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죽이기 1부 3권
How to Kill a Cat
4. 매달린 남자
그는 중학교 때까지 항상 전교 1등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도 당연히 1등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2등. 엄마와 아빠는 1등이고 2등이고 너무나 대단한 거라면서 진심으로 기뻐했지만 그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2등이라니.
그래서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준비를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했다. 이번에는 1등이겠지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여전히 1등은 입학시험 때 1등을 한 학생이었다. 역시 좀 실망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1등을 한 사람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말고사 준비를 더 열심히 하겠다 건전한 마음을 먹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김성우가 어깨를 툭 치며 쟤, 하고 누군가를 가리켰다.
[뭐가?]
[이번에 또 전교 1등 먹은 새끼.]
안정훈은 그가 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히 별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뻤다.
옷깃 하나 구겨진 곳이 없었다. 풍성하고 새카만 머리카락, 눈썹과 속눈썹,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그 고운 외모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눈빛이었다. 타인을 쉽게 깔보는 강렬한 눈동자. 많은 친구들이 그를 잔뜩 둘러싸고 있었다. 진창 속에 핀 장미 같았다.
스치듯 눈이 마주치고, 그는 친구들을 몰고 가버렸다. 안정훈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안정훈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은 다문 채로 김성우의 등을 팍팍 쳤다.
[아, 왜!]
[와, 쟤 잘생겼다. 연예인 같아!]
[뭐래, 미친놈이.]
[이름은? 이름 뭐야? 친해지고 싶다. 엄청 친해지고 싶다. 완전.]
안정훈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공부도 그렇게 잘한다니. 게다가 친구도 저렇게 많고. 저런 애가 진짜로 있구나 싶어 놀랐다. 무슨 만화 주인공 같은 애가 아닌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자주 마주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안정훈도 김성우도 성적이 전교권이었고 함께 공부를 하고 놀러도 다녔다. 그때부터 김성우는 때때로 못마땅한 얼굴로 안정훈을 보기도 했지만 안정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와 친해져서 너무나 기뻤기 때문이다.
[안정훈? 내가 시키면 여기서 옷 벗으라고 해도 벗을걸?]
[진짜?]
다른 학교의 여자애들도 함께 놀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노래방이었나? 어쩌다가 그런 말이 나왔다. 안정훈은 약간 당황했다. 당연히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가 너무나 즐겁고 기대가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안정훈은 그의 기대를 너무나 만족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옷을 벗었다.
그때 그가 얼마나 환하게 웃었는지 모른다. 평소 날카롭고 도도하기만 한 그도 웃을 때는 소년다웠다. 정말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만큼이나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부터 유인하는 시험이라도 하듯 안정훈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고 안정훈은 그걸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줬다.
그 눈빛이 자신을 향할 땐 언제나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이상할 정도로 그가 좋았다. 함께 있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친구가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2학년이 됐을 땐 운이 좋게 같은 반이 되었다. 안정훈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고 유인하는 그를 레트리버라고 불렀다. 결국 가장 유인하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친구 중 하나가 되었다. 안정훈의 집에도 가끔 왔다. 안정훈의 침대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언제나 날이 선 것처럼 날카롭고 그래서 매력적인 그가 자신의 앞에서 방심을 하는 순간이 생겼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 심장이 찌르르했다. 그가 옆에서 잘 때면 안정훈은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더 친하게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인하에게 좀 더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좀 더 날 보게 될까?
그런 생각을 아주 많이 했다. 그리고 2학년 2학기 때 안정훈이 드디어 전교 1등을 했다. 안정훈은 등골이 오싹했다. 인하가 날 다시 봐주겠구나. 유인하는 자신이 1등이라는 것에 프라이드가 높았다. 분명히 자신을 다시 봐줄 것이다. 그에게 걸맞은 존재로.
하지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슬슬 안정훈을 친한 친구로 여기나 싶었던 유인하가 안정훈을 경계하며 집에 오지도 같이 잠을 자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에겐 친구들이 몇 트럭은 더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이 굳이 안정훈이 아니어도 그는 괜찮았던 것이다.
실망스러웠다. 이대로는 안 되었다. 그에게 자신이 유일한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오랫동안 고민했다.
‘작년에 0.5점 차이로 떨어졌을 때도 진짜 힘들어했는데 올해는 더 힘들겠지. 고양이로 자꾸 왔다갔다하는 것도 불안할 테고. 집에서도 뒷바라지해주는 거 부담스럽다고 했다고 하고.’
안정훈은 차를 몰고 신림동으로 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콧노래가 나왔다.
‘회사 들어갈까 고민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공부한 게 아깝잖아. 내년이면 붙을지도 모르는데. 열심히 어필하자. 도와준다고. 같이 살자고. 부모님도 안 해주는 고시 뒷바라지를 내가 해주는 거야.’
아무리 유인하가 인기가 많다지만 자신 같은 친구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어떻게 해야 자신의 도움을 순순히 받아들일까? 예전에는 안정훈이 뭘 해주든 기뻐했는데 지금은 마치 안정훈이 전교 1등을 했을 때처럼 경계하고 싫어하는 것 같다.
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그가 소중하고 그래서 잘해주고 싶기만 한 자신의 마음을 말이다. 받아들이면 그도 편하고 좋을 것이 분명한데.
안정훈은 이제껏 유인하에게 누구보다도 충실한 친구였다. 누구의 말대로 충견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불려도 상관없었다. 안정훈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는 것뿐이다.
“하, 귀찮아.”
안정훈은 자신이 그런 혼잣말을 해놓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콧노래가 멈췄다.
*
유인하는 좁디좁은 현관에 서서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기 직전에 멈췄다.
“…….”
나갔다가 고양이가 되면? 그래서 바깥에 갇히게 되면?
침대와 현관 사이에 커다란 고양이 사료가 놓여 있었다. 화장실의 문은 항상 어느 정도 열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고양이 사료 포대와 비슷한 건빵 포대가 있었다. 냉동실과 냉장고에는 볶음밥이 가득 차 있었다. 대용량 볶음밥을 소분하여 냉장고에 이틀 치를 넣어두고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었다.
유인하는 외출을 극도로 줄였다. 고양이가 되어 또 밖에서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를 이 1.5평 고시원에 갇히게 했다. 그렇게 싫어했는데 말이다. 그때 이후로 8월이 된 지금까지 유인하는 딱 한 번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외출을 한 것이 다였다.
그래도 오늘은 정말 나갈 생각이었다. 미뤄왔던 일도 해치워야 하고 오늘만큼은 공부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늘은 2차 시험의 결과 발표가 있는 날이다. 아침부터 계속 들어가서 확인을 해봤지만 결과는 아직 뜨지 않았다.
‘와 있겠네.’
유인하는 시계를 보고 심호흡을 했다. 그동안 고양이로 바뀐 적은 없었다.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문의 손잡이를 잡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 기어코 자신과 싸워 이겨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작은 고시원은 아무리 문을 열고 있어도 환기가 잘 되지 않는다. 반지하의 현관 밖일 뿐인데도 방안보다 훨씬 상쾌한 공기가 밀려온다. 문을 닫기 전 앞집의 문도 불쑥 열리더니 그 폐인이 나왔다.
그는 그동안 더 살이 찐 것 같았다. 키는 170cm 전후, 탄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물처럼 흘러내리는 살에 눈은 실눈을 뜬 것처럼 작고 눈두덩은 두둑했다. 눈썹이나 머리카락의 숱이 적고 얼굴과 목의 구분이 힘들었다. 오늘도 구멍 난 런닝에 트렁크 차림이었다. 방 안에서는 오늘도 유난히 큰 모니터 화면에서 게임이 돌아가고 있었다.
유인하는 그를 마주치는 걸 극도로 혐오했고 아마 그건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인하는 언제나처럼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는 유인하를 쳐다보았다. 유인하는 곧바로 불쾌함을 느끼고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눈 깔라 이거다.
“오랜만에 나오네요.”
그런데 그가 말을 걸었다. 직접 말을 거는 건 1년만일까. 이제껏 유인하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일일이 체크했다는 말인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긴 하지만….’
그래도 구태여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가. 아주 불쾌하다.
그는 여러 가지로 유인하와 마찰을 겪기도 했다.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복도에 방치해서 집주인을 통해 몇 번 컴플레인을 걸었다. 적반하장으로 유인하만 보면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 직접 얘기를 하려고 하면 쫄아서 집에 틀어박혔다. 정상적인 사회성을 거의 보인 적이 없는 작자다. 보기만 해도 불쾌한 새끼가 하는 짓도 생긴 것 따라 아주 좆 같았다.
“아, 네.”
유인하는 그처럼 아예 무시를 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유인하의 눈빛은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니 그가 또 이상한 타이밍에 질문을 던졌다.
“공부는 잘되어가요? 오늘 2차 발표날인데.”
유인하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그를 돌아보고 한 번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한 번 젓고 고시원 밖으로 나왔다.
‘좆 같은 폐인 새끼가 남의 일에 갑자기 왜 참견이야?’
쓰레기 같은 게…. 기분이 잡쳤다. 유인하는 한 달 동안 집에만 있느라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얘졌으며 눈 밑이 퀭하고 언제나 총기가 번뜩이던 눈도 먹구름이 낀 듯했다.
날이 더워져 옷차림이 얇다.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티셔츠에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옷차림만은 예전과 같이 구김 하나 없었지만…. 기운이 빠진 사람 특유의 쳐진 느낌이 감돈다.
그는 누가 봐도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어 항상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마치 예쁜 칼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있어 쉽게 얕잡아 보이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운이 빠져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그 전과는 사뭇 달랐다.
유인하는 동네에 있는 커피 체인점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절대 올 일이 없는 곳이었다. 가성비 넘치는 옵션이 많은 이 동네에서 제일 비싼 커피숍이었다. 그만큼 내부가 멀끔하고 넓었다. 뭐든 좀 더 제대로 된 느낌이다.
‘집에만 있느라 돈도 안 썼고….’
유인하의 가장 큰 지출은 식비였으나 고시 식당마저도 가지 않는 지금 저번 달 생활비가 아주 약간 남았다. 이런 커피숍에서 몇천 원 과소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아무 곳에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묵묵히 걸어 커피숍에 도착했다. 커피숍의 앞에는 안정훈의 차가 서 있었다. 외제차였다.
‘백수 주제에 무슨….’
분명 안정훈의 집도 유인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수입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중소기업 회사원이고 어머니는 전업주부고. 물론 그는 일단 외동이라 유인하의 집보다 사정이 좋은 편이라고 봐야겠지만. 그래도 한동안 대기업을 다니며 돈을 벌었으니 저 정도 차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가 다른 관대한 형이 이 정도는 사줄 수 있는 것일까.
“…….”
유인하는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안정훈이 안쪽의 넓은 자리에 먼저 앉아 있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커서 다리가 한참 나온다. 깔끔한 차림새에 밝고 선한 인상의 그는 세상에 무슨 어려움을 겪어봤는가 싶은 얼굴이다. 역시 여기 사는 인종들과는 기운이 달라 눈에 띄었다. 실제로 공부를 하고 있는 다른 인간들이 힐끗힐끗 그를 보고 있었다.
“인하야.”
그는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는 유인하를 보고 마치 주인을 반기는 커다란 강아지처럼 눈이 반짝였다. 언제나처럼.
그는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른 게 없었다. 심지어 나이도 안 먹는 것 같다. 그와 달리 유인하는 십수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맞았다. 유인하는 인사도 하지 않고 일단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로 가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내가 살게.”
“아니, 내가 살게. 뭐 마실래?”
“어, 진짜?”
“어.”
유인하가 말했다. 안정훈은 한 번 더 거절할까 고민하다가 그건 아니다 싶어 종업원에게 미소를 지은 얼굴로 주문했다.
“그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작은 사이즈로 주세요.”
“그거면 돼? 다른 거 먹고 싶은 건 없어?”
“아니, 괜찮아.”
“시켜.”
“괜찮다니까.”
“시키라고.”
오늘은 초장부터 아주 까칠한 유인하였다. 안정훈이 강아지처럼 눈동자가 크고 새카맣고 순한 눈으로 한 번 눈을 깜박였다.
“어….”
“내가 하라면 해.”
유인하가 노려보았다. 안정훈은 언제나처럼 유인하에게 이기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 안정훈은 다시 웃는 얼굴로 종업원을 보았다. 그는 작은 조각 케이크를 시켰다. 이번에도 가장 저렴한 것이었다.
“아뇨, 이걸로 주세요.”
짜증이 난 유인하는 제일 비싼 케이크를 통째로 시켰다. 종업원이 당황하여 두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자리로 돌아갔다. 곧 커피 두 잔과 커다란 딸기 케이크가 두 사람의 사이에 놓였다. 딱히 축하할 것도 없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묘하게 이상한 광경이었다. 친한 것인지 데면데면한 것인지, 한 사람은 표정이 안 좋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가운데 있는 화려한 케이크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안정훈은 그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무언가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여기.”
“여기까지 주러 와줘서 고맙다.”
유인하는 그가 준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보며 말했다. 아이폰4다. 예전 것이지만 새것처럼 깨끗하고 예뻤다. 유인하는 그것을 받아 화면을 켜보았다. 충전이 다 되어 있었다. 안정훈이 신경을 쓴 모양이다. 바쁘다며 미루고 미뤄 오늘에서야 휴대폰을 돌려받았다. 유인하는 원래 어제 보자고 했지만 안정훈이 오늘 시간이 된다고 해서 오늘 만났다. 그것마저도 조금 짜증 났지만 그러려니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필요한 연락은 노트북으로 하고 있어서 별로 불편함은 못 느꼈다. 유인하는 2차 발표 결과가 오는 길에 혹시 떴을까 싶어 확인해 볼까 하다가 멈췄다.
“얼굴이 안 좋아.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은데….”
안정훈이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얼굴을 들게 하려고 했는데 유인하가 탁 하고 바로 손을 밀어냈다.
“뭐 하는 거야?”
안정훈을 보는 그의 눈빛은 ‘어디서 감히?’라는 듯했다. 안정훈은 약간 눈을 크게 떴다. 전에 두 번이나 머리를 만지게 해주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다. 안정훈은 무안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건 괜찮아? 많이 안 괜찮으면 정말….”
“괜찮아. 그 뒤로 바뀐 적 없고.”
“그래?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는 안정훈의 얼굴은 얼빵하고 멍청해 보였다. 근 몇 년간 딱히 자주 본 적이 없어 약간 까먹고 있었다. 최근에 몇 번이고 보니 생각났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항상 짜증이 났었다. 눈치가 없다.
“형은 괜찮은 것 같아. 일주일 정도는 또 찾았는데….”
“안 물어봤다.”
“2차는? 오늘 발표 아냐? 괜찮아?”
“괜찮아. 한두 번도 아니고.”
“발표 났어?”
“질문 좀 그만해라.”
유인하는 짜증을 냈다. 유인하는 삐딱한 자세로 눈을 치켜떠 그를 보았다. 안정훈은 커다란 덩치를 최대한 줄여 무해하게 보이려고 하고 있었다.
‘이 새끼는….’
진짜 병신인가?
고등학교 때 유인하는 항상 전교 1등이었고 그는 2등이었다. 학과는 달랐지만 같은 대학으로 진학했다. 안정훈도 똑똑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어딜 가나 호구를 잡힐 이 얼빵하고 멍청한 태도가 문젠데, 정말 보는 사람이 답답해서 속이 뒤집어진다.
이상할 정도로 비굴한 태도. 이것도 모르나 싶을 정도로 눈치가 없게 굴거나 갑자기 엉뚱한 화제로 돌리는 괴상한 언행. 과도하게 잘 보이려고 하고 필사적으로 밉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주제에 간혹 불쑥 손을 뻗어 선을 넘는 행동.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의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말이라면 죽는 시중도 하는 인간은 안정훈밖에 없었다.
“힘든 거 있으면 뭐든 얘기해.”
“힘든 일 있었으면 좋겠냐?”
“혼자 안 힘들어했으면 좋겠어서….”
초반부터 계속 날카롭기만 한 유인하의 태도에 많이 주눅이 들었는지 안정훈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강아지처럼 순한 눈으로 유인하의 눈치를 보았다.
“우리 친구잖아.”
“하아…. 다음 달부터는 알바 하면서 내년 준비하려고 했는데 한 달 동안은 안 변했지만 앞으로 어떨지는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못 정했어. 그냥 그게 제일 큰 문제지.”
‘우리는 친구’라는 말에 유인하가 공격적인 태도를 아주 약간 누그러뜨리고 그렇게 말했다.
“작년이랑 올해는 운이 없었지만 너 완전 합격권인데…. 부모님한테 조금만 더 지원해달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공부에만 집중하는 게 좋잖아.”
“누가 그걸 모르냐.”
그러자 안정훈은 자기가 다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말 그렇지만… 솔직히 너희 부모님 자꾸 너한테 돈 없다고 하는데, 난 그거 아무리 봐도 거짓말 같단 말이야.”
“뭐?”
봐라, 또 선을 넘는다. 유인하가 인상을 팍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비굴하게 구는 주제에 이럴 때면 도대체 스스로를 뭐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의심된다. 자기가 ‘감히’ 유인하에게 그런 말을 해도 될 정도의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안정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잖아…. 너희 부모님 하시는 걸 보면… 돈 없어서 네 학원비도 지원 못 해주지만 너희 형이 사고 친 건 어떻게든 수습해 주시잖아. 그럼 그 돈은 어디서 난 건데? 네 동생 대학원 학비는?”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유인하의 목소리가 서릿발보다 차가워지자 안정훈은 아차, 하며 더욱 눈치를 봤다.
“미안….”
“누가 사과하래?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아니….”
안정훈은 다시금 사과했다.
“미안…. 그냥 난… 난 항상 네가 너무… 잘못된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넌 이것보다 훨씬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네가 얼마나 대단한데….”
유인하는 점점 더 짜증스러운 인상이 되었다. 실이 팽팽하게 이어진 것 같은 긴장감도 예전에는 그를 강하게 보이게 했다면 지금은 아슬아슬하게 보이게 할 뿐이다.
“너 말이야, 요새 자꾸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너 보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라고 너 만나주는 거 아니거든? 넌 그냥 내가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고, 그냥 옛날처럼 해. 알았어?”
유인하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안정훈은 조금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
“…….”
커피는 조금씩 마셨지만 아무도 케이크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하얗고 달콤한 레어 치즈를 베이스로 그 위에 각종 베리가 올라간 화려한 케이크였다. 설탕으로 코팅한 과일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유인하도 케이크가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포크로 한쪽을 쑥 파서 입으로 들고 갔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유난히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치즈와 검붉은 딸기가 쏙 들어갔다.
약간 풀이 죽어 있던 안정훈은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입가에 치즈가 살짝 묻었다.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유인하는 안정훈이 자신의 입술을 빤히 보자 엄지로 입가를 훔쳐 치즈를 핥아먹었다.
“묻었으면 말을 해.”
안정훈은 묘한 표정으로 유인하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했다. 유인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로 할 말도 없는 것 같은데 나가자.”
“어? 케이크는?”
“네가 들고 가.”
“아니….”
유인하는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공통의 친구들의 근황이나 최근 시사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주로 안정훈이 소식을 전하고 유인하는 듣고 평하기만 한다. 하지만 유인하는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정훈은 케이크를 챙기고 잔을 두 개 반납한 후 얼른 따라 나갔다.
“케이크 들고 가. 네가 샀는데….”
“됐어. 단 거 안 좋아해. 너 먹어.”
“태워 줄게.”
“됐어.”
“인하야….”
마음이 조급해진 안정훈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안정훈은 다 안다는 얼굴로 말했다.
“많이 힘들잖아. 안 참아도 돼. 내가 도와줄게.”
“안 힘들어. 아, 왜 이래!”
유인하는 안정훈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안정훈은 간절한 눈빛으로 진심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난 널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는 거 알잖아.”
“…….”
그러자 유인하가 멈칫하며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안정훈은 약간 놀라 마른침을 삼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평가하는 유인하의 눈빛이 한 번 안정훈의 몸을 훑었다. 마치 혀로 핥는 것처럼…. 오랜만이었다. 안정훈은 또 상당히 뜬금없는 말을 했다.
“네가 여기서 벗으라고 해도 난 또 벗을 수 있어.”
“…왜?”
유인하라면 분명히 벗으라고 할 것이다. 안정훈은 이미 벗으려고 티셔츠를 주섬주섬 끌어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유를 물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안정훈은 특유의 무해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며 유인하를 보았다. 2초 뒤에 대꾸했다.
“네가 하라고 하니까.”
“…됐고. 술이나 한잔하자.”
안정훈은 티셔츠를 다시 내렸다. 그리고 유인하를 따라갔다. 근처의 허름한 맥주집이었다. 안주를 시키고 맥주와 소주를 시켰다. 술을 섞어 소맥을 만들었다. 유인하는 이번에도 빨리 취했다. 다년간 지켜본 결과 못 마시는 티를 안 낼 뿐 주량이 강한 편은 아닌 것 같다. 안정훈은 함께 마시는 척하면서 그를 계속 힐끔거렸다. 유인하가 물었다.
“넌 왜 아직도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해?”
“왜긴….”
아까부터 왜 자꾸 이유를 묻는 걸까. 안정훈은 약간 쑥스러운 태도로 대꾸했다.
“난 항상 너랑 진짜 친해지고 싶었어.”
“그러니까 왜.”
“…그냥?”
“미친놈.”
아까 옷을 벗겠다는 말은 정답이었나 보다. 최근 1, 2년 정도 안정훈을 날카롭게만 대하던 유인하의 태도가 조금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기간은 확실히 유인하가 안정훈과도 연락을 끊을까 말까 고민했던 시기와 일치했다.
“네가 진짜 내 개새끼라도 되냐, 레트리버? 어?”
“키워주게?”
쳇, 하는 소리를 내며 유인하가 피식 웃었다. 전에는 초조함에 유인하에게 몇 번 마음에 없는 소리도 하고 부딪쳤는데 역시 그에게는 배를 보이며 확실하게 복종의 의사를 나타내는 게 더 나은 접근법인 모양이었다.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말이다.
“너 같이 커다란 걸 내가 어떻게 키우냐?”
“어? 큰 게 문제인 거야?”
안정훈이 눈을 크게 뜨며 약간 충격을 먹은 얼굴을 했다. 웃기다. 유인하는 한 번 피식 웃었다가 진심이냐는 듯한 얼굴로 안정훈을 보았다. 안정훈이 얼른 말했다.
“왜, 왜? 내가 그렇게 크진 않지 않나? 아니, 나 뭐 어지르지도 않고 얌전한데? 진짜 완전 얌전한데…. 좀 커도….”
자기가 진짜 개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유인하는 어이가 없어서 또 픽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그래, 커서 안 되겠는데.”
그 말에 안정훈이 핫, 하고 최대한 자신의 덩치를 줄여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어깨를 모아봐도 큰 건 큰 거다. 시무룩한 얼굴이 웃기다. 안정훈은 무해하면서도 약간 억울한 듯 불쌍한 표정을 했다. 유인하가 지나가듯 말했다.
“차라리 네가 날 데리고 살면 모를까.”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니까. 내가 전부 다 해줄게.”
유인하의 농담에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안정훈의 입에서 다다다다 말이 나왔다. 유인하는 눈을 크게 뜨며 안정훈을 보았다가 다시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이 너무나 오랜만이라 안정훈은 자신에게 정말 꼬리가 있다면 지금 잔뜩 흔들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했다.
“웃으니까 보기 좋다, 인하야.”
“난 네가 이해가 안 된다.”
“왜?”
나 같은 게 뭐가 좋다고…. 유인하는 그렇게 대답할 뻔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뭐 어때서, 라고 스스로에게 반박했다. 그는 학창 시절 내내 또래 친구들이나 선생님 할 것 없이 인기가 좋았다. 대학을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고시 생활을 시작하며 사람 만날 일이 극히 줄어 지금만 이런 것뿐이다. 유인하는 안주를 몇 개 먹으면서 심드렁하게 물었다.
“말만 그러는 거 아니고?”
“뭐가?”
“같이 살자는 거.”
“당연히 아니지!”
흐악. 안정훈은 심장이 쿵 하고 뛰어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낼 뻔했다. 그 후로 심장은 마구 뛰어 목과 귀까지 화끈해졌다.
‘같이 살면…!’
그 순간 떠오른 것은 자신의 이불로 알몸을 감싸고 있던 유인하였다. 이불을 빼앗으려고 하니 어깨가 훌렁 보였다. 귀에서 스팀이라도 나올 뻔했다.
‘친구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유인하를 똑바로 볼 수가 없다. 눈이 핑글핑글 도는 것만 같다. 죄책감이 바닥을 뚫고 동시에 기대감도 대기권을 뚫고 솟았다. 유인하는 그런 안정훈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술을 마셨다.
“정 네가 그렇게 말하면 생각은 해볼게.”
굳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생각해보면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다. 월세만 안 나가도 비상금으로 내년까지 견딜 수 있다. 알바를 안 해도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고양이로 변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면 고시가 된다 해도….’
유인하는 인상을 찌푸리곤 생각을 멈췄다.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안정훈은 생각만 해본다는 그의 말에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지금 당장이라도 그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줬다 뺏긴 기분이다.
‘어차피 줘도 안 살 싸구려 고시원에 사는 주제에.’
참 값비싼 자존심이다. 안정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가 멈칫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또 자신답지 않은 이상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마치 그의 안에 두 명의 서로 다른 자신이 있는 것만 같았다. 유인하를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상적인 자신과….
‘?’
뭐라고 이름 붙이기가 힘들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많은 망상들이 그렇듯 또 잊어버렸다. 유인하는 마지막 잔을 비우고 조금 알딸딸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집에 가자.”
“…….”
유인하는 자리에서 또 훌쩍 일어나 걸어 나갔다. 안정훈은 순간 가슴이 찌릿했다.
함께 있고 싶은 것은 언제까지 나뿐인 걸까?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네게 필요한 건 오직 나뿐이라는 걸 알기까지.
‘오늘 왜냐고 자꾸 물었지.’
왜일까…. 유인하를 만난 이래로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알았다. 오늘날까지 유인하도 묻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 말도 안 되는 걸 다 들어주면서 자신이 왜 이러는지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봤다. 그게 말이 되나?
왜?
쿵쿵. 쿵쿵쿵쿵!
안정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을 짚은 그의 손에 땀이 흥건했다. 등이 순식간에 젖어버렸다. 가게 안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아 춥게 느껴지는데도.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은 아찔함이 들었다.
“계산이요.”
안정훈은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코앞에 비닐이 일어난 유리문이 있었다. 방금의 느낌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잊어버려야만 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8월의 열기가 땀이 흐른 찝찝한 몸을 더욱 후끈하게 만들었다. 안정훈은 티셔츠를 펄럭였다. 유인하는 이쪽에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안정훈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인하야….”
당연한 것일 텐데도 그의 뒷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유인하. 안정훈은 다시 아까의 이상한 기분을 잊고 미소를 지었다.
“아, 덥다. 역시 오늘은 우리 집 갈래?”
안정훈은 언제나 그러듯이 가볍게 유인하를 꼬셨다. 하지만 유인하는 별 반응이 없었다.
“왜 그래?”
안정훈은 유인하의 어깨 너머로 그가 보고 있는 것을 함께 보았다. 이제 밤이 제법 늦었다. 유인하는 자신의 2차 시험 결과를 확인해 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불합격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과목이 0.5점 과락이었다.
안정훈도 그걸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하고 뒤에서 유인하의 손을 잡고 화면을 내려보았다. 이번엔 합격자 평균은 아니었지만 합격자 커트는 넘었다.
안정훈은 뒤에서 유인하의 손을 내려다보는 자세였다. 안정훈은 아무런 말도 쉽게 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이 아주 가깝다. 어둡고 더러운 골목. 가로등도 멀찍했다. 유인하의 하얀 얼굴은 멀리 있는 하얀 가로등에 의해 더 창백해 보였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유인하의 몸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두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평소대로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나 싶더니 곧 너무나 서러운 얼굴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흑…. 흐윽…. 윽…. 흑….”
“인하야.”
안정훈은 유인하의 몸을 돌려 앞에서 꽉 끌어안았다. 이마에 두 손을 댄 자세 그대로 안정훈의 품에 안긴 유인하는 너무나 서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흑…. 흐엉, 흑…. 윽…. 흐으윽.”
“인하야, 괜찮아. 응? 괜찮아.”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눈물을 흘렸을까.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앞에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전에는 그냥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 만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펑펑 울고 있었다. 마음이 찌르르 아팠다.
그렇게 예쁘고 자신만만하고 남들을 쉽게 깔보곤 하던 유인하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유인하 본인도 몰랐을 것이다. 안정훈은 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인하야. 내가 있잖아. 응?”
“난, 난… 흐엉, 난 아무것도 안 될 거야. 난 그냥 안 되는 거야. 흐으윽. 흐어엉!”
유인하는 결국 모든 것을 다 놓고 소리를 높여 엉엉 울기 시작했다. 주변 생각은 전혀 안 나는 모양이었다. 나라라도 망한 것처럼 울었다.
