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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6화 (6/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6화

이도윤은 백자안에게서 하진을 구해 달아날 수 있을 것인지 가늠해 보았다. 불가능할 것 같았다. 천지 분간 못 하고 나대는 민간인은 그가 백자안에게서 눈을 떼는 순간 죽으리라.

그러나 다행히 이도윤이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하진은 반소매 아래에 드러난 그의 팔뚝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난 괜찮으니 그쪽은 좀 자도록 해요.”

이도윤은 자신이 무어라 대답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대답이란 걸 했던가?

맞닿은 곳에서부터 퍼지는 충족감에 이도윤은 더는 생각을 잇지 못하고 앞선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절하듯 잠들었다.

오랜 시간 파장이 불안정했고, 백자안을 상대하느라 이능력을 과하게 쓴 탓에 피로한 몸에 퍼지는 가이딩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이제 당신만 남았네요.”

백자안은 그렇게 하진을 노릴 땐 언제고 코앞에 하진이 있는데도 손가락 하나 뻗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죽지 않은 게 용한 꼴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폭주로 인해 흐른 코피로 엉망이었고, 몸 전체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으윽, 큭……!”

“……미안합니다.”

그에게 다가간 하진은 사과와 함께 백자안을 가이딩했다.

그 사과는 이렇게 될 때까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서지 않았음에 대한 사과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삶을 고집할 거란 사과이기도 했다.

폭주한 에스퍼이기에 하진은 세 사람보다 더 강한 가이딩을 불어넣어야 했다.

하진의 가이딩으로 인해 백자안은 조금씩 이성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혈색마저도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성과 본능,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백자안은 제 목줄을 틀어쥐게 된 이를 눈에 담았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처음 본 이를 따르는 각인 효과 같기도 했다.

“이, 하진…….”

가지고 싶다. 달리 거추장스레 표현할 것도 없었다. 좋다. 좋다는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너무 좋아서 이하진을 가지고 싶어졌다.

백자안이 하진에게 닿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앞선 세 사람보다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런 와중에도 조금이라도 닿아보겠다고 하진이 있는 방향으로 뻗어진 손끝이 그 집착을 말해주고 있었다.

“후, 끝났다.”

하진은 잠든 네 사람을 한 번씩 훑었다. 보스 몬스터를 잡았으니 이들에게 위협이 될 건 없었다. 설사 남은 몬스터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을 해할 수는 없을 거였다.

그러니 이젠 자신의 삶으로 돌아갈 때였다.

이도윤의 유니폼을 벗은 하진은 잠든 그에게 덮어준 뒤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마스크를 꺼내 썼다. 던전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얼굴까지 보였으나 적어도 밖에서 마주하는 이들에게서는 숨겨야 하지 않겠는가.

던전이 생성된 주변에는 협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진은 정장에 묻은 흙을 탁탁 털고 익숙한 지하철 안을 걸었다. 역 밖으로 나가자 역시나 협회 사람들이 부리나케 다가왔다.

하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몰래 도망가기는 그른 듯했다. 이럴 땐 조금 소홀해도 되는데 말이다. 하진을 가장 먼저 발견한 직원이 다른 이들에게 소리쳤다.

“나왔다! 다들 준비해!”

던전의 주인을 죽였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던전 또한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뒷수습을 준비해야 했다.

“괜찮으십니까?”

명령을 내린 직원의 명찰을 확인하니 협회 소속임을 드러내는 표식이 있었다. 그는 하진에게 담요와 물을 내밀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 그는 담요는 정중히 거절하고 물만 받았다.

하지만 팔자에도 없는 뜀박질을 해댄 탓에 목이 바짝바짝 말랐으나 얼굴을 감춰야 했기에 당장에는 마실 수 없었다.

“그런데 혹시…… 왜 혼자 나오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에스퍼분들께선…….”

짧은 시간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변명을 내보일 때였다.

잠든 에스퍼들이 일어나면 자신을 찾으려 할지도 모르겠으나 홀연히 사라진 이를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포기할지도 모르지.’

하진은 에스퍼에게 가이드가 어떤 존재인지 몰랐다. 아버지의 유언에 능력을 숨기려 살아왔을 뿐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집착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진은 연신 출구를 힐끔거리는 직원에게 말했다.

“실은 에스퍼 한 분의 폭주가 있었습니다.”

“네?! 폭주요?”

화들짝 놀란 직원의 외침에 주변에서도 분주해졌다. 폭주라니.

그러면 던전이 사라지고 나면 이곳에 폭주한 에스퍼가 뚝 떨어진다는 말 아닌가. 협회에서 나온 직원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것은 하진의 앞에 선 직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던전에서 탈출한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런 젠장, 폭주라니. 몸은 괜찮으십니까? 설마 이 꼴이 된 게…….”

