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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20화 (20/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20화

꿩 대신 닭이라고 그가 자신을 잡아가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협회의 보호 아래에서 곱게 자란 한지우는 미약하나만 협회 바깥에 공포심마저도 가지고 있었다. 협회가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교육의 힘이었다.

그들은 협회를 제외한 세력들의 위험성을 특히나 강조했다. 에스퍼 반대 단체는 에스퍼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놈들이라고 했다.

그런 이들이니 가이드를 죽이는 건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하진 또한 그들에게 저격당할 뻔했고.

그렇다고 해서 반정부 놈들이 더 낫다는 건 아니었다. 그곳에선 한지우가 살아온 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방금 가이드가 몇 없다고 서주안이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그곳에 잡혀가면 가이딩만 하는 노예로 전락할 게 분명했다.

“도움이라도 요청하려고?”

한지우는 서주안의 목소리에 빠르게 뒤돌았다. 등 뒤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애써 당당하게 뒤돌았지만 무섭기는 여전한지라 한지우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내가 소리만 지르면 에스퍼들이 달려올 거야.”

“거짓말. 여기 가이드 교육장이잖아. 에스퍼는 못 들어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네가 그걸 왜 알고 있는데……!’

한지우는 육성으로 욕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완전히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긴장감과 두려움에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말을 끝으로 한지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빤히 바라만 보는 시선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뱀 앞에 놓인 개구리가 된 것처럼 두려움에 결국은 몸이 부들부들 진동했다.

“에이~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내가 에스퍼인데 설마 가이드한테 허튼짓하겠어?”

그러니 숨 쉬어, 숨.

그 말을 듣고서야 한지우는 자신이 숨도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허억! 콜록! 허억, 허억……!”

한지우는 허리를 접고 터져 나오는 기침을 토해냈다. 그가 한참을 부족한 숨을 들이마시며 콜록거리다가 겨우 허리를 펴고 서주안을 노려보았다.

기가 죽지 않는 눈빛에 서주안이 작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오, 성깔 있네.”

“무슨 수작을 부릴 셈이야…….”

서주안은 픽 웃었다.

“수작이라니. 제안을 하려고 온 거야.”

“……제안?”

한지우의 눈에 의문이 들어찼다. 서주안은 속내를 감추고 방긋 웃으며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서주안이 한지우가 몸을 크게 떨며 멀어지기도 전에 성큼 다가와 마치 친한 친구에게 하듯 어깨동무를 하더니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하진, 쫓아내고 싶지 않아?”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속내가 들통나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것은 어떻게 이 타이밍에 자신을 찾아왔는가였다.

한지우는 분명 하진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증오하게 된 건 조금 전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고 찾아와선 지금 이 타이밍, 하진을 향한 증오가 가장 높게 솟구칠 때 저런 말을 속삭인단 말인가.

‘조심해야 해.’

한지우는 다시금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덫이다. 사람 속내를 읽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상황이 너무 절묘했다.

“그냥 제안이라니까.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 너는 꼴 보기 싫은 녀석 쫓아내고, 우리는 가이드가 생기는 거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하, 내가 그딴 말에 넘어갈 정도로 멍청해 보였냐?”

“음?”

한지우는 제 어깨에 걸쳐진 팔을 거칠게 치워냈다. 에스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미약한 힘이지만, 서주안은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한지우는 서주안과 멀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용기를 되찾았는지 표독스럽게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협조할 일은 없지만, 만일 그런다 해도 협회가 하나뿐인 S급 가이드를 빼앗기고도 그냥 A급으로 만족하려고 할 것 같냐? 그리고 네가 입 털면 나만 좆되는 건데 누굴 병신으로 아나.”

한지우가 떨던 것도 잊고 서슬 퍼런 눈으로 보았으나 서주안은 오히려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리 으슥한 곳이라고 해도 적진 한가운데서 할 짓이 아니었다.

“하하, 네 말도 맞네. 그래도 다음에 다시 올 테니 생각해 봐.”

서주안은 그 말을 끝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싱겁게 물러나는 것이 오히려 더 수상쩍었으나 잔뜩 긴장했던 한지우는 그런 생각까지 할 겨를이 없었다.

“……하아.”

한지우는 거친 숨을 토하며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에스퍼의 보호 아래에서만 위험을 마주했던 그에게 보호막 없는 위협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한참을 주저앉아 몸에 힘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그때, 누군가 한지우에게 다가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저벅거리는 발소리에 한지우가 파드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 격한 반응에 놀란 것은 오히려 상대였다.

“깜짝이야.”

박현준 대리였다. 이곳에서 종종 담배를 피우곤 했는지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었다. 그는 그저 별 뜻 없이 주저앉아 있던 이가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다가온 것이었다.

박현준은 땀을 흠뻑 흘린 채 숫제 자신을 노려보는 한지우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한지우 가이드, 괜찮아요? 무슨 땀이…….”

