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Good Dog(1부 5권) (6/7)

고양이 죽이기 1부 5권

How to Kill a Cat

6. Good Dog

안정훈은 유인하가 너무 좋았다.

첫눈에 반하게 만들었던 그 강렬한 눈빛이 좋았다. 무척이나 자존심이 세고 기준이 높은 그가 아주 가끔 만족스러운 듯 웃는 게 마음을 얼마나 미친 듯이 끄는지 아는가. 그 눈빛을 오래도록 마주 하고 싶었다. 그 미소를 계속 보고 싶었다. 그가 가진 색깔을 모두 보고 싶었다.

어릴 때의 그는 누가 봐도 눈을 사로잡는 아찔한 미소년이었다. 그런 소년과 함께 허물없이 지내며 우글우글 모여 다니며 재미있다는 건 뭐든 하고 다니는 생활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미소년한테는 또 그만큼 예쁘고 뛰어난 소년들이 함께하고 싶어 하는 법이고 그렇게 그 무리에 소속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뭔가로 인정받은 것 같았다.

그 당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진심으로 믿었다. 어릴 적은 누구에게나 특별하다. 그럴 때 그런 자만을 단체로 공유하며 믿을 수 있었다. 일종의 종교적 황홀을 공유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중심에 있는 유인하는 추종자들만큼 들뜨지 않았다. 그가 쾌활하고 자신만만하기만 했다면 과연 그만큼 애들이 그를 좋아했을까? 그는 처음부터 냉소적이고 잔혹한 면이 있었다.

가만히 꿰뚫어 볼 것처럼 관찰하는 눈빛. 첫눈에 호기심과 경멸을 동시에 담는다. 호감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간 사람으로서는 허둥지둥거릴 수밖에 없다. 필요 이상으로 미주알고주알 변명하며 저도 모르게 그에게 전부 다 갖다 바치고 만다. 그러고 나면 누군가는 묘하게 불쾌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굴다가도 매몰차게 대하고 매몰차게 대하다가도 친근하게 대했다. 추궁하고 놀리고 괴롭혔다. 마음을 읽고 알아주며 관심이 없으면 하지 못할 말을 건네기도 했다.

손바닥을 칼로 그으라고 했다고 그은 놈도 있었다. 그러면 유인하는 폭소를 하며 그 새끼를 안아주는 것이다. 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하구나, 킥킥. 그러면 그 누군지 모를 병신도 따라서 웃었다. 그러면 거기 있는 모두가 놀라워하면서 웃는 것이다. 그런 예기치 못한 일탈이 그들의 결속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그 병신은 한동안 그 다친 손을 자랑하고 다녔다. 넌 하지도 못하잖아?

그 치기, 묘한 영웅심리, 인정욕구, 우월감, 절대감.

몇몇 사람들은 그런 유인하를 필요 이상으로 증오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법 많은 사람들은 그런 유인하를 필요 이상으로 좋아하기도 했다.

안정훈이 어느 쪽이었는지는 자명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좋았어. 진심이야….’

하지만 이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 팔로 그의 허벅지를 감싸 안았다. 다른 손은 그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가 등허리를 잡았다. 안 그래도 체온이 높은 그의 손바닥이 물기가 어릴 정도로 열이 올랐다.

그는 아름답다. 매력적이다. 누구의 눈길이라도 사로잡을 수 있는 화려함과 아찔한 색기가 있다. 머리도 좋지, 자신만만한 미소도 일품이다. 차라리 그의 잔혹함에 유린당하고 싶어 할 정도로 모두가 그를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모르는 걸 안정훈은 알고 있었다. 다들 그의 예쁜 모양이나 색깔에 감탄한다.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인력에 어쩔 줄 모르고 끌려가봤자 그의 심심풀이 장난감이나 될 뿐이다. 그런 걸로는 절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는 겁쟁이였기 때문에 강했다. 강했지만 겁쟁이였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쉽게 얕잡아 보고 의심하고 추궁하고 괴롭히는 게 사실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라는 걸 처음 깨달았을 땐 얼마나 심장이 뛰었던가. 그의 마음 속에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실 일이 없는 아귀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어땠는가. 그걸 알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네 ‘그게’ 항상 날 유혹해….’

외로운 주제에. 그럴 때 안심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게 나밖에 없는 주제에. 네가 날 원할 때마다 나도 조금씩 더 원하게 됐다. 그게 뭐가 그렇게 잘못됐단 말인가.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네가 말하는 거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나 없이는 못 살잖아? 인정해. 안아줄게. 누구보다도 강하게. 너 같은 앨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너야말로 그걸 가장 잘 알고 있잖아?

칼도 맞았지, 흠씬 두들겨 맞기까지 했다. 하지만 웃음이 실실 나왔다. 그냥 보기만 해도 좋고 가까이 있으면 더 좋고 만지기라도 하면 미칠 것만 같다. 맹목적일 뿐이라 비난한다고 해도 별로 해명할 생각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항상 만만하고 부담 없는 상대로 포지셔닝하고 값비싼 것을 공짜처럼 넘겨주고 심지어 그를 강제로 덮치려고 한 것조차도 길들이기의 일환일 뿐이다. 쉬운 것만큼 거부하기 힘든 것이 없다. 강아지의 목에 목줄을 매는 것과 같다. 사랑하니까 그러는 것이다.

“하아….”

유인하는 자신의 티셔츠를 손으로 꽉 쥐었다. 그의 복근이 드러나 있었다. 그 아래로 짙은 다갈색 머리가 있었다. 유인하는 차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치켜들며 야시시한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그의 얼굴이 피폐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동시에 원초적이며 순수한 쾌락을 나타냈다. 안정훈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유인하의 성기를 입안 가득 집어넣고 빨고 있었다. 그때 안정훈의 실수로 그의 성기에 이가 닿았다. 유인하는 곧바로 그의 머리채를 잡고 확 고개를 재꼈다.

“죽을래, 이 개새끼야?”

퍽. 유인하는 그의 턱에 사정없이 주먹질을 했다. 방금까지 자신의 것을 빨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먹질의 강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턱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안정훈은 이미 이승원과의 싸움으로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유인하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지금껏 보지 못한 눈빛을 보였다. 도취된 눈빛이었다. 제법 섹시했다. 예전엔 이런 식으로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미묘한 분위기가 났다. 안정훈은 더욱 맛이 간 눈빛이 되었다.

‘아, 인하 거. 인하 거다. 존나 좋아. 여기도 예쁘잖아. 아, 미칠 것 같아. 존나 느끼게 해주고 싶다.’

미칠 것처럼. 기절할 것처럼. 나처럼. 그렇게 안정훈은 유인하의 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헥헥거렸다.

“미안. 다시 할게. 아, 나…. 진짜 미칠 것 같아. 인하, 인하야. 너무 좋아. 너무 좋아…. 계속 봐줘. 계속 나 봐줘.”

자신의 입안에 있는 그의 것을 상상해본 적이 있냐고? 당연히 있다. 안정훈은 다시 유인하의 허벅지를 끌어안으며 더욱 정성을 들여 구음하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뭐가 유쾌한지 또 하하, 하고 웃었다.

“똑바로 해, 이 병신아. 존나 못하네. 진짜 개가 해도 이것보단 낫겠다, 병신 새끼. 너 같은 건 처음 봤을 때부터 싫었어. 기분 나쁜 새끼.”

유인하는 안정훈의 이마를 검지로 꾹꾹 누르며 그렇게 을렀다. 안정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인하의 거기에서 꿀이라도 나오는 것처럼 빨아대고 있었다. 그걸 이승원이 4~5m 간격을 두고 멀찍이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못 해.’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승원은 저런 건 할 수 없었다. 저렇게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굴욕적으로 착취당하는 건….

“뭘 봐?”

그때 유인하가 눈을 치켜뜨며 이승원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이 미간을 관통당하는 것처럼 강렬했다. 느끼고 있는 유인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이승원이었다. 깜짝 놀라 주춤거리며 시선을 팍 내렸다.

“아, 아니….”

그런 이승원의 얼굴을 보던 유인하가 피식 웃었다.

“너도 하고 싶어?”

살기와 매력이 동시에 느껴지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승원이 말을 더듬었다.

“나, 나는….”

“하고 싶으면 너도 와서 무릎 꿇어.”

“아니, 나는…!”

그동안 안정훈은 일부러 쪼옥, 츕, 쪼오옥, 하아, 쪽쪽 하는 음란한 소리를 크게 내며 정신없이 유인하의 것을 빨았다. 이승원은 겁이 난 얼굴로 그걸 보고 다시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유인하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옛날 같았다. 너무나 예쁘고 매력적이었다. 그 시선을 당장 이쪽으로 다시 돌리고 싶을 정도로.

“인하야, 너무 좋아. 하아, 꿈꾸는 것 같아. 커. 맛있어. 좀 더 줘. 나한테 다 줘.”

안정훈은 유인하의 것을 입에서 빼고 거기에 입술과 코를 문지르며 아찔한 목소리를 냈다. 낮고 동굴처럼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안정훈이었다. 그런 목소리로 야한 신음을 흘리니 평소의 순진무구하고 무해한 소년 같은 느낌의 그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야했다. 정말로 유인하의 것을 물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다는 듯이….

유인하는 계속 웃었다. 그런 그가 몹시나 우스웠기 때문이다. 만만하기 때문에 이딴 짓을 시키는 것이다. 병신 같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그게 기쁘다는 말인가? 우습지 않을 수가 없다. 유인하는 대놓고 기분 나쁘라고 그의 머리를 계속 툭툭 쳤다.

“넌 도대체 왜 이렇게 바보 같냐? 이게 진짜 좋냐? 병신. 너 여자한테도 이렇게 깔리고만 살았지? 아니면 설마 남자? 우엑~.”

“아, 아니…! 난 네가 처음이야…!”

안정훈이 고개를 확 떼고 유인하를 올려다보았다. 동그랗게 눈을 뜨며 바보 같은 소리를 했을 땐 또 정말 이런 건 처음 해보는 순박한 소년 같은 느낌이 확 났다. 그 얼굴이 또 웃긴 지 유인하가 킥킥 웃었다.

사람을 괴롭히는 게 즐겁지 않다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을 괴롭히진 않을 것이다. 여기엔 어떤 원초적인 즐거움이었다. 자신의 말에 옷을 벗고 바닥을 기고 무릎을 꿇는다. 이렇게 하찮은 취급을 받으면서도 굴욕적인 짓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게 너무 즐거워서 대부분 왜 괴롭히기 시작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아니, 다른 것은 다 변명일 뿐이다. 즐겁기 위해서 괴롭히는 것이다.

유인하는 안정훈이 여전히 하찮아 보여서 좋았다.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서 좋았다. 머리를 짓누르고 모욕적인 말을 아무리 해도 자신의 눈치를 보고 굴종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유쾌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무력감을 잊을 수 있었다.

“거짓말.”

“아, 아니, 지, 진짠데. 진짜 처음인데. 난 너밖에…!! 나, 나 진짜 고등학교 때…!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아, 씨발, 그 소리는 지금 들어도 기분 좆 같거든? 누가 그때부터 그런 눈으로 나 봐도 된다고 했냐? 어? 아, 토 나와.”

유인하가 그렇게 말하며 안정훈의 다리 사이를 발로 밟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것을 손에 쥔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했다.

“윽, 어, 어? 미, 미안…. 으윽, 미안, 인하야. 아, 아파….”

“이게 아프다고? 하하, 진짜 아다 새끼냐? 진짜 병신 같아.”

유인하가 또 하하, 하고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는 안정훈을 괴롭히면서 즐기고 있었다. 저런다고 뭘 책임질 생각도 없다는 것 잘 안다. 고등학교 때처럼 말이다. 이젠 고등학생이 아닌데도.

“미안해, 인하야. 용서해줘….”

안정훈은 억울한 듯 낑낑거리며 유인하의 것을 다시 입에 물었다. 그도 마치 옛날의 안정훈 같았다. 절대 유인하에게 반항하지 않고 복종하기만 했던 그때 그의 모습이었다. 일부러 더 바보같이 행동하고 비굴하게 굴면서. 물론 그때는 이런 식으로 괴롭힌 적은 없었지만…. 유인하는 다시 느끼는 얼굴로 돌아갔다. 이번엔 안정훈의 머리채를 살살 쓰다듬었다. 안정훈은 아까보다 더욱 열심히 유인하를 빨았다.

이승원은 그런 유인하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거의 없다. 항상 그를 마음에 안 들어 하던 유인하였다. 뭔가 바뀌었다. 뭔가 바뀐 것이다.

유인하는 한 손으로 안정훈의 머리채를 잡고 다른 손으론 자신의 티셔츠를 움켜쥐고 턱을 살짝 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속눈썹의 떨림까지도. 이승원은 유인하를 관음하며 얼굴이 벌게져서 침을 꿀꺽 삼켰다. 유인하는 그런 그의 시선을 느끼고 다시 고개를 돌려 이승원을 빤히 보았다. 이승원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팍 내렸다.

“한 번 더 말하게 하지 마라.”

유인하가 말했다. 유인하가 안정훈에게 명령조로 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이승원에게 그런 적은 없었다. 처음인데도 이승원은 그 말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못해. 난 못해. 저런 건…!’

이승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미 유인하의 곁으로 주춤주춤 다가갔다. 유인하가 씨익 웃었다. 예뻤다.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항상 그랬다. 이승원은 그의 미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곧 심하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유인하가 담배를 쥔 손으로 이승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눌렀다.

“하아, 하아….”

하지 마. 꿇지 마. 이승원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고 또 말했다. 하지만 어느새 안정훈과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게 되었다. 이승원은 아까 전부터 기름칠이 안 된 오랜 기계처럼 버벅거리기만 하는 자신이 생소했다. 다들 유인하를 무서워했어도 이승원만큼은 그의 곁에서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의 이승원은 마치 그때의 그들 같았다. 그리고 옆에는 유인하의 것을 목구멍까지 넣어 빨고 있는 안정훈이 있었다.

이 새끼는 이걸 해본 적이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런 걸 할 수가 있지? 고등학교 때 유인하가 사람들 앞에서 안정훈의 옷을 벗게 하거나 기어 다니게 하던 것보다도 훨씬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방관자가 아니라 바로 그의 곁에서 나란히 무릎을 꿇고 유인하의 착취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정훈이 목젖이 울룩불룩해졌다. 경악스러웠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괜찮은 거야?’

겁이 난다. 그래, 항상 겁이 났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지만 유인하의 곁에 있으면 언제나 긴장했다. 그가 무서웠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두려웠다. 안정훈은 유인하가 시키는 것이라면 뭐든 했다. 그건 옛날도 그랬다. 그걸 바로 곁에서 보면서도 자신은 절대 저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정훈은 벌게진 얼굴로 잠깐 시선을 옆으로 돌려 이승원의 얼굴을 보았다가 다시 눈을 감고 구음에 집중했다. 그대로 유인하를 가게 만들 작정인 모양이었다. 이승원에게 순서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듯이.

“하아, 아윽, 아아…!”

그에 따라 유인하의 숨소리도 가빠졌다. 유인하가 티셔츠를 놓고 안정훈의 어깨를 꽉 쥐었다.

“하아, 그렇게…. 그래, 더 깊숙이 집어넣어. 이 안 닿게. 하하, 진짜 개새끼 같아.”

유인하는 이승원이 옆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것 같았다. 잠깐 안정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그의 머리를 한 손으로 잡았다.

“가만히 있어.”

그리고 그대로 유인하는 안정훈의 목구멍에다 거칠게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퍽퍽 하는 소리가 났다.

“으읍! 읍…! 음…! 윽!”

“윽, 하아, 하하, 하아….”

유인하는 신음 사이로 웃었다. 이승원은 깜짝 놀라서 숨을 멈췄다. 안정훈은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고개를 조금 들게 해서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안정훈의 눈가로 눈물이 흘렀다. 그대로 유인하는 그의 입안에 사정했다.

“으으읍…!”

아주 꽉 눌러 들어오자 안정훈이 막힌 비명을 질렀다. 유인하는 봐주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머리통을 잡고 더욱 꾹꾹 그의 목구멍을 눌렀다. 사정을 다 하고 나서 빼냈다. 안정훈의 입술부터 유인하의 성기로 타액과 체액이 뒤섞여 늘어졌다. 안정훈은 심하게 기침을 했다. 유인하는 아찔하고 야한 얼굴로 잠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아, 기분 좋아….”

평소보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유인하의 목소리가 매우 색기 넘쳤다. 가만히 있어도 보는 사람의 목을 타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럴 때 느끼는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무방비하고 정말 기분 좋아 보이고 예쁘고…. 목이 바짝 탄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안정훈의 눈동자를 한동안 보던 유인하가 고개를 돌렸다. 이승원과 눈을 마주쳤다. 마치 이제 네 차례다, 라는 것 같았다.

“아니, 나, 난 이런…. 난 달라. 내가 좋아한다는 건 좀 더…!”

이승원은 화들짝 놀라 그런 변명부터 시작했다. 유인하는 다시 웃었다. 그 미소가 무척이나 즐겁다는 것 같아 놀라서 말을 멈췄다. 이런 미소는 정말… 너무나 오랜만이라서…. 왜일까. 언제나 숨이 갑갑했다. 근데 지금은 산소가 너무 넘치는 것 같다. 머리가 쨍하다.

“어릴 때는 어릴 때라 그러는 건 줄 알았는데 씨발, 왜 좆 같게 냄새나는 남자 새끼들이 자꾸 나한테 덤비는 거야? 씨발, 더러운 호모 새끼들.”

유인하는 안정훈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승원의 이마도 검지로 툭 밀었다. 무척이나 기분 나쁜 스킨십이었다. 누구도 이승원에게 이랬던 적은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승원은 몸이 굳어버렸다. 이승원은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난 그런 거 아니야. 난 달라. 난 정말로 널….”

“닥쳐, 이 돼지 새끼야. 물어.”

유인하의 성기가 뺨에 닿았다. 이승원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절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분홍색의 아주 예쁜 입술이었다. 축축한 체액이 그의 얼굴에 문질러졌다. 냄새가 났다. 이런 폭언은 처음이었다. 누구한테도 들어본 적 없었다. 이런 취급도. 이승원은 패닉에 빠졌다.

‘싫어. 싫어. 싫어싫어. 하지 마. 이런 거 절대 하지 마.’

이런 걸 했다간…! 이승원은 눈을 질끈 감으며 유인하의 허벅지를 밀어내려고 했다. 유인하가 오른손으로 담배를 바꿔 들고 이승원의 예쁜 입술 사이로 엄지를 처넣어 억지로 벌리게 했다. 담배의 쓴맛이 났다.

“헉, 하아, 헉, 흐윽, 인하야…. 안 돼. 싫어…. 제발….”

이승원은 덜덜 떨면서 애원했다. 이런 걸 당하면 절대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애원하는 그는 평소의 말쑥하고 여유로운 모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애처로웠다. 그는 이런 게 처음이었다. 처음이란 건 누구에게나 충격적이다.

안정훈을 동지라고 생각했다고? 아니었다. 이승원은 안정훈 같은 취급을 견딜 수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절대 유인하가 싫어할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락조차 할 수 없었던 거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이승원도 폭발할 것처럼 서버렸다. 그리고 그걸 유인하는 알고 있었다. 창피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유인하의 빨간 입술이 비웃음을 그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이런 식으로 유인하가 자신을 내려다본 것은 처음이었다. 유인하는 더 이상 이승원을 유일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돼지 새끼로 보고 있었다. 안정훈과 똑같았다.

“인하야, 내가 또 해줄게. 이 새끼는 그냥 보내.”

안정훈이 기침을 멈추고 유인하의 한쪽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유인하는 이승원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속살을 드러냈다가 막 감춘 사람 특유의 취약하고 상처받은 느낌이 났다. 이승원도 유인하와는 결이 다르지만 참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고상한 얼굴선에 이지적이고 교양 있고 우아하다. 분위기가 있었다. 어렸을 때보다 더. 그런 그가 지금 겁이 나서 벌벌 떨고 있었다. 이런 놈인지 몰랐다. 웃기다.

뭘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건 생각 안 하기로 했다. 기분 좋지 않은가. 그거면 된 것이다. 인생이 허무한 건 뭔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성공, 사랑, 미래. 그런 건 그냥 개념일 뿐이다. 원래 인생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살아야 한다. 기분 좋은 것만 쫓으면서 살아야 한다. 어차피 그 이상의 것은 없으니까.

“빨리 입 벌려.”

유인하가 말했다. 이승원은 심하게 몸을 한 번 떨었다. 이승원은 심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유인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를 안정훈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승원은 사시나무처럼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돼. 절대 안 돼. 못 해. 난 절대 못 해!’

그러면서도 이승원은 입을 벌렸다. 이승원은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인하의 말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런지 알 수 있다면 지금처럼 미칠 것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인하의 바짓단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이 핏줄이 잔뜩 솟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유인하는 그의 혀에 담배를 짓이겼다. 치이익, 하는 소리가 났다.

“하하하!”

유인하는 다시 배를 잡고 웃었다. 이승원은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감싸며 욱, 하고 담배와 재를 뱉어냈다. 안정훈도 그가 이승원에게 하지 않아 기쁜 얼굴이었다. 유인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하, 미치겠네. 하하하.”

그래, 맞아. 이런 것이었다. 이런 거. 그동안 이런 재미를 잊고 살았다.

유인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특히나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고등학교 때의 그 많은 친구들, 하나하나 다 시험해보았다. 얼마나 바보 같은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더 바닥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친구들이 자신을 위해 바보짓을 할 때마다 너무나 즐거웠다.

이승원이 생리적인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리며 구역질을 멈췄을 때 그의 얼굴에 유인하의 손이 닿았다. 유인하는 정말로 너무나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그 옛날처럼.

“하하, 너도 빨겠다고 벌릴 정도면 다른 새끼들도 다 대겠네. 하하하! 존나 웃기다, 진짜. 하하하.”

유인하는 겨우 폭소를 잠재우며 차림새를 다시 가다듬었다. 그는 말끔해졌다. 안정훈과 이승원은 엉망이었다. 이승원은 온몸에 힘이 풀려 한 손으로 땅을 짚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절대, 절대 다시는….’

이승원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다시는 유인하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마음을 고백했는데. 그가 원하는 대로 안정훈을 때려눕혔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게 이런 취급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이 이런 짓을 해도 이럴까? 유인하가 자신을 이렇게 취급하는 것은 이승원의 가장 안쪽부터 무언가를 짓이기는 것 같았다. 뭔가 가장 근본적인 것을. 무서웠다. 두려웠다. 항상 이걸 무서워하고 있었다. 아직도.

“인하야, 잘했어. 저런 겁쟁이 새끼 필요 없어. 내가, 내가 다 해줄게. 네가 원하는 건….”

그리고 아무것도 겁내지 않는 남자는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허리를 왼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유인하의 표정을 살폈다. 유인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간 세상 시름은 다 껴안고 사는 것 같은 유인하였다. 지금은 고등학교 때만큼이나 밝아 보였다.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던 그때처럼.

“가자.”

안정훈이야말로 자신이 유인하에 대해 전부 안다고 생각하면서 거칠 것 없이 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랬다. 지금의 유인하는 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를 무능력하게 만들어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도록 만들면, 그에게 정말 안정훈밖에 없게 된다면 그가 스스로 다리를 벌릴지도 모른다는 뭐, 나름대로 가슴 두근거리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가 벌써 이런 것을 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아니, 그에게 고백을 하고 차이고 덮치려고 했다가 칼을 맞은 지 2주가 채 안 지났다. 붙잡아서 발목에 사슬이라도 매달아 감금할 생각이었는데.

‘기분 좋은 오산이다.’

드디어 미친 걸까? 공부 오래 하는 사람들 중에도 간혹 미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큰 유인하의 경우는 그 가능성이 제법 높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친구에게 감히 이런 생각을 한다니! 하고 스스로 검열하여 잊어버린 척했지만.

안정훈은 기뻤다. 역시 인하에겐 자신밖에 없었다. 그걸 인하도 드디어 안 것이다. 유인하가 웃는 얼굴로 안정훈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안정훈은 귀가 쫑긋하고 꼬리가 헬리콥터처럼 돌아가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곧 어디를 가든 상관없다는 듯 주인을 따라 뛰어갔다.

*

뭔가 끊어져 버렸다. 유인하는 웃음이 매우 많아졌다. 언제 몇천 원에 목을 맸냐는 듯 돈을 물 쓰듯이 썼다. 가끔 마음에 좀 드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비싼 선물을 턱턱 주기도 했다. 짧은 시간 안에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조금 더 지나니 받아오는 게 더 많아졌다.

고등학생 때야 나름 순진했으니 친구를(안정훈을) 좀 등쳐먹거나 해도 그렇게 크게 문제는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을 조금 더 알게 되고, 거기에 안 그래도 경계심이 많은 유인하의 성격이 더 강해져 더 이상 남이 주는 것을 덥석덥석 받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로 돌아간 듯 안정훈의 돈도 자기 돈처럼 마구 썼고 남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아주 기뻐했다.

“하하. 아, 기분 좋아.”

안정훈의 집 거실에 파티 풍선과 음식, 술이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다. 아직도 쿵쾅거리는 음악이 집을 울리고 있었다. 에어컨이 최대로 돌아가고 있었는데도 땀이 흘렀다. 사람들은 술에 취해 쓰러져 있거나 뒤엉켜 있었다.

쾌락이란 무엇일까? 쾌락만큼 맥락 없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빨리면 기분이 좋다. 아니, 죽을 때 사정하는 남자들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이라는 건 딱 그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존재인 모양이다. 쿵쾅거리는 음악과 똑같이 쾌락을 탐닉하는 무절제한 젊음들, 술과 담배,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는 듯 헤프게 흘리는 미소들.

고급 소파 위에 유인하가 담배를 문 채 삐딱하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안정훈은 머리까지 반듯하게 넘기고 있었다. 평소엔 덩치 큰 소년 같은 이미지가 강했는데 지금은 좀 더 어른스럽고 남자답고 훤칠해 인물이 살았다. 세련되고 근사하다. 유인하의 취향이었다. 그는 유인하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하아….”

유인하는 소파의 등에 뒷목을 댄 채 왼손으로 그의 머리를 강아지를 쓰다듬듯 쓰다듬었다. 그리고 오른손의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내뱉었다. 유인하도 잔뜩 취한 상태였다. 이렇게 절제 없이 술을 마시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아, 으응….”

구름 위에 둥둥 뜨는 느낌이었다. 술도 펠라도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게 좋았다. 안정훈의 입안은 아주 뜨겁고 입술과 혀는 부드러웠다. 강하게 빨리는 게 좋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심각한 표정으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듯이 자신의 것을 빨고 있는 안정훈의 얼굴을 보면 아주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은 참 기분이 좋은 일이다. 누군가 자신에게 복종한다는 게 기분이 좋다. 그만큼 자신이 우월한 존재가 된 것 같으니까. 그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지가 결정이 된다. 지배와 피지배는 언제나 상호적이다.

유인하는 안정훈을 언제나 심하게 깎아내리곤 했다. 깎아내릴 게 많은 놈이었기 때문이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머리도 좋고 착하기까지 했다. 그런 놈이 왜 이렇게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일까? 이승원은 매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때는 안정훈의 순진한 얼굴 안에 어떤 목적을 숨기고 있는지 제대로 보지를 못 했기 때문에 그의 복종이 기분이 좋으면서도 때때로 불쾌하게 느끼곤 했다.

‘생각해보면 이 새끼가 뭐라고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계속 내 말만 잘 들으면 상관없는 거지.’

이렇게 그의 입에 처박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그냥 걱정 없이 그의 복종을 즐기는 게 이득이다. 아니, 그 말고 다른 사람도 상관없다. 마음에 든다면.

지금껏 어떤 섹스도 이렇게 기분 좋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할 필요 없었고 신경 쓸 것도 하나도 없는,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는 쾌락. 이 새끼는 유인하가 그를 칼로 찌르면서 처박아도 대줄 새끼였다.

‘병신.’

자신의 것을 빠는 안정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좋았다. 그를 함부로 취급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아주 좋았다.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담배가 들어갔다가 나오면 하얀 연기가 토해졌다. 지그시 감은 눈매가, 관능적인 표정이, 드러난 목덜미가 자신의 성기를 빨고 있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잡은 손가락까지 전부 섹시했다.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모두가 그를 관음했다.

그리고 유인하는 그들을 괴롭혔다. 네 발로 기어 다니게 하고 서로 싫어하는 사람끼리 섹스하게 했다. 처음엔 불쾌해서 일그러진 얼굴들이 곧 쾌락에 오염되었다. 유인하는 기꺼이 즐겼다.

누군가 용기를 내서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무슨 모델이랬던가. 나름 느낌이 있게 생겼다. 그는 유인하가 머리를 기댄 쪽으로 팔을 두르며 유인하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댔다.

“남자만 돼? 아까 여자애들 다 쫓아냈잖아.”

그렇게 말을 거니 유인하가 눈을 반쯤 뜨며 그의 쪽으로 눈동자만 돌렸다. 말을 건 모델은 가슴이 두근했다.

‘와, 씨발. 장난 아니네, 진짜….’

정말 눈빛이 장난 아니었다. 이 미모, 이 분위기, 이 눈빛…. 그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유인하에게 좀 더 바짝 붙어 앉았다.

“나 남자한테는 한 번도 그런 생각한 적 없는데…. 그쪽은 될지도….”

생각보다 진지하게 나오는 말투에 스스로도 놀랐다. 유인하는 피식 웃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서 떼며 대꾸했다.

“여자만 되는데.”

“엉? 그럼….”

모델은 유인하의 가랑이 사이에서 열심히 그를 빨고 있는 아주 잘생긴 남자의 이마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모델? 모르는 놈이다. 유인하는 굴뚝처럼 담배를 후악 내뿜었다.

“이딴 데 오는 여자애들이야 뻔하잖아. 걸레는 싫다. 책임지는 것도 싫고.”

“하하, 그럼 왜 돈까지 주고 부르는데?”

“그냥 하는 거 볼라고.”

남자 모델은 뭐가 웃긴 지 거기에 대고 웃었다. 그는 유인하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으려고 했다.

“맞아. 보기 좋은 게 다지….”

그러면서 그는 유인하의 뺨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유인하가 고개를 떼며 그의 얼굴을 퍽 하고 밀었다.

“걸레는 싫다니까?”

“씨발, 누구 보고 걸레래?”

남자 모델이 화가 나서 언성을 높였다.

“너, 이 병신아. 딱 봐도 걸레같이 생겼거든? 가까이 오지 마라. 병 옮을 것 같으니까.”

“그럼 넌! 이 새끼는!”

“나? 난 너같이 못생긴 놈한테 관심 없고. 얘는….”

유인하가 취한 목소리로 대꾸하다가 왼손에 힘을 줘서 안정훈의 머리채를 확 잡아챘다.

“내 전용 구멍?”

“윽…!”

안정훈이 벌건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그는 눈을 감고 표정을 좀 찌푸리고 있었다. 언제나 멍하고 어벙하던 그의 얼굴에도 표정이라는 게 생겼다. 고통은 솔직한 것이다. 그런 솔직한 면모를 보고 싶어서 괴롭히는 것일지도. 계속 목구멍까지 찔러서 괴로웠던 모양이다.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눈물이 배어 나왔다. 좀 더 그의 이목구비가 선명해졌다. 그의 검은 바지의 가운데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눈 떠.”

