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죽이기 1부 4권
How to Kill a Cat
5. 여덟 번째 죽음
“하하….”
손에 남은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옷을 쥔 채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뜬 채 웃는 그의 얼굴이 흥분에 차 있었다.
어차피 너한텐 나밖에 없어.
도망쳐봤자 소용없어.
다 잡아 놓고 지금까지 뭘 그렇게 겁을 낸 것일까.
‘병신같이.’
유인하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안정훈은 거기에 별 감상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안정훈은 병신이었다.
그를 가지려면 그를 이겨야 했다. 그가 자신을 이겨 자신을 가졌던 것처럼. 그가 고양이로 변할 수 없었다면 안정훈은 드디어 그를 가졌을 것이다. 그렇게 바라는 줄도 모르던, 아니, 바라다 못해 죽을 것 같던 것이 목전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기쁘다. 너무 기쁘다.
‘잡기만 하면 돼.’
고양이인 채로 잡을 수만 있다면 더더욱 훌륭하다. 그를 납치해도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다.
어떻게 할까?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리고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다. 안정훈은 순간의 정동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짜릿했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아무것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는 것만으로. 안정훈은 유인하의 옷에 얼굴을 묻고 신음을 흘렸다.
그의 살결이 손등을 간지럽힌다. 발가락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혀로 핥아줄 것이다. 사랑받는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도록. 안쪽의 안쪽까지 연결되어 눈을 마주치고 입을 맞추면 그의 향기에 머리가 아찔해지고 그의 느낌에 폭발할 것만 같이 흥분해서 그에게서 더욱 떨어질 수 없게 될 것이다. 처음엔 싫어하는 척하겠지만 결국 그도 쾌락에 몸부림칠 때까지….
‘이렇게 간단한 거였는데.’
아까 유인하가 서슴없이 안정훈을 경멸하며 떠나려고 할 때의 안정훈은 정말 세상을 다 잃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도 이렇게 되는 거였다면 도대체 왜 그렇게 참은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그도 원하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는 나밖에 없는 것이다.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안정훈에게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오로지 둘만 있으면 되었다. 유인하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너한테는 나밖에 없으니까 괜찮잖아? 네가 원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어.’
어차피 그가 고양이가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잡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유인하는 자신의 것이 된다.
‘이렇게 간단하다니.’
유인하의 옷을 손에 꼭 쥔 채 안정훈은 기뻐했다.
‘기분 좋았어.’
유인하를 만졌던 감각을 다시 되새겼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또 온몸이 오싹하다. 이것만으로도 몇 번이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인하가 하듯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어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걸 들여다보는 것은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의 안에 파고드는 건 뭐든 좋은 것이니까. 그도 원할 테니까.
그때 주차장으로 차가 한 대 들어왔다. 제대로 주차도 하지 않고 누군가가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안정훈을 발견하고 바로 고개를 돌리며 다른 누군가를 찾았다. 매우 복잡한 표정으로 나타난 이승원이었다.
“…….”
입맛이 살짝 떨어지면서 동시에 묘한 가학심이 솟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옛날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꽤 근사한 남자로 자랐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랑 달라진 게 거의 없는 데다가 내내 무해한 듯 어수룩하게 굴며 살고 지금은 그냥 돈 많은 백수나 다름없어 여전히 커다란 소년 같은 안정훈보다는 좀 더 번듯하고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다. 예전처럼 아닌 척 멋은 많이 부리나 보다. 나이가 들수록 차림새가 말쑥해진다. 그는 안정훈에게 반쯤 뛰듯이 다가왔다.
“인하는?”
“도망갔어.”
유인하가 사라진 방향을 보는 안정훈은 마치 사냥에 나서기 직전의 흥분한 사냥개 같았다. 자신에 찬 얼굴이다. 이런 얼굴은 처음 본다. 하지만 낯설지는 않다. 이승원은 잠깐 굳었다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안정훈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아쉬워?”
“…안도의 한숨이야.”
안정훈은 눈만 들어 째릿 안정훈을 노려보았다. 안정훈이 되물었다.
“안도의 한숨?”
“내가 설마 네 말대로 쓰레기 짓 하려고 온 줄 아냐? 당연히 인하 구해주려고 온 거지.”
이승원은 등을 펴고 서서 마치 안정훈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보듯이 보았다. 선을 그은 것이다.
“…….”
뭐래, 이 병신이.
유인하의 기를 좀 꺾고 싶었던 것이지 딱히 정말 주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미쳤다고 공들여 잡은 고기를 남에게 주겠는가, 나 먹기도 아까운데. 물론 유인하가 끝까지 뻗댔다면 다른 얘기가 되었겠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잘 알았다.
고양이로 변한 유인하가 가면 어딜 가겠는가. 어차피 그의 행동반경은 정해져 있었다. 안정훈은 느긋하게 이승원을 상대했다. 안정훈은 조금 웃고는 더 얘기하라는 듯한 태도로 쳐다보았다.
“너 또라이라는 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는데… 진짜 이런 짓까지 저지를 줄은 몰랐다. 너 진짜 제정신이냐? 인하가 진짜 대단한 거지. 인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옛날부터 너 싫어하더라.”
이승원은 안정훈에게 선심을 쓰는 척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안정훈을 보았다. 유인하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말에는 안정훈도 인상을 썼다. 잘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이승원이 말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해야 할 거 아냐.”
“그래서 넌 포기했는데 여기까지 온 거냐?”
안정훈이 물었다. 이승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난 인하 구하러 온 거라고.”
“몇 킬로 밟고 왔어?”
“좋아하면 고백을 해, 병신아. 그걸 뭐라고 10년을 넘게….”
이승원이 혀를 찼다. 스스로도 자신이 유인하를 구하러 온 것이라고 믿으려나 보다. 아니, 유인하도 듣자마자 알아차렸는데 이제 와서 혼자서 태세 전환하면 뭐 어쩌자는 것인가? 유인하가 바보도 아니고 그걸 믿을 것 같나? 만약 유인하가 이승원을 본다면 죽이려고 들 것이다. 물론 그건 안 가르쳐줄 거지만…. 어쨌든 익숙한 사고방식이다.
‘우린 전부 이런 식이었네.’
안정훈은 옛날을 돌이켜 떠올려보았다. 아주 약간 피곤함을 느꼈다. 그리고 대꾸했다.
“했어.”
“…뭐?”
이승원이 눈을 크게 떴다.
“인하가 받아줬어?”
이승원이 놀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니 안정훈이 피식 웃었다. 안정훈은 유인하가 두고 간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냈다. 이승원은 그게 유인하가 피우던 브랜드라는 것을 바로 알아봤다. 이승원이 믿기지가 않는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어. 인하는 절대…. 그래, 그랬으면 네가 날 불렀을 리가 없지. 너 차였다고 억지로 인하 덮치려고 한 거냐? 너 진짜, 이 쓰레기 새끼. 헛물켰다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런 짓이나 해? 그러니까 인하가 널 싫어했던 거야, 개새끼야. 싫어할 거 알면 그냥 조용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안정훈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보면서 라이터로 몇 번 불을 켰다 껐다 하다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차도 두 대밖에 없는 어두운 주차장이었다. 반듯하게 주차된 안정훈의 차와 라인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마구 세워놓은 이승원의 차가 있었다.
“누가 너한테 그런 말 한 적 있나 봐?”
안정훈이 물었다.
“뭐?”
“싫어할 거 알면 그냥 조용히 곁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누가 너한테 말했냐고.”
“지금 내 얘기 해? 네 얘기 하잖아.”
“아니, 웃기잖아. 내가 네 얘기 들으면 그제서야 ‘어? 내가 잘못했나? 내가 이상한 건가?’ 이런 생각이나 할 줄 알았어?”
안정훈은 완전 놀리는 말투로 물었다.
“너처럼?”
이승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안정훈이 담배 연기를 크게 내뿜으며 비웃음을 단 채 그를 보았다.
“아니, 너나 성우를 보면 웃긴 게 안 그런 척하면서 남 얘기를 그렇게 잘 믿더라고. 남들이 뭐라고 하면 ‘어? 내가 잘못한 건가?’, 남들이 잘했다고 하면 ‘어? 내가 잘한 건가?’ 이러고. 거기까진 뭐 그러려니 하는데 이 병신들이 그래서 남들도 다 자기 얘길 들어줄 줄 알아.”
“좋아하는 사람 덮치지 말라는 얘기가 그럼 틀렸다는 말이야, 이 사이코야?”
이승원이 화를 냈다.
“맞는 말이냐, 틀린 말이냐 하는 소리가 아니잖아. 왜 갑자기 멍청한 척해? 아니면 그냥 멍청한 건가?”
안정훈이 비웃는 어조로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승원은 반박했다.
“다른 사람들 신경 쓰는 건 너잖아. 인하 앞에서는 배알 없는 척,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착한 척만 해대던 게 누군데.”
안정훈은 유인하가 사라진 쪽을 보면서 그가 어디로 갔을지 생각하면서 대충 그를 상대했다.
“그것도 네 얘기잖아.”
“누가!”
이승원이 발끈해서 화를 벌컥 냈다. 안정훈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너 진짜 선생질하러 왔냐? 옛날엔 그래도 이것보단 나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
안정훈은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기분이 좋으세요? 선생질하니까 네가 뭐 좀 더 나은 인간이라도 된 것 같아? 그것참 다행이네.”
“싸우자고 불렀냐, 이 개새끼야?”
“싸우러 온 건 너라며? 인하 구하신다며? 너 나랑 얼마 만에 만나는 거지? 인하랑은? 4년? 5년? 네가 우리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아는 척이야?”
우리?! 이승원을 울컥해서 소리쳤다.
“옛날엔 내가 인하랑 더 친했어!”
“아니거든? 내가 더 친했거든?”
둘은 잠깐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입씨름을 했다. 아아. 여기서 말릴 게 아니다. 이긴 건 나다. 안정훈은 다시 씨익 웃었다.
“옛날 생각나? 우리 무조건 우르르 몰려다녔잖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들 인하랑 단둘이 있고 싶은데도.”
안정훈이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이승원이 인상을 팍 썼다. 그리고 툭 말했다.
“난 둘만 있을 때도 많았어.”
말하고 나선 바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는 얼굴이 되었다. 굳이 안정훈의 말에 반응해서 유인하와의 옛 추억을 제 입으로 말한 것이 후회스러운 모양이었다. 안정훈도 눈을 잠깐 크게 떴다.
“그래? 씨발.”
안정훈이 잠깐 욕을 했다.
“인하랑 둘이 있는 걸 누가 보면 뭔가 들키면 안 될 걸 하고 있는 기분 들어서…. 씨발, 난 인하가 집에 오면 잠도 못 잤는데.”
“그건 네가 변태 새끼라서 그런 거야, 이 미친놈아.”
“그래서 넌 안 그랬다고?”
“…….”
“인하 진짜 좋더라.”
그 말을 듣자 이승원은 정말 울컥한 얼굴을 했다. 패배의 얼굴이었다. 안정훈은 웃었다. 그걸 아는지 이승원은 또 그러고 싶지 않았다는 얼굴로 후회를 했다. 그는 감정의 흔들림을 막기 위해 잠깐 눈을 감고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뭔가를 참을 때 으레 하는 그의 습관이었다. 검은 테의 사각형의 안경의 그의 잘생긴 눈매를 살짝 가렸다.
“같이 있기만 해도 그런데 드디어 직접 만졌다고. 하얗고 피부도 부드럽고 입술은 새빨개서 내 걸….”
“개새끼야, 죽여버린다, 진짜!”
이승원이 결국 안정훈에게 달려들었다. 유인하를 상대하려고 몸도 키워온 안정훈인데 옛날에 포기한 놈한테 당할 리가 있나. 안정훈은 달려드는 그에게 밀리는 척 몸을 돌려 발목을 걸어 그를 넘어뜨리고 팔을 꺾어 등 위에 올라탔다.
역시 싸움은 배워서 손해 볼 게 절대 없다. 쓸모가 참 많다. 안정훈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지금 모든 게 아주 유쾌했다. 유인하를 가지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았다.
“인하한테 보여주고 싶다. 좋아했을 텐데. 우리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농담도 모르냐!”
이승원이 그를 떨쳐내려고 하며 말했다.
“너 기억력이 쓰레기네. 인하는 농담 같은 거 안 해.”
“그때라면 내가 이겨!”
“그게 의미가 있냐? 병신. 선생질 다 했으면 가라. 난 인하 찾으러 갈 거니까.”
이승원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런 굴욕감은 오랜만이었다. 예전에는 바라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가졌다. 이기는 것이 당연해서 위기와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상황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씨발….’
옛날 유인하와 같이 다니던 시절 안정훈은 유인하에게 개처럼 기었고 이승원이야말로 유인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유인하가 안정훈을 좀 심하게 괴롭힌다 싶으면 옆에서 그러지 말라고 말려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이승원은 안정훈이 유인하의 앞에서만 유달리 그런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보기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아마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자신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인하는 분명 자신이 본 인간 중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처음부터 안정훈의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기도 했지만, 그런 유인하조차 결국 그의 연기에 넘어갔다.
“씨발, 그만하라고. 인하 내버려 둬, 이 개새끼야.”
“싫은데?”
“너 분명히 후회할 거다.”
“후회하고 있는 건 너잖아.”
이승원은 안정훈에게 제압당한 상태로 얼굴을 돌바닥에 짓이겨지며 그를 노려보았다. 안정훈은 그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었다.
“억울해 죽겠지?”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넌 그러고 싶어도 참았는데 난 안 참으니까 억울해서 이러는 거 아냐, 이 병신 새끼야.”
아무래도 어렸을 적 가장 함께했을 시절의 인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가까이서 서로의 얼굴을 볼 때 그들은 둘 다 교복을 입을 시절의 서로를 기억했다. 분명히 지금의 안정훈은 유인하의 앞에서 빌빌거리는 안정훈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순하고 착하고 예의 바른 안정훈도 아니었다.
강한데 어딘지 위태롭고, 욕망에 솔직하며 마음을 흔든다.
‘인하 같잖아….’
유인하 특유의 요요한 날카로움과 눈을 뗄 수 없는 색기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닮았다. 이승원은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안정훈은 담배를 쥔 손으로 이승원의 어깨를 잡았다.
“요새 인생 좆 같은 거 다 안다.”
“…….”
“해야 할 거 대충 다 해놓은 것 같은데도 좆 같잖아. 재미도 없고 인생 왜 사나 싶고.”
안정훈은 이승원의 뺨을 가볍게 툭툭 쳤다. 매우 모욕적이었다. 이승원은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옛날엔 안 그랬는데. 인하랑 같이 있을 땐. 그치?”
안정훈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속삭이듯 빠르게 말했다.
“인하한테 물어봤거든? 너랑 할 바에야 나랑 한다더라.”
자랑질이었다. 이승원이 예전엔 자신이 유인하와 더 친했다는 말이랑 거의 피장파장인 유치한 말이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 말에 가장 깊은 패배감을 느낀 이승원이었다. 그 사실에 한 번 더 패배감을 느꼈다.
“거짓말….”
이승원이 중얼거렸다. 안정훈이 대놓고 픽 웃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간다.”
안정훈은 이승원을 놓고 일어났다. 옷을 툭툭 털고 모양을 잡은 후 자신의 차로 돌아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승원이 비실비실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안정훈은 한 번 그의 얼굴을 봐주고 시선을 진로 방향으로 돌렸다. 마치 전에 유인하가 자신에게 맞아 이가 빠진 김성우를 흘끗 한 번 보고는 신경을 끈 것처럼. 상대도 안 된다는 듯이.
안정훈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인하를 찾아야 했다.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고양이 상태에서 언제 인간으로 돌아올지도 모르고.’
고시원밖에 없다. 유인하의 본가는 서울이 아니니 거기까지 걸어갈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고시원의 계약이 끝나는 것 8월 말이니 시간이 남았다. 안정훈은 이승원과 실랑이를 벌이고도 느긋하게 차를 몰았다. 고양이의 다리로 고시원까지 빨리 가봤자 얼마나 빨리 갈 수 있겠는가.
‘밖에 계속 있다가 험한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해. 빨리 구하러 가야지.’
유인하를 구해주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그가 입으로 뭐라 말하든, 어떻게 느끼든 그에게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걸 항상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승원 생각이 나자 안정훈은 픽 웃고 말았다.
‘병신.’
정의의 용사짓이 가끔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게 이런 점 때문이다. 자기가 아는 걸 자기만 아는 줄 착각할 때가 있다.
[있잖아…. 너도 사실 인하 좋아하지? 나도 인하 좋아하는데…. 말 안 할 거야? 난 요새… 진짜 못 참겠어. 너도 알잖아. 인하 성격에… 좋아한다고 하면 완전 싫어할 텐데. 미칠 것 같아. 나 어떡하지….]
[…너 지금 인하를 그렇고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야? 난 친구로 좋아하는 건데…. 난 당연히 너도…. 어떡하냐, 야. 인하야 당연히 싫어하지. 너 같으면 좋겠냐? 싫어하는 정도면 다행이지. 그냥 조용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
안정훈은 눈을 한 번 깜박였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하하, 웃었다.
‘아, 뭐야. 내가 얘기한 거였네?’
기분이 더욱 유쾌해졌다. 지금까지 나쁜 자신과 착한 자신의 사이에 단단한 벽을 쌓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벽이 지금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그는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그러게 남의 말은 왜 들어? 말한 사람이 책임지는 거 봤나.’
안정훈도 유인하의 곁에서 계속 친구로 남으려고 했다. 아마 유인하가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친구로 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인을 쫓아다니는 강아지처럼 맹목적으로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따라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이승원처럼 되지는 않았던 것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걔가 더 병신이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먼저 따먹는 놈이 이기는 게임이었어.’
그런데도 ‘선택’을 바란 마음은 물론 안정훈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안정훈은 17살부터 유인하가 정말 너무나, 너무나 좋아서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것도 철저히 외면하고 오로지 가장 친한 친구로서 옆에 있을 수만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를 볼 때마다 단전이 욱신거리는데도.
대학도, 진로도, 창업도 전부 유인하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착하고 순하고 그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몸을 낮춘 것도 전부 유인하가 자신을 버릴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승원과 달리 안정훈은 본의 아니게 유인하를 한 번 이겨버렸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리고 순진했던 날들이다. 유인하에게 계속 져주면 깔보이고 막 대해질지언정 곁은 계속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 바랐다면 창업을 한다든가 운동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게임은 유인하에게 완전히 이겨야지 끝나는 게임이었다. 그것을 안정훈만큼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인하에게 계속 져주려는 마음과 이기려는 마음이 자꾸 부딪쳐 왔다.
유인하에게 결국 거절당했다. 안정훈이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실행된 것이다. 이제 아무리 져줘도 유인하는 곁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한 가지 방법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안정훈의 목줄을 풀어버렸다. 다른 선택지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은 모든 번민에서 해방된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안정훈에게 유인하를 포기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승원의 병신 같은 모습을 보고 나니 실감이 들었다. 그의 얼굴에선 충격과 좌절, 질투가 읽혔다. 승리감이 들었다. 예전에는 안정훈이 그를 질투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봐라. 처음 시작이 어땠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포기한 자와 포기하지 않은 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압도적인 격차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누가 뭐라고 하든. 지금까지 안정훈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한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김성우도 이승원도 다른 친구들도 유인하에게 그렇게까지 하지 말라고 말하며 그를 말리곤 했다. 하지만 결국 끝까지 곁에 있던 것은 자신이었다. 결국 그를 손아귀에 넣는 것도 자신이었다.
유인하는 인색하다. 그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착취할 줄만 알았지 뭐 하나 돌려주는 법이 없었다. 안정훈이 꼭 자신에게 배를 보이며 굴복하는 모습을 봐야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냥도 할 수 있었다. 그럴 기회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끝까지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가. 지금까지처럼 소중하게 대해주겠다고도 약속했다.
‘뭐가 나빠.’
그런데도 안정훈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 다른 놈들을 선택하는 척하지 않나, 결국 안정훈이 좋다고 말해 놓고 도망갔다.
그래, 그 정도는 용서해줄 수 있다. 유인하는 인색한 편이지만 자신은 인색하지도 않고 인내심이 강한 편이다. 원래는 별로 참을성이 없는 편이었는데 누구 덕분에 아주 좋아졌다.
원하는 만큼 부유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딴 자존심 꺾기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게 그가 원하는 것 아닌가. 유인하를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구하는 것은 안정훈이었다. 당장은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포기하면 모든 것이 편안해질 것이다. 안정훈은 그에게 훌륭한 출구전략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안정훈은 유인하가 그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빨리 다시 만나고 싶다, 인하.’
이제 만나면 다시는 헤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아무리 거부하더라도, 아무리 미워하더라도 그에게 안정훈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는 결국 안정훈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더 없는 해피 엔딩이다.
*
정신없이 도망치고 나서, 자신이 이제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죽여버릴 거야!’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배신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도 이번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다. 무려 12년이었다!
심장이 뛰었다. 간신히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나비는 분통이 터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비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닥쳤던 온갖 불합리함과 억울함이 전부 안정훈 때문인 것처럼 느꼈다. 그건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안정훈은 언제나 유인하에게 가장 손쉬운 화풀이 상대였다. 그런데 그런 놈이….
‘감히 날 이렇게 취급해? 안정훈 그 병신이! 절대 용서 못 해.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속에서 용암이라도 솟구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안에 이렇게 많은 화가 존재하고 있었던가. 나비는 정말로 그를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그를 죽여버려야 지금까지 상한 자존심이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구체적인 계획도 나왔다.
‘씨발, 사람이 고양이가 됐다가 사람이 됐다가 하는데 이걸 누가 알아내? 사람으로 변하면 바로 찔러서 죽여버릴 거야.’
그리고 고양이가 되어 도망가는 것이다. 그 상상만으로도 조금 유쾌해질 정도다. 나비는 웃을 수 있다면 웃었을 것이다.
‘하하, 병신…. 꼴 좋다.’
처참하게 죽은 그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김성우도 이승원도 전부 죽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고양이가 되어 도망칠 것이다. 정말 최고이지 않은가, 고양이가 된다는 건. 그들 모두 그래도 싸다. 법보다 복수가 훨씬 쉽고 효과적이다.
‘언제 사람으로 바뀌지? 칼은 어디서 구하지? 집 근처에서 기다려야 하나? 고양이 모습으로 들어갈 수는 없나?’
그렇게 작은 치즈냥이는 살인 계획을 짜며 작은 뇌를 팽팽 돌리고 있었다. 숨이 멎을 정도로 뛰다가 약간 정신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나 뛰어왔는지 모른다.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커다란 잡초 사이로 한강이 보였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지금 사람으로 변하라고 하면 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인하는 시험 삼아 한 번 사람으로 변했다.
“하.”
유인하의 얼굴이 이채가 돌았다. 억센 풀들이 알몸의 피부를 잔뜩 할퀴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다시 고양이로도 변할 수도 있었다. 그는 다시 고양이로 변했다.
정말로 그 새끼들을 전부 죽여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위력감이 마음을 달궜다. 아무도 자신을 잡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유인하보다도 훨씬 더 무력하게 당할 것이다.
‘죽었어, 이 개새끼들. 누굴 만만하게 봐?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유 같은 것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능욕을 당해도 아무런 복수도 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며 의기양양해서는 달려들었다. 유인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들을 죽여버리고도 아무런 의심을 사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 너무나도 훌륭한 수단이 있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살의에 가득 찬 작은 고양이의 눈동자가 포식자의 안광을 빛냈다.
“먀~.”
복수는 아주 훌륭한 목표였다. 동기부여부터 실행까지 순도 높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훌륭한 복수 계획이 나오자 그제야 숨도 골라지고 조금 진정되었다.
여전히 화가 났지만 아까와 같이 단박에 폭발해버릴 듯한 활화산 같은 분노는 아니었다. 좀 더 이성적으로 돌아왔다. 그가 만졌던 피부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어 진저리가 쳐졌다. 그의 손은 아주 뜨거웠다. 피부에 닿는 순간 뜨거운 물이 닿는 것처럼 물 자국을 남겼다. 손을 떼도 떨어진 것 같지가 않았다.
‘씨발….’
나비는 수풀 속에서 바깥으로 한쪽 발을 내밀었다. 어째서일까. 분노의 한켠에서 후회가 짙게 몰려왔다.
안정훈 같은 것에게 기대지 않고 마음을 잡고 바로 공부를 시작했어야 했다. 그 새끼랑 엮이지만 않았어도 김성우랑 엮일 일도 없었고 그러면 지금쯤 아무렇지도 않게 공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드니, 그 모든 불행이 원래는 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위축감이 들었고 그에 반발하여 다시금 분노가 부글거렸다.
‘죽여버릴 거야.’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인가. 그 개새끼들이 개새끼 짓을 한 게 내 잘못이라고? 그렇게 분노하다가 자신이 바보 같게 안정훈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니, 분명히 그가 이상하다고 느꼈으면서도 그를 곁에 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니 다시금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그래,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 게 공짜라고 생각한 자신이 일차적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남에게 기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 무엇인가. 다 유인하가 약하다는 증거이지 않은가. 안정훈마저도 이렇게 얕볼 정도로. 스스로가 한심했다. 실망스러웠다. 안정훈 같은 사이코를 미리 알아차리고 피하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기가 찼다. 자기혐오가 그를 세상의 가장 밑바닥으로 짓눌렀다.
자신이 약하다는, 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자신이 자신의 생각만큼 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유인하를 무저갱으로 처넣었다. 자신이 약해서 이런 짓을 당하는 것이라면…. 너무나 끔찍했다. 거기서 탈출하기 위해 다시금 분노를 불태웠다.
‘죽여버리면 돼.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자기혐오와 분노의 쳇바퀴를 돌기 시작했다. 가벼운 고양이가 되었는데도 발걸음이 전에 없이 무거웠다. 겨우 자신의 무력감을 진정시켰다.
‘난 약하지 않아. 난 약하지 않아. 난 강해.’
복수해야만 했다. 자신이 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다시금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수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군가 자신을 해치면 자신은 충분히 보복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알려야 했다.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의 집까지 멀 것 같지도 않았다. 뒤에서 사람으로 변해 돌이라도 내리치면 된다.
‘이대로 가서 죽이면….’
그때 문득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늘까지 솟았던 분기가 약간 꺾였다. 그 새끼는 그 남자의 동생이지 않은가. 아무리 그 남자가 무뚝뚝하기가 병적인 수준이라고 해도 분명 정도 있고 감정도 있는 남자였다. 그래서 고양이 같은 미물에게도 마음을 준 것일 테니까.
그 새끼를 죽이면 그가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그런 앞뒤가 맞지 않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도 모르는데.
‘젠장.’
정말 우스운 일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일관성이란 걸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멋대로 분노에 찼다가 자기혐오에 찼다가 망설임에 찼다가.
나비는 수풀숲을 나왔다. 그리고 어둠 속을 걸었다. 몸이 좀 큰 것일까. 눈높이가 예전보다 약간 높아진 것 같다.
‘이젠 별로 귀엽지 않을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잡종 길고양이 따위 새끼일 때나 귀여운 것이다. 나비는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안정훈을 죽여버리겠다고 분기탱천했을 땐 무서울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더니 지금은 급격히 다시 위축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비는 고개를 저었다.
‘죽일 거야. 죽일 거야.’
그래, 준비가 필요했다. 일단 고시원으로 돌아가서…. 고시원의 방을 빼야 하는 날이 10일 정도 남았다. 지금까지 잘만 돌아다녀 놓고 지금은 작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밖에 있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인 자신도 그런 짓을 당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고양이 같은 거 무슨 짓을 당해도 변변찮게 누가 벌을 내려주는 것도 아니다. 대신 복수해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금 안정훈이 불쑥 나타나 자신을 해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 등의 털이 솟았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강을 오른쪽에 끼고 계속 걷다가 굴다리가 보이자 그쪽으로 들어갔다. 작은 고양이는 벽에 최대한 붙어 걸어 나갔다. 굴다리를 나가니 아파트 단지가 나왔다. 그대로 쭉 직선으로 걸었다.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가 나왔다. 사람이 갑자기 많아졌다.
