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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3화 (3/136)

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 3화

“저희가 금방 던전 토벌 끝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전, 하진을 구했던 백자안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언제 끝을 냈는지 몬스터는 축 늘어져 있었다.

“네, 믿겠습니다.”

저 정도 몬스터를 혼자 상대하는 사람인데 못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진은 던전 토벌을 위해 걸음을 옮기는 에스퍼들을 따라 이동했다.

그들은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지 하진에게 딱히 말을 걸지는 않았으나 하진이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는 신경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파장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하진으로서는 그들이 다가오는 것이 조금 불편했다. 아니, 사실 많이 불편했다.

그 파장이 제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배에 칼이 찔려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한 감상과는 별개로 던전 토벌은 하진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수월하게 이어졌다.

몬스터들이 나올 때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지만, 손가락 하나로 이능력을 사용하며 몬스터들을 처리해 나가는 에스퍼들을 보고 있으니 점차 평온함이 찾아왔다.

걷는 내내 소음이라고는 몬스터가 내는 소리가 다였다. 에스퍼들은 사교적이지 않았고 하진도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굳이 입을 열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적이 깨진 것은 그중 외형적으로는 가장 서글서글해 보이는 에스퍼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네. 물어보세요.”

백발의 그는 웃는 얼굴 하나면 맞선이나 상견례를 한 번에 통과할 것같이 생긴 미남이었다.

선하게 잘생겼네. 하진의 감상도 딱 그랬다.

“아까 아이한테 탈출 키트 양보하셨던데 왜 그러셨어요?”

“……네?”

남자의 질문에 하진이 잠시 당황했다. 왜 그랬냐니.

마치 타박하는 것 같은 말투에 하진이 한 박자 늦게 대답하자 남자는 제 질문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아, 다른 뜻이 아니라,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본인 목숨이 걸린 일인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 말은 하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정도 선의를 베풀고 살지 않습니까.”

“……네?”

이번엔 남자가 당황했다. 귀가 열려 있어 함께 그 대답을 들은 나머지 세 사람도 하진을 돌아보거나 하며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하진은 그러한 반응과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진은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평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세상엔 많은 미담이 있다. 가벼운 선의에서부터 누군가를 구하는 숭고한 희생까지 다양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희생한 이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희생할 수 있는 거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는걸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라고.

하진은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 어릴 적부터 다양한 정보를 통해 평범함을 ‘공부’했다.

그런 하진의 대답은 어딘가 핀트가 나간 듯 묘하게 다른 말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그런가요? 그래도 대단하세요. 아, 던전 토벌까지 함께하게 되었는데 소개가 늦었네요. 본부 소속 S급 에스퍼 백자안이라고 합니다.”

덤덤한 하진의 말에 표정을 가다듬은 백발의 에스퍼, 백자안이 눈을 휘며 자기소개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백자안의 행동에 앞서 걷던 세 사람이 저놈이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뒤를 힐긋거렸다.

자기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던전을 정리하고 나면 신경도 안 쓸 민간인에게 자기 이름을 알려준단 말인가.

백자안은 그런 작은 수군거림까지 다 들릴 텐데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예쁘게 웃는 얼굴로 하진에게 계속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저거 진짜 미쳤나.”

한승호의 중얼거림은 워낙 작았기에 하진에게는 닿지 않았다.

하진은 내민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에스퍼와 맨살이 닿으면 자신이 가이드라는 사실이 들킬 것이다.

“이하진입니다. 평범한 회사원이죠.”

그렇다면 맨살만 닿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하진의 장갑 낀 손이 백자안의 손을 맞잡았다. 아버지에게 가이드라는 사실을 숨기라는 말을 들었던 이후부터 하진은 장갑을 한시도 벗지 않았다.

“그런데 특이하시네요. 아직 가을인데 장갑이라니. 아, 혹시 무례한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거듭되는 질문에 하진은 조금 귀찮아졌다. 조금 전의 질문까지야 심심하거나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고 치더라도 장갑을 끼든 말든 그게 왜 궁금한 걸까.

만약 백자안이 처음부터 사교적으로 나왔다면 이런 의문을 품지 않았겠지만. 그는 제 팀원들과 같이 침묵을 고수하다가 갑자기 말문이 터진 것처럼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설마하니 눈치챈 건 아닐 거고.’

그것만은 장담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품에 안기기는 했으나 한여름에도 긴팔 셔츠를 고수하는 하진은 얼굴을 제외하곤 좀처럼 맨살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이 가이드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백자안이 왜 갑자기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세 에스퍼의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나 사교적인 성향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감인가…….’

하진의 아버지도 그랬다. 희귀하다는 S급 에스퍼였던 하진의 아버지 또한 감이 상당히 좋은 편에 속했다. 평범한 하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말이다.