유인하의 말대로 안정훈이 눈을 떴다. 찌푸린 표정으로 유인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유인하는 그의 새카만 눈동자를 직시하며 자신의 것을 왼손으로 잡아 몇 번 흔들다가 섹시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지그시 감고 그의 얼굴에 싸버렸다.

“하아…!”

유인하가 사정하자 옆에 앉아서 그의 얼굴을 보고 있던 남자 모델은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유인하는 왼손으로 자신의 것을 몇 번 더 쓰다듬었다. 안정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유인하의 아랫도리에 다시 달라붙어 사정한 그의 성기를 혀로 끈적하게 핥아 올렸다. 유인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면 개…?”

“나도 빨아줄까?”

흥분한 남자 모델이 그렇게 물었다. 유인하가 별로 관심 없는 시선으로 스윽 그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안정훈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눈으로 정액이 튀어 그쪽은 눈을 뜨지 못했다. 안정훈은 그 상태로도 유인하의 것을 무슨 아이스크림처럼 빨아댔다.

“으윽, 하아, 아….”

사정하고 난 성기를 부드럽게 빠는 것은 자극이 강해 허리가 절로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유인하는 거기에 집중한 채 매우 야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붉은 혀가 새빨간 입술을 잠깐 핥았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내리깐 시선이 안타깝다. 이쪽을 보게 만들고 싶을 정도로. 이렇게 섹시하고 관능적인 남자는 따로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역시나 별 관심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아, 싫은데.”

유인하는 안정훈의 눈가를 엄지로 쓰다듬었다. 유인하는 안정훈을 이렇게 만져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유인하의 관심은 안정훈이 아닌 누군가에게 향해 있었다.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인하가 날 보고 있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눈꺼풀 위에 튄 정액을 유인하가 엄지로 닦아주었다. 안정훈은 그쪽 눈도 뜨고 유인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눈을 쳐다보았다. 마치 자신의 눈동자가 너무나 좋다는 것처럼. 마치 안정훈이 그러는 것처럼! 꼬리가 있다면 정말 날아갈 정도로 흔들고 있을 것이다.

‘너무 좋아!’

안정훈은 여전히 침이 질질 흘러서 몇 번이나 삼켜야 했다.

그 뒤로 3개월이 흘렀다. 안정훈은 언제나, 언제나 원해왔던 것처럼 이제 유인하와 매일매일 함께 하고 있었다. 꿈만 같았다. 유인하를 잔뜩 느끼게 할 수도 있었다.

‘얼마 안 남았어….’

안정훈은 유인하의 엉덩이를 오른손으로 꽉 잡으며 다시 유인하의 것을 입안에 넣었다. 유인하가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꽉 잡았다.

“하하…. 으윽, 읏. 하아….”

누군가 여기를 입으로 빨아준 것은 안정훈이 처음이었다. 뭐, 아직까지는 그밖에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입으로 빠는 것이야 정말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는 것일까?

‘습관 되겠는데.’

남자든 여자든 입으로 하는 것 정도가 딱 좋은 느낌이다. 책임질 일도 없고 손해 볼 일도 없고. 게다가 감히 자신을 덮치려고 한 그가 자신의 좆을 빨고 있는 것이 아주 우습고 유쾌하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의 것을 빨고 있는 그의 눈동자를 보는 것이 좋았다. 유난히 커다란 새카만 눈동자…. 유인하는 다 피운 담배를 옆에서 자꾸 귀찮게 하는 남자 모델에게 휙 던졌다. 그는 재가 옷에 떨어질까 봐 얼른 그걸 집어 들었다.

“아…! 으윽, 하, 씨발, 더 조여.”

유인하는 그대로 안정훈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으며 허리를 튕겼다. 남자 모델은 유인하에게 화를 내려고 하다가 다시 눈을 크게 뜨고 1열에서 그를 관음했다. 하얀 셔츠 사이로 보이는 육감적인 몸매와 완벽한 비율, 움직이는 허리짓이 아름다우면서 너무나 야했다. 그런 느낌을 동시에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뭔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는 말도, 쓰는 단어도 다르다. 지적이고 분위기가 있다.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아니, 관심도 없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눈빛과 마주하면, 말이라도 한 번 나눠보면 너무나 매력적이라 마니아가 생겨나고 마는 것이다. 눈을 뗄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사실 여기에 나올 매물이 아닌 뭔가가 돌아다니는 느낌이다. 아주 좋은 것이 더럽혀지고 타락한 느낌…. 난교의 주최자는 난교에 참여하지 않는 미묘한 난교 파티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술을 좀 더 마신 유인하는 굉장히 취했다. 자신의 것을 빠느라 수고한 안정훈의 양쪽 뺨을 손으로 두드리다가 꽉 잡고는 크게 웃었다. 안정훈의 얼굴이 찌그러져 약간 우스워졌다. 유인하는 킥킥거리며 더 웃었다.

“아, 진짜 이럴 줄 알았으면 옛날부터 할걸, 그치?”

“어? 어. 어. 그럼 너무 좋았지….”

안정훈은 웃고 있는 유인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렇게 대답했다. 그가 웃으니 안정훈도 바보같이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술에 휘청거리며 안정훈의 어깨를 잡고 잠깐 그의 몸에 기댔다. 안정훈이 부축을 하며 유인하의 손을 잡았다.

“하… 하하….”

큰 키, 큰 체격에 커다란 손, 뜨거운 체온.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유인하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는 안정훈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밀었다.

“토 나오게 그게 무슨 개소리야.”

“으, 응?”

안정훈은 유인하의 변덕에 당황하여 눈만 크게 뜨고 긴장했다. 그가 웃을 때 같이 웃었다가 웃어? 하고 면박을 주며 시험하던 건 고등학교 시절 때도 있었다. 그때는 장난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티가 났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완전히 정색해서 안정훈을 등지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

안정훈은 자신의 턱 상태를 잠깐 점검하며 유인하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또 잘 웃어주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유인하는 솔직하지 못하다. 웃고 지낸다고 속까지 웃는 건 아니었겠지. 평생을 걸었던 시험도 포기했고 그를 덮치려고 했던 자신까지 받아들였다.

‘울어도 되는데….’

안정훈은 몇 달 전 그가 자신의 품에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던 것을 기억했다. 단전이 다시 뜨끈거렸다. 약해진 그를 위로해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앞에 완전히 맨얼굴을 드러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밀착감이 황홀했다. 그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걸 그때만큼 느꼈던 적이 없었다.

‘울리고 싶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곁눈질해 보며 스읍, 입맛을 다셨다.

“형.”

박하늘이라는 남자 모델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쌍꺼풀 없는 가느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더라? 그런 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유인하가 여기저기서 어쩌다가 불러 모은 인간인가 보다. 안정훈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어, 왔어?”

“네…. 형, 괜찮아요?”

그는 유인하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그에게 물었다. 안정훈이 씨익 웃었다.

“엄청 괜찮지.”

“…….”

묘한 기분이었다. 유인하에게 이 남자가 엄청 박한 취급을 받는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뭐 하는 남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장격 되는 사람이 그렇게 그를 취급하니 다들 그를 하인 비슷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박하늘은 그에게 묘한 동정심을 느꼈다.

“형, 형도 여기 앉아서 좀 마셔요.”

“아, 난 술은 좀.”

“물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어, 고맙다.”

해가 지기도 전에 시작한 파티라 새벽 2~3시가 되니 거의 다 나가떨어졌다. 안정훈은 사람들을 정리해서 밖으로 내보냈다. 아침 일찍 사람이 와서 청소를 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휴대폰으로 신청했다. 안정훈은 유인하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침실의 문을 열어보니 유인하가 이미 자신의 침대인 것처럼 쿨쿨 곯아떨어져 있었다.

안정훈은 깊게 숨을 내쉬며 침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리고 그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우며 얼굴을 완전히 드러냈다. 희미한 불빛 속에 음영 진 그의 얼굴이 그윽하고 아주 예뻤다.

12년, 소년에겐 참 긴 시간이다. 전처럼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이런 날을 바라고 또 바랐다.

‘돈은 벌고 볼 일이야.’

그리고 안정훈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안정훈은 그렇게 낮게 속삭이며 그의 잘생긴 광대에서 또 입술을 눌렀다. 다른 손으로 그의 다른 쪽 뺨을 감쌌다. 그러자 잠든 줄 알았던 유인하가 흠칫하더니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으….”

“인하야?”

감고 있는 그의 짙은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차올랐다. 유인하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악몽을 꾸는 모양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쁜 숨을 뱉었다.

“아니야…. 아니야. 흐윽, 아니야….”

가위에 눌린 것일까. 안정훈이 그의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인하야.”

유인하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눈물이 한 방울 오른쪽 관자놀이를 지나 흘렀다. 유인하는 크게 눈을 뜬 채로 가만히 눈동자만 돌려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뭔가 확인하듯 그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순간 헷갈렸다. 그렇지만 바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시선을 떼지 않고 안정훈의 눈동자를 빤히 보고 있었다.

“하아…. 몇 시야.”

조금 마음이 진정되고 나서야 유인하는 시선을 떼고 허리를 일으켰다. 벌써 술이 다 깬 목소리였다.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걸 숨기듯 주먹을 꽉 쥐었다.

“3시 좀 넘었어. 계속 자도 돼.”

“…….”

왁자지껄한 파티가 끝나고 난 후의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언제 그런 파티가 있었냐는 듯. 치워야 할 것만 잔뜩 남아 있을 뿐이다. 이 허무감이 싫었다. 유인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인하야?”

유인하는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술병을 들어 병 채로 꿀꺽꿀꺽 마셨다. 그를 따라 나온 안정훈이 그 모습을 잠깐 멀찍이서 보고 있었다. 저렇게 술을 마시는 건 처음 봤다. 술병을 다 비운 모양이다. 유인하는 그걸 그냥 바닥으로 툭 떨궜다. 다행히 카펫이 있어서 깨지지는 않았지만….

안정훈은 유인하에게 다가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유인하는 처음엔 많이 놀란 듯 심하게 몸을 떨었지만 안정훈을 바로 밀치지 않았다. 술 때문인 모양이다, 하고 안정훈은 생각했다.

“많이 힘들어? 괜찮아. 시험 같은 거 사실 아무것도 아니잖아.”

“…….”

“이제 아무것도 힘들게 안 해도 돼. 나랑 같이 이렇게 재밌게 살자, 응? 넌 그래도 돼.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

유인하는 자신의 양팔 채로 허리를 안고 있는 안정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안정훈은 그걸 긍정의 사인이라고 생각했다. 독한 술을 단박에 들이켜는 바람에 유인하는 금방 취했다. 악몽도 금방 잊었다. 나쁜 기분도 사라졌다.

“기분 좋아….”

유인하는 안정훈의 품에 머리를 기대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느낌이 똑같네….”

“응?”

유인하는 잡고 있는 안정훈의 손을 들어 올렸다. 안정훈은 그냥 그가 하는 대로 따라가 주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허억, 인하가…! 드디어!’

어쩌려는 것일까?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이끄는 것만으로 온갖 상상의 나래가 다 펼쳐졌다. 12년이 지났지만, 동시에 이렇게 된 지는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유혹인 것일까? 유혹하는 것일까? 이런 장면을 상상한 적은 많았지만 무엇 하나 실감 나는 것이 없었는데!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가 자신의 손을 어디로 가져갈지 몹시나 궁금했다. 그리고 거기가 어디든, 안정훈은 자신이 그걸 좋아할 거라는 걸 알았다. 안정훈은 숨을 죽이고 유인하의 기색을 살폈다.

유인하는 그 손을 자신의 얼굴 위에 올렸다. 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이건 잘 모르겠다. 맨얼굴에 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면…. 유인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옛날에 하던 것처럼 커다란 손바닥에 자신의 이마와 뺨과 코를 차례로 문질렀다.

“아.”

향수 냄새가 났다. 유인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손을 버리듯이 툭 놓았다. 기분이 다시 잡쳤다. 왜인지 알 수도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몹시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충분히 젊지 않은 것 같았다. 충분히 키가 큰 것 같지 않았다. 충분히 잘생긴 것 같지도 않았고 충분한 학벌도 아닌 것 같고 충분한 직업도 아니고 충분한 재정 상태도 아니고 충분한 인간관계도 아니고. 다 하나씩, 혹은 몇 개씩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냥 뭔가가 아무래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부족함이 유인하의 발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자꾸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게 내가 가질 수 있는 단가?’

언제나 유인하를 기분 나쁘게 하던 질문이었다. 예전엔 아니라고 부정했다. 지금도 부정하고 싶었다. 유인하는 방금까지 기분 좋다고 했으면서 안정훈을 오물처럼 바로 떨쳐버렸다. 안정훈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또 이상한 변덕을 부리는 유인하였다.

“술 더 없냐?”

유인하는 테이블에 있는 술병을 들어 한 번 흔들고는 주둥이에 입을 대고 고개를 젖혔다. 몇 방울만 나올 뿐이었다.

“응? 응, 응. 여기 있어.”

안정훈은 얼른 부엌으로 가서 술을 두 병 들고 왔다. 유인하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곁으로 오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뭐지?’

유혹이 아닌가. 안정훈의 들떴던 마음이 지금은 좀 가라앉고 말았다. 줬다 뺏는 것이 이래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안정훈이라고 유인하의 변덕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져주길 바라는 건가….’

좋아하는 것인지 싫어하는 것인지 여전히 아리까리 하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끌어안고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어줄 수 있었다. 마주 안고 체온을 나누며 다정한 말을 하며 머리부터 허리까지 천천히, 그의 마음에 드는 방식대로 만져줄 수 있었다.

‘내게 바라는 게 있는데 왜 말을 하지 않지?’

추궁할까?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안정훈은 유인하에게 다시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 다시 부를까?”

“아니.”

유인하는 짧게 대꾸했다.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그가 그걸 한 번에 마시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슬며시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얼굴 많이 빨갛다, 인하야.”

다시 그의 얼굴을 만져서 반응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유인하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의 손을 술잔으로 밀어냈다.

“냄새나.”

“내 손에서?”

그래서 떨궈낸 것인가. 안정훈은 얼른 자신의 두 손을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페라리 향수 냄새가 약간 나는 것뿐이었다.

유인하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래, 그 망할 이승원처럼. 그래서 좀 흉내를 내보았다. 평소라면 눈치채고 바로 따라 하냐고 면박을 주었을 텐데 술에 취하니 면박하는 것도 까먹은 모양이다. 그래도 같은 향수까진 쓰고 싶지 않아서 다른 향수를 뿌려본 건데….

유인하는 다시 술에 만취해 곯아떨어질 때까지 마셨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리지도 않았다. 유인하는 소파의 등에 머리를 댄 채 그대로 잠들었다. 안정훈은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고 많은 동물 중에 고양이로 변한 이유가 있네.”

변덕이 죽 끓이듯 하고 자기 맘대로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들어 올렸다. 침실의 문을 열고 다시 그를 바르게 눕혔다. 이불을 덮어주며 얼굴이 가까워졌을 땐 행동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이불을 다시 들치고 그의 옷 안에 손을 넣고 싶었다.

“…….”

아니야. 조금만 더 참자. 안정훈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

“아.”

안정훈은 일찍 일어났다. 사람을 불러 같이 집을 전부 치우고 아에이오우 입 운동을 하며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같이 유인하를 잔뜩 빨고 있었다. 턱이 아프다, 턱이.

‘뭐, 해주는 것도 좋지만.’

안정훈을 목을 늘이면서 프라이팬을 능숙하게 뒤집었다. 유인하는 숙취가 심한 편이다. 해장은 시켜줘야지.

‘역시 빨게 만들고 싶다….’

목구멍 깊숙이,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그렇게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엄청 싫어할 것이다. 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가슴이 두근거린다. 안정훈이 감히 유인하가 싫어하는 짓을 몇 번이나 해봤겠는가. 그 빨간 입술이 담배를 물 때마다 언제나 자신의 것을 무는 것을 상상했다. 상상하면서도 상상한다는 것을 부정하곤 했다. 아마 생각보다 많은 인간들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제 그거 기분 좋았는데….’

안정훈은 유인하가 먼저 자신과의 스킨십을 원하며 몸을 기대왔던 것을 기억했다. 가슴이 엄청 두근거렸다. 역시 외로워서 그런 거겠지?

‘인하는 원래 그러니까.’

그는 사람들을 쉽사리 혐오한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을 너무나 좋아했다. 외로움을 많이 타니 흘리는 게 습관이다. 그의 말투, 눈짓, 몸짓. 모두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 매우 탁월하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매력적인지 아주 잘 알았다. 얕보이기 싫어서, 잘나 보이고 싶어서 스스로를 마구 부풀린다. 인기 또한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에 훌륭한 요소이지 않은가. 사람들이 미끼를 문 것처럼 마구 끌려오고 그는 마음에 안 든다고 마구 패대기를 친다. 그리고 또 질질 흘린다. 아마 스스로는 부정하겠지.

‘어제 그 새끼도 괜히 옆에다 두고 보여주기나 하고….’

사실 안정훈은 어젯밤 같은 그런 건 싫었다. 유인하는 자신만 독차지하고 싶다. 하지만 타락에는 자극적인 것만큼 유용한 게 없다. 자극적이고 중독적이고….

‘더 뭘 해줄까.’

술, 담배, 섹스로도 유인하는 벌써 이만큼이나 주저앉았다. 약? 도박? 뭐든 좋을 것이다. 즐거운 것이라면 그는 뭐든 할 것이다. 기분 좋은 것이라면 뭐든 좋다고 했다. 유인하는 그간 비정상적일 정도로 절제하며 살았다. 이 일탈이 얼마나 짜릿하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안정훈의 원래 계획에 가까웠다. 억지로 덮치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타락한 삶으로 몰아넣어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유인하는 그걸 매우 기꺼워했다. 그가 많이 웃었다. 그래서 안정훈도 많이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평생 그럴 수 있었다.

‘약간은 생각이랑 다르긴 하지만.’

어젯밤처럼 집이 갑자기 파티장이 되어 있을 때는 안정훈도 놀랄 수밖에 없다. 사실 유인하는 안정훈이 권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타락하고 있었다.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감탄했다. 유인하는 정말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때 침실 문이 달칵 열렸다. 샤워를 한 것인지 유인하가 젖은 머리로 수건을 어깨에 올리고 방에서 나왔다. 숙취가 심한 모양이다. 표정이 안 좋다. 안정훈이 밝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일어났어?”

유인하가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으며 술을 가리키며 손을 까딱까딱했다. 아침부터? 하지만 안정훈은 전혀 그런 생각을 티를 내지 않고 얼른 얼음 잔에 위스키를 가득 따라서 주었다. 유인하는 잔을 흔들어 얼음을 약간 녹이고 반쯤 마셨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따라 흐르며 식도가 어디에 있는지 그대로 알려주었다. 안정훈은 그런 유인하의 상태를 힐끗힐끗 보며 확인했다. 안정훈이 브런치를 해내는 사이 그거 한 잔으로 유인하는 다시 취했다.

‘알코올중독….’

안정훈은 그것의 득실을 한번 생각해보았다. 그동안 음식을 다 했다.

“인하야.”

안정훈은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유인하의 이름을 불렀다. 아일랜드 식탁의 맞은편에서 양손으로 턱을 괴고 유인하의 얼굴과 그가 먹고 있는 브런치를 번갈아 보았다. 유인하가 빈 잔을 그의 앞으로 슝 튕겼다. 안정훈은 다시 거기에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몇 시야?”

“지금? 1시 좀 넘었어.”

“오늘 무슨 일 있었는데. 아….”

유인하는 북엇국을 한 입 먹고 위스키로 입가심을 했다. 그는 취해서 멍한 눈빛으로 휴대폰 화면을 켰다.

“아, 그래, 2시까지 뭔 촬영? 늦겠네.”

유인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정훈은 반찬의 위치를 좀 더 유인하의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그거 아르바이트 잠깐 한다는 거 아니었어? 언제 그만둘 거야?”

안정훈은 아무런 흑심도 없다는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인하도 딱히 무슨 낌새를 눈치챈 것은 아닌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왜 그만둬? 돈도 많이 주는데.”

“모델들이랑 놀고 싶은 거면 내가 불러줄게.”

“누가 걔들이랑 놀고 싶대? 골 빈 새끼들, 말도 안 통하는데.”

“그럼 그거 왜 해?”

“돈 줘서 한다니까.”

유인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니, 왜애, 나 돈 많은데. 혹시 돈 모자랄까 봐 그래? 충분한데….”

안정훈이 약간 투덜거리는 듯 꿍얼거리는 듯 말했다. 그러자 유인하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들어 안정훈과 오늘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넌 나한테 칼까지 맞고도 내가 그렇게 좋냐? 미친 새끼.”

“좋은데?”

안정훈도 유인하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유인하는 또 한 번 피식 웃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다시 한번 웃었다. 안정훈은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전의 일은 없던 것이 된 것일까? 유인하는 원한을 가질 줄만 알지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안정훈이 본 유인하는 그랬다. 체념시키는 것만이 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안정훈이 멋대로 유인하를 얕본 것이 아니었을까?

고등학교 때의 유인하는 사랑받는 폭군이었다. 보통 애는 할 수 없는 짓을 잔뜩 했다. 사랑받고 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또 유혹하기도 하면서…. 그는 사람들의 매저키스틱 한 면모를 불러일으키는 데 탁월했다. 동시에 몇몇 사람들의 사디즘을 자극하기도 했다.

지금의 유인하는 마치 안정훈이 자신을 덮치려고 했던 일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고시도 마찬가지다. 그런 역사가 없었던 것처럼. 그저 고등학교에 이어 지금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했다. 하지만 안정훈은 알고 있었다. 옛날의 유인하는 스스로를 믿었다. 스스로의 미래를 믿고 현재도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지금의 유인하는? 외면을 하면 전부 해결이 되는 것처럼 구는 것이 마치 이전의 안정훈 같지 않은가.

유인하는 계속 술을 마셨다. 안정훈과의 시시껄렁한 잡담에도 그다지 빼지 않았다. 그는 계속 웃을 뿐이었다. 비웃음일 때도 있고 그저 생각 없는 깔깔거림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2시가 돼서야 집에서 출발했다.

내내 술에 취해서 사는 삶이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모든 게 뒤섞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 하루가 지나갔는지 이틀이 지나갔는지 일주일이 지나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유인하가 웬 연예 소속사의 명함을 받아 아르바이트라는 명목으로 모델 일을 시작했을 때도 그게 언제인지, 가장 첫 일이 뭐였는지도 이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면 불쾌한 것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취하면 모든 것이 다 기분이 좋아졌다. 뜨겁고 아무것도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고 웃음이 나온다. 왜 진작 이렇게 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매우 쉬웠다. 돈을 버는 것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하하하.”

유인하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 또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거의 껴안다시피 하며 왔고 만취해 있었다.

“여기 집 너무 좋다.”

2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여자 모델이었다. 그녀는 집을 보고 깜짝 놀라 둘러보았다. 그녀는 유인하의 왼팔에 끌어안겨 있었고 오른팔 쪽엔 남자 모델이 하나 끼어 있었다.

“형, 형, 너무 마셨어요. 괜찮아요?”

그는 유인하를 부축했다. 집으로 들어와 셋이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유인하는 그들의 뺨에 쪽쪽 한 번씩 입을 맞췄다.

“아, 고맙다. 데려다줘서. 진짜 내가, 아, 내가 너무 많이 마셨네. 하하….”

그들은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화려하고 매혹적이고 깨질 듯이 아슬아슬하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꼴린 것이다.

“형….”

남자 모델이 유인하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으며 어깨에 입을 맞췄다. 여자 쪽도 그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뺨에 입술을 비볐다. 유인하의 뺨에 빨간 립스틱이 묻었다.

“우리 기분 좋은 거 해요.”

“기분 좋은 거….”

유인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람도 물건도 가리는 게 그렇게 많던 유인하가 단번에 바뀌기는 힘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걸레는 싫다던 유인하도 지금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런 걸 왜 가려?’

다 똑같아. 다 똑같다고. 어차피 백 년도 못 살고 죽는 건 다 똑같은데 뭘 가려? 뭘 아낄 게 있다고. 그냥 살아. 그냥 살자! 그냥 사니까 모든 것이 너무나 잘 풀린다! 유인하의 인생에 지금처럼 생각대로 모든 것이 되던 때가 있었던가. 유인하는 비실비실 웃었다.

“좋아….”

그리고 유인하는 고개를 돌려 여자와 입을 맞췄다. 여자의 입술이 매우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오랜만이었다. 유인하는 그녀의 뒤통수를 잡고 입을 벌려 그녀의 입안으로 혀를 넣어 노골적으로 그녀의 입안을 탐했다. 여자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다. 피부가 아주 부드러웠다.

“으응, 응…!”

그동안 남자 모델은 유인하의 티셔츠를 위로 확 젖혀 올렸다. 근육이 잘 잡힌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드러났다. 똑같은 남자의 몸일 텐데도 하얗고 섹시했다. 그는 유인하의 명치 부분에 얼굴을 묻으며 가슴골로 올라가며 숨을 크게 들이셨다. 향수도 뿌리지 않은 것 같은데 살 내음이 좋았다.

“형, 혀엉, 형 진짜 잘생긴 거 알아요? 형처럼 잘생긴 사람 처음 봤어요….”

그는 유인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유인하와 여자가 입맞춤을 하고 있는 걸 보고 더욱 꼴렸다. 그는 취한 유인하의 몸을 확 뒤집어 엎드리게 했다. 유인하는 여자를 마주 보고 끌어안으며 입맞춤을 이어갔다.

남자 모델은 벌건 얼굴로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이렇게 할까? 이렇게 하자. 형은 얘한테 박고 나는 형한테 박고….”

그렇게 그가 유인하의 바지와 속옷을 스윽 내리고 밑에서도 여자가 속옷을 벗으며 준비했다. 아무것도 책임지기도 싫다더니 정말 책임지지 못 할 짓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현관문이 덜컹 열리며 이 섹시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인하야~, 벌써 왔어~?”

남자 모델과 유인하, 그리고 여자 모델이 차례로 포개진 채 동시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 모델은 자신의 손가락을 혀로 적시던 중이었다. 안정훈은 웃는 얼굴 그대로 응? 하고 셋을 번갈아 보았다. 안정훈은 장을 봐온 걸 식탁 위에 놓았다.

‘아, 저게 인하 형 항상 따라다닌다는 따까리….’

매니저도 아니고. 남자 모델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하던 걸 계속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모델 둘 다 안정훈에게 머리채를 잡혔다.

“아악!”

“나가.”

항상 톤을 높게 잡던 목소리가 삽시간에 낮아졌다. 안정훈은 괴력에 가까운 힘으로 사람 둘을 끌고 나갔다.

“넌 뭔데, 이 새끼야? 인하 형 집이야!”

남자 모델이 화를 냈다. 안정훈이 그들을 현관까지 끌고 가서 밖으로 내쫓으며 대꾸했다. 여전히 소년처럼 순진무구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이 집 내 집.”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

그동안 내내 헤실헤실 웃고만 다니던 안정훈도 웃음기가 좀 가셨다. 무표정하고 바로 선 그의 모습은 평소의 무해하고 순진무구한 느낌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인상이 다르다. 똑바로 보는 눈빛의 날카로움은 유인하를 닮은 것 같고 무표정한 얼굴과 태도는 그의 형을 닮은 것도 같다. 무엇보다도 싸한 느낌이 났다.

‘지금은 굳이 돌릴 필요 없잖아?’

아깝게시리. 현관의 등이 꺼졌다. 그는 어둠 속에서 거실 쪽을 가만히 주시한 채다. 술에 취한 유인하가 드러누워 있는 곳이다. 저것들의 이름이나 알는지 모르겠다.

‘저런 것들 더럽다며? 이제는 괜찮은 건가?’

처음의 유인하는 운동만 잔뜩 했다. 원래 타고 나길 인싸라 운동하는 곳에서도 사람을 잔뜩 사귀어서 부어라 마셔라 했다. 그러다가 거기서 아는 사람을 타고 모델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인물이 인물이라 생각보다 일이 잔뜩 들어왔다. 광고나 영화의 단역이나 조연 같은 것도 나가곤 했다. 또 거기서도 아는 사람들을 잔뜩 만들어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외로도 갑자기 피아노를 배워본다든가, 드럼을 배운다든가, 윈드서핑을 배운다든가, 하여튼 별별 것을 다 해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크게 마음에 드는 건 없는지 몇 번 하다가 관두기를 벌써 수차례다. 지금까지 못 해봤던 것들의 한을 풀려는 것이겠지 싶어서 언제나 잘한다, 잘한다, 응원 중이다. 옛날이라면 좋아했을 텐데 지금은 영 심드렁하다.

‘역시 아직 시험 포기한 거 때문에 많이 우울한가.’

안정훈이 드디어 발걸음을 뗐다. 현관등이 꺼졌다. 그는 거실로 들어갔다. 유인하는 반쯤 헐벗은 채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거의 누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정훈은 뒤에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고 싶었어? 빨아줄까?”

코가 닿을 듯이 얼굴이 가까웠다. 제정신이었다면 주먹이 날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안정훈에게는 유인하 앞에서 언제나 바보같이 굴던 태도는 없었다. 그는 여유가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만히 대답 없는 유인하의 얼굴은 보고 있다가 그의 잘생긴 코끝을 검지로 톡 만졌다.

‘역시 좋아….’

약간 언짢았는데 다시 괜찮아졌다. 유인하는 왜 이렇게 좋은 것일까? 보고만 있어도 좋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걸 느끼는 게 분명했다. 그에게는 분명히 특별한 것이 있었다. 물론 김성우같이 싫어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결국 그것도 좋아서 싫어하는 것이다(?). 그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유인하 본인밖에 없을 것이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머리카락을 자신의 검지에 베베 꼬며 부드럽게 만졌다. 약간 망설이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인하가 머리를 만지는 걸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아직 모르겠다. 안정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상냥한 손길로 유인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기분 좋아….’

반쯤 정신을 잃은 유인하는 머리를 쓰다듬는 크고 뜨거운 손에 등줄기가 오싹오싹해졌다.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이젠 제법 익숙해진 손길이다. 뜨겁고 커다랗고 상냥한 손길. 그런데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웠다. 그리워하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그런데 어쩐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리웠다. 이상하다. 그 손은 머리를 쓰다듬다가 이내 귀를 감싸며 엄지로 눈가를 매만졌다. 무뚝뚝한 인상과 달리 아주 따뜻한 손이다. 아직은 깨고 싶지 않았다.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노곤했다.

그의 손은 평소와 달리 머리에만 머물러 있었다. 본래라면 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가슴에서부터 배까지 남김없이 쓰다듬어주어야 했다.

‘더….’

나비는 언제나처럼 그 손에 얼굴을 문지르며 졸랐다. 맨얼굴에 닿는 손바닥이 건조하고 약간 딱딱해서 피부가 간질간질하고 목덜미가 오싹오싹했다. 나비는 손으로 덥썩 그의 손목을 잡았다.

‘너무 좋아….’

그리고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비비다가 그의 손을 천천히 움직여 목을 쓰다듬고 이내 가슴까지 내려오게 했다. 손을 뺏긴 주인의 처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의 손을 껴안고 그대로 다시 푹 잠이 들려고 하였다.

그의 손에서는 언제나 무취에 가까운 은은한 샤워코롱의 향기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 청량감 있고 달콤한 페라리 향수 냄새가 난다. 유인하는 서서히 눈을 떴다.