나비는 다시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그 안의 조경을 따라 걸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니 아는 길이 나왔다. 그 길을 따라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2주 정도일 뿐인데 거의 억겁 만에 다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시원의 허름한 현관 앞에서 잠깐 시커먼 입구를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가서 문 앞에서 사람으로 변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문득 기이한 기시감이 들어 옆을 보았다. 평소와 달리 고시원의 앞에 차가 한 대 서있었고 그 차가 눈에 익었다. 안에 사람이 타고 있진 않았지만 아까 몹쓸 짓을 당할 뻔한 안정훈의 차였다.
나비는 기겁하여 순식간에 건물 사이로 들어가 담장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보이지 않도록 숨었다. 흉통 속의 작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게 느껴졌다.
‘지금 여기 있다고?’
나비는 무기로 쓸 수 있는 게 없는지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기는 CCTV도 없었다.
‘여기서 숨어 있다가….’
하지만 그는 어디를 찾으러 다니는지 꽤 오랫동안 차 근처로 돌아오지 않았다. 들킨다면 사람으로 있을 때보다 훨씬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는 유인하가 사람과 고양이를 오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양이라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큰일 났다.’
잠이 오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모습으로 있으면 잠이 많아진다. 안정훈이 여기 왔다는 건 분명히 자신을 찾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시원의 가까운 곳에 잠들어 있다가 잡히면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가 자신을 납치해도 증거 하나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유인하는 그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고시원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나비는 담장에서 훌쩍 뛰어내려 있는 힘껏 달렸다. 어느 공원으로 들어가 가장 높은 나무를 찾았다. 그리고 그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최대한 둥글게 말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꿈을 꾸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되는 꿈이었다. 진짜 고양이가 되고 만 것이다. 이젠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고양이로 살 수밖에.
나비는 익숙한 길을 걸어갔다. 아무리 커다란 사람이 옆을 지나가도, 차가 아무리 쌩쌩 달려도, 아무리 멀리 걸어야 해도 신이 났다.
이번에 돌아가면 절대 떠나지 말아야지. 그 남자의 곁에 있어야지. 이번엔 꼭 웃는 얼굴을 봐야지.
만나면 얼마나 기뻐할까. 이번에는 혼을 낼지도 모르겠다. 벌써 몇 번을 가출을 한 것인가. 화를 내는 그 남자는 어떨까. 하지만 이제는 떠나지 않을 것이니 화를 내는 그 남자가 나쁘다. 그냥 못 알아들은 척 애교나 부리며 때워야지. 그러면 그 남자는 할 수 없다는 듯 용서하고 또 한동안 나비를 과보호할 것이다.
집에 드디어 도착했다. 햇빛이 잔뜩 드는 밝은 곳이다. 잔디도, 물고기도 전과 똑같았다. 물고기를 잡고 싶은 욕구를 꾹 누르고 현관으로 뛰어가 야옹야옹 울었다. 전과 달리 누군가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그 남자였다.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그 남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나비를 보았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다. 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졌다. 어째서? 그는 나비와 마주 서 있었다. 나비는 어느샌가 사람으로 다시 변해 있었다. 알몸으로! 너무나 창피해서 바로 무릎을 껴안고 앉았다.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의 구두만 보고 있었다.
뭐라고 할까. 뭐라고 생각할까.
완전히 고양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온 것이다. 그러면 그를 속인 게 아니니까. 그를 속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거짓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고양이일 때는 그렇게나 자신만만했는데 인간일 때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왜일까. 알 수가 없었다. 알맹이는 어차피 똑같은 유인하였는데도.
비난할까. 속였다고 화를 낼까. 걷어차거나 욕을 할까. 언제나 부드럽게 털을 쓰다듬는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 쫓아내 버리면 어쩌나. 그러면 마음이 너무 아플 텐데.
겁이 나서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웅크리고만 있었다. 이런 공포는 처음이었다. 차라리 모든 것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내쫓든 때리든 그에게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저항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인하는 당장 벼락이라도 내리쳐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눈을 질끈 감고 그를 속인 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뜨니 그 남자의 구두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 그 남자가 등을 돌리고 저 멀리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가지 마,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고양이가 된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다시 고양이가 된 것이다. 다시 고양이가 되었다고, 이제 괜찮다고, 나비는 야옹야옹하고 계속 주인을 불렀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비는 버려진 것이다. 흔하디흔한, 보잘것없는 길고양이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고양이가 되어도 그를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먀…!”
눈을 떴을 땐 여전히 고양이였다. 하늘이 우중충했다. 나비는 한동안 자신이 정말로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야옹야옹하고 그 남자를 부르며 크게 울었다. 하지만 자신이 여전히 나무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꿈을 잊어버렸다. 마음이 적적한 느낌만이 남았다.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고픈데.’
나비는 다시금 고시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고시원의 현관을 살폈다. 차가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고시원의 현관 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그때 무언가가 몸통을 덥석 잡아 왔다.
“잡았다.”
사실 잡히기 직전에 이미 뭔가를 알아차렸다. 나비는 혼비백산해서 그의 손을 꽉 물고는 물렁물렁한 신체를 이용해서 그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고양이의 달리기 속도는 인간보다 훨씬 빠르다. 그를 금방 따돌렸다.
‘젠장….’
공포, 불안, 살의. 그런 것들이 마구 머리를 어지럽혔다. 차라리 근처에 매복하고 있다가 그가 나타나면 사람으로 변해 정말로 그의 머리를 내려칠까? 그는 자신이 자유자재로 사람과 고양이를 오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가.
하지만 이대로 고양이의 모습으로 계속 버티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안정훈과 달리 아무것도 마실 수도, 먹을 수도 없었고 잠도 많이 자야 했다. 그가 고시원 앞을 저렇게 지키고 있는 이상 사람으로 변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잠깐 몸을 피할 곳도 없는 것인가. 안정훈은 유인하가 어디에 사는지, 심지어 부모님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그가 당한 피해를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형제마저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할 것이고 예전에 알았던 친구들은 아무래도 믿을 놈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너무나 상한다. 그런 인간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지금의 처지가.
사람이 곁에 있든 없든 유인하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인하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거야.’
그래도 역시 잠깐이라도 쉴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남자가 또 떠올랐다.
‘안 돼.’
지금 나비는 그 남자의 동생을 해치려고 마음먹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 남자에게 또 신세를 질 생각을 한단 말인가.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그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면….
나비는 계속해서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한강 변까지 와 있었다.
‘물은 싫은데.’
커다란 물을 보니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그래도 목이 말랐다. 조금도 젖지 않도록 발을 잘 갈무리하고 강물을 마셨다. 역시 흙맛이 난다. 얼른 둔치로 올라와 발을 털었다. 눈길이 자꾸 강 건너로 향했다. 그리고 나비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가 올 것 같아.’
여기는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발을 보았다. 새하얀 털이 보기에도 매우 보송보송하다. 하지만 비를 맞으면 지저분하게 젖을 것이다. 그때도 비가 왔다. 이번에는 정말 큰 비가 내릴 것 같다.
나비는 멍하니 낮고 검은 구름을 보면서 흐르는 대로 생각했다.
‘이제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데 조금은 괜찮지 않나…. 안에 들어가지만 않으면 쉽게 도망칠 수 있어…. 별로 만날 것도 아니고… 구경만 하면 되잖아? 그래, 구경은 할 수 있잖아? 그럼 별로 문제없는데, 아직은 아무 짓도 안 했고…. 잠깐 비만 피하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드니 그게 그렇게 그럴듯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비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발이 가벼웠다. 어느샌가 뛰고 있기도 했다.
‘구경만 하는 거야. 보기만 하는 거야. 담장 위에서 슬쩍 보고 바로 돌아오자. 그것까진 괜찮아.’
나비는 스스로와 그렇게 약속했다. 사람을 죽일 생각도 하는데 잠깐 보고 오는 것이 뭐가 그렇게 큰 대수겠는가? 별로 큰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힘든 일이 있었다. 조금만 위로를 받고 싶었다.
보고 싶었지 않은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으니 갑자기 가슴이 시렸다. 그간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협박하고 속였다. 그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때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의 손해라고.
그 부자 동네로 들어가니 드디어 사람도 차도 없어졌다. 이미 사위가 새카매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 담장 위를 걸을 때쯤엔 빗줄기가 많이 굵어졌다.
그렇게 언덕을 오르고 올라가니 드디어 그 집이 보였다. 뿌듯한 마음마저 들었다. 인간일 때는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는 곳이었다. 대문의 옆 담장 위에 가만히 앉아 전처럼 환하게 빛이 나는 그 집을 바라보았다. 나비가 좋아하던 잉어가 가득한 연못 위로 빗방울이 내려앉아 파문을 그렸다.
‘저기 나무 밑에 있을까. 비가 많이 오잖아.’
나비는 약간 주저했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와 타협을 보아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며 집을 바라보았다.
‘여기도 비가 떨어져.’
현관의 옆은 비가 떨어지지 않는다. 저기까지는 괜찮지 않나. 들킬 것도 아니고. 그렇게 타협에 타협을 거쳐 결국 현관까지 다가갔다. 곧 보란 듯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깐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기로 피하기 잘했다고.
천천히 거실의 창을 돌아 정원수와 꽃이 우거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차하면 나무 속으로 숨을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거실의 창을 가만히 보며 네 발을 모으고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남자가 책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나비는 그가 반가워서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먀~, 하고 울었다가 깜짝 놀랐다. 들키면 어쩌려고! 나비는 얼른 새카만 그림자 속에서 네 발을 모으고 다시 얌전히 앉았다. 정신 차리고 있어야지.
그 남자는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언제나 동작이 군더더기 없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고 여유가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보는 사람이 차분해지는 마음이 든다.
‘여전하구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솔직히 고양이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지. 슬퍼하길 바란 게 아니다.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그런 것까지 바라면 안 되는 것은 안다. 그가 여전히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얼굴을 볼 수 있는 게 생각보다 아주 기쁘다.
“먀~.”
나비는 그를 바라보며 또 저도 모르게 울었다. 고양이로 있을 땐 감정을 이기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둠과 폭우가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몇 번이나 어겨서 그럴까. 갑자기 괜한 불안함이 들었다.
‘역시 싫어할지도.’
지난밤의 꿈을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해 몇 가지 떠올렸다. 몇 번이나 가출을 해버리지 않았는가. 은혜도 모르는 고약하고 괘씸한 고양이니까. 이제 와서 다시 돌아왔다고 곤란한 얼굴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새 커버려서 이제 별로 귀엽지도 않을 것이다.
‘이대로 있을 거야. 그러면 괜찮아. 그냥 조금 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곧 갈 거잖아.’
아니, 곧 곤란하게 하겠지만. 그래도 나라는 걸 모를 테니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복수하지 않으면 유인하라는 인간은 더 이상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살고 싶었다. 그건 언제나 그랬다.
환한 빛이 나오는 창문 앞의 그림자 속에 네 발을 모으고 앉아 주인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고양이가 생각했다.
‘잊어버렸다면 그걸로 괜찮아.’
시간이 되자 그 남자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독서 시간이 끝난 것이다. 언제나 길게만 느껴지던 그 시간이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그는 이제 침실로 가서 잘 것이다.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나도 이제 가자.’
그런데 그가 전과 달리 거실의 창으로 다가왔다.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문을 열 거라고 생각을 못 했다. 그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비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들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돌아보자 고양이의 눈동자가 빛을 반사해 밝아졌다.
차분한 빗소리의 사이로 그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나비니?”
그 남자가 나비가 숨어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아주 어두운 그림자였다. 하지만 나비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경계를 하듯이 몸을 움츠리고 가만히 있었다.
‘어떡해.’
잊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었다. 여전히 나를 찾았나 보다. 어쩌지. 너무 기쁘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들킬 수 없었다. 들키면 안 되었다. 나비는 결국 고양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다시 불렀다.
“나비야.”
어둠 속에 둥둥 떠 있는 두 개의 동그란 눈이 있었다. 권시혁은 그쪽으로 손바닥을 보여 내밀었다. 쯧쯧 하고 개를 부를 때 내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고양이라고.’
나비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 한 발을 그림자 밖으로 내디뎠다. 그리고는 아차 하고 다시 그림자 속에 숨었다. 본능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쫓는 자연스러운 마음을 억눌렀다.
‘이대로 뒤돌아서 나가는 거야. 이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나무를 타고 담장으로 올라가 뒤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는 것이다. 사람은 고양이를 쫓아올 수 없다.
“이리 와. 괜찮아.”
그 남자가 다시 말했다. 나비는 뒤로 돌아서려다가 다시 그 남자를 돌아보았다. 본래의 자세에서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남자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때 그 남자가 어째서인지, 약간 웃었다.
“나 잊어버린 걸까.”
결국 나비는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갔다.
*
나비가 권시혁의 가슴으로 뛰어올라 그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고양이의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가슴이 또 터질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분노 때문이 아니었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고양이는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걸까. 울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작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군가를 믿었다가 배신당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에게 위로받다니. 인생은 혼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당신이 잊어버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너무나 마음 아파서 적어도 나부터 잊어버리려고 했다. 잊어버릴 수 있었다면 백만 번은 잊어버렸을 것이다.
‘이런 거 너무 싫어. 짜증 나. 바보 같아. 이러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힘들어.’
억울하고 분하고 기쁘고 황홀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나비의 작은 몸이 나무처럼 딱딱해져 털까지 다 솟아 있었다. 마치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자신은 화가 난 것일까. 나비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제대로 아는 감정은 분노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대신에 일어나는 신체적 반응이 힘겨웠다. 죽을 것만 같았다.
‘살려줘.’
뭔가에 퍽 하고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권시혁은 자신의 가슴 위에 네 발로 서서 온몸의 털이 곤두선 작은 치즈냥이의 머리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그 남자의 차분한 질문에 나비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나비는 자신을 만지는 그의 손을 반사적으로 깨물려고 하며 하악질을 했다. 그는 손을 바로 뗐다.
‘아니야!’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남자는 흥분하고 예민해진 나비의 얼굴을 손등으로 아주 천천히 만졌다.
“괜찮아.”
그가 눈을 마주치며 그렇게 말했다.
‘정말?’
그의 새카만 눈동자는 마치 고요한 수면 같아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운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던 고통이 조금 괜찮아졌다. 그가 다시 말했다.
“괜찮아. 힘들었지?”
나비는 그의 눈을 보고 있다가 그제야 그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그의 목에 파고들어 턱에 얼굴을 비비며 꼬리까지 뻣뻣하게 뻗었다. 너무 안도가 되어 눈물이 나오다니. 이런 건 처량해서 싫었다. 처음이었다. 어린아이처럼 그냥 목을 놓아 울고 싶었다. 그제야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미야! 먀! 냥. 냐아. 먀.”
잊지 않았어. 보고 싶었어. 그런 말을 쉴 새 없이 했다. 그 남자는 다시금 웃었다. 원래 나비는 말이 많은 고양이였다. 못 본 사이 조금 컸다.
“왜 자꾸 나가?”
그는 역시나 화를 내지 않았다. 흥분하지도, 그래서 허둥지둥하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그리고 그건 나비에게 무의식적으로 굉장한 안정감을 주었다. 나비는 주인의 가슴 위에 서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뭐라고 자꾸 먀먀거렸다. 그 남자는 그래, 그래 하고 알아들은 척 어르며 나비를 들고 일어났다. 그가 비에 젖은 작은 머리를 손으로 닦아주며 눈을 마주쳤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이게 이 무뚝뚝한 남자의 가장 상냥한 얼굴이었다. 그걸 알 수 있었다. 나비는 그의 얼굴을 보며 꼬리를 절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골골거리는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날 사랑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힘들 때면 언제나 그가 생각났다. 한 번만 쓰다듬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런 구질구질한 기분 따위 전부 날아갈지 모른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만 더 들을 수 있다면. 내 존재가 그 남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나가서 살고 싶어?”
그가 물었다. 나비는 아니라고 야옹거렸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그 남자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해? 이러면 내가 널 가둔다고 생각하려나.”
그 말을 들은 나비는 너무 답답해서 그의 손가락을 콱 물었다.
“아파.”
그가 전혀 아프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비는 너무 답답해서 뒤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과 고양이가 말이 안 통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도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나가고 싶어서 나간 게 아닌데. 어쩔 수 없었던 건데!’
고양이는 왜 말을 할 수 없을까.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간 잊으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열심히 날 혼냈는데. 화가 난다. 이 마음을 그가 몰라주는 게. 적어도 그만은 알아주길 바랐다. 당신은 특별하지 않은가. 너무나 특별하다. 날 사랑한다면 내 마음도 당연히 알아줘야 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머리가 열심히 합리화했다.
‘이렇게 좋은 집을 두고 어떤 고양이가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겠냐고. 바깥 생활이 얼마나 험한데!’
그렇게 씩씩거리며 계속 생각했다.
‘날 잊어버렸으면 용서 안 할 생각이었어. 당신은 내 거잖아.’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내가 무슨 짓을 당할 뻔했는지 알아? 당신은 날 지켜줘야 하잖아! 나비는 화가 났으면서도 오랜만에 만난 주인은 반가워 목과 턱에 계속 얼굴을 비볐다. 그래서 뜬금없이 그를 깨물기도 했다. 그는 전혀 화를 내지도 않고 아프다고 고양이를 밀치지도 않았다. 그게 뭐라고 자꾸 가슴이 울렁거려서 나비는 자꾸 그를 깨물었다.
“다들 많이 찾았어.”
권시혁은 아예 손가락 하나를 물라고 내주고는 차분히 근황을 전했다. 그도 고양이와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다. 그런데도 좀 더 교감하고 싶으니까 말하는 것이겠지. 그 마음이 전달되어 감동마저 느꼈다.
“정훈이 나갈 때 없어져서 네가 정훈이라도 따라간 줄 알았는데. 너 정훈이 좋아하잖아.”
“먀~! (아냐!!!)”
나비가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쳤다. 그 남자가 또 웃었다. 그는 나비의 얼굴을 감싸고 뺨에 입을 맞췄다. 방금까지 밖에 있던 고양이였는데도 더럽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연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걱정이 돼서…. 그래, 아직 어리니까….”
그 남자답지 않게 의뭉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비는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다시 그의 가슴을 짚고 일어서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빤히 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그의 턱에 다시금 이마를 부딪쳐 비볐다.
연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 말한 것 치곤 나비의 방은 전과 똑같았다. 권시혁은 고양이용 고급 캔을 따고 손수 물까지 받아왔다. 밖에 오래 헤맸을 테니 일단 먹일 생각이었다. 나비는 만 하루를 꼬박 굶었기 때문에 옛날처럼 우아하게 천천히 먹었지만 전부 다 먹었다. 그 남자는 스툴에 앉아 가만히 나비가 먹고 있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다 먹고 나서는 다시 그의 품에 안겼다. 그것만으로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온 것만 같이 안심이 되었다. 마치 그간의 고생과 고통은 꿈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멀어졌다. 생각은 아니라는 걸 아닌데 마음은 그랬다. 나비는 고개를 들어 주인을 보았다. 그는 고양이와 눈을 마주친 채 이마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나비는 말이 많은 고양이였지만, 반대로 이 남자는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몇 번이나 말을 건다.
“걱정 많이 했어. 돌아오면 혼낼까 싶기도 했는데.”
그는 엄지로 고양이의 얼굴과 귀를 쓰다듬었다.
“예뻐서 혼낼 수도 없고.”
또 입을 맞췄다. 그는 고양이를 끌어안고 다시금 입을 맞췄다. 커다란 남자가 어깨까지 좁혀가며 온몸으로 작은 고양이를 안았다. 이 무뚝뚝한 남자의 진심 어린 애정이 느껴졌다.
“이제 나가지 마. 위험하잖아. 한우도 매일 줄게. 좋아하지?”
뭘까. 나비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온몸이 오싹오싹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좋아서 마음이 뭉게뭉게 부풀어 터질 것만 같았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데 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시 가슴이 뻥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나비를 안고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나비는 그의 가슴에 안겨 몸을 길게 하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비비고 골골거렸다. 권시혁은 잠깐 나비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풀과 흙냄새가 났다.
“어디 갔었어?”
권시혁은 나비를 왼손으로 안고 오른손으로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며 방에 들어가 욕실로 갔다. 이제야 그렇게 그리던 주인을 만났다는 실감에 정신을 못 차리던 작은 치즈태비가 어라, 하고 고개를 들었다. 권시혁은 욕실 문을 닫고 세면대의 배수구를 막았다.
“젖은 김에 그냥 씻자.”
“먀!!! (물 싫어!)”
“그래.”
이 남자는 고양이 말을 알아듣는 척만 잘한다.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감동적인 해후에 젖어 있던 나비는 그 남자가 수도꼭지를 틀자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야옹! (놔라, 이 남자야!)”
“그동안 많이 컸네, 우리 나비.”
그는 마치 대견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몸통을 받쳐 잡는 것만으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세면대에 받은 물을 오른손으로 떠서 몇 번 털을 적시니 털이 부숭부숭한 치즈태비가 불쌍하게 눈만 동그랗게 커졌다. 나비는 어떻게든 어딘가에 앞발을 딛고 도망가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앞뒷발을 전부 휘적거리며 도망치려다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가 말했다.
“다 했어.”
“먀! (거짓말!)”
나비는 완전히 쫄딱 젖어 샴푸질까지 박박 당했다. 수건에 싸여서 욕실에 나왔을 땐 배신감이 장난 아니었다.
“먀…. (밉다….)”
물에 젖어 온몸이 빨래질 당하는 것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나비는 목욕을 몇 번 해본 적은 없었지만 할 때마다 아주 큰 굴욕감을 느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마치 숱이 많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갑자기 삭발을 당하는 기분과 비슷할까.
권시혁이 고양이를 수건째 선반 위에 두고 드라이기를 들었다. 나비가 수건에 싸인 채 그 남자를 올려다보며 다시 야옹 하고 울었다.
“야옹~! (나한테 왜 이랬어?)”
“괜찮아.”
그는 부드럽게 나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엄지로 코부터 귀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드라이기를 켜서 고양이의 털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유심히 나비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 다친 곳이나 이상이 없나 보는 모양이었다. 그는 나비의 얼굴을 잡고 입을 벌린 뒤 입안을 보고 뒤로 뒤집어 꼬리를 들고 엉덩이를 보기도 했다.
“하악!”
나비는 깜짝 놀라 하악질을 했다. 나비는 분명히 고양이지만 속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엄청 창피했다. 안 그래도 목욕 당하며 여기저기 만져져서 싫었는데! 그의 손을 콱 물었다.
“어디 다쳤는지 보는 거야.”
“먀! (아는데 싫다고!)”
“내일 병원 가자.”
“캭! (싫어!)”
병원에 가면 수의사가 비슷한 짓을 또 한단 말이다. 주사도 놓고! 나비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보고 싶었는데. 반가웠는데…. 그래도 조금만 더 그대로 있어 주지.’
좋아하기 때문에 별 사소한 것에 원망이 다 든다. 털을 뽀송뽀송하게 말리고 나서는 빗으로 꼬리부터 슥슥 빗기 시작했다. 나비는 짜증 나서 그냥 옆으로 누워서 맘대로 해라, 하고 삐쳐 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대로 잠들었고 눈을 떴을 땐 그 남자의 침대 위였다. 그 남자는 잠들어 있었고 나비는 그의 얼굴 옆에서 자고 있었다. 새벽이었다.
“…….”
나비는 그의 가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앞발로 그의 뺨을 툭툭 쳤다.
“먀? (자?)”
나비는 그가 깰 때까지 그의 얼굴을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결국 그 남자가 깼다.
“나비야….”
그는 잠긴 목소리로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며 손으로 고양이의 머리를 감싸 눌렀다. 나비는 그대로 그의 몸 위에 엎드려 누웠다. 그가 엄지로 귀를 몇 번 접힐 정도로 쓰다듬었다. 그리곤 다시 잠들어 손길이 멈췄다. 손의 무게가 좋아 그대로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앞발만 뻗어 그의 얼굴을 다시 툭툭 쳤다.
‘일어나.’
잠이 오지 않는 밤, 곁에 있는 사람은 잘 자고 있는 게 싫은 이유는 뭘까. 말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있었다.
하지만 말해봤자 그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비는 의식적으로 모든 것을 한구석에 묶어 놓고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러고 싶었다.
“…….”
나비는 사람으로 변했다. 숨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깨지 않을 모양이다. 그제야 숨을 살짝 내쉬었다.
맨피부에 닿는 이불의 느낌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이 침대에서 그렇게 많은 밤을 보내고도. 그의 얼굴마저 달라 보였다. 고양이의 눈으로 볼 때와는 색감이 다르다. 하지만 어두워서 고양이일 때보다 잘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사람의 눈으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유인하는 뭔가 말할 듯 입을 벌렸다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대로 눈을 감고 그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다시 고양이로 변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신 때문이야.’
모든 것을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그의 가슴 위에서 몸을 둥그렇게 말고 다시 잠을 청했다.
*
다음 날 아침에는 병원으로 끌려가 한바탕했고 돌아와서는 집안 고용인들의 손을 한 번씩 거친다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비는 해야 할 것이 산더미같이 있었는데 말이다. 복수도 해야 했고 그다음엔 다시 고시생의 생활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도 해야 했다. 하지만 이 집의 평화는 나비를 해야 할 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려고 했다.
“아휴, 우리 나비 살 빠진 것 같아. 그치, 재민 씨?”
“조금만 더 줄까요?”
소중하게 기르던 애완묘가 돌아온 것만으로 집안의 분위기가 많이 폈다. 사람들이 단 한 시도 놓아주질 않았다. 특히나 김 집사와 최수아라는 젊은 여자 고용인이 거의 번갈아 가며 들고 다녔다. 그들은 나비가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몇 번이고 나비를 혼냈다.
“이제 집 나가면 안 돼. 또 나가면 혼난다, 나비.”
최수아가 나비를 들고 둥가둥가 흔들며 말했다. 언제나 나비를 살뜰히 모시던 그녀조차도 이런 식으로 말할 정도다. 나비는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나가면 혼난다니.’
혼날 일을 하면 보통은 내쫓는 게 기본 아닌가. 나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어젯밤을 떠올렸다.
왜 그때 그 남자의 앞에서 사람으로 변했는지 모르겠다. 그것이야말로 혼날 짓이었다. 그에게 들키기는 죽어도 싫었던 게 아닌가. 나비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나비는 해야 할 일을 어떻게든 떠올려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평화와 심하게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멀미가 날 정도로 사람들의 손을 타다가 뭔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또 뭐야.’
김재민이 서재에 촬영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나비는 한때 잘 나가던 고양이 유튜브 스타였다. 그게 사실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어차피 고양이는 그 채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도 못하고 아무런 지분도 없기 때문일까. 권시혁이 나비를 찾기 위해 구독자나 팔로워들의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 나비의 귀가를 알려야 할 것이다. 물론 나비는 내키지 않았다.
“먀. 먀아~! (차라리 죽여라, 인간들아. 잠 온다고! 내가 이러고 있을 땐 줄 아냐!)”
말도 통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마구 하곤 하는 건 예전에도 그랬다. 나비는 그들을 노예라고 부르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했다. 어차피 그들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멋대로였다. 나비는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데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신경질이 났다.
그렇게 시간은 느린 듯 날아가 권시혁도 회사에서 돌아왔다. 평소보다 1시간이나 이른 귀가였다.
“나비는?”
“여기요.”
김 집사가 들고 있던 나비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나비야.”
차라리 차분한 그가 드니 좀 낫다. 나비가 한숨을 쉬니 그가 웃었다.
“한숨 쉬었어?”
나비는 예쁘고 동그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무뚝뚝한 그가 어제오늘 몇 번이나 웃었다. 나비가 집에 돌아온 게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나비는 꼬리는 한 번 살랑 흔들었다.
‘당신이 좋으면 나도 좋아.’
그렇게 생각했다가 갑자기 또 심란하게 어젯밤의 일이 생각났다. 나비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잠깐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그의 턱에 이마를 부딪쳐 비볐다.
그는 나비를 들고 서재로 갔다. 그리고 나비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나비는 그대로 벌렁 누웠다. 낮잠 시간을 한참 넘겼다. 이러고 있을 때도 아니다.
