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사의 운명(1부 6권) (7/7)

고양이 죽이기 1부 6권

How to Kill a Cat

집사의 운명

그의 기상 시간은 새벽 5시 반으로 정해져 있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씻고 옷을 차려입고 출근을 하면 회사에 6시 반쯤 도착했다. 7시엔 임원 회의가 있다. 8시 반에 마치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며 결재 서류를 보다 보면 금세 점심시간이 된다. 약속이 없을 땐 사무실에서 밥을 먹고 약속이 있을 땐 나갔다. 오후 시간엔 밑에서 올라온 사업 및 투자 계획서를 전부 읽어봤다. 그러면 저녁 6시가 금방이다. 시간에 맞춰 퇴근을 한다. 집에 가서 바로 서재로 가서 1시간 정도 일하다가 궁금했던 자료를 찾아 읽는다. 그 뒤에 저녁을 먹고 씻고 난 후엔 책을 읽고 10시가 되면 바로 잠을 잤다. 이렇게 10년을 살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이다.

이 남자의 삶이란 설명할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너무나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삶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꾸미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드러내지도 않았다. 무욕은 모든 고통에서의 해방을 뜻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남자였다.

보통 사람들과는 많이 이질적인 사람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에게는 간혹 나타나기도 하는 속성이었다. 그는 평생을 사업 보고서와 책만 읽고 비즈니스를 사 모으는 것에만 열중한 90대 노인을 알고 있었다. 온화한 노인이었다.

물론 그 노인은 유머 감각도 있고 친근한 인상이라 비인간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권시혁 같이 혈기왕성해야 할 젊고 잘생기고 많은 것을 가진 남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다들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권시혁의 얼굴에서 무심함을 읽는 사람도 있었고 냉정을 읽는 사람도 있었고 잔인함을 읽는 사람도 있었고 평온을 읽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에는 단 한 입이면 충분했다.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눈을 떴다. 평소와 같은 일이었다.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 위로 올렸다. 곧바로 일어나면 추위를 타서 가슴 위로 올라온 고양이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고양이는 애교가 많지만 짜증도 많아 손이 많이 간다. 하지만 손은 허무하게 자신의 가슴 위를 바로 짚었다.

“…….”

몇 초 정도 그렇게 있었을까. 알람 소리가 크게 울렸다. 권시혁은 알람을 껐다.

일어나서 회사를 갔다가 돌아와서는 바로 서재로 들어갔다.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땐 그런 아주 미약한 잡념마저도 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일만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관념, 개념, 사상, 일시적인 생각과 충동적인 감정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의 시간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달렸다.

봄이 되면 땅에 벼를 심고 모내기를 하고 가을이 되면 수확하고 겨울엔 보리를 심는다.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그게 농사꾼이 해야 하는 업이다. 자신의 업에 충실할 때 사람은 가장 자유롭다. 그런 의미에서 권시혁은 무척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조금 더 품종이 좋은 벼와 보리를 고르고 가장 작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가장 좋은 값에 많은 사람들에게 팔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창의성이란 생각보다 기계적이고 부지런한 일이다.

그리고 오늘의 일을 다 했을 때 의자를 뒤로 돌리다가 멈칫하며 아래를 보았다. 고양이가 갑자기 무릎 위로 뛰어 올라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또 발을 밟으면 어쩌나.

때때로 떠오르는 생각이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았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권시혁은 이런 이미지에 정신의 발목을 잡혔다.

“…….”

권시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으면 적적함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권시혁은 서재에서 나와 저녁을 먹고 나비의 방으로 갔다.

거기엔 가슴을 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면을 똑바로 보고 있는(뭔가를 한 대 딱 때리기 직전의 아주 귀여운 얼굴이다) 나비의 커다란 사진과 그것의 형태를 단순화하여 그린 똑같은 크기의 액자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주인을 잃은 캣타워도, 캣휠도, 장난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권시혁도 마찬가지다. 그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권시혁은 거기에서 유일하게 인간을 위해 준비된 안락의자에 천천히 앉아 몸을 편히 기댔다.

‘아이를 잃으면 이런 기분일까.’

가슴 안 한 구석에 구멍이 나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그건 고양이를 쓰다듬는 일과 정반대되는 기분이다. 고양이의 몸은 말랑말랑하고 따뜻했다. 그걸 품에 안고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면 그것만으로도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평생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던 남자가 충족감이란 게 뭔지 조금이나마 느껴봤던 시절이었다.

가족. 아마 동생을 잃으면 이런 느낌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세상에 소중한 사람이라고 꼽을 수 있는 인간은 동생밖에 없었으니까. 비교를 할 대상이 아주 협소했다.

1년이 지난다고 잊혀지는 게 아니었다. 그것도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면’ 더더욱. 때때로 괜찮다가도 금세 그 화두에 붙잡히고 말았다.

바라는 게 없으니 고통스러워할 일도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존재가 자신 때문에 불행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그 생소함에 여전히 섬찟하며 놀라곤 했다.

권시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엔 나비를 위한 간식 팬트리가 있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간식을 들고 방을 나왔다. 그대로 집을 나와 뒷동산으로 향했다. 아직 매미가 울고 있었다.

그 산에서 제일 큰 나무의 앞이었다. 조약돌로 잘 덮어놓은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다. 조그마한 비석도 있었다. 나비, 라고 작게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다. 권시혁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조약돌을 조금 더 정리하고 주위에 떨어진 나뭇잎을 치웠다.

나비를 묻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 짐승이 시체를 물어갔는지 무덤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주인이 없는 무덤이라 지금 깨끗하고 단정한 것이라 생각하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고양이 방과 똑같다. 깨끗하고 예쁘다. 권시혁은 그 앞에 나비가 좋아하던 간식을 뜯어서 놔두었다.

아쉬웠다. 잊혀져 간다는 게 이렇게 아쉬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욕망은 고통의 근원이고 감정은 속임수다. 하지만 함께할 때의 그 기분 좋은 충족감이 과연 진짜 고통의 근원이고 속임수였나.

그랬지….

권시혁답지 않은 자기합리화였다. 놀랍게도 그건 진짜 고통의 근원이고 속임수였으니까. 그의 고양이는 놀랍게도 사람에, 사람으로 변하자마자 권시혁을 향한 원망과 고통만을 남긴 채 자살해버렸다.

행복도 거짓이었다. 충족도 허구였다.

충격이었다. 함께해서 행복했던 것은 자신뿐이며 그는 오히려 자신의 곁에서 불행했다니. 게다가 고양이가 어떻게 하든 절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이 달라졌다. 그의 인간 모습을 보고 깨져버린 건 서로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권시혁의 믿음이었다.

감정이 달라지니 과거를 곡해한다. 권시혁답지 않은 일이다. 눈에 색이 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을 바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권시혁은 여전히 ‘인간’ 나비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절을 행복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하고 슬퍼서 화가 난 그의 존재에 권시혁은 당황하기만 했다.

그리고 권시혁이 그렇게 당황한 사이에 그는 권시혁을 죽이려고 하고 자신도 죽였다. 제 화를 못 이기고 죽는 화려한 물고기처럼. 누군가의 공격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무뚝뚝하고 무감각한 남자에게 생각보다 큰 상처를 남겼다.

권시혁은 새 고양이를 기르면 이 마음이 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동생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어볼까, 했던 적도 있었다. 전부 부질없는 짓인 걸 알면서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비야.’

이 그리운 마음을…. 작은 고양이, 분명 아무것도 아닌 미물일 것이다. 사람과 같다. 하지만 마음을 담아 대하는 순간 전부가 되었다. 바라던 것은 오직 함께 하는 것뿐이었다는 걸 없어지고야 깨달았다. 고양이 주인은 고양이와 함께하는 순간부터 고양이의 것이었다.

그리고 권시혁은 사람이 된 나비의 모습을 떠올렸다. 뭔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아니, 빨아들이는 것처럼 강렬한 인간이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그게 자신의 나비라니. 무언가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된 것은 35년 인생에서도 처음이었다. 이젠 어찌해야 할 이유도 없을 텐데도. 권시혁은 죽은 고양이를 그리며 커다란 허무감을 느꼈다. 그런데도 놓지 못하며 오늘도 고양이의 무덤을 찾아왔다 돌아갔다.

*

배신이라는 건 무엇일까.

배신은 믿음을 전제로 한다. 믿지 않으면 배신도 없다. 함께 하는 동안의 그 교감을, 안정훈은 진심으로 믿었다. 그가 자신의 애정을 구해오는 순간들, 손길과 눈빛들.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도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자신을 원한다는 걸 조금씩 인정해가고 있었다.

유인하가 사라졌다. 마치 금방 볼 것처럼 헤어져 놓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다. 연락할 테니까 찾지 말고 기다려라.>

보는 순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 성의 없는 인사말뿐만 아니라 교감했던 모든 순간들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씨발, 기분 나빠…. 앞으로 아는 척도 하지 마라. 아, 좆 같으려니까 별게….]

웃기지 않은가? 그때도 슬펐지만 배신감은 들지 않았다. 그때는 유인하가 그런 식으로 나올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안정훈의 믿음에 부합하는 언행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건 달랐다. 안정훈은 자신이 여전히 유인하를 아주 잘 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심지어 유인하 본인보다도. 그는 떠나지 말아야 했다. 그에겐 더 이상 그런 힘이 없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건 유인하와 안정훈 본인이 모두 안정훈을 배신한 일이다.

안정훈의 차는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딱지를 끊을 건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정면만 보고 있는 남자의 눈빛이 날카롭다.

조금이라도 원하는 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전부 손에 들어온다. 그런 환경이 얼마나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가. 화려한 파티도, 아름다운 사람들도, 지금껏 못 해봤던 수많은 새로운 것들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너무 쉬웠기 때문이다. 그는 끝내 침대에서 거의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그 별 볼 일 없는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 집에만 있게 될 예정이었다. 바로 안정훈의 곁에.

그도 원했지 않은가? 솔직하지 못해서 말로는 하지 못했지만 언제나 두 눈을 바라보며 손길과 포옹을 바랐다. 우스운 일이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자석처럼 끌려가는 유인하였다. 그는 그 모두를 쉽게 가지고 놀았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하지만 실은 그렇게나 사람을 원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길을 선택해 달려갔다는 게 웃기지 않은가? 사람들이 좋아서 사람들의 곁에 있고 싶어도 그들이 자신을 해칠까 봐 그런 티도 내지 않고 스스로도 부정한다. 그런데도 곁에 있고 싶으니까, 곁에 있으면서도 안전함을 느끼고 싶으니까 스스로를 부풀리고 누가 봐도 있어 보이는 것만 추구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겁쟁이라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부정하고 앉아 있는 것은 멍청한 인간들이나 하는 것이다. 안정훈은 유인하가 떠난 이유가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죽으려고 한 것이거나 아니면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뭐, 결국 둘 다 같은 말이지만. 어쨌든 둘 다 안정훈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시도임에는 틀림없었다.

네가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나는 네 삶에 절대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갈수록 내가 없으면 넌 스스로의 가치를 쉽게 확신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너한테 필요한 건 나야. 이제는 조금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나?

화가 난다. 이런 게 화가 나는 게 맞는 건가? 화가 난다는 건 상당히 당혹스러운 감정이다. 스스로가 잘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유인하가 안정훈을 함부로 취급하는 것은 흔하다 못해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때리고 화를 내고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괜찮았다. 귀여우니까. 하지만 이렇게 떠나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배신이었다.

‘죽으면 절대 용서 안 해. 버려도 절대 용서 안 해.’

안정훈은 유인하 본인보다 그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뭔가라고 해봤자 그에겐 오직 자존심밖에 없었다. 그래, 안정훈에게 기대어 사는 것이 자존심 상해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그 자존심 때문에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자존심 때문에 부모님한테 손을 벌리지도 못하겠지. 자존심 때문에 일도 함부로 못 하고 자존심 때문에 친구들한테 연락도 못 할 테고. 매일 줄어가는 통장 잔고를 보면서 아무것도 못 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내가 찾아주길 바라면서.’

그래, 그걸 바라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주겠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찾는다면 목에 쇠사슬을 달아서 침대에 묶어 둘 것이다. 홀딱 벗겨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게 하고 매일매일 자신이 오기를 기대하고 또한 두려워하게 만들 것이다. 그 상상이 어지러운 심정을 효과적으로 가라앉혀 주었다.

훌륭한 동기부여였다.

‘이런 기분으로 맨날 살았던 건가, 인하는? 대단한데.’

분노라는 감정은 매우 자기 혐오적이다. 이걸 견디고 사는 삶이란 고통 그 자체일 것이다.

유인하를 찾으러 다닌 지도 이미 반년이 넘었다. 이미 유인하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특히 그의 동생인 유진하는 매일같이 들들 볶았다. 그런데 정말 그 누구도 유인하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성인 남자라 실종 신고도 안 된다. 안정훈은 분명히 인내심이 강한 남자였지만 그것도 한계에 달해가고 있었다.

‘아니야. 인내심을 가지자. 예전이랑 똑같아.’

안정훈은 한숨을 쉬며 차의 속력을 조금 늦추고 운전석에 등을 푹 기댔다.

‘인하는 이번에도 스스로 내게 돌아올 거야.’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행정 구역상 지방의 소도시에 속한 한 산속이었다. 낡은 건물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펜션도 아니고 그렇다고 암자도 아니다. 속세를 떠나 은거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TV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법한 건물이었다.

“인하야!”

마음을 느긋하게 먹겠다 생각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다. 안정훈은 다짜고짜 그 집 안으로 쳐들어갔다. 알고 있을까? 뭐든 못 하는 게 없던 그가 점점 스스로에 대한 본질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말이다.

안정훈이 들어간 방에는 지금 아무도 없었다. 사설탐정을 몇 명이고 고용해서 겨우 찾아낸 곳이었다. 울룩불룩 울어 볼품없는 노란 장판, 삐뚤어진 형광등의 창백한 불빛. 모든 것은 색이었다. 색이 모든 것을 나타냈다.

“유인하!”

안정훈은 다시 유인하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장롱문을 확 열었다. 도대체 언제 산 것인지도 모를 색색깔의 이불들이 켜켜이 쌓여 냄새를 풍겼다.

“누구세요?”

안전훈이 고개를 홱 돌렸다. 좋게 말해 순박한 인상의 얼굴이 새카만 초로의 남자다. 이 방만큼이나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 순간 안정훈의 눈빛은 뭐든 뚫을 것 같은 검은 송곳 같았다. 초로의 남자는 흠칫하며 잠깐 두려운 얼굴을 했다. 인정훈의 큰 키와 덩치는 잘못하면 그런 위협감을 주었다.

“…안녕하세요~. 제 친구가 여기 산다는 말을 듣고 좀 찾아왔는데요.”

안정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해하고 밝은 느낌으로 바뀌었다. 마치 그 전의 그 눈빛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코앞에서 보고도 속는다고 집주인은 자신이 잘못 본 건가 하고 얼떨떨하게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여기 살던 총각? 어제 짐 뺐는데.”

“네? 어디 갔는데요?”

“그야 나도 모르지. 공부하던 총각이니까 시험이라도 치러 갔겠지.”

“공부요?”

안정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네, 공부요….”

안정훈은 다시 한번 유인하가 지냈다는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역시 외관만큼이나 볼품없는 집구석이다. 어디서 복사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서 본 듯하다. 집주인은 안정훈이 신발을 신은 채 들어온 것을 힐끔거렸지만 안정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공부?’

이제 와서? 의외였다. 포기한 게 아니었나? 유인하 같은 사람이야말로 너무 강해서 부러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 번 꺾이면 돌이키기가 힘들다. 그때 그 주차장에서 실성한 것처럼 웃어 댈 때, 유인하는 분명히 뭔가를 놨다.

‘그런데도? 귀엽기는….’

죽는 것보다는 좀 더 자존심을 부려본 것이다. 스스로에게 다시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유인하다웠다. 그의 자존심은 지금까지 그를 살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그가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죽어라 준비해도 안 됐는데 작년의 그 온갖 일을 겪고 이런 데 도망까지 와서 되긴 뭐가 되겠는가.

그가 가진 건 이제 안정훈이 전부였다. 실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는 지금까지 무언가를 손해 봤다고 생각하면서 안정훈을 떠올리고 자기혐오에 스스로를 해치고, 또 그 사실에 혐오감을 느끼며 고통 속을 기었을 것이다.

‘고생 좀 했겠네.’

안정훈은 벽에 걸린 구겨진 달력을 한 번 검지로 툭 치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자신의 소중함을 좀 깨닫지 않았을까? 그런 기대가 들었다.

“어쨌든 살아 있긴 한 거네요?”

묘한 질문이었다. 집주인이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그렇지…?”

저 착한 얼굴에 이상한 태도…. 집주인은 묘한 인지부조화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안정훈은 흠, 하고 짧게 숨을 내뱉더니 깔끔하게 돌아섰다.

“아,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안정훈은 그 집을 나오며 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어 유인하가 치는 시험의 일정을 확인했다. 또 떨어지면? 흔하디흔한 고학력 고시 폐인들처럼 1년, 1년 또 조금씩 영혼이 죽어갈 뿐이다. 나쁘지 않지. 오늘이 2차 시험 날이었다.

‘2차가 오늘인데 짐은 어제 뺐다?’

내년은 할 생각이 없는 건가. 역시 객기였다. 한 번 자포자기한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힘들다. 눈에 보이는 길만을 선택해온 유인하라서 더욱 힘들 것이다.

‘이 기회에 알았겠지.’

이제는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안정훈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험장 앞을 지키고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 이 시간이면 늦을 것이다.

묘하게 예감이 좋았다. 안정훈은 서울로 급히 올라갔다.

*

올해 유인하가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노력이라면 지금까지 하고 또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아니, 돌아오기는커녕 손해만 봤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삶도 꿈도.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진정한 타락은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자신이 산 채로 썩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썩어가는 걸 아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유인하는 그날 곧바로 안정훈의 집을 나왔다. 안정훈은 유인하가 원하는 걸 전부 해주었다. 살기 위해 더 이상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평생 이런 것을 바랐던 게 아닌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유인하를 무기력하게 하는 데 한몫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안정훈은 유인하가 가진 유일한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더 있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될 것만 같았다.

안정훈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 사이에 어떤 의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때 그 탄천의 주차장에서 다 끊어졌다. 그동안은 서로 원하는 것만 상대에게서 착취하는 쌍방으로 일방적인 관계였다. 찾지 말고 기다리란 말은 남겼지만 처음엔 막막해서 몇 번 돌아갈까 싶기도 했다.

“하.”

유인하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천장엔 하얀 백열등이 삐뚜름하게 달려 있었다. 벽지는 울어 있었고 바닥은 노랗다. 어디든 가난의 모습은 비슷한 모양이다. 죽었다 살아났다고, 아니면 뭔가 결심했다고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건 아니었다. 유인하는 역시나 그 가난의 모양이 싫었다. 하지만 또한 금세 익숙해졌다. 원래부터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책상 앞에만 앉아도 진저리가 쳐졌다. 새로 산 책과 문제지가 새것처럼 깨끗했다. 예전의 것은 전부 버렸기 때문이다. 빼곡하게 적어 놨던 메모도, 족보도, 다른 정보도 없었다. 시간도 얼마 없고 안 될 이유만 잔뜩 생각났다. 책을 펼쳤다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휴대폰 화면을 켜서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시간 낭비를 하고 나면 좆 같은 허무감과 자괴감으로 죽을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은 그걸 견딜 수가 없어 휴대폰이고 노트북이고 전부 부숴버렸다. 그러고도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잠도 오지 않는데 맨바닥에 누워있기만 했다. 그렇게 새벽이 되자 정말로, 정말로 밥버러지 같기만 한 자신이 너무나 증오스러웠다. 그동안 자신을 얼마나 죽이고 싶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마치 초능력이 사라진 히어로처럼, 유인하는 자신이 드디어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공부를 하는 능력과 프라이드밖에 없었으니까. 둘 다 없어진 지금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옹색하고 구차하고….

그래도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공부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건 텅 빈 시간이었다. 도대체 고양이 시절에는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할 게 없어서, 너무 심심해서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

공부란 참 정직했다. 몇 달을 놓고 산 게 티가 난다. 그렇게 오랫동안 해왔는데도. 사람은 근본적으로 밑 빠진 독 같은 것인 모양이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공부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누가 한 번 시킨 적이 있나, 아니, 도리어 방해하는 인간들만 수두룩했는데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저 공부를 잘하면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좋아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그저 오기였을까.

그래도 싫다고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작년부터는 싫어지더니 이젠 두렵기까지 했다. 공부가 어렵고 무서웠다. 거기에 인생을 걸었으니까. 어렸을 땐 몰랐다. 그게 무슨 뜻인지.

유인하는 누운 채로 벌레 사체 때문에 그림자가 진 전등을 보며 10초 정도 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유인하가 있는 작은 방 안에 상 하나가 놓여 있고 작은 농이 하나 있었다. 작은 상 위엔 책과 공책, 펜과 연필이 있었고 유인하는 그 앞에 붙어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공부를 하고 있었다.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시골 산골짜기였다. 사람이 없었다. 그게 마음에 들어 여기를 택했다. 그런 주제에 때때로 출처를 알 수 없는 외로움에 시달리기도 했다. 모두에게 투명 인간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사실 그 ‘모두’라는 건 없는 개념인데도. 그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싫어했다. 그건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유인하는 그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집중만 할 수 있으면 그때부터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술이나 섹스 못지않았다. 역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게 좋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서 점점 갈수록 공부에 빠져들었다.

그래, 예전엔 서른 살이 되면 막연히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정장을 입고 다니고 번듯한 집과 직장이 있고. 마치 정해진 것처럼. 하지만 정해진 건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사실 별로 변함이 없었다. 무능력자의 말은 아무 가치가 없다. 그게 옳은 말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무능력자는 사랑을 말할 자격도 없었다.

유인하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 될까 봐, 집 앞에 살던 그 고시 폐인이나 형 같은 존재가 될까 봐. 한 번도 입 밖에 내뱉어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될 바에야 죽어버릴 거라고 그냥 ‘정해 놨다’.

하지만 술과 섹스에 빠져 몇 개월이고 허송세월하며 그 못난 인간들만큼이나 한심하게 살아봤다. 패배 의식에 젖어서 자신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것 또한 술이나 섹스 못지않은 자위행위일 뿐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데도 살아 있었다. 숨이 붙어 있으면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고시 폐인이나 형도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이다. 이제 와서 그들이 이해가 되고 그런데도 여전히 싫고 외면하고 싶다.

신림동 고시생일 때보다도, 고양이일 때보다도 하루가 더욱 단순했다. 눈 뜨면 아침이고 아차 하면 잘 시간이 되었다. 유인하의 인생에 지금만큼 시간이 빨리 간 적은 없었다. 노력했다면 또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정말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한 것뿐이었다.

고독했다. 예전에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자신은 결국 혼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간혹 외로움을 견딜 수 없을 땐 가장 손쉬운 상대를 만나며 자신을 만나주는 그를 바보 취급하곤 했다. 그건 결국 자신을 바보 취급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덤에서 홀로 일어나 결국은 자신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아무도 만나기 싫었다. 정말로 혼자가 되니까 외롭다는 감정도 무뎌져서 또한 익숙해졌다.

예전이었다면 나약한 사고방식이라고 자책했을까? 하지만 유인하는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히고 살지 않는 삶이 어땠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고 다시 여름이 되었다. 결국 작년에 이어 올해도 빠짐없이 2월의 1차 시험도, 6월의 2차 시험도 치고 나왔다. 마치 그간 별로 특별한 일 없이 고시생의 삶이 쭉 이어져 온 것처럼.

떨리지도 않았다. 그냥 좀 피곤했을 뿐이다. 그대로 휴대폰을 하나 장만하러 강남 쪽으로 넘어갔다. 지금까지는 필요할 때마다 지내고 있는 지내던 곳의 구닥다리 공용 컴퓨터를 이용하곤 했는데, 어쨌든 앞으로 뭐든 하려면 휴대폰 하나는 필요할 것이다.

“저기, 저기, 잠깐만요. 잠깐 시간 좀 있으실까요?”

“…….”

“WZ엔터테인먼트 김한일 팀장이라고 합니다. 혹시 지금 소속사 있으세요?”

휴대폰만 잠깐 장만하러 가는 유인하를 벌써 5명이 넘는 스카우터가 붙잡았다. 어렸을 때도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일이 많이 있었고 작년에 심하게 방황할 때도 결국 그쪽의 권유로 일을 하기도 했다. 이제는 정말 계란 한 판을 꽉 채웠는데도 여전히 연예인이나 할 법한 인간으로 보이는 것일까. 아무리 해도 유인하가 가진 직업에 대한 계급 의식은 없어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유인하는 그를 삐딱하게 내려다보았다.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그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유인하는 아까와 똑같이 대꾸했다.

“소속사 있습니다.”

“아, 예…. 그래도 명함은….”

유인하는 그가 주는 명함을 주머니에 구겨서 넣었다. 아무 가게나 들어가 휴대폰을 하나 개통했다. 하지에 가까워 날이 아주 길었다. 유인하는 밖으로 나와 걸으며 새로 산 휴대폰의 설정을 대충 마치고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명함이 몇 장 손에 걸렸다. 버릴 겸 모두 구겨서 꺼냈다.

“…….”

유인하가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방황할 시기에 했던 아르바이트 덕분이었다. 돈 걱정 크게 없이 공부를 했던 건 처음 아닐까. 도대체 하고 많은 직업 중에 왜 고시를 하려고 했을까? 돈이라면 이런 걸로도 벌 수 있었는데. 죽고 싶을 정도로 하기 싫을 때가 왔는데도 놓지 못한 건 왜일까? 그게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을 텐데도.

도대체 고시라는 건 뭘까?

가족이, 친구가, 타인이 아무리 그를 공격해도, 그를 깎아내리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려고 해도 유인하는 그들의 무례함과 불합리가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고 믿었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했다. 자신은 분명히 그들과 달리 대단한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건 그 자체로 시련이 되었다. 자신이 지금껏 스스로에게 말하던 것만큼의 인간이 정말 맞을까? 굳건히 믿는다고 생각하는데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누구나 인정할 만한 걸 가지고 싶었다. 결국 다년간 포기하지 못하고 여기에 도전하는 인간들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결핍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믿음의 결핍이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정해 놓은 국가, 정부, 시험, 점수, 타이틀로 결핍을 대체하려는 것이다. 남들이나 그러는 줄 알았는데 자신도 그런 얄팍한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던 걸까?

“후우….”

역시 서울에 오면 가슴이 답답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붙을 것 같지도 않았고 이제 정말로 공부엔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막막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럴 때 사람은 가장 쉽기 때문에 가장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연락처를 보고 있었다.

이유야 많았다. 짐도 다 그가 가지고 있고 어쨌든 한 번은 만나야 할 테고…. 이럴 때는 또 쉽게 안 좋았던 것은 잊어버린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다. 이 모든 게 이미 패턴이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불안하고 외롭고 막막할 땐 그냥 습관적으로 그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짓이라도 해서 자신을 위로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학습했다. 똑똑한 강아지는 주인에게 공을 던지는 훈련을 시키는 법이다.

굳이 작년의 일이 아니더라도 유인하는 꽤 오랫동안 안정훈과의 연락을 끊을지 말지 고민하곤 했었다. 딱히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연락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답답한 느낌이다. 유인하는 일단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다시 할 게 없어졌다.

할 수 있는 것도, 어디 갈 곳도 없었다. 거리에는 어디서 퍼부은 것처럼 사람이 우글우글했다. 눈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버스가 하나 섰다. 한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는 버스였다. 어째서일까. 유인하는 충동적으로 그 버스에 올라탔다. 얼마 가지 않아 한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방이 탁 트였다. 서쪽부터 서서히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멍하니 그것을 잠시 보고 있었다. 한남대교를 지나 버스에서 내렸을 땐 강을 건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여긴 참 본의 아니게 많이 걸어 다녀 길을 잘 알았다. 더웠다. 이미 저녁 시간이 지났는데도 땀이 등을 따라 줄줄 흐를 정도였다. 유인하는 어느새 그 남자가 사는 동네에 도착했다. 부잣집 동네의 등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나지막한 산이 보인다.

목이 가뭄이 닥친 강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것 같다. 단지 더워서 이런 것일까? 유인하는 작은 산책로를 따라 그 동산을 마저 올라갔다.

‘이쯤이었나….’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면 어딘가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가 완전히 단념될 것이라 여기는 것처럼. 벌써 1년 가까이 지났고 나비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유인하는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아무리 채찍질을 해봤자 고집스러운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죽고 싶은지도 살고 싶은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계속 과거 속을 헤매고 싶지는 않았다.

산책로의 위치와 높이를 가늠하여 더듬더듬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였나, 하면서 산책로를 이따금 이탈하여 높은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역시 정확한 장소를 찾기는 힘들었다. 그때는 아무래도 한밤중이라서….

“아.”

유인하가 의미를 모를 목소리를 냈다. 검은 조약돌이 원의 테두리를 이루고 그 안을 하얀 조약돌이 채우고 있었다. 유인하는 설마, 하면서 거기로 다가갔다. 가장 커다란 나무의 앞이었다. 유인하는 그 조약돌이 모여 있는 곳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주 작은 비석이 앞에 있었다.

나비.

1년 가까이 지났다. 조약돌 사이로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잘 관리된 것처럼. 무덤은 기억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다. 잊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죽은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래서 이런 데 무덤을 만들어 준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무덤이 있었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가 며칠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얼떨떨했다.

‘무덤이 파헤쳐졌는데도 다시 만들어 준 걸까?’