관운이라는 게 있다고 하지 않는가. 작년에는 합격자 평균을 넘어도 떨어졌고 이번에도 합격자 커트를 넘겼는데도 떨어졌다. 공부를 아무리 해도 운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고시다. 작년에는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도 너무나 억울했다. 이번엔 최선조차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정말 모든 것이 후회되었다.
그깟 고양이 따위 뭐가 되고 싶다고 그렇게…. 정신 차리고 그 두 달만 제대로 했어도 지금 이러고 있진 않을 거라는 말 아닌가…! 한 치 앞도 못 보고 제 복을 발로 찬 것이다. 지금까지 몇 년을 이 고작 두 달 놓친 것으로 수포로 만들었다. 다들 말했다. 올해는 붙을 거라고! 그런데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믿었다면 고양이가 되어도 고시를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했을 것이다.
모두가 날 믿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도 나만큼은 나를 믿고 싶었다. 나만큼은 내게 기대하고 싶었다. 잘 할 수 있다고 잘 살 수 있다고. 부모형제처럼 살지 않을 수 있다고.
“너무 힘들어.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해. 이건, 이건 이상하잖아. 너무 억울하잖아. 작년에도 그랬는데 올해도…! 너 때문이야! 네가 그때 그런 말만 안 했어도 고양이 따위…!”
유인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악을 쓰며 안정훈에게 화풀이를 했다.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등을 주먹으로 퍽퍽 쳤다. 좌절과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기에 유인하는 더더욱 괴로웠다.
“미안해. 미안해, 인하야. 응?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 집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어! 그런 거…!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흐윽….”
안정훈은 쉬이, 하고 바람 소리를 내며 유인하의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 유인하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남자의 손길이 강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행복도. 그런 것 따위 다 환상이었다. 아무리 바라도, 아무리 원해도 절대 가질 수 없는. 그런 것에 홀려서… 손에 쥘 수 있는 확실한 것을 놓쳤다. 딱 한 번 다른 곳에 눈 돌려본 것뿐인데. 딱 한 번….
악을 쓰던 유인하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몸이 축 늘어졌다. 유인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쉰 목소리를 냈다.
“이제 못해…. 포기하고 싶어. 죽고 싶어.”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한순간에 무참히 꺾여버리는 이 거대한 실망. 그 기대도, 노력도 분명히 좋은 것일 텐데 그게 크면 클수록 실망이 자신을 해쳤다.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인하야….”
안정훈은 자신이 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유인하를 꽉 안았다.
매미가 울었다. 아마도 이 삭막하고 피폐한 거리에도 마른 나무 정도는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매미의 울음소리는 그다지 건강하게 들리지 않았다. 기계음이 지직거리는 것만 같다. 밝은 것이라곤 간간이 다니는 버스뿐이다. 승객이 콩나물시루처럼 가득 차 환한 전등과 검은 머리카락의 대비가 선명했다.
그대로 몇 분이 흘렀다. 안정훈은 고개를 들었다. 유인하는 넋이라도 빠진 사람처럼 흐릿한 눈빛으로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안정훈은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잡았다. 아까는 거절했으면서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는 것일까. 안정훈은 그의 왼쪽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괜찮아, 인하야. 내가 있잖아. 내가 돌봐줄게.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다 해줄게. 걱정하지 마. 응? 내가 있잖아.”
진심이었다. 심장이 다 떨렸다. 왼팔로 더욱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동시에 머릿속에 희열에 찬 목소리가 퍼졌다.
‘드디어.’
그가 내 손에 떨어진다.
*
잘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좋은 직업을 가지면, 그래서 남들이 우와, 하면 잘 사는 것이고 한 명이라도 낮춰 보면 못 사는 것일까?
‘그럼 잘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아닌가.’
분명히 얼마 전까지는 행복했는데,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걸 알았는데 왜 지금은 그 느낌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걸까?
“…….”
눈을 떴다. 그렇게 많이 자진 못한 모양이다. 새벽의 푸름이 깃든 방안은 에어컨이 돌아가 약간 서늘했다. 그래도 춥진 않았다. 유인하는 자신의 몸 위에 올라온 뜨거운 두 덩어리를 인지했다. 안정훈의 팔과 다리였다. 그의 머리가 유인하의 베개를 같이 베고 있었다.
유인하는 그를 밀어내고 일어났다. 머리가 멍했다. 그냥 잤더니 여기저기 찝찝하다. 침실에 연결된 통로로 들어가니 드레스룸이 보이고 욕실로 통했다. 전에는 술에 취한 데다가 고양이로 변해서 잘 몰랐는데 꽤 좋은 집인 것 같다.
‘새 아파트인 거 같은데….’
유인하는 욕실로 가서 불을 켰다. 잘은 모르겠지만 벽이나 바닥의 대리석 재질이 뭔가 유인하가 겪어봤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맨발에 닿는 바닥재의 느낌이 몹시 부드럽다. 아파트치고는 천장도 굉장히 높고 모든 것이 깨끗하고 번쩍번쩍하다.
‘미친놈….’
자기 형을 얼마나 쪽쪽 뽑아 먹고 있단 말인가. 외제차에 아파트에. 양심도 없다. 유인하는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단정했다.
유인하는 옷을 벗고 샤워 부스로 들어가서 물을 틀었다. 거울을 보았다. 파리한 얼굴에 눈이 엄청 부었다. 어디에도 힘이 들어간 부분이 없어서 전부 처져 있었다. 초췌하고 늙어 보였다.
작년에 떨어진 것은 생각날 때마다 분했다. 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번엔…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아니, 힘들었다. 그 두 달, 그동안 다른 생각하지 않고 여태껏 그랬듯 공부에 집중했다면 지금 결과가 달랐을 거라는 생각은 그를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짓이겼다. 그때를 행복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여태껏 자기 자신 하나만 믿고 살아온 유인하에게는 스스로를 지탱해온 마지막 기둥이 부서져 버린 느낌이었다.
열심히 하나 열심히 하지 않으나 원래부터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작년과 올해만큼의 점수를 받을 수 있는 해가 더 이상 오지 않으면 어쩌나. 이렇게 운이 나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되지 않는다면? 아니, 사실 작년과 올해가 가장 운이 좋았던 것이었다면? 앞으로도? 바보같이 안 될 것에 온 힘을 낭비하고 있었을 뿐이라면?
‘그러면… 그러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길을 잃어버렸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원래 떨어질 것을 알고 있지 않았느냐, 계획대로 내년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당장은 아무런 힘도 나지 않았다.
다 씻고 드레스룸에서 안정훈의 옷을 아무거나 골라 입었다. 반바지에 티셔츠. 품이 많이 남았다. 마치 유인하 같았다. 유인하라는 인간의 겉껍질 속에 그 자신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힘없이 거실로 걸어 나갔다가 조금 놀랐다.
벽 전체가 창문이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구름이 보였다. 유인하는 저도 모르게 창문으로 다가갔다. 진짜였다. 진짜 구름이 발아래에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오른쪽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며 구름을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주황색과 보라색, 회색, 연두색과 하늘색. 하늘은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눈을 자극했다.
비행기도 한 번 타본 적 없는 유인하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라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신기함에 잠시 들떴던 기분은 당연하다시피 다시 가라앉았다. 들떴기 때문에 오히려 낙하가 힘겹게 느껴졌다. 그냥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뿐이었는데도.
외면하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냥… 이제는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한구석에선 괴롭다. 왜 그런지 이유조차도 모르겠다. 예전엔 모든 것의 이유를 꼭 찾아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나쁜 것은 나쁜 것으로 분류하여 취하거나 피하면 전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냥 모르겠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은 운해를 뒤로했다. 뒤쪽에 부엌이 있었다. 이럴 때도 배는 고픈 것이다. 그쪽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그리고 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뭐가 많지는 않았다. 과일과 우유, 음료. 새빨간 사과를 한 알 꺼내고 우유도 꺼냈다. 시리얼 통이 보인다. 시리얼 볼에 시리얼을 잔뜩 담고 우유를 부었다. 아일랜드 식탁에서 해가 뜨는 창밖을 보며 천천히 시리얼을 먹었다.
시리얼을 다 먹고 사과를 한 입 먹을 즈음엔 이미 해가 다 떴다. 발소리가 쿵 들렸다.
“인하야?”
머리가 한쪽으로 다 솟은 안정훈이 침실에서 나왔다. 눈이 마주쳤다. 유인하는 눈이 잔뜩 부어서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눈을 다 뜬 느낌이 아니었다. 유인하는 스스로가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질 뿐인데, 안정훈은 일어난 직후인데도 뭐가 기쁜지 들뜬 얼굴이었다.
“배고팠어? 여기 아침 줘. 또 먹자. 여기 좋지?”
안정훈은 약간 들뜬 얼굴로 말했다.
“여기 무슨 호텔이야?”
유인하가 물었다. 안정훈이 유인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 집인데?”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집을 다 사냐? 아무리 너희 형이 부자라지만…. 넌 양심도 없냐?”
기운은 많이 빠진 목소리였지만 어쨌든 유인하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안정훈은 그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른 고개를 저었다.
“형 돈으로 산 거 아니야.”
안정훈은 재빨리 말했다.
“그럼 백수가 무슨 돈으로 이런 집을 사냐? 로또 맞았냐?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이건….”
유인하는 역시나 기운은 잔뜩 빠졌지만, 안정훈을 무슨 도둑놈이라도 보는 눈빛으로 보았다. 안정훈은 입을 약간 내밀었다.
“회사 그만두고 회사 사람들이랑 같이 창업했단 말이야. 그리고 좋은 가격에 금방 팔아서…. 운이 좋았던 거긴 한데…. 너한테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백수라고 하면 백수 맞긴 한데….”
안정훈이 유인하의 눈치를 보았다. 그동안 쉽게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유인하는 싫어할 것이다. 유인하는 표정이 점차 굳었다가 관심 없다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래.”
이 바보 같은 새끼도, 언제나 유인하의 앞에선 개새끼처럼 빌빌거리던 새끼도 이렇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운만 좋으면. 운이 좋다면.
‘운이 나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안 된다는 말이야?’
평소라면 이런 생각에 분노가 화르륵 붙었을 것이다. 지금은 물에 젖은 부싯돌을 튕기는 것 같았다. 탈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분명히 내 인생과 남의 인생은 다른 것일 텐데도, 남들이 잘해 나가는 게 나만 안 된다는 생각의 감정적 이유로 차곡차곡 쌓였다.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그래서 여태껏 열심히 부정해왔는데도. 사실 논리라는 건 그렇게 우월한 게 아닌가 보다.
마치 남이 나의 것을 훔쳐 간 것처럼 분노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어 고치지도 못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누가 고쳐주지도 않는다. 쳇바퀴를 돌 뿐이다. 운이 나쁜 것도, 합격을 계속하지 못하는 것도. 그냥 내가 능력이 없고 가치가 없고 어리석기 때문인 것이다.
아니,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이다. 부모와 형제를 생각해보면 근본도 결과도 일목요연해서….
“아, 아니, 그, 그래도 이 집은…. 이 집은 잘못 샀어. 이렇게 비싼 집 살 생각은 전혀 없었지, 나도…!”
화를 내거나 빈정거리는 것보다 침묵이 더 무섭다. 안정훈은 아차 싶어 얼른 말했다.
“진짜야. 여기 처음에 미분양이 많아서, 그러니까 어떻게 알게 된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 한 채만 팔아 달라고 사정해서, 어쩌다 보니까 샀는데 완전 빚덩어리야. 가격도 비싸게 사고. 관리비도 엄청 나오지…. 그 사람한테 반쯤 사기당한 거나 다름없어.”
“…넌 어디 가든 호구 잡히기 쉬우니까 조심하라고 했지?”
땅을 파고 들어가던 사고를 겨우 멈추고 유인하가 겨우 그렇게 말했다. 안정훈이 헤실 웃었다.
“그러니까. 나 바보 같지?”
“넌 원래 바보 같았어.”
유인하는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젠 고마웠다. 나 이제 갈게.”
이런 곳에 있어 봤자 뭐 하겠는가. 결국 안정훈도 권시혁도 처음부터 전부 구름 위의 사람이고 유인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뿐이다. 전처럼 분하거나 화가 나거나 자존심이 상한다고 구태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심장이 자꾸 무거워져 괴로웠다.
“어디 가게?”
안정훈이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유인하를 바라보았다.
“어디 가긴. 내 집 가는 거지.”
“나랑 같이 살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생각해본다고 했잖아.”
안정훈의 말에 유인하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치켜뜬 눈이 날카롭다. 기운이 다 빠진 모습인데도 말이다.
“내가 너랑 왜 살아.”
그게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도 몰라도 안정훈은 이상하게 울컥했다. 유인하는 그저 거절할 수 있는 권리를 십분 활용하는 것뿐일 테다. 마치 유인하 같았다. ‘감히’ 자신의 호의에 거절한 것이 괘씸하게 느끼는 것처럼…. 안정훈은 그의 손목을 갑자기 꽉 잡았다.
“뭐야?”
유인하가 인상을 쓰고 안정훈의 얼굴을 성가시단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
유인하는 그랬다. 언제나 자신을 시험하길 좋아했다. 이번에도다. 그는 안정훈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안정훈은 참을 수 있었다.
‘왜 그래. 초조해하지 마. 이제 다 됐어. 유인하가 강한 척하는 건 언제나 있는 일이다.’
머릿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안정훈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을 풀고 유인하의 허리를 슬 끌어당겼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뜬금없이 말했다.
“집에 원피스 전권 다 있는데. 너 안 읽은 지 오래됐지?”
유인하가 진심이냐는 얼굴로 안정훈을 돌아보았다. 안정훈은 해맑게 웃었다. 상대의 경계를 해제하는 미소다.
“좀 쉬어도 돼. 그래도 누가 안 잡아먹어.”
“…너 그러다가 내가 진짜 눌러앉으면 어쩌려고?”
유인하가 한쪽 눈썹을 들며 안정훈을 아래위로 보았다. 안정훈은 눈을 약간 크게 떴다가 웃었다.
“완전 좋은데?”
호구짓도 적당해야지…. 유인하는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지만 그는 언제나처럼 과하게 해맑고 무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널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는 거 알잖아.]
유인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너 진짜 아직도 내가 벗으라면 벗을 수 있냐?”
“어? 엉.”
안정훈이 바로 티셔츠를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하. 유인하의 피폐한 얼굴에 상대에 대한 비웃음과 자조의 중간쯤 되는 것이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누가 지금 벗으래.”
유인하는 다시 집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티셔츠에 머리가 걸린 안정훈은 으응?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몸을 돌리다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머리를 다시 티셔츠에 넣고 나니 유인하가 벌써 저기까지 간 것을 발견했다. 그것만으로도 안정훈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어디 있는데?”
유인하가 물었다. 안정훈은 다시 싱글벙글한 얼굴로 그에게 따라붙었다. 정말 꼬리가 있다면 세차게 흔들고 있을 것 같다.
‘꼬리 있으면 인하가 좋아할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안정훈은 얼른 그를 안내했다.
“여기 여기.”
이 집은 독신 가구가 살기에 딱 좋게 만들어져 있었다. 거실 옆에 하나 더 있는 방을 서재로 쓰고 있었다. 구름이 걷힌 창으로 서울의 전경이 훤히 보이고 책상이 있고 벽 두 면을 천장까지 채운 책장이 있었다. 반은 그냥 일반 서적이고 반은 만화책이었다. 책이 없는 곳은 세련되고 예쁜 인테리어 소품이 있었다.
‘나도 나중에 이렇게 살고 싶었는데….’
원래 유인하가 원하던 삶의 수준은 아마 이 정도였을 것이다. 깔끔하고 살기 편리한 아파트 한 채와 충분히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정적인 수입. 물론 여긴 너무 비싸서 엄두도 안 나는 곳이지만 형태는 그랬다. 유인하도 미처 구체적으로 생각 못 했던 것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 같은 곳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인테리어와 가구들, 여러 편리 시설들. 어렸을 때 좋아했던 만화책 정도는 잔뜩 사 놓을 수 있는 작은 여유. 젊음도 동시에 느껴졌다. 이 깔끔함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해 많은 물건을 발 디딜 곳 없이 쌓아 둔 유인하의 낡은 본가와 대척점에 있는 듯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생각이 자꾸 나쁜 곳으로만 빠지려고 한다. 오늘 같은 컨디션이면 공부는커녕, 아니, 공부 같은 건 안 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대학교 1학년 이후로 못 읽었던 만화책이 한가득 있었다. 아직도 완결이 안 났다. 유인하는 1권부터 10권 정도 뽑아 들고 거실로 갔다. 안정훈도 신이 난 얼굴로 만화책을 몇 권 뽑아서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대로 둘은 소파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 얘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 죽었나? 죽지?”
“누구? 아, 걔? 어. 근데 좀 어이없이 죽어.”
“조연캐가 그렇지.”
자신이 그런 말을 했으면서 심장이 콱 죄이는 것만 같았다. 그 느낌을 외면하기 위해 십 분 정도는 써야 했다. 만화에만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단 하루만이라도.
그렇게 만화 캐릭터를 하나 두고 서로 갑론을박하기도 하면서 종일 만화책을 봤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 때 시험이 끝나면 종종 하던 짓이었다. 예전에는 둘 말고도 친구들이 몇 더 있었지만.
치킨을 시켜 먹었다. 사실 별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유인하는 한 달 동안 볶음밥만 먹고 살았기 때문에 입에 들어간 순간 무슨 신세계의 맛을 영접하는 기분이었다.
“이거 이런 맛이었지….”
통통한 치킨 날개를 달콤하고 바삭한 튀김이 감싸고 있었다. 씹을 때마다 닭 날개의 담백하고 부드러운 육질과 달콤한 기름이 잘 어우러진다. 이 가게가 유난히 잘하는 곳이라서 이런 거겠지?
생각해보니까 굳이 볶음밥만 먹고 살기 이전이라고 해도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건 거의 1년 만이었다. 어느샌가 천 원, 이천 원에도 벌벌 떨며 살던 유인하가 치킨 같은 걸 어떻게 시켜 먹었겠는가.
“맛있어?”
유인하는 부드러운 육질의 날개만 잔뜩 먹고 있었다. 안정훈은 자기가 다 배가 부르단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유인하는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빨았다.
“응.”
그렇게 대답하고 안정훈의 얼굴을 보는데 이 이상한 새끼가 이유도 없이 얼굴을 붉히고 또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유인하가 봤을 때 안정훈이 병신같이 보이는 이유는 이런 맥락이 없는 짓을 자주 하기 때문도 있었다.
“왜?”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닌데!”
“병신.”
한 번 병신은 영원한 병신인가…. 유인하는 저도 모르게 평소대로 그런 생각을 하고는 다시 만화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그렇게 울어 부었던 유인하의 눈도 거의 다 가라앉았다.
“아, 재밌다.”
맨날 공부만 하다가 만화책 좀 읽으니 엄청 재밌다. 치킨도 맛있고. 하긴 그간 무슨 낙이 있었나. 고작 고양이 동영상을 하루에 30분 정도 보는 것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그만둔 지 꽤 되었다.
“…….”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는 얼굴이다. 잠깐 고개를 돌려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안정훈은 갑자기 만화책에 코를 박았다. 역시 바보 같다.
“야, 그것 좀 치워 봐.”
“어, 어? 왜…?”
안정훈이 만화책 위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유인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에서 만화책을 뺏고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안정훈은 괜히 어쩔 줄을 몰라 귀까지 빨개졌다. 눈을 확 깔았다.
‘닮지는 않았나….’
태도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비교조차 못 하겠다. 그냥 얘는 병신 같고 그 남자는….
“…됐어. 읽어.”
유인하는 그에게 만화책을 다시 툭 던져주고 자신이 읽던 만화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아침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10권쯤 읽으니 벌써 5시였다.
‘이걸 언제 다 읽어.’
아직도 몇십 권이나 남았다. 예전 같으면 읽을 게 많이 남았다고 좋아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지친다. 이 정도 시간이면 전부 읽어야 남는 장사인 것 아닌가. 게다가 잠을 얼마 못 잔 유인하는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그는 소파의 팔걸이에 머리를 댄 채 만화책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 전체적으로 기운이 빠져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어젯밤만큼 최악의 상태 같지는 않다. 안정훈은 만화책을 보면서도 계속 유인하를 힐끔거렸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자꾸 확인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땐 유인하를 독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렇게 예쁘게 생겼고 매력적이고 그래서 친구가 많았다. 물론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쭉 고시 공부를 시작해서 다른 친구들은 물론이고 안정훈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간 얼마나 초조했던지. 안정훈은 그와 이렇게 둘이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그 초조함을 기억할 수 있었다.
“잠이 다 온다….”
유인하는 몇 번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보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별로 자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시간에 자면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고 그러면 내일을 망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잠깐만, 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오늘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하지 않았다. 오늘 뭘 했단 말인가. 고작 만화책이나 읽고 쓸데없는 얘기나 시시덕거렸다. 자신은 아직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되었다. 잘한 것도 없는 주제에. 모든 것이 잘못된 것만 같았다. 오늘 하루가 모든 것의 당락을 결정짓는 중요한 날일지도 모른다. 심장이 뛰고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고시원 총무도 이제 찾아봐야 해. 이제 정말 돈도 없는데. 엄마한테 돈 안 받기로 했잖아.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뭐든 해야 돼.’
고양이일 때와는 달랐다. 놀아 봤자 아무것도 편해지지 않았다. 그때는 어쩔 수 없어서, 그래,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을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있었다. 어리석은 착각이었을 뿐이지만.
이전에도 이런 날이 없지는 않았을 테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1분 1초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 생각이 마음을 꽉 죄었다. 그런 여유 따위 가질 자격이 자신에게 어디 있단 말인가. 종일 시간을 허비했다는 사실이 감당할 수 없이 큰 자책으로 다가왔다. 고작 이런 것에 빠져서 소중한 하루를 버리다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온몸에 무거운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한 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는 몸부림을 칠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왜? 어째서? 몸부림을 쳐야 하는데? 아무리 무거워도, 아무리 힘들어서 일어나야 하는데 왜? 아니, 일어나는 것 따위가 뭐라고 일어나지조차 못한단 말인가. 거짓말이다. 나약한 변명이다. 일어나. 빨리!
그래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 어디도 잘못된 곳은 없었다.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일어날 수는 없었다.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무력했다.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면?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 아니, 나는 원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었던 건 아닐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래서 영원히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무력함의 진공에서.
“흐으, 윽, 하아, 윽….”
얕은 잠에 빠진 유인하가 가위에 눌려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안정훈은 약간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보지도 않던 만화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나서 유인하가 누운 소파에 앉았다. 유인하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눈썹이 찌푸려져 미간에 선이 올라왔다. 짙고 긴 속눈썹이 눈 밑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붉은 입술은 앙다물려 있었다. 유인하같이 대가 센 애가 이렇게 약해져 있는 것은 보기 힘든 일이었다.
색달랐다. 아름다운 얼굴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뭐든 할 수 있는 예쁜 손도 빈 주먹을 꽉 쥐고 있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빨리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깨우지 않았다. 무방비한 유인하를 보는 것은 언제나 가슴이 욱신거렸다. 마치 봐서는 안 될 걸 보는 것처럼 죄책감이 든다. 그런데도 자꾸 이런 순간을 기다리게 된다. 죄책감이 드는데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
‘넌 항상 이렇게 괴로워했던 걸까.’
어젯밤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더니. 오늘 아침엔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서 약간 아쉽기까지 했다. 좀 더 할 일이 있을 줄 알았다. 좀 더 자신이 위로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괜찮은 척한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이 마음 아팠다. 차라리 그가 포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러면 자신이 더 많이 도와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도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나쁜 생각일까?’
안정훈은 그의 뺨에 손을 올려 엄지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인하야.”
유인하는 온몸의 근육을 잔뜩 긴장한 채 굳어 있다가 눈을 반짝 떴다. 눈이 마주쳤다.
“인하야. 일어나. 괜찮아. 응?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유인하의 눈이 순간 빨개졌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더니 벌떡 일어났다. 얼굴을 잡고 있던 안정훈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가 안정훈의 팔을 잡았다.
“나 이제 가야겠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왜 그래? 조금 쉬어도 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유인하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인하야.”
안정훈은 그의 몸을 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유인하는 이렇게 누군가에게 껴안긴 적이 많지 않았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몸을 강하게 안고 있던 이 느낌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났다. 뜨거웠다.
“흐윽, 헉…. 하아….”
유인하는 해일같이 덮쳐오는 불안에 공포스러워하다가 겨우 진정했다. 오늘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지쳐버렸다. 속으로 자책하고 원망하고 고민하고 스스로와 줄다리기를 하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했다.
그리고 유인하의 사상 최악의 밤 중 하나였던 어젯밤과 같이 안정훈의 품은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가 정말 강아지였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아무리 나락으로 떨어져도 강아지는 충성을 지키니까. 비록 우아함과 품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조금만 잘해줘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꼴 보기 싫지만.
‘고양이가 좋아. 개는 싫어. 하지만 사람보다는 개가 낫지….’
불안과 공포에 지쳐 그로기 상태에 빠진 유인하의 정신은 그런 생각으로 불안과 공포를 회피했다. 그동안 안정훈은 유인하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괜찮아. 너 그동안 진짜 열심히 살았잖아. 좀 쉬어도 괜찮아. 아무도 뭐라고 안 해.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먹고 싶은 건? 공부 다시 시작하기 전에 다 하자. 어때? 한 달 정도는 괜찮잖아?”
“한 달은 무슨….”
유인하가 안정훈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겨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가 자신에게 기대고 있었다. 안정훈은 자신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손끝도 찌릿찌릿하다. 아니, 그냥 온몸이 오싹오싹했다. 어젯밤 그를 이렇게 껴안았을 때의 아찔한 충만감이 기억났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좀 더 강하게….’
그렇게 생각하자 안정훈의 눈앞에 이상한 상상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틀어쥔 손목. 일견 고통스러워 보이는 얼굴이 어느샌가 환희로 바뀌고 창백한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거칠게….
안정훈은 팟, 하고 유인하를 놓았다. 유인하도 자신의 이마를 손등으로 닦으며 떨어졌다. 안정훈은 기계적으로 원래 하려던 말을 했다.
“한 달이 싫으면 2주일도 좋고…. 집에만 있는 게 좀 답답했나? 드라이브 나갈까?”
“드라이브? 이 시간에?”
“가자.”
안정훈은 벌떡 일어났다. 유인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랑 내가 무슨 데이트하는 것도 아니고….”
또 뜬금없다. 놀아 달라고 끊임없이 공을 물고 오는 레트리버처럼 안정훈은 유인하에게 매우 치근덕거리곤 했다. 고등학교 때는 그런 그를 보며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고 귀찮아하기도 했었다. 유인하는 안정훈에게 손목을 잡혀 반쯤은 끌려가듯 소위 드라이브라는 것을 나가게 되었다. 안정훈은 생각을 빠르게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좋은 차를 타고 주차장을 나왔다. 아래에서 보는 서울의 야경도 아름다웠다. 차를 타고 가만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이런 외출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내일은 쇼핑 좀 할까?”
“돈 없어.”
“내가 사줄게.”
“됐거든?”
“왜? 예전에는 내가 사주는 건 전부 받았잖아.”
“…마음대로 해라.”
유인하는 고개를 팩 돌렸고 안정훈은 아까의 복잡한 심경을 잊고 신난 얼굴이었다. 금방 잊어버릴 수 있는 것도 재능이다. 차는 남산으로 향했다. 반대쪽 차선은 어째서인지 밀리고 있었다. 하얀 라이트가 점점이 이어졌다. 남산에 도착하자 차를 적당히 세워 두고 타워를 등진 채 산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을 마주했다.
“예전에 다 같이 여기 온 거 기억나?”
“어.”
유인하는 야경을 보고 있었고 안정훈은 난간에 등을 대고 유인하의 쪽을 보고 있었다. 안정훈의 얼굴이 고등학교 시절만큼이나 개구져 보였다.
밖에 나온 것은 확실히 기분 전환이 되었다. 이렇게 탁 트인 장소는 정말, 정말 오랜만이었다. 존재하는 공간이 넓어지는 만큼 자신도 넓어지는 기분이다. 안정훈의 값비싼 레지던스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공기가 상쾌했다.
“수능 치고 나서였나? 절에 가서 다 같이 원하는 대학에 가게 해달라고 소원 빌었잖아.”
“그랬지.”
“결국 원하던 데 간 사람은 너랑 나밖에 없나?”
“다들 눈만 높아져서 다 우리 따라서 원서 써서 그런 거 아냐.”
유인하가 픽 웃었다. 기분이 좀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래, 인하는 맨날 공부만 한다고 아무 데도 못 갔잖아.’
전에 자신도 하고 싶은 것이 많다는 말을 했다. 그걸 다 해주면 좋아할까? 인하가 하고 싶은 건 뭘까? 야경을 보고 있는 유인하의 머리카락이 날아가 그의 눈가를 간지럽혔다. 그가 그쪽 눈을 살짝 찌푸렸다. 안정훈은 그에 앞서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주며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인하는 그의 손길을 피하려고 했지만 머리카락을 치워주는 걸 알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는 시중받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또 하고 싶은 건 없어?”
