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15화
하진은 그가 의식하면서도 반말이 나오는 걸 보며 심각해졌다. 그래도 정부 소속이라면서 대체 애들을 어떻게 키운 걸까.
깊게 파고들었다간 자신만 귀찮아질 것 같아 고개를 저은 하진은 한승호에게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스물다섯.”
하진과 7살 차이였다. 형 소리 듣지 못할 나이 차이는 아닌데도 친밀한 관계보다는 회사 생활에 익숙한 하진은 마치 신입이나 인턴이 제게 형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 어색함을 느꼈다.
‘……그래도 저렇게까지 하는데 그냥 허락할까.’
솔직하게 반말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허락을 구하는데 뭐 대단한 거라고 버티겠는가.
어색하기야 하겠지만 하진은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떨어진 허락에 한승호가 주먹을 꽉 쥐며 좋아했다.
“아싸! 형도 그냥 말 까!”
‘요즘 애들 말투는 다 저런가.’
7살 차이면 세대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는 차이였다. 특히나 요즘 같은 사회에서는 서너 살 차이에서도 세대 차이가 느껴진다고 하지 않나.
하진이 한승호의 자유분방한 말투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이쪽이 더 편하고.”
그게 아직은 선을 긋는 중이라는 걸 알아듣지 못할 이는 없었다. 한승호가 서운한 듯 입술을 비죽였지만, 하진에게도 자신만의 선이 있는 법이었다.
특히나 사람과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하며 인간관계 또한 협소하기 그지없었던 하진에게는 이것도 나름 봐주고 있는 거였다. 어쨌거나 하우스 메이트가 되었으니 말이다.
‘……새로운 직장 동료와 함께 산다는 게 어색하긴 하지만.’
하진은 어릴 때 이후 누군가와 함께 살아온 경험이 없었다. 집 안에 자신 말고도 사람이 넷이나 더 있다는 사실이 퍽 어색했다.
게다가 하나같이 하진에게 꿀이라도 발라놓은 듯 쳐다보고 있으니 아무리 무던한 하진이라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저는 그냥 남는 방 쓰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죠?”
“따라오시죠.”
“와, 내 방 옆이네. 아, 저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차진우를 따라나서자 곧바로 옆에 이도윤이 따라붙었다. 형이라. 하진은 또 한 번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나이가……?”
“스물셋이요.”
아홉 살 차이, 거의 열 살 차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어린애에게 형 소리를 들어도 되나. 하지만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부르라고 하기엔 또 자존심이 상했다.
하진은 자신이 어리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저씨 소리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을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많이 어리네요.”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그런 것치곤 첫 만남에선 아저씨라고 했던 것도 같은데 말이다. 하진의 시선이 잠시 이도윤에게 머무르며 과거의 기억을 헤집었으나 잘 기억나지 않아 그냥 넘어갔다.
“그냥 이하진 가이드라고 부르는 건 어떻습니까.”
“싫어요. 승호 형한테만 허락해 준다고? 치사하게?”
‘그게 이렇게 되네.’
여전히 이도윤에게 형 소리를 듣기 껄끄러운 면이 있었으나 차별로 느껴진다면 굳이 고집부릴 건 없었다.
“그럼 형이라고 부르세요.”
“나한테도 말은 안 놓을 거예요? 우리 이제 옆방인데.”
“야, 이도윤아. 나랑 방 바꿀래?”
“꺼져.”
“이 새끼가, 형한테!”
“아, 저리 가라고!”
젊은 혈기답게 이도윤과 한승호는 별것도 아닌 걸로 금방 불이 붙어선 아옹다옹하기 시작했다.
그 둘이 그러는 사이, 위치 때문에 하진의 옆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밀려났던 백자안이 홀라당 빈자리를 차지했다.
“저는 하진 씨라고 불러도 되나요?”
백자안으로서는 하진에게 조금 더 특별해지고 싶다는 다른 꿍꿍이가 숨어 있었으나 하진에게는 그저 어린 녀석이 맞먹으려 드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회에 나오면 인턴이나 신입으로 한창 어리바리 떨 나이인데 하진 씨라니.
“나이가?”
“스물다섯이에요.”
한승호랑 동갑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미 그와도 서로 편하게 말을 놓았었지.
“형이라고 부르는 건 싫나요?”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는 건 뭔가 꼰대 같아서 권유형으로 물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그게 권유형이었겠지만, 이미 하진에게 홀릴 대로 홀린 백자안은 오히려 부드럽게만 들리는 목소리에 덜컹 떨어지는 심장을 가까스로 붙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혀엉.”
