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11화 (11/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11화

수십 년간 착용했던 장갑을 벗어 던진 하진은 어떻게 보면 덕분이라고 할 수 있는 한승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한승호가 그 손을 누가 잡기라도 할까 싶어 먹이를 낚아채듯 빠르게 잡았다.

“혹시 가이딩이 부족합니까?”

“아니, 그런 건, 하아…… 그런 건 아닌데.”

손을 잡자마자 느껴지는 가이딩에 한승호가 나직한 한숨을 터트렸다. 하진이 없었던 지난 며칠을 대체 어떻게 버틸 수 있었던 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좋았다.

“승호야, 너 변태야? 왜 하진 씨 손을 잡고 숨을 그렇게 내쉬어.”

“넌 닥치고 꺼져, 백자안.”

동갑이니만큼 이래저래 함께할 일이 많은 백자안과 한승호는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정도로 사소한 일로도 자주 부딪혔다.

지금만 해도 하진의 가이딩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해도 모자란 마당에 그 꼴은 못 본다는 듯, 초치는 말과 함께 끼어들어 사람을 긁어대고 있지 않은가.

“하진 씨가 너 때문에 에스퍼들은 다 변태라고 생각해서 가이딩하기 싫어지면 어떡해.”

“넌 진짜 주둥이 좀 닥치라고.”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은 다른 두 사람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었으나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는 하진은 그 살벌한 대화에 당황했다.

뭐지? 사이가 좋지 않은 건가?

‘아니면 저쪽도 가이딩이 부족한 건가?’

파장만 보면 아닌 것 같지만, 당사자가 아니니 쉽사리 확신할 수도 없었다. 고민하던 하진은 반대쪽 손을 어떻게든 꺾어 백자안에게 내밀었다.

“가이딩해 줄게요.”

안 그래도 백자안은 하진을 다시 만나게 된 순간부터 끌어안고 가이딩을 갈구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다.

그런데 한승호가 그런 제 앞에서 하진의 손을 잡고 그의 가이딩에 흐물거리고 있으니 화가 나겠는가, 안 나겠는가.

그래서 평소나 다름없이, 아니 평소보다 조금 더 화가 난 상태로 입을 털었던 거였다.

자신의 구원자는 자신이 어떤 마음을 품은 줄도 모르고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좋아하는 선생님 앞에서만 얌전해지는 어린아이처럼 백자안이 조심스레 그 손을 감싸 쥐었다.

살며시 웃는 모습이 붓꽃같이 예뻤으나 졸지에 그 꼴을 보게 된 한승호의 표정은 쓰레기를 먹은 듯 잔뜩 구겨졌다.

벌서는 것도 아니고 양손을 뒤로 넘긴 채 이상한 자세가 된 하진과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그 손을 감싸 쥐고서 가이딩을 축내고 있는 제 팀원들을 보며 차진우가 한숨을 쉬었다.

“저 녀석들의 어리광을 하나하나 받아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진 씨는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아무리 철없이 다투고 멍청한 얼굴로 가이딩에 취해 있다고 해도 S급 에스퍼였다. 해달라는 대로 가이딩을 해줬다가 하진의 몸이 상할까 걱정되었다. 물론 질투가 섞이긴 했다.

그러나 하진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힘든 일도 아니니까요. ……지금은 조금 팔이 아프긴 한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승호와 백자안이 하진의 손을 놓았다.

헤어진 연인과 몇 년 만에 만났다가 다시 놓아주는 것처럼 애절한 얼굴이었으나 팔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도 그 손을 계속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찌나 빠릿빠릿한지 누가 보면 각인이라도 한 사이인 줄 알게 분명했다.

“쳇, 나도 가이딩받고 싶었는데.”

형들 둘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바람에 그들이 가이딩에 녹아내리는 걸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이도윤이 아쉬움에 혀를 찼다.

그러다 미간을 찌푸린 차진우와 눈이 마주쳐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아닌 척했지만 말이다.

잠깐이면 되겠거니 하고 손을 내밀었다가 오 분이 넘게 붙잡혀 있었던 하진은 저릿한 팔을 주물렀다. 그러자 뒤에서 대신 팔을 주물러주고 싶은지 안절부절못하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힘 조절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 두 번째로 보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안마를 시키겠는가.

그러는 사이 어느새 차가 커다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협회에 도착한 것이다.

“아마 하진 씨를 보러 온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물론 그들 전부 상대하는 건 아니지만, 알아두는 게 좋겠군요.”

차의 시동을 끄며 차진우가 말했다.

“저를요?”

“예. 폭주 에스퍼 한 명과 폭주 직전의 에스퍼 세 명을 재웠으니까요. 심지어는 터지면 끝장인 폭탄 취급받는 S급 에스퍼들이니 협회는 물론이고 정부에서도 관심이 많습니다.”

그 말에 하진은 속이 안 좋아진 것처럼 미간을 구겼다. 협회의 관심을 받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정부라니.

누가 뭐라고 하건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한 하진에게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인사들이었다.

“지금이라도 도망가면 안 되겠죠?”

“됩니다.”

반쯤은 농담이었는데 놀란 기색 없이 떨어진 긍정에 오히려 하진이 놀랐다.

된다고?