“흐응.”

안정훈이 침대에 팔꿈치를 괴고 유인하의 얼굴을 빙글빙글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유인하의 가슴팍에 들어와 있었다. 유인하는 옷깃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뭐야, 이 새끼야….”

유인하는 취해서 뭉개진 목소리로 말했다.

“인하야.”

안정훈은 그대로 유인하의 가슴 한쪽을 잡으며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오른쪽 가슴살을 봉긋하게 쥐고 그대로 엄지로 그의 붉은 기가 많이 도는 유두를 한 번 톡 건드렸다. 실크와 벨벳처럼 매끈한 피부와 달리 그곳은 아주 여린 느낌이 났다. 안정훈은 그곳을 뚫어져라 보면서 흥분한 얼굴을 했다.

“아….”

유인하가 움찔했다. 안정훈은 다시 맛있는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처럼 빤히 유인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아.”

안정훈은 저도 모르게 변태 같은 숨결을 내뱉었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대신 콧김이 훅 나왔다.

‘아, 안 되는데. 너무 이른데.’

뭔가 돌이키지 못할 짓을 저지를 것 같았다. 아직은 일렀다. 이런 게 아니다. 듣고 싶은 말이 있지 않은가.

눈이 마주쳤다. 안정훈은 잠깐 숨을 멈췄다. 그는 확실히 자부해도 될 만큼 인내심이 강한 남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충분치 않은 느낌이다. 짙은 속눈썹에 감싸인 화려하고 강렬한 눈동자, 이 눈빛. 역시 너무 좋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할짝 핥았다.

유인하가 이렇게 취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안정훈이 원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자꾸 자신의 앞에서 취하고 흐트러지는 건 결국 그도 원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는 솔직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할 리가 없었다.

역시 이것은 유혹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뻥 터질 것 같았다. 급격히 흥분했다. 안정훈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유인하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인하도 날 원하고 있어.’

항상 알고 있었다. 유인하는 언제나 포기하고 싶어 했다. 항상 힘들어했다. 지금의 그를 봐라. 그가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 보통 사람들은 평생 가도 접할 수 없는 이 주거 환경, 좋은 물건들에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그가 원해왔던 그럴듯한 모든 것들을 다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안정훈이 원했던 것처럼 그가 주는 것을 당연하게 받으면서 의존하고 있었다. 환상적인 공생 관계다.

“알고 있었어. 너한텐 나밖에 없어.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너도 이제 알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안정훈은 유인하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그의 놀랄 정도로 여린 살을 계속 자극했다.

“아, 아으….”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유인하는 안정훈의 손목을 잡았다. 가슴을 만져지는 것뿐인데도 아래가 욱신거렸다. 유인하는 다른 손으로 다리 사이를 잡았다.

“아아, 하, 으….”

“하아, 인하야. 여기 기분 좋아?”

“아, 으, 아앗…!”

유두를 한 번 둥그렇게 돌리니 유인하가 허리를 뒤틀며 신음을 흘렸다. 기분 좋은 모양이다. 안정훈은 그렇게 소파의 뒤에서 앞으로 몸을 최대한 구부린 채 유인하의 뺨과 목덜미, 쇄골까지 천천히 입을 맞추며 내려가 그의 셔츠를 벌려 반대쪽 젖꼭지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왜 이런 곳도 이렇게 예쁘게 생긴 것인가.

“넌 최고야….”

안정훈은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혀를 내밀어 젖꼭지를 한 번 핥았다. 아주 여리고 부드럽고 맛있었다. 안정훈은 지금까지 유인하의 성기밖에 맛보지 못했다. 그의 온몸을 핥고 싶었다.

“아…!”

그의 젖꼭지가 단번에 수축했다. 안정훈은 얼굴이 새빨개져 이미 땀이 뺨을 따라 흘렀다. 유인하의 젖꼭지가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핥았다. 너무 부드러워서 여리고 여렸다. 조금 핥았다고 벌써 뾰족하게 솟아 움찔거리는 게 귀엽다. 그가 자신의 머리를 붙잡았다. 안정훈은 반대쪽도 남김없이 빨고 핥고 깨물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유인하의 것을 옷 위로 잡았다.

이걸 거의 3개월을 빨아댔다. 그가 어디를 좋아하고 어디를 싫어하는지 잘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안정훈은 옷 위로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지그시 잡은 후 부드럽게 문질렀다.

“하, 아…! 안정훈, 하아….”

유인하는 느끼면서 안정훈의 이름을 불렀다. 안정훈은 너무 열중하여 소파 너머로 거꾸로 꼬꾸라질 뻔했다. 젖꼭지를 만지던 손으로 재빨리 소파를 짚었다. 그리고 그대로 소파의 등을 넘어와서 소파에 앉아 있는 유인하의 다리 사이로 가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허벅지를 세워 여전히 유인하의 젖꼭지에서 혀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하얀 살결은 술과 쾌락으로 붉어져 있었다. 붉은빛이 도는 그의 젖꼭지를 입술로 문지르고 혀로 굴렸다. 유인하가 취기가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으, 아, 빨리 빨아, 이 새끼야.”

유인하는 안정훈의 정수리를 잡고 아래로 세게 눌렀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젖꼭지에서 입술을 떼고 헥헥거렸다.

“아아~, 왜애. 여기 맛있어. 여기 더 하고 싶어.”

“빨리 싸고 싶다고, 하아. 아파.”

유인하는 오른손으로 엉덩이에 대충 걸려 있는 바지와 속옷을 아래로 스윽 내렸다. 탱, 하고 유인하의 성기가 불쑥 튕겨 나왔다. 가슴을 핥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 걸까? 안정훈은 기뻤다가 아까 그와 전희를 나누고 있던 모델들이 기억났다. 그때의 질투심도 같이.

“아까 그 여자 마음에 들었어?”

“누구.”

“아니면 남자?”

“누구….”

유인하의 목소리에 약간 짜증스러운 기색이 섞였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것을 오른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선단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구멍에서 체액이 나와 매끈하고 잘생긴 귀두를 적셨다.

“아, 남자는 승원이 좀 닮았던데?”

“어쩌라고.”

“넌 도대체 걔가 왜 마음에 들어? 걔야말로 진짜 내숭덩어리야. 겉만 번지르르한 것뿐이라고.”

안정훈이 미리 그런 견제에 들어갔다. 유인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아, 씨발, 계속 쫑알댈 거냐? 할 거면 하고 아니면 꺼져.”

“여기 내 집인데.”

안정훈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제야 유인하의 것을 입에 물었다. 유인하는 나지막한 신음을 내며 안정훈의 복슬복슬한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귓가를 매만지는 그의 손이 기분 좋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것을 깊숙이 물었다. 처음엔 눈물 콧물을 다 쏟았던 딥쓰롯도 이제 제법 익숙해졌다. 안정훈의 도드라진 목젖이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으응, 하아….”

뜨거운 게 좋았다. 머리가 붕 뜨고 뭐든 기분이 좋게 느껴진다. 실없는 웃음이 계속 나온다. 술, 담배, 펠라…. 유인하는 입맛을 다셨다. 목이 말랐다.

“하아, 야, 내 담배 어디 있어?”

“으웁, 응? 담배?”

쮸릅 소리를 내며 안정훈이 벌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유인하의 바지에 들어있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바지에서 담뱃갑을 꺼내 유인하에게 주었다. 유인하는 그것을 받아 담뱃갑을 툭툭 쳐서 담배를 하나 꺼내서 입에 물었다. 안정훈은 그런 유인하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가 담배를 무는 모습은 언제나 섹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선이 담배에 닿아 있어 시선을 잘 눈치 못 채기도 하고…. 유인하가 담뱃불을 붙이고 시선을 들었을 때 안정훈은 시선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뭘 봐, 하고 날 선 목소리가 날아오진 않을까 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틀렸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얼굴을,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

정확하게는 두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눈동자만을 빤히 보았다. 이게 도대체 뭘까. 안정훈은 그것만으로도 숨이 멈출 것 같았다.

‘인하가 날 보고 있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온몸이 찌릿거렸다. 안정훈은 그대로 유인하와 눈을 마주친 채 다시 그의 것을 입에 물었다. 이대로 안정훈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인하도 안정훈의 눈을 보는 것을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눈을 깔라고 위협하지도 않았다. 계속 바라보며 안정훈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눈을 마주치는 게 좋았다. 안정훈은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유인하의 것을 혀를 내밀어 노골적으로 핥아 올렸다.

“기분 좋아?”

“하아, 어….”

유인하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하지만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어디가? 여기? 아니면 여기?”

츄릅. 짭. 쪼오옥. 안정훈은 일부러 더 야한 소리를 냈다. 혀끝으로 첨단을 파듯이 핥다가 이내 기둥을 우물거리며 이의 표면으로 쓸었고 밑으로 내려가 고환을 빨았다. 한쪽씩 입안에 담아 쪼옥쪼옥 사탕을 빨듯이 빨았다.

“하아, 으읏, 윽….”

유인하는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애가 타는 듯한 얼굴이었다. 화려한 미모를 가진 유인하였다. 그 눈빛이 경계를 담으면 칼처럼 날카롭고 호기심을 담는 것만으로도 유혹적이다. 거기에 쾌락은… 뭔가 흐드러진다.

“더… 기분 좋게 해줄까?”

안정훈은 다시 유인하의 것에 얼굴을 비볐다. 색깔마저 이쁘다. 새하얀 피부답게 거의 하얀색에 가까운 분홍색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안정훈은 잠깐 마른 침을 삼키며 벌건 눈을 했다. 안정훈은 그대로 유인하의 맨 허벅지를 스윽 쓰다듬으며 엉덩이를 쥐었다. 피부가 굉장히 촉촉하다. 탱탱해서 쥐는 느낌이 아주 좋다. 그리고 엄지로 아래를 받치며 왼쪽 허벅지를 들었다.

“하아….”

안정훈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벌건 얼굴을 바로 유인하의 치부에 들이밀었다가 유인하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하지만 유인하가 인상을 찌푸릴 것 같자 얼른 혓바닥을 댔다. 한 번 핥고는 눈치를 보듯 유인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뜨거워.”

놀랍게도 유인하의 불평은 그걸로 끝이었다. 아까 그 이승원을 아주 약간 닮은 남자 모델과는 진짜 할 생각이었던 걸까?

‘열 받네?’

그렇게 비싸게 굴더니 이름도 모르는 그런 쌍놈한테 넘어간단 말인가?! 안정훈은 유인하의 하얀색에 가까운 옅은 분홍빛 구멍을 혀로 한 번 더 아래에서 위로 핥아 올렸다.

“아….”

유인하가 움찔했다. 그의 늘씬한 허벅지가 안정훈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그 무게감이 야했다. 하얀 엉덩이 사이로 천국의 입구가 보인다. 안정훈은 개처럼 헐떡거리며 정신없이 구멍을 빨았다. 다시 유인하의 젖꼭지를 손톱으로 튕기며 성기를 잡고 있는 오른손도 잔뜩 움직였다. 오른손에 꽉 차게 유인하의 것이 섰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잔뜩 났다.

“하아! 아, 으응, 하으으, 아, 좋아, 좋아….”

유인하는 몸을 들썩거리며 간혹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쾌락을 찾았다. 다리를 M자로 벌리고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전부 드러낸 채 느끼고 있는 유인하는 몹시나 예쁘고 야했다. 안정훈의 턱으로 땀이 방울방울 흘렀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안정훈의 것도 터질 것만 같이 부풀어 있어서 아팠다.

‘하아, 빨리 하고 싶어! 넣고 싶어! 넣어서 엄청 흔들고 싸고 싶어. 안에 잔뜩. 엄청 느끼게 해서 울릴 때까지. 밤새도록…!’

아니야. 아직 때가 아니잖아?

안정훈은 멈칫했다. 씨발, 뭐가? 뭐? 뭐? 빨리 덮쳐버리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따졌다. 하지만 역시나 뭔가가 안정훈의 목줄을 당겼다.

그런 걸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참았다고? 그런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어. 이딴 건 고등학교 때도 할 수 있었다고.

정신이 없는 유인하를 건드리는 건 처음도 아니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유인하가 잠들거나 취하면 안정훈은 가끔 그의 이부자리에 들어가 그를 몰래 만지곤 했다. 하지만 한 번도 큰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 안정훈이 원하는 건….

[난 너 없이 못 살아.]

“헉…! 으윽….”

손길이 닿기도 전에 유인하는 이미 흥분했다. 안정훈과 닿을 것을 기대한 것만으로도 그 아름다운 몸이 만개하였다. 그리고 그는 안정훈의 가슴을 거칠게 밀고 올라타 새하얀 피부와 은밀한 속살을 내어주며, 그 칼날 같은 눈빛마저 애절하게 녹아 애원조로 말한다. 널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어. 그렇게 스스로 상대에게 모든 것을 바치며 마음을 유혹하는 게 유인하가 되는 것이다.

“으윽…!”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상상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지나가듯 잊어버려 단 한 번도 기억을 남긴 적이 없었다. 안정훈은 순간 깜짝 놀라 옷 위로 자신의 것을 꽉 쥐었다. 사정하고 말았다.

“뭐야….”

안정훈의 애무가 멈추자 유인하가 취한 어조로 웅얼거렸다.

“허억, 헉…. 아, 아무것도 아니야. 으윽….”

안정훈은 유인하의 회음부에 코를 박은 채 잠깐 말을 더듬었다. 뜨거운 숨으로 그의 살을 덥혔다.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허벅지를 한 손으로 꽉 잡고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으으으~, 하는 알 수 없는 신음을 냈다. 그리고 벌건 얼굴로 고개를 들고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유인하의 눈빛은 완전히 흐려져 있었다.

‘그래, 아직은 아닌 거지? 아직은 아닌 거야….’

너무 흥분해서 모든 것을 망치는 것은 저번 한 번으로 족했다. 그때는 이판사판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간이 있었다. 충분히. 안정훈은 유인하의 가장 민감한 성감대를 전부 만지며 정성을 들여 빨았다. 혀끝을 구멍에 댔다 뗐다 하니 유인하가 남자의 가슴을 찌르르 흔들 정도로 야시시한 신음을 흘렸다.

“하아…. 간지러워.”

유인하는 마치 칭찬을 하듯 안정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안정훈은 다시 시선을 들어 유인하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안정훈은 거칠게 숨을 헐떡거리며 유인하의 위로 타고 올라갔다.

“으윽, 오늘은 여기까지만….”

안정훈은 유인하의 것을 잡고 있던 오른손으로 그의 회음부를 더듬어 내려가 그의 비부를 살짝 만지고는 바로 안에 중지를 찔러 넣었다.

“아으…!”

“인하야….”

안정훈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의 하얀 피부는 만지면 촉촉하고 매끈하고 탱탱하다. 그의 젖꼭지는 생각보다 너무나 여려 가학심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안은…. 이번엔 유인하가 곧장 그의 팔을 잡았다. 싫은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안정훈은 섹시한 얼굴로 유인하의 이마에 자신의 것을 댄 채 입맛을 다셨다. 촉감이 예술이다…. 안정훈은 손가락의 방향을 바꿔 배 쪽으로 꾹꾹 누르며 손가락을 빠르게 왔다 갔다 했다.

“아, 아…. 아? 아으, 그거 뭐야.”

한순간 유인하가 움찔하며 허리를 뒤틀었다. 유인하는 소파의 등을 왼손으로 잡고 엉덩이를 완전히 안정훈의 쪽으로 내민 채 허리가 꼬아져 있었다. 매우 섹시한 포즈였다.

“이러니까 네가 나쁜 거잖아…. 인하 네가 나빠. 나빠….”

안정훈은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유인하의 어깨에 입을 쪽쪽 맞췄다. 역시 그의 안은 비좁고 뜨겁고 사나웠다. 동시에 매끄럽고 탄력 있고 푹신했다. 너무나 유인하다웠다. 환상적이다. 훈은 감탄하고 약간은 떨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 구멍 진짜 쩐다….”

“변태 새끼.”

유인하가 그렇게 말하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안정훈은 고개를 들고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술에 취해 있었지만 눈을 마주치는 그 눈빛이, 그의 매력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아, 하고 부르르 떨었다. 안정훈은 약간 울 것 같으면서도 황홀한 얼굴을 했다.

“인하야, 나 너무 좋아. 네가 너무 좋아. 사랑해. 사랑해.”

안정훈은 유인하가 앉아 있는 소파 위로 불쑥 올라왔다. 그의 허벅지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각각 얹었다. 그리고 안정훈은 유인하를 꼭 끌어안았다.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가. 유인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자신이 아닌 남에게 어떤 마음을 쏟는 메커니즘을 잘 모르겠다. 어째서인지 항상 남의 진심에 차가워진다. 하지만 그런 그도 누군가에게 열중했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는 그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고 여겼다.

‘이 개새끼가 하다 말고 뭐 하는 거야?’

유인하는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유인하보다 덩치가 큰 그라서 꽉 끌어안으니 그의 어깨에 턱이 약간 들렸다. 안정훈의 품은 언제나처럼 뜨겁고 푹신했다. 뭔가 쏙 안기는 느낌이었다. 그의 팔이 유인하의 등과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술에 취한 유인하는 그의 애무가 멈춰 성적 자극이 끊기자 아주 조금 정신이 들었다.

기억에 있었다. 이 느낌이. 이렇게 뜨거운 품에 안겼던 적이 있었다.

“술.”

유인하가 갑자기 말했다. 술이 좀 더 필요했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정면에서 끌어안은 채 그의 엉덩이에 다시 손가락을 넣었다. 이번엔 두 개를 넣은 상태였다. 안정훈이 고개를 뗐다.

“술 줄까?”

“하으, 아니, 그거, 거기, 거기 좀 더….”

배 안쪽이 찔리는 게 이렇게 자극적인 것인지 몰랐다. 바로 사정할 것 같아서 술이 필요 없었다. 안정훈의 두껍고 긴 손가락이 배 쪽을 세게 꾹꾹 눌렀다. 그것만으로도 자꾸 뭔가 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긴장되었다. 참을수록 더 나올 것만 같다. 그래서 더 긴장되었다. 이 나이에 이런 곳에서 실례를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안에 들어온 것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서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안정훈은 그의 귓가에 코를 비비다가 이내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여기 기분 좋아?”

“하아….”

유인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좀 더 기분 좋게 해줄까?”

“아, 아으, 으응, 어떻게…?”

유인하가 저절로 엉덩이를 움직여 앞을 안정훈의 아랫배에 대고 문지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안정훈의 손가락을 조였다 풀었다 했다. 안정훈은 깜짝 놀라 그의 엉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손가락을 물고 있는 그 예쁜 엉덩이다. 그의 얼굴이 벌게졌다.

‘참자참자참자참자참자참자!!’

안정훈은 눈을 땡그랗게 뜨고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인내했다. 하지만 역시 힘들었다. 안정훈은 자신의 바지와 팬티를 급하게 내렸다. 그의 자지가 튀어나와 유인하의 아랫배를 쳤다. 귀두의 아랫부분이 가장 두터워 아래로 휜 것처럼 보였다. 유인하가 움찔하더니 그대로 아래를 쳐다보았다. 안정훈은 바로 저자세가 되어 빌었다.

“그냥, 그냥 이렇게만 할게. 하게 해줘. 응? 응응?!”

안정훈은 간절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것과 자신의 것을 같이 잡았다. 유인하가 뭐라고 하기 전에 그대로 같이 비비기 시작했다.

“아앗! 하아…!”

술 최고다. 그를 가장 빠르게 타락하게 만든 건 술이었다. 유인하는 아찔한 얼굴로 계속 아래를 쳐다보았다. 안정훈은 혼신의 힘을 다해 두 개를 같이 잡고 마구 흔들었다. 오른손은 여전히 유인하의 구멍을 쑤시고 있었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양어깨를 잡고 허리를 꿈틀거렸다. 안정훈이 유인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서로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겹쳐졌다. 조를 때와 달리 낮고 섹시한 목소리를 냈다.

“하아, 기분 좋아?”

“흐으, 아….”

유인하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느끼고 있었다. 대답이 필요 없었다. 안정훈은 완전히 홀린 얼굴로 유인하를 소파로 밀어붙였다. 서로의 이마가 닿고 코와 코가 겹쳤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뺨에 얼굴을 묻은 채 끙끙거렸다.

“너무 좋아. 너무 좋아.”

서로의 성기를 맞대고 비비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만 같았다. 또 금방 사정할 것 같다. 유인하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그는 항상 그랬다.

“으응, 하아, 아, 아…!”

뜨거웠다. 다른 사람의 성기와 겹쳐져 섹스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유인하는 쾌락이 흐트러진 눈빛으로 아래만 쳐다보았다. 단전부터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 열기는 뇌에 영향을 미쳐 유인하를 더욱 바보로 만들어주었다.

“으으응, 기분 좋아….”

유인하는 얼굴을 붉히고 안정훈의 어깨를 안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퍼렇게 핏줄이 솟은 안정훈의 손이 두 개의 기둥을 잡고 마구 비비다가 손을 멈췄다. 안정훈은 그대로 사정할 뻔했다.

“아, 아으, 하….”

안정훈은 순간 온몸을 떨며 겨우 참고는 유인하의 등 너머로 엉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유인하의 엉덩이가 그의 손가락을 아주 꽉 물고 있었다. 안정훈은 고개를 약간 떼고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유인하는 취해서 허공만 보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예뻐….”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순간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머리카락과 뺨을 쓰다듬었다. 유인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 손에 얼굴을 문질렀다. 안정훈은 깜짝 놀라서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또. 마치 유혹하는 것 같다.

“기분 좋아….”

유인하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담겼다. 술기운이 더욱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몇 가지 감각이 술 때문에 마비되었다. 아마도 그래서 그런 모양이었다. 머리가 더욱 멍청해졌다.

그 남자의 무릎 위를 알몸으로 범하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그 남자라도 깜짝 놀라겠지. 섹스를 하면 그 남자라도 느낄까? 그런 걸 궁금하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그는 크고 뜨거운 손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좋은 손이다. 그의 품도 아주 뜨끈뜨끈하다. 고양이가 딱 좋아할 만한 체온이었다. 그의 품에서 쓰다듬어지며 마음껏 그르릉거리면 기분이 너무나 좋아서….

평소에는 그 남자를 떠올려본 적이 별로 없었다. 혹시라도 그럴까 봐 술을 마시고 섹스를 했다. 그러면 더 이상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즐거우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다.

“하아, 인하야, 잠깐만, 움직이지….”

유인하는 안정훈의 입을 왼손으로 꽉 잡아서 막았다. 그대로 움찔움찔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직접 자신의 것을 안정훈의 것에 붙여 문질렀다. 유인하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아, 뜨거워…. 머리, 머리 쓰다듬어줘…. 천천히….”

유인하는 안정훈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졸랐다. 엄마를 닮은 인형의 품에 파고드는 새끼 원숭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다. 그가 이러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뭔가 떠오를 뻔했다. 하지만 그걸 기억하기엔 좀 많이 당황했다. 사정을 참는데도 급급했다. 그는 원래 머리를 쓰다듬는 걸 싫어하지 않는가. 하지만 어제도 그렇고…. 안정훈은 숨을 죽이고 자신의 목덜미에 파고들어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고 스스로 엉덩이를 움직이고 있는 유인하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원하고 있었던 것인가? 너무나 기뻤다.

“인하야, 너무 좋아. 너무 좋아….”

이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이제는 정말 나밖에 없지 않냐고. 하지만 그가 입을 막아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대신 안정훈은 그대로 유인하를 꽉 끌어안았다. 유인하는 하아아, 하면서 혼이 빠지는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아랫배가 엄청나게 당겼다. 자지가 터질 것만 같다. 손가락을 조이는 그의 안은 뜨겁고 매끈하고 질척거렸다. 안정훈의 얼굴로 땀이 흘렀다. 안정훈은 그대로 허리를 강하게 들썩거리며 유인하의 박자에 맞춰 서로의 성기를 비볐다. 둘 다 체액이 잔뜩 나와 엄청 미끌거렸다.

처음에 안정훈은 어떻게든 유인하에게 잘해주고 복종해서 그의 애정을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리고 말을 잘 들어도 유인하는 안정훈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초조했다. 분명히 그에겐 자신밖에 없는데. 그래서 고백을 하고 모든 것이 전부 망해버리자 그냥 유인하를 사냥해서 덮치려고 했다.

하지만 안정훈이 원하는 게 그것뿐이었다면 진작에 덮쳤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기회는 지금까지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를 가지고 싶었다. 그가 자신 없이 못사는 인간이 되길 바랐다. 자신처럼.

안정훈도 이제 유인하가 왜 이렇게 자신에게 특별한지 잘 몰랐다. 정말로 17살의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얼굴이야 엄청 예쁘지만 성격은 개판이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그냥 좋은 것이다. 그냥 좋았다. 그러니까 미치는 것이다.

“하아, 하….”

“으응, 으으응, 하으, 아…!”

젊은 두 육체가 뒤엉켜 쾌락을 구가하고 있었다. 예쁜 애는 취해 있었고 상대는 거기서 자신의 이점을 찾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입가에 입을 맞췄다. 뺨이나 턱이나. 입술에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커다란 소년 같은 안정훈이었다. 그는 멍청한 얼굴로 유인하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첫 키스는 네가 해주는 게 좋아….”

왜 이럴까, 난? 진짜 모르겠다. 그걸 안다면 안정훈도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동화 같은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 사람 같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양 엉덩이를 잡고 서로의 앞을 맞대고 마구 돌렸다. 이런 건 해본 적도 없으면서 본능적이었다. 정말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응? 인하야? 해줘. 해줘….”

안정훈이 졸랐다. 아아, 그는 바로 이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가 되는 느낌. 마음이 통하는 기쁨.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순간은 수없이 이어질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안정훈은 그의 뺨에 코를 비볐다. 유인하도 자신을 마주 끌어안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안정훈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애정을 확인했다. 안정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그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서로밖에 없다는 듯했다.

“하아….”

유인하가 고개를 뒤로 꺾으며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아래가 완전히 흥건해졌다. 타인과 피부를 맞대는 게 이런 거였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때보다 기분이 더 좋았다. 지금은 그 이유까지 생각해볼 여력은 없었다. 섹스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건 머리가 더 멍청해졌다는 말이다. 유인하는 그게 좋았다.

‘멍청한 건 좋은 거였어….’

그래서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유인하는 자신의 머리를 감싼 그의 손에 얼굴을 비비면서 같이 엉덩이를 움직였다.

“흐응, 하으으, 나올 것 같아. 아, 아…! 아…!”

유인하는 온몸을 움찔거리며 앞뒤로 흔들며 못 견디겠다는 목소리로 신음을 흘렸다. 그가 얼마나 느끼고 흥분하고 있는지 여실히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것만으로도 쌀 수 있었다. 안정훈은 깜짝 놀라서 그를 꽉 끌어안고 바로 사정하고 말았다.

“으으윽! 아윽…! 인하야…!”

안정훈은 유인하를 꽉 끌어안고 크게 허리를 털어 강하게 몸을 눌렀다. 유인하는 그렇게 소파의 등에 꽉 눌려서 자신의 배에 뜨거운 것이 마구 튀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것만이 아니었다.

“하아…. 아아….”

뜨거워. 유인하는 희미하게 눈을 뜨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것에서도 하얀 체액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분의 헐떡임이 유례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땀이 뒤섞이고 쾌락도 섞였다.

“…….”

서로를 끌어안은 채 열기가 서서히 식으며 유인하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은 자신에게 당황했다. 뭔가 속에서 울컥했다. 심장이 무언가로 푹 찔렸다. 아팠다. 등과 팔에 식은땀이 어렸다.

‘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남자랑 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기분도 좋았다. 뭘 그렇게 하나하나 자존심을 상해했는지 모르겠다. 이 정도라면 그냥 펠라나 다름없었다. 손해 보는 것 하나 없이 봉사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기분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좋았다.

유인하의 등에 아주 뜨겁고 커다란 손이 올라와 있었다. 상대의 품도 몹시나 뜨거웠다. 그 손의 느낌이나 품의 느낌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것 때문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술에 취해 멍청해진 머리로 열심히 부정했다.

‘그건 끝난 일이야. 그런 시시한 남자,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죽이려고 했고 그 남자도 죽이려고 했는데 결국 아무도 못 죽인 시시한 일일 뿐이다. 다 끝난….’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미련 같은 것도 없었다. 물론 안정훈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나 크고 뜨거운 손은 간혹 그 남자를 떠올리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둘은 형제니까. 안정훈이 펠라치오를 해줄 때면 가만히 그의 눈동자를 보곤 했다. 그냥, 그냥 취향 같은 것일 테다. 그 남자를 떠올려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래, 그런 것뿐이야.’

술, 그래, 술을 마시자. 유인하는 그제야 안정훈을 밀어내며 일어났다. 안정훈은 홀린 얼굴로 유인하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인하야, 너무 좋아. 사랑해….”

온몸이 쾌락의 여진으로 떨리고 있었다. 지금도 몇 번이고 연달아서 사정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추구하던 상대였다. 끝까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감동적이었다. 이런 걸 하다니. 내가 인하랑 이런 걸….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은 없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이런 건 유인하 밖에 없었다.

“넌 내 거야. 내 거야….”

떨어지기 싫었다. 안정훈은 허우적거리듯 계속 유인하를 끌어안고 들러붙었지만 유인하는 기어코 그를 떼어내고 아일랜드 식탁으로 향했다. 안정훈은 귀도 꼬리도 축 처진 커다란 강아지처럼 풀이 죽은 얼굴로 유인하의 뒷모습을 보며 낑낑거렸다.

“인하야~.”

안정훈이 투정을 부리듯 유인하의 이름을 불렀다. 유인하는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술을 찾았다. 거기엔 유인하를 위해 안정훈이 준비한 양주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유인하는 얼음을 잔에 담고 위스키를 따랐다. 독하고 아주 좋은 술이다. 한 번에 전부 들이켰다. 속으로 뜨거운 용암이 흘렀다. 그리고 한 잔 더 따라서 다시 마셨다. 충분했다. 잔을 든 손으로 입가를 닦으며 다시 취할 대로 취한 얼굴로 안정훈을 돌아보았다.

“한 번 더 하자.”

아니었다. 그러니까 괜찮잖아? 유인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

눈을 떴을 때 느낀 것은 엄청난 숙취였다. 유인하는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

이건 정말 죽고 싶을 정도의 숙취였다. 그리고 고관절이 말도 안 되게 욱신거렸다. 유인하는 한 손을 이마에, 한 손으로 허벅지를 잡고 끙끙거렸다. 어젠 위스키만 마신 게 아니었다. 애초에 유인하는 별로 술이 강하지도 않다.

위스키가 필요했다. 숙취를 달래야 했다. 다리가 저려서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술에 취해서 어디 부딪치기라도 한 것일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인하는 겨우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겨우 눈을 떴다. 유인하가 지내는 방이 아니라 안정훈의 방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어?’

게다가 몸이 이상하게 허전했다. 알몸이었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안정훈이 세상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다. 그도 알몸이었다. 그제야 복부와 엉덩이, 허벅지가 체액의 범벅인 걸 알아차렸다.

“…….”

굳이 이불을 들쳐볼 필요도 없었다. 유인하는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자고 있는 안정훈의 위에 올라탔다.

“으, 응? 으응…. 인하야….”

