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뚝뚝한 주인님
동물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런 건 키워도, 키우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선택의 순간엔 대체로 손이 덜 가는 선택지를 고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틀림없이 좀 더 손이 가는 선택지를 골랐다. 별로 자신답지 않은 짓이었다.
“먀~.”
우다다, 하고 무언가 재빨리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고양이다. 돌아온 주인의 발치에 작은 고양이가 맴돌다가 이내 몸을 비볐다. 꼬리는 하늘로 솟아 끝만 살짝 구부러져 있었다. 모든 발에 힘을 줘 한껏 몸을 세운 채 주인의 발과 발목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피웠다.
“그래도 주인은 사장님이라는 걸 아나 봐요. 나비가 진짜 똑똑하다니까요.”
고양이가 생기니 고용인들이 말을 자주 건다. 권시혁은 평소처럼 별 대꾸 없이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의 그 꾀죄죄한 고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뻐졌다. 얼굴이 뽀얗고 동그랗다. 눈은 별을 박은 듯 초롱초롱하다. 원래 예쁜 고양이였던 모양이다.
이런 작은 짐승도 은혜는 안다는 것인가. 아니, 사람도 배불리 먹여주는 자를 따르는 법이다. 권시혁은 여느 때처럼 일을 좀 더 하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고양이가 발치를 졸졸 따라오다가 대뜸 바닥에 드러누웠다. 밟을까 봐 멈칫했다.
“어머, 만져 달라네요.”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요구를 하고 있었다. 가방을 들고 따라오던 집사가 귀엽다는 듯 감탄사를 냈다. 누운 채 고개만 빼꼼 든 새끼 고양이는 마치 ‘이렇게 귀여운 나를 한 번도 안 만지겠다고? 진심?’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권시혁은 고양이를 피해 다시 발을 내디뎠다. 고양이는 따라오다가 또 드러누웠다. 권시혁은 이번엔 발을 멈추지 않고 바로 피했다. 고양이는 삼보일와를 계속했다. 집사는 귀엽다고 웃었지만 주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정말로?!’
고양이 유인하는 그의 철벽에 분개했다. 게다가 서재를 들어갈 때는 아예 발로 슥 밀어내기까지 했다.
“캬! (발로!)”
이 무엄한 인간 노예(후보)가! 나비가 발톱으로 서재의 문을 긁자 집사가 얼른 쪼그리고 앉아 그런 나비를 위로했다.
“어이구~, 주인님이 안 만져줬어요? 내가 쓰다듬어 줄게.”
그녀는 고양이의 배를 정성 들여 긁었다. 자존심이 잔뜩 상한 나비는 심통한 얼굴로 그녀에게 안겨 거실로 갔다.
‘감히!’
고양이가 된 유인하는 사람들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것이 너무나 재밌었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다. 중요한 존재로 대접받는 느낌. 이 노예들은 나비가 오른발만 들어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이 어떻게 하면 그들이 간식을 주고 놀아주고 쓰다듬어 주는지 학습했다. 자신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그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그들이 가소로웠다.
그는 단 며칠 만에 이 집안을 평정했다.
그 남자만 빼고 말이다.
그래서 그 노예 목록에 꼭 그 남자도 집어넣고 싶었다. 그러기로 했다. 그 남자까지 지배해야 진정으로 이 저택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응당 고양이라면 그 정도 포부는 세워야지!’
머슴살이도 하려면 대감집에서 해야 한다고? 고양이라면 그 대감집에 들어가서 대감마님까지 귀여움으로 구워삶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 출신(?)이라 그릇이 좀 작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우쭈쭈 떠받들어주는 만큼, 유인하는 고양이답게 점점 거만하고 권태로운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런 남자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한우가 먹고 싶을 뿐이다.’
1등급 투쁠로!
하지만 그 뒤로도 대감마님의 철벽은 계속되었다. 이 집에 들어온 지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집으로 모시고 들어온 것은 본인이면서 어찌 이리 관심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고양이는 주인의 일을 폄하했다. 사장님이란 건 좀 더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일 줄 알았다. 그는 그냥 일만 했다. 이렇게 가진 게 많으면서도 참 무미건조한 삶이다. 마치 기계 같다. 일어나면 바로 새벽같이 출근하고 저녁 6시나 7시쯤 퇴근해서 집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서재에 한두 시간 처박혀 있는다. 그 뒤엔 거실에서 또 한두 시간 책을 읽고 바로 잔다. 주말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반나절 정도 운동을 하고 돌아와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잔다.
‘아니, 재벌 3세나 4세나 그런 것들은 다 마약하고 여자 끼고 쓰레기같이 놀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유인하는 스스로 시사 상식에 밝다고 생각했다. 신문은 꼬박꼬박 읽었다. 면접이나 토론 준비를 위해서도 필요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신문 읽기는 고시 생활의 몇 안 되는 낙 중 하나이기도 했다. 독서실에서 신문만 정독하고 있는 고시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남자 또래의 재벌 3, 4세들이 몇 달 전에도 마약 사건 때문에 줄줄이 신문을 탄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릇이 안 되는 인간들에게 태어날 때부터 넘치는 부가 당연하게 주어지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있어 봤자 뭐 하는가. 가치 있는 삶이 못 된다. 그런 사건이 하나 터지면 유인하나 다른 고시생들은 하나같이 혀를 끌끌 차며 이렇다 저렇다 평을 했다. 마치 자신은 그런 그릇을 타고난 것처럼.
‘이 남자도 뒤에서 그런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니겠지?’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이 남자는 너무 칼같이 퇴근을 해서 집에 들어온다. 화를 내는 건 본 적이 없다. 기뻐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불평을 하는 것도 본 적 없다.
‘어릴 때 다 해봐서 질린 건가?’
고양이의 작은 머리통이 20대의 그 남자를 상상해 보았다. 무표정하고 별로 귀엽지 않은 청년이 떠오를 뿐이다. 하지만 정황상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가진 게 많고 젊고 잘생긴 남자다. 누가 그를 방종으로부터 막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고양이가 이런 건방진 의심을 품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를 그 남자는 오늘도 서재에서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나와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고 지금은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저러다가 10시가 되면 칼같이 잔다.
