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자신이 천사인 줄 아는 악마(1부 2권) (3/7)

고양이 죽이기 1부 2권

How to Kill a Cat

3. 자신이 천사인 줄 아는 악마

고시생이란 건 분명 고시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인간일 테다. 특히나 5급 이상의 고시라면 누가 해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합격생의 평균 시험 준비 기간이 3년에서 5년을 넘는다. 뽑히는 인원은 고시생의 2% 안쪽이라던가.

98%의 사람들이 떨어진다는 것인데도 100%의 사람들이 자신만은 합격할 것이라 믿으며 0.5점 차로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잔혹한 게임에 뛰어든다.

어제까지 옆에서 공부하던 친구가 합격을 했으니 나도 합격할 것만 같고, 작년에 0.5점 차로 떨어졌으니 올해는 합격할 것만 같고, 오래 준비했으니 올해는 될 것만 같고.

매년 주어지는 그 2%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형편이 제법 되는 집이라도 기약 없이 몇 년이나 고시 뒷바라지를 해주는 것은 어렵다. 시간이 갈수록 고시생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정신적으로 힘들어진다. 고시 기간을 누가 경력으로 쳐주는 것도 아니고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니니 포기하면 그 기간 모두가 통째로 무용지물이 된다. 시간이 지난 만큼 다른 일에 도전하는 것도 어렵게 느껴진다.

나는 왜 합격을 못 하지? 내가 쟤보다 더 오래 공부했는데 왜 쟤는 합격하고 난 합격 못 해? 만약에 그 사람에게 트집이라도 잡을 곳이 있으면 더 완벽하다. 쟤가 젓가락질하는 걸 봐. 기침하는 걸 봐. 자세 좀 봐. 가정 교육 하나 제대로 못 받은 게 분명한데. 저 사람이 성격이 얼마나 개판인데. 유치해. 수준 낮아. 내가 분명히 더 나을 텐데.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뭔가 비리가 있을지도 몰라. 적어도 쟤보다는 내가 되어야 맞는 거잖아!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미쳐간다. 고시 준비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지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많다. 유인하의 앞집에 살며 맨날 게임만 하는 그 장수생도 내로라하는 명문대 출신이다. 그의 방에서는 언제나 악취가 나고 문밖에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내놓아 유인하도 집주인에게 여러 번 항의를 했었다. 소문으로는 그는 가족에게 자신이 고시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살고 있다고 한다.

유인하는 그를 참 경멸했는데, 거기엔 자신도 저렇게 될까 봐 무서운 마음이 숨어 있었다. 자신의 바로 앞집에 사는 한심한 인간. 그를 볼 때마다 유인하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안 돼. 난 공부하잖아. 나는 게임 안 하잖아. 고양이 동영상 하루에 30분 정도 보는 건 양호한 거야. 나는 하루에 10시간은 공부하잖아. 같은 집에 산다고 다 같은 사람이야? 아니야. 난 달라.

유인하는 옛날부터 타인을 쉽게 경멸했다. 열심히 공부를 안 하는 사람들, 공부 외의 유흥에 빠져드는 사람들, 고시를 포기할까 자주 고민하는 사람들, 고시를 포기하는 사람들, 심지어 죄 없는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심지어 사기업은 대기업이라도 불안정하다며 후려치곤 했다. 의사라고 해도 병원 차렸다가 망하면 어쩌냐, 페이 닥터로 월급 많이 받아도 그만큼 쥐어 짜인다, 예나 지금이나 나랏일 하는 게 최고라는 식으로 은근히 무시했다.

그렇게 선을 긋고 그 사람들을 배척하면 고시 외의 것과 불합격에서 멀어져 자신을 합격선 안쪽으로 밀어낼 수 있을 것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쌓여 유인하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합격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것이면서도 무언가 속에 쌓여갔다. 창창한 20대, 많은 시간을 고시 생활로 보내며 남들이 누리는 것 하나도 마음 놓고 누리지 못한 지난날들이 점점 더 억울해지기 시작한다.

젊음도 초라하게 만드는 무능력과 가난. 낙오자의 신분. 그것을 보상하기 위하여 합격은 영원히 푸르디푸르고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해야만 했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남에게도. 대단하고 특별해야 했다. 그렇게 과대한 환상을 가질수록 현실은 더욱 비참해질 뿐인데도.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현실도 꿈도 둘 다 기괴하게 왜곡되고 병들어갔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유인하를 고양이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비였다. 나비는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먹고 싶을 때 먹어도 되고 자고 싶을 때 자도 되고 자신이 아무렇게나 해도 모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뻔뻔하고 앙큼해도, 그걸 모두 포함해서도 심신 양면이 모두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나비의 노란 홍채 가운데 있는 동공이 동그랗게 열려 있어 귀여웠다. 나비가 울었다.

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나비는 ‘바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대한 분홍 젤리가 달린 앞발로 맹수의 후예답게 유인하를 자비 없이 짓밟았다. 콰직.

“헉…!”

유인하는 눈을 번쩍 떴다. 아주 생생한 꿈이었다. 인간이 발목까지밖에 오지 않는 거대한 고양이라니. 인터넷에서 스치듯이 본 고양이의 세계 정복 사진이 현실화된 것만 같았다. 화면으로 볼 때는 귀여웠는데 직접 당해보니 무섭다.

유인하는 몸을 일으켰다.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다. 주인과 같이 자는 습관이 드니 밤에 일어나 돌아다니던 버릇도 좀 없어졌다. 어차피 고양이는 많이 잔다.

‘뭔가 좀… 이상한데?’

뭐랄까. 갑자기 키가 매우 커진 느낌이다. 잠자리도 좁게 느껴진다. 습관적으로 오른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왼손으로 몸을 일으켰다. 고양이 세수를 할 참이었다.

‘손?’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이었다. 그러니까 오른쪽 앞발이 아니라 오른손이었다.

“!”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비명을 지를 뻔했다. 완전 깐 달걀 같은 전라였다. 인간의 몸통이 머리 아래에 달려 있었다. 등의 털이 곤두서야 할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식은땀이 흐를 뿐이었다.

“으음…. 나비야….”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렸다. 그리고 뜨거운 손이 침대를 짚고 있는 유인하의 손등에 닿았다. 유인하는 얼른 손을 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남자가 몸을 뒤척였다. 유인하는 일단 쏜살같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 욕실로 이어진 복도로 도망쳤다.

‘미미미미미쳤어미쳤어미쳤어사람됐어미쳤나봐나이제어떡해다시사람되는거였어왜왜왜왜한번고양이됐음끝난거지왜사람돼왜다시사람되는거야나보고이제어쩌라고’

인간의 몸은 털이 나지 않으니 자연히 알몸이 부끄럽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양팔로 허전한 몸을 감싸고 있다가 얼른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고양이일 땐 이 정도 밝기에서도 뭐든지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그는 드레스룸의 불을 켰다. 그리고 아무거나 잡아 입기 시작했다. 유인하도 작은 키가 아닌데 셔츠는 품이 크고 바지도 길었다. 셔츠를 바지에 넣고 허리띠로 허리를 조이고 바지 밑단을 접고 신발을 챙겼다. 그리고 드레스룸의 불을 껐다.

“…….”

옷을 입고 나니 다시금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꿈속에서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우습게도 사람에서 고양이로 변했던 것보다 고양이에서 사람으로 변한 것이 백만 배는 더 당황스러웠다. 유인하는 절대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아예 생각조차 못 했다. 마치 고양이로 바뀔 수도 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이러고 있으면 안 돼.’

패닉 상태에서도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는 존재했다. 밖으로 나가려면 다시 그의 침실로 들어가야 한다. 최대한 발을 세워 살금살금 나가는데도 고양이처럼 발걸음 소리가 지워지지 않았다. 고질라가 걸어가는 것처럼 쿵쿵거렸다. 그래도 이 침실은 대궐짝처럼 넓어서 멀리 돌아가면 저기 누워 있는 남자가 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캐노피 때문에 그 남자의 얼굴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날 보면….’

절대 어젯밤과 같은 눈빛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작별 인사마저도 사치였다. 유인하는 고개를 돌리고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방문을 열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매일 돌아다니던 길고 넓은 복도였다. 보이지 않은 복도의 코너에서 일찍 일어난 고용인들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어쩌나 불안했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최대한 조용히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삐리릭. 평소엔 신경도 안 쓰던 도어락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렸다. 그는 현관문을 나오자마자 달렸다. 여기는 CCTV가 엄청나게 많이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뛰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했다. 대문을 열고 높은 언덕을 쏜살같이 달려갔다. 새벽이라 보도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차는 제법 달렸다. 이태원역 근처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숨을 골랐다.

‘그 남자보다 먼저 일어나서 다행이다.’

간신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호등이 파란색이 되자 갑자기 달려서 얼얼한 다리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멍하기만 했다. 그렇게 계속 직선으로 걷다 보니 좁은 골목 사이로 고가 도로가 보였다. 거기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한강을 왼쪽에 끼고 반포대교까지 가서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걷고 또 걸어 서울 한복판을 통과해 어느샌가 신림역에 도달했다.

거기서부터는 마치 언제 잊은 적이 있냐는 듯 익숙하고도 익숙한 길을 걸어 자신의 쪽방 고시원 앞에 도착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반지하로 들어가니 앞집에서 나는 익숙한 악취가 났다. 그리고 몇 년이나 산 자신의 집을 보았다. 온갖 전단지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오래되어 칠이 벗겨진 철문 앞에는 고시원 주인이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 여러 개 있었다.

<연락이 안 되네요. 보면 전화 주세요.>

<혹시나 싶어 문 따고 들어가 봤는데도 없네요. 부모님한테 연락 주세요.>

유인하는 그런 것들을 전단지와 같이 바닥에 전부 떨어뜨려 놓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니까 악취는 앞집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두 달 전에 그대로 버려 놓고 나간,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쪽방 안에서도 썩는 냄새가 났다. 이부자리는 그때 나간 그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망연자실하다는 게 이런 것이었다. 얼이 빠진다는 것도. 걸어오는 동안도, 지금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아 입을 떡 벌린 채 하릴없이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한데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상했다.

‘이제 어쩌지.’

그러다가 퍼뜩 먹고 살 걱정이 났다. 그러자 공부 생각도 떠올랐다.

‘2달 동안 공부 하나도 안 했는데 학원도 다 빠지고…. 2주 뒤면 2차 시험인데….’

이대로라면 올해도 또 2차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2달이 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다. 공부를 어떻게 했었는지 전부 까먹은 것만 같다. 공포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었을까.

그깟 고양이가 됐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다 풀릴 거라고 생각했나? 평생 아무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갑자기 고양이가 됐으니 갑자기 인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지?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지? 당연히 생각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는 누구나 종종 있을 것이다. 유인하는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키라도 깎아 먹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껏 가장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졌던 때도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유인하는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현실적이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로또라도 당첨된 줄 알았겠지. 고양이? 그딴 거 몇 년이면 금방 죽어버리고, 아니, 그 남자가 질려서 나중에 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 들켰으면 그날로 끝이었어! 그딴 거에 인생을 전부 걸었다고? 미친 새끼. 그냥 나가 죽어라, 이 멍청한 새끼야.’

사람에서 고양이가 되었을 때보다 고양이에서 사람이 될 때가 더 당혹스럽다니. 원래대로 돌아간 것뿐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이제서야 떠올랐다. 유인하는 자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쳤다. 몇 번이고 쳤다. 생각 같아서는 허벅지라도 칼로 찌르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멍청하고 어리석은 스스로를 벌하고 싶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폐지를 줍는 건 일도 아니다. 아니, 이대로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면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자존심을 굽히고 다른 일을 하기엔 이미 너무나 먼 길을 지나온 것만 같을 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까, 그렇게 다른 직업이나 다른 사람들을 욕했는데 어떻게 다른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창피해서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 이 사실은 두 달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 다를 게 없었다.

‘정신 차리자.’

유인하는 침대와의 간격이 1m도 되지 않는 책상의 자리로 옮겨갔다. 자리에 앉아서 플래너를 펼쳤다. 이제라도 현실감을 되찾아야 했다. 2달 치나 뭉텅이로 넘기니 그만큼의 시간이 자기 인생에서 잘려져 나간 것만 같이 느껴졌다. 여태껏 그랬듯이 자신이 가진 것은 시간밖에 없었는데. 오늘 날짜를 펼치고 해야 할 것을 적었다.

휴대폰 찾기, 2차 족보 외우기(오늘부터 밤새우자), 밀린 월세+다음 달 월세 내기, 청소. 스터디나 다른 걸 하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유인하는 침구를 정리하고 책상 위에서 컵라면 그릇을 치우고 냉장고 안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을 전부 꺼내 쓰레기봉투 안에 넣었다. 얼마나 역했는지 모른다. 유인하는 언제나 자신이 이런 하찮은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책상과 바닥을 물티슈로 순식간에 닦아내고 밖으로 나가 전단지도 전부 안에 집어넣고 밖에 나가 쓰레기봉투를 내놨다. 그리고 다시 층계를 내려와 앞집 문에 노크를 했다.

“저기요. 앞집인데요.”

평소엔 마주치기도 싫어 본체만체하던 앞집이다. 몇 번이나 노크를 하니 욕설을 하면서 튀어나왔다.

“아, 왜요.”

문을 열자 집 안의 모든 것이 보인다. 유인하의 집과 다른 것이 없었다. 그의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 화면에 게임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팬티와 늘어난 민소매 티셔츠만 입은 키가 작고 뚱뚱한 남자다. 안경엔 기름때가 껴 있고 다듬지 않은 수염은 듬성듬성 나 있었다. 냄새가 났다.

유인하는 그 조합만으로도 얼굴 표정이 굳었다. 자신도 언젠가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격렬하게 부정하면서도 내심 두려워하던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여느 때보다도 강하게. 유인하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한데 제가 휴대폰을 잃어버려서요. 집주인 아주머니께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요?”

“내가 왜요?”

평소엔 유인하를 무서워하던 그였다. 지금은 별 한심한 인간을 다 본다는 얼굴로 유인하를 보고는 문을 쾅 닫았다. 저런 인간이 자신을 무시했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면서 이 인간이 휴대폰을 빌려주지 않으면 자신은 누구한테 휴대폰을 빌려서 연락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절박함이 심장을 죄었다.

‘아, 노트북…!’

노트북으로 연락을 하면 된다는 답이 떠오르자 얼굴이 확 빨개졌다.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바보. 바보바보.”

유인하는 다시 자신의 뺨을 두 손으로 때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고양이가 되고 나서 뇌세포라도 죽었나?

‘정말 그런 거면 어쩌지?’

유인하는 다시금 땅이 꺼지는 것만 같은 공포심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면 자신은 절대 고시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고양이의 머리로 사람도 못 하는 고시 합격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냐, 아냐…. 그렇지 않아. 절대.’

빨리 휴대폰 찾고 공부하자. 공부하면 돼. 유인하는 노트북을 틀었다. 10년 가까이 된 구식 노트북의 부팅은 무척이나 늦었다. 유인하는 손톱을 깨물면서 마우스를 초조하게 흔들었다. 부팅이 되자 얼른 비밀번호를 치고 카카오톡 로그인 화면이 뜨기를 기다렸다.

“왜 이렇게 느려!”

유인하는 초조함에 화를 냈다. 그리고 로그인 화면이 뜨자 비밀번호를 쳤다. 사람의 손을 사용하는 게 오랜만이라 오타를 냈다. 성질을 한 번 더 확 내며 벽을 발로 찼다. 그리고 다시 로그인을 했다.

그때 홧김에 프로필을 업데이트했던 게 마지막이었다. 그때와 달리 연락이 제법 와 있었다.

<합격했냐?>

<안녕하세요, 인하 씨. 아직 2차 아닌데….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혹시 로또라도?>

<설마 로또…?>

평소 자신의 행방이 궁금했던 사람들이 이 정도는 있었던 것일까? 평소엔 연락도 없던 사람들에게서도 메시지가 와 있었다. 프로필 사진과 프로필 사진에 달린 소개글 때문이었다. 유인하는 일단 프로필 소개글을 삭제하고 사진도 삭제하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아니야. 아무것도 말 안 해도 돼. 유인하는 프로필을 바꿨다. 그리고 그는 일단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제일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그동안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혹시 두 달 전에 고시원 앞에 제 휴대폰을 떨어뜨렸는데 가지고 계실까요?>

그렇게 카톡을 보냈다. 그녀는 빨리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사고가 좀 있었어요. 되도록 빨리 연락 주세요.>

1분이 지나도 집주인 아주머니가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자 유인하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푹푹 쉬며 드디어 다른 사람과의 채팅방을 살폈다. 평소 연락도 없다가 프로필이 바뀌니 연락이 온 몇몇 친구와 고시생들은 무시했다. 엄마와의 채팅방을 확인했다.

<인하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니? 전화도 안 되고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엄마 많이 걱정되니까 꼭 보고 연락 줘.>

<인하야, 합격한 거야? 합격한 거니?>

당연할지도 모르는 말들이었지만, 유인하는 그녀의 메시지를 읽는 것만으로도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유인하가 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한 게 몇 년이 지났는데도 유인하가 언제 1차, 2차 시험을 치는지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아직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 그녀는 분명히 자신의 아들이 걱정되어 이런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단지 모르니까 물어보는 것이다. 그녀를 걱정시킨 자신은 죄책감을 느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도 짜증의 감정이 훨씬, 훨씬 컸다.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있어요. 방해돼서 휴대폰 그냥 끄고 살았어요. 아직 2차 시험도 안 쳤어요.>

거짓말을 했다. 유인하는 일단 노트북을 밀어 놓고 고양이가 되기 전에 제본한 2차 족보를 꺼냈다. 공부 시간을 측정하는 타이머를 틀었다.

‘시간이 없어. 그냥 이것만 다 외우자.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유인하는 첫 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줄을 긋고 중얼중얼 외웠다. 머리에 들어오는 느낌은 아니었다. 너무 오랜만에 공부를 해서 그럴까. 자꾸 안 좋은 생각만 들고 쓸데없는 걱정만 들 뿐이었다.

이번에도 분명히 떨어질 거라고, 이래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거라고, 이제 와서 공부해봤자 결과는 똑같을 거라고. 이런 생각이야말로 지금 유인하에게 하등 소용없는 생각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옛날엔 이러지 않았다. 하지만 여느 때보다도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자책만 깊어질 뿐이다.

10장 정도 겨우 읽었을까. 타이머를 확인했다. 1시간 30분이나 흘러 있었다. 이 속도로 도대체 언제 이걸 다 공부하고 시험을 치러 간단 말인가. 1차 시험이 끝나자마자 학원에서 제본해준 족보만 2권이었다. 그리고 이건 최소한의 최소한이다. 원래라면 적어도 5년 치 족보는 전부 공부해야 했다.

‘미치겠다….’

더 초조해졌다. 더 공부가 되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된다. 유인하는 타이머를 끄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고시원 근처를 한 바퀴 뛰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절전 상태의 노트북 화면이 켜졌다. 고시원 집주인이 드디어 답장을 보냈다.

<휴대폰 하나 보관하고 있어요. 가지고 지금 가요. 인하 학생 건지 확인해봐요. 5분 뒤면 도착해요.>

유인하는 네, 하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5분이라도 족보를 더 공부하려고 했다.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인하는 일어나서 얼른 문을 열었다. 어디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평범하게 생긴 중년 여성 하나가 서 있었다.

“두 달이나 연락이 안 되면 어떡해요. 다음 달도 연락 없으면 그냥 방 정리하려고 했어요.”

배운 것도 없이 이런 세나 놓아 고시생들의 고혈을 쥐어짜 사는 사람이다. 유인하는 누가 그러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금 자신이 그녀의 앞에서 굽실거려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존심 상했다. 그냥 그녀가 집주인인 갑의 입장이고 자신은 월세를 내야 하는 을의 입장이라는 게 싫었다.

“죄송합니다.”

“이거 맞아요?”

그녀가 구형 스마트폰을 꺼내서 보여줬다. 유인하가 얼른 그것을 받았다. 휴대폰 케이스 안에 식권 두 장까지 그대로 있었다.

“네.”

“월세는 이번 달 거까지 90만 원 넣어줘야 하는 거 알죠? 아니면 보증금에서 까요.”

그녀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이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 듯하다. 그게 유인하는 또 자존심이 상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들’하고 똑같이 봤다는 게. 이런 건 너무나 오랜만이라서 오히려 더욱 모욕감을 느끼는 듯했다.

“네….”

“바로 보내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다른 말 없이 갔다. 유인하는 문을 얼른 닫았다. 누구한테 호되게 혼나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은 성인이었고 그 누구도 자신을 혼내거나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고시원 아주머니는 화를 내거나 혼을 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말이다.

‘바보 같아. 바보. 멍청이.’

스스로를 어린애처럼 혼내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벌거벗겨져 집 밖으로 쫓겨나 문 앞에서 손을 들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치욕적이다. 유인하는 인상을 팍 쓰고 휴대폰에 충전기를 연결해서 전원을 켰다.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많이 와 있었다. 은행 어플로 들어가 잔고를 확인했다.

“아, 엄마…!”

유인하는 돈을 달라는 소리를 안 했다고 그간 다달이 주기로 약속한 용돈을 부모님이 주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화가 불쑥 났다. 그는 바로 카카오톡에 들어가서 엄마한테 보낼 메시지를 빠르게 쳤다.

<나 굶어 죽으라는 거야 뭐야? 연락은 안 돼도 용돈 주기로 한 건 줘야 하는 거 아냐? 그거 얼마나 한다고 주라는 소리 할 때까지 기다려?>

그러자 엄마가 바로 답장을 보냈다.

<지금 당장 필요하니? 일단 이번 달 것만 보내면 되지?>

엄마의 답장에 유인하는 더욱 짜증이 났다.

<장난해? 4, 5, 6월달 거 다 줘야지! 엄마 진짜 미쳤어?>

<저번 달엔 니가 얘기가 없어서 못 준 건데 지금 당장 그 돈을 한꺼번에 어떻게 주니. 너 비상금도 있잖아.>

유인하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 비상금은 정말 만약에 사태를 대비해서 대학생 때 유인하가 과외를 해서 모아둔 돈이었다.

<그 비상금은 못 쓰는 거라고 했잖아. 주기로 한 건 줘야지! 통장에 150만 원도 없다는 게 말이 돼?>

그러자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유인하는 전화를 받자마자 화를 냈다.

“빨리 보내. 월세 3개월이나 밀렸다고.”

-일단 50만 원으로 어떻게 안 될까? 진짜 엄마가 돈이 없어서 그래. 엄마 통장에 지금 80만 원밖에 없어.

“그거 다 주고 나머지는 아빠한테 달라고 하면 되잖아!”

유인하는 언성이 높아졌다.

-인하야, 요즘에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아빠도….

“도대체 엄마 아빠가 경기 좋은 때가 언젠데? 주기로 약속한 건 줘야 할 거 아냐. 나 사는 데 1.5평밖에 안 돼. 나 한 달에 20만 원밖에 안 쓰고 산다고. 진짜 이것도 못 해주는 건 너무 한 거 아냐?”

-그래…. 미안하다. 엄마가 빌려서라도 보내줄게. 일단 80만 원 보내주고 나머지는 이번 주 안으로….

