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5화
나라에서 시행하는 공식적인 검사를 받기도 전에 하진은 그의 아버지를 통해 자신이 가이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긴 했다. 고작해야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던 그때, 아버지의 손을 잡았을 뿐인데 가이드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진의 아버지는 어린 하진이 그동안 보았던 것 중 가장 심각한 얼굴로 이 사실을 무조건 숨겨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붙들고 어떻게든 약속을 받아냈으니 말이다.
‘그때 했던 말이 아마 가이드라는 사실을 들켜서 붙잡혀 가게 되면 큰일 난다고 했었던가.’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았지만, 가이드라는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것만은 뇌리에 남아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하진의 인생 지표로 남았다.
‘하아…….’
하진은 지끈거려오는 머리에 잠시 눈을 감았다. 만약 주위에 에스퍼가 많았다면 하진은 그들이 백자안을 제압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던전 안이고, 같은 S급이라고 할지라도 백자안을 막아선 이들은 고작 두 사람뿐이었다. 거기다 다른 한 명은 저를 지키느라 발이 묶여 있었다.
‘저대로라면 저 둘도 폭주할 것 같은데.’
하진이 제 평생의 안위를 두고 이렇게 고민한 건 바로 저 때문이었다.
애초에 하진이 그들을 처음 봤을 때부터 파장은 불안정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는 건 필시 평소에도 그 정도 파장이었기 때문이겠지.
동급의 가이드가 아니고서야 해소되지 않는 고통일 터였다. 안정되지 않는 파장이니 조금 불안정한 정도로는 평소와 같다고 여기고 위기감을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태로 폭주한 동료를 막기 위해 이능력을 마구 사용하고 있으니 저들 또한 폭주할 위험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폭주의 전조였다.
“시발, 돌겠네.”
이도윤 또한 하진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폭주한 에스퍼가 셋이나 되는 미래가 훤했다.
다른 등급도 아니고 S급 에스퍼 셋을 진정시킬 방법은 없으니 정부가 일찌감치 자신들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았다.
S급 에스퍼가 귀하긴 해도 폭주한 S급 에스퍼 셋이면 나라도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니 피해를 막기 위해 던전째로 묻어버리려고 하겠지.
욕설을 뱉은 이도윤은 최대한 구석에다가 하진을 내려놓았다.
“여기 얌전히 있어요. 그쪽은 손끝 하나 안 다치게 해줄 테니까 괜히 빨빨거리다가 방해되지 말고.”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꿋꿋한 싹수에 하진이 감탄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라 본래 성격이 나오는 걸지도 몰랐다.
하진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이도윤은 곧바로 백자안에게 달려들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도윤이 나선 일은 없었기에 그의 이능력은 무엇인지 몰랐다.
냅다 달려들어 몸으로 부딪치는 걸 봐선 신체능력 자체가 이능력인 듯했다.
“두 사람은 물러나!”
“너, 후우, 너 혼자 백자안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한승호의 외침에 이도윤이 백자안을 향해 크게 주먹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폭주한 에스퍼 셋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쉽겠지!”
콰앙!
사람과 사람이 맞붙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이도윤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던 한승호와 차진우는 차라리 조금 쉬면서 파장을 진정시키려는 듯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파장이 진정된다면 가이드가 왜 있겠는가. 오히려 한 번 자제 없이 날뛰기 시작한 파장은 점점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아…….”
당장이라도 폭주할 것처럼 불안하게 날뛰는 파장을 지켜보던 하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한숨을 내쉬었다.
유니폼을 단단히 여민 그는 혼자 있거나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 절대 벗지 않는 장갑을 제 스스로 벗었다.
‘이대로라면 유언이고 뭐고 죽게 생겼으니까…….’
흙먼지로 얼룩진 하얀 장갑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진은 얌전히 있으라던 이도윤의 말을 무시한 채 숨을 고르며 폭주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 기척을 놓칠 리 없는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위험하니 큭, 다가오지 마십시오.”
“뒤지고 싶어? 차라리 도망이라도, 크흑, 가라고.”
식은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말은 용케 잘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어투지만 결국 그 내용은 민간인인 하진의 안전에 대한 것이었다.
하진은 이대로 폭주하게 되면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 뻔한데도 도망치라고 말하는 이들을 보니 반대로 족쇄라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리 가이드임을 숨기기 위해 삶의 형태마저도 바꿔온 하진이라지만, 자기 목숨이 달린 와중에도 남 걱정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돌아설 만큼 매몰차지 않았다.
“휴우…….”