왜?

정말로 왜일까. 그대로 유인하는 자신의 무덤을 꿈쩍도 하지 않고 보고 있었다. 뭔가 알아내고 싶은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동글동글하고 깨끗한 조약돌과 깔끔하게 정리된 주변, 커다란 나무. 햇빛이 잘 비친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찾아…오는 걸까….’

그러면?

갑자기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유인하는 당황했다. 왜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짜증마저 났다. 노여워도 왜 노여운지 잘 모르겠고 눈물이 나도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망가진 것처럼, 아니, 예전에 망가졌는데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왜?’

착취당하는 자가 되느니 착취하는 자가 되고 싶었다. 맞는 사람이 되느니 때리는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유인하는 자신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괴롭혔고 사랑하는 그 남자를 죽이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게 맞잖아….’

어차피 나비는 죽었다. 유인하는 이유도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쪼그리고 앉은 채 천천히 손을 뻗었다. 비석에 적힌 나비라는 글자를 만져보려고 했다. 죽은 나비가 정말로 이 안에 웅크리고 자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들었다.

그때 기척이 느껴졌다. 유인하는 동물적인 반응으로 홱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자를 쳐다보았다.

“…….”

“!!!”

정확하게는 유인하가 그의 영역에 침입한 것이었다. 고양이 상태였다면 분명히 머리부터 꼬리까지 털이 전부 섰을 것이다. 큰 키에 조각상처럼 무뚝뚝한 얼굴, 점잖은 차림새. 젊은 남자지만 젊은 남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남자가 손에 나비가 좋아하던 간식을 들고 나타났다. 털만 선 것이 아니라 하악질까지 했을 것이 분명하다. 유인하는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벌떡 일어났다.

보고 싶은지, 보고 싶지 않은지도 여전히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 유인하는 알았다.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을 찾아와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싫어. 절대 싫어!’

유인하는 그대로 앞만 보며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 일어난 일을 외면하는 것처럼. 귀에서 이명이 왱왱 울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리가 순간 핑글 돌아서 나무를 손으로 짚고 잠깐 비틀거렸다. 그제야 의식적으로 크게 숨을 한 번 내뱉었다가 들이마셨다.

여기서 제일 놀란 사람이 어떻게 유인하겠는가. 권시혁은 눈을 약간 크게 뜨고 1초 정도 굳어 있었다. 유인하가 언제나 생각했던 것처럼 조각상 같다.

‘나비가 살아 있다. 어떻게?’

무엇에도 놀라는 법이 잘 없는 남자다. 나비만이 그런 남자를 놀라게 하는 희소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평정한 마음에 흙탕물이 확 인 것처럼 생각과 단어가 머리를 꽉 채웠다.

나비가 살아 있다. 어떻게? 그때 분명히, 아니, 나비가 맞나? 나비는 고양이다. 저건 사람이야. 하지만 분명히 나비다. 그래, 뭔가 이상했어. 자꾸 기다리게 되었다.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권시혁은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니었다. 아니, 기억한다고 해도 그 기억에 어떤 감정이 어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그는 저 이름 모를 청년의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권시혁은 이상하게도 나비가 죽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실 지금도 그다지 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나비는 바로 그의 품에서 피를 흘리며, 바로 그의 품에서 차갑게 식어갔는데도, 그냥 나비가 또 훌쩍 가출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거의 매일 무덤을 찾아왔다. 그런데도 그랬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것이 매우 상반되어 괴리감이 심했다. 이상했다. 그는 이렇게 실재하는 사실을 부정해본 적이 없었다. 나비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나비에 대한 것은 처음부터 그랬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고양이 같은 걸 주울 성격이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것은 순리대로 가는 법이다. 어미를 잃은 새끼 고양이는 웬만해선 죽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집안에 들였다. 구태여 정을 줄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걸 의식하면서 사는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양이를 무릎에 얹고 있지 않을 때가 없어졌다.

시선을 맞추고 눈을 한 번 깜박이면 고양이가 따라서 눈을 깜박였다. 고양이가 눈을 깜박이면 그도 눈을 깜박였다. 쓰다듬는 횟수를 더해갈수록 마음도 더해져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 어떤 것보다도, 그 어떤 존재보다도.

권시혁에게 외부의 기준이 중요했던 적은 없었다. 어차피 세상은 주관적인 것이다. 돌멩이 하나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할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이 덧없는 세상에서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던 남자에게 중요한 것이 딱 하나 생겼는데, 그게 바로 나비였다.

그리고 고양이는 덧없이 왔다가 덧없이 가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권시혁의 집에는 여전히 고양이의 방이 남아 있었고 그의 손에는 그 고양이를 지키다 입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나비가 죽고도 제법 오랫동안 새벽에 깰 때면 가슴 위에서 잠든 고양이가 굴러떨어질까 봐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정신을 차리면 적적한 마음에 잠깐 그대로 좋았던 때를 생각했다. 서재에서 의자를 뺄 때면 고양이의 발을 밟을까 봐 한 번은 뒤돌아본다. 또 어디선가 마법처럼 나타날 것만 같아 밤이면 정원을 향하는 문을 열고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게 나비를 죽게 한 걸까.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생각이 오랫동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언가 놓지 못하는 화두가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새로운 고양이를 키울까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고양이들은 나비가 아니었다. 다른 고양이의 모습을 보아도 나비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길고양이라도 마주치면 비이성적이게도 나비가 아닐까, 하고 한 번 생각만 할 뿐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함께 한 시간은 짧았다. 시간은 중요하면서도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건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중요해지는 것이었다. 옛 사진이나 영상을 자주 보곤 했다. 나비가 자신에게 준 행복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나비에게 준 고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러면 놀랍게도 그가 고통스러워졌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어서 행복할 수 있었다. 일방적인 믿음이었을 것이다. 동물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분명히….

혼란이 극에 달했다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여전히 인간 나비와 고양이 나비가 같은 존재라고 심정적으로 일치시키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눈앞에서 나비가 인간으로 변하는 걸 보고는 큰 거부감을 느꼈었다. 전혀 나비 같지 않았다. 심지어 1년 내내 나비를 그리면서도 인간 모습은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아니, 그 모습이 떠오르면 답답하고 가슴이 아프기만 했다.

그래도 서로 같다는 건 알지 않은가. 이렇게 바로 알아봤으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고작 하루, 아니, 몇 분 본 얼굴을 1년이 지나고 나서도 기억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해소할 수 없는 화두가 있었다. 권시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비야.”

유인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했다. 이번엔 환청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하나도 달라진 것 없이 낮고 차분했다. 아무런 공격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인하는 얼른 나무를 돌아가 일단 모습을 숨겼다.

“나비야.”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유인하가 대답했다.

“가까이 오지 마.”

말을 하고 숨이 모자라 목소리가 이상하게 끊겼다.

권시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유인하가 알 턱이 없었다. 두려움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지배했다.

사람이 이성적이라는 건 다 개소리다. 다짜고짜 그가 지금 자신을 보고 얼마나 놀라고 불쾌하게 느꼈을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찾기 시작했다.

죽이려고 했다. 갑자기 사람으로 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다짜고짜 칼을 목전에 들이밀었다. 있지도 않은 그의 죄를 추궁하면서 결국엔 그를 살해하고 자신도 죽이려고 했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 뻔뻔하게 여기에 얼굴을 들이밀 수가 있냐고, 그렇게 어이없게 생각하고 있진 않을까?

도망가고 싶었다. 너무 무서우면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침대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그 시간이 바로 이랬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끔찍한 생각이었다, 여기에 온다는 개념 자체가. 유인하는 애초부터 여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는 실수로라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심호흡을 한 유인하는 일어나서 그대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권시혁은 이미 옆으로 조용히 다가와 있었다. 동물적인 감을 발휘하는 유인하도 눈물을 닦느라 그걸 눈치채진 못했다. 벌겋게 벌어진 마음을 다시 어딘가로 짓누르느라 바빴다. 그는 대뜸 유인하를 끌어당겨 뒤에서 단단히 끌어안았다. 가출한 고양이를 잡는 것 같았다. 유인하는 너무 놀라 그대로 몸이 굳었다.

“쉬이. 가만히 있어야지.”

고양이를 제법 상대해본 경험이 돋보인다. 유인하는 깜짝 놀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그의 품이었다. 인간일 때는 딱 한 번, 그를 죽이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 느껴보았다. 그리운 냄새였다.

그리고 그건 잠시였다. 유인하는 더욱 큰 두려움을 느꼈다.

‘싫어. 싫어. 너무 싫어. 보지 마. 보지 마.’

그의 앞에 있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창피했다.

고양이일 때의 유인하는,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의 유인하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예쁘고 총명한 아이였고 모두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어린이였을 뿐이다. 그런 믿음에 자각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제법 오랫동안 그렇게 계속 믿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가난한 집안, 그에 걸맞게 무능력하고 생각 없는 부모, 폭력적인 형과 무기력한 동생. 그런 건 전부 유인하의 탓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믿을 수 있어야 했다. 가질 수 있는 건 믿음밖에 없었다.

그래서 분명 유인하에게는 자기 자신이라고 믿던 그림이 하나 있었다. 스스로를 그린 자화상이다. 굳이 꺼내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꺼내 본 그 그림은 아무 색깔이나 손에 잡아 아무렇게나 그린 삐뚤삐뚤한 크레파스 그림일 뿐이었다. 어린아이가 여물지 못한 손으로 그려 선은 전부 뭉개지고 색도, 크기도, 형태도 전부 맞지 않았다. 끊임없이 덧칠한 그 그림은 어느새 어린아이가 그린 것이라고 보기엔 굉장히 기괴해졌다.

어느덧 새카맣게 칠해진 그림 속에 눈꺼풀이 없어 영원히 감지 않은 눈동자만 하나 남아 있었다. 스스로가 그 믿음에 부합하는 인간인지 끊임없이 감시하는 눈이다. 그리고 유인하는 더 이상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싫어졌다. 언제나 스스로를 부풀리고 꾸미고….

믿을 수 있을 땐 같은 공부도 꿋꿋이 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 되었을 땐 몇 시간 동안 단 한 페이지도 읽을 수가 없어졌다. 그런 자신이 혼란스러웠다. 가장 괴로운 것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내가 나 같지가 않았다. 이젠 나조차 내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더 해 나가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살고 싶었다.

삶은 허무하다. 우연히 태어나 100년 남짓 살고 죽을 뿐이다. 50억 년 뒤면 지구도 사라질 것이고 인간은 더더욱 빨리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렇게 아등바등 살려고 해봤자 어차피 전부 뒈지기만 기다리는 유기체 덩어리다. 그저 DNA가 시키는 대로 먹고 자고 싸고 섹스할 뿐인 생물 기계란 말이다. 스스로가 뭔가 대단하다고 믿는. 이런 순간에도 여전히 뭔가를 원하면서, 원하지 않는 모순을 안은 채.

“이거 놔.”

겨우 목소리를 냈는데 생각보다 목소리가 너무 작게 나왔다. 이런 목소리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위축되어 있는 자기 자신에게 반발하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분하고 자존심이 상한다. 나비는 죽었다. 이제 나비로 변할 수 없었다. 말해야 할까? 말해야 했다. 유인하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털었다. 정신 차려. 유인하는 조금 더 크게 말했다.

“산 채로 땅에 묻은 건 당신이잖아.”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순간 사실이 되었다. 자신의 말에 유인하는 심장이 서걱 썰렸다. 그래, 그랬다. 산 채로 묻혀 있었다는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가슴이 미친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미 1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도. 여길 왜 왔을까? 뭘 확인하고 싶어서? 이걸 확인하고 싶었나?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지. 하, 그때 당신을 제대로 죽였어야 했는데.”

유인하는 그렇게 말하고 오른쪽 주먹을 한 번 부들 떨었다. 숨이 가빠졌다.

“걱정 마. 이제 그럴 생각 없으니까. 난 다 잊어버렸어. 당신도 잊어버려.”

산책로 양쪽으로 꽃이 만개한 배롱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유인하는 산 채로 붙잡힌 맹수처럼 두 손을 제압당하고 등 뒤에서 끌어안겨 있었다. 권시혁의 얼굴은 여전히 좀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차분해졌다. 유인하는 그대로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마치 매서운 매질을 견디는 아이처럼.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또 늦은 태풍이 온다고 했던가. 권시혁이 드디어 입술을 뗐다.

“왜 그랬어?”

유인하는 움찔하며 눈을 떴다.

“살아 있으면서 왜 안 돌아왔어?”

“난 나비가 아니야.”

나비는 언제나 마법처럼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고 봐야 할까. 나비가 죽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 스스로를 이상하게 생각했던 주제에, 나비가 자신의 곁에서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워 했으면서도, 막상 나비의 인간 모습을 보고도 순수하게 기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의 마음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고양이 나비와 이 낯선 청년의 사이에 등호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처럼. 그의 아버지처럼. 평범한 사람처럼.

권시혁을 향한 그의 적개심은 마지막 나비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가출을 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고 애교가 많던 나비는 점점 사람을 피하고 이윽고 모두를 공격하게 되었다. 마지막엔 주인을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고 했다.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한 것일까? 전달의 방법이 잘못되었을까? 그가 사람으로 변했을 때는 천하의 권시혁도 놀랐다. 사람인 그의 모습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거부감을 느꼈다. 그게 잘못이었을까? 후회했다. 그게 뭐든. 차갑게 굳어가는 고양이의 몸을 안고 급하게 동물병원으로 달려갔지만 다시 살릴 수는 없었다.

[나 죽으면 아무도 못 찾는 곳에 묻어줘. 아무한테도 알리지 마. 알았지?]

그 말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권시혁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며 단정하고 그렇게 죽일 듯이 화를 냈으면서, 어째서인지 마지막의 마지막엔 고양이처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빤히 권시혁의 얼굴을 보다가 나비처럼 얼굴을 맞대어 문질렀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그가 나비였기 때문이다.

그걸 권시혁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웠던 게 아닌가? 원망했던 것이 아닌가? 왜 그런지 알아야만 했는데 알 수가 없었다. 나비는 그대로 그의 품에서 죽어버리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에, 실재하는 현실에 권시혁은 화가 나 있었다. 소중한 것은 나비밖에 없던 남자였다.

“왜?”

“왜 물어? 난 당신 이유 같은 건 안 궁금한데.”

“나비야.”

“나는 고양이가 아니야! 그냥 고양이인 척한 것뿐이지.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데? 쓰레기처럼 버렸으면서!”

그가 하는 말에 일리가 있는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 건 그때와 같았다. 그때의 일을 후회하면서도 여전한 유인하였다. 말을 하는 게 힘들었다. 상대를 비난하는 건데 어째서 말을 할 때마다 내가 힘든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 당신 외롭게 살았지? 엄마도 당신을 버리고 지금도 항상 혼자겠지. 다 가진 게 무슨 소용이야? 당신도 고양이 같은 걸로 외로움을 달래는 한심한 남자일 뿐이야. 그것도 똑바로 못해서 어디서 반푼이 같은 걸 주워서 죽을 뻔했잖아? 하하, 바보 같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유인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심호흡을 했다. 권시혁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한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오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버리지 않았어.”

“버렸잖아!”

역시 좀 화가 난 음성이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종잡을 수는 없었다. 그때 유인하가 다짜고짜 화를 내며 덤볐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유인하는 그가 하는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휘둘렸다.

“버리지 않았다.”

권시혁은 화라는 걸 내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화를 내는지도 잘 몰랐다. 유인하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지만 역시 화를 내는 그에게 상처받았다. 그가 화를 낼 만하다든가, 아니면 그가 화를 낼 줄 안다는 사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무엇에 혼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부모에게 무섭게 공격받았던 기억만 남기는 아이들처럼 상처만 받았다.

그의 품은 전과 같았다. 하지만 전과 같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눈물이 나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유인하의 눈이 벌게져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지만 뭔가에 억울하고 그래서 화가 난 얼굴로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꾹 참고 있었다. 부모의 정당하지 못한 매질에 절대 빌지 않고 자존심을 세우던 언젠가와 똑같았다. 스스로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짓말…!’

버릴 만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버렸다는 사실에 원망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왜 그랬어?”

“당신도 날 버렸잖아!”

그의 추궁이 왜 그가 면피하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버렸으면서! 유인하는 그의 팔에 거의 매달려 있었다. 아무런 힘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력한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끝까지 악을 썼다.

“버리지 않았어. 왜 자꾸 버렸다고 하는 거지? 넌 그때 정말로 죽었다. 병원에 빨리 갔는데도… 살릴 수가 없었어. 내 품에서 넌…! 차갑고 딱딱해졌다. 왜 그렇게 되어야만 했지? 난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불행하게 한 건가? 그래서 날 죽이려고 한 거야?”

그답지 않게 목소리가 빨라졌다. 그제서야 권시혁은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누군가에게 화를 낸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이렇게 강압적으로 붙잡고. 권시혁은 유인하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내가… 정말 죽었다고…?”

유인하가 중얼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 죽었으면 지금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문득 그때 분명히 날짜 계산이 안 맞았던 기억이 불현듯 났다. 그가 그렇게 잔혹하게 버렸다고 생각하고 나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깨어난 날은 칼로 찌른 날로부터 열흘이 넘게 지나 있었다. 고양이로 변했으니 연명 치료도 어려웠을 것이다. 변하기 전에 이미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이미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엔 그런 부탁도 한 것이다.

“정말… 버리지 않았다고….”

“그래.”

유인하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등에는 그날의 흉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손등을 뚫리면서까지 유인하를 구하려고 했다.

“네 말을 알 수 있기를 바라곤 했다.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면 더 이상 가출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내 곁에 있어 줄 것 같아서….”

“…….”

“널 불행하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나에게 그런 원한을 가질 정도로 널…. 사람이 된 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어. 하지만 만약에 내가 네게 해준 것들이 널 힘들게만 한 거라면 난….”

권시혁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렇게나 평정하고 아무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남자였다. 손을 아무리 물어도 쓰다듬어주는 남자였다. 그때에 묶여 있는 건 유인하 뿐만이 아니었다. 이 남자를 찔렀을 때, 그의 목만 찔렀던 것이 아니었다.

“슬펐다. 사죄하고 싶었다.”

유인하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권시혁은 드디어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면 나도 이 번민을 벗을 수 있겠지….”

그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졌다. 아무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예전으로 돌아가듯. 유인하의 기분이 크게 울렁거렸다.

“당신한테 고양이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 어머니도 끝난 인연이라고 매정하게 내치면서.”

유인하가 나무 옹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권시혁은 그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약간 놀랐지만 티가 나진 않았다. 티가 날 만큼 놀란 건 아니니까.

“내가 정훈이를 찔렀다고 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잖아. 당신은 냉혈한이야. 당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너도 다른 사람들이랑 같은 말을 할 줄은 몰랐군.”

그러자 놀랍게도 권시혁은 상당히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목소리는 똑같이 무뚝뚝하고 차분했지만 그랬다. 그리고 이어 말한 말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네 것이라고 말했던 건 너였다.”

무슨 뜻이지? 그의 말에 유인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 것. 내 거…. 유인하는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런다고 정말 내 게 되는 건 아니잖아.”

권시혁이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그럼 너는?”

유인하는 또 목이 졸린 것 같은 가쁜 숨소리를 냈다. 왜냐하면… 유인하는 인간 유인하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의 고양이로 평생 그의 곁에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

잊으려고 했었다. 아니, 없었던 일로 하려고 했었다. 그때의 일도, 그 마음도. 잔혹하게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그때, 그 사실을 견딜 수가 없어서 필사적으로 외면하려고만 했었다. 사랑하지 않았다고. 나도 죽이려고 했다고. 그러면 그에게 버려진 것에 고통받지 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술을 마시고 여전히 자신이 누군가한테는 원해진다는 것으로 어떻게든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었다. 원하게 된 이상, 원하는 것도 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전부 고통이 되었다.

권시혁의 새카만 눈동자는 유인하의 살랑거리는 머리카락만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나비의 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칠흑같이 새카만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나비가… 그리워.”

권시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목석이니 불감증이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만 같던 그는 오히려 솔직했다. 어떤 것에도 솔직하지 못한 유인하는 그의 말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는 아직도 나비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퍼뜩 겁이 났다. 이미 나비는 죽었다. 이제는 나비로 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인하는 또다시 상실감에 욱신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떨궜다.

처음에 나비가 되었을 때 나비는 유인하였다. 사람으로 다시 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인간인 자신과 고양이인 자신 사이에서 마구 흔들렸다. 원래는 하나였던 것이 두 개로 나뉘어 버린 것처럼. 이젠 고양이로 변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전과 같이 인간 유인하만이 남은 것일까? 나비는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다시 고양이가 되길 바라는 거야?”

“될 수 있어?”

“…아니.”

유인하는 그제야 그를 떨쳐내고 그의 품에서 나왔다. 옷차림을 바로잡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나비는 죽었어.”

“네가 나비잖아.”

“난 고양이가 아니야.”

유인하가 말했다. 그러자 잠깐 대답이 없던 권시혁이 물었다.

“그러면 왜 마지막에 나비처럼 인사했지?”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유인하는 허점을 찔린 사람처럼 잠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밖으로 티가 나진 않았다. 다시 정신을 붙잡았다.

“그래? 기억 안 나는데.”

유인하는 다시 주먹을 꽉 잡았다.

“난 당신이 싫어.”

유인하가 말했다. 그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이 무서웠다. 그리고 한숨이 들려왔다. 그가 돌아서는 것 같았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곧 갈 것 같던 권시혁은 발을 머뭇거렸다. 그러는 법이 없는 남자라 유인하는 약간 의아하게 여겼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이제 돌아오지 않을 건가?”

그의 질문에 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돌아가? 누가? 어딜? 나한테 돌아갈 곳이 어디 있다고. 지금 나한테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말하는 건가? 왜? 이제 고양이가 될 수 없다고 했는데도? 유인하는 당황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실소를 하고 습관처럼 빈정거렸다.

“사람인 나보고 설마 당신 곁에서 아양이나 떨면서 살라는 거야? 난 고양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자신의 말에 더 당황했다. 그리고 돌이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이어 말했다. 그런 자신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말했잖아. 난 그냥 먹고 살려고 당신 집에 들어간 것뿐이야. 당신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새 고양이 한 마리 길러.”

유인하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자신의 이런 언행은 전부 그의 습관이었다. 그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싫어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보다도 가혹하고 모질었다. 스스로가 자신에게 가혹하고 모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향한 호의를 언제나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을 찌를 비수를 숨기고 있는 포장지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건 그를 정이나 사랑을 빌미로 해치고 착취하는 인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는 가족에서부터 어린 그에게 욕정을 품고 공격하던 남자들까지. 지금은 강인해 보이기만 하는 그이지만 그런 그도 누군가의 애정이나 안전함을 원해서 오히려 다쳤던 적이 많았다. 갈수록 무서워지고 그래서 방어적으로 변했다. 그 마음이 상대가 자신을 해칠 수 있게 허용하게 만들 테니까. 그래서 그가 권시혁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그만큼 그를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

권시혁은 묵묵한 눈길로 유인하의 뒷모습을 보았다. 상실감은 이미 다 느꼈다고 생각했다. 나비가 죽었을 때. 본인은 자신이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황했었다. 자신이 마음대로 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남자였다. 그는 언제나 새벽의 호반처럼 평온한 남자였다.

잃을 만큼 뭔가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착각이다. 사람도 물건도 언제나 오고 갈 뿐이니까. 하지만 언제나 무릎 위에 놓고 쓰다듬으며 ‘자신의 고양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준 만큼 잃어버리고 말았다.

몇몇 사람들은 권시혁을 뭔가 초월한 존재처럼 보곤 했지만 역시나 사실이 아니었다. 그도 이렇게 보이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무언가에 정을 붙이고 그래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본질은 같다는 걸 알아도 고양이 나비와 인간 유인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권시혁은 나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고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하지만 인간 유인하는?

나비는 할퀴고 손을 문다. 애정을 표해도 금방 돌아서고 돌아섰다가 또 금방 돌아와 품을 파고든다. 자신이 사랑받는지 아닌지 기민하게 눈치챘다. 밤이면 꼭 주인이 자는 침대 머리맡에서 잤고 서재에 숨어 있다가 일을 하고 있는 주인의 무릎 위를 뛰어올라 놀래켰다. 제멋대로 굴어도 사랑받는 자신을 알고 그것을 즐겼다. 사랑받는 법을 알았다. 독서 시간엔 책을 읽는 것보다 쓰다듬는 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화를 냈다. 돌아오면 언제나 반기며 뛰어왔다. 발치에 몸을 비비고 안아 들면 이마를 부딪쳐 문질렀다. 나비는 분명히 자신의 주인을 사랑했다.

고양이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다. 고양이라면 가출해도 찾아서 쉽게 데리고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할퀴고 무는 것처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방금 눈치챘으면서도. 고양이 나비는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지 않는 권시혁을 기어코 유혹해냈다. 하지만 인간인 그는 처음부터 단념하고 있다는 차이였다.

권시혁은 여전히 인간 나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비처럼 똑같이 사랑하는지도. 원래 그런 것은 권시혁과 인연이 먼 것이었다. 이것은 권시혁의 습관이었다. 연이 아닌 것은 구태여 붙잡지 않는다. 권시혁은 짧은 한숨만을 남기고 돌아섰다. 이 마음도 시간이 희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던 유인하의 어깨가 움찔했다. 당당하게 펴져 있는 그의 어깨가 어쩐지 약간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유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 점잖은 남자는 나비를 그렇게 차갑게 내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렇게 정갈한 무덤도 만들어준 것이었다. 아마 그날 새벽에도 그는 저 남자가 만들어준 소중한 무덤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권시혁은 지금까지 나비의 무덤을 찾아오고 있었다.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 했는데도.

유인하는 이상하게도 당연히 그가 자신을 해치고 싶어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는 것만으로도 뭔가 배 속의 느낌이 이상했다. 차가운 돌이 위장을 문지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거북하고 무겁고.

‘이제 잊어버릴 거야.’

알 수 있었다. 돌아서는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헤어질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그와는 영영 이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접으려고 했다. 몇 번이고 스스로 그의 주변으로 돌아오고 말면서도 헤어질 때면 인연을 끊을 각오를 했다. 왜냐하면 서로가 연이 아니라는 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권시혁이 아니라 유인하였기 때문이다.

유인하는 저도 모르게 뭐라고 입을 열었다. 그 남자가 발을 멈췄다.

“뭐라고?”

“머리….”

유인하의 굳어 있던 얼굴이 약간은 풀렸다. 시선을 내리니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신경질적이지만 조금은 처연한 얼굴이었다. 여전히 뭔가 자존심이 상하는 것처럼. 물론 권시혁의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권시혁은 두 번 묻진 않았다. 그는 다시 발걸음 뗐다. 유인하는 온몸에 식은땀이 어렸다.

‘진짜 가버렸어….’

유인하는 그제야 권시혁의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는 산책로로 돌아갔다. 배롱나무의 담 위로 키가 큰 그의 머리카락만 약간 보였다. 유인하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버릴 줄 알았어….’

사람이라는 걸 들키면 그가 고양이의 모습이라도 미워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두려워했었다. 하지만 그가 고양이의 모습만 바란다는 것을 알아도 마음은 아픈 것이었다. 왜 여기를 왔을까. 이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결국 그 남자도 날 포기했다는 걸?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이런 건 싫어…. 싫어.’

이제 고양이는 될 수 없었다. 마지막이었다. 정말 마지막이야. 유인하는 배롱나무를 해치고 곧장 산책로로 넘어갔다. 머리가 흐트러졌다. 달렸다. 산책로를 내려가던 그 남자가 뒤돌아보았다. 어느새 늦여름의 밤이 찾아왔다. 가로등이 약간 멀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달려가 안길 것처럼 다급하게 뛰어갔지만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섰다.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간 유인하로.

“인사… 제대로 하고 싶어.”

유인하는 주춤주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 남자는 가만히 있었다. 유인하는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느끼는 편이다. 조금 용기를 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좀 더 선명하게 보이는 곳까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땐 미안했어. 미안하다는 말로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내가…. 난 이제 고양이는 못 돼. 처음 나갈 때도 인사는… 하고 싶었어. 그래서… 그러니까….”

진짜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했다고 해도 이것보다는 더 잘 말하지 않을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감정이 뭔지도 모르게 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두서없는 말을 해도 그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마치 알아듣는 것처럼. 쳐다보는 시선은 조금 견디기 힘들었지만, 다행이다.

유인하는 머뭇거리며 눈치를 몇 번이고 보다가 왼손으로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때의 유인하를 지키느라 꿰뚫린 상처가 있는 손이었다. 그때는 고양이의 모습이 아니었는데도 지켜주었다. 그 손을 뺨에 댔다. 그것만으로 황홀해서 뺨이 분홍색으로 바뀌었다. 뭘까. 그것만으로 짓누르던 무언가가 하나 떨어져 나갔다. 안도의 한숨처럼 길고 가늘게 숨을 내뱉었다. 속눈썹이 축 처졌다. 그대로 발꿈치를 약간 들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대며 그의 등을 한 팔로 안았다.

싫어하는 표정을 하고 있을까? 아까처럼, 그때처럼? 인간인 나는 싫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마지막이니까 봐줘. 그때의 일도 봐줬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싫다면 매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건 언제나 그랬다.

유인하는 마치 나비처럼 자기 멋대로 주인을 재단했다. 아니, 그는 언제나 멋대로 권시혁이라는 남자를 재단했다. 석남이랬다가 하인 취급을 했다가. 고양이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포옹이었다. 맨얼굴에 닿는 그의 피부는 조금 건조하고 아주 뜨거웠다. 무취에 가까운 희미한 샤워 코롱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유인하가 말했다.