안정훈은 여전히 잠에 취한 채 유인하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팔이 이불 안에 묶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유인하가 말했다.

“이 꽉 깨물어라.”

“엉…?”

퍽! 그대로 유인하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안정훈의 왼쪽 광대에 주먹을 꽂았다. 이가 문제가 아니다. 광대뼈가 부러질 뻔했다.

“우악! 이, 인하야! 자, 잠깐만! 왜! 악! 아파!”

유인하의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는 맞아본 사람만 안다. 안정훈은 갓 잡은 생선처럼 펄떡거리면서 겨우 유인하를 떨쳐냈다.

“야 이 씹새끼야, 뭐? 내 말이면 다 듣겠다고? 누가 이런 거 하고 싶댔냐!”

화가 난 유인하는 무섭다. 안정훈은 분명 정신은 번쩍 들었지만 무엇이 문젠지 알 수가 없어 어벙벙하고 억울한 얼굴로 맞은 얼굴을 잡고 있었다.

“그러고 또 이런 거면 그냥 나한테 맞아 죽고 싶다는 거지? 내가 못 할 것 같냐?”

그러고 유인하가 다시 달려들자 안정훈은 겁이 나서 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유인하의 몸통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그를 뒤에서 끌어안아 양팔을 결박했다.

“왜, 왜, 왜 이래, 인하야? 왜? 세, 섹스한 거 때문에? 그거, 그거 네가 하자고 하, 한 건데….”

“뭐?”

안정훈은 습관적으로 말을 더듬었다. 유인하의 앞에서 긴장하면 꼭 병신 같이 군다. 원래는 불쌍해 보이려고 일부러 이랬는데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유인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최대한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안정훈은 입을 꾹 다물고 유인하와 눈을 마주쳤다. 무엇을 읽은 것일까? 일단 진짜라는 것을 안 것인가? 유인하는 몸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안정훈도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그를 놔주었다.

“기억 안 나.”

유인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나발인지 지금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게 제일 문제였다. 안정훈이 입을 떡 벌렸다.

“거짓말!”

“몰라, 씨발. 아, 술이나 가져와.”

안정훈은 유인하의 눈치를 보면서 팬티를 입었다. 그리고 얼른 나가서 위스키를 따라왔다. 그 사이 유인하도 옷을 입었다. 유인하는 그에게서 잔을 받아 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이미 취기가 살짝 오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기어오르지 마라. 다시는 이런 일 없다.”

유인하는 꼬인 목소리고 그렇게 안정훈에게 경고했다. 안정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알았어, 인하야. 난 네 말대로만 하는 거 알잖아.”

전에는 안정훈이 자신을 덮치려 했다고 칼로 찌르기까지 한 유인하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다면서 괜찮은 것일까? 물론 끝까지 한 건 아니지만…. 유인하는 심드렁한 얼굴로 밖에 나가더니 자신의 방으로 갔다. 위스키를 마저 마시고 욕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목덜미나 가슴, 배, 허벅지 등 가리지 않고 온통 울혈이 잔뜩 남아 있었다. 유인하는 헛웃음이 나왔다. 엉덩이가 안 아픈 걸 보니 거기까진 안 한 걸까? 그것도 알 수 없다.

‘도대체 남자 몸에 뭐 별볼일이 있다고.’

이해가 안 된다. 뭐,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무 상관도 하지 않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돈도 조금은 있었다. 죽을 생각도 없었다. 대충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술….’

술만 있으면 됐다. 술을 마시면 일단 기분이 좋고 일어나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좋다. 유인하는 오늘 있는 스케쥴을 소화하고 또 술이 떡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뭘 했는지도 누가 데려다준 건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인하야.”

약간 정신이 들었을 땐 현관에서 안정훈의 품에 안겨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유인하를 부축하고 있었다.

“물 줄까? 꿀물? 아니면 위스키?”

“위스키….”

“알았어.”

안정훈은 유인하를 부축하여 식탁이 있는 쪽으로 갔다. 그는 언제나처럼 유인하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게 뭔가 웃겼던 것일까. 유인하가 안정훈을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

“너 이제 잘하네~, 하하! 술 따르는 거 잘~ 어울린다!”

유인하는 술 때문에 기분이 좋아 그렇게 말하며 안정훈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렸다. 안정훈은 맞으면서도 웃으며 간사한 부하처럼 아부했다.

“안주는? 안주도 해줄까?”

제정신을 차릴 뻔했는데, 위스키를 마시니 도로 취했다. 유인하는 비틀거렸다. 지금 비틀거리고 있는 게 다만 그의 육신뿐만이 아닐 것이다. 안정훈이 그를 부축했다. 자신보다 커다란 남자에게 안겼다. 술에 취한 유인하보다도 더 뜨거운 손이 유인하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하아….”

기분 좋았다. 어쩌면 술보다도 기분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쭉 누가 머리를 만지는 게 싫었다. 칭찬이든 뭐든 누군가 함부로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건 깔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게 맞을 것이다. 누가 함부로 대기업 회장님 머리를 만지겠는가? 그런데도 지금은 기분이 좋았다. 그 손이 안정훈의 것일 뿐인 걸 아는데도. 안정훈이 유인하를 부축하며 방으로 데려다주려고 하니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유인하가 그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자신의 뺨에 댔다.

“인하야?”

유인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술에 취해 잠이 든 것일까. 그때 유인하가 고개를 약간 비틀며 안정훈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내 손이… 좋아?”

안정훈이 물었다. 그렇게 묻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더 두근두근했다. 이런 게 연애를 하는 기분일까? 좋아하는 애가 잔뜩 취하는 건 역시 두근두근한 일임은 틀림없다. 마음대로 해버려도 상대는 제대로 저항할 수 없다.

‘어제는 진짜 끝내줬지….’

안정훈은 알 수 있었다. 누구랑 해도 유인하랑 하는 것만큼 기분이 좋진 않을 거라는 걸. 그는 특별했다. 누구에게나 특별했다. 알고 있었다. 다들 유인하같이 생긴 애는 그것도 끝내준다는 걸 DNA 수준에서 알아챌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다들 짐승 같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거겠지.

또 하고 싶었지만, 더 하고 싶었지만 안정훈은 유인하가 좀 더 자신을 필요로 할 때까지, 정말로 자신이 없으면 못 살겠다고 매달릴 때까지 조금 더 참을 생각이었다. 그 과실이 얼마나 달콤할지. 이젠 상상도 하기 힘들다. 벌써 여기까지 왔다. 거기까지도 그렇게 긴 시간은 걸리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안정훈은 인내심이 강했다. 기다릴 수 있었다.

그래도 안정훈은 슬그머니 그와 몸을 더욱 붙였다. 이런 건 부처가 와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유인하 같은 애가 이렇게 흐트러져 있다. 그가 취했을 때 만지는 건 언제나 남들 몰래 부당한 이득을 보는 것처럼 짜릿하다. 눈을 감고 있는 그의 풍성한 속눈썹을 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안정훈의 손에 뺨을 비볐다. 안정훈이 반대쪽 뺨에 입술을 눌리자 아, 하고 유인하고 가느다란 신음을 냈다.

“기분 좋아?”

안정훈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인하는 잔뜩 취한 멍한 눈빛으로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하고 싶어.”

그러자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참겠다던 안정훈의 결심과는 무관하게 둘 다 아래만 벗은 채 다시 서로의 것을 함께 쥐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등을 벽에 대고 헐떡거리며 어디서 본 적도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유인하는 술과 섹스에 잔뜩 취해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느낄 때마다 고개를 드는 타이밍, 벌어지는 입술과 뜨거운 숨결, 지그시 감는 눈매. 모든 게 섹시했다.

그는 자신의 뺨을 감싼 안정훈의 손을 위로 꽉 감싼 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했다. 머리를 뜨겁게 해서 아무런 생각도 못 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원대로 아주 뜨거워졌다. 그 핑계로 뇌는 또다시 무책임한 환상을 틀기 시작했다.

그 남자의 쓰다듬는 손길은 무심하고 부드러웠다. 그도 다른 사람처럼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즐거움을 얻는 것일까? 고양이의 부드러움이나 촉감을 누리면서? 손을 떨치면 억지로 따라붙지 않는다. 하지만 다가가면 다시 쓰다듬어주었다. 자신의 고양이가 기분이 좋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듯했다. 금욕적인 애정이었다. 그래서 나비는 안심하고 그의 애정을 즐길 수 있었다.

[사랑해.]

아, 맞아. 그런 말도 했지. 그런 말도 들었어. 그때는, 그때는…. 아, 기분 좋아…. 유인하는 칠칠치 못하게 느끼는 대로 젖고 있었다. 이미 단정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누가 쓰다듬어줘도 상관없는 것이다. 기분이 좋다면 뭐든지 좋았다. 아마 당장 안정훈이 박는다고 해도 기분이 좋다면 유인하는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과 다르게. 그는 이미 가지고 있던 많은 잣대를 잃어버렸다.

“아, 으으응, 아….”

유인하가 잔뜩 느끼면서 또 사정했다. 이렇게 취했으면서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 안정훈은 너무나 좋은데도 심각하게 유인하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괜찮나? 또 해도?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은 건가?’

하, 너무 좋으니까 불안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이런 짓을 하려고 했다고 패려고 하더니 밤에는 유혹이라. 하여튼 유인하의 변덕은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문제는 그게 안정훈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은, 하아, 누구누구 만났어? 이런 거 한 건 아니지?”

“시끄러….”

안정훈은 그가 이러다가 다른 남자도 아무렇지 않게 꼬시는 것이 아닌가 잠깐 걱정이 되었다. 이런 건 자신뿐이었으면 좋겠다. 안정훈은 한 손을 유인하에게 뺏긴 채 다른 손으로 유인하의 것과 자신의 것을 잡고 격하게 비비며 물었다.

“왜, 하아, 계속, 하게, 해, 주는, 거야? 싫다고, 윽, 했잖아.”

찹찹, 퍽퍽, 쩍쩍쩍!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는 크든 작든 아주 야했다. 안정훈의 것은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거의 말만 했다. 그런 게 딱딱하게 서서 민감한 살에 격하게 마찰했다. 안 그래도 뜨거운데 그 마찰열에 살이 익는 것 같았다.

“아으으, 으으응…! 하아, 아, 아, 하아….”

유인하는 또 갈 것 같아서 끙끙거렸다.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자극이 되는 것이 힘들기도 했다. 쾌락에 젖은 얼굴은 고통스러운 얼굴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안정훈은 그가 취해서 제대로 듣지 못했나 싶어 다시 물었다.

“응? 왜 하게 해주는 거야? 응? 나 좋아? 나 좋아해? 나 좋지? 나 없인 이제 못 살 것 같아? 어때?”

“하아….”

뜨거운 열기에 유인하의 얼굴과 온몸으로 땀이 흘렀다. 유인하가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닮…았어….”

“응?”

유인하는 아, 하면서 고개를 한 번 가로저었다. 그제야 술과 열기에 벌겋게 튼 얼굴로 안정훈의 눈을 보았다.

“어….”

유인하가 헐떡거리는 와중에 뜸을 들이듯 그렇게 답을 골라보는 듯했다. 그리고 대꾸했다.

“그냥?”

유인하는 자신의 답변이 썩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는 실실 웃었다.

“기분 좋은 거면 뭐든 좋아. 너 아니라도 상관은 없지. 하하….”

“그 말은 싫은데. 나뿐이라고 했으면 좋겠는데.”

안정훈이 조르며 어린애처럼 말했다. 서로의 눈이 서로 가까이 마주쳤다. 안정훈이 유인하의 멍한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유인하는 그래, 그래, 하며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안정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그의 뺨을 한 대 때리며 팍 밀었다. 약간 아플 정도였다. 찰싹 하는 소리가 났다.

“대주는데 말이 많아. 닥치고 그냥 해, 병신 새끼야.”

안정훈은 아주 잠깐 고개를 돌린 채로 돌아오지 않았다. 손도 몸짓도 일시정지 상태다. 술에 취한 유인하는 안정훈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새카만 눈동자만이 이상한 빛을 잠깐 냈던 것 같다.

“뭐?”

화났으면 뭐 어쩌라고, 안정훈 주제에. 유인하는 쓰고 난 두루마리 휴지에게도 주지 않을 것처럼 싸늘한 시선으로 안정훈을 하찮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안정훈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 울상을 지었을 뿐이다.

“너무해.”

병신. 그리고 그 병신은 하던 것을 계속했다. 몸짓이 아주 격렬해졌다. 그때부터 머리를 지배하던 뭉근한 과거 혹은 환상은 사라졌다. 동물적인 교접만이 남았다. 안정훈이 유인하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고 바보 같은 표정을 했던 얼굴과 다르게 아주 어른스럽고 섹시하게 허리를 돌려댔다. 유인하는 헐떡거리느라 바빴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귀를 핥았다.

“그래서 좋아? 나한테 대주는 것도 할 만하지? 하아, 너 진짜 너무 좋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윽, 너무 좋아.”

안정훈이 혼이 나간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유인하의 엉덩이를 꽉 잡았다.

“여기만 대줄 거야? 여긴? 여긴 싫어? 하아, 난 하고 싶은데.”

“닥쳐. 으읏, 하아, 으응…!”

서로 비벼지며 질척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유인하의 표정이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술과 쾌락에 취해 잔뜩 풀린 얼굴에는 평소의 날카로움과 긴장은 느껴지지 않는다. 눈썹과 눈매는 약간 고통스러운 듯했다. 입가는 쾌락을 그렸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빵 터질 것 같은데 지금은 자지도 터질 것 같다.

‘하아, 그냥 박아버릴까?’

원래 기회가 있을 때 누구든 최대한 따먹는 게 제일 이득이지. 유인하는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위스키를 물처럼 마셔대고 있었다. 지금까지 따먹으려면 골백번도 넘게 따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참았었지만…. 어제 선을 하나 넘었다. 참기가 힘들다. 너무 힘들었다. 어제 살짝 맛보았던 그의 구멍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기 때문일까? 그런 곳에 자신의 것이 들어간다는 상상만으로도, 아~, 벌써 죽을 것 같다.

“나밖에 없다고 말해….”

안정훈이 유인하의 귀에 대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속삭였다. 유인하가 흠칫했다. 고막을 깃털로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나 없인 못 살겠다고 해봐. 박아줄게. 아무 생각도 못 할 정도로 해줄게. 죽을 정도로 기분 좋을 거야….”

“하아…. 으윽.”

유인하가 잠깐 입을 뻐끔거렸다. 안정훈은 세상에 마치 유인하밖에 없다는 듯이 그에게 열중해서 몸을 딱 붙이고 그의 멋진 광대에 입술을 붙인 채 누군가 들으면 아래가 쑥 빠질 만큼 섹시한 신음을 냈다.

“응…? 하자고…?”

안정훈이 유인하의 엉덩이를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륵 허벅지로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확 하고 그의 다리를 들어 올려 야한 자세로 만들었다. 서로의 것을 맞붙여 비비고 있던 게 그때 딱 떨어져 상대의 회음부와 엉덩이 사이를 미끄러져 들어갔다.

“하아….”

안정훈은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도 완전히 맛이 간 벌건 얼굴이 되었다. 유인하의 얼굴을 만지고 있던 손을 떼고 두 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쪼갤 듯이 꽉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유인하의 엉덩이골에 자신의 남성기를 비비며 스마타를 하기 시작했다.

“미끌미끌해. 이대로 들어갈 것 같아….”

유인하는 안정훈에게 반쯤 들린 채 한 손으론 안정훈의 어깨를 잡고 한 손으론 자신의 것을 쥐고 수음에 몰두했다. 이미 인사불성에 가까워서 안정훈이 뭘 하든 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유인하는 언제나 경계심이 많았다. 스스로가 가치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마 그 사실을 까먹은 것이 분명하다. 지금처럼 이렇게 경계심은커녕 잡아 잡수, 하고 내놓는다면 솔직히 누가 그를 안 건드리겠는가. 이건 그가 나빴다. 언제나 나쁜 것은 유인하였다. 안정훈은 그대로 유인하의 엉덩이살이 빨개지도록 거칠게 자신의 것을 마찰했다.

“으윽, 헉, 넣고 싶어. 아, 젠장. 아윽.”

안정훈은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마구 하고 있었다. 이대로 미끄러져서 그냥 들어가 버려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유인하는 금방 갈 수가 없어 짜증이 났다. 그래서 약간 정신을 차렸다.

“씨발, 좀 조용히 못 하냐? 집중이 안 된다고.”

유인하가 졸린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안정훈은 헉, 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정신을 잃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도 괜찮았던 걸까. 방금과 달리 안정훈은 다시 숫된 소년처럼 어수룩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인하야, 나, 나 싸, 쌀 것 같아. 나와. 지, 진짜 나와.”

“아, 이제 더 깰 것도 없는데. 병신 새끼….”

유인하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유인하도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자신의 것을 손으로 잡고 마구 흔들었다. 더 오르가즘을 느끼고 싶었다. 더 바보가 되고 싶었다. 유인하가 무서울 정도로 야한 얼굴이 되어 잔뜩 느끼는 표정을 짓고 신음을 흘렸다. 안정훈은 헉, 하고 온몸을 굳히며 눈을 부릅떴다가 바로 질끈 감았다.

“아…! 아으…. 아우으…!”

안정훈은 그대로 크게 사정했다. 그가 먼저 가버렸다. 유인하도 가려고 직접 하다가 뭐야, 하고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사정을 하는 안정훈의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남자다웠고 섹시했다. 유인하는 그의 얼굴을 잠깐 보고 있다가 손바닥으로 턱 밀어버렸다.

“시시하긴.”

그가 비틀거리듯 떨어졌다. 열기가 가라앉았다. 하반신이 욱신거리고 찝찝하기만 하다. 머리는 어지러웠다. 술기운이 약간 떨어지고 두통이 느껴졌다. 유인하는 식당으로 가 다시 술을 조금 마셨다.

[닮…았어….]

유인하는 좌우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어지러움이 심해졌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 별로 안 닮았으니까. 안 닮았어.’

손 정도만 조금…. 아냐. 전부 지나간 일이야. 아무런 의미 없어. 아무런….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유인하는 땀에 젖은 티셔츠를 훌렁 벗고 위스키를 벌컥 한 잔 마셨다. 오른쪽 허벅지에, 누구도 알아보기 힘든 흉터만 제외한다면 흠 하나 없는 그의 강인하고 아름다운 육체가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리고 곧 정신을 잃고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

유인하는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기어코 요단강을 건널 뻔했다.

“아.”

안정훈은 유인하의 병실 문을 열기 전에 잠깐 짜증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쉽게 되는 게 없다.’

거의 다 왔는데. 고작 3개월이다. 그렇게 빨리 술 때문에 문제가 생길 줄이야. 평생 그렇게 처마시고 사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안정훈은 그렇게 속으로 불평불만을 말했다.

‘그럼 앞으로 인하한테 술 못 먹이는 건가?’

그럼 이제 어쩌지? 유인하의 대는 아직도 제법 남아 있다. 심지어 아르바이트로 한다는 뭔지도 모를 모델 일로도 뭔가 될 법한 유인하였다. 농담이 아니다. 언제고 선녀 옷을 입고 훌훌 날아가 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 정말. 술 안 먹이고 어떻게 따먹어. 그래, 위스키는 너무 독했다. 와인? 와인은 숙취가 너무 심해서 싫다고 그랬는데. 그냥 물만 좀 탈까….’

된다면 팔다리라도 부러뜨려서 묶어 놓고 싶다. 안정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드디어 병실의 문을 열었다.

“인하야, 인하야! 눈 좀 떠봐! 아으으…!!”

곡소리의 주인공은 한 사람뿐이었다. 유인하의 어머니다. 유인하의 아버지는 문을 연 안정훈을 보고는 아내를 말렸다.

“괜찮다잖아, 좀. 그만해.”

“괜찮긴 뭐가 괜찮아. 죽을 뻔했다는데 괜찮을 리가 있어?! 바보라도 되면 당신이 책임질 수나 있냐고! 우리 인하 공부해야 하는데!”

“아, 엄마, 그만해! 시끄럽게! 공부하는 새끼가 술을 그렇게 마셨다고? 엄마 바보야? 그냥 유인하 이거 쇼하는 거라고. 이제 이 새끼도 그냥 끝난 거야.”

유인하의 형인 유영하도 있었다. 남편의 말에도 악을 쓰던 그녀가 장남의 윽박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기만 할 뿐이다. 화가 난 목소리로 짜증과 윽박을 지르는 유영하는 이상하게도 입가에 비실비실 미소를 달고 있었다. 안정훈으로서는 약간 기시감이 드는 웃음이다. 유진하는 울긴 울었는지 벌건 눈으로 모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유인하가 핏기없는 얼굴로 누워 있었다. 언제나 새빨갛던 그의 입술도 지금은 파리할 뿐이었다. 안정훈이 들어오자 유진하가 고개를 돌렸다.

“정훈이 형….”

유진하는 코를 한 번 훌쩍이며 안정훈에게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형. 형 아니었으면 작은형 어떻게 됐을지….”

그의 형을 죽을 뻔하게 만들었던 그 술은 모조리 안정훈이 사준 것이다. 안정훈은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아니야. 괜찮아?”

“내가 뭘…. 작은 형이 걱정이지.”

확실히 유인하의 집은 유인하나 유진하를 제외하면 숨길 수 없는 천박함이 있었다. 심지어 유인하마저도 최근 몇 년 동안에는 티가 많이 났다. 조급함, 불안함, 자격지심, 질투, 공격성. 그 모든 게 그리는 피폐함의 색깔. 금전적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 하나 가족에게 기댈 수 없어 겨우 불러내 얘기할 수 있던 게 바로 안정훈이었다. 그렇게 외로움을 많이 타는데.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유인하에게 고작 안정훈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인하는 끝내주지.’

존나 예쁘니까. 그래도 강하니까. 그나마 이 상황에서도 안정훈에게 유인하를 챙겨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건 유진하밖에 없었다. 유인하가 술에 스러질 지경이 된 데에는 안정훈의 기여도가 굉장히 크다고 해도 그걸 유진하의 집안사람들이 알 리는 없지 않은가.

“야, 네가 불렀냐? 넌 이게 무슨 자랑이라고 남한테 알려?”

유영하는 갑자기 유진하의 팔을 주먹으로 한 대 퍽 쳤다. 유진하는 흠칫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한 번 더 봤다.

“아니…. 정훈이 형이 작은형 병원에 데리고 와준 거야…. 작은형이랑 제일 친한 친구야….”

유진하는 맞은 팔을 손으로 감싸며 반은 변명하듯이 반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안정훈은 속으로 오오, 하고 그의 말을 기꺼워했다. 제일 친한 친구. 사실은 그걸 원했던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그걸 원한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남들 눈에 자신이 유인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보인다는 건 기분이 좋은 일이다. 이것도 고등학교 시절의 유산일까. 진귀한 걸 가지고 있다는 기쁨일까. 유영하는 더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씨발, 뭔, 의사가 하는 말 너도 들었잖아?”

“아, 큰형….”

유진하가 말리는 기색으로 유영하의 팔을 잡았다. 그러니 유영하는 날 잡았다는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좆 같은 새끼! 하여튼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이때까지 잘난 척은 있는 대로 하더니, 수울~? 야, 이 새끼가 술 그렇게 마실 동안에 넌 안 말리고 뭐 했냐? 그래, 뭘 말리겠냐. 그냥 죽겠다고 마신 거겠지. 씨발, 웃기고 자빠졌네.”

꼴 좋다는 목소리였다. 유인하의 어머니의 곡소리는 더욱 커졌고 아버지는 돌아섰으며 유진하는 큰형의 팔을 잡고 거칠게 팍 흔들었다.

“큰형!”

“미쳤냐?”

유영하는 눈을 부라리더니 유진하의 머리를 주먹으로 퍽 쳤다. 유진하는 발끈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한 번 보고는 억울한 얼굴로 물러났다. 유인하라면 절대 안 참았을 것이다. 유진하는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미뤄두고 괜찮은 척, 역시나 가족들보다는 약간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는 안정훈을 다시 보았다.

“작은형…, 그렇게 많이 힘들어했어? 우리는 그냥 공부나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가족 중에 진상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유진하밖에 없는 듯했다. 안정훈이 대꾸했다.

“어? 어…. 아무래도…. 이번에도 또 과락 때문에 떨어졌잖아. 힘들지….”

유진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안정훈은 그의 얼굴을 보고 다른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다시 유진하의 얼굴을 보았다. 역시 유진하가 제일 많이 닮았지만 역시 또 그렇게까지 닮은 것 같진 않은 느낌이었다.

그 유인하의 동생이니 당연히 잘생겼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등이 굽고 안색이 어두우며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어려워한다. 누가 봐도 인상이 뚜렷하게 박히는(첫눈에 잡아먹힐 것 같은) 유인하의 동생이라고 보기에는 영 기운이 약하고 인상이 희미하다. 그에 반해 형이라는 유영하는 누가 봐도 기운이 흉흉하고 사납지만 생긴 것보다 훨씬 추하고 옹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아버지는 자존심이 강하고 가정에 무심한 인상이었으며 어머니는 기가 너무나 죽어 보였다. 10년 전에 비하자면 다들 제각각으로 특징이 강해졌다.

그렇게 그들은 제각각으로 무력하게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유인하를 바라보았다. 과연 유인하가 정신이 들어 있었다면 저런 눈빛으로 쳐다볼 수나 있었을까.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았을 때 유인하가 가만히 있었을까.

강하지 않으면 가족들에게도 괄시를 당하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지 않은가? 유인하가 그렇게 강했던 데는 이런 가족들도 한몫했을 것이다. 스스로 지킬 수 없으면 잡아 먹힌다.

‘뭐, 가족만 그런 것도 아니었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의 문젠데, 유인하를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유인하 자체가 남을 잡아먹으려고 든다. 그러니 약해지면 납작 엎드려 있는 인간들도 이제는 비빌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유인하가 착한 애들이랑 착하게만 어울렸다고 생각해봐라. 이런 일도 없지. 물론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지만.

‘착한 인하라….’

그건 그거대로 또 꼴리네. 안정훈은 그렇게 유인하와 그의 가족과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지랄하고 앉아 있네. 공부만 처한 새끼가 힘들긴 뭐가 힘들다고.”

말하다 보니 뭔가 분한 모양으로 유영하는 쿵쾅거리며 병실을 나갔다. 그러니 유인하의 어머니는 영하야, 하고 부르면서 안타까운 얼굴로 장남을 따라갔다. 유인하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착잡한 얼굴로 유인하의 모습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놈의 불효자식….”

그리고 그는 유진하에게 당부했다.

“네가 좀 있어라. 나는 네 엄마랑 형 데리고 일단 집에 갔다가 내일 아침에 오마.”

이미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이었다. 그들도 소식을 받은 건 늦은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응….”

유진하는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관두고 우울하게 대꾸했다. 그 사이 안정훈은 유인하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정리해서 넘겼다. 유인하의 아버지는 그런 안정훈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병실을 나갔다. 안정훈은 유진하를 돌아보았다.

“진하야, 너도 잠깐 갔다 와. 내가 여기 있을게. 아까부터 있었던 거잖아.”

“그래도….”

“넌 학교도 가잖아. 잠은 잘 자야지. 집에 가서 짐 좀 챙겨서 내일 아침에 와. 그동안 내가 지키고 있을게.”

“그럼… 잠깐만 우리 형 부탁해. 내일 아침에 봐.”

마키아벨리도 말했다, 이거다. 착한 게 아니라 착하게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유진하는 유인하를 안정훈에게 맡기고 병실을 나갔다. 부랴부랴 와서 아무것도 챙겨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유진하는 주저하며 몇 번이고 돌아보다가 병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안정훈은 문을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다시 단둘이 되었다.

전에 형이 유인하가 죽었다는 말을 했을 땐 패닉에 빠졌었다. 형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지 않은 걸 알았을 땐 괜찮아졌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가 아닌가. 그래서 지금은 그저 그에게 술을 더 먹일 수 없다는 것을 순수하게 아쉬워했을 뿐이다.

“하긴….”

유인하는 원래 술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원래 주량은 고작해야 소주 한 병도 안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40도가 넘는 위스키를 물처럼 마셔댔으니. 술 때문에 스러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안정훈은 유인하가 술 때문에 큰일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 했다. 약해져도 그는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 술은 너무 쉬운 방법이었지….”

왜일까. 원하는 걸 곧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아무리 인내심이 강해도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만다. 갑자기 고백을 한다든가…. 역시 마음이 급했다. 안정훈은 반성하며 유인하의 곁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병실 안에는 고요함이 흘렀다.

안정훈도 3개월 전엔 병원 신세를 크게 졌었다. 그때는 정말 유인하 하나만 볼 때였다. 딱 한 가지 냄새만 맡을 수 있게 훈련된 사냥개처럼.

그전까지만 해도 본인이 랩독(Lap dog)인 줄 착각하고 살았다. 아니지, 정확하게는 랩독이라고 착각하고 싶었다. 자신의 커다란 덩치론 발치에 앉아 무릎 위에 올려주길 기다리기보단 사냥하는 것이 더 빠른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남자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빠른지, 내가 얼마나 강한지, 내가 얼마나 영리한지. 그리고 그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럼 넌?’

안정훈은 유인하의 파리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이라고 하기에는 계산적이고, 먹잇감을 보는 얼굴이라고 하기엔 욕정이 강하다. 안정훈의 이유는 언제나 유인하였다. 변화하든 변화하지 않든. 그렇다면 유인하는 어떨까?

[지금 기분이 너무 안 좋아. 기분 좋아지는 거라면 뭐든 좋아. 한 번 해봐.]

그때부터 뭔가 달라졌다. 안정훈은 유인하가 드디어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이기지 못하고. 안정훈은 기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형은 나비가 죽었다고 했는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형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묻지 않았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유인하는 안정훈의 손에 떨어진 상태였다. 형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다행히 그때부터 유인하의 추락은 더욱 깊게 심화되었으며 거기에 형이 한몫한 것이라면 형에게 감사할 일일 것이다.

그 이후로 형과 만난 적도 없고 얘기를 한 적도 없다. 어차피 형은 괜찮을 것이다. 자신의 친어머니에게도 아무런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였다. 고양이라고 뭐가 그렇게 특별해 그가 애착을 갖겠는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벌써 잊어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형은 걱정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유인하는 즐기는 것에 인색해졌다.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원하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벌을 줬던 모양이다. 친구들을 이끌고 재미있는 것이라면 뭐든 했던 그가 입으로는 기분 좋아지는 건 뭐든 좋다고 말하면서 그런 것들을 심하게 경계했다. 다행히도 지금의 유인하는 그런 것을 대부분 포기했다. 꿈도,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도. 그는 자유로워졌다. 기분 좋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안정훈은 아주 웃음이 많아진 근 3개월간의 유인하를 떠올렸다.

하지만 때때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별말은 없었다. 힘들다는 말도 전혀 하지 않았다. 원래의 유인하도 솔직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만만한 안정훈에게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음을 흘리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마저도 없었다. 아니, 그런 게 있는데도 안정훈이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안정훈은 유인하가 자신의 손에 얼굴을 문지르고, 또 그걸 뿌리치기를 반복했던 묘한 경험을 떠올렸다. 예전엔 유인하의 마음이 한눈에 보였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안정훈은 분명히 인내심이 강한 남자로 컸고 거기에 자신도 있었다. 자신이 참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싸우느니 차라리 지고 줄 때는 아까워하지 않고 전부 줄 수 있는 그런 남자였다. 그래서 유인하에게 전부 주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가 괴로운 것은 포기하고 싶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정훈은 그걸 약간만 도와주고 있을 뿐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안정훈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약…?”