“이번 주 안으로 꼭 보내! 진짜 내가 엄마 때문에…!”

-알았어. 미안해.

“끊어.”

유인하는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엄마가 잠깐만, 하고 붙잡았다. 그녀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하야…, 올해는 되는 거지? 올해는 꼭 돼야 해. 엄마랑 아빠도 더 이상은….

유인하는 엄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뚝 끊었다. 안 그러면 엄마랑 아빠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뒷바라지나 해줬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통화도 다른 사람들이 집에 있었다면 다 들었을 것이다. 그 상상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해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내가 공부하는 데 아무것도 보태준 적 없으면서! 남한테 자랑만 할 줄 알았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기 싫어 전화를 끊은 주제에 이미 머릿속으로는 그녀에게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가 더러워서라도 손 안 벌린다. 그래, 그깟 50만 원 알바 좀만 해도 벌 수 있는 돈이야!’

그렇게 속으로 몇 번이고 돈과 시간 계산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했다. 타이머를 다시 틀고 1시간 30분이 다시 흘렀는데, 넘어간 페이지는 단 두 장뿐이었다.

‘공부해야 돼, 이 멍청아. 제발!’

올해도 절대 합격 못 할 거야. 두 달이나 놀았는데 어떻게 합격해. 포기하고 내년을 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

‘1년이나 더 이렇게 살라고? 또?’

더 이상은 한계였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유인하는 이제 ‘사람답게’ 사는 게 뭔지 알지 않은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머릿속에 줄줄 펼쳐졌다.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3층 높이의 천장, 하얗게 빛나는 소파가 비치된 거실은 언제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복도와 방을 가리지 않고 아름다운 액자와 조형물이 가득했고 정원은 푸르고 꽃이 가득했다. 누구나 자신에게 친절했고 애정을 주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싶은 데서 자고 놀고 싶을 때 놀고 싶은 사람과 놀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매일매일 통장 잔고를 계산하며 한숨 지을 필요도 없고 미래를 생각하며 막막함을 느낄 이유도 없는 호화롭고 풍족한 삶. 우아하게 털을 고르고 그 남자가 만져주면 골골거리며 기분 좋게 그의 무릎에 드러누우면 됐다.

유인하는 모든 것을 가져봤다.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 먹고 살 걱정에 매일 자존심 상하지 않아도 되는 풍족함, 어떻게 해도 언제나 사랑해주는 사람.

‘앞으로 다시는 그렇게 못 살겠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아무리 노력해도.’

당장 합격해도 월급쟁이가 거기서 거기다. 그런 집을 살 수도, 고용인을 잔뜩 고용할 수도 없다. 그런 남자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일까. 그제야 눈물이 줄줄 나기 시작했다. 그동안에도 타이머의 시간은 계속 갔다.

*

2주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시험장을 나오니 머리가 멍하기만 했다. 잘 쳤는지 못 쳤는지 가늠도 가지 않았다. 뭔가 쓰긴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복기해서 적어 놔야 나중에 다른 사람들하고 비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아니…. 어차피 망했겠지.’

내년을 준비해야 했다, 또…. 서늘한 감각이 심장을 푹 적시더니 어느샌가 온몸을 젖게 해 몸이 무거웠다. 아마도 허무감, 허탈감,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작년에도 비슷한 걸 분명히 느낀 것 같은데 왜 오늘따라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걸까?

‘뭘 잘했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내렸다. 평소라면 버스로 갈아탔겠지만 오늘은 걸었다. 걷고 걷다 보니 어느새 고시원의 앞에 서 있었다. 누가 봐도 낡고 허름하고 초라한 곳. 역시 여기를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공부하자.’

올해 2차 합격은 불가능했다. 내년 1차와 2차 시험에 비중을 1대 2 정도로 두고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지금 같은 상태로는 누굴 불러 술을 마셔도, PC방에 가서 게임을 해도, 다른 그 어떤 것을 해도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았다.

‘알바도 알아봐야지.’

공부하면서 같이 할 수 있는 알바…. 고시원 총무가 좋겠지? 그래, 그런 데는 숙식도 해결하고 돈도 주니까 그런 곳으로 알아보자. 공부하려고 책을 펼쳤는데 그 위에다가 알바에 대한 것만 적고 있었다. 집중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그 낙서 위를 새카맣게 칠했다.

‘내년… 내년에도 안 되면 그냥….’

이 공부를 하다가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 패배감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는 것일까? 다들 자신이 똑똑하다고, 공부에는 나름 자신 있다는 사람들만 도전할 텐데 어떻게 그냥 툭툭 털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다른 일도 이만큼 특별할 수 있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만큼 인정받을 수가 있나?

‘작년에 됐으면 이런 생각은 안 했을 텐데.’

만약 그때 단어 하나만 더 적었어도, 그래서 합격했더라면…. 또 그런 상상에 빠져들고 말았다. 유인하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 싫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부잣집 고양이가 되었을 땐 자신에게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먹고 살 문제도 없고 누가 봐도 부러워할 것들을 잔뜩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걱정 따윈 하나도 들지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그저 고양이로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고방식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데도, 그때는 정말… 행복했다.

벌써 2주가 지났나.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은 쉬웠다. 고양이 나비는 자신이 거기 있는 십 수 명의 사람들을 모두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항상 의기양양했다. 자신은 사랑받는다고, 특별하다고, 대단하다고, 고양이는 최고라고, 자신 같은 부잣집 고양이가 대다수의 인간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냥 꿈꾼 거야. 황당한 개꿈….’

고작 고양이 따위의 미물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들을 대한 것을 알면 그 남자나 그 고용인들이나 얼마나 황당할까. 스스로 생각한 것인데도 그때의 자신이 우스웠다. 그때 그 남자의 곁에서 사람으로 깨어나 마치 좀도둑처럼 그 집을 도망 나올 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날 밤까지만 해도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볼썽사나운 쥐새끼 신세.

‘들키면 어떻게 됐을까.’

그 남자에게 들켰다면? 난 뭐라고 해야 했을까. 내가 나비라고? 갑자기 고양이로 바뀌어 부잣집에 살고 싶어 당신 집으로 들어왔다고? 아무리 그 남자라도 황당한 얼굴을 할 것이다. 사랑을 말한 그 입으로 뭐라고 자신을 꾸짖을까. 나비가 무슨 짓을 해도 화를 내지 않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인간 유인하에게는 다를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잘리는 것만 같다.

유인하는 그 모든 걸 그전까지 겪었던 고생의 보상으로 생각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부잣집 고양이인 자신과 과거의 자신 사이에 선을 딱 그었다. 고양이로 있던 시간의 대부분 과거의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뭘 해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도, 음식을 남겨도, 공부를 하지 않아도. 자유로웠다.

그런데 다시 사람이 되자 이제는 부잣집 고양이가 되어 천방지축으로 지낸 자신이 한심했다. 아무 노력도 없이 주어진 것이 당연히 영원할 것처럼 철석같이 믿었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걸 믿을 수가 있었을까. 자신은, 그래도 조금은 똑똑했던 게 아니었나.

‘다시 고양이가 되면 그 집에 갈 수 있을까?’

나는 다시 고양이가 되고 싶은 건가?

유인하는 자존심이 상했다. 너무나. 지나고 보니 그랬다. 고양이일 때의 기억을 생생하게 가지고 있었다. 제대로 살 자신이 그렇게 없었던 것일까, 자신이? 고양이가 되자마자 고시 같은 건 간단히 포기해버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부랴부랴 닥친 2차 시험을 치고 나자 유인하는 이상할 정도로 크나큰 허무감을 느꼈다. 그동안 어떻게든 2차 시험을 치르려고 미뤄왔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그를 잡아먹었다. 자기혐오, 후회, 혼란, 불안, 초조, 공포. 그 모든 게 유인하를 괴롭혔다. 견디기가 힘들었다.

‘쓰다듬어 줬으면 좋겠다. 기분이 너무 안 좋아. 한 번만….’

어느새 책상에 이마를 박고 있던 유인하는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제대로 보고 나올걸. 나 같은 걸 사랑한다고 말해준 사람은 그 남자뿐이었는데….

결국 휴대폰을 가져와서 주저하다가 그 남자가 만든 인스타그램으로 들어갔다. 나비네 계정으로, 그가 자신의 사진을 찍어 올리던 곳이다.

<범인을 아시는 분은 꼭 연락 주십시오. 남성. 20대 추정.>

유인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범인?! 인스타그램에는 흐릿한 CCTV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재빠르게 뛰어가서 누가 알아보기 힘들지만 맞지도 않은 옷을 입고 달려가는 자가 누군지 유인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

유인하는 쥐새끼처럼 도망가는 자신의 모습에 생각보다 훨씬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볼품없고 범죄자 같던지. 스크롤을 하니 그가 고양이 사진을 올릴 때보다 훨씬 많은 업데이트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 나비를 본 적이 있으신 분들은 연락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가 자신을, 나비를 찾고 있었다. 벌써 2주나 지났는데…. 그동안 유인하는 코앞에 닥친 2차 시험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니,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으려고 했다. 꿈이었다고 생각하려고 했으니까. 안 그러면 너무 마음이 아프니까. 자신의 생각만 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사라진 인간 유인하의 2달이 진실인 것처럼 이 남자에게 나비 또한 진실이었다.

‘많이 찾고 있을까?’

유인하는 죄책감과, 이상하게 약간 원망도 들었다. 어째서일까.

‘찾으면 뭐 해. 정작 날 보면 바로….’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유인하도 그에게 자신이 나비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게다가 주거침입죄로 줄이라도 긋게 되면 유인하의 고시는 그날로 끝이다. 저 집 근처에도 가면 안 되었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채널을 아무리 넘겨보아도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상심한 유인하는 계속 스크롤을 넘기다가 문득 생각했다.

‘권시혁….’

고양이였을 때는 그의 이름이 뭐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의 이름을 알아 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그런 집에 살 정도로 대단한 자산가이지 않은가. 이름을 검색하면 나올까? 유인하는 권시혁의 이름을 검색 엔진에 검색해 보았다.

“아.”

권시혁, 34세. 식료품 회사의 사장이었다. 유인하도 곧잘 먹는 즉석 밥이나 캔 음식을 만드는 회사였다. 이렇게 젊은 사장님이 운영하는 회사인지 몰랐다. 대기업 계열사 중의 하나였다. 제법 큰 회사인 것 같다.

‘이런 일을 하는 남자였구나…. 얼굴도 잘생겼는데 어떻게 사람들한테 안 알려졌지?’

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아는 재벌 3세나 4세를 떠올려보았는데 유인하도 아는 이름이 몇 개 되지 않았다. 유인하가 고양이 시절 즐겨 보던 드라마에서도 재벌 3세가 주인공으로 나왔다. 재벌, 재벌 하며 어찌 보면 친근하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구나 싶었다.

그 남자에 대해서 검색해서 나오는 건 극히 적었고 회사에 대한 것은 좀 더 찾아볼 수 있었다. 젊은 사장님이라 신세대 사업(?)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런 건 아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근면하게 일을 하는 그의 성향에 잘 맞는 업종인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유인하는 사업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도 대단한 거겠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큰 회사에, 더 중요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남자의 고양이었구나, 하는 생각과 잡히면 꼼짝없이 빨간 줄을 긋겠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우울해졌다. 이제 와 이런 걸 알아봤자 허탈하기만 할 뿐이다. 허무했다.

게다가 벌써 1시간이나 딴짓을 했다. 더 우울하다.

‘그래…. 오늘 2차 끝났잖아. 오늘 하루 정도는….’

잘까? 자면 기분이 좀 좋아질까?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밖은 아직도 밝은데 고시원 방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의 쪽방에는 마치 감옥의 독방처럼 조그마한 창문이 달려 있었다. 햇빛 같은 건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몇 분 있다가 유인하는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여기 못 있겠다. 그는 밖으로 나와서 휴대폰을 보았다. 연락할 사람 없나?

‘안정훈….’

연락할 사람은 이제 그 친구밖에 없었다. 가족은 말이 안 통하고 다른 친구들은 너무 멀어졌다. 그리고 그는 권시혁을 알았다.

‘잘못 말했다가 내가 범인인 걸 들키면….’

걱정부터 드는 것은 사실이다. 몇 달 전 그와 얼마나 어색하게 통화를 끊었는지도 기억난다. 그가 권시혁과 아는 사이라고, 그래서 그가 잘사는 집 아들에 이제껏 자신을 무시해 왔을 거라고 분개했던 기억도 났다. 그런데도 유인하는 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래도 연락할 사람이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하야….

전화를 안 받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약간의 주저함은 느껴졌다. 전과 달리 그는 몇 번의 전화 연결음 끝에 받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적의도, 깔보는 기색도 없었다. 그를 대하는 유인하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는 착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걸 알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었다면 그 길로 연락을 끊었을 것이다.

‘얘도 잘사는 집 아들이었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생각해야만 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구차하고 싫었다. 유인하가 물었다.

“오늘 시간 있어?”

유인하는 상당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현재 유인하의 유일한 친구인 안정훈은 그의 목소리가 안 좋으니 좋은 사람답게 퍽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어…, 왜? 무슨 일 있어? 나 시간 많지.

“그럼… 오늘 나랑 술 마실래?”

유인하가 물었다.

*

안정훈은 유인하의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왔다. 전에 그런 소리를 한 게 미안했을까.

‘하긴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유인하에게 반항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딱 한 번 그런 것이다. 유인하는 언제나 안정훈을 만만하게 생각하곤 했었다. 그래, 한 번은 봐줘도 되겠지.

‘작년에 되기만 했으면.’

고작 0.5점 차 때문에 안 들어도 될 소리를 듣고, 고양이 같은 게 되어서 이런 꼴이나 되고. 유인하는 안정훈이 오기 전에 이미 한 병을 마신 상태였다.

“인하야….”

안정훈은 퍽 당황한 상태였다. 이미 유인하가 제법 취한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안정훈은 키도 체격도 매우 커서 그가 앉을 철제 스툴이 아주 작아 보였다. 유인하보다도 훨씬 컸다. 그런데도 유인하가 만만하게 여겼던 것은 그런 그가 유난히도 유인하에게는 호구같이 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는 유인하가 말하는 건 정말 뭐든 들어주던 놈이었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딱히 나쁜 평을 듣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불만을 입에 담는 법이 없고 웬만해선 남에게 다 맞춰주는 선한 성품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것 같았다.

‘호구라는 걸 좋게 말해주는 거지.’

얼굴도 잘생겼다. 눈이 크고 살짝 쳐져서 착한 인상이다. 어렸을 때 유인하가 레트리버라고 부르기도 했다.

유인하는 사람일 때나 고양이일 때나 똑같았다. 사람을 쉽게 부리고 자신에게 부려지는 사람을 쉽사리 과소평가한다.

“있잖아…. 저번엔 내가 정말 미안. 난 항상 너 생각하는데 넌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구나 싶고…. 너 시험공부 하느라 바빠서 그런 거였는데.”

봐라. 안정훈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렇게 사과하자 유인하는 픽 웃고 말았다.

“그래.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 앉아.”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안정훈은 사실 유인하의 부하 비슷한 것이었다. 유인하는 잘생기고 공부도 항상 1등이었다. 그는 유인하의 개나 다름없었다. 유인하는 술에 취해 계속 피식피식 웃으며 옛날 생각을 했다. 잠깐은 기분이 좋았다. 잘 나갈 때의 기억이었다.

‘이 새끼는 지보다 더 나아 보이는 사람만 보면 비굴하게 안 하고는 못 견디겠는 거야. 강약약강이 이런 거지. 얄팍한 새끼. 그래, 그 남자한테도 형형거리면서 자꾸 먼저 연락하고. 그 남자는 귀찮아하는 것 같던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자신이 우월한 존재가 된 것같이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안정훈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인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2차 끝난 거지?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누가 뭐래?”

내심 우월감을 즐기고 있던 유인하는 그가 2차 시험에 대해 언급하자 기분이 팍 상해 저도 모르게 쏘아붙이는 말하고 말았다. 유인하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이번에 사고가 있어서 2달이나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

“진짜? 언제? 왜?”

“너 때문이야. 네가 그때 한 전화 받고 바로….”

유인하는 말을 멈췄다.

“뭐? 교통사고라도 난 거야? 괜찮아? 지금 술 마셔도 돼?”

안정훈이 크게 걱정하며 그렇게 묻자 유인하는 다시 성질을 냈다.

“괜찮아.”

“왜 말 안 했어?”

“내가 그런 걸 너한테 왜 얘기해?”

“우리 친구잖아.”

안정훈은 유인하의 말에 상처라도 받은 얼굴이었다. 유인하는 다시금 우월감을 느꼈다. 안정훈은 얼른 유인하의 비위를 맞춘 말을 했다.

“괜찮을 거야. 작년엔 한 과목 때문에 안 된 거였잖아. 0.5점 차로 과락이라서. 이거 이제 그냥 붙을 시험이라는 거잖아. 될 거야. 보통 시험도 아니고 진짜 대단한 거잖아.”

그래, 맞아. 유인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른다. 안정훈은 그래도 그걸 알 정도는 알았다. 그러니까 답답한 구석이 있어도 지금까지 유인하가 만나주는 것이다.

지금만 좀 이런 것이다. 합격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말만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더 잘 나가게 되는 것이다. 원래대로.

‘내년에도 합격 못 하면?’

안정훈이 예전처럼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자신의 말에 어쩔 줄 모르는 걸 보며 우월감에 젖어 있던 기분이 한순간에 찬물을 맞은 듯이 가라앉고 불안감이 급격히 몰려왔다. 안정훈은 그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말했다.

“진짜야. 정말 될 거야. 넌 대단하잖아. 고등학교 때도 전교 1등은 항상 너였고. 네가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데.”

합격할 거라고만 말하면 유인하가 기분이 무조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안정훈의 말에 유인하가 툭 말했다.

“2학년 2학기 땐 네가 1등 한 적 있잖아.”

“아, 그거? 그거 그냥 운 좋아서 그런 거지. 네가 1등이고 난 만년 2등인 거 애들도 다 알았는데.”

안정훈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웃는 얼굴에 아무런 사심이 없었다. 유인하는 1등이고 자신은 만년 2등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자존심도 상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가 여전히 그를 정말 호구같이 보이게 했다.

“넌 무슨 일 없냐?”

유인하는 표정이 좀 심드렁해진 채로 그렇게 물었다. 그 말이 마치 안정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길 바란다는 듯했다. 그러자 안정훈의 표정이 마치 혼나기 전의 애처럼 또 유인하의 눈치를 살짝 본다 싶더니 말했다.

“아…. 사실 전부터 얘기하려고 했는데 너 공부하는 데 방해될까 봐 얘기 못 한 게 있거든.”

“뭐? 그게 뭔데.”

유인하는 시선을 들어 안정훈과 눈을 마주쳤다. 안정훈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나 회사 그만뒀어.”

“뭐?”

“이제 1년 넘었는데….”

안정훈이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유인하가 불쑥 말했다.

“뭐? 그럼 너 지금 백수야?”

유인하의 목소리가 조금 커서 주변 사람들이 돌아보기까지 했다. 안정훈은 살짝 당황했다가 모호하게 대꾸했다.

“어….”

“와, 너 어쩌려고 회사를 관두냐? 다른 데 이직 준비도 안 하고 그만두면 어떡하냐? 경력 공백 생기면 이직하기도 힘들 텐데.”

유인하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 이상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심드렁하고 틱틱거려도 묘하게 기가 죽어 있더니 지금은 조금 기운이 난 것 같다. 입맛이 없다며 술만 마시더니 지금은 고기도 잘 먹는다.

유인하가 자신이 일을 그만둔 것을 은근히 기뻐하고 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숨길 수가 없어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

‘저번 일 때문에 그런가….’

저번에는 자신이 말이 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정훈은 인상만큼이나 천성이 순하고 무던하다는 평을 받는 사람이었다. 웃는 얼굴이 서글서글하고 인간관계도 원만하다.

[야, 네가 그러니까 유인하 그게 널 완전 호구로 보는 거 아냐.]

하필이면 그때 2년 준비하여 의전을 갔던 김성우라는 친구와 함께 있었다.

[네가 그렇게 유인하 챙겨도 걔 합격해봐라. 너 다시 개무시할걸?]

[왜 그래? 인하랑 나랑 얼마나 친한데. 인하 이제 나한테만 연락하는 거 너도 알잖아.]

[병신.]

그것 때문에 그답지 않게 약간 화가 났을 때 유인하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었다. 그것도 유인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한 김성우에게 화가 난 것뿐이었다. 안 그래도 몇 년이나 시험 때문에 자주 연락을 할 수 없어서 연락 올 때마다 반가울 뿐이었는데, 그때 하필이면 유인하가 김성우가 말한 것처럼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한다고 느껴지니 불쑥 그런 말이 나왔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처음이라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하잖아.]

그리고 그때 앞에 있던 김성우가 웃으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래서 어쩌게? 어디 취직할 데는 알아봤어?”

유인하가 물었다. 안정훈이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을 말하자. 분명히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유인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도 고민이 많겠지. 그래, 우리 나이에 다시 취직하는 게 쉽냐. 이해한다. 내가 다 이해하지.”

유인하는 그렇게 기운차게 말하다가 들뜬 기색이 확 가라앉았다. 그러고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도 고시 그만하고 너랑 같이 취업이나 할까.”

“고시 안 하게?”

안정훈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그 직업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나이도 이제 많이 먹었고. 하더라도 돈 벌면서 같이 해야지….”

“어차피 할 거면 공부에만 집중하는 게 낫지 않아?”

안정훈이 그렇게 말하자 유인하가 인상을 썼다.

“그냥… 나도 더 이상은 이렇게 못 살겠어서. 집에서도 뒷바라지해주는 거 부담스러워하고. 너도 엄마가 취직하라고 뭐라고 할 거 아냐.”

“돈 때문에 꿈 포기 안 해도 돼. 넌 뭘 해도 다 잘하잖아. 결국 될 거야.”

그리고 난…. 안정훈이 더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유인하는 또 말을 잘랐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올해 하반기에는 들어갈 수 있을까? 내년 상반기? 괜찮을까? 우리 벌써 29살인데…. 넌 몰라도 난 신입사원으로 들어가야 하잖아.”

유인하는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고시를 그만둘 생각인 건가? 다른 직업 정도는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듯 말했던 유인하였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기색이 짙었다. 안정훈은 하려던 말을 관두고 언제나처럼 그를 위로했다.

“괜찮아. 요즘은 서른 넘어서도 많이 들어가.”

“나 고시 준비한다고 학점도 관리 안 했는데….”

“괜찮아. 열심히 하면 돼. 진짜.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언제나 자신감 있게 말하는 유인하였다. 아까는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던 유인하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이제는 불안과 초조를 숨기지 못했다.

“모르겠어….”

그가 느끼는 막막함이 목소리에 그대로 드러났다. 술을 잔뜩 마신 그의 하얀 얼굴이 붉어졌다. 많이 취했다. 눈도 빨개진 것 같았다.

“왜 나만 계속 열심히 살아야 해?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되는 건데. 나도 남들처럼 놀고 싶고 가고 싶은 데도 많고….”

유인하는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가 빠르게 훔쳤다. 유인하가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안정훈은 눈을 크게 떴다.

“인하야….”