읽고 있는 책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유명한 책인가? 모르겠다. 아까 그에게 거절당한 것에 기분이 약간 상했기 때문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멀어지지도 않았다. 나비는 자주 애용하는, 값비싼 품종 고양이만 어울릴 법한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진주색 스툴 위에서 천천히 그루밍을 하며 그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는 크고 무겁고 정적이다. 말도 별로 없다. 표정의 변화도 없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재미나 즐거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진짜 기계라고 해도 믿겠다.
‘저게 고시생이랑 뭐가 달라.’
맨날 해야 하는 일만 하고 사는 삶이라니. 모든 걸 다 가지고도. 그게 유인하만 끔찍하게 느껴지는 걸까?
‘물론 그런 재벌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적당하게는….’
성실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부잔데도 성실하다니. 아니, 성실해서 이런 부자가 된 것일까? 일이 그렇게 좋나? 뭐 하는 남자지? 여전히 이름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나중에 와이프랑 자식들은 좋겠다.’
아니지. 내가 먼저다. 아직 고양이의 마인드셋을 갖추려면 멀었구나. 그래, 이 남자가 고시생처럼 살든 어리석게 살든 나랑 무슨 상관인가. 정진하자, 좀 더 고양이답게. 요구하자, 뻔뻔하게!
저렇게 무뚝뚝한 남자의 마음을 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살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고를 칠 것이다. 애정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졸졸 따라다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애완동물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남자라면 어떻게 유혹해야 할까.
발치에 몸을 비비거나 드러누워 손길을 바라는 것은 안 먹힌다. 밑에서 귀여운 얼굴로 바라보며 귀여운 목소리로 야옹거려도 안 된다. 심지어 그의 침실 앞에 아끼는 간식이나 장난감을 두며 고양이의 보은을 흉내 내는 귀여운 짓도 해봤다. 안 먹혔다.
이상한 남자다. 무릇 고양이의 귀여움이란 개도 고양이를 젖 물려 키우게 하고 닭도 고양이를 알처럼 품게 만들며 원숭이도 고양이를 들고 다니게 만든다. 더군다나 지금 유인하는 극강의 귀여움을 발휘하는 생후 3개월의 치즈냥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코도 분홍색이고 육구도 분홍색이라 얼마나 귀여운 줄 아는가!
‘괘씸하다….’
자신의 귀여움을 인정하지 않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도 눈길 한번 안 준다. 그는 자신을 주워 준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남자야말로 자신을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나 같은 완벽한 고양이에게 어울리는 집사임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남자다.
‘내가 기필코 한우 먹고 만다. 삼시 세끼 다 한우 바치게 한다, 내가. 내 사진 찍어서 주변 사람들한테 팔불출처럼 자랑하게 다니고 만다.’
그렇게 5년 차 고시생 출신 고양이의 목적의식은 매우 투철했다. 그가 드디어 책을 덮고 일어나자 나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그를 본체만체했냐는 듯 그의 발치로 쫓아갔다.
“먀아~.”
자신이 예쁘고 귀여운 고양이라는 자신감으로 중무장한 유인하는 바로 그의 정강이에 두 발을 대고 서서 그를 바짝 올려다보았다. 그는 잠깐 자신의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고양이는 그를 졸졸 따라갔다. 문을 열자 그가 막기 전에 바로 들어가 그의 침대 위에 떡 올라갔다. 그제야 그가 반응을 보였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자기 집 다 됐네.”
‘내 집 된 지가 언젠데!’
나비는 그의 침대에 발랑 누웠다.
‘자! 빨리 날 쓰다듬어라!’
한 번 쓰다듬으면 너도 못 헤어나온다. 아무리 무뚝뚝하게 굴어도 고양이에게 함락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내 배를 봐라! 이 하얀 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아느냐! 내 젤리를 봐라! 너무 귀여워서 만지고 싶어서 못 배기겠지?!
그래, 일단 집으로 데리고 온 순간부터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저 목석이 그래도 어린 고양이를 불쌍하게 여겨 집안에 들인 것 아닌가.
나비는 동글동글한 하얀 얼굴에 쫑긋한 귀에 커다란 눈동자가 너무나 귀여운 고양이였다. 아직 짤막한 네 다리도 아주 깜찍하다. 고양이 특유의 귀여움과 요염함이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 남자는 고양이를 무시하고 욕실로 향했다. 나비는 부글부글한 마음에 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석남이냐!’
저 남자, 분명히 인기 없을 것이다. 이 귀여운 걸 보고도 표정 하나 안 바꿔? 그가 욕실로 들어가자 나비는 실망해서 그의 침대에 털썩 누웠다. 한 바퀴 뒹굴 굴렀다.
‘음…? 근데 이거 뭐지?’
과연, 대감마님이 쓰는 건 다르단 말인가. 이렇게 고급스러운 침구는 처음이었다. 면이 아주 탄탄한 느낌이다. 자수가 은은하면서도 멋지고 털 오라기 하나 빠져나온 곳이 없었다. 숨이 꺼진 곳도 없이 빵빵하고 푹신했다. 좋은 냄새가 났다. 나비는 그대로 침구에 마구 등을 비볐다.
‘너무 좋다~!’
마치 사냥을 하듯이 푹신푹신한 침구 위를 폴짝폴짝 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고양이는 고양이답게 가끔 이렇게 고양이의 본능에 빠져 정신이 나갈 때가 있었다. 장난으로 소일하는 것이 새끼 고양이의 사명이다.
그러는 동안 그 남자는 벌써 다 씻었는지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가 된 유인하는 눈도 귀도 코도 예민해져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는 머리카락이 약간 젖어 있었고 상반신은 헐벗고 있었다.
“캭! (몸이 왜 저래!)”
