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9화
차진우의 숨은 여전히 고르게 흘러나왔으나 눈빛만은 수없이 서주안을 찢어 죽이고 있었다.
“뭐야, 서주안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그때 마침 하진을 저격하던 곳을 정리하고 돌아온 에스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들어선 한승호가 서주안을 발견하곤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길거리에 마구잡이로 흩뿌려진 쓰레기를 보아도 저것보단 고울 듯했다. 하지만 서주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안녕, 정부의 개새끼들아.”
“오냐, 안녕하다.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거지새끼야. 너는 들개도 못 돼.”
살벌한 언사들이 이어졌다. 한승호를 필두로 이도윤과 백자안까지 도착해 서주안을 둘러싸려 하자 서주안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진정해. 오늘은 인사만 하러 온 거야.”
“평생 만날 일이 없을 텐데 인사는 왜 해.”
이도윤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다가갔다.
차진우는 하진을 지켜야 하니 움직이지 못한다고 치더라도 세 명의 S급 에스퍼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데도 서주안은 전혀 무섭지 않은 듯 굴었다.
“아, 주인님 지키는 개새끼들이 너무 무서워서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 자기야, 나중에 봐.”
“이 개새끼가! 누가 네 자기야!”
한승호가 벼락같이 소리쳤으나 입술을 모아 쪽 소리를 낸 서주안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런 일이 종종 있는지 알파 팀은 혀를 차면서도 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졸지에 서주안의 ‘자기’가 된 하진이 찜찜해서 물었다.
“안 쫓아도 됩니까?”
한 대도 때리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며 돌아선 이도윤이 대답했다.
“저 쥐새끼 같은 놈이 한 번 도망가면 못 쫓아요. 주제에 S급이라고 한 번 이동할 때면 나라를 뛰어넘을 수 있어서.”
이런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것참 부러운 능력이라고 하진은 생각했다.
차진우 역시 그를 놓친 게 아쉬워 보였으나 빠르게 표정을 감추고 팀원들에게 물었다.
“KEs 잔당들은 다 제압했나?”
“엉. 힘 좀 쓰는 거 같은 놈들은 잡아다 줬으니 잔챙이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
상황이 정리되었다는 말에 하진이 차진우의 손들을 작게 두드렸다. 이제야 자기만 답삭 안겨 있는 게 창피했던 거다.
차진우는 아쉬워하면서도 조심스레 하진을 내려주었다. 마치 깨질 것 같은 유리 조각상을 대하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하진이 다 민망해졌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좀 더 주위를 경계했어야 했는데.”
차진우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작정하고 덤벼드는 놈들이 문제지, 그게 왜 그가 미안할 일이란 말인가. 테러가 뭐 대비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만 이제 앞으로 이런 일을 수없이 당하게 될 거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드는 건 슬픈 일이었다.
“애초에 옥상으로 향한 건 저였고, 차진우 씨가 아니었다면 전 벌집이 되었겠죠.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자 차진우가 당황했다. 하진을 일으켜 세우고 싶어 하면서도 차마 닿지 못하고 허공을 움켜쥐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뭐야. 대장만 분위기 좋네? 우리한텐 떨거지 처리 맡겨놓고 혼자 가이드 독차지하면 좋아?”
‘금발 머리, 그러니까 한승호였던가.’
길 가는 커플에게 시비 거는 양아치처럼 굴던 한승호는 하진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몸을 움찔 떨더니 제자리에 멈춰 서버렸다.
차진우가 딱히 뭐라고 쏘아붙이지 않는 걸 봐선 원래 저런 성격인 듯했다.
하진으로서는 처음 보는 성격이었기에 신기해서 잠시 바라봤는데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승호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뭐, 왜, 왜.”
양아치처럼 굴 때는 언제고 시선 하나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다니. 풋풋했다.
하진은 한승호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지기 직전에 시선을 돌려주었다.
가이드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자 한승호는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쉬었으나 한편으로는 저 시선을 다시 붙들어오고 싶었다.
그러나 시도도 해보기 전에 백자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어, 저 기억하세요?”
서주안이 사라지고서부터 쭉 하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백자안이 슬쩍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하진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는 뜨거울 정도로 바라봤으면서 막상 하진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물론이죠. 몸은 괜찮으세요?”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시체 같은 몰골이라 가이딩을 한다고 해도 죽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멀쩡해 보였다.
그는 하진이 제게 안부를 물어오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이내 눈썹을 축 늘어뜨린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제, 제가 무섭지는 않으세요? 제가 폭주하는 바람에 다치실 뻔했다고 들었는데.”
“와, 저 여우 새끼…….”