“아, 씨…. 이런 말 하려고 부른 거 아닌데. 너도 일 그만둔 지 오래되어서 막막할 텐데….”

눈물을 흘리는 얼굴이 생각보다 굉장히 가여웠다. 지금은 자존심이 팍 상한 얼굴이었다. 눈과 코가 벌겋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 안 하고 콧김이 훅 나올 뻔했다. 안정훈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 응? 다 말해도 돼.”

그와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렇게까지 기가 죽은 모습은 처음 보았다. 마음이 안되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양팔로 얼굴을 괴고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던 유인하가 움찔했다. 머리를 만지는 게 싫은가 싶어 안정훈은 손을 얼른 뗐다. 그러니 유인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머리… 계속 쓰다듬어 줘.”

“어?”

안정훈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두 번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유인하의 예쁜 얼굴이 수심에 깊이 잠겨 있었다.

“너도 손이 따뜻하구나….”

그가 가만히 자신의 손길을 느꼈다. 안정훈은 초조함을 느꼈다. 쓰다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유인하는 분명히 오랜 친구이고 좋아하는 친구였다.

‘좀 더 제대로 위로해주고 싶은데….’

괜히 강한 척하고 허세 부리는 면이 없지 않았지만 주관이 강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도 열심이다. 열심히 하니까 이렇게 속상해한다는 걸 안다. 자신에 대해 엄격하기 때문에 남에게도 엄격한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그를 보면 가끔…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저번에도 울었을까?’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보지 못한 게 아쉽다. 생각해보면 만날 때마다 이상했던 것 같다. 안정훈이 그것을 매번 잊어버렸을 뿐이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손을 잡아 자신의 머리에서 뗐다. 그의 손은 다소 서늘하고 촉촉하고 매끄러웠다. 안정훈은 그가 자신의 손을 놓는 것을 아쉽게 느꼈다. 그리고 유인하는 가만히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술을 마셔서 그렇겠지만 이렇게 눈을 맞추는 것이 조금 긴장되었다.

“왜 그래?”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없냐?”

유인하가 물었다.

“숨기는 거?”

안정훈이 되물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유인하가 발로 안정훈의 정강이를 툭툭 두드렸다.

“생각해보니까 너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구나 싶어서.”

“나에 대해… 알고 싶다고?”

안정훈이 눈을 한 번 크게 깜박했다. 그리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정신을 차렸다.

“네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뭐가 있다고. 우리가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라고 말하다가 멈칫했다. 그는 유인하를 보았다. 유인하는 입술을 한 번 삐죽했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게 말하고 식탁에 꼬꾸라졌다.

“인하야…!”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잡았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는 얼른 유인하의 옆으로 가서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원래도 유인하는 별로 술이 세지 않다.

“많이 힘든 모양이네….”

얼굴이 핼쑥하다. 이렇게 흐트러지는 그를 보는 건 처음이다. 오늘 여러모로 유인하의 처음을 많이 본다. 유인하에게는 미안했지만 약간 기분이 좋았다.

‘날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인하도 날 제일 좋아하는 거라고.’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안정훈은 휴대폰 어플로 택시를 부르고 시간에 맞춰 그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뒷좌석에 그를 먼저 태우고 옆에 탔다. 그의 어깨를 감싸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도록 했다. 그리고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직 그리 야심하지 않은 밤이다. 많은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

택시는 지하 주차장 쪽으로 들어갔다. 안정훈은 택시비를 내고 유인하를 들쳐업고 집으로 향했다. 공동 현관은 보안팀 직원이 열어줬는데 현관이 문제였다. 발로 문이 닫히지 않도록 밀어내고 얼른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침실로 가서 침대에 그를 눕혔다.

“괜찮나?”

안정훈은 잠깐 잠이 든 유인하를 보며 두 손을 움찔거렸다.

‘버, 벗겨? 부, 불편할 텐데.’

아니야. 아니야. 안정훈은 되려 이불을 덮어주었다. 괜히 입이 마르고 가슴이 뛴다. 안정훈은 침실 밖으로 나와 잠깐 부산을 떨었다.

“아, 집을….”

그는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별로 어질러지지도 않았지만 손님이 왔으니까…. 그러고도 뭔가 수런거리는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필요한 건 없나? 아, 숙취약. 유인하는 오늘 술이 좀 과했다. 내일 숙취 때문에 죽으려고 할 것이다. 예전에 와인을 같이 마셨을 때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기억났다. 즐거웠던 추억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안정훈은 편의점에 갔다 왔다.

밤이 늦었는데도 아직 뭔가 기분이 잘 기분이 아니다. 안정훈은 뭔가를 더 해야 할 것만 같아 괜히 소파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아차, 하고 허리를 들었다.

“아, 씻어야지.”

약간 차가운 물로 씻고 나니 술기운이 가시면서 기분도 조금 차분해졌다. 그제야 안정훈은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흠흠.”

그래도 주인인 내가 소파나 바닥에서 자기는 좀 그러니까…. 전에도 같이 잔 적 있으니까…. 그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치고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유인하와 같이 자는 건 대학 이후로 처음인가.

처음엔 유인하에게 등을 보이고 옆으로 누웠다가 어느새 바로 누웠고, 그다음에는 그를 바라보고 옆으로 누웠다. 안정훈은 끄응, 하고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눈을 떴다.

모든 것이 짙은 남색으로 보이는 침실 안이다. 일부러 커튼을 치지 않았다. 창밖의 불빛이 안을 비춘다. 유인하의 기다란 속눈썹이 눈에 띄었다.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만약을 가정한 상상이다.

이대로 그가 아무것도 되지 않고 자존심 때문에 누구도 차마 만나지 못하고 점점 더 자신만 계속 찾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그게 무슨 생각이야. 친구가 잘되길 빌어야지….’

안정훈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 대해 이런 나쁜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했듯 자신은 착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가장 좋아하는 친구에게…. 하지만 상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1년, 1년 그는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오늘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으니 아마 앞으로도 그런 모습을 보일 것이다. 오직 자신에게만. 그렇게 밝고 강한 척하던 그가 눈물을 흘리고, 매달리고, 이내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난 너 없으면 못 살아.

‘그러면?’

그러면 난 어떻게 할까?

으음,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유인하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얼굴이 가까웠다. 안정훈은 숨을 멈췄다. 유인하의 앞머리가 약간 흘러내려 얼굴을 가렸다. 안정훈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그의 동그란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부드러웠다. 안정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모르겠다. 왜 이러는지.

안정훈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유인하를 알아 왔다. 안정훈은 누구와도 원만하게 지내는 성격이라 무던하거나 둔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모난 곳이 없었다. 그에 비해 유인하는 쉽게 남들을 바보 취급하곤 해서 적을 만들곤 했다. 그래도 그들은 친구가 되었고, 지금까지 연락이 끊이지 않고 지내온 건 스스로 생각해도 다 자신의 이 ‘착한 성격’ 덕분인 게 틀림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대학 때 갔던 제주도 펜션. 유인하의 자취방.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언제 잊었냐는 듯이. 놀랄 법한 기억인데도 묘하게 차분하다. 마치 다시 잊어버릴 것을 아는 것처럼.

‘분명히 넌 이런 날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

안정훈은 그대로 천천히 유인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유인하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얼굴이 자신의 목덜미에 닿도록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

“으음….”

안정훈은 약간의 숙취와 함께 잠에서 깼다. 숙취해소제는 자신이 먼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토요일이라 좀 더 잘 수는 있겠지만 유인하에게 아침밥을 먹이려면 먼저 일어나야 했다. 해주고 싶었다.

그는 아마 모두에게 이렇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유인하에게는 항상 더 잘해주고 싶었다. 유인하도 그래서 그를 만만하게 보는 것이다. 김성우가 말 안 해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냥 좋았을 뿐이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뭘 먹이나.’

우우웅. 그때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침대 옆에 있는 선반 위에 그의 휴대폰이 있었다. 휴대폰의 화면을 확인했다.

“형…?”

안정훈이 아침이라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이 먼저 전화를 하다니 별일이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얼른 받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 형. 왜?”

-정훈아.

안정훈은 아직 잠들어 있는 유인하를 눈으로 확인하고 침실을 나가며 문을 닫았다. 안정훈은 하품을 크게 했다.

-너 지금 바쁘냐.

“응? 왜? 무슨 일 있어?”

형은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안정훈은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얼른 물었다. 형은 평소처럼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넘어가고 본론부터 말했다.

-2주 전에 내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뭐? 도둑?! 형은? 괜찮아?”

아니, 그런 집에도 도둑이 든단 말인가! 안정훈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에 신고했어?!”

-난 괜찮은데. 경찰에는 신고했다. 어쨌든 그놈이 우리 집 고양이를 밖에다 버린 모양이야.

“뭐? 왜? 형 고양이 키워?”

-그래. CCTV에서는 그놈이 고양이를 들고 가진 않았는데 그때 사라졌어. 그래서 지금 다 같이 동네 다 뒤지면서 찾고 있는데 보이지가 않는다. 너도 좀 와서 도와줄 수 있냐.

“뭐야, 고양이…. 깜짝 놀랐잖아. 다른 건 훔쳐 간 것 없어?”

누가 다치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다. 아니, 형이 안 다쳤다면 다 괜찮은 것이다. 안정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훔쳐 간 건 별거 없어. 일단 그것보다 우리 나비를 찾는 게 먼저니까. 할 일 없으면 와라.

도와줄 수 없겠냐, 하고 점잖게 물어보더니 말이 길어지니까 그냥 오라가라다. 안정훈은 약간 어이가 없어서 휴대폰의 화면을 보았다. 어째 자신에게는 필요할 때만 부르는 사람들이 천지인 것 같다. 안정훈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근데 지금은 친구가 집에 와서. 지금 당장 가야 해?”

-오늘내일은 찾을 때까지 돌아다닐 거야. 현상금도 걸었어. 시간 되면 바로 와.

“현상금까지나…. 내가 찾으면 그 돈 나도 주는 거야?”

-그래.

“대박. 알았어. 아, 내 친구도 데려가도 돼? 근데 얼마나 줘?”

-천.

“오, 역시 우리 형님. 통이 크다. 엄마한테 맛있는 거 사줘야지. 엄마한테 말해도 돼?”

-마음대로 해.

그리고 무정한 형님은 전화를 뚝 끊으셨다. 하지만 전과 달리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보니까 본인이 찾는다는 그 고양이의 사진이었다. 10장이나 보냈다.

“뭐야, 진짜.”

안정훈은 어이가 없어서 그런 말이 나왔다.

안정훈도 원만하고 무던한 성격이라는 평을 받는 편이지만 ‘그의 형’은 그것보다 백 배는 더해서, 무심하고 무뚝뚝하고 인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축이다. 그런 형이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도 웃긴데 그 고양이가 사라졌다고 현상금까지 걸고 주말을 반납해가며 찾으러 다닌다는 게 놀랍다.

‘형이 이런 면이 있었네….’

아니, 근데 고양이를 키운 지 몇 달은 된 것 같은데 그동안 자신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좀 섭섭하다. 원래 형이 그렇긴 하지만.

‘그나저나 이런 주황색 고양이가 어디 한둘이야? 그냥 길고양이잖아?’

안정훈의 눈에는 그저 아주 흔한 길고양이처럼 보였다. 안정훈은 휴대폰을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고 손을 씻은 뒤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토스트, 써니 사이드업, 저염 프랑크 소세지, 살라미 소시지, 브로콜리, 방울토마토, 양송이를 적당히 구워서 접시에 올렸다. 과일과 야채를 썰어서 샐러드 볼에 넣고 그 위에 발사믹 소스를 뿌렸다. 버터와 잼, 치즈를 꺼내서 적당량 올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좋아하겠지? 이런 거 좋아하니까.’

머리가 한쪽으로 솟은 건장한 남자는 플레이팅을 마치고 침실로 친구를 깨우러 들어갔다.

“인하야, 일어나서 밥 먹어.”

캬아!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에는 그가 없었고 그가 입고 있던 옷가지만 남아 있었다. 씻고 있나? 안정훈은 욕실로 가서 문을 열어보았다.

“유인하?”

욕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안정훈은 다시 침실을 돌아보았다. 유인하는 침실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내내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던 안정훈이다.

“뭐야. 장난치는 거야?”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안정훈은 잠깐 허리를 숙여 침대 밑을 살피기까지 했다. 없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예상치 못한 것과 눈이 마주쳤다.

“하악!”

“으악!”

얼굴부터 앞발과 가슴, 배는 하얗고 등은 주황색인 고양이가 침대 위에 있었다! 그 고양이는 자기가 하악질을 먼저 했으면서 소리를 지르는 안정훈에게 놀라 그의 코를 발톱으로 할퀴었다. 안정훈은 자신의 코를 감싸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양이는 쏜살같이 구석으로 숨었다.

“아야야….”

안정훈은 잠깐 자신의 코를 만져보았다. 아주 약간 피가 묻어 나왔다. 안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양이가 도망간 구석을 보며 중얼거렸다.

“고양이?”

집에 왜 고양이가 있는 것인가…. 현관문을 열어놓고 잔 것도 아니고 창문, 아니, 일단 여기는 46층이다. 고양이가 창문으로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있나.

“인하야, 집에 고양이가 있어.”

안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때 고양이가 서랍장의 밑에서 기어 나왔다. 저길 어떻게 들어갔나 싶다. 고양이가 야옹, 하고 미약한 울음소리를 냈다. 고양이는 안정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호박색 눈에 검은색 동공이 동그랗다. 매우 귀여운 고양이였다.

“야…. 너 도대체 우리 집을 어떻게 들어왔냐?”

안정훈은 고양이가 답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인하!”

다시 한번 크게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고양이가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가며 야옹, 하고 다시 울었다.

“유인하, 나와 보라니까. 고양이가 들어왔어!”

먀~, 하고 고양이가 다시 울었다. 아니, 도대체 얘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보니까 휴대폰도 그대로 있고…. 그리고 다시 고양이를 보았다. 안정훈은 묘한 기시감을 받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흔하디흔한 주황색 등을 가진 길고양이 종류이다. 하필 형이 고양이를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자신의 집에 고양이가 나타난 게 신기하기만 하다.

“어?!”

안정훈은 침실을 나가 자신의 휴대폰을 들고 들어왔다.

“어, 너 잠깐만….”

그는 형이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귀부터 꼬리까지 뒷면은 노랗고 얼굴부터 배까지는 하얀 5~6개월 된 고양이였다. 자신의 침대 위에 있는 고양이와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대박! 뭐야! 진짠가? 천만 원!”

안정훈이 두서없이 외쳤다. 안정훈은 고양이가 혹시 다시 도망갈까 얼른 들어서 품에 안았다. 그는 기뻐서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전후 사정이 뭐가 중요한가. 형이 애타게 찾던 고양이를 찾은 것이다.

“인하야, 진짜 어디 있어? 지금 완전 대박인데? 인하야!”

안정훈은 침실과 욕실, 다른 방까지 돌아다니며 친구를 찾았다. 신발도 그대로 있고 심지어 옷도 침대 위에 그대로 있는데 친구가 없다. 너무 이상해서 침대로 다시 돌아와 옷을 뒤져보니 마치 사람만 쏙 사라진 것처럼 속옷과 양말까지 그대로 있었다. 친구를 찾아다니는 동안 품에 있는 고양이가 계속 야옹야옹하고 울었다.

“뭐야….”

형이 잃어버린 고양이와 똑같이 생긴 고양이가 나타나고, 절친한 친구는 휴대폰도 옷도 신발도 내팽개치고 사라졌다. 흥분이 약간 가라앉았다.

“인하가 고양이로 변했을 리도 없고….”

“먀!”

고양이가 이제는 짜증을 내듯 대꾸했다. 안정훈은 고개를 숙여 왼팔로 안고 있던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고양이는 안정훈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안정훈이 중얼거렸다.

“그래, 내 옷 입고 잠깐 편의점이라도 갔나 보다.”

안정훈은 일단 형한테 영상통화를 걸었다. 그는 자신과 고양이가 전부 화면 안에 들어오도록 휴대폰을 최대한 멀리 떼어냈다. 고양이는 지금 이 인간이 뭘 하나, 하는 눈으로 잠깐 안정훈을 돌아보았다.

-왜.

형의 무뚝뚝한 얼굴이 화면에 떴다.

“형! 혹시 이 고양이 맞아?”

-나비야.

권시혁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가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고양이가 홱 고개를 돌려 휴대폰을 보았다가 얼른 안정훈의 품에서 뛰어 내려갔다.

“맞아?”

-어디서 찾았어?

형의 목소리가 약간 다급해졌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안정훈은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차분하던 형의 목소리가 이렇게 빨라지다니. 안정훈은 고양이의 위치를 확인하며 형에게 대꾸했다. 고양이는 다시 서랍장 밑으로 들어갔다.

“아니, 우리 집에서 갑자기 나왔는데….”

-뭐? 나비가 거기까지 갔다고?

“아니, 근데 맞긴 맞아?”

-집이라고? 지금 간다.

“아, 어….”

형이 여유를 잃는 모습은 상상조차 한 적 없었다. 심지어 처음 만났을 때도….

‘어쨌든….’

안정훈은 서랍장 밑을 보기 위해 무릎을 꿇고 자세를 바짝 낮췄다.

“나비라고?”

안에 빛을 반사하는 노란색 눈동자가 번쩍했다가 멀쩡해졌다. 서랍장 밑, 벽에 붙어 웅크리고 있는 작은 고양이가 보였다.

“나비야. 나비야~.”

나비가 아닌 것일까. 안정훈은 알 수 없었다. 고양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거기에 틀어박혀 있었다. 서랍장을 옮기려다가 밑에서 날카로운 하악질이 들렸다. 고양이가 혹시나 다칠까 싶어 다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인하는 어디 갔는데 이렇게 안 와? 휴대폰도 안 가지고….”

안정훈은 일단 욕실과 침실문을 단단히 닫아 놓고 밖으로 나왔다.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인터폰이 알림음을 냈다. 안정훈은 버튼을 눌러 공동 현관의 문을 열어주었다. 조금 있으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안정훈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나비는?”

권시혁은 안정훈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곧바로 그렇게 물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같이 사는 게 아니고서야 다들 그렇겠지만. 안정훈이 대꾸했다.

“내 방에. 서랍장 밑에 들어가서 꿈쩍도 안 하는데? 그냥 길고양이 아닐까?”

무표정한 형의 얼굴과 멀끔한 차림새를 보니 역시 내 형이 맞구나 싶으면서도 저렇게 빠른 걸음으로 걷는 건 처음 봐서 신기하다. 권시혁은 안정훈의 침실문을 벌컥 열었다.

“어디?”

“아까는 서랍장 밑에 있었는데.”

안정훈이 권시혁을 지나쳐 들어가 서랍장 밑을 다시 살펴보았다.

“어, 여기 있어.”

“나비야.”

권시혁은 얼른 안정훈의 옆으로 다가와 같이 무릎을 꿇고 서랍장 밑을 살폈다. 서랍장 밑이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남자 둘이 좁은 곳에서 그러고 있으니 서로 치인다. 권시혁이 먼저 일어났다.

“이거 치우자.”

“형이 거기 들어.”

혼자서 서랍장을 드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이라 고양이를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이서 서랍장을 들려고 하니 고양이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다른 구석을 찾았다. 권시혁은 바로 서랍장을 놓았다. 발등을 찧을 뻔한 안정훈은 어이쿠, 하고 얼른 발을 뺐다.

작은 고양이는 등을 바짝 세우고 방문을 긁었다. 권시혁은 얼른 다가가 고양이를 번쩍 들었다. 안정훈이 경고했다.

“걔 할퀴더라.”

권시혁은 고양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비야….”

그리고 품에 껴안으려고 하니 나비는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그의 품을 빠져나와 안정훈의 발 뒤로 가서 숨었다.

“형 고양이 맞아?”

나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안정훈은 당황해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아까는 할퀴었다. 권시혁이 대꾸했다.

“맞는데….”

“아직 작은 것 같은데. 발정기 와서 암컷 따라 나간 것도 아닐 거고.”

안정훈은 나비의 뒷덜미를 잡아서 들었다. 역시나 아까처럼 냉큼 얼굴을 할퀴려고 해서 얼굴에서 좀 뗐다. 고양이는 귀가 완전히 뒤로 접힌 채 겁에 질린 모습이 되어 있었다. 눈꼬리가 처지고 동공이 확장했다. 안정훈은 권시혁을 돌아보았다. 권시혁의 얼굴은 약간 초조해 보였다. 안정훈은 그에게 고양이를 내밀었다.

“다시 확인해봐.”

“나비야, 정말 나 잊어버렸어? 아니잖아. 우리 나비가 얼마나 똑똑한데.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말도 못 알아듣는 고양이에게 친히 말을 거는 권시혁의 모습은 퍽 이상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마치 말이라도 알아들은 것처럼 천천히 얌전해졌다. 온몸의 털을 세우고 귀를 완전히 접고 있던 모습이 점점 누그러져 안정훈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권시혁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권시혁이 그런 고양이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데리고 왔다.

남자와 그의 품에 안긴 고양이가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고양이의 귀가 다시 쫑긋 섰다. 겁먹지 않은 동글동글한 얼굴이 귀엽다. 고양이가 천천히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권시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뭔가 둘 사이의 의사소통 방법이라도 되는 것 같다. 권시혁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이내 품에 꾹 눌러서 소중하게 안았다.

“고맙다. 나비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네가 찾아서 다행이야.”

그리고 권시혁은 고개를 돌려 안정훈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안정훈은 약간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감동적이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안정훈은 습관처럼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며 시선을 슬쩍 돌렸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우리가 닮긴 닮았나 보지. 비슷한 냄새라도 나나? 나도 집에 갑자기 고양이가 들어와서 깜짝 놀랐어.”

“집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상상도 안 된다. 마른 것 같고…. 빨리 집에 데리고 가서 좀 먹여야겠어. 아니, 병원부터 데리고 가야 하나?”

권시혁은 다시 고양이를 이리저리 살폈다. 고양이는 그대로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천천히 해. 괜찮아 보이니까.”

권시혁은 곧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고 나서 다시 안정훈을 보았다.

“갑자기 왔다가 이렇게 가서 미안하다. 식사 한번 하자.”

“에이, 식사 가지고 퉁 치려고? 천만 원 준다며!”

안정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권시혁이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 마라. 준다.”

그리고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안정훈이 불쑥 말했다.

“천만 원 됐고. 엄마…, 한 번만 만나주면 안 돼?”

“생각해볼게.”

그리고 그는 나갔다. 안정훈은 쩝, 하고 중얼거렸다.

“맨날 생각만 해본대.”

안정훈은 한숨을 푹 쉬고 까치집이 된 자신의 뒷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인하는 어디 갔는데 아직도 안 와?”

*

‘큰일 났다.’

유인하는 차의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작은 고양이에게 차란 커다랗고 흔들리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이 각도에서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니 엄청나게 커 보인다. 그 남자는 천천히 운전을 하면서도 연신 자신의 고양이를 돌아보았다. 저런 얼굴은 처음 봤다. 나비는 두 발을 모두 몸통으로 깔고 앉은 상태로 몸을 움츠린 채 그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왜 갑자기 다시 고양이가 됐지? 안정훈 방에서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큰일 되는 거 아냐? 이러다가 또 인간으로 변하는 건가? 언제? 어떻게? 이 남자의 눈앞에서 갑자기 변하면?’