유인하의 앞에서는 언제나 헤실헤실 웃기만 하던 안정훈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고 멋있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진심이기 때문이다. 유인하는 야경에서 눈을 떼지 않아 그걸 보지 못했다.
“글쎄. 요새 입맛이 없어서. 좀 색다른 맛 없나?”
유인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안정훈은 귀가 쫑긋하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좋아. 맛있는 거? 못 먹는 거 있어?”
“딱히? 너무 달지만 않으면….”
“알았어.”
안정훈은 휴대폰으로 맛집을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고 또 하고 싶은 건 없어?”
“글쎄….”
먹는 것 빼고 그다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만화책은 오늘 봤고…. 유인하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냥 기분 좋아지는 건 뭐든….”
안정훈은 흠칫하며 휴대폰에서 시선을 뗐다. 어느새 난간에 기대어 서울 야경을 바라보고 있는 유인하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정말?”
“뭐가.”
“기분 좋아지는 거… 다 해줘도 돼?”
“뭐 해주게?”
그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유인하는 평소처럼 썩 신통치 않은 얼굴로 안정훈을 올려다보았다. 안정훈은 사고회로에 과부하가 걸렸다. 결론으로 가기도 전이다.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귀가 새빨개졌다. 어두워서 보이진 않겠지만. 심장이 쿵쿵 울렸다.
‘네가 원한다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핥아줄 수 있어.’
또 머릿속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울렸다. 더 이상 눈을 마주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들킬 것 같다. 안정훈은 고개를 돌리고 예의 순하고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을 보았다.
“일단 맛있는 것부터 먹을까.”
서울은 맛집이 많다. 안정훈은 인터넷으로 찾은 정보를 마치 자신만 알아낼 수 있는 정보인 것처럼 떠들어대서 우스웠고 유인하는 그런 그가 귀찮아졌다. 여느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서울을 야경을 보며 산책로를 걸었다.
“성우? 이제 3학년인가, 4학년인가. 학교에 남을 건가 봐.”
“교수 하게?”
“그렇겠지?”
“고생하겠네.”
“상민이는 회사 잘 다니고 있어. 얼마 전에 만났는데. 아, 영빈이도 얼마 전에 만났는데 영빈이 결혼한다던데? 미쳤지? 준현이 기억나? 준현이는 유학 간대.”
“넌 백수 되더니 진짜 놀기만 하냐?”
평일의 늦은 밤이라 산책로는 거의 텅 비었다. 가로등의 불빛 아래로 두 사람만이 걷고 있었다. 전에는 이 길을 열 명이서 걸었고 지금은 두 명이서 걸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때는 왁자지껄했는데 지금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그게 어른이 됐다는 뜻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왜 이래….’
가슴이 뛰었다. 아무도 없었다. 안정훈은 괜히 유인하의 손을 건드리고 싶었다. 10년 전처럼. 친구들과 함께 어깨를 치여가며 이 길을 걸었다. 그것 때문인 척 유인하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툭툭 치면서 만졌었다. 장난으로. 장난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얼마나 긴장했던지…. 잊고 있던 기억이 확 하고 살아났다. 기억할 수 있어서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다시 잊고 싶기도 했다.
안정훈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살짝 감싸듯 건드렸다. 그때보다는 좀 더 대담했다. 유인하가 움찔하더니 손을 뺐다.
“뭐야?”
“어? 아. 미안.”
안정훈은 흠흠,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별것 아닌데 또 해도 재밌는 장난이었다. 유인하도 실수인가 하고 그냥 지나갔다. 유인하는 오랜만의 산책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지개를 켰다.
“예전엔 그래도 아침에 꼬박꼬박 운동도 했는데…. 한 달 안 했다고 몸이 다 뻐근하다.”
“계속 집에만 있었어?”
“응. 혹시 고양이로 변할까 봐.”
유인하는 기지개를 쭉 켰다. 1.5평 고시원 안에서는 기지개도 마음대로 못 켠다. 툴툴 뛰어보기도 했다.
“이제는 정말 안 변할 건가 봐. 하긴, 변하는 게 이상한 거지.”
“응.”
그렇게 가다 보니 상점과 음식점이 나왔다. 분식점은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닭꼬치 냄새가 화하게 났다. 유인하는 습관적으로 가격표부터 보았다. 비싸다.
“왜 먹을래?”
“아니, 아까 치킨도 먹었는데.”
“왜, 너 이거 좋아하잖아.”
“내가?”
이런 지저분한 분식집에서 파는 닭꼬치를 이런 가격을 주고 먹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가성비 안 나온다. 하지만 안정훈은 그런 것에 거리낌 없이 자신이 먼저 양념이 잔뜩 발린 닭꼬치를 들어 올려 한 입 먹었다.
“맛있어.”
“아까 치킨 먹고 그게 들어가냐?”
유인하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입 앞에 들이대는 걸 한 입 먹었다. 닭의 비계와 살이 살짝 매우면서도 달달한 소스와 함께 입안의 감각을 확 되살렸다. 불맛도 적절하게 감칠맛을 올렸다. 이게 이런 맛이었지, 그런 생각이 또 들었다. 너무나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10년 전에 친구들과 여기 놀러 왔을 때도 이 닭꼬치를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났다. 그때는 안정훈의 말대로 좋아했었다. 자주 사 먹기도 했다. 그냥 10년 동안 안 먹어서 좋아하던 것도 잊어버렸을 뿐이었다. 그때는 고작 몇천 원 정도가 비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땐 빚을 지더라도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이 우선이었다.
“…….”
왜일까. 자신에게는 죽어도 지켜야 할 자존심이란 게 있지 않았나? 그런데 그런 게 언제부터 고작 천원, 2천 원에 굽히기 시작한 것일까. 분명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처음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젠장, 구질구질해. 고작 이런 걸로….’
유인하는 눈물이 나올 뻔한 걸 필사로 참았다. 유인하가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것이 궁상맞은 것이다. 안정훈이 더 먹기를 종용했지만 먹지 않았다. 맛있다는 걸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작 3천 원짜리….
“돌아가자.”
유인하가 먼저 발길을 돌렸다. 이번에도 안정훈을 전혀 배려하지 않아 안정훈은 얼른 값을 치르고 헐레벌떡 따라가야 했다. 상점들의 밝은 불빛에서 벗어나 다시 어두운 곳으로 오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유인하는 문득 안정훈에게 말을 걸었다.
“넌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
“무슨 생각?”
유인하의 질문에 안정훈이 되물었다.
“그냥… 다 허무하다는 생각?”
“뭐가?”
“사는 것도 그렇고…. 어차피 나중에는 다 죽잖아. 사람 같은 거 티끌만 한 존재고. 뭐 하러 다들 아등바등 사나 싶어서.”
유인하가 묵묵히 걸으며 그렇게 말하자 안정훈이 이번엔 아닌 척하지 않고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유인하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안정훈은 그답지 않게 못마땅한 듯, 아니면 약간 한심하다는 듯이 보이는, 하지만 꽤나 생생한 눈빛으로 유인하를 보았다. 처음이었다.
“죽고 싶어?”
안정훈이 했다고 하기엔 몹시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유인하는 그의 변모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하는 말이잖아.”
“그냥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안정훈은 유인하의 손을 조금 거칠다 싶을 정도로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를 꽉 끌어안았다.
“아, 놔. 뭐 하는 거야?”
“난 절대 그런 생각 안 해. 너한텐 내가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해?”
안정훈은 답답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유인하는 얘가 또 뜬금없이 왜 이러나 싶어 짜증이 났다.
“네가 뭐라고.”
“나 이제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해줄 수 있는 거 몰라? 나 이제 돈도 많아.”
유인하는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너 가끔 존나 또라이 같은 건 아냐? 우리가 아직도 고등학생인 줄 알아? 도대체 너 나한테 왜 이러냐?”
유인하는 안정훈을 밀어냈다. 안정훈은 여전히 유인하의 손을 강하게 잡은 상태였다. 유인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진위를 알아보겠다는 듯 안정훈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안정훈은 뭔가 답답한 얼굴이었다.
“난 항상 네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어.”
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냐는 듯, 답답하다는 어조였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유인하는 여전히 그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친구?’
비웃음이 나올 것 같은 건 나뿐인가. 유인하는 그런 말을 하는 그를 평소의 태도로 대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이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그럼 됐네.”
유인하는 손을 빼내려고 했다. 안정훈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고. 지금은 고등학교 때보다도 안 친한 거 같아. 그땐 네가 나한테 뭐든 시켰는데. 내가 뭘 해줘도 좋아했잖아. 근데 지금은 자꾸 피하려고만 하고…. 섭섭해.”
표현에 부족함이 느껴지는지 안정훈은 더욱 답답한 얼굴을 했다. 유인하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평범한 친구, 그런 거 싫어. 나는 네가 좋아. 처음부터. 너한테도 나밖에 없잖아. 그렇게 말해줘. 그럼 뭐든 해줄게. 아무것도 사양할 필요 없어. 난,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
여전히 아주 어두운 곳에 있었다. 빛이 나는 곳은 역시나 머나멀다. 이렇게 커다란 놈이 아직도 어린애같이 말했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항상 못 미더웠고 또한 그래서 진심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말을 이런 나이가 되어서 믿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닌가. 어렸을 때야 마음으로만 만날 수 있는 게 친구라지만 이제는 아니다. 적어도 유인하는 아니었다.
안정훈은 분명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해왔다. 옛날에도 지금도. 그 말을 옛날처럼 언제든 무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별것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안정훈 같은 것의 말에 자신이 휘둘린다고 생각하면 너무 자존심이 상하니까.
유인하는 자신이 입을 열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그럼… 여기서 벗어.”
유인하가 말했다. 안정훈의 눈이 커졌다. 유인하는 자신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황해야 할 안정훈은 도리어 피식 실소를 할 뻔했다. 왜인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방금 바보 같은 말을 하던 놈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서 표정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눈빛만이 빛날 뿐이다. 그의 그림자가 유인하의 발에 닿았다.
안정훈은 입고 있던 하얀 티셔츠를 한 번에 훌쩍 벗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에 운동도 많이 했는지 근육이 다 잡혀 있었다. 유인하는 내심 깜짝 놀랐다. 그는 하나도 나이가 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완전히 성숙해서 누구도 놀랄 만큼 남성적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안정훈은 유인하와 눈을 끝까지 마주친 채였다. 예전에 처음으로 유인하의 앞에서 옷을 벗을 땐 꽤나 부끄러워하면서 벗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니었다. 신발과 양말도 벗고 팬티 한 장만 남았다.
“어머!”
운동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 둘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이쪽을 보면서 주춤거렸다. 안정훈은 그쪽을 쳐다보지도 반응하지도 않았고 유인하만 약간 신경질적은 얼굴로 아주머니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듯 얼른 지나갔다.
“자.”
그동안에 팬티 한 장도 거리낌 없이 시원하게 벗은 안정훈은 유인하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야 뭐.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고.”
“…….”
유인하는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안정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러면 괴롭히는 게 안 되지 않은가. 안정훈이 다시 옷을 입으려고 하자 유인하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누가 입으래?”
“응?”
안정훈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며 팬티를 다시 입으려다가 허리를 세웠다.
“더 이렇게 있을까? 나 이대로 집에 가자고 해도 갈 수 있는데.”
안정훈 주제에 무슨 여유를 부리고 있는가? 재수 없게. 유인하는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래? 그럼 여기서 한 번 빼는 것쯤 쉽겠네?”
*
“으, 응? 뭘?”
안정훈이 되물었다. 알아들은 주제에 뭘 모르는 척하는가? 안정훈은 간혹 저렇게 과도하게 순진한 척을 하는 게 제일 문제다. 저 덩치로 귀여운 척을 한다는 말이다. 지가 진짜 강아지인 줄 아는가?
“내 말이면 뭐든 듣는다며? 증명해 보라고.”
순진한 척 크게 뜨고 있는 눈이 슬쩍 좌우를 살폈다. 닮은 점을 하나 찾아냈다. 그 남자도 눈동자가 유달리 새카맣고 컸다. 10년이 넘게 보던 친구인데 그 점이 이제야 눈에 띄었다. 안정훈은 잠깐 난처한 듯 하늘까지 쳐다보았다가 끄응 하고 또 불쌍한 척 유인하를 보았다. 유인하는 빨리하라고 눈짓만 했다.
입다 만 검은색 드로즈가 그의 팽팽한 허벅지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약간 머뭇거리나 싶더니 안정훈의 오른손이 결국 다리 사이로 움직였다.
알몸으로 있는 것 정도는 괜찮다. 어차피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어둡다. 하지만 이 이상을 하는 건 역시 위험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로….’
왼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양팔 다 어깨까지 핏줄이 새파랗게 올라왔다. 키가 크고 어깨는 넓고 팔다리는 길쭉길쭉하다. 코가 아주 높고 입술은 분홍색이었다. 눈썹과 머리카락은 아주 짙은 다갈색에 짙은 쌍꺼풀을 가졌다. 그는 순진한 척 자주 눈을 크게 뜨는데 가늘게 뜨고 있는 지금은 생각보다 매우 잘생기고 섹시해 보였다.
“하아….”
안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집중이 되지 않고 메말라서 하기가 힘들었다. 오른손에 잡힌 두툼한 살덩어리가 곤란하기만 할 뿐이다. 변태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흥분하는 취미는 없었다.
“…….”
안정훈은 그대로 시선을 치켜들어 유인하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유인하는 분명히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절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안정훈은 자주 그의 눈을 피했지만 유인하는 단 한 번도 안정훈의 눈을 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눈을 깔려면 네가 깔라는 거다.
역시 말이다. 그런 게 이상하게 귀엽단 말이다. 이런 걸 시키는 것도 그렇고. 그는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여전히 복종한다는 것을. 그는 그런 게 기분이 좋은 것이다.
내가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근육이 꽉 차 빵빵한 엉덩이 양쪽에 골이 확 파지고 깊이 파인 등골로 땀이 흘렀다. 철썩철썩하고 손과 고환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탁탁탁탁. 안정훈의 시선은 유인하의 눈동자에서 코, 그리고 입술에서 조금 오래 머물렀다.
“하아, 미치겠네….”
안정훈의 미간이 심하게 좁혀졌다가 놀고 있던 왼손이 유인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 더럽게 왜 만져!”
하란다고 진짜 해? 병신. 그렇게 속으로 비웃으며 내심 우월감을 느끼고 있던 유인하는 그가 자신의 손을 잡자 깜짝 놀랐다. 안정훈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강한 눈빛으로 유인하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다가 순식간에 표정이 변해 눈을 깔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끙끙댔다.
“역시 밖이라 잘 안 돼.”
“아, 어쩌라고. 놔!”
“인하야….”
안정훈은 그의 오른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검지를 뻗어 그의 손목 안쪽을 한 번 매만졌다. 유인하는 그게 불쾌해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보통 친구의 손목을 이런 식으로 쓰다듬을까.
“갈 것 같아, 하윽.”
“놔! 놓고 해!”
“으윽, 난 네 말대로 하고 있는 것뿐인데…. 하아.”
안정훈은 평소처럼 끙끙대는 개새끼처럼 말했지만 눈빛이 또 평소와 달리 또렷하고 강해졌다. 다시 유인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분홍색 입술을 핥는 혀는 새빨갰다. 서로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서 유인하도 퍽 당황했다. 그리고 안정훈의 귀가 빨개지며 결국 사정했다. 하얀 정액이 튀어 유인하의 신발 위에 몇 방울 떨어졌다. 안정훈은 그의 오른손을 확 끌어당겨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으윽, 헉….”
“안 놔, 이 미친놈아?!”
“네가 하라고 했잖아….”
“야!”
안정훈은 자신이 형을 따라 그냥 습관적으로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던 것 같다. 유인하는 그의 힘에 당해내지 못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아찔했다. 그의 향기가 입맛을 더욱 돋웠다.
‘아, 이제 진짜 못 참겠다. 진짜….’
왜 참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안정훈은 완전히 맛이 간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여기서 당해도 얘가 뭘 할 수 있어? 돈도 없고 부모도 있으나 마나야. 친구 같은 거 없어진 지도 오래됐고…. 얘는 아무것도 없어. 나밖에 없다고.’
뭔가를 너무 오래 참으면 어딘가 살짝 이상하게 되는 법이다. 안정훈은 왼손으로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목덜미부터 물어뜯으려고 했다.
“야! 묻잖아! 더럽다고!”
유인하가 기겁하여 그의 팔을 잡아떼려고 하는데 마침 그때 삐우우웅, 하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거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사람들 다니는 데서!”
경찰이었다.
*
“…….”
“…….”
집에 도착했다. 안정훈은 커다란 눈을 한 번 깜박했다. 유인하는 똥 씹은 얼굴이었다. 다행히 경찰서까지 가는 일은 없이 훈방 조치되었다.
“너 때문이잖아.”
유인하가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정훈이 그를 따라갔다. 안정훈의 집이었다.
“미안!”
현관에서 이어진 복도를 지나 거실로 가자마자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빛나는 창문이 크게 나타나자 유인하는 움찔하며 멈춰 섰다. 이런 걸 당연하게 여기지 못하는 자신에게 미약하게 화가 났다. 낮까지만 해도 화낼 기운도 없었는데. 그래도 하루 지났다고 마음이 조금 회복된 것일까? 아니면….
[난,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병신.’
고등학교 때의 관계에 매달리는 게 왜 하필 저 새끼인가? 고등학교 때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쭉 그는 유인하에게 병신 같은 호구였을 뿐이다. 자신이라면 같은 나이의 친구가 자신을 꾸준히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에 분개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 몰라. 병신에 이유가 있냐? 그냥 병신이지.’
내가 왜 저딴 새끼 때문에 고민을 해야 하는가. 다들 함께 나이를 먹으며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일은 서로 모른 척해주는 것이 나름의 예의라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싫다는 걸 어떡하는가.
이유가 어떻든 유인하의 말이라면 여전히 그런 짓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월감이 느껴진다. 역시 가소롭다.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불합격의 보상처럼 생각한다면 이것도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유인하는 놀란 기색을 완전히 지우고 별것 아니라는 듯 서울의 야경을 스치듯 보고는 부엌으로 갔다. 마치 자기 집처럼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 마셨다. 안정훈이 집안의 불을 켰다.
“별문제 없을 거야, 인하야. 그냥 이렇게 왔잖아? 응?”
“아, 나도 알아. 시끄러워.”
“그럼 괜찮은 거야?”
유인하가 화가 나지 않은 것에 안정훈은 기뻐했다. 안정훈은 아일랜드 식탁의 의자에 앉아 유인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열정적인 눈빛이었다.
“내일은 뭐 할까? 뭐 하고 싶어?”
“쇼핑하자며.”
“쇼핑할까? 뭐 사고 싶어?”
“다 사주게?”
“응! 당연하지!”
병신…. 유인하는 삥을 뜯겨서 좋아하는 안정훈의 싱글벙글한 얼굴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래, 그러자.”
유인하는 그렇게 말하곤 음료수병을 식탁 위에 놓고 기지개를 켰다.
“졸리네. 어제 얼마 못 자서.”
“자려고?”
유인하는 침실로 들어갔다. 이제 밤에도 더워 샤워를 하고 자야 할 것 같다. 안정훈이 따라왔다. 드레스룸을 지나 욕실 앞에서 유인하가 옷을 벗으려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디까지 따라오는 거야?”
“으, 응?”
유인하는 인상을 쓰고는 옷을 벗기 전에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샤워기를 트는 소리가 났다. 안정훈은 그 욕실의 앞에 서 있었다. 괜히 심장이 다 두근두근한다.
‘한 번 확 열면….’
그는 손잡이로 오른손을 올렸다. 잠그지 않은 것 같다. 어렸을 때도 한 번 이런 장난을 한 적이 있었다. 놀란 얼굴의 유인하를 보는 것은 언제나 재밌는 일이다.
‘이제 이런 장난을 쳐도 될 정도로 친해진 거…잖아?’
하지만 안정훈은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있는 욕실에서 씻고 다시 자신의 침실로 돌아와 드레스룸에서 잠옷을 고르며 괜히 얼쩡거렸다.
욕실의 문이 열렸다. 안정훈은 바로 고개를 잠옷으로 돌렸다. 얼른 하나를 꺼내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알몸으로 나오는가 싶다가 안정훈이 있는 것을 보고 목욕 가운을 입고 나왔다. 안정훈은 실망했다.
‘친구끼리 뭐 어때서.’
자기는 잔뜩 봐놓고. 안정훈이 꿍얼거렸다.
“치사하다….”
“뭐?”
유인하는 수건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안정훈은 상의를 꺼내다가 말고 침을 꿀꺽하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피부가 몹시 촉촉했다. 하얀 목과 쇄골도…. 안정훈은 저도 모르게 헐거운 목욕 가운 사이로 나온 그의 피부를 핥듯이 보고 있었다. 유인하가 그를 돌아보았다.
“야, 나 뭐 입으면 돼?”
“어? 어…. 이거?”
안정훈은 바로 고개를 확 돌리고 손에 있는 것을 불쑥 내밀었다. 그 묘한 어색함과 타이밍이 상대에겐 불쾌감을 일으킨다. 유인하는 인상을 썼다.
“너 입으려고 한 거 아냐?”
안정훈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크게 뜬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유인하는 그것을 받아 상의부터 입었다. 흐억. 안정훈은 그가 목욕 가운을 벗자 바닥에 떨어진 목욕 가운에서부터 발목과 종아리, 허벅지를 타고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엉덩이와 허리와 등…. 안정훈은 눈을 크게 뜬 채 오른쪽 검지의 마디를 꽉 물었다. 입에서 이상한 신음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씨.”
유인하가 짜증스러운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안정훈은 바로 안 본 척하고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갑자기 부산을 떨며 이 옷 저 옷을 뒤적거렸다. 유인하는 그런 그를 바보처럼 보았다.
“야, 바지는? 속옷은 새거 있어?”
“응? 어? 어? 어…. 잠깐만. 사, 사 가지고 올까?”
“그래.”
안정훈은 잠옷 바지를 벗고 다시 외출복을 입었다. 그리고 유인하를 마주 보았다.
“갔다 올게!”
“빨리 갔다 와.”
안정훈은 헐레벌떡 집을 나섰다. 유인하는 벗어 놓은 자신의 옷을 개어 구석에 두고 안정훈이 벗고 나간 잠옷 바지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저게 세튼데….’
유인하는 다소 꺼림칙한 얼굴로 자신이 입고 있는 실크 잠옷의 상의를 보았다. 유인하는 다른 잠옷을 찾아냈다. 상의를 바꿔 입었다. 안정훈이 돌아왔다. 그는 편의점 봉투를 두 개나 들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편의점에서 산 속옷이 잔뜩 들어 있었다.
“뭐야, 이거? 하나만 사 오면 되지.”
“어? 아니….”
안정훈의 기행에 유인하가 인상을 팍 쓰며 그의 얼굴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안정훈은 시선을 돌려 피했다.
‘병신 새끼.’
하지만 이렇게 병신, 병신 하면서도 결국 유인하와 안정훈이 10년 넘게 ‘우정’을 유지해온 건 결국 안정훈의 이 병신 같은 태도 때문이었다. 유인하에게는 언제나 넙죽 엎드리는 이 태도 말이다. 유인하의 말이라면 뭐든 듣고 뭘 갖다 바쳐도 절대 아까워하지 않고 기뻐하기까지 한다. 유인하는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그중에 자신의 사이즈에 맞는 것을 하나 꺼내 입었다.
안정훈은 자신이 그에게 준 남색 실크 잠옷이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인하는 회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안정훈은 자신의 옷을 벗으며 유인하를 힐끗힐끗 계속 보았다. 유인하의 하얀 다리가 헐렁한 회색 잠옷으로 가려졌다. 그리고 유인하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안정훈은 남색 잠옷의 바지를 입고 상의를 입기 전에 자연스럽게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가 스스로도 약간 놀랐다.
‘오랜만….’
생각해보니 옛날에도 유인하의 옷을 훔쳐 냄새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그 옷이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역시나 까먹고 있었다. 왜 이러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하 말대로 진짜 병신인가, 나….’
아냐. 난 그냥… 친구가 좋은 거야. 다시 실크 잠옷에 얼굴을 묻어 그의 체취를 찾아보았다. 별로 나지 않았다.
‘아까는….’
남산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단전이 지끈거린다. 그런 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확실히 유인하의 일이라면 자신은 정말 뭐든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유인하는 그를 뭐든 할 수 있는 남자로 만들었다.
‘인하가 우리 집에 두 밤이나 자다니.’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안정훈은 유인하가 입었던 남색 잠옷의 상의를 위에 입었다. 유인하가 입은 것과 색깔만 다른 같은 잠옷이었다.
‘오늘도 같이 자는 건가?’
그러면 또 잠을 설치게 될 텐데도 이상하게 엄청 좋다.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때보다도 훨씬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게 될 테다. 또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아무리 팔아버린 회사라지만 여전히 지분도 좀 남아 있고 일도 해야 했지만 이 김에 그냥 싹 정리해야겠다. 유인하하고만 지내는 것이다. 같이 밥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자고. 고등학교 때처럼, 아니, 고등학교 때보다 더욱 많이 얼굴을 보는 것이다.
‘나도 고시 공부할까? 그럼 인하랑 더 많이….’
아니, 인하가 그냥 고시 공부 그만두면 안 되나? 그만두고 싶은 것 같은데.
‘딱히 사명 의식 넘치는 것도 아니면서.’
그만두게 만들 방법은 없나? 안정훈은 유인하와 함께 지낼 생각을 하니까 괜히 웃음이 실실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정말로 유인하가 좋았기 때문이다.
‘하반기 채용 한번 해보라고 할까? 어차피 준비도 없이 해봤자 떨어질 거야. 내년 상반기도 하게 하고. 제일 어려운 곳만 쓰게 해야지. 회사 우습게 보는데 두 번이나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거야. 다시 고시로 돌아와도 1년 버리는 거고 마음잡기 힘들겠지.’
유인하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게 하는 것이다. 그의 프라이드가 그를 파괴할 것이다. 극도의 혼란이 그를 덮칠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이 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겠지.
그럴 때 자신이 왕자님처럼 그를 구해주는 것이다!
‘인하가 얼마나 좋아할까? 얼마나 고마워할까?’
그래서 내가 말하는 건 전부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생각만으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온몸이 오싹거렸다. 안정훈은 침실로 얼른 나갔다.
“인하야~!”
이미 침대에 누운 유인하가 침대로 올라오는 안정훈을 보고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유인하가 물었다.
“집도 넓은데 잘 데가 여기밖에 없어?”
“응. 수학여행 때 생각난다.”
안정훈은 약간 핀트가 나간 대답을 했다. 안정훈은 이불을 덮고 천장을 보고 누웠다. 바로 아차 하고 리모컨으로 집안의 불을 전부 껐다. 그리고 다시 이불을 잡고 천장을 보고 누웠다.
“더워?”
“아니.”
그리고 한참 있다가 안정훈이 다시 물었다.
“자?”
“어.”
“빨리 자.”
“그럼 자꾸 말 걸지 마, 이 새끼야.”
유인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정훈은 좀이 쑤셨지만 겨우 가만히 기척을 숨기고 누워 있었다. 그가 빨리 잘 수 있도록. 어차피 안정훈은 쉽게 못 잘 것이다.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안정훈은 흐읍, 하고 숨을 들이켜고 갑자기 리모컨으로 헤드등을 컸다. 그리고 옆으로 돌아누워 몸을 팟 일으켰다.
“인하야, 자?”
유인하는 대답이 없었다. 어젯밤에는 절망에 정신을 못 차리던 유인하라 마음이 아파 우는 그를 껴안고 안정훈도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비교적 평소와 비슷했고 아까는 안정훈에게 그런 짓을 시키기까지 했다. 그래도 괜찮을 리가 있는가. 그에게 자신이 필요할 것이란 생각에 자꾸 심장이 두근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제는 날 믿는가 봐, 인하가.’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가 시킨 짓을 한 것 중에 아까 그게 가장 잘한 짓 같다. 그가 고시 생활을 시작하고 자주 만나지 못해 초조하게 굴었던 건 패착이었던 게 분명하다. 자신답지 않게 유인하에게 상처가 될 소리를 하고 부딪치기도 했으니까. 역시 고등학교 때처럼 하는 게 맞는 것이다. 전과 달리 다른 사람들도 없고 유인하는 혼자다. 안정훈은 기뻐서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 너한텐 내가 있잖아. 다 괜찮아질 거야.’
아까 사는 것이 허무하다던 유인하가 생각났다. 마음이 찌릿찌릿 아팠다.
[그냥 기분 좋아지는 건 뭐든….]
“세상에서 제일 기분 좋게 해줄게….”
안정훈은 유인하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아까 실크 잠옷에 얼굴을 묻고 찾던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껴안고 잠들었다.
*
“아, 기분 나빠….”
