 하진에게 향했다.
“캐리어 크기가 작은 걸 보아하니 옷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더군요. 그래서 몇 벌 골랐습니다. 디자인까지 느긋하게 고를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제가 임의로 골랐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받는 입장에서 뭐 그런 것까지 따지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정장이 대부분이라 옷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잘됐습니다.”
괜한 말이 아니라 여태 나왔던 후보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디자인이야 차진우가 괴이하고 이상한 걸 골랐을 리는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다.
차진우의 선물까지도 합격점을 받았다. 이제 한승호와 백자안만이 선물을 고르면 되는데…….
도무지 하진의 취향에 맞추지 못하는 둘을 몇 번이나 돌려보내다가 결국 하진이 먼저 포기하고 말았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정말 센스가 없는 건지 한승호도 백자안도 오히려 처음에 골라왔던 게 나아 보이는 것들만 가지고 와서 하진을 질리게 했던 탓이다.
솔직히 한승호라면 몰라도 백자안은 일부러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냥 침구 세트로 하겠다고 하자마자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하진은 괜히 찝찝했으나 더 씨름하기엔 너무 지쳐버렸다.
‘그래도 이제 돌아가면 쉴 수 있겠지.’
그러나 숙소로 돌아와 제 방에 들어선 하진은 말 그대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방을 한가득 채운 쇼핑백에 그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마 정상인이라고 여겼던 차진우도 나머지와 똑같았다.
* * *
짐 정리만으로 사흘을 꼬박 보낸 하진은 다시 교육장을 찾았다.
고작 사흘 만에 교육장을 찾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게 한 네 사람이 대단했다.
이번엔 따라오려는 걸 말리고서 혼자 차를 타고 왔다. 교육장에 도착한 하진은 건물에 들어서기도 전에 자신의 앞을 막아선 이에 눈썹을 들썩였다.
일전에 하진에게 시비를 걸었던 젊은 가이드였다.
“죄송합니다만 그러니까, 이름이 뭐였죠?”
태연하게 이름이나 묻는 태도에서 자신에게 관심이 요만큼도 없음을 눈치챈 한지우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한지우예요.”
“이하진입니다.”
자연스레 하진이 악수를 건넸지만, 한지우는 그 손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깔끔하게 무시했다.
“잠깐 저 좀 보시죠.”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좋게 표현하자면 당차고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면 재수 없는 행동에 하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무시할까.’
무의식중에 떠오른 생각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좋든 싫든 앞으로 계속 부딪쳐야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무시했다간 무슨 성질을 부릴지 걱정이었다.
억울하더라도 이런 일에 휘말리면 괜히 꼬투리를 잡히지 않는 게 좋았다.
‘후우, 내가 어린애랑 뭐 하는 건지.’
결국 하진은 저 멀리 멀어진 한지우를 따라 발걸음을 움직였다. 수업 시간보다 일찍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지우는 하진을 사람이 오지 않을 만큼 으슥한 곳까지 끌고 갔다.
영화였더라면 이렇게 따라가다가 뒤통수 맞고 납치당하는 전개일 듯한 분위기라 하진은 눈을 굴려 괜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 한지우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노려보는 눈초리가 어찌나 매서운지 하진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쪽한테 경고를 하러 왔어요.”
“경고?”
한지우는 뭐가 그렇게 분한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는 운을 뗐다.
“앞으로도 남의 거에 관심 가지지 말고, 당신 거나 잘 간수하는 게 좋을 거예요.”
밑도 끝도 없는 경고에 하진도 참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수연이 말해주기도 했지만, 그 전에 이미 짐작하지 않았던가.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가지는 집착만큼 가이드가 에스퍼에게 가지는 집착도 있다고.
능력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이곳에서 제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선 보다 뛰어난 에스퍼를 가이딩해야 하니 집착하는 마음도 이해는 되었다.
“듣고 있어요? 사람이 말을 하는데 대답이 없어.”
그러나 하진은 제 욕심대로 굴겠다고 저에게까지 괜한 불똥이 튀는 이 상황까지 이해해줄 순 없었다.
어리다, 어리다 했어도 미성년자도 아닌 성인 남성이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 걸 하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쪽은 에스퍼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겁니까?”
무엇보다도 하진이 화가 나는 것은 에스퍼를 제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안 보는 태도였다.
차라리 좋아하는 에스퍼에게만큼은 가이딩하지 말아 달라고 했으면 고민하더라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진에게 가이딩받은 에스퍼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알파 팀을 통해 절절히 알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한지우는 마치 제 것에 침 발라놓는 어린애처럼 굴고 있었다.
이미 제 품에 다 끌어안는 것도 벅차서 여기저기 다 흘리면서 그것까지도 전부 제 것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어린애.
‘진짜 어린애면 귀엽기라도 하지.’
이건 뭐 하진만큼이나 크고 시커먼 남성이 저러고 있으니 짜증만 났다.
평소였더라면 굳이 다툼을 만드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네네, 하고 넘어갔겠지만, 사람은 생각보다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였다.
아무리 무던한 성격이라고 해도 하루아침에 자신이 일군 모든 것들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 스트레스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진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의 등급이 높고 좋은 대우를 받는다 해도 타의에 의해 살아가는 환경이 통째로 바뀌었다.
아무리 하진이 나이가 더 많고 사회 경험이 풍부한 어른이라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참고 넘어가 주는 것도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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