무서웠다.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아까는 패닉에 빠져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비야, 정말 나 잊어버렸어? 아니잖아. 우리 나비 얼마나 똑똑한데.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내가 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울컥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밤마다 꿈에 나타나던 한남동의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전처럼 행복하지가 않았다.

“나비야!”

김 집사와 김재민뿐만 아니라 다른 고용인들까지 전부 달려 나왔다.

“아니, 진짜 그 미친놈은 왜 남의 집 고양이를 밖에 버려요!”

김재민이 화를 냈다. 김 집사가 권시혁의 품에서 고양이를 넘겨받아 상태를 확인했다.

“어머, 살이 빠졌어. 어떡해. 물부터 줘야겠지? 병원 가야겠죠?”

“병원 갔다 오는 길이에요. 괜찮대요. 밥도 그대로 먹여도 된답니다. 밖에서도 완전히 굶은 건 아닌 것 같다고.”

“어머, 어머, 진짜 다행이다. 우리 나비 똑똑해서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들은 나비를 고양이방으로 데려가 깨끗한 물부터 주었다. 나비는 마지못해 마시듯 작은 분홍색 혀를 몇 번 날름거리며 물을 마셨다. 그리고 부엌에 갔던 김재민이 고양이용 고급 참치를 덜어 전용 그릇에 잘게 으깨어 가지고 왔다.

사람이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 먹으라고 하면 못 먹을 것이다. 아니, 원래 고양이 나비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던 잘만 먹었다.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그들을 모두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이 사람들 앞에서 변하면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자신이 알몸으로 사람들 앞에서 고양이 연기를 하고 있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말 그대로 말이다. 창피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잘 못 먹네요, 우리 나비. 좋아하는 건데….”

“나비야.”

그 남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유인하는 그의 손길에 반응하여 저도 모르게 머리를 치켜들며 그의 손에 자신의 몸을 꾹 눌렀다. 전처럼, 고양이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이 언제나 무표정한 그였지만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가 뜨는 것은 고양이의 인사 혹은 눈키스라고 부르는 행동이었다. 나비는 그렇게 그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 참치를 마저 먹었다. 다 먹으니 다들 안심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유인하는 얼른 달걀 모양의 은신처 안으로 쏙 들어갔다. 권시혁은 그 안으로 손을 넣어 한 번 더 나비를 쓰다듬고 일어났다.

“진정할 때까지 혼자 둡시다.”

“어디서 찾으셨어요?”

“정훈이가 찾았더라구요.”

“어머나, 도련님이 용케도 찾았네요. 나비 본 적도 없으신데. 연락하셨어요?”

“네.”

“그러면…, 아니, 나비가 송파까지 간 거예요? 그 먼 데까지?”

“그러니까요.”

그들은 그렇게 얘기를 나누면서 고양이방을 나갔다. 혼자가 되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한숨을 내쉰 유인하는 두 손, 아니, 두 앞발로 자신의 두 눈을 누르며 몸을 웅크렸다.

“먀…. (이제 어떡하지….)”

전에는 몰라서 그렇게 팔자 좋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예고도 없이 사람으로 다시 변할 거라는 걸 알았다면 모든 걸 놓고 그렇게 살았겠는가.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지금처럼.

‘나가야 해. 탈출해야 해. 인간으로 또 변하기 전에….’

여기서 인간으로 변할 때까지 기다려선 안 된다. 또 CCTV에 찍혔다가 제대로 얼굴이라도 나오면? 권시혁은 안정훈과 생각보다 훨씬 친한 것 같은데 안정훈이 영상을 보면 바로 알아볼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가야 한다. 유인하는 은신처에서 나와 캣타워로 향했다. 폴짝폴짝 뛰어 창틀로 올라갔다. 창문 밖으로 정원이 보인다. 창문은 슬라이딩 식이 아니라 두 개의 창을 안으로 활짝 열 수 있는 구조였다. 창문을 타고 몸을 일으켜 잠금장치에 발을 올렸다. 잠금이 뻑뻑해서 잘 내려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사람들이 오기 전에 다시 나가야 한다. 그 일념으로 오른쪽 앞발에 힘을 주니 서서히 잠금장치가 내려오다가 철컥하고 풀렸다.

‘됐다!’

이제 문만 열면 된다. 손잡이만 내리면 문이 열리고 그러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껏 이 집에서 아무리 높은 손잡이도 펄쩍펄쩍 뛰며 잘만 열고 다니던 고양이 나비였다. 고양이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

사람이어도, 고양이여도 안녕이라는 인사는 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화들짝 놀라 도망갔던 그때는 그를 마지막으로 보지 못하고 떠난 것이 아쉬워서 몇 번이나 눈물이 났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얼굴을 보면 떠나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잖아….’

달칵. 유인하는 창문을 열었다. 옆으로 비키니 문이 저절로 안쪽으로 조금 열렸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이렇게 나가면 가출이라는 것을 다들 알게 될 것이다. 또 찾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결국엔 괜찮아질 것이다. 어차피 이 집에서 산 기간은 고작 두 달밖에 되지 않는다. 고작 길고양이 한 마리일 뿐이다.

‘고시원 근처로 돌아가서 사람으로 변할 때까지 기다리자.’

나비는 쏜살같이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대문 밑의 아주 작은 틈을 빠져나가 도로로 나왔다. 조금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바깥사람들은 절대 무엇이 안에 있는지 감히 볼 수도 없는 높디높은 담장만이 보인다.

“…….”

고양이는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발걸음을 뗐다. 유인하는 이미 이 길을 몇 번 걸어봤기 때문에 익숙했다. 배는 아까 채웠기 때문에 몇 시간 정도는 걸어도 괜찮을 것이다.

‘이번엔 사람으로 변하는 데까지 얼마나 걸릴까?’

전에는 두 달이었고 다시 고양이로 변하는 데는 2주가 걸렸다. 그러면 이번에는 더 짧지 않을까? 그래, 그럴 것이다.

‘그리고 또 고양이로 변하는 건가?’

그럼… 어떡하지? 그건 너무 막막한 일이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니야. 그냥 사람으로 사는 거야. 전처럼. 그게 정상이니까.’

하지만 현재는 부정할 수 없는 고양이의 몸이다. 고양이의 몸으로 사람의 길을 걷는 것은 무서웠다. 사람들은 너무나 컸고 불친절했다. 발에 채지 않으려면 알아서 잘 피해 다녀야 했다. 몇 시간에 걸쳐 고시원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처음으로 고양이로 변했을 때 몸을 숨겼던 박스 사이에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하루나 이틀…. 사흘이나 나흘이면….’

유인하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새끼 고양이는 잠을 많이 자야 했다. 아까부터 눈꺼풀이 무거웠다. 다른 고양이의 냄새가 났기 때문에 불안하고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한 것일까?

‘원래 내 인생은 어쩔 수 없는 일투성이잖아.’

부모도 돈도 공부도….

그 집에서 살 때는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척척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고양이로서 하루하루 무럭무럭 자라갔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위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점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전엔 잡지 못했던 다람쥐나 잉어를 잡을 수도 있다. 매일이 즐거운 일의 연속이었다. 넓고 좋은 방이 생기고 다들 자신을 좋아하고 그 남자를 유혹해 소고기를 먹기도 하고 유튜브 스타도 되어 보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하루와 이틀, 사흘과 나흘이 지나도 유인하는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심지어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가난한 집안에서 컸어도 깨끗한 물 정도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다. 고양이로 변하고 나서는 사람도 못 먹을 한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잣집에서 지냈다. 유인하는 도저히 바닥에 고인 시커먼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목이 말라. 배가 고파….’

나흘째엔 결국 고시원의 근처를 벗어났다. 새벽이었다. 어떻게든 잠을 자서 최대한 버티려고 했던 것도 너무 배가 고파서 잠이 오지 않았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사람들이 고양이 사료를 두는 곳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짧은 다리로 걷고 또 걸어 봉천역 근처의 공원까지 가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미묘하게 고기 향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냄새가 아주 맛있게 느껴지자 본능적으로 달려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거기엔 사람들이 고양이 사료를 쌓아 둔 플라스틱 그릇이 있었는데 선객 또한 있었다. 인적이 드문 새벽에 길고양이들이 잔뜩 모여 포식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고양이가 나타난 것을 한 번씩 째려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인하는 어른 고양이들이 잔뜩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아니면 공짜 밥을 먹을 땐 싸우지 않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유인하는 이 동네에서 몇 년이나 살았지만 고양이로서는 뉴비였다. 그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한 건 그 많던 사료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을 때였다. 그들은 한 번씩 유인하를 위협하고는 슬렁슬렁 어디론가 가버렸다. 유인하는 얼른 하얀 플라스틱 그릇으로 달려가 코를 박았다. 냄새만 남아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조그만 분홍색 혀가 쑥 나와 빈 그릇을 핥기 시작했다.

‘뭐야….’

멀쩡한 식당에서도 괜히 자존심에 음식을 버리고 나오고 고양이일 때도 고급품이 아니면 입도 대지 않은 주제에 여기선 더러운 플라스틱 그릇이나 핥고 있는 것 아닌가. 비참해서 그의 분홍색 귀도 힘을 잃어 앞으로 축 처지고 하얀 얼굴도, 유달리 동그랗고 큰 눈도 처연하고 불쌍하게만 보였다.

그 뒤로 그는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맸다. 인간일 때랑 똑같았다. 그는 스스로 먹이를 구할 수 없는 패배자였다. 스스로 사냥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쥐나 참새 같은 걸 인간이었던 그가 생으로 잡아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시는 물이 깨끗한 물인지 구분할 수 없어 배를 앓기도 했다. 어른 고양이들에게 두드려 맞고 도망가는 건 일상이었다. 6월의 햇살만이 아직 차가운 길거리를 떠도는 고양이에게 위로가 될 뿐이다. 고양이의 세상은 유인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냉혹했다.

‘이러다 죽을 거야.’

도대체 언제 사람이 되는 거지? 다시 고양이가 된 지 일주일째, 그간 입에 댄 건 보수가 되지 않아 움푹 파인 인도에 맺힌 물 웅덩이뿐이었다. 흙맛이 나서 마시기 정말 힘들었다.

여기서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뭘 잘못했길래 자신이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째 인간일 때나 고양이일 때나 생각하는 것은 결국 비슷하다는 것이 웃기다. 그는 자신을 부양해주는 부모나 그 남자가 없으면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일 뿐인가.

그 남자에게 들킬 수 없다는 일념으로 다시 집을 나온 주제에 그간 몇 번이고 돌아갈까 고민했다. 하루라도 따뜻하고 배부르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시시때때로 그를 유혹했다. 그리고 그건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자신은 이렇게나 나약하고 무능력한 존재라고 매번 확인받는 기분이다.

‘차라리 죽을까.’

도저히 이렇게 살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매분 매초 생존을 위해 필사적이어야 하는 삶이라니. 고시 식당의 저렴한 음식마저도 마음 편히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삶이라니.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유인하는 그 고시생의 삶에서도 자주 수치심을 느꼈다. 이런 한낱 미물의 삶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잘 살려고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어떤 선택이 가장 치명적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은 처음부터 그냥 답이 없었던 걸까. 자신도 행복이라는 것을 느껴보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 갈 거였으면 왜 그렇게 살았을까. 먹고 싶은 거 꾹 참고 입고 싶은 거 못 입고 가고 싶은 곳도 못 가고 쳇바퀴처럼 고시원과 학원을 오가며 공부만 하고 살았다. 간혹 고양이 영상을 보며 귀여운 걸 귀엽다고 생각할 수 있을 때만 어쩐지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은 젊음을 뽐내고 즐기며 살았을 것이다. 해외여행도 가보고 연애도 하면서…. 그렇게 비교를 하니 더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예전에 처음으로 와인을 마시고 숙취에 시달리며 이틀이나 앓아누웠을 때 죽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보았다. 농담 삼아 사람들에게 곧잘 말하곤 했었다. 그 정도가 아니면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그리고 사는 게 막막해 정녕 죽음 말고는 길이 없어진 지금, 왜 사람들이 진짜 자살을 하는지 절절하게 알게 되었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모습이 된 건 자신의 탓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어차피 시간문제다. 아무것도, 아무도 저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했을 때 떠오른 것은 가족도 아닌…, 그 남자였다.

언제까지 찾아다닐까? 많이 슬퍼할까? 가슴이 먹먹했다. 고작 두 달…. 지금까지 살아온 평생에 고작 두 달, 누군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준 것은 그때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던 안전함, 날 절대 버리지 않을 사람…. 앞으로 다시 가질 수도, 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애초부터 유인하의 것이 아니었다.

‘진짜 고양이였으면 좋았을까….’

고양이는 건물 사이에 놓인 박스 틈에 몸을 숨기고 축 처져 있었다. 고시원에 살기 시작하면서 여기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무서워하곤 했다. 과연…. 저녁이 되며 날이 약간 서늘해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마 이 비를 다 맞고 나면 죽지 않을까. 차라리 아주 큰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쓸려갈 수 있도록. 고양이는 몸을 웅크리고 작게 골골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남자를 기억하면서.

*

“유인하…, 진짜 어디 간 거야?”

안정훈은 갑갑한 한숨을 내쉬었다. 유인하의 2차 시험이 끝난 날, 오랜만에 함께 술을 한잔하고 안정훈의 집에서 함께 잤다. 그리고 그가 사라졌다.

그는 휴대폰도 옷도 신발도 그대로 놔둔 채 증발하고 말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휴대폰이 있었지만 비밀번호를 풀 수 없어 그의 가족들에게 연락도 할 수 없었다. 친구들에게 수소문을 하여 유인하 부모님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연락을 했다. 그가 사라졌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고시원의 주소만 알아냈다.

안정훈은 오늘도 유인하의 집 문을 두드리며 그의 이름을 한참 부르다가 혹시나 싶어 앞집 문도 한 번 두드려 보았다. 문을 몇 번이나 두드리고 나니 언제 갈아입은 것인지 모를 속옷과 런닝만 입은 키가 작고 뚱뚱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안정훈은 약간 당황했지만 예의 바른 태도로 물었다.

“혹시 앞집에 지내는 사람 들어오는 거 본 적 있을까요?”

“뭐? 앞집?”

안정훈을 한 번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바로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문을 쾅 닫았다. 가타부타 대답도, 제대로 된 반응도 없이 그냥 문을 닫은 것이라 깜짝 놀랐다. 눈빛부터가 이상한 인간이었다.

‘뭐지?’

꺼림칙한 얼굴로 잠깐 닫힌 문을 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앞집에 살았다니. 유인하가 썩 좋아했을 것 같진 않다. 일단 안정훈은 유인하의 부모님이 가르쳐준 고시원 주인의 전화번호로도 전화를 해보았다.

-글쎄요. 그 학생 저번에도 몇 달이나 집에 안 들어오더라고. 월세도 밀리고. 이제 공부 안 할 건가 보지.

사람이 없어졌다는데 썩 놀란 기색도 없는 집주인이었다. 이런 일이 종종 있는 것일까. 안정훈이 물었다.

“혹시 CCTV는 없나요?”

-우리 고시원엔 남자들만 살아서 CCTV 없어요.

“아, 네….”

안정훈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유인하가 자신의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꽤 되었다는 건 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앞집은 문 사이에 끼워 넣은 사채 명함 등이 바닥에 떨어져 있어 사람이 드나들었단 티가 나는데 유인하의 집은 그대로 끼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에도 안 오고 부모님께 간 것도 아니고…. 그럼 얘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안정훈은 1층으로 터벅터벅 올라갔다. 그리고 고시원의 입구에 서서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서 비가 슬금슬금 내리기 시작했다.

유인하를 찾아다닌 지 벌써 일주일이다. 처음에는 회사도 다니면서 찾아다녔는데 그제부터는 종일 찾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연락하는 친구라고는 자신밖에 없는데, 그가 휴대폰도 지갑도 없이 도대체 어딜 싸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이제 그만 열심히 살고 싶어.]

그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좌절과 절망감에 눈물을 흘리는 그의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이쪽의 마음이 아팠다. 그걸 그렇게 넘길 일이 아니었던 걸까? 항상 강한 척하는 그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그런 말까지 했으니….

‘설마….’

안정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얼른 저었다. 아냐,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절대 아니야….

안정훈은 문득 그날 밤의 자신이 기억났다. 그날 밤 유인하를 가지고 몹쓸 상상을 하기까지 했다. 정말로 그렇게 되길 바란 것은 아닌데…. 그런데 만약 그가 나쁜 선택을 했다면 안정훈은 자신을 용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안정훈은 휴대폰으로 연락처를 검색하며 유인하가 혹시나 연락할 만한 사람은 없는지 다시 찾기 시작했다. 벌써 100번은 봤다.

그때 옆에서 아주 작게 골골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해서 소리가 묻혔다. 하지만 착각이 아니었다. 안정훈은 이마 위에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비를 막고 박스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건물 사이의 틈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박스를 뒤로 밀어내니 울퉁불퉁하고 더러운 콘크리트 바닥에 무언가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주황색 털이 매우 부드러워 보인다. 하지만 물에 반쯤 젖어 있었다.

고양이였다.

“어, 너….”

안정훈은 고양이를 두 손으로 안아 들고 비를 피해 처마 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롱거리고 있는 고양이의 얼굴을 보았다.

“나비?”

형네 집의 고양이가 집에 돌아가자마자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안정훈은 그쯤엔 이미 사라진 유인하 때문에 패닉 상태였기 때문에 그냥 넘겨듣고 말았다. 원래 길고양이니 야생성이 살아난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안정훈이 들고 있는 고양이는 들어올 틈도 없는 아파트에 홀연히 나타난 고양이, 나비가 맞았다. 그 대신에 친구인 유인하는 지금까지도 사라지고 말았지만….

‘하필이면 인하 고시원 근처에서 나타났네….’

고양이는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안정훈은 일단 한 팔로 고양이를 안은 채 형에게 전화를 했다.

“형, 나비 찾았어?”

-아니.

형의 목소리가 딱딱했다. 안정훈은 형이 무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굳은 목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저번에 고양이가 사라졌을 때도 이렇진 않았다. 물론 형의 변화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을 테지만. 이번엔 가출을 했기 때문에 더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그럼 그때는… 기분이 나빴던 건 아니었네?’

문득 아주 옛날 생각이 나기도 했다. 그가 기분이 나쁠 땐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형, 이거 진짜 이상한데…. 내가 또 나비 찾은 거 같아.”

안정훈이 품에서 고롱거리고 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권시혁은 1초 정도 아무 반응이 없다가 대꾸했다.

-…뭐?

형은 이번에도 순식간에 달려왔다. 유인하의 고시원과 학원을 살펴본다고 차를 끌고 오지 않은 안정훈은 냉큼 그의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아, 비 많이 온다.”

권시혁은 직접 운전까지 하고 왔다. 그가 운전을 하는 건 아주 보기 드문 모습이다. 안정훈이 보기에는 언제나 고상하고 품위 있는 형이 이렇게 부랴부랴 나타난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 고양이에 대한 그의 사랑이 느껴진다.

‘그냥 흔한 고양인데….’

권시혁은 안정훈의 품에 있는 고양이를 냅다 뺏어갔다. 안정훈은 그 고양이를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역시 아무리 봐도 그냥 흔하게 볼 수 있는 길고양이다. 권시혁의 얼굴은 진지했다.

“나비야….”

“맞아? 저기 있던데.”

박스가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는 건물 틈을 안정훈이 손으로 가리켰다. 얼굴은 하얗고 동그랗고 삼각형의 귀는 주황색이다. 나비가 맞았다. 권시혁은 고양이를 아기처럼 품에 안고 연신 쓰다듬었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고양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지? 왜 이러지? 아픈가?”

“형, 내가 운전할게. 내려.”

형제는 자리를 바꿔 앉았다. 안정훈은 차를 출발시켰다. 권시혁은 고양이의 네 발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자신의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안정훈은 그런 형을 자꾸 힐끔거렸다. 역시 이상했다. 그가 조금 보통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 동물병원부터 가자.”

권시혁은 내비게이션에서 고양이 전문병원을 찾아 주소지를 설정했다. 고양이는 따뜻한 곳을 좋아한다. 비를 맞아 몸이 차가워져서 이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권시혁은 품에 고양이를 꼭 안은 채 조금 속상한 얼굴로(여전히 무표정하지만) 카시트에 몸을 기댔다.

“너네 집까지도 멀지만….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다른 고양이들한테 쫓겼나 보지.”

“창문을 다 바꿔야겠어. 그걸 나비가 열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잠가 놓은 걸 열고 가출했다.”

“그걸 열었다고? 똑똑하네.”

“나비는 천재야.”

둘의 목소리는 분명히 달랐지만 이상하게 톤이 비슷하게 들린다. 일단 찾아서 안도감이 드는지 권시혁은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안정훈은 그런 형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형이 잠을 못 잘 때도 있나….’

같이 자본 적은 별로 없지만 이 인간은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자는 인간이다. 권시혁은 고양이의 작은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엄지로 천천히 뺨과 귀를 쓰다듬고 있었다. 안정훈이 말했다.

“형, 결혼해야 하는 거 아냐? 아기 잘 키울 것 같아.”

안정훈이 실없는 소리를 했다. 권시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잠이 든 것일까. 차는 동물병원의 주차장에 섰다. 커다란 형제 둘이 비를 피해 얼른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나비 집사님.”

수의사는 권시혁을 알아보고 그렇게 인사했다.

“나비 또 집 나갔다더니 찾으셨네요?”

“저번엔 괜찮았는데….”

권시혁은 얼른 나비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축 처져서 고롱거리고 있는 나비를 수의사가 얼른 진료실로 데리고 갔다. 직접 상태를 보고 엑스레이를 찍고 피검사도 했다. 그녀는 노란색 용액이 담긴 커다란 주사기를 꺼냈다.

“전에 사라졌을 땐 굶지는 않았던데…. 이번에는 많이 굶었네요. 그래도 수액 좀 맞으면 괜찮을 거예요. 3시간 정도 걸려요.”

권시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잠든 나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안정훈이 물었다.

“아니, 고양이가 왜 자꾸 도망가는 거죠? 고양이도 집에 곧잘 돌아온다던데?”

“새끼 고양이라서…. 다른 고양이들의 텃세에 밀려 도망갔을 가능성이 크죠.”

“문을 직접 열고 나갔다는데요?”

“바깥에 호기심이 많은 고양이인 모양이네요. 발정기가 와서 그럴 수도 있구요. 그런 고양이는 집을 나가면 안 돌아올 가능성이 커요. 두 번이나 찾은 것도 용하네요. 문단속 잘해야 해요. 주택에 사신다고 하셨죠?”

“네….”

안정훈이 대신 대꾸했다. 권시혁은 3시간은 내리 기다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안정훈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은 나도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나…. 인하야….’

마음이 무거웠다. 내일도 못 찾으면 경찰에 신고해야겠다. 안정훈은 나비가 들어 있는 케이지 앞에 자리를 깔고 앉은 형을 보며 말했다.

“형, 난 갈게.”

“왜? 집에서 밥 먹고 가라.”

“아니,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자고 가.”