‘말할까?’

서주안은 반정부 소속에서도 주요 인물에 속했다. 게다가 그 잘난 능력 탓에 협회 측에서도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런 이가 가이드 교육장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었다.

‘그래도 다음에 다시 올 테니 생각해 봐.’

금방이라도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던 한지우가 도로 굳게 입을 다물었다.

“몸이 안 좋은 거면 의료팀을 부를게요.”

“아뇨! 괜찮아요. 잠깐 속이 안 좋아서 앉아 있었는데 이제 괜찮아졌어요.”

한지우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서주안과 마주쳤다는 건, 그것도 그가 가이드 교육장에 나타났다는 건 코드 레드에 해당하는 수준의 위험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인가.

‘……나까지 의심당할까 봐 그런 거야. 아무 일도 없었잖아.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지.’

한지우는 굳은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이젠 이하진 가이드도 있으니까 한지우 가이드 혼자 너무 열심히 할 필요 없어요.”

박현준은 한지우의 짐을 덜어줄 요량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짐을 제 욕심으로 꾸역꾸역 지고 있던 한지우에게는 오히려 안 좋은 쪽으로 영향을 주었다.

‘시발, 이하진…… 이하진!’

평소의 한지우였다면 내가 그놈보다 못한 게 뭐가 있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을 테지만, 그저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대신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럼 이만.”

그는 꽉 깨문 이로 인해 턱이 아려왔으나 깨문 이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영문 모를 박현준 대리만이 뒷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 * *

그 시각 하진은 짐을 챙기기 위해 원래 살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한승호와 백자안이 하진의 양옆에 앉아 살벌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누가 하진의 옆에 앉을 것인지 다투다가 차라리 하진을 가운데 앉힌 것이다.

‘가운데 자리가 제일 불편한데.’

아무래도 이 덜 자란 에스퍼들은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배려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양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해대니 시끄럽기까지 했다. 인내심 하나는 자신 있는 하진까지도 이젠 한 번씩 울컥하려고 하니 말 다 했다.

“조용히 갑시다.”

그나마 이렇게 하진이 말하면 듣기는 한다는 게 다행이었다. 귓등으로도 안 들으려 했다면 진지하게 팀을 바꿔 달라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하진은 양옆에 앉은 이들이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으나 앞만 봤다.

그제야 차진우가 왜 진지하게 어리광을 받아줄 필요가 없다고 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시간도 잘 가는 듯했다. 점점 눈에 익은 풍경이 이어지더니 곧 익숙한 건물 앞에서 차가 멈춰 섰다.

“협회 직원들이 한차례 수색을 마쳤고, 지금도 주변을 경계하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하진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현관을 열었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망연자실한 음성에 차진우가 면목 없는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워낙에 다급한 상황이어서 신발을 벗을 생각을 못 한 것 같습니다.”

발자국. 까만 발자국이 그야말로 집 안 바닥에 온통 퍼져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집 안에 누가 숨어 있을지,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 와중에 신발을 벗고 들어갈 생각을 누가 하겠는가.

……그래도 집 안 가득 퍼진 신발 자국을 보고 있으려니 끔찍했다. 침대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는 걸 참고 넘겨야 하는 기분이랄까.

‘아니다. 이제 내 집도 아닌데.’

집은 협회 소속이 되어 숙소에서 생활하게 된 하진을 대신해 협회에서 처분해주기로 했다. 내 집이 아닌 걸 상기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가 안 치워도 돼.

“그럼 저는 짐 좀 챙길 테니 잠시 앉아 계세요.”

“도와줄까요?”

이도윤이 사심을 품고 다가왔으나 하진이 고개를 저으니 작게 혀를 차며 물러났다.

장정 넷을 소파에 앉혀놓고 하진은 방으로 향했다. 자잘한 건 다 버린다고 생각하고 필요한 것만 챙길 생각이었다.

가지고 온 캐리어를 열고 우선은 옷을 챙겨 넣었다. 쉬는 날이라고 딱히 나가는 일이 없어서 그런지 대부분이 정장이었다.

‘새 옷을 사긴 해야겠군.’

옷과 속옷을 챙긴 후에는 서랍을 열었다. 중요한 것들을 넣어두는 공간이었다. 혹시라도 없어졌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그들이 노리는 건 하진이어서 그런지 물건은 없어진 것 하나 없이 전부 멀쩡했다.

통장이며 인감도장, 필요한 서류 등을 빠트리지 않고 챙기고 나니 더는 챙길 게 없었다.

하진의 생활이 검소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것들은 협회 안에 준비가 되어 있어서 따로 챙길 게 없었다.

“이거만 챙기면 되겠군.”

마지막으로 하진은 어릴 때 찍었던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를 챙겼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졸업사진이나 증명사진 외의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는 이 액자 속 사진이 하나밖에 없는 어린 시절 추억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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