‘아이고, 죽겠다.’
걱정 없이 고양이로 지낼 때는 사람들의 애정이 좋았다. 하지만 걱정이 많을 때는 달랐다.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일방적인 애정은 나비의 정신적, 물리적 공간을 심하게 침해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엄청 피곤하다. 권시혁이 그런 나비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들도 너 걱정 많이 했어.”
뭐? 그 말에 나비가 귀를 쫑긋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돌아보았다. 카메라는 오랜만이었다. 나비는 일어나서 가만히 컴퓨터 화면을 보았다. 그간 거의 영상을 올리지 못한 데다가 잃어버렸다고 난리를 쳤으니 구독자가 많이 떨어졌을 줄 알았다. 아마 고양이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다고 먹을 팔자도 아닌 세상 욕을 다 먹었을 이 남자였다.
‘아닌가? 괜찮나?’
이 남자는 무슨 일이 있다고 얼굴에 티도 나지 않는다. 그냥 항상 똑같이 무뚝뚝하고 차분할 뿐이었다. 그의 그런 점이 예전에도 신기했지만 점점 갈수록 더 신기하다. 뭘 먹고 살면 이 남자처럼 되는 걸까?
‘이런 게 마음이 넓은 건가? 아니면 진짜 석남인 건가?’
물론 예전만 하진 못할지 몰라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스트리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채팅창에 많은 사람들이 나비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글을 올리고 있었다. 나비는 꼬리를 한 번 까딱했다.
유인하도 고양이 영상을 많이 찾아보곤 했다. 고양이는 하는 짓이 차분하고 예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느긋함이 좋았다.
아니, 사실 이건 나중에 붙인 이유에 불과하다. 어쩌다가 보니 고양이 사진과 동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게 하루의 시름을 더는 일과가 되었을 뿐이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것 중 하나였을 뿐이다.
“…….”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도 그런 것뿐이다. 심심풀이일 뿐이다. 나비는 이런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하기 싫어.’
예전의 나비는 상당히 카메라를 의식하여 행동하곤 했다. 나비가 권시혁을 돌아보았다.
“먀아~. (하기 싫어.)”
“이제 카메라 켤까?”
권시혁이 물었다.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나비는 스트리밍을 시작하는 그의 손을 콱 물었다.
“왜 그래, 나비야?”
권시혁이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짜 안 아픈가, 이 남자는? 나비는 그의 손을 시험 삼아 잘근잘근 씹었다. 그동안 그는 카메라를 켰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많이 걱정하고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비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나비는 그가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스트리밍을 시작하자 한숨을 쉬고 카메라를 등지고 털썩 누웠다. 그 남자가 웃었다. 그는 오랜만에 돌아온 고양이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는 분주한 채팅창보다는 고양이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또 삐쳤어?”
“먀~.”
“여기 좀 봐.”
모든 걸 등지고 뒤돌아서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의 작은 귀를 권시혁이 검지로 접었다 폈다 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나비는 화가 풀렸는지 벌렁 누우며 그의 손가락을 앞발로 툭툭 치며 장난을 쳤다. 그리고 누운 자세 그대로 눈을 마주쳤다.
“먀~.”
나비가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니 권시혁이 턱을 괸 채 자신의 고양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왼손은 나비가 끌어안고 있는 채였다. 그가 말했다.
“고양이 말 좀 알았으면 좋겠다. 불만이 뭔지 알면 다 해줄 텐데.”
왜 가출한 거야? 거짓일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나비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권시혁은 나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비가 입을 열었다.
“먀~.”
“응?”
“먀~.”
“왜?”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무뚝뚝한, 하지만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정말 무엇이라도 들어줄 것처럼.
차라리 진짜 고양이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때면 항상 마음이 아팠다. 유인하는 그게 자신이 진짜 고양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잠깐만….’
나비는 또 그렇게 스스로와 타협을 보았다. 권시혁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나비를 어디서 찾았냐고 물었다.
“정원에 있었습니다. 아마 이 근처를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나 봐요. 집 뒤에 작은 언덕이 있거든요. 병원에 갔다 왔는데 크게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권시혁이 스트리밍 채팅창을 보고 그렇게 대꾸했다.
“그동안에 나비가 좀 컸습니다. 오늘은 병원을 갔다 와서 컨디션이 안 좋네요. 네, 안 그래도 의사 선생님도 발정기라서 그런 게 아닌가 하시더라구요.”
무슨 기계처럼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비를 쓰다듬는 손은 매우 부드러웠다. 하지만 나비는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 그의 손을 또 물었다. 나한테 집중해. 이 남자는 아프다는 티도 내지 않았다.
<이 집 고양이도 무네요.>
<안 아프세요?ㄷㄷ>
채팅창에 그런 말이 올라왔다. 권시혁이 약간 한숨을 쉬었다.
“손을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비 혼나야겠네.>
<물 때 제대로 하지 말라고 훈련시켜야 해요.>
나비는 그 채팅창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보란 듯이 그의 손을 물었다. 그러니 채팅창에 채팅이 마구마구 올라왔다. 그 반응이 재밌어서 몇 번 더 그의 손을 물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물려도 아프다는 티도 내지 않는 이 남자가 너무나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반응과 고양이가 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훈수를 두었다.
나비는 촬영이 마음이 안 들었는데, 하다 보니 또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나비는 그의 손을 놓고 기지개를 켰다.
<어! 궁디팡팡 해주세요. 저러는 거 궁디팡팡 해달라는 거임.>
나비가 화면을 보지 않는 사이 그런 채팅이 올라왔다. 이미 어엿한 고양이 집사가 된 권시혁은 다른 인터넷 용어는 몰라도 고양이에 대한 용어는 몇 개 알 수 있게 되어 그 말을 보고 자신을 향해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나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비도 이제 8개월 정도는 되었다. 안 그래도 수의사가 나비가 발정기가 되어 집을 나가는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권시혁이라는 남자야 일부러 귀찮은 짓을 하지 않는 게 원칙 아닌 원칙인 남자였지만 그건 언제나 나비한테는 반대로 적용되었다. 그는 나비가 그저 기지개를 켤 뿐이라는 걸 모르고 오른손을 들어 올려 나비의 꼬리 위쪽의 엉덩이 부분을 살살 두드리기 시작했다.
“햐악?”
나비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그의 쪽으로 엉덩이를 더 치켜들었다.
‘앗, 앗, 아앗! 하앗! 아앙! 미, 미친…!’
그가 무심하게 툭툭 두드리는 손길이 엄청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하반신에 자극이 와서 생식기 주변이 찌릿찌릿했다. 목에서는 그릉그릉 거리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꼬리가 살랑 위로 솟았다.
‘흐응, 으응, 아앙, 싫어. 하지 마!’
처음에 그가 쓰다듬을 때도 유달리 기분이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겠더니 이건 차원이 달랐다. 궁디팡팡 이거 고양이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고양이 입장에서는 완전히 그렇고 그런 짓이었다.
‘하악, 으읏, 하…! 아앙, 하, 하고 싶어…!’
나비는 순간 본능에 정신이 나가 그에게 더더욱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나비의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음란한 상상이 지나갔다.
그런 그의 무릎 위를 대범하게 올라타는 상상이었다. 왠지 지금은 아무것도 입지 않아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분명히 당황하겠지. 어떤 일에도 그다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 남자다.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은 과연 어떨까. 이 무뚝뚝한 남자도 섹스를 할까? 흥분할 땐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그를 지켜보다가 대뜸 그의 무릎을 범하며 놀래키는 것은 나비의 특권이었다. 이 남자는 나비의 것이지 않던가. 그 상상이 나비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흥분한 적은 처음이었다.
‘더, 더 해줘. 하앗, 기분 좋아. 으읏, 기분 좋아. 좋아아.’
한참 정신을 못 차리다가 순간 나비의 눈에 카메라의 새카만 렌즈가 보였다. 나비는 자신이 이 남자의 손에 이런 걸 당하면서 카메라에 찍혀 오만 사람들에게 다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닫자 하악질을 하며 그의 손을 칵 깨물고 도망갔다.
“싫어하나….”
그 남자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나비가 서재 밖으로 도망가려고 할 때 김재민에게 잡혔다.
“하악! (놔라!)”
“나비야.”
김재민이 껴안았을 땐 교양 있는 고양이 나비도 다짜고짜 하악질을 시전했다. 김재민은 나비가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아주 싱글벙글이었다. 나비는 그가 상당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오늘 내내 피해 다녔다. 봐라. 그는 나비를 권시혁에게 데려다주기 전에 나비의 배에 얼굴을 묻고 배방구를 놓기까지 했다. 굴욕적이다. 김재민은 퍽 감동스러운 얼굴로 나비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가출하지 마, 나비야. 보고 싶었어. 왜 가출한 거야? 밥이 맛이 없나?”
김재민이 그렇게 물었다. 나비가 대꾸했다.
“캬악! (너 때문이다!)”
“난 혹시나 도련님이 그런 건가 싶어서 십년감수 했잖아.”
김재민이 그렇게 말하며 나비를 놓아주었다. 나비는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나비는 뒤로 돌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김재민은 다시 문 쪽으로 물러났다. 뭔가 아는 것일까. 그는 나비에게 얼른 권시혁에게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을 뿐이다. 나비는 터벅터벅 걸어서 그 남자의 무릎 위로 다시 올라갔다.
‘그래,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순 없어. 안정훈이 찾으러 올지도 몰라.’
이 집에 다시 오기 전까지는 언제라도 그가 나타나 자신을 해칠 것만 같아 긴장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차 사고가 나거나 사람들이 발로 걷어찰 수도 있었다. 사람은 죽으면 대체로 큰일 나기라도 하지 고양이는 아니다. 신경이 타버릴 것 같은 긴장을 유지하다가 이 남자의 품에 한 번 안기니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해결된 것만 같아서….
나비는 권시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권시혁은 나비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당연하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손길이 부드럽고 기분 좋았다.
이걸 잃고 싶지 않았다. 들키면 분명히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앞으로 평생 만나지 못하는 게 나았다. 그래서 전에도 이 집을 나갔지 않은가. 나가도 고통스러웠지만 차츰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냥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넘쳤다. 나비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나비는 말할 수 없음에 다시금 커다란 답답함을 느꼈다.
이제 됐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의 말이 맞다고. 연이 아니라고.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당신이 좋아. 당신이 너무 좋아. 떨어지고 싶지 않아. 같이 있고 싶어. 같이 있고 싶어.’
왜 같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으면 이유가 너무나 많아서 말문이 막힌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게 이렇게 기뻤던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했던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이제는… 고양이로 있을 수 있잖아. 그러면….’
그러면 전에 바랐던 것처럼 그냥 이 남자의 고양이로 평생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에게 붙어 있으면 된다. 그러면 그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다. 자신을 보살펴주고 사랑해줄 것이다. 그러면 평생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비는 자신이 겪었던 모든 불행이 이 남자를 가지기 위한 것이었다면 전부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가 좋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나비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추운 겨울의 차갑고 지저분한 아파트 복도. 외면하는 많은 얼굴들. 찢어진 상장. 한 번도 보지 못한 표독한 얼굴. 어두운 한강 변의 주차장.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모든 일들이 중구난방으로 떠올랐다. 심지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하나같이 ‘유인하’가 어떤 사람인지 조각했던 일들이다.
나비의 눈이 커지고 동공이 세로로 가늘어졌다.
‘아니야. 절대 그런 짓, 다시는, 누구라도….’
그의 프라이드가 꿈틀했다. 잊은 듯했던 모욕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며칠 전이었다. 떠올리면 언제고 그때로 돌아가 그에게 능욕당할 것이고 배신감과 굴욕감에 치를 떨 것이다.
‘또 포기한 거야?’
그 질문에 나비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처음으로 고양이가 되었을 때도,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도, 김성우가 고소를 하겠다고 협박을 했을 때도. ‘유인하’는 마치 이런 순간만 기다려온 것처럼 모든 걸 쉽게 포기해버렸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노력과 마음을 배신하고.
그리고 그런 유인하를 안정훈은 비웃고 쉽게 능욕하려고 했다. 그는 유인하조차 몰랐던 유인하까지 알고 있었다. 강한 외면에 숨겨진 위태로움과 피로함. 그에게는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유인하가 헛된 우월감으로 눈을 가리고 모든 것이 옛날과 같다고, 아무것도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는 동안 그는 정말로 강해졌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약하지 않다고, 강해지겠다고, 누구도 업신여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이를 갈며 맹세했다.
그래 놓고 또다시 이렇게 간단하게 ‘날’ 포기할 생각인가.
‘자존심도 없어? 너 정말 이 정도야? 복수 안 할 거야? 그 새끼들 전부 죽여야 한다고!’
왜? 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약해진 거지? 도대체 왜 날 배신하는 거야? 나만은 날 지키기로 했잖아!
지금까지 그가 해온 모든 노력과 억울하게 당했던 모든 일들이, 그래서 복수하겠다고 벼렸던 마음까지도 이렇게 한순간에 아무것도 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건 지금까지의 인간 ‘유인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같았다. 전의 두 달과 같이 유인하는 또 고양이로 도피하려고 했다. 절대 다시는 자신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맹세해놓고!
‘안정훈이나 이승원 같은 새끼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처럼 멀쩡하게 살게 놔두려고? 그래도 진짜 괜찮다고?’
유인하는 스스로에게 윽박을 질렀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비명은 분명 자신의 비명 소리였다. 유인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작 고양이가 되기 위해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것이 아니다. 그 누가 자신을 외면해도 나만큼은 나를 외면하지 않겠다고, 나를 믿기로 했었다. 할 수 있다고. 강해질 수 있다고.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이대로 고양이가 되어서 살면? 그러면? 이 남자가 정말로 날 끝까지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이 남자는 아무것도 몰라! 안정훈이 여길 안 올 것 같아? 날 분명히 찾으러 올 거야.’
그러면 과연 이 남자가 누굴 선택하겠는가. 너무나 자명한 것 아닌가. 어떻게 여길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여기야말로 가장 위험했다. 이 남자는 그의 형이었다. 이 남자의 곁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이 남자에게 들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안정훈에게 다시 무력하게 잡혀갈 것인가?
화가 났다. 그렇게 똑똑하다고 자신하던 자신의 판단력이 언제 이렇게 쓸모없게 되었을까. 안정훈 같은 것을 믿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 남자에게는 인생을 걸려고 하고 있었다. 멍청하게! 지금껏 모든 악조건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의지는? 나만은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스스로에 대한 굳건한 신뢰는?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그걸 스스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섬뜩했다.
‘그래서 이대로 포기할 거라고?’
바로 사흘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곧바로 이렇게 복수도, 자기 자신도 포기한다고? 왜? 뭐 때문에?
나비는 크게 눈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권시혁을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가 날 약하게 만들어.’
그는 정말로 날 사랑했지만 정말은 날 사랑하지 않았다. 정말로 날 지켜주고 있었지만 정말은 날 해칠 것이다.
지금까지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앞으로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절대. 강해지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왔다. 누구도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그런데 고양이가 되는 게, 이 남자가 주는 이 안전함과 애정이 유인하를 유혹했다.
형제는 형제인가.
유인하는 섬뜩함을 느꼈다. 형제가 나란히 유인하를 타락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애완동물이냐, 애완인간이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는 것인가. 진심이냐, 거짓이냐도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유인하의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등을 짓눌렀다.
‘그렇다면… 당신도 필요 없어.’
나비는 생각했다.
‘날 약하게 만드는 건 용서 못 해.’
약해서 당하는 것이다. 버려지는 애완동물, 방치당하는 어린아이. 약함이야말로 모든 불행을 불러오는 원인이라는 걸 유인하는 잘 알고 있었다.
*
나비는 부엌에 매복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훌륭한 포식자다. 먹이가 사정 범위 안에 들어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었다.
‘분명히 올 거야.’
기회는 한 번뿐이다. 다시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이미 그 남자가 안정훈에게 나비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벌써 연락을 했을지도 모른다. 언제 덮쳐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안전한 곳은 없었다. 아니, 여기야말로 가장 위험한 곳이다. 그렇기에 반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새끼는 완전히 또라이였다.
사랑한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하더니 억지로 붙잡고는 자신과 하지 않으면 고등학교 때 유인하를 노리던 친구들을 불러 함께 강간하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보통 미친놈이 아닌 것이다. 올 때 오더라도 그냥 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 집은 사람들이 많으니 허튼 짓거리를 함부로 할 수는 없겠지만 그건 나비도 같은 입장이었다.
‘여긴 칼이 많아. 부엌으로 오면 바로 사람으로 변해서 칼로 찌르고 다시 고양이로 변하면 돼. 아무도 모르겠지.’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아니, 범죄가 아니었다. 정당한 복수다.
‘신고해봤자 집행유예도 안 나올 것 같은데 복수하는 게 백 배 나아.’
모든 재범은 제대로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개와 다를 바가 없어서 나쁜 짓으로 보상을 받게 되면 끊임없이 나쁜 짓을 하게 된다. 유인하가 안정훈에 대한 복수를 포기한다고 저쪽이 얌전히 나도 미안, 이라고 할 리는 없지 않은가.
유인하는 그 일을 잊고 싶었다. 별것 아닌 것처럼. 그러기 위해선 그 이상의 복수가 필요했다. 마치 안정훈이 시간이 지나면 그때의 일을 한순간의 실수나 치기로 치부하며 잊어버릴 것처럼, 유인하도 그것을 당연한 승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 멍청한 놈이 감히 자신에게 덤볐지만 그 이상을 당하고 내가 이겼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면 유인하는 더 이상 굴욕감에 몸서리 칠 일도 없어지는 것이다. 스스로의 강함을 의심할 이유가 없어진다.
‘죽여버릴 거야.’
그렇게 나비가 살인을 꿈꾸며 자꾸 부엌에 숨어 있자 집안사람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틀이 갓 지났을 뿐이었다. 전에도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나가 집안사람들을 걱정에 빠뜨리더니.
“밖에서 고생을 많이 한 걸까요? 전에 돌아왔을 땐 사장님 빼고는 아무한테도 안 다가가더니 이번에는 사장님도 피하네요. 어제까진 괜찮았는데….”
“나비야.”
권시혁과 김 집사, 김재민 등이 한 대 모여 냉장고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비는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양이 훈련 전문가라도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병원에도 다시 가야 하는데….”
다들 전전긍긍한 얼굴이었다. 애완동물은 집안의 아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방법이 없어 사람들이 하나둘 일을 하러 떠났다. 권시혁은 독서 시간을 포기하고 나비를 계속 불렀다.
“나비야.”
나비가 냉장고 위에서 얼굴만 슥 내밀었다. 서 있는 그 남자를 내려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비의 동그란 동공이 평소와 달리 세로로 날카롭게 좁혀져 있었다. 권시혁은 가만히 자신의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는 약간 한숨을 쉬더니 물었다.
“계속 거기 있을 거야?”
이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을 조금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비는 그게 싫어졌다. 당신 말이 맞다고. 연이 아니라고.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나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서 화가 났다.
‘또 후회할 짓 하지 마. 약해지지 마. 안정훈한테 복수하고 나면 어차피 이 남자랑도 원수야. 다 잊고 공부할 거야. 합격할 거야. 잘 살 거야.’
나비는 그 남자에게 하악질을 했다.
“하악! (저리 가!)”
그 남자는 또 한숨을 쉬었다. 잠깐 더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뒤돌아서 가버렸다. 나비는 그런 그의 뒤통수를 빤히 보았다. 먀, 하고 그를 부를 뻔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저 남자도 똑같아. 내가 그 새끼 죽이려고 하는 걸 알아봐. 고양이 같은 게 눈에 보일 것 같아? 전부 기만이야. 그 새끼랑 똑같아. 사랑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야.’
속았다.
진심이라면 상대를 속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아니, 그 남자의 침실에서 갑자기 사람으로 변했던 그 새벽에 이미 알고 있었지 않았던가. 권시혁에게 유인하는 그저 좀도둑 같은 존재였다. 걸리면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나도 불평 한마디 할 수 없는 하찮은 존재였다.
‘그런데도 또 속는다고?’
왜 알면서도 속게 되는 걸까. 그렇게나 바보였을까, 자신이? 나비는 자신을 계속해서 다그쳤다. 귀신에라도 홀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인하는 올해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판단만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느슨해졌다. 스스로를 좀 더 채찍질해야 했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했다. 그러지 않아서 지금껏 당한 것이다.
‘나한텐 나밖에 없어. 잘 알고 있었잖아. 전부 다 착각이라고. 정신 차려.’
그렇게 나비가 살인 고양이로서 마음을 다잡고 있는 동안 가버린 줄 알았던 그 남자가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배고프지?”
“…….”
나비는 잠깐 복도 쪽을 보고 위에서 빤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먹이로 유혹하면 내려올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권시혁은 잠깐 나비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냉장고 위로 접시를 올려주었다.
밥은 먹어야지. 힘이 있어야지 복수도 하는 것이다. 나비는 발로 그릇을 끌어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릇 위의 음식이 휘황찬란하다. 나비가 좋아하는 한우가 가득이었다. 그때 밑에서 커다란 손이 불쑥 올라왔다. 먹는 동안이라도 쓰다듬어 보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비는 그가 쓰다듬으려 하니 하악, 하고 귀를 뒤로 눕히고 이를 드러냈다.
그래도 권시혁의 얼굴은 큰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냉장고 위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잊어버린 걸까….”
그런 중얼거림이 들렸다. 나비는 먹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냉장고의 위는 황량하고 오로지 자신밖에 없었다. 나비는 그의 말에 마음이 아팠는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 이제 알았잖아. 이 남자도 결국 날 속이는 거야. 진심이라서 더 나쁘다. 난 고양이가 아니야. 잊지 마, 안정훈처럼. 지금에서야 이러는 것도 벌써 바보 같은 거야, 엄청.’
가슴이 아픈 것도 바보 같은 거야. 전부 바보 같은 거야. 나는 속은 거니까. 나비는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었다. 신경이 곤두선 채로 몇 시간이나 있었을까. 밤새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경계하고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잠들었다.
“…?!”
야행성인 고양이라 밤 동안 자지 않으면 낮에는 어쩔 수 없이 잠이 든다. 그때 갑자기 뭔가가 나비를 꽉 붙잡았다. 나비는 혼비백산하여 소리를 마구 질렀다.
“캬악! (놔!)”
“잠깐만 참아.”
재빨리 움직이는 꼴을 본 적이 없는 그 남자가 자고 있는 나비를 붙잡은 것이었다. 다행히 안정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비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설마 날 그 새끼한테 데리고 가려는 건가?’
나비는 불쑥 그렇게 의심했다. 그리고 그게 이상할 정도로 사실처럼 느껴졌다. 더욱 몸부림을 쳤다.
‘그래, 고양이 같은 것보다 동생이 더 좋으니까. 날 넘겨주려는 거야.’
나비는 공포에 질렸다. 기억하지 못하는 꿈속에서는 그가 뭘 해도 절대 그를 해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론 그의 손을 물고 할퀴고 난리를 쳤다.
그래도 그는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병원에도 데리고 갔다. 병원에 가서도 한바탕 난리를 쳤던 나비였다. 집에 돌아왔을 땐 진이 다 빠져 있었다. 권시혁은 알아서 그런 나비를 냉장고 위에 올려주었다. 냉장고 위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
그게 뭐라고…. 나비는 기분이 너무나 이상한 것을 느꼈다. 가슴이 아픈 것도 같고 서러운 것도 같고…. 권시혁도 김 집사도 다른 사람들도 전부 냉장고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을 느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얘기를 나눴다.
“어디 아픈 건 아니래요?”
“네, 귀만 한 번 더 닦고…. 역시 발정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역시 전문가라도 불러서 한 번 상담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한 번 알아봐 주세요.”
나비를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걱정과 진심이 묻어났다. 나비는 목이 메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난 고양이가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야. 아무것도 느끼지 마. 해야 할 것만 생각해. 안정훈이 오면 죽일 거야. 그리고 이 집을 떠나서 다시 공부하고 합격하고… 전부 잊어버릴 거야. 나비는 냉장고 위의 가장 구석으로 가서 복도 쪽을 바라보고 네 발을 깔고 앉아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내가 왜 이렇게 나약해졌지?’
나비는 그런 자신을 심하게 질책했다. 자신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너무나 답답했다. 화가 났다.
작년과 올해의 불합격으로 약해진 자신을 안정훈이 돈으로 구슬리고 이내 덮치려고 했을 땐 전부 그의 탓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집에 돌아오고 나니 알 수 있었다. 고양이가 된 것도, 안정훈도 결정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권시혁이야말로 유인하를 약하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었다.
자꾸 그에게 기대고 싶게 만든다. 애정을 받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만 같다. 그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모두 포기하고 싶어진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쓰러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고작 무능력한 애완동물이 되어 주인의 사랑에 기대어 평생 살아가기로 결정하다니. 인간이라는 걸 들키는 순간 버림받을 그런 결정. 평생 불안에 떨며 그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되는 인생. 그런 인생을 바라는 건… 정말로 지금까지 유인하의 전부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땐 그래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러는 건 유인하의 인생도, 노력도, 전부 스스로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는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그의 침실에서, 다시 사람이 되어 쥐새끼처럼 도망갈 때 느끼지 않았던가.
‘바보같이 똑같은 실수 하지 마. 정신 차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기억해. 지금 이 남자의 앞에서 ‘원래대로’ 변하면 언제 사랑한다고 말했냐는 듯 눈빛이 달라질 것이다. 이 남자는 나비를 사랑하는 것이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알지 않은가. 자꾸 바보 같은 생각을 하지 말란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다그치는데도 마음이 전혀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날 밤 왜 그의 앞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던가. 들키면 모든 것이 최악으로 향할 거라는 걸 알면서. 입맞춤까지 하지 않았던가. 들키고 싶어 작정한 게 아닌가.
나비는 그 기억을 떠올리자 더욱 고통스러워졌다.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끊임없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너무나 한심하여 수치스러웠다.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어.’
나비는 생각했다. 자꾸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그가 미웠다. 자신의 결심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의 존재가 복수하겠다는 결심을 위협할 때마다 유인하의 존재의의와 가치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빨리 와라.’
나비는 냉장고 위의 구석에 숨어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귀를 뒤로 바짝 접고 있었다. 그 남자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비는 그가 자신의 생각을 읽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형.
“정훈아.”
나비의 동공이 좁아졌다. 일주일만인가. 고양이의 귀는 통화 내용을 전부 훔쳐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인 것도 같고 마치 방금까지도 내내 듣고 있었던 것만 같기도 했다. 마치 자신의 생각대로 안정훈이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안정훈만큼이나 유인하도 시야가 좁아지고 있었다.
-형, 혹시 나비 찾았어?
“응, 어떻게 알았어?”
권시혁의 목소리는 평소와 별다름 없이 들렸지만 묘하게 힘이 약간 없이 들리기도 했다. 나비는 그러기 싫은데도 그게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해 죄책감을 느꼈다. 나비는 자신을 공격하는 자기혐오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죄책감에도 극심하게 반발했다.
‘나는 원래 바로 가려고 했어! 다시 돌아올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어! 정훈이만 죽이면 갈 거야! 내가 괴롭히고 싶어서 괴롭히는 게 아니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괴로워지기만 했다. 나비는 그냥 자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쳤어? 약한 소리 하지 마!’
그리고 나비는 그런 스스로를 끝까지 채찍질했다.
‘복수만 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모든 게 정상이 될 거야.’
나비는 스스로를 세뇌했다.
-나 지금 형 집으로 가.
“지금?”
-조금 이따 봐.
전화는 짧게 끝났다. 안정훈의 기이한 행동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권시혁은 약간 의아한 기색이 있었다. 여유가 정말 조금도 없는 나비는 날카로운 눈으로 부엌칼을 노려보았다.
‘나 말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전부 적이라고 생각해. 그래, 전부….’
나비는 안정훈이 올 때까지 스스로를 그렇게 세뇌하고 또 세뇌했다.
*
“형, 나비는?”
안정훈이 권시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 말이었다. 안정훈이 권시혁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비 보러 온 거야?”
“형은 나비 찾고 어떻게 나한테 말도 안 해?”
“우리도 얼마 전에 찾아서….”