유인하는 눈을 뜨자마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도 안정훈이 자신이 베고 있는 베개를 베고 자신을 껴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버릇이 최악이다. 유인하는 그를 퍽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푹 자고 있는지 제법 세게 맞았는데도 그냥 쿨쿨 잘 잔다.
‘여자랑 같이 자던 습관인가?’
이런 병신도 여자가 붙나…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안정훈은 평소 바보 같은 짓을 할 때보다 훨씬 그럴싸해 보였다. 입 다물고 가만히만 있으면 괜찮아 보이는 외모인 걸까? 유인하는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 그래. 이제 돈도 많으니까. 아니, 예전에도 형덕으로 잘만 먹고 살았겠지. 여자가 대순가.’
몇 명이나 사귀어 봤을까? 몇 번이나 해 봤을까? 이건 안정훈 같은 놈에게도 자신이 당연히 질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안 좋다. 아니, 이런 건 많이 한다고 이기는 게 아니잖아. 더럽기만 하지. 맞아. 그렇게 하나하나 따져보다가 스스로가 바보 같아졌다.
한강이 보이는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햇빛은 나이 잘 먹고 할 짓 없는 백수 둘을 비추고 있었다. 유인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아주 안 좋았다. 적어도 그게 짜증이 날 정도로 회복은 된 모양이었다.
‘그래, 돈 많아서 나한테 뭐든 해주고 싶다는데 다 받아먹자. 진짜 여기서 공부해?’
세상에 돈 많고 할 짓 없는 사람들 참 많다. 유인하는 창문으로 다가가 물끄러미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여느 전망대 못지않다.
‘그러면 딱히 알바도 안 해도 되고 공부에도 더 집중할 수 있고….’
자동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숨을 다시 쉬었다. 공부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 어이없게 떨어진 시험도 생각나고, 그러니까 또 그 전의 수많은 실수와 바보짓이 생각나고 자신이 한심하고 멍청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허무함이 가슴을 적셨다.
‘그거 되면 뭐? 그래도 이런 곳에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남자도 만날 수 없다.
‘…아직 찾고 있을까?’
가슴이 지끈거렸다. 이런 건 싫다.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별로 사랑 같은 거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바란 적은 더더욱…. 생각한다고, 노력한다고, 바란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이건. 그러니까 한시바삐 잊어버리는 게 이득이었다. 잊지 못하는 게 손해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마. 그래, 며칠 놀자. 안정훈이 뭐든 다 해준다는데. 그럼 마음이 좀 풀리겠지. 그다음 건 그다음에 생각하자.’
유인하는 욕실로 들어가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거실로 갔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며 짐짓 권태로운 듯 생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고양이짓을 할 때 이런 여유를 겪어 본 적이 있어서 그럴까. 겉보기엔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기분은 지옥을 헤매고 있었다. 여전히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 편히 있기로 했다. 그래서 마음 편히 있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왜?’
떨어질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내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건데도 지금 왜 이렇게 마음이 안 잡히는 것인가? 그런 자신이 한심하고 그래서 기분이 너무나 나쁘다. 무거운 한숨을 몇 번이나 쉬어도, 천국같이 비현실적인 창밖을 보며 기분을 풀려고 해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랑 뭐가 다르다고….’
유인하는 또 그때의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렇게 생각했다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또 쉬었다.
차라리 그 기억이 있는 뇌의 부분을 파내서 해결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지금의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기억임은 틀림없으니까. 그는 공부를 해야 했다. 그걸 못하게 하는 것은 전부 적이다.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공부도 하기 싫고, 하려고 해도 막막한 기분만 들 뿐이라 논리 충돌이 일어났다. 하기 싫은 것을 위해 유일하게 행복했던 기억마저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는 게.
‘그런 거 환상 같은 거니까. 내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야.’
유인하는 눈두덩을 손으로 잠깐 눌렀다.
“너 진짜 일찍 일어난다….”
그때 안정훈이 눈을 비비며 침실에서 나왔다. 거실에 앉아 있는 유인하를 보고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준비하고 나올게. 아침 먹으러 가자.”
이 기분을 떨쳐내고 마음을 잡을 때까지. 유인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있으면 적어도 자신이 조금은 나은 인간인 것처럼 느껴진다. 적어도 그보다는.
“그래. 빨리 나가자.”
오늘은 쇼핑을 하기로 했다. 이 유명한 L타워는 지하부터 지상 몇 층까지는 거대한 쇼핑센터이고 사무실도 있고 호텔도 있고 거주 구역도 있었다. 무언가를 즐기는 데 있어 돈만 있다면 여길 나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안정훈은 그를 데리고 조식을 제공해주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입주민과 호텔 이용객 전용인 모양이었다. 황금색을 기조로 한 화려하고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창밖으로 하늘과 구름, 그리고 지상이 보였다.
조식 뷔페는 음식의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기본에 충실했다. 뷔페식 고시 식당과는 뷔페식이라는 것 외에는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가격도 사람도 장소도.
가격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질 뻔했지만 놀란 것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안정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결제하고 안으로 들어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너무 별게 없는 것 같은지 유인하의 눈치를 봤다.
“나도 요리 같은 건 잘 못 해서… 오늘만 간단하게 괜찮지? 더 맛있는 거 먹고 싶으면 내일은 다른 데 가자.”
“그러든가.”
계란 프라이 하나도 위에 장식을 얹어 준다. 유인하는 그런 것 하나하나에 놀랐다. 이런 것을 겪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놀랐다는 티는 절대 내지 않았다. 자존심 상한다.
모든 음식이 별달리 특별한 것 없이 심심한 맛이었다. 유인하는 스스로가 언제나 소식을 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침치고는 굉장히 많이 먹고 말았다. 조금 후회했다. 속이 더부룩해질 것이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엘리베이터를 내려가 1층에 도착할 때까지도 속은 멀쩡했다.
‘착각이겠지?’
일일이 너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사 의심이 든다. 이 정도야 그렇게 크게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고양이로 그 남자의 집에서 살 때는 모든 것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했지만(심지어 빈 액자마저도 그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안정훈이 가진 것에는 별로 감명받고 싶지 않았다.
1층에는 L백화점의 명품관 에비뉴엘이라는 곳이 있었다. 모던하고 세련된 주거 공간이나 호텔 식당과는 또 분위기가 확 달랐다. 황금색을 기조로 조형물과 인테리어가 모두 휘황찬란했다. 유인하는 명품관 자체를 처음 와 봤기 때문에 눈이 절로 돌아갔다. 어째서일까. 이런 데는 처음 와보는 것인데도 아주 좋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못 올 곳에 온 것처럼 어색하기도 했고 그렇기 때문에 좀 짜증이 났다.
“뭐 필요한 거 없어?”
안정훈도 사실 돈 번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긴커녕 유인하의 얼굴만 쳐다보며 없는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하긴 얘는 여기 사는데….’
그런 형도 있고…. 유인하는 관심 없는 척 가게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보며(이 중에서 익숙한 거라곤 몇몇 유명한 명품 이름뿐이었다) 대꾸했다.
“글쎄…. 요즘 뭘 사러 다닌 적이 없어서.”
“옷 살까?”
유인하는 대학을 올라가 열심히 과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중가 브랜드의 기본 제품을 잘 관리하여 지금까지 입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얼굴이 잘생기고 비율이 좋아 뭘 입어도 잘 어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제에 맞지 않는 명품 같은 것은 골 빈 자들의 허세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저렴한 것을 입고 다니는 것은 없는 티만 날 뿐이다. 고등학교 때까지야 교복을 입고 다니느라 별 티도 나지 않았지만 대학부터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입고 다니는 옷은 무조건 주름 하나 없이 다림질해서 입고 다녔다.
그래도 티셔츠같이 금방 닳는 건 필요하다. 그때 샀던 옷들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갔다. 잘 관리를 하긴 했지만 슬슬 갈아야 할 것도 많았다.
“티셔츠나 트레이닝복? 그것 말고는 딱히.”
유인하는 그렇게 말했다. 안정훈은 싱글벙글 웃으며 유인하의 등에 가볍게 손을 대고 매장으로 안내했다.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고객님, 연예인 하셔도 되겠어요.”
“뭘 입으셔도 잘 어울리시네.”
“29살이요? 어머, 난 당연히 대학생 1, 2학년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나올 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갈아입고 나왔다. 쇼핑백은 전부 안정훈이 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다 뿌듯한 얼굴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유인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난 느낌이었다. 이렇게 팬티까지 싹 벗겨 먹는다는 것일까? 실제로 팬티까지 싹 벗겨졌다.
‘뭐야….’
피부에 닿는 느낌이 매우 이질적이다. 재질도 마감도 심지어 태도 뭔가 다르다. 유인하는 매장의 밖에서 유리문에 자신을 비춰 보았다.
“너무… 과하지 않나? 나 이런 것까진 필요 없는데….”
“역시 엄청 잘 어울린다~. 진짜 예쁘다. 딱이야.”
“그래도….”
유인하는 이런 쇼핑이 처음이라 얼떨떨해서 절대 놀란 티를 내지 말아야지, 하던 결심도 살짝 잊어버렸다. 유인하가 관심을 갖고 보는 건 전부 사줬다. 안정훈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돈 많이 벌기 잘했다.”
유인하는 진심이냐, 라는 얼굴로 한 번 그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는 안정훈이다.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게 낫다. 그 뒤로도 이리저리 오가며 온갖 걸 다 샀다. 유인하가 가진 모든 것을 안정훈이 오늘 사준 것으로 대체가 가능할 정도였다. 순식간에.
평생 이렇게 많은 옷을 사본 적도 없으니 아무리 비싼 명품 옷이라고 해도 크게 좋은지 나쁜지 모르고 밍숭맹숭 하던 유인하였으나(하지만 가격표는 절대 보지 않았다) 고급 필기류와 지류를 파는 매장에 들어서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유인하는 펜을 쥐고 반듯한 노트 위에 슥슥 써보았다. 보통은 이면지나 그가 살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제품을 사용하는 유인하였다. 이건 명품 매장이 아니라서 그런지 가격이 버젓이 걸려 있었다. 노트 하나에 3만 원이 넘었다.
‘미쳤다….’
티셔츠 한 장에 몇십만 원이라고 해봤자 감도 안 온다. 하지만 공부에 필요한 몇천 원짜리 노트마저도 살까 말까 많이 망설여본 유인하는 속에 착착 감겨오는 노트가 오히려 탐났다.
‘그래, 노트 정도야. 지금 입고 있는 게 더 비싸겠지. 다 사준다잖아? 사자.’
유인하는 그 노트를 뭉텅이로 들었다. 마음에 든 펜도 말이다. 안정훈은 이것도 당연히 결제했다. 그렇게 정말로 자신의 것이 되니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저기요.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갑자기 누가 유인하에게 말을 걸었다. 안정훈은 계산을 하고 있었다. 유인하는 네? 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 옷 너무 예쁜데…. 혹시 어디서 사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쇼핑을 하러 온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유인하가 입고 있는 티셔츠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거 밑에 **시아가라고….”
이거 엄청 비쌀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흐릿하게 대꾸하니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아, 역시. 어쩐지 너무 예쁘더라구요. 나도 사야겠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유인하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그녀가 유인하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근데 진짜 잘생기셨어요. 쇼핑 즐겁게 하세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총총 가버렸다. 유인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티셔츠를 손바닥으로 한 번 만졌다.
‘이거 진짜 예쁜 건가 보다.’
그러니 이것도 은근히 기분이 좋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부러워… 하는 건가?
“가자.”
안정훈이 돌아왔다. 유인하는 그가 들고 있는 많은 쇼핑백을 보았다. 좀 더 기분이 좋아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쇼핑을 하는 건가?’
이만큼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들밖에 없었다.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아침까지만 해도 정말 기분 안 좋았는데…. 그들은 오전 내내 쇼핑을 하고 다녔다. 점심을 먹을 때쯤이 되자 배가 파먹을 듯이 고팠고 그들은 쇼핑백을 집에 두고 다시 내려왔다.
“요새 입맛 없다고 했지? 여기 진짜 맛있대.”
역시나 L타워 안에 있는 음식점이었는데 서울이 훤히 보이는 독실에 앉아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 종업원이 아주 친절한 태도로 음식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다른 것보다도 그의 그 태도가 유인하에게 다시금 그 어색한 느낌을 주었다. 여기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은, 이방인의 느낌.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게 싫어서 아주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그는 아주 멋지게 생긴 잔에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노란색 와인을 따라주었다. 유인하는 본의 아니게 굳은 얼굴이고 안정훈은 여전히 싱글벙글했다.
“너무 많이 다녀서 다리가 다 아프다, 그치?”
“쇼핑은 원래 30분 내로 하는 거야.”
“네 말이 맞아.”
한식인데도 한 접시, 한 접시 코스로 나왔다. 작게 자른 흰 살 생선이 가장 첫 접시였다. 유인하는 원래 흰 살 생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퍽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피타이저로 나온 생선 요리는 지금까지 먹어봤던 그 어떤 흰 살 생선 요리보다도 부드러워 그냥 그대로 입안에서 녹아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 표현이 정말 가능한 것이었던 것이다. 직접 먹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다음 접시도, 그다음 접시도 유인하의 입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런 건 유인하 평생 입에 대본 적도 없는 음식이었다. 분명히 도미라든가, 소고기라든가, 두부라든가 먹어본 것이 분명한 식재료들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분명 처음 먹는 음식이었다. 그런데도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올 정도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환상적인 맛이라는 것도 정말 있는 거였어….’
표정 관리는 예전에 실패했다. 유인하는 이미 맛있다,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고 있었다. 그리고 다 먹고 나서는 안정훈의 싱글벙글한 얼굴을 발견했고 그제야 표정이 약간 굳었다.
“맛있었어?”
“어…. 진짜 맛있네.”
“다행이다.”
계산도 앉은 자리에서 했다. 스치듯 계산서를 보니 유인하가 평소에 먹던 음식의 가격에 0을 두 개 더 붙인 것보다도 더 비싸다. 안정훈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밥까지 먹으니까 더 피곤하다. 여기 스파도 좋은데 갈까?”
“스파? 바로? 아무것도 안 챙겨가도 돼?”
이런 곳에 목욕탕도 있단 말인가. 유인하는 안정훈을 따라 스파라는 곳을 갔다. 여기도 역시나 유인하가 지금까지 가봤던 목욕탕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공중목욕탕인데 한 명 한 명 따로 앉아 머리를 말릴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칠이 다 벗겨지는 싸구려 라커도 아니다.
‘똑같은 목욕탕인데….’
유인하는 옷을 다 벗고 눈만 굴려 천장부터 벽까지 한 번 스윽 훑어보았다. 그동안 안정훈은 틈만 나면 유인하의 알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래도 유인하가 돌아보면 시치미를 뚝 떼고 웃었다.
“마사지까지 다 받고 나오자. 저녁엔 뭐 하지?”
“또 뭐 해?”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비치된 목욕용품조차도 전부 오가닉 어쩌고라고 영문명이 박혀 있었다. 이 좋은 곳에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아 무슨 전세라도 낸 것 같았다. 마사지사가 세신부터 마사지까지 책임지고 해주었다. 세신도 마사지도 처음이라 조금 어색할 줄 알았는데 너무 시원하고 좋았다.
밖에 나왔을 땐 둘 다 얼굴이 반들반들해졌다. 안정훈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혈색이 엄청 좋아졌어, 인하야.”
“어….”
“돌아서면 밥 먹을 시간이네. 저녁 먹을까?”
이게 돈 많은 백수의 생활인가…. 저녁은 양식이었다. 최고급 숙성 어쩌고라는 소고기를 잘라 한 입 먹었을 때야 비로소 유인하는 자신이 단백질이 무척이나 필요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았다. 소고기마저도 입에서 살살 녹았다. 한 입 딱 먹는 순간 입에서 이상한 신음이 나올 뻔했다.
“맛있지?”
“넌….”
이런 거 매일 먹냐? 그렇게 물어볼 뻔했다.
부자라고 세 끼 먹을 거 삼십 끼 먹는 것도 아니고, 때를 백 번씩 벗기는 것도 아닐 테다. 그렇게 생각하며 기 안 죽으려고 종일 신경을 썼다. 아니, 기죽을 이유가 뭐가 있는가. 어쨌든 유인하는 고객이고 그래서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니 절대 기죽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 기묘한 어색함, 이질감이 괜히 유인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런데도 내내 불쾌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공간은 넓고 화려했다. 물건은 파는 것부터 안 파는 것까지 전부 고급품에 손에 닿는 느낌부터 다르다. 사람, 사람이 가장 다르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외모가 아예 달랐다. 모두가 웃는 얼굴에 다들 너무나 친절했다.
이것이 진정한 호화로움이었다. 고양이가 되어 고작 고급 사료와 간식을 먹고 궁전 같은 집에서 갇혀 사는 건 말 그대로 부잣집 고양이의 삶이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인간의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이건 정말….
‘이게 진짜야. 이게 정말 가진 사람들의 삶이야.’
손만 뻗으면 곧바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하고 싶은 건 전부 할 수 있고 하기 싫은 건 전부 남이 해준다. 눈에 보이는 것 무엇 하나 불쾌한 게 없다. 전부 좋은 것뿐이다. 모두가 친절하고 그를 중요한 사람으로 대우해줬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바라 마지않던 삶이 아니던가. 유인하는 그게 너무나 좋았다. 원하던 대로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
백수가 바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안정훈은 또 어이없게 2차 시험에 떨어지고만 유인하를 위로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첫날을 쇼핑으로 시작한 둘은 다음날 잠실 구장에서 야구 경기를 관전하고, 그다음 날은 북한산을 등산하고, 그다음 날은 전시회와 연극을 보았고 또 그다음 날은 난생처음 오페라를 보기도 했다.
아침엔 시큰둥하고 귀찮아하던 유인하도 저녁이 되면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해본 적이 없으니 말만 들었을 땐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직접 그 현장에서 겪어보면 좋은 것이다. 그런 메인 이벤트와 별개로 미식과 스파 마사지는 매일매일 이어졌다. 유인하의 혈색이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아쿠아리움에 갈 즈음엔 유인하도 아침부터 내심 하루가 기대되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물고기가 사방에 잔뜩 널려 있는 걸 보고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흥분했다. 안정훈은 그런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다 부른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인하랑 뭐 할까?’
앞으로도 이렇게만 살면 소원이 없겠다. 매일매일 그에게 무엇을 해줄까,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안정훈은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그리고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5성급 호텔에서 며칠 동안 지내며 온갖 물놀이를 다 하고 산해진미를 전부 찾아 먹었다. 유인하는 제주도도 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몇 년 동안 웃는 법도 모르고 살았던 유인하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돌아왔다.
“하하, 병신~!”
유인하는 안정훈이 윈드서핑 보드에서 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렇게 놀렸다. 둘 다 처음 배우는 것이었는데, 뭐든 배우는 게 빠른 유인하였다.
“인하야, 너 진짜 잘한다. 최고야.”
안정훈은 그의 면박에도 구김 없이 웃으며 언제나처럼 찬사를 날렸다. 그가 웃으면 안정훈도 좋았다.
강렬하게 타오르는 태양이 푸르른 바다를 반짝이게 했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백사장에서는 비키니를 입은 한 무리의 여자들이 비치 발리볼을 하고 있었다. 함성과 웃음, 박수갈채로 왁자지껄하다. 사방에서 에너지가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활기가 아름다운 바닷가를 더욱 밝게 밝히고 있었다.
“와, 진짜. 인하 씨는 재능이 있는데? 계속 배울 생각 없어요?”
몇 시간의 강습 끝에 다들 뭍으로 돌아왔다. 구릿빛으로 탄 중키의 남자가 감탄한 얼굴로 유인하를 보았다.
햇볕에 붉게 달아오른 피부, 밝은색의 눈동자,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과 눈썹과 속눈썹, 새빨간 입술.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유인하의 하얀 얼굴은 웃지 않아도 전에 없이 밝았다. 그에게도 젊음의 적절한 표정이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수려한 미모가 더욱 빛나 주변 사람들의 눈길을 잔뜩 끌었다.
“감사합니다.”
“공부하느라 바빠서 안 되려나?”
“으음, 시간 내면 될 것 같기도 하고….”
“서울에도 하는 데 있어요. 어차피 서로서로 다 아니까.”
“생각해볼게요.”
원래 유인하 정도로 잘생긴 남자는 가만히 있어도 남녀 상관없이 말을 엄청 걸어온다. 게다가 유인하는 젊고 학벌도 좋다. 친해지고 싶어 하고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예전부터 익숙한 것이었다. 윈드서핑의 1회 강습료는 유인하가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는데도 유인하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이런 것쯤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투로 말했다.
“이제 어디 가요? 저녁에 일정 없으면 다 같이 바비큐 해요. 우리 게스트 하우스에 묶는 사람들도 다 젊은 사람들이니까 같이 놀면 재밌잖아요. 외국인들도 많아요.”
“아, 그럴까요?”
유인하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 찾았다. 아래위로 래쉬가드를 잘 챙겨 입고 있는 유인하와 달리 안정훈은 헐렁한 수영복 바지 차림이었다. 그도 위에 다른 걸 입고 있었는데 벗어버렸다.
정확하게 키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190은 넘을 것이다. 거기에 어깨가 엄청 넓고 근육질이라 자칫하면 다른 사람에게 위압감을 줄 법한데도 원체 선하고 착한 인상이라서 다들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키가 작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몸을 숙여주는 그의 태도가 특히나 순하게 느껴진다.
“에이, 힘이 이렇게 좋은데 왜 이렇게 못해?”
“운동한 보람이 없네. 이거 다 뻥이잖아?”
같이 강습을 받던 대학생들이 그를 둘러싸고 놀리고 있었다. 역시 다들 그가 만만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야, 안정훈.”
그런 그를 구해준 건 유인하였다. 약간 다가가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를 놀리던 대학생들은 유인하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기도 하고 약간의 어려움을 느끼며 말을 멈췄다. 작은 강아지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커다란 레트리버 같던 안정훈은 유인하를 보자 반짝 하고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인하야.”
안정훈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대학생들에게 얘기 도중에 빠져서 미안하다는 듯 굽신굽신 인사를 하곤 유인하에게 얼른 다가갔다.
“옷은 왜 벗어?”
“아까 떨어지면서 찢어졌어.”
이 커다란 놈이 창피하다는 듯이 어깨를 좁히며 두 팔로 빵빵한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팔도 근육질에 배도 등도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건장한 남자라 그러는 게 더 웃겨 보였다. 안정훈은 구해달라는 듯 불쌍한 눈빛으로 유인하를 보았다. 유인하는 지속적으로 ‘병신….’ 이라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해가 안 된다.
‘아니, 벗으라고 하면 도시 한복판에서도 벗는 놈이 이건 부끄럽다고?’
이해가 안 되는 건 유인하만이 아닌지 강습을 해주던 강사도 안정훈의 등을 팡팡 쳤다.
“허리 펴, 허리 펴. 아니, 이렇게 몸이 좋은데 당당하게 보여줘야지.”
“그래도….”
안정훈은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들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강사가 말했다.
“나 같으면 맨날 벗고 다녔다.”
“형은 안 이래도 맨날 벗고 다니잖아요.”
다른 강사가 지나가다가 그를 구박했다. 그러자 중키의 남자 강사가 버럭 했다.
“에이, 내가 키가 작아서 그렇지 어디 빠지지는 않는다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유인하와 함께 등을 부딪쳤다는 안정훈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래도 옷만 찢어지고 피는 안 나네.”
아주 약간 껍질이 일어났을 뿐 피도 나지 않았다. 강사는 구급상자를 가져와 소독을 하고 약을 발라 주었다.
“호텔로 바로 갈까?”
유인하는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왔지만 안정훈은 오늘 바다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가져온 옷이 없었다. 안 한다더니 갑자기 같이하겠다고 나선 건 안정훈이었다. 벗고 있는 게 영 부담스러운지 안정훈이 그렇게 말하자 유인하가 대꾸했다.
“형이 여기 게스트 하우스에서 바비큐 하는 데 오래. 외국인들도 많대. 가자.”
“나 이렇게 가라고?”
“뭐 어때? 너 벗는 거 좋아하잖아.”
“아닌데….”
그건 네가 벗으라고 할 때만 좋아하는 거지. 안정훈은 노출증 환자가 아니다. 하지만 유인하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했다. 그들은 친해진 서퍼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는 야외에서 바비큐를 즐겼다. 여자들도 외국인들도 잔뜩 있어 무슨 해외에 놀러 온 것만 같았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유인하는 원래 인싸 중에 인싸였기 때문에 ‘나는 잘났다’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필요할 땐 친근하게 굴고 유머 감각도 좋아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지니 안정훈은 옛날처럼 자연히 한두 발자국 먼 곳에서 그를 보고 있어야 했다. 안정훈은 맥주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그를 힐끔거리며 관찰했다.
그때 유인하에게 전화가 왔다. 휴대폰 화면을 본 그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안정훈은 바로 그의 휴대폰 화면을 훔쳐보았다. 유인하의 어머니였다. 유인하는 바로 화면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여보세요.”
-인하야, 전화 받을 수 있니? 학원이야?
“왜.”
-아니…, 진하가 너 시험 발표 났을 거라고 해서….
유진하는 유인하의 동생이었다. 바비큐를 중심에 두고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것만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유인하는 파도가 오고 가는 모래사장의 경계에 서서 그 무늬를 보고 있었다.
어차피 그냥 지나갈 순 없는 일이었다. 유인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떨어졌어.”
-…….
그러니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깐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작게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인하야…. 엄마가 전에도 말했지만 이제는 정말….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비굴하게 들렸다. 오늘도 그랬다.
“알았어.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어머니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인하는 그렇게 말했다.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좋다는 것을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웃고 있었다. 그런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걸 지금 깨달았다. 그리고 기분이 아주 안 좋아졌다. 뭔가, 필요 이상으로.
‘왜?’
기분이 나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나쁠 일은 아니다. 발표 난 지가 언젠데. 그런데도 심장이 돌덩이가 되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바닥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깊은 바닷속으로.
실망했을까.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실망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상대에게 먼저 실망한 것은 유인하였다. 그녀가 실망스럽다는 티를 조금이라도 낸다면 유인하는 화를 낼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어머니는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엄마도 너한테 해주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너도 알잖아. 진하도 다 대출받아서 학교 다니는 거고 생활비도 과외해서 벌고 있잖니. 진하는 이제 집에도 돈 보내주는 거 알지? 이번에 너희 형이 또…. 진하한테도 미안한 게 많아. 엄마 아빠한테 너만 있는 게 아니잖아.
“알았어.”
그녀가 실망 대신에 미안함을 표했을 땐 안심했다. 하지만 변명이 길어지니 짜증이 났다. 유인하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고. 다른 걸 따질 생각도 없었다. 어머니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인지 전화기 너머에서 우물쭈물 대는 것이 느껴졌다. 유인하는 한숨을 짧게 쉬고 말했다.
“할 말 없으면 끊을게.”
-정말이야, 인하야. 엄마가 해주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영하 여자친구가 임신해서 결혼을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영하는 장남이잖아. 결혼할 때 전세금 정도는 어떻게든 엄마 아빠가 해주려고. 애는 키워야 하잖아.
더 변명을 하고 싶었던 어머니는 안 하느니만 못한 이유를 들먹였다. 자기 입장에서는 장남을 우선하는 게 너무 당연한 것이고 다른 가족도 자신과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유인하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냥 모르는 것이다. 본인이 가족과 스스로를 동일시해서 구분하지 못하니 다른 가족들도 그럴 것이라고, 혹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걸 아는데도 유인하는 불쑥 쏘아붙였다.
“그 여자는 형이 예전에 다른 여자도 두 명이나 임신시킨 건 알아? 형 지금 하는 일 없는 건 알고?”
-인하야, 넌 왜 항상 형을 그런 식으로 말하니…. 형제가 사이좋게 지내야지. 엄마 또 마음 아프게…. 좋은 일이잖아. 영하도 이 기회에 자리 잡을 거야. 축하해주면 안 될까?
“하긴 내가 그 여자 걱정을 왜 하냐. 다 끼리끼리 노는 건데.”
-인하야….
엄마에게 신경질을 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형이 친 사고를 엄마가 필사적으로 수습하는 것은 언제나 봐오던 그림이었다. 그래서 어렸을 땐 형이랑 많이 싸우기도 했다. 엄마는 항상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순식간에 많은 의심이 지나갔다.
그 전세금이란 것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그걸 굳이 왜 지금 유인하에게 말하는 것인가. 정말 아무런 의도 없이 한 말인가. 어렸을 때부터 그 흔한 학원 한 번 보내주지 않았으면서 형이 사고 칠 때마다 마법같이 돈이 나온다. 그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냥… 엄마는 생각이 없어서 그래.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거고. 어리석어서 그런 거야.’
또 그렇게 넘어가려고 했다. 앞으로 알아서 생활비를 버는 건 이미 몇 달 전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지금에 와서 이렇게 울컥하는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유인하는 견딜 수가 없어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번 2차 시험도 분명히 떨어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 길바닥에서 그런 추태를 부릴 정도로 힘겨웠다. 지금 생각해도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떨어질 걸 미리 알고 있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런 주제에 지금은 제주도 같은 곳에 와서 한심하게 놀면서 시간을 버리고 있다.