“…왜 이래?”

안정훈이 별일이라는 듯 권시혁을 보았다.

“너랑 나비가 무슨 연이 있는 것 같다. 당분간 내 집에 있어라. 나비가 적응할 때까지.”

“뭐? 형 집에서 출근을 하라고?”

“어머니께 연락 드려. 주말에 식사하자고.”

“…….”

안정훈은 순간 ‘넌 엄마보다 그 고양이가 소중한 거냐?’ 하고 말할 뻔했다. 그냥 별생각이 없는 사람인 건 알지만 간혹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안정훈은 의자를 끌고 와 권시혁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고양이가 자는 모습을 함께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생각보다 시간은 금방 갔다. 권시혁은 혹시나 고양이가 또 도망갈까 싶어 새 케이지를 사서 고양이를 그 안에 넣었다. 그리고 그걸 안정훈에게 들게 했다. 그동안 운전기사가 와서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도 계셨네요?”

권시혁의 오랜 운전기사는 안정훈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안정훈은 손사래를 치며 고개도 저었다.

“아뇨. 아뇨. 제가 무슨 도련님이라고 자꾸 그러세요.”

그는 커다란 우산을 받쳐 들고 형제를 차로 안내했다. 오른쪽 뒷좌석 문을 열어 권시혁이 먼저 타게 했다. 그리고 얼른 안정훈을 왼쪽 뒷좌석으로 안내하여 태웠다. 그리고 운전석에 탔다.

“나비 그게 사장님 속을 여간 썩이는 게 아니네요. 두 번이나 집을 나가고.”

“그러니까요. 형이 이러는 거 처음 봐요.”

“그래도 두 번이나 도련님이 찾아 주셔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다들 나비한테 정이 얼마나 들었는데요. 나비 그게 원체 애교가 많아 가지고.”

“네.”

보통 이 차 안은 별 얘기가 오가는 공간이 아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안정훈을 본 운전기사는 입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입을 딱 다물고 운전만 했는지 모를 일이다.

동물병원에서 권시혁의 집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케이지를 들려고 했으나 권시혁은 기어코 안정훈에게 케이지를 들게 시켰다. 정말 이 고양이랑 안정훈에게 무슨 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가끔 보면 생각하는 게 정말 옛날 사람 같다.

“나비야!”

“아유, 진짜 내가 못 살아!”

김재민과 김 집사가 차례로 그렇게 말하며 나비를 케이지에서 빼냈다.

“나비가 창문 못 열게 잠금장치 내일까지 다 바꾸세요.”

권시혁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비를 맞아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복도를 걸으면서 첨언했다.

“정훈이 당분간 집에 있을 겁니다.”

“어머, 도련님이요?”

“아, 진짜 제가 무슨 도련님이라고 다들 그러세요, 부담스럽게.”

“얘가 두 번이나 찾은 걸 보면 뭔가 있나 봅니다. 나비가 집에 다시 적응할 때까지 둡시다.”

내가 물건이냐. 안정훈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권시혁은 동생을 돌아보지도 않고 침실로 들어갔다. 김재민은 나비를 고양이방으로 데리고 갔고 김 집사는 안정훈을 보았다. 안정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형은 나보다 고양이가 더 좋은가 봐요.”

“에이, 고양이는 동물이라서 그런 거죠. 아기 같은 거잖아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형은 결혼 안 한대요?”

“글쎄요…. 차라리 불가에 귀의한다고 하면 모를까요.”

“하….”

*

안정훈도 몇 번 이 집에 온 적은 있었다. 권시혁은 어딘가 초연한 구석이 있으니까 말이다. 안 그랬으면 집을 드나들기는커녕 보면 얼굴만 붉히는 사이가 됐을 가능성도 크다.

권시혁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고양이의 상태를 살피더니 무슨 젖먹이 아기처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서 본인은 젖먹이 엄마 같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무릎에 두고 먹더니 출근을 하기 전 안정훈에게 신신당부를 하며 데리고 있으라고 했다.

“형! 형 고양이 나 안 좋아하는데?”

형의 미신 같은 말에 무슨 의미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그가 말한 연이라는 게 있을까 싶어 친해질 요량으로 한 번 만져보려고 했다. 형의 무릎에선 그렇게 얌전하던 나비가 안정훈이 얼굴을 살짝 들이대니 바로 할퀴었다.

“네가 잘해야지.”

그러니 권시혁은 드물게 인상을 약간 쓰며 혀를 쯧 차며 똑바로 하라고 다시금 신신당부를 하더니 출근했다. 원래 사장님은 새벽 출근이 기본이다. 안정훈은 고양이의 겨드랑이 밑을 양손으로 잡아 들어 눈을 마주쳤다. 고양이는 바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야, 야…!”

나비는 안정훈의 손을 벗어나 쏜살같이 복도를 내달렸다. 김 집사가 한숨을 쉬었다.

“진짜 집을 나가고 싶어서 저러는 건 아니겠죠? 요새 사장님 아니면 다 저러더라구요.”

“예전에도 그랬어요?”

“아뇨? 예전에는 사람 안 가리고 애교가 얼마나 많았는데요. 바깥에서 나쁜 물이 들었나….”

김 집사도 고양이가 무슨 사람 애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안정훈은 그 말에 아주 약간 당황했다.

“8시에 출발하시면 될 거예요. 차랑 기사님이랑 준비하고 계세요.”

“네? 기사요? 아휴, 아직 제가 막 기사 딸린 차를 타고 다니기엔….”

“뭐, 어때요. 그럼 차만 끌고 가실래요?”

“차 뭔데요?”

“롤….”

“아니요!”

김 집사가 차 브랜드의 앞글자를 말하자마자 안정훈은 기겁을 해서 외쳤다. 안정훈은 거실로 얼른 도망쳤다. 돈을 좀 벌었다지만 역시 아직 서민 마인드가 강한 안정훈이었다.

권시혁이 일찍 일어나니 안정훈도 얼떨결에 평소 기상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일어나고 말았다. 볼 때마다 번쩍번쩍 호화스러운 집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주 오가고, 그것도 형의 집이라고 이젠 그렇게 어렵지가 않다. 안정훈은 하품을 하며 거실의 롱체어에 드러누웠다. 잠깐만 눈을 붙여야겠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뭐가 뺨을 치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래, 가령 작은 솜방망이 같은 게…. 안정훈은 눈을 떴다. 눈앞에 예쁘게 생긴 고양이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고양이가 사정없이 자신의 뺨을 치고 있었다.

“먀. (문 열어.)”

나비였다. 눈을 떠보니 그 남자의 집이었다. 또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유인하는 집안 창문을 샅샅이 확인했다. 창문이 전부 바뀌어 있었다. 고양이인 자신이 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안정훈은 도대체 왜 이 집에 있는 것인가. 아까 갑자기 얼굴을 할퀴었던 건 미안하지만, 아니, 갑자기 그렇게 커다란 얼굴을 들이밀면 어쩌라는 건가. 그래도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건 역시 친구뿐인 것 같다.

“냐아아. (일어나서 문 열라고.)”

“뭐야….”

아까는 할퀴더니. 안정훈은 잠을 이기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이 건방진 야옹이는 안정훈의 소매를 물고 당겼다. 마치 어디 가자는 것처럼 말이다. 안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바짓단을 물어 당겼다. 안정훈은 뭐지? 하면서 그냥 그 고양이가 가자는 대로 가니 정원으로 통하는 뒷문이 있었다.

“먀! (열어!)”

“…열라고?”

“먀! (그래!)”

안정훈은 나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뒷문의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달칵 도어 노브를 내리니 바로 나갈 것처럼 고양이가 문틈으로 달려가서 기다렸다. 안정훈은 다시 문을 잠갔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았다. 나비는 화를 냈다.

“캬! (왜 다시 잠가?)”

“너… 진짜 가출하고 싶어?”

“먀! (그래, 인마!)”

“…….”

자신이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인가. 고양이랑 대화를 다 하려고 하고. 안정훈은 스스로가 바보 같아져 고양이를 두고 그냥 일어났다. 마침 김 집사가 그를 불렀다.

“도련님~! 택시 왔어요!”

“네~.”

안정훈은 자신의 가방을 챙겨 얼른 밖으로 향했다. 나비, 그러니까 유인하는 그런 안정훈의 등 뒤에 대고 저주의 하악질을 했다.

“캬아아! (도움도 안 되는 새끼!)”

죽다 살아났다. 고양이는 조금만 굶어도 건강에 큰 이상이 생기니까. 하지만 이 집에 다시 들어온 것은, 그러니까 사실상 갇히게 된 것은 큰 문제였다. 언제 인간으로 다시 변하게 될지 모르는데 이 집에서 이렇게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도련님? 도련님은 무슨 도련님이래?’

도대체 저 새끼는 그 남자랑 무슨 관계인 것인가. 이번엔 어떻게 자신을 찾아서 그 남자에게 또 넘겨줬단 말인가. 살려준 건 감사해야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또 이렇게 공부를 놓고 있을 수도 없고.’

유인하는 서재로 달려갔다. 그리고 권시혁의 책상 위로 뛰어 올라가 컴퓨터를 켜고 내년 2차 대비 강의라도 듣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했다. 고양이의 발로 한 자 한 자 타자를 쳐야 했다. 혹여 고용인들이 들어올 때를 대비하여 연신 문을 살펴보아야 했다.

‘아, 진짜! 노트도 없고!’

손도 없고! 필기를 할 수가 없었다. 유인하는 한참 강의를 듣기는 했지만 결국 몰려오는 잠을 참을 수가 없어 컴퓨터를 끌 수밖에 없었다. 새끼 고양이는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자야 했다.

“우리 나비~, 낮잠 잘 시간인데 여기서 뭐 해?”

서재를 막 나오니 김 집사가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고양이는 힘없이 야옹, 하고 말했다.

“자장, 자장, 자장.”

그녀는 아기를 재우듯 그렇게 몸을 흔들면서 복도를 걸어갔다. 그때 다른 고용인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김 집사님, 청소할 사람 구하는 건 어떻게 되셨어요?”

“면접 보러 오긴 하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네.”

“빨리 구했으면 좋겠네요. 사람이 세 명이나 그만두니까 좀 벅차긴 하네요.”

“그러니까. 집이 좀 커야지.”

“세 명 다 뽑으실 거죠?”

“그럴 생각인데.”

김 집사가 얘기를 나누느라 멈춰 서자 유인하는 짜증이 났다.

“먀! (아! 잠 오는데!)”

유인하는 김 집사의 품을 탈출했다. 빨리 잘 자리를 찾아야 했다. 잠드는 게 무서웠다. 자고 일어났는데 다시 사람이 되어 있으면 어쩌는가. 유인하는 3층으로 향했다. 3층은 죄다 빈방뿐이다. 갑자기 사람이 되더라도 누군가 자신을 바로 발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3층의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방의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겨우 잠이 들었다.

*

덜컹.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인하는 뭔가 엉덩이를 짓누르는 느낌에 서서히 잠에서 깼다. 바닥과 침대 사이에 엉덩이가 끼었다. 신음을 흘리며 엎드려 누웠다. 맨살에 닿는 차가운 바닥과 나무의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유인하는 눈을 번쩍 떴다.

“안 돼…!”

그는 숨 막히는 비명을 작게 질렀다. 곧바로 허둥지둥 일어나려고 했다가 침대에 머리를 박았다. 그는 침대를 기어 나왔다. 깐 달걀 같은 알몸이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3층이 아니라 드레스룸에 숨었어야 했다.

‘나 진짜 뇌세포 죽은 거 아냐?’

여긴 일하는 사람이 15명이나 있었다.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걸 붙잡히면 그게 무슨 창피인가. 아니, 잡히면 고시고 뭐고 다 날아간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일단 이불을 몸에 둘러쌌다.

‘어떡하지? 어떻게 나가지?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아, 여기 3층이야.’

이런 꼴로 어떻게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있겠는가. 창밖을 살피니 해가 제법 내려와 있었다. 그 남자가 올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유인하는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고 심호흡을 했다.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어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복도를 살금살금 달려 계단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2층으로 슬금슬금 내려갔다. 그냥 재빨리 1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튀어 나가는 게 맞지 않을까. 쪽팔려도 어쩔 수 없었다. 냅다 뛰려고 했는데 1층에서 2층으로 누가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유인하는 2층에 있는 손님방으로 얼른 들어갔다. 안정훈이 지내는 방이다.

‘그래, 정훈이 옷을 일단 입자!’

유인하는 안정훈의 방을 둘러보았다. 집 안의 구조나 가구, 예술품까지도 빠삭하게 알고 있는 유인하였다. 그는 손님방에 딸린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어제 온 거라 개인 짐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있었다. 갑자기 머물게 된 사람의 방 같지 않았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진짜 안정훈…. 그 남자랑 무슨 사이야? 김 집사도 도련님, 도련님하고. 형제도 아니고.’

성이 다른데. 카카오톡을 보고 친하겠구나 대충 알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뜸 집에서 지낼 수 있는 사이인지는 몰랐다. 애초에 안정훈이 어떻게 또 자신을 찾아서 이 남자에게 데려다준 건지도 모르겠다.

[네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뭐가 있다고. 우리가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거짓말쟁이.”

유인하는 울컥했다. 맨날 우리는 친구라며 친한 척은 다 하더니. 항상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만만하게 보던 그가 감히 자신에게 숨긴 것이 있다는 게 화가 나기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정훈이 말이다.

‘그때 통화했을 때부터 이상했지. 기어오르는 거야. 이제 날 만만하게 보는 거지. 젠장….’

이 정도로 격의 없는 사이라면 안정훈의 집도 생각보다 잘 사는 것일까?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집이 서민의 표본인 것처럼 말하곤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다. 유인하의 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뭐? 출근? 백수라며?!’

역시 속인 것이다. 지금까지 유인하가 가난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속으론 얼마나 혀를 찼을까. 아니면 동정했을까? 그게 더 자존심 상한다.

‘다시는 연락 안 한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티셔츠를 입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또 자존심 상하게 품도 더 크지 않은가.

“에이씨….”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덜컥 열렸다. 응?!

“사장님도 일찍 오셨네요. 아무래도 나비 신경 쓰여서 그러신가.”

“형이 고양이를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어요.”

안정훈과 고용인이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안정훈은 곧장 드레스룸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다가 안정훈이 문을 열 때까지 어디에 숨을지 정하지 못해 행거 뒤로 한쪽 다리를 넣은 것이 다였다. 그래서 안정훈이 드레스룸의 문을 열었을 땐 바로 눈이 딱 마주쳤다. 안정훈의 눈이 엄청나게 커지고 유인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고용인이 물었다.

“뭐 찾으세요?”

“아, 아뇨!”

안정훈은 문을 쾅 닫았다. 닫고도 약간 당황했다. 자신이 이걸 왜 닫았나 싶었다.

‘인하?’

인하 맞지? 안정훈이 일주일이 넘게 찾아다니던 그 유인하인 것이다. 유인하가 왜 여기에?! 다시 생각해봐도 절대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 안정훈은 다시 문을 열려고 했다.

“정훈아, 나비 못 봤어?”

형이 올라왔다. 안정훈은 그를 돌아보았다.

“나비?”

그러는 사이 유인하는 드레스룸의 안에서 문손잡이를 꽉 잡고 굳어 있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권시혁까지 2층에 올라온 것이다. 유인하는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문밖에서 들리는 대화가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다른 데는 없어. 여기 들어간 거 아냐?”

“고양이가 여길 어떻게 들어와?”

“나비 문 잘 열어.”

권시혁이 안정훈을 비키게 하고 문손잡이를 열었다.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유인하는 깜짝 놀라서 더 문을 꽉 잡았다. 권시혁은 이상하다는 목소리를 냈다.

“누구 안에 있어?”

“아, 형, 내 친구가 지금….”

권시혁은 문을 다시 확 열었다. 이번에는 열렸다. 안정훈도 드레스룸 안을 보았다.

“왔는데….”

안정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비야.”

권시혁이 웃었다. 옷이 너저분하게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옷을 치우고 고양이를 꺼냈다. 권시혁은 고양이를 반쯤 어깨에 얹고 등을 쓰다듬었다. 안정훈은 드레스룸의 문틀을 잡고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

“여기서 장난치고 있었어?”

권시혁은 그 무뚝뚝한 얼굴로 고양이를 우쭈쭈 어르고 있었다. 아침에도 참 별꼴을 본다고 생각했지만 퇴근하고 돌아온 그의 목소리에서는 애정이 더 뚝뚝 떨어졌다. 적어도 그의 기준으로는 말이다.

안정훈은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유인하가 없었다. 그리고 고양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안정훈은 입을 딱 벌린 채 고양이를 보고 있다가 얼른 드레스룸 안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다시 고양이를 보았다.

‘그때도… 인하가 없어지고 나비가….’

나비는 이미 권시혁에게 들려 문까지 간 상태였다. 고양이의 작은 얼굴이 권시혁의 어깨 너머로 불쑥 나와 있었다. 안정훈은 오른손 검지로 고양이를 가리키고 드레스룸 안을 한 번 가리켰다. 고양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이상하게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였다.

“!”

안정훈은 양손으로 뺨을 감싸고 입을 더 떡 벌렸다.

*

“형…! 형, 형!”

“왜.”

“고양이 좀 잠깐 줘봐.”

“왜.”

권시혁은 마뜩잖은 얼굴로 안정훈을 돌아보았다. 돌아온 나비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느긋하게 즐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간의 해후를 풀어야 할 것 아닌가. 권시혁은 안정훈이 나비를 달라는 소리를 한 후부터 더욱 부지런히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희로애락의 표현이 별로 없는 목석같은 형이 저런 얼굴을 했으니 평소의 안정훈이라면 자신의 의견을 굽혔을 것이다. 안정훈이 다급히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

“뭐?”

권시혁이 안정훈을 마치 미친놈을 보듯이 보았다. 표정 변화는 하나도 없는데 그게 그렇게 보이는 게 신기했다. 아니, 아마 스스로가 미친놈 같아서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아니, 어차피 형 서재에 갈 거잖아! 아! 그냥 일단 좀 줘봐!”

안정훈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권시혁은 미미하게 눈썹을 꿈틀했다. 그리고 나비를 내려다보았다. 나비와 가까이 눈을 맞추고 바라보았다. 마치 고양이의 의사를 알아보겠다는 듯이 말이다. 고양이는 눈을 한 번 깜박했다.

‘그래…. 일하는데 자꾸 데리고 있었으니까 심심할 수도 있겠구나, 우리 나비.’

나비는 권시혁이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존재가 아니던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든 소중할 테지만 오랜만이라 더욱 특별하다. 하지만 고양이는 사람과 다르니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일방적인 마음이니까.

‘이런 게 짝사랑인가.’

권시혁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자기 고양이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곤 안정훈에게 주었다.

“잘 놀아줘라.”

그리고 권시혁은 고양이를 안정훈에게 주고 자신은 1층으로 내려갔다. 안정훈은 자신의 형이 나비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일단 고양이를 왼팔에 대롱대롱 매단 채 얼른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문을 쾅 닫고 품에 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고양이도 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너 설마 유인하냐!”

“먀! (야, 나 어떡해!)”

아까까지만 해도 절교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이렇게 된 거 역시 의지할 수 있는 건 안정훈뿐이다! 어쩔 수 없다. 아니, 사실 안정훈과 연락을 하겠다 안 하겠다 갈팡질팡하던 것은 유인하에게 제법 오래된 문제였다. 안정훈은 패닉에 빠진 것 같았다.

“야, 내가 너 얼마나 찾은 줄 아냐? 그때 그렇게 우리 집에서 사라져서! 너네 집에 연락해도 너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지, 고시원에 가도 없지!”

“냐냐. 먀! 냐아! (뭐? 네가 찾으러 다녔다고?)”

“아니아니, 고양이한테 말 걸고 있는 내가 미친놈인 것 같다. 아, 혹시 꿈꾸고 있는 건가? 인하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안정훈은 멍청한 얼굴로 자신의 뺨을 오른손으로 찰싹찰싹 치기까지 했다. 유인하는 그의 가슴에 앞발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먀! (나 맞아!)”

안정훈은 잠깐 고양이를 든 채로 왔다 갔다 하다가 문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안락의자에 앉았다. 고양이의 몸이 참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서 기분이 좋아 저도 모르게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캬악! 하며 그의 손에 냥냥펀치를 날렸다. 아얏, 하며 손을 뗐다.

“아냐,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아까 헛걸 본 건가?”

“먀!! (맞다니까!)”

고양이가 더 세차게 울며 안정훈의 가슴 위로 더 올라왔다. 안정훈은 그런 고양이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너… 진짜 유인하 맞아?”

고양이의 커다란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했다.

“오늘 7월 7일.”

고양이는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7월 8일.”

고양이가 눈을 깜박였다.

“1 더하기 1은 3.”

고양이가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127 더하기 111은 238.”

고양이가 눈을 깜박였다.

“내 생일 9월 1일.”

고양이가 뺨을 때렸다. 안정훈이 울렁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인하야…!”

고양이는 다시금 눈을 깜박였다.

“야! 너 이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안정훈이 얼굴을 가까이 대니 유인하는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에 또 솜방망이를 날리며 하악질을 했다. 이 고양이가 유인하라고 생각하고 보니 때리는 게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형 얼굴은 안 때렸으면서.’

뽀뽀까지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안정훈은 고양이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고양이는 그의 양손 위에 자신의 하얀 앞발을 올렸다.

“진짠가? 진짜 인하야?”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가볍기 짝이 없던 고양이가 아주 묵직해졌다. 아니, 갑자기 알몸의 유인하가 나타났다! 안정훈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얼어붙었다. 유인하도 눈을 크게 떴다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아, 미치겠네, 진짜. 도대체 오늘만 몇 번이나…. 왜 이러는 거야?”

“…….”

유인하는 원래도 하얀 편이었지만 고시 생활을 거치며 더욱 하얘졌다. 그런 피부가 커다란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매우 부드러워 보였다. 눈동자의 색깔이 아주 옅다. 옷 위로 닿는 나체의 느낌이, 무게가 자극적이다. 분명히 무척이나 놀랐다.

안정훈은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침만 꼴깍 삼켰다.

“야, 잘 들어. 나도 이거 왜 이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으니까. 변하는 주기가 들쭉날쭉이라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들키면 안 되니까 네가 나 좀 데리고 이 집 좀 나가줘. 알겠지? 어?”

유인하가 안정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안정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갈 뻔했다가 번쩍 들었다. 유인하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일단 나가자. 그 남자 다시 오면 어떡해.”

“유인하…!”

안정훈은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안정훈의 얼굴이 이상했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고….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탄 유인하는 자신의 맨살을 만지는 그의 뜨거운 손에 놀라 그의 팔을 잡았다.

“난 네가 혹시 그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라도 한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내가 죽긴 왜 죽어.”

유인하는 시선을 피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 뚱한 얼굴까지 진짜 유인하가 맞았다. 안정훈은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동적이라 그를 와락 껴안았다.

“으악, 뭐 하는 짓이야. 징그럽게…!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일단 나가야 한다고!”

안정훈은 유인하의 등허리를 왼팔로 꽉 안고 그의 뒤통수를 오른손으로 감쌌다. 여전히 안정훈의 눈은 크게 뜨여 있었다. 그가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그가 무사했다. 다행이다. 일주일이 넘게 걱정하며 찾아다녔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이대로 영영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무서워서 찾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부드러워….’