하진은 그런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성큼 다가섰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에스퍼들이 혀를 차며 피하려 했지만, 고통에 허덕이는 몸뚱이는 민간인보다 느렸다.
결국 그들이 피하는 것보다 하진의 손이 그들의 손을 붙잡는 게 먼저였다.
“……!”
그들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이 닿는 것과 동시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운이 온몸에 채워졌다.
가이딩이었다.
“이, 건…….”
이 가이딩을 어떻게 비유해야 좋을까.
언제 어디서나 냉철한 차진우는 처음으로 갈증이 충족되는 가이딩에 넋을 놓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도 모르던 갈증을 깨닫게 하는 가이딩이라 하는 편이 맞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폭주의 위험을 낮추기 위해서라도 그는 수많은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아왔다.
‘뭔가 다르다. 이 사람은, 뭔가 달라.’
하지만 단언컨대 하진의 가이딩은 그 어떤 가이드와도 달랐다.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충족감과 편안함이 온몸을 감쌌다.
‘이게, 가이딩이라고……?’
차진우는 잠들지 않기 위해 비틀거리면서도 땅을 딛고 버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온전히 가이딩을 느끼고 싶었다.
폭주의 위험성을 나타내는 수치는 확인하지 않아도 0으로 떨어졌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조금만 더 이 편안한 감각이 계속 이어지길 바랐다.
죽기 직전까지 굶다가 먹은 한 숟갈의 음식이 이러한 느낌일까. 그도 아니면 뙤약볕 아래를 헤매다가 마주한 살랑바람이 이러할까. 어떠한 비유를 갖다 대도 부족했다.
각성한 이후로는 단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고통은 어느새 당연한 게 되었다. 협회 소속 가이드의 가이딩을 받아도 폭주 위험성만을 낮출 뿐 고통은 덜어지지도 않았다.
죽을 때까지 곁에 머물 거라고 생각했던 고통이 사라졌다.
마치 각성하기 전처럼, 아니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건장했던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보다 편하지는 않으리라.
한승호는 이미 버티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아마 자신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저렇게 잠들겠지.
그 순간, 차진우는 본능처럼 알게 되었다.
그의 손길이 닿은 순간, 자신은 이미 그에게 종속되어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이 삶의 지표가 되리라는 것도. 그건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밤이 되면 달이 뜬다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아…….”
가이딩은 이 정도면 되었다는 듯 떨어지는 손길이 아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자신을 예뻐해 달라고 그 발밑에 웅크리고 손길을 구걸하고 싶었지만, 그의 몸은 편안함을 더는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참으로 오랜만의 숙면이었다.
순식간에 S급 에스퍼 둘을 재우고도 하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처음 해본 가이딩인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해왔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진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가이드임을 밝히고 정부 소속이 되는 것은 꺼려졌다. 하지만 자신을 살리겠다고 애쓰던 그들이 안타까워 폭주하게 둘 순 없어서 가이딩을 해버렸다.
이대로라면 더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를 수도 없게 될 것이다. 하진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생각했다.
‘이대로 전부 재우고 도망칠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나 막상 두 사람도 재웠는데 네 사람을 못 재울 건 뭐란 말인가.
“흠, 그거 괜찮네.”
까발려진 건 이름과 얼굴뿐이었다. 이들을 재우고 나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낸다면 자신이 어디 사는 사람인지 찾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좋아. 밑져야 본전이지.”
하진은 그대로 발을 옮겨 백자안과 이도윤에게 향했다. 조절하지 못한 채 이능력을 펑펑 써댔던 백자안은 이미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시체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런 그를 혼자 상대하고 있던 이도윤의 상태도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만약 하진이 탈출 키트를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여기서 자멸했으리라.
“뭐야! 내가 움직이지 말라고 했, 윽! 아오 진짜!”
지척으로 다가온 하진을 본 이도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하진을 노리고 튀어 나가려는 백자안을 몸으로 막아섰다.
‘이게 폭주……. 확실히 공기가 좀 답답하네.’
재앙이나 다름없다는 S급 에스퍼의 폭주에 대한 감상치곤 상당히 간결했다. 폭발처럼 퍼져 나오는 파장이 넘실거리며 위협하는데도 하진은 아무렇지 않았다. 조금 답답한 정도?
그는 이 정도 파장이라면 어지간한 가이드들은 거품을 물고 졸도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저 자신이 가이드라 영향이 없는가 하고 생각했다.
“아저씨 뭐 하는 거야!”
이도윤은 답답했다. 종이 인형이나 다름없는 민간인이 여기가 어디라고 끼어든단 말인가. 손끝 한 번 스쳐도 하진의 몸은 말 그대로 박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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