“안녕.”

“…….”

색.

다시 얼굴을 봤을 때 권시혁이 느낀 인상은 처음과 똑같았다. 사람이 된 자신의 고양이는 자신과 달리 격렬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미간을 꿰뚫는 것 같은 사나운 눈빛. 권시혁이 물이라면 유인하는 불이었다. 그래서일까. 기가 죽은 모습이 가엽다.

포옹은 짧았다. 그는 얼른 떨어졌다. 얼굴을 보여주기 싫은지 고개부터 돌렸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의 손과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깨를 펴고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대로 한 걸음을 내디딜 때 권시혁은 그의 오른쪽 손목을 잡고 끌어당겨서 다시 뒤에서 안았다. 유인하는 숨을 멈췄다. 권시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희로애락이 적다고 평했다. 권시혁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누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과 기분들이 뭐냐고 물어보면 무엇이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전에 겪어보지 못한 감정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은 이럴 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면 아마 다른 사람들의 감정사가 그보다 더 다채로운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어머니는 권시혁을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꺼려했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권시혁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자식을 버린 비정한 여자.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가는 경쟁자. 그걸 안다고 굳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권시혁을 그저 권시혁으로 봐주는 것은 아마 돌아가신 할머니와 이부동생인 안정훈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달리 고양이는…. 권시혁은 나비가 곁에 있어 행복했다. 그런 감정은 처음이었지만 분명히 행복이라는 것은 알았다. 존재만으로도 충족한 마음이 든다. 서로 교감하고 보살펴주었다. 은연중에 나비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도 나비에게 자신을 투영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되어 누군가를 찌르고 권시혁에게 화를 내고 떠났다. 권시혁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나비는 행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걸 느끼면서 사는 것이었다. 혼자서 기대하고 실망하는 마음. 아마도 이런 게 실연인가 보다. 권시혁이 말했다.

“나는 멋대로 네가 내 곁에 있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화가 났다. 화가 나본 건 처음이야.”

한참을 유인하를 껴안고 있던 그가 그렇게 말했다.

“널 정말로 사랑했다.”

이게 유인하의 ‘안녕’이란 말에 대한 그의 화답인 모양이다. 점잖은 남자답다고 해야 할까? 권시혁은 그렇게 유인하를 놓으려고 했다.

유인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강한 힘이었다. 작은 고양이였다면 절대 느낄 수 없을 만큼. 권시혁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인상적인 기다란 속눈썹과 그린 듯한 높고 예쁜 코, 새빨간 입술은 섬세하기 짝이 없다. 반듯한 이마와 광대는 우아하고 턱선은 남자답다. 그는 권시혁의 손을 잡은 채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홱 돌려서 권시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

솔직히 권시혁은 그대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고 싶었다. 미간을 꿰뚫는 것 같은 강렬한 눈동자였다. 뭔가 전하고 싶은 것을 가득 담아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침범당하는 기분이다. 강력한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느껴졌다. 맹수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맹수님은 화가 나셨다. 그가 또 뭐에 화가 났는지 권시혁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찌를 듯한 눈으로 권시혁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지금 사랑하지 않으면 그런 말 따위…! 화가 나서 씩씩대며 권시혁의 멱살까지 잡은 유인하는 그 뒷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하악!”

그대로 공중에서 자유낙하 하는 걸 권시혁이 얼른 받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다지 몸놀림이 좋지 않은 것일까.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지만 나비는 고양이라 낙법 같은 건 DNA에 새겨져 있었다. 그의 가슴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 바로 그의 뺨에 냥냥펀치를 팍팍 날렸다.

“캬!!”

괘씸하다. 당신은 내 건데! 사랑했다니, 사랑했다니!! 그럼 지금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 완전한 성체가 된 나비는 꽤나 무거웠다. 하지만 귀부터 꼬리까지는 노랗고 얼굴과 배는 하얀, 부정할 수 없는 진짜 나비였다. 얼굴이 어렸을 때랑 똑같다. 나비는 주인의 광대를 연타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은근히 힘이 세다. 퍽퍽 소리가 났다. 권시혁은 놀란 얼굴로 일단 나비의 앞발을 잡았다. 나비는 붙잡힌 채로 광분하여 마구 머리를 흔들며 짜증을 냈다.

“@#$%#$!! (짜증 나아!!)”

마치 사람이 악악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고양이가 된 나비는 화가 나면 약간(많이) 이성을 잃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허리를 벌떡 일으켰다.

“나비야.”

그의 목소리가 일변했다. 그는 얼른 허리를 세우고 나비를 꼭 껴안았다.

“나비야….”

그제야 나비는 자신이 다시 고양이가 된 것을 깨달았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순간 털이 파바박 서버렸다. 그리고 뻣뻣했던 꼬리가 살랑하고 움직이더니 물음표 모양이 되었다.

‘다시 고양이가 됐어? 어떻게? 그 뒤로는 전혀….’

얼굴부터 배까지는 뽀얀 하얀색이다. 귀와 등, 꼬리까지는 주황색 고양이다. 줄무늬는 있지만 옅은 치즈태비. 확실히 무척 예쁘게 생겼지만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권시혁이 자신의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무엇보다 특별한 고양이를 보는 것처럼. 인간 유인하를 볼 때와는 달랐다. 그의 눈동자에 애정이 돌아왔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나비야….”

그는 고양이의 얼굴에 스스로 뺨을 비볐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그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골골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물론 배신감이 들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지금 이거 뭐냐고! 이 태도 전환!!’

눈빛이 달랐다. 이 남자는 목석같은 남자라 감정 표현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빛, 목소리, 태도에서 티가 확 났다. 겉으로 보이는 인상과 달리 그는 무척이나 솔직한 남자였다.

도대체 이 남자한테 나비는 무엇일까? 나비가 인간으로 변했을 땐 싫어했다.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나비가 되는 것을 눈앞에서 봤으면서, 지금 자신이 이렇게 애지중지 안고 있는 게 그 인간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인가.

“먀. 먀아. 먀! (당신도 그냥 얼빠냐고. 몸만 노리는 거냐고. 바보 같아.)”

나비는 역시 말이 많았다. 인간 유인하는 꺼려했던 그가 고양이는 마음껏 만졌다. 그렇게 불평불만을 말하면서도 나비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했다. 인간일 때는 위축되어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유인하에게도 나비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 남자는 진짜 무슨 감격이라도 한 것인지 한동안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서 나비를 껴안고 쓰다듬었다. 표정이 진지했다. 몇 번이고 얼굴을 보고 뽀뽀를 하고 다시 껴안고 다시 얼굴을 보고 또 껴안았다. 그러고서야 바닥에 떨어진 유인하의 물건들을 발견했다.

“…….”

권시혁은 왼쪽 어깨에 고양이를 반쯤 걸친 채 몸을 숙여 그 물건들을 모두 챙겼다. 그리고 고양이의 뺨에 다시 입을 맞추며 말했다.

“집에 가자.”

*

정말 유인하에게도 나비란 무엇인가. 그 남자와 똑같은 배신자였다.

“골골골골. (기분 좋아~~!)”

위축되어 있던 마음도,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우울한 마음도 전부 없어져 버렸다. 나비는 몇 시간 동안 사람들의 손을 타고 다니며 온몸을 만져졌다. 사람의 상태였으면 모두를 때려눕히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의 몸일 땐 왜 이렇게 스킨십에 관대해지는 걸까? 아니면 이 집 사람들이 특별한 걸까?

사람들은 나비에게 미안해했다. 산 줄도 모르고 땅에 묻었으니 자신을 버렸을 것이라 생각했을 거라면서 다들 슬퍼했다. 그러니까 모두들 기억하고 있었다. 나비를 잊지 않았다. 나비의 방도 사진도 그림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권시혁은 다른 모든 일을 전부 제쳐 두고 나비의 방에 틀어박혔다. 안락의자에 반쯤 눕듯 편히 앉아 가슴 위에 고양이를 얹어 놓고 쓰다듬고만 있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나비에게만 집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텅 빈 시간을 주체하지 못했던 유인하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은 텅 비지 않았다. 그 남자와 함께 있으면, 그냥 몸을 기대고 체온을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충만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듯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양이는 엔진을 켜놓은 오토바이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남자의 목덜미에 턱을 얹어 놓고 작은 머리통부터 허리까지 쓰다듬어질 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녹은 마시멜로처럼 늘어졌다.

뜨거운 손이었다. 고양이가 딱 좋아할 온도다. 커서 한 손으로도 온몸이 감싸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검지가 미간을 간지럽히면 지그시 눈을 감고 먀, 하고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귀를 접었다 폈다 하는 엄지에 더 머리를 눌러 문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나비는 고개를 들고 권시혁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았다. 그 남자의 무뚝뚝한 눈동자에선 전과 같이 애정이 느껴졌다. 나비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낼 수 있었다. 나비가 눈을 한 번 깜박이니 그도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전과 똑같이. 나비는 그의 코와 뺨에 다시 이마를 비볐다.

‘당신이 너무 좋아.’

그동안 그렇게 부정하고 외면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렇게 불쑥 좋다는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마치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것처럼. 역시 자존심이 상해야 할 일일까.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길 바란 것도 아닌데.

인간이니 고양이니 그렇게 신경 쓰지 말 걸 그랬다. 그냥 이대로 같이 있을 걸…. 나비는 한참 그의 품에 안겨서 쓰다듬을 받았다. 골골거리는 소리를 쉴 새 없이 냈다. 오랜만이라서 더 기분이 좋았다.

‘더, 더…! 좋아…!’

그의 손에는 캣닢을 발라 놓은 게 틀림없었다. 나비는 마치 언제 떠난 적이 있냐는 듯 어느새 그의 무릎에 방만하게 누워 배를 드러내고 그를 유혹했다. 그가 더 자신을 마음껏 만질 수 있도록 했다. 너무나 좋았다. 그륵그륵거리는 소리는 잔뜩 냈다. 그가 어딜 어떻게 만지든 너무나 좋아했다. 나비는 다시 일어나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먀, 먀아~, 먀! (궁디팡팡 해줘!)”

나비는 엉덩이를 치켜들며 요구했다. 집 밖으로 나다니며 결국 안 좋은 물이 들고 말았다. 모든 금욕주의자들에겐 쾌락주의적 면모가 있는 것일까. 원래 나비는 말도 많고 요구성 울음이 많은 고양이였다. 그 남자는 그게 웃긴지 피식 웃더니 나비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우리 나비….”

“골골골골~. (하아~! 너무 좋아!)”

둘 다 전의 일이나 아까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몸의 대화 (?)만 하고 있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관계라 할 수 있을까. 나비는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그릉거리다가 결국 뿅 하고 다시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다.

“흐으응~! 너무 기분 좋아…!”

새하얀 피부의 미남이었다. 알몸에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색기만발한 표정으로 수제 양복을 입은 성인 남자의 무릎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한 손이 그의 하얀 엉덩이를 잡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필요 이상으로 모든 것을 도색적으로 만들었다. 그 남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유인하는 자신이 다시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신의 엉덩이를 그의 몸에 꾹 눌렀다. 손으로 그 남자의 옷깃을 잡고 고개를 돌려 뺨에 입술을 문지르며 아양을 떨었다.

“좀 더….”

핫, 말했다…! 유인하는 눈을 번쩍 떴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유인하는 그 남자의 품에 등을 대고 몸을 푹 포개고 있었다. 얼굴이 엄청 가까웠다. 입술이 서로 닿을 것 같다.

“…….”

“…….”

둘 다 눈을 크게 뜬 채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펑. 그대로 유인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고양이로 변했다. 다행히 의지대로 변할 수 있었다. 권시혁의 넓적다리 위에 얌전한 척 네 발을 모으고 있는 고양이가 다시 나타났다. 주인을 등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귀여운 뒷모습이다.

“…먀. (아니야.)”

나비는 뭐가 아닌지 스스로도 모르면서 일단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비는 분명 사람으로, 그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풀고 싶은 오해가 있었다. 그걸 다 제쳐두고 고양이로 몸의 대화만 나누다가 막상 사람이 되었을 땐 벙어리처럼 말문이 막혔다.

나비는 그대로 그 남자의 무릎을 벗어나 창틀로 올라갔다. 창문을 열기 위해 잠금 장치에 발을 올리고 낑낑거렸다. 하지만 예전에 나비가 가출을 밥 먹듯이 하는 바람에 이 집의 모든 창문의 잠금장치가 고양이가 절대 풀 수 없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도 나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문을 열려고 했다. 고양이가 창틀에 미친 듯이 스크래치를 하고 있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등을 등받이에서 떼고 물끄러미 나비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던 권시혁이 입을 열었다.

“나비야.”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자신의 이름’에 귀가 다 간지러웠다. 나비는 자연스럽게 그를 돌아보고 먀~, 하고 그의 부름에 답했다.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

나비는 그의 말에 순간 눈물이 글썽했다.

그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살았는데도 묻은 것이라는 건 의심만으로도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이런 말을 들어도 자신답게 믿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보면 아마 믿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그에게 거짓말을 해도 권시혁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여전히 유인하라는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묵묵한 시선으로 나비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하다.”

권시혁이 말했다. 나비는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

나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어째서일까. 그리고 이 남자는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산 채로 묻어서? 그런 의문이 고양이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일까. 그가 이어 말했다.

“전부 미안해.”

창틀에 앉은 고양이는 주인을 내려다보며 잠깐 그대로 있었다. 거기서 바로 다시 주인의 무릎 위로 뛰어내렸다. 아마 그는 좀 아팠을지도 모른다.

“먀~.”

“응?”

“먀~.”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건 언제나 나비였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하지만 나비는 다시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진짜 고양이처럼 그의 가슴 위에 앞발을 올리고 길게 서서 그의 뺨에 이마를 문질렀다. 나비의 쫑긋한 귀가 접혔다 펴졌다 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권시혁은 고양이를 자신의 품에 놓고 안락의자의 등받이에 기댄 채 다시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역시 고양이를 쓰다듬는 건 참 기분이 좋은 일이다. 마음이 더욱 정갈해진다. 기분이 좋은데도 차분하고 충족감이 든다. 권시혁은 눈을 감고 나비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

“사랑해.”

“하악…!”

처음 듣는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비는 깜짝 놀라서 다시 인간으로 변할 뻔했다. 하악질을 하며 그 남자의 입술을 앞발로 퍽퍽 쳤다. 사람으로 안 바뀌어서 다행이었다. 유인하는 주먹이 굉장히 매운 편이다.

“하하하.”

냥냥펀치를 맞은 그 남자는 뭐가 그렇게 웃겼던 걸까. 그 남자가 웃었다. 나비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때리기 위해 오른쪽 앞발을 든 채 그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밝은 얼굴이었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비는 그 남자의 얼굴을 그대로 덥썩 끌어안았다. 털복숭이에 얼굴을 묻게 된 그는 잠깐 숨이 막히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고양이의 등을 잡았다. 하지만 역시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

중간에 저도 모르게 인간으로 한 번 변한 것을 제외하면 계속 고양이의 모습으로 있었다. 그렇게 저녁 내내 쓰다듬을 받다가 전과 다름없이 그의 침실까지 가서 함께 잠을 청했다. 그는 여전히 잠을 잘 잤다. 세상모르고 자는 그의 얼굴을 보면 가끔 묘한 심술이 돋는다. 뺨을 때려서라도 깨우고 싶다. 그래도 얌전히 그의 가슴 위에 안겨 심장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비도 어느새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해도 뜨지 않은 애매한 시각에 눈이 반짝 떠졌다.

“…….”

알 수 있었다. 가야 할 시간이라는 걸. 나비는 그의 가슴 위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로 걸어가 그의 눈가에 이마를 한 번(몇 번) 문지르는 것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살금살금 그 남자의 침실을 나와 고양이 방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자신의 옷과 소지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변해 옷을 입고 다시 살금살금 나와 현관으로 나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미련이 남은 전 연인과 충동적으로 잠자리를 한 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좋았지만 후회가 되기도 하고 뭔가 기대도 되었다.

‘어떻게 계속 같이 있어.’

1년 전의 유인하는 사람의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데도 굳이 그의 눈앞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 그를 시험했다. 내심은 인간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다는 얼토당토않은 욕심 때문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하지만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 불쑥 나타나 자신의 마음만 잔뜩 말한 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것처럼. 사실 그때의 그것은 말 그대로 그것이었다. 마치 예전에 살던 고시원의 앞집에 살았던 그 폐인놈이나 할 것 같은 그런 짓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의 앞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말 그대로 아예 사라졌다. 고양이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이 좋았다. 그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로 사랑받는 것과 같았다. 유인하가 받지 못해본 사랑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서 이게 나쁜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처럼 사랑받는다는 건.

하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인간의 삶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역시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집을 나오자 얕은 한숨을 절로 나왔다. 그래도 마음을 꽉 막고 있던 바위 하나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 남자의 진심을 들은 것만으로. 유인하는 다시 코끝이 찡해져서 얼른 등을 돌려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서 이래.’

새벽이었다. 이런 새벽에 죽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죽어버렸던 뭔가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모든 것이 차츰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벽의 냄새, 공기의 서늘함, 새가 지저귀는 소리. 멀리서 밝아오는 햇살이 하늘을 진홍빛으로 물들였다. 길을 걷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뺨이 뜨끈뜨끈하다. 유인하는 걷다 말고 잠깐 아우우, 하고 쭈그리고 앉았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잘해줄 거야.’

기뻤다. 그 남자한테 다시 사랑받는다는 게 기뻤다. 이렇게 기쁘다는 게 창피할 정도로 기뻤다. 앞으로는 물지도, 할퀴지도 않고 예쁜 모습만 보여줄 것이다. 자신이 기쁜 만큼 그도 기쁘길 바랐다. 나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을 한 번 더 듣고 싶었다.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 그 남자와의 좋았던 순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떠올리다가 대뜸 사람으로 변했던 장면이 생각이 나자 털이 확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애정 어린 눈빛으로 보던 그 남자가 인간 모습을 보자 딱 굳어버렸다. 둘 다 당황했다. 재빨리 고양이로 다시 변했지만 그 어색함은 지금도 진저리가 쳐졌다.

‘앞으로 절대 그 남자 앞에서 사람으로 안 변해. 절대!’

그 남자는 쉽사리 당황하는 법이 없는 무거운 남자였다. 그래서 석남이니 불감증이니 어린 나비는 속으로 그런 그를 잔뜩 흉보곤 했다. 그런 그가 그럴 정도면 인간 모습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심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아.”

유인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뭐가 창피한지 역시 창피하기도 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껄끄러워 인상을 조금 썼다.

그게 그 남자의 탓이 아니라는 거 안다. 전에는 그게 그렇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나비만큼은 사랑해준다는 사실이 기뻐서 그때만큼 화가 나지는 않았다. 웃기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괜찮잖아, 그 정도는.’

고양이라면 몰라도 역시 사람은 부담스럽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양이가 요구하는 것이라고 해봐야 한우나 스킨십 정도가 최고치지만 사람은…. 그에게서 뭔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는 죽어도 싫었다. 특히 돈이나…. 순수한 호의로 다가가도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었다. 그 남자처럼 가진 게 많은 남자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득을 취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겠는가.

‘합격했으면 좋겠다.’

이번 시험만큼 생각 없이 치른 시험도 없었다. 정말로 더 이상 하고 싶은 것도 할 것도 없어서 한 공부였다. 2차 시험까지 다 보고 나서야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합격해서 적어도 그에게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는 증명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었다. 자기 자신에게도. 예전 모델 일을 하며 모아둔 돈도 조금은 있고….

‘그러면 가끔은… 보러 와도 될까?’

귀찮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가끔만…. 유인하는 큰 도로에 도달하여 다시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 보러 오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야. 다시 고양이도 될 수 있고.’

그래도 참 바보 같은 남자다. 아직도 나비가 그렇게 좋단 말인가. 아니, 못 보던 동안 더 마음이 깊어진 것처럼 보였다. 유인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역시 고양이는 대단하다.’

목석같은 남자가 고양이에게만 뭔가 달랐다. 항상 그랬다. 그런 남자라도 마음을 빼앗기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유인하가 그랬던 것처럼.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심장이 욱신거리곤 떨렸다. 금방이라도 다시 뛰어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같은 마음이냐고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묻고 싶다.

“…….”

유인하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야 할 일도, 해결해야 할 일도 많았다. 그렇게 나비는 외출냥이가 되고 말았다.

*

유인하가 지내던 곳이라던 시골 고시원을 갔다 온 지 2주 정도 지났다. 이제 계절은 완연한 여름이 되었다. 문자가 왔다.

<뭐 하냐. 항상 가던 커피숍. 내려와라.>

“…….”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안정훈은 유인하의 아무렇지 않은 문자를 받고 기쁨과 괘씸함을 동시에 느꼈다. 예전의 안정훈은 유인하가 먼저 연락을 해주면 언제나 감지덕지했다. 이제는 달랐다.

어차피 유인하에게 돌아올 곳은 자신밖에 없지 않은가? 예전에도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은 언제나 유인하였다. 안정훈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솟았다. 승리의 미소였다.

‘이럴 줄 알았어.’

스스로의 예상이 맞다는 걸 확인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배신감과 분노는 잠시 잊었다.

‘역시 네겐 나밖에 없어.’

초췌해져 있을 것이다. 얼른 가서 맞이하자. 상처 입은 그를 위로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도 그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안정훈은 쏜살같이 집을 튀어나가 둘이서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향했다.

L타워의 하층에 위치한 그 커피숍은 사람도 적당히 있고 커피도 맛있었다. 같은 프랜차이즈라도 고급스러움이 남달라 그런지 유인하는 종종 아침이나 점심쯤 여기서 식사를 때우며 사람 구경을 하곤 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유인하를 찾는 것은 언제나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쪽을 보면 된다. 유인하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정훈은 눈물이 글썽거렸다. 다행히도 말이다.

“인하야, 흐엉.”

고작해야 8개월 정도 못 본 것이었다. 전에는 그것보다 더 오랫동안 못 봤던 적도 있다. 물론 그때는 전화나 문자로 연락 정도는 몇 번 오가곤 했지만.

유인하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유인하는 안정훈이 오버하는 것을 예전부터 참 싫어했다. 행동이 차분하지 못하고 쉽게 경거망동한 건 뭘 아무리 좋게 말하려고 해도 천박해 보인다. 돈이 많으면 뭐 하나. 클래스가 낮아 보인다는 말이다. 누구와 심히 비교가 된다.

‘병신 새끼.’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유인하가 안정훈을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거기서 거기였다. 한심함, 그럼 그렇지 하는 일종의 안도감. 안정훈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와 유인하를 와락 안았다. 유인하는 밖으로 봤을 땐 크게 티가 안 나지만 사정없이 그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억…!”

안정훈은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옆구리를 잡고 잠깐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뒷덜미를 잡고 일단 자리에 앉혔다.

“조용히 좀 하자.”

“건강해 보여서 다행, 윽, 그동안 어디 있었어?”

안정훈은 옆구리가 아파서 허리를 들지도 못했다. 약간 원망조의 말부터 나왔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라.”

유인하가 매정하게 말했다. 안정훈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역시 인하가 먼저 연락해줬어.’

배신이라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주제에 그것을 싹 잊고 안정훈은 좋을 대로 생각했다. 만약에 유인하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보다 자신이 찾는 것이 빨랐다면 높은 확률로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그의 머리를 야구 방망이로 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그에게 어떤 선택권도 주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찾았는데. 얼마나 걱정했는데. 따질 거야.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안정훈이라고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큰 시련이 닥쳐도 함께 할 미래만큼은 굳건하다고 믿기 때문에 괜찮은 것뿐이다. 자신은 그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 유인하도 마찬가지다.

“어, 어떻게, 네가 어떻게 나, 나한테 말도 없이….”

등신같이 목소리가 떨린다. 원래는 다 연기였다. 멀쩡하게 말해도 될 텐데 상대방의 냉정한 반응에 습관적으로 목소리를 떨며 말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한 번도 유인하에게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도 크게 작용했다.

너에겐 분명 나에 대한 책임이 있지 않냐고.

솔직히 지금까지의 세월이나 그에게 착취당해온 것을 생각하면 몇 번쯤은 해봤을 법한 말인데도 그런 말에 혹여나 그가 떠날까 봐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정을 나눠 놓고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몇 개월이나 사라지다니. 책임감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래, 이건 따져도 될 것이다. 따져야 했다. 관계의 진전을 이뤄야 했다. 다시는 이렇게 멋대로 떠나는 일이 없도록. 유인하에게 뭔가를 당당히 요구하다니. 괜히 두근거린다. 안정훈은 마음을 크게 먹고 고개를 번쩍 들고 유인하를 마주했다.

흐헙, 안정훈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안정훈은 그렇게 유인하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생각이었으나…. 유인하는 심드렁한 얼굴로 안정훈의 반대편에서 양복의 단추를 풀며 자연스럽게 앉고 있었다. 창밖을 구경하는 그의 표정이 그림처럼 우아하다. 마치 항상 그러고 다니는 남자처럼. 그는 곧 고개를 돌려 메뉴판을 내려다보았다. 안정훈의 가슴이 크게 두근, 하고 뛰었다.

오늘 무슨 날인 걸까? 유인하는 근사한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안정훈은 원래 부에 대한 선망이 없었는데도 유인하가 그런 것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유한 남자가 되었다. 딱히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도 열정이 없지만 유인하가 그러니까(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별개로) 본인은 그보다 더한 사교성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돈을 벌게 되고 부유한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 사치품에 대해서도 제법 알게 되었는데, 지금 유인하가 입고 있는 것을 제대로 알아본 것이 맞다면 정장 한 벌에 2백만 원이 넘는 명품이었다. 정장만 해도 이런데 구두도 싼 것은 아닐 것 같고. 다크 그레이 투버튼 수트에 셔츠는 이태리산 고급 원사의 은은한 진주색, 넥타이는 베이지색과 황금색 중간에 고급스러운 패턴이 들어가 있었다.

물론 작년에 유인하가 돈을 약간 벌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런 사치를 할 정도는 아닌 건 안정훈이 더 잘 알았다. 몇천 원에도 벌벌 떨던 시절이 그렇게 억울했던지 작년에 함께 지내던 시절의 유인하는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썼다. 그 씀씀이가 아직 줄어든 건 아닌 모양이다.

다들 미남이 희귀한 시대에 살고 있다. 훤칠한 키에 어디서 보기도 힘들 정도로 잘생긴 절세 미남이 몸에 딱 맞는 쓰리피스 양복을 입고 약간 피곤한 듯 나른한 얼굴로 고급 커피숍의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뭘 하는 남자일까 하는 호기심이 인다. 아까의 소동이 아니더라도 전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다.

‘아, 진짜 꼴린다….’

안정훈은 잠깐 자기가 뭘 하려고 했는지 까먹고 눈을 크게 뜬 채 유인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침이라도 안 흘렸으면 다행이다.

“뭐, 뭐야?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입었어? 나, 나 만나려고? 너무 멋있다, 인하야….”

안정훈이 확인 삼아 자신의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유인하가 일찍이 얼굴로 먹고살았으면 아마 안정훈은 그를 감히 건드릴 생각도 못 하고 얌전히 훌륭한 셔틀 친구로 평생 그에게 복종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평생 추락할 일이 없었을 테니까.

옷 때문일까?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따라 유난히 얼굴이 좋았다. 피부도 생기가 있고 반질반질하며 뭔가 인상도 달라진 것만 같다. 날카로운 느낌이 그렇게 사납지는 않고 여유가 느껴진다. 일단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파악할 새가 없었다.

완전 헤벌레한(몇 개월 동안의 배신감과 분노를 잊고서) 안정훈의 얼굴을 발견한 유인하는 당연히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하루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말한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짜증이 나서 말했다.

“너 그것 좀 어떻게 안 되냐? 어떻게….”

“으, 응? 뭐가? 나?”

유인하는 인상을 약간 쓴 채 눈동자만 아래위로 굴려 그를 훑어보았다. 안정훈은 핫, 하고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유인하가 저럴 때면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하게 된다.

“처음 만났을 땐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물건의 흠이라도 살펴보듯 유인하가 안정훈을 보았다. 저런 눈빛은 오랜만이다.

유인하에게 안정훈이란 원래 아무 이유도 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병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만만하고 그러니까 손쉽다. 쉬운 놈이라는 뜻이다. 자기 주제를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알아 왔을 것이다.

작년에 그런 일이 있고도 지금은 어째 전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서로 양만큼 주고받았기 때문일까. 복수가 얼마나 정신 건강에 이로운지 알 수 있었다. 굳이 무기력하게 침대 속에 있을 때가 아니더라도 무감각했다.

고시 생활 동안 위축되어 있을 땐 오히려 안정훈을 그렇게 착취하지도 않았다. 물론 착취하더라도 책임감은 제로에 수렴했다. 어차피 억지로 착취한 적도 없었다. 언제나 먼저 떠받든 건 안정훈이었다.

어차피 다 자기가 원해서 한 것 아닌가.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라서 굳이 버릴 필요도 없는 그런 존재. 그래서 고시 때문에 마음이 지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황할 때에는 ‘나한테 이것밖에 없다고?’하고 분개했고 이제 그것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옛날처럼 뭔가 신경에 거슬리지만 만만한 개새끼, 안정훈 본연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물론 전과 다른 점도 있었다. 오래 함께하면 상대의 존재가 너무 익숙해서 없으면 허전하다. 습관적으로 만나고 습관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그런 커플처럼.

“뭐, 뭐가?”

