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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16화 (16/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16화

가이드들만 있는 곳이라 에스퍼는 확실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사실을 잘 아는 하진의 에스퍼들이 다른 장소를 요구했으나 하진의 만류에 입술을 비죽이면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얼굴 보고 살아야 할 사람들인데 초장부터 괜히 밉보일 필요는 없지.’

하진의 생활 수칙 중 하나였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는 남들과 똑같이 행동해야 했다.

특별 취급은 곧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관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제 정체를 숨겨야 했던 하진으로서는 특별 취급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가치를 높여야 했던 협회장과의 대면에선 약간의 잘난 척과 특별 취급이 필요했지만, 함께 일해야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선 그런 태도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다.

쉽게 설명해 협회장은 하진이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인재를 스카우트하러 온 사장이고 이제부터 마주쳐야 하는 가이드들은 그 회사의 직원들인 거다.

물론 진짜 직장과는 다르니 하진이 혼자 모난 돌처럼 행동해도 아무 상관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만나보지도 않고 벌써부터 태도를 정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 인생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그냥 따로 교육받지. 아니면 우리가 알려줄 수도 있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꾸역꾸역 기어코 하진과 함께 차에 오른 한승호가 들어달라는 듯 중얼거렸다.

“됐습니다. 전문가한테서 받아야죠.”

그러나 하진의 맞는 말 앞에선 투정은 통하지 않았다.

“하…… 맞는 말만 하니까 할 말이 없네.”

알파 팀이 내심 꿍얼대는 한승호를 응원해 봤지만, 하진은 끄떡없었다.

결국 차가 교육장 앞에서 멈출 때까지도 하진을 설득하는 데에 실패한 그들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근처 카페에 자리 잡았다.

“하진 형.”

건물로 들어서려는 하진을 붙잡은 건 백자안의 목소리였다. 기껏해야 하루지만, 들을 때마다 왜인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부드러운 울림이었다.

“다녀오세요.”

그러자 선수를 빼앗겼다는 듯 다른 이들 또한 인사를 남겼다.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

형 호칭만은 꼬박꼬박 붙이겠다고 했으면서 까먹는 건지, 자각도 못 하는 건지 한승호는 자주 형이라는 말을 빼곤 했다. 그에 지적하기를 멈춘 건 하진이었다.

“괜히 시비 거는 놈들 있으면 승호 형 이름 팔아요. 아니면 대장 이름 팔든가.”

“대장은 몰라도 내 이름은 왜 파는데?”

“몰랐어? 형 미친놈으로 유명하, 아!”

지지 않겠다는 듯 그다음으로 말은 이은 사람은 이도윤이었다. 하진은 그가 새침하게 생긴 대로 툭툭대지만, 아닌 척 저를 챙기려 드는 게 기특하기도 했다.

물론 하진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 알면 그런 게 아니라고 답답해하겠지만 말이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소란을 뚫고 차진우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하진을 배웅했다. 그냥 교육받으러 가는 것뿐인데 장황한 작별 인사에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누군가에게 이런 배웅을 받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제야 앞으로 이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잠시 낯선 기분에 입을 다물었던 하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머쓱하고 어색한 건 사실이기에 하진은 서둘러 발을 돌렸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고작 교육받으러 가는 걸로 에스퍼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서 ‘아빠, 다녀오세요’ 인사하는 것 같은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건 창피하기도 했다.

“이건 협회장님께서 보내신 전언입니다. 이하진 가이드의 등급은 S급으로 지정하셨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발표는 이하진 가이드의 교육이 끝나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오히려 하진으로서는 다행이었다.

전 세계 최초의 S급 가이드라는 감투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할 만큼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등급 측정 불가라는 사실이 퍼졌다간 정말 24시간 밀착 경호 겸 감시를 당할 게 분명했다.

“여기서부턴 교육장 직원이 안내해드릴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이가 다가왔다. 고개를 끄덕인 하진은 돌아서는 이에게 인사를 남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허, 아주 VIP 납시셨네. 고작 교육받으러 오면서 에스퍼를 뭐 저렇게 줄줄이 끌고 오는 건지.”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하진의 시선이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입을 연 이는 하진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오히려 삐뚜름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들으라는 듯 떠들어댔다.

“뭐, 귀한 S급 가이드이라시는데 당연히 저 정도 되는 호위가 필요하시겠지.”

“아니면 겁쟁이라거나.”

“한지우 가이드! 민경원 가이드!”