한승호가 작게 중얼거렸으나 워낙에 작은 소리라 하진의 귀에는 닿지 못했다. 하진은 그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아직 그가 어린 청년이라는 오해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보다는…… 안쓰러웠죠.”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그래, 하진은 그가 안쓰러웠다. 정확히는 에스퍼라는 존재가 안쓰러웠다.
하늘에 닿고 땅을 뒤엎으면 뭐 하나. 하진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런 힘이라면 줘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안쓰, 럽다고요?”
백자안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에스퍼들 모두 처음 받아보는 동정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이드라서 그런가.’
감히 어느 누가 기상천외한 능력을 이용해 세상을 제 손에 넣고 굴리는 S급 에스퍼를 동정하겠는가.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더라면 코웃음을 치며 비웃어줬을 테지만 그 상대가 하진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생전 처음 맛보는 꿀 같은 휴식을 쥐여준 가이드인데 무슨 말을 하든 밉게 들릴 리가 없었다.
백자안은 당황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눈을 빛냈다.
‘내가 안쓰럽다면 더 안쓰러워해 줘.’
그는 하진이 자신을 안쓰럽게 여긴다면 기꺼이 더 불쌍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는 네 사람 모두 하진의 가이딩을 받았다지만, 그 의미가 백자안보다 큰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폭주의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던 순간에 한줄기 봄바람처럼 밀려들었던 기운을 기억한다.
죽지도 못하고 이대로 이 순간에 갇혀 영원히 고통스러울 것 같았던 때에 닿은 손끝에서 느껴지던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각.
만약 잠들지만 않았더라면 백자안은 아마 하진을 그대로 납치해 사람이라고는 없는 곳에 숨겨버렸을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비유나 과장도 아닌 진심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당장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얌전할 뿐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하진을 어떻게든 제 곁에 머물게 하는 거였다. 동정심을 자극하는 정도로 하진을 얻을 수 있다면 싼값이었다.
‘고작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얌전한 개새끼가 되어줄 수 있지.’
반면에 하진은 고작 안쓰러웠다는 한마디에 마치 날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 같은 반응들을 보며 제가 말을 잘못한 건가 싶어 얼떨떨했다.
하지만 안쓰러운 걸 어쩌겠는가.
의외라면 의외로 고집이 센 하진은 제가 잘못한 게 아닌 이상 말을 번복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쁘실 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프잖아요.”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에 대한 지적에 이미 개가 되어 꼬리를 살랑거리기로 작정한 백자안을 제외한 세 사람이 어색해했다.
백자안은 상황 파악이 느린 제 팀원들을 대신해 하진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가주세요. 저희의 가이드가 되어주세요.”
‘하진 씨를 나눠 가지는 건 싫지만, 일단은 이렇게라도 곁에 두자.’
“으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라는 듯 하진이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백자안은 굴하지 않았다. 고작 저런 반응에 물러날 수 있을 리가.
자신이 굶주리는 줄도 몰랐던 때라면 모를까, 이미 그의 가이딩을 맛보았다. 이젠 그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어졌다.
“이미 다른 세력들도 하진 씨의 정체를 알게 되었어요. 혼자 계시면 언제고 이런 일이 생길 거예요.”
백자안의 의도를 파악한 한승호가 끼어들어 뒷말을 이었다.
“언제고가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가 가고 나면 납치당할걸? 그나마 반정부 놈들이면 가이드 예우라도 해주지. KEs 놈들이면 그냥…….”
죽는다고 봐야지, 라고 하려 했는데 가정이라 할지라도 하진이 죽는다는 말을 꺼내는 게 껄끄러워 말끝을 흐렸다.
‘아주 중증이네.’
고작 가이딩 한 번에 이렇게 될 줄이야.
한승호는 자조했으나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가이딩을 한 번이라도 느껴봤다는 것에서 다른 S급 에스퍼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래서 중증이라는 것이지만.
“그러니 그냥 우리 손을 잡아줘.”
끝내 잡으라는 명령조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싫다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이렇게 매달리는 입장인데.
“후우…….”
하진은 제게 내민 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태연한 척 굴던 한승호의 손이 잘게 떨렸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저들의 말이 백번도 더 옳았다. 저 나름대로 정체를 숨긴다고 숨겼으나 일주일이 채 가지 못했고, 지금도 벌써 한 차례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았나.
비단 자신의 안위만 걸린 게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제 고집대로 버틸 수 있는 만큼은 버티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진의 목숨만 노릴 뿐 아니라 그의 주변인과 일반 시민까지 해칠 수 있는 폭력 단체였다.
제 고집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진아, 부디 너만은 잘살아야 한다. 그 힘을 절대 내보이지 마.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아라.’
환청처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하진은 결국 내민 손을 잡았다. 평범하게, 남들처럼만 살아라.
‘그렇게 살려고 가는 겁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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