“병신처럼 좀 굴지 마. 이제 우리 나이가 몇 살인데.”

“으, 응? 내가? 나? 나 병신 같아? 아니, 아닌데. 그냥 난 네가 좋아서….”

안정훈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는 유인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며 머릿속에 이미지를 저장하느라 바빴다. 유인하가 모델 활동을 할 때도 예쁘긴 했지만 그때는 술에 취해 있을 때가 많아 그의 진짜 매력은 별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눈빛이 살아 있는 지금의 그는 날카롭기 짝이 없는 칼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칼집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허억, 하! 진짜 왜 사람들이 수트에 미치는 줄 알겠네! 발끝부터 마디마디 다 핥고 싶다….’

그럴수록 안정훈은 습관적으로 숨을 죽였다. 오늘 이걸로만 딸을 백 번은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면 유인하는 뭐라고 할까? 아아, 술을 먹일 수 있을 때가 참 좋았다. 무드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 같으면 아마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쳐다보는 눈빛만이 날카로울 것이다. 이목을 생각해서 소란을 피우진 않겠지만.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다른 사람들이 없다면 맞았을지도. 그의 발등에 입을 맞춘 기억을 소환해냈다. 입술에 닿는 그의 구두의 감촉이 궁금했다.

안정훈이 그렇게 망상에 한창일 때 유인하는 잠깐 자신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처음 봤을 때….’

유인하는 종업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정훈의 쪽으론 시선도 두지 않은 채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만나야 하는 이유는 제법 있었다. 작년에 그의 집에서 나올 때 무작정 나왔기 때문에 짐을 전부 그가 가지고 있었다. 꼬이고 꼬인 그의 형과의 문제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나중에 찾은 이유다. 결국 ‘왠지 만나야만 할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결국 불러냈다. 매년 싸우면서 명절 때는 꼭 다 모이는 가족 같다.

딱히 만나고 싶지 않은데 만나야만 할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만나면 그게 좋을 리가 없나. 심드렁하다.

‘아니, 다른 문제도 있지. 공부는 어쩔 거고….’

오랜 고시 기간 동안 안정훈은 유인하를 항상 응원해왔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둥, 함께 살자는 둥 이상한 말을 했다. 그냥 들었을 땐 고마운 말일지 모르지만….

유인하는 안정훈을 관찰했다, 예전처럼.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동안 그냥 잘 지낸 모양이었다. 표정이 밝았다. 뭐, 그는 언제나 얼굴이 밝다. 얼마나 내버려 두든 만나면 꼬리를 마구 흔드는 강아지 같았다.

하지만 작년엔 고백에 차였다고 사람을 바로 덮치려고 하지 않았던가.

“…….”

처음 봤을 때의 안정훈은 유달리 밝다는 인상이 전부였다. 활기찬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유인하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저기! 안녕! 너 진짜 잘생겼다~!]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순수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면은 처음부터 있었다. 유인하에 대한 호감이 너무 티가 팍팍 나서 이승원을 비롯해서 다른 친구들도 웃음기를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처음엔 말을 더듬는다거나 유달리 눈치가 없다거나 바보 같지는 않았다.

‘사람이 발전이 있어야지….’

유인하는 그렇게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가 고등학교 때 안정훈을 상당히 괴롭혔다는 것은 까마득히 잊고서. 원래 때린 놈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들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하고 매일같이 심부름 등을 시키며 금전도 갈취했으며 부하처럼 부렸다. 물론 안정훈은 그럴 때보다 그가 관심을 썩 주지 않은 고3 때나 고시 시절을 더 싫어하긴 했지만.

‘또 그럴까?’

유인하는 작년의 파란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바보 같기만 하다.

그러니까 안정훈의 바보 같은 면모는 사실 유인하가 조각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 사람이 본인에게 기대하는 역할에 부응하려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안정훈은 그의 형과는 다른 의미로 전혀 남을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다. 다만 유인하만큼은 특별했다.

유인하는 무의식중의 방어기제로 무해한 인간들에게만 곁을 허락하거나, 먼저 공격성을 드러내어 상대방의 공격성을 테스트하거나 혹은 거세하려고 든다. 그가 곁을 허락했던 인간들을 보면 일목요연했다. 권시혁도, 안정훈도, 이승원도 제각각 유인하가 안도하는 포인트가 있었다. 권시혁은 금욕을 넘어 무욕적이고 안정훈은 항상 배를 발랑 까뒤집으며 복종을 표현했으며 이승원은 스스로가 방어적이기 때문에 남의 위협을 불러일으킬 짓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 유인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은 단연 안정훈이었다. 나머지 둘은 상대방을 추구하는 열정이 부족하지만 안정훈은 달랐다. 외로움을 타지만 의심이 많은 유인하에게는 무조건적으로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 같은 안정훈이 사실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유인하는 자존심은 너무 센데 자존감은 낮아서 자신보다 대놓고 더 잘난 사람과는 제대로 인간관계를 맺지도 못한다. 그가 권시혁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 사람들을 선망하지만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그러는 것처럼 상대도 자신을 성에 안 차게 볼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욕심은 많아 이상은 높은데 대체로 안전빵을 선택하고 마는 모순이 있다. 하고 많은 직업 중에 고시를 선택한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러니 안정훈처럼 죽자고 쫓아다니는 열정과 어떤 일이든 전부 다 져주는 처신에 상대의 결핍과 욕망을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함이면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유인하는 자신에게 비굴하고 멍청한 연인을 자신보다 못하다고 성에 안 차 하면서도 끝까지 헤어지지 못하고 결혼하는 여자와 비슷하달까. 그러니까 궁합이 맞는 것이다.

유인하는 항상 자신이 왜 안정훈과 여전히 어울리는지 이해하지 못하곤 했었다. 지금도 그랬다.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돌아보면 같이 있게 되니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상대방을 그렇게 길들인 것은 자기 자신이다.

‘아, 마음에 안 들어.’

술을 안 마시고 제정신인 상태에서 보니 저 새끼랑 같이 살고 그런 짓까지 한 자신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쳐다보는 눈빛부터가 짜증 난다. 아마 상대와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더 짜증이 나는 것이다. 아무리 암흑기였다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런….

‘흑역사, 흑역사 말만 들어봤지, 진짜.’

자신의 모든 찌질하고 초라한 모습을 본 상대라는 건 껄끄럽기 짝이 없다. 안정훈의 집에 있는 물건만 정리하면 이번에는 정말 인연을 끊고 살아야겠다. 오늘 먼저 연락을 한 것도 일단은 그 용건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유인하는 어떻게 하면 이 개새끼와 ‘안전이별’을 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다. 물론 그 개념조차 유인하의 신경을 긁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고민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피를 나눈 형제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그 남자의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의 반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닮았다면 지금껏 안정훈을 그렇게 하찮게 취급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유인하는 잠깐 더 뭐라고 하려다가 관뒀다. 그래, 이렇게 해서 어떻게 될 거였으면 고등학교 때 이미 바뀌었을 것이다. 안정훈을 바보처럼 만든 것은 자신이면서 자각하지 못한 유인하의 생각이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아이스 카페라떼로 하나 주세요.”

유인하는 메뉴판을 종업원에게 건네며 그렇게 말했다. 유인하를 바라보는 종업원의 눈빛이 아주 반짝거렸다. 누군들 안 그러겠냐만,

“혹시 작년에 XX차 광고 찍으신 모델 아니세요?”

종업원이 물었다.

“네?”

유인하는 약간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기뻐했다.

“맞구나! 와, 실물이 더 잘생기셨어요! 혹시 실례 안 된다면 사인 좀….”

“…제가 사인이 없어서요. 음….”

“그럼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그러세요, 그럼….”

안정훈은 그가 칼같이 그녀의 요구를 자르며 면박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유인하는 지금 그녀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또 봐도 놀랄 오늘 유인하의 엄청난 미모에 잠깐 그로기 상태에 빠져 속으로 침이나 질질 흘리고 있던(‘덮치자. 오늘은 꼭 덮친다!’) 안정훈이 내심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뭐지?’

그래, 역시 뭔가 바뀌었다…. 유인하가 달라졌다. 딱히 기꺼워서 하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표정이 어색하다. 유인하의 까다로움을 안정훈이 모르겠는가. 처음 본 사람이라고 딱히 봐주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여자한테는 조금 낫긴 하지만…. 그 종업원은 감사합니다, 하고 밝게 웃으며 총총 카운터로 돌아갔다.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안정훈이 물었다. 유인하는 다시 심드렁한 표정이 되어 대꾸했다.

“무슨 일은.”

“어디서 지냈어? 그동안 뭐 했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안정훈은 그렇게 말했다. 역시나 유인하가 화를 내거나 면박을 주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유인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공부했어.”

유인하는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공부? 시험 포기, 아니, 안 하는 거 아니었어?”

안정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예상을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유인하는 그의 그런 반응에 불쾌감을 느껴 인상을 약간 썼다. 반년 전, 유인하가 바닥의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그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봤던 안정훈이었다. 유인하가 까칠하게 대꾸했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딴 식으로 말해?”

“어? 어…. 아니….”

안정훈은 언제나처럼 유인하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바보 같은 태도로 어물쩍하게 대꾸했다. 물론 안정훈은 이미 그가 2차 시험까지 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이미 2차 결과 발표일은 지난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유인하의 안색이 너무 좋았다. 고등학교 이후로 그의 얼굴이 이렇게 좋았던 적이 있었던가. 작년에도, 그리고 그 전년도에도 아깝게 떨어졌던 유인하였다. 둘 다 엄청 힘들어했었다. 작년에는 길거리에서 엉엉 울기까지 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이렇게 덤덤한 건 떨어졌지만 이제 익숙해져서 덤덤한 것일까, 아니면….

‘잠깐만. 오늘 며칠이지?’

안정훈은 오늘의 날짜를 헤아려봤다. 8월 19일…. 안정훈은 당연히 유인하가 치는 시험의 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준비하던 시험은 3차 면접까지 있고 그게 이맘때일 것이다. 게다가 오래간만에 만난 유인하는 전에 보지 못했던 양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결론은 쉽게 나왔다.

유인하가 2차에 합격했다.

‘3차에서는 떨어질까?’

안정훈은 곧바로 가능성을 점쳐봤다. 유인하는 외모가 아주 훌륭하고 사교성도 좋다. 물론 면접에서 그런 것만 보는 건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최종 단계까지 올라간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야. 그것뿐만이 아니야. 뭔가 이상해…. 유인하의 얼굴에서 불안과 초조를 읽기 힘들었다. 아직 합격을 한 것도 아닌데도. 작년에 어쨌든 돈을 좀 벌어서 이런 것일까? 이번엔 이렇게 자신이 있을 정도로 잘한 것일까?

유인하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을 땐 승리의 희열마저 느꼈다. 도망가봤자 이제 소용없는 것이다. 유인하는 자신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그 바람을 증명받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일까? 합격하면? 합격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더 이상 그에게 안정훈이 필요 없어진다는 말일까?

‘모델일, 그것도 못 하게 할까 했어. 잠깐 하는 그걸로 돈을 얼마나 벌까 싶어서 놔둔 건데 생각보다 잘 돼서….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서 그냥 둔 것뿐이다. 그것 때문에 인하는 더 불안해하고 술을 더 마셨으니까. 이건 그렇지 않겠지? 분명히….’

다시 선녀옷을 찾아 입고 훨훨 날아가 버릴 것 같다. 안정훈은 당연히 그 옷을 찢어버릴 생각부터 했다.

“얼마 전에 성우 만났는데.”

안정훈이 뜬금없이 말했다. 유인하는 인상을 썼다.

“넌 그 병신이랑 아직도 같이 노냐?”

그렇게 말했다가 그래, 너도 병신이지, 라는 표정으로 다시 커피나 한 모금 홀짝했다. 마뜩잖은 얼굴이다.

“성우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는 모양이더라고.”

“뭐? 그때 그거? 이제 와서?”

무슨 생각인지 관심도 없지만 김성우는 그렇게 고소를 하니 마니 지랄을 한 주제에 결국 고소를 하지 않았다. 자기도 쪽팔린 건 안 것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안정훈은 걱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떡하지? 내가 성우 열심히 말리긴 하는데…. 그러다가 홧김이라도 진짜 고소하면 어떡해.”

“하라 그래, 병신 새끼.”

역시 뭔가 이상하다. 유인하는 분명히 기분 나빠 하고는 있었지만 전처럼 불같이 화를 버럭 내지는 않았다. 전이었다면 눈빛부터가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바뀌었을 것이다. 안정훈은 그의 그런 태도에 당황했다. 유인하가 다시 단단해졌다, 옛날처럼.

‘왜? 어떻게?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고작 시험을 좀 잘 쳤다고? 아니, 공부를 할 정신이 있긴 했나? 유진하도 몰랐던 걸 보면 가족과 연락하며 지낸 것도 아니다. 어디에서 금전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유인하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자신감도 이제 전부 까먹었지 않은가. 안정훈은 잠깐 안절부절못했다. 안정훈이 유인하를 관찰하는 동안 유인하도 안정훈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가 툭 말했다.

“짜증 나.”

“으, 응? 뭐가?”

“뭐긴 뭐야. 네가 짜증 난다는 거지.”

“나?”

안정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진한 척하는 얼굴은 그대로다. 하지만 유인하가 한 말의 저의를 읽기 위해 그의 얼굴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유인하가 한숨을 쉬었다.

“존나 짜증 나. 너랑 안 보고 살겠다고 생각한 게 몇 번인 줄 아냐. 근데 여기서 왜 널 또 보고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그런다, 왜?”

유인하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 말에 안정훈은 1초 정도 그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씨익 웃었다.

“천생연분이라서?”

“죽고 싶냐?”

솔직하기까지. 안정훈은 웃었다. 확실히 느꼈다. 선녀옷이 아른거린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공부하면서 도를 같이 닦은 것일까? 그런 거랑은 연이 없을 텐데.

“어쨌든 오늘은 짐 챙기러 온 거야.”

“짐? 왜?”

“나가야지. 내 집도 아니고.”

“왜? 다시 같이 살면 좋잖아….”

안정훈이 울상으로 최대한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 유인하는 인상을 약간 썼다. 안정훈은 그가 징그러운 소리를 하지 말라든가, 친구끼리 어떻게 계속 같이 사냐, 등등 평범함에 입각한 이유를 들먹이며 면박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전처럼. 유인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싫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안정훈의 말에 유인하가 똑바로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안정훈이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쳤다. 유인하는 딱 잘라 말했다.

“그때 있었던 일들은 다 없던 거야. 우린 그냥 친구야. 전처럼 살자. 각자 알아서. 알겠냐?”

“…….”

친구라고 생각해준 적도 없는 주제에. 안정훈은 잠깐 그대로 유인하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니, 별로 상관없나. 안정훈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알았어….”

안정훈은 온순하게 수긍하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리고 둘은 안정훈의 집으로 올라가서 유인하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장 재킷을 벗어 놓고 팔을 걷어붙인 채 자신의 짐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유인하의 손끝이 야무지다. 눈빛도 또렷했다. 다시금 앞날을 향해 굳건히 걸어가는 사람처럼. 안정훈은 말없이 그를 돕다가 말했다.

“그동안 다른 애들도 너 보고 싶다고 연락 많이 왔는데. 송별 파티라도 하자. 금방 준비할 수 있는데. 오랜만에 봤는데 그냥 가면 섭섭하잖아. 술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안정훈이 말했다.

유인하는 오늘 짐을 정리하는 것으로 안정훈과의 불미스러운 일들, 그게 무엇이든 전부 다 정리하고 앞으로 다시 제대로 살 생각이었다. 지금도 세세하게 안정훈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이 새끼가 또 작년처럼 미쳐서 달려들면 어떡할 것인가.

그리고 지금 유인하는 자신이 충분히 안정훈을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작년의 그건 약해져 있기 때문에 생긴 불상사다. 다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낙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유인하는 여전히 어떤 면에서는 안정훈을 만만하게 보고 있기(개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그런 말에 혹하는 자신에게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조금 정도는 괜찮지….’

이 초대에 또 다른 저의가 있다면 피하는 게 맞을까? 하지만 피하는 건 또 유인하의 속성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식으로 합리화했다. 안정훈을 바보처럼 만든 게 유인하라면 유인하를 쾌락과 쉬운 선택에 익숙해지게 만든 것은 안정훈이다. 유인하의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안정훈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안정훈이 끊임없이 그에게 주입하는 편견이기는 했지만. 얕보이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걸 이용할 수만 있다면.

안정훈의 예상대로 오늘 유인하는 3차 면접을 보고 왔다. 떨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길거리에서 봤다면 있는지도 모르고 스쳐 지나갔을 사람들이라도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입장의 응시자들은 전부 자신보다 못해 보였다. 하지만 그게 면접관의 눈에도 똑같이 보일까? 욕망이 커지면 객관성을 잃는다. 아무 생각 없이 쳤던 1차 시험과 2차 시험과는 달랐다. 유인하는 정말 합격하고 싶었다. 시험을 치면서 이렇게 떨렸던 것은 처음이었다.

합격해서 판검사라도 되면 적어도 그 남자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진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왜일까. 언제나 자신만을 위해서 열심히 해왔는데 거기에 그 남자를 넣은 것만으로 조금 더 간절한 마음이 되었다. 불안과 흥분은 똑같은 기작을 가지고 있어서 기대가 되어 흥분하면서도 안 될까 봐 불안해지기도 했다. 둘 다 괴로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럴 때 섹스나 술에 혹하는 건 유인하뿐만이 아니었다. 유인하는 이미 그런 현실도피를 해봤기 때문에 잘 알았다. 게다가…. 유인하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안정훈은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물었다.

“왜?”

유인하는 안정훈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으로 시선이 내려왔다.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절대. 그 남자 같은 남자가 세상에 두 명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닮았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남자와 달리 안정훈은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상상하게 되었다. 그 돌 같은 그 남자도 열정에 흔들리는 순간이 있을까?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그 남자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 순간 유인하의 얼굴을 스친 표정은 뭐랄까, 관능적이었다. 아주 비싼 명품 정장을 입은 모델 뺨을 잔뜩 치는 굉장한 미남자의 눈빛에 정욕의 물기가 어렸다가 스스로도 그것을 알아차린 듯 시선을 멀리 돌렸다. 안정훈은 눈을 아주 크게 떴다.

적의를 가지고 노려보는 것과 약간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욕망하는 눈동자였다. 단지 간단하고 쉬운 술이나 약 같은 쾌락을 탐하는 눈빛이 아니라 뭔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때 놀던 애들도 불러서 재밌게 놀자.”

안정훈은 생각 이전에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얼른 권했다. 유인하는 묵묵히 짐을 정리하는 척하다가 아닌 척 살짝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마지막으로.’

어차피 그 남자랑은 절대 못 할 것이다. 이 늘씬하고 우아한 맹수 같은 남자가 승낙하는 것이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을 늘어놓고 하는 문란한 난교라는 것을 안다면 다들 뭐라고 할까? 안정훈은 그런 유인하를 힐끗힐끗 보며 곧바로 룸을 예약하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가 전화를 끊자 유인하가 먼저 일어났다.

“가자.”

유인하는 박스를 들고 일어났다. 안정훈도 유인하의 짐이 든 박스를 일단은 들어 올렸다. 유인하는 당연하다는 듯 안정훈이 들고 있는 박스 위에 자신이 든 박스를 올렸다. 그리고 자신은 정장 재킷을 다시 멋지게 입고 현관으로 향했다. 안정훈은 그런 유인하의 뒷모습을 잠깐 보고 있다가 짐을 들고 따라갔다.

지하로 내려가 안정훈의 차를 탔다. 안정훈은 뒷좌석에 짐을 실었다. 지금 뭘 하러 가는지 생각해보면 들뜰 법도 한데 차 안은 고요했다. 유인하의 앞에서는 항상 들뜨는 안정훈의 마음도 뭔지 모르겠는데 매우 차분했다. 유인하의 경계를 해제하기 위한 바보 같고 맹한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는데 말이다.

착잡했다. 그때 바로 찾아냈어야 했다. 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그가 겪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안에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힘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다시 되돌릴 수 있을 정도로. 유인하가 강하다는 건 언제나 알지 않았던가? 이런 걸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난 너 없이 못 살아.

안정훈은 유인하가 살아가는 데 없으면 안 되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가 저런 말을 자신에게 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오랜 세월을 천착해왔다. 그가 원하는 대로도 다 해봤다. 곁에 놔둬도 아무런 해가 안 되는 존재, 편리한 존재. 하지만 그런 존재는 결국 그에게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다시 보고 싶다.’

아까 자신을 보던 눈빛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도대체 그 눈빛은 무슨 의미일까? 나를 원한다는 뜻일까? 작년에도 때때로 그것과 비슷한 눈빛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가슴이 뛰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신을 원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게 마치 쳐다본 것만으로도 저 여자는 나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변태 같다.

‘네가 원한다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말만 하면 될 테다. 그걸 유인하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쳐다보기만 했을까. 아니, 왜 떠나려고 하는 것일까? 외로우면서, 원하는 주제에 왜 항상 안정훈을 버리려고 하는 것일까?

‘인하는 여전히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몰라.’

그래, 그렇지. 그거다. 안정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유인하는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누군가와 연락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의미 없이 인터넷 속을 헤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깐만.”

한밤중에 어두컴컴한 거리의 한 가운데 내렸다. 발렛 파킹을 하기 위해 직원이 다가왔다. 차에서 내리자 유인하는 안정훈에게 그렇게 말하고 화장실부터 찾았다. 안정훈은 잘 됐다, 하고 모인 사람들을 체크하기 위해 전화를 걸며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다 왔어?”

-네, 형. 인하 형도 진짜 왔어요?

“응.”

유인하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유인하도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안정훈이 눈을 마주치고 곧 전화를 끊었다. 안정훈이 웃으며 그에게 권했다.

“가자.”

그들은 함께 지하로 들어갔다.

급하게 준비한 파티룸이었지만 이미 술이고 여자고 남자고 다 준비되어 있었다. 남자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것이다. 전에 김성우와 함께 처음으로 룸살롱에 갔을 때는 그 여자들이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창녀들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경멸했었다.

지금 부르는 사람들은 전에 유인하가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나 다른 걸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 혹은 안정훈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술 좋아하고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아마 소위 그런 ‘전업’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비슷한 일을 해봤던 인간들은 있었다. 그래도 그런 창녀들보다는 나은가. 하긴 유인하가 얼마나 사람의 클래스와 직업의 귀천을 철저하게 따지는가. 스스로도 그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데. 그래도 유인하가 그들과 섹스를 했던 적은 없었다. 몇 번 할 뻔했던 적은 있긴 했지만. 거부감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유인하는 언제나 자신이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특별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그를 괴롭게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파티룸 안은 이미 클럽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빵빵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유인하가 갑자기 안정훈의 이름을 불렀다.

“정훈아.”

이런 식으로 그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게 얼마 만인가. 안정훈은 살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인하를 돌아보았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얼굴을 조금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날카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분하고 약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관찰하고 있었다. 짧게 숨을 내뱉더니 물었다.

“너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이제 와서? 안정훈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전에도 이 비슷한 질문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스스로의 마음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때라 심장만 터질 듯이 뛰었다. 생각만으로도 죽을 것 같아 전속력을 다해 도망쳤다. 지금은 아니다. 안정훈이 대꾸했다.

“사랑하니까.”

평소 같은 바보 목소리가 아니었다. 유인하는 도어 노브에 손을 올린 채로 몸을 돌렸다. 값비싼 수트를 입은 그는 배우처럼 근사했다. 화룡정점으로 그의 눈빛은 피폐할 때와 달리 제법 건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안정훈은 전에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런 유인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뜬금없는 말에 또 짜증스러운 면박을 줄 수도 있는 유인하였다. 그도 그대로 안정훈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미묘한 침묵이 잠깐 이어졌다.

“왜?”

안정훈이 되물었다. 유인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진위를 알아보듯 안정훈의 눈을 번갈아 관찰했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새카맣고 큰 눈동자. 도대체 이게 이 새끼의 연기인지 뭔지 알고 싶었다.

“넌 도대체….”

“응?”

되묻는 얼굴이 다시 해맑다. 유인하는 그의 얼굴을 여전히 빤히 보고 있었다. 무언가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처럼. 그리고 유인하는 처음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나한테 집착하지 말고 네 인생 살아.”

“…….”

그리고 유인하는 먼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들어갔다. 안은 이미 시끌벅적했다.

“인하 형~!”

“인하 오빠~!”

남자고 여자고 유인하의 팔에 철썩철썩 들러붙었다.

“잘 지냈어?”

유인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빙 둘러앉았다. 예전처럼 어울리면서도 그들을 경멸하던 기색도 많이 사라졌다. 여전히 그들을 무슨 광대 보듯이 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누가 유인하의 손에 잔을 쥐여 주었다.

금주한 지는 8개월이 좀 넘었다.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술을 마시던 이유도 사라졌다. 사람들의 선망과 정욕의 눈빛을 받으며 유인하가 웃는 얼굴로 한 모금을 술을 넘겼다. 어렸을 때랑 똑같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익숙하다, 이런 사람들이.

안정훈은 안에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누가 안정훈에게 다가왔다.

“형 왔어요?”

“사람 수가 좀 적은데?”

“몇 명은 오고 있는 중이래요. 형이 준 연락처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다 연락했어요.”

“알았어.”

“인하 형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웬 양복이래요? 요새는 일 안 한다고 들었는데?”

그가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유인하를 보았다. 안정훈이 대답했다.

“물어봐.”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나 안정훈은 뒷전이다. 안정훈은 문가에서 유인하가 어쩌고 있는지 가만히 보고 있었다.

[너도 이제 나한테 집착하지 말고 네 인생 살아.]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정말이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안정훈은 뭐든 할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 자신을 마주 보는 그의 눈빛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좀 더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그게 뭔지 안정훈도 알고 싶었다.

“형 이거면 돼요?”

부른 사람들이 더 도착했다. 그중 하나가 안정훈을 보자마자 다가와서 말했다. 안정훈은 활짝 웃으며 그에게 현금을 주었다.

“응, 고마워.”

막 도착한 어린 남자 모델이 내민 것은 작은 비닐 랩에 들어 있는 하얀 가루였다. 안정훈은 웃음기가 싹 사라진 눈빛으로 웃고 있는 유인하를 보았다. 그리고 천장을 한 번 보았다.

‘아직도 인하는 자기가 원하는 걸 인정 못 해. 내가 가르쳐줘야 돼.’

*

지금까지 약을 쓸 생각을 안 한 것이 아니다. 작년엔 유인하에게 죽을 정도로 술을 마시게 했다. 실제로 죽을 뻔했을 때는 놀랐다. 그가 죽어버리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 게 아닌가. 그대로 집안에서 술병은 전부 치웠다. 유인하도 죽기는 싫은 것인지 그 이후로 술을 찾지 않았다.

그가 자신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 된다면 뭐든 좋았다. 하지만 술을 끊고도 유인하는 그대로 폐인처럼 살았기 때문에 굳이 약을 쓰지 않은 것뿐이다. 그래서 갑자기 집을 나가 종적을 감췄을 땐 정말 놀랐다. 그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유인하는 오히려 옛날처럼 ‘건강’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안정훈에게는 전혀 좋은 사인이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친구한테 나쁜 생각이라니! 라며 스스로를 꾸짖었겠지만 이제 그런 위선은 집어치운 지 오래다.

안정훈은 유인하에게 줄 잔에 아까 받은 가루를 솔솔 뿌렸다. 정신을 잃지 않을 정도의 양만 주문했다. 안정훈은 유인하가 자신이 당하는 것을 전부 똑똑히 기억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안정훈은 유인하를 돌아보았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정신이 없었다. 안정훈은 미소를 지었다.

넌 내 거야.

“인하야~.”

안정훈은 웃는 얼굴로 유인하의 옆자리로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전처럼 자연스럽게 유인하의 잔에 술을 따랐다.

“빨리할까? 아까 꼴렸지? 그동안 안 한 거야?”

안정훈이 유인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도 잘 들렸다. 귀가 간지러워 유인하가 인상을 썼다. 안정훈은 그의 귓가에 얼굴을 묻으며 그의 탄탄한 허벅지를 손으로 스르륵 쓰다듬어 올라갔다.

“뿅 가게 해줄게….”

“…….”

유인하가 안정훈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응? 하고 안정훈은 나름 간절한(귀여운) 얼굴을 했다. 술도 한 모금했겠다, 전의 유인하라면 안정훈의 머리채를 잡아 눌렀을 것이다. 아주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쳤다.

“왜?”

안정훈이 물었다. 유인하는 인상을 썼다.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그의 손을 잡아서 막았다.

“아.”

유인하는 대꾸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대로 시끄러운 방 안에서 둘 사이에만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안정훈은 이 긴장의 의미를 성적으로 해석했다. 다른 사람이 마시던 칵테일을 빼앗아 마시고 있던 유인하였다. 지금까지 금주를 계속했던 걸까? 거의 마시지 않았다. 안정훈은 자신이 들고 있는 위스키를 권했다.

“왜? 그건 약해?”

안정훈은 매우 해맑은 얼굴로 약을 탄 위스키를 권했다. 유인하는 안정훈이 들고 있는 위스키를 보았다. 유인하가 그걸 보곤 약간 실소했다.

“그래, 약하네.”

“그럼 한 모금만 더 해.”

유인하는 그에게서 잔을 받았다. 그대로 마시려다가 안정훈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안정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전히 순하고 무해한 얼굴이었다.

“넌 술도 못 마시냐?”

한 번도 안정훈이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 안정훈은 눈을 한 번 크게 깜박였다. 얼른 유인하가 마시던 잔을 들어 올렸다.

