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14화
“계약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내일 하기로 할까요? 우선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차진우 팀장?”
협회장의 부름에 차진우가 한 걸음 다가섰다.
“예.”
“이하진 가이드를 숙소로 안내해 주게나.”
그 말에 차진우를 비롯한 알파 팀이 눈을 빛냈다. 차진우는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협회장 욕심대로라면 하진을 어디에 어떻게 써먹을까 고민했을 건데 곧바로 자신들에게 붙이는 걸 보아하니 급하긴 오죽 급한 모양이었다.
“하진 씨, 가시죠.”
* * *
송 박사와 협회장에게서 드디어 벗어난 하진은 저도 모르게 넥타이를 끌러 숨통을 트며 한숨을 쉬었다.
시종일관 하진을 지켜보고 있던 알파 팀은 그 한숨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힘들어요? 안아줄까요?”
“송 박사 그 영감탱이는 왜 사람을 귀찮게 하고 난리야.”
“협회장은 또 어땠고. 나 영감탱이가 굽실거리는 거 처음 봤잖아. 그 모가지 뻣뻣한 인간이 말이야.”
“협회 안이다. 말조심.”
“네에.”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으려 하는 입담들에 차진우가 자중시켰으나 그 또한 딱히 유감은 없어 보였다.
그 와중에 백자안은 계속해서 팔을 벌리고 대기 중이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서른둘이나 먹고 연하에게 달랑 안겨서 옮겨질 것 같아 하진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단순히 피곤한 것뿐인데요.”
“안겨도 괜찮은데…….”
백자안은 아쉬워하면서도 팔을 물렸다. 아직은 막무가내로 굴 때가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진을 파악한 바로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듯 보였다.
‘그러면서 폭주 에스퍼를 무시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여리기도 하지.’
자신이 그어놓은 선 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고 있으나 그 안에만 들어가면 이 다정한 사람은 사심을 가진 접촉도 거절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백자안은 그때를 위해 지금은 한 걸음 물러나기로 했다.
입맛을 다시며 물러나는 꼴을 보고 한승호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고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으나 깔끔하게 무시했다.
숙소로 향하기 위해서는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협회 본부가 서울에 있는 것과 달리 에스퍼와 가이드의 숙소는 따로 경기도 외곽에 위치해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하진은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가이드끼리 지내는 숙소가 따로 있는 겁니까?”
“그게, 페어가 정해지지 않은 가이드들은 자기들끼리 지내는 숙소가 있는데 팀에 소속되어 있는 가이드는 에스퍼들과 함께 생활합니다.”
“저는 그럼 여러분의 팀에 소속되는 건가요?”
운전 중에도 착실히 대답하던 차진우는 처음으로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는 듯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현재로선 그러하지만, 협회장은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지금은 하진 씨의 능력을 보고 잘 대해 주려 할 테지만, 얼마 가지 않아 하진 씨 능력을 여기저기 사용하려 들 겁니다.”
“흐음…….”
‘나도 치졸하군.’
차진우는 쓰게 웃었다. S급 에스퍼로 각성하고 알파 팀의 팀장으로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에스퍼는 철저히 실적으로 팀을 이룬다.
알파 베타 감마 등 이름으로 정해진 팀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소속된 에스퍼는 능력과 실적에 의해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알파 팀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멤버가 바뀐 적이 없었다.
맞는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는 조금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이능력을 사용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받는데도 그들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견고했다.
그런 만큼 제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하진을 협회장에게 빼앗길까 무서워서 은근슬쩍 안 좋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그가 제 곁에, 알파 팀에 머물러주길 바라고 있다.
사실 제 사정이었다. 감정적인 걸 떠나 현실만 놓고 따진다면 협회장의 태도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측정 불가 가이드.
하진은 이미 S급 에스퍼 네 명을 가이딩하고도 유유히 사라진 전적이 있었다. 가이딩으로 관리받아 온 에스퍼도 아닌, 폭주한 에스퍼를 가이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매칭률이라는 게 있다.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 파장이 얼마나 잘 맞는지를 따지는 거다. 완벽하게 잘 맞는 조합이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에스퍼 한 명과 높은 매칭률을 보이기만 해도 그 가이드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상승한다.
그러나 보통은 그럴 확률은 희박하고 팀 전체와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는 더 희박했다. 그래서 보통은 팀과 매칭률이 50퍼센트만 되어도 팀 가이드로 지정되는 편이었다.
그 효율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폭주를 막아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하진은 제각기 파장이 다른 S급 에스퍼를 모조리 재워버렸다.
제각기 파장이 다른 S급 에스퍼를 재운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당사자인 하진은 잘 모르는 듯하지만 말이다.
일전에 던전이 사라지고, 잠든 에스퍼들이 나타났을 때 협회 직원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었다.