사실 하진의 꼴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땀범벅에 흙먼지투성이인 꼴은 가히 괜찮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폭주 에스퍼를 직접 마주했다고 하기에는 멀쩡했다. 직원은 이능력을 처음 본 민간인이 S급 에스퍼의 강대한 이능력을 폭주와 헷갈린 건 아닌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었다.

“정말로 폭주가 맞습니까?”

“예. 다른 에스퍼분들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다행히 보스 몬스터를 잡고 난 후에 일어난 일이라 저는 그분들이 막아주신 틈을 타 먼저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폭주한 에스퍼를 막아주는 틈을 타 그들을 재우고 도망친 거지만. 과정 하나만 빠졌을 뿐, 거짓말은 아니었다. 먼저 가라고 하기도 했고.

“아…….”

직원은 울고 싶어졌다. 민간인 피해가 없는 건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S급 에스퍼가 폭주했으니 그 피해는 어마어마할 게 분명했다.

‘아, 이럴 게 아니지!’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었다. 폭주가 사실이라면 언제 던전이 사라질지 모른다.

게다가 에스퍼 폭주에 민간인이 휩쓸렸다는 사실이 기사로 나가게 되면 에스퍼 반대 단체(KEs)나 반정부 단체에서 아주 좋다고 기가 살 게 분명했다.

“그, 그럼 저 안에서 다른 피해는 없으셨는지요.”

그래도 확인해야 할 건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했다. 급하다고 그냥 보냈다가 나중에 애먼 데서 입은 상처를 가지고 던전에서 입은 상처라며 터무니없이 큰 보상금을 뜯어내려고 하면 큰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진 또한 이 일을 조용히 넘기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옷이 더러워진 건, 몬스터를 피하느라 그렇게 된 것이고 저는 에스퍼분이 폭주하자마자 열린 출구로 도망쳤으니 다친 곳은 없습니다.”

직원은 하진이 정직한 시민임에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괴롭히려고 작정한 것처럼 난리 치는 이들에 비하면 하진은 선녀고 천사였다.

“아휴, 다행입니다. 그럼 피해 보상액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해도 괜찮을까요? 원래라면 저희가 후속 처리까지 다 해드리는데 지금은 위급 상황이다 보니…….”

하진은 직원이 건넨 명함을 받았다.

“어느 지사든 찾아주실 때 전화 한번 주시면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진은 명함을 읽는 척 2초 정도 시선을 던진 뒤, 품에 넣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진이 이를 찾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피해 보상액은 절대 무시 못 할 금액일 것이나 그 돈을 받으러 갔다가 에스퍼들의 눈에 띌 바에야 아예 안 받는 게 나았다.

그렇게 하진은 바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사람들 틈을 빠져나온 것뿐인데 주변이 조용한 것이 딴 세상 같았다.

아니지. 저들은 다른 세상 사람이 맞다. 하진은 잊어선 안 되는 명제를 되새기며 더욱 그곳으로부터 멀어졌다.

“하아, 힘들었다.”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걷다가 결국 택시를 잡아탄 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하진의 꼴이 어떤지 모르고 차를 태웠다가 졸지에 더러워진 차 시트에 택시 기사는 언짢은 티를 팍팍 냈다.

“크흠, 거 어디서 그렇게 뒹굴었길래 젊은 양반 꼴이 그래요?”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에 그와 대거리할 힘이 없던 하진은 상황을 돈으로 무마할 생각이다. 너무 피곤하니 더 생각할 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세차비용은 따로 챙겨 드리겠습니다.”

“커험, 뭐 그렇다면야…….”

그 말을 끝으로 마지막 힘을 다한 하진은 잠시 눈을 붙였다. 만일을 대비해 집 근처 역에서 내린 하진은 택시를 탄 보람도 없이 십 분이나 더 걷고 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아, 죽겠다…….”

스펙타클한 모험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두고두고 술안주로 삼았을 이야기지만 하진은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하진의 삶은 일상물이지 액션 활극이 아니었다.

“하아, 씻어야 하는데 몸이 안 움직이네.”

신발을 벗지도 못하고 그대로 현관 앞에 엎어지듯 누운 하진은 쏟아지는 잠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 * *

하진은 꼬박 하루를 앓고 나서야 다음 날 출근할 수 있었다.

원래는 던전 발생에 휘말렸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기 위해 아무 일 없었던 척, 출근할 생각이었으나 눈을 뜨자마자 온몸을 때리는 근육통에 결국 병가를 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외근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숨길 수도 없었지만.’

외근 중에 갑자기 땡땡이친 사람 되기, 던전 발생에 휘말려 병가까지 쓴 불쌍한 사람 되기 중에 고르라고 한다면…….

아무리 가이드임을 숨겨야 하는 하진이라고 해도 후자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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