양은 조절하면 되지 않을까? 중독된다면 그때야말로 정말 안정훈을 떠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내 곧 안정훈은 고개를 저었다. 약은 술보다도 쉬운 방법이다. 그에겐 자신밖에 없다는 말을 그것보다는 좀 더 진정성 있게 듣고 싶었다. 안정훈은 다시 정신을 잃은 유인하를 보았다. 예쁘다. 잘생겼다. 그대로 침대에 팔꿈치를 대고 얼굴을 괸 채 유인하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난 그 말 하나면 되는데.”

지금까지 12년이었다. 어린 그의 눈길을 한 번에 사로잡았던 강렬한 눈빛. 그 눈이 자신을 보게 만들기 위해 안 했던 짓이 없었다. 다가오는 듯했다가 멀어지고 멀어지는 것 같으면 다가오며 사람을 미치게 만든 것은 그였다. 시험을 통과하면 마치 옆을 허락해줄 것처럼 굴었으면서 지금껏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도 유인하였다. 그래, 그가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어울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버리는 건 용서하지 못한다.

“내가 얼마나 많이 봐줬는데. 따먹으려고 했으면 벌써 백 번도 따먹었어.”

안정훈은 그렇게 속삭이며 유인하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

그리고 몇 시간 뒤 유인하가 일어났다. 오랜만에 말끔한 맨정신이었다. 많이 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위가 새카맸다. 왼팔에는 약물이 들어올 수 있는 바늘이 꽂혀 있었다. 유인하는 몇 분인가, 몇십 분인가 멍하니 있다가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술 때문일 것이다. 3개월이 넘게 위스키를 그렇게 마셔댔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오래간만에 제정신으로 눈을 뜬 유인하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카만 창문이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얼마나 지났을까. 유인하에게는 일순으로 느껴졌다. 창으로 보이는 하늘의 색깔이 바뀌었다. 처음은 아주 미묘한 차이였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칠흑 같은 어둠이 군청으로 바뀌고 구름이 농담을 더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경이로운 일이다. 거대한 지구가 노련한 발레리나처럼 우아한 턴을 하며 태양의 주변을 돌고 있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 흐트러짐 없는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래서 유인하는 알 수 없는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날이 밝으면 다른 사람들도 깨어나 또다시 평범하고 아름다운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유인하 혼자만 늪에 빠져 또 허우적거리고 있겠지. 더 이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뭘 원하는지도 모르니까.

더 이상 잘 살 자신이 없었다. 그 마음이 어느새 불변의 진실이 가느다란 핀이 되어 유인하의 심장을 찔러 바닥에 꽂았다. 다시는 움직일 수 없도록. 전시판에 꽂힌 박제된 나비처럼.

‘다시 어두워져.’

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어두워지라고 빌었다. 빛이 밝아지면 너덜너덜해진 자신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피가 다 빠지고 상처 입고 부러져서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는 모습으로. 그때 흙에서 일어났던 때처럼.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죽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죽고 싶었다. 그 모순된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상충하는 욕구는 언제나 살고 싶다는 쪽이 이겨왔다. 99%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단 한 번, 그것이 역전되었을 때 유인하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아예 벼랑에서 떨어져 버렸다. 그 순간의 일은 마치 남 일처럼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일분일초를 단 한 조각도 빼먹지 않고 기억할 수 있었다. 낭자한 혈액, 무거워지는 몸, 믿을 수 없는 현실과 코앞까지 다가온 새카만 미래.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제정신도 아닌 채로, 자신이 죽는 것도 모른 채로 죽을 뻔했다. 술에 스러지는 수많은 병신들처럼. 유인하는 그런 자신이 싫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자신은 그것보다는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좆 같다.

괜찮았던 게 아닌가. 지금까지 이렇게 ‘잘’ 살았던 적이 없었다. 이대로면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데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돈을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인간들이 다시 자신을 따랐다. 이런 희망찬 미래가 유인하에게 주어진 게 얼마 만인가. 노력은커녕 방탕하게 살아도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니. 도대체 그 전까지의 유인하는 무엇을 하고 산 것일까? 도대체 그 전의 삶은 무엇일까?

그래, 생긴 대로 사는 것이 제일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그러니까 좌절할 건 아무것도 없다. 머리는 그렇게 훌륭한 자기합리화를 내놓았다. 가슴은 그걸 혼신의 힘을 다해 내동댕이치며 모골이 송연한 비명을 질렀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날 죽여!!!!

“…….”

유인하는 몸을 뒤척여 창문을 등졌다. 바로 코앞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닿았다. 어스름한 빛이 들어오는 병실, 옆에는 안정훈이 엎드려 자고 있었다. 우스운 건 여전히 자신의 곁에 있는 그가 같잖아 보이면서도 못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도대체 이 새끼는 어떻게 사는 거지?

바보 같은 짓이라곤 골라서 다 하는 놈이었다. 그것도 남 때문에. 그런 게 싫지 않은 걸까? 창피하지는 않나? 돈이 있든 없든 그는 스스로를 감당하고 사는 것에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그런 형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 그렇다면 더더욱 안 괜찮아야 하는 것 아닌가? 스스로의 비대한 자아에 짓눌려 비틀거리는 유인하의 눈에는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은 안정훈이 기이하게만 느껴졌다.

그도 원하는 게 있었다. 그도 그가 어찌할 수 없는 가정사가 있었다. 불의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런데도 어떻게 상대를 끝까지 추구할 수 있는 것인가.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나?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 걸까? 어떻게?

안정훈이 싫었다. 그에게는 어둠이 없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화목한 가정에 자상한 부모님, 타인이 다가오는 것도,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둔하고 원만한 성격, 원하는 것을 끝까지 추구할 수 있는 자기 확신까지. 그런 건 살면서 그다지 공격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좌절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몹쓸 짓을 하면서도 자기혐오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괴감은 유인하의 살을 푹 찔러 들어왔다. 고양이로 지내던 시간, 술로 채우던 시간, 모두 시간을 허비한 것은 같았다. 그때도 고통스러웠다. 코앞에 닥친 시험과 불합격, 불투명한 미래 등.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럴 것도 없었다. 시험은 없었고 돈도 있었다. 돈 많은 주정뱅이의 미래라고 해봤자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나야말로 괴로울 것은 전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까와 같이 그런 이성적인 결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훨씬 더 나은 상황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랬다. 그때는 먹고 죽을 돈도 없을 때였다. 한강이 보이는 비싼 레지던스는커녕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에서 살았다. 조금만 쉽게 살아도, 조금만 기준을 낮춰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부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자기합리화를 해도 고통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끔찍한 자기혐오만이 뾰족한 바늘이 되어 심장을 몇 번이고 찌를 뿐이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술이 필요했다.

이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을 살다가 죽을 것이다. 아무런 내실도 없이 늙어 더 이상 누구의 눈에도 띄지 못하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될 것이다. 가까운 인간에게도 혐오 받다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고 아무것도 아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홀로 비참하게 죽어갈 것이다.

‘도대체 이런 생각을 왜 하는 거야? 왜? 왜?’

스스로를 괴롭히기 위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하기 싫었다. 더 이상 스스로를 괴롭혀 이루고 싶은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인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게 가장 괴로웠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처음부터였을 것이다. 유인하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었다. 자신이 뭔가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취급을 받아도 좋은 인간이 아니다, 그런 강한 확신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랬다. 유인하는 머리가 좋았고 성적도 좋았으며 외모도 아름답고 인기도 많았다. 그런 사람은 분명히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난 최고였어.’

분명히 그렇게 확신했다. 그런데도 언제나 부족함을 느꼈다. 언제나. 그리고 언제부터일까. 의문이 스물스물 들기 시작했다. 그럼 어째서 그걸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걸까?

사실 난 최고가 아닌 게 아닐까?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할 때는 자신이 최고라는 증거만 찾았다. 자신이 최고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는 역시나 그 의심에 맞는 증거만 찾기 시작했다. 별 볼 일 없는 집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일어나는 불쾌한 사건들, 아직 어리고 무력한 자신. 원하던 대학과 학과에 합격했던 것이 끝이었다. 그 이후로는 쭉 내리막길이다. 고시를 준비하며 그때까지의 성적과 학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좋은 머리와 아름다운 외모도 노화와 함께 천천히 스러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많던 친구도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돈 때문에 오물 속을 구르고 있었다.

‘그래서? 또 죽고 싶다고? 또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유인하는 스스로를 비아냥거렸다. 나약한 새끼. 하지만 그런 건 이 끔찍한 기분의 관성을 더할 뿐이었다.

예전엔 분명히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안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하면 웃고 무엇을 하면 즐거우며 무엇을 하면 싫고 무엇을 하면 노여운지. 분명히 그렇게 오래전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아주 오랫동안 괴로워한 것만 같다. 지금이 괴롭기 때문이다. 지금이 괴로웠다. 그리고 가장 절망스러운 건 앞으로도 계속 괴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도대체 뭘 잘했다고 괴로움씩이나 겪는단 말인가. 다 자초한 것 아닌가?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이렇게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따져볼수록 그것이 결정적인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이 끔찍한 기분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기연민에 빠져서 인생을 변명으로 일관하는 인간들이 역겹다. 자포자기해서 타성에 젖어 사는 인간들을 경멸한다. 자신의 불안을 주체하지 못해 타인을 위협하는 인간은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혐오한다.

그런데도 내가 그런 인간이 되어버린 것일까?

사람은 부정적인 것에 영향을 깊게 받는다. 심지어 영민할수록 스스로의 부족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에 반대하는 것으로 자아를 세운다고 긍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너무나 싫은데도 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스며들고 만다. 그렇게 아무리 찬란한 색이라도 바래지고 만다.

정말로 더 이상 내게 희망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그러길 바라는 걸까. 왜 정훈이를 찔렀을까. 왜 그 남자를 찔렀을까. 왜 나를 찔렀을까.

나는 언제부터 나를 포기한 걸까.

그렇게만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고 기분이 너무너무 좆 같고 좆 같고 좆 같다. 가장 큰 배신을 저지른 건 10년이 넘도록 무해한 얼굴을 하고 곁에 있었던 안정훈도, 인간의 모습이 된 자신의 고양이를 경계의 눈빛으로 보던 그 남자도 아니었다.

약속했다. 약속이라는 말 따윈 하지 않았지만. 맹세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나만큼은 나를 사랑하고 지키겠다고. 어린 내가 나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지켜주기로 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너무나 서러운 얼굴로 나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억울하고 또한 좌절한 얼굴이었다. 가장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한 자의 표정이다.

어린 그는 이미 너무나 많은 자들에게 배신당해 왔다. 그래서 그 누구도 기대하지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기로 했다. 자기 자신만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스스로마저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한 끝에 드디어 자기 자신에게도 배신당한 것이다.

그는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돌아서서 멀어졌다.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이윽고 작은 아이는 바닥에 쓰러졌다. 커다란 피 웅덩이 속에 채 다 크지도 못한 작은 고양이가 죽어 있었다. 나비가 죽어버렸다.

그 어떤 것도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피에 젖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엉엉 울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빌었다. 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인하는 환상을 보고 있었다. 악몽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창밖이 금세 하늘색이 되어갔다. 유인하는 팔에서 바늘을 뽑았다. 그리고 고양이로 변해보려고 했다. 몇 번 더 시도했다.

“…….”

유인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혈을 하지 않은 바늘 구멍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새하얀 피부에 검은 피가 줄기줄기 흘러내렸다.

원하지 않는데도 고양이로, 또 인간으로 제멋대로 변했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고양이가 된 것이 저주라고 생각했다. 위기의 순간부터는 자유자재로 변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원래대로 다시 변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도대체 이 상실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비는 도대체 뭘까?

나비는 자신이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비는 정말로 사랑받았다. 애정을 주지 않는 그 남자를 비난하고 기어코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나비는 행복했다. 영원히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비는 나일까? 나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갑자기 고양이로 변했다. 알 수 없었다. 고양이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다. 잠깐 현실에서 도피하였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눈물이 흘렀다. 다시 고양이로 될 수 없는 것이 슬픈 건가?

나비의 주인은 그 남자가 아니었다. 바로 유인하 자신이었다.

‘병신….’

화나도 왜 화났는지 모르고 슬퍼도 왜 슬픈지도 모르는 등신이 바로 자신이었다. 병신, 등신, 등신! 이대로 영원히 왜인지 모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

날이 밝고, 가족들이 한바탕 휘몰아치고 갔다. 이래서 날이 밝는 것을 그렇게 저주했던 것인가. 유인하는 이제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이쯤 되면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온다.

엄마는 화를 냈고,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못마땅한 표정에, 형은 아주 날을 잡고 비아냥거리고 조롱했다. 거기서 모두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동생은 보는 것만으로 불안이 전이되었다.

그렇게 면면이 다른 반응을 했지만 결국 다들 유인하를 거들떠보기도 싫은 짐짝처럼 여긴다는 건 분명했다. 유인하는 그렇게 느꼈다. 누구한테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혹여나 본인한테 기댈까 봐 미리 으름장을 놓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그들은 어떤 말도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왜 그러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 질문을 받는 것만으로 공격이라 생각하며 유인하를 천하의 이기적이고 나쁜 인간으로 취급할 것이다. 그리고 그래,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유인하는 경중은 있어도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일종의 희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유인하의 추락을 기뻐하고 있었다.

그것 봐.

내가 뭐라고 했어?

너도 실패할 줄 알았어.

그러니까 우리처럼 나대지 말았어야지.

아버지는 언제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네가 알아서 하고 나에게 기대지 말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피해자인 척하지만 그저 아버지에게 복종하고 형만을 사랑하며 다른 자식에겐 기꺼이 가해자가 되었다. 그녀에게 유인하는 유영하에게 마땅히 가야 할 자원을 훔쳐 가는 도둑처럼 보이는 걸까. 유영하는 어렸을 때부터 유인하를 죽어라 때렸다. 상장을 집에 가져오기라도 하면 갈기갈기 찢었다. 유진하는 혹시나 그 폭력이 자신에게 올까 봐 언제나 전전긍긍하며 그 모습을 방관하고 있었을 뿐이다.

가난한 집의 잘난 자식이라는 건 생각보다 그렇게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 밖의 존재일 뿐이고 그런 것은 우상시하거나 혐오하거나 둘 중 하나이지 않은가. 모난 곳을 정으로 때리듯 멋대로 치켜세우고 멋대로 깎아내린다. 무식하니까. 모르니까. 생각할 능력조차 없으니까! 그래서 저렇게 사는 것이다.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라 그냥 저런 사람들이라서 저러는 것이다! 그게 화가 났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 바뀔 수도 없었다.

‘난 달라. 난 달라. 난 다르다고.’

다 가버리고 나니 깊은 허탈감과 용암처럼 고요히 지글거리는 분노와 함께 하얀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익숙해서 반갑기까지 한 감정이었다. 유인하는 드디어 자신이 자신답게 느껴졌다. 고양이로 살던 2개월, 술로 지새던 3개월은 유인하에게는 너무나 큰 사치였다. 그래, 이런 것이다. 여유가 없는 삶이라는 건.

‘씨발…. 지금까지 뭐 한 거냐, 도대체.’

유인하에겐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로도 수차례 그렇게 되새겨왔다. 하지만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사랑이니. 복수니.

유인하는 욕심덩어리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하나라도 포기하면 마치 모두 가지지 못할 것처럼 느껴진 적 없는가. 그걸 핑계로 참고 훗날을 도모하는 것보다 즉흥적인 복수에 열을 올렸고 그 남자에겐 사람인 자신도 사랑해주기를 바라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본인은 그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리화했다.

그런 건 결국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잘난 척 턱을 치켜들고 있어도 유인하에게 중요한 것은 여전히 혼자서 먹고 사는 것, 그것뿐이었다. 어떻게? 유인하는 다시 털썩 침대 누워 천장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돈이지.’

가족들에게는 돈을 번다는 말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어떻게 될지 유인하는 잘 알았다. 대학원을 다니며 과외로 고작 몇십만 원 정도를 벌어 자기 입에 풀칠만 하고 사는 유진하에게도 돈을 뜯어내는 게 그들이었다. 유인하가 모델 일이든 뭐든 돈을 번다고 한다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깎아내리며 일단 돈은 버니 빨대만 꽂으려고 하겠지. 이런 취급까지 당하면서 돈까지 갖다 바친다? 고작 가족이라는 이유로? 유인하의 눈빛은 증오로 날카로워지고 입가엔 냉소를 띄었다. 그들이 자신이 불행해지길 바란다면 유인하도 그들이 불행해지길 바랐다.

‘그래, 돈 벌자.’

결국 돈이었다. 아무리 고상한 척하려고 해도. 지금은 비참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공부 같은 건 생각만큼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었다. 공부에 대한 유인하의 집착은 뭐였을까? 어렸을 때 자주 연예계 쪽에서 제의를 받곤 했다. 어린 유인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모든 건 돈인데. 공부 그게 뭐가 그렇게 고상한 거라고. 돈이었다. 돈. 돈. 돈!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딴 건 없다. 가족도 이런데 누가 타인에게 헌신할 수 있단 말인가. 안정훈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면 아마 이유도 없이 그의 얼굴에 주먹질을 할 것 같았다.

‘돈을 얼마나 모았더라? 술이야 남의 돈으로 마셨으니까….’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천한’ 일이었다. 하. 어째서일까. 또 실소가 나왔다. 그렇게 앞으로 다시 어떻게 살아갈지 계획이 잡히자 조금 차분해지면서 묘한 고독감이 밀려왔다. 유인하가 짜는 삶의 계획이란 욕심을 얼마나 부리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은 언제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스스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독립적인 삶. 그게 그가 아는 최고의 삶이었으니까.

‘또 죽을 뻔했다고…. 젠장.’

왼쪽 고관절이 몹시 욱신거렸다. 술이 몸에 해로운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술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은 유인하의 기준에서 제일 병신이었다. 그리고 유인하는 그 병신이 되었다. 칼로 자신을 찔렀을 때는 바로 후회했다. 지금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지 않아. 이딴 거에 지지 않아. 지지 않아….”

유인하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분노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유인하는 더 이상 ‘나대고’ 싶지가 않아졌다. 그러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졌다.

이제는 분노가 불태울 수 있는 연료도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술을 끊은 유인하는 놀라울 정도로 무기력해졌다. 침대 밖으로 거의 나가지도 못했으니까.

유인하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집에 처박혀서 나가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밖에 나가면 고양이로 변해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봐. 아니, 술을 죽을 때까지 마시면서도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기억도 나지 않는 돈 드는 취미 생활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냥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쇠사슬이라도 발목에 매달린 것처럼. 그리고 유인하는 때때로 그런 자신이 다시 죽도록 싫어졌다.

하지만 술은 다시 마실 수가 없었다. 절제할 자신이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조금 건전한 현실도피’가 섹스였다.

‘아, 이제 정말 미칠 것 같아.’

침대의 머리맡까지 바짝 밀려 올라간 유인하의 몸 위로 커다란 남자의 근육질 등이 둥그렇게 말려 있었다. 두 사람분의 헐떡이는 신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침대 위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인하야….”

집중한 얼굴로 계속 유인하의 이름을 부르는 안정훈의 얼굴은 어떨 땐 남자 같고 어떨 땐 소년 같았다. 그는 한시도 유인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었다.

그와는 오랫동안 알아 왔고 그의 앞에 알몸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은 뭔가 달랐다. 그의 몸짓에 느끼기라도 해서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그대로 보일 때면 종종 스스로에 대한 환멸에 몸을 할퀴고 싶어졌다. 그런데도 쾌락에 흠뻑 젖어버렸다.

유인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상태에선 성적 자극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는 데다가 저도 모르게 그것을 더욱 쫓았다. 유인하의 것은 하얀색에 가까운 분홍색을 띠고 있었다. 거기에 맞닿은 안정훈의 것은 소년 같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시뻘건 색을 하고 있었다. 크고 두툼하고 질량감이 대단했다. 그게 유인하의 것에 맞닿아 서로의 체액을 윤활제 삼아 마구 문질러지고 있었다. 유인하는 술에 취하지 않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술과 섹스 빼고는 아무것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일에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운동이나 자주 바뀌는 취미 생활도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술 말고는 낙이 없었다. 몇 개월 동안 파티광처럼 즐기고 살던 유인하가 지금은 집 밖, 침대 밖으로 나가는 것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하고 싶을 때 바로 할 수 있는 건 섹스밖에 없었다. 기분이 좆 같을 땐 안정훈이라도 한 대 패면서 섹스를 하면 그 순간만이라도 조금 나아질 수 있었다. 안 그러면 유인하에겐 텅 빈 시간만 남았다. 제법 진지하게 연예계 쪽 일을 받아보려고 했지만 바란다고 당장 24시간 잘 시간도 없이 일이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돈이라도 버는 게 아니면 다른 일은 하기도 전에 벌써 허무했다. 그 고루한 시간을 견디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아흐, 아…! 아으응.”

예전에도 이랬던가? 섹스라는 거? 남자한테 섹스는 좋기만 한 건 줄 알았다. 성기가 마구 부풀어 특히 귀두가 예민해진다. 직접적으로 닿는 손과 타인의 성기뿐만이 아니라 몸짓이나 마찰되는 다른 피부, 상대의 호흡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스스로 하는 것과 다르게 타인의 영향에 의해 쾌락도 불쾌감도 침범당한다.

유인하는 오염되고 있었다. 뜨거운 체온이 피부를 찌르고 거친 숨결이 호흡을 더럽혔다. 소리는 고막을 긁어 기분이 나빴다. 상대의 무게에 하반신이 눌리고 엉덩이가 그의 허벅지에 부딪혀 진동하면 이해할 수 없는 불쾌감이 진동이 되어 그 부분부터 척추를 따라 퍼져나갔다. 그런데도 유인하의 것은 이미 체액으로 잔뜩 더럽혀져 있었다.

살면서 접하는 모든 게 이런 걸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딱 구분할 수가 없다. 좋은데도 싫고 싫은데도 좋다. 살고 싶은데도 죽고 싶고 죽고 싶은데도 살고 싶은 것처럼. 그래서 가끔 너무 짜증이 났다.

“기분 좋아?”

귓가에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렸다. 유인하는 미간을 좁히며 야시시한 소리를 내며 코로 숨을 내뱉었다. 유인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전신을 구석구석 핥고 성감대는 떨어질 것 같을 정도로 자극했다. 상처 하나 없이 하얗던 피부도 지금은 온통 얼룩덜룩했다. 역시 더럽혀지고 있었다. 그런 실감이 들 때면 기분이 갑자기 급격히 좆 같아진다.

“어때? 이제는 기분 좋지? 나 이제 잘하지?”

“입 좀 닥치고 해라.”

유인하는 턱을 치켜들며 섹시한 목소리를 냈다. 고막을 핥는 것 같다. 안정훈은 조금 낑낑대며 아슬아슬한 얼굴을 했다. 귀가 간지러운데 어째서 단전이 욱신거리는지 모르겠다. 금방 할 것 같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귓불을 할짝할짝 핥았다. 유두를 엄지로 둥그렇게 돌렸다. 그리고 이내 검지로 빠르게 양쪽 유두를 튕기면서 만졌다.

“으응…! 하앗, 하아…!”

젖꼭지를 만지면 사정할 것 같았다. 유인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눈을 감으며 엉덩이를 절로 꿈틀꿈틀거렸다.

“진짜 너무 좋아….”

안정훈의 얼굴은 벌겋고 눈빛은 약이라도 한 듯 풀려 있었다. 중독되고 있는 것은 유인하뿐만이 아니었다. 안정훈이 유인하의 뺨을 핥으며 속삭였다. 안정훈이야말로 불쾌감 없이 지금의 상황을 완벽하게 즐기고 있었다. 급성 알코올중독으로 거의 죽을 뻔했던 유인하는 중독의 대상으로 술 대신 섹스를 선택했다. 안정훈만 노난 것이다.

“하아, 인하야…. 넌 최고야….”

안정훈은 유인하의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유인하의 양 허벅지를 각각 자신의 다리 위에 올리고 왼손으로 둘의 것을 한데 모아 잡아 허리를 직접 움직였다. 마치 그에게 직접 박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엉덩이에 허벅지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물기 어린 박자를 만들어냈다. 새하얀 피부는 언제나처럼 깨끗하고 부드러워서 닿는 느낌이 환상적이었다. 그의 가슴을 만지고 뺨에 입을 맞추며 귓가에 속삭이면 아랫배가 미친 듯이 딱딱해지고 당장이라도 그에게 박고 싶은 마음에 입이 바짝 마른다. 술을 마시지 않아 처음에는 잘 집중하지 못하는 유인하도 곧 눈을 감고 아찔한 얼굴을 만들었다. 그렇게 하얀 얼굴에 홍조가 돌아 붉게 흐드러졌다.

“흐으응….”

마음에 들어. 방사선이라도 맞지 않는 이상 사람의 본질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유인하는 언제든 유인하일 뿐이다. 어떤 상태든. 안정훈은 뭉근하고 아주 섹시하게 엉덩이를 뒤로 당겼다가 앞으로 박듯 움직였다. 서로의 성기가 마찰하여 마찰열 이상의 열기를 내고 있었다. 가장 기분이 좋은 파트에 돌입했다. 서로의 성기가 민감한 곳에 닿을 때마다 가쁜 숨을 내뱉었다. 아릿아릿 아픈 듯하면서도 금방이라도 또 갈 것 같이 자지가 온통 찌릿찌릿했다. 온몸이 흥분으로 뜨거워졌다.

“역시 넌 이런 게 잘 어울려….”

안정훈은 그의 귀에 숨을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그가 움찔했다. 숨길 수 없는 쾌락의 얼굴을 하고 있는 유인하였다. 안정훈은 그게 너무나 뿌듯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허리를 꽉 끌어안아 닿는 면적을 최대한으로 느꼈다. 겹쳐진 허벅지, 팔에 가득 안기는 그의 허리.

“다른 거 할 필요 없어. 하기 싫은 건 다 내가 할게.”

그가 유인하의 귀에 속삭였다.

유인하는 보기보다 훨씬 민감하고 쾌락에 약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감정의 격차가 커서 유인하가 간혹 어깨를 안거나 귓가에 신음을 흘리기만 해도 안정훈은 가기 일보직전까지 내몰렸다. 어떻게든 쾌락으로 상대를 길들이려고 하는 건 안정훈이었으나 역시 만만치가 않았다. 지금도 금방이라도 갈 것 같았다. 그가 지금이라도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필패하는 것은 역시 안정훈일지도 모른다.

유인하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얹고 허리를 움직이면 그의 탱탱한 엉덩이와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좋았다. 역시 그의 안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하아, 인하야…. 빨리 내가 좋다고 해줘. 나 없이는 못 살겠다고….”

“미쳤냐, 이 또라이 새끼야.”

유인하가 허리를 꿈틀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유인하의 화려하면서도 예쁜 얼굴이 성적 쾌락에 일그러지는 게 너무나 보기 좋았다. 매시 매분 매초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붉은색을 띠는 그의 입술은 언제나 색적이라 볼 때마다 입맛을 다시게 되었다. 하, 키스하고 싶다.

“하아아….”

안정훈이 더욱 강하게 서로의 것을 움켜쥐자 유인하는 갈 뻔하여 허리를 들며 꿈틀거렸다. 아찔한 신음을 냈다. 서로의 체액으로 젖어 매끈해진 민감한 피부가 닿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섹스였다. 안정훈의 것은 크고 딱딱했으며 유인하의 것과는 달랐다. 그게 어떤 지점을 지속적으로 문지르고 압박할 때마다 점점 근질거리고 열이 오르고 갈 것 같이 되었다. 보통 유인하가 만지는 부분은 아니었는데도. 그가 펠라를 할 때와도 달랐다. 그때는 이렇게 가까이서 상대의 숨결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얼굴과 얼굴이 너무나 가까웠다. 뺨에 안정훈의 숨결이 닿았다. 매우 뜨거웠다.

“아….”

예전에 했던 섹스는 어땠지? 글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도 술을 마시고 했다. 별로 접점은 없던 여자애였는데 그 계기로 사귀어서 얼마 못 가다가 끝났다.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좋지도 않았다. 그때도 그런 것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 것 같다.

“하아, 야, 그만해라. 별로 기분 안 난다.”

기분이 가라앉은 유인하는 절정의 직전에 안정훈을 밀어냈다. 안정훈은 응…? 고개를 들어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유인하의 표정이 별로다. 유인하의 눈치를 보고 산 세월이 있었다. 유인하는 진심이었다. 안정훈은 끙끙거렸다.

“으응…? 진짜? 여기서? 하아,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응? 기분 안 좋아? 왜? 그냥 하자, 응? 인하야~.”

안정훈은 낑낑거리는 커다란 강아지처럼 유인하에게 애원하고 졸랐다. 유인하는 그런 안정훈의 얼굴을 그냥 밀어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신음을 흘렸다.

‘아, 진짜~~! 그냥 확 박아버릴까 보다.’

안정훈은 그대로 슬금슬금 그의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내려 중지를 쑥 유인하의 안에 넣었다. 거기까지 체액이 흘러내려 쉽게 쑥 하고 들어갔다. 유인하가 핫, 하며 몸을 움찔했다.

“뭐, 하는 거야, 이 개새끼야, 으윽. 안 빼?!”

술을 마셨을 땐 그냥 당하더니 지금의 유인하는 안정훈의 머리채를 확 쥐고 떼어내려고 했다. 안정훈은 버텼다. 그리고 처음 했을 때 찾았던 유인하의 느끼는 부분을 중지로 깊게 찔렀다. 유인하는 눈을 크게 뜨며 등을 크게 들며 신음을 뱉었다.

“아…! 아아아, 아으, 아…!”

아, 반응 죽인다…. 유인하는 처음엔 깜짝 놀랐다가 안정훈이 배 안쪽으로 손가락으로 구부려 사정없이 찔러대자 견디지 못하고 바로 질금질금 사정하기 시작했다. 안정훈은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역시 좋아. 촉감 봐. 엄청 부드러워. 넣으면 진짜….’

안정훈이 유인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유인하는 사정을 했는데도 눈앞이 번쩍번쩍했다. 그는 몸을 뒤틀며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거 뭐야? 흐읏, 하지 마. 아앗, 아응…!”

“기분 좋지? 어때? 처음 했을 때도 너 여기 엄청 좋아하더라…. 역시 넌 소질이 있어….”

안정훈은 잔뜩 느껴서 온몸에 촉촉하게 땀이 배어 나온 유인하의 피부를 온몸으로 느끼며 그의 뺨을 코끝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애정이 느껴지는 스킨십이었다.

“하앗, 아앗! 갔다고, 하아! 하지, 으으응~!!”

금방 사정했는데도 안정훈은 그의 안에 손가락을 하나 더 넣고 유인하의 좋은 곳을 마구 누르며 서로의 것을 잡고 다시 세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머리채를 콱 잡았다. 안정훈은 아파서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유인하는 눈을 크게 뜨고 아래를 보았다.

“하으, 아, 아, 아으으, 하아아, 안 돼. 으응~! 죽을 것 같아. 하아, 하아…. 또….”