‘아니야. 이건 잠깐 쉬려고….’
쉰다고? 무슨 자격으로? 또 변명이나 하는 거야? 다시금 거대한 혼란이 유인하를 덮쳤다. 고양이와 사람을 오가며 유인하는 그동안 붙잡고 있던 뭔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잠하다가 이해할 수 없는 시점에 사람을 흔들었다.
그는 이러고 있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합격할 때까지 공부가 아닌 그 어떤 다른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독서실 총무를 구하기로 한 것도 아직 구하지 못했다. 지금 가장 급한 건 내년까지 버틸 수 있는 돈이었다.
‘아니, 그건 정훈이 집에서….’
그걸 어떻게 믿어? 그러다가 중간에 부담스럽다고 나가라고 하면? 그러면 또 페이스를 완전히 잃게 된다. 그러면 내년도 떨어지게 될 수도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불안이 온몸을 지배했다. 뭔가 완전히 잘못된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뭐든 해야 할 것만 같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뭐가 맞는지 틀리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그게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마치 발이 모래에 붙잡힌 것만 같다.
무력했다. 자신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질렀던 모든 실수가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만 같았다. 스스로가 실망스럽기만 해서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유인하는 그런 자신의 느낌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아니야. 이런 건 잠깐이야. 이 정도 여유는 즐길 수 있어. 난 그럴 자격이 있어. 안정훈을 봐. 여전히 날 대단하게 보잖아. 고양이가 된 건 내 잘못이 아니야. 0.5점 정도는 충분히 올릴 수 있어. 다 점수 많이 올렸잖아. 2달이나 공부를 안 하고 본 건데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잘 알고 있잖아. 남들은 몰라도 난 알고 있잖아. 괜찮아.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난 할 수 있어.’
포기한 적 없어. 난 할 수 있어. 알고 있잖아. 난 할 수 있어. 유인하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그렇게 마음을 추슬렀다. 좀 괜찮아졌다.
‘그래, 감정에 휘둘리지 마. 그런 건 잠깐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컨트롤 할 수 있어.’
유인하는 바비큐 장소로 돌아갔다.
“뭔데 전화를 이렇게 오래 했어?”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뭐야, 마마보이야?”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그렇게 농담을 걸었다.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에이, 인하 형 정도로 생기면 내가 엄마라도 맨날 전화하겠다. 우리 아들 잘 있나~.”
“하하, 생각보다 귀찮아.”
유인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농담하며 웃었다. 이런 거짓말은 이미 의식도 못 할 수준의 습관이 되고 말았다.
*
그렇게 자정을 넘겨 파티가 끝났다. 다들 숙소로 삼삼오오 돌아갔다. 유인하와 안정훈도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섰다. 걸어가기로 했다.
몇몇 사람들은 유인하와 안정훈이 머무는 호텔까지 따라가고 싶어했지만 그건 거절했다. 여자들도 있었는데 서핑 강사를 하는 남자들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얼굴로 유인하와 안정훈을 보았다.
안정훈도 은근슬쩍 유인하에게 물었다.
“아까 그 여자애들… 너랑… 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괜찮아? 안 아까워?”
전화가 오기 전보다는 별로지만 그래도 기분이 제법 회복된 유인하였다. 그의 눈치 없는 질문에 짜증스럽게 인상을 쓰고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뭐가 아까운데?”
“아니…. 너 그동안 여자 못 만났을 거 아냐…. 그래서….”
안정훈이 우물쭈물 말했다. 병신 같다. 유인하는 그 시점에서 기분이 다시 잡쳤다.
“누가 내가 여자를 못 만난대? 안 만난 거지! 마음에 드는 여자 있었으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해. 누가 너한테 그런 걱정해 달랬냐?”
유인하가 신경질을 팍 냈다. 안정훈의 눈을 그대로 1초 더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안정훈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유인하는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하고 싶으면 너나 많이 해라. 왜? 방 비워줘?”
“아, 아니!”
안정훈이 얼른 대꾸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미안하고 신경 쓰여 안절부절못하는 티를 팍팍 내며 그의 눈치를 봤다. 안정훈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그럼… 넌 어떤 여자 스타일 좋아하는데? 예전엔 윤지민 같은 스타일 좋다고 했잖아.”
안정훈이 연예인의 이름을 하나 들먹였다. 유인하가 대답했다.
“지금도 그런 스타일이 이상형이야.”
안정훈이 중얼거렸다.
“착하고 청순하고 아담한 스타일이 좋다고 했었지…. 지켜주고 싶은….”
“알면서 왜 물어봐?”
유인하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안정훈은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간 바뀌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안정훈은 이유 없이 시무룩한 얼굴로 커다랗고 넓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유인하를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
‘착하고 청순한 것까지는 어떻게든 하면 되려나?’
착한 건 이미 착한데. 청순? 청순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아담? 아담은…. 안정훈은 저도 모르게 그런 고민을 심각하게 하고 있었다. 전에도 커서 문제라고 했지. 안정훈은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유인하보다도 한 뼘은 컸다.
“으음….”
안정훈은 잠깐 어깨를 움츠리며 그런 소리를 내다가 순간 정신을 차렸다. 아니, 유인하가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이 무슨 상관이라고.
‘우리의 우정을 위해선 아직 여자는 없는 게 좋아. 아니, 여자 같은 건 절대….’
그냥 이대로만 있을 수는 없을까? 너무 좋은데…. 안정훈은 자연스럽게 카드키로 호텔방 문을 열고 들어가는 유인하의 뒤통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여자를 마다할 것 같은 스타일은 아니잖아? 아까 여자애들은 솔직히 그렇게 예쁜 건 아니었지…. 윤지민 같은 스타일?’
안정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유인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물놀이를 오래 했고 지금은 늦은 시간이기도 하니 살짝 피곤한 기색이 있었다. 유인하는 기지개를 켰다. 안정훈은 닫히는 문을 잡고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창밖이 온통 새카맣다.
“나 먼저 씻는다.”
“응.”
유인하는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안정훈은 다른 욕실을 썼다. 빨리 씻고 나왔다. 유인하는 언제나 씻는 게 늦는다. 안정훈은 창가에 앉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안정훈은 휴대폰의 잠금을 해제하고 그것을 읽어 보았다.
<아 씨발 교수 새끼 개새끼 죽여버리고 싶다. 제주도라고? 나도 간다. 씨발 씨발>
김성우였다. 문자에 온통 욕뿐이었다. 안정훈은 깜짝 놀라서 답장을 얼른 보냈다.
<오지 마>
<왜? 나 이대로 있다간 우리 교수 죽인다. 너 내가 살인하는 꼴을 기어코 봐야겠냐? 친구가 되어 가지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이 배신자 새꺄 혼자 노니까 좋냐? 그래서 조옹나 죽어 나가는 친구한테 제주도에서 논다고 자랑질을 그렇게 한 거냐 이 개새끼야>
<꺼지라고 미친 새끼야 오면 내가 널 죽인다>
안정훈이 얼른 답장을 보냈다. 평소답지 않게 아주 강경한 어조였다. 그러자 약간 늦게 답장이 왔다.
<뭐야 이 새끼? 여자랑 있냐? 혼자 갔다고 했잖아? 나 뱅기 이미 끊음>
안정훈은 욕실을 한 번 힐끔 보았다. 그리고 두다다 문자를 보냈다.
<인하랑 같이 있는데. 인하 너 싫어함.>
<뭐? 유인하? 유인하 새끼랑 같이 간 거? 근데 왜 거짓말? 그 좆 같은 새끼 아직 안 죽었냐? 붙었다는 소리 없는 거 보니까 올해도 떨어진 거 아님? 붙음?>
그리고 안정훈이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다시 김성우가 문자를 이어 보냈다.
<잘됐네. 또 종나 재수 없어지겠네 유인하 새끼. 어쨌든 나 감>
그 뒤로 안정훈이 오지 말라고 메시지를 한 50개 정도 보냈다. 하지만 그는 확인도 하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아, 씨….”
“왜?”
안정훈이 인상을 팍 쓰고 짜증스러운 소리를 내자 욕실에서 막 나온 유인하가 그렇게 물었다. 안정훈은 바로 안색을 바꿨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유인하는 목욕 가운을 입고 나와 호텔에 있는 화장대 앞에 앉더니 차분히 스킨케어 제품을 발랐다. 그냥 호텔에 비치된 제품을 쓰는 것뿐인데도 뭔가 특별한 것만 같다. 손바닥과 얼굴의 피부가 닿으며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얼굴이 촉촉하고 더 예뻐 보인다.
“흡….”
안정훈은 잠깐 모든 것을 잊고 숨을 멈춘 채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머리카락은 수건으로 닦은 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작고 하얀 얼굴은 아직도 아까의 햇볕 때문에 조금 빨개져 분홍색이다. 얼굴에 로션을 다 바른 유인하는 바디로션을 손에 잔뜩 짜서 팔부터 바르기 시작했다. 그다음에 목을 바르고 목욕 가운 안으로 손을 쑥 넣어 가슴과 배를 발랐다. 안정훈은 그것을 화장대의 거울을 통해 빤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유인하는 화장대 앞의 스툴에 앉은 채 다리를 벌렸다. 목욕 가운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며 그의 하얀 허벅지가….
“뭘 봐?”
유인하는 다리에 로션을 바르다 말고 갑자기 홱 고개를 돌렸다. 유인하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걸까. 가끔씩 이렇게 감이 좋다. 안정훈은 시선 처리를 하는 타이밍이 늦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며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흥분감에 눈을 벌겋게 뜨고 있다가 허둥지둥거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 저! 내일 김성우 온대!”
안정훈은 얼른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이건 자주 잘 먹혔다. 유인하가 인상을 썼다.
“뭐? 왜?”
“여름 휴가 같은 거겠지…?”
고시생과 백수에게 휴가란 각기 다른 쪽으로 요원한 단어다. 안정훈은 유인하와 알기 전부터 김성우와 친구였다. 유인하도 그가 김성우와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그래. 둘이 놀아, 그럼.”
“가, 같이 놀자. 오랜만에 다 같이 좋잖아?”
안정훈은 유인하가 김성우를 싫어한다는 걸 버젓이 알면서 그렇게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취급을 안 했다. 재미도 없고 자주 분위기를 파토 내며 매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인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난 그 새끼 재미없어서. 잘 됐다. 안 그래도 집에 가야겠다 싶었는데. 너희 둘이 잘 놀아라.”
“아, 아니!! 인하야, 가지 마. 내가 못 오게 할게.”
안정훈은 항상 하던 대로 얼른 그렇게 대꾸했다. 유인하는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얼굴로 먼저 침대에 누웠다.
“불 꺼.”
“어….”
안정훈은 불을 끄고 유인하의 눈치를 엄청 보았다. 자신의 침대에 누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하야, 화났어?”
“아니.”
화났으면서. 안정훈은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가만히 천장을 보고 눈을 끔벅거렸다. 낑낑거리는 레트리버 같다.
‘병신.’
또한 유인하는 그의 병신 같음에 안도했다. 그의 하찮음을 볼 때마다 긴장이 약간 풀어진다. 안심이 된달까. 어쨌든 그동안 정말 즐거웠다. 유인하는 자신이 윈드서핑을 좋아한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오늘 처음 해봤기 때문이다.
‘19일….’
유인하는 오늘의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마음을 잡을 때까지만 안정훈과 어울리겠다고 마음먹은 유인하였다. 처음엔 한 사나흘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벌서 12일이나 흘렀다.
‘딱 2주일만 채울까?’
아까 엄마와 통화를 할 때만 해도 당장 서울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자려고 좋은 호텔 침대에 누우니 또 그런 생각이 났다.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을 통으로 날렸는데도 고작 영어에서 0.5점이 모자랐을 뿐이다. 자신은 작년부터 이미 합격권이었다. 내년 시험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지금 이거 조금 논다고 큰일 날 리가 없다.
‘그래, 놀 때는 공부하는 거 생각하지 마. 기분만 나빠. 내일도 윈드서핑 할까? 그러자.’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억지로 하는 조깅이나 체조와는 다르다. 자신이 얼마나 건강하고 강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거기에 다른 건강한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것도 다른 무엇에 비할 바 없이 재밌는 일이다. 이런 건 오랜만, 아니, 솔직히 이런 건 대학 생활 때보다도 질적으로 훨씬 좋았다.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그 돈은 유인하의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기분이 살짝 안 좋아졌다.
‘김성우?’
그가 와서 지금의 유인하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뻔했다.
‘젠장….’
그러자 다시 좋아졌던 기분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안정훈이 병신같이 유인하에게 삥을 뜯긴다고 안정훈에게 대놓고 뭐라고 하곤 했다. 하지만 그 비난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분명했다. 유인하는 ‘어쩌라고?’라는 눈빛으로 말밖에 없는 그를 비웃었다. 그러면 그가 굴욕감을 느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만난 건 몇 년 전인데 그때의 그는 고시 생활을 하고 있는 유인하를 무척이나 고소하게 생각했다. 아무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제는 좀 비빌 만한가 하고 쳐다보는 그 징그러운 눈빛. 물론 그때의 유인하는 고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그런 그를 고등학교 때와 똑같이 무시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 볼 때부터 유인하를 싫어했다. 물론 유인하도 똑같이 싫어했다. 그는 의사가 된 자신이 지금의 유인하보다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언제나 주제 파악을 못 했다. 별것도 아니면서 욕심만 많고 그래서 불평불만만 가득한 놈이었다. 벌써 꼴 보기 싫다. 마주칠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씨발…….’
분명히 너무나 피곤하고 바로 자려고 했는데, 잘 수가 없었다. 순간 불안이 확 몰려왔다. 유인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에 가라앉아 몸이 굳어 버릴 것만 같았다. 창가로 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바다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괜찮아. 2주 정도는 괜찮아. 이런 건 처음이잖아. 좋잖아.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런 거 다 하고 나면 분명히 미련 없이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거야. 괜찮아.’
유인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불안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예전처럼 말이다. 하지만 올해 내내 그랬듯 불안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났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내가 이 정도도 못 해?’
고작 2주의 여유도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를 할 때는 스스로에게 그 어떤 여유도 없다고 다그치고 이럴 땐 여유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왜 마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제발….’
또다시 혼란과 그에 따른 불안으로 심장이 마구 뛰고 식은땀이 흘렀다. 유인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인상을 팍 썼다. 창문에 입김이 서렸다 사라졌다.
그때 머리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닿았다. 묵직한 느낌이 익숙하다. 유인하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지금 필사적으로 떠올리려고 노력하던 손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리에 다른 손이 스륵 둘러 오자 그게 자신이 생각하던 남자의 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당연한 거지만.
“인하야.”
“뭐야, 징그럽게? 놔.”
유인하는 팔꿈치로 그를 밀어냈다. 안정훈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
“뭐가? 아, 놓으라고.”
안정훈은 주저하다가 떨어졌다. 유인하는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팍 쓰고는 그를 더 확 밀어내고 자신의 침대로 갔다.
“잠이 안 와? 맥주라도 한 캔 할래?”
안정훈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 맥락이 없던 그도 긴 세월에 걸쳐 조금씩 타율이 좋아지는 느낌이다. 유인하는 그렇게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바비큐 파티에서도 조금 마셨지만 다 깼다. 안정훈은 방에 비치된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왔다.
“괜찮아?”
안정훈이 다시 물었다. 유인하는 확 화를 냈다.
“괜찮다고. 왜 자꾸 그래? 짜증 나게.”
“미안….”
하지만 여전히 눈치가 빻은 안정훈은 그런 유인하가 걱정된다고 계속해서 선을 넘어 질문 공세를 펼쳤다.
“왜? 오늘 기분 나쁜 거 있었어? 아까 어머니한테서 전화 와서 그래? 무슨 일 있대?”
“아무것도 아니라고.”
짜증 나는 기억만 되살아났다. 유인하는 맥주를 한 번에 다 마신 뒤 그대로 털썩 침대에 누웠다. 안정훈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앉아서 상체를 그의 쪽으로 돌려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윤곽만이 살짝살짝 보일 뿐이다.
“그래도….”
“그냥…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유인하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뭐가?”
“뭐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래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목소리다. 그렇겠지. 유인하는 눈을 떠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얼굴. 누구도 경계하지 않는 태도. 바보 같고 순진하고….
돈이 많아지고 여유가 있어지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유인하는 이렇게 되고 싶은 것일까? 그냥 돈만 많으면 되는? 자신도 그런 얄팍한 인간들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일까? 유인하는 스스로가 이미 얄팍해질 대로 얄팍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얘는 원래부터 이랬는데….’
안정훈이 지금 이렇게 여유가 있는 것이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사실 안정훈의 집이 부유한 집이 아니었다는 건 유인하가 잘 알았다. 유인하는 지금껏 자신의 문제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형제들은 문제가 많지만 부모님은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왜 내가 고시를 하려고 했더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유인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분명히 오늘 낮까지만 해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는데….
“몰라.”
생각이 아무 곳으로나 튀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마음이 안 잡힌 것이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게 초조한 것일 테다. 유인하는 그냥 그대로 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입으로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너희 형은 이제 고양이 안 찾아?”
말하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 마음이 흠칫했다가 눈을 천천히 떴다. 안정훈도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이라 생각 못 한 모양이었다.
“우리 형?”
“…….”
안정훈은 유인하의 말을 대충 듣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유인하의 오른손을 만지려고 자신의 왼손을 슬금슬금 가까이하는 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의 질문에 그의 손에 집중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잘 지내냐고.”
유인하는 인상을 썼다가 끝내 다시 물었다. 안정훈은 ‘왜 형에 대해서 묻지?’라고 생각했다. 유인하는 그를 싫어하지 않은가. 고양이였던 시절은 끔찍했을 것이다.
“형? 형은… 형은 항상 잘 지내.”
“그래?”
“응.”
“왜?”
“왜냐니…. 우리 형 같은 사람이 별일 있을 이유가 없잖아.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형 진짜 보살 같은 사람이라 일 말고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사람이야.”
안정훈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남에게 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처음이다. 아니, 남이 아닌 사람에게도 말해본 적 없다.
“아니, 아마 일도 그냥 하는 거일걸?”
안정훈은 지금껏 봐온 자신의 이부 형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물론 살갑게 같이 산 적은 없으니 잘 안다고 말하기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도 애매하지만…. 안정훈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도 엄마랑 오랜만에 만났는데 엄마가 반가워서 막 우니까, 흘러간 인연에 너무 마음을 쓰는 게 아니다, 이런 말이나 하고 앉아 있다니까?”
안정훈은 권시혁의 말투와 무표정한 얼굴을 따라 했는데 얼굴이야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쳐도 목소리에는 깜짝 놀랐다.
‘역시 형제구나….’
생각보다 훨씬 비슷하게 들렸다. 안정훈의 목소리가 이렇게 들린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십 년이 넘게 들어온 목소리였다. 심장이 꽉 조이는 느낌에 이어 식은땀이 살짝 배어 나왔다. 안정훈은 다시 순진하고 철없는 느낌으로 그때의 상황을 마저 설명했다.
“엄마는 모자 사이가 어떻게 흘러간 인연이 될 수 있냐며 또 울고? 그러면 형은 아무 말도 안 해. 이렇게 쳐다보기만 하지.”
유인하가 눈을 뜨고 안정훈을 올려다보며 진짜냐, 라는 얼굴을 했다. 안정훈은 그가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가지자 약간 기분이 좋아 더 말을 늘어놓았다.
“형은 그 말을 15살 때부터 했어. 15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를 만났을 때부터.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야.”
그 덤덤한 남자의 상태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에 유인하도 놀랐다. 15년 만에 만난 친엄마에게 흘러간 인연이니 정을 떼라는 말을 하는 15살짜리 아들이라니.
“진짜 석남인가….”
유인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중얼거렸다. 안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형 표정 변화도 거의 없거든. 기계나 목석같아. 엄마는 어렸을 때 엄마 품에서 못 자라서 그런 거라고 엄청 서러워하더라고. 나는 잘 모르겠어.”
“그래? 그 남자는 그냥….”
유인하는 뭐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표정이 굳으며 관두었다.
“그럼 고양이 같은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그 남자.”
“그럴걸? 다행이지.”
“그렇네.”
안정훈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그게 느껴져 유인하는 짜증을 냈다.
“왜.”
“근데 우리 형은 왜?”
“뭐가?”
“신경 쓰여?”
“아니.”
유인하는 그렇게 짤막하게 말했지만 안정훈은 여전히 빤히 유인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유인하는 무시했다.
*
다음 날에는 진짜 김성우가 왔다. 유인하는 그와 마주치지 않게 먼저 서핑 스쿨로 가려고 했는데 호텔 로비에서 딱 마주쳤다. 둘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 씨발.’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인하야, 그럼 일단 내가 차부터 가져올게.”
안정훈과 유인하는 따로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일이나 모레 서울로 다시 올라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유인하는 느긋하게 걸었고 안정훈은 마치 운전기사처럼 종종걸음으로 주차장으로 먼저 뛰어가려고 하다가 김성우를 발견했다.
“어?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내일 간다며?”
“아, 일단. 일단 알았다. 잠깐만, 인하야. 넌 여기서 기다려.”
안정훈은 유인하에게는 헤실 웃는 얼굴로 말하고 김성우에겐 정색하곤 얼른 뛰어갔다. 로비의 문 앞엔 유인하가 서서 햇빛이 쨍쨍한 밖을 쳐다보고 있었고 김성우는 뚱한 얼굴이었다.
유인하와 안정훈의 고등학교 친구 김성우는 겉으로 보기에 여러모로 ‘중간’이라는 말을 실체로 구현한 것 같은 느낌의 남자였다.
못생긴 건 아닌 것 같고, 패션 센스가 나쁜 것도 아니고, 키도 작은 것도 아니며, 사회성이 나빠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잘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으로 다방면에서 크게 모자라는 느낌이 없는 남자는 생각보다 적어서 역시 중간보다는 약간 위일까 싶기도 한데, 그가 의사라고 하면 그래도 공부는 잘했나 보네, 라는 말이 절로 입 밖에 튀어나오니 또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여러모로 중간인 것이다. 딱히 인상에 남는 남자는 아니다. 평범하다.
그에 비해 가만히 서서 밖을 쳐다보고 있는 유인하는 누가 봐도 엄청 예쁘고, 누가 봐도 성격 있고, 누가 봐도 영리해 보이고, 누가 봐도 인기가 많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누가 봐도 잘난 느낌이랄까.
“너 이번엔 2차 합격했다면서?”
김성우는 뚱하니 휴대폰을 보고 있다가 그렇게 말했다. 유인하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누가 그래?”
“아니면 이런 데 놀러를 오겠냐?”
“합격했으면 3차 준비했겠지.”
“또 떨어졌냐?”
“네가 보태준 건 없을 텐데.”
유인하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우는 그를 돌아보았다.
“야, 아직도 2차가 안 되면 어떡하냐? 작년엔 0.5점 차 과락으로 떨어진 거라 올해는 붙는다고 그랬다면서? 언제까지 고시 생활하려고? 내가 벌써 졸업을 했는데. 그래가지고 언제 결혼할래?”
“해도 너보다 예쁘고 잘난 여자랑 하니까 걱정 마라.”
김성우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입술은 웃었다.
“야, 예쁘고 잘난 여자가 왜 너 같은 날백수랑 결혼을 하냐? 머리 돈 거 아니면. 하려면 차라리 나 같은 의사랑 하지 않겠냐?”
김성우는 자신이 이런 말을 유인하에게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런 말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아니, 남들 앞에서 의사라고 유세를 부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자신은 올 초 졸업하고 인턴이 된 신참 의사일 뿐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짜릿한 희열이 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유인하는 심드렁했다.
“글쎄, 예쁘고 잘난 여자면 돈보단 얼굴을 보지 않을까? 넌 못생겨서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데.”
유인하는 아무런 사감도 없이 객관적 진실을 말한다는 어투였다. 별로 관심도 없고 악의도 없는 듯한 말투다. 이런 식으로 그는 언제나 어떻게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이상할 정도로.
분명히 지금은 옛날과 다르지 않은가. 지금은 분명히 자신이 좀 더 낫다고 생각해도 좋을 텐데. 그런데도 김성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울컥했는데. 다만 심장이 오그라들면서 표정은 굳었다.
그래도 자신이 못한 외모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절대로. 오늘도 논다고 생각하며 나름 꾸미니 평소보단 좀 더 잘생겨 보인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가끔 훈남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못생긴 건 분명히 아니라는 말을 듣는단 말이다. 그럼 그 정도는 되는 외모란 말 아닌가? 못생겼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닌 것이다. 그렇게 유인하에게 강변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유인하의 외모는 아직도 화려한 꽃처럼 아름다웠다.
‘씨발, 얼굴 좀 잘났다고….’
고등학교 때도 비슷한 화법에 휘말려서 그래도 자신이 못생긴 건 아니라고 핏줄을 세워 소리치다가 다른 친구들에게도 비웃음을 샀다. 다들 농담으로 지나갔지만 김성우는 그때의 모욕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복수할 기회가 없었다. 김성우도 전교 10등 안에는 꼭 들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유인하는 딱 한 번을 빼고 매번 전교 1등을 했었다. 성적도 학벌도 외모도 그에게는 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인하는 고등학교 때 근방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생긴 것으로 소문이 났었다. 잘생긴 걸로 치면 안정훈은 키도 더 크고 성격도 좋아 더 인기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정말 인기가 있는 것은 유인하였다.
보는 사람은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저렇게 성격도 지랄 같고 사람 좆같이 보고 무시하는데도 유인하가 잠깐 관심을 보이거나 웃어주면 무슨 간택이라도 받은 것처럼 사람들이 좋아했다. 아무리 전교 1등이라지만, 항상 선생님들을 잘 따르고 말도 잘 들었던 김성우보다 선생님들은 대놓고 선생님을 놀려 먹기까지 하는 유인하를 더 좋아했었다.
‘정훈이 그 새끼가 진짜 개새끼처럼 저 새끼한테는 빌빌거리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진짜 저 새끼가 뭐가 있는 새끼인 줄 착각했다. 실제로 안정훈이 유인하에게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면서 그의 위명이 더욱 높아졌다. 안정훈같이 누가 봐도 성격도 좋고 인물도 좋고 힘도 세고 우월한 남자가 그러니까 좆도 없는 저 자식이 대단해 보였던 것이 아닌가.
다들 속은 것이다. 억울하다. 속이 부글부글했다. 마치 그가 자신 몫의 무언가를 빼앗아 간 것처럼.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일부러 적을 만드는 사람들은 잘 없기 마련이다. 아니, 그런 사람도 있긴 하다. 김성우의 지도 교수와 같이 저항할 수 없는 학생 같은 인간에게 압도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 그런 경우면 김성우도 알아서 긴다. 하지만 유인하는 그것이 아니지 않은가. 절대 아니다.
고등학교 때? 아직도 그걸 질질 끌고 그때의 뭔가가 지금도 적용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분명히 그렇다. 김성우는 유인하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야.”
유인하가 옆을 돌아보았다. 내리깐 속눈썹이 아주 짙고 풍성하다. 내리뜬 눈동자가 여전히 김성우를 깔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별것 아닌 것을 보고 있다는 눈이었다. 일부러 하는 것도 아니고 악의도 없다. 그래서 더 열 받는다.
“넌 안정훈 저 새끼가 네가 뭐 대단해서 저렇게 하는 줄 아냐?”
“몰라. 관심 없어서.”
그 눈동자는 다시금 앞으로 향했다. 김성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인하에게 다가갔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유인하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고 싶은데 마치 한 판 하러 가겠다는 듯 온몸에 힘이 다 들어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분기에 차 있는 게 보였다. 김성우는 씩씩거리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하면서 씩씩거리며 말했다.
“저 새끼 너 따먹고 싶어서 저러는 거야, 병신아.”
하다하다 별소리를 다 한다, 못생긴 게. 유인하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유인하는 손가락마저도 하얗고 예쁜 손으로 그의 얼굴과 자신 사이를 막았다. 여전히 그의 태도는 관심 없는 남의 집 어린애라도 대하는 듯 건성이었다.
“그래, 진정하고 좀 떨어져서 말해. 입 냄새난다.”
“~!!”
이것보다 더한 모욕도 많이 당했었다. 하지만 김성우는 지금이 가장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자신이 그보다 조금 더 잘난 것처럼 느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더 잘났는데 자신보다 못한 놈이 감히 자신에게 덤빈다고 생각하면 괘씸해서 분노가 치솟지 않는가. 결국 울컥해서 주먹을 치켜들고 유인하에게 달려들었다. 김성우는 태어나서 싸워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주먹을 휘두르는 자세도 우스꽝스러웠다.
다른 의미로 싸움 같은 것이랑은 연이 없었을 것 같은 유인하였다. 하지만 그가 몸으로 달려들자 눈빛이 바로 바뀌더니 그걸 왼팔로 바로 쳐내고 오른쪽 주먹으로 제대로 훅을 꽂았다. 아래팔과 위팔의 각도가 정확하게 90도에 제대로 체중까지 실어 친 완벽한 훅이었다. 이가 하나 빠져서 날아갔다.