“어디 있어?”
평소에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예의 바른 안정훈이라기엔 상당히 분위기가 딱딱하다. 아니, 성의가 없다. 그에게서 항상 풍기는 부드럽고 착한 느낌이 사라졌다. 눈빛이 형형하다. 무던한 권시혁도 이상함을 느껴 안정훈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나비는?”
“부엌에 있는데.”
안정훈은 권시혁을 놓고 곧바로 부엌으로 달려갔다. 안정훈은 부엌을 휙휙 둘러보았다. 테이블 밑을 살펴보고 다른 곳도 뒤졌다.
“유인…! 아니, 나비야, 어딨어? 나와야지~. 착하지~.”
안정훈이 찬장과 서랍을 전부 열어보았다. 저녁이라 고용인들은 거의 퇴근하거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안정훈은 나흘을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유인하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고시원의 앞에서는 거의 그를 잡을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오랜 세월 동안 바라고 또 바라오던 일이었다. 약이라도 맞은 것처럼 고양감이 들어 잠시도 쉬지 않고 그를 찾아다녔다. 몇 번을 더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의 힘이었다.
“이런 데를 왜 와? 우리 형 별로 안 좋아하잖아? 난 널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는데~. 나 돈 번 것도 다 널 위해서였어. 알아?”
남이 본다면 미친 소리나 다름없는 소리를 하며 안정훈이 부엌을 헤집었다. 권시혁이 부엌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정훈아.”
안정훈이 아, 하고 형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제야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권시혁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형, 나비 여기 있는 거 맞아? 없는데? 어디 있어?”
“…….”
“형도 좀 찾아봐.”
권시혁은 다시 정신없이 구는 안정훈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 나비 데리고 나간 거 너냐.”
나비가 사라진 날은 안정훈이 돌아간 날과 같았다. 자동으로 닫히는 현관문이 아침에 열려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안정훈이 나비를 데리고 갔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권시혁은 쉽게 누군가를 의심하는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행동을 봐라. 의심하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형의 질문에 안정훈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지만 남에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분주하게 굴었다.
“뭐? 내가? 내가 뭐 하려고 그런 짓을 해?”
“나비는 내 고양이야.”
“아니라니까?”
“너도 가족이잖아.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도 돼. 염주 같은 거야 얼마든지 가져가도 되지만 고양이는 다르잖아.”
안정훈은 싱크대를 열어보다가 고개를 불쑥 들어 자신의 형을 돌아보았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얼굴이었다. 놀랄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안정훈이 반문했다.
“…가족?”
“우리는 형제라고 쫓아다니던 건 너였다.”
이미 나비는 돌아왔으니 다른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권시혁은 그렇게 말하곤 냉장고의 위를 살피며 고양이가 있는지 한 번 확인하고는 다른 곳으로 나비를 찾으러 갔다. 안정훈은 얼른 복도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권시혁을 보았다.
“형.”
그가 부르자 권시혁이 안정훈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다.
“진짜야?”
“뭐가.”
“나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해?”
안정훈이 물었다. 권시혁은 그런 동생의 얼굴을 보더니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한테 가족은 너밖에 없어.”
그 말에는 안정훈도 깜짝 놀라서 입을 잠깐 딱 벌렸다. 권시혁은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지, 그가 하는 말은 전부 외면할 수도 없는 진심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 난생처음 보는 그를 형이라고 소개하던 엄마의 눈물과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둘밖에 없는 형제이니 사이좋게 지내야 된다고 애원하듯 말하는 엄마의 말에 안정훈은 크고 무뚝뚝한 얼굴을 한 그가 조금 두려웠는데도 나서서 먼저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도 무척 화가 났었다. 바로 그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럼 고양이 나 줘.”
안정훈이 불쑥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가족이잖아.”
“고양이는 물건이 아니잖아.”
안정훈의 말에 권시혁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치사해.”
“자주 오면 되지. 나비도 너 좋아하니까.”
권시혁은 그대로 서재의 문을 열고 나비를 찾으러 들어갔다. 안정훈은 여전히 형이 있던 곳을 바라보며 눈 두 번 깜박이곤 코를 슥 문질렀다.
권시혁은 사실상 안정훈이 나비를 몰래 들고 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엄마는 형의 그런 점을 항상 섭섭하게 생각했지만 안정훈은 이상하게 그의 그런 점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좋아졌다. 예전에 그의 염주를 훔쳤던 것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해준 모양이었다.
“형 염주 돌려줄까? 나 아직 가지고 있는데.”
“너 해.”
안정훈이 소리쳐 물으니 권시혁의 무뚝뚝한 대꾸가 돌아왔다. 안정훈은 역시 기분이 괜찮았다. 그거 꽤 형한테 중요해 보여서 훔친 거였는데….
‘역시 형한테 좀 미안한데.’
역시 누가 뭐라고 해도 그들이 형제이긴 한 모양이다. 관대한 형이 있는 형제는 사이가 좋기 마련이다. 엄마는 어째서 형의 이렇게 좋은 점을 싫어하는 걸까? 형은 단지 아무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을 뿐이다.
흥분했던 안정훈은 방금의 대화로 약간 차분해졌다. 권시혁의 차분함은 전염력이 강하다.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다. 부엌을 한 번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마침 부엌의 뒷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기로 도망갔나?’
안정훈은 곧바로 그 문을 열었다. 요새 자꾸 비가 내려 땅이 잔뜩 젖어 있었다.
“유인…!”
안정훈은 유인하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다가 헉, 하고 아래를 쳐다보았다. 부엌의 덧문 옆에 서서 칼을 들고 있던 유인하가 그의 배를 곧장 찔렀기 때문이다. 안정훈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배를 보고 있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유인하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유인하의 눈동자가 안정훈의 눈을 보고 있었다.
“내가 죽여버린다고 했지?”
“…!!”
칼을 뽑자 안정훈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바로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안정훈은 분명 유인하가 이승원을 발견하면 그를 죽여버리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럴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뭐랄까, 지금의 안정훈은 유인하가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매우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잡기만 하면 자신의 것이 된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유인하는 유인하고, 아무리 약해졌어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호락호락하게 당할 사람이었으면 이미 어떻게든 해버렸을 것이다. 안정훈은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금방 찔린 부분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 숨쉬기도 어려웠다.
“허억, 윽…. 인하야…. 너 이래도… 괜찮아? 이제 정말 다… 으윽, 포기했어?”
“그럼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유인하가 눈을 부릅뜨고 칼에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안정훈의 눈을 끝까지 똑바로 쳐다보았다. 안정훈은 겨우 미소를 지었다. 안정훈이 유인하에게 얼굴을 슬며시 가까이했다.
“나 없이 어떻게 살려고? 응?”
끝까지 수작질이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머리채를 잡고 칼을 목에 들이밀었다. 안정훈의 안색이 벌써 새하얬다. 유인하는 그런 그를 벌레만도 못하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빌어.”
“하하….”
안정훈이 웃었다.
“이래야 우리 인하지….”
“빌어!”
“싫어….”
“윽…!”
유인하는 안정훈의 머리채를 더욱 세게 틀어쥐었다. 예전에는 빌라고 하지 않아도 절로 꿇던 놈이었다. 그것도 짜증 난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 게 훨씬 화가 난다. 유인하는 그의 얼굴을 이글이글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지금 네가 죽어도 아무도 내가 죽인지 몰라. 개죽음이라고.”
“하하….”
안정훈이 웃었다. 스스로도 그런 자신이 신기할 정도다. 안정훈은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바로 지금 깨달았다. 그리고 유인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 기억해줄 거지? 네가 죽인 남자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안정훈이 유인하의 목을 잡고 끌어당겨 입을 맞추려고 했다. 유인하가 질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어 그를 떨쳐냈다.
“이 미친 새끼가…!”
“왜애….”
안정훈은 그러지 말라는 듯 약간 어리광 어린 목소리를 냈다. 유인하는 그대로 화를 내려고 하다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유인하는 안정훈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그날 밤 유인하를 범하려고 했던 그는 지금 피를 철철 흘리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지금 당장 그의 목을 꿰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안정훈에게 휘둘릴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지금 힘을 가진 것은 유인하였다.
“하아….”
유인하는 잠깐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가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빛 의 예기는 더욱 강해지고 온도는 내려갔다. 유인하는 무릎을 꿇고 있는 안정훈의 허벅지를 발로 밟았다. 지그시 누르니 배에서 피가 더 나오고 안정훈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게 제대로 된 것이란 느낌이 든다. 이런 느낌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짜릿했다.
“너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릴 거야.”
유인하가 입을 열었다. 안정훈이 인상을 썼다.
“너 같은 건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이승원이 안정훈의 변모를 보고 유인하 같다고 생각했던 건 유인하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데 자유분방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선 의심이 많고 남들을 깔아뭉갤 필요가 있었다. 안정훈이 스스로도 속일 정도로 순하고 무해한 연기를 펼쳤던 이유가 뭔가. 유인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유인하가 나이가 들면서 친구들에게 관심을 거의 꺼버리고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에만 온 힘을 다해, 예전처럼 다른 사람들을 휘두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안정훈은 그런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짙은 속눈썹에 밝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새빨간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피가 묻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뿐만이 아니다. 그건 환희 때문이었다.
유인하는 알몸에, 그의 일부가 자신의 몸 안에 들어오기까지 했다. 이걸 우리의 첫 번째 섹스라고 봐도 될까? 피를 쏟을수록 찔린 쪽도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몽롱하고 기묘한 고양감이 든다. 유인하의 피부는 흥분으로 예쁜 분홍색에 눈빛은 원초적인 감정으로 일렁였다.
너한테 이런 걸 줄 수 있는 남자는 나밖에 없잖아?
처음부터 안 될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끊임없는 추구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안정훈은 지금까지 정말로 고통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고통도 없는 권시혁과는 달랐다. 너무나 바라지만 바라지 않는 척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통마저 외면하는 이승원과도 달랐다. 고통스러워서 포기하고 싶은데도 절대 포기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장작 삼아 불타오르는 유인하와도 달랐다.
안정훈이 웃었다.
“아니, 넌 못 잊어.”
“왜?”
“널 만족시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또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유인하는 뭔가 울컥했다. 많은 일이 있었다. 옛날에도 안정훈만큼은 눈에 거슬려 꼭 짓눌러야 직성이 풀렸다. 이제는 그가 자신에게 빌빌거리지 않고 건방지게 구니 이상할 정도로 분노가 솟구친다. 그의 앞에서 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 왜 너밖에 없어. 너 같은 거 아무것도 아냐. 나는…!”
“하하….”
그걸 보고 안정훈은 또 웃었다. 그는 유인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나 찌르니까 기분 좋았어?”
유인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잔뜩 흥분해서 온몸이 뜨거웠다. 알몸에, 등골로 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심장이 마구 뛰고 있었다. 찌르는 순간, 성공했다는 짜릿함에. 그게 복수라는 것이었다. 유인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안정훈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안정훈은 씨익 웃었다. 혈색이 싹 빠진 채로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의 안정훈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퇴폐적이고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이 순간을 영원히 잊어버리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눈을 맞춘 채로 안정훈은 유인하의 피 묻은 손에 입을 쪽 맞췄다.
“어떻게 빌까? 빌면 용서해줄 거야?”
“…….”
안정훈은 유인하의 얼굴을 그 강렬한 눈빛으로 계속 바라보았다. 유인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알아 온, 전혀 모르겠는 남자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유인하의 맨 발등에 입을 맞췄다. 배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말이다. 유인하는 눈을 잠깐 크게 떴다.
“미안해. 잘못했어. 사랑해.”
그걸 내려다보는 유인하는 한쪽 눈썹을 꿈틀했다. 안정훈은 다시 유인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난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네가 원하는 건…. 난 네가 원하는 걸 주려고 한 것뿐이야.”
“너랑 그딴 거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
유인하는 발로 그의 배를 꾹 눌렀다. 안정훈은 윽, 하고 허리를 구부렸다.
“기분 좋은 거… 으윽, 하고 싶다고 했잖아?”
“넌 아냐.”
“포기하고 싶었잖아. 포기할 수 있게 해주려고 한 것뿐이야.”
“닥쳐, 이 미친 새끼야. 빨리 죽어.”
“목도… 찌르는 거 아니었어?”
안정훈이 다시 비웃듯이 미소를 지었다. 유인하는 자신을 도발하는 그의 머리채를 다시 잡았다. 이것은 유혹이었다. 거부하기 힘든.
“하….”
유인하는 마른 입술을 한 번 말아서 침을 묻혔다. 피가 묻은 칼로 그의 목덜미를 살짝 쓰다듬었다. 놀라울 정도로 그냥 찌르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찌르고 싶지 않았다. 유인하가 평생 중요하게 생각해왔던 논리나 이성은 이미 자리를 비킨 지 오래였다.
유인하가 입을 열었다.
“너 도대체 뭐야.”
그가 물었다. 안정훈이 자신의 머리채를 잡은 유인하의 손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난 네 개잖아.”
마치 커다란 개가 주인에게 그러듯이.
안정훈은 다시 웃었다. 그리고 그는 유인하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저항하지도 않았다. 죽일 테면 죽이라는 듯했다. 복종을 하고 있는데도 도발적이기 짝이 없었다.
‘찔러. 그냥 찔러. 그리고 다 끝내. 이 새끼는 절대 용서 못 해. 찔러.’
유인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안정훈의 머리채를 잡아 강하게 끌어당겼다. 칼이 위협적으로 안정훈의 목을 파고들어왔다.
둘은 서로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유인하는 그의 유난히 검고 큰 눈동자를 보면서 그의 머리채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 까매서 유인하의 모습이 아주 투명하게 비쳤다.
‘죽여.’
유인하의 안 깊숙이에서 계속 죽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당연했다. 그렇게 그를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런데도 유인하는 끝까지 그의 목을 찌르지 못했다.
그리고 안정훈은 결국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유인하는 그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 보다가 깨어나지 않자 놓았다. 안정훈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칼을 든 상대 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만큼 무력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이겼다. 유인하는 그의 머리를 발로 툭 찼다.
“미친 새끼….”
유인하는 한숨을 섞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승리라는 건 분명 짜릿하다. 그 순간의 유인하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알몸이라든지, 손에 든 칼이라든지. 두 발로 어제의 비로 젖은 흙바닥 위에 굳건히 서 있었다. 적이 발치에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닌가? 홀로 선 승리의 피로감은 도취에 가깝다. 그때였다.
“정훈아?”
권시혁이 부엌 쪽으로 오며 그런 소리를 냈다. 유인하는 칼의 손잡이를 안정훈의 옷으로 빠르게 닦아내고 바로 고양이로 변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다가가서 그의 얼굴을 툭 건드렸다.
‘숨 쉬는 건가? 죽었나?’
진짜 고양이라면 이 순간에도 먹잇감의 숨통이 끊어졌는지 아닌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까. 지금은 너무 흥분해서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다시 사람으로 변해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는 게 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피를 많이 흘렸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은 죽어야지 말이 없다.
“…….”
놀라울 정도로 죄악감 같은 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끝끝내 그의 목을 찌르지 못한 것은, 그럴 수 있었는데도 주저한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기분이 이상하다. 만약에 그가 깨어나서 허튼소리를 한다면 모든 것이 어그러진다. 그것은 몹시 두려웠다.
‘목을….’
지금이라도. 쓰러진 안정훈은 고양이 나비보다 훨씬 컸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나비는 다시금 칼을 보았다. 다시 사람으로 변해서 목을 찌르고 고양이로 변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고양이의 귀는 이미 권시혁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늦었다.
“정훈아?”
부엌의 덧문이 열리며 권시혁이 고개를 내밀었다. 먼저 고양이를 발견하고 그다음에 쓰러진 안정훈을 발견했다.
“정훈아.”
그 남자의 목소리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었다.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만 음색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 남자도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곧바로 안정훈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뒤집어 보았다. 안정훈은 배에서 피가 철철 나고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는 배의 상처를 누르고 안을 향해 소리쳤다.
“김 집사! 누가 빨리 119에…!”
이 남자가 소리를 지르는 건 처음 보았다. 고양이는 가만히 네 발을 모으고 앉아 자신의 주인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가족은 너밖에 없어.]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이 남자에게는 고양이 같은 것보다 동생이 중요한 것이다. 저번에 안정훈이 자신을 속이고 나비를 들고 가버렸다는 것을 눈치채고도 그렇게 말할 정도다. 혼 한 번 내지 않았다. 결국 고양이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역시 잊어버린 걸까….]
화가 난다. 먼저 저버린 건 이 남자였다. 속은 것은 이쪽이다. 나비의 새하얀 앞발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나비는 생각했다.
‘앞으로 누구도 믿지 않아. 아무한테도 기대지 않아. 나에겐 나밖에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
큰일이 되었다. 대중교통도 마땅히 다니지 않는 동네에 구급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왔다. 권시혁은 안정훈을 실은 구급차를 타고 가버렸다. 경찰도 왔다. 고용인들도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피가 낭자한 부엌 밖을 보며 최수아라는 고용인이 나비를 꼭 껴안고 있었다. 경찰 조사가 끝날 때까지 치울 수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공포와 걱정이 읽혔다. 나비는 긴장했다. 누구라도 범인이 자신인 걸 알아차려 추궁을 하지 않을까, 하는 비합리적인 불안이 치밀어 올랐다. 이상하게 그게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나비의 하얀 발이 아직도 피로 검붉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도 고양이에게 네가 범인이냐는 질문을 하진 않았다. 그제서야 묘한 안도감이 찾아왔다.
‘설사 안정훈이 깨어나서 내가 범인이라고 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이런 데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날 잡을 수 없다.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도. 내가 그 개새끼를 죽였다. 그는 죽을 것이고 나비는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부당한 이득을 취득한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은밀한 기쁨이 느껴진다. 모두가 바보처럼 보였다. 이제야 크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수는 역시 빨리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능욕하려고 했다. 감히.
‘후회하지 않아. 난 날 지킨 거야. 복수한 거야. 정당한 거야.’
집이 넓어서 다행이었다. 1층에는 김 집사와 몇몇만 남고 다들 2층으로 올라갔다. 다들 2층 거실에 모여서 불안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우리 사장님이 누구한테 원한 지실 분도 아니고….”
“CCTV에도 아무것도 안 나와 있잖아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게다가 권시혁이 보통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 중 한 사람이다. 그것도 출생이 복잡한.
“정희 회장님은 우리 사장님 끼고 사셨지만 지금 회장님은 사장님보다 후처 자식들 더 좋아하시고….”
“후처라고 할 수 있나요. 사장님 어머님은 결혼도 안 하고 사장님 낳으신 건데. 게다가 그냥 평범한 사람이시고….”
“하긴….”
“20년쯤 뒤엔 왕자의 난이라면서 떠들썩할지도 모르겠네요.”
“어떡해요. 우리 사장님은 일하는 것밖에 모르시는 분인데….”
“그러니까 정희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얼른 회사도 물려주신 거죠.”
약간 나이가 있는 고용인들이 전 회장이 죽고 나서 들어온 고용인들은 잘 모르는 얘기를 해주었다. 최수아는 불안한 얼굴로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만 있다가 곧 경찰에게 나비를 씻겨도 되냐고 물어보고 2층 욕실에서 나비의 목욕을 시켜주었다.
“먀~!! (발만 씻겨!)”
“세상에….”
나비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지 않고 2층 창문에서 자신이 안정훈을 찔렀던 현장만 쳐다보고 있다가 잡혀왔다. 최수아는 이 평화로운 저택에서 일어난 비극에 무거운 한숨을 계속 지었다. 목욕 후에 나비는 다시 2층 창틀에 앉아 1층을 내려다보았다. 사이렌을 끈 경찰차의 불빛만 정원을 들락날락거리고 낯선 이들이 부엌 뒷문 쪽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TV 속에서 보던 것만 같던 장면이었다. 그리고 범인은 바로 모두를 비웃고 있는 고양이다.
‘아무도 날 잡을 수 없어.’
유쾌한 생각이다. 그래서 나비는 마치 사냥에 성공한 맹수처럼 의기양양하고 느긋한 태도로 피에 젖었던 자신의 앞발을 그루밍했다. 발이 깨끗해질수록 역시나 아무도 자신을 잡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기분이 좋았다. 밤이 될 때까진 마치 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누가 쓰다듬으면 유쾌한 목소리로 먀~, 하고 울기도 했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고용인들은 전부 퇴근을 하거나 숙소로 돌아갔다. 이 거대한 저택에는 나비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비극이 일어난 저택에 홀로 남은 고양이. 2층에서 1층으로 가는 통로는 막혀 있었다. 고양이방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비는 아까의 창틀에 앉아 천천히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밤하늘이 청명하고 보름달이 휘영청 떴다.
나비는 아무도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몇 번 대문을 힐끔거렸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역시, 라고 생각했다. 당연하다. 고양이라는 건 보통 사람에게도 우선순위가 제법 밀리는 존재일 것이다. 그런 남자에게는 더더욱 그렇겠지.
배신의 굴욕도, 복수의 기쁨도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비는 그렇게 굴욕감에 떨었으면서도 그 남자를 만났을 땐 기뻐했으며 그렇게 복수에 기뻐했으면서도 지금은 출처를 모를 쓸쓸함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경멸했다. 혼자 있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왜 때때로 누군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어차피 누가 곁에 있더라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난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네가 원하는 건….]
나비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게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더. 그중에서 가장 깔보고 있었던 인간은 당연히 안정훈이었을 것이다. 가장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장 질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자신의 주변에서 사라져갈 동안에도 그만은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당장 곁에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항상 선택되었던 것은 안정훈이었다. 손쉬운 상대, 가장 편한 선택.
놀랍게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똑같은 말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유인하에게 맹세하듯 하던 말이다.
[너한텐 나밖에 없어.]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언제나 유인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인하는 한 번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안정훈밖에 없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다른 사람을 위해 뭐든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안정훈이니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어리숙하고 바보 같았으며 병신이었다.
‘개새끼, 말은 잘한다. 그런 새끼가 날 어쩌고 어째? 빌 거면 처음부터….’
그러다 옛날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이 막 됐을 무렵 안정훈과 이승원, 김성우도 있었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잔뜩 모여 기억도 안 나는 무슨 바보 같은 농담으로 크게 웃었던 때였다. 언제나 우르르 같이 다녔다. 별것 아닌 일에도 항상 즐거웠다.
그때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뭘 해도 잘하고 칭찬받았다. 자신이 하지 못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자신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 굳건히 믿고 있었다. 진심으로 웃을 수 있을 때였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는 언제나 안정훈이 있었다. 그제야 유인하는 안정훈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그때를 돌아보고 위안을 얻던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의 추억은 유인하에게 가장 빛나는 기억이었다. 암울했던 그의 인생에서 스스로가 가장 강하다고 느꼈던 때였다. 모두에게 환영받고, 사랑받는다고. 그리고 그의 복종은 유인하의 자긍심을 때때로 만족시켜주곤 했었다.
유인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리고 사실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유인하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그래, 그래서 그렇게 싫었던 거야….’
나한텐 나밖에 없어. 다들 그런 것뿐이야. 나비는 그대로 쭉 창틀에 엎드려 대문을 바라본 채로 있다가 잠들었다.
다음날이 되자 저택은 겉보기엔 다시 멀쩡해졌다. 하지만 절대 전과 같지 않았다. 고용인 몇 명은 출근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선 불안이 읽혔다. 나비는 자신이 떠나야 할 때가 왔다는 걸 직감했다.
‘정훈이 이 새끼는 그래서 죽은 거야, 안 죽은 거야?’
그것만 갈피가 잡히면 그냥 나가버려도 상관없었다. 설사 안정훈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더라도 누가 사람이 고양이로 변한다는 말을 믿을 것이며, 이제는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유인하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들킬 일은 절대 없다.
‘그래, 그러니까 지금 나가도 상관없어. 차라리 나가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는 게 좋아. 내 방도 지금 어떻게 됐을지…. 아, 내 물건은 다 그 새끼가 들고 있었잖아? 아, 젠장.’
그리고 이승원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도 확 찔러버릴까 싶었다. 어째서인지 괘씸하기로는 그도 만만치 않았다. 그 뒤엔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이번에도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여전히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집을 나가는 것이야 예전과 달리 고양이와 인간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으니 인간으로 변해 문을 열고 고양이로 다시 변해 나가면 될 것이다. 인간인 채로 옷을 훔쳐 입고 정문으로 당당히 나갈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지금은 집안의 CCTV를 경찰들이 샅샅이 조사하고 있을 테니 너무 위험하다.
부엌 뒤쪽의 덧문 쪽에 있는 CCTV는 문 위에 달려 바깥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 장소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도망친 사람이 다른 CCTV에 찍혔을 리도 없으니 집안의 분위기가 아주 흉흉했다. 집안사람들이 조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그런 일까지 저질러서 그럴까. 죄책감이 딱히 들지 않았다. 안정훈을 찌르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염려하는 사람들을 보면 죄책감이 느껴져 스스로에게 화를 잔뜩 냈다. 지금은 그냥 모든 게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죄책감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어차피 저 사람들에게 자신은 그저 고양이일 뿐이다.
‘그래, 그러니까 빨리 나가야 해.’
여긴 더 이상 그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런 곳은 없었다.
권시혁도 안정훈도 유인하에게 무언가를 ‘거저’ 주는 듯싶었다. 하지만 역시 세상에 그런 건 없었다. 사랑스러운 고양이가 아니라면? 권시혁은 나비의 것이 되지 않는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성적으로 착취하고 싶어 했다. 공짜를 기대하는 마음 자체가 문제다. 나약하고 어리석다.
당장 고양이 상태로 도망쳐 고시원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짐을 다 정리해 다른 곳에 두었을지도 모르고 그럼 사람으로 다시 변하기가 곤란해진다. 고양이에서 사람으로 변하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알몸으로 변한다. 그렇다고 고양이의 몸으로 본가를 가기엔 너무 멀다.
‘부탁할 수 있는 사람 없나? 밤에 컴퓨터로 문자 보내면 될 거 아냐.’
나비는 밤을 기다렸다. 그리고 서재로 가서 컴퓨터를 켜고 자신의 계정으로 카카오톡 로그인을 했다. 많이 고민해봤지만 결국 부탁할 사람이라곤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야, 유진하. 저녁까지 내 고시원 앞에 옷 좀 가져다 놔라. 티셔츠, 바지, 속옷, 신발. 저녁 시간 언제든 상관없다.>
문자를 얼른 보내고 로그아웃을 했다. 그 뒤 그 남자의 계정으로 다시 로그인을 해 두고 고양이로 변했다. 그리고 나서야 미약하게 불안하여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사라졌다. 자신이 들킬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내일 고시원 가서 짐 챙기고…. 잠깐 유진하 집에서 지낼까? 그리고 이승원….’
나비는 서재를 나와 자연스럽게 그 남자의 방으로 갔다. 원래는 갈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을 열어보았다. 그는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
나비에 대한 그의 사랑조차 그런 별 볼 일 없는 것이었다. 나비를 연기하고 있던 유인하에게는 어떨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동생이 훨씬 중요한 것은 당연했다. 그는 유인하의 것이 아니었고 그러니까 그는 유인하를 지켜주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나비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먼저 상대를 버린 것은 이쪽이다. 그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존재라는 걸 일찍이 깨닫고 대비했다. 그러니까 슬퍼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었다. 나비는 바보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가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비는 천천히 그의 침대로 다가가 침대 위로 사뿐 뛰어올랐다. 단정하게 정리된 침대 위를 걸어 그의 베개 위에 똬리를 틀고 누웠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
점점 갈수록 불안함이 심해졌다. 여전히 죄책감은 없다. 고양이가 고양이인 주제에 살인자로 지목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은 모든 다른 감정들을 마비시켰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기분 좋았는데, 새벽까지만 해도 뭔가 느꼈었는데. 어제의 나와 지금의 내가 불연속적이다. 멋지게 복수를 해냈는데도 왜 그 기분 좋음이 영원하지 않은 것일까. 마치 강렬한 마약을 맞고 난 뒤엔 그 어떤 것도 성에 안 차는 것처럼. 어쩐지 지금은 잠든 것과 깬 것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나비는 천천히 눈을 깜박거리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먼지가 떠다녔다.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피로감이 엄습했다. 마치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 놓고 엑셀만 최대로 밟은 채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세상을 사는 의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복수를 하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다시 열심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나? 하지만 나비는 자신이 전처럼 그렇게 빛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것마저도 의심스러웠고 지금은 너무나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굳이 안정훈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비는 원래 지쳐 있었다.