유인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탄탄하고 기다란 목이 섹시하게 드러냈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더욱 느끼게 하기 위해 그의 유두를 빠르게 반복해서 핥았다. 집중력을 잃는가 싶었던 유인하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사로잡혀 아무런 잡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젖꼭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온몸에서 땀이 났다. 맞붙어 미끌거리는 성기도, 뱃속에서 뭔가를 밀어내려는 듯 누르는 길고 뜨거운 손가락도 유인하의 온몸을 불타는 것처럼 뜨겁게 만들었다. 이런 쾌락은 처음이었다. 유인하는 침대 시트를 두 손으로 꽉 잡으며 온몸을 꿈틀거렸다. 그의 얼굴은 지금껏 보여주지 않은 극상의 쾌락을 나타냈다. 만개한 것이다. 안정훈은 고개를 들어 그런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잠깐 안절부절못했다.

“아…, 아…. 기분, 기분 좋아? 기분 좋지? 아, 인하야…. 너무 예뻐. 너무 예뻐. 좋아해. 너무 좋아. 하아, 나 좋아? 나 좋다고 해줘. 나밖에 없다고 해줘. 나 없이는 못 살겠다고 해줘.”

그는 끙끙거리듯 졸랐다.

“그러면 다 줄게. 더 기분 좋게 해줄게. 여기, 여기 기분 좋지? 기분 좋은 거 좋잖아. 우리 기분 더 좋아지자. 내가 할 수 있는 거 너도 알잖아.”

“하아아…! 으윽…! 진짜….”

또 갈 것 같았다. 금방 갔는데 이렇게 빨리 다시 갈 것 같이 된 건 처음이었다. 유인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너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질척거리는 성기를 마구 문지르고 안쪽을 자극했다. 가슴은 빨고 있지 않은데도 빨리는 것 같았다. 그의 젖꼭지가 예쁘게 솟아올라 있었다. 온몸이 뜨거워졌다. 이런 쾌락은 처음이었다.

“흐윽, 아아, 하, 아으, 가, 가고 싶어…!”

안정훈의 몸짓이 격해지며 침대도 마구 흔들렸다. 안정훈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유인하의 귀를 빨았다.

“아, 하아, 으으응…!”

유인하는 끙끙거리며 고개를 도리질하다가 결국 움찔하며 아랫배를 크게 들어 올렸다.

“아아아…!!!”

“으윽…!”

드디어 안팎으로 자극당해 가버리며 엄청난 얼굴을 한 유인하였다.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섹스로 쉬어 내뱉는 신음마저 너무나 야했다. 언제나 강해 보이던 그가 전에 보지 못한 취약한 표정으로 절정을 느끼고 있었다. 안정훈은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몸을 떨었다. 그의 하얀 얼굴이 이렇게까지 붉어져서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몇 번이고 사정할 수 있었다. 안정훈은 혼이 나갈 것 같은 신음을 흘렸다. 겨우 사정을 참으며 유인하에게 다시 애원했다.

“눈 떠. 으윽, 나 봐. 나 봐줘.”

안정훈은 서로의 아랫배를 딱 붙인 채 손으로 흐트러진 유인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정리했다. 그리고 곧 쓰다듬었다. 유인하는 눈을 흐릿하게 반쯤 감고 입술을 깨물며 오르가즘을 느끼며 경련했다. 아슬아슬한 숨소리를 냈다.

“으윽, 기분 좋지? 부드러운 것보다 이런 게 좋잖아? 죽을 것 같은 게 좋잖아? 하아….”

애정 깊은 목소리였다. 유인하는 순간 어쩔 줄 몰라서 한정된 범위 내에서 몸을 꿈틀꿈틀하다가 순간 후들거리며 핏핏 물 같은 걸 싸며 깜짝 놀랄 정도로 야한 소리를 냈다.

“하으으응….”

유인하는 안정훈의 손에 코와 입술을 묻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커다랗고 뜨거운 손의 촉감을, 언제까지고 느낄 수 있다는 듯이, 그렇게 잠깐 정신을 놓고 그 느낌에 모든 것을 내맡겼다. 좋고 싫은 걸 하나하나 따질 새가 없는 환상적인 쾌락이었다.

그리고 심장이 욱신욱신거렸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아픔을 쾌락과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 느낌을 쫓아 계속 그 손에 얼굴을 눌렀다.

“눈 떠줘. 나 봐줘.”

안정훈의 입술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 왔다. 그는 흐릿하게 뜨고 있는 유인하의 한쪽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인하는 드디어 눈길을 안정훈에게 돌렸다. 쾌락에 젖어 이지러진 강렬하고 도발적인 눈동자. 안정훈은 숨을 잠깐 멈췄다. 그렇게 둘은 처음으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섹스했다. 안정훈은 그 인력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으음…! 으응….”

“하아, 인하야….”

둘은 그대로 입을 맞추고 혀를 깊숙이 섞었다. 아래도 위도 잔뜩 섞여서 서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질척거리고 물컹거렸다. 유인하의 다리에 힘이 빠지고 그의 구멍에서도 약간 힘이 풀려 부드러워졌다. 그 사이를 안정훈의 손가락이 마구 범했다.

“으으응…! 하아, 아앗.”

“하아, 인하야….”

안정훈은 유인하의 뺨과 귓가에 입을 맞추다 다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짜릿했다.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안정훈은 그와의 입맞춤에 너무 열중하여 그의 얼굴을 손으로 꽉 잡고 마구 그의 입 안을 탐했다. 유인하의 다리는 양쪽으로 크게 벌려져 있었고, 서로의 아랫배를 맞춘 안정훈의 볼륨감 있고 단단한 엉덩이만이 힘이 들어가 위아래로 움직여 상대의 성기에 자신의 것을 비볐다. 침대 시트만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이 안정훈의 팔을 붙잡았다.

“아으, 거기….”

“헉, 여기?”

안정훈은 점점 참기가 힘들어져 유인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댄 채 무아지경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아아, 아아아…! 하…. 으응, 응, 하으…!”

다시 눈이 마주쳤다. 안정훈이 다시 입을 맞췄다. 유인하는 움찔했다가 결국 포기했다. 항상 최고의 절정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역시 제정신으로 이런 것까지 하는 건 거부감이 없을 수가 없었다. 유인하는 앓는 소리를 냈다.

“하아, 으윽, 하아아…. 또 가고 싶어….”

안정훈은 심하게 헐떡이며 유인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턱을 들어 다시금 입을 맞췄다. 언제까지고 입을 맞출 수 있다는 듯했다. 그의 허리짓이 더욱 빨라지며 그가 점점 절정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유인하는 가장 제정신을 차리고 싶지 않은 순간에 또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제정신으로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는 그를 보면 간혹 이상한 실감이 났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하는 게 좋은 것이다. 아, 젠장. 그냥 한 잔만 마실까? 모든 중독은 연결이 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술을 마시고 싶을 때는 섹스할 때였다.

“으윽…! 하! 아으으….”

침대가 푹푹 꺼졌다 올라왔다. 유인하는 턱을 치켜들며 격렬하기 흔들렸다. 이런 건 진짜 박히는 것 같다. 싫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고조될수록 저절로 성적 쾌감이 올라갔다. 유인하가 서로의 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하지만 너무 민감해서 그 이상으로 만질 수가 없었다. 안정훈이 이미 피스톤질을 하듯 서로의 것을 비비고 있었다. 숨소리마저 상대방의 것을 따라 더더욱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이 오늘따라 진짜 좆 같았다. 그건 결국 서로 교감을 하고 하나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안정훈의 소년 같은 얼굴도 더 이상 소년 같지 않게 되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성숙하고 섹시해져 같은 남자의 얼굴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이름을 불렀다.

“아…! 으윽…. 인하야…. 아으윽….”

그리고 참고 참던 농밀한 정을 뿜어냈다. 유인하는 인상을 잔뜩 쓰며 시트를 꽉 잡았다. 배 위로 두 사람분의 체액이 흩뿌려졌다. 참으려고 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후들후들 떨며 강렬한 절정을 느끼고 말았다.

“아, 아우으, 아으….”

“하아, 하아, 허억. 큭….”

안정훈은 그대로 아주 천천히 엉덩이를 움직이며 서로의 것을 쓰다듬듯 문질렀다. 유인하는 그 아래를 벌건 얼굴로 보았다. 하반신이, 온몸이 너무나 욱신거리고 뜨거웠다.

“쩐다, 진짜….”

안정훈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유인하는 이미 오르가즘 후의 큰 허탈감에 매우 기분이 안 좋아진 상태였다. 상대방만이 끝까지 만족스럽게 즐기고 있는 것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할 때는 기분이 좋지만 술처럼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하는 것이 낫다. 기분도 좋고 술로 모든 걸 잊을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그냥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잠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인하야….”

안정훈이 벌건 얼굴에 일렁이는 눈빛으로 유인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제법 간절하게 들리는 건 착각일까. 그는 그대로 유인하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유인하는 수긍했다.

“아, 그래, 한 번 더 해.”

“인하야….”

유인하의 말에 안정훈은 감동이라도 한 얼굴이 되었다. 유인하의 다리는 저절로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아랫배부터 상체가 가득 포개졌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등을 왼팔로 껴안고 오른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감쌌다.

‘제일 기분 좋았어….’

가장 그와 교감을 하고 정말로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안정훈은 그 느낌을 잊고 싶지 않았다. 다시 느끼고 싶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정신이 든 유인하는 그의 얼굴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안정훈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뺨으로 타액이 흐를 정도로 혀가 들락날락했다.

“사랑해. 좋아해. 좋아해….”

안정훈은 완전히 삘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는 그대로 유인하의 두 허벅지를 한 손으로 모아 잡고 들어 올렸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엉덩이를 붙잡고 엄지로 살짝 옆으로 벌렸다. 안정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아…….”

하얀색에 가까운 분홍색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벌리면 그의 섹시한 입술이나 유두처럼 빨간색이 나타난다. 이미 둘의 체액으로 질척질척했다. 이대로 박아 눌러버린다고 해도 유인하는 저항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첫 키스는 네가 해주는 걸로 받고 싶었는데. 하아, 이것도….’

이미 입맞춤에 대한 판타지도 포기하고 그냥 해버렸다. 그래도 너무 좋았다. 이것도 그냥 못할 것이 무엇인가. 하지만 안정훈은 그대로 유인하의 엉덩이골과 허벅지 사이에 자신의 말 만한 남성기를 끼우기만 했다. 그리고 유인하의 허벅지를 교차하여 자신의 것을 꽉 조이게 했다. 유인하의 무릎이 접혀 두 발이 공중에 떠올랐다.

“뭐야, 이거?”

자세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유인하가 고개를 옆으로 약간 빼고 안정훈을 올려다보았다. 안정훈은 그의 붉은 입술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왜? 박아줄까?”

“죽고 싶냐?”

“왜애~.”

안정훈은 애교를 부리듯 그렇게 대꾸하며 유인하의 허벅지 사이에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허벅지와 엉덩이골, 회음부, 고환까지 전부 문질러졌다. 부드러웠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어깨에 쪽쪽 입을 맞추며 그의 아랫배와 침대 사이로 손을 넣어 유인하의 것을 잡았다. 오늘 이미 몇 번이고 사정한 그의 성기의 끝을 엄지, 검지, 중지로 잡고 주물거렸다. 유인하가 핫, 하며 야한 얼굴을 했다.

“아으, 끝에만 하지 마. 앗…!”

“으윽, 헉, 좋으면서.”

“아아, 아프다고…! 으윽, 하아. 아앗.”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는 심리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거라도 누군가 자신을 원했으면 좋겠는 것이다. 자신이 그런 가치라도 있다고 느끼고 싶다. 누군가에게는 필요하다고. 반대로 그런 걸 위험한 낯선 남자에게서 구할 만큼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좆 같아.’

좆 같은데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자신이 혐오스러운데도 스스로를 멈출 수 없는 더러운 기분이다. 더 이상 스스로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잊어버렸다. 답답하다. 그냥 가장 좆 같은 걸 피하는 데 급급했다. 아무것도 아닌 텅 빈 시간. 그러니까 술이라도 마시든가, 섹스라도 해야 했다.

퍽퍽퍽. 찍찍. 유인하의 엉덩이에 그가 부딪쳐 찰싹찰싹 소리가 났다. 서로의 살이 부딪치고 떨어지고 서로의 체액이 늘어졌다. 삽입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안정훈은 한 손으로 유인하의 귀두를 주물거리며 다른 손으론 그의 젖꼭지를 빠르게 문질렀다.

“어때…? 기분 좋으니까 좋지?”

“하아, 시끄러워. 그냥 해.”

벌써 몇 시간이나 이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유인하는 섹스를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사람 같았다. 안정훈은 그 점을 마음껏 이용했다. 그의 온몸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만지면서 즐겼다.

그 뒤로는 말이 없었다. 왼손은 그의 심장 위에 올렸다. 빠르게 뛰고 있는 그의 심박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가 그의 고개를 잡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예뻐…. 야해….”

느끼고 있는 유인하의 얼굴을 보며 사춘기 소년 같은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유인하가 약간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눈이 잠깐 마주쳤다. 안정훈은 그에게 입을 맞췄다. 아주 부드럽게 입술의 끝만 닿다가 곧 혀를 넣어 그의 입술 사이를 가르며 안을 범했다.

“으응….”

안정훈은 자신의 가슴이 팔딱팔딱 뛰는 것을 느꼈다. 더욱 그와 살을 섞는 데 집중했다. 온몸에 닿는 그의 피부가, 그의 속살이, 그의 입술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인하야…. 나 이제 좋은 거지? 그치?”

“하으, 아, 아….”

안정훈은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가슴을 만지던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몸에 긴장이 약간 풀리며 흐물, 하고 조금 더 달라붙어 오는 느낌이었다. 찡그린 미간이 조금 펴지고 좀 더 안정훈에게 몸을 내맡겼다.

‘이제 내가 좋은 거야. 그렇지? 얼마 남지 않았어.’

너 없이는 못 살아. 그렇게 말하는 유인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가슴이 떨렸다.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를 가지고 싶었다.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넌 내 거야.”

너무나 바라왔다.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안정훈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었다. 안정훈은 웃으면서 다시 유인하에게 입을 맞췄다.

*

발버둥을 치는 동안은 분명히 괴로웠다. 너무나 괴로워서 죽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침대에만 누워 하루를 보내는 것은 분명 그것보다는 괴롭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때때로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어디선가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살기를 포기했을 때도, 스스로를 칼로 찔렀을 때도, 술 때문에 죽을 뻔했을 때도, 유인하는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이해받는 것을 포기한 것은 언제였을까?

죽음에서 깨어나 이승원에게 화풀이를 할 때까지도 유인하는 마구 휘두르는 유리 칼처럼 언제 깨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라는 존재가 근본부터 녹아내리고 있었다.

행복한 사람에게든 불행한 사람에게든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갔다. 하루가 짧게 느껴지는 사람도 길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시간을 전부 걷고 나면 결국 그 길은 몹시도 짧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아, 상민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야, 이 씨, 이 개새끼, 요새 왜 술 마시러 안 나오는데? 죽은 줄.”

“회사 잘 다니냐?”

“넌 회사 때려쳐서 좋겠다, 이 새끼야. 지금 뭐 하고 사는데?”

안정훈은 밝은 얼굴로 친구에게 인사했다. 그는 요새 아주 컨디션이 좋았다. 고등학교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안정훈은 신랑 들러리 중 하나다. 잘 차려입고 사람들이 올 때마다 하나하나 일어나서 악수를 했다.

안정훈이야 요새 전업 남편(?)으로 유인하와의 신혼(?)에 한창이었다. 왜일까. 유인하는 쳐다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다. 평생 그럴 것이다.

유인하는 요새도 간혹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었다. 돈은 제법 쏠쏠할지 몰라도 일주일에 한 번 일할까 말까다. 하루에 몇 분 몇 초도 따져가며 공부를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아침 일찍 언제나 같은 시간에 깨서 할 것이 없어 TV 앞에나 앉아 있곤 했다. 그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했다. 피아노니 기타니 드럼이니. 취미 거리를 몇 번이나 바꿔가며 어떻게든 무언가에 몰입해보려고 했지만 이후, 유인하는 술이나 섹스 외에는 영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게다가 술은 한 번 죽을 뻔하니까 미련 없이 끊었다. 그 뒤론 그냥 섹스 삼매경이다.

‘아, 우리 둘 다 보양식을 좀 해 먹을까.’

안정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실실 웃었다.

해가 바뀌기 전 고등학교 친구 신영빈의 결혼식 날짜가 다가왔다. 그래도 이건 전화 인사로 때울 순 없는 것이라 안정훈은 몇 번 외출을 하며 식을 같이 준비했다. 고등학교 때의 안정훈은 유인하 외에는 사실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은 누구보다 많은 친구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 이유는 역시나 유인하 때문이다. 유인하는 원래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은가. 인싸 중의 인싸다. 언젠가 뭐가 잘못되더라도 서로의 연결점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신랑의 표정이 아주 밝았다. 결혼하는 게 그렇게 좋은 모양이다. 안정훈은 잠깐 망상에 빠져들었다.

‘인하도 예복 입으면 엄청 근사할 텐데….’

결혼식은 신부의 날이라지만 유인하라면 새하얀 예복을 입어도 전혀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모델이 따로 없겠지. 뭐, 요새는 진짜 모델이기도 하고. 솔직히 유인하는 공부 말고 뭘 해도 다 잘했을 것이다. 이번에 운동이니 아르바이트니 음악이니 하는 걸 보면서 더더욱 깨달았다. 하고 많은 것들 중에 꼭 힘든 것을 고른 것이 유인하답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안정훈이 그렇게 잠깐 딴짓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축의금을 내밀었다. 그리고 펜으로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다. 이승원.

“…….”

“…….”

두 남자가 서로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았다. 누군가 이 장면에 주목했다면 아마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안정훈은 곧 웃으면서 아까의 다른 친구를 맞을 때와 똑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승원아~,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안정훈은 그의 손을 강하게 잡고 어깨를 팡팡 치며 반갑다는 듯이 안부를 물었다. 이승원은 인상을 쓰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손의 온도가 뜨거운 안정훈과 달리 그는 손이 매우 차가웠다.

“축의금이나 받아.”

“어, 이승원~! 야, 진짜 오랜만이다.”

이승원을 보자 다른 친구들도 그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했다. 제일 바쁜 놈 중의 하나였다. 잘 나가기 때문이다. 신랑인 신영빈도 멀리서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김성우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승원을 보았다.

이승원은 높은 코에 귀족적인 얼굴형, 우수에 찬 눈빛에 분홍빛의 글래머러스한 입술을 가진 미남이었다. 검은색 테를 가진 안경을 끼고 있는 게 어쩐지 살짝 금욕적으로 보인다. 큰 키에다가 스타일도 좋아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 같다.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고 여유로운 느낌이 물씬 나던 그였다. 애티튜드가 매우 고급스럽다. 성인이 되고 나니 더욱 완성된 느낌이 들었다. 소위 폼이 난다.

“와, 진짜 넌 갈수록 더 잘생겨진다. 뭐 먹고 사냐?”

“혼자 왔어? 여자 친구는?”

다들 이승원에게 모여들어 안부 인사를 물었다.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그때 다른 친구 하나가 다 함께 모인 옛 친구들을 보다가 문득 그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인하만 있으면 딱 좋을 텐데…. 인하 진짜 보고 싶다.”

그러자 다들 잠깐 말을 멈췄다.

“인하…. 인하 요새 뭐 해? 아직도 공부하나?”

“인하 있으면 진짜 좋았을 텐데.”

“어제도 인하랑 같이 놀았으면 재밌었겠지.”

“그랬으면 어제 안정훈 죽었다. 하하.”

“너도 죽었을지도?”

“그런가? 흐.”

서로 밝게 안부 인사를 묻던 친구들이 어쩐지 조용히 속닥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각기 달랐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는 묘한 욕구불만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안정훈은 좀이 쑤셨다.

마구 외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인하가 자신과 함께 하고 있으며 자신은 드디어 유인하의 모든 것을 가질 거라고. 하지만 동시에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찌르르 떨리고 귀가 뜨거워졌다. 둘만의 비밀이고 싶다.

그런 안정훈을 이승원이 발견했다. 이승원은 순간 인상을 썼다가 한숨을 쉬더니 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내며 잠깐 밖으로 나갔다. 유인하가 피우는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원래 담배는 입에 댄 적도 없었지만….

흡연 구역에 들어가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혀가 따끔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젠장.”

그날 이후 이승원은 평소 쓰지도 않던 연차와 휴가를 다 끌어 써서 집에 드러누웠다. 누군가와 싸운 것이 분명한 얼굴로 회사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했고, 무엇보다도 충격이 컸다.

유인하는 분명 다른 친구들과 자신을 완전히 다르게 대접해주었다. ‘진짜 친구’로 대해주었다. 어린 날의 이승원은 그것에 저도 모를 묘한 우월감을 느끼곤 했다.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하게 대해지는 것. 그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영영 끝나버렸다. 이제 고등학생도 아닌데 그게 그렇게 충격적일 수가 없었다. 그게 여전히 충격적이라는 게 충격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게 효과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은 안정훈처럼 그렇게 꼴사납게 굴지 않을 것이다. 죽어도.

‘다시는.’

하지만 방금, 유인하의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가장 목소리를 높였을 안정훈이 입을 딱 다문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입술을 말아 문 것이 말하고 싶은 것이 아주 많지만 참는다, 그런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승원은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예전의 이승원도 느꼈던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꿈 같은 시간들….

‘같이 있는 거야? 지금도? 어떻게? 인하가 그걸 허락했다고?’

그렇게 친했던, 특별했던 자신도 그렇게 잔인하게 내친 유인하였다. 안정훈을 용서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새끼가 미친 것 아닌가. 그렇게 강제로 유인하를….

“나도 한 대만 줘라.”

이승원은 두 번째 담배를 꺼내다가 시선만 들었다. 안정훈이었다. 큰 키에 잘생기고 호감이 가면서도 첫인상은 살짝 만만해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소년처럼 순진한 인상이다. 이승원의 눈썹이 아주 약간 꿈틀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던 담배를 안정훈에게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담배를 다시 꺼내 물었다. 자신의 담배에 불을 먼저 붙이고 안정훈에게 라이터를 던져 주었다.

“…….”

“…….”

그대로 둘은 같은 담배를 피우며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었다. 몇 분 정도 그랬다. 이승원은 먼 곳을 보고 있었고 안정훈은 간혹 이승원을 힐끔거렸다.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안에서 누가 나와 안정훈을 찾았다.

“야, 넌 축의금 받다가 뭐 하냐?”

“어? 아니, 잠깐! 지금 갈게!”

안정훈은 얼른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끄고 후후 하면서 담배 연기를 불어 날렸다. 그리곤 약간 실망스럽다는 얼굴로 이승원을 보았다.

“야, 너 진짜 이럴 거냐?”

“시비 걸지 마라.”

이승원이 담배 연기를 후 뱉으며 대꾸했다.

“인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잖아?”

“너한테 듣고 싶지 않은데.”

“내가 아니면 누구한테 인하 소식 듣게? 겁나서 연락도 못 하는 주제에.”

자신을 잘 아는 친구라는 건 매우 좆 같을 때가 많다. 안정훈의 말에 이승원은 고개를 돌린 채 담배만 깊게 빨았다. 안정훈은 씨익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또 팡 두드렸다.

“인하 진짜 좋더라.”

이승원은 순간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놀랐다. 그리고 명치 안 뭔가가 깊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승원은 시선을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넌 그게 진짜 좋냐?”

“좋지, 그럼 안 좋냐?”

이렇게 자랑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신난 얼굴이다. 이승원은 식은 눈빛으로 안정훈의 새카만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렸다. 이긴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그것도 같은 상대를 둔 연적이라면. 안정훈은 씨익 웃고는 다시 이승원의 어깨를 팡 쳤다.

“나 먼저 간다.”

그리고 안정훈은 얼른 축의금을 마저 받으러 안에 들어갔다. 이승원은 그가 자신의 속을 뒤집기 위해 달려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승원은 그대로 지금까지와 똑같이 그냥 나른하게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때우는가 싶었다.

‘…했다는 거야, 지금? 진짜로?’

마음이 수런거렸다. 아까와 달리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선을 아래로 한 이승원이 깊숙이 담배를 물었다. 다시금 혓바닥이 따끔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떻게? 어떤 식으로? 뭔가 더러운 수를 쓴 것이 틀림없었다. 때렸을까? 아니, 협박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인하가 그를 칼로 찔렀으니까.

‘치사한 새끼, 그런 걸로 인하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던가? 아니다. 그는 그저 유인하를 범하고 싶은 것뿐이다. 좋아한다는 핑계로 상대방을 마구잡이로 해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최악의 인간이었다. 저질 중의 저질이다. 유인하에게 절대 어울릴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미친 개새끼.

‘어떻게?’

이승원은 담배를 잘근잘근 씹었다. 이승원의 머릿속에서 지금껏 한 번도 한 적 없는 방식의 상상이 펼쳐졌다.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는 유인하의 손목이 침대 머리맡에 묶이고 무릎을 접어 허벅지와 종아리를 벨트로 묶여 있는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었다. 그는 정말 싸움에 강했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힘으로 유인하를 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대로 유인하의 하얀 허벅지를 잡고 마음대로 하기 시작하면 유인하의 얼굴엔 고통보다도 굴욕이 생생하여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볼 것이다. 하지만 쇠사슬에 묶인 맹수처럼 저항은 결코 불가능했다. 그가 아무리 싫어해도 그의 아름다운 몸을 마음껏 만지면서 즐기면 죄책감으로 심장이 찌르르 떨리면서도 정신이 나갈 정도로 흥분해서….

“…….”

이승원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담배에서 입술에서 뗐다. 뺨이 약간 빨개지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담배 대신 분홍빛 입술을 초조하게 깨물었다.

‘안정훈 그 새끼가… 그러니까 그 새끼가….’

안정훈이 그런 짓을 하면 유인하는 할 수 있는 저주란 저주는 다 하면서 당할 것이다. 안정훈 이 개새끼는 유인하가 자신에게 반응한다는 것만으로 더 흥분해서 날뛸 것이다. 저 새끼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는 데 심각한 장애가 있었다.

[아, 아흣…! 안정훈 이 개새끼, 아으! 죽여버릴 거야! 이 개새끼야! 하, 하으응! 아…! 거긴 안 돼…!]

[안 돼? 안 돼? 어디? 여기?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어?]

[아…!! 하으으, 아으으응…! 하앙…! 안정훈…!]

이승원은 안경 밑으로 두 손을 넣어 얼굴을 감쌌다.

“씨발….”

상상만 해도 타격이 극심하다. 이런 상상을 하는 자기 자신이 더 좆 같다.

‘말려들지 마, 씨발. 그 개새끼가 일부러 그런 거야. 이러라고. 씨발, 하지 마. 생각하지 마.’

그런 건 절대 싫다. 절대. 여유로운 미소가 잘 어울리는 이승원의 단정한 얼굴에 부정과 불쾌감이 잔뜩 배어 나왔다. 관조적이던 눈빛에 질투가 가득 찼다. 그런 스스로가 괴로웠다. 하지만 생생했다. 이승원은 유인하가 아니라 차라리 안정훈을 생각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이승원을 이렇게 약 올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승원은 담배꽁초를 재떨이 방향으로 그냥 집어 던지고 다시 식장으로 돌아갔다.

*

식장에 돌아갔을 땐 필요 이상으로 사람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고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인하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우리한텐 연락 한 번 안 하고.”

“잘 지냈어? 넌 그대로다….”

유인하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앞머리를 내리고 약간 박시한 검은 니트에 검은 바지 차림이었다. 검은 니트의 목이 넓어 쇄골이 보였다. 온통 검은 옷이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었다. 어디에 있어도 그만 눈에 들어올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감이 있었다.

그에게 가까이 둘러싼 이들은 이전부터 유인하를 아주 좋아했던 추종자들이었다. 나머지는 마치 월플라워처럼 멀리 떨어져 쳐다보고 있었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물으면 미묘한 표정으로 뭐라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꺼려짐이 느껴졌지만 그런데도 구태여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예전에 유인하와 가깝게 지내던 이들도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영빈아, 결혼 축하한다.”

“인하야.”

거의 10년 만에 본 것일까. 둘은 가볍게 포옹을 했다. 신영빈의 눈빛은 예비 신부를 볼 때보다 더 애틋했다. 우스운 일이다. 둘은 잠깐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유인하가 입을 여니 별로 우스운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금방 왁자지껄 웃음이 터졌다.

안정훈은 당황한 얼굴로 멀찍이서 유인하를 보고 있다가 유인하에게로 다가갔다. 이승원도 저도 모르게 이끌리듯 그를 따라갔다.

“어머나, 세상에…. 사위 친구들이 너무 잘생겼네….”

유인하가 신부 측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신영빈의 예비 장모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유인하와, 그의 뒤에 서 있는 안정훈, 이승원을 번갈아 보았다. 그 시선의 움직임을 본 유인하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고 이승원을 발견했다. 인사를 끝내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겼다.

“…….”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해도 구차하다. 이승원은 유인하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서도 먼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안정훈이 유인하의 팔을 잡았다. 유인하가 그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온다는 소리 안 했잖아? 올 줄 알았으면 같이 올걸.”

유인하는 일이 없으면 거의 집 밖에 나오지 않은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갔다. 술을 마시고 죽을 뻔했던 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정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유인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뭐 하려고 그때부터 와서 기다리냐?”

“어떻게 왔어?”

“택시 타고.”

“데리러 갈걸.”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해.”

안정훈에게 박하고 퉁명스러운 유인하의 말투나 태도는 여전했다. 그런데도 좋다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안정훈은 유인하에게 치근댔다. 전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 그들이 얼마나 가깝게 지내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왜?”

그리고 유인하는 계속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이승원을 다소 심드렁하게 한 번 쳐다보았다. 성의 없고 관심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승원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둘이 잤어?”

충동적이었다. 묻고 나서 이승원은 바로 후회하는 얼굴이 되었다. 안정훈은 이승원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쳤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짜증이 난 게 분명했다.

“그런 건 나랑 얘기하지?”

“어.”

유인하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안정훈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인하를 돌아보았고 이승원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시선을 내렸다. 알면서도 물어본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 어? 왜, 왜 사실대로….”

“내가 숨겨서 뭐 해. 둘이 사이좋잖아. 둘 다 사람을 구멍으로 보는 주제에.”

유인하는 심드렁한 어조로 말하며 자신의 바지 주머니를 잠깐 더듬거리며 뭘 찾았다. 안정훈과 이승원 둘 다 눈을 크게 뜨고 버럭 소리쳤다.

“아니야!”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유인하는 전부 관심 없다는 얼굴이었고 안정훈과 이승원은 순식간에 안절부절못한 태도가 되어 더욱 유인하에게 집중했다.

“구, 구멍 얘기는 그냥 좀 놀리려고 한 것뿐인데. 절대, 절대 진짜 그렇게만 생각해서 한 말 아닌데. 물론 좋긴 하지만….”

“내가 그때 말했잖아. 난 널 구해주고 싶었다고. 그때는 그냥 잠깐 실수였을 뿐이야. 절대 그럴 생각 없었어.”

구멍 어쩌고를 운운한 건 안정훈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승원은 그간 메시지 한 번 보내지 않은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했다. 둘 다 동시에 빠르게 말해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상대도 듣고 있지 않으니 환상적인 조합이다. 유인하는 앞뒤 주머니를 다 만져보곤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이승원을 보았다.