폭주를 일으켰다고 했는데 막상 잠들어 있는 에스퍼들의 폭주 수치가 0으로 떨어져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S급 에스퍼 넷을 동시에 가이딩하다니. 하진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역사에 없었던 가이드였다.
그러니 차진우를 비롯한 알파 팀 모두 바라는 게 있는 강아지인 양 끙끙대는 것이었다.
차는 에스퍼 전용 도로를 타고 빠르게 숙소에 도착했다. 마치 하나의 마을을 보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알파 팀의 숙소가 가장 크고 좋아 보였는데 하진은 이를 보면서 협회의 치졸함에 혀를 찼다.
‘어릴 때부터 애들 모아놓고 이런 식으로 실적에 따라 차별했겠군.’
어릴 때 차출되어 온 에스퍼들이 무얼 알겠는가.
그나마 늦게 발현해서 들어온 이들이면 몰라도 어릴 때부터 이런 취급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저들끼리 경쟁하고 질투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벌써 피곤한데.’
오늘만 해도 하진은 벌써 몇 번이나 협회를 선택한 게 잘한 짓인지 회의감을 느꼈다. 이내 그렇다고 해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깨닫고 알파 팀을 따라 숙소로 들어섰다.
그런 그의 등 뒤로 숨어 있던 시선들이 꽂혔다.
“숙소가 좋네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깔끔했다. 그 점에서 하진은 먼저 놀랐다. 여기저기 출동하다 보면 청소할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청소하러 오는 이가 있는 걸까.
“주기적으로 청소업체가 오지만, 하진 씨가 원하는 때에 언제든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역시 돈이 좋네.’
제 돈 주고 부르기는 아까운 청소업체를 언제든 불러도 된다니. 한없이 떨어지기만 하던 협회를 향한 점수가 조금 올라왔다.
“남는 방이 하나 있는데 하진 씨가 원한다면 다른 녀석들과 방을 바꾸셔도 됩니다.”
“아님 나랑 같은 방을 써도 되고.”
한승호가 차진우의 눈초리에도 굴하지 않고 끼어들어 하진을 꼬드겼다. 하지만 하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 하러 굳이 남과 같은 방을 쓰겠는가.
“사양하죠.”
“……그래도 고민은 좀 하고 말하지?”
“……사양하죠.”
정확히 3초를 세고 사양하자 더 상처받은 듯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하진은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던 문제를 결국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데 왜 반말하십니까?”
“……안 돼?”
“당연하죠.”
한승호는 당황스러웠다. 그는 심지어는 차진우에겐 대장이라는 호칭만 붙이고 반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상대를 무시해서 반말하는 건 아닌 듯했다.
중학생 때 에스퍼로 발현해서 협회에 오게 된 한승호는 이 약육강식의 순리에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지 오래였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린애가 엄청난 힘을 휘두르며 말을 막 놔도 그 누구도 한승호가 반말하는 걸로 뭐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이미지를 신경 써야 할 때나 시민들을 만날 때는 예의를 갖추긴 하지만 그것도 신경 쓰지 않으면 금방 돌아와 버렸다.
만약 저런 말을 한 사람이 다른 이였더라면 네가 뭔 상관이냐고 오히려 쏘아붙였을 테지만, 상대는 하진이었다.
한승호는 잘못을 저지른 대형견인 양 하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자신보다 어린 이에게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는 하진에게 먹혀들었다.
대뜸 반말을 해대는 한승호를 보며 단호하게 한마디 하려던 하진은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풀었다.
사회생활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했을 거라는 점이 하진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
미세한 근육의 경직도까지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에스퍼들은 하진의 반응을 머릿속에 각인할 기세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승호만이 하진이 자신을 싫어하면 어쩌나 싶어 축 늘어져서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 아니 미안해요. 가이드가 생긴 건 처음이라 그랬어요.”
‘맨날 백자안 형한테 여우 새끼라고 하면서 자기가 더 여우 새끼 같네.’
재수 없을 정도로 당당한 한승호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잘못한 강아지처럼 하진의 눈치를 살피는 꼴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도윤은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저런 게 먹힌단 말이지.’
이 중에서 가장 어린 이도윤이 눈을 빛내며 하진의 반응을 살폈다.
반면에 하진은 한승호의 말에 완전히 어깨의 힘을 풀어버렸다. 잘못을 알고 반성까지 하는데 뭘 더 말하겠는가.
그는 제가 연하에 약한 줄도 모르고 한승호를 기특하게 여겼다.
“앞으로 조심하면 됩니다.”
하지만 하진의 격려에도 한승호는 반말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의식하면 괜찮겠지만, 사람이 어떻게 24시간 내내 의식하고 살 수 있겠는가.
차라리 협회장이었더라면 아예 입을 다물고 말았을 텐데 상대가 하진이니 지금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알겠다고 대답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그러다 다음에 또 실수로 반말해서 그가 자신에게 실망하면 어찌하겠는가.
“형이라고 부르고 말 놓으면 안 돼? 요? 나 자신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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