그래도 살아가야 했다. 질 수는 없으니까.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이다. 인생도 원래 이런 것이다. 행복도 사랑도 전부 환상일 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힘을 내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 저택을 서성거리다가 서재로 들어갔다. 차라리 낮잠을 청했다.
낮잠을 자는 듯 마는 듯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비의 컨디션은 아주 최악이었다. 고양이가 되면 언제나 날아갈 것만 같이 가볍던 몸도 지금은 너무나 무거웠다. 어깨와 등이 쭈그러들어 온몸을 뭉개 버릴 것 같았다.
나비는 내내 서재의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유인하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던 곳 중 하나이다. 이런 것으로라도 기분을 좀 낫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밤을 기다렸다. 나갈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시간이 괴로웠다. 차라리 공부든 뭐든 해야 할 걸 당장 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자신이 끔찍했다. 불안과 허무감이 빠르게 번갈아 찾아올 뿐이다. 자신이 발각될 수 있는 각양각색의 경우를 상상했다. 물론 그 무엇도 현실감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대비를 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불안하다.
사람들이 손을 대려고 하면 날카롭게 하악질을 했다. 나비는 예전의 그 귀엽고 애교 많은 모습이 거짓말이었나 싶을 정도로 예민하고 날카롭고 폭력적인 고양이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귀여워하던 사람들도 안타까운 얼굴을 하면서도 꺼려했다.
‘그래, 이것 봐. 내 편은 아무도 없어. 아무도 날 지켜주지 않아. 나는 내가 지켜야 돼. 정신 바짝 차려야 돼.’
복수를 하면 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틀림이 없었다. 유인하는 다시금 전처럼 생존 그 자체에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유인하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돈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에 낭떠러지가 산재했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추락할 것이다.
몸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등이 아팠다. 나비는 하는 수없이 책장 밖으로 뛰어내렸다. 언제나처럼 우아하게 착지할 수가 없었다. 나비는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그제야 나비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어? 왜 이래? 아픈 거야? 어디가? 왜?’
굶었을 때를 빼면 나비는 아파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건강할 때와 달리 아플 때면 유달리 그답지 않게 되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없이 낙담하고 뭐든 쉽게 포기했다. 원래부터 믿는 것이라곤 자기 자신 중에서도 아주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위태로운 것이다.
균형감각을 잃는 것은 심각한 병일 수도 있었다. 뇌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런 것일까? 그는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를 찾았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이 막막해졌다.
“아으윽….”
외면하고 있던 고통이 느껴졌다. 유인하는 사람으로 변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다.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허리와 등을 당기는 느낌이 사람으로 변하는 느낌과 같았다. 맨몸으로 땅바닥을 뒹구는 건 절대 좋은 느낌이 아니다. 분명히 잠에서 깼을 때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 유인하는 그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그 탓에 기분이 나빠 그런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인하는 간신히 다시 고양이로 바뀌었다. 안 그래도 걱정거리가 태산 같은데 앓기까지 하니 짜증이 심하게 났다.
‘씨발, 내가 아프기까지 해야 해?’
뭐 때문일까. 비를 맞아서? 안정훈을 찔러서? 나비는 그대로 옆으로 털썩 누운 채 끙끙거리며 앓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멀쩡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나비는 살면서 아플 때 아프다는 것을 별로 인정받아본 적이 없어서 사실 아프다는 게 뭔지 잘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똑똑하면서도 몇몇 감각은 여전히 잘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니까.
‘설마 큰 병은 아니겠지?’
유인하는 자신이 한 번도 아플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만약에 큰 병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겨우 고양이가 되는 걸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안정훈에게도 복수했다. 그런데 병이라면?
누구에게 어떻게 말하고 돈은 어떻게 마련하고 공부는 어떻게 하고…. 순식간에 많은 생각들이 몰아쳤다. 하지만 무엇도 어떻게 해야겠다고 선뜻 정할 수는 없었다. 곤란하다는 얼굴, 질색인 얼굴, 혹은 기뻐할 얼굴들이 있었다.
그건 그냥 죽느니만 못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인하는 다시금 그냥 별것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그러면 다시금 구분할 수 없어서 괜찮아지는 것이다. 걱정해봤자 어차피 소용없다. 그러니까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 이득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이성적인 생각은 한 번도 제대로 먹히지를 않을까. 스스로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막연한 불안감이 피크를 찍었다.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인하는 저도 모르게 스스로를 세뇌하듯 말했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도저히 괜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와인을 두 병이나 마시고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기억나는 한 그렇게 크게 앓아본 것은 그때 그 숙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보다 더 아팠다. 그냥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유인하는 그 개념이 너무나 싫었다. 죽는다는 생각.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크게 반발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기운마저 없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비는 먹은 걸 토하고 그대로 반쯤 기절해서 축 처졌다. 어떻게 이 순간까지 모를 수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잊고 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래, 그때도 죽고 싶었지. 그때도…. 그때도….’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던 생각보다 많은 순간들. 비가 내리고 모든 게 쓸려가길 바랐던.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건강하고 좋을 땐 모든 게 다 괜찮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힘들어질 때 붙잡고 버틸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나마 붙잡고 있던 공부도 그를 배신했다.
‘이젠 너무 피곤해….’
어째서 살고 싶다는 생각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 수 있는 것일까. 왜 또 이렇게 포기하는 것일까. 왜 이렇게 포기에 익숙해진 것일까.
도대체 이 ‘유인하’는 누구인가.
안정훈을 찌르기 전에도 이미 유인하는 1여 년간의 무력감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고작 0.5점이 자신을 좌절시킨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고작 0.5점이었다. 그런 것에 무너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든 부정적인, 자신답지 않은 감정과 생각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더욱 가혹하게 스스로를 채찍질했을 뿐이다. 그래야지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고양이가 되었을 땐 겨우 자신의 채찍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난생처음으로 대가 없는 안전과 애정에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은 피할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은 피할 수가 없었다. 사람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평생 고양이로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유인하를 공격했던 것은 나비에게 속았던 권시혁도, 평생 유인하에게 개처럼 부려졌던 안정훈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몇 번이고 결심과 포기가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스스로에 대한 신뢰는 자취를 감췄다. 노력은 멀고 포기는 가깝다. 유인하는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고 그 길을 바로잡아줄 사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안정훈 같은 걸 찌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복수만 하면 모든 것이 ‘정상’이 될 것이라고 멋대로 기대했다. 여전히 헛발질을 하고 있었다. 가장 찌르고 싶었던 건 안정훈도, 이승원도, 심지어 김성우도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믿었는데, 기대했는데, 사랑했는데, 결국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너무나 미워서 살해하고 싶었다.
‘그래,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려. 죽어. 죽어.’
고통 속에서 나비는 저도 모르게 스스로를 저주했다. 지난 1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익숙했다.
“나비야.”
계속 집에 들어오지 못했던 권시혁이었다. 자신의 집에서, 그것도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칼을 맞아 병원에 실려 갔다. 이래저래 큰일인 것이다.
권시혁은 나비가 구토를 하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는 작은 치즈태비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기절한 것은 아니었는지 몸에 손을 대자마자 고개를 들더니 귀를 뒤로 눕히고 하악질을 했다.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워서 또 구토를 할 것 같았다. 그가 다시 만지려고 하니 나비는 그의 손을 물었다.
“하악! (만지지 마! 싫어!)”
“어디 아파? 병원에 가자.”
자신이 그를 계속 기다렸다는 걸 나비는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인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다시 보기 싫었다는 것도.
‘늦었어! 이제 와서…!!’
그도 지금 마음이 자기 마음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막 집에 돌아온 고양이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싫겠는가.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요구만 많은 고양이다. 나비는 이미 그가 자신을 아주 귀찮고 짜증 나는 짐처럼 생각하고 있으리라 무의식적으로 확신했다.
이런 고양이따위 줍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말이다. 버릴 수 있다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버려도 좋아. 아니, 지금 버려주면 감사하지!’
그래, 그가 버려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화를 내길 바라고 있었다. 분명히 짜증이 날 것이다. 발길질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유인하라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런 티 하나 나지 않았다. 나비는 몸이 아픈데도 그의 얼굴에서 실망의 증거가 나타날 것을 확신하며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누가 칼에 찔렸나 싶을 정도로 평소와 똑같았고 아무리 손을 물어도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나비야.”
이름을 부르는 차분한 목소리가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 뿐이다. 지금인가, 아니면 지금? 그렇게 그가 자신을 공격할 타이밍을 재던 나비는 초조와 불안, 공포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 전부 다 싫어!’
안 그래도 미치기 일보 직전이던 나비는 완전히 폭발했다. 분명히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비는 이 집을 나가 다시 공부를 하고 고시에 합격해 제대로 살아갈 것이라 마음먹었다. 이 마음을 다시 배신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몸이 아파지자마자 또 그걸 간단히 포기하며 죽고 싶다는 허망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마치 매일 결심만 하고 시작조차 못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벌써 몇 번째인가. 자신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달랐는데! 그 원망은 얼토당토않게도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나비는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물고 손톱을 세워 그의 손을 크게 할퀴었다.
“하악!”
권시혁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도 놀라서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나비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잊고 마구 울어 댔다.
웃기지 마. 내가 싫은 거 다 알아. 당신은 그냥 나사가 하나 빠진 인간일 뿐이야. 아무것도 못 느끼니까! 석남! 불감증! 이건 전부 당신 탓이야. 당신이 날 약하게 만들었어. 그래서 안정훈 그 개새끼한테도 그런 짓을 당한 거야. 예전의 난 이렇지 않았어. 가고 싶으면 가버려! 버리고 싶으면 버려! 난 아무렇지도 않아! 당신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나비는 구석으로 도망가서 자신을 보호하며 잔뜩 웅크렸다.
“캬아아!”
그 남자를 보며 심하게 하악질을 했다. 언제든 다시 공격하겠다는 듯이. 작은 고양이는 주인에게 엄포를 놓고 있었다. 버릴 테면 버려봐! 그의 손에서 피가 주르륵 흐를 정도로 할퀸 상처가 심했다. 그걸 보고 나비는 생각했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이젠 분명히 포기할 것이다.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어차피 나한텐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그러니까 상관없어! 얼마든지 미워하라고 해! 난 복수할 거야! 난 합격할 거야! 그러면 전부 괜찮아질 거야!’
나비는 여전히 스스로를 윽박질렀다. 타인이 공격이 예상되자 나비는 언제 무기력했냐는 듯 공격성을 발휘했다. 나비는 죽일 듯이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얼굴은 그저 차분하고 무뚝뚝할 뿐이다. 언제나처럼. 그것마저도 원망스럽다. 나비는 다시금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프고 어지러웠다.
“캭. 캬앙.”
나비는 다시 옆으로 털썩 쓰러져 이상한 울음을 냈다.
“나비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가 나비의 이름을 불렀다. 한쪽 무릎을 꿇고 나비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권시혁이 얼른 나비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시 그를 만져보려고 했다.
나비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도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 몸이 아팠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더 미칠 것 같은 건 왜 자신이 이런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비야, 병원 가자. 의사 선생님이 고쳐줄 거야.”
날 미워하는 게 분명한데 도대체 어째서 이러는 것인가! 저리 가버리라고! 어린아이라도 대하듯 어르는 목소리를 내며 그 남자가 또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아파서 쓰러져 있던 나비는 퍼뜩 머리를 들어 그 손을 있는 힘껏 깨물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물린 채로 다른 손으로 나비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려 했다.
나비는 그 손길이 자신에게 닿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전부. 이것은 공포였다. 유인하는 권시혁이 두려웠다.
“싫다고 했잖아!”
유인하는 권시혁의 얼굴을 찌를 듯이 노려보며 그의 손을 쳐냈다.
*
‘나비가 사람으로 변했다?’
세상에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하는 것만큼 놀라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에 비견될 정도로 놀라운 것이 또 있었다. 나비‘였던’ 인간의 모습이었다. 권시혁의 눈에는 그가 색(色), 그 자체를 사람으로 구현한 것처럼 보였다.
총기로 번뜩여 눈빛이 강렬했다. 뭔가 불만이 단단히 있는 듯한 눈빛이다. 하지만 쉽사리 말해줄 것 같진 않다. 누구든 유심히 그를 관찰하고 말 것이다. 그 불만이 무엇인지, 뭘 원하는지 알아내어 만족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맹수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밝은 곳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남자의 유난히 검고 큰 눈동자는 분명히 놀람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그는 차분했다. 유인하는 그런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비와 비슷한 밝은 갈색의 눈이다.
유인하는 알몸이었다. 전에는 알몸이 부끄러워 가리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권시혁이 자신을 공격하기라도 할 것처럼 경계심으로 눈에 불을 켠 채 노려보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권시혁이 눈을 한 번 깜박일 때 유인하는 순식간에 책상 위에 있는 만년필을 쥐고 그를 덮쳐 한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고양이처럼 날랜 동작이었다. 날카로운 펜촉이 그의 턱밑을 눌렀다.
서재의 책상과 커다란 창문의 사이, 바닥에는 정장을 입은 커다란 남자가 누워 있었고 그 위를 나체의 미청년이 덮치고 있었다. 새카만 정장과 새하얀 피부가 완벽한 대조를 이뤘다. 유인하가 그를 위협했다.
“움직이지 마.”
유인하는 그의 눈을 손으로 단단히 감싼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대로 둘 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유인하는 사람으로 돌아왔는데도 머리가 아파 신음을 흘렸다.
“으윽….”
그러자 유인하의 밑에 깔린 그 남자가 움찔했다. 유인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
왜 사람으로 변했는지 모르겠다. 이건 유인하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그 남자의 바로 코앞에서 사람으로 변했다. 눈 돌릴 틈도 없이. 마치 그 남자에게 들키고 싶었다는 듯이.
칼에 찔린 안정훈의 곁에 있었던 건 나비밖에 없었다.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면 자신이 안정훈의 친구라고 둘러댔던 때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면 유인하가 누구인지 찾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범행 도구에 지문이 다 지워지지 않았거나 DNA라도 남아 있다면 범행의 증거를 밝히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는 걸 봐선 안정훈도 아직은 죽지 않은 것 같으니 만약 그가 깨어나 무슨 말이라도 한다면 유인하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이제 이 남자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동생을 죽이려고 한 게 고양이인 척한 인간이라는 것도. 이제는 아무리 이 남자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제서야 비로소 자신의 예상이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놀랍게도 유인하는 웃었다.
“당신 생각을 맞춰 볼까? 이딴 길고양이 그냥 처음부터 내쫓을 걸, 그렇게 생각했지?”
“나….”
“움직이지 마. 내 말 안 끝났어.”
유인하는 그의 목에 펜촉을 더 깊게 눌렀다. 잉크가 새어 나와 마치 피처럼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한 것만으로도 기함할 일일 텐데 거기다 그 고양이가 주인을 죽이려고 목을 겨누고 있었다. 심지어 말도 못 하게 한다.
‘나비가 사람으로 변했다.’
눈앞에서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했다. 그런데도 권시혁은 심한 인지부조화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실재하는 사실을 부정하는 인간다운 짓은 하지 않는 남자였다. 자신의 눈앞에 일어난 일인데도 믿기지도, 믿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나비가….’
권시혁은 분명히 당황했는데도 낯설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답지’ 않은 격렬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나비는 분명히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였다. 무언가에 구애되는 법이 거의 없는 남자가 자신의 고양이에게는 무척이나 구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생처음으로 무언가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사랑하는 마음,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그런 것은 아무리 석남에 불감증인 남자라도 배타적이게 만들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형태가 아니라면 거부하는 것이다. 그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얼굴이… 어떻게 생겼었지?’
눈이 가려져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다시 얼굴을 보고 싶었다. 눈을 좀 더 보고 있으면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비….”
손을 움직여 나비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더니 나비가 더욱 사납게 목을 눌렸다. 나비가 작은 고양이가 아니라 큰 고양이였으면 이 집안에 남아나는 사람이 없었겠다. 나비는 예쁘고 애교가 많았지만 분명히 예민하고 사나운 부분도 있었다.
“안정훈 그 새끼는 알고 있었어. 여기서 바보는 당신이야. 당신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래, 누가 이런 걸 예상할 수 있겠어? 놀랐지? 이번엔 어쩔 수 없었지?”
안 그래도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남자다. 눈까지 가리니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첫인상처럼 조각상같이 무기질적이다.
“난 항상 당신을 놀라게 하고 싶었거든.”
유인하는 눈을 크게 뜬 채 미묘한 미소로 입가를 치장하고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산같이 있었다. 그런 말들은 지금 한마디도 하지 않겠지만. 나비는 원래도 말이 많은 고양이였으니 이 무뚝뚝한 남자는 그러려니 할까.
“당신도 똑같아. 귀엽게 굴지 않으면 성가셔서 버려버리는 그런 남자잖아? 당신같이 태어날 때부터 다 가진 남자가 아까운 게 뭐가 있겠어? 나보다 예쁜 고양이라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주저할 필요 없어. 어차피 난 가출도 많이 했잖아? 그냥 버리고 또 가출했다고 말하면 되잖아? 고지식해서 그런 방법이 생각이 안 난 것뿐이라면 가르쳐줄 테니까 그렇게 얘기하고 다녀.”
“나비, 윽.”
그가 또 말을 하려고 하자 유인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조금 더 깊이 찔렀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했다면 아마 같은 존재라고 ‘평상시’대로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했다. 조금 신기할 수는 있어도 다른 많은 일과 마찬가지로 그러든지 말든지 별로 큰일도 없고 자신과 상관은 없다. 끝. 그런 확신이 들었다. 실재하는 사실에 저항하는 일이 없는 남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양이가 사람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아주 큰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저도 모르게 둘 사이의 공통점을 수집했다. 같다는 걸 알면서도 거부감을 느끼고 같다는 걸 알면서도 그를 뒷받침할 다른 증거들을 확인하는 것이다. 권시혁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고양이였을 적에도 무작정 공격만 하던 나비다. 사람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눈을 가려진 상태에서도 권시혁은 고양이 나비와 자신을 덮치고 있는 사람 사이에 공통점을 몇 개나 찾아낼 수 있었다. 권시혁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서 입을 열었지만 역시나 아무 말도 못 하도록 목을 찔렸다. 그래서 권시혁은 약간의 답답함과 짜증이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이쪽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지라도.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 고용인한테 떠넘겼을까? 아니면 친척? 아니면 보이지 않게 3층 같은 데 가둬 뒀으려나? 성가셨잖아. 자꾸 당신을 따르지 않고 사고를 쳤으니까. 집도 나가고 욕만 먹게 하고 말도 안 듣고. 버리고 싶었잖아.”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유인하는 드디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유인하는 자신의 밑에 깔린 채로 눈이 가려져 흉기로 위협당하고 있는 권시혁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만년필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을렀다.
“대답해. 버리고 싶었지? 버리고 싶었잖아. 버리고 싶었다고 말해.”
눈을 가리니 더더욱 인간미가 없어진 권시혁의 얼굴이었다. 그의 입술이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의 입술이 움직였을 땐 무슨 마술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거짓말.”
유인하는 곧바로 그렇게 받아쳤다. 권시혁의 목은 만년필에 찔려 잉크와 함께 피가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다. 유인하는 더 사납게 말했다.
“난 당신이 부자라서 당신을 선택했어. 당신 집에 돌아온 것도 당신 동생을 죽이려고 돌아온 거야. 당신 생각 같은 건 하나도 안 했다고! 당신은 나한테 당했어. 속은 거야. 화났잖아. 이해해. 나라도 그럴 테니까. 당신도 날 죽이고 싶지? 인정해.”
“아니.”
이번엔 대답이 빨랐다. 권시혁에게는 긴 대답을 할 틈이 없었다. 유인하는 더 화를 냈다.
“그래, 내가 정훈이 그 새끼 찔렀으니까 겁나겠지!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해! 고양이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게다가 당신 동생까지 죽이려고 했어! 때려눕혀도 시원치 않잖아? 똑같이 되갚아 주고 싶잖아?”
“아니야.”
유인하는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앞으로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혀 어딘가로 데구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인하는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도 떼고 그의 멱살을 붙잡고 자신의 이마를 상대의 것이 쿵 부딪쳤다.
“자! 마음대로 해봐! 저항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죽여버려! 나도 당신 같은 건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
유인하의 치켜뜬 두 눈은 화염을 두른 칼처럼 날카로웠고 강렬했다. 그에 반해 권시혁의 눈은 새벽의 호반처럼 여전히 차분했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권시혁은 ‘인간 나비’의 눈동자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역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게 내가 사랑하던 나비라고? 눈을 마주치니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비가 이 인간으로 변하는 것을 버젓이 봐놓고도. 그 부드럽던 털도, 가냘픈 울음소리도, 말랑거리고 따뜻한 몸도 없다. 쓰다듬으면 언제나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피우던 귀여운 고양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면 내 고양이는 도대체 어디로 갔지?’
그리고 눈앞의 이 사람은 누구인가. 낯설고 싫다. 그런데도 권시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언가에 천착하는 법이 없는 권시혁이라도 순리에 따르는 법은 알았다. 아무리 그라도 이럴 때는 저항했다. 살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를 밀어내야 했다. 지금이 기회였다. 흉기도 사라졌다. 그게 아니더라도 상대가 자신을 정말 찌를 생각은 없다는 걸 권시혁은 알 수 있었다. 마치 나비가 자주 주인의 손가락을 무는 것과 같았다. 물더라도 죽이고 싶은 건 아니니까.
권시혁은 자신의 생각에 인상을 약간 썼다.
‘나비가 아니야.’
눈앞에 나타난 청년에게 낯섦과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나비와의 공통점을 찾고, 동시에 그의 무언가가 나비와 같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느껴 강한 부정의 마음이 솟구쳤다. 보통 사람처럼. 유인하는 말도 행동도 없는 권시혁을 보며 출처를 모를 분기에 차서 점점 더 씩씩거렸다. 그는 권시혁의 멱살을 거칠게 놓고 주먹으로 바닥을 퍽 치며 고개를 들었다.
“거짓말하지 마! 솔직해지라고! 처음부터 난 다 알고 있었어! 내가 사람인 걸 알면 당신은 절대, 절대…!”
“그럼 왜 내 앞에서 사람으로 변했지?”
유인하가 침묵과 시선을 참지 못하고 또 열화와 같은 윽박을 지르려는데 그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유인하의 말문을 막았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의 말을 받아칠 수 없자 마치 절대 지기 싫은 싸움에서 진 것처럼 분기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이 순간에도 그 남자는 차분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고양이일 적의 그는 분명히 따뜻하게만 느껴졌는데. 아니, 이럴 줄 알았다. 경계하고 있었다. 탐색하고 있었다.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유인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유인하는 피가 흐르는 그의 목을 한 손으로 콱 쥐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위협했다.
“조심해. 난 별로 잃을 게 없는 사람이야. 거짓말은 이제 지긋지긋해.”
“내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지?”
그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공기를 울렸다. 고양이일 때와는 달랐다. 물어도 쓰다듬고 보살펴주던 그는 이제 영영 사라졌다. 유인하가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 날 버리고 싶었다고. 속아서 화가 난다고. 복수하고 싶다고. 죽여버리고 싶다고.”
고양이의 모습이었다면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을까. 권시혁은 분명히 눈앞에서 나비가 눈앞의 청년으로 바뀌는 것을 봤으면서도, 평소보다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말하면?”
그게 감정적으로 격앙된 사람의 심기를 더 건드릴 것을 알면서도. 권시혁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유인하에게는 매우 냉정하게 들렸다. 그래서 유인하는 그것을 그렇다는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럴 줄 알았어!’
유인하의 눈이 벌게졌다.
“당신도 죽여버릴 거야!”
어째서일까. 사랑은 쉽사리 살의로 바뀐다.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던 상대가 그러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순간부터. 그리고 마치 이 순간만 기다린 것처럼 살의가 유인하를 지배했다.
알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다른 건 전부 변명이다. 유인하는 그의 목을 두 손으로 쥐었다.
이미 모든 게 끝나지 않았던가. 모든 게 끝났다. 왜 사람으로 변했냐고? 그딴 거 유인하라고 알 리가 있는가. 하지만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경찰. 재판. 감옥. 온갖 지저분한 것들. 그래, 이런 한심한 문답은 아무 소용없었다.
“하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갈수록 이 무뚝뚝한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두 손으로 유인하의 양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떼어내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포기하고 싶었잖아. 포기할 수 있게 해주려고 한 것뿐이야.]
안정훈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만두고 싶었다. 그만둘 수가 없었다. 아마 고양이도, 이 남자도, 안정훈도 전부, 그저 그만두기 위한 구실일 뿐일지도 모른다.
“웃기지 마.”
마치 먹이의 숨통을 끊는 것처럼 손아귀의 힘이 몇 배로 강해졌다. 유인하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믿었는데. 기대했는데.
사랑했는데.
“당신은 내 거야….”
*
이 남자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좆 같은 이유로 죽었을까. 아마 몇몇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차라리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자존심이나마 지키는 일이다. 누구나 제 나름대로 어리석다. 무엇이든, 그것이 치사량에 이르면 죽는 것뿐이다.
유인하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싫었다. 누구한테도 죽임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죽일 것이다. 그게 누구든.
우리는 스모그가 뿌옇게 끼여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대도시의 까막눈이다. 드디어 자신의 존재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눈 밝은 이들과 함께 폭풍우가 오길 기도한다. 어떻게 그들은 그 순간 다시 버림받을 것이란 걸 모를 수가 있는 것일까? 까막눈이라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까막눈은 스모그가 도시를 뒤덮었을 때 눈이 보이는 인간을 전부 죽였어야 했다.
이 서재는 이 집에서 유인하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오래된 책의 향기로운 냄새는 아무리 어지럽혀진 마음이라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인하의 가장 차분하고 이성적인 선택인 것이 분명했다. 비슷한 경우의 많은 이들과 같았다. 그 남자의 눈빛에서 더 이상 사랑을 읽을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아, 으윽….”
그 남자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목을 손으로 눌렀다.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얼굴이 새로웠다. 언제나 무표정하기만 한 그 남자였다. 고통이 그의 얼굴에 색을 입혔다. 지금 이 남자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들 수 있는 게 조금 좋다고 말하면 자신도 미친 것이 되는 걸까.
[나 찌르니까 기분 좋았어?]
그래, 이 개새끼야.
그의 목에서 뽑아낸 편지칼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피가 손잡이 쪽으로 흘러 유인하의 손에도 닿았다. 유인하의 밝은 갈색의 눈동자의 동공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목을 조르다가 자신이 그의 힘에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더 크고 힘이 센 남자였다. 포식자가 자신보다 큰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필요한 법이다. 유인하는 곧바로 책상 위에서 날카로운 것을 잡아 그의 목을 찔렀다.
그 남자는 마치 크고 우아한 초식동물 같았다. 유인하가 좋아하던 그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에도 피가 묻어 흘렀다. 유인하는 마치 자신이 그를 잡아먹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법 충족감이 느껴지는 감상이다. 유인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했다. 눈이 마주쳤다.
“당신은 이해 못 할 거야.”
유인하는 왼손으로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향기가 났다.
“그래도 괜찮아….”
유인하는 편지칼을 역수로 들었다. 그리고 권시혁의 머리를 왼팔로 안은 채 자신의 오른쪽 넓적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만두고 싶었던 것은. 아무리 해도 나는 날 만족시킬 능력이 없었다. 그걸 언제 알게 되었을까.
‘혼자 죽는 게 싫었을 뿐일지도.’
굳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인간이라는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당신은 희생양이다. 이런 나라서 당신 같은 남자가 좋았나 보다. 아마 당신이 기적적으로 지금의 나까지 사랑한다고 해도 결과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가 급격히 좁아졌다. 지금의 유인하와 권시혁에겐 이제 이 서재 외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것으로 끝이다.