“같이 마실까?”

안정훈이 먼저 술에 입을 댔다. 음료수나 다름없는 칵테일이라 반쯤 금세 비웠다. 그걸 보고 유인하는 안정훈이 건넨 크리스털 잔을 1초 정도 보고 있다가 한 번에 잔을 전부 비웠다. 아무런 의심 없이 충신이 바치는 독배를 비운 왕 같다. 안정훈은 심장을 졸이며 유인하를 지켜보았다. 혼날 짓을 한 아이가 된 기분이다. 물론 혼날 짓 정도가 아니지만. 목이 탔다. 안정훈은 술을 좀 더 마셨다.

오늘 그의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앞으로 더 이상 자신 없이는 살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에게서 그를 약탈할 것이다.

잠깐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보고 있던 유인하는 점점 천천히 눈을 깜박거리더니 소파 등에 머리를 기대며 잠들 듯 정신을 잃었다. 안정훈은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인하야, 인하야.”

유인하는 깨지 못했다. 그걸 확인한 안정훈은 아까 약을 건네준 남자를 돌아보았다. 눈빛이 날카롭다.

“뭐야? 기절했잖아? 내가 양 조절 제대로 하라고 했지?”

“어? 그럴 리가 없는데….”

그가 우물쭈물 대꾸했다. 되는 게 없다. 안정훈은 인상을 팍 썼다. 그리고 유인하를 다시 돌아보았다.

첫 키스는 그가 하는 것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참을성이 부족해서 결국 먼저 하고 말았다. 첫 경험은 서로의 눈을 보면서 하고 싶었다. 그의 안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그에게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었다.

“하아.”

불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멈출 수 없었다.

“여자는 다 나가.”

그렇게 말하자 미리 말이 되어 있던 남자들이 여자들을 전부 밖으로 나가게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노래가 여전히 쿵쾅쿵쾅 울리는데도 안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긴장으로 터질 것처럼.

안정훈은 유인하의 얼굴만 가만히 보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유인하를 건드리는 건 처음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말 할 거라고 생각하니 떨렸다. 안정훈은 정신을 잃은 유인하의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렸다. 안정훈의 뺨이 약간 빨개져 있었다. 너무 긴장해서 표정은 굳은 것에 가까웠다.

“인하야….”

차여서 충동적으로 덮치는 것과 계획적으로 덮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실감의 차이다. 안정훈은 손에 땀이 잡혀 두 손을 맞잡고 주무르며 떨림을 진정시켰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면박을 들은 남자에게 음악을 끄게 했다.

왜 항상 떠나려고 하는 것일까?

유인하는 탁월한 유혹자였다. 줄 것처럼 주지 않는다. 몇 번이고 충성을 시험받았고 그 테스트를 통과했다. 이제 다 넘어왔다고 생각했던 적이 몇 번이나 되던가. 그런데도 또 멀어져 버린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슬아슬함이 애간장을 타게 만든다.

작년만큼 두 사람이 가까웠던 적이 언제 있었던가. 언제 하나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달라붙어서 서로를 탐하고 또 탐했다. 그런데 그렇게 떠나버리다니. 마치 안정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안정훈은 유인하의 얼굴을 가까이서 내려다보았다.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듯이, 무척이나 진지한 눈길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인하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들을 수 있다는 듯,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겁나는 거 알아. 하지만 이제 그만하자. 그만하게 해줄게. 괜찮아. 그래도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어.”

유인하는 솔직하지 못하다. 마음속의 결핍을 절대 인정하지 못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어딘가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마음을 외면할 것이다. 처음 보던 순간부터 알지 않았던가? 밀어내면서도 유혹하는 그 강렬한 눈동자. 그는 끊임없이 안정훈을 시험했다. 안정훈이 그 시험을 통과하길 바라니까.

“너는 몰라도 난 네가 날 원한다는 걸 알고 있어.”

안정훈이 유인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형, 이래도 돼요?”

누군가 물었다. 밤이 아주 늦었다. 남자들만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휴대폰을 들고 찍고 있는 놈도 있었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소파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 그를 흥분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싼 포장지로 싸인 맛있는 초콜릿을 보는 것 같다. 그는 유인하의 다리를 잡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그의 구두에 입술을 댔다.

“돼.”

그의 구두에서는 고급스러운 가죽 냄새가 났다. 그러고 나서 그는 유인하의 베스트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작년에도 이러려고 했었다. 고통에 매달리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가 원하던 대로 오로지 편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주려고 했다. 그때는 마음이 약했지. 역시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얼굴을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마치 운명을 마주한 남자처럼. 샅샅이 보다가 덥썩 입을 맞췄다. 그의 붉은 입술은 아주 뜨겁고 부드러웠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베스트 안으로 손을 불쑥 넣어 그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에 꽉 차는 질량감이 흡족하다. 다른 손으로 그의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

“인하야, 인하야, 인하야….”

시험? 그딴 거 통과한 지 오래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세상에 네 옆에 계속 있을 수 있는 건 나뿐이잖아. 그런데도 계속 시험하는 건 의미 없는 짓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예전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같이 있고 싶었다.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날 원하면서. 몇 달 동안 내팽개친 것도 돌아온 것 하나로 용서할 수 있었는데 다시 나가겠다고?

냉방이 아주 빵빵하게 도는데도 온몸에 식은땀이 어렸다. 안정훈은 그의 셔츠를 북 뜯었다. 그 사이로 손을 넣어 그의 젖꼭지를 만졌다. 오랜만이었다. 그의 매끈한 피부에 손이 호강했다. 참지 못한 누군가가 유인하의 다른 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야, 처음은 나라고 했지?”

안정훈이 유인하의 가슴을 빨다가 고개를 들고 그를 멱살을 콱 잡았다. 맹견처럼 광폭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는 안정훈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유하고 순하기 짝이 없던 안정훈의 인상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가 움찔하면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잠깐 가까이 있는 남자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모든 남자들은 자신이 잘못된 짓을 저지를 때 잘못된 짓을 저지른다는 걸 안다.

아직도 술이나 필요한 것을 들고 방을 오락가락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안정훈은 흥분해서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감각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씨발, 이제 문 잠가. 늦는 새끼들은 끝이야!”

안정훈이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외쳤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놈과 눈이 딱 마주쳤다.

“…….”

“…….”

안정훈은 그대로 그를 보고 있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유인하의 가슴을 만졌다가 안정훈에게 맞을 뻔했던 놈을 보았다. 여전히 싸한 눈빛이지만 의아해서 공격성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너 쟤는 어떻게 아냐?”

“네? 저는 그냥 형이 보내준 연락처에서 다….”

안정훈이라고 이 골 빈 새끼들을 어떻게 다 기억하겠는가. 대충 프로필을 보고 연락처를 넘기다 보니 저 새끼 연락처도 있었던 모양이다.

외모만큼은 천하의 유인하도 인정할 정도로 미끈한 놈이었다. 아는 모델 중에 동명이인도 있었다. 안정훈은 잠깐 눈앞의 어린 남자 모델을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야, 딱 맞춰서 잘 왔다. 이번에도 낄 거지?”

이승원은 웃지 않았다. 그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열댓 명은 되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가운데 옷을 벗겨지고 있는 유인하가 있었다. 그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범죄의 현장이었다. 거기서 미소를 짓고 있는 안정훈의 얼굴은 옛날처럼 순진무구하고 밝은 미소를 짓고 있어서 그 괴리감이 충격을 더했다.

“이 미친 새끼가…. 너 또….”

젊은 남자들이 우글우글했다. 이승원도 이렇게 우글우글 몰려다니는 수컷 무리 속에 속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알파 울프는 유인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알파 독은 안정훈이다. 그가 눈짓하자 누군가 이승원의 등 뒤에서 문을 철컥 잠갔다.

‘젠장….’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흠칫했다. 예전의 그들을 보던 다른 사람들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젊은 남자들이 이만큼 몰려 있는 것만으로 위협적이다. 지금 그들은 모두 이승원을 보고 있었다. 경계, 탐색, 위협. 그들의 눈빛에선 그런 원초적인 배타성만이 빛나고 있었다. 그가 그들의 일원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안정훈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먼저 할래? 너라면 인하도 좋아할 것 같은데.”

“…이런 건 작년에 정리된 거 아냐? 인하가 용서할 것 같아?”

안정훈이 웃었다.

“역시 너 기억력 안 좋네. 작년에도 인하는 결국 용서했잖아.”

“그만해라. 제발.”

이승원은 인상을 쓰며 강하게 말했다.

“너 인하 좋아하잖아.”

이어 말했다. 이승원은 자신에게 온 메시지를 아예 확인도 못 할 뻔했었다. 전의 결혼식에서의 일 이후로 유인하는 연락조차 없었다. 그는 매일 악몽을 꿨다. 바쁜 와중에도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눈을 벌겋게 뜨고 기다렸던 게 하루하루가 지나 벌써 몇 개월이나 된 것이다. 그런 짓까지 당했는데도, 그가 그 일을 잊어버리고 정말로 자신을 내팽개친 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유인하가 사라졌다고 안정훈이 사방팔방으로 찾으려 다닐 때는 더욱 휴대폰을 손에서 떼지 못하고 살았다. 그가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아오길 바랐다. 하지만 유인하가 먼저 연락을 한 것은 또 안정훈이었고 이승원이 받은 것은 또….

“누가 인하 싫대? 인하 좋아서 이러는 거야.”

안정훈은 약간 표정을 굳히고는 이내 웃으며 그렇게 대꾸했다.

“미친놈.”

“왜 이래~? 너도 알면서.”

안정훈이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는 정신을 잃은 유인하를 가슴을 드러내고 움켜쥐었다. 마치 자신이 획득한 것이 무엇인지 경쟁자에게 과시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너랑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짝사랑 동지 아냐?”

안정훈은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이승원이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승원의 말끔한 얼굴이 차츰 절망에 물들어갔다.

‘제기랄. 싫어. 싫어. 싫어싫어!! 다시는…!’

왜냐하면 그의 말에 흔들리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원도 유인하를 ‘가지고’ 싶었다.

“싸우지 말자. 솔직히 아무리 인하라도 우리 둘을 어떻게 당해내냐? 우리 둘이 편 먹으면 앞으로 서로 질릴 때까지 할 수 있을걸?”

이승원은 팔에 핏줄이 다 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의 분홍색 입술은 절대 열리지 않을 만큼 꾹 물려 있었고 턱 근육도 전부 서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뿐인데도 숨이 가빴다. 이승원은 안경 안으로 손을 넣어 얼굴을 문질렀다.

유인하는 욕망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욕망을 해도, 끊으려고 해도 괴롭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택했다. 이 고통에 끝이 있길 바라면서. 안정훈은 욕망하고 또 욕망하며 뒤돌아보지도, 끊을 생각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믿고 추구하기 때문에 괴롭지 않았다. 이승원은 한 번 든 욕망은 끊을 수가 없는 것인데도 끊으려고 하는 데만 집중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됐어. 그냥 하자.”

안정훈은 대꾸 없는 이승원을 무시했다. 이승원은 놀라서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안정훈은 유인하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눈을 감고 있는 유인하의 아름다운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안정훈의 표정이 일변했다.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인하야….”

하는 짓과 달리 애정을 가득 담은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도대체 저 새끼는 뭘 위해서 저러는 것일까. 저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으니까? 이승원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을 철저하게 부정하며 그와 자신의 사이에 선을 그으려고 했다.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고 같은 것을 욕망하지만 같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정훈의 입술은 유인하의 속눈썹과 뺨을 누르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의 향기를 탐하며 안정훈의 커다란 손이 그의 셔츠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셔츠의 단추를 마저 풀어 그의 상체를 훤히 드러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바지를 약간 내렸다. 값비싼 정장 바지가 유인하의 탄탄한 허벅지에 걸려 있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젖꼭지를 몇 번이고 빨고 핥으면서 탐했다. 정신을 거의 잃은 유인하는 움찔움찔하면서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가 입은 검은색 속옷 안이 점점 질량을 더해갔다.

다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그를 관음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무력한 유인하는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매력적이고 날카롭고 강하던 유인하였다. 정신을 잃고 타인에게 이런 짓을 당하고 있는 유인하는 마치 유인하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이 처참함…. 이승원도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그것을 보고 있었다.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왔다.

이 정도면 유인하가 죽을 수도 있었다. 죽는다는 것도 모르고 죽는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봤던 상대가 단지 자신의 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부숴버리겠다는 것은 이승원이 바라던 바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그럼 너랑 나뿐이면 되잖아.”

안정훈도 이미 터질 정도로 서서 유인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속옷을 벗기고 있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안정훈의 얼굴이 벌겋고 눈빛이 심하게 일렁였다. 배를 심하게 곯고 있던 새카만 개가 포식을 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눈빛이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뚫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평소의 순진무구하고 해맑은 그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관능적이었다. 평소의 그는 어디 갔으며 평소에는 저런 그는 어디 갔을까.

“뭐라고?”

열중하느라 뭐라고 하는지도 제대로 듣지 못한 안정훈이 되물었다. 이승원이 다시 말했다.

“다른 새끼들은 치우라고.”

“하아, 으윽…. 인하는 역시 좀 돌려야 기가 꺾일 것 같은데. 아직도 우리는 발톱에 때만큼도 아니게 보잖아? 그때 돌렸어야 했어.”

안정훈은 유인하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는 게 영 힘든지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승원이 말했다.

“너랑 나면 충분해.”

그의 말에 안정훈은 흥분이 약간 가라앉은 얼굴을 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 안정훈은 갑자기 콱 하고 유인하의 목덜미를 물었다.

“야…!”

한 번 남자들이 술렁거렸다. 너무 세게 물었기 때문이다. 이승원이 다가가려 하자 다른 놈이 그의 가슴을 팍 치며 막았다. 안정훈이 고개를 들었다. 유인하의 하얀 목덜미는 피멍이 들었다. 피도 조금 나는 것 같았다. 미리 마킹이라도 해놓는 것 같았다.

“내 지갑.”

안정훈이 오른쪽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누가 그에게 지갑을 넘겨주었다. 그는 안에서 카드를 하나 꺼냈다.

“이거 가지고 오늘 니들 맘대로 놀아라.”

다른 놈들도 제각각 유인하에 대한 욕정이 있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이승원의 등장에 불안감도 느끼고 있었다. 이 중 하나만 배신해도 다들 경찰서행 아닌가? 부외자는 언제나 위협적이다. 동질감은 중요하다.

그렇게 밀물이 빠지듯 젊은 남자들이 우르르 나갔다. 그들은 다들 이승원을 위협적으로 빤히 쳐다보곤 나갔다. 그리고 넓은 파티룸 안에는 셋만 남았다. 이승원은 테이블 위에 있는 크리스털 술잔을 거칠게 들어서 그대로 그걸 전부 꿀꺽꿀꺽 마셨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다시 보았다. 조용했다. 마치 둘만 있는 것처럼. 안정훈은 하던 일로 돌아갔다. 유인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탱글탱글한 입술을 가르고 안으로 혀를 넣었다. 축 늘어진 혀를 몇 번이고 찌르고 자극했다. 유인하의 바지와 속옷을 발끝까지 벗겨내고 그의 정장 자켓과 조끼도 벗겼다. 유인하가 걸친 것은 반쯤 단추가 날아간 하얀 셔츠와 양말, 비싼 구두뿐이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상체를 끌어안고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깊이 등을 대고 앉고 자신의 무릎 위에 유인하를 앉혀 마주 안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귓가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듯이.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해도 좋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뺨에 입술을 묻은 채 눈을 떠서 이승원을 쳐다보았다. 두 손으로 유인하의 엉덩이를 꽉 잡고 양쪽으로 벌렸다. 그리고 말했다.

“먼저 해.”

이승원은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빡였다. 시선을 돌릴 뻔했다. 하지만 돌리지 못했다. 유인하의 몸은 누가 그렇게 만들라고 해도 못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등에도 근육이 잘 잡혀 휜 모양이 예뻤다. 허벅지도 종아리도…. 엉덩이가 글래머러스했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꽉 잡아 손 모양으로 움푹 들어갔다. 그사이의 치부마저도 새하얬다.

“…….”

안정훈의 시선에는 적개심이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이승원에게 먼저 권했다. 왜 그러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도 무언가의 함정일 것이다. 이승원은 자신이 흥분한 것을 알고 있었다. 전에는 분명히 그게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승원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숨이 심하게 거칠어져 있었다. 셔츠가 다 젖을 정도로 등이 젖었다. 이승원은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그리고 유인하의 피부에 검지가 살짝 닿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의 허벅지를 한번 주물렀다. 차가운 손에 닿는 그의 촉감이 대단히 매끄러웠다. 정신을 잃은 유인하를 이승원도 즐긴 것이다. 이걸로 이승원도 또다시 공범이 되었다.

“하아. 윽, 하아…. 젠장…. 으윽….”

이승원은 흥분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승원은 그대로 더욱 다가갔다. 고급스러운 벨벳 소파 위에 안정훈이 앉아 있었고 그 위에 정신을 잃은 유인하가 반라로 포개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이승원이 섰다. 이승원은 심하게 헐떡거리면서 왼손을 유인하의 셔츠 안에 넣어 목부터 그의 등골을 따라 천천히 만졌다.

분명히 이번만큼은 처음부터 유인하를 구하려고 했었다. 유인하를 다 같이 덮치자는 그 문자를 받자마자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이승원은 뭘 하려고 하고 있는가. 어째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걸까. 이승원은 유인하의 허리에 입을 맞추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의 향기를 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그의 피부를 입술로 지분거리며 올라갔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인하야….”

이승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유인하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오른손이 유인하의 허벅지를 진득하게 주무르며 한 번 내려가서 그의 종아리와 발목까지 쓰다듬고 다시 올라와서 엉덩이를 살살 주물렀다.

“넌 인하랑 이런 거 처음이지?”

안정훈이 물었다.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승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의 비웃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유인하는 이승원을 공중화장실의 휴지처럼 쓰고 버려버렸다. 상처받았다. 아무리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그런 짓을 당할 만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상처받았다. 그래서 이승원도 지금 그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승원은 왼손으로 유인하의 아랫배를 더듬거렸다. 그의 성기를 부드럽게 한 번 쓰다듬고 위로 올라갔다. 그의 젖꼭지를 검지와 중지로 부드럽게 굴리고 뺨을 만졌다. 그리고 허리를 일으켰다.

“하아….”

이승원은 나직하고 섹시한 한숨을 흘리며 자신의 것을 오른손으로 쥐었다. 옷 위로도 뜨거움이 느껴졌다. 으윽, 하고 고통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곤 이승원은 왼손으로 테이블 위의 술잔을 하나 쥐었다. 그리고 다시 술을 마셨다. 안정훈이 비웃었다.

“왜? 술 안 마시면 못 하겠어? 겁쟁이. 빨리해라. 나도 해야 하니까.”

안정훈은 왼손으로 유인하의 엉덩이를 꽉 잡은 채 다른 손의 중지와 검지를 곧바로 그의 치부에 찔러 넣었다. 정신을 잃은 유인하도 순간 움찔했다. 안정훈이 유인하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혼이 나간 목소리를 냈다.

“아, 진짜 쩐다…. 진작 하는 건데….”

“으응….”

“…….”

이승원은 술을 마시다 말고 그걸 보곤 인상을 썼다. 그리고 술을 마저 마시고 그 크리스털 잔으로 안정훈의 머리를 내리쳤다. 크리스털 잔은 묵직해서 그 정도로 깨지지도 않았다. 안정훈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소파로 쓰러졌다.

“하아, 헉, 으윽….”

이승원은 쓰러진 안정훈의 품에서 유인하를 빼앗았다.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유인하의 반라를 꽉 끌어안았다.

“아니야. 하아, 구했어. 구했으니까 괜찮아. 구하려고 한 거야. 인하야….”

이승원은 아까의 그것이 이 상황을 이용해 그를 강제로 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시 그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으윽, 죽고 싶냐, 이 뱀 같은 새끼가!”

안정훈이 머리를 붙잡고 이승원을 노려보며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누구 하나라도 물고 절대 놓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승원은 유인하를 꽉 끌어안으면서 심호흡을 했다. 지금까지 안정훈과 이승원의 전적은 1대 1이었다. 승패가 갈릴 순간이 온 것이다. 이승원은 유인하의 셔츠를 조금 더 바르게 입히고 벽에 기대어 바로 앉힌 후 일어났다.

[진짜 이기려면 죽였어야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하면 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 말은 분명히 기만이었다. 거짓말이다. 그때 주차장에서의 제안보다도 더 질이 나빴다.

“이제 인하 괴롭히지 마.”

이승원이 안정훈을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안정훈은 머리에 난 상처를 확인하다가 하, 하고 웃으며 이승원은 노려보았다.

“넌 언제나 그 말뿐이야. ‘인하야, 이제 그만해~.’ 넌 아무것도 못 해. 질 것 같으면 숨고 이길 것 같을 때나 고개 들고. 넌 그냥 폼만 잡을 줄 아는 찌질이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 이 병신 새끼야.”

오래된 친구라는 건 별로 좋은 게 아니다. 생각보다 날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때 주차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승원이라는 귀티가 철철 흐르는 우아한 남자의 얼굴에 서릿발처럼 무서운 표정이 내려앉았다. 상대를 죽여버리려고 할 때나 나오는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남자가 아무거나 할 수 있을 때의 얼굴이다.

“어릴 때 인하를 그렇게 말리는 게 아니었어.”

이승원이 말했다. 안정훈이 비웃음을 띄며 대꾸했다.

“위선자.”

“인하는 알고 있었던 거야. 네가 이런 놈이라는 거.”

“넌 아무것도 몰라. 인하는 날 원해. 인하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그래?”

안정훈도 이승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날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먼저 움직인 건 역시 안정훈이었다. 안정훈은 테이블을 그의 쪽으로 먼저 엎었다. 잔들이 깨지거나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이승원은 뒤로 물러났다. 안정훈은 그대로 테이블을 넘어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안정훈은 이승원의 멱살을 잡아 콘크리트 벽에 쾅 밀어붙였다. 그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으려고 했지만 막혔다. 이승원이 그의 턱을 손으로 잡아 밀어냈다.

“이 씹새끼!”

“윽!”

안정훈이 그의 정강이를 찼고 이승원이 고통에 허리를 약간 숙이자 그대로 무릎을 올려 차 그의 갈비뼈를 가격했다. 숨이 막힌다. 하지만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이승원은 그의 한쪽 다리를 잡고 그를 넘어뜨렸다. 그리고 그대로 발로 그의 얼굴을 차려고 했다. 안정훈은 두 팔로 얼굴을 보호했다.

“죽어, 이 개새끼야.”

진짜 죽일 생각인가 보다. 머리에 그냥 사커킥을 날리고 하고 있었다. 안정훈은 뒤로 굴러 얼른 일어났다. 팔이 부러질 뻔했다. 팔을 한 번 흔들어 상태를 확인했다.

“뭐야. 너도 인생 조지고 싶냐? 사람을 이렇게 패?”

안정훈이 비웃음을 띄며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이승원이 먼저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때 바로 안정훈은 마치 복싱을 하듯이 오른손으로 바로 그의 얼굴에 훅을 꽂고 왼손 주먹으로 복부에 카운터를 먹였다.

“헉…!”

“넌 이제 나한테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병신아.”

이승원은 안정훈의 옷깃을 붙잡으며 숨을 쉴 수가 없어 괴로워했다. 그런 이승원의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들게 했다. 그의 안경이 좀 삐뚤어졌다. 안정훈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완전히 뭉개 버릴 생각으로 그의 얼굴을 무릎으로 올려 치려고 했다. 그때 다행히도 안정훈이 순간 휘청하며 이승원을 놓치며 옆으로 비틀거렸다.

“어…?”

이승원은 머리채를 잡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헉헉거리며 떨어졌다. 안정훈의 얼굴 뼈가 완전히 일그러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사커킥을 찼지만 자신의 얼굴이 망가질 뻔했을 땐 모골이 송연해졌다. 얼굴을 가리려고 어울리지도 않는 안경을 끼고 다니는 주제에.

“어, 어, 왜 이래…. 어어….”

안정훈은 술을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도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느낌이었다. 그는 장식장 위의 물건을 다 떨어뜨리고 곧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승원은 그런 그를 여전히 경계하며 쳐다보았다. 명치를 붙잡고 겨우 허리를 일으켰다. 안정훈은 눈을 크게 뜨고 그런 이승원을 보았다가 그 뒤로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시선을 따라 이승원도 고개를 돌렸다.

유인하가 일어나서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인하야…?”

“인하야….”

안정훈과 이승원 둘 다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유인하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일단 소파로 가서 옷부터 천천히 입었다. 그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유인하를 보고 있었다. 속옷과 바지를 입고 유인하는 뜯어진 셔츠 단추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보았다. 그 위에 베스트를 입고 단추를 모두 잠그고 자켓까지 입고 넥타이는 주머니 안에 넣었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 단추가 좀 열려 있는 것만으로도 아까와는 달리 야성적인 느낌이 나는 유인하였다. 목의 상처가 보였다. 유인하는 자신을 귀신처럼 보는 이승원을 무시하고 쓰러져 있는 안정훈에게로 다가갔다. 고요한 와중에 구두 소리만 사각사각 났다.

“인하야….”

“그대로 있어, 이 개새끼야.”

유인하는 일어나려는 그의 뒤통수를 발로 밟았다. 쿵 하고 안정훈은 이마를 콘크리트 바닥에 박았다. 벌레를 쳐다봐도 저런 눈빛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유인하는 안정훈을 버러지만도 못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이승원은 아까 나갔던 남자들 중 하나가 문을 살짝 열고 안을 훔쳐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 안정훈에게 약을 전달했던 남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이승원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

이승원은 잠깐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유인하의 뒷모습을 보았다. 퍽! 퍽퍽! 유인하는 사정없이 안정훈을 걷어차고 있었다. 말 그대로 개 패듯이 패고 있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정훈은 약에 취해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했다.

“으윽….”

“하아, 하아….”

유인하가 발길질을 멈췄을 땐 안정훈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처맞았을 때였다. 유인하는 크게 숨을 몰아쉬면서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안정훈을 내려다보고는 허리를 들며 다시 자신의 옷을 바로잡았다.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이승원과 훔쳐보고 있는 어린 모델을 발견했다. 그를 보는 유인하의 눈빛은 처음엔 날카로웠지만 곧 살짝 누그러졌다. 그는 손을 까딱까딱하며 그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문을 닫으며 안으로 얼른 들어왔다.

“형…, 괜찮아요?”

“응. 고맙다, 하늘아.”

“아, 아니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을…. 형 무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하늘이라고 불린 어린 남자 모델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유인하는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한 번 거칠게 쓰다듬었다. 아까 유인하가 안정훈의 차를 타고 이쪽으로 올 때 그가 먼저 연락을 주었다.

[인하 형, 조심해요! 정훈이 형이 형 약 먹이려고 해요!]

화장실에 가서 잠깐 받았던 전화가 그것이었다.

안정훈이 김성우에 대한 것을 말했을 때부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려는 것 같았다. 그 불안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하려고 했다. 빠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쁜 얼굴을 했지만…. 도대체 안정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유인하를 ‘파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인지 모르겠다. 분명히 처음에는 좋아한다고 눈물을 흘렸지 않았던가.

솔직히 안정훈의 제안에 끌려 여기까지 올 때 절반은 관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안정훈에 대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탐탁지 않은 면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왔다. 그래도 만난 것처럼. 지금에 와서 보니 또 한 번 안정훈을 시험한 것이었다.

안정훈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시험받았다. 시험이란 게 그렇듯 언제나 난이도는 점점 더 올라갔다. 계속 지킬 수 없는 기준을 제시하면서도 그것을 지키길 바랐다. 유인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꿰뚫어 보는 것 같으면서도 간혹 그걸 너무 평면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강박 때문이다. 티끌 없이 완벽한 충성(사랑)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걸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시험하고 끊임없이 의심한다.

안정훈도, 그에 휘말려 얼떨결에 시험받은 이승원도, 심지어 그 남자도 그 기준을 통과할 수는 없었다. 그걸 완벽하게 통과했다면 그중 둘이나 유인하에게 칼을 맞는 일은 없었겠지.

작년의 유인하는 안정훈에게 처음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자신을 모욕한다고 생각했다. 속이고 배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깔보고 능욕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안정훈과의 섹스는 유인하에게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마치 안정훈 본인처럼. 심심풀이 땅콩이나 다 헤진 낡은 다트 과녁 같은 것이었다. 공중변소나 휴지 같은 것이다. 아주 손쉬운 상대, 속된 말로는 꽁X이 되는 편리한 놈.

그때 그 주차장에서 유인하의 좆을 처음 빨기 시작한 날부터 안정훈은 유인하의 말이라면 다시 전부 복종했다. 이 새끼는 배에 구멍이 뚫려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놈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발가락을 빨라고 해도 침을 질질 흘리며 빨 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하든 욕을 하든 때리든 안정훈은 유인하의 것이라면 꿀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빨았다.

오랫동안 아는 사이라는 것은 좋든 싫든 묘한 신뢰감을 형성하는 법이며 거기에 마치 예전의 일을 보상하듯 안정훈은 유인하의 말이라면 이제 절대 거스르지 않았다. 그렇게 안정훈은 옛날보다도, 고등학교 때보다도 유인하에게 더 만만하고 쉽고 우스운 놈처럼 굴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닌 걸 아는데도, 아는데도 자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버리고 만다. 유인하처럼 경계심이 높은 사람도.

