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12화
사실 하진도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무리 다친 사람 하나 없다지만, 총알이 날아다니는 상황을 대한민국 사회에서 몇 번이나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제 발로 협회까지 걸어 들어왔으니 제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야 했다. 안 그런 곳도 있지만, 어디나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분란이 생기기 마련이다.
지금만 봐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다니던 직장만 해도 입사 초기에는 결벽증에 아웃사이더처럼 구는 하진을 뒤에서 욕하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나.
‘뜬금없이 나타난 가이드가 S급 에스퍼들의 호위를 받고, 협회장까지 직접 내려와 반길 정도니 같은 가이드들한테는 위기감으로 느껴지겠지.’
하진은 에스퍼와 가이드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게 없다. 겪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가이딩 한 번에 이들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아닌 척해도 가이드들이 가지는 우월감이 있을 거다.’
게다가 나라에서 어릴 때부터 선별해 데려와 키운 가이드들이니 자기들끼리 얼마나 고이고 썩었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이 협회장과 S급 에스퍼들을 끼고 이러고 있으니 아마 내일이 되면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등급은 어차피 S급일 테니 신경 쓸 것 없다. 그럼 협회장이 있을 때 내 위치를 좀 더 견고히 해야 해.’
가치관을 바꾼다는 게 쉽지 않겠지만, 하진은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심지어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무언가 해보기도 전에 경계받게 생겼다.
그러니 차라리 괴롭힐 생각이라도 못하게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괜한 걱정이면 좋겠지만, 노려보는 눈초리들이 심상치 않으니 미리 조심하게 되었다.
하진이 한숨을 삼켰다. 회사 다닐 때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내 정치에 끼어들어야 한다니.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이었다.
“허허, 이거 참. 이하진 가이드의 열정이 이렇게 대단할 줄이야. 역시 젊어서 그런가 봅니다. 이런 점은 나도 배워야겠어요.”
그런 하진의 마음도 모르고 협회장은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이하진 가이드의 생각이 그렇다면 곧바로 검사를 준비하죠. 이 비서.”
“네, 협회장님. 바로 가시면 됩니다.”
“그럼 가시죠.”
협회장이 먼저 앞장서자 뒤에서 한 번이라도 하진과 대화를 나누려고 기다리던 이들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슬슬 물러났다.
그 번들거리는 시선들을 보지 못한 척, 하진이 걸음을 옮기고, 그 뒤를 알파 팀이 보호하듯 따라붙었다.
“괜찮겠습니까? 조금 쉬어도 되는데 말입니다.”
차진우가 작게 속삭인 말에 하진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죠.”
사람들 틈에서 나오자 아니꼽게 보는 시선들이 더욱 짙어졌다. 새삼스레 그 시선에 기가 죽은 건 절대 아니다. 고작 저런 거에 주눅 들기엔 하진의 심지가 너무도 굵었다.
다만 귀찮으니까. 저 나이대의 애들이 얼마나 성질이 불같은지는 친구가 없는 하진도 잘 안다. 그런데 거기에 가이드라고 오냐오냐 모셔지면서 컸다?
‘에스퍼가 없으면 한 걸음마다 시비가 걸리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안 그래도 멀쩡한 직장과 집을 잃은 마당에 어린애들 시비까지 받아줘야 한다니.
귀찮다. 그러니 유치하더라도 저들의 입을 막을 수 있게 등급 측정부터 하려는 거다.
이건 하진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뒤에 서 있는 이들이나 협회장이 저 뜨거운 시선을 느끼지 못해서 모르는 척하겠는가.
물론 몇 번인가 저것들이 뭘 꼬나봐, 하는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은데. 어쨌든 저들에게는 앞을 막아설 명분이 없었다.
아무튼 측정실로 이동하고 나서야 적의 어린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뒤를 지키고 선 에스퍼만 없었더라면 진즉에 뒤통수가 뚫렸으리라.
“송 박사.”
협회장의 부름에 나이가 지긋하고 귀밑머리가 허옇게 올라온 사내가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협회장님. 이쪽이 그 가이드분이신가요?”
송 박사라 불린 이의 시선이 닿자 하진은 언제 피곤해했냐는 듯 얼굴 표정을 바꾸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하진입니다.”
“송진성 박사예요. 실례가 아니라면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이름을 나누자마자 질문이라니. 당황하긴 했으나 거절할 입장이 아닌 하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괜찮습니다.”
“발현이 늦은 겁니까, 아니면 숨긴 겁니까?”
훅 들어온 노골적인 질문에 하진의 포커페이스가 처음으로 깨졌다.