어쩌다 보니 팀원들의 나이를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하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마지막 남은 팀원인 차진우에게 향했다. 그에게 향하는 시선에는 이유 모를 기대감이 피어났다.
“팀장님께서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도 됩니까?”
그렇지 않아도 차진우는 하진이 묘하게 제게만 더 딱딱한 태도를 보이는 걸 신경 쓰고 있었다.
“서른셋입니다.”
“아, 그럼 저보다 한 살 위이시군요. 저는 서른둘입니다.”
차진우는 잠시 저를 형이라 부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했으나 나중에 친해진 상태면 모를까 지금은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적당한 긴장감을 위해선 너무 편해지는 건 좋진 않았다. 그 어떤 긴장감을 말하는 것인지 차진우만 알겠지만 말이다.
“……그냥 편하게 진우 씨라고 부르십시오. 저희는 그리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팀장님이신데요.”
“팀장이기 때문이죠.”
뜻을 모를 말에 방문을 앞에 두고 멈춰 선 하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차진우는 사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멀끔한 얼굴로 대답했다.
“앞으로 같이 일해야 하고, 또 에스퍼와 가이드라는 특성상, 우리는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를 위한 하나의 방안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팀장이 사기 치네.’
‘혼자 특별 취급받으려고.’
떨떠름한 눈으로 제 팀장을 바라보는 한승호와 이도윤과는 달리 가장 먼저 눈을 번뜩여야 할 백자안이 웬일인지 조용했다.
하진을 만나러 가기 전에도 몇 번이나 자기가 같이 가면 안 되냐고 드물게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 한 백자안의 집착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이 새끼, 설마 이상한 생각하는 건…….’
“……좀 더 일찍 태어났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태어났어.”
‘미친놈.’
한승호는 잠시 끌어 올렸던 긴장을 탁 풀어버렸다. 그래, 저건 또라이였지.
차진우의 이야기를 들은 하진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살 차이면 이름으로 부른다고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는 게 없는 자신과 달리 하나의 팀을 이끄는 차진우의 말이니 그 말대로 해서 나쁠 것 없을 거였다.
“예, 그럼 진우 씨. 잘 부탁드려요.”
차진우는 멋대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올리며 하진의 손을 맞잡았다.
하진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팀장이 내숭 떤다고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건 나중에 훈련장에서 잡아 패면, 아니 훈계하면 될 일이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비로소 혼자가 된 하진이 낯선 방 안을 한 번 둘러본 후 침대에 앉았다.
그 과정에서 에스퍼들이 하진의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려는 걸 떼어내느라 차진우가 결국 그들을 훈련장으로 끌고 가야 했지만. 그 덕에 어쨌든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깔끔하네.”
애초에 미리 준비를 해뒀는지 침구고 옷이며 당장에 필요한 것들은 충분했다. 게다가 취향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잡다한 것들이 없는 구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흐음.”
마치 남의 방에 들어온 것처럼 침대에 앉아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하진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듯 드러누웠다.
비싼 매트리스인지 꽤 강하게 머리를 박았는데도 그다지 아프지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맘 편히 쉴 수 있는 것도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협회장과 송 박사는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한 기본 상식조차도 모르는 하진을 보며 황당함을 갖추지 못했다.
이해는 했다. 요즘 세상에서 에스퍼, 가이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나. 아무리 뉴스로만 소식을 접했다고 해도 그렇지.
사실 뉴스만 봐도 어지간한 정보는 알 수 있는데 하진이 집착적으로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한 소식을 피해 다닌 덕이었다.
“……다른 게 급한 게 아니었군.”
하진은 그 순간 처음으로 선생들이 어쩌지 못하는 골칫덩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모범생도 그런 모범생이 없었던 하진으로서는 색다른 기분이었다.
“다행히 교육장에는 좋은 선생이 있으니 도움이 될 겁니다.”
아무튼 협회장이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으니 아마 당장 내일부터 교육에 들어갈 게 분명했다.
“그럼 우선…….”
잘까.
많은 일이 있었지만, 시간만 따진다면 아직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편한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내일이면 사라질 달콤한 휴식일 테니 지금 충분히 즐겨둬야지.
“하암.”
하진은 입도 가리지 않고 하품한 뒤 제대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 * *
하진의 예상대로 다음 날이 되자 곧바로 협회장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가이드들이 교육받는 곳이 근처에 따로 있으니 하진 또한 그곳으로 가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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