“다만 저희를 버리지는 말아 주십시오. 하진 씨가 어디로 향하건 이제는 그곳이 저희가 머물 곳이니까요.”

어쩌면 부담을 넘어서 과할 정도의 호감을 보여주었다. 이젠 신기할 지경이었다. 대체 가이딩이 뭐기에 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농담으로라도 그럼 같이 도망가자고 할 수 없는 진지한 분위기에 하진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저와 그들 사이의 거리가 멀었다.

“하하, 이거 이렇게 얼굴을 뵙게 되는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KCEG의 협회장, 이호승이라고 합니다.”

후려치기나 기선제압을 당할까 싶어 단단히 경계하고 들어왔는데, 곧바로 협회장이라니.

그의 뒤로도 많은 이들이 늘어서서 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부 하나같이 금배지를 달고 있는 데다가 심지어는 뉴스에서 본 얼굴들도 더러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선제압이 맞나.

하진은 제 얼굴이 웃지만 않으면 어리숙해 보이진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협회장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하진이라고 합니다. 협회장님께서 직접 맞이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기가 조금 죽으려 했지만, 그동안 회사에서 윗사람들을 모시고, 아래 후배들을 달래야 하는 대리 생활을 했더니 윗사람 면 세워주는 말이 아주 술술 나왔다.

그리고 협회장 또한 그의 아부가 싫지 않은지 더욱 호탕하게 웃었다.

“영광이라니요. 이하진 씨 같은 가이드를 저희 협회에 모시기 위해서라면 저 하나 움직이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사람 좋게 웃던 협회장은 이내 침중한 얼굴로 변모하더니 하진의 손을 양손으로 맞잡았다.

“낮에 있었던 일은 들었습니다. KEs 그놈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고요.”

과한 접촉에 하진의 뒤에 서 있던 에스퍼들이 몸을 움찔거렸으나 같은 S급 에스퍼라면 모를까,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동작이었다.

‘저 영감탱이가 지금 누구 손을 잡는 거야.’

상대가 협회장인데도 네 사람은 맞잡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기 계신 분들께서 구해주셔서 저는 물론이고 다른 분들 또한 다치지 않았습니다. 천만다행이었죠.”

하진도 협회장과 손을 붙잡고 있는 게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였는지 뒤에 선 이들을 가리키는 척, 자연스레 잡힌 손을 빼냈다.

흡족한 대답에 협회장이 화통하게 웃으며 에스퍼들을 칭찬했다.

“하하하! 제가 협회장이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알파 팀은 정말이지 능력 좋고,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네. 그렇더군요.”

“다만 능력이 출중한 만큼 이들을 가이딩해줄 가이드가 마땅치 않은데 만약 이하진 씨가 알파 팀의 가이드가 되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협회장은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니만큼 사람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능숙했다.

웃으며 알파 팀의 성적을 칭찬하던 협회장이 이게 본론이라는 듯 진지해졌다.

“에스퍼들은 강하지요. 우리 국민들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의 무운이 에스퍼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항상 가이딩이 모자라 힘들어하는 모습에 저는 항상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니 이하진 씨, 아니, 이하진 가이드.”

협회장이 다시 양손으로 하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마치 국운이 하진에게 달렸다는 듯 뒷말을 이었다.

“부디 우리와 오래도록 함께해 주었으면 합니다.”

하진은 감탄했다.

‘이런 식이군.’

만약 하진이 가이드로 발현한 순간, 협회에 왔더라면 정말로 나라의 운명이 제 손에 달렸다고 믿었을 것이다.

사람 좋게 웃고 있지만 그 속에 숨은 속내는 장난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등급 측정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호칭을 가이드라고 바꾸지 않았나.

그러나 하진은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회에 대해 뭐 얼마나 잘 아느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저런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정도는 된단 뜻이었다.

애초에 하진은 입사 초기에도 일을 받으면 ‘네! 제가 해보겠습니다!’ 하고 의욕을 가지기보단 어째서 신입인 내가 하는 거지, 하고 생각하던 쪽이었다.

그런 심드렁함이 기본값인 사람에게 나라의 국운이 어쩌고, 에스퍼가 어쩌고 해봤자 새삼 의무감과 책임감이 생길 리가 있나.

‘그래도 싫으나 좋으나 살려면 협회에 붙어 있어야 하니…….’

뼈를 묻지는 않을 거지만, 적당히 남들만큼만, 돈 받은 만큼은 할 생각이다. 어쩔 수 없이 협회의 소속이 되기로 마음먹었다지만, 하진은 무언가 열심히 해볼 생각은 없었다.

평범한 삶을 글렀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까지 잃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굳이 다짐이랄 게 있다면 하진은 이곳에서도 자신의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이 목표였다.

하진에게선 대답이 없었으나 협회장은 그의 얼굴을 보며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굴었다.

높으신 분들은 이상하리만치 하진의 냉한 얼굴을 좋아했다. 사람이 참 진중해 보인다고 했던가.

“하하, 제가 피곤하실 분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군요. 우선은 조금 쉬시겠습니까? 이 비서, 이하진 가이드에게 숙소를…….”

“아닙니다. 배려는 무척 감사하지만, 우선은 가이드 등급 측정부터 하고 싶습니다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