“예?”
하진이 당황하자 지켜보던 에스퍼들이 입을 열려고 했으나 협회장이 손을 들어 막았다. 제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협회에 속한 이상 그를 무시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불만스럽게 이를 악물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차진우는 숨을 깊게 뱉으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본래의 그라면 침착했을 것이다. 오히려 튀어 나가려는 이를 막은 게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진하고만 엮이면 원래의 자신이 아니게 되었다.
‘쯧, 다른 놈들을 멍청하다고 욕할 게 아니었군.’
그러나 더 어이없는 건 그런 변화마저도 기껍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던 모습을 잃어 가는데도 그 변화의 이유가 하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하진의 색으로 물들었으면 했으니 말 다 했다.
‘내가 이 정도인데 나머지 놈들은 아주 뇌가 없는 것처럼 굴겠지.’
차진우는 어지간해선 잘 나오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자신도 그냥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싶은데 팀원이라는 어린놈들이 있으니 억지로라도 이성을 챙겨야 했다.
다시 하진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캐물을 줄은 몰랐기에 당황하고 말았다.
작정하고 추궁하려 드는 사람 앞에서 당황해봤자 사실을 인정하는 셈밖에 안 되는데도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정하자.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 오히려 나쁘지 않다.’
협회장의 앞에서 대놓고 물어본다는 게 무얼 뜻하겠는가. 하진은 머리를 굴렸다.
에스퍼, 가이드 신고 의무를 어긴 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 혹은 징역 3년 이하의 벌을 받을 수 있는 중죄이다. 그런데 굳이 하진에게 숨긴 것인지 아닌지를 묻는다?
‘그냥 형식상 물어보는 거네. 그도 아니면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봐주겠다는 뜻이거나.’
생각을 마친 하진의 눈빛이 다시 평소와 같이 가라앉았다. 그러자 송 박사가 재차 물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가요?”
하진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다만 이렇게 직접 물으실 거라 생각하지 못해서 잠시 당황했습니다.”
“이런,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놈이다 보니 눈치가 없었습니다.”
송 박사의 너스레에 완전히 평온을 찾은 하진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잠시 당황했을 뿐, 탓하려고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협회에는 다 이렇게 능구렁이 한 마리씩 잡아먹은 사람뿐인가.’
생각했던 것만큼 쉽게 흘러가지만은 않는 상황에 하진은 그냥 나중에 측정할 걸 그랬나 하다가도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나 나중이나 똑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매를 일찍 맞냐, 늦게 맞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하진은 느릿하게 마른 입술에 혀를 내어 적신 후 대답했다.
“물론, 발현이 늦은 쪽이죠.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검사의 눈을 피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지요. 하하, 알파 팀 전부를 가이딩했다기에 능숙한 가이드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서 실례라는 걸 알면서 이런 질문을 했네요. 이해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이해합니다.”
가식적인 말에는 가식적인 대답으로. 믿든 믿지 않든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줬으니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났다. 마침 협회장 앞이니 따로 말 나오더라도 문제 될 리는 없을 것이다.
‘능구렁이…….’
하진은 좀 더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다. 송 박사 스스로 저 판을 깔았을까? 하진은 어쩐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하진의 시선이 힐끔 돌아가려다 말았다. 그렇다면 역시 이 판을 깔도록 지시한 건 협회장일 것이다. 증거도 없지만 하진은 거의 확신에 가깝게 그리 생각했다.
‘조심해야겠어.’
잘못하다간 아주 홀라당 먹힐지도 모른다. 가이드임이 드러나고 여기저기서 노려지는 이상 다른 데 갈 곳도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등골을 죄 뽑아 먹힐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럼 바로 측정 들어가죠. 이쪽으로 오세요.”
송 박사를 따라가자 텅 빈 공간에 작은 기계 하나가 있었다.
“자, 이걸 잡아보겠습니까?”
“이걸로 측정하는 겁니까?”
정부에서 주기적으로 실시하던 검사 때와는 다른 모양의 기기에 하진이 의아해했다.
송 박사는 그런 하진의 반응에 허허 웃었다.
“최근에 기기를 바꾸었지요. 예전에 쓰던 건 오래된 버전이기도 하고 생각보다 무게가 나가서 이동이 불편했거든요.”
자, 얼른 끝내봅시다. 그 말에 하진이 기계를 잡았다. 누군가 손을 대면 전원이 들어오는 건지 장난감 거짓말탐지기처럼 생긴 기계에 불이 들어오더니 1분가량 불빛만 깜박거렸다.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가 싶을 때 송 박사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듯 의아한 얼굴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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