유인하는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를 편지칼로 찌르기 위해 손을 치켜들었다. 넓적다리와 몸통이 이어지는 바로 그 부위였다. 어디가 급소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예전에 조폭들이 경쟁자를 살해할 때면 허벅지를 찌르곤 했다. 보통 의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은 상해 의도만 있을 뿐 살인 의도는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언젠가 진짜 죽이지 않고 못 배길 인간이 생기면 써먹을 만하겠다, 하고 기억해뒀다. 인생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정말 죽이고 싶었던 친구는 대놓고 배를 찔러버렸다. 사랑하는 남자는 더하다. 목을 찔렀으니까. 그리고 자기 자신은, 이렇게 치사한 방법으로 죽이는 것이다.
유인하가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려고 할 때 커다란 손이 그의 허벅지를 감쌌다. 편지칼은 그의 손등을 뚫고 허벅지도 뚫었다.
여전히 고양이 나비와 인간 나비의 사이에서 인지부조화를 느끼고 있던 권시혁이었다. 하지만 인간 나비가 죽으면 고양이 나비도 죽을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와 상관없이. 실재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권시혁이 말했다.
“뽑지 마.”
그가 그럴 것이라 아주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유인하는 당황해서 편지칼을 뽑았다. 그러자 피가 미친 듯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권시혁의 목은 제대로 찌르지 못했고 자신의 허벅지는 제대로 찔렀다. 순식간에 유인하의 아래에 피 웅덩이가 생겼다. 유인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을 것이다.
혼자.
그걸 깨닫자마자 유인하는 과호흡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허억, 하악. 하아. 하아. 흐윽…!”
“김 집사!!”
권시혁은 밖을 향해 소리를 치고 그대로 유인하를 뒤에서 끌어안아 허벅지를 꽉 쥐어 지혈을 했다. 하지만 유인하의 새하얀 허벅지는 삽시간에 새빨간 피로 물들었다. 권시혁의 다른 손은 여전히 자신의 목을 잡고 있었지만 곧 그 손을 떼서 유인하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지혈했다. 그의 목에서도 여전히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유인하는 패닉에 빠져 두 손을 어쩔 줄 모르다가 권시혁의 손 위를 두 손으로 누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싫어. 흐윽, 죽기 싫어. 하악, 싫어. 싫어…!!”
순간의 격정에 휩쓸린 선택은 대체로 후회하기 마련이다. 충동구매나,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의 잠자리나, 자살은 더욱.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선택의 순간엔 스스로에게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권시혁은 그의 허벅지를 더 꽉 잡으면서 쉬이, 하고 진정하라는 소리를 냈다. 유인하는 자신의 피가 미친 듯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진저리를 쳤다.
“흑…. 젠장….”
유인하는 자신만 한 등신을 세상에서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말이다. 온 세상의 사람들이 지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처지를 비웃고 있었다. 아마 자신을 껴안고 있는 이 남자야말로 가장 앞에서 비웃고 있을 것이다.
“놔…! 당신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유인하는 몸부림을 쳤다.
권시혁은 대체로 남이 뭘 하든 간섭 따위 일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게 설사 자살이나 살인이라고 해도. 누군가는 그게 타인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이라고 봤고 누군가는 타인에 절대적인 무관심이라고 봤다. 유인하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쉬이, 나비야, 착하지. 가만히 있어야지. 의사 선생님이 고쳐줄 거야. 괜찮아.”
그의 말이 유례없이 빨라졌다. 아이를 대하는 말투였다. 나비를 대할 때처럼. 본능적이었다. 권시혁이라는 남자도 그런 것이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밖을 향해 소리를 쳤다.
“김 집사!! 밖에 아무도 없습니까?!”
유인하는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곧바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혼자였다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아니, 지금 곁에 있는 게 권시혁이 아니었다면.
유인하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눈물을 몇 방울 흘리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혈액을 그렇게 많이 잃었는데도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유인하는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조금 되찾았다.
유인하는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 창백한 얼굴로 권시혁을 돌아보았다. 눈이 다시 마주쳤다. 유인하가 말했다.
“나 죽으면 아무도 못 찾는 곳에 묻어줘. 아무한테도 알리지 마. 알았지?”
권시혁의 무심한 눈이 약간 커졌다. 그리고 유인하는 그런 그의 눈동자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작은 고양이 대신 어떤 비겁한 인간의 얼굴이 비쳤다. 지금도 이 남자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걸로 된 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들 사이에 제대로 된 작별 인사 같은 건 인연이 없었다. 별로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어떻게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유인하는 그의 뺨에 이마를 부딪쳐 얼굴을 한 번 문지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다시 고양이로 변한 뒤 쓰러졌다.
*
처음엔 자고 있는 그의 옆에 눕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서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기만 했다.
어린 소년들이 간혹 어깨를 맞대고 잠이 드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 텐데도, 그때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적인데도, 안정훈은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당혹해하며 친구의 이부자리를 몰래 범하고 싶어 하는 자신에게 실망했다.
인형을 빚은 것처럼 예쁘게 생긴 유인하였다. 새카만 머리카락, 생기가 도는 하얀 피부, 새빨간 입술. 그것뿐이었다면 잘생겼다고 한번 감탄하고 잊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미간을 꿰뚫리는 것처럼 강렬하다. 호기심, 적의, 멸시가 동시에 느껴진다.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상대는 첫 만남부터 어떻게 하면 그의 ‘오해’를 풀 수 있을지 고심할 수밖에 없다. 그의 앞에서는 뭐든 해야 할 것만 같은 강한 충동에 휩싸인다.
그 눈빛이 그라는 존재에 강렬한 색을 입혔다.
그래서 안정훈은 자고 있는 유인하를 건드릴 때마다 그가 눈을 뜨고 못된 짓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까 봐 두려워하곤 했다. 그가 눈을 뜨지 않기를, 그가 눈을 뜨길 바라는 만큼 바랐다.
자고 있는 그의 옷 안으로 몰래 손을 넣는 건 자이로드롭을 타는 것보다 더 짜릿한 일이었다. 어린애가 뭘 알겠는가. 자신이 뭘 탐하는지도 모르고 열중하다 보면 낯선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 도망가기 마련이다.
안정훈은 너무나 오랫동안 도망만 다녔다. 한 번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유인하와 처음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진창 속에 핀 새빨간 장미. 잠깐 관심을 두었다가 꺼버리는 날카로운 눈빛. 그 눈빛이 영원히 자신을 보게 만들고 싶었다.
솔직히 안정훈도 17살의 자신에게 살짝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은 어땠냐고.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
“으음…….”
나직한 신음이 들렸다.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권시혁이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권시혁만 들은 모양인지 의사는 계속해서 자기가 할 말을 하고 있었다. 침대 위에 커다란 남자가 누워 있었다. 병원이었다.
안정훈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눈을 떴다. 권시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안정훈은 흐리멍덩한 검은 눈으로 권시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고 권시혁도 무뚝뚝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둘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 별로 안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눈은 거의 판박이였고 체형과 손발이 닮았다. 권시혁은 그의 이마를 손으로 한 번 짚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안정훈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안정훈이 깬 것을 확인한 의료진이 자리를 대신하고 권시혁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정훈이 일어났습니다.”
-어…? 진짜…?
어머니는 거의 혼이 빠진 목소리를 냈다. 안정훈이 칼을 맞은 것으로 죽을 뻔한 건 어머니였다. 쇼크로 바로 쓰러졌다고 한다. 여전히 아이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 뒤로 어머니는 사흘 동안 안정훈의 곁에서 밤을 새우다가 결국 다시 쓰러져 다른 병실에서 수액을 맞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자 안정훈의 아버지가 현재 그녀를 살피고 있는 상태였다. 간단히 전화를 끝내고 권시혁은 의사를 보았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권시혁에게 다가왔다.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다른 손상도 안 보입니다. 이대로 회복만 잘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권시혁과 같은 남자는 수행원만 해도 몇 명씩 따라다닌다. 문 안팎으로 몇 명 서 있었다. 권시혁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동생에게 다시 다가갔다. 다행히 안정훈은 움직일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움직이려다가 헉, 하더니 왼손으로 산소마스크를 벗었다. 오른쪽 배에 칼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권시혁을 불렀다.
“형….”
“너 신장 하나 뗄 뻔했다.”
“진짜…?”
권시혁이 무뚝뚝하게 말하고 안정훈이 되물었다. 그는 눈을 한 번 감으며 고개를 바로 했다. 숨쉬기 아직 좀 힘든지 스스로 산소마스크를 다시 코에 댔다.
“뭐…, 다행인가.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지.”
권시혁도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뿐만 아니라 배다른 형제도 두 명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닮은 건 이쪽인 것 같다. 안정훈에게도 묘한 차분함이 있었다. 안정훈은 아직 약이 덜 깬 모양이었다. 그래서 약간 멍한 얼굴로 권시혁을 올려다보았다.
안정훈은 자신의 눈을 비볐다. 이상하게도 권시혁도 다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급 정장의 목깃 안으로 작은 밴디지가 보였다 말았다 했다. 왼손은 더 확실했다. 안정훈은 그들이 형제이기 때문에 때마침 형도 다친 모양이다, 하고 무의식중에 형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안정훈이 솔직하게 물었다. 그들은 형제이고 안정훈은 거짓말쟁이였지만 권시혁은 아니었다.
“형아, 근데 내가 팔찌 가지고 간 거 어떻게 알았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권시혁이 대꾸했다.
“나랑 눈이 마주치면 몇 번 손목을 숨기길래.”
“그럼 나비는?”
“그렇게 찾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런가….”
안정훈이 중얼거렸다.
“정훈아!”
그리고 형제의 어머니인 이정아와 그녀의 남편인 안현일이 병실로 들어왔다. 병원복을 입은 그녀는 파리한 얼굴이었다. 어쨌든 안정훈은 그들의 외아들이다. 이정아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아들의 손을 잡고 얼굴을 만졌다.
“괜찮아? 엄마 알아보겠어? 우리 똥강아지….”
안정훈의 아버지 안현일은 유난히 온화하고 선한 느낌이 나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아내에게 양보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눈물을 참기 힘들어 잠깐 모두에게서 뒤돌아서 눈물을 찍어냈다. 권시혁은 한 발자국 떨어져 그런 그들을 모두 보고 있었다.
권시혁에게 가족이란 돌아가신 할머니를 제외하곤 다 이런 느낌이었다. 남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지 않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권시혁은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제법 신경을 쓰는 것 같다.
“형.”
그가 형을 찾자 다들 그를 돌아보았다. 권시혁이 그에게 다가갔다. 안정훈이 아직은 좀 파리한 얼굴로 권시혁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물었다.
“나비는?”
그래도 안정훈은 조금 달랐다. 가족이라곤 그밖에 없다고 말했던 건 거짓이 아니다. 무엇이 그 애매함을 나누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책임감의 차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처음 본 날부터 유난히 권시혁에게 살갑게 굴었다. 뭘 안다고 그런 건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물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0살짜리의 소년이 자신을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런 건 안정훈밖에 없었다. 권시혁은 그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었다. 다른 말을 했다.
“밖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난 그냥….”
그런 형제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정아였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형제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안정훈이 물었다.
“왜 그래, 엄마?”
“아니, 그냥….”
그녀의 남편이 이해한다는 듯 그녀를 안았다. 부부는 둘을 서로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참 금슬이 좋았다. 권시혁은 그걸 보다가 안정훈을 보았고 안정훈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손을 뻗었다.
“나 좀 일으켜줘.”
권시혁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고 다른 의료진들이 침대를 세워주었다. 안정훈은 안 그래도 큰 눈을 엄청나게 크게 뜨며 이를 악물었다.
“와, 씨, 이거 진짜 아프네. 악.”
“괘, 괜찮아, 정훈아?”
이정아가 울다 말고 그를 다시 살폈다. 이정아와 안현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험한 일을 당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진짜 괜찮은 거죠? 낫는 거죠, 선생님?”
이정아가 의사를 돌아보며 그렇게 묻자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젊어서 괜찮을 겁니다. 그럼 경찰 조사는….”
의사가 권시혁을 보며 그렇게 운을 뗐다. 그러니 안정훈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의사를 보고 놀란 부부는 혹여나 아들이 트라우마라도 생겨 힘들어할까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폈다. 안정훈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엄마, 엄마, 내 휴대폰은?”
거기서 이정아는 약간 놀라 눈물이 뚝 그쳤다. 눈을 크게 뜨고 안정훈의 얼굴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권시혁을 돌아보았다.
그는 키가 크고 체격도 크다. 자세가 아주 반듯하고 분위기가 차분하여 나이에 비하여 훨씬 성숙해 보였다. 행동거지 어디 하나 모나고 빠지는 곳이 없고 무엇에도 쉽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의 할머니가 얼마나 그를 정성 들여 키웠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권시혁은 너무나 아픈 손가락임과 동시에 어렵고 힘든 사람이었다. 자신의 배로 낳았는데도 가끔 외계인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에게는 그가 너무나 차갑고 무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감정이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까 성이 다른 두 형제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가까이하고, 이렇게 힘든 시기에 권시혁이 안정훈에게 든든한 형이 되어주는 것 같아 퍽 감정이 사무치기도 했다.
근데 지금은 칼을 맞고 깨어나자마자 휴대폰부터 찾는, 낳고 나서부터 쭉 끼고 산 둘째 아들이 조금 외계인같이 느껴졌다. 둘을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정도 많고 애교도 많고 참 순하고 착한 아들이었는데. 그녀는 언제나 권시혁의 매정한 면이 그의 아버지 쪽의 유전일 것이라 생각했다.
“자.”
정신이 없는 이정아를 대신하여 안현일이 아들에게 휴대폰을 주었다. 안정훈은 휴대폰을 켜고 메시지를 살폈다. 그동안 권시혁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깐 얘기를 나누는 거라면 당장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럼 차 비서가 내일 오전 중으로….”
안정훈은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형의 말을 끊었다.
“아니, 이거 실수로 내가 찌른 거야. 칼 들고 있다가 위로 넘어졌어. 의사 선생님 저 퇴원은 언제 할 수 있어요? 형, 그래서 나비는 형 집에 있다고?”
안정훈은 충격 발언을 터뜨린 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에게 질문을 착착 해나갔다. 당황해할 사람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응?”
사람들이 대답이 없자 안정훈은 고개를 들었다. 다들 이상하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안정훈은 눈을 한 번 끔벅했다가 아차, 했다.
“아니, 제가 일이 있어 가지고….”
안정훈이 하하, 하고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사람을 쳐다보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의사가 정색하며 먼저 대답했다.
“못 해도 일주일은 꼬박 있으셔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큰일인 줄 아십니까? 기껏 꿰맨 신장을 다시 떼어내야 할 수도 있다구요.”
“아, 네….”
안정훈은 더욱 머쓱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정아와 안현일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머리를 짚고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 앉았다 하다가 갑자기 둘 다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넌…! 도대체 애가…! 뭘 어떻게 하다가 실수로 배를 찔러?! 내가 살다 살다…!”
“엄마가 그러니까 넌 칼 같은 건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했지?!”
아무래도 이 부부에게 안정훈이란 다 크고 돈까지 많이 벌어도 썩 믿음직한 아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실수로 찔렀다는 말이 믿길 정도로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이라 안정훈은 놀라서 턱을 당기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얼른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볐다.
“아니, 갑자기 벌레가 나와서….”
“벌레가 나왔다고 그 큰 칼을…!!”
이정아는 한 대 때리려고 손을 확 들었다가 움츠렸다. 그러고는 너무나 억울한 얼굴로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누가 낳아준 몸인데 조심성 없게! 너 잘못되면 엄마는 어쩌라고, 허어엉…! 이 나쁜 놈!”
“엄마, 미안. 미안하다니까.”
권시혁은 그걸 보고 있다가 비서에게 조용히 말했다.
“경찰은 내일 아침에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권시혁은 왼쪽 손목의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의 손목에는 아주 크게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손등을 둘러 붕대도 감고 있었다. 목에도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 아들이야말로 고양이가 할퀴었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었다. 권시혁은 안정훈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일어난 거 봤으니까 난 간다. 어머니, 전 가보겠습니다.”
“어….”
펑펑 울던 이정아가 어? 하고 고개를 돌려 권시혁을 돌아보았다. 권시혁은 어머니의 남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병실을 나가려고 했다. 이정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런 큰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섭섭함을 느껴도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큰일을 하는 아이라 이만큼이나 시간을 써준 걸 아마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아니, 정말로 고마웠다. 다른 게 아니라 자기 동생이라고 안정훈을 챙겨주는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지금까지의 섭섭함이 뭐든 모두 날아갈 정도로.
“저, 저기… 시혁아…!”
이정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권시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형제가 둘 다 그녀의 크고 검은 눈망울을 물려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주저하며 그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자신의 옷깃을 두 손으로 꼭 잡은 채 움츠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큰아들의 앞에서 항상 겁을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서러워 다시 눈물이 나왔다. 자신이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겁이 난다. 엄마라고 해준 것도 없는데 미워하면 어쩌는가. 정말로 해준 게 없어서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정아는 눈치를 보듯 권시혁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주저주저하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한쪽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고맙다, 시혁아. 너 아니었으면 정훈이가 어떻게 됐을지….”
차가워 보이기만 하던 그의 손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권시혁은 몹시 움츠려 있는 자신의 어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강철 같은 눈동자와 무표정한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타인이 전혀 읽을 수가 없다. 자신의 어떤 언행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타인은 어째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어째서 미워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걸까.
“제가 간수가 소홀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손을 잡은 어머니의 손을 한번 짧게 마주 잡아주고 바로 문으로 몸을 돌렸다.
“아….”
그게 너무 짧아 이정아는 다시 그의 손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늦었다. 그를 만져본 것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안정훈은 권시혁이 나가기 전에 얼른 다시 물었다.
“형! 그래서 나비는 집에 있어?”
권시혁은 멀찍이 있는 안정훈을 돌아보았다.
권시혁은 자신이 나비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사랑한다는 마음이 뭔지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양이 나비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에 격렬한 거부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만큼 무언가가 싫었던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모든 것이 잘못된 게.
지나간 일에 이유를 물었던 적은 극히 드물었다.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권시혁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권시혁이 대답했다.
“죽었다. 어머니,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권시혁은 그렇게 말하고 병실을 나갔다. 이정아는 병실 밖으로 나와 수행 비서들과 함께 가는 권시혁의 등 뒤에 살짝 손을 흔들고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있다가 병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정훈아?”
칼을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던 안정훈이 눈을 크게 뜨고 굳어 있었다.
*
함께 죽고 싶었다. 그 남자에게 칼을 꽂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격정의 정체를.
유인하의 무의식은 결국 인간인 자신이 권시혁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근거만을 수집했다. 사랑받아 마땅한 귀엽고 깜찍한 고양이가 아니라 집안도 본인도 별 볼 일 없는 고양이인 척하던 음침한 인간.
이미 유인하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했다. 고양이가 되었을 때, 비를 맞으며 죽어갈 때, 시험에서 또 떨어졌을 때, 김성우가 협박했을 때.
그럼 그냥 포기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의 기대를 충족시킬 가능성도, 사랑받을 가능성도 제로라고 한다면 그냥 모두 놓아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유인하는 그 모든 가능성이 제로라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걸. 그래서 스스로 모든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려고 했다. 더 이상 기대하는 걸 포기하고 싶으니까. 노력하는 게 너무 힘이 드니까. 이제 그만하고 싶으니까.
결국 어느 것도 고통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도,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왜 이런 것일까? 왜 이렇게 되고 만 것일까?
의식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믿을 수 있었을 때는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고 그러는 것이 당연했다. 이 자존심을 받쳐줄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방해만 한다 하더라도 절대 지지 않을 단단한 마음과 회복력이 있었다. 그리고 유인하는 그런 강한 자신이 너무나 좋았다.
그렇다. 좋아하지도 않은 인간에게 원망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유인하는 자신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미워졌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의 씨앗은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심겨 있었다. 자신을 하찮게 취급하는 가족들, 이유 없이 공격하는 낯선 어른들과 친구들. 그렇게 천천히 싹이 트고 자랐다. 어느 순간부터 예전이라면 거뜬히 이겨냈을 것도 힘들어졌고 닥치지도 않은 일들이 두려워졌다.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그 끔찍한 기분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스스로에게 허락한 것이 공부밖에 없어서 썩은 동아줄을 계속 타고 올라가는 기분으로 살았다. 노력해서 올라갈수록 더 높은 곳에서 추락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면서.
도대체 그 남자는 유인하에게 무엇일까?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이 차라리 그 남자에게 사랑받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원래라면 그런 남자, 유인하 같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조차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어째서 더 가능성이 낮은 것을 택했을까? 왜 그렇게 사랑받고 싶었을까? 왜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공격했을까? 오히려 사랑받을 가능성을 제로로 만든 것일까?
유인하는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사랑받기를 바라기보다 더 확실한 걸 택했다. 같이 죽는 것이다. 그 남자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미워해도 좋았다. 그렇게라도 함께 있고 싶었다.
피부에 닿는 흙의 축축함과 까슬함. 흙과 밤의 차가운 쇠 냄새. 나무의 냄새. 어둠 속에서 눈앞의 나뭇잎이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바람의 소리.
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에 입술만이 새빨간 화려한 미남자가 전라로 흙 속에서 나오는 것은 기괴하고 퇴폐적이다. 죽음에 가까운 아름다움이라는 건 전부 그런 것이었다.
얼떨떨할 새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면. 그는 언제나 많은 걸 알아차릴 수 있는 자기 자신에게 처음으로 원망스러움이 들었다.
흙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살아있었다. 살아있는데도 묻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어.’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이었다. 사람인 걸 들키면 버려질 거라고, 어느 날 새벽 그의 곁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깨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도,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는데도. 이럴 줄 알았는데도… 우습게도 눈물이 나왔다.
‘이럴 줄 알았어….’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잖아? 울 일이 아닌 것이다. 울 일이 아니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보같이 눈물이 자꾸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자신을 이렇게 버릴 줄은 몰랐다.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그런데도 유인하는 자신이 그걸 알고 있었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버림받을 줄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원망보다는 그런 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괜찮을 것 같은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습관일지도.
좋았다. 그런데도 부정했다. 동시에 아무리 부정해도 좋았다. 왜일까. 짧은 기간이었지만 수많은 기억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치고, 붙잡을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흘러가 버렸다. 모든 것이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행복하게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만 알았다.
그가 원하지 않는 사람만 그를 원하고 그가 원하는 사람은 그를 원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분명 슬픔을 느꼈다. 하지만 그 슬픔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횟수가 반복될수록 그는 그 상황에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애초에 아무도 원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버림받을 것 같으면 먼저 버렸다. 이번에도 분명히 그렇게 했다. 그런데도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이다. 놀랍게도 그럴 때의 대비책 또한 있었다. 곧 유인하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해졌다. 눈물이 그쳤다.
그딴 시시한 남자.
좋아한다는 건 착각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 어쩔 수 없었다. 무력할 때였다. 갑자기 고양이로 변해서 기댈 곳이 필요했다. 어린아이랑 똑같은 것이다. 무력하지 않았다면, 선택할 수 있었다면 과연 처음부터 자기 부모를 선택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유인하는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무능력한 데다가 자식을 냉대하는 아버지, 역시나 무능력하고 차별하는 어머니. 똑같았다. 그 상황에선 유인하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그래, 나도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 남자도 죽이려고 한 거지? 그래, 뭔지 알겠어. 쌤쌤이라고 쳐.’
아주 냉소적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래, 원래부터 나랑 상관없는 인간이었지. 뭐 하려고 그렇게 바보같이 굴었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남자도.
냉정하게 생각해보니까 정말 별거 아니었다. 그냥 상황이 만들어낸 우스운 착각일 뿐이다. 그런데 바보같이 그딴 남자 하나 때문에 죽으려고 한 자신이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바보. 멍청이. 그런 남자는 그냥 없던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더 이상 만날 일도 없다. 그러면 그냥 모든 게 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유인하는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함께 했던 친구가 자신을 배신했을 때도 그 상황을 똑바로 직시했다. 복수는 당연한 권리였다. 하지만 그 남자와의 기억은, 그 남자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외면했다. 이 모든 게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치 없었던 일이 될 것처럼.
‘일어나자.’
유인하는 자신이 칼로 찌른 오른쪽 허벅지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도대체 며칠이나 땅에 묻혀 있었던 걸까. 신기하게도 상처는 전부 나아서 딱딱한 흉터 조직이 되어 있었다. 유인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축축 쳐졌다.
사위가 몹시 어두웠다. 꽃과 하얀 조약돌과 부서진 관과 담요가 아래에 널브러져 있었다. 제대로 모양을 내어 만들어진 무덤이었다. 하지만 유인하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유인하는 고양이로 변했다. 그리고 자신이 묻혀 있던 동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동산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집과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이다. 그 남자의 집이 아주 조금도 눈에 띄지 않도록 나비는 일부러 뱅 돌아서 언덕을 내려갔다. 일단 고시원으로 향했다.
‘날짜가 지났을까.’
그동안 연락도 되지 않았는데 설마 정말 짐을 빼버렸을까. 고시원 주인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그녀는 연락이 되지 않아도 봐주는 것 없이 문을 따고 들어가 짐을 처분한다고 경고했었다. 그래도 몇 년이나 월세를 꼬박꼬박 냈는데, 하고 유인하는 평소와 달리 약간의 행운을 기대했다. 마치 그걸 회복의 징조로 삼으려는 듯.
고시원에 도착해 사람으로 변했다. 고양이의 눈은 어둠 속도 볼 수 있지만 사람의 눈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이 되자마자 반지하의 어둠 속에 묻혀 미남자가 녹이 슨 철문을 열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제야 화가 났다. 한 번 더 비밀번호를 눌러보았다. 역시나 불쾌한 경고음을 내기만 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분명히 유인하는 지금까지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폭발했다.
“씨발! 왜 안 열려! 열리라고! 씨바알!!!”
유인하는 칠이 벗겨진 철문을 주먹으로 마구 쳤다. 한참 치고 나서야 헉헉거리며 멈췄다. 눈앞이 벌게졌다. 고작 문이 하나 열리지 않는 것뿐인데 온 세상의 문이 다 닫혀 있는 것 같다. 세상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기분이었다. 세계가 유인하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무덤에서 일어난 유인하는 분명히 곧 괜찮아졌다.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빨리 감정을 추스르고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열리지 않는 문에 이성을 잃어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덮어뒀던 의문이 노도와 같이 솟아올랐다.
죽음을 앞둔 순간 느꼈던 철저한 무력감이었다. 단 한 순간, 스스로에게 느꼈던 무자비한 살의에 유인하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화가 났다. 무엇도 자신을 죽이려는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또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게? 그런 말도 안 되고 좆 같고 나약한 결심이? 세상에 가장 유인하답지 않은 짓을 고르라고 하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게 믿기지가 않았다.
유인하는 분노 했다. 그는 언제나 분노했다.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짐덩이 취급하는 어머니, 무관심한 아버지, 무자비한 형, 외면하는 동생, 배신하는 친구들, 날 버리는 그 남자. 인정하면? 그런 취급이 합당했다고 스스로 받아들이면? 정말로 자신이 그 정도로 가치 없고 쓸모없는 존재가 맞다고?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노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패배자의 사고방식이다. 유인하는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자신에게도.
‘전부 죽여버릴 거야!!’
유인하는 이미 마음속으로 모두를 몇 번씩 죽였다. 죄가 있든 없든 가리지 않았다. 폭력에는 중독성이 있었다. 한 번 폭력의 해결법을 배우고 나면 그 외의 다른 시시한 방법들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폭력은 가시 돋은 새빨간 장미처럼 언제나 유혹적이다.
언제 철문을 치는 걸 관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유인하는 씩씩거리며 그런 불연속적인 자신에게 또다시 분노하며 주먹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전부 이런 것 같았다. 열리지 않을 철문을 혼자서 주먹으로 치고 또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 모두가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엄마, 아빠, 형, 동생, 김성우, 이승원, 안정훈, 권시혁.
모든 것이 뒤흔들렸다. 고양이가 되어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고양이의 삶에 만족하려고 했던 자신을 깨달았을 때도 스스로가 크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자기자신이라 굳건히 믿었던 무언가가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이 뒤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딛고 있는 땅이 흔들렸다.