“어어어! 뭐야?! 왜 그래!”
밖에서 보인 모양이다. 차에서 내린 안정훈이 슬라이딩을 하며 안으로 들어와서 싸움을 말렸다. 소리를 지르며 다시 유인하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김성우를 안정훈이 허리를 잡고 말렸다.
“놔, 이 씨발! 저 개새끼 내가 죽여버릴 거니까!”
셋 중에 체급은 안정훈이 제일 높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쳐다보았다. 유인하야말로 어디서 감히 자신에게 덤벼드냐며 한 대 더 패고 싶은 얼굴을 했지만 그냥 크게 한숨을 쉬며 주먹을 터는 것으로 끝냈다. 김성우는 안정훈에게 뒤에서 잡혀 발길질을 했다. 안정훈이 김성우를 유인하에게서 아주 멀리 떼어냈다.
“야야야, 그만해. 인하 싸움 진짜 잘해.”
김성우를 신경 써준 것인지 안정훈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김성우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그를 째릿 노려보았다. 안정훈은 진짜라는 얼굴이었다.
“진짜야.”
유인하는 정말로 싸움 같은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보인다. 사람 패는 건 여러모로 해본 사람이 잘하는 종목이다. 고등학교 때도 그가 싸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씨발, 싸움도 잘한다고?’
김성우는 패배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패배감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안정훈이 말리니까 참는다는 식으로 맞은 뺨을 손으로 누르며 분이 안 풀려 씩씩거렸다. 안정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성우를 살폈다.
“야, 어떡해? 괜찮아? 아 해봐.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냐?”
이가 뽑혀 날아가는 게 밖에서도 보였다. 안정훈은 호텔 직원의 도움을 받아 그의 이를 냅킨 위에 올렸다. 직원이 물었다.
“일행이신가요? 아까 저분이 동행분에게 먼저 달려드셨는데…. 경찰에 신고는….”
“아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소란 피워서 진짜 죄송합니다.”
정작 싸운 두 놈은 사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씩씩거리고 있는데 안정훈은 커다란 덩치로 두 손을 모으고 얼른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여 사과부터 했다. 직원부터 멀리 있는 손님들에게도 죄송합니다, 하면서 머리를 숙였다.
“얼른 데리고 나갈게요. 그럼 괜찮을까요? 뭐 부서진 건….”
“그런 건 없습니다. 일단 병원부터….”
“아, 예….”
안정훈은 이를 싼 냅킨을 한 번 보았다가 유인하를 보고 김성우도 돌아보았다가 얼른 유인하에게 다가갔다.
“택시 타고 일단 갈래? 난 성우 데리고 병원 갔다 올게.”
“마~음대로 해라.”
안정훈의 말에 유인하는 완전히 미간을 팍 찌푸리고 안정훈의 얼굴을 강하게 노려보고는 호텔을 나가버렸다.
“…….”
헉, 인하 화났다. 뭔진 모르겠지만 안정훈도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안정훈은 유인하를 대하던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서 땀을 삐질 흘렸다가 얼른 그를 따라갔다.
“아니! 인하야! 같이 가!”
그렇게 외치고 다시 안으로 돌아와서 김성우에게 달려갔다.
“야, 야! 이거 들고 치과부터 가! 알았지?! 병원 도착하면 전화해!”
“야 이 개…!”
“전화해!”
그는 그렇게 김성우를 버리고 헐레벌떡 유인하를 따라갔다.
“이, 이, 인하야!”
안정훈은 유인하의 손을 덥썩 잡았다.
“차, 차 여기 있잖아. 타고 가자. 원래대로, 응?”
안정훈은 유인하를 끌고 가 렌터카의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유인하는 차 문을 사이에 두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매우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넌 도대체 저 좆 같은 새끼를 왜 여기까지 부른 거냐? 어? 저 새끼 성격 존나 이상하다고. 자격지심으로 배배 꼬인 거 안 보이냐?”
“아니, 성우가 원래는 착한데….”
“착하다고? 저게? 정신 좀 차려라. 쟤는 너 이용하는 거야. 너랑 같이 다니면서 자기도 너 정도 급이라고 착각하고 싶은 거라고. 잘생겼다고.”
굳이 말하자면 안정훈을 가장 골수까지 뽑아 먹고 이용하는 것은 유인하였다. 유인하는 한심하다는 눈빛과 어투로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차에 탔다. 안정훈은 눈을 크게 떴다가 한 번 깜박했다. 그대로 헐레벌떡 차를 돌아가 운전석에 탔다. 유인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에어컨부터 틀어.”
“나, 나, 나 잘생겼어?”
또 핀트 나간 소리 하는 안정훈이다. 유인하는 질린다는 얼굴이었다.
“운전해라. 벌써 시간 늦었다.”
유인하는 외제 렌터카의 유리창으로 휴지 조각을 쥐고 호텔에서 나오는 김성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곧 관심 없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안정훈은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들뜬 얼굴이었다.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 기분이 그렇게 좋은가 보다.
그렇게 예정대로 윈드서핑을 한 번 더 배우러 갔고 또 파티에 초대받아 새벽까지 놀았다. 중간에 안정훈은 전화로 지랄을 하는 김성우에게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사과하면서 유인하의 눈치를 봤다. 유인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뿐이다.
“아, 나도 그 고시 준비하다가 지금 대학원 다니는데. 0.5점 차면 진짜 내년은 붙겠다. 대단하다. 난 1차 바로 붙고 2차 치자마자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 하고 바로 포기했는데.”
“누나가 똑똑한 거야. 나도 못 해 먹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누가 봐도 뛰어난 미모를 가진 여자였다.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하고 윈드서핑을 배운 지는 5년이 되었다고 한다. 여름이 되면 주말마다 타러 다닌다고 한다. 유인하보다 한 살이 많았다. 대학도 알아주는 대학이고 심지어 유인하가 준비하는 고시도 경험이 있다고 한다. 당연히 말이 통했다. 유인하가 의외로 약한 소리를 하니 그 여자가 웃었다. 호감이 가득한 미소였다.
“너 되게 매력 있다.”
잘생긴 것도 잘생긴 거고 여자라고 딱히 특별대우하는 느낌도 아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느껴진다. 도도한 인상이라 의외로 친근하게 구는 게 무척이나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귀여운 얼굴이라기보단 화려하고 날카로움이 있는 미모인데도. 그녀는 자연스레 오른손으로 유인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유인하는 진심 반 장난 반으로 말했다.
“머리 쓰다듬는 거 싫어하는데.”
“진짜?”
“여자는 조금 괜찮을지도.”
“왜?”
“몰라. 누나라서 그런가?”
그러니까 이런 점이 묘하게 상대방에게 ‘내가 특별한 건가?’라는 느낌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누구라도 으쓱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녀는 눈을 살짝 동그랗게 떴다가 좀 더 부드럽게 유인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그것이 기분 좋게 느낄 수 있도록 유념하면서 말이다.
김 집사나 젊은 여자 고용인 등 나비가 좋아하던 쓰다듬 전용 노예들이 있었다. 김재민은 온갖 장난감과 간식으로 나비를 유혹했지만 나비는 그가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큰둥하게 대하곤 했다. 그때가 생각나서 어쩐지 그리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잠깐 눈을 감았다.
“우리 이제 갈까! 너 술 많이 마셨나 보다!”
갑자기 안정훈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 여자는 안정훈에게 말 그대로 퍽 밀렸다. 유인하가 인상을 썼다.
“취한 건 너잖아, 이 새끼야. 누나 괜찮아?”
“아, 어. 괜찮아.”
유인하가 주먹으로 안정훈의 팔뚝을 퍽 쳤다. 안정훈은 아주 잠깐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눈빛으로 그 여자를 스캔했다. 유인하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뭐야! 윤지민 같은 스타일도 아닌데?!’
안정훈은 유인하의 팔을 잡았다.
“내일 우리 아침 비행기야, 아침 비행기. 가자. 빨리 가자.”
“뭐야. 언제 표 끊었어?”
“내일 아침 비행기야? 아쉽네. 난 월요일까지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유인하가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럼… 서울에서 봐야겠네.”
“응. 또 보자.”
둘은 아쉬운 듯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팔을 잡고 마구 끌어당겼다. 사람들과 좀 떨어지고 나서야 유인하가 안정훈에게 확 화를 냈다.
“아, 짜증 나게 왜 이래?”
‘내숭쟁이.’
안정훈은 그런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미 늦었잖아. 아침 비행기라고.”
늦긴 늦었다. 대리 기사를 불러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유인하는 짜증이 났다. 자신이 지금 자유롭게 누리고 있는 여유 중에서 안정훈만 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
물론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이 모든 여유를 가져와 준 것이니까.
[저 새끼 너 따먹고 싶어서 저러는 거야, 병신아.]
유인하가 불쑥 입을 열었다.
“김성우는 이빨 다시 심었대?”
“바로 치과 가긴 했는데 있어 봐야 알 것 같대.”
유인하는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병신.”
“근데… 왜 싸웠는지 물어봐도 돼?”
“김성우한테 물어봐.”
“성우도 이번엔 별말 없어서….”
안정훈은 유인하의 눈치를 힐끗힐끗 보았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유인하는 불쑥 물어볼 뻔했다.
너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
예전에도 유인하를 좀 과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선생님이라든가, 친구라든가. 김성우처럼 처음부터 덮어두고 싫어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덮어놓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고시 생활을 겪으며 차츰차츰 사라졌고 이제 고작 안정훈만이 남은 것이다. 그의 태도는 처음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고양이였다가 사람이 되었을 때랑 어쩐지 비슷한 것 같다. 고양이일 때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땐 그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시 사람이 되자마자 그것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고양이이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애정이었다. 사람은 받을 수 없는 애정이다. 사람 간의 애정이란 어떤 말로 포장해도 결국 기브 앤 테이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아까 안정훈에게 한 말이랑 같았다. 아마 옛날의 유인하에게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유인하의 곁에 있으면서 일종의 선택받았다는, 유인하처럼 공부도 잘하고 매력 있고 인기 많은 미소년과 함께 할 수 있는 자신에게 도취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름다운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돈 주고도 쉽게 살 수 없는 기분이니까. 나비 또한 그 남자와 함께하면서, 함께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남자의 특별함이 자신의 특별함인 줄 착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의 유인하는?
‘아냐. 봤잖아. 그냥 서핑을 하다 만난 사람들도 다 날 좋아했어.’
안정훈은? 유인하는 눈동자만을 돌려 운전을 하고 있는 안정훈을 가만히 관찰했다. 아까 김성우가 한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쓴다고 생각했다.
‘진짜라면?’
그러면?
안정훈 같은 새끼가 그런 생각으로 옆에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안정훈은 그냥 쉽게 비굴해지는 그런 놈일 뿐이다. 유인하에게 안정훈 같은 인간이 안정훈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좀 유난스럽긴 하지만….’
묘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 딱 잡아서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었다. 뒷목의 털 몇 가닥이 움찔하는 것만 같다.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미묘한 느낌이다. 기억해야 하는 게 있는 것만 같은….
“이, 인하야, 화났어? 미안….”
하지만 그 느낌도 오래가지 않았다. 안정훈은 안정훈이었다. 안정훈은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유인하가 말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바로 이렇게 사과했다. 과도하게 유인하의 눈치를 보며 언제나처럼 쭈글쭈글한 얼굴을 하고 운전을 하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바로 눈을 돌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진다. 얼마나 잘생겼든 키가 크든 태도가 이러면 그 누구도 병신으로 보일 뿐이다.
‘이런 병신이? 말도 안 되지.’
그걸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만으로도 자신이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김성우 같은 것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게 이상한 거다. 그런 인간들은 아무 말이나 한다. 못생긴 열폭러는 부처와 예수가 세트로 와도 답이 없다.
뭐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나. 그래, 이제 일탈을 끝낼 때가 되었다. 서울 가면 고시원을 정리하고 독서실 총무 자리 알아봐서 옮기자. 그동안 한 번도 고양이로 다시 변한적 없고 아마 앞으로도 안 변할 것 같으니까. 그래, 그동안 좋았으니까 됐다. 여전히 안정훈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휙 버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사실에 유인하는 안도감마저 느꼈다.
‘짐은 어쩌지? 엄청 많은데….’
안정훈이 잔뜩 사준 옷과 물건을 떠올렸다. 그거 그대로 들고 갔다간 지금 고시원은 잘 곳도 없어질 것이다. 이미 머릿속으로 집에 있는 뭘 버리고 어떻게 정리를 할지 착착 계획을 세웠다. 놀 때만큼 즐거운 기분은 아니더라도 마음이 좀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날 밤은 잠을 설치는 일 없이 잘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물론 짐은 안정훈이 전부 다 들었다. 유인하는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드디어 마음을 잡은 상태라 스스로가 다시 좀 단단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예상대로 2주 동안 논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드문드문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지금껏 해보지 못한 여러 가지를 경험해보는 건 역시 즐거웠다. 정말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서핑 같은 운동을 몇 개 할 때 스스로도 잘하는 게 느껴지니까 으쓱한 기분도 들고 좋았다. 그렇게 잠깐 모든 걸 잊을 수 있는 경험은 순간일 뿐이더라도 큰 해방감을 선사했다.
‘합격하면 꼭 다시 배우러 와야지.’
목표가 하나 생겼다. 그간 새로 알게 된 연락처만 몇십 개는 된다. 다들 연락을 잔뜩 해주었다. 유인하는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휴대폰으로 연락을 준 사람들 중 마음에 든 사람들의 것에만 답장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원래 알던 친구들과는 연락하기도 싫었는데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마음이 열리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했지? 두 달 놀고도 그 정도면 진짜 대단한 거야. 내년은 진짜 된다. 되기만 하면 전부 해결되는 거야.’
다시금 희망과 힘이 생겼다. 고작 2주 만에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이것 또한 대단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신은 이런 사람이었다. 포기 같은 건 절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유인하는 그렇게 스스로를 격려했다.
공항이었다. 쓰고 있던 명품 선글라스가 마치 모델처럼 잘 어울렸다. 그는 선글라스를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안정훈을 찾았다.
“시간 다 됐는데 어디 간 거야?”
아침부터 자꾸 어딘가 전화를 하면서 뭉그적거리던 안정훈이었다. 작은 캐리어가 두 개 덩그러니 앞에 놓여 있었다. 크기도 모양도 같고 색깔만 달랐다. 이번에 안정훈이 사준 건데 기분 나쁘게 자기도 똑같은 걸 사서 제주도까지 같이 챙겨왔다.
유인하는 시선을 돌렸다. 제주 공항의 구석에 찌그러져 수그리고 또 전화 통화에 한창인 안정훈을 발견했다. 저건 저런다고 지 덩치가 숨겨진다고 생각하나? 멍청하기 짝이 없다. 유인하는 캐리어를 직접 끌고 가야 하나,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어차피 여기에 둬도 누가 들고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유인하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나보고 저거 다 챙기라는 거야? 뭐 하는 거야?’
그렇게 유인하가 그의 등짝을 툭툭 치려는데 그가 한참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드디어 말소리를 냈다.
“야, 아니, 그래, 알겠는데 그건 네가 먼저…. 야, 아니, 좀 참아 봐. 야, 어? 내가 미안하다, 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
그야 뭐 전반적으로 병신 같긴 하지만 그래도 유인하 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이렇게까지 병신 같은 건 아니라서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안정훈이 더욱 사정했다.
“아니, 네가 그러면 인하 공부하는 건 어떡해. 성우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네가 먼저…. 야, 아니, 이런다고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유인하는 인상을 팍 섰다가 안정훈의 등짝을 주먹으로 퍽 때렸다. 안정훈은 화들짝 놀라더니 몸을 돌렸다. 휘둥그레 뜬 눈으로 유인하를 내려다보았다. 안정훈의 휴대폰에서는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가 막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안정훈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어… 하고 유인하를 보았다. 유인하는 휴대폰을 달라고 손짓을 했다. 안정훈이 주저했다. 유인하는 그걸 강제로 빼앗았다.
“가지가지 해라.”
-…뭐야, 씨발.
한창 소리를 지르던 김성우는 말을 뚝 멈췄다가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스스로도 그런 식으로 반응한 게 자존심 상하는지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야, 너 이제 좆 됐어, 아냐? 나 진단서 다 끊었다, 개새끼야. 경찰서 간다.
유인하의 눈빛이 매우 날카로워졌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는 안정훈은 안절부절못하며 다시 휴대폰을 돌려받으려고 유인하의 손 근처에 자신의 두 손을 가까이했다가 말았다가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인하야, 내가 성우한테 잘 얘기해볼게. 응? 응?!”
유인하는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팍 밀었다.
“생긴 대로 논다.”
-개새끼야, 아직도 감이 안 잡히냐? 너 폭행 전과 달고 임관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협박해? 그러려고 먼저 달려든 거야? 경찰서 가서 그렇게 말하면 되냐?”
안정훈은 자신의 코를 두 손으로 붙잡고 뜨악,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옛날부터 느꼈지만 유인하와 김성우는 상성이 별로 좋지 않았다. 물론 유인하는 김성우를 취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상성이 좋지 않은 것이다. 김성우도 자존심이 세다.
-네가 먼저 나한테…!
“내가 뭐?”
-네가 나 무시했잖아!
유인하는 그리고 눈을 치켜들어 안정훈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너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안정훈한테는 말했냐?”
안정훈은 여기서 자기 얘기가 나올진 몰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하여튼 눈 한 번 크다.
“나? 나 왜? 나 뭐?”
안정훈이 또 눈치 없이 그렇게 물으며, 안 그래도 가까운데 한 발자국 더 다가오자 유인하는 신경질이 나서 그의 가슴을 퍽 밀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안정훈은 아차, 하고 깨갱 물러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몰라! 씨발, 네가 뭐라고 하든 난 경찰서 가서 신고할 거라고!
“진짜 넌 쪽팔리지도 않냐? 먼저 달려든 건 너잖아. 네가 다니는 그 지방대는 그런 거 괜찮은 거냐? 의사가 사람 패도?”
-너 지금 협박했어? 어? 너도 지금 협박한 거야?!
“아오, 이 병신. 말을 말아야지.”
말이 안 통한다. 유인하는 인상을 팍 쓰곤 안정훈에게 전화기를 휙 던졌다. 유인하도 짜증이 나서 잠깐 한숨을 푹푹 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김성우 같은 인간이 제일 짜증 나는 게 그렇게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주제에 시시때때로 밑바닥을 보이기 때문이다. 있어 보이는 게 뭔지 모르나? 그러면서 바라는 건가. 이런 인간들이 있었다. 좀 비빌 만하면 모를까, 꼭 이상하게 되도 않는 것들이 유인하를 보고 열폭을 하곤 했다.
‘이 새끼도 가만히 있는데.’
유인하는 죄도 없는 안정훈을 아래위로 한 번 째릿 훑어보았다. 안정훈은 으아아, 하고 지가 멘붕을 해선 전화기에 대고 참아라, 이러지 마라, 내가 잘못했다, 이러고 있었다.
“그만하고 끊어. 비행기 시간 다 됐다.”
“김성우, 진짜 내 얼굴 봐서라도 그만해라, 어? 어? 제발.”
-넌 어제 나 버리고 간 순간부터 친구고 나발이고 끝난 거야, 이 좆 같은 새꺄.
“야아~.”
어쨌든 그렇게 전화 통화를 끝냈다. 유인하도 분명 화가 나서 칼날처럼 날카로운 분위기가 풍풍 났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안정훈이었다.
“어, 어떡해, 인하야!”
“조용히 해.”
“그, 그래도… 이러면 너 공부하는 건….”
공무원은 원래 전과는커녕 구설도 있으면 안 된다. 유인하가 하려는 쪽은 본인뿐만 아니라 부모형제에 사촌까지도 범죄 경력이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오죽하면 공무원은 싸움에 휘말리면 그냥 맞는 게 올바른 처신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게 말이 돼?’
유인하는 짜증스럽게 그렇게 생각했다. 잘못한 게 없으니 아까는 당당하게 김성우를 개무시했지만 정작 비행기에 올라타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다시 마음을 굳건히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그 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단 말인가? 유인하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화가 났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 중에 유인하가 잘못한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돈이 없는 집에서 태어난 것도, 병신 같은 형제가 있는 것도, 고양이가 된 것도 전부 유인하의 잘못이 아니었다. 유인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열심히 산 죄밖에 없었다.
‘그것도 잘못이란 말이야?’
분명히 마음을 잡았는데 내일부터 공부를 할 것이라고 마음을 먹으니 든든하기까지 했는데. 순식간에 속에서 업화가 타올랐다. 언제 꺼진 적이 있냐는 듯. 아까 통화를 할 때보다 훨씬 더 큰 분노였다.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다스린 줄 알았던 화는 차곡차곡 쌓이고만 있었다. 유인하는 타고 있는 비행기가 김포 공항에 떨어질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안정훈은 내내 그의 눈치를 봤다.
‘만약에 성우가 정말 경찰에 신고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인하 공부하는 건 전부 물거품이 되는 거잖아?’
일단 김성우가 먼저 때리려고 한 것이니 분명 쌍방폭행일 테다. 하지만 저쪽은 이가 나가기까지 했으니 유인하의 과실이 큰 것이겠지? 안정훈은 김포 공항에 내리자마자 슬그머니 아는 변호사에게 연락을 했다.
<형, 쌍방폭행인데 합의 안 되면 어떡해요? 먼저 달려든 사람을 제 친구가 피하면서 딱 한 대 쳤는데 이빨 날아감>
지금 김성우가 오버하는 것을 보면 정말 경찰서까지 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 하는 것으로 봐선 합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유인하가 아닌가. 호락호락하게 굽혀주지도 않을 것이다.
‘보통은 인하가 무시했을 텐데…. 어쩌다가 그렇게 됐지….’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캐리어까지 양손에 하나씩 캐리어를 끌고 유인하의 뒤를 터덜터덜 따라갔다. 그가 다 속상했다.
‘도와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나…?’
이러다가 무슨 기록이라도 남게 되면 유인하의 임관은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이 된다. 김성우는 어떻게 해서든 그가 큰 타격을 입거나 아니면 그가 자신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일 테다. 근데 그걸 버젓이 아는 유인하가 그렇게 하려고 할까? 임관이 걸려 있다고 해도?
‘인하가 남한테 그러는 건 싫은데.’
안정훈은 시무룩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예전에 했던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그냥 고시 포기하면 안 되나…. 별로 하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아무리 봐도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마음 같은 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회사 같은 데 들어가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말을 듣기 싫은 것뿐 아닌가.
‘공무원이라고 다른가.’
그가 자연스럽게 고시를 포기하고 자신의 호의를 받아들였으면 해서 하반기 공채를 쓰게 하느니 뭐라느니 생각한 적도 있는데(또 까먹고 있었다) 이러면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 아닌가?
역시 유인하는 자신이 호강시켜 주는 게 제일일 것 같다. 이번에 함께 하면서 알게 되었다. 유인하는 그냥 이렇게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처음에는 유인하를 걱정하던 안정훈의 사고가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인하가 2차 시험에 떨어질 때부터. 안정훈은 친구의 불행에 기뻐하는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유인하와 함께 앞으로도 이렇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니까 웃음이 비실비실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난점이 있다면 둘이 어쩌다가 합의를 하게 되면 역시 유인하는 다시 고시 공부를 할 것이고 유인하의 실력으로 보아 내년이면 정말 합격을 해버릴 것 같단 말이다.
고시가 뭐 합격한다고 끝나는 것인가? 연수원 들어가면 거기서도 또 경쟁해야 하지, 유인하 성격에 또 1등 안 하면 이가 갈릴 테니 죽어라 할 것이다. 그다음 단계에서도. 또 그다음 단게에서도. 그래서 인생을 열심히 사는 걸로 어떻게 해보려는 사람들은 그냥 죽을 때까지 열심히만 살다가 끝나는 법이다.
‘별로 그렇게 살고 싶은 거 아니잖아? 행복하게 살고 싶은 거잖아? 많이 누리면서. 내가 해주는 거 다 좋아했잖아?’
2주 동안 안정훈은 참 행복했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와 함께 자고 일어나고 종일 붙어 다녔다. 이런 건 고등학생 때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가 가끔 환하게 웃으면 마음속이 뭉게뭉게 부풀어서 바보같이 들뜨곤 했다.
조금만 더 솔직해지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더 많은 쾌락을 누릴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건 전부 들어줄 수 있었고 안정훈이 그에게 못 해줄 것은 없었다. 바란다면 전부 해줄 수 있다.
우리는 친구니까. 이것으로 둘도 없는 친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어려울 때 헌신하는 친구. 평생을 함께하는. 서로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안정훈이 유인하에게 그런 것처럼.
‘조금만 더….’
안정훈은 유인하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너무나 ‘자신답지 않은’ 생각이라 위화감이 강하게 드는데도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냐. 난 인하가 잘못되길 바라는 게 아니야.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야. 인하는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거야.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잖아? 그래서야. 그래서….’
그들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안정훈의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유인하는 완전히 컨디션을 망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고민이 깊은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원래는 바로 짐을 챙겨 고시원으로 돌아가 내년에 돌아오는 시험을 다시 준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뜻 이 집을 나갈 수가 없었다.
‘진짜 고소할까?’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말 자신이 김성우에게 사과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먼저 달려든 게 누구인가. 하지만 한국 법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쌍방폭행이니 끝까지 가면 형사처벌까진 가지 않더라도 기록은 남을 것이다. 그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칠까? 이런 경우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그런 핸디캡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치료비도 물어줘야 하나? 비상금으로 되려나?’
먼저 연락을 해야 하나? 사과를 했는데도 받아주지 않으면? 그러면 자존심도 상하고 기록도 남게 된다. 김성우가 유인하를 제대로 엿 먹일 생각이라면 사과를 받든 안 받는 절대 합의를 해주지 않을 것이다. 유인하라면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무력감이 또 느껴졌다. 오늘 집에 가기로 했는데 엉덩이가 소파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갑자기 엔진이 망가져 활강하는 불안한 비행기가 된 것 같다. 속수무책이다.
‘젠장….’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도 이런 걸까? 자신만 이렇게 운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이만큼 무력감을 느끼길 바랐다. 안 그러면 죽을 것 같았다.
‘나만 이럴 리가 없어. 다들 그럴 거야. 누군가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잘못되면?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먼저 달려드는 인간에게 반격한 것만으로 평생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꼬리표를 벗을 수 없는 거라면?
‘힘들어….’
필사적으로 몰려오는 좌절감을 떨쳐내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몹시 힘겨워서 이미 좌절스러웠다. 그냥 모든 게 너무나 힘들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 것인가. 이렇게 힘든데도 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유인하는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실마리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아니었나? 아니, 어제는커녕 아까 그 통화 전에 자신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뭘 했는지는 기억났다. 하지만 그때의 기분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이 별을 지상으로 끌고 내려온 것처럼 화려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어제 봤다면 보기 좋다고 생각했을까? 지금은 이상하게도 허탈감이 들 뿐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것 또한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더라도. 아니, 별로 이런 거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 주제에 도대체 뭐가 괴롭단 말인가. 알 수 없었다.
‘젠장….’
몸이 무거웠다.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힘들었다. 마음이, 정신이 힘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그게 뭔지 알지 못했다.
“괜찮아?”
안정훈이 유인하의 옆에 앉았다.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유인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소파의 등에 몸을 기대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김성우, 경찰서 갔대?”
유인하가 그렇게 운을 떼자 안정훈은 바로 유인하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되물었다.
“물어볼까?”
“…응.”
안정훈은 충견답게도 바로 김성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 서재에 들어갔다. 문을 닫진 않았다. 유인하는 그쪽을 쳐다보진 않았지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야, 아직도 화 많이 났어? 그러지 말고…. 야,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너 이러는 거 진짜 치사한 건 아냐, 어? 너답지 않게 왜 이러냐. 너 이 정도 아니잖아. 일단,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어?”
안정훈이 김성우를 간신히 설득한 모양이었다. 유인하는 서재에서 나오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굳은 얼굴이었다. 불안한 모양이었다. 화가 나 보인다. 안정훈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내가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는데 괜찮을까?”
안정훈은 내심 김성우와 그가 잘 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지만(열심히 그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꾸짖고 있었다), 유인하가 김성우와의 대화를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간에 있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
유인하가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2주 동안 점점 기운을 차린 그가 단박에 다시 기운이 빠진 것 같이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걸 딱 꼽을 수는 없었는데도 말이다. 안정훈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둘이 잘 화해하게 내가 잘 도와야지. 참….’
착하게 말을 잘 듣고 잘해주면 언젠가 유인하도 자신의 노력을 알아줄 것이다. 평소라면 나쁜 생각은 금방 잊어버렸을 테다. 하지만 최근 유인하와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생각의 간격이 매우 좁아지고 말았다. 안정훈은 자신이 했다고 믿을 수 없는 ‘나쁜 생각’을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눈치를 왕창 보았다. 그럴 리가 절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자신의 나쁜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하면 어쩌나 두려웠다. 가슴이 조이고 손에 땀이 쥐였다. 안정훈은 눈만 크게 뜨고 입을 꾹 다문 채 휴대폰으로 열심히 뭔가를 찾는 척 부산을 떨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잘해야 돼. 김성우 기분을 풀어줘야지. 성우가 좋아하는 게….’