“야, 담배 없냐? 깜박하고 안 가져왔어.”

둘은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낭패한 기분을 느꼈고 그중 안정훈이 조금 더 그랬다. 안정훈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낭패한 얼굴을 했고 동시에 이승원을 힐끔 보았다. 이승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

이승원은 자신의 품에서 얼른 담배를 꺼내 주었다. 한 번 담뱃갑을 쥐어 본 유인하가 안을 살폈다.

“라이터는?”

“아! 여기!”

안정훈이 아까 가져가고 안 돌려줬다. 유인하는 그의 손에서 라이터를 뺏어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

“…….”

둘 다 돌려주진 않을 것이다. 여러모로 모양이 많이 상했기 때문에 이승원은 자신의 안경 안으로 손을 넣어 얼굴을 쓸었다.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뭐가 후회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게 안정훈은 정말 모양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럴 수가 있을까. 이승원은 안정훈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얼른 따라갔다.

“인하야!”

담배를 입에 물고 눈동자만 돌려 안정훈을 본 유인하는 시선을 내리고 그대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빨아들였다.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끊지 않았다.

“진짜로 괜찮아? 말해도?”

끝까지 간 건 아니지만 그 새끼가 그렇게 알고 있으면 더 좋다. 안정훈은 어쩐지 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유인하는 별로 관심 없는 얼굴로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네가 빠는 것도 옆에서 보고 있던 새낀데.”

유인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안정훈도 그때를 기억할 수 있었다. 약간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다.

“왜? 진짜 이승원한테도 하고 싶어?”

별로 생각해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유인하는 이승원을 한 번 떠올려보았다. 유인하는 연기를 훅 내뱉었다.

“그런 거 시키면 걔는 너보다 시끄러운 것 같던데.”

“그렇지?”

안정훈이 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유인하가 다시 안정훈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구, 구멍 얘기는 그냥 좀 놀리려고 한 것뿐인데. 절대, 절대 진짜 그렇게만 생각해서 한 말 아닌데. 물론 좋긴 하지만….]

유인하는 담배를 다시 빨아들였다. 솔직히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이든 관심이 없었다. 없어졌다. 예전이라면 상대의 본심을 파악하려고 끝까지 추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귀찮다. 의욕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냥 그가 여전히 유인하의 말이라면 복종하기 때문에 곁에 두는 것뿐이었다. 그는 기괴하고 추했다. 그래서 안심이 되었다.

‘내가 여길 왜 왔지.’

유인하는 신영빈이 결혼을 하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홀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시간이 오늘따라 견디기 힘들어 충동적으로 오고 말았다. 유인하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정훈이라고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안정훈은 할 수 있는 걸 했다. 이승원의 험담을 했다.

“걔는 나처럼 못해. 네 말 못 들어. 난 네가 하라고 하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래.”

유인하는 그 정도로 대꾸하며 다시 담배를 피웠다. 건너편 건물을 보고 있는 듯했지만 그냥 멍하니 있는 것뿐이었다. 유인하는 요새 이럴 때가 많았다. 술을 마실 때는 그렇게 많이 웃더니 술을 끊고 나니 웃지 않았다. 항상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일이 아니면 집에서 나가지도 않았다. 잠만 잤다.

‘왜 왔지? 심심해서 온 건가….’

내가 보고 싶어서?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쿵쿵 뛰면서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다가 대담하게 그의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유인하는 인상을 썼다.

“뭐야?”

“기분 좋은 거 할까?”

안정훈이 나쁜 장난을 권하는 소년 같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

유인하가 돌아오지 않는다. 식이 이미 시작했는데도. 유인하를 따라 나간 안정훈도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나 급한 것 없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이승원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볼 때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는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떨고 있었다.

[어.]

누누이 말하지만 예전의 유인하는 이승원만큼은 그렇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유인하가 안정훈을 유달리 갈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을 따라다니는 친구들을 전부 바보 취급했다. 이승원만 빼고. 이승원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입을 열면 유인하는 눈을 마주치고 들어주었다.

‘했다고? 진짜로?’

믿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유인하가 어떤 남자에게 그런 걸 허락했다면 그건 절대 안정훈은 아니어야 했다. 유인하가 지금껏 그를 얼마나 하찮게 취급했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에 유인하가 어떤 남자에게 그런 걸 허락했다면… 그건 분명히 자신이 되어야 맞았다.

[닥쳐, 이 돼지 새끼야. 물어.]

이승원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인하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흡연 구역으로 나가서 아직도 있는지 확인했다. 없었다. 안으로 들어와 둘이 갈 만한 곳을 찾다가 구석에 있는 화장실을 발견했다.

“인….”

이름을 채 다 부르기 전에 어떤 기척을 느꼈다. 이승원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바깥의 소음이 멀어지자 소리가 명확하게 들렸다.

“으응, 하아, 앗, 거기….”

이승원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절로 발소리를 죽이고 가장 끝에 있는 칸 앞에 섰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니 안에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하아, 여기? 여기 좋은 거야?”

“아흐, 아앗, 으응…!”

유인하가 이런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 아니, 두 번째로 듣는다. 이승원은 숨을 멈췄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둘이서, 둘이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친구 결혼식에서, 이런 대낮에, 이런 곳에서! 이승원은 상상도 못 하는 짓이었다. 아니, 유인하답지도 않은 짓이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는가. 누구라도 알아차린다면? 옛날의 유인하가 얼마나 교활했던가. 그는 어떤 짓을 해도 흠 하나 잡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유인하는 뭘 입어도 예뻤지만 아까는 쇄골이 보이는 게 섹시했다. 검은 옷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목덜미가 눈길을 끌었다. 지금 어떤 남자의 손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게 아닌가.

“으흐, 아으, 아흐으….”

덜컹. 경첩이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귀가 예민해져 점막이 비벼지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안정훈이 속삭였다.

“구멍…이라는 말 안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하아, 어쩔 수가 없네. 이제 구멍 비면 못 가겠지? 그렇지? 여기도, 여기도… 나보다 더 만진 사람은 없잖아?”

“글쎄, 으윽.”

“거짓말….”

얇디얇은 문 한 짝으로 배설 행위를 가리는 곳이다. 배설 행위 중에는 그 어떤 동물이든 공격에 취약해진다. 섹스는 두말할 것도 없다.

“헉…, 여기, 여기지. 하아, 이제 알아…. 좋아? 좋지? 좋다고 말해줘.”

“으윽…! 아으, 아우으…. 하아…!”

이승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보다, 상상보다 훨씬 야하고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는 유인하였다. 이런 목소리를 내는 유인하는 과연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어떤 얼굴로 느끼고 있는 걸까. 어디까지 범해지고 있는 걸까. 지금의 이승원으로서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음란한 상상을 해야 했다.

“인하야….”

이승원이 신음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안의 두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그만큼 섹스에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이승원은 당장 문을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듦과 동시에 오히려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때? 더 기분 좋아지고 싶지? 더 하고 싶지?”

“씨발, 입 좀 닥쳐. 조용히 하고 하라고 몇 번을 말하냐?”

“그래서 좋잖아?”

“맞기 전에 닥쳐라, 이 병신 새끼야.”

“알았어, 쳇.”

그렇게 계속 싸우는가 싶더니 점점 두 사람의 숨소리가 더욱 고조되었다.

“아, 아, 인하야, 좋아, 너무 좋아. 최고야….”

“핫, 아읏, 아으…. 하아아…!”

결국 누군가에게 들킬 건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살이 부딪쳤다 떨어지며 찰싹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나기 시작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에 누군가 부딪쳤다. 그리고 문까지 부서질 것처럼 거칠고 빠르게 흔들렸다. 유인하가 죽을 것 같은 신음을 흘리면서 헐떡거렸다.

“아응, 아, 아아…! 하아, 으응! 아! 아아! 아아아!”

“인하야, 인하야, 허억, 인하야…!”

이승원은 그 열기에 밀려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흠칫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누군가에게 들키는 줄 알았을 땐 심장이 아찔했다. 자신이 저런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딱 마주쳤다.

머리카락 한 톨도 흐트러지지 않은 키가 크고 근사한 남자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얼굴이 벌겋고 눈빛이 번들거렸으며 앞섶이 터질 것처럼 솟아 있었다. 온몸이 불쾌한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런 자신을 보고 당황한 이승원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그대로 화장실을 박차고 나왔다. 친구들의 섹스를 엿들으며 흥분하다니.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러지 마. 꼴불견이야. 나답지 않아. 인하도 그 개새끼도… 그냥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만약에, 만약에 지금까지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이 자신이고 그래서 저렇게 그를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게 자신이라면….

저런 식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아름다운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음식점에서 음미할 가치가 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들리는 듯 마는 듯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세련된 재즈 음악을 배경으로 별을 담은 듯한 부드러운 샴페인을 마시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아닌 얘기로도 배가 아프게 웃을 것이다. 그러고 난 후엔 야경이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고급스러운 스위트룸에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왕을 모시는 것처럼 발끝부터 하나하나 입을 맞추며 부드럽고 환상적인 사랑을 나눌 것이다.

‘그때 이긴 건 나야. 그때 이긴 건 난데….’

유인하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결국 자신이든 안정훈이든 섹스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하기 싫어서 그런 거라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억지로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 취급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승원은 단념했다.

그게 아닌 것인가. 이긴 건 자신인데 왜 안정훈에게 저런 것을 허락해주는 것인가. 그렇게 그에게 따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게 얼마나 꼴사나울지 훤히 보이는데도.

웨딩홀의 바깥에서 헐떡거리고 있는 남자가 이상해 보일 것은 자명했다. 이승원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표정을 굳힌 채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차로 가서 운전석에 앉았다.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가자 약간 안심이 되었다.

“하아.”

이승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고 합장을 하듯 입을 감쌌다. 눈을 감고 두근거림을 멈추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다시 울컥했다.

유인하는 도대체 왜 안정훈 같은 놈에게 저런 것을 허락하는가. 그 새끼가 유인하에게 무슨 짓을 했던가. 그런 걸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는가. 아니, 원래의 유인하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유인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건 이승원이 알던 유인하가 아니었다.

“왜, 왜….”

이승원은 욱신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핸들에 이마를 박은 채 괴로워했다. 가슴이 아팠다. 화가 났다. 손이 다 떨렸다. 용서할 수 없었다.

‘왜 그딴 새끼를 선택하는 거야? 너한텐 내가 있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를 붙잡고 외치고 싶었다. 그래, 자신은 그의 곁을 지키지 못했으니 자신을 선택하지 못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안정훈은 아니었다.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아는 것은 유인하일 것이다.

‘왜, 왜, 도대체 왜.’

[같이 할래?]

그러다가 문득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입에서 불쑥 욕이 튀어나왔다.

“개 같은 새끼.”

그래, 유인하가 원해서 저런 걸 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강간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칼까지 맞았다. 그걸 안정훈 그 개새끼가 이용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유인하는 협박당하고 있는 것뿐이다. 잊을 걸 잊어야지. 유인하가 자신보다 안정훈을 선택할 리가 없었다. 그 새끼가 유인하를 협박한 것이다!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아!”

참을 수가 없었다. 억눌러지지가 않았다. 이승원은 차 안에서 소리를 한 번 크게 질렀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이승원은 다시 차에서 내렸다. 웨딩홀의 건물로 빠르게 걸어갔다. 어떻게 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유인하를 만나고 싶었다. 역시 따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까의 화장실의 문을 열려고 하는데 바로 문이 확 열렸다. 안에서 유인하가 썩 신통치 않은 얼굴로 나왔다. 이승원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한번 확신했다.

“비켜.”

심기가 사나웠다. 할 때는 좋지만 나중에 좋지 않은 게 다 그렇듯. 유인하가 죄도 없는 이승원을 살벌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승원은 잠깐 안을 확인했다. 안정훈은 없었다. 신랑 들러리인 안정훈은 그렇게 자리를 오래 비우지 못했다. 이승원은 숨이 약간 거칠어져 있었다. 유인하의 목덜미에 아까 보지 못한 울혈들이 보였다. 그는 유인하의 손을 덥썩 잡았다.

“하지 마.”

“뭘?”

“그 개새끼랑 그런 거 하지 마.”

이승원은 그대로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유인하는 자연스럽게 다시 화장실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이승원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 개새끼 말만 그러는 거야. 절대 신고 못 해. 한 번 더 찔러도 걔는 안 그런다고.”

“뭐?”

유인하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이승원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이승원은 잠깐 숨을 멈췄다가 더욱 유인하를 밀어붙였다.

“내가 도와줄게.”

진짜야. 이승원은 유인하의 손을 꽉 잡았다. 유인하는 그의 얼굴을 순간 빤히 보며 진의를 의심했다.

“…….”

무기력함에 빠진 사람은 중심이 사라진 사람과 같달까. 유인하는 어느 때보다 더 취약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남의 뜻에 휘둘리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그 반의 반만큼만 휘둘렸어도 자존심이 상해 분노하고 엎어버렸겠지. 하지만 지금의 유인하는 무엇보다도 자극이 필요했다. 휘둘림이라도 아쉬운 것이다. 안 그러면 금세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남들에게 징징거리고 마는 것은 무력한 자신을 누군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나 좀 어떻게 해달라고. 그게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자각도 하지 못한다. 유인하는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는 짓은 똑같았다. 결국 똑같은 바보다. 유인하가 잠깐 이승원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쪽팔려서라도 넌 안 이럴 줄 알았는데.”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야.”

이승원이 바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인상을 약간 썼다. 폼 안 나는 짓은 안 하는 게 아니었나? 옛날에 이승원이 언제나 안정훈에게 이겼던 건 그가 언제나 이길 싸움에만 나섰기 때문이다. 유인하는 한 번 더 그를 아래위로 쳐다보았다.

“이럴 거면 그때 잠자코 빨지 그랬어?”

유인하가 웃었다. 이승원은 흠칫했다. 하지만 전혀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말했다.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라고 했잖아.”

“아니, 웃기잖아. 왜 갑자기….”

유인하는 약간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들었냐?”

“…….”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표정은 아니었다. 유인하가 픽 웃었다.

“아직도 나랑 하고 싶냐? 넌 자존심도 없냐?”

그 웃음엔 분명히 경멸이 담겨 있었다. 이승원은 그 사실을 무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의연한 척 대꾸했다.

“난 그런 거 아니야. 난 달라. 난 그냥 널….”

“닥쳐, 이 돼지 새끼야.”

이승원은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또 이런 폭언을 했다. 누구한테도 들어본 적 없었다, 유인하 말고는. 이승원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이라면 정색을 했을 텐데 유인하라서 상처받은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유인하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경멸의 색을 띠고 있는 유인하의 눈동자였다. 똑바로 이승원의 눈동자를 보았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승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겁쟁이. 저질. 돼지. 변태 새끼. 찌질이. 루저 새끼야, 넌 안정훈 같은 거한테도 지는 병신 중에서도 상병신이라고.”

유인하는 가장 혐오하는 것을 보는 눈길로 그 옛날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유일한 친구를 깔보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에게 곧잘 도대체 왜 이승원이 마음에 드냐고 물어보곤 했다. 별로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지금 보니 알겠다. 그는 언제나 모양이 나고 분위기가 있었다. 있어 보였다는 것이다. 유인하가 동경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친구로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유인하와 달리 남을 깔보는 일이 없이 착했다.

그런데 그런 놈도 결국엔 꼴사납기 짝이 없던 그 개새끼랑 피장파장이었다는 소리다. 자꾸 실소가 나왔다. 전과 다르게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흠을 잡기 위해서다. 괴롭히고 싶었다. 안정훈마저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데 마음에 들었던 친구라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아니야! 내가 언제! 진 적 없어! 저번에도 이긴 건 나야!”

이승원은 유인하의 밑도 끝도 없는 매도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졌다는 말에는 발끈했다. 유인하가 그의 뺨을 손으로 툭 밀었다.

“진짜 이기려면 죽였어야지.”

이승원은 다시금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유인하를 돌아보았다.

“죽이길 바랐어?”

그러자 유인하는 그냥 대꾸없이 이승원의 눈을 싸하게 보고 있다가 시선을 돌렸다.

“아니.”

유인하가 답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승원은 유인하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그를 잡아당기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밀어붙이고 싶은 것인지 애매하게 흔들거렸다. 언제나 단정한 그의 얼굴이 일렁거리는 것같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잔뜩 흐트러질 것처럼…. 그러곤 바로 아차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은 싫어. 밖에 나가서 제대로 얘기해.”

“싫은데. 너 같은 새끼한테 딱 어울리는 곳이잖아? 속이 시커먼 주제에.”

“아니라고. 도와줄게. 대가 같은 건 필요 없어. 절대 그 새끼 같은 짓 안 해. 그때 그건 실수였어. 난 네 친구야. 그러니까 하지 마.”

“왜?”

유인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서로의 허벅지가 닿을 것만 같았다. 이승원은 입을 다물었다. 유인하가 바로 아래에서 이승원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좆은 빨기 싫다고?”

그럼 패야 하나. 유인하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이승원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은 마음에 든다. 얼굴 말고?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미래를 보지 않는 사람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들은 할 수 없는 그런 폭력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게 된다.

“아니….”

이승원은 깜짝 놀라 시선을 홱 피했다. 유인하는 그의 눈빛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유인하가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아니면… 빨아줄까?”

일부러 누군가를 도발하는 것은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자포자기했을 때뿐이다. 유인하가 이승원의 다리 사이를 손으로 잡았다. 이승원은 헉, 하며 굳어버렸다. 그의 말에 나쁜 상상을 하는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유인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여느 때보다도 도발적인 눈빛이다.

“…….”

“내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지? 안정훈 그 새끼도 거짓말 못하는 편이긴 한데 넌 더 못해.”

그리고 유인하는 이승원의 다리 사이에서 손을 떼고 그의 어깨를 어깨로 퍽 치고 지나갔다. 이승원은 또 거절당했다는 생각이 심장이 뚝 떨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명치가 근질거렸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마하지마하지마하지마.’

이승원은 차가운 화장실 벽에 이마를 댔다. 유인하가 화장실 출입문을 열었다.

“진짜… 빨아도 돼?”

유인하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승원은 여전히 자신을 멈추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어코, 마치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볼품없이 작은 목소리가 이어 나왔다.

“네 거….”

*

“도와주고 싶다고 했잖아. 그걸 왜 못 믿어? 내가 구해줄 수 있어. 난 네 친구니까. 제일 친한 친구. 너도 그렇다고 말했잖아. 네가 그때 일만 용서해준다면 우린 평생 예전처럼 멋지게, 그렇게 지낼 수 있었어.”

이승원은 우뚝 선 채로 두 주먹을 쥔 채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이 맞다는 듯이. 유인하는 커버를 덮은 변기 위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그래,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승원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금연 장소인데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손에는 불붙은 담배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대꾸했다.

“자. 빨아도 된다니까? 왜 갑자기 일장연설이야?”

그러자 이승원은 더욱 궁지에 몰린 얼굴이 되었다가 한 손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 안경 밑을 쓸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깐 뒤로 한 바퀴 돌며 답답한 듯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난 원래 이런 짓 절대 안 해. 절대로. 너도 알겠지만, 아무한테도, 절대…. 네가 날 믿어주지 않으니까 하는 거야. 이러면 내 말대로 정훈이랑 안 하는 거지?”

“그런 소리는 안 했는데.”

그러자 이승원은 배신이라도 당했다는 듯,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표정으로 유인하를 보았다. 그러곤 스스로도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다는 걸 알긴 아는 것인지 표정이 한 번 더 무너졌다. 다시 얼굴을 가렸다. 유인하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네가 생각보다 훨씬 더 돌대가리라는 건 알겠다. 뭐냐, 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안 할 거면 간다?”

“아니, 아니….”

얼굴을 가린 손을 떼자 이승원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더 우수에 잠겨 있었다. 내가 이런 짓까지 하다니. 아아, 불쌍한 나. 그런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누가 보면 억지로 시키는 줄 알겠다.

그리고 유인하와 눈이 마주쳤다. 유인하는 자신의 바지 앞섶을 눈동자로 가리켰다. 이승원의 숨이 서서히 거칠어졌다. 그러고는 움찔하듯이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스스로도 눈을 크게 뜨며 놀라더니, 또 안 그럴 것 같다가 그대로 천천히 유인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것만으로도 심하게 헐떡거렸다. 유인하도 약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싫어? 나한테 무릎 꿇는 거.”

“…….”

“예전이면 모르겠지만 지금 이러는 건 좀 억울해? 지금은 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텐데.”

“…….”

“아닌가? 아.”

유인하는 조금 더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웃기다는 듯했다. 예전에 안정훈에게 괴상한 짓을 시키고 괴롭히며 즐거워하던 딱 그런 웃음이었다. 우스꽝스러운 광대를 보는 듯한…. 이승원은 너무 심장이 뛰어서 밖으로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셔츠가 등에 붙어 불쾌했다.

“그렇게 무릎 꿇고 싶었으면 진작 말하지.”

유인하는 이승원의 팽팽한 앞섶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이승원의 근사하고 잘생긴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유인하가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이승원은 심하게 헐떡거리며 그의 손을 보고 있다가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싫은 거면….”

이승원은 작게 물었다. 유인하는 흥미가 조금 있는 듯한 얼굴로 이승원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니, 한 번 해봐.”

내적 갈등이 여전히 극심한 이승원은 심하게 헐떡거리다 윽, 하고 신음을 흘리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거리를 가늠하지 못해 그대로 유인하의 속옷에 코를 푹 박았다. 깜짝 놀랐다. 정액 냄새가 조금 났다. 맞다. 바로 아까 전에 유인하는 안정훈과도 했었다.

‘마, 말도 안 돼. 지, 진짜로….’

이승원은 유인하의 두 무릎을 잡았다. 눈을 슬그머니 떴다. 유인하의 속옷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유인하의 눈치를 한 번 확인하고 유인하의 속옷을 이로 물려고 했다가 아차, 하고 두 손으로 잡았다.

안정훈이 이승원을 겁쟁이, 겁쟁이, 하고 부르곤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정말 겁쟁이였다. 그리고 유인하는 그게 나쁘지 않았다. 웃겼다. 유인하는 미소를 띤 채 이승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마음을 끌었다. 용기가 났다. 이승원은 유인하의 속옷을 내리고 그의 것에 입을 맞췄다.

“킥킥.”

이승원은 저도 모르게 열중해서 유인하를 핥고 있다가 그런 웃음 소리를 듣고 시선을 들었다. 유인하가 몹시나 비웃는 얼굴로 휴대폰을 들어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이승원은 깜짝 놀라 입술을 떨었다.

“찍…었어?”

“왜? 계속해.”

유인하가 손을 뻗어 이승원의 안경을 벗겼다. 유인하는 두껍고 못생긴 이승원의 뿔테 안경을 한 번 돌려보았다.

“이런 거 왜 쓰냐? 이제 보니까 너 얼굴 빼고는 쓸모도 없는 새끼인 거 같은데.”

유인하는 그 안경을 그냥 성의 없이 뒤로 던져버렸다. 플라스틱 안경이 벽과 바닥에 부딪히며 가벼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승원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콧등에 안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걸 검지로 살살 만졌다.

“네 얼굴은 아직도 좋아.”

이승원은 그 말에 얼굴이 좀 더 벌게졌다. 그리곤 마치 그걸 숨기듯 인상을 썼다. 카메라로 찍는 것을 마치 모르는 척 다시 유인하의 성기를 핥기 시작했다. 끝을 핥기 시작하자 유인하가 움찔했다.

“으응….”

이승원은 더욱 열심히 그를 핥았다. 고환부터 기둥을 쭉 핥아 올리고 귀두의 날개 부분도 세세하게 핥았다. 처음 할 때 안정훈은 정말 못했다. 하지만 이승원은 이상하게 제법 잘했다. 하긴, 유인하 만큼은 아닐지라도 이승원도 묘하게 못 하는 게 없었다.

“뭐야, 너? 이런 거 해봤어? 잘하는데?”

“아니….”

이승원은 생각보다 열중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입을 확 뗐다. 어떻게 하면 유인하가 마음에 들어 할까, 그것만 생각하면서 했더니 그에게 그것이 어떻게 보일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천박하게 보였을까? 이, 이런 건 처음인데, 당연히…!’

이승원의 멀끔한 얼굴이 벌게졌다. 유인하는 또 웃었다. 하긴, 안정훈은 노력파다. 이승원도 노력하지 않아도 뭐든 그럭저럭 잘하는 놈이었다. 유인하는 그의 정수리를 붙잡고 짓눌렀다.

“계속해.”

미칠 것 같았다. 이승원이라고 유인하의 위압적인 면모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잘 아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이승원에게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별로 덥지도 않은데 이승원의 목덜미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등골이 오싹거렸다.

그리고 드디어 이승원은 입안에 넣고 빨까 말까 고민했다. 전에는 안정훈이 있어서 그렇게 싫었던 걸까? 유인하와 둘만 있으니 그때의 ‘이런 건 절대 안 돼.’라는 감각이 조금 약했다. 하지만 그래도 주저되었다. 유인하가 너무 자신을 창부처럼 보면 어쩌는가. 유인하는 동영상을 양껏 찍고 휴대폰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이승원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재미있네.”

유인하는 갈수록 부쩍 무기력함을 느껴 잠만 자기 일쑤였다. 활력 넘치는 젊은이가 시름시름 앓는 노인네 같은 생활을 하니 따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섹스는 술처럼 내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이의 공백을 채우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술이라도 마실 땐 파티를 잔뜩 열고 운동을 하거나 모델을 하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드럼을 배우거나 이것저것 손을 안 대본 것이 없었다. 예전엔 돈이 없어서 못 했던 것들도 잔뜩 해봤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렇게 큰 감흥은 일지 않았다. 전에 윈드서핑을 배웠을 땐 그렇게 좋았는데 지금은 왜 이런 것일까? 답답하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 그냥 심심해서 온 것이다. 옛날 친구들이라도 보면 조금 자극이라도 될 것 같고 그러면 조금은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흥미가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역시나 섹스 정도나 괜찮았다. 그리고 그건 안정훈이든 이승원이든 별로 상관없었다. 공중변소에 대해 기대치가 높은 사람은 별로 없는 법이니까.

“하아, 이제 갈 것 같아….”

그리고 유인하는 이승원의 머리를 잡더니 허리를 움직여 직접 그의 입안에 푹 하고 자신의 것을 박았다. 이승원은 깜짝 놀라 그의 허벅지를 잡았다.

“으웁! 읍! 허억!”

숨이 막혔다. 죽을 것 같았다. 유인하는 그의 머리채를 잡은 채 자비 없이 허리짓을 했다.

‘주, 죽을 것 같아!’

그 말끔하고 고상한 귀공자 같던 이승원의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눈가는 눈물범벅에 얼굴은 벌겋고 머리카락은 전부 흐트러졌다. 숨이 막혀 눈이 거의 돌아갔다. 그리고 유인하는 결국 그의 목구멍까지 찔러 범하고 사정했다.

“으우웁!”

“하아, 하하, 너도 진짜 별거 없다.”

유인하는 이승원의 머리채를 던지듯 툭 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승원은 바닥에 손을 짚고 눈물을 흘리며 크게 기침을 했다. 유인하가 옷을 추스르며 화장실의 거울을 보고 있었다. 이승원은 겨우 기침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오금이 다 떨린다. 속옷이 축축했다. 이승원은 자신의 젖은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유인하의 손을 잡았다. 유인하가 그를 돌아보았다.

“나라고 말해줘.”

이런 것까지 당했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이승원은 마치 간직해뒀던 순결을 홀랑 빼앗긴 사람 같은 마음이 되어 유인하를 붙잡았다.

“뭘?”

“그때 내가 실수 안 했으면… 그랬으면 날 선택했을 거라고 말해줘.”

유인하는 픽 웃고는, 한 번 더 웃었다. 유인하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새끼들이 왜 이렇게 자신에게 목을 매는지 말이다.

“하하하.”

그는 그렇게나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살았다. 자신이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주제에 누군가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면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무의식중에 꿍꿍이가 없다면 자신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언제부턴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바로 본인이 되었다.

“벌려.”

유인하가 말했다. 이승원은 흠칫했다가 설마,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인하는 전처럼 그의 잘생긴 얼굴을 잡고 그의 입에 엄지를 넣어 입술을 벌리게 했다. 유인하는 거의 끝까지 피운 담뱃불을 그의 혀에 지졌다. 안 그래도 엉망인 그를 재떨이처럼 사용했다.

“병신.”

“…….”

유인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를 한 번 따먹고 버린 채 화장실을 나갔다.

*

결혼식 피로연은 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 친구들은 대부분 그를 반겨주었다. 하지만 곧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불평불만을 해도 열심히 제 몫을 해내고 살고 있는 사람들. 유인하도 분명 이제 돈도 나름 벌고 있는데도 자신이 제 몫을 하는 사람이라는 자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일까. 스스로는 금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 연락이 왔다. 딱 유인하의 이미지를 원하는 광고주가 있다고 했다. 액수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래, 이런 거 조금만 더 하자.’

하지만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술이 없으면 하기가 힘든 일이었다.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의 관음 대상이나 되는 일이었다. 유인하는 그 일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유인하가 바닥까지 떨어졌다지만 시선의 불쾌감은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리 오라고 하면 와야 하고 저리 가라고 하면 가야 하고 웃으라면 웃어야 하고 울라면 울어야 했다.

그래서 당일 안정훈의 차를 타고 일을 하러 가는 내내 유인하의 심기는 불편해 보였다. 술이 고팠다.

‘한 번 빼고 갈까.’

유인하는 내리기 전에 안정훈에게 한 번 빨게 하고 가야겠다고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기분이 축축 처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안정훈의 의사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아니, 뭐, 좋아하겠지.

‘병신이니까.’

흐르듯 그렇게 생각하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것보다 더 나은 옵션이 있었다. 차의 배기음을 자장가 삼아 잠든 것이다. 그렇게 잠을 많이 자는데도 또 잠이 오는 것이 신기했다. 선잠이라 그럴까.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꿈을 많이 꿨다. 기억나는 꿈은 7살 땐가. 티라노사우루스가 그 작은 발로 엄마와 아빠를 잡아가서 울면서 잠에서 깬 적이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다 갑자기 떨어지는 꿈을 많이 꿨다.

잠들기 전까지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야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어떤 남자의 무릎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새카만 가죽 의자가 뒤로 잔뜩 기울어져 있었다. 유인하는 그 남자가 누군지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그의 하반신과 자신의 하반신을 빈틈없이 붙여 서로의 옷 위를 문질러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유인하는 아주 능숙하게 허리를 흔들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 남자였다. 순간 번개라도 친 줄 알았다. 정수리부터 미추 끝까지 짜릿했다.

드디어.

더욱 흥분한 유인하는 그의 무뚝뚝한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눈을 마주쳤다. 오랜 기다림 끝에 사냥감을 잡은 맹수처럼 흥분했다. 유인하는 그의 조각같이 무심한 얼굴을 쓰다듬고는 바로 아래로 손을 내렸다.

그의 속살을 보고 싶었다. 언뜻 보면 차갑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따뜻한 이 남자의 속에도 뜨거운 무언가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아랫배가 두근거렸다.

당신은 시시한 남자가 아니야.

유인하는 껍질을 벗기듯 그의 옷을 벗기고 자신도 아랫도리만 벌거벗어 곧바로 하나가 되었다. 차가운 석고상 같은 그의 얼굴이 살아 움직였다.