내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니.
‘생각하지 마. 차라리 생각하지 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없었던 일이야. 잊어버리자. 차라리 잊어버려….’
유인하는 그 사실마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없었던 일처럼 외면해 보려고 했다. 없었다고 생각하면 없었던 게 될 것처럼.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자신이 이미 부서졌더라도 상관없었다. 유인하는 지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않은 것까지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며 비겁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유인하를 지탱해준 자존심이 있었다.
그런데도 포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인하의 크게 뜬 눈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헐떡거리면서 허공을, 아니, 비참한 자기 자신만을 보고 있었다.
끼익.
그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인하는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짐승 같은 반응이었다. 몇 년이나 이 반지하에 같이 살았던 그 폐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등 뒤로 빛이 나와 어둠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벌거벗은 유인하를 비췄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작은 눈이 커지며 이채를 띄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새하얀 육신.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실오라기 걸치지 않는 그 몸은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3차에서 떨어졌어요?”
폐인의 가래 끓는 목소리가 퀴퀴한 반지하의 공간에 불쾌한 습기를 더했다. 한밤중이었다. 자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복도는 등도 없었다. 그의 집에서 나온 빛만이 유일한 광원이다. 폐인은 유인하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유인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두서없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있잖아요. 내가 뭔가 하고 있는 게 있는데 같이 할래요? 사실 고시 같은 거 해봤자 돈도 생각보다 못 벌잖아요. 아는 형이 프로그래머라 뭐 좀 만들 줄 아는데 도박 프로그램 만들어서 한탕 치고 빠지면 몇십억이 우습대요. 같이 할래요?”
“…….”
궁지에 몰린 인간은 티가 난다. 하지만 본인은 잘 모른다. 유인하는 이 생기다 만 새끼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폐인은 그런 유인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실 옛날부터 인하 씨한테 관심 있었는데…. 이해해요. 공부 힘들죠? 저도 3차에서 떨어졌는데 진짜 죽고 싶더라구요. 다 이해해요. 해본 사람만 이해하는 게 이 바닥이잖아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예요? 같이 해요.”
그는 유인하의 팔을 만지려고 했다. 그의 괴이한 눈이 기름기를 머금은 것처럼 번들거렸다. 그는 유인하의 턱에서부터 허리까지 훑어보았다. 그제야 유인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언제나 그랬다. 정신력이 한계에 달했다.
유인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어떻게 해석한 것일까. 폐인은 매우매우 기분 나쁜 눈빛으로 유인하의 얼굴을 홀린 것 같은 눈으로 보면서 더욱 바짝 다가왔다. 유인하에게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거나 눈만 마주쳐도 그를 두려워하던 폐인의 기저에는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다시 두 손을 뻗어 유인하를 만지려고 했다. 유인하는 오물을 털어내듯 그의 손을 쳐냈다.
“좆같이 생긴 게 생긴 대로 노냐? 그딴 거 너나 해. 좋은 말로 할 때 함부로 말 걸지 마라. 네 면상만 봐도 토 나오니까. 그냥 평생 네 방에 처박혀서 살아. 꼴에 뭘 한다고. 하.”
유인하는 사납게 말했다. 눈빛이 살벌했다. 폐인은 주춤하면서 물러났다. 두꺼비같이 생긴 새끼가 하는 짓은 쥐새끼 같다. 유인하는 그제야 주변이 약간 눈에 들어왔다. 문이 잠긴 유인하의 고시원 앞에 종이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유인하는 짧게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동생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유인하는 그 가방을 주워들어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옷을 입기 시작했다. 폐인은 헉, 하는 소리를 한 번 내고 유인하의 몸을 몇 번이고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유인하는 그런 그의 얼굴을 확 노려보았다. 그는 눈을 돌렸다. 말을 더듬었다.
“아, 아, 아, 아니, 나쁜 얘기 아니에요. 지, 지금까지 인하 씨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내가 다 봐왔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이 마음먹고 하면 뭘 해도 성공할 거예요. 우리 같이해요….”
폐인은 유인하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이상한 눈빛을 냈다. 그 눈빛이 특히나 기분이 나빴다. 이 인간은 세상의 바닥 중의 바닥이었다. 유인하는 옷을 다 입었다. 신발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좆도 아닌 깡이 자꾸 나오는 건지 그는 계속 유인하를 만지려고 했다. 유인하는 그 손을 퍽 하고 쳐냈다.
‘왜 나만 항상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왜?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어둠 속에서 유인하의 눈빛이 칼날처럼 빛났다. 이 망할 폐인이, 유인하가 세상에서 가장 경멸하는 인간 중 하나인 그가 지금 유인하에게 껄떡거리는 이유는 본인 스스로 그럴 수 있다고, 가능성이 있다고 감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만해 보이는 것이다, 유인하가.
죽여버릴까?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곧 구석에 쌓여 있는 낡은 의자들과 반지하로 내려오는 계단 모서리의 날카로움이 눈에 띄었다. 저 나무 의자로 저 두꺼비 같은 얼굴을 뭉개 버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머리채를 쥐고 저 모서리에 이마를 찧으면 몇 번 만에 죽을까?
‘왜 못해? 고양이로 변해서 도망치면 돼. 볼 때마다 좆 같았어.’
지금은 도저히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모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지금껏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인간들이 한둘이겠냐만, 이렇게 참기 힘든 것은 또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미 유인하는 몇 번의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건 생각보다 엄청 쉬운 일이었다. 쉽다는 건 아주 저항하기 힘든 선택지다.
안정훈이나 그 남자보다는 쉬울 것이다. 유인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유인하보다 크고 힘도 셌어도 유인하를 당해내지 못했다. 유인하는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다. 이런 오물만도 못한 두꺼비 새끼는 더 쉬울 것이다.
아아, 그래도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죽여줄 수 있었다.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버러지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니, 없어지는 게 더 나은 인간이다. 딱히 세상에 좋은 일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좋은 일을 하게 될 것 같다. 죽인다고 생각하니 유쾌함마저 든다. 한 세계를 없애버릴 수 있다는 전능감이 발치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 기억해줄 거지? 네가 죽인 남자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병신 새끼, 넌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유인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왜 그러세요….”
유인하가 아무 말 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폐인은 잔뜩 쫄아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유인하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순식간에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마가 쿵 부딪쳤다. 폐인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으나 유인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순간까지도 유인하는 살인에 대한 강렬한 유혹에 시달렸다.
“죽고 싶으면 앞으로 내 눈에 또 띄어라.”
유인하는 살벌한 눈길을 옆으로 돌리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유인하의 뜨거운 숨이 폐인의 얼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폐인은 오줌을 찔끔 지리기 시작했다. 이 꽃같이 화려한 외모를 가진 청년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서웠다. 무서웠는데 그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다. 미추가 짜릿했다. 느꼈다.
유인하는 폐인의 사타구니 쪽을 보고 인상을 팍 썼다. 역겨움을 느낀 표정으로 다시 폐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폐인은 그가 자신의 사타구니를 보고 자신의 얼굴을 보자 깜짝 놀라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자기 집으로 도망갔다.
“야 이 개병신 새끼야, 문 안 열어? 이 씨발이, 진짜 죽여버린다!! 그거 뭐야, 이 씹새끼야!! 죽고 싶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집 문을 몇 번이고 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고 살벌하게 협박을 하고 난 후였다.
“하아, 하아….”
무릎이 아팠다. 주먹이 아팠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유인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깊숙이 손바닥을 파고들어왔다. 좁고 더러운 고시원 반지하 복도가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다. 그것은 짐승의 숨소리 같기도 했고 목숨이 끊어지기 전의 숨결 같기도 했다.
지금의 유인하는 마치 심각한 상처를 입은 맹수 같았다. 경쟁자나 심지어 먹이에게도 반격당해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 공포가 그를 폭력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그의 상처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 고통에 저버려 정말로 자신을 찔러버리고 말았다. 또 그런 일을 저지를 순 없었다. 아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몇 번이고 지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며 죽음을 기다리며 큰비가 내리길 기다리던 그때, 스스로를 찔러버린 그때.
‘벌써 두 번이나!! 이 정신병자야! 이 또라이 병신 새끼야! 다시 한번만 그런 짓 하면 정말로 죽여버릴 거야!’
처음엔 그 폐인 새끼에게 화가 났던 것이 아닌가? 지금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스스로를 그렇게 저주하다가 유인하는 이 어쩔 수 없는 자기혐오에 쿵 하고 다시금 철문에 이마를 박았다. 자신에게 죽여버린다는 것 말고 더 이상의 협박을 할 수가 없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 죽이겠다니.
“하아, 윽, 하아…. 제발….”
유인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강렬하고 총명하던 눈빛도 지금은 살인과 자해, 자살, 살의로 피폐해져 있었다.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마치 기름을 뒤집어쓴 채 부러진 손으로 아슬아슬하게 불이 붙은 라이터를 들고 있는 사람 같다. 유인하는 그 숨 막히는 반지하를 빠져나왔다.
아까부터 입안이 건조하고 끈적거렸다. 어지러움도 심해진다. 왼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유인하는 정처 없이 걸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쉴 곳이 필요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제라고 해야 할지 오늘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리는 새벽 4시. 눈앞에는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하고 빛으로 반짝거리는 유리탑이 서 있었다.
[너한텐 나밖에 없어.]
“…….”
안으로 들어갔다. 거주자를 위한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었다. 보안팀 직원이 유인하를 보고 다가왔다.
“입주자이십니까?”
맨발에 흙투성이에 낯빛이 퀭한 유인하를 보고 그들은 곧바로 경계의 제스처를 취했다. 아마 가드 중 한 명이 유인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냥 거기서 막혔을 것이다. 그는 당혹한 표정을 아주 잘 숨기고 유인하를 안내해주었다. 유인하는 실소를 지을 뻔했다. 유인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주거단지에서 맨발에 거지꼴을 하고 행보했다. 드디어 안정훈의 집이 있는 층에 내리고 공동 현관으로 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현관문의 비밀번호도 입력했다. 열렸다.
찰칵. 저절로 문이 닫혔다. 아주 넓은 공간이었는데도 다른 공간과 단절된 독립된 공간이라는 느낌이 유인하를 아주 약간이나마 안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유인하는 그대로 현관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현관의 등이 꺼지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해졌다.
그대로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입이 너무나 말랐다. 그것 때문에 벽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현관등이 다시 켜졌다. 등 뒤의 불빛에 기대어 겨우 부엌까지 갔다. 홀더에서 컵을 하나 빼 들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반도 받지 못하고 일단 마셨다. 사레가 걸려 기침을 하며 뱉어냈다. 화가 나서 컵을 던졌다. 쨍그랑.
“헉, 하아, 하아….”
유인하는 눈물을 한 방울 흘리며 헐떡거렸다. 방금 던진 컵을 어느 방향으로 던졌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귀가 왱왱 울리고 있었다. 유인하는 겨우 다시 새 컵을 잡고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입안이 젖어 조금 더 수월하게 마실 수 있었다. 며칠은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 같았다. 유인하는 몇 컵이고 마셨다. 그리고 곧 싱크대에 마신 걸 그대로 토했다.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목마름을 참을 수가 없어 다시 한 컵을 마셨다.
“하아….”
유인하는 피폐한 눈길을 돌려 집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안 그래도 말끔한 집이었다. 사람의 온기가 없으니 모델 하우스 같다. 유인하는 그대로 더러워진 옷을 벗으며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 또한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기만 했다.
그대로 욕실로 가서 조금 따뜻한 물을 맞았다. 상처 입은 젊디젊은 육체로 물이 줄기줄기 흘렀다. 유인하는 추운 곳에 있는 것처럼, 아니면 전력으로 달린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꽉 쥔 그의 주먹에서 피와 물이 섞여 뚝뚝 떨어졌다. 흙탕물과 함께 소용돌이쳐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드레스룸으로 나왔다. 이 집에는 여전히 유인하의 물건이 많았다. 유인하는 옷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 욕실의 불빛이 침실과 거실까지 새어 나왔다. 유인하는 그제야 거실의 소파 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폰을 하나 발견했다. 유인하의 것이었다.
아직도 유인하의 근육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는 거실 한 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가 자신의 휴대폰을 빠르게 집어 들었다. 화면이 켜졌다. 날짜가 조금 이상했다. 안정훈을 찌르고 난 이후로 거의 2주가 흘러 있었다. 권시혁을 찌르고 난 이후로도 열흘이 넘게 지났다는 말이다.
땅속에 묻히고 열흘이 넘게 지났다면 멀쩡하게 산 사람도 그냥 죽었을 시간이었다. 물을 마시지 못하면 사흘이면 죽는 게 사람이다.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
그는 일단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잠금을 풀었다.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쓸데없는 것뿐이다. 그 뒤 메시지를 확인했다.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인하야…. 우리 만나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이승원이었다. 스스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불타오르는 분노의 해방구가 보였다.
*
커다란 거울 속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높은 코와 귀족적인 각진 턱에 깊고 우수에 찬 눈빛을 가지고 있는 모델 같은 남자다. 지적이고 도회적인 느낌이 났다.
“…….”
가볍게 흰 린넨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시계를 찼다. 검은 테의 사각 안경을 착용했다. 그런 그의 말끔한 모습과 달리 집안이 제법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안을 돌아보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데도 치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지도 2주가 넘었다. 변명하자면 그가 이러고 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는 뭔가 빠지는 걸 싫어한다. 특히 그게 모양이 빠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는 휴대폰 정도만 간단히 챙기고 집을 나섰다. 지하로 내려가 자신의 주차 자리를 찾았다. 올해 나온 링컨 컨티넨탈이 서 있었다. 이승원은 차를 타고 시동을 걸었다. 고급 외제차가 부드럽게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주말이라 시내로 들어서는 동안 도로가 차로 가득 찼다. 차의 부드러운 진동과 폐쇄감은 차가 자신만의 영역이라는 감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기분이 조금 차분해진다. 빨간불에 걸려 차가 정지선 앞에 섰다. 앞만 보고 있던 시선이 잠깐 조수석을 향했다. 새카만 화면의 휴대폰이 보였다.
[하하하!]
순간 누군가의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조소도 실소도 아닌 진짜 미소였다. 예쁜 얼굴, 하얀 피부, 붉은 입술. 눈을 뜨지도 못할 만큼 폭소하고 있었다.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비웃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놀랐었다.
이승원은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시선을 정면으로 다시 향했다. 잊고 있었다. 아니,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기억이 뒤를 이었다. 빛과 같던 앞의 기억과 달리 새카만 기억이었다.
[넌 그러고 싶어도 참았는데 난 안 참으니까 억울해서 이러는 거 아냐, 이 병신 새끼야.]
이승원은 그제야 눈썹을 심하게 찌푸리고 핸들을 꽉 잡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나는 절대….”
이승원은 마치 누군가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그렇게 말하려다가 분홍색의 모양이 아주 예쁜 입술을 딱 붙이고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안경 안으로 손을 넣어 눈을 꾹 눌렀다. 안경에 가려진 미모가 살짝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런 거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동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던 그때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불쑥불쑥 자괴감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야.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야.’
유인하를 만나지 않은 건, 만나지 못하게 된 건 이미 몇 년이나 된 일이었다. 정확하게는 4년인가. 고등학교 때의 친구가 이맘때쯤 멀어지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안정훈은 간간히 얼굴을 봤다. 서로 겹치는 친구의 결혼식이나 모임에는 빠지는 법이 없는 안정훈이었다. 고등학교 때의 안정훈은 사실 유인하 빼고는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와 마주칠 때마다 묘한 위화감을 느끼곤 했었다. 그는 변한 것일까. 그래도 어째서인지, 이승원은 언제나 그를 ‘동지’라고 여겼다.
[너도 같이할래?]
유인하를 강제로 범하고 싶다는 생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권했을 땐 등골이 오싹했다. 그의 말에 당장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 버렸다. 그런 자신에게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이승원이었다.
이승원은 언제나 유인하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게 자신이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만나지 않은 것뿐이지 멀어지고 싶어서 멀어진 것이 아닌데도, 그날 안정훈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그래서 자신만 그를 잃은 것은 아닌지 계속 의심이 들었다.
이승원은 있는 그대로의 유인하가 좋았다. 그래서 단 한 치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가 멀어지자 붙잡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하 진짜 좋더라.]
“아!!”
이승원은 순간 울컥해서 차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핸들에 이마를 찧었다. 뒤에서 빠앙, 하고 앞으로 가라는 경적을 울렸지만 이승원은 2초 정도 더 핸들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굳어 안 그래도 이지적인 그의 얼굴을 조금 더 차갑게 보이게 했다.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기분이 아주 좆 같았다.
‘죽여버리고 싶다.’
어째서일까. 이런 생각이 아주 쉽게 떠올랐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심호흡을 했다.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매미가 세차게 울었다. 아직도 낮이 이렇게 길었다. 전부 좆 같다.
“…….”
짧고 강렬한 살의가 지나가고 난 뒤엔 알 수 없는 자기혐오와 죄책감이 마음을 괴롭게 했다. 이승원은 조수석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걸 손에 쥔 채 운전을 계속하다가 또 신호에 걸리자 스마트폰을 지문으로 잠금 해제하고 메시지가 온 것이 있는지 확인했다. 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지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없었다.
이승원은 그날 밤새 고민을 하다 유인하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었다. 직접 메시지를 보낸 것조차 몇 년 만이다. 하지만 여태껏 답장이 없었다. 더 보낼까도 싶었지만 더 보내는 게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알아 간신히 스스로를 말릴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났는데.’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면 자신이 지금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더더욱 한심해지는 것이다. 바보 같다.
‘답장이 없는 거 보면 없던 일로 하려는 건가 보지. 어차피 난 직접적으론 아무 짓도 안 했어. 얼굴도 못 봤으니까.’
아니, 난 진짜 그런 짓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정말로 구해주려고 했던 거야. 적어도 그 새끼가 한 말이 사실인지 확인은 하려고 했다고. 나랑 하고 싶다고 한 게 사실인지….
‘아냐. 나도 없던 일로 하는 거야. 더 이상 상관하지 말자.’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라는 거 그때나 중요하게 느껴지는 거지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게 ‘보통’이고 ‘정상’이다. 아까보다는 조금 진정했다. 이승원은 자신의 다른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그만한 잘생기고 건실한 남자에게는 언제나 초대가 넘쳐났다. 다 답장을 할 수도 없을 정도다.
그는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키도 크고 분위기가 있었다. 집안도 훌륭하고 매너도 좋다. 딱 봐도 귀한 집안의 빼어난 도련님 같은 느낌이다.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남자였다. 고등학교 때도 여자한테 고백을 많이 받는 것으로 따지자면 친구들 중에 단연 이승원이 최고였다.
물론 유인하는 단연 그가 있는 장소의 모든 사람의 이목을 사로잡을 정도로 엄청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아무나 쉽사리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은 날카로움이 있어서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함부로 다가갈 수 없다. 곁에 다가가더라도 그에게 미움받지 않도록 처음부터 다들 몹시 조심한다. 언제나 그랬다.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따라 각각의 선을 그어 놓았다. 신분이랄까. 아주 가까운 사람도 있었고 아주 먼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멀든 가깝든 모두 그 선을 함부로 넘을 수 없는 것은 같다.
안정훈은 이제 사람들이 주변에 잔뜩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아주 대하기 쉽다고 여기거나 혹은 보호 본능마저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그야말로 필요에 따라 관계의 거리를 아주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하고 해맑은 얼굴로.
이승원은 그 정도로 약게 굴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인하처럼 칼처럼 내치지도 못했다. 그의 여유로운 애티튜드와 누구에게나 상냥한 매너에 어렸을 땐 정말 아무나 달려들기도 했다. 그 당시 유인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피곤한 일이 더 많았을 것이다.
오늘은 가장 외모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만날 것이다. 지적이고 질척거리지 않는 여자로. 어제 몇 달 만에 연락을 하는 건데도 그녀는 흔쾌히 만나주겠다고 화답을 주었다. 이승원은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내쉬고는 운전에 집중했다. 곧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오랜만이야, 승원 씨~. 그동안 잘 지냈어?”
“똑같지. 잘 지냈어?”
“응.”
이승원은 투자 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다. 연봉이 높은 만큼 업무 강도는 강하다. 일 관계로 만나게 된 여자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만난 첫날부터 알 수 있었다. 그 후로 종종 만났다.
그녀는 가슴이 파인 옷을 즐겨 입었지만 하의는 언제나 길었다. 허리부터 다리까지의 곡선이 아름다웠다. 가슴만큼이나 다리도 예쁜데 언제나 비장의 무기처럼 가려 놓은 게 좋았다.
고급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호텔 라운지 바에서 술을 한잔하고 그 호텔로 직행했다. 여유 있고 젠틀한 태도는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유지되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뭐야? 급했어? 그러면 바로 오지.”
그녀가 듣기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렇게 말했다. 이승원이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순서가 있지.”
“순서가 어디 있어?”
“나중에 딴소리 나오는 거 싫어.”
그리고 그들은 곧장 침대로 향했다. 이것마저도 이승원은 A부터 Z까지 전부 순서를 지켰다. 그녀를 만족시키고 끝냈을 땐 여느 때보다도 깊고 진한 허탈감이 들었다.
[요새 인생 좆 같지?]
씨발 새끼. 그답지 않게 속으로 쌍욕을 했다. 차라리 유인하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아랫배가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승원은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아니아니….’
그는 침대를 내려오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나 먼저 씻을게.”
“응~.”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나른하게 대답했다. 샤워기의 물을 트니 곧장 찬물이 나왔다. 움찔했다가 그냥 놔뒀다.
“하아….”
이승원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갑갑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섹스는 하고 나면 언제나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까? 얼마나 아름다운 여자랑 하든 상관없이 언제나 그랬다. 별로 그들이 싫은 것도 아니고 끝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데도….
씻고 나온 이승원은 바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운을 입고 등 뒤에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바로 가게, 자기?”
그녀는 언제나 이럴 때만 이승원을 ‘자기’라고 불렀다. 이승원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자고 갈까?”
“가끔은 그런 것도 괜찮잖아?”
“…그런가.”
이승원은 창가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실크 가운을 입은 채 이승원의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이승원도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응했다. 그녀가 말했다.
“자기는 안경 안 끼는 게 훨씬 잘생겼는데. 자기도 알지?”
“응.”
“근데 왜 껴?”
“조금 무게감 있게 보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하, 안경 끼면 그럴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할까?”
“으음.”
그녀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그의 얼굴에 안경을 끼웠다 벗겼다 하고 머리카락도 만져서 머리를 넘겼다가 내렸다가 해보았다.
“하긴 자기는 여자한테 너무 인기 있을 느낌이라 피곤할 것 같긴 하다.”
그녀는 한참 이것저것 해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나마 안경 끼는 게 제일 낫다.”
“그치?”
밤이 늦었다. 너무나도 젊은 이 남자의 태도에서는 짙은 권태로움이 느껴졌다. 그런 점이 그를 묘하게 온화하고 여유롭게 보이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무해하달까. 그녀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말했다.
“자기는 나중에 나랑 결혼할 것 같아.”
“응? 왜?”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진심으로 의아한 듯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 나랑만 하잖아? 거기에 우리 둘이 조건이 서로 안 맞는 것도 아니고.”
“난 아직 결혼 생각은….”
이승원은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라서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결혼하고 싶대?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다는 거지.”
그녀는 이승원의 무릎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자기는 내가 제일 편한 거잖아? 나도 자기가 편하고. 편한 선택이라는 거, 제일 거부하기 힘든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승원은 그녀가 사라진 곳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이승원은 짧게 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시선을 테이블에 고정했다.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왱왱거렸다.
‘쉬운 선택….’
순식간에 그럴듯한 미래가 그려졌다. 적당한 때 결혼하면 아마 누가 봐도 뭐라고 할 수 없는 근사한 커플이 될 것이다. 둘 다 집안도 좋고 각자 벌이도 좋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 정도 낳고 기르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서 나이를 먹고 은퇴를 하고…. 정답 같은 인생이다.
“…….”
좀 멍해졌다. 그리고 또 알 수 없는 갑갑함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무엇 때문에 이런 것인지 알기라도 하면 좋을 것 같다. 이승원은 안경 밑으로 두 손을 넣어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때 짧게 우웅, 하고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왔다. 메시지를 보낸 상대를 확인했다.
“!”
이승원은 깜짝 놀라 메시지창을 다시 보았다. 이승원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심장이 펄떡하고 뛰었기 때문이다. 등줄기가 짜릿하며 멍해졌던 정신이 한순간에 바짝 조여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만나러 가야 했다. 지금 당장. 이승원은 곧바로 차림새를 마저 바로 하고 소지품을 챙겼다. 그리고 욕실로 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나 일이 생겨서 갈게.”
“어? 지금? 이 시간에?”
“응, 다음에 봐.”
그렇게 말하고 이승원은 바로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욕실 문 밖으로 그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데?”
“아무것도 아니야.”
이승원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대꾸하고 곧바로 방을 나갔다.
*
이승원이 문을 쾅 열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쳐다보았다. 이승원은 헐떡거리며 숨을 골랐다.
“이거 놓으라고, 아…!! 오늘은 나갈 수 있다며!!”
“내일 아침까지는 계셔야 한다구요!”
“그게 그거지!”
“아직 이렇게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발견한 것은 상의가 거의 벗겨질 정도로 여러 사람에게 붙잡혀 있는 안정훈이었다. 항상 남의 의견을 우선시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버릇이 있는 안정훈답지 않은 짓이었다. 아니, 그건 ‘그 전’의 안정훈인가. 저렇게 답답해서 죽으려고 하는 안정훈의 표정은 처음 본다. 다른 때였다면, 아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일까.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이럴 수가 없는데 ‘그’에 대한 일이라면…. 이승원은 눈에 불이라도 켜진 것 같은 얼굴로 터벅터벅 다가가 안정훈의 멱살을 잡았다.
“거짓말이기만 해봐. 진짜 죽여버린다, 이 개새끼야! 인하가 죽긴 왜 죽어!”
그러자 병실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이승원도 떼어내기 위해 매달렸다. 그제야 이승원은 안정훈이 오른쪽 허리 쪽에 커다란 거즈가 붙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안정훈도 심하게 다쳐 있었다. 이승원은 금방 진정했다.
‘진짜야? 진짜라고?’
인하가 정말 죽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이승원은 숨골을 푹 찔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승원은 곧바로 선을 긋듯 말했다.
“네가 죽인 거야.”
그러자 안정훈이 여전히 의료진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딱 멈췄다. 안정훈은 침대에 눕혀졌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그의 몸 위로 벨트를 둘러 침대에 묶었다. 안정훈의 얼굴이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어린애처럼 되었다.
“후회할 거라고 내가 말했지?”
그렇게 말할 땐 약간의 승리감이 들었다. 착각일까? 이승원은 굳은 얼굴로 안정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아니야.”
안정훈이 대답했다. 커다란 덩치에, 소년 같은 얼굴에, 순진무구한 인상의 안정훈이었다. 그 울음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몹시 가엾어 보였다. 그래서 이승원은 그가 더욱 가증스러웠다. 다소 진정했던 이승원은 다시금 울컥했다.
“너 때문이라고!”
“흐어엉, 아니야아!”
그러자 이승원은 점점 더 숨을 쉬기가 어렵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벌게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정훈의 상처와 상태를 보니 믿지 않기도 어려웠다.
안정훈이 이승원에게 보낸 메시지는 이랬다. 인하가 날 칼로 찔렀다. 그리고 인하가 죽었다. 우리 탓일까.
어디서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가. 물귀신이 따로 없다. 이승원은 화를 냈다.
“네가, 네가 인하 죽인 거야. 네가 인하한테 그런 짓을 하려고 하니까! 이 개새끼,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인하 자존심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 거 너도 알고 있었으면서!”
유인하라면, 유인하라면 휘어질 바에야 부러질 것을 선택할 것이다. 자신의 친구에게, 자신이 개만도 못하게 취급했던 놈에게 당할 뻔했다는 건 그의 드높은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버렸을 것이다.
“씨이발, 흑, 이게 왜 나 때문이야! 인하 때문이야! 인하가 날…! 그리고 너도!”