나비는 한창 그를 유혹하던 것도 까먹고 하악질을 하고 말았다. 그는 키가 크고 근육질이었다. 무슨 화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몸이다. 우습게도 그렇게 금욕적으로 사는 남자의 몸이 저렇게 육감적인 것이다. 뭐랄까. 완벽한 남자의 몸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저렇게 되고 싶을 정도로. 저런 몸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비는 저도 모르게 등의 털을 마구 하늘로 뻗고 경계하는 태도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실크 잠옷을 마저 입었다.
“내려가.”
아직도 자신의 침대 위에 있는 고양이를 보고 그가 손등으로 밀어냈다. 짜증스럽지는 않았지만 아주 약간 성가심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힘에 밀려 유인하는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하지만 다시 뛰어 올라갔다. 그랬더니 이 무뚝뚝한 남자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다. 유인하는 그의 손을 빤히 보았다.
‘그래! 만져! 만지는 거야! 쓰다듬어!’
그리고 나한테 빠지는 것이다! 나비는 이미 한우에 대한 것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일종의 자존심 대결이 되고 만 것이다. 뭐, 일방적이긴 하지만. 나비의 의도와는 달리 안타깝게도 그는 고양이를 쫓아내기 위해 손을 뻗은 것이었다. 그는 첫날처럼 그의 뒷덜미를 잡아 침실의 입구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고양이를 휙 던졌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고양이는 탁 하고 바닥에 착지했다. 그 남자는 이미 문을 닫았다.
“캭! (이 석남!)”
나비는 침실문을 향해 하악질을 했다.
*
그 남자가 잠이 들 즈음엔 집안에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그 남자의 일정에 맞춰 지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행성 동물이 된 유인하는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래서 밤이 되면 유인하는 집 안에 있는 예술 작품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며 이건 뭘까, 저건 뭘까 골몰하곤 했다. 이런 집에 걸려 있으니 필시 대단한 작품일 것이다. 자신이라면 알아볼 수 있을 터다(물론 간혹 날벌레를 쫓아다니느라 작품 감상을 잊을 때도 있었다).
노랗고 작은 고양이가 복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액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꼬리가 한 번씩 바닥을 쓸었다. 그가 보고 있는 작품은 안에 하얀 캔버스만 있는 황금빛 액자였다.
‘이건 뭔가…. 인간의 허무한 내면을 나타낸, 그 어떤…. 그래, 뭔가. 포스트 모더니즘? 음…. 저건 좀 키치하네. 별것 아니야. 이런 것도 작품이라고.’
그렇게 일일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여 판단했다. 그러면 이상하게 으쓱하고 기분이 좋다. 남들은 가지지 못하는 뭔가 대단한 걸 누리는 기분이다.
고양이가 된 상황에서도 예술 작품을 찾아 즐기는 자신 같은 우아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겪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런 집에 거하며 이런 예술품에 둘러싸여 살며 입을 거, 먹을 거 걱정 없이 집안일을 모두 누군가 해주며 떠받듦을 받는 삶이야말로 역시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이었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그래,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이런 보상은 합당한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로 과거와 현실의 연결점을 만들어냈다. 그는 오늘도 이런 고즈넉한 밤중에 텅 빈 액자를 하나 감상하고는 만족스럽게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 같은 고지능 생물이 먹고 사는 것에만 만족하면 안 되지. 책을 보는 건 어려울까? 컴퓨터는 괜찮을 것 같은데?’
고양이 발로 휴대폰 조작은 무리일지 몰라도 컴퓨터는 가능할 것이다. 고양이가 되어 유인하는 가지고 싶은 것들, 그 이상을 다 가지게 되었지만 하나 잃은 것이 있다면 지적인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아쉽다. 하지만 사실 그건 고시생 때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으니 괜찮았다. 컴퓨터만 쓸 수 있다면 될 것 같은데….
이제 조금 큰 새끼 고양이는 그 남자의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폴짝 뛰어 문고리를 잡아 내려 문을 열었다.
‘역시.’
그렇게 문고리를 열고 의기양양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책 냄새가 난다. 나비는 책상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갔다. 커다란 일체형 컴퓨터가 있었다. 전원을 눌렀다. 화면이 켜졌다. 화면 앞에 앉아 있는 등은 노랗고 앞은 하얀 고양이의 얼굴이 진지하고 귀엽다.
‘그래…. 사라진 지 일주일이 넘었으니 찾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드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고 걱정하며 찾을 가족이나 친구들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유쾌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잘못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유인하에게 충분히 잘해주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안다면 다들 얼마나 부러워할 것인가.
‘가르쳐주지 못하는 게 아쉽다.’
카카오톡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 자랑해? 아니다. 자랑해서 뭐 하는가. 어차피 생활 수준의 격차는 메울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다른 이들에게 좌절감만을 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을 깎아내리려고만 한다.
‘불쌍하다.’
그는 자신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가엽게 여겼다. 그들이 운이 없는 게 어떻게 그들의 탓이겠는가.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정훈이 그 새끼한테는 그래도 가르쳐주고 싶다.’
그는 고양이가 되기 직전 자신에게 창피를 준 친구가 생각났다. 갑자기 화가 난다. 그라면 지금 유인하가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며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친구들은 분명히 부러워할 것이다. 그런 말까지 했던 놈이라면 분명히 자신의 말을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컴퓨터 부팅이 다 되자 화면 가운데 PIN 번호를 치는 입력란이 떴다.
‘에잇.’
그는 다시 컴퓨터를 껐다. 그래도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다음 날 아침엔 자신을 침실에서 쫓아낸 그 남자가 또 괘씸해서 배웅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낮잠을 실컷 자다가 마음에 드는 노예를 찾아가 놀아 달라고 앞발로 툭툭 쳤다. 그러면 그들은 기꺼이 시간을 내서 놀아주었다. 젊은 여자라면 더 좋았다. 그녀가 껴안으면 촉감이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나서 더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나비는 서재로 숨어들었다. 책장의 아래에서 세 번째 칸 중 하나에 들어갔다. 좁고 어두운 곳에 있으니 어쩐지 마음이 평온해져 생각보다 오래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양이의 본능일까. 안전하게 느껴졌다.