이 상황에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은 역시 이상한 것이겠지? 그리고 그랬다간 유인하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안정훈은 그를 놓아주었다. 유인하는 그의 무릎에서 내려갔다. 얼른 다시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안정훈의 옷을 입었다. 안정훈도 정신을 차리고 그쪽으로 갔다. 유인하가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쪽 날개뼈에 작은 점이 눈에 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제야 놀람이 좀 가셔 겨우 차분하게 물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은 이상하게 계속 두근거리고 있었다. 놀랄 만한 일이지. 놀랄 만한 일이라서 그런 것은 알지만…. 안정훈은 유인하의 몸에서 시선을 떼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해야 했다. 유인하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알겠냐? 갑자기 이렇게 됐는데. 이것 때문에 2차 시험도 망한 거였다고.”

자신의 헐렁한 티셔츠 사이로 그의 가슴이 다 보인다. 허리를 숙여 바지를 발에 꿰입으니 엉덩이부터 다리까지 스윽 눈길이 갔다.

‘진짜 왜 이래.’

안정훈은 스스로를 타박했다. 같이 잤을 때보다 기분이 더 울렁거린다. 그래도 끝까지 봤다. 열이 올라 잠깐 티셔츠를 펄럭거렸다. 옷을 다 입은 유인하가 똑바로 서서 안정훈을 보았다. 펄럭거리던 걸 얼른 멈췄다.

“어떻게 나가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까? 신발만 좀 빌려줘라.”

“잠깐, 잠깐만. 2차 시험도 이것 때문에 망했다고?”

안정훈이 물었다. 유인하가 딱딱한 얼굴로, 하지만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래.”

“그럼 다시 고양이로 변하는 거 아냐?”

안정훈이 물었다. 유인하가 멈칫했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 전에 집에 들어가야지. 고양이 사료도 미리 사야겠네.”

안정훈의 말에 방책이라도 하나 생각났는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창문으로 향하는 유인하였다. 안정훈은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

“그럼 어제… 내가 발견 못 했으면 너 죽을 뻔한 거 아냐? 야.”

안정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건 고맙다.”

“야, 잠깐만. 이렇게 급할 필요 없잖아. 일단 내가 아니까….”

정말로 창문을 뛰어내리려고 하는 유인하의 손목을 안정훈이 잡았다. 유인하는 방문을 힐끗 보았다.

“들키면 어떡해.”

“누구? 형한테?”

“밖에서 얘기하자.”

안정훈은 그대로 물끄러미 유인하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그래, 내가 도와줄 것이다. 내가 인하를 도와줄 것이다.

‘우린 가장 친한 친구잖아?’

안정훈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리고 그 말을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잠깐 앉아.”

그는 유인하를 안락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유인하가 불안하게 힐끔거리는 방문으로 다가가 문을 잠갔다.

“됐지?”

“한 시간이면 찾으러 올 거야.”

그 남자는 집에 돌아오고 나서 항상 일을 그 정도 한다. 유인하가 그렇게 말하자 안정훈이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유인하는 알 수 없었다. 안정훈은 스툴을 하나 끌고 와 유인하의 가까이 앉았다.

“언제부터 이런 거야?”

“4월… 3일부턴가.”

“왜 이런 건지 짐작 가는 건 있어?”

“있을 것 같냐.”

평소만큼이나 까칠한 말투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얼굴도 보지 않고 인상을 찌푸린 상태로 발로 물건만 툭툭 차고 있었다. 안정훈이 물었다.

“그럼 너 처음에 두 달 넘게 여기서 살았다는 거 아냐? 그때는 잘 지냈다고 들었는데?”

“별로.”

유인하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안정훈은 뭔가 더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허리를 펴서 앉았다.

“다시 고양이로 변하는 건 지금 안 돼? 아까도 고양이로 변했다가 지금 또 변한 거잖아.”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일단 나가자.”

“형이 또 나비 찾을 텐데….”

안정훈이 잠깐 걱정하며 중얼거렸다. 유인하가 발끈했다.

“뭐? 야, 넌 고작 아는 형이 10년 넘게 친구로 지낸 나보다 더 중요하냐?”

유인하가 발끈해서 그렇게 말하자 안정훈은 표정을 조금 굳혔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아는 형이 아니니까 그렇지….”

“그럼?!”

“역시 우리가 별로 닮진 않았나….”

안정훈이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진짜 형이야. 엄마 쪽으로만 피가 통했지만….”

“…뭐?”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유인하는 깜짝 놀라서 잠깐 말을 잃었다. 그리고는 입을 뻐끔거리며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안정훈은 피식 웃었다.

“보다시피 형이 좀 많이 무뚝뚝한 편이라. 그래도 우애 좋게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어렸을 때부터 많이 쫓아다녔는데, 말은 안 해도 좀 귀찮아하는 것도 같고…. 그래도 이번에 고양이, 그러니까 너 두 번이나 찾아 주니까 고맙긴 한 모양이더라고. 집에도 오라고 하고…. 어쨌든.”

안정훈은 솔직하게 말했다.

“왜… 말 안 했어?”

유인하가 물었다. 유인하가 그간 안정훈이 권시혁과 아는 사이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분개했던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분노였다. 단지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 하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제라는 건 모르는 사이보다 나쁜 게 당연하다. 유인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남자랑 안정훈은 아버지가 다르다는 걸로 그렇게 다르게 산 거잖아?’

그래, 안정훈의 집은 분명히 그렇게 돈이 있는 집이 아니었다. 그래서 혹시 그가 부잣집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자마자 배신감을 느낀 것 아닌가. 유인하도 10년이 넘게 그를 알아 왔다. 화목했지만 경제적인 사정은 유인하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 화목함도 거짓이라는 말 아닌가?

게다가 자신과 달리 모든 걸 다 가진 형이 있다는 건 분명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유인하라면 그럴 것이다.

“어? 아니, 자랑할 것도 아니고….”

안정훈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듯, 원래대로 순하고 무던한 태도로 말했다. 유인하는 정색 했다.

“야, 난 진짜 우리 집에 있었던 일 별의별 것까지 다 얘기했는데. 형이랑 동생 욕도 다 하고….”

“그거랑 이거랑 같아?”

안정훈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유인하는 여전히 정색했다.

“너희 집에 그런 사정 있다고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럴 줄 알았어?”

“아니야.”

어. 안정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안정훈은 유인하를 알았다. 그가 얼마나 사람들을 하나하나 아래위로 나누어 생각하는지. 자존심이 강하고 얕보이는 걸 싫어하며, 그래서 언제나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하는지 무시하지 않는지 탐색했다. 먼저 상대의 흠을 찾는 데는 선수였다.

[누가 이기고 지는 건 첫인상에 결정되는 거라고.]

어렸을 때의 그는 안정훈에게 그런 말까지 하기도 했다. 아마 여전할 것이다. 지금의 유인하는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조금… 섭섭하네. 난 네가 나한테는 뭐든 얘기하는 줄 알았는데.”

“말 못 해서 미안.”

“…….”

유인하의 얼굴에는 안정훈이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괘씸함과 동시에 안정훈을 조금 동정하는 마음까지 쓰여 있었다. 아니, 전보다 조금 더 하찮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김성우는 유인하가 안정훈을 호구같이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안정훈은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걸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이 유인하를 더 좋아해서 그러는 것 같다. 항상 더 친해지고 싶다고,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확실히 많이 불편하겠네…. 형이랑…. 기껏 나 찾아줘서 사이좋아지고 있는데 내가 그냥 나가버리면 네 입장이…. 며칠은 있는 게 좋을까?”

항상 안정훈을 만만하게 보고 무시하던 유인하였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동정심이 일었다. 꼬붕이든 깍두기든 결정적일 땐 챙겨줘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코가 석 자인 상황인데도 유인하는 이상한 선심을 발휘했다.

안정훈이 얼마나 병신 같든 부모에 대한 문제는 조금 다르다. 그건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다른 형제라든가. 그런 거 한국에서는 없는 것만 못한 것이다. 안정훈의 잘못도 아닌데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찝찝한 존재가 있는 것이다. 아니, 그런 것 때문에 괜히 당당하지 못해 지금의 호구 같은 안정훈이 있다고 생각하면 불쌍하기까지 하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와…. 상상도 못 하겠다. 아빠가 다른 형이 있다는 거. 그냥 평범하게 엄마 하나 아빠 하나 가지고 태어나는 것도 어려운 걸지도 모르겠다….’

옳고 그른 게 호사꾼들에게 뭐가 중요한가? 솔직히 그들이 어렸을 때만 해도 어떤 아줌마가 남편이 둘이 있고 아빠가 다른 아들이 하나씩 있다고 하면…. 아마 지금도 수군거릴 것이다. 어쨌든 비정상적인 것 아닌가.

‘게다가 하나는 재벌, 하나는 가난한 남자….’

솔직히 무슨 사정인지 몹시 궁금하다. 하지만 쉽사리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래, 게다가 얘 지금 백수지. 안정훈은 분명히 유인하에게 1년 전에 회사를 관두고 백수가 되었다고 했다. 출근을 하는 척한 것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이부 형에게는 알리지 않은 것이다. 쪽팔리니까.

‘아버지가 다른 형…. 그러니까 아주머니는….’

유인하는 안정훈을 이상한 눈빛으로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유인하는 우선순위를 잠깐 잊었다. 남을 동정할 수 있는 건 기분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우월하게 느껴지니까.

‘어쩌지? 지금 당장 나가면 진짜 얘랑 그 남자 사이가 나빠지는 건가? 그렇다고 안 나갈 순 없잖아? 며칠? 얼마나? 아니, 언제 다시 고양이로 바뀔 줄 알고? 고양이로 안 바뀌면 어떻게 나가지?’

머리가 아프다. 안정훈이 말했다.

“일단은 친구 데려왔다고 얘기해 놓을까? 지금 너 있는 거 이상하지 않게.”

“뭐? 안 돼.”

유인하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답했다.

“전에 도망칠 때 CCTV에 찍혔단 말이야.”

“그거? 별로 못 알아보겠던데?”

“봤어?”

“응.”

“…그래도 안 돼.”

“왜?”

유인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유인하는 갑자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두 손을 모아 잡고 눈을 감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다가 작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고양이가 되고 싶다. 고양이. 고양이로 변해라. 사람으로 살기 싫다. 고양이가 되고 싶다.”

안정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인하처럼 얕보이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애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게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그때 안정훈의 방문 손잡이가 덜컥하더니 바로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정훈아.”

권시혁이 온 것이다. 그러자 유인하는 눈을 번쩍 뜨고 방문을 돌아보았다. 안정훈은 유인하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유인하는 벌떡 일어났다.

“나, 나 간다. 그냥 창문으로 뛰어내려야겠어.”

얄팍한 동정심은 당연히 오래가지 않았다. 이 상태로 그 남자와 마주 볼 생각을 하니 며칠은커녕 1초도 있을 수가 없었다. 창문으로 얼른 달려가니 안정훈이 말렸다.

“야, 여기 높아. 다쳐.”

안정훈이 그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유인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주변을 휙휙 보다가 드레스룸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을 닫고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모아 이제껏 없을 간절함으로 기도했다.

‘제발, 제발. 제발이요.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다시 고양이로 변하게 해주세요. 그럼 바로 나갈게요. 열심히 살게요. 뭐든 할게요. 그 남자한테는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안정훈에게 들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남자에게는 다른 일이었다.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일까. 다행히 안정훈이 확인을 위해 드레스룸의 문을 살짝 열었을 땐 유인하는 고양이로 다시 변한 상태였다. 권시혁이 안정훈을 밀어내고 문을 활짝 열었다.

“나비야.”

촌스러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온기가 서렸다. 동생이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내는 목소리와는 분명히 달랐다. 커다란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내밀었다.

“우리 나비, 옷이 좋은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절로 귀를 쫑긋거리게 했다. 옷을 헤치고 나오니 그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얼굴. 그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따뜻한 손이다.

그 순간 너무나 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거짓말….’

큰비가 내려 모든 것이 쓸려가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아침에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의 품에 안겨 사랑을 받던 것이 유인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순간이었다. 아무런 걱정도 불안도 없이 고양이라고 바보 같은 짓이나 숨 쉬듯이 저질렀다. 그래도 고양이라고 계속 귀여움을 받았다.

고작 고양이가 되어 귀여움을 받던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하는데도, 상해야 하는데도 막상 다시금 그 남자의 품에 안기니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영원히 꿈에서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계속 함께 있으면 좋겠다고 마음 깊이 바랐다. 그런데 이 남자가 대뜸 자신을 놓고 평소처럼 출근을 하는 것이 아닌가. 꿈인데도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정신이 번뜩 들었다. 얼른 다시 도망가야 한다고 집안을 헤집고 다녔다. 나갈 수가 없었다. 언제나 행복했던 이곳에서 불안으로 마음을 졸이며 좀도둑처럼 침대 밑에 숨어 있어야 했다. 자꾸 사람과 고양이를 오가서 패닉에 빠져 있었다. 아까도 간신히 고양이로 변해 이 남자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지 않았던가.

방금까지도 이 남자에게만은 들키지 않게 해달라고 있지도 않은 신을 찾아 빌었다. 들키면, 들키면…. 그런데도 정작 이렇게 이 남자를 마주하니 또 기쁜 마음이 들어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기쁘고 불안하고 억울하고 슬프기도 했다.

‘내가 가출한 건데….’

이 남자는 여전히 화 같은 건 내지 않았다. 고양이가 된 유인하는 본능을 숨기지 못하고 절로 그의 손에 이마를 문지르며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그런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품에서 그의 향기가 났다. 맡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먀. 먀아. 냥. 냐. 냐앙. 냐!”

“그래, 그래.”

고양이는 엉덩이를 받쳐 든 그의 왼팔에 온몸을 의지하고 가슴을 앞발로 짚은 채 그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날 사랑하고 있다.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느끼니 갑자기 전날의 서러움이 몰려와 고양이는 쉴 새 없이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힘들었다고. 보고 싶었다고.

하지만 고양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는 그는 무심한 태도로 오냐오냐하며 자신의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유인하는 분명 고양이가 되자마자 창문으로 튀어 나가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가출하면 이 남자도 단념하지 않겠는가.

‘도망가고 싶지 않아.’

나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유감이 기분이 좋았다. 그의 품이 기분 좋았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왜 도망가야 하는 걸까. 왜 함께 있을 수 없는 걸까. 그의 오른손이 나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비는 그 손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이상했다. 유인하는 자신의 감정에 이렇게 솔직한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특히나 사람을 좋다고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기 때문에, 좋은 걸 좋다고 솔직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기까지 했다.

‘같이 있고 싶어.’

너무 좋아…. 나비는 골골거리는 소리를 크게 내며 유난히 더 남자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권시혁이 웃었다. 그는 고양이를 두 팔로 안고 이부동생을 돌아보았다.

“밥 먹자.”

으아악. 그동안 패닉에 빠진 것은 안정훈이었다. 안정훈은 그를 따라가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하지? 인하 빨리 구해줘야 하는데.’

저렇게 있다가 사람으로 변하면 꼼짝없이 무단침입자다. 전에 도망갈 때 CCTV에 찍힌 적이 있으니 상습범으로 찍힐지 모른다.

‘그러니까 일단 내 친구라고 말은 해놓는 게 낫지 않아?’

아니, 그 유인하니까 자신이 고양이가 되어 대했던 사람들을 사람의 모습으로 대하기 싫을 것이다. 자존심이 상할 테니 말이다. 형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그를 아기를 대하듯 하고 있지 않은가. 눈에 보이는 것은 작은 고양이지만 실체는 그 유인하인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뿐인데도 그는 굴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안정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인하 그동안 고생 많았겠다, 진짜…. 게다가 인하는 형 같은 사람 진짜 싫어한다고….’

물론 안정훈은 형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다. 하지만 유인하는 재벌 3세니 4세니 하는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들은 이 사회의 부조리에 수혜를 받은 인간들로 의식하지도 않고 숨 쉬듯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이런 형이 있다고 말을 하냐고….’

안정훈은 한숨을 쉬었다.

[기껏 나 찾아줘서 사이좋아지고 있는데 내가 그냥 나가버리면 네 입장이…. 며칠은 있는 게 좋을까?]

자신의 옷을 입은 채 자신을 위해 고민하던 유인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날 위해서 며칠은 견뎌주려고 한 거잖아?’

자신과 형의 사이가 혹여나 불편해질까 봐. 겉으로 나오는 태도가 솔직하지 못할 뿐 역시 유인하도 자신을 소중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안정훈은 더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빨리 대책을 생각하자. 어떻게 하지?’

안정훈은 나비를 너무 뚫어져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린애 취급당하는 꼴을 자신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권시혁은 그대로 고양이를 안은 채 식사를 했다. 거실에서 책을 읽을 때도 고양이를 계속 무릎 위에 올려놓고 쓰다듬었다. 심지어 잘 때도 데리고 들어갔다. 그 무뚝뚝하던 형이 저러니 안정훈으로서는 괴리감이 극심했다. 전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과잉보호다.

‘내가 도와줘야 하는데. 아, 진짜. 하필이면 우리 형한테…. 형은 또 왜 저러는 거야? 형이 고양이 같은 걸 주울 성격이 아닌데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거지? 형이 이해가 안 된다.’

착하고 선한 성품에 대인관계도 두루두루 원만한 안정훈이었다. 그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대하기 힘든 사람이 바로 그의 형이었다. 희로애락이 강한 유인하는 차라리 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게 극도로 적은 권시혁 같은 사람이야말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안정훈은 권시혁과도 언제나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기 때문에 자주 고민하곤 했다.

‘형한테는 미안하지만… 여차하면 그냥 들고 도망가야겠다. 어차피 형한테는 그냥 고양이 한 마리 잃어버리는 것뿐이잖아?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 한 마리 사주면 될까?’

안정훈은 자신의 방 안락의자에 앉아 가만히 골몰했다. 고양이가 된 유인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애타게 안정훈이 자신을 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다 뛰었다.

‘그래, 이건… 기회일지도 몰라.’

유인하와 정말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될 기회. 드디어.

오랜 고시 생활에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안정훈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그걸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는 것뿐이지 않은가? 유인하같이 까다로운 사람이 그런 걸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네가 그렇게 유인하 챙겨도 걔 합격해봐라. 너 다시 개무시할걸?]

그래서 회사도 그만두고 다른 일도 시작해서 꽤 성과를 냈지만…. 유인하는 분명 가난을 탈출하길 바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돈만 추구하는 것은 혐오했다. 그래, 돈만 원하는 것이었으면 그의 말대로 고시가 아니라 빨리 회사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게 유인하의 대단한 점이기도 했다. 그렇게 싫어하는 가난을 견디면서도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안정훈이 단지 돈이 많다고 해서 안정훈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려운 순간에 돕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인 것이다. 이부 형과 사이가 불편해질 것도 감수하고 자신을 도와준다면 유인하도 감동받지 않겠는가? 자신을 다시 봐주지 않겠는가?

‘역시 나밖에 없다고….’

그 까다로운 인하가 그런 말을 할 땐 어떤 얼굴로 날 볼까. 나는 어떤 얼굴로 인하를 볼까. 이상하게 등골이 오싹했다.

*

안정훈은 좀 더 밤이 야심해지기를 기다렸다. 형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자는 사람이니 벌써 잠들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만전을 기해야 했다. 12시가 되기 2분쯤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데렐라를 데리러 가는 기분이다.’

집 안은 많이 어두웠다. 밤의 냄새가 난다. 부지런한 주인을 둔 저택은 그 주인을 닮아 깔끔하고 차분하고 무게감이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간 안정훈은 저택의 마스터룸 앞에 섰다.

안정훈은 형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안정훈은 10살이었고 그는 15살이었다. 15살의 그는 이미 어른만큼이나 컸고 전혀 어린애 같지 않았다. 약간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그는 그때도 이미 이상할 정도로 무심하고 차분했고 그런 그를 본 엄마는 울었다.

‘엄마, 미안.’

안정훈은 마음속으로 미리 사죄하고 문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달칵. 조그마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침실 안의 어둠에 적응하니 어렴풋이 사물이 분간이 갔다. 캐노피가 달린 커다란 침대로 다가갔다.

권시혁은 바로 누워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어깨와 얼굴 사이에 작은 고양이가 동그랗게 말려 자고 있었다. 안정훈은 자고 있는 형의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작은 고양이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다시 침실을 나왔다. 문을 닫았다.

“후우~.”

심장이 벌렁거린다. 형의 것을 훔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그때도 어린 마음에 얼마나 심장이 뛰던지.

‘형도 미안.’

그는 자신의 형에게도 마음속으로 사죄를 했다. 그리고 품에 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그동안 사람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고양이는 작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안정훈은 고양이를 머리부터 등까지 한 번 쓰다듬었다. 별로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비는 안정훈이 만지려고 할 때마다 하악질을 하고 앞발로 손을 쳤다.

“…….”

안정훈은 자고 있는 고양이를 마음껏 주물럭거리며 부엌으로 갔다. 나비가 또 가출한 것처럼 꾸밀 생각이었다. 이미 전적이 있으니 형도 결국 포기할 것이다.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부엌 뒷문의 잠금을 풀고 살짝 열어 두었다.

‘지금 당장 변할 것 같진 않다. 내 방에서 데리고 있다가 아침에 출근하는 척 가방에 넣어서 데리고 나가야지.’

괜찮은 계획이다. 그리고 막 돌아서려고 했다.

“누구세요?”

부엌의 불이 켜졌다. 입주 고용인 중 하나였다. 안정훈은 깜짝 놀라 뒤로 돌았다. 김재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정훈의 얼굴을 보았다.

“도련님?”

김재민의 눈이 열린 부엌 뒷문으로 향하고 안정훈의 품에 안겨 있는 나비에게로 옮겨갔다.

“어….”

“잠이 안 와서요. 나비랑 놀아주다가 바람 좀 쐴까 해서요.”

안정훈은 인상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재민은 눈을 한 번 끔벅했다.

“아, 그러셨어요? 그래도 조심하세요. 나비 또 가출하면 어떡해요. 가출할까 봐 집 창문도 다 바꿨잖아요.”

“아, 그렇죠. 나비를 들고 나가는 건 그렇겠죠?”

“네, 좀 그렇겠죠?”

안정훈은 부엌문을 닫고 다시 잠갔다. 변명을 덧붙였다.

“잠들어서 괜찮을 것 같았는데….”

“아, 네. 그렇겠네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네, 도련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안정훈은 부엌을 나갔다. 김재민의 묘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안정훈은 식은땀을 흘렸다.

‘실수했다….’

미리 문을 열어 두고 데리러 갈걸. 괜한 오해를 산 건 아니겠지? 안정훈은 나비를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데려갈까 하다가 그것도 아니다 싶어 고양이방으로 가 나비를 캣타워 위에 두었다.

“나비 잘 때는 사장님 방에서 자는데요.”

부엌을 나온 김재민도 고양이방으로 왔다. 안정훈이 나비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지고 대답했다.

“형 지금 자서요.”

“아, 그렇죠.”