만나기로 한 것은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유인하는 그동안 평소대로 행동하려고 했지만 초조하고 불안해서 신경질이 났다. 안정훈은 안정훈대로 죄지은 사람처럼 유인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까 한 망상이 전과 달리 빨리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곤해….’
안정훈이 바보 같은 것은 언제나 그랬다. 유인하는 습관적으로 그가 표시하는 모든 낑낑거림을 무시했다. 그것까지 전부 신경 쓰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옛날이라면 이런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고, 아니라면 속이라도 분노로 부글부글 끓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물에 젖은 부싯돌을 튕기는 것처럼 분개할 기운이 안 났다. 차라리 쉽게 화를 낼 수 있는 게 더 좋았다. 그건 그럴 에너지라도 있었다는 뜻이었다.
같이 오손도손 밥 먹을 사이는 아니니 바로 술집으로 갔다. 장소를 고른 건 안정훈이었다. 유인하는 이런 곳은 처음 와 봐서 조금 놀랐다.
밖에는 양복을 입은 크고 작은 남자들이 서 있었다. 같은 양복이라도 낮에 양복을 입고 다니는 남자들과는 인종부터 달라 보였다. 크든 작든 천한 기운은 숨길 수 없다. 가게는 간판도 제대로 없었고 지하에 있었다. 규모 자체는 넓은 것 같은데 로비는 협소해서 숨이 막힌다. 들어가자마자 짙은 화장을 한 여자가 방으로 안내했다. 노래방과 비슷하게 복도를 따라 방문이 주르륵 있었다. 하지만 방문에는 창문이 달려 있지 않았다. 이상해서 유인하는 힐끗 문을 돌아보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 겉으로 보기보다 넓다. 천장도 높다. 바닥도 벽도 모두 검은색으로 윤이 났다.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디자인의 양주와 크리스탈 잔이 주르륵 놓여 있었다. 테이블도 소파도 분명 고급스럽고 비싸 보이는데 이상하게 은밀하고 천해 보였다.
“뭐야, 여기?”
유인하는 인상을 쓰며 안정훈을 돌아보았다. 그는 나름대로 고심했다는 얼굴로 속닥거렸다.
“성우가 이런 데 좋아해.”
“뭐? 니들 도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유인하는 더욱 인상을 쓰며 안정훈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평소의 못마땅하다는 눈빛에서 좀 더 나가 더러운 것을 보듯 경멸의 의미까지 섞여 있었다. 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없는 놈이 갑자기 돈 벌어서 이런 거냐? 그러니까 사람들이 졸부는 티가 난다고 하는 거다.”
김성우 기분을 풀어주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허둥지둥하다 보니 유인하 생각을 못 했다. 안정훈이 화들짝 놀라 유인하의 곁에 바싹 붙어 앉았다.
“아, 아, 아니, 난 아무것도 안 해. 진짜야. 성우만 그래. 내가 얼마나 순결하게 살았는데…!”
“관심 없다.”
안정훈은 필사적으로 변명하려고 했지만 유인하는 그의 변명을 원천차단했다. 안정훈은 낑낑거리는 태도로 그의 옆에 앉아 허리를 펴고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유인하가 술을 마시려고 크리스탈 잔을 잡자 안정훈은 얼른 술병을 들어 올렸다.
“위스키? 얼음 얼마나 넣어줄까?”
그런 거 모른다. 이 새끼는 잘 아는 것일까. 유인하는 한 번 안정훈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무렇게나 해.”
“아, 알았어.”
유인하는 안정훈이 따라주는 술을 보았다. 짙은 호박색의 위스키가 불규칙하게 잘린 얼음덩이 위로 쏟아졌다. 어이가 없었다.
“김성우 그건 세상 옳은 소리는 혼자 다 하더니 이런 걸 좋아한다고?”
“자기만 같이 못 어울리면 안 된다고…. 이런 데 다니는 사람끼리만 단체 카톡방 만들고 하니까.”
안정훈은 김성우를 대신해 열심히 변명했다.
“미친, 못생긴 애들끼리 서로 잘도 빨아주네. 어울리긴 무슨.”
유인하가 비웃었다. 그리고 안정훈을 쳐다보았다.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다.
“넌 도대체 뭐가 문제냐? 김성우 같은 새끼랑 같이 다니면 뭐가 좋냐?”
“별로 성우랑 같이 다닌 적 없는데…! 난, 네가…! 그러니까…!”
기분이 안 좋은 유인하가 앞에 있는 안정훈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안정훈은 여느 때처럼 필사적으로 그에게 변명했다. 지금의 그는 유인하의 곤란을 해결해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도 매우 저자세였다. 아마 그런 상황이기에 유인하는 더욱 안정훈을 갈구려고 하는 것이다. 도움을 받아도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곧 김성우가 도착했다. 유인하에게 맞은 뺨이 크게 부풀어 있었다. 말소리가 딱 멎고 유인하와 안정훈 둘이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누가 봐도 이쪽이 팀을 먹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김성우는 유인하에게 빌빌거리는 안정훈을 보며 기분이 더 잡친 모양이었다. 항상 보던 것이었는데도.
“…….”
“…….”
10대 때 학교를 같이 다닌 남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교실이 아닌 룸살롱에서 만났다. 우스운 건 유인하도 김성우도 이런 걸 즐기는 소위 ‘무지하고 탐욕스러운 기성세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김성우는 처음부터 그랬고 유인하는 고시 생활이 길어지면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손님이 다 도착하니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짙은 화장을 했든 옅은 화장을 했든 비굴한 웃음과 태도를 취하고 있는 그 여자들은 모두 하류 인생 특유의 공포와 불안이 보였다. 비굴함 자체가 공포와 불안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다. 애교를 부리든 섹시하게 보이려고 하든 근본은 같았다.
“내 옆에 앉지 마.”
유인하는 여자들이 자신의 양쪽에 앉으려고 하자 바로 신경질을 냈다. 김성우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창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술부터 마셨다. 바보가 아닌가.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겨우 심은 이를 잃어버리고 싶은 모양이다.
“어? 왜? 내가 신경 써서 골랐는데? 둘 다 여기서 인기 많대.”
안정훈이 눈치 없이 그렇게 말했다. 유인하는 그게 무슨 얘긴가 싶어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양옆에 앉으려고 했던 창녀들의 얼굴을 보았다. 한 명은 연예인 윤지민을 닮았고 한 명은 어제 친해진 그 대학원생 누나를 닮았다. 유인하는 순간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인상을 팍 썼다.
‘이 새끼는 도대체….’
불쾌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말문이 막힌다. 날 뭘로 보는 것인가. 얼굴이 조금 닮기만 하면 그게 창녀라도 상관없는 얄팍한 인간으로 보는 것인가. 게다가 세상 착하고 순해서 바보 같아 보일 정도인 안정훈이다. 그런 놈이 돈을 주고 이런 여자들이랑 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인가?
‘그래, 이 새끼도 착한 게 아니라 비굴한 것뿐이지….’
유인하는 새삼 안정훈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안정훈은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는 결백한 얼굴이었다. 어제 느꼈던 미묘한 괴리감이 다시 찾아왔다. 여전히 뭐라고 설명하긴 힘들다. 그리고 안정훈과 김성우의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만나기 전부터도 함께 있기 싫었지만 더 싫어졌다. 유인하는 짜증 난 표정으로 술을 들이켰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눈치를 보고 헉, 하고 얼른 나가라고 창녀들에게 손짓했다. 그리고는 유인하와 김성우의 눈치를 보고 말했다.
“얘들아…, 친구끼리 이번 일은 좋게좋게 넘어가자, 응? 성우야, 솔직히 이번엔 네가 먼저 그랬잖아. 경찰서까지 가긴 너무 많이 치사하지 않냐?”
“왜요? 무슨 일인데, 오빠?”
김성우의 옆에 앉은 창녀 중 한 명이 물었다.
“아니, 이렇게 둘이 싸웠거든. 먼저 달려든 건 성운데 성우가 맞아서 이빨이….”
“야, 나도 유인하가 먼저 좆 같이 안 했으면 안 그랬어!”
김성우는 안정훈이 더 설명하기 전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역시 쪽팔린 건 아는 것이다. 안정훈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래. 그러니까 서로 좋게 끝내자, 어?”
“사과해. 무릎 꿇고!”
김성우가 소리쳤다. 유인하가 인상을 쓰고 그를 노려보았다.
“가지가지 해라.”
“씨발, 네가 먼저 나보고…, 나보고 못생겼다고 했잖아!”
김성우는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다시 하는 것부터가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유치하기 짝이 없고.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았는데 얼굴이 벌게졌다. 그의 양옆에 앉은 창녀들도 풉 하고 웃을 뻔했던 것을 입술을 말며 참았다. 안정훈도 웃을 뻔했다. 하지만 그 두 명에게 얼른 눈짓했다.
“아니, 누가 오빠보고 못생겼대? 이렇게 잘생겼는데.”
“진짜~. 성우 오빠 진짜 잘생겼어. 보면 볼수록 매력인데. 누가 그랬어, 누가? 내가 혼내줄게. 이 오빠가 그랬어?”
유인하와 김성우의 가운데 앉아 있는 창녀가 유인하의 팔을 장난스럽게 툭 치려고 했다. 유인하가 경멸을 숨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손대지 마. 더러우니까.”
분위기가 싸해졌다. 룸살롱에 온 남자가 절대 하면 안 되는 말 중에 1, 2위 안에 꼽히지 않을까 싶은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여기에 안 와야 하는 것이다. 유인하도 그걸 알았다.
‘젠장,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고작, 고작 김성우한테 사과를 하려고? 진짜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이었나? 경찰서에 가지 말아 달라고? 내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왜? 뭘 위해서?
유인하는 위스키를 단번에 다 마셨다. 불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김성우와 그의 옆에 앉은 창녀들까지 모두 아주 경멸스럽기 짝이 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못생긴 새끼한테 잘생겼다고 하는 건 이런 창녀밖에 없어. 평생 끼리끼리 놀아라. 난 간다.”
“인하야…!”
그가 나가버리자 안정훈은 벌떡 일어났다. 바로 그를 따라 나갔다. 지하에서 나오니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약간 트였다.
사과하기 죽어도 싫었다. 그게 뭐라고.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대로 길을 걸었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벌건 네온사인과 비열한 얼굴을 한 인간들이 가득해 질식할 것만 같았다. 길 하나를 넘어온 것뿐인데 나라를 대표하는 깨끗한 거리가 창녀들을 선전하는 전단지로 가득하여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돈 벌면? 이런 데 와서 쓰고? 그러면 잘나가는 거라고?’
아무것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 비굴해지기 위해 산 것은 분명 아니었다. 유인하는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담배를 사서 나왔다. 고시를 시작하면서 끊었던 것이다. 편의점을 나오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기 전에 한 번 멈칫했다.
‘됐어….’
불을 붙였다. 이제 그만하자, 라고 생각하니 그를 쥐새끼처럼 몰아대던 긴장이 탁 풀렸다. 자조가 절로 나왔다.
‘나 진짜 왜 이러냐….’
고양이가 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럴 기회가 생기자마자 그는 포기했다. 마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순간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허무했다. 어떤 이유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뭘 원했던 것인지. 자신은 누구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뻥 뚫린 공허를 보고 있었다.
‘이제 어쩔까….’
항상 해야 할 것만이 가득한 그의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이럴 때도 분명히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왼쪽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이것도 안정훈이 사준 것이었다. 유인하의 취향과 달리 화려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는 데는 뭐든 상관없는 것이었는데. 10시가 다 되어 갔다.
‘이제 자러 가겠네….’
왜일까.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별로 지금이랑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데. 지금 그는 평생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 남자랑 상관있는 일도 아니다. 아니, 어찌 보면 지금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한심해….’
이런 순간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떠올리면 그립고 동시에 가슴이 아프기만 하다. 고작 두 달, 고작 고양이…. 그런 것을 잊지 못하는 자신이 그 개념만큼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고양이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것에도 정을 두지 않는 남자라고 한다. 전부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만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면?
“인하야!”
바로 따라 나왔는데도 안정훈은 차를 끌고 나오느라 유인하를 놓쳤다.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치여도 상관없다는 듯이 차를 몰고 온 안정훈이었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모습을 보고 반쯤 태운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타, 인하야.”
안정훈이 몸을 조수석으로 완전히 굽혀 문을 열어주었다. 유인하는 잠깐 그 문을 보고 있다가 차에 탔다. 문을 닫고 창문을 올리니 거리의 소음이 차단되었다. 다시금 좀 더 숨통이 트였다. 고급 자동차의 중후한 진동과 가죽 카시트의 안락함이 느껴진다. 안정훈은 아까와 달리 안전 운전을 하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큰길로 나갔다.
안정훈은 운전을 하면서 조수석에 앉은 유인하의 눈치를 잔뜩 보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은 유인하만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 인하야, 걱정하지 마.”
“뭘.”
“나 진짜 돈 많아. 평생 아무 일도 안 하고 호강하면서 살 수 있어.”
말하고는 저도 모르게 귀가 빨개졌다. 역시 너무 이상한가? 전에 같이 살자는 말을 처음 할 때도 이렇게 긴장했었다. 친구끼린데. 이런 말은 어색한 것일까?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인하 얼굴을 봐. 인하도 알고 있어. 이제 나밖에 없다는 걸. 그렇잖아? 성우가 정말 경찰서에 신고하면…. 아니, 상황이 어떻게 되든 하나도 안 중요해. 중요한 건, 중요한 건 인하야….’
이제 다 된 것이다.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상할 정도로 안정훈의 생각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안정훈은 벌써부터 희열감에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손에 땀이 잡혔다. 안정훈의 시선은 전방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망막엔 이상한 이미지가 점멸하는 것 같았다. 마치 영화 프레임 속에 숨겨진 광고처럼 인식하지 못하는 새 각인된 망상의 단편들이다. 맞잡은 손, 붉어진 피부, 겹쳐진….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마.”
유인하는 짜증을 냈다.
“지, 진짜야. 통장 보여줄까? 또 제주도 갈래? 기분 안 좋지? 내일 아침에 다시 갈까?”
안정훈은 또 핀트가 나간 대꾸를 했다. 그의 얼굴은 유인하의 눈치를 마구 보면서도 들뜬 얼굴이었다. 신호 때문에 차가 서며 그는 필요 이상으로 유인하에게 몸을 기울였다. 대답을 재촉하는 표정이다. 얼굴이 벌겋고 눈빛이 이상하다.
“인하야….”
유인하는 안정훈을 볼 때마다 느꼈던 불쾌함이 최대치로 솟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납죽 복종하는 것 같지만 가장 원하지 않을 때에 가장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선을 넘었다. 아는 것 같은데 모른다. 그래서 눈치가 없다고 여겼는데 어느 순간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묘하게 따라붙는 시선, 시험해보는 듯한 언행, 거부하기 힘든 복종. 옛날에는 그저 신경에 거슬리는 정도에서 그쳤던 그 모든 것들이, 느슨한 올가미가 어느샌가 목을 조이고 있는 것처럼 몸서리쳐졌다.
“떨어져!”
유인하는 부정적 감정을 한껏 드러낸 태도로 그를 퍽 하고 밀어냈다. 안정훈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맞은 곳이 아팠다. 놀라고 그 후엔 얼떨떨했다.
‘왜 좋아하지 않지?’
안정훈은 어리둥절한 감정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뒤에 있는 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어 있었다. 안정훈은 일단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그리고 안정훈은 적절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유인하가 또 화풀이를 한 것이다. 김성우 때문에 그는 기분이 안 좋을 것이다. 자신이 성급하게 굴었다. 하지만 성급하게 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자리를 파투를 내고 나왔으니 고소를 당해도 상관없다는 것 아닌가? 고시를 포기할 생각을 한 것이 아닌가. 그에게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여느 때보다도 안정훈이 가장 절실한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일부러 그러지 않아도 돼, 인하야.”
삼성동을 넘어갈 때쯤 안정훈이 최대한 흥분감을 억누르며 말했다. 유인하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뭘?”
“싫은 척 사양 안 해도 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줄 수 있어. 자존심 때문에 못 받아들이는 거 다 알아. 그럴 필요 없어.”
“뭐?”
차가 이상한 곳으로 가기 시작했다. 강남과 송파의 사이에 있는 탄천의 주차장이다. 강남의 화려한 조명에서 벗어나 칠흑같이 어두운 곳이었다.
“내가 너 평생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안정훈은 울렁거리는 얼굴로 유인하를 보았다. 유인하도 눈을 크게 뜨고 안정훈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안정훈은 너무나 답답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때 남산에서와 비슷했다. 뭔가를 전달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너 도대체 왜 이러냐?”
유인하는 인상을 쓰고 안정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안정훈은 지금이 중요한 순간임을 알았다.
‘어떡하지?’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무언가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렇게나 원해오던 게…. 그렇기 때문에 안정훈은 약간 패닉에 빠졌다. 머릿속으로 다시금 원치 않는 이미지들이 명멸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게 뭔지 보였다. 자신의 입으로 무슨 말이 튀어나오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나불거렸다.
“난 너한테 뭐든 해주고 싶어.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있어 줘.”
남산에서 이렇게 말했을 때 유인하는 안정훈을 다시금 믿어주었다. 그리고 함께 있어 주었다. 함께 있는 동안 정말 행복했다. 그러니까 이게 맞을 것이다.
“하….”
유인하는 순간 머릿속으로 김성우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유인하는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차 안이라 각도가 잘 안 나왔지만 퍽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갑자기 주먹질을 당한 안정훈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뺨을 붙잡은 채 유인하를 돌아보았다. 미묘한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서, 유인하는 여지껏 없었을 정도로 분노했다.
“김성우가 그 말 했을 때는 별 좆 같은 말을 다 한다고 생각했는데. 너 진짜로…, 하, 씨발, 너 진짜 나한테, 이 씨발, 너 진짜 변태 새끼냐? 이때까지 나한테 좆질 하고 싶어서 그런 거냐고, 어? 그렇게 친구, 친구 하더니!”
유인하의 목소리는 경멸과 분노, 딱 두 가지만을 아주 강렬하게 담고 있었다. 안정훈은 입을 딱 벌렸다. 안정훈은 그런 생각 따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그가 비수로 숨기고 있던 가장 은밀한 곳을 푹 찌른 것만 같이 느껴졌다.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지금껏 외면해 왔던 수많은 기억과 망상들이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치 유인하의 말을 스스로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 그들은 친구들과 함께 몰래 술을 사 와서 마셨다. 유인하가 취해서 잠들고 난 후 안정훈도 취한 척 그의 침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몰래 그를 만져보았다.
대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 친구들이 다시 모여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도, 유인하의 자취방에 갔을 때도, 그가 올해 2차 시험을 치고 나서 술에 취했을 때도.
들킬까 봐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손에 땀이 잡혔다. 그가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쁜 짓이라는 것도. 착한 자신이 할 만한 짓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언제나 필사적으로 잊어버리려고 했다.
자고 일어나면 언제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하지만 착한 자신이 했다고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짓이라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점점 더 유인하에게 비굴하게 굴었다. 그것으로 보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럴 기회를 잡을 때마다 점점 더 그를 만지는 손길이 대담해지고 그다음엔 빨리 잊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그에게 이미 많은 것을 주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정당화했다.
안정훈은 볼기를 맞은 망아지처럼 화들짝 놀랐다. 스스로의 기억과 생각에 놀랐다.
“아, 아니야! 난, 난 그냥 항상 네가 좋아서…! 그러니까 친구로…! 절대 그런 이상한 거 아냐! 절대로…! 난 그냥 네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어! 성우가 왜 그런 말을 해, 했는지 모르겠어!”
안정훈은 곧바로 고개를 마구 저으며 해명하기 시작했다. 유인하는 이미 심증을 굳힌 얼굴이었다.
“씨발, 그래, 내가 너 이상하다고 처음부터 생각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더라고. 이제 알겠네. 네가 지금까지 그딴 생각 하면서 나한테 들러붙었다고 생각하면 구역질이 다 난다.”
분명히 유인하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마음에 안 드는 상대에게는 상처받는 말을 잘 내뱉는 타입이었다. 그래도 안정훈은 이상하게 그게 괜찮았다. 귀엽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 것 알 수 없었다.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평소처럼 바로 그에게 애원하고 용서를 빌 수가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눈을 크게 뜬 채 화가 잔뜩 난 유인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친구, 친구 하면서 뭐든 해주겠다고 하고 책임지겠다고 하냐고, 어? 들을 때마다 소름이 다 돋더니. 하, 씨발, 살다 살다 내가 별꼴을…. 허튼 생각하지 마, 씨발. 누가 너 같은걸…!”
유인하는 지금까지 오랜 시간 바보같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인간과 함께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런 것을 구별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태어나서 이렇게 화가 난 적은 처음이다.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모든 실수와 판단 미스의 총합으로 나타났다.
‘씨발, 씨발, 씨발…!’
안정훈 같은 병신은 고등학교 때 이미 걸렀어야 했던 것이다. 자신을 잘 따른다고 그 느낌을 무시하고 그냥 두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으면 모를까 안정훈을 볼 때마다 그는 불쾌함을 분명히 느꼈다.
유인하에게 안정훈 같은 인간이 안정훈만 있었던 건 분명 아니었다. 세상에는 유인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주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히 달랐다. 뭐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짓을 시키며 시험해보기도 했다. 그러면 뭔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다 했는데, 그래서 유인하도 까먹고 말았다. 그의 복종으로 우월감에 젖어 무엇을 위해 그런 짓을 시켰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유인하는 또 스스로에게 실망한 것이다. 스스로가 안목이 없음에. 그래서 이렇게 분노한 것이다.
“다시는 연락하지 마라.”
유인하가 조수석의 손잡이를 잡았다. 안정훈은 깜짝 놀라 그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변명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빌어야 했다. 그의 기분을 풀어줘야 했다. 오해라고,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냥 자신은 순수한 의도로, 친구를 위해서 이러는 것뿐이라고 말해야 했다.
“나는… 난… 그냥… 난 널 처음 볼 때부터….”
안정훈은 유인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강렬한 이미지가 또 하나 떠올랐다. 그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뻤기 때문이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냥 좋아서…….”
안정훈은 심하게 야단을 맞은 커다란 강아지처럼 움츠려 있던 그의 불쌍한 눈동자에서 그 순간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어…?”
안정훈은 자신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를 보고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더듬었다. 스스로도 자신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당황스러웠다. 뭔가를 들킨 것처럼. 뭔가 들켜선 안 될 것을 들킨 것 같았다. 상대에게도, 자신에게도.
안정훈은 막 울려고 하는 아이처럼 입술이 삐죽거리더니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했다. 유인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손은 놓을 수가 없어 자신이 잡고 있는 그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스스로도 한번 생각해보지 못했던 말들이 입에서 줄줄 나오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좋아해서 미안해. 미안해. 좋아해. 난 네가 너무 좋아서,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 좋아서… 네가 원하는 건 전부 해주고 싶었어.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좋았어. 미안해….”
그 말은 유인하뿐만 아니라 안정훈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유인하는 당황과 경멸이 뒤섞인 얼굴이었지만 안정훈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뭐야, 이런 말 하면 안 돼. 인하가 싫어한다고. 병신이야? 거기다 대고 좋아한다고 하면 인하가 얼씨구나 하고 받아줄 것 같냐? 한심한 새끼. 도대체 왜 이런 거야? 잘하고 있었잖아? 고지가 코앞이었는데!’
머릿속에서 울리는 말대로 유인하는 경멸이 가득한 얼굴로 안정훈의 손을 뿌리쳤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씨발, 기분 나빠…. 앞으로 아는 척도 하지 마라. 아, 좆 같으려니까 별게….”
유인하는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안정훈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모든 것이 혼란에 혼란이었다. 자신의 고백도, 그에 대한 유인하의 반응도.
그런데도 가장 견딜 수가 없는 건 자신이 이미 이 모든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그의 불행을 볼 때마다 그가 점점 자신의 것이 되어간다고 착각했다. 아니, 착각하려고 했다.
‘아, 이제 끝났어.’
모든 것이 슬로 모션처럼 느껴졌다. 그는 앞으로 절대로, 절대로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인하는 절대 날 좋아하지 않아. 내가 어떻게 해도 날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가끔만 만날 수 있어도 그것이 뛸 듯이 기뻐서,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조금만 더 함께하려고 한 것뿐인데…. 그것 말고는 더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가 죽어도 김성우에게 사과하지 않은 것처럼 그는 죽어도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게도 ‘우리는 친구’라고 속였다.
안정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상심한 얼굴로 눈물을 훔쳤다.
‘그냥 빨리 따먹을걸….’
*
“…….”
안정훈은 자신의 생각에 살짝 놀라 굳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가려운 곳을 아주 살짝 건드리기만 했을 뿐이다. 그런 건 오히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럽게만 만들 뿐이다.
왜?
‘아니야.’
지금이라고 왜 못해?
‘아니라고.’
큰 검은 눈동자를 가진 커다란 소년 같은 안정훈이었다. 눈물을 훔치는 그의 모습이 퍽 동정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미 실연의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히 고통스러웠다.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 마음을 우정으로 가려서라도 평생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함께 있지 않은 미래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절망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고통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또 다른 자신이 있었다.
웃기지 마. 그냥 따먹어 버려. 넌 알고 있어. 지금까지 항상 그러고 싶었잖아. 그러니까 인하 앞에서 그렇게 병신같이 군 거 아냐. 발정 난 개새끼처럼.
“아니라고. 아니야. 이렇게 좋아하는데….”
안정훈은 목소리를 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괴로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의미부여를 해왔던 마음이, 가장 소중했던 것을 어느새 스스로 심각하게 오염시켜 놓았다. 한참을 울었다. 눈물만이 마치 순수의 증명인 것처럼.
“…….”
그러다 기이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이상했다. 훌쩍거리면서 밖에 있는 유인하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밖에서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해놓고,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해놓고.
‘왜?’
유인하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고시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안정훈이 사준 수많은 물건들을 두고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인하는 자존심에 죽고 자존심에 사는 인간이다. 입이 찢어져도 솔직하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인하도 날 원하고 있어.
안정훈은 눈을 크게 떴다. 솜털이 삐죽 섰다.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보같이 질질 짜지 마, 등신아. 인하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는 거 알잖아. 내가 없으면 인하가 앞으로 어떻게 살겠어? 인하한테는 어느 때보다도 내가 필요해. 인하가 ‘진짜’ 원하는 걸 줘. 그러면 나도 인하를 가질 수 있다고. 아무것도 늦지 않았어.’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였다. 저럴 줄 알았다. 안정훈은 주먹으로 자신의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그래, 맞는 말이다. 등신같이 울 때가 아니었다.
‘인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인하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몰라. 눈물이 가신 안정훈의 얼굴은 차분해졌다. 전에 없을 정도로. 그리고 잠깐 운전석에 앉아 살짝 내리뜬 눈으로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유인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관찰하는 맹수처럼. 그런 자신의 변화를 안정훈 본인도 인지하지 못했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라이터의 부싯돌을 신경질적으로 튕기며 담뱃불을 붙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젠장.”
김성우와의 일로 자포자기하여 그로기 상태에 빠져 있었다. 더 이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서 아무런 생각도 안 날 정도로. 그리고 그럴 때면 늘 그랬듯이 또 누군가가 유인하가 가장 약해진 순간을 노렸다.
그 누군가는 언제나 그때의 유인하가 가장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었다. 가장 믿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가장 의지했던 사람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씨발, 존나 좆 같았다.
그래서 자연히 유인하는 사람 같은 건 잘 믿지 않게 되었다. 특히나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일수록 더 믿지 않았다. 유인하는 언제나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시험했고 그 시험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것은 다름 아닌 안정훈이었다.
유인하는 언제나 안정훈을 의심했다. 그의 애정은 처음부터 너무나 순수하고 무조건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땐 숨 쉬듯이 그를 괴롭혔다.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으라고 하거나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매게 하며 장난이라는 미명하에 온갖 셔틀짓을 다 시켰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말에 거역하거나 꺼려하는 것 같으면 쉽게 그를 내치려고 했었고, 그럴 때면 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매달렸는지 모른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하찮게 그를 취급했다. 그런데도 그는 바보같이 유인하의 괴롭힘을 전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느샌가 유인하는 그의 그 바보 같음을 믿게 되었다.
아니, 믿게 만들었다. 이것은 배신이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라고?! 씨발, 그래, 저 새끼는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상한 거 알았다고. 씨발, 이걸 못 걸렀다고, 내가? 씨발, 진짜 개 같다. 씨발. 씨발! 내가 진짜 합격한다. 좆 같은 새끼가 누굴 우습게 봐?’