옹기종기 모인 이들이 킥킥대며 저열하게 떠들어댔다. 그 모습에 안내를 맡은 직원이 대경실색하며 그만두라는 듯 그들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협회에 몸을 담았기에 오히려 이곳의 생리를 잘 알았다.

몸소 겪어 왔으니까. 눈앞의 S급 가이드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협회장은 자신들을 버리지 못할 거란 것도.

S급 가이드가 얼마나 대단하든 협회에 속한 모든 에스퍼를 가이딩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협회와 에스퍼는 많은 가이드를 필요로 했다.

그 예로 그들을 타박하듯 이름을 부르며 경고한 직원도 그 이상의 태도를 취하지는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한지우라고 불린 이는 오히려 뻔뻔하게 왜 그러냐는 듯 순진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리님, 왜 그러세요. 저희는 그냥 저희끼리 떠든 것뿐인데. 설마 S급 가이드님 앞에선 함부로 입도 못 여나요?”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화가 불쑥 날 정도였으나 대리라고 불린 직원은 그럼에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괜히 저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당장 가이딩을 못 하겠다고 드러눕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모조리 자신이 뒤집어써야 하니까.

특히나 저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한지우는 A급 가이드였다.

가이드들 사이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하진이 오기 전까지는 그나마 S급 에스퍼들을 가이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가이드.

‘젠장. 이놈의 협회는 애새끼들을 어떻게 키우는 거야.’

대리는 속으로 욕할지언정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머릿속에서 빠르게 두 사람을 저울 위에 올려두었다.

이 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데다가 제가 가진 이점이 뭔지 알고 그걸 쥐고 흔들 줄 아는 못된 녀석과 S급이라고는 하나 아직 아무것도 몰라 이제 겨우 교육을 들으러 가는 하진.

둘 중 어느 쪽이 달래기 쉬운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대리는 등을 돌려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만들고 하진을 보았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하진 가이드. 혹시 기분이 상하셨더라도…….”

한 번만 봐달라고 하기도 전에 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저 나이에는 저럴 수 있죠.”

하진의 말에 한지우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이렇게 대놓고 어린애 취급이라니. 가이드가 되고서는 한 번도 그런 취급을 받아본 적 없는 한지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하진의 대답을 들은 대리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교육장으로 다시 가시죠.”

“예.”

하진이 이 상황을 넘긴 건 딱히 별 이유가 없었다. 저들의 나이가 어려서이기도 하고, 사이에 낀 대리, 하진과 같은 직급인 사내가 쩔쩔매는 게 안쓰러워서이기도 했다.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정말로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래 집단끼리 묶이면 이런 일은 흔했다. 그런데 어린애들을 한데 모아놓은 거로도 모자라 가진 힘에 등급까지 매겨놨으니 그 질풍노도 시기의 아이들이 가만히 있겠나.

등급이 높은 이들은 권력이라도 잡은 양 굴 것이고, 등급이 낮은 아이들은 굴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굳이 이곳이 아니더라도 이런 양상을 보이는 곳은 흔했다. 당장에 학교가 그러하고 회사가 그러했다. 하진은 초등학교 입학도 전에 양친을 모두 잃고 성인이 되기까지 심심하면 ‘고아 새끼’라는 말을 들었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만, 그래서 무섭다는 말이 있다. 딱히 상처 주려는 의도 없이 양친의 부재를 입에 담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게 어떤 뜻인지 잘 알고 짓누르기 위해 입에 담는 아이들도 있었다.

처음엔 하진도 많이 상처받았다. 하진이라고 해서 태어나면서부터 덤덤하고 무던한 성격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아 새끼라는 말도 듣다 보니 익숙해졌다. 사는 게 바빠서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그 말대로 받쳐줄 토대가 없는 고아인데 남의 말에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진은 그 시간에 차라리 조금이라도 더 책을 읽고 영어단어를 외웠다.

‘또래 중에 제일 커다란 녀석에게 멱살 잡혀 윽박도 당해봤는데 애들이 저래 봤자…….’

저들은 적어도 패륜적인 발언은 하지 않지 않나.

오히려 하진이 어릴 때 들은 욕을 떠올리면 저 정도는 그냥 투덜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하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하진을 괴롭혔던 녀석들은 그래봤자 같은 학생, 그것도 말릴 수 있는 선생이라는 제어기가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가이드들은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란 제 머리 위에는 하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덜 자란 성인이라는 것이었다.

“저, 새끼가…….”

한지우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선 하진을 보며 이를 갈았다. 스물셋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보다 잘난 이를 만난 적이 없던 한지우에게는 그 무시가 크나큰 자존심의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미련 없이 등을 돌린 하진에게는 그 화가 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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