설마 따라온 건가? 진짜로 의심을 샀나? 안정훈은 다시 그에게 인사를 하고 고양이방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갔다. 표정이 굳었다.

‘어떡하지?’

만약 근시일 내에 나비가 사라지면 내가 의심을 받게 될까?

‘나랑 상관없이 나비가 스스로 가출한 걸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집의 창문은 모두 고양이가 열 수 없도록 바뀌었다. 집안과 정원을 보는 CCTV는 없지만 대문 쪽과 담벼락을 따라서는 많다.

‘사람들 눈앞에서 가출하면….’

이건 유인하랑 의논을 해야 하는 사항이다. 안정훈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털썩 누웠다. 실망스러웠다. 짜증도 좀 났다.

‘멋지게 구해주려고 했는데.’

아까 그 사람한테만 안 걸렸어도 내일 아침이면 바로 유인하를 구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아까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그 사람이 아까 본 걸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어떡해? 형한테 말하면?’

유인하를 구출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형과의 사이도 나빠지게 될지 모른다. 늦은 시간이니 누구한테 당장 아까 본 걸 말할 리는 없을 테고….

‘그 사람이 당장 없어질 방법은 없나?’

잠깐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곧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당장 그런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야. 아까 본 걸로 내가 나비를 가출시키려고 했다고 생각하는 게 과대망상이지. 나한테는 그럴 이유가 없잖아? 내가 두 번이나 나비 찾아줬는데. 게다가 난 착하고, 언제나 형한테 잘 보이려고 하고, 이 집 사람들도 그래서 다 나 좋아하잖아.’

일단 자야 하나. 안정훈은 침대에 바로 누웠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아까 자신의 품에서 나체로 나타난 친구를 떠올렸다. 동화 속 마법처럼.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그의 눈동자가 유난히 밝게 보였다. 고양이 나비와 비슷할 정도로…. 안정훈은 그때의 상황을 제법 오랫동안 떠올렸다. 자신의 위에 올라탄 그의 무게나, 손에 닿은 보드라운 피부결, 예쁜 얼굴….

‘이상하다.’

친구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왜 하지?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잖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이런 게 지금이 처음은 아니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의 등에 있는 점도 그대로라는 기억이 나니까. 그의 등에 점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런 걸 언제 그렇게 유심히 봤을까?

‘맞아. 수학여행 때…. 온천욕 할 때였나…. 그때가 아니더라도….’

체육 시간 때 옷을 갈아입을 때면 매번 그의 등에서 그 점을 찾아내곤 했다. 그걸 왜 그렇게 유심히 봤을까? 새카맣게 까먹고 있었다. 친구의 등에 그런 게 있다는 걸 기억하는 건 뭔가… 좀 이상하긴 하니까. 기억의 줄기를 타고 타고 올라가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다시 오늘의 일로 돌아왔다.

[뭐? 야, 넌 고작 아는 형이 10년 넘게 친구로 지낸 나보다 더 중요하냐?]

“참.”

안정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그런 소리를 냈다. 나에게 네가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싶냐. 그렇게 불쑥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런 걸 물으면 어떤 표정을 할까. 안정훈은 또 이상한 상상을 짧게 지속했다. 당황하겠지. 그러고는….

‘그렇다고 대답할까?’

그럼 나는 뭐라고 할까? 그 뒤로는 상상이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 유인하의 모습은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자신의 모습은 달걀귀신처럼 밋밋하고 흐릿했다. 안정훈은 망상을 관두고 일단 잠을 자기로 결정했다. 잠은 전처럼 또 이런 망상들을 흐릿하게 지워줄 것이다.

*

다음날, 권시혁이 출근을 하자마자 안정훈은 남들의 눈을 피해 얼른 나비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안락의자에 앉아 고양이를 자신의 배 위에 올리고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속닥거렸다.

“야, 큰일 났어. 어젯밤에 너 잘 때 내가 너 들고 탈출하려다가 걸렸어.”

“먀? (뭐라고?)”

“어떡하냐, 이거. 이제 너 가출하면 진짜 내가 의심받을지도 몰라.”

“냐! 캬! (야 이 병신아!)”

“미안!”

안정훈은 정말 미안한 얼굴로 그렇게 빌었다. 마치 혼나는 대형견 같았다. 고양이 유인하는 화가 나서 안정훈은 코를 확 할퀴었다. 안정훈은 다시금 미안! 하고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그리고 그는 얼른 생각한 대책을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많이 생각해봤는데… 사람들이 볼 때 네가 집을 나가면 되지 않을까?”

“먀아? 먀! (어떻게, 임마!)”

“지금 창문은 네가 열 수 있는 게 없잖아. 어제 들켜서 내가 열어줄 수도 없고. 형이 퇴근할 때 문 열리는 거 기다리고 있다가 튀는 거야.”

어째 고양이 말은 형보다 동생이 더 잘 알아듣는 것 같다. 그의 말도 말이 되는 것 같고. 유인하가 물었다.

“먀? (그리고?)”

“그리고 밖에서 내가 너 픽업하는 거지. 어디서 만날까? 이태원역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내가 너 나가는 거 확인하고 차 가지고 이태원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잖아.”

한참 안정훈에게 화를 내기도 하던 고양이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물론 고양이 말을 정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야옹댄다고 뭔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때?”

“…….”

“너 이러다가 사람들 앞에서 변하면 큰일이잖아. 최대한 빨리 나가야지. 내 생각은 안 해줘도 돼. 형도 금방 괜찮아질 거야. 네가 2번이나 제 발로 나가면 그냥 연이 아닌 거구나, 하고 안 찾을걸?”

안정훈이 말했다.

“지금 고양이라서 다행이야. 당장 사람으로 변할 것 같진 않지? 나 집에 차 가지러 갔다 온다?”

“…먀….”

안정훈은 고개를 끄덕이곤 고양이를 안락의자 위에 두고 일어났다.

“혹시 모르니까 내 방에 있어.”

안정훈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나비는 창틀로 올라갔다.

‘그런가….’

그럴지도. 그렇겠네. 하긴 그 남자 성격이 확실히 그렇지….

사람으로 다시 변할지도 몰라, 적어도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수차례 스스로에게 말하면서도 결국 잠자리까지 함께했다. 고양이가 되면 이상하게 참는 것이 힘들어졌다. 원래 유인하는 많은 것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았던가. 그 남자가 너무 오냐오냐해서 잠시 버릇이 나빠진 모양이다.

‘그래, 더 이상 여기 있을 순 없어. 나가야 해. 들키면 안 되잖아.’

그 남자가 찾지 않게 된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나비는 더 이상 여기서 살 수 없다. 그래, 언제까지고 가출한 고양이를 찾으러 돌아다닐 만한 남자가 아니다. 그는 그러기엔 너무 중요한 사람이지 않던가. 차라리 새로운 고양이를 들이는 게 낫다. 새 고양이 따윈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다시 정신 차리자. 공부해야지. 다시 공부 생각만 해야 돼.’

안정훈이 돌아올 때까지 특강을 들을까. 유인하는 안정훈의 방을 나와 그 남자의 서재로 갔다. 하지만 컴퓨터 앞에는 가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자주 숨어 있던 책장으로 향했다. 창에 가장 가까운, 밑에서 세 번째 칸. 책은 한 권 꽂혀 있었다. 거기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었다. 적당히 어둡고 몸에 꼭 맞았다. 아름답고 차분한 서재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책의 냄새가 난다.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다.

여기서 자주 그 남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고양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일을 하다가 잠깐 쉬려고 의자를 돌리다 눈이 마주치면 그 남자는 약간 놀란 얼굴을 했다. 그게 재미있었다.

‘그럼 무릎 위에 올라가서….’

나비는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고양이는 기분이 좋을 때나 아플 때 골골 소리를 내니까 말이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등이 당기는 느낌이 났다. 소름이 돋는다. 정신을 차리고 책장에서 뛰어내렸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 어어? 설마….’

어제는 사람과 고양이를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했다. 타이밍은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바뀌기 직전의 울렁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나비는 얼른 서재를 나와 안정훈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사람으로 변해서 얼른 문을 닫았다. 바로 문을 잠갔다.

“미, 미친….”

유인하는 침대 위의 이불로 몸을 감싸고 얼른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지금 사람으로 변하면 어떡해!’

다시 고양이로 변해라. 빨리! 사람의 모습으로는 빠져나가기가 힘들었다. 집에서 한 발자국만 나가도 CCTV가 천지였고 유인하는 이미 찍힌 전적이 있기 때문에 더 위험했다. 유인하는 전처럼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 빌고 난리를 쳐보았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그때 드레스룸의 바깥, 안정훈의 방문 노브가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인하는 드레스룸의 문을 살짝 열고 용태를 살폈다.

“어? 뭐야….”

안정훈의 목소리가 났다. 유인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발을 고양이처럼 세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한 후 얼른 뛰어가 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 사이로 안정훈과 눈이 마주쳤다. 안정훈의 살짝 쳐진 커다란 눈이 더 커지더니 잠깐 그대로 유인하를 몇 초 보고 있다가 유인하가 야, 하고 부르자 얼른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또 사람으로 변한 거야?”

안정훈은 조금 얼떨떨하고 긴장한 얼굴이었다.

“어.”

“어떡하지?”

“아, 씨….”

안정훈이 오기 전까지 유인하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불안한 기색을 떨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안정훈의 앞에서 너무 병신 같아 보일 수는 없었다. 불안을 대신하여 짜증 나는 티를 팍팍 내면서 창가의 안락의자에 털썩 앉았다.

“일단 고양이 될 때까지 기다려보자.”

유인하가 말했다. 안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조하기는 그가 더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다.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그건 유인하에게 약간의 안도감을 주었다.

“그래, 시간은 있으니까.”

“오늘은 나가야 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 맞아.”

“…생각해 보니까 너 때문이잖아? 네가 자꾸 이 집에 데려다줘서.”

창밖을 보던 유인하가 안정훈을 째릿 노려봤다. 안정훈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 몰라서….”

그리고 유인하의 눈치를 보며 쭈굴거리는 태도를 보였다. 유인하는 화난 태도를 유지하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정훈은 침대에 앉아 유인하를 보았다. 아무 말 없이 넓은 방 안에 침묵이 흘러갔다. 유인하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바깥만 쳐다보고 있었고 안정훈은 역시 그의 눈치를 계속 보았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안정훈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있잖아. 궁금한 게 있는데….”

“뭐.”

“처음에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너희 집에서 여기 멀잖아. 이 근처에 왔다가 고양이가 된 거야?”

언제나처럼 안정훈은 유인하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착하고 순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고시 생활을 시작하고 유인하는 일체의 다른 활동을 끊었다. 신림동에서 거의 벗어날 일이 없다는 말이었다. 유인하는 창밖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대꾸했다.

“어쩌다가.”

“우리 형이 고양이 같은 거 그냥 주울 사람도 아니라 신기했거든.”

“집에 들어온 동물 내쫓는 거 아니라고 바로 받아주던데?”

“아…. 그건 그럴 것 같네.”

안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었겠다. 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뭐? 왜?”

“재벌 같은 거 항상 싫다고 했잖아.”

안정훈의 말에 유인하는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떡해.”

“그건 그렇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정훈은 유인하가 권시혁을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편이 좋다. 유인하는 그의 오해를 방치했다. 안정훈은 쉽게 수긍하며 무던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의아한 점이 생겨 물었다.

“그럼 고양이에서 사람으로 빨리 안 돌아왔을 때 왜 여기 안 왔어? 큰일 날 뻔했잖아.”

“그냥… 다음날이면 변하겠지, 다음날이면 변하겠지 하다 보니까.”

아니다. 유인하는 아예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를 알 리가 없는 안정훈은 유인하의 말에 또 쉽게 수긍했다.

“지금은 자꾸 변하고 있으니까 금방 고양이로 변할 거야. 조금만 기다려보자. 형 돌아오기 전까지만 변하면 되니까. 바로 나가서 이태원역으로 와, 알았지? 내가 차 타고 바로 따라갈게.”

대화를 제대로 하려고 해도 너무 급작스럽게 고양이와 사람을 오가거나 권시혁이 끼어 있어서 실패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유인하는 그다지 안도한 얼굴이 아니었다. 안정훈은 이게 그를 만족시킬 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냐?”

“아니, 맞아. 그렇게 하면 돼….”

유인하는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안정훈은 다시금 유인하의 눈치를 봤다. 사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차를 가지러 나갔다 오는 길 내내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있잖아….”

안정훈이 말문을 떼어놓고 말을 머뭇거리니 유인하가 돌아보았다.

유인하는 여전히 이불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었다. 다시 고양이로 변할 거라고 생각하고 옷을 입지 않았다. 아까는 보고 깜짝 놀랐다. 내 방에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알몸의 유인하. 안정훈은 긴장하여 턱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마주치고 이런 망상을 하는 것은 긴장되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을 들킬까 봐….

‘이상한 생각하지 마. 인하 도와주는 것만 생각해. 도와주는 거야. 인하는 지금 내 도움이 필요하잖아.’

지금껏 유인하가 이토록 자신을 필요로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러니 지금은 분명히 기회다. 기회를 날려서는 안 된다. 드디어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가슴이 뛰고 긴장되어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조바심 내면 안 되는데….’

오랫동안 바라왔던 게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니 자꾸 마음이 뭉게뭉게 부풀고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망상을 하게 된다. 기분이 울렁거리고 헛소리를 할 것 같다. 안정훈은 다시 마음을 잡았다.

“너 고시원으로 갈 거야?”

“응.”

“너 자꾸 고양이로 변하잖아…. 그러니까….”

안정훈이 자꾸 본론을 말하지 않고 머뭇거리니 유인하가 답답했던지 성질을 냈다.

“아, 뭐?”

안정훈은 유인하의 시선을 피해 바닥을 바라보며 변명 조로 말했다.

“아니, 너 자꾸 변하니까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위험하기도 하고 전처럼…. 큰일 나면 어떡해. 너 시험도 있고…. 그러니까… 우리 집에 갈래?”

별로 이상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또 두근거린다. 안정훈은 침을 꼴깍 삼키고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

“같이 살자.”

그 말을 하고 나서 1초 뒤 안정훈은 목이 확 빨개졌다. 같이 살자니. 무슨 프러포즈라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많은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뺨에 붙은 머리카락. 붉어진 피부. 긴장한 근육과 꽉 얽매인 손가락. 안정훈은 눈을 크게 떴다.

‘이상하게 들린 건 아니겠지?’

안정훈은 바로 유인하의 눈치를 봤다. 유인하는 뭔 말 하는가 싶었네, 라는 얼굴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됐어. 어차피 이제 공부밖에 안 할 건데. 집에 고양이 사료 사 놓고 있으면 돼.”

유인하는 생각도 안 하고 바로 거절했다. 안정훈은 당황했다.

“그래도 전 같은 일 생기면 어떡해. 고양이 되면 아무것도 못 하는데.”

“사료랑 물만 있으면 어떻게든 돼.”

“병원이나 그런 데 가야 하지 않을까?”

“넌 내가 연구소에 끌려가는 걸 보고 싶냐?”

도와주고 싶은 것뿐인데… 어쩐지 말이 안 통하는 느낌이다. 권시혁만큼은 아니더라도 안정훈도 원래 무슨 일에든 크게 당황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인하의 앞에서는 자꾸 바보처럼 행동한다. 초조해진 안정훈은 애원 조가 되었다. 도움을 주는 것은 안정훈이고 받는 것은 유인하였는데 말이다.

“인하야, 내가 도와주게 해줘. 내가 잘 돌봐 줄게. 최선을 다해서, 어?”

“싫다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유인하는 화를 내기까지 했다. 안정훈은 그가 자신의 도움을 받도록 설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우리 10년 넘게 친구였잖아. 내가 너한테 그 정도도 못 해주겠어? 해결될 때까지만이라도 안 될까? 걱정돼서 그래.”

“싫다니까. 몇 번을 말해.”

그래도 유인하는 거절 했다. 그 순한 안정훈도 약간 화가 났다. 왜일까. 이것보다 더 심한 취급을 당했을 때도 안정훈은 웃었다. 저번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안정훈은 그런 스스로에게 위화감을 느꼈지만 역시나 하려던 걸 관두지는 않았다.

“그래? 그러면서 이 집 나가는 건 왜 도와달라고 해? 그건 왜 안 싫어?”

그렇게 말하자 유인하는 안정훈을 홱 돌아보았다. 진짜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전화 통화를 했을 때도 이런 표정을 지었을까. 안정훈은 은밀한 희열을 느꼈다. 안정훈은 침대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가 몸을 가리고 있는 하얀 이불을 확 끌어당겼다. 그의 하얀 어깨와 쇄골이 드러났다.

“이것도 네 거 아니잖아.”

안정훈의 시선이 유인하의 턱부터 그 아래까지 스윽 훑었다. 유인하에게는 그 눈빛이 마치 그가 자신을 깔보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유인하의 눈이 커지며 곧바로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유인하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새끼들을 단 한 번도 가만히 놔둔 적이 없었다.

“너… 죽고 싶냐?”

유인하가 안정훈의 얼굴을 찌를 듯이 노려보았다. 안정훈은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곧바로 말도 안 되는 곳에서 반응이 올 것 같아 흠칫했다.

‘뭐야, 이거….’

안정훈은 이불을 놓았다. 그리고 시선을 피했다.

“…장난이야.”

“장난? 장난?! 갑자기? 씨발, 이 또라이 새끼가!”

상대가 태도를 굽혀주자 유인하는 타이밍을 잡은 맹수처럼 확 화를 냈다.

“넌 옛날부터 그랬어! 착하고 둔한 척하면서 괜히 사람 약 올리고!”

유인하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는 오른손으로 안정훈의 멱살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살짝 목이 졸렸다. 안정훈은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시선을 피했다.

“내가…? 아니야, 인하야. 내가 언제….”

“항상 그랬잖아!”

“야….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저번에도 그랬잖아! 넌 뭐 좆도 없는 게 날 무시하려고 해?!”

“그건…! 그건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리고 내가 사과했잖아, 인하야…. 그때는 네가 계속 다른 애들 무시하니까….”

“내가 언제? 내가 뭘 언제 누굴 무시했는데?”

안정훈은 당황했다. 유인하의 눈을 다시 봐도 될지 모르겠어서 눈을 봤다가 깔았다가 하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너 맨날… 다른 직업은 불안정하다고…, 언제 망할지 모른다, 별것 아닌 일 하면서 유세 떤다, 다른 애들 다 옛날엔 별것 아니었다고… 그런 말 많이 했잖아.”

“그게 뭐가 무시하는 거야? 사실이지!”

유인하는 핏대를 세워 소리쳤다. 안정훈은 눈을 크게 뜨며 유인하의 얼굴을 보았다가 한 번 끔벅했다.

“응…. 미안해, 인하야.”

그 모습이 아까와 달리 순하고 약간 억울해 보이는 커다란 대형견 같은 안정훈이었다. 고분고분하고 만만해 보이는 평소의 안정훈이다.

‘씨발….’

유인하는 그래서 더 화가 울컥울컥 솟았다. 이럴 거면서 감히 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해?! 아까 자신의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얼굴의 안정훈은 크고 성숙하고 강하고 우월한 남자처럼 보였다. 순간 경계심이 확 들 정도로.

‘내가? 이 새끼한테?’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같이 살기는 뭘 같이 살아? 다시는 연락 하나 봐라! 유인하가 그렇게 결심하고 있는 동안 안정훈은 쩔쩔매며 빌었다.

“인하야,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러니까 잘 모르면 말을 하지 말란 말이야!”

유인하는 안정훈의 사과를 받고도 몇 분을 더 소리쳤다. 안정훈은 몇 번 문을 힐끔거리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야…, 근데 밖에 사람 있어. 네 목소리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자 드디어 유인하가 입을 합 다물었다. 살짝 두려운 얼굴이 되어 문을 힐끔거렸다. 안정훈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생각했다.

‘얄팍하긴….’

겁이 많은 개가 잘 짖는 것이다. 안정훈은 소중한 친구에 대해 또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아, 나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인하한테. 이런 생각 안 하고 싶은데.’

안정훈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유인하가 지금 얼마나 마음이 불안하겠는가. 친구가 되어서 그런 마음을 이해해 줘야지 약간 화가 난다고 목소리나 높이고….

‘인하가 나 미워하면 어쩌려고.’

안정훈은 풀이 죽은 기색으로 자신의 침대에 털썩 앉았다. 유인하의 눈치를 봤다. 유인하는 여전히 성난 얼굴이었다.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안정훈은 눈치 보는 기색이 팍팍 나는 말투로 말문을 뗐다.

“사실… 형한테 들켜도 큰일은 안 나지 않을까? 우리 형 보살기가 있어서 별로 놀라지도 않을지 몰라.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지나갈 것 같기도 한데.”

“그럴 리가 있냐?”

유인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안정훈을 째릿 노려봤다. 안정훈은 무해한 얼굴로 고개를 얼른 저었다.

“아니, 진짜. 우리 형 뭔가 초연한 게 있다니까? 물론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는지는 처음 알았지만. 그냥 좀 놀라고 말 것 같은데. 사정 말하면 이해해 주고…. 나비가 또 가출했다고 찾아다닐 일도 없을 거 아냐? 사실인 걸 어떡해.”

여전히 하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유인하였다. 표정은 놀란 것에 가까울까.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그의 어깨가 유난히 처져 보였다. 유인하는 한숨을 쉬었다.

“기분 나쁠 거 아냐….”

목소리에서 분기가 빠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보았다. 안정훈은 그의 화가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말했다.

“물론 네가 기분이 나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게 깔끔하지 않을까?”

“…….”

유인하는 무릎을 품으로 끌어당기고 최대한 몸이 차지한 공간을 줄인 채 가만히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손과 발을 한 데 모은 게 꼭 고양이 같기도 했다. 하얀 이불 사이로 왼발과 왼손만 조금 밖으로 나와 있다. 어쩐지 조금 우울해 보였다. 안정훈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너네 집 가끔 가서 확인해 보고 하면 되겠지.”

“안 그래도 돼.”

“인하야….”

어쩐지 함께 술을 마시던 때가 떠올랐다. 안정훈은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유인하는 순간 뭔가 울컥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중얼거렸다.

“진짜 형제 맞구나…. 손이 똑같아….”

“그래?”

유인하는 자신의 무릎에 이마를 댔다. 안정훈은 전처럼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술 안 마셔도… 만져도 되는 건가?’

더군다나 머리…. 머리를 만지는 걸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존심이 강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유인하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때 집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대문이 열리고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유인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창밖을 보았다. 안정훈도 보았다.

‘큰일이다. 형이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됐단 말인가. 안정훈은 얼른 유인하를 보았다.

“인하야, 아직이야?”

유인하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차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연못을 돌아 현관 앞에 섰다. 이 각도로는 현관이 보이지 않았다. 유인하는 방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밝은색의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펑 하고 고양이로 다시 변했다.

안정훈이 얼른 당부했다.

“인하야, 바로 역으로….”

“먀~.”

나비는 안락의자에서 뛰어내려 방문으로 달려가 한 번에 점프하여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복도를 우다다 달려 현관으로 직행했다. 막 현관을 들어서는 그 남자가 보였다.

키가 아주 훤칠하고 체격이 크고 수트가 잘 어울리는 근사한 남자다. 무엇에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차분한 태도와 낮은 목소리가 무게감 있다. 평소대로 김 집사에게 출근할 동안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먀.”