안정훈이 침대에 묶인 채로 눈물 콧물을 쏟으며 이승원을 노려보았다.
“너도 똑같잖아! 너도 눈 벌게져서 달려온 주제에! 인하가 얼마나 화냈는지 알아?!”
“난…! 난 아니야! 난 인하 구하러 간 거였다고!”
이승원은 곧바로 반박했다. 둘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경비원과 간호사, 의사들이 이승원을 병실에서 쫓아내려고 그를 밀어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가주십시오. 당장.”
이승원은 벌건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경비원을 보았다가 다시 자신을 차분하게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충격을 받았다. 그건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다. 유인하는 이미 이승원에게 과거의 사람이어야 했다.
[너도 같이할래?]
그것도 과건가? 이승원은 정말로 숨이 막혔다.
“난동… 피워서… 죄송합니다.”
이승원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잠깐 안경 밑으로 손을 넣어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드러난 한쪽 눈만 크게 뜨고 있다가 질끈 감았다. 그리고 바로 돌아섰다. 갈 생각이었다. 안정훈이 다급하게 물었다.
“인하한테, 그전에 인하한테 무슨 연락 안 왔어?”
이승원은 그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안정훈을 돌아보았다. 안정훈은 고개만 빼꼼 움직여 이승원을 보았다.
“형이, 우리 형이 못 나가게 해. 이런 적 없었는데. 내가 뭘 해도 형은 다 봐줬는데. 형이 그랬어. 인하 죽었다고. 흐엉, 승원아, 나 어떡해. 너도 알잖아. 인하 없으면 나 못 산단 말이야. 흐어엉.”
그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정말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그걸 보면서 이승원은 숨을 점차로 가라앉힐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이승원은 1학년과 2학년 때 유인하와 같은 반이었다. 1학년 때부터 친해져서 그때부터 쭉 그의 가장 친한 친구로 고등학교를 보냈다.
유인하는 분명 다른 친구들과 자신을 완전히 다르게 대접해주었다. ‘진짜 친구’로 대해주었다.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하게 대해지는 것. 그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어린 날의 이승원은 그것에 저도 모를 묘한 우월감을 느끼곤 했다. 다들 그를 부러워했다.
특히나 안정훈을 대하는 유인하의 태도를 보면 더더욱 자신이 특별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안정훈은 아무리 바라도 가질 수 없는 그의 옆자리를 이승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부단히 스스로를 꾸짖으면서도 그런 걸 느끼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비단 이승원이나 안정훈의 일만은 아니었다. 유인하는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상대에게 스스로도 몰랐던 걸 들추게 했다. 그게 가장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유인하의 곁에 있을 때의 이승원은 가장 최고의 이승원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최악이었다.
이승원은 그렇게 우월감을 느끼면서도 유인하에게 가혹한 취급을 받는 안정훈을 간혹 도와주곤 했었다.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위선이 더 적당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근원엔 두려움이 있었다.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렇게 좋아한다는 티를 숨기지 못한다면 자신도 유인하에게 저런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말 것이다. 더 이상 가장 친한 친구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승원은 안정훈과 완전히 다른 취급을 받고 있었는데도 은연중에 그를 동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을 믿었었고 그의 전화에 달려 나갈 수 있었다. 둘이라면, 동지가 있다면 죄책감이 덜할 테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승원은 이미 유인하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 속 어딘가는 유인하가 영영 사라져버린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짜 아니잖아. 인하가 왜 죽어….”
이승원은 그의 우는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눈물을 흘렸다. 실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가 이렇게 특별한 것일까?
첫사랑이라서? 모르겠다. 함께 있으면 산소의 밀도가 짙어진다.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둘이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시시덕거리면서 웃고 떠들기만 해도 그 말들이, 잠깐의 미소나 눈빛 같은 그런 사소한 게 이상할 정도로 뇌리에 남아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둘만의 비밀이 생긴다. 그것만으로 더더욱 상대도 자신도 특별하게 느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자신의 일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나 때문이야. 인하한테 진짜 친구는 나밖에 없었어. 내가 인하를 배신했어. 그래서, 그래서….’
이승원은 안경 밑으로 한 손을 넣어 두 눈을 감싼 채 눈물을 흘렸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오는데요.”
이승원을 마저 쫓아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당혹해하던 경비원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다시금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얼른 눈물을 거두려고 노력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물을 훔치고 휴대폰을 꺼내며 병실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나가지는 못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유인하였다.
*
이번에도 주차를 똑바로 하지 못했다. 이승원이 차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어두운 탄천을 보고 서 있는 새카만 인형이 보였다. 사람인지 아닌지 잠깐 자세히 봐야 했다. 담배 냄새가 났다. 그의 얼굴에 가려져 있던 담배가 옆으로 나오며 담뱃불이 빨갛게 빛났다.
유인하가 이승원을 불러낸 장소는 놀랍게도 예의 주차장이었다. 유인하는 이승원을 여기로 부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승원은 입이 바짝 말랐다.
“인하야….”
이승원은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다. 목이 졸린 듯 쉰 목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승원은 그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일단 변명해야 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물어야 했다. 안정훈은 그가 죽었다고 했다. 도대체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인하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
“진짜 왔네. 오랜만이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그의 목소리는 대체로 그의 화려한 외모에 가려지긴 했지만 듣는 것만으로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좋은 소리를 냈다. 나직한 숨소리가 자연스럽게 섞인 감미로운 목소리.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유인하가 드디어 고개를 돌려서 이승원을 보았다. 아무것도 빛을 반사하지 않는데 그의 눈동자만큼은 빛을 약간 반사하였다. 보일 리가 없는데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승원은 숨을 멈췄다.
“어…. 오랜만….”
그리고 이승원은 겨우 유인하의 말에 대꾸했다. 서로의 사이에는 5~6m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예전엔 언제나 서로 어깨가 닿을 거리에서 함께했다. 유인하가 이승원의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물가를 등지고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
분명히 변명할 거리는 잔뜩 준비해왔다. 여기서 말문이 막히면 안 된다. 이승원은 한 번도 말문이 막힌 적이 없다는 듯 말했다.
“우리 친구 맞아.”
“넌 오랜만에 연락 닿은 친구를 덮치러 오냐?”
“구하러 온 거야.”
“너희 둘은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거 아니었어?”
“그 새끼랑은 아무것도 아니야.”
“항상 둘이서 나 뒤통수칠 생각만 했나 봐?”
“아니야.”
“옛날부터?”
“아니야!”
이승원이 큰 소리를 냈다. 유인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빨아들였다. 그리고 이승원 쪽으로 걸어왔다. 그가 걸어오는 만큼 호흡의 간격도 좁혀졌다. 바로 그의 앞에 섰다. 서로의 얼굴이 보였다.
유인하는 조금 야윈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여느 때보다 더욱 날카롭게 느껴졌다. 출처를 모를 빛을 반사한 눈빛이 이승원을 곧장 꿰뚫었다. 어느샌가 이승원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자신의 사지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4년 만이었다.
“그럼?”
유인하가 그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조금 뿜었다.
“그럼 그건 뭔데?”
이승원은 마른 침을 삼켰다. 목이 아팠다. 아니, 마주치고 있는 눈이 아픈 것 같다. 그리고 말했다.
“구하러 온 거라고 했잖아.”
유인하는 그의 어깨를 왼손으로 잡고 곧바로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제대로 먹혔다. 이승원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유인하의 허리와 팔을 잡았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렸지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가 분명히 나한테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지?”
유인하가 왼손으로 그의 머리채를 잡았다. 이승원의 허리가 구부러져 눈높이가 바로 맞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승원은 그제야 겨우 숨을 쉬었다. 맞은 곳이 미친 듯이 아팠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겨우 말했다.
“으윽, 헉, 진짜야.”
“안경 벗어.”
유인하가 말했다. 급소를 맞아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유인하는 전혀 봐주지 않고 그대로 오른쪽 주먹으로 이승원의 왼쪽 뺨을 후려쳤다. 반사적으로 이를 꽉 물지 않았으면 이가 빠졌을 것이다. 안경이 부서지며 날아갔다. 왼손으로 그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이 고스란히 얼굴로 전해졌다.
이승원은 겨우 유인하를 다시 보았다. 안경을 벗은 것뿐인데 마치 가면을 벗은 것처럼 얼굴이 드러났다. 유인하가 말했다.
“난 네 얼굴이 좋았는데.”
가까이서 본 유인하의 눈빛이 이상했다. 어릴 때도 강렬하기 짝이 없던 인상이었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초췌와 광기로 더럽혀져 있었다. 이승원은 인상을 썼다. 맞는 순간에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 더 왼쪽 광대를 그의 주먹이 강타했다. 그리고 유인하가 그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이승원은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양 무릎을 두 손으로 짚었다. 어디가 터진 것인지 그의 얼굴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유인하의 주먹에서도 피가 흘렀다.
“으윽, 헉…. 윽….”
이승원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배를 붙잡고 숨을 헐떡거렸다. 두 번째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머리가 딩딩 울리고 여전히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유인하가 오른손을 털며 손목을 풀었다.
“왜? 반격해야지. 그러고 싶었던 거 아냐? 난 니들이 쌍으로 변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라도 해서 날 따먹고 싶었다고? 씨발, 그럼 너도 제대로 덤벼. 그래야지 내가 너도 죽여버릴 거 아냐?”
이승원은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상태로 숨을 몇 번이고 헐떡거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겨우 자아냈다.
“아니야….”
“너 거짓말하는 거 버릇이야.”
“난 그 새끼랑 달라.”
이승원이 고개를 들어 유인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안경을 벗은 그의 얼굴은 상처를 입어도 태가 났다. 우수에 젖은 듯한 눈과 고상한 얼굴선을 가졌다. 하지만 이렇게 굳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답지 않게 눈빛이 얼룩져 있었다. 여러 가지 욕망으로. 그는 곧 기침을 심하게 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으윽, 그 새끼가 네가 나랑 하고 싶다고 했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그걸 믿었다고?”
유인하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비명을 질러서 거짓말이라는 건 바로 알았어.”
이승원이 겨우 허리를 차례로 폈다. 그리고 바로 서서 유인하와 다시 마주 보았다.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는데 한순간은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일렁였다.
“그래도 네가 비명을 지르기 전까진 정말… 설렜어.”
이승원이 그러고는 평소대로 웃으려고 했는지 입꼬리를 올리려다가 말았다.
“웃기지?”
“아니.”
“구하러 온 건 사실이야.”
“좆까지 마.”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면 내가 먼저 너랑 하고 싶었어. 적어도 나도 하고 싶었어.”
유인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가만히 이승원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왜?”
[너 같으면 좋겠냐? 싫어하는 정도면 다행이지. 그냥 조용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
유인하의 질문에 이승원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일을 하나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안정훈이었다. 이승원은 순간 숨을 멈췄다.
‘개새끼.’
그런 주제에 저번에는 기억도 나지 않는 척 ‘누가 너한테 그런 말 한 적 있나 봐?’ 하고 비아냥거리지 않았던가. 일부러 그랬던 게 틀림없었다. 여러모로 개 같은 놈이다. 그런 주제에 아까의 그는 그렇게 무고한 얼굴로 울었다.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이. 이승원은 그런 놈의 말에 넘어갔던 어린 날의 순진한 자신이 한심했다. 이승원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유인하가 있었다.
이승원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적어도 안정훈한테는 널 뺏기고 싶진 않았어.”
“그러니까 왜.”
“난 항상 널 두고 그 새끼랑 경쟁했으니까.”
이승원의 말에 유인하는 더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승원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항상 내가 이겼으니까.”
유인하는 새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유인하는 이승원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분명히 강렬했지만 동시에 텅 비어 보였다. 계속 얘기해보라는 듯했다. 이승원은 다시금 마른 침을 삼켰다.
“우린 제일 친한 친구였잖아. 나한테 너만큼 친한 친구는 그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어. 너도… 너도 그런 거… 맞지?”
한 번도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승원의 불안한 눈빛이 유인하의 얼굴을 더듬어 확인했다. 유인하는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의 눈빛은, 그래, 그의 눈빛은 마치 회광반조 같았다. 꺼지기 전에 더 활활 타오르는 것이다. 유인하가 물었다.
“그러니까 그런 새끼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냐고.”
그가 아주 간단하게 수긍했다. 바보 같을 정도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심지어 상대한테 잔뜩 두드려 맞은 후다. 섹스를 할 때도 이렇게 심장이 뛰진 않았다. 누구랑 해도. 안 그래도 맞아 터져서 왼쪽 얼굴에 열이 뜨끈뜨끈하게 났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온 얼굴이 터질 것처럼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난… 그러니까….”
이승원은 말을 더듬었다. 부끄러워서 그 잘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벌써 몇 년이 지났던가. 그런데 마음이 곧바로 십수 년 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너무나 순진하고 열정적이었던 첫….
쾅! 그때 가까이에서 차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유인하가 바로 움찔하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운전석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에도 이승원은 유인하의 얼굴만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다시 돌아보길 바라며….
“넌 주차라는 개념을 모르냐?”
이승원이 눈을 크게 뜨고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차를 박은 차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그리고 그 차에서 내린 놈도.
‘개 같은 새끼.’
도대체 어떻게 따라온 것인가. 이승원은 그답지 않게 여유가 사라진 살벌한 눈빛으로 안정훈을 노려봤다. 안정훈은 눈은 크게 뜨고 유인하를 보았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개처럼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흐, 흐엉, 흐어엉! 인하야!!”
착각이었을까. 그는 또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유인하를 향해 뛰어왔다. 그러다가 다리가 풀려 풀썩 넘어졌다가 엉금엉금 기며 일어나 다시 달려왔다. 그런 안정훈의 앞을 이승원이 막았다.
“인하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봐라.”
“비켜! 인하야, 인하야아~!”
날카롭지만 허무하고 강렬하지만 꺼질 것만 같던 유인하의 눈빛에도 약간의 놀라움이 돌았다. 놀라지 않을 순 없었다.
“미친놈이 명줄 한번 길다….”
죽이지 못한 것은 권시혁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인하는 그것이 너무나 짜증 나 이를 한 번 으득 갈았다. 그것마저도 자신의 무능력함을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어이가 없어서 결국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두 남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유인하는 다시금 입술을 꾹 다물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니들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거냐.”
유인하가 물었다. 그러자 안정훈도 이승원도 할 말이 많은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인하야, 인하야, 난 네가 진짜 죽은 줄 알고, 흐어엉, 형이…!”
“인하야, 걱정 마. 이 새끼가 너한테 손가락 하나도 못 대게 할 테니까!”
“하하.”
유인하는 한 번 더 웃었다. 유인하의 손이 라이터를 몇 번 켰다 껐다 하다가 곧 새 담배를 입에 물고 빨아들이며 불을 붙였다. 안정훈과 이승원 둘 다 순간 말을 멈추고 그런 유인하에게 집중했다. 담뱃불이 붙는지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입으로 뭔가를 빠는 모습은 깜짝 놀랄 정도로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이렇게 하자.”
유인하가 입을 열었다.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승원을 패는 것은 생각보다 화풀이가 되지 않았다. . 패는 맛도 안 났다. 게다가 안정훈까지 나타나니 입맛을 상당히 버렸다. 차분하던 이승원도 안정훈이 나타나니 그의 에너지 레벨에 맞춰 목소리가 커졌다. 두 남자의 열기가 불쾌했다. 그들이 가진 에너지를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자신이 시작한 일인데도 관심이 떨어진다. 모든 것이 밋밋해졌다. 연료가 다 되자 예고도 없이 꺼져버린 불꽃처럼. 순간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손이 퉁퉁 부어 있는데도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자극이 필요했다. 유인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둘이 싸워 봐.”
“뭐…?”
이승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유인하는 불이 붙은 담배를 쥔 손으로 잠깐 눈썹을 긁었다. 그리고 다시 둘을 보았다.
“난 항상 니들 둘 중에 누가 이길지 궁금하더라. 이긴 놈이랑 자줄게. 니들 둘 다 그것 때문에 이 지랄하는 거잖아.”
유인하는 자포자기한 것이나 다름없이 말한 것이지만 누구의 눈에도 그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느 때처럼 강해 보였으니까. 그의 입에서 자준다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어떤 힘이 있었다. 믿게 만드는 힘이.
안정훈이 순간 정신을 차리고 헉 하고 눈을 크게 뜨고 유인하를 보았다. 울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저 새끼가 남몰래 연기 학원이라도 다녔던 걸까? 무표정한 유인하의 얼굴은 초췌하고 뭔가 이상했으며 동시에 퇴폐적이었다.
“아니아니, 잠깐만 그러면 내가 존나 불리하잖아. 난 지금…!”
이승원은 눈을 크게 뜨고 곧바로 유인하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유인하가 옆으로 시선만 돌려 이승원과 눈이 마주쳤다. 뭔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승원이 느낀 것은 지금껏 잊고 있던 짜릿함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훈의 전화를 받았을 때와 비슷하지만 더 강렬한 느낌이었다. 보이지 않는 뭔가 커다란 것이 그래도 된다, 고 허락해준 것처럼.
이승원은 곧바로 안정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한 걸음 안정훈의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가 아으, 하면서 잠깐 자신의 배를 오른손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 보는 무섭고 진지한 얼굴로 뚜벅뚜벅 빠르게 안정훈의 쪽으로 걸어갔다. 그를 보면 항상 느낄 수 있는 여유와 권태로움도 지금은 없었다. 안정훈은 특유의 눈을 동그랗게 뜬 얼굴로 그런 그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하지만 먼저 공격을 한 것은 안정훈이었다. 주먹으로 아래에서 위로 이승원의 복부를 쳐올렸다. 안정훈은 지금 한 대라도 잘못 맞았다가는 요단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먼저 제압하려고 한 것이다. 안정훈은 모르지만 이승원은 이미 그 근처를 맞은 상태라 다시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곧바로 시선을 들며 상대를 죽일 듯이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단정한 얼굴이 이런 식으로 무섭게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전에는 어이없이 지고 말았다. 무력하게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그대로 팔꿈치로 안정훈의 얼굴을 후려쳤다. 안정훈이 발로 그를 걷어차려고 하자 그 다리를 잡고 밀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그의 위로 올라탔다. 그것만으로도 안정훈은 칼이 맞은 부분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져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런 틈을 기다려주지 않고 이승원은 안정훈의 멱살을 손으로 잡고 그의 얼굴을 몇 번이고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의 주먹도 터져서 피가 났다.
“하….”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이기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이런 것이었다. 얼굴이 터질 듯이 부풀고 횡경막이 끊어질 것 같아도 움직일 수 있었다. 최선, 그 이상으로. 이승원의 주먹질에는 한 치의 자비도 없었다. 이승원은 그대로 안정훈의 멱살을 끌어올려 한 대 더 때리려고 했다. 상대가 환자라던가,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아니,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 순간 안정훈이 그대로 이마로 이승원의 턱에 박치기를 했다.
“윽!”
“아, 이 씹새끼가 진짜 안 봐주네…! 환자라고!”
안정훈이 그대로 자세를 바꿔서 그의 위로 올라갔다. 안정훈은 곧바로 주먹으로 이승원의 얼굴 정중앙을 때렸다. 코가 부러질 뻔했다. 이승원이 이를 꽉 물었다.
“얼굴은 치지 마, 이 개새끼야!”
“지는 이 씹, 헉!”
이승원이 무릎으로 안정훈의 오른쪽 허리를 찼다. 안정훈은 소리도 못 지르고 이를 악물며 허리를 감싸 잡았다. 이승원이 다시 자세를 바꾸려고 했지만 안정훈이 오른손으로 그의 머리채를 잡고 아스팔트 바닥에다 쾅 내리쳤다. 순간 눈앞에 정말 별이 번쩍했다. 둘 다 그로기 상태에 빠져 땅바닥을 기었다.
유인하는 담배를 피우며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약간은 놀란 듯, 흥미로운 듯한 얼굴이었다.
쓰러져 있다가 먼저 일어선 것은 안정훈이었다. 그는 이승원을 걷어차려고 했는데 그걸 기다리고 있던 이승원이 누워 안정훈의 배를 정확하게 걷어찼다. 뭐,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주먹질과 발길질이 오고 갔지만, 사실 승패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헉, 윽…. 젠장, 나도 운동… 해야지…. 제기랄….”
이승원이 무릎을 짚고 복부를 오른손으로 부여잡고 심하게 숨을 헐떡거렸다. 복부에 힘이 안 들어가는 데도 주먹질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분명히 어디서 배운 거다. 이승원은 땅바닥에 엎드려 빌빌거리며 일어나지 못하는 안정훈을 내려다보았다.
“헉…. 으윽, 아윽…. 씨발…. 이 치사한 새끼…. 넌 인하 포기했잖아…! 옛날에 포기한 주제에 이제 와서 인하 건들지 마. 내 거야…!”
안정훈이 이를 갈며 외쳤다. 이승원은 대답 없이 곧바로 그의 허리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드디어 조용해졌다.
“이기고 지는 데 치사하고 나발이고 어딨어. 씨발, 지가 제일 치사하게 나온 주제에.”
이승원은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하지만 이승원도 허리를 펴기가 힘들었다.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겼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하아….”
이승원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유인하가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상하게도 맞지도 않은 심장이 아팠다.
“인하야….”
아프다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이승원은 허리를 펴려고 시도하며 몇 번이나 앓는 소리를 냈다. 마침내 구부정하게 허리를 펴고 겨우 유인하의 쪽으로 갔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프지 않다는 착각이 들었다.
“인하야.”
하지만 이승원의 표정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유인하의 얼굴로 피 묻은 오른손을 뻗으며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로의 간격을 제로로 줄였다. 이승원은 유인하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소란스러웠던 주차장에도 다시금 고요함이 찾아왔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고 심장의 고동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과 끈적한 땀이 느껴진다. 피비린내와 담배 냄새가 섞였다. 이승원은 오른손으로 유인하의 뒤통수를 감싸고 왼팔로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인상을 잔뜩 쓰고 눈을 꼭 감은 채 유인하의 귓가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를 안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나 황홀했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담배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조금 떨어뜨려 놓은 채 유인하는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에게서 불가리 향수의 우아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이승원이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기억나…? 너 시험 준비하기 전에 우리 둘이서 놀러 갔던 거.”
“응.”
“사실 그때 말하려고 했어. 고등학교 때 내가 너… 좋아…했었다고. 근데 이젠 아니라고. 그러니까 계속 친구로 잘 지내자고….”
“그딴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을 왜 하냐? 병신이냐?”
“하하…. 그러게….”
“기분만 나쁘게.”
유인하다운 말이었다. 이승원은 다시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얼마 가지 않았다.
“근데 그러면… 그러면 계속 같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잘 모르겠더라고, 이제…. 널 생각하는 내 마음이 뭔지. 너한테 말하면 알 수 있을 것 같았어.”
처음부터 우리는 잘 맞았다. 마치 영혼의 단짝을 찾은 것처럼. 그와 친하다는 건 언제나 갈등 속에 놓여 있다는 말과 같았다. 그와 친하다고 마구 자랑을 하고 싶기도 하고, 아는 척도 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절대 더럽히고 싶지 않은 내 어린 날의 성역이고 우상이며 첫사랑이었다.
때때로 떠오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오랜 친구가 멀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대로 순식간에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는 미래에 도달해버리면 어떡하나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갑갑해졌다.
마음을 억누르다 보면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온다.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원하지 않는 것인지. 어느 것을 선택해도 마음은 불편하기만 하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후회할 것만 같다. 그런 우유부단한 자신이 답답해서 갈수록 숨이 막힌다.
이승원은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 눈물이 나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품에 있는 유인하의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다시는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까는 그런 말 하고 싶은 게 아니었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사과하고 싶었어. 실수였어. 근데 네가 날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쩌나 겁이 나서…. 아무리 친했어도 넌 날 그런 식으로 보지 않는 거 아니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 알고 있었어.”
이승원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고 유인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오른손으로 유인하의 목을 감싼 채 엄지로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있잖아…. 어떻게 하고 싶어…? 네가 원하는 대로만 할게…. 한 번뿐이라도 좋아. 좋아해. 미안해. 너무 좋아….”
이승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홀린 듯 그대로 천천히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유인하는 피식 웃는가 싶더니 하하하, 하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이승원은 당황해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인하는 정말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 하하하. 아하하하. 하하하하!”
유인하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대로 폭소를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이승원이 기억하고 있던 그 순수한 즐거움의 미소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지금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굉장히 기괴하고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하하하, 난, 진짜, 하하하, 난 진짜…. 큭큭.”
유인하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안정훈도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다가 웃고 있는 유인하를 발견했다. 두 남자 다 아연하고 당황스러운 기분을 공유했다. 그런 점에서 둘은 본질적으로 확실히 동지였다.
“니들이, 큭큭큭, 이해가 안 된다, 하하하. 씨발, 니들 도대체 왜 싸우는 거냐? 큭큭큭.”
짐짝 취급하는 어머니, 무관심한 아버지, 무자비한 형, 외면하는 동생, 배신하는 친구들, 날 버리는 그 남자. 지금까지 이 모든 것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유인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찮은 것이다. 그래서 유인하는 분노했다. 인정할 수 없었으니까.
아까 그 말은 유인하가 했던 말 중 가장 무책임한 말이었을 것이다. 싸워 보라니. 자주겠다니. 이걸 진짜 들어줄 거라고 믿는 이 새끼들이 우습다. 그들에게 자신은 도대체 무엇인 것일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차라리 전처럼 둘이서 편 먹고 지금 당장 유인하를 덮쳤으면 유인하는 아마 당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둘이서 왜 싸우고 있는 것인가. 희극도 이런 희극이 없다. 보고 있는데 정말 바보들이 따로 없지 않은가. 그들은 아직도 유인하의 말에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유인하는 여전히 그들이 바보 같은 것이 좋았다.
“인하야….”
안정훈이 엉금엉금 기어 왔다. 그는 유인하의 발치에 도달해 무릎을 꿇고 유인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잘생긴 얼굴로 언제나처럼 거짓말은 할 수 없다는 듯 무해하고 순진무구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말했다.
“난 뭐든 할 수 있어.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알잖아, 내가 할 수 있다는 거. 죽지 마. 절대 죽지 마. 나랑 같이 있어 줘.”
“믿지 마, 인하야. 이 새끼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이승원이 유인하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며 빠르게 말했다. 유인하는 이승원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안정훈의 얼굴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
유난히 크고 새카만 눈동자. 닮았다. 유인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안정훈의 눈가를 엄지로 살짝 문질렀다. 안정훈은 그 손길에 더욱 용기를 얻었다. 재빨리 말했다.
“네 발로 기면서 개처럼 짖으라고 해도 짖을 수 있어. 네가 벗으라면 어디서든 벗을 수 있어. 알잖아? 이미 그렇게 했잖아? 네 말이라면 뭐든 했잖아? 난 네 개야. 너도 알잖아. 네 말 한마디면 난 뭐든 할 수 있어!”
안정훈의 말은 순진무구한 고백에서 점점 광기에 가까워졌다. 당장 무력감과 패배감에 찌든 사람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고백이 어디 있을까? 잠깐의 침묵 후 유인하는 픽 하고 웃었다. 그러고도 좀 더 실실 웃었다.
“그래.”
그가 싫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상했다. 그걸 알고 있었다. 그도 유인하만큼 공부를 잘했고 얼굴도 잘생겼고 키는 더 컸다. 그런데도 그는 유인하 앞에서 절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언제나 복종했다. 다른 친구들은 전부 멀어졌는데도 안정훈은 곁에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뭐였겠는가.
그때, 처음으로 고양이가 된 것도 안정훈의 전화에 충격을 받아 자포자기했을 때였다. 언제나 만만하게 보던 안정훈마저도 자신을 저버린다는 게 그렇게 충격이었다. 누군가를 찔러본 것도 안정훈이 처음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유인하에게 남은 것은 그밖에 없었다.
‘내가 졌다.’
유인하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안정훈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이었다. 유인하의 눈빛에 안정훈에 대한 못마땅함이 아니라 어떤 기대가 담겼다.
“나 지금 기분이 너무 안 좋아. 기분 좋아지는 거라면 뭐든 좋아. 한 번 해봐.”
5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