해가 기웃기웃해지니 그 남자가 퇴근을 하고 집에 왔다. 그는 간단히 요기하고 서재로 바로 왔다. 자다가 그가 들어오니 눈이 떠졌다. 네 발을 모으고 앉아 그의 손이 키보드 위로 올라가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컴퓨터를 켰다.
‘1, 2, 0, 0, 0…, 0?’
뭐야. 비밀번호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매일 돌아와서 뭘 하나 싶었더니 집에 와서도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일중독. 철벽남. 석남.’
새끼 고양이는 그렇게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저만한 남자를 비난하는 것은 사실 아무런 이유가 없더라도 재미있는 일이다. 상대를 비난하면 비난당한 상대보다는 자신이 좀 더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지니까. 다들 그런다. 그 남자는 한참 뭔가 하더니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낮은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리고 그가 의자를 옆으로 돌리자 나비는 깜짝 놀랐다.
잠깐 창밖을 보며 쉬려고 했던 권시혁은 자신의 고양이가 책장 위에서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또 어떻게….”
별로 부정적이진 않았지만 조금 어이가 없다는 말투였다. 하긴 고용인들도 침실보다 서재를 더 조심조심 청소하는 것 같았다. 나비가 대꾸했다.
“먀. (뭐.)”
치즈태비는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고양이답게 사뿐사뿐하게 걸어오더니 그 남자의 무릎 위로 대범하게 훌쩍 올라갔다. 아직 작은 치즈냥이는 똑바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도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만 튕기고 이제 쓰다듬어!’
치즈태비는 남자의 무릎에 털썩 누워 배를 보였다. 얼굴과 앞발, 배가 참 하얗고 보송보송해 보였다. 게다가 코도 발바닥도 다 예쁜 분홍색이다. 그 남자는 아주 미약하게 당황한듯싶더니(아마도) 얼떨결에 치즈태비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는 아주 건장하고 커서 손도 매우 묵직하게 느껴졌다.
권시혁은 드디어 고양이의 배를 쓰다듬었다. 일을 하고 있을 땐 엉덩이가 무겁다. 일어나서 고양이를 밖으로 내쫓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게다가 구태여 고양이를 내쫓을 이유는 뭔가. 방해가 될 만큼 귀찮게 구는 것도 아니다. 쓰다듬는 것도 얼떨결에 손이 올라간 김에 쓰다듬는 것이었다. 굳이 그럴 이유도 없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양이의 털이 굉장히 부드러웠다. 촉감이 매우 좋다. 쓰다듬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안온해지는 느낌이다. 따뜻한 고양이의 온도만큼.
권시혁도, 심지어 고양이 나비도 몰랐지만 사실 인간은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고양이를 쓰다듬는 인간에게는 스트레스는 줄이고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다른 그 어떤 동물보다도 고양이와의 스킨십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크다고 하니 고양이가 곧잘 인간의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타당성이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말랑말랑하군….’
이름을 나비가 아니라 말랑이로 지어야 했나. 남자는 잡념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냈다. 정원을 보며 잠깐 한숨을 돌리려고 했던 그는 대신에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으로 소일했다. 심박 수가 낮아지고 긴장이 풀린다. 그 남자는 평소와 같이 덤덤한 태도였지만 나비는 깜짝 놀랐다.
‘와! 아앗! 아앙…! 뭐야? 뭐지?!’
기분 엄청 좋다! 커다란 손이 투박하게 턱밑부터 배와 허리를 쓰다듬는데 아찔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가 쓰다듬어 주는 것은 처음이다. 다른 사람들이 쓰다듬어 주는 것도 기분 좋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손이 커서 그런가? 손이 뜨거워서? 무거워서? 안에 모터라도 넣어둔 것처럼 고롱거리는 소리를 쉴 새 없이 냈다. 어느새 팔다리도 부끄럼 없이 활짝 벌리고 배를 다 까뒤집고 드러냈다.
“골골골골골~! (하아, 하아…! 너무 좋아! 좀 더!)”
권시혁은 다시 일을 하려고 쓰다듬는 걸 멈추고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비는 완전히 홍콩에 가 있었는데 그가 더 이상 쓰다듬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자 짜증이 났다. 다시 일을 하려는 그 남자의 무릎 위로 또 올라갔다. 그가 손으로 고양이를 밀어냈다.
“안 돼.”
“냐아아! (더 쓰다듬어!)”
밀어내는 손을 피해 고양이는 남자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고양이가 된 유인하는 본능에 휘둘릴 때가 종종(많이) 있었다. 치즈태비는 짜증을 잔뜩 냈다. 얼른 다시 쓰다듬으라고 그의 가슴 위에 앞발을 짚고 고개를 쑥 내밀었다. 한쪽 발로 그의 팔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기려고 했다. 귀찮아서 사람이라도 부를까 했던 권시혁은 그것마저 성가셔 잠깐 고양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살짝 가슴에 안았다. 사람이었다면 턱도 없었을 일이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그러자 이 새끼 고양이는 사람말이라도 알아들은 것처럼 시끄럽게 야옹대던 걸 멈췄다. 그대로 그의 가슴에 두 발을 짚고 선 상태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가만히 기다렸다. 10분쯤 지나니 그가 하던 걸 마무리하고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먀.”
그러니 그걸 알아차린 듯 치즈태비가 주인을 불렀다. 권시혁은 자신의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내 고양이…라.’
그는 가진 것이 많은 남자였다. 거기에 크게 감상은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그의 업일 뿐이다. 그중 하나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것 중에 살아있는 것은 이 고양이뿐이다.
“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가냘프다. 그는 주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동그란 눈동자가 예쁘다. 고양이가 다시 오른발을 뻗어 권시혁의 손을 끌어당기려고 했다. 안 되니 권시혁의 가슴에 자신이 직접 이마를 비볐다. 쫑긋한 귀가 접혔다 펴졌다 했다.
‘정말 날 알아보는 건가?’