그건 누구인가? 지금 이건 누구지? 한 사람은 도대체 몇 가지의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안정훈이라는 인간의 본모습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본모습은 무엇인가.

한 대 때려도 헤실헤실 웃는 놈이라면 굳이 때리고 싶지 않아도 눈에 띌 때마다 한 대씩 때리게 된다. 그게 나쁜 걸 몰라서 하는 것이겠는가? 아니다. 그를 언제든 때릴 수 있는 놈으로 남겨두고 싶기 때문이다. 버릇을 들여놓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도 그게 습관이 된다. 유인하가 지금까지 안정훈을 별로라고 생각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만나온 것도, 지금 이렇게 그가 주는 섹스에 혹하는 것도 파블로프의 개 실험의 원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유인하는 안정훈을 개처럼 다뤘고 그는 정말 개처럼 꼬리를 흔들어댔지만 그 개에게 의해 오랫동안 조종당해온 것은 결국 유인하이기도 했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유인하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끊임없이 자신과 안정훈을 비교하며 살아왔다. 상대를 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제 와 밝혀진 건 결국 유인하는 자신도 안정훈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불안한 사람들은 곧잘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한다. 스스로가 마음대로 안 되니까 남을 조종하는 것으로 무력감을 해소하려는 것이다. 어릴 때의 유인하는 자타에게 아주 크고 효과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다. 자신도 남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힘들어졌다. 애들도 머리가 크고 자기 자신에게도 힘든 걸 견딜 수 있는 정신적 자본이 바닥났다. 홀로 불행을 이겨내는 것이 익숙할 법도 한데 작년은 모든 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폭력을 선택했던 것이다.

결국 유인하는 단 한 번도 안정훈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를 보면서 자기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마치 백설 공주에 나오는 계모처럼. 안정훈만큼 유인하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선명하게 비춰냈던 거울은….

[당신은 내 거야….]

그 남자밖에 없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가장 깔보던 인간과 가장 좋아하는 인간이 피를 나눈 형제다. 그리고 유인하는 둘 다 죽이려고 했다.

도대체 사랑이란 뭘까. 이 형제는 유인하에게 무엇일까. 지금까지 유인하를 비추기만 했던 그 거울의 안에 있는 진짜 안정훈은 무엇일까. 얘는 어떤 놈이지? 10년이 넘어 처음으로 상대와 마주했다.

“얘도 네가 불렀지?”

“네…. 형 친구 아니에요?”

박하늘은 이승원을 곁눈질하며 그렇게 물었다. 이승원은 유인하와 박하늘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유인하는 언제나 인기가 있었다. 자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나름대로 안정훈에게 신뢰를 받았던 놈인 것 같은데 배신한 모양이다. 유인하는 그의 말에 이승원을 돌아보았다. 눈빛이 차가웠다. 이승원은 1초쯤 뒤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하.”

유인하는 양손을 허리에 얹으며 다시 한번 숨을 골랐다.

약이라니. 먼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아무리 조심했어도 큰일이 났을지 모른다. 그에게 안정훈에게는 가짜 약을, 진짜 약은 자신에게 주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 약을 타 놓고 기다렸다.

옷깃이 좀 흐트러지긴 했지만 근사하고 섹시하기까지 하다. 그는 다시 안정훈을 돌아보았다. 발끝으로 그의 어깨를 툭 차서 바로 눕혔다. 안정훈은 죽을 것처럼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왼쪽 얼굴이 피투성이에 오른손으로 왼쪽 갈비뼈를 움켜쥐고 있었다.

시험을 다른 말로 하자면 기회였다. 유인하는 그가 다시 이러지 않기를 바랐다. 그걸 바라면서 굳이 이 똥통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그걸 바란다는 것도 모른 채. 그래서 화가 났다. 그런 걸 바라는 스스로에게도.

도대체 이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죽여?’

유인하의 눈빛이 맹수 같았다. 유인하는 이미 사람을 제법 해쳐봤다. 폭력은 중독성이 있다. 그때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면 역시 정답은 죽이는 게 아닌가. 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인 게 당연했다. 한 번 배신한 놈은 계속 배신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곁에 두고 또 이렇게 다시 만난 자신도 용서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인하는 부러진 것이 분명한 그의 왼쪽 갈비뼈 위를 손 채로 지그시 밟았다.

“으윽…!”

“솔직히 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관심 없다고 생각했거든? 네 헛소리 더 듣고 싶지도 않고.”

유인하는 박하늘에게 손짓을 했다. 커다랗고 무거운 술병을 가리켰다. 그는 주춤주춤하면서 그 술병을 유인하에게 건네주었다. 유인하는 술병의 주둥이를 잡고 무서운 눈으로 안정훈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죽였어야 했어.”

“하하…. 결국 못 죽였잖아? 지금도 마찬가지야. 넌 나 못 죽여.”

안정훈은 쿨럭 기침을 하면서 웃었다. 약을 먹어서 아픈데도 기분이 좋았다. 그는 비실비실 웃으면서 말했다.

“넌 날 좋아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야.”

유인하는 그의 말에 큰 불쾌감을 느꼈다.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그때 그를 찔렀을 때와 똑같았다. 상대방을 칼로 찌르거나 두드려 패 철저하게 거세했다. 하지만 전혀 기죽지 않고 도발하는 상대는 안정훈밖에 없었다.

“넌 내가 좋으니까 싫은 거야. 네 말대로 뭐든 할 수 있는 인간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 다시 찔러. 넌 나 못 잊어. 너한테 이렇게까지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평생 후회할 거야.”

“어떻게 해줄까? 그래, 죽이는 건 너무하지? 여기? 아니면 여기? 한 대만 더 맞자. 맞으면 딱 병신 되기 좋을 것 같지 않냐?”

유인하가 그의 말을 무시하며 구두코로 안정훈의 관자놀이 근처를 툭툭 쳤다. 안정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몸이나 정신이나 맷집이 무서울 정도다. 안정훈이 유인하의 얼굴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그에게 손을 뻗었다.

“괜찮아, 인하야. 괜찮아. 겁먹지 마. 날 원하는 거 알고 있어….”

유인하는 그의 얼굴을 한 대 더 발로 차버렸다. 퍽! 안정훈은 이제 신음도 뱉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느리게 꿈틀거렸다.

“내가 없으면 너한테 누가 있어…. 외로움 많이 타면서….”

안정훈이 신음처럼 말했다. 이럴 때 하는 안정훈의 말은 죄다 헛소리인데도, 유인하는 점점 더 화가 난 얼굴이 되었다. 그의 말이 유인하의 어떤 것에 직격했다.

“나한테도…!”

그 남자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유인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남자가 원하는 것은 오직 고양이뿐이다. 인간 유인하는 그저 그 존재에 기생한, 원치 않는 부속물일 뿐이다. 유인하는 그 뒤로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이를 뿌득 갈았다.

작년 아직 추운 봄날, 유인하는 안정훈에게 전화를 한 통 했었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다. 자신을 말하고 싶었다.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그때도 단 한 명뿐이었다.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형에게도, 동생에게도, 다른 그 누구에게도 자신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얼마나 초조한지, 불안한지, 힘든지. 귀찮아하거나, 곤란해하거나, 아니면 기뻐하거나. 그런 반응들이 너무 선명하게 예상되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그런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누군가에게 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유인하는 자신이 항상 이길 수 있는 인간을 택했다. 아주 오랫동안, 항상. 심지어 그 굴욕적인 통화 이후로도 유인하는 작년 내내 안정훈에게 신세를 지며 의지하고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들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허세를 부리고, 울고, 술에 취해 곧잘 무력한 모습으로 그와 섹스를 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미 그때는 안정훈이 추악한 본심을 다 드러내고 난 이후라는 것이다. 그가 유인하에게 이런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이 처음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다시 복종하는 모습에 그냥 넘어갔다. 아니, 받아들였다. 유인하에게는 그런 안정훈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진짜 자신을 알고도 항상 원해준 건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무척이나 화가 났다. 항상. 항상.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던 이승원과 박하늘은 맞고 있는 안정훈을 보고 있다가 유인하를 동시에 돌아보았다. 눈빛이 불타는 칼 같았다. 둘 다 경찰서 같은 뜨뜻미지근한 데 갈 생각도 없다. 야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은 보통 현재에 몰두하다 보면 일어나곤 했다. 안정훈이 다시 한 쪽 눈으로만 유인하의 얼굴을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는 여전히 웃었다.

“미칠 것 같지?”

안정훈이 말했다.

“넌 잘났어. 잘생겼지, 똑똑하지, 젊고 강하지. 그런데도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고. 안 그래? 갈수록 되는 게 없는 것 같지? 그리고 이젠 그게 다 네 탓 같잖아.”

“…….”

“사랑받기에 충분한 조건인 것 같은데 아무한테도 사랑받는 것 같지 않으니까.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넌 불쌍한 애야. 사랑받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잖아?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해달라고 말하고 싶잖아? 그런데 그러면 지는 것만 같고.”

안정훈의 한쪽 눈이 박하늘과 이승원을 한 번 스쳐 지나갔다. 안정훈은 크게 숨을 내뱉고는 겨우 일어나려고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겨우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저런 어린애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이승원? 저 새끼는 겁쟁이야. 널 만족시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널 이렇게까지 원하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나한테 확신을 줘. 그러면 다시는 배신 안 해. 나한테서 멀어지려고 하지 마. 날 사랑한다고 말해. 나 없이는 못 산다고 인정해.”

“죽어.”

가만히 듣고만 있는가 싶던 유인하가 자신이 들고 있는 술병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이승원과 박하늘 둘 다 놀라서 그를 불렀다.

“인하야!”

“형…!”

유인하가 그대로 안정훈의 머리를 내리치려고 하기 전에 둘이서 그의 팔을 한쪽씩 잡고 말렸다.

“인하야, 참아.”

“형, 그러면 진짜 죽어요. 형…!”

“놔!!”

이승원은 그런 유인하를 끌어안았다.

“인하야, 아니야. 아니야. 저 새끼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닌 거 알아. 저 새끼 말은 다 거짓말이야. 휘둘리지 마. 너한텐, 너한텐 나도 있잖아.”

이승원은 유인하를 꽉 끌어안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인하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기어코 안정훈을 죽여버리려고 기를 썼다. 그것으로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있다는 듯이. 이승원은 박하늘에게 눈짓했다. 그는 안정훈을 살펴보았다.

“안 놔, 이 새끼야?”

유인하가 이승원을 밀어내려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로 마주 보았다. 유인하의 얼굴을 마주한 이승원은 움찔하면서 저도 모르게 손에서 힘을 뺐다. 이승원의 가슴팍을 한 손으로 퍽 밀어내고 바로 선 유인하는 다시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 숨을 골랐다.

“둘 다 나가.”

유인하가 말했다.

“인하야….”

이승원은 다시 유인하에게 다가가며 애원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인하가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그의 눈빛만이 안광을 발하는 듯하다. 박하늘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안 돼, 인하야. 진짜….”

“나가.”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승원은 그의 말에 거역할 수가 없었다. 주저하면서도 결국 방을 나가자 박하늘도 따라 나갔다. 유인하는 뒤로 돌아 안정훈을 마주 보았다. 유인하의 손에는 흉기나 다름없는 유리병이 쥐어져 있다. 안정훈은 무력하게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약과 부상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냥 이대로 놔두기만 해도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죽기 일보직전까지도 유인하를 말로 농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궤변에 유인하는 흔들렸다. 또 그의 말에는 유인하조차 파악하지 못한 뭔가가, 진짜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인하는 항상 자신이 안정훈을 봐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정훈은 자신이 유인하를 봐준다고 생각했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복종이 진심인지 끊임없이 평가했다. 안정훈은 자신이 언젠가 유인하를 길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인하는 습관적으로 안정훈을 괴롭혔다. 안정훈은 습관적으로 멍청한 척 유인하를 속였다. 유인하도 안정훈도 연기를 했다. 그리고 둘 다 어느 것이 자신의 본 모습이었는지 까먹었다. 아니, 연기가 더 이상 연기가 아니게 되었다.

어떤 포식자와 피식자는 서로를 내포하다 못해 공생 관계가 되고 만다. 개미와 진드기처럼. 서로 근본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하는 짓도 다르지만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었다.

‘죽이고 싶어.’

유인하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끝내고 싶어.’

한 번 더 말했다. 서로의 거친 숨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리는 어느새 똑같아졌다. 흉기를 들고 있는 남자도 그의 폭력에 쓰러진 남자의 숨소리도 거칠기는 마찬가지다.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정적을 이루고 있었다.

“너 뭐야.”

그것을 먼저 깬 것은 유인하였다.

“네 개라고 했잖아.”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 거냐?”

“안 그러면?”

안정훈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되물었다.

“넌 책임감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어. 의리도 없지. 그런 거 배워본 적이 없으니까. 난 아니야.”

안정훈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도 약간 놀라서 눈을 끔벅거렸다. 약 때문일까. 몇 번이고 궁금해했다. 지금까지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를 덮치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굳이 그를 망가뜨려서 평생 범하고 싶었던 것이면 그것이야말로 처음부터 그랬어도 상관없었겠지. 이유가 기억나지 않았다. 17살의 자신에게 묻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도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었냐고.

‘어쩌긴…, 그냥 잘해주고 싶었지.’

안정훈이 생각했다.

“그때 고백하지 말걸…, 그치? 네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난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냥 나는… 네가 너무… 좋으니까….”

안정훈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버릴 거면 그냥 죽여.”

함께 있으면 왜 닮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며 안정훈도 유인하의 어떤 면을 닮아갔다. 사람을 이용하고 즐기고 멋대로 버리는 비정한 면이라든가. 유인하는 안정훈이 정신을 잃으며 한 말에서 그 남자를 죽이려고 했던 자기 자신을 떠올렸다. 왜 그 남자를 죽이려고 했던가. 그리고 왜 자기 자신마저 죽이려고 했던가. 자신을 버리려고 했던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버림받는 자신도 용서할 수 없었다.

유인하는 여전히 술병을 꽉 쥐고 있었다. 죽일 수는 없겠지. 하지만 적어도 반병신은 만들어 놓을 작정이었다. 다른 놈들과 했던 메시지도 전부 확보하고 있었다. 잘못되어 경찰서까지 간다 하더라도 밖에 있는 두 놈도 유인하의 뜻대로 증언할 것이다.

‘안 그러면 안 끝나.’

그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앞으로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유인하는 술병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줬다. 유인하의 한쪽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잠시 뒤 방문이 벌컥 열리자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두 남자가 화들짝 놀라 나온 사람을 돌아보았다. 유인하였다. 유인하는 옷깃을 바로잡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병원 데리고 가.”

이승원이 얼른 방 안을 살폈다. 유인하가 들고 있던 술병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안정훈은 실실 웃고 있었다. 박하늘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 안정훈을 부축했다.

“그것 봐. 넌 나 못 죽여. 사랑하니까…!”

안정훈이 피 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유인하는 인상을 쓴 채로 그의 말을 무시했다. 이승원이 유인하에게 다가갔다.

“인하야….”

“피곤해.”

유인하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박하늘이 안정훈을 한쪽 팔에 짊어지고 나오는 걸 쳐다보지도 않았다. 유인하는 이승원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앞장서라고 눈짓했다. 이승원은 발걸음을 뗐다.

*

그의 말이 맞았다. 언젠가부터 유인하는 미칠 것만 같았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나 공격받아 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적도 있었는데도, 언제나 누군가에게 이유도 없이 공격받았던 것만 같이 느껴졌다. 공격받지 않아도 누군가 공격하는 게 아닌가 경계하고 상대를 도발해서 공격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그러고선 역시나 날 공격하려고 그랬던 것이라고 여기고 마는 것이다.

왜? 도대체 왜 그랬을까?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잊고 있었기에 마치 남의 기억이 심어진 것처럼 생소했지만 분명히 그런 일이 있었다. 자기 기억인데도 조금 놀랐다.

엄마를 위해 형과 맞서 싸운 적이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때의 유인하가 10살이었나. 14살인 형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흠씬 두들겨 맞았다.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

왜 먼저 형을 건드리니. 형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먼저 형에게 대들었다고 오히려 이런 소리를 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엄마는 형이 자신을 때리는 걸 말린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엄마를 위해 형에게 맞선 것이었는데 그런 소리를 들어 무척이나 억울했다. 그런데도 어째서 엄마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을까. 말문이 막혔다는 게 옳을 것이다.

고구마 줄기를 타고 내려가듯 그간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계속 떠올랐다. 그래, 어렸을 땐 형에게 이유 없이 맞았던 적이 많았다. 유치원 때였나,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이었나. 가장 오래된 기억도 형에게 맞았던 것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선 더 심해졌다. 유인하가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오면 그가 언제나 찢어버렸다. 그때마다 유인하는 불같이 화를 냈고 그럼 그가 또 때렸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 형은 유인하를 패던 것을 멈췄는데 유인하의 키가 쑥 크고 드디어 그를 때려눕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유인하의 뺨을 몇 번이나 때리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했다. 그때의 충격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을까. 그런데도 없었던 일처럼 잊고 살았다.

그 당시 유인하에게 엄마는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피해만 보고 사는 사람이었다. 남편에게 한마디 하지도 못하고 문제 많은 장남에겐 언제나 쩔쩔매며 가난한 형편에 애를 셋이나 기른다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의 유인하는 분명히 그런 엄마를 무척이나 동정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를 외면하고 싶어졌다.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먼저 그를 저버린 것은 엄마가 아니던가. 하지만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 언젠가 자신이 그녀를 호강시켜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다. 그에게 엄마는 언제나 누군가 지켜줘야 하는 약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녀를 지켜주지 않으니 자신이라도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러면… 언젠가 형이 아니라 날 가장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녀와 같은 인간의 애정을 갈구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사실은 누구의 눈앞에 내놓아도 혀를 찰 만큼 별 볼 일이 없는 구차하고 찌질하고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누가 속인 것도 아닌데 유인하는 속았다는 생각에 분노했다.

아마 엄마가 형 여자 친구의 두 번째 낙태 비용을 대줬을 때였을 것이다. 그때 유인하는 대입을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 만에 하나라도 원하는 대학에 못 가면 재수를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다른 데는 붙어 봤자 사립대라 부모님이 보내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아빠는 떨어질 것 같으면 형편에 맞게 지방 국립대를 쓰라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고등학교에서 딱 한 번 빼고 전교 1등을 도맡아 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화를 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형이 사고 친 것은 언제나 그럴 수도 있다, 괜찮다 하며 수습해주면서 왜 유인하만 형편에 맞게 살아야 하는가. 원하던 대학에 한 번에 붙지 않았더라면 정말 형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나 형은 유인하를 ‘고작 대학 정도로 유난을 떠는 이상한 놈’으로 취급했다. 대학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주제에.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하는 것을 조롱하는 족속들이었다. 노력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한 번도 남들보다 뛰어나 본 적도 없다. 남들에겐 자랑하면서 안에서는 유인하를 억누르려고 했다. 그들은 유인하가 ‘고작 공부 따위로’ 그들을 무시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건방지고 이기적이고 냉정하다고 말했다. 유인하라고 처음부터 그들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을수록,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말대로 그들을 무시하는 것밖에 없게 되었다. 아무리 그들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해봤자 그들은 끝까지 트집을 잡을 것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그냥 알게 되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순 없었다. 유인하는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남의 도움을 구하는 마음이 도리어 해를 불러왔다. 스스로를 독려하고 타이르며 모든 것을 홀로 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런 마음이 해를 불러올 것을 알면서도, 마음 아주 깊숙한 곳에는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자신이 지금껏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만큼의 존재라고. 그런 확인을 남에게서 구해선 안 된다고 아무리 스스로를 단속해도 누군가에게, 내가 인정할 만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버려지지가 않았다.

그 상대가 가족이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 그들은 때리고도 너를 위해서 때린 것이라고 말하고 뺏으면서도 널 위해 모든 것을 다 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잘한 것은 잘못했다고 말하고 잘못한 것은 잘했다고 말하는 인간들이다.

따지기라도 하면? 여전히 자신들이 유인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에 음험한 기쁨을 드러낼 뿐일 것이다. 아무리 잘난 척 해봤자 자신들에게 상처받는 것을 보니 역시 별것 아니네, 하는 식으로.

잘 되면?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는 주제에 그의 성공을 배 아파하고 동시에 뜯어먹을 것은 없는지 노리기만 할 것이다.

여전히 그딴 인간들에게 미련이 남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것에 재능이 있어도, 빠르고 비교적 쉬운 길이 있었어도 공부라는 길을 선택하고 만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싶었다. 그리고 시간을 들인 만큼 점점 더 비이성적일 정도로 집착하게 되었다.

결국 이 모든 선택과 괴로움이 그가 어찌할 수 없었던 환경과 배경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어진다. 그러니까 외면했다. 많은 것을 외면하고 산 것은 안정훈뿐만이 아니다.

이번에도 분명히 그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죽일 수 없었다. 마치 스스로를 죽이고 싶었는데도 끝내 죽이지 못했던 것처럼.

“아….”

유인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침대 위를 한 번 데굴 굴렀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술은 그 이후로 마시지 않았지만 오랜만이라 그런가. 원래도 그는 숙취가 심한 편이었다. 잘 자지도 못했다. 기억나지 않는데도 밤새 악몽만 잔뜩 꾼 것 같다.

“내가 다시는 술 마시나 봐라….”

유인하가 신음을 흘렸다.

“괜찮아?”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인하는 동작을 멈추고 머리에서 손을 뗐다.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이승원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 기품 있는 얼굴형, 유난히 예쁜 분홍색 입술. 약간 초췌해 보이는 게 섹시하기까지 하다. 아, 맞다. 얘네 집에 왔지. 원래 지내던 곳은 잠시 빌린 원룸이었다. 기분도 최악이었고 별로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뭐야…. 몇 시야?”

유인하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신음처럼 물었다. 이승원은 시계도 보지 않고 대꾸했다.

“2시.”

유인하는 유난히 침대에서 일어나기 힘들어하다가 결국 일어났다. 어째 갑갑하다 싶더니 양복을 그대로 입은 채로 자고 있었다. 이 비싼 옷이 다 구겨졌다.

“나 좀 씻어야겠다.”

아직 눈 뜨기도 힘든지 인상을 심하게 쓴 채였다. 이승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유인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욕실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이승원은 한숨을 푹 쉬며 자세를 무너뜨렸다.

그는 어젯밤 한숨도 못 잤다. 어제 이승원은 안정훈의 꼬드김에 넘어가 결국 그에게 손을 대고 말았다. 누구의 피부도 그를 만질 때처럼 만진 적이 없었다. 그 손에 담긴 정념이,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스스로도 무서울 정도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게 두려웠다.

그런데 그때 유인하는 사실 정신이 들어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저렇게 씻으러 가버렸다.

‘널 구하기 위해서였어. 그래서 맞장구친 거야. 다른 놈들 다 나가게 하려고. 그 새끼 속이려고 하는 척한 거야. 너도 들었잖아. 정신을 잃은 널 어떻게 하고 싶었던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어. 난 널 구하려고 한 거야. 이번엔 진짜야. 믿어줘.’

이승원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애원하듯이 말했다. 유인하가 샤워하는 소리를 듣는 내내 이승원은 죄책감과 자괴감에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날부터 그랬다.

[너도 같이할래?]

그때부터. 도저히 이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걸 모를 리가 있는가. 어떻게 해야 더 이상 괴롭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너무나 괴로웠다.

‘인하한테 사실대로 말해. 사실대로 말하고….’

믿지 않으면? 사실을 알아내면? 이번에도 사실은…. 그러면 또 유인하는 이승원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일까? 강제로 무릎을 꿇리고 폭언을 하고 담배로 지지고 쓰고 난 휴지처럼 내팽개치는 걸까?

‘그런 건 싫어. 절대 싫어. 제발….’

그렇게 괴로워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이승원은 순간 움찔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쏴아아. 하는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이승원은 자신이 흥분해서 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말 스스로를 때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깊은 혐오감을 느꼈다.

어릴 적의 유인하는 이승원을 얼굴, 성격, 집안, 뭐 하나 빠질 것이 없는 부잣집 도련님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승원의 여유롭고 차분한 애티튜드를 좋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승원도 그의 곁에서는 누구보다 조신하게 굴었다. 바르고 있어 보이는 말을 쓰고 절대 없어 보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유인하가 자신의 그런 면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인하에게 마구 굴려지는 안정훈을 볼 때마다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불안했다. 왜냐하면 안정훈처럼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그렇게 잘 보이고 싶었던 이유는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말로 그런 짓을 당했을 땐 무엇보다도 흥분하고 말았다. 이승원은 그런 자신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뭐 하냐?”

유인하는 마치 자기 집처럼 이승원의 옷까지 입고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자괴감에 젖어 있던 이승원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다리 사이를 재빨리 확인했다. 다행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이승원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렇게 대꾸했다.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두근거렸다. 당장 유인하가 화를 내면서 자신을 두드려 팰 것만 같았다.

그제야 유인하가 물었다.

“그 새끼랑은 계속 연락하고 산 거냐?”

“아니…!”

이승원은 확 하고 허리를 세우고 경악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그런 의심을 할 수 있냐는 듯이. 하지만 그동안 안정훈에게 연락이 뻔질나게 오기는 했었다.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거짓말인 것이다. 그래서 윽, 하고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유인하의 두 눈을 직시했다.

“널 구해주러 간 거야.”

이승원이 말했다. 당당한 척 말했지만 몹시나 불안했다. 더 물어보면 어떡하지? 더 자세하게 말해보라고 하면 어떡하지? 어디까지 말해야 하지? 어떻게 변명하지? 믿어줄까? 이승원은 너무 무서워서 손이 덜덜 떨렸다. 그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유인하는 잠깐 시선을 돌렸다. 이승원의 침실 머리맡에는 굉장히 인상적인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가로세로 2m는 될 법한 커다란 그림이었다. 짙은 파랑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가 그림을 감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알았다.”

유인하가 한숨을 다시 한번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저 머리를 닦으며 침실을 나갔다. 이승원은 당황했다. 엉거주춤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그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2층이 있는 모양인지 아주 높은 층고를 가진 이승원의 집이었다. 유인하는 한 번 그 집을 쭉 둘러보고는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목이 엄청 말랐다.

‘술은 끊자, 술은.’

유인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유인하는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이승원이 가까이, 하지만 반경 2m 내로는 다가가지 못한 채 섰다.

“괜찮아?”

“괜찮겠냐.”

이승원이 안절부절못하는 티를 숨기지 못하자 유인하는 픽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밝은 색깔의 눈동자에 속눈썹이 짙어 아주 깊은 느낌을 내는 인상적인 눈동자였다. 그렇게 웃으며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가슴을 뛰게 한다. 이승원이 잠깐 안절부절못한 채 시선을 어쩔 줄 못하자 유인하가 물었다.

“뭐야, 너. 너도 바보 됐냐?”

“…….”

그의 앞에서 바보짓을 하는 놈들이 많은 건 그 새끼들이 진짜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예전엔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 유인하가 정말 강해 보였다. 아무것도 참지 않고, 웃고 싶으면 웃고 화를 내고 싶으면 화를 내는 게. 이승원은 눈을 한 번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쉰 뒤 다시 눈을 뜨고 유인하를 보았다.

“배고파?”

“좀.”

“앉아.”

유인하는 널찍한 대리석 식탁 앞에 앉아 거실을 마저 구경했다. 권시혁의 집은 대저택이다. 안정훈의 집은 유명한 L타워의 중간 크기 레지던스다. 이승원의 집은 층고가 아주 높아 주택인가 싶은데 블라인드가 다 내려가 있어 밖을 볼 수가 없었다.

안정훈의 집은 의외로 세련되고 깔끔한 데 반해 이승원의 집은 또 의외로 화려했다. 많은 것들이 꽉 차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순서대로 각을 지켜 배열되어 있었다. 그 남자의 집이나 안정훈의 집에서 느낄 수 있는 여백의 미나 환한 느낌은 적었다. 약간 어두운 채도, 고급스러운 마감, 주인의 심미안이 드러나는 물건들이 눈을 자주 사로잡았다.

‘이런 건 얼마나 할까?’

유인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승원은 부엌으로 가서 먹을 만한 걸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승원은 유인하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좀 무서웠다.

‘왜 더 안 물어보지?’

죄짓고 사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 이승원은 태연함을 가장하기 위해 노력했고 다행히 썩 잘했다. 그는 바보처럼 보이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요리에 집중했다.

냉장고에서 계란과 소시지, 양송이, 토마토, 양파, 이탈리안 파슬리, 생크림, 버터를 꺼냈다. 무쇠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불은 중간으로 맞췄다. 버터를 적당히 잘라서 올렸다. 다른 무쇠 프라이팬을 올리고 거기엔 강불로 소시지와 버섯을 바로 올렸다. 버터가 녹을 동안 믹싱볼에 계란을 여섯 개 깨서 빠르게 섞으며 생크림을 한 컵 정도 천천히 부었다. 소금과 설탕을 약간 넣었다.

그리고 양파를 작게 썰고 다진 마늘과 함께 버터가 녹은 중불의 프라이팬에 살짝 익힌 후 걷어서 도마 위에 올려 두고 계란물을 부어 주걱으로 저으며 익히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 익은 버섯은 도마 위로 옮기고 또 그 뒤엔 소시지를 옮겼다. 타이밍을 맞춰 마늘과 양파를 익혀 놓은 것을 섞은 후 바로 스크램블드에그를 그릇으로 옮겼다. 안은 하얗고 밖은 파란색인 시리얼볼 크기의 그릇이었다. 두 개의 볼에 나눠 담았다. 아주 촉촉한 스크램블드에그였다. 그 위에 익힌 양송이와 소시지를 작은 크기로 썰어서 올리고 옆에는 토마토 슬라이스를 곁들였다. 위에 이탈리안 파슬리를 약간 썰어서 뿌린 것으로 마무리했다.