유인하는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았는지 드디어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는 그 누구한테도 업신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인하 앞에서 개처럼 기던 안정훈이 유인하를 능욕하려고 지금껏 벼르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김성우의 말만 머리 속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맞을 것이다. 아니, 그걸 곧이곧대로 좋아한다고 시인한 게 더 열 받는다. 유인하는 자신을 향한 욕망의 눈빛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유인하는 솟아오른 분기 때문에 담배만 뻑뻑 피우고 있다가 안정훈이 차에서 나오자 칼로 찌를 것 같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차의 반대편에서 서서 가만히 유인하를 바라보았다.
“너 같은 새끼가 제일 최악이야. 친구? 하, 씨발. 이 개새끼가.”
“…….”
“어디서 똑바로 쳐다봐? 무릎 꿇고 빌어도 죽여버리고 싶은데!”
유인하는 여전히 그를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하는 것도 완전히 병신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인하는 무의식적으로, 언제나처럼 자신이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빈다’는 개념을 먼저 들먹인 건 유인하였다. 빌면? 용서를 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안정훈이 가까이 다가오자 유인하는 자신이 오른손으로 불이 붙은 담배를 쥐고 있으면서도 그의 얼굴을 다시 후려치려고 했다. 얼굴을 지져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팔을 잡아서 그대로 차에 쿵 밀어붙였다. 유인하는 싸움에 나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방심했다.
“윽…!”
가슴을 차에 세게 부딪쳐 순간 숨이 막혔다. 유인하는 순간 숨을 못 쉬었다가 거세게 기침을 했다.
“가만히 있어.”
안정훈의 목소리가 본래대로 낮아졌다. 안정훈 스스로도 생소하게 느껴지는데 동시에 아주 오랫동안 많이 들은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본래 목소리였다. 평소에 유인하의 앞에서 무해한 척, 어린 척, 바보 같은 척하던 그의 과장된 어투와 목소리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쥐새끼 하나 돌아다니지 않는 곳이라 조용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목의 털이 오소소 돋을 정도다.
“놔!”
유인하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유인하는 몸부림을 쳤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팔을 허리에 꺾어 누르고 다른 팔로는 등을 꽉 눌렀다. 몸부림도 칠 수 없어졌다.
“으윽…!”
유인하는 괴로워했다. 그의 헐떡거림이 감미로웠다. 안정훈은 잠깐 그대로 유인하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에게 이렇게 거칠게 행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뭐야? 정말 할 수 있잖아?
안정훈은 분명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하지만 동시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자신을 코끝으로 부리던 상대를 짓누르고 있었다. 짜릿함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발목에 매여 있던 엉성한 사슬을 부숴버린 코끼리가 된 것 같다.
안정훈의 눈에 유인하의 손에 들려 있는 담배가 들어왔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고 독하기만 한 종류의 담배였다. 안정훈은 자연스럽게 담배를 쥔 유인하의 오른손에서 담배를 빼앗았다. 왼손으로 그것을 쥐고 입에 물고 가볍게 빨아들였다가 뱉었다. 흔들리는 물빛에 가느다란 담배 연기가 약간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유인하는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대학 때 유인하가 막 담배를 배워 피울 때였다. 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섹시해 힐끔힐끔 많이 훔쳐봤다. 바닥에 떨어진 꽁초가 아니라 그의 입술에 닿은 담배를 훔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몹시 꾸짖고 외면했다.
‘뭐야. 진짜 쉽잖아?’
안정훈은 짧게 웃었다.
유인하는 커다란 외제차에 딱 달라붙은 채 왼손으로 어떻게든 몸을 띄워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안정훈은 그가 발로 자신을 차지 못하도록 발로 그의 오른발을 옆으로 확 벌렸다. 그리고 그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넣었다.
“으윽…!”
유인하는 분명히 싸움을 잘하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이렇게 제압당한 채로 체급 차이가 이 정도로 나면 답이 없었다. 안정훈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운동을 열심히 해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싸움을 잘하는 유인하를 다분히 의식한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 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서른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 안정훈의 모든 것은 유인하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안 바랐다는 건 거짓말이야.”
그가 입을 열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안정훈은 놀란 기운 없이 다시금 차분해졌다. 약간의 유쾌함도 느껴진다. 솔직함은 미덕이지 않던가. 유인하가 겨우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한 말 중에 거짓말이 아닌 게 있기나 해?”
유인하가 말했다. 안정훈은 바로 받아쳤다.
“너야말로 거짓말쟁이잖아.”
“너 같은 새끼한테 굳이 거짓말까지 할 정도로 신경 써본 적 없는데, 이 미친 새끼야?”
유인하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는 안정훈의 변모에 당황한 티도 내지 않았다. 그러면 자신이 더 강해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안정훈은 그대로 담배를 끝까지 빨아들이며 유인하의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깐 그렇게 신경전을 벌였다.
“으윽…!”
유인하는 자신의 팔을 빼내려고 다시금 몸을 크게 흔들었다. 안정훈은 담배 연기를 뱉으며 자연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인하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지 않기 위해서였다. 소중하지 않아서 이러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말했다.
“넌 인생을 너무 피곤하게 살아.”
“뭐라고?”
“이렇게 좋은 걸 가지고서.”
안정훈이 담배를 쥔 왼손으로 유인하의 머리를 만지며 엄지로 뺨을 쓰다듬고 목과 등과 허리까지 스윽 쓰다듬었다.
“부드러워….”
안정훈이 중얼거렸다. 유인하는 굴욕감에 이를 악물었다. 눈앞이 벌게졌다.
이제껏 안정훈은 보는 사람이 다 이상한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무해한 언행을 반복해왔다. 분명히 이건 아닌데, 싶은 순간에도 그는 언제나 개가 배를 까 복종하는 것처럼 굴어왔다. 그것이 아주 오랜 시간 반복되고 익숙해져서, 심지어 이제는 당연하게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그는 마치 ‘극단적으로 무해한 안정훈’의 반대쪽에 있는 ‘극단적으로 유해한 안정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도대체 얼마나 배신당하고 또 배신당한 것인지 셀 수조차 없다. ‘믿었기’ 때문에 화가 난다. 이상함을 느꼈으면서도 믿다니. 상대방과 스스로에게 동시에 화가 난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유인하의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안정훈의 들뜬 눈빛이 지금은 훨씬 명료하고 견고해 보여 이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니, 무슨 일을 저질러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만 같은 눈빛이다. 괴리감이 상당했고 당연히 더 좆 같이 느껴졌다.
안정훈은 오른손 하나로 유인하를 자신의 차에 꽉 붙여 놓은 채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손으로 그의 왼쪽 엉덩이를 가볍게 쥐었다. 마치 물건의 상태를 살피는 것 같았다. 유인하는 흠칫했다.
“뭐 하는 거야, 이 개새끼야….”
“지금까지 몇 명이랑 해봤어? 남자는 없지? 내가 알기로 네가 누구랑 사귄 건 1학년 때 하은인가 하윤인가가 다인데. 걔랑은 얼마나 했어? 또 누구한테 주고 다녔어?”
안정훈이 그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서 물은 적은 없었지만 항상 궁금했던 것이었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던 것을 드디어 하나 내놓으니 그것만으로 상쾌해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모욕적인 말과 행동에 유인하의 얼굴이 벌게졌다.
“손 안 떼?”
안정훈은 유인하의 엉덩이를 보면서 한 번 더 주물렀다. 그리고 유인하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아직도 예쁘긴 하지만…. 솔직히 이제 언제 처져도 이상하지 않잖아?”
기분이 좋아진 안정훈은 농담이라도 하듯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심지어 유인하에게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유인하는 이를 갈았다.
“이거 놔.”
“널 따먹고 싶어 하던 놈이 나만 있었을 것 같아? 그런 널 지켜줬던 게 누구일 것 같아?”
“안 놔?”
유인하의 목소리가 분노에 차서 떨렸다. 안정훈은 그의 엉덩이에서 손을 떼고 짧아진 담배를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검지로 담배꽁초를 튕겨 아무렇게나 버렸다.
그가 엉덩이에서 손을 떼서 겨우 한숨 돌리나 싶었던 유인하였다. 하지만 안정훈은 그대로 유인하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하지 마, 이 개새끼야!”
“쉬이.”
안정훈이 유인하의 귀에 속삭였다. 안정훈은 기분이 점점 더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더욱 확신에 찼다.
‘이게 인하가 원하는 거야.’
심지어 입고 있는 바지와 속옷마저도 전부 안정훈이 사준 것이었다. 그대로 엉덩이와 다리를 훤히 내놓은 채 짓눌려 있었다. 그런데도 유인하가 살기를 담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협박했다.
“절대 가만 안 둬. 네가 아무리 빌어도 절대 용서 안 할 거라고.”
안정훈이 피식 웃었다.
“네 그런 점 좋아해.”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안정훈은 다시 유인하의 머리를 만졌다. 유인하는 머리를 흔들어 그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유인하는 누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걸 아주 싫어했다. 굴욕감에 지금 당장 안정훈을 찔러 죽이라고 해도 찔러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정훈이 일부러 유인하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귀에 속삭였다.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다. 오랜 시간 억지로 눌러왔던 그의 가장 어두운 욕구가 폭발했다.
“사실 누구라도 상관없었지? 벌레 같은 인간이라도 넌 결국 다리를 벌렸을 거야. 널 떠받들어주기만 한다면. 안 그래?”
진창 속에 핀 장미. 유인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강했다.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 그의 영민함과 의지는 빛을 발했다. 그는 젊고 아름답고 강하고 위태롭다. 누가 그의 매력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모든 것은 한계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포기하고 싶어 했다. 누군가가 그를 꺾어 주길 바랐다. 편해지길 바랐다. 그러니까 자신이 편하게 해줄 것이다.
몸부림을 치는 유인하의 등 뒤에 안정훈이 천천히 몸을 붙여왔다. 허벅지와 허벅지가 맞닿고 엉덩이가 그의 하반신에 눌러지고 그의 입술이 귀에 닿을 듯했다. 유인하는 절대 지지 않고 안정훈의 눈을 노려보았다. 안정훈도 살짝 내리뜬 눈으로 유인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아무리 비싼 척 굴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
유인하의 귀에 입을 맞추듯 가까이 대어 속삭이자 유인하가 고개를 흔들어 바로 떨쳤다.
“안 떨어져? 이 변태 새끼가…!”
안정훈은 그런 그를 비웃었다.
“누가 비위를 맞춰주고 치켜세워주면 정말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줄 착각해서 우쭐해 하는 게 귀엽더라.”
어째서일까. 지금 중요한 것은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안정훈의 말과 태도가 심장을 찔렀다. 이딴 얄팍한 매도의 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걸 아는데도 그의 말에 당장 반박하고 싶어 울컥했다. 결국 유인하는 그의 말을 받아쳤다.
“우쭐하긴 누가! 멋대로 들러붙은 게 누군데!”
유인하의 말에 안정훈이 웃었다.
“쥐뿔도 없는 너한테 들러붙는 놈들이 왜 그렇게 많았을 것 같아? 네가 진짜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원래 예쁘고 돈 없는 년한테는 남자들이 개떼같이 달려드는 거야. 특히나 너처럼 흘려 대면….”
“헛소리하지 마, 이 개새끼야.”
유인하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안정훈은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안정훈이 갑자기 얼굴을 확 가까이하자 유인하가 흠칫하며 얼굴을 뒤로 물렸다. 상대의 미지근한 숨결이 콧등에 앉았다. 안정훈의 눈빛은 먹잇감을 보는 짐승의 눈빛이나 다름없었다. 안정훈은 그대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유인하의 입술을 보면서 자신의 입술을 잠깐 핥았다. 그리고 입맛을 다셨다.
남산에서의 일이 기억이 났다. 그때 유인하의 입술을 빤히 보면서 자위를 했다. 그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넣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유인하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찌를 것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자신의 것을 물고 있는 그의 얼굴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절경일 것이다.
‘못 참겠어….’
더 이상 왜 참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덮쳐버리자고 드디어 마음먹었다. 그때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해 왔던가. 사실 아무것도 참을 필요가 없었다. 유인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유인하 본인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그가 반반한 얼굴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아는데도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자존심만 고고하게 높아 앞만 곧게 쳐다보는 그를 볼 때마다 목이 바짝 말랐다. 왜냐하면 그러면서도 편해지고 싶고 포기하고 싶어 하는 그를 안정훈만큼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위태로움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빨리 손을 댔어야 했다. 서로를 위해서라도. 12년이나 걸릴 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응원의 말을 쉽게 읊었지만 어차피 정말 그가 원하는 건 그런 식으로 노력해봤자 가질 수 없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치만 귀여웠다고.’
안정훈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웃는 얼굴은 이 상황에 맞지 않게 어느 때보다도 순진무구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더욱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사실은 내가 좋았지?”
목소리만 들었을 땐 마치 사랑의 속삭임 같았다. 마치 연인 사이의 장난 섞인 놀림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유인하가 하, 하고 눈동자를 한 번 굴리고 그를 다시 노려보았다. 아주 기가 막힌다는 목소리였다.
“미친 새끼, 너 진짜 미친놈이구나.”
“네 말대로 키도 크고 잘생기고 이제는 돈도 많으니까. 날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쉽게 널 대단하다고 생각하니까. 넌 그런 얄팍한 걸 좋아하잖아.”
“망상도 작작 해라. 너 같은 건 그냥 호구라서 데리고 다녀준 것뿐이야.”
유인하가 찌를 듯한 눈으로 안정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탄천의 물이 한강과 합쳐지는 곳이다. 다리가 머리 위로 몇 개나 지나갔다. 분명히 도시의 불빛이 사방에서 반짝거리는 데 이곳은 너무나도 어둡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부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협박보다는 살살 꼬드기는 목소리에 가까웠다.
“이제 전부 포기했잖아?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너한텐 아무것도 없어.”
“닥쳐.”
“너한텐 나밖에 없어.”
그가 유인하의 귀를 핥았다. 유인하는 그를 떨쳐내려고 온 힘을 다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죽여버릴 거야.”
“불쌍한 우리 인하.”
그가 유인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뭐?”
유인하는 머리를 만지는 그의 행동에도, 감히 자신을 불쌍하다고 말하는 그의 말에도 굴욕감이 뻗쳤는데…. 어째서일까. 그 말에 필요 이상으로 흠칫했다. 자신을 불쌍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는데.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많이 힘들었지? 포기하고 싶었지? 누구한테든 기대고 싶었잖아. 이제 괜찮아.”
그리고 다른 어떤 말보다도 자존심이 상했다. 유인하는 크게 반발하여 그를 떨쳐내려고 했다.
“놔!”
“너한텐 내가 있으니까.”
안정훈은 유인하의 귓가에 천천히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의 숨이 뜨겁다. 소름이 끼친다. 그리고 그의 왼손이 유인하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아…!”
그의 손가락이 가슴이 닿자 유인하는 크게 움찔했다. 그리고 수치감이 확 몰려왔다. 그런 것 따위 느끼고 싶지 않은데도 그가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굴욕감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 마. 씨발, 죽여버린다. 만지지 마!”
“성우가 말해줄 때까지 진짜 몰랐어? 너 똑똑하잖아. 성우는 처음부터 눈치채더라.”
“그래서 둘이 사람 가지고 노니까 좋냐? 어?”
“사람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는 건 너였지.”
안정훈이 말했다. 유인하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를 떨쳐낼 수가 없어 씩씩거리며 차에 이마를 박았다. 그가 중지와 엄지로 젖꼭지를 꼬집었다. 차를 짚고 있던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젠장, 둘 다 죽여버릴 거라고!”
그는 그간 한 살도 먹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껏 그렇게 인식해온 것이 섬뜩할 정도로 크고 성숙한 남자가 있었다. 이런 짓을 할 정도로 잔인하고 안하무인인 놈이다. 아까 룸살롱에서 하는 짓을 보고 진즉에 눈치를 챘어야 했다. 아니, 어느 때라도. 속았다.
“많이 상처받았어? 배신감 들어?”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유인하가 부글부글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안정훈이 물었다.
“왜? 나로는 부족해?”
“누가 너 같은 걸!”
유인하가 화를 버럭 냈다. 안정훈이 그의 다리를 스르륵 검지로 쓰다듬었다. 피부에 전율이 흘렀다. 유인하는 그 느낌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안정훈은 재밌고 조금은 짓궂은 제안을 하듯 속삭였다.
“그럼 오랜만에 우리 친구들 만나서 한 바퀴 돌려볼까?”
“…뭐?”
“그러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
고등학교 때 자주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은 아주 많았다. 그중에서도 항상 같이 모였던 인원마저도 열 명이 넘는다. 유인하는 그들의 리더였다. 유인하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안정훈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안정훈은 웃었다.
“아까 말했잖아. 너 따먹고 싶어 했던 새끼들이 산처럼 수두룩했어. 전화해?”
그 시절을 가장 좋았던 때로 기억하고 있던 유인하는 충격을 받아 순간 말문을 잃었다. 유인하는 그들 모두를 자신보다 한 수, 두 수 아래라고 쉽게 판단하곤 했다. 그때의 친구들만큼은 언제나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사실 그들 모두가 먹잇감처럼 유인하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인가?
“…….”
안정훈은 마치 유인하의 마음을 어떻게 망가뜨려야 하는지 잘 아는 것만 같았다. 유인하는 그에게 휘말리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거짓말하지 마.”
안정훈은 유인하의 엉덩이에 자신의 몸을 꽉 눌렀다. 유인하는 왼팔로 그의 옆구리를 쳤지만 자세 때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말.”
안정훈은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왜 자신을 못 믿냐는 듯이 당장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바로 받았다. 유인하는 움찔했다.
“어, 승원아.”
-정훈아.
귀에 아주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학창 시절 안정훈보다 유인하와 친했다. 하지만 유인하가 모두와 연락을 끊고 지내는 동안 안정훈은 모두와 연락을 지속하고 살았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술 먹자고?
“아니, 나 지금 인하랑 있는데.”
-인하? 유인하? 인하 살아있어? 연락이 안 된다, 연락이. 우리 인하~, 진짜 보고 싶다. 같이 있어?
“응, 지금 인하랑 좋은 거 하려는데…, 너도 같이할래?”
그렇게 말하며 안정훈은 유인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너 옛날에 인하랑 하고 싶어 했잖아.”
-…어? 뭘? 어? 너… 지금 무슨 말 하냐? 야, 장난치지 마. 안 웃겨.
“인하도 너랑 하고 싶다는데.”
“씨발, 언제! 안 닥쳐?!”
유인하가 몸부림을 쳤다. 그러자 전화 상대는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뗐다.
-…진짜?
그 말에 유인하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몸부림을 다시 치기 시작했다.
“이거 안 놔?! 이 변태 새끼들이! 이거 놔!!!”
-난 네가 언젠가 일 칠 줄 알았다….
“응.”
-…어디야?
“여기 탄천 주차장.”
“싫어. 절대 싫어. 놔, 이 미친 새끼야!”
유인하가 뒤통수로 그의 얼굴을 가격하려다가 손을 쳐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유인하는 분노로 눈이 시뻘게진 상태였다.
‘씨발…. 씨발, 씨발!’
안정훈이 속삭였다.
“몇 명 더 부를까? 다섯 명? 여섯 명? 네가 원하는 만큼 불러 줄게.”
“죽여버릴 거야…. 전부 죽여버릴 거야….”
“한 바퀴 돌고 나면 너도 얌전해지겠지? 모르는 놈보단 너도 아는 얼굴이 좋잖아?”
안정훈은 배신감에 부들부들 떠는 그의 머리를 다시금 쓰다듬었다.
“성우도 부를까?”
“윽…!”
유인하가 그의 얼굴을 다시금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안정훈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꼬시지 마. 애들 다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지.”
“절대 싫어. 죽어도 싫어!”
“나도 억지로 하는 건 싫어.”
안정훈이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선택해.”
그는 유인하의 눈을 아주 가까이에서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항상 열에 들떠서 순진해 보이던 그의 크고 검은 눈동자가 명료하고, 분명 즐겁다는 듯 이채를 띄고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맹수처럼.
확실히 안정훈은 즐거웠다. 지금까지는 모든 걸 유인하의 결정에 맡겼기 때문에 아무런 진도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드줄을 이제 스스로 잡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유인하와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안정훈이 말했다.
“나만? 아니면 승원이? 다른 애들?”
“하…….”
유인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거대한 분노의 사이로 날카로운 불안이 솟아올랐다.
‘씨발….’
이런 선택에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자신의 인생은 온통 이런 선택투성이인 것 같다. 안정훈이 악마와 같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편하게 살아. 넌 그냥 부유하게 살고 싶은 거잖아? 나한테 다리 벌리면 전부 가질 수 있어.”
유인하는 그의 말에 다신 없을 모욕감을 느꼈다. 안정훈은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의 답을 이미 안다는 것처럼. 유인하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인상을 팍 썼다. 저주의 말을 마구 내뱉었다.
“너 같은 건 죽어도 싫어, 이 개새끼야. 이거 안 놔?! 죽여버릴 거야! 씨발, 너한테 당하느니 죽는 게 나아. 죽어도 죽여버릴 거야!”
유인하가 사납게 소리쳤다. 그러자 안정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나보다 다른 애들한테 돌려지는 게 낫다고?”
“그래!”
“…….”
유인하의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과 새카만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안정훈이 천천히 대답했다.
“…좋아. 그럼 승원이가 올 때까지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기다려볼까.”
그리고 둘은 말이 없어졌다. 그는 유인하에게서 애무하던 손을 떼고 더욱 강하게 유인하를 결박했다. 이미 몸부림을 치느라 힘이 많이 빠져버렸다.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유인하는 차에 이마를 박은 채 가빠지는 숨을 참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마를 차에 대고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말도 안 돼. 이런 거….’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이 번복을 불허했다. 차가 주차장 가까이 올 때마다 흠칫거렸다. 이승원일까?
두 사람이 자신을 붙잡고 다른 사람을 부르게 되면 몇 명이나 올까. 이런 곳에서 그런 짓을 당하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버릴까. 드디어 깨져버리진 않을까.
‘아니야. 절대 아니야. 이 새끼들 다 죽여버릴 거야. 그러면 돼. 어떻게든 복수할 거야. 절대 용서 못 해.’
작년에 0.5점 차로 시험에서 떨어진 이후로 유인하는 내내 무력감과 싸워야 했다. 스스로도 될 거라고 생각했던 고지에서 어이없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가진 건 쥐뿔도 없는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지키고 싶었다. 자신보다 못한 새끼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운이 없었다는 말로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루저나 하는 짓이다. 그렇기에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싸워오는 시간이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올해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 2차 시험 전 두 달을 허송세월하고 그러고도 친 시험이 합격권에 달하자 유인하는 자신이 미워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째서 스스로를 믿지 못했던가. 다들 말했다. 올해는 붙을 것이라고.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고작 고양이가 되었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포기해버린 것일까. 자신에게는 분명히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았는가. 그걸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포기해버릴 수가 있었을까.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그 어떤 동기부여도 힘들었다. 힘이 나지 않았다. 해야 할 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돌아올 건 너무나 작아 보였다. 뭘 해도 자신이 손해 보는 것 같고 바보 같고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반쯤 자포자기해서 현실을 회피하며 안정훈 같은 것이 주는 쉽고 즐거운 것들에 휘둘렸다.
좋았다. 그건 그 남자의 집에서 살 때도 느꼈다. 유인하는 돈이, 그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좋았다. 비싼 집, 좋은 물건, 맛있는 음식. 그런 걸 참지 않고, 기다리지도 않고 원할 때마다 덥석덥석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돈이 너무나 좋았다. 모두가 다시금 자신을 선망의 눈길로 보았다.
언제나 돈만 있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돈만 원하는 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욕망과 가치관이 부딪치고, 그래서 하루에도 기분이 수십 번은 오락가락했다. 안정훈이 이제 그만, 이라고 말하면 지금까지 누렸던 것을 아무것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그것을 자신이 아쉬워할 거라고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고작? 고작 안정훈 따위에게 아쉬움을 느낀단 말인가. 스스로에게 분노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나서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김성우가 고소를 한다느니 뭐라느니 할 때 또 기다렸다는 듯이 쉽게 주저앉았다.
‘씨발….’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약해진 자신을 노리고 지금껏 기다린 것이 안정훈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친구들은 모두 주변에서 사라져 갔는데도 그만은 곁에 있었다. 유인하는 언제나 그를 무시했다. 첫인상이란 건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고 그것을 당사자도 항상 수긍했지 않은가. 속았다.
‘절대 용서 못 해.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눈앞이 벌게졌다. 어떻게 하면 뒤에 있는 이 새끼를 정말로 죽여버릴 수 있을지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놀랍게도 사람을 별 탈 없이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무척이나 많았다. 유인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고개를 돌려 안정훈을 보았다.
“…그래, 네가 좋아.”
유인하가 그렇게 말했다.
그의 짙은 속눈썹에 감싸인 뚜렷한 눈동자가 마치 오물이라도 보듯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안정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평소처럼 약간 바보같이 보였다.
“다른 놈들한테 당하는 것보단 네가 낫지.”
“역시 그렇지?”
안정훈이 그 표정 그대로 말했다. 바보같이 보이는 게 아니라 유인하를 바보같이 보는 표정이었다. 유인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안정훈이 그대로 다시 유인하에게 달라붙었다. 한 번 거부를 당해서 그런지 약간 조급한 손길이었다.
“나쁘게 생각하지 마. 좋게 생각하려면 얼마든지 좋게 생각할 수 있잖아.”
“씨발, 이걸 어떻게 좋게 생각하라는 거야, 이 좆 같은 새끼야.”
안정훈의 커다란 손이 허벅지에 닿았다. 화인을 찍듯 뜨거웠다. 유인하는 인상을 잔뜩 쓰며 이를 갈았다. 그런 얼굴마저도 예뻤다.
“뭐, 좋은 경험이었다,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유인하가 사납게 노려보니 안정훈이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어때, 난 12년이나 네 개노릇 했잖아. 한 번쯤은 대줘도 수지가 맞는 건 너지.”
“닥쳐, 이 변태 새끼야.”
“그럼 돈이라도 벌래? 한 번에 백만 원? 2백? 어때? 너 돈 가지고 싶잖아. 그냥 좀 포기해.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할 수 있어.”
“씨발,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 보고, 씨발, 나 보고 너한테 창녀짓이나 하라고?!”
유인하가 발끈했다. 안정훈은 그게 뭐가 나쁘냐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한테도 나쁠 건 없잖아.”
“뭐라고?!”
“어차피 당할 거 돈이라도 받는 게 좋잖아? 아까부터 자꾸 손해 볼 선택을 하네? 왜 그래, 바보같이.”
그의 손이 다시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유인하는 흡, 하고 숨을 삼켰다.
“얼마 줄까? 너도 본전 찾아. 나도 본전 찾을 테니까.”
“아…!”
안정훈은 이렇게 강제로 하는 주제에 강제로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이 새끼의 머리 속에는 돈을 주고 하는 것이나 다른 놈들에게 단체로 당하기 싫어서 자신을 선택한 게 합의의 기준인 것인가? 진짜 사이코패스가 따로 없다. 유인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죽여버릴 것이다. 반드시. 유인하는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괜찮아, 인하야. 아프지 않아. 지금까지처럼 소중하게 대해 줄게. 귀여워해 줄게….”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면서도 그의 목소리가 귀에 꽂혀왔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씨발, 왜….’
유인하는 오른쪽 팔로 그의 옆구리를 다시 치려고 했지만 자세 때문에 제대로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안정훈은 살짝 상체를 들고 유인하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단전이 찌르르 떨렸다. 이날을 얼마나 고대해 왔던가. 마음속 깊이 숨겨 모르는 척해왔던 이 몸을 끓는 듯한 욕망. 처음 보는 그 순간부터 그를 덮치고 싶었다.
널 안으면 널 잃을 줄 알았던 날들도 있었다. 아니다. 사실은 반대였다. 널 안아서 부술 것이다. 널 안아서 가질 것이다. 아무리 부서져도 결국 너는 너일 테니까 상관없어.
유난히 새카만 그의 눈동자가 흥분에 조금 들떠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 거짓말이야. 조금은 아파도 되겠지? 처음이니까.”
“윽…!”
그대로 그가 몸을 밀어붙이자 유인하가 몸을 굳혔다.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실감이 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정말 당하고 마는 것인가. 안정훈 같은 새끼에게? 이런 미친놈한테? 그의 오른손이 유인하의 맨 엉덩이를 만지더니 이내 손가락이 비부를 꾹 눌렀다.
“좋아….”
안정훈이 유인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냄새를 맡았다. 엉덩이 사이에 무언가 닿아왔다. 유인하는 이가 부서져라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죽여버릴 거야.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유인하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언젠가 안정훈이 무릎을 꿇고 울고 불며 빌게 만들 것이다.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백 배는 더 처절하게.
양쪽 종아리는 안정훈의 양 무릎이 꽉 누르고 있었다. 자신보다 무거운 상대에게 눌린 유인하는 정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굴욕적인 일은 따로 알지 못했다.
유인하는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죽여버릴 거야.’
유인하는 눈을 감고 이를 꽉 깨문 채 안정훈의 손길을 느끼며 그렇게 되뇌었다. 거의 기도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이 쑥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비는 눈을 반짝 떴다. 그대로 밤의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4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