내가 구해줬다는 걸? 내가 주인이라고? 권시혁은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드디어 고양이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고양이는 그 손에 자기 머리를 문질렀다. 원래 이러는 것인가? 권시혁은 고양이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권시혁은 그제야 고양이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호박색의 예쁜 눈동자. 털이 참 부드럽다. 유연하고 말랑말랑한 몸은 만지는 느낌이 몹시 좋아 그와 같은 남자도 저도 모르게 쓰다듬게 만들었다.
고양이는 참 묘한 매력이 있었다.
얼굴도 예쁘고 귀엽고. 그래서 이렇게 눈길을 끄는 것일 테다. 권시혁은 지금까지 고양이 같은 건 별로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고양이를 주워 와 놓고도 별로 관심 가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기분이 약간 이상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사람한테도 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사실 무언가가 마음을 끄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목석같은 남자였다.
그는 오른손으로 고양이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한 번 쓰다듬었다. 작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입과 코 주위를 쓰다듬자 그쪽 눈만 한 번 감았다가 뜨면서 다시 고롱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집안사람들이 많이 귀여워해 준 모양이다. 처음 무릎 위에 올라올 때는 조금 놀랐다. 아까는 배를 쓰다듬었는데 이제는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쓰다듬었다.
권시혁은 그렇게 한참 고양이를 쓰다듬다가 평소보다 늦게 서재를 나왔다. 고양이를 한 팔에 안고 말이다. 그의 가슴과 어깨에 걸쳐 안긴 채 나비는 혼란을 느꼈다.
‘진짜 기분 좋았어!’
그것도 이렇게 덩치 큰 남잔데! 작은 심장이 흉통을 울리며 콩닥거렸다. 말 없는 무심한 스킨십이었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저도 모르게 그의 향기를 킁킁 맡았다. 좋았다. 유혹하려고 했던 것은 이쪽이다. 유혹당할 생각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냥 쓰다듬는 것도 이 정돈데 궁디팡팡이라도 당하면….’
이것도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그건 어떤 느낌일까? 아니, 아니지. 아직 어리니까 궁디팡팡 정도는 해도 괜찮을 거야. 아직 아무도 궁디팡팡까진, 아니, 해주길 바라는 게 아니다. 아깐 잠깐 정신이 나가 그에게 쓰다듬어 달라고 엄청 조르고 말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쪽팔린다. 물론 그것을 알 리가 없는 권시혁은 고양이방으로 가서 유인하를 내려놓았다.
“냐오옹. 먀아아. (가냐? 가지 마.)”
나비는 바로 그의 발치로 다가갔다. 그는 사람일 때도 별로 사람 손을 타본 일이 없다. 이 남자는 분명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이대로는 조금 모자라다. 이 무뚝뚝한 남자를 좀 더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아야 했다.
다른 노예들도 만져줄 땐 잔뜩 만져준다. 그것도 기분이 좋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책임져주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나비는 여전히 이 남자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지금 나비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특별했다.
작은 고양이는 주인의 발목 정도밖에 키가 되지 않았다. 주인의 발치를 졸졸 따라다니며 계속 먀먀거리며 말을 걸었다. 권시혁은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별을 박은 듯 초롱초롱하다.
권시혁은 딱히 고양이와 더 놀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 비슷한 생각도 평생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가 남들에 비해 일체의 사물에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절로 고양이 간식을 찾고 있었다. 용케도 바로 간식 서랍을 찾았다.
‘홀린 것 같은 기분이군.’
이 고양이를 처음 본 이래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만 잔뜩 하고 있었다. 낯선 동물을 집안에 들이고 오늘은 잔뜩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정말 귀신에게 홀린 것일까. 그래서 고양이를 영물이라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권시혁은 간식을 들고 고양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몇 번 고용인들이 간식을 가지고 나비와 놀아주는 것을 지나가듯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먀~.”
나비는 최대한 예쁘고 귀여운 자태로 야옹, 하고 간드러지게 울었다. 간식을 든 그는 다시금 고양이를 보았다. 그가 바닥에 앉았다.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다. 나비는 그의 다리 사이에 가서 간식을 쥔 손을 솜방망이로 잡고 일어났다. 그는 바로 간식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손을 내밀었다.
“손.”
훗…. 나의 영민함을 보일 때가 왔다. 나비는 자신의 오른쪽 앞발을 그의 손 위에 올렸다.
“왼손.”
왼발을 그의 손 위에 올렸다. 그는 약간 놀란 눈치였다.
“똑똑하네.”
그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간식을 주었다. 똑똑하다는 칭찬은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나비는 간식을 얼른 먹었다. 맛있었다. 그는 다른 간식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또 명령했다.
“앉아.”
훗, 또 그 정도 가지고. 나비는 척 하고 앉았다. 그는 또 간식을 주었다.
“김 집사가 벌써 가르쳤나?”
역시나 놀란 눈치다. 워낙 무표정해서 좀 미묘하긴 했지만. 고양이는 속으로 낄낄낄 웃었다.
‘그렇게 비싼 척을 하더니! 무릎에 한 번 올라가 줬다고 단박에 넘어오는구만!’
역시 고양이는 세계를 정복한다! 개도 쉽게 못 할 묘기들도 전부 알아듣고 해내니 과연 이 남자도 나비의 훌륭함에 감탄했다. 그는 두 손으로 고양이를 잡아 들었다.
“이 정도면 천재 아닌가?”
그는 자기 고양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비는 매우 의기양양해졌다.
*
“먀~!”
다음날 출근할 때 나비는 용케 그걸 알고 쏜살같이 튀어나와 권시혁의 발치에서 야옹거렸다. 그의 출근 준비를 하던 고용인들은 나비를 반기며 한마디씩 했다.
“사장님 배웅하러 나왔어? 우리 나비 착하네~.”
권시혁의 서류 가방을 운전기사에게 넘겨주고 김 집사가 나비를 안아 올렸다. 나비는 그녀의 품에 안겨 먀먀거리며 권시혁을 올려다보았다. 동그란 호박색 눈동자에 동그랗게 벌어진 검은 동공이 몹시나 귀여웠다.