아주 간단하지만 든든한 브런치였다. 아니, 그냥 점심이라고 하기에도 늦은 시간이지만. 이승원은 빠르게 요리를 끝내고 유인하의 앞에 그릇을 놓고 그의 맞은편에도 그릇을 놓은 후 견과류를 뿌린 싱싱한 샐러드를 냉장고에서 꺼내 뚜껑을 열고 드레싱을 뿌려서 가운데 두었다. 그리고 유인하의 맞은편에 앉았다가 아차 하고 일어나서 식기를 가져왔다. 식기를 가져오는 김에 또 냉장고에서 커다란 포도를 하나 꺼내서 은쟁반에 담아 왔다. 유인하에게 포크를 건넸다.

“자.”

“너 요리도 해?”

보는 맛이 나는 피사체다. 가만히 그가 하고 있는 것을 구경하고 있던 유인하가 물었다. 의외였다. 이승원은 아직도 긴장해 있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대학 때부터.”

“그래? 왜 몰랐지?”

“너 공부한다고 바빴잖아.”

유인하는 소시지를 하나 포크로 찔러서 입에 넣었다. 별 기대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입에 넣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맛있네.”

“먹는 게 낙이라서.”

이승원은 자신의 몫으로 시선을 내리고 지나가듯 그렇게 말했다. 유인하는 버섯을 입에 넣으며 이승원의 얼굴을 보았다. 대단히 한국적인 답변이 아닌가. 전혀 그렇게 안 생긴 주제에. 저런 한 마디가 그의 예쁜 가면에 흠집을 만든다. 뭐 하나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도련님이 무료함을 요리로 달랜다는 것일까? 항상 여유로운 듯 웃는 그였지만, 여전히 어렸을 때처럼 심심한 모양이다. 뭔가 재밌는 게 저절로 일어나기를 바라며.

유인하는 몇 년간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험하지도, 조종하지도 않았다. 가끔 만나는 안정훈을 제외하고는. 온통 시험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진짜 맛있는데.’

그렇게 어려운 요리도 아닌 것 같은데 감칠맛이 살살 도는 게 맛있었다. 생크림을 넣은 계란에 소세지라 약간 느끼할 수도 있는 것이 적겨자가 들어간 샐러드가 확 잡아주었다. 유자 드레싱이 달달하면서도 상큼하고 적겨자가 알싸하게 매운맛을 냈다. 금방 다 먹고 꿀이라도 주사기로 넣은 것 같은 포도를 먹으며 이승원이 먹고 있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참 자세가 좋다. 식사할 때의 동작 하나하나조차 그가 참 좋은 집안의 아들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유인하도 나름대로 스스로가 없어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고 살았지만 고등학교를 들어가 이승원을 처음 보았을 땐 솔직히 충격받았다. 말하는 것 하나, 이렇게 포크질 하는 것 하나조차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게 좋은 집에서 좋은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난 애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이승원에게선 안으로 밖으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이승원이 다 먹고 물까지 마시고 나서야 유인하는 물었다.

“그래서 어제 왜 왔냐?”

“…구하러 간 거라니까.”

한 템포 늦게 이승원이 대답했다. 유인하는 눈썹을 살짝 들면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승원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왜?”

“그냥 그대로 해도 됐잖아? 그러고 싶었던 거 아냐?”

유인하가 곧장 직구를 던졌다. 이승원은 강속구 데드볼을 명치에 맞았다. 당황한 표정이 그대로 보였을 것이다. 유인하의 앞에서는 표정 관리가 힘들다. 예전에는 안 이랬는데. 그때는 유인하에게 아무 짓도, 신경에 거슬릴 만한 짓도 하나 하지 못했었다. 유인하에게 부여받은 베스트 프렌드라는 역할에 충실하여. 사실 안정훈보다도 더 비굴했던 것이 유인하 앞에서의 이승원이었다.

“아니라고 했잖아. 구하러 간 거라고. 어제 걔가 말했잖아. 내가 네 친구인 거 알고 연락했다고. 처음에는 스팸 메시지인 줄 알았는데 너랑 안정훈 그 새끼 이름까지 있는 게 스팸일 리는 없잖아.”

이승원의 얼굴이 심하게 굳었다.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도대체 안정훈이 너한테 그런 짓까지 했는데 왜 지금까지 같이 논 거야? 진짜 큰일 날 뻔했잖아.”

“그래서 진짜 나 구하러 왔다고?”

유인하는 이승원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시 그렇게 물었다. 이승원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좀 억울한 얼굴을 했다.

“그래.”

“흠….”

유인하가 의미 모를 소리를 내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삐딱하게 이승원을 쳐다보았다. 어제 얼굴을 한 대 맞은 것 치곤 그래도 말끔했다. 멍은 좀 들 것 같았지만. 이승원은 긴장해서 위가 아파왔지만 무시했다. 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모르겠다. 그렇게 찰나를 망설였지만 이승원이 입을 다시 열기 전에 먼저 말한 것은 유인하였다.

“그래서 이번엔 그 새끼 죽일 생각이었냐?”

유인하가 물었다. 이승원이 대답했다.

“…몰라.”

“흐음.”

다시 이상한 소리를 냈다. 유인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올리는 거냐?”

“리모컨으로….”

유인하는 블라인드 하나를 살펴보더니 그냥 손으로 살짝 걷어 올렸다.

“뭐야? 이럴 거면 블라인드를 왜 쳐놨어?”

유인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거실의 테이블 위에 있는 리모컨 몇 개를 발견했다. TV와 에어컨 리모컨을 제외하니 하나가 남았다. 버튼을 보고 차례대로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니 답답할 정도로 꽉 닫혀 있던 블라인드들이 차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속이 뻥 뚫릴 정도로 커다란 통유리창이 드러났다. 원래라면 말이다.

그 커다랗다 못해 거대한 창문의 바깥에는 식물로 뒤덮인 거대한 벽이 1m의 간격도 되지 않게 딱 붙어 있었다. 처음엔 산속에 집이 덜렁 있는 건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위쪽을 보니 담벼락이 보인다.

거실의 두 면이 이어져 절경이 따로 없었다. 보니까 조명도 있는 게 밤이 되면 더 근사할 것 같다.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유인하는 한 바퀴 쭉 둘러보다가 이내 이승원을 보았다.

‘집이라는 건 도대체 그 사람을 얼마만큼 나타내는 걸까?’

유인하의 본가는 쓸데없지만 버리지 못해 쌓여 있는 것이 한가득이었다. 고시원은 필요한 것도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볼품없었다. 지금 지내는 곳도 풀옵션이라 그냥 주어진 대로 살 뿐이다.

안정훈의 집은 그야말로 유인하의 스타일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고층 빌딩에 편리한 시설들, 그리고 안의 인테리어는 세련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거기에 좋아하는 책과 만화책을 잔뜩 채운 서재를 가지고 있었다.

권시혁의 저택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속세와도 다른 곳에 존재하는 하얀 성 같다. 오래된 집, 오래된 물건들, 그와 오래 함께 한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본 이승원의 집은 온갖 좋고 화려한 것들이 한 번도 손댄 적도 없는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가득한, 아름답고 거대한 감옥 같았다.

벽. 안경. 유인하는 물끄러미 이승원을 보았다.

“넌 참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았는데.”

“뭐가?”

유인하는 여전히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끼고 있는 안경을 허락도 구하지 않고 스윽 벗겼다. 그리고 그 안경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이승원의 얼굴을 보았다. 예쁜 얼굴. 유인하는 이승원의 안경을 써보았다. 솔직히 이 안경은 이승원에게 안 어울렸다. 하지만 유인하는 그럭저럭 어울리는 편이었다. 물론 그도 얼굴이 워낙 잘나 드러내는 편이 더 나았지만.

이승원은 자신의 안경을 쓰고 있는 유인하를 잠깐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유인하는 이승원의 눈과 그의 입술을 번갈아 보았다. 이승원은 그의 그런 시선에 조금 당황했다.

“인하…야?”

섹슈얼한 함의가 담긴 눈빛이었다. 헉, 하는 소리를 낼 뻔했다. 유인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승원에게서 떨어져 그의 안경을 가지고 놀았다. 이승원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유인하가 물었다.

“나 어쩌면 좋을까?”

자신의 일은 뭐든지 스스로 결정하는 유인하였다. 이런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이승원은 눈을 크게 뜨고 유인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유인하는 다시 이승원의 안경을 썼다.

“그 새끼 너한테 또 덤빌 거야.”

이승원이 말했다. 유인하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겠지?”

역시 어떻게든 했어야 했다. 그런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유인하는 후회가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되물었다.

“그 새끼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닐 거 아냐?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처음부터 그랬어.”

이승원이 인상을 약간 쓴 채 그렇게 대꾸했다가 헉, 하고 유인하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면 안 됐다. 이승원의 눈빛을 보고 흐음~, 하는 소리는 내는 듯한 표정을 짓는 유인하였다.

“그래?”

고등학생 시절, 유인하가 너무 좋아서 열병에 시달릴 때였다. 분명 같은 고민에 고통스러워하는 안정훈이라면 이해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말을 꺼냈다가 그대로 마음을 단념하고 말았다. 유인하 본인이 아니라 안정훈 때문에.

“…내가 도와줄게.”

이승원이 말했다. 계속해왔던 말이었다. 진심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 말이 왜 이렇게 부끄럽게 느껴지는 걸까. 이승원은 자기혐오로 처참한 심경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갈등을 느끼면서도 말을 이어 나갔다.

“널… 지켜주고 싶어.”

이승원은 지금까지 몇 번이고 이런 말을 했지만 벌써 몇 번이고 거절당했다. 뭘 거절당하는 것도 극히 드물었지만 거절당했는데도 같은 것을 계속 제안한 경우는 아예 처음이었다. 이승원은 다시 거절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지만 유인하는 아일랜드 식탁에 약간 기대어 이승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평이하게 그렇게 되물었다. 이승원은 가슴이 다시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걘 너한테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막 나가는 거라고. 너한테 나도 있으면….”

“있으면?”

유인하는 이승원의 안경을 낀 채 제법 수용적인 태도로 이승원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옛날처럼. 이승원은 유인하의 눈을 드디어 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그 새끼는 네가 아니라 나한테 집중할 거야. 날 먼저 네 곁에서 없애려고 할 거야.”

서서히 소멸되어가던 관계였다, 유인하와 이승원은. 누구나 다 알아주던 절친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자연 소멸. 이승원은 그게 너무나 싫었지만 아무런 티도 내지 못했다. 안정훈의 제안에 덜컥 튀어 나갈 정도로… 몰려 있었다. 그럼 유인하는 어땠을까?

유인하는 잠깐 시선을 돌리며 생각을 해보는 듯했다.

“하긴… 넌 특별하지.”

특별. 이승원은 1초 정도 숨을 멈췄다. 다시 유인하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마 이상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유인하는 식탁을 손끝으로 두 번 두드렸다.

‘합격하면 아무리 안정훈이라도 그렇게 막 나가진 못하겠지? 판검사가 우스운 것도 아니고….’

유인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승원의 얼굴을 다시 빤히 보였다.

“그럼 어떻게 해?”

“여기서 지내도 돼.”

말하는 타이밍이 너무 빨랐다. 이승원의 귀가 약간 빨개졌다. 이번엔 유인하도 실소를 참을 수는 없었다.

“너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 내가 너네를 살살 팬 것도 아닌데.”

“…….”

할 말이 없다. 도대체 인하와 정훈이는 둘이서 지금까지 뭘 해온 것일까. 이승원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왜 나는 네 곁에 없었을까.’

그랬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이런 게 또 후회가 되는 걸까.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곁에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이승원은 가만히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옛날과 똑같았다. 이승원은 유인하가 손을 잡고 끌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 흥미를 잃은 것으로 끝나버릴 관계였고 그래서 끝나버렸다. 그런 주제에 유인하가 이런 눈빛으로 조금 봐줬다고 마구 흔들리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승원은 시선을 내렸다. 우수에 젖어 처연한 빛이 도는 게 청순한 듯하면서도 가학심을 자극한다.

그의 귀가 좀 더 빨개져 있었다. 언제나 우아하고 딱히 다른 것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무게감 있는 젊은 남자를 연기하는 이승원이었다. 어렸을 땐 그러면서도 심심해했지, 지금은… 뭐, 지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유인하는 이승원의 잘생긴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오른손을 툭 뻗어서 그 귀를 만졌다. 이승원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인하야, 이러지 마.”

이승원이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더욱 멀리 보냈다.

“왜? 같이 있는 걸로는 좀 약하잖아.”

유인하가 그렇게 말했다. 이승원은 겁을 좀 먹었다.

“나 그런 거 못 해.”

“전엔 좋다고 빨더니.”

유인하의 말에 놀랍게도 눈물이 글썽 차올랐다.

“그리고 그냥 버리고 가버렸잖아….”

유인하의 눈이 잠깐 커졌다. 의외라는 듯. 유인하는 피식 웃었다가 하하, 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승원은 예쁜 분홍빛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더욱 아래로 내렸다. 코까지 먹먹해졌다. 유인하는 웃음을 거뒀다.

‘난 진짜 아무것도 몰랐구나.’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친구도, 가장 싫어했던 놈도 어떤 놈들인지 몰랐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왜 곁에 있는지. 그 남자에 대한 것도 그랬다. 마지막엔 무작정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것도 제대로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좋아하고 싫어했다.

유인하는 다시 이승원의 얼굴을 보았다. 고상한 얼굴선에 우수에 젖은 눈빛, 이지적이고 우아한 인상에 분홍빛 입술이 도톰하고 아주 예쁘다. 키가 크고 자세가 좋고 교양 있는 태도와 말씨가 어린 유인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유인하의 곁에는 바보 같은 친구들만 우글거렸다.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도 바보인 새끼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이승원은 그중에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전의 일을 용서했느냐? 용서하지 않았다. 그를 돼지 새끼라고 부르며 괴롭혔던 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안정훈은 사실 제멋대로인 광견이었고 말을 잘 듣는 개는 이쪽이었던 걸까?

유인하는 이승원의 턱을 잡는가 싶더니 검지로 턱밑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승원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며 시선도 들었다. 유인하와 눈이 마주쳤다. 이승원을 내려다보는 유인하는 웃지 않았다. 상대를 위협하는 눈빛도 아니다.

“도와준다며?”

유인하가 말했다. 그는 그대로 이승원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여전히 이승원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승원은 긴장해서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인하의 새빨간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다시 친하게 지내자. 그 새끼 너 진짜 싫어해. 옛날부터 내가 너만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거 알고 있었거든. 그래, 네가 나 대신 그 새끼 상대 좀 해줘라.”

유인하가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유인하는 재미있는 놀이를 제안하듯 이어 말했다. 마치 옛날처럼.

“섹스하자.”

*

비슷한 체격이었지만 밑에 누운 남자는 키가 더 컸다. 약간 슬렌더한 느낌도 난다. 반대로 그의 위에 올라탄 남자는 온몸에 섹시하고 탄력 있는 근육이 잡혀 있었다. 이승원은 침대 시트를 꽉 잡으며 위를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감았다.

“아흑, 아…! 인하야, 잠깐만…. 으윽!”

이런 건 처음이었다. 유인하는 그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그를 침대에 짓눌렀다. 이승원은 털썩하고 침대에 완전히 눕게 되었다. 언제나 여유로운 애티튜드로 모든 것을 대하던 권태롭고 우아한 그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턱을 치켜들고 시트를 찢을 듯이 꽉 쥐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 흐트러졌다.

“하아, 좀 가만히, 있어라. 으읏….”

유인하는 약간 인상을 쓴 채 발간 얼굴로 그의 위를 타고 있었다. 손가락은 몇 번 넣어진 적 있었지만 자지는 처음이었다. 반쯤 넣은 채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승원은 생긴 것답지 않게 마치 처음 당하는 소년처럼 완전 숫된 반응을 보였다.

“인하야, 인하야…! 잠깐, 하…!”

“야, 너 너무 시끄러운 거 아냐? 그러면 여자가 좋아하냐?”

유인하가 면박을 주자 이승원이 얼굴을 확 붉히며 이를 꽉 깨물었다. 창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라고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인하랑 하고 있어. 인하랑 진짜 하고 있어. 인하한테 내…!’

이런 생각조차 감히 해보지 못했다. 좋고 나쁜 걸 넘어 충격적이었다. 상대의 피부, 체온, 촉감, 냄새, 목소리, 숨소리, 움직임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꼈다. 마치 처음으로 섹스를 하는 것처럼, 아니, 마치 처음으로 감각이란 것이 살아난 사람처럼. 그래서 역치를 넘겨 느끼다 못해 아팠다.

자지가 너무 서고 너무 조여서 아팠다. 이렇게 커진 건 처음이었다. 섹스라는 거 이런 느낌이었단 말인가. 온몸이 욱신거리고 피가 끓는 것 같았다. 죽을 것 같다.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인하는? 인하는 괜찮은 건가?’

이승원은 아파서 눈물을 글썽하고 조금 망설이다가 시선을 바로 들어 유인하의 얼굴을 살폈다.

“!”

안 그래도 색기 넘치는 얼굴이다. 다리를 벌리고 이승원의 위에 올라타 그의 자지를 반쯤 민감한 곳에 넣고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유인하는 역시나 아픈 듯 인상을 조금 쓰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닌지 자신의 것을 오른손으로 쥐고 흔들며 야한 얼굴을 했다. 거기서 나오는 그 인력이란.

“인하야.”

이승원은 허리를 벌떡 일으켜 일어났다.

“뭐야?”

이승원은 눈을 크게 뜨고 유인하와 눈을 마주치더니 바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유인하도 움찔하고 이승원과 눈을 마주쳤다. 입술이 거의 닿을 것 같았다. 이승원은 거칠게 숨을 헐떡거리며 유인하의 눈동자를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키스…해도 돼?”

유인하는 한 번 눈을 깜박였다. 굳이 물어봐서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아니?”

이승원은 흥분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헐떡이며 그대로 유인하의 얼굴만 빤히 보고 있었다. 몇 초가 그냥 그대로 지났다.

이승원은 자세를 바꿔 유인하를 침대에 털썩 눕히고 자신이 위로 올라갔다. 입은 맞추지 않았다. 다급하게 그의 손을 찾아 강하게 깍지를 꼈다. 그리고 자세를 잡아 그의 엉덩이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리고 깊게 박아 넣었다.

“아…!”

유인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신음을 뱉었다.

“야, 아프다고.”

“미안…. 괜찮아? 하….”

이승원은 자신의 허벅지 윗부분과 유인하의 엉덩이가 더 꾹 맞닿도록 힘을 주었다. 상체를 최대한 낮추고 왼팔을 그의 등 밑에 넣어 몸을 더욱 강하게 붙였다. 촉촉해진 피부가 접착력을 만들었다. 서로 맞잡은 손이, 맞닿은 가슴이, 전신으로 겹쳐진 피부가 황홀했다. 코끝이 스칠 거리에서 이승원이 유인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짙은 속눈썹, 밝은색의 인상적인 눈동자, 새빨간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악당 같이 웃기도 하고 천사 같이 웃기도 했다. 첫사랑이었다.

“인하야….”

이승원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유인하의 뺨을 코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뭘까. 이 느낌은. 이 기분은. 아찔해서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다.

평생 아무것도 뺏기지 않으려고 살았던 것 같다. 훌륭하게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으며 살아왔다. 욕구불만이 뿌리부터 쓸었다. 섹스를 할 때마다 상대방을 만족시키는 것에만 신경 썼다. 의무적이었다. 불평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다. 하고 나면 언제나 깊은 허무감을 맛봐야 했다.

상대방의 숨결 하나, 움찔거림 하나하나도 세세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떤 것을 주느냐에 따라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것 하나하나가 이승원의 아주 깊은 곳부터 채워 나갔다.

“인하야….”

이승원은 뜨거운 숨을 뱉으며 천천히 길게 빼냈다. 거의 귀두까지 빼내고는 다시 고환까지 꽉 눌러 박았다. 따라서 윤활제가 안까지 더 들어가며 유인하의 안이 아주 미끌미끌해졌다. 이승원은 눈을 감고 그대로 부르르 떨었다.

아주 탄력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압착되는 것만 같았다. 유인하의 탄탄한 몸을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우그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안이 무척이나 매끄럽고 촉감이 환상적이었다.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을 정도로. 뭐라도 나올 것처럼 자꾸 자지가 근질거리고 욱신거렸다. 실금을 할 것만 같아 긴장되고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이렇게 흥분한 것은 처음이었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렀다.

너무 좋았다.

“하아….”

지적인 인상의 미남이 흐트러져 느끼는 맨얼굴이 몹시나 매력적이다. 이승원이 눈을 뜨고 내려다보니 유인하가 그의 얼굴을 그대로 보고 있었다. 유인하가 픽 웃었다.

“뭐야, 너도 처음이라고 하려는 건 아니지?”

“…아니.”

그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이승원은 그대로 다시 뭉근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대방에게 찰싹 달라붙어 입술로 뺨과 귓가를 간지럽게 더듬었다. 허리의 움직임이 능숙했다. 지적이고 권태로운 듯한 그의 이미지와는 상반될 정도로 굉장히 섹시하고 음란한 박자를 만들어냈다.

“하아, 인하야….”

떨리는 그의 목소리가 아찔했다. 이승원이 고개를 숙여 유인하의 목덜미에 입을 부드럽게 맞췄다. 그러면서 왼손으로 유인하의 허리부터 간지럽게 쓰다듬었다. 아랫배를 한 번 꾹 누르는 그 손길이 안쪽의 압박을 아주 약간 더 강하게 만들며 아랫배의 어딘가가 크게 욱신거렸다. 유인하는 엉덩이를 움찔하고 들며 반응했다.

“으응…. 하으, 야, 거기….”

약간 거북스러운 듯 인상을 썼던 유인하가 야한 신음을 흘렸다. 이승원은 귓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

그래, 역시 상대방을 만족시키고 싶었다. 그게 자신의 만족이 되었다. 이승원이 누구보다도, 누구랑 해도 자신의 생각이 날 정도로. 섹스라는 거 이런 건지 몰랐다. 섹스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그게 남자의 진정한 기쁨이었다.

유인하는 자신을 것을 잡고 자극하던 것을 멈추고 아랫배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아래를 쳐다보았다. 아랫배 안쪽이 찌릿찌릿했다. 뭉툭한 질량감의 자지가 들락날락하는 것만으로도 마찰열 때문에 입구가 아릿아릿했다. 내벽이 끊임없이 긁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어떤 지점에 그게 닿으면 사정할 것같이 몹시 자극적이었다.

하얀 피부가 붉어진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인하의 얼굴은 몹시 야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이런 거 싫어했던 게 아닌가? 단지 이승원에게 안정훈을 대신 상대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걸 한다고?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승원은 유인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승원은 유인하와 이마를 마주치고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인하도 시선을 들어 이승원과 눈을 마주쳤다. 이승원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진지했다. 상대에게 얼마나 열중하고 있는지 그 눈빛만으로 누구나 훤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넌 처음이야?”

“그럼 넌 내가 남자 자지를 여기 또 넣어봤을 것 같냐?”

유인하게 그렇게 말하자마자 이승원은 그의 엉덩이에 자신의 하반신을 더욱 꽉 붙어 퍽 하고 박았다.

“하악…!”

“진짜야?”

이승원은 떨리면서도 기쁜 목소리로 그렇게 되물으며 더욱 끈적하고 농염하게 피스톤질을 계속했다. 그의 탄탄하고 볼륨감 있는 엉덩이가 뒤로 빠졌다가 앞으로 전진할 때마다 근육이 움푹움푹 파이며 부드럽게 살이 닿았다 떨어졌다 하는 소리가 찰싹찰싹 났다. 하지만 아까보다 훨씬 더 깊은 곳을 찌르고 또 찔러서 유인하는 그때마다 스스로 위로 몸을 튕기며 조금 버거워했다.

한 번 의식하니까 자지가 들락날락할 때마다 거기가 자극된다. 아랫배의 아주 깊숙한 곳이었다. 닿기만 해도 질금질금 뭔가가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행위 자체는 배가 거북하고 버거우며 좀 괴롭기까지 했다. 쾌감과 고통이 뒤섞인다. 유인하가 억눌린 듯한 신음을 내뱉으며 잡히지 않는 손으로 이승원의 어깨를 꽉 잡았다.

이 시점에서 이승원은 그냥 모든 것을 잊고 홀려버렸다. 그런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의 일도, 앞으로의 일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유인하의 피부의 느낌에, 향기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움직였다. 그 외에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황홀한 경험이었다.

“너무 좋아….”

고급 침구가 사륵거리는 소리는 냈다. 둘 다 여기서 빨라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서로의 가장 민감한 곳을 겹치고 물기를 머금은 채 문지르는 게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이승원은 유인하의 피부에 얼굴을 천천히 음미하듯 문지르며 물었다.

“진짜 정훈이 때문에 나랑 하는 거야?”

섹스 한 번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유인하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노리는 남자들을 상상 이상으로 매우 혐오했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혐오했다. 그러니까 안정훈도 칼로 찔렀지 않은가. 남자랑 하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고 생각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왔었다.

넣지만 않았을 뿐 안정훈과 할 건 다 했던 건…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함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무리 자포자기 했었다지만 그땐 안정훈뿐만 아니라 누구한테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막살았었다. 그렇게나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말이다.

안정훈 같은 미친놈의 생각을 누가 알 수 있겠냐만, 적어도 그가 유인하에게 집착하고 있으며 그를 성적으로도 가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다. 남들에게 돌리니 마니 하는 거 보면 유인하가 다른 사람과 하는 것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승원을 견제하는 것을 보면 또 다른 이야기인 것 같기도 했다. 그 새끼한테 당할 생각 같은 거 죽어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첫 경험을 해버려서 그를 엿먹이는 것도 좋은 방법 같았다. 처음이니 뭐니 하며 자신을 희롱했던 말이 생각났다. 없앨 수 있다면 얼른 없애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물론 그 이유뿐이라면 이런 걸 남자랑 한다는 건 역시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뭐…. 궁금하기도 하고…. 하.”

유인하가 대답했다.

“뭐가?”

유인하는 인상을 쓰며 스스로 엉덩이를 들어 움직였다. 이승원은 깜짝 놀라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유인하가 한 손으로 이승원의 등을 끌어안아 몸을 붙이고 아래에서 유연하게 엉덩이를 아래위로 움직이며 이승원의 자지를 스스로 안에 끼웠다 뺐다 했다. 처음이라면서 이 무슨 음란함인가. 유인하의 허벅지가 자신의 허벅지를 꽉 죄어 끌어당겼다. 그의 속살도다. 넣을 땐 몹시나 부드럽게 머금고 뺄 때는 사정없이 조였다. 너무나… 이승원의 취향이었다. 이런 취향이 있는지도 몰랐지만. 유인하가 이러는 게 너무나 좋았다. 이승원이 얼굴을 확 붉히고 사정을 참으며 겨우 물었다.

“뭐가 궁금한데?”

유인하는 결국 다시 이승원의 어깨를 잡고 그를 침대에 눕히고 올라탔다. 연습이 안 된다. 유인하는 땀에 약간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어떤 느낌인지. 이런 거 하고 싶은 남자가 있어서.”

이승원의 표정이 일변했다.

“누구?! 뭐 하는 남자야? 어떻게 만났어? 왜?”

그대로 그답지 않게 추궁하듯이 말하며 상체를 팍 세웠다. 유인하의 눈을 똑바로 보는 그의 눈동자는 질투가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걸 쉽게 티를 내는 놈이 아니다. 유인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두 번 깜박였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이럴 때면 한 번씩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웃기다. 유인하는 웃었다.

“아니, 그냥….”

유인하는 자연스럽게 뭐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살짝 멈칫했다. 그 남자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유인하는 오른쪽으로 시선을 멀리 돌렸다.

“어쩌다가 만났어. 근데 좀 고지식한 남자라서 나랑 이런 건 절대 안 할 거야. 나도 남자랑 이런 거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어렸을 때부터 변태가 많이 붙어서. 그런데 그 남자라면 좀… 궁금하더라고.”

처음에는 평범했는데 말을 할수록 유인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약간 쑥스러운 듯 시선을 아래로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좋아하는 사람이야.”

“…….”

“아아~, 별로 말할 생각도 없어. 그 남자도 모르고. 나도 딱히 이제 바라는 거 없고.”

유인하는 손사래를 치며 그렇게 마무리했다. 그래도 아직도 약간 쑥스러운 기분인지 유인하는 시선을 어쩌질 못하다가 결국 이승원의 위에서 일어났다. 이런 유인하는 처음이었다.

“야, 그만하자. 집중 안 된다. 그 새끼한텐 절대 비밀이다.”

유인하가 신신당부했다. 괜히 말했다는 얼굴이었다. 이승원은 침대에서 내려가는 유인하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며 몸을 일으켰다.

‘다른 남자랑 하면서 좋아하는 남자 얘기를 하니까 그렇지.’

자신이 좋아한다고 말한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는 상대의 기분이 어떨지는 전혀 생각 안 한 것이 분명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좆 같다. 이승원은 말 그대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섹스의 황홀경이라는 게 뭔지 경험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여전히 흥분해 있어서 자존심마저 상했다. 이승원은 자신의 거친 숨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혼자만 흥분해 있는 건 정말 꼴사나운 일이다.