아…!

유인하는 턱을 치켜들며 음란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바로 그가 앉은 가죽 의자에 두 팔꿈치를 대고 그의 얼굴을 코가 닿을 거리에서 내려다보며 다시 엉덩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를 먹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다.

당신은 내 거야.

그렇게 말하듯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순종은 미덕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불만 없이 잘 따르는 그가 좋았다. 이대로 이 남자를 천천히 음미하며 성에 찰 때까지 마셔버릴 작정이었다.

그때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남자가 유인하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커다랗고 뜨거워 언제나 좋아하던 손이었다. 강하게 끌어당기자 유인하는 뜨거운 숨을 뱉으며 입술을 뗐다. 그 남자답지 않은 적극성이다.

눈을 떴을 땐 새카맣고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했다. 하지만 그 남자와 달리 순하게 잘 웃는 눈매를 가졌다. 안정훈은 깜짝 놀란 유인하의 눈을 똑바로 보며 그의 입술을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기분 좋아?

애정이 깊은 목소리였다. 유인하는 화들짝 놀라 굳어버렸다. 안정훈은 언제나 유인하의 약점과 실수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유인하의 엉덩이를 잡고 멋대로, 격렬하게 유인하를 탐하기 시작했다.

이거 놔!

자신을 속인 상대에 대한 분함, 속은 자신에 대한 분노, 그런데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몸의 쾌락은 아주 훌륭한 삼중주를 이뤘다. 유인하는 그의 두 팔에 손톱을 전부 박아 꽉 쥐며 그의 몸에 온몸을 기댄 채 정신없이 신음을 흘렸다.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섹시한 신음을 흘렸다. 안정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잔뜩 헐떡거렸다. 냄새가 났다. 그 순간엔 그게 뭐가 잘못된 건지 깨닫지 못했다. 곧 참지 못하고 상체를 들고 온몸을 뻣뻣하게 들며 경련했다. 아래가 욱신거리고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떠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기분 좋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이상했다. 얼굴이 창백하고 물기가 있는 눈과 입안은 새카맣게 썩었다. 유인하를 안고 있는 온몸의 피부가 밀가루처럼 허옇게 뜨고 핏줄이 새카맣게 드러나 썩어가고 있었다. 깜짝 놀란 유인하가 그의 무릎에서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누군가에게 등을 부딪쳤다. 너무 놀라서 바로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이번엔 이승원이었다. 똑같이 시체처럼 썩어가고 있었다. 그의 우아한 얼굴의 한쪽이 허물어지고 분홍빛 입술이 새카맣다. 생기 없는 눈동자를 돌려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유인하를 붙잡으려고 했다. 유인하는 황급히 빠져나갔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샌가 거긴 온통 움직이는 시체가 가득했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역시 알 수 없다. 전부 아는 얼굴이었다. 유인하가 아는 모두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없었다.

유인하는 겨우 그곳을 빠져나왔다. 안도감을 느낄 찰나 어디선가 또 썩은 냄새가 났다. 주변을 황급히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경계했다. 하지만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알 수 없었다. 무작정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이상한 느낌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손에 검은 핏줄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 두 눈과 입안이 썩은 자기 자신이 똑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유인하는 눈을 번쩍 떴다. 생생한 꿈이었다.

“일어났어?”

그때 안정훈이 말을 걸었다.

“이번 건 꽤 큰 건인가 봐? 하늘이가 그러던데.”

“…뭐?”

아주 생생한 꿈이었는데도 순식간에 꿈의 대부분을 잊었다. 오직 공포감만이 남았다. 공포와 설렘은 사실 같은 생리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감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달랐다. 공포로 뛰는 심장은 언제나 차갑다. 식은땀이 흐른다.

유인하는 자신이 안정훈의 차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을 하러 가고 있는 중이었다. 별로 그렇게 많이 잠든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도 가는 길이었다. 꿈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기억도 거진 잃었는데도 아직도 소름이 돋았다. 유인하는 인상을 잔뜩 쓰고 자신의 몸을 두 팔로 감쌌다.

“이제 다른 사람들도 웬만하면 알겠는데?”

안정훈은 그런 유인하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유인하가 보통 얼굴도 아니고 공중파고 어디고 뿌려대는데 못 알아채는 게 더 드물 것이다. 이번 신영빈의 결혼식에서도 몇몇 친구들이 안정훈에게 슬쩍 물어 오기도 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이걸 대체 왜 하지? 돈? 돈을 왜 벌어. 내가 다 주는데. 안 쓰는 것도 아니면서.’

유인하는 사람을 싫어하지만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고통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많은 찬사 속에서도 꼭 부정적인 것만 보고 말 것이다. 그래서 안정훈은 유인하가 덥석 아는 사람이 소개한 모델 일을 시작했을 때 정말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좋아하기는커녕 싫어할 일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게다가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형이었다. 인하와 형 사이에는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긴 했다. 형은 나비가 죽었다고 하곤 그 뒤론 나비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유인하도 고양이 시절의 일에 대해서는 이제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물론 안정훈도 구태여 물어보진 않았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안 그래도 유인하는 권시혁을 싫어했다. 형은 아직도 나비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안정훈은 형에게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에 사람 모습을 들킨 거라면… 형도 알게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괜찮은 건가?’

역시 아니겠지?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나 찌를 때 보니까 고양이랑 사람이랑 이제 자유자재로 왔다갔다하는 것 같던데 일부러 형한테 들키려고 한 게 아니라면 형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 형에게 들킬 일은 없는 것이다.

‘뭐, 형이 설마 나비가 고양이가 아니었고 날 찔렀다고 해도 크게 반응할 것 같진….’

자신의 형이긴 하지만 참… 뭐랄까, 독특한 성격이라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무슨 사고가 있었던 거겠지? 형은 나비를 제법 좋아했으니 상심하여 말을 하지 않는 것뿐일 것이다. 원래 형은 뭔가에 집착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 상심이 나름 클 수도 있겠다. 인하는… 고소해했을까? 그래, 다 가진 남자가 고작 고양이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나 통쾌했겠는가. 보통 사람들은 형 같은 사람이 고생하는 걸 제일 좋아한다. 불쌍한 우리 형.

“그냥 재미로 하던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도 이런 거 싫어하잖아? 왜 해? 내가 카드도 줬는데, 그거 한도 1억이나 하는데….”

안정훈이 유인하의 눈치를 보면서 그렇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제 유인하는 꿈의 내용을 거의 잊어버렸다. 하지만 불쾌감만은 남아 신경질적으로 조수석에 등을 대고 겨우 힘을 뺐다. 심드렁하게 답했다.

“글쎄…. 벌 수 있을 때 벌고 싶은 것뿐이야. 그것도 나이 조금만 더 들면 못할 텐데. 누가 알아보든 뭐, 앞으로 만날 것도 아니고.”

“전에 결혼식에도 왔으면서….”

“시시했어. 다들 시시하게 살더라.”

유인하는 하품을 했다.

“형이 보면 어떡해?”

안정훈은 아닌 척 툭 하고 본론을 꺼냈다. 그래도 유인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별로. 이제 아무 상관 없잖아, 그 남자.”

“그렇지….”

역시 들킨 건 아닌 모양이다. 안정훈은 안심했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촬영장에 데려다주고 잠깐 볼일을 보러 가버렸다. 유인하는 그에게 펠라를 시키려고 했던 걸 까먹었다. 데리러 온다고 했다. 유인하는 벌써 피곤한 느낌이었다.

‘저 새끼도 진짜 피곤하지. 이제 저 새끼 집 나올까? 내가 왜 거기 사는지 모르겠네. 하는 것도 질리고.’

역시 하는 거면 여자가 좋지. 하지만 여자는 책임질 것이 많아서 불안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름 책임질 일 없는 다른 옵션이 생각났다. 이승원. 그래, 뭔가 새로운 게 필요하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요새는 뭔가를 느끼기가 힘들다. 기분이 축축 처지기만 한다.

“안녕하세요.”

유인하가 오자 사람들이 인사를 했다. 한창 술을 마실 땐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졌다. 유인하는 대충 인사를 받아주고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아무도 쉽게 말을 걸지 않는다.

[형이 보면 어떡해?]

“어쩌라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유인하가 까칠하게 중얼거렸다. 심기가 몹시 나빠졌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금주 중이라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오늘 촬영 어땠어요?”

“뭐, 그냥….”.

가을도 이제 거의 다 가버렸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가을 태풍이 지나간 하늘이 아주 맑았다.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태풍일 것이다. 해가 지니 풀벌레가 하나둘 울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을 틈타 그는 잠시 휴대폰으로 뭔가를 읽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와서 그에게 종이컵을 하나 주었다. 따뜻한 커피였다. 유인하는 그걸 준 사람에게는 시선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한 걸음 뒤에서 유인하를 아래에서 위까지 몇 번이고 훑어보았다.

키가 훤칠하고 자세가 바르다. 비율이 완벽해서 온몸을 감싼 수트의 선이 딱 떨어진다. 팔과 가슴, 허벅지가 탄탄하여 수트 위로도 볼륨감이 은근히 드러났다. 저도 모르게 어깨부터 허벅지까지 스윽 훑어보게 만들 정도로 선이 예술이었다. 숱이 많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아주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적당한 두께의 새빨간 입술에 눈썹과 속눈썹이 아주 짙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밝은색의 눈동자가 가진 힘이 아주 강렬했다.

눈동자는 칼날 같고 굳게 다문 입술은 방어적이다. 사물을 직시하는 눈빛에서 총명함을 숨길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야성적이기도 했다.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하지만 가끔 짙은 권태로움이 그를 성숙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아니, 성숙이라기보단 색기다. 그는 색이 화려한 남자였다. 그래서 그를 쓰는 감독들은 전부 그를 수트나 제복, 교복으로 꽁꽁 싸맸다.

“어렸을 때부터 캐스팅 제의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왜 빨리 이쪽으로 안 들어왔어요?”

그의 말에 유인하는 촬영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관망하며 대답했다.

“공부를 좀 오래 해서요.”

유인하야 애초부터 범상치 않은 외모였으니 어렸을 때부터 이런 제의는 질리도록 받았다. 특히나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는 친구들과 강남을 조금만 돌아다녀도 명함을 대여섯 장씩 받곤 했다. 하지만 유인하는 이런 일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제안에 모욕감을 느끼곤 했다.

자신이 고작 사람들에게 아양이나 떨면서 사는 인간이나 될 사람으로 보인단 말인가? 그것도 감독도 아니고 배우?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매춘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는데. 유인하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시키는 대로만 하는 예쁜 마네킹이나 하면서 살라고? 어린 유인하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였다.

그 이후로 4개월이 흘렀다. 말 그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싫었다. 닥치는 대로 흥미가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했다. 하지만 곧 여기서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허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뭘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아무것에나 손을 대고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그런 건 고등학교 때랑 크게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도 시도와 심심풀이는 달랐다.

그래서일까.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늘어난 건. 그건 아무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일 테다. 포기한 것이다, 원하던 대로. 손발이 묶여 있지 않아도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에 점차로 무감각해졌다.

“윤지민은 금방 하고 갔죠? 봤어요? 전 늦게 와서 못 봤는데.”

“네.”

“실물이 더 예뻐요? 어때요?”

“똑같았어요.”

“아으, 아깝다. 제트 성혁이랑 사귄다는 거 진짤까요? 윤지민이 아깝다….”

아까부터 말을 자꾸 거는 이 남자는 유인하가 일을 받는 소속사에 소속된 연기자 지망생이었다. 5살 정도 어렸다. 자꾸 별것도 아닌 일에 방방거리고 말을 걸고 가십을 씹으려고 해서 성가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고 구부정한 자세로 계속 다리를 떤다.

‘왜 든 게 없는 것들은 꼭 이렇게 티를 내지? 자랑인가….’

유인하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재잘거리는 그의 얼굴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그것도 모르니까 그렇지.’

당연한 것을 의아해하는 자신도 문제가 있다. 결국 이런 사람들과 접할 수밖에 없다는 건 자신도 엇비슷한 클래스라는 말일 뿐이다.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거나 다름없겠지.

서른 살이 되면 막연히 어엿한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정장을 입고 다니고 번듯한 집과 직장이 있고. 마치 정해진 것처럼. 하지만 정해진 건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별로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정장을 입고 일을 하긴 하네.’

광고할 차가 외제차처럼 세련되고 멋있었다. 유인하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촬영장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흘러가 아무것도 아닐 것을 보는 것처럼. 그래서일까.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돈 들고 외국이나 나가버릴까?’

좋아서 여기 태어난 것도 아니고 미련도 없다. 예전엔 해외여행에 대해서는 아쉽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가면 확실히 여기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좋을까? 새로운 내가 된 것 같지 않을까?

‘이민 쉽게 나갈 수 있는 데가 어디 있지?’

유인하는 그런 충동에 휩싸였다. 그리고 의외로 밑도 끝도 없이 진지해졌다. 당장이라도 한국을 떠나 이역만리 타지로 떠날 것처럼.

‘물가 좀 싼 나라로 가면 되지 않을까?’

남은 촬영 내내 그 생각만 했다. 그게 마치 자신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바닷가 앞에 작은 집 하나 사고 서핑이나 하고 사는 거야.’

스튜디오 촬영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당장이라도 비행기 티켓을 끊을 기세였다. 그간 아무것에도 의욕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살짝 들뜬 것처럼 느껴지는 지금의 자신이 아주 오랜만에 조금 기분 좋게 느껴지기도 했다. 집에 돌아가지 않고 커피숍 같은 데 앉아서 이민 관련 정보나 찾아볼까 했다. 안정훈에게는 오지 말라는 메시지만 보내고 근처에 있는 큰 커피숍을 지도 어플리케이션으로 찾았다. 조금 걸어가니 명품 거리가 나왔다. 또 묘한 충동이 들었다.

‘나도 이런 거나 사볼까?’

안정훈이 사준 것은 제법 있었지만 잘 모르는 것뿐이었다. 여기 있는 것은 죄다 누구나 알 법한 명품들뿐이었다. 유인하는 한 번도 이런 걸 제 돈으로 사본 적이 없었다. 이런 걸 사면 뭔가 다를까, 특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해외 이민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이제는 명품 간판을 하나하나 세어 보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도 어떤 도피처를 찾고 있었다. 술이나 섹스 같은, 아니면 이민이나 명품 같은 것이다. 인생을 지배하고 있는 무의미함과 무료함에 반발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여전히 더 나아지고자 하는 욕구가 그의 안에 있었다. 마치 DNA에 새겨진 것처럼. 이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스스로는 이제 인지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때 커다란 검은 차가 한 대 길 건너편을 미끄러지다 유인하가 향하고 있던 커피숍 앞에 섰다. 눈에 익은 차종이었다. 수행 기사가 차의 왼쪽 뒷좌석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고급 커피숍에 들어갔다.

수행 기사는 미리 음료를 시키기 위해 먼저 들어간 모양이다. 곧 운전기사가 내려 뒷좌석의 문을 다시 열었다. 상석에서도 사람이 하나 내렸다. 문을 열어주는 운전기사를 지나쳐 등장한 남자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정장의 뒷모습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키가 아주 컸다.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일처럼 자연스러웠다. 세련된 거리, 멋진 상점들과 비싼 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유인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옆으로 몇 걸음 걸으며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게로 향하는 남자의 얼굴이 건너편에서 보일 리가 없었다. 그가 가게로 들어가고 나서야 핫, 하고 얼른 신호등을 보았다. 아직 빨간불이었다. 심장이 뛰고 열기가 올랐다.

갑자기 의식하지도 않은 새에 누군가의 목소리와 냄새와 손길이 전부 되살아났다.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는 것처럼. 털이 솟구치는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발치로 뛰어가 몸을 비비고 싶었다. 그를 부르고 싶었다. 그의 품에 안겨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싶었다. 그의 손길을 느끼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싶다.

‘가지 마.’

아직 가지 마. 기다려. 기다려. 뭐가 문제인 걸까. 유인하는 그 순간 나비로 돌아가 버렸다. 조금 닮은 뒷모습을 본 것만으로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과거도, 현재도. 마치 나비처럼, 집으로 돌아온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알아듣고 달려가는 집고양이처럼 마음이 달았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편지 칼. 꿰뚫린 목. 피와 죽음. 산 채로 묻혔던 마지막.

그제야 유인하는 아… 하고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자신의 선 자리를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집고양이가 아니었다. 나비는 죽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 남자가 아닐 거야. 아니야.’

아니, 그 남자면 뭐가 어때서? 상관없잖아. 이제 전부 상관없는 일이야. 유인하는 뒤돌아섰다. 커피숍이라면 저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 내가 왜 피해?’

버린 건 그 남자잖아. 그걸로 끝난 거야. 내가 먼저 죽이려고 했어. 아무렇지도 않아. 바로 눈앞에 있어도 아무렇지 않을 자신 있다. 유인하는 다시 횡단보도를 마주했다. 신호가 빨간불로 돌아가 있었다. 신호가 다시 바뀌기를 기다렸다.

쿵. 쿵쿵. 쿵쿵쿵쿵.

심장이 갈수록 강하게 뛰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이러다 심장이 터져서 죽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아찔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유인하는 뒷걸음질을 쳤다.

이번에야말로 죽는 게 아닐까? 유인하의 머릿속에는 말도 안 되는 이미지가 연달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그 남자의 모습과 뒤이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앞뒤도 맞지 않는 공포스러운 이미지일 뿐인데도 가슴에 박혔다. 그리고 바로 잊어버렸지만 그 공포감은 그대로 이어졌다.

유인하는 다시 뒤로 홱 돌아섰다. 그리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커피숍에서 멀어질수록 천천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누구한테서도 도망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남자에게서는 항상 이렇게 쥐새끼처럼 도망쳐야 하는 걸까.

‘아직도?’

유인하는 우뚝 길 한복판에 섰다. 자존심이 상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장 뒤돌아 달려가 그의 멱살이라도 붙잡고 당신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소리라도 지르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지금 뭘 해야 할지도, 내가 누군지도. 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인간으로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헛되이 살아야 하는 걸까?

하루가 너무 길다. 침대에 누워 지나가는 시간을 세다 보면 이유 없이 숨이 막힌다. 예전이었으면 쉴 새 없이 웃으며 봤을 만화나 TV 프로그램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루가 저물어 갈 때쯤부터 심장이 죄이는 듯한 증상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고칠 수도 없었다. 밤이 깊어 갈수록 증상은 더 심해지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으니 긴 하루는 도통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1분 1초도 허비하지 않고 살던 삶은 멀기만 하고 더 이상 뭘 해야 할지도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길고 긴 하루가 지나 문득 뒤를 돌아보면 일주일과 한 달과 1년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 있어 모골이 송연하다. 그렇게 앞으로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린 하루와 화살보다 빠른 10년을 보낼 것이라 생각하면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런 삶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유인하는 숨을 잠깐 멈췄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또, 또또…! 그런 생각이 무기력했던 유인하의 분노를 화르륵 불러일으켰다. 이젠 없는 줄 알았던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친구의 등이나 처먹으며 사는 주제에 도대체 이 자존심은 뭐고, 뭐가 그렇게 분하단 말인가.

심장이 쑤셨다. 유인하는 가슴 위를 꽉 쥐었다. 몇 달간 덮어서 꾹 눌러 놓기만 했던 것이, 외면했던 것들이 불쑥 솟아올랐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라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건 바라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아무것도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부모. 형제. 친구. 누군가 유인하를 하찮게 취급할 때마다 단 한 번도 따져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원한을 가졌다.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하는 짓이 그들이 유인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설명했다. 유인하는 절대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자신에게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나약한 인간들이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고작 그런 것에 진다면, 그런 자신은 얼마나 더 나약하단 말인가.

그런데 스스로를 죽이려고 했다. 더 이상 자신조차 조금도 믿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꼬이고 엉켰다. 더 이상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그 남자도. 그러니까 그냥 전부 잘라버리고 없던 일로 하기로 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러면 되는 것 아니었나?

분명히 괜찮아졌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의 생각 같은 건 거의 하지도 않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이었다.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전과는 달랐다. 전에는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아도 그가 쓰다듬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그걸 바라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제는 쓰다듬어줘봤자 가슴만 아플 것 아닌가.

그걸 알면서도, 이 갑갑함은 뭘까. 이젠 이 마음이 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유인하는 실소라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소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곧 마음이 초조하고 다급해졌다. 뭔가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런 모든 것을 보상할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만 같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외국에 나가서 살자. 명품도 잔뜩 사자.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게 뭐든….’

차라리 불행에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걸 보상할 만한 게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손해를 보는 게 아니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런 이유도, 그런 보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걸 아니까 그런 걸 바라는 스스로가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잖아…. 그렇잖아….’

지금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 왜? 지금은 쓰다듬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미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괜찮았다. 분명히 나도 잊어버렸다. 모든 건 끝났다. 끝나버렸다.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일까?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데도.

[형이 보면 어떡해?]

하고 많은 일 중에 어째서 이런 일을 했을까? 가장 싫어하던 일 중의 하나였다. 남들에게 관음당하고 누군가 알아보고 비아냥거리거나 해코지라도 할까 봐 경계심만 점점 올라갈 뿐이다. 그 남자가 볼 수 있다는 걸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이미 어딘가에서 유인하가 나온 광고나 화보를 봤을지도 모른다.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을지 모른다. 알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지도. 상관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오늘 찍은 건 알아볼 수 있을까? 그가 발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찾으러… 오면?

‘절대 싫어.’

유인하는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을 했을까? 안정훈의 말대로 쓸 돈이 없어서 하는 것도 아니면서. 공짜로 펑펑 쓸 수 있는 돈이 주어졌는데. 그런 걸 평생 원했던 게 아니었던가. 유인하는 그런 자신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는 고양이로 변할 수도 없었다. 그가 유인하에게 티끌만큼이라도 바랄 만한 건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다. 유인하도 자신을 쓰레기만도 못하게 버려버린 그에게 원한도 생기지 않았다. 그냥 없었던 일로 영원히 잊어버릴 수 있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런데도 유인하는 구태여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을 했다. 술을 마셔가면서.

‘나는 화가 난 건가? 슬픈 건가?’

그 남자가 날 버릴 줄 알았는데도 버렸다고 화가 나나? 이제 와서? 분노는 뭐고 슬픔은 뭔지도 이제는 알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으니까. 다만 괴로움만큼은 심장을 좀먹었다. 괴롭고 싶지 않았다. 그치만 어째서 괴로운지도 모르니까 고칠 방법이 없다.

진공에 얇디얇은 겉껍질을 하나 뒤집어씌운 게 지금의 유인하였다. 그리고 심장이 있어야 할 곳에 눈꺼풀이 없는 커다란 눈이 하나 있었다. 그저 모든 것을 끊임없이 지켜보고 있는. 서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게 항상 유인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유인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시선이었다.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시선.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뭔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그때 죽어버린 건 역시 살아나지 못한 걸까.

그 남자와 아주 조금 비슷한 남자의 뒷모습을 본 것만으로 지금까지의 자신이 얼마나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삶.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 마치 그 남자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전혀 그 남자 같지 않았다. 그 남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몰라서 그렇게 산 게 아니었다. 알아도 그렇게 살 수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유인하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직시하는 것이 무서웠다. 언제까지고 모르는 척하고 멋대로 믿고 싶었다.

문득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자신이 아니라 그 남자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래도 조금은 슬퍼했을까?’

그 남자는 내 죽음을 애도해줬을까? 내가 왜 사람으로 변했는지 그 남자는 이해하고 있을까? 정말로 날 그렇게 쓰레기처럼 버려버린 걸까? 조금도 불쌍하다고 생각해주지 않은 것일까? 이제는 잊어버렸을까? 이게 나는 정말 궁금한 건가? 나는 그 남자에게 여전히 뭔가 바라고 있는 걸까? 바라면?

미치겠는 건 그게 왜 궁금한지는 모르겠다. 궁금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미 끝나버렸는데. 아무것도 되돌이킬 수가 없는데. 만나고 싶지도 않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궁금한가? 미친 새끼.

예전에는 바라는 게 많았어도 그걸 지금 할 수 없는 이유를 아주 잘 만들어내서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그것도 지쳐버린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다. 유인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징징거리기만 하는 인간을 제일 싫어한다. 지금은 바라기도 전에 엄포를 놓는 피 묻은 몽둥이가 마음 속에 놓여 있었다. 무엇을 바라는지 입도 뻥끗하기 전에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고 매질을 흠씬 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유인하는 바라는 게 없는 게 아니라 무언가 바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보고 싶은데도 보고 싶어 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칠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 남자의 생각을 하기라도 하면 득달같이 자기 자신을 협박했다. 절대로 보고 싶어 하면 안 된다고. 그 남자는 적이나 다름없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 남자의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아무런 윽박도 지르지 않았다. 그냥 마음속에 무서운 몽둥이가 하나 놓여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냥 모르겠다. 그래서 답답하다.

전처럼 돈이 궁하지도 않았다. 꼴을 보는 것만으로 싫어 자기혐오마저 드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것도 아니다.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친구가 무해함을 연기하며 속이려 드는 것도 아니다. 가질 수 없는 사랑이 어른거리지도 않는다. 죽을 정도로 노력해도 되지 않는 꿈을 좆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의 유인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문제들은 이미 모두 포기해버렸으니까. 자신도, 꿈도, 사랑도, 가족도, 친구도. 그러고선 그 외에 하고 싶은 대로 제멋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외면했다. 하지만 두려워서, 너무나 두려워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진짜 문제가 아닌 걸 문제 삼아 봤자 더욱 감감한 수렁에 빠져들었다. 술이니, 섹스니, 이민이니, 명품이니.

스스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걸 타인이 해결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걸 아니까 지금껏 타인과 제대로 교류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저 전부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러면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란 건 알았다.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데 어째서, 왜…. 유인하는 슬프지 않았다. 그 남자가 보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했을지, 조금은 보고 싶어 했을지 궁금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길래 궁금한 것일까? 왜? 역시나 모르겠다.

예전이라면 절대 도망가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낼 때까지 스스로를 추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왜냐고 물으면서도 동시에 그런 추궁도 대꾸도 결국 무의미하기만 해서 허탈했다.

‘시시한 남자였어.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제.’

그 남자가 시시하다면 지금의 자신은 더욱 말할 것도 없지만. 처음에 그 남자가 필요했던 건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먹고살 만했고 그에겐 이미 들켜버렸다. 이젠 곁에 있어도 평생 함께하고 싶을 만큼 행복해질 수 없었다. 곁에 있을 수도 없었다. 그걸로 끝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냥…. 그냥….’

막연히 뭔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끊임없는 의심이 들었다.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뭘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아무것도 잘못하는 거 없다고.’

그 남자는 분명히 고양이 나비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이 모르는 낯선 인간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그는 분명히 인간 유인하를 경계했고 싫어했다. 유인하는 자신을 향한 호의와 불의를 누구보다 잘 읽어낼 수 있었다. 아무리 그 남자라도 속은 것이니까 당연히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그럴 줄 알면서도 사람으로 변했다. 그래서 이해했다. 그렇게 차갑게 버려졌을 때, 그의 선택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자초한 것이 무엇인지.

그래, 자초한 것이다. 그래서 버려진 것이다. 내가 나쁜 애니까. 나쁜 고양이였으니까. 내 탓으로 당신을 잃은 것이다. 먼저 버린 것은 나다. 그러니까 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 끝난 인연이다. 끝.

유인하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뗐다.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든.

‘역시 이민 갈까? 그래, 가자.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사는 거야.’

홀가분하고 좋을 것이다. 유인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걸었다. 한 블록 정도 걸었을까.

“…….”

유인하는 주먹을 꽉 쥐고 자신의 발치를 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눈물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여기서 운다면 뭔가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나마 얇디얇은 껍질이 깨지고 그 안에 있는 보잘것없는 것이 백일하에 들어날 것이다. 유인하는 흐읍, 하고 숨을 마시고 멈췄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나비야.]

“!”

유인하는 움찔하며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차마 뒤를 보지 못하고 멈췄다. 마치 무서운 꿈이라도 꾼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어둠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엄마일지, 아니면 꿈 속의 괴물일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불안한 눈초리로 눈동자만 굴려 자신을 부른 목소리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걸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그저 마음속에서 들린 소리였다.

날 찾으러 올 리가 없잖아, 바보.

찾으러 오길 바란 걸까. 찾으러 올 리가 없었다. 당연한 걸 가지고, 그게 뭐라고. 결국 눈물이 흘렀다. 유인하는 다시 왔던 길을 달려갔다. 다시 횡단보도 앞에 섰다. 차도, 그 남자인지 아닌지 모를 남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4개월 전, 사실 그 뒤에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유인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 남자가 정말 살아있는 자신을 그대로 땅에 묻었는지 아닌지도.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충격이었다.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맞기라도 한다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남자야말로 유인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유인하가 안정훈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빼면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그가 동생에게 이미 죽은 고양이에 대한 것을 캐물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오래전에 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조차 지나간 인연이라 말하는 남자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이미 죽은 자에 대해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마지막까지 유인하는 그 남자에게 짐만 안겨주고 떠났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포기하고 바라지 않았다고 부정했던 것들은 전부 정말로 가지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부모, 형제, 친구. 자신을 공격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랑해달라고, 소중하게 대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그 남자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다시 한번 그렇게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랐다.

‘왜 그렇게 묻었냐고 묻고 싶었어.’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살아 있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묻어버린 것인지. 그렇게나 싫었는지. 이제는 잊어버렸는지.

‘내가 죽은 줄 알고 그랬냐고 묻고 싶어. 그전에 사실… 나 구해주려고 했잖아. 죽지 않게, 살려주려고 했잖아. 그런데 일부러, 일부러 산 채로 묻은 건 아닐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보다는 그가 자신을 버렸을 것이라는 게 좀 더 말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남자가 그 상황에서도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생각보다 미워할 거라는 생각이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세상은 온통 불쾌한 것들이 가득 쌓인 쓰레기통 같았다. 그래도 나는 다르다고 그렇게 믿으며 기어 올라가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혼자서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지키고 열심히 살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영원히 샘솟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가장 실망시킨 것은 세상도 가족도 친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스스로가 죽도록 미운 마음. 가장 힘든 것은 그 마음이었다.

평생을 무언가 그럴듯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고양이같이 가장 아무것도 아닐 때가 가장 행복했다. 아무것도 아니어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물고 할퀴어도 쓰다듬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인간인 유인하도 그렇게 사랑해주길 바라면서,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

나비는 죽고 말았다. 이제 그 남자의 앞에 설 수 있는 건 알코올중독에 반백수, 폐인이나 다름없다. 그를 죽이려고도 했었다. 처음보다 조건이 더욱 안 좋아진 것이다. 조건은 계속 안 좋아지기만 했다. 설사, 만약에 유인하가 그 남자를 아직 보고 싶어 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얼굴을 들고 그의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이제 나비는 없고 유인하만 있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가능성은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도 이런 내가 싫었다. 그런데도 그 남자에게 사랑을 바라는 걸까? 여전히 그 남자는 자신의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생각하는 나비가 남아 있는 걸까?

‘같이 있고 싶어.’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도 유인하는 이제 자기혐오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다시 그를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어질 것이다. 유인하는 알 수 있었다.

‘제발 날 다시 주워줘….’

그런데도 길고양이가 되고 만 집고양이는 주인을 그리워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6권에 이어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