“한 번 쓰다듬어 주세요, 사장님.”
권시혁은 잠깐 1초 정도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다. 안 해줄 것 같더니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얹는 것에 가까웠다) 나갔다. 고용인 일동은 권시혁의 출근을 배웅하곤 한숨 돌리고 돌아섰다. 아침의 가장 큰 일이 끝난 것이다.
“나비야, 사장님이 네가 싫어서 저러시는 게 아니야. 그냥 요즘 사람치곤 많~이 무뚝뚝해서 그래. 우리 나비가 얼마나 이쁜데, 그치~?”
열다섯 명이나 되는 고용인들이 하나같이 새로 들어온 식구를 예뻐한다지만 그래도 주인 양반이 썩 귀여워하지 않으니 김 집사의 눈에는 좀 가여워 보였던 것 같다. 작은 고양이가 흥, 하고 콧바람을 냈다.
‘아~, 저 남자! 여간 비싸게 구는 게 아니네!’
어제는 이것저것 시키기도 하길래 좀 넘어오나 싶었더니! 그래도 한 번 쓰다듬기라도 한 것은 장족의 발전이 틀림없었지만! 이 집사 양반도 눈치가 비상해서 뭔가 미묘한 변화를 캐치한 것인지 오늘은 이렇게 한 번 쓰다듬어 달라는 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오늘 저녁에는 더 확실히…!’
김 집사가 자신의 털에 얼굴을 묻고 힐링을 하는 동안 나비는 포기하지 않고 그 남자가 퇴근해서 올 것을 노리기로 했다. 아직 작기만 한 새끼 고양이가 사냥감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이 집 고양이가 된 지도 어언 9일째. 다른 고양이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나비도 이 집안을 평정하기 위한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도 서재에서 일을 도모하기 위해 구석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
‘여기 왜 이렇게 좋지?’
고양이들이 왜 박스를 좋아하는지 알겠다. 책장의 한구석에 몸을 끼우고 있으면 마음이 아늑했다. 자신만의 공간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좋았다. 새끼 고양이는 잠도 많이 자야 했기 때문에 낮잠을 자기에도 완벽한 장소였다.
‘응…?’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이미 그 남자가 퇴근하여 자신의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유인하는 오늘도 이 남자의 무릎을 범할 생각이었다. 암살자처럼 소리 없이 책장에서 뛰어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가 하필 그때 일을 막 마쳤는지 의자를 돌리면서 나비의 앞발을 밟고 말았다. 나비는 펄쩍 뛰었다.
“캬아!! (아이고! 나 죽네!)”
그러자 이 둔한 남자도 깜짝 놀랐는지 얼른 의자를 빼고 고양이를 들어 올리며 벌떡 일어났다.
“왼쪽인가.”
그는 고양이의 왼쪽 앞발을 살피며 그렇게 말했다. 고양이가 너무 작아서 건드리는 손길이 아주 조심스럽다. 발이 부러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평정심을 잃는 법이 없는 권시혁도 약간은 다급함을 느꼈다. 나비는 화가 나서 그의 손에 오른쪽 앞발로 솜방망이를 마구 날렸다.
“캬! (아파! 아파!)”
내가 얼마나 작은데! 밟을 데가 어디 있다고 발을 다 밟나! 억울해서 살 수가 있나! 나비는 말도 안 통하는 주제에 그 남자에게 마구 화를 냈다.
권시혁은 두 손으로 고양이를 들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 언제나 과묵하고 정적인 그 남자치고는 재빠른 발걸음이다. 김 집사가 막 퇴근을 하려다가 말고 얼른 다가와서 살폈다.
“왜 그러세요, 사장님?”
“나비 발을 밟았어요.”
“네?!”
작은 고양이는 지금도 털을 다 세우고 소리를 지르고 난리였다. 누가 보면 잡아먹으려는 줄 알겠다. 이미 주인의 손을 얼마나 할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이 무덤덤한 남자는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다.
김 집사가 물었다.
“기사님 오라고 할까요?”
“아니요. 제가 운전해서 가겠습니다.”
김 집사는 케이지를 가져왔다. 권시혁은 케이지에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차고로 가서 차를 한 대 끌고 나와 24시간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수의사는 피곤한 얼굴로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네? 이렇게 아파하는데요?”
수의사의 말에 권시혁이 물었다. 고양이는 귀를 뒤로 완전히 넘긴 채 아직도 권시혁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수의사는 그럴 수도 있다는 투로 말했다.
“엄살이 심한 거예요. 며칠은 더 삐져 있을 겁니다.”
“캬아! (엄살 아니거든?!)”
고양이는 사람 말이라도 알아들은 것처럼 수의사에게도 화를 냈다. 진료비를 내고 권시혁은 고양이를 다시 케이지에 넣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자 그는 한숨을 돌리며 고양이를 케이지에서 꺼냈다. 그는 고양이를 안아 들고 고양이방으로 향했다.
자신의 품에서 여전히 불평불만을 잔뜩 말하는 고양이를 그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좀 더 성의가 생겼다. 미안한 모양이다. 고양이가 아직도 화가 많이 나 있어서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굳이 풀어주지 않아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권시혁은 고양이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더욱 부드러운 손길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미안해.”
“캬아아! (그게 미안하다는 사람 태도냐!)”
“그래.”
“캭! (내 발 물어내!)”
나비는 자신을 다시 쓰다듬으려는 그의 손에 대고 또 냥냥펀치를 날렸다. 그 남자는 마치 아이라도 달래는 듯 그래, 그래 하면서 고양이의 투정을 전부 들어주었다. 그는 고양이방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다시 한번 고양이의 왼쪽 발을 확인해 보았다.
“이야아아야! (아프다니까!)”
“진짜 아픈 거 아닌가….”
왼쪽 발의 젤리를 한 번 살짝 눌러 봤더니 나비는 아예 그 남자의 손을 물었다.
“아파.”