‘인하한테 좋아하는…. 그것도 남자가….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유인하가 누굴 좋아했던 적이 있었던가? 잠자리에서 이런 취급은 처음이다. 이승원은 상처받았는데도 그게 익숙하지 않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유인하를 바라보며 그가 좋아하는 남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어떤 새끼인지 몹시 궁금했다.

권태로운 듯 욕망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남자의 정념 가득한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뒤통수로 받아내며 유인하는 침실을 가로질러 걸었다.

‘지금 몇 시지?’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겠지만 한 번 아웃은 대부분 영원히 아웃이다. 유인하는 이승원의 고백이나 마음을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받아줄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그냥 그걸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까 생각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오래 알아왔다는 이유로 흘리듯 누구한테 해본 적 없는 말이 나왔다. 놀랍게도 입 밖으로 이렇게 말한 것만으로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갑자기 그 남자가 엄청 보고 싶어졌다.

‘잠깐만 갔다 올까? 얼굴만 보고 올까?’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못 봤다. 그 남자도 날 보고 싶어 할까? 그럴 것이다. 정말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어제 있었던 일들도 마구 떠올랐다. 별로 징징거리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 건 다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쓰다듬어주면 분명히 위로가 되겠지…. 유인하는 그제야 휴대폰을 찾아보았다.

‘아, 정훈이 새끼 다친 거…. 그거 알까? 나랑 그 새끼 사이는 얼마나 아는 거야?’

아니, 그전에 칼에 찔린 것도 별말 없었는데 이 정도야…. 도대체 그 남자는 사고회로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영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실 유인하, 권시혁, 안정훈은 서로를 무척 가깝게 여기고 있었지만, 아무리 가까워져도 서로에 대해서 전부 알 수도 없을뿐더러 뭘 모르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각자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좋아한다고 느꼈을 때 마음껏 애정을 표현했다. 비록 완전히 고양이가 된 줄 알았을 때였지만. 하지만 만날 수조차 없을 거라는 걸 알고는 바로 마음을 접으려고 노력했다. 그 남자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했을 땐 아예 없던 일로 하고 싶어 모든 것을 외면했다. 더 이상 자신의 감각도 생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사랑해.]

옛날엔 전부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짝사랑 같은 건 못난 놈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냥… 다시 만나서, 다시 쓰다듬어줘서 기쁜 걸 어쩌겠는가. 좋은 걸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도 지금도 그 남자에게는 고양이일 뿐이라는 거 안다. 처음에는 자신도 괜찮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지금도 나름 괜찮은 모양이다.

‘그래, 그냥… 내가 진 거라고 하자.’

섹스를 하는 그 남자가 궁금했다. 그건 옛날에도 종종 궁금해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느낌일지도. 그렇게 돌 같은 남자도 섹스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 괜히 이것저것 상상하게 되곤 했다. 정말 막 하고 싶다기보단 호기심에 가까웠다.

‘그래, 호기심.’

그런 욕심을 부렸다가 다시 잃는 것은 싫다. 그 남자 앞에선 역시 고양이인 게 좋았다. 호기심이라면 다른 데서 채워도 된다. 부끄러울 게 없는 훌륭한 나신이라 유인하는 그대로 당당히 선 채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조작했다.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안정훈이었다.

이 개새끼가. 대충 맞은 것도 아닌데 전화할 정신은 있는가. 이 새끼 맷집은 항상 상상을 초월한다. 유인하는 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대체로 이승원에 대한 말뿐이었다. 그 새끼랑 같이 있냐. 그 새끼가 하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다. 어째 이승원이 안정훈에 대해 하는 말과 비슷했다.

‘아니, 이럴 거면 둘이 붙어먹으라고. 병신들이.’

유인하는 안정훈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니가 아무리 지랄해봤자 넌 안 돼.>

유인하는 자신을 보고 있는 이승원의 사진을 예고 없이 찰칵 찍고는 그것까지 보냈다. 이승원은 뒤늦게 움찔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하고 휴대폰 전원을 아예 껐다. 유인하는 옷을 찾아 입기 시작했다.

3차 면접의 결과는 보름은 있어야 나왔다. 붙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남자를 보러 가는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다. 자신에게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 땐, 안정훈과 함께 타락으로 인생을 허비해도 그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고양이로 변할 수 있다지만 사람을 막 찌르질 않나. 물론 안정훈을 찌른 건 별로 후회하지 않았다.

반쪽짜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는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다시 만나는 거 들키고 싶지도 않고 그 새끼가 또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겠고. 만약에 좋아한다는 거라도 눈치채면….’

진짜 그냥 죽였어야 했나?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폭력은 언제나 유혹적이다. 상대방도 그런 식으로 나왔다면 더더욱. 만나서 죽이고 고양이로 변해서 도망간다는 옵션이 여전히 정답처럼 느껴진다.

“…….”

하지만 그때도, 어제도 결국 끝을 짓지 못했다.

[넌 책임감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어. 의리도 없지. 그런 거 배워본 적이 없으니까. 난 아니야.]

유인하는 잠깐 눈을 감고 인상을 쓰며 자신의 눈썹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내가 너한테 책임질 게 있다고? 지켜야 할 의리가 있다고? 먼저 배신한 게 누군데!’

[버릴 거면 그냥 죽여.]

그때는 자신이 그를 죽이지 못할 게 뭐가 있냐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지금도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그 충동은 확연히 가라앉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때는 정말로 죽이고 싶었는데도 죽이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아니, 죽이고 싶은 마음만큼 죽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왜일까. 유인하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에 무척이나 저항감을 느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라운지 체어 위에 휴대폰을 던졌다.

‘그래, 그 미친 새끼. 뭘 죽여. 잘못하면 내 인생까지 말아먹는 건데. 그 새끼는 그냥 멍청이야. 병신이라고. 바보가 바보짓 한다고 죽일 필요는 없지. 이제 난 괜찮잖아? 그 남자도 있어.’

그 새끼는 그 남자 동생이고. 그래서 그냥 내가 봐주는 거다. 유인하는 한숨을 짧게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미친 새끼가 그래도 먼저 연락했는데 왜 갑자기 터지냐? 같이 놀아줬잖아? 전에는 차서 그런 거라고 쳐도, 하여튼 미친 새끼.’

무언가는 또 외면했다. 무언가는 받아들였다. 유인하는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

-야 이 뱀 같은 새끼야, 죽여버린다, 이 씹새끼야!

“네, 이승원입니다.”

-인하 어디 있어? 어디다 숨겼어?! 야, 나 지금 네 회사 앞이다? 당장 쳐들어간다. 사람들 앞에 얼굴 못 들고 다니게 해줘? 어?!

“아, 회사까지 오셨다구요? 네,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네.”

-끊지 마, 이 씹…!

이승원은 전화를 뚝 끊었다. 그는 회사 동료들에게 평소와 같은 미소로 인사를 했다.

“점심은 따로 해야겠네요. 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이승원은 발걸음을 빨리하여 다른 사람들에 앞서 얼른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승원은 그제야 인상을 팍 썼다.

‘미친 새끼.’

유인하가 아예 안정훈과 연락을 끊어버린 모양이었다. 이승원에게 불같이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승원도 씹었는데 회사까지 연락을 하니 그가 하는 전화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돈 많은 백수 스토커는 도대체 뭘로 상대해야 하는 거냐.’

이승원은 잠깐 안경 밑으로 손을 넣어 눈을 문질렀다. 남자를 상대로 하는 거라 경찰에 신고를 해도 황당하다는 반응만 했다. 딱히 욕심도 없던 새끼가 돈은 어떻게 그렇게 벌고 빠져 가지고. 남에게 자신의 공간을 침범당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이승원이었다. 이전에도 스트레스 수치가 상당히 높았는데 근 보름 동안 일생의 스트레스를 다 몰아받는 느낌이었다.

1층에 도착해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가자 빠앙-! 하고 아주 큰 경적 소리가 울렸다. 이승원은 평소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싹 가시고 잠깐 살기가 왔다 갔다. 그는 큰 한숨을 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비싼 외제차가 하나 서 있었다. 조수석을 열고 안에 탔다. 얼굴이 온통 멍투성이에 얼룩덜룩한 안정훈이었다. 그가 말끔하게 차려입은 이승원의 멱살을 잡아서 확 끌어당겼다. 이승원은 신경질이 난 얼굴이지만 차분하게 말했다.

“말로 하자.”

“말로 하자고?! 이 씹새끼야, 인하 어디다 숨겼어?!”

상대에 대한 절대적인 적개심. 역시 유인하 같다. 이승원은 그의 눈을 일부러 보지 않고 멀리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미친개를 상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희 집이지? 맞지?”

“와서 백날 난리 쳐봐라.”

이승원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안정훈은 울컥해서 두 손으로 그의 멱살을 더 꽉 잡아 끌어당겼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얼굴이 무섭다. 그리고 탁 놓았다. 이승원은 자신의 셔츠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인하가 싫다잖아. 이제 우리도 그만하자.”

“우리?”

안정훈이 운전석에 머리를 꽉 기댄 채 이를 갈았다.

“인하가 너 선택했잖아. 넌 그만둘 필요 없잖아.”

“…….”

이승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안정훈은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자꾸 빡치는 일이 생기고 뭔가 생각대로 안 되니까 자꾸 시야가 좁아진다.

“아니지. 인하 성격에 그냥 나 엿 먹이려고 너랑 한 거지? 착각하지 마. 지금은 인하가 너한테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너도 버림받는 거 금방이야. 그때 되어서야 내 말대로 했어야 했다고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고.”

안정훈이 화를 내면서 말하곤 씨근덕거렸다. 이승원은 그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충동적으로 말했다.

“진짜 인하 좋더라.”

안정훈이 움찔하며 홱 고개를 돌려 이승원을 보았다. 이승원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나랑 한 게 처음이라던데. 넌 그동안 대체 뭐 했냐?”

사실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하지만 끝까지 말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대로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로 노려보았다. 갑자기 안정훈이 차를 급발진했다. 그리고 차는 그렇게 멀지 않은 곳으로 향했다.

예의 그 주차장이다. 한낮인데도 차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멀리서 봐도 확연할 정도로 차가 덜컹덜컹 흔들렸다.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모션이다.

“얼마나 했어? 몇 번이나 했어? 어디까지 손댔어? 씨발, 내가 전부 다 물어 뜯어버릴 거야!”

이승원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누르고 그의 얼굴에 주먹질을 하며 안정훈이 소리쳤다. 이승원이 그의 턱밑을 잡고 차의 천장에 그의 정수리를 쿵 박았다.

“미친 새끼, 그냥 죽어라, 죽어…!”

퍽퍽 하는 소리가 제법 오랫동안 오고 갔다. 안정훈은 다친 데를 더 다쳤고 이승원은 회사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안정훈은 핸들에 이마를 박은 채 헉헉거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인하는… 인하는 나 좋아하는데…. 이제 시험하는 건 충분하지 않나? 나 같은 남자가 어디… 헉, 어디 있다고….”

이승원은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넣고 옷깃을 다시 만지다가 뭘 어떻게 할 수준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그냥 조수석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안경이 또 부서져서 맨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안정훈은 계속 꿍얼거렸다.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병신아. 내일이면 인하 3차 발표날이라고. 인하 합격하면? 판검사라도 되면 진짜…. 아니, 아닌가? 그러면 더 괜찮나?”

안정훈이 눈을 부릅뜨고 다시 한번 여러 가지 옵션을 검토해봤다. 유인하도 상당히 체면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그걸 가지고?! 이승원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문제가 아냐.”

이승원이 말했다. 안정훈이 엉망인 얼굴을 돌려 이승원을 보았다. 이승원은 조수석 창문 쪽에 시선을 둔 채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얼굴은 맞기 싫다더니 입술만 조금 터진 게 다였다. 보이지 않는 곳은 그도 흠씬 두드려 맞았다.

“뭐?”

안정훈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승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안정훈이 경고했다.

“뭐라고 하든 난 포기 안 해, 등신아. 알잖아?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원래 너답게 행동해. 그냥 인하 어디 있는지 말해. 그리고 도망가라고.”

“나도 모른다고 말했잖아.”

이승원은 그 말을 끝으로 안정훈의 차에서 내렸다. 입가를 손가락으로 대며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큰길을 향해 걸어갔다. 택시를 타고 일단 성형외과라도 가볼 생각이었다. 얼굴에 상처가 남는 건 싫었다.

‘피곤해….’

아직 한낮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승원은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면 더더욱 피곤했다.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을 하고 있단 걸 알기 때문이다.

그때의 황홀경은 도대체 뭐였을까? 착각이었을까?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특별했다. 맞닿는 피부가, 숨결이, 향기가, 눈빛이 너무나 환상적이라 그에게서 절대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그의 포로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싶었다.

이승원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말보로 레드. 유인하가 피우는 것이었다. 그의 혀를 몇 번이고 지진 것도 이 담배였다. 정말 싫었다. 불을 붙이고 숨을 약간 빨아들였다. 혀가 따끔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하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이승원은 그런 자신이 싫었다. 너무나 싫었다.

‘인하는 지금 어디 있을까.’

그렇게 콜택시를 기다리며 잠깐 정신을 빼고 멍하니 서 있었다. 담뱃재가 저절로 툭 떨어졌다.

‘그 남자랑 있는 걸까….’

그때였다. 부우웅-! 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커다란 차가 인도에 서 있는 이승원을 덮쳤다. 이승원은 2미터 정도 구르다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차에서 안정훈이 내렸다. 인적이 드문 환한 찻길에는 늦은 매미가 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안정훈은 잠깐 쓰러진 이승원을 멀찍이서 보고 있었다. 잠깐 시선을 오른쪽으로 길게 흘리며 바람 빠지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안정훈은 그에게 다가가 그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를 들쳐 메고 차의 뒷좌석에 짐짝처럼 던졌다.

*

어차피 그 남자에게 고양이일 뿐이라면 언제든지 만나러 가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유인하는 여전히 그를 만나러 가지 못한 채 시계바늘만 초조하게 보며 살고 있었다. 또 무언가의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합격자 발표가 나면, 그러면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마음을 정리하고 만나러 갈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와 약속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기쁨과 죄책감 사이에 그런 식으로 타협을 하는 것이다.

드디어 발표날이 내일이다.

‘내일이면 만나러 가는 거야.’

유인하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엄청 더웠다. 집으로 가야겠다. 요새 유인하는 헬스장과 도서관, 집만 내내 오가고 있었다. 임시로 지내고 있는 곳은 단기 계약의 월세방으로 합격을 하고 나면 옮길 요량으로 열심히 휴대폰 어플로 집을 찾아보고 있었다.

너무 기대는 안 하고 싶은데 3차까지 온 것은 처음이라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3차 시험 때까지만 해도 너무 떨렸는데 치고 나서는 뭔가 초탈한 듯 마음이 놓였다가도 때때로 무척이나 불안해지곤 했다.

그럴 때면 그 남자를 생각했다. 그 남자는 참 이상한 남자였다. 무엇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강철 심장은 가끔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 그 남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차분함이 옮아왔다. 진정할 수 있었다.

‘만나러 가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고양이 모습으로 집에서부터 왔다 갔다 하는 건 역시 좀 위험하지. 잡혀갈 수도 있고….’

역시 나비가 좀 미묘여야지…. 유인하는 어떻게 그의 집에 가야 할지 방법을 고민했다. 일단 사람 모습으로 그의 집 근처까지 가서…, 그리고 어떡하지? 박스 같은 걸 들고 가서 그 안에 들어간 다음에 고양이로 변하면 물건이 일단 박스 안에 들어가 있기는 하겠지?

‘혹시 모르니까 지갑이나 휴대폰은 그냥 집에 두고 가야 하나….’

누가 들고 갈까? 안 그럴 것이다. 그 동네에 걸어 다니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 남자 말고는. 그것도 한 번뿐이다.

“…….”

주변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걸어서 갈 만한 거리라 집까지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유인하는 잠깐 그 모든 사람들과 유리되었다.

‘반가워하겠지? 쓰다듬어주겠지?’

상상만으로도 목덜미의 털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간질간질해서 못 살겠다. 유인하는 집까지 뛰어갔다. 내일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집에 도착해서 에어컨을 틀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몸이 노곤했다.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린다. 불도 켜지 않아 집안이 어두웠다. 그 남자의 생각이 도저히 떨쳐지질 않았다.

‘씨발…. 뭐야, 항상 이러는 건 아니겠지?’

설렘이나 불안이나 똑같다. 어쩔 줄 모르겠다. 그동안은 어떻게 참았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커다랗고 뜨거운 손. 맨살에 닿는 느낌도 아주 좋았다. 화인이라도 남는 듯한 뜨거움이었다. 그 남자에게선 유인하가 좋아하는 냄새가 났고 품에 안기는 느낌도 전에 없는 안전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유인하는 그 산책로에서 그 남자에게 안겼던 것과 실수로 그 남자의 무릎 위에서 사람으로 변했던 것을 기억했다. 역시 뒤에 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창피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흥분했다.

그 남자의 놀란 얼굴은 ‘놀란 얼굴’이라는 표준에는 매우 미달이다. 그냥 평소 같은 얼굴이 좀 굳은 것에 불과하다.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하는 것 정도에나 놀라는 남자다.

나비는 어째서인지 그를 항상 놀래키고 싶어 했다. 책장에 숨어 그가 돌아보길 기다렸다 왁, 하고 달려든다. 사고를 치고 손을 물며 반응을 살폈다. 왜 혼내지 않을까, 궁금하면서도 혼내지 않는 것에 기뻐했다.

얼굴과 귀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 등줄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을 때마다 꼬리가 빳빳하게 서고 골골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나온다. 배를 긁는 것도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영원히 그 손길만 받고 싶을 정도로.

우우웅.

유인하가 본격적으로 속옷 안으로 손을 넣으려는 찰나 그것을 방해하듯 휴대폰이 얼굴 근처에서 크게 울렸다. 유인하는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약간 창피함을 느꼈다.

벌떡 일어나서 잠깐 반성했다. 완전히 고양이가 되어버린 줄 알았던 시절에도 이상하게 그 남자의 섹스가 궁금하곤 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그를 반찬 삼는 일은 없었다. 그때는 고양이로서 어리기도 했고…. 지금도 역시 뭔가 해선 안 될 짓을 상상하는 느낌이다.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일단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가 한 통 왔다. 보통 때라면 문자의 앞부분이 조금 보였겠지만 ‘사진’이라는 표시만 되어 있었다.

안정훈이었다. 유인하는 별 망설임 없이 그것을 손가락으로 탭 했다. 사진이 보였다. 인상을 약간 찌푸리는 것 외에는 몇 초 동안 미동도 없다가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이 미친 새끼.”

아까의 흥분이 싹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사진은 정신을 잃은 채 차의 뒷좌석에 짐짝처럼 실려 있는 피투성이의 이승원이었다. 안정훈의 차였다. 유인하는 바로 경찰에 신고를 할까 잠깐 고민했다. 곧 냉정해졌다.

구설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인하가 직접 신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유인하는 그냥 그 연락을 무시해버렸다. 나쁜 짓에 보상을 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저걸로 감방이라도 가면 고맙지.’

유인하는 자신이 여전히 안정훈을 컨트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고.

‘그때 죽었으면 다 해결됐을 텐데.’

유인하는 그를 칼로 찔렀을 때를 떠올렸다. 아니면 2주 전의 일도. 지금은 진심으로 아쉬웠다. 안정훈과는 언제나 후회할 여지를 만들고 마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죽이지 못했던 이유가… 진짜 있었나? 지금의 아쉬움 때문인지 그 미묘하고 강한 저항감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유인하의 삶은 끊임없는 발버둥의 연속이었다. 이제 그 발버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던 것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합격을 하고 그 남자의 곁에서 있을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어디에 있을까? 안정훈은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그만 사라진다면 유인하는 드디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인하는 그 후로 일부러 안정훈이나 이승원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빌려온 인테리어 관련 서적을 읽는 것에 집중했다. 저도 모르게 그 남자에 대한 생각도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다음날 점심쯤 이승원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왔다.

어떤 대형 병원의 이름과 호실이 적혀 있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뭐, 안정훈 그 새끼도 그렇게 막 나갈 수는 없지. 이 미친놈의 맥락도 좀 보이는 것 같다.

유인하는 점심을 먹고 일어나 그 주소로 향했다. 붕대를 둘둘 감은 이승원이 침대에 반쯤 기대어 누워있었다. 유인하는 문안용 꽃다발을 오른손에 쥐고 다른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그에게 다가갔다.

“많이 다쳤네?”

“…….”

유인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이승원의 턱을 잡아 한 번 옆으로 돌려보았다. 이승원은 그 손을 뿌리치진 않았지만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가 물었다.

“이게 네가 원한 거야?”

유인하는 이승원을 쌩 깠고 안정훈은 결국 이승원을 직접 병원에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이승원은 당장에 그를 신고했다.

돈은 있으니 변호사가 열심히 구실을 만들어주려고 하겠지만 블랙박스엔 사건의 정황이 그대로 담겨 있을 것이다. 살인미수일지 중상해일지 모르겠다. 어쨌든 마지막엔 병원까지 직접 데리고 온 데다가 그는 돈이 있으니 합의만 잘하면 집행유예 정도일까? 이승원이 끝까지 합의를 안 해주면 몇 개월 정도는 감방에 들어갈 수도 있겠다. 유인하로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다.

“먼저 도와준다고 한 건 너잖아?”

유인하가 그렇게 되물었다. 이승원은 고집스럽게 창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건 이제 끝이야.’

오늘 아침, 병원에서 눈을 뜬 이승원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이 이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유인하와 안정훈에게 휘둘려서 몸이 상한 것이 몇 번째인가. 이골이 난다. 아무리 도와주고 싶더라도 이런 미친 짓은 이승원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갔다. 아무리 이승원이 유인하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목숨까지 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끔찍했다. 다시는 이런 짓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다고….’

이승원은 인상을 팍 찌푸리고 시선을 멀리 돌렸다. 이제 그와의 인연을 완전히 정리할 것이다. 유인하가 아니라 자신이 그를 버릴 것이다. 다시는 그를 위에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엔 네가 차로 한 번 쳐.”

유인하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복수는 확실히 하는 게 좋다, 가 좌우명 비스무리한 사람다운 말이었다. 어렸을 땐 어려서 그랬다지만 커서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는 게 사람인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인 것이다.

그제야 이승원이 고개를 들어 유인하를 보았다. 병문안 선물은 꽃이었다. 하얀 꽃을 한아름 안고 있는 유인하는 근사했다.

“이거 나한테 빚진 거야.”

충동적으로 말했다. 유인하가 꽃을 선반에 두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승원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한 번 박았잖아.”

그 말에 얼굴을 붉힌 건 이승원이었다. 하지만 유인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주장했다.

“중간에 멈췄잖아.”

“좋아하더만. 할 거 다 하고 딴소리 하는 남자 존나 꼴불견이다.”

유인하가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그 말에 이승원은 말문이 막혔고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화가 나는 건지 나름 창피해하는 건지 모르겠다. 유인하가 물었다.

“억울해?”

“…억울해.”

이승원이 자신의 침대보로 시선을 내렸다. 파란색으로 병원의 이름이 수도 없이 적혀져 있는 병원복을 입고 있었다. 병원복이라니 최악이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성형외과 의사를 찾았지만 이미 봉합이 끝난 것은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흉터가 남을까 봐 아주 신경이 쓰였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키스도 못하게 했으면서.”

또 꼴사나운 말이 나왔다. 이승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습관적으로 손으로 얼굴을 감싸서 조금 가렸다.

“아니, 아니…. 방금 한 말은 안 한 걸로 해줘.”

“하고 싶어?”

“…….”

유인하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가만히 이승원의 상처 입은 얼굴을 보고 있다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를 마주 보았다. 이승원이 고개를 들어 억울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유인하는 그대로 눈을 감으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

그의 빨간 입술은 생각보다도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깜짝 놀라서 몸을 심하게 떨었다. 역시나 꼴사납다. 그의 혀가 이승원의 분홍색 입술을 가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혀를 지지는 담뱃불의 고통과 쓴맛이었다. 하지만 입안에 들어온 그의 혀는 너무나 부드럽고 달콤했다.

“으응….”

이승원은 뺨을 붉히며 집중하였다. 다친 손을 뻗어 유인하의 목덜미를 잡고 고개를 돌려 그의 입 안에 혀를 넣었다. 달콤한 타액을 삼키고 그의 혀를 핥았다. 촉, 하는 소리를 내며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땐 이승원은 잠깐 멍해졌다. 유인하는 자신의 입술을 날름 핥으며 중얼거렸다.

“너 역시… 나쁘지 않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웃는 얼굴이 다분히 장난기 가득했다. 자신 때문에 차에 치여 죽을 뻔한 친구를 앞에 두고. 그의 미소는 이승원의 가장 선명한 기억 중 하나인 그때의 그 미소와 아주 흡사했다. 순간 다른 건 전부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언제 다 낫는대?”

“한 달 정도는….”

유인하의 질문에 이승원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유인하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부터 계속 합격자 명단이 떴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이승원과 대화하는 사이 떴을지도 모른다. 유인하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틀고 인터넷 어플을 새로고침 했다.

그때 보고 있던 화면의 새로고침 단추를 누르자 새로운 게시글이 하나 올라왔다. 유인하는 1초 정도 그 화면을 보고 있다가 그 게시글을 눌렀다. 그대로 잠깐 굳어버렸다. 유인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승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유인하는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한 번 더 입술을 꾹 눌렀다. 아까보다 좀 더 뜨겁고 열정적인 입맞춤이다. 그리고 아까보다도,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웃었다.

“다 나으면 연락해라. 나 간다.”

그리고 그는 빠른 걸음으로 병신을 나갔다. 곧 뛰는 소리가 들렸다. 이승원은 그가 나간 병실의 문을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가 툭 손을 떨궜다. 조금 그대로 있고 나서야 머리가 돌아갔다.

‘합격했나 보다….’

그게 무슨 뜻일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입맞춤을 하고 어딜 가는 것일까.

“…….”

이승원은 엉망이었다. 오른쪽 뺨에 붙인 커다란 거즈와 머리를 둥둥 감은 붕대, 팔과 허벅지에는 금이 갔고 온몸에 찰과상과 멍이 가득했다. 그의 무릎을 덮고 있는 병원 이불의 위로 물방울이 하나 뚝 떨어졌다. 그 이후로는 투두둑 연달아 떨어졌다.

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일까?

이승원은 이제 이런 건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 뭔가를 걸 수 있다면 이승원은 이미 한도를 초과해도 한참 넘긴 상태였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목숨을 걸 만큼 유인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안정훈이 이 정도로 막 나갈지 몰랐다. 이승원은 겁이 났다. 더 이상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

왜 입을 맞췄을까? 한 번만 더 그런 미소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향하지 않는 그 미소는 너무나 예뻤지만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이승원은 유인하를 좋아했었다. 참 많이 좋아했었다. 어린 시절 그의 세상은 유인하를 중심으로 돌았다. 그만 있으면 이승원은 뭐든 할 수 있었다. 함께 하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한 번만 더 그 행복을 느껴보고 싶었다.

안정훈 같은 것에게 말하지 않고 온전히 혼자만 간직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다면 직접 마음을 전했을 것이다. 태어나서 이승원이 가졌던 감정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인 감정이었다.

“으흑….”

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최악인 점은 바로 그 마음을 스스로 망쳐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날, 안정훈의 추악한 제안에 흔들려 달려 나갔을 때 이승원은 자신의 가장 눈부신 추억과 마음에 구정물을 끼얹어버렸다.

가장 친했던 친구를 배신했다. 그게 그를 죽일 뻔했다. 가장 애틋하고 소중했던 마음을 하수구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아무리 해도 되찾을 수가 없었다.

이승원은 자기혐오와 후회로 괴로워하며 침대 시트를 꽉 쥐고 온몸을 웅크렸다. 질투가 났다. 얼굴도 모르는 어떤 남자가 죽도록 증오스러워졌다. 그렇게나 그리던 그의 미소와 입맞춤이 자신을 이런 절망에 빠뜨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승원은 자신의 온몸을 쥐어뜯었다. 발버둥을 쳤다.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와 질투와 혐오가 그의 마음을 흠씬 때렸다.

“하아….”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지친 이승원은 드디어 온몸의 근육에서 힘을 풀었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더 아팠다.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너무나 많았다.

“인하야….”

이승원은 자신의 한쪽 무릎에 이마를 댄 채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잠깐 축 늘어져 있었다.

그가 다시 내 마음을 생각해줄 날이 올까? 내 괴로움을 이해해주는 날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

절대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축 늘어진 손이 스르륵 움직였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휴대폰을 찾았다. 이승원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스피커폰으로 돌린 채 이승원은 여전히 무릎에 상체를 의지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이승원 씨? 지금 통화 내용은 당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인 모양이었다. 이승원은 약간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착오가 있었습니다. 정훈이가 일부러 친 게 아니라 주차 실수였어요. 그 새끼 바보 같은 구석이 있어서 병원에 좀 늦은 것뿐입니다. 정훈이 바꿔주세요.”

-…알겠습니다.

“안정훈.”

이승원은 바로 안정훈의 이름을 불렀다. 어차피 듣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안정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냐, 너 갑자기.

그래, 안다. 이건 배신이었다. 이승원은 안정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들은 동지였다. 한 번 선을 넘으면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날 그들은 같이 선을 넘었다.

“인하가 좋아하는 남자, 넌 누군지 알지?”

이승원은 너무나 애처롭고 처연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지만 단호했다.

“나도 인하 가지고 싶어. 네 말대로 우리 둘이서 가지자.”

고양이 죽이기 1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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