하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죄송할 거 없습니다. 제가 좀 깔끔 떠는 편이라 평소에도 장갑을 착용하고 다닙니다.”

유난스레 살을 내놓지 않고 남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이유로 결벽증만 한 게 없었다.

실제로 하진은 깔끔한 걸 좋아하기도 해서 남들보다 부지런하게 주변을 청소하고 소독제를 뿌리기만 해도 사람들은 금방 속아 넘어갔다.

“그러시구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몬스터가 나왔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백자안이 입을 다무니 자연스레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었다.

하진 또한 먼저 입을 여는 성격이 아닌지라 오히려 이 정적이 편하기만 했다. 그러나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당장 관심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잠시 물러나는 것 같았다.

‘실수로라도 이 남자하고는 닿지 않는 게 좋겠군.’

가이딩을 차단한 채 옷 위를 스쳤을 뿐인데도 무언가 감지한 것 같은 태도라니.

물론 본인도 본능적으로 무언가 느꼈을 뿐, 하진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찾아낸 건 아닌 듯했다.

제 정체를 숨기고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고 싶은 하진으로서는 절대적으로 조심해야 할 사람이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던전은 평화로웠다. 물론 하진에게 말이다.

몬스터들은 자신들을 손가락 하나로 가지고 노는 에스퍼들의 옷자락 하나 건들지 못하고 죽어 나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쉬워 보이는데 왜 S급 에스퍼가 네 명이나 온 거지?’

긴장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 던전의 등급이 저들보다도 한참 아래라는 뜻인데 왜 굳이 S급 에스퍼들이 온 것일까.

의문은 곧 풀렸다. 쉬워 보인다는 하진의 감상이 사실이었는지 금발 머리 에스퍼가 기지개를 켜며 투덜거린 터였다.

“도심에서 터진 던전만 아니었으면 이 정도 던전은 그냥 B급들한테 맡겨도 되는 건데. 아, 심심해.”

“한승호. 시민의 앞이다.”

“윽.”

한승호는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 사내, 차진우의 일침에 입을 꾹 다물었다. 겉으로 봐선 하진과 동년배로 보였는데 말 한마디에 한승호가 꼼짝 못 하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가 무리의 리더인 듯했다.

그는 한승호를 타박한 뒤, 불평을 들었을 하진에게 사과를 남겼다.

“실례했습니다.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서 그렇지, 절대 구조 임무에 소홀히 하는 친구는 아닙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진은 정말로 괜찮았다. 여기서 수틀린다고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게 아니고서야 에스퍼의 성격이 개차반이든 테레사 수녀님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는 이 팀의 리더, 차진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방금 실례되는 말을 한 저놈은 한승호, 반대편에 있는 검은 머리는 이도윤이라고 합니다. 백자안 에스퍼를 포함해 모두 본부 소속 S급 에스퍼입니다.”

갑작스러운 자기소개였지만, 사회생활에 찌든 하진은 곧 그 의도를 알아챘다.

‘그러니까 내가 기분이 상했다고 오해한 거로군.’

딱딱한 하진의 말투는 이런 상황에서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하진은 정말로 상관없어서 그리 말한 것이지만, 딱딱한 말투에 짧게 끊어진 말만 들으면 마치 그의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예쁘장하지만 서늘한 무표정도 한몫 단단히 했다.

“이하진이라고 합니다.”

이미 백자안과 통성명을 주고받아 알고 있을 테지만, 딱히 받아칠 말이 없었기에 하진은 다시 한번 제 이름을 말했다.

“이 녀석들이 말은 험하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 마음을 놓으셔도 좋을 겁니다.”

제아무리 잘난 에스퍼라 해도 나라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이니만큼 시민들의 시선을 신경 써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 지켜야 할 시민 앞에서 심심하니, 뭐니 해버렸으니 이미지에 타격이 가거나 자신이 민원이라도 넣어 한승호가 징계라도 받을까 걱정한 것이리라.

먼저 자신들을 소개함으로써 어색한 분위기를 잘 풀어보려는 의도였던 거다. 서로의 이름을 알고 인사까지 나누다 보면 아예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는 유해질 테니 말이다.

귀한 S급 에스퍼들이니만큼 이름을 알려주는 것으로 괜히 그들과 연줄이 생겼다는 기분도 느끼게 될 것이었다. 물론 하진은 그런 연줄 따위 필요 없지만 말이다.

여하튼 본의 아니게 눈치를 준 셈이 된 하진은 저 또한 먼저 이름을 밝혔음에도 풀어지지 않는 분위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했다.

괜히 이 분위기를 유지해서 저들의 뇌리에 남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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