아프다고 말하는 것도 아이에게 말하듯 차분한 어조였다. 물론 유인하는 아이에게 차분하게 말하는 어른을 별로 겪어본 적이 없지만. 그 남자가 손을 떼자 얼른 도망가서 달걀 모양의 은신처 안에 숨었다. 최대한 위협적으로 으르릉거렸다. 은신처 안에서는 그 남자의 종아리밖에 안 보였다. 그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마음을 풀라는 뜻으로 간식을 꺼내 앞에 두고는 밖으로 나갔다.
‘내가 밟을 데가 어디 있다고! 자기가 조심해야 할 거 아냐!’
나비는 도저히 분이 안 풀려 아직도 아릿아릿한 자신의 왼발을 한참 핥다가 겨우 잠들었다. 다음날이 되어도 화가 안 풀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머, 사장님, 손이….”
“괜찮습니다.”
“소독은 하셨어요?”
“아뇨.”
“아유, 혹시 모르니까 그래도 소독은 해야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의 손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핏기가 생생하다. 어제 나비가 그의 손을 죽어라 할퀴고 물었다. 손을 소독하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비가 말했다.
“먀. (뭘 봐.)”
저 남자가 먼저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고양이의 반항적인 눈빛을 보고도 그 남자는 무덤덤했다. 그는 김 집사에게 말했다.
“원래 가던 병원에 좀 데리고 가주세요. 어제 수의사는 아무 이상 없다고 했는데 지금도 발을 저네요.”
“네.”
손에 밴드를 덕지덕지 붙인 그 남자는 그대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치즈냥이 나비는 바로 또 동물병원을 갔고 그 병원에서도 별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서 하루 종일 보란 듯이 왼발만 핥고 있었다. 많은 고용인들이 와서 걱정을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 집의 주인이고 그들은 그의 인간 노예들이었다.
오늘은 서재로 들어가 그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그가 책을 읽으러 거실로 왔을 때 그의 손이 여전히 상처투성이인 걸 보고 약간 마음이 풀어졌다.
‘음…. 내가 너무 나갔나….’
밴드가 거치적거렸는지 전부 떼어낸 그의 손에는 자신의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수의사가 두 명이나 발에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럼 정작 안 다쳐도 될 걸 다친 사람은 저 남자가 아닌가. 그때는 서로 실수를 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군….’
나비는 자신이 애용하는 스툴에서 일어나 그가 앉아 있는 소파로 건너갔다. 그리고 천천히, 우아하게 걸어가 그 남자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털썩 누워 배를 보였다. 쓰다듬어라. 나름대로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 것이다.
권시혁은 책에서 눈을 떼고 또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무릎에 올라오는 고양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양이는 마치 권시혁의 무릎이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등을 대고 누운 채 빤히 권시혁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빨리 안 쓰다듬고 뭐 해? 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일까지는 삐질 줄 알았는데.”
당연히 사람과 고양이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권시혁은 또 고양이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신에게 이렇게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존재는 드물었다. 낯설어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미묘한 느낌이다. 고양이의 호박색 눈동자의 동공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가만히 관찰하게 될 만큼.
‘삐진 게 아니다. 벌을 내린 거다.’
흥. 나비는 남자의 무릎 위에 누워서 쓰다듬으라고 팔을 끌어당겼다. 권시혁은 자연스럽게 고양이의 몸 위에 오른손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남자도 화해의 제스처를 받아들인 것이다. 왜일까. 별것 아닌데 기분이 좋아졌다.
‘화해라. 화해라는 거 진짜 있는 거구나.’
누가 잘못을 했든 제대로 화해를 해본 적도, 하는 걸 본 적도 없었다. 다들 그저 없었던 일처럼 지나가 버리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화해는 생각보다 아주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단 한 번으로도 또 이렇게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보여주는 듯하다. 나비는 골골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를 내더니.’
조금 웃기기도 하고. 권시혁은 다시 한번 고양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제 발을 밟았다고 오늘 아침까지 노려보고 하악질을 하던 나비였다. 처음부터 애교를 잘 부려서 잘 몰랐는데 성격이 제법 있지 않은가. 그런 게 화가 풀렸다고 무릎 위에 올라오더니 쓰다듬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지금은 기분 좋다고 골골거리고 있는 게 귀엽다.
김 집사는 나비가 주인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시혁이 봤을 때는 나비가 스스로를 주인이라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적어도 그런 개념이 있다면. 집안사람들 중 몇 명은 무릎을 꿇고 나비와 놀아주는 모습이 왕왕 보였다. 나비가 한 번 울면 몇 사람이고 달려갔다. 권시혁의 침실과 서재를 마음대로 오가고 그의 무릎마저 올라오더니 쓰다듬으라고 지금도 손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역시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비가 주인이라….’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귀여워서 이런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그러면 괜찮지. 말랑거리고 부드러운 고양이의 몸을 쓰다듬으며 권시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
“나비는?”
“거실에 있어요.”
현관으로 그 남자가 들어왔다. 이전 같으면 그를 맞으러 쏜살같이 달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 남자가 자신이 있는 거실로 왔다. 승리자가 된 기분이다. 짜릿하다. 고양이는 주인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우아하게 자신의 앞발을 핥아 털을 골랐다.
‘훗, 아무리 저런 남자라도 어쩔 수 없네! 나 같은 고양이 앞에선!’
세상에서 일밖에 모르고 살던 남자가 발을 밟은 게 미안했던지 그날 이후로 몇 번이나 왼발의 상태를 살피기도 하고 자주 쓰다듬기도 하며 뭔가 미묘하게 달라지더니 일주일이 지나자 퇴근 시간도 빨라지고 돌아오자마자 고양이를 찾기 시작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서재에 있는 고풍스러운 책장에 어울리지 않는 고양이 서적이 생기기 시작했다. 방과 복도에는 나비의 사진이 걸렸다. 특히 나비의 방에는 나비의 전신샷을 담은 아주 커다란 액자와 그 사진을 그린 유화가 나란히 걸려 있어서 꽤나 멋지다. 역시 있는 남자의 사랑이란 돈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 남자가 바로 거실로 들어왔다. 키가 훤칠하고 건장한 남자다. 얼굴도 남자답게 잘생겼다. ‘나 잘났고 어디서 한자리하고 있소.’라는 모습을 구현하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젊은데도 무게감이 있고 자세가 좋은 아주 근사한 남자다.