“나비야.”

나비는 꼬리를 세우고 끝만 살짝 꼬부라뜨린 후 발끝에 힘을 주어 키를 크게 하여 그의 발목에 몸을 부볐다. 흔히들 고양이가 자신의 것에 표시를 하는 행위였다. 그의 양쪽 다리를 왔다 갔다 하며 머리부터 꼬리까지 꾹꾹 눌러 비볐다.

“잘 놀고 있었어?”

권시혁이 한 손으로 고양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김 집사도 나비의 미간을 검지로 간지럽혔다. 나비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애완묘였다.

“큰일이네요. 사장님은 검은 옷이 많은데 죄다 나비 털이 붙어서.”

“괜찮습니다.”

품에 안긴 고양이는 벌써부터 고롱거리는 소리를 크게 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가슴을 앞발로 짚어 몸을 길게 하고 주인의 턱에 이마를 비볐다. 권시혁은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나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또 못 봤다. 권시혁은 유인하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좀 컸네. 길어졌다.”

“먀~.”

“오늘은 소고기 먹을까?”

“먀~.”

고양이는 일일이 주인의 말에 대꾸하고 있었다. 주인은 유례없이 흡족한 얼굴로 자신의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도 그의 눈빛이 만족스러웠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 오로지 고양이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튀어 나가는 고양이를 따라 나온 안정훈은 그 모습을 보고 멈춰 섰다.

‘뭐야….’

현관문이 닫혔다. 그런데도 나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인의 턱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기 바빴다.

[아뇨? 예전에는 사람 안 가리고 애교가 얼마나 많았는데요.]

안정훈의 손에는 차 키가 쥐어져 있었다. 곧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고양이가 되면 뭔가 달라지는 게 틀림없어. 인하가 일부러 저럴 리가 없잖아.’

친한 친구인 자신을 보고도 낯선 이를 보는 것처럼 하악질을 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래, 유인하가 저러고 싶어서 저럴 리가 없었다. 고양이가 되어서 그런 것이다. 사람인 상태랑 같을 리가 없었다. 안정훈은 나비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래, 맞아.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구해줬어야 했어. 어제 들키는 게 아니었는데.’

안정훈은 그렇게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이제껏 제대로 보지 못했던 고양이의 행동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나비는 권시혁의 턱과 목에 자신의 머리를 계속 부비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린 것처럼 허리를 세우고 안정훈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안정훈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아우웅. 먀.”

고양이가 뭐라고 말했지만 안정훈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무슨 사정을 말했을 것이다.

“집에 계속 있었어?”

권시혁은 고양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안정훈에게 물었다.

“응.”

“저녁 먹자.”

권시혁은 그대로 당연하다는 듯이 나비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고용인들도 다들 그를 따라갔다. 권시혁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식당으로 왔다. 안정훈이 먼저 앉아 있었다.

‘젠장….’

그제야 유인하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권시혁이 집에 왔다는 걸 알아차리자 저도 모르게 고양이로 변해 그에게 인사를 하러 달려가고 말았다. 그냥 머릿속에 이 남자가 집에 왔다는 사실만 가득해서, 얼른 만나러 가고 싶었다. 자신의 냄새를 묻히고 싶었다.

“나비야.”

권시혁은 나비를 들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안정훈이 한마디 했다.

“형, 과잉보호야.”

“일한다고 집에 오래 못 있잖아. 고양이도 외로움 많이 탄대.”

권시혁은 무심하게 말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는 고양이에게서 영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게 그렇게 귀엽나 싶다. 안정훈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그냥 흔한 길고양이와 똑같이 보였다.

“이 집에 사람이 몇 명인데….”

“그럼 내가 타나 보지.”

권시혁은 무던하게 그렇게 말하며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나비는 골골거리며 그의 얼굴에 또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 안정훈은 그런 나비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고양이처럼 보였다. 나비는 주인에게 아양을 피우는 걸 주체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유인하가 저럴 리는 절대 없는 것이다.

‘그래, 하고 싶어서 저러는 게 아니야. 고양이로 바뀌면 뭔가 달라지는 거야.’

완전히 다시 사람으로 바뀌는 방법은 없는 건가? 안정훈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나비를 빤히 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저럴 수 있다. 유인하가 저러는 것이 아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안정훈은 그렇게 굳건히 믿었다. 그는 유인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사람으로 완전히 돌아오는 방법을 어떻게 찾지?’

안정훈은 초조함을 느꼈다. 저녁상이 바로 나오고 형제는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했다.

“일하는 건 할 만해?”

“응. 형은?”

“똑같지.”

권시혁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건강하시고?”

“그런 건 엄마한테 직접 물어봐. 어차피 주말에 볼 거잖아.”

“그래.”

무덤덤한 형제의 대화는 데면데면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오히려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릎에 앉아 그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유인하는 결국 맛있는 냄새를 참지 못하고 슬쩍 앞발을 하나 뻗어 접시를 가지고 오려고 했다가 뺏겼다.

“사람 음식은 안 돼.”

권시혁은 아이를 어르듯 그렇게 말했다. 안정훈은 그걸 보고 한 번 더 확신했다.

‘그래, 인하가 저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고양이가 된 부작용인가?’

부작용. 안정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 이렇게 이상한 일이 생겼는데 문제가 없는 게 이상한 것이다.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만약 불구라도 된다면….’

뒷목에 털이 섰다. 안정훈은 그게 걱정과 공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해서 나비를 관찰했다. 나비는 권시혁에게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야옹~. (아는 맛인데.)”

사람 음식 맛을 모르는 게 아니니까 조금 힘들다. 안정훈의 생각이 반은 맞았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되면 본능에 휩쓸릴 때가 많았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노는 게 기본인데 참는 게 힘든 건 당연하다. 안정훈이 나비를 보며 말했다.

“나 이제 슬슬 집에 가도 되지?”

나비가 귀를 쫑긋하더니 안정훈을 돌아보았다.

“왜?”

“나비도 적응한 것 같고.”

“언제 가게? 오늘?”

“밥 먹고 짐 챙기는 대로.”

안정훈은 식탁 위로 빼꼼 올라온 나비의 얼굴을 직시했다. 지금의 나비는 안정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 눈치다.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나가면 되잖아.’

유인하는 알아들은 것이 분명했다. 나비는 안정훈을 보며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떴다. 안정훈은 다시 한번 안도감을 느꼈다. 분명 아까는 무슨 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권시혁은 주방장에게 준비시킨 소고기를 담은 접시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고양이를 들고 일어났다. 나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안정훈의 눈치를 봤다. 안정훈은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 씨.’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소고기가 눈에 들어오니 입에 침이 잔뜩 고였다. 선명한 붉은 색에 지방이 고르게 낀 맛있는 살코기. 소고기. 맛있는 거다. 먹으면 맛있다. 소고기다. 저건 맛있는 거다.

‘먹고 싶어. 먹고 싶어. 잔뜩. 많이.’

고양이는 이미 두 발로 서서 접시를 든 손을 앞발로 잡고 있었다. 머리 한구석에서는 안정훈이 곧 짐을 챙겨 내려올 것이고 그때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되뇌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소고기가 든 접시에 고정되어 있었다. 거실로 간 권시혁은 나비를 소파에 내려놨다.

“먀~.”

그 남자는 왼손에 든 접시를 높게 들었다. 단호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 오랜만에. 손.”

“…….”

유인하는 2층에서 내려오는 계단을 의식했다. 아직 안 내려왔다. 그 남자의 손 위에 자신의 오른쪽 앞발을 얼른 올렸다. 그 뒤로도 왼손, 앉아, 엎드려, 돌아, 빵야 등 갖은 재주를 다 부리고 나니 그제야 권시혁이 흡족한 얼굴로 소고기를 주었다.

“우리 나비 진짜 똑똑하지?”

권시혁은 품에 안겨 소고기를 아주 맛있게 먹고 있는 나비를 쓰다듬으며 막 내려온 안정훈에게 말했다. 나비는 짐승답게 먹을 것 앞에서 주체를 못 하고 있었다.

“어….”

나비는 소고기를 순식간에 다 먹고 권시혁의 무릎 위에 방만하게 드러누운 채 배를 다 드러내고 골골거리고 있었다. 권시혁은 자연스럽게 나비의 턱 밑부터 배까지 부지런히 쓰다듬고 있었다.

‘큰일이다. 인하가 이상해. 이상해지고 있어. 빨리 구해줘야 하는데.’

안정훈의 마음이 동동거렸다. 부작용이 확실했다. 고양이가 되면 뭔가 이상해지는 게 확실하다.

“어흠, 흠.”

안정훈은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에서 헛기침을 하며 형의 옆에 앉았다. 권시혁은 한 손으론 책을 들고 한 손으론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가 안정훈을 돌아보았다.

“가려고?”

권시혁이 책을 덮고 일어나려고 하자 무릎에 누워 있던 나비가 그의 손을 다시 끌어당겼다.

“그럴 건데….”

인하야, 얼른 정신 차려! 안정훈은 나비를 힐끔거리다가 슬금슬금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다.

“하악!”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나며 퍽 소리가 나게 솜방망이가 안정훈의 손을 강타했다. 책을 보고 있던 권시혁이 한 박자 늦게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왜 그래?”

“아니….”

안정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양이를 계속 힐끔거렸다. 눈빛에 이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고양이였다. 유인하가 그냥 고양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고양이로 변한 유인하는 유인하가 아니라 그냥 고양이. 아까는 분명히 말도 알아듣고 했는데….

“너도 고양이 좋아하냐.”

안정훈이 갈 기색 없자 권시혁은 다시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무심하게 물었다. 안정훈이 대답했다.

“아니.”

자신에게는 그렇게 하악질을 하더니 지금은 또 골골거리며 형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진짜 큰일이다. 어쩌지? 의심받더라도 그냥 들고 나가야겠다. 저대로 가다가 인하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하니 공포심마저 들었다.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만 같다.

‘아니야. 곧 정신 차릴 거야. 유인하잖아.’

안정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기억이 났다.

‘이 집 나가면 어쨌든 내가 돌보는 거니까.’

유인하가 그렇게 거절했던 것은 까먹고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비를 보았다.

‘내 손이 형 손이랑 똑같게 느껴진다고 했잖아?’

근데 그게 무슨 의미지? 좋다는 건가, 싫다는 건가. 돌보는 사람이 내가 되면 나에게도 저렇게 애교를 피우게 되는 건가. 일단은 고양이니까. 기분이 묘해졌다. 가슴이 좀 두근거렸다. 애교를 부리는 것이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 모습의 유인하로 상상되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한테만….’

잘 시간이 될 때까지도 유인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안정훈도 그랬다. 안정훈은 갈 것같이 굴다가 미적거렸고 그러다 잘 시간이 되니 자연히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권시혁은 그러려니 하고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오늘 밤에 형이 잠들면 바로 들고 나가자.’

안정훈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래, 내가 구해주는 것이다. 고양이 상태의 유인하에게 선택을 맡긴 것이 잘못이었다. 유인하가 멀쩡할 때는 꿈도 못 꾸겠지만 이럴 땐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를 대신해서 그에 대한 일을 결정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인하야, 기다려. 내가 구해줄게.’

그리고 안정훈은 둘만의 시간을 계속 상상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시계에 시선을 고정했다. 오늘의 자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신데렐라를 구해주기 위해서.

*

‘이제 어쩌지…. 정훈이한테 가야 하는데….’

이미 계획은 어그러졌다. 다 자신 때문이었다. 다른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남자는 이미 잠들었다. 나비는 그 남자가 자신을 침대에 내려놓을 때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도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네 발을 다 모으고 가만히 앉아 그 남자의 얼굴을 보다가 일어나 그의 뺨에 이마를 대고 비볐다. 이젠 익숙해진 그의 냄새가 났다. 무취에 가까운 은은한 향기가 난다.

‘가야 하는데….’

도망가고 싶지 않았다. 함께 있고 싶었다. 이러다가 또 사람으로 변할지 몰랐다. 그럼 큰일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가면 정말로 마지막이다. 이 남자를 보는 것은 마지막…. 얼굴을 보는 게 아니었다. 일주일 전에도 알지 않았던가. 얼굴을 보면 가기 힘들 거라고.

‘당신이 좋아.’

고양이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당신은 알까? 내가 당신을 이렇게나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사랑 같은 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유인하는 연애로 허송세월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하지만 평생 여유가 없던 자신이 가장 여유가 없을 때,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느낄 수 있게 될지는 몰랐다.

역시 좋아한다는 마음은 정말 쓸모없는 마음이었다. 그것도 남자끼리 무슨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금 이 순간에 이 마음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이런 마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이용만 하고 훨훨 떠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모든 것이 자신에게만 이렇게 가혹한 것일까.

고양이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다. 사람과 다르게 말이다. 그래서 나비는 그에 대한 애정을 생각하는 동안 자꾸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좋아해. 좋아해. 당신이 좋아.’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게 아니야. 난 당신이 정말 좋아. 많이 슬퍼하지 마. 그래도 날 잊지 말아줘.

‘당신은 내 거잖아….’

유인하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웠다. 그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고 있는 그의 손을 끌어당겨 거기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으음…. 나비야…. 안 자고 뭐 해….”

자꾸 건드리니 그가 결국 잠에서 깬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꺼풀이 서서히 떠졌다. 눈이 마주쳤다. 그때까지도 유인하는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누구야.”

“난….”

야옹, 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 목소리가 나왔다. 유인하는 눈을 번쩍 떴다. 유인하는 그의 위에 올라타서 그의 손목을 잡고 그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그것도 알몸으로!

“!”

유인하는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을 확 끌어당겨 몸을 가리고 침대에서 후다닥 내려왔다. 어둠 속에서 그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이 순간에도 그는 전혀 허둥거리지 않았다. 유인하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 집에서 뭐 하는 거지?”

유인하는 허둥지둥거렸다. 유인하는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벌떡 일어났다.

“아, 아으…. 저, 저는… 저는… 저, 정훈이 친군데….”

유인하의 생에 이렇게 당황스럽고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건 처음이었다. 자신의 입이 뭐라고 떠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말이 되게 지어내고 있었다.

“바, 방을 잘 못 찾아와서… 죄, 죄송합니다!”

유인하는 그대로 그의 방을 뛰어나와 2층으로 부리나케 올라갔다.

‘어떡해! 들킨 거야? 들킨 건 아니겠지?’

안정훈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유인하는 자신의 몸을 가린 이불을 꽉 쥔 채로 다리가 꺾여 바닥에 잠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인하야?”

12시가 되기만 기다리고 있던 안정훈이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안정훈은 얼른 일어나서 유인하에게 다가왔다. 유인하는 부축하는 그의 몸에 상체를 기댄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정신 들어? 이제 괜찮은 거야?”

“또… 또 옆에 있는데 변했어…. 들켰어….”

유인하가 목이 졸린 것만 같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뭐?”

그때 똑똑, 하고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권시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간다.”

그리고 도어 노브가 돌아갔다. 유인하는 깜짝 놀라 언제 다리가 풀렸냐는 듯, 아니, 마치 고양이처럼 후다닥 침대를 넘어가 반대편으로 갔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침대로 몸을 가리고 숨을 죽였다.

권시혁은 안정훈의 방으로 들어오자 바로 불을 켰다. 안정훈은 갑자기 조명이 쨍하고 켜지자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잠깐 뒤쪽을 의식했다. 유인하는 인기척 하나 내지 않았다.

“아, 형….”

안정훈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 말이라도 맞출 것 아닌가. 권시혁은 안정훈을 보고는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그 사람이 네 친구라고?”

“아, 어. 어.”

들켰다더니 사람으로 변하는 장면을 들킨 건 아닌가? 친구라고 말을 한 것인가? 어쨌든 그건 사실이다. 안정훈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의 반응이 상당히 이상하다. 권시혁이 팔짱을 끼고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가만히 동생을 바라보았다. 평소대로 무표정한 것 같은데 살짝 못마땅해 보이는 건 착각인가?

“친구?”

“어, 어, 친구 맞아. 고등학교 때부터 친군데? 완전 친구. 그, 어, 형 자러 들어가고 나서 불렀어, 내가. 잠깐 보려고.”

“이 밤에?”

“얘가 시험 끝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 오늘 가려고 한 것도 얘 만나려고…. 진짜 친해. 진짜 친해서. 내가 이리로 불렀는데.”

권시혁은 안정훈이 더듬더듬 변명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누굴 만나든 형이라고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어머니가 슬퍼하신다. 뭐든 순리대로 가는 게 맞는 거다.”

“어?”

“잘 생각해라.”

“어…?”

뭐지? 엄청… 형답지 않은 말이었다. 마치 ‘다른 평범한 형’들처럼 안정훈을 혼냈다. 근데 내가 인하랑 만난다고? 뭘 만나 갑자기? 뭐야, 괜찮은 건가? 안정훈은 눈을 크게 뜨고 형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그의 형은 살핀다고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눈치를 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그랬다. 그리고 권시혁은 안정훈에게서 시선을 떼고 침대 너머를 응시했다.

“일단은 동생 친구라니까 편하게 얘기한다. 남의 집을 그런 꼴로 다니는 게 아니다. 내 이불은 돌려주고.”

그러자 유인하는 여전히 고개를 못 드는 채로 한 손에 이불을 들고 침대 위로 스윽 올리고 손을 재빨리 내렸다. 안정훈은 침구를 형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권시혁은 별다른 말 없이 나가버렸다. 사실상 무단주거침입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다. 안정훈은 얼떨떨하게 닫힌 문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형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유인하는 대신에 안정훈의 이불을 가져와 일단 몸을 감쌌다. 얼굴이 홧홧해졌다. 사람으로 변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말았다. 고양이가 그러는 것은 기분 좋은 애교지만 다 큰 성인 남자가 그러는 것은 불쾌할 뿐이다. 그것도 일면식도 없는 낯선 남자다. 유인하라면 때려눕혔을 것이다. 그래도 안정훈으로 착각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니 그나마 다행…인 건가?

“…….”

유인하는 잠깐 침대에 이마를 박은 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털이 없으니 알몸이 부끄럽다. 하지만 맨 입술에 닿는 그의 입술의 느낌은 털 위에 닿는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뜨겁고 매끄러웠다.

‘진짜 내가 싫은 건… 당연한…가….’

아니! 당연한 것 가지고 징징거리지 마! 바로 앞에서 변했는데도 안 들킨 걸 다행으로 생각해! 유인하는 정신을 차리고 잠깐 침대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거 바로 가야겠다. 나 옷 좀.”

“어? 어….”

유인하는 얼른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안정훈의 옷을 마음대로 골라 입었다.

“이렇게 된 거 네가 데려다줄 필요도 없겠다. 나 혼자 갈게. 고맙다. 나 간다. 내일 내 휴대폰 가지러 너네 집에 갈게.”

“아니, 야, 같이 가. 걸어서 가게?”

유인하는 안정훈의 방을 나가 1층으로 내려가 슬리퍼를 하나 신었다. 그리고 현관을 나갔다. 안정훈은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가다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닫히지 않도록 살짝 열어 두었다. 그리고 유인하를 계속 쫓아갔다.

“야, 같이 가자니까.”

집안사람들은 다 잔다. 안정훈이 목소리를 낮춰 말하며 유인하를 따라 나왔다.

“아냐. 시간도 많이 늦었고. 넌 들어가서 자라.”

“진짜 걸어서 가게?”

“괜찮아.”

“이상한 고집 좀 피우지 마.”

안정훈은 차고로 가서 차를 끌고 나왔다. 유인하는 그동안 대문을 나와 걸어가고 있었다. 안정훈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차창을 내렸다.

“타! 빨리!”

유인하는 그대로 몇 걸음 더 걷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마지못해 조수석에 탔다. 안정훈은 안도의 한숨을 짧게 쉬고 차를 출발시켰다. 유인하는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정훈은 묵묵히 운전을 하다가 말했다.

“역시 우리 집으로 가자. 나도 공부하니까 같이 공부하면 좋잖아? 너 공부하는 데 방해 안 되게 할게.”

“너한테 그렇게까지 신세를 어떻게 져.”

“나중에 갚으면 되지.”

내가 어떻게… 라고 말할 뻔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싫어. 그냥 내린다?”

차는 유인하의 고시원으로 향했다. 얼굴이 벌게졌다. 자신이 여기서 살고 있는 걸 안다니.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유인하는 내리려고 하는 안정훈을 말렸다.

“됐어. 나 간다.”

“야, 너 고양이 사료라도….”

“됐다니까. 오지 마! 가!”

그리고 유인하는 얼른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 얼른 자신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자정이 넘었을까. 작은 창이 달린 1.5평 고시원 방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바로 코앞에 있는 것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유인하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안정훈의 차가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겨우 숨을 내쉬었다.

‘이제 진짜 끝이야….’

한 사람이 꽉 차는 현관이었다. 칠이 벗겨진 차갑고 우둘투둘한 현관문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았다.

‘…너무 놀았다. 공부 시간 늘려야지. 알바도 해야 하니까…. 역시 고시원 총무가 좋겠다. 8월 말에 여기 계약 끝나자마자 바로 갈 수 있는 걸로 구할 수 있을까? 최대한 맞춰 보자.’

이제부터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공부만 하는 것이다. 어차피 올해는 안 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놀았어. 1차는 문제 위주로 꾸준히 풀고….’

지금부터 내년까지의 대략적인 시간표를 쭉 짜 보았다. 사실 지금까지 몇 년이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비슷했다. 할 것을 정하고 나서야 가장 큰 걱정거리가 떠올랐다.

‘계속 고양이랑 사람을 왔다 갔다 하면 어떡하지?’

2차 준비는 스터디나 학원 첨삭이 필수다. 그런데 고양이로 변할지도 모르는 상태로 사람들을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아르바이트는?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그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유인하의 마음속에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가장 근원적인 공포였다.

아무런 가능성도,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뭐 때문에 이렇게 나왔는데. 그래도 사람 구실 하고 살려고 그런 거잖아. 고양이로 살 수는 없으니까 사람으로 제대로, 원래대로….’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유인하는 다시금 마음을 굳건히 먹으려고 노력했다.

‘일단 자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유인하는 신발을 벗고 바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 침대에서는 먼지 냄새가 조금 났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벽의 모서리에 붙어 몸을 최대한 말았다.

‘괜찮아. 괜찮아. 열심히 하면 돼.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내년에는 될 거야. 괜찮아. 혼자니까 잘 할 수 있잖아.’

무뚝뚝하고 무심한 남자. 매일 똑같은 삶을 사는 남자. 아무런 재미도 즐거움도 찾지 않는 남자. 그래서 불만도 없나 보다. 그 남자는 내게 있을 곳을 주었다. 밝고 따뜻하고 안전한 곳. 내가 어떤 존재라도 좋다는 듯이 가만히 함께 하는 시간을 공유하며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부드러운 손길을 주었다. 내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해주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날 행복하게 해주었다. 행복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몇 번은 웃었는데.

맨 입술에 닿은 그 남자의 입술은 뜨거웠고 생각보다도 훨씬 부드러웠다. 그런 입술로 항상 나에게 입을 맞춰준 것이었다.

“흑…. 흐윽…. 흑….”

첫사랑이었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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