무뚝뚝하다고, 무미건조하게 산다고, 일중독에 철벽남에 석남이라고 속으로 그를 마구 욕하던 유인하였다. 그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을 안아 들자 매우 의기양양해졌다. 헹.
“잘 있었어?”
나비는 얼른 쓰다듬으라고 목을 위로 쭉 빼며 눈을 감았다. 야옹, 하고 우니까 그가 바로 턱밑을 손으로 긁었다. 이 남자는 아주 성실하고 좋은 긁개다. 나비는 기분 좋게 고롱거리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주워와 놓고 정은커녕 데면데면 비싸게만 굴더니 의외로 그는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준다.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훗, 쉬운 남자.’
그래, 이렇게 가진 게 많으면 뭐 하나? 이 남자는 언제나 혼자 있었다. 그를 모시는 사람이 많을지 몰라도, 그래서 그들은 그와 대등한 사람이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얼마나 답답한지 나비는 잘 알고 있었다. 거기서 오는 외로움도 말이다.
“골골골골! (하아앙~! 기분 너무 좋아~!)”
어쨌든 이 남자의 손은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조금만 쓰다듬어도 금세 자세가 방만해졌다. 그 남자의 무릎에 벌렁 누워 배를 내보였다. 그의 커다란 손이 유인하의 턱밑부터 배까지 부드럽게, 끊임없이 쓰다듬었다.
“아휴, 나비가 사장님 엄청 좋아한다니까요. 진짜 주인을 알아봐요.”
김 집사가 옆에서 나비의 귀를 쓰다듬으며 거들었다. 어째서일까. 그 말이 약간 민망하게 느껴졌다. 나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냥 손맛이 좀 좋은 것뿐이야.’
하지만 기분이 좋아서 그 민망함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비는 눈을 감으며 먀, 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권시혁은 나비의 배를 열심히 긁으며 말했다.
“아마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어머, 그러려나. 그럴 지도요. 수아 씨나 재민 씨는 나비한테 아예 정신을 못 차리니까요. 잘 보면 사람 말도 다 알아듣는 것 같아요.”
딱딱하기만 한 남자가 고양이한테 슬슬 빠지기 시작하더니 집안일 하는 사람들과도 이런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다. 권시혁을 조금이라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전부 기절초풍할 일일 것이다. 일 외에는 타인과의 교류가 극히 적은 권시혁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비 얘기를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역시 고양이가 요물이긴 요물인 모양이다.
“아유, 복덩이. 귀여워.”
나비 덕분에 집안 분위기가 다 화사해졌다. 김 집사도 나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할 일을 하러 물러났다. 권시혁은 그대로 나비를 들고 서재로 향했다. 그리고 나비를 무릎에 둔 채 일을 얼른 끝냈다. 나비가 불편할까 봐 무릎도 모으고 자세가 조신했다. 그도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의 태가 점점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비는 손길이 멈추자 다시 손을 끌어당기려고 하고 키보드 위에 올라타기도 했다. 전이라면 쫓아냈을까. 화를 내는 법은 없는 남자이니 화를 내진 않았겠지만 지금처럼 귀엽게만 보이는 것도 신기하긴 마찬가지다.
‘귀여워.’
무언가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신기하다. 귀엽다는 건 무엇인가. 권시혁은 서재의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의자가 30도 정도 뒤로 기울어졌다. 나비는 당연하다는 듯이 권시혁의 몸을 타고 가슴 위로 올라왔다. 역시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나비는 남자의 가슴 위를 정복하고 서서 권시혁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먀~.”
그래, 더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나. 나비가 귀여움의 정의일 것이다. 권시혁은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비는 커다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나비가 귀여움의 정의였다. 그리고 귀여움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사람을 코끝으로 부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듯하다.
나비는 무척이나 똑똑하고 영악한 고양이었다. 겁도 없이 무릎에 올라타서 쓰다듬을 조르고 자신이 질리면 도망가버린다. 간식을 주면 개도 못 하는 걸 척척 해내고 말을 걸면 알아듣는 듯했다. 조금씩 커가는 게 눈에 보인다. 갈수록 점점 더 예쁘고 더 귀여워졌다. 그게 혼자만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뿌듯하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면 이런 기분일까.’
결혼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없었다. 아이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아마 이 귀여움은 유전자 레벨에서 시작되는 것인 모양이다.
“나비야.”
권시혁은 나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나비가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박하더니 대꾸했다.
“먀~.”
목소리가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다. 권시혁은 나비의 귀를 긁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 들어주고 싶다. 그게 나비를 행복하게 할 수만 있다면. 이상한 기분이다. 권시혁은 자신의 행복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권시혁은 부들부들한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비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그러면 언제까지고 나비의 눈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이런 게 아마 기분이 좋다는 것일 테다. 나비의 새카맣고 커다란 동공 속에 그저 한 남자가 비친다. 마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가장 놀라운 것은 나비도 그렇게 계속 권시혁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나비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면 자신도 한 번 눈을 깜박였다.
“나비야.”
그렇게 또 부르니 알아듣는지 다시금 눈을 깜박였다가 뜨는 나비였다. 뭐랄까.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그는 언제나 모자란 듯 중도를 지키며 사는 남자였다. 지금은 뭔가 충족된 느낌이 든다. 이상했다.
권시혁은 나비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일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역시 처음이다. 이 집에 나비가 들어온 이후로 이런 ‘처음’들이 많아져서 그럴까.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오늘과 내일을 구분할 수 없던 그의 삶이었다. 불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하루하루의 색이 선명해졌다. 모든 것을 나비를 기준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나비가 자다가 발차기를 하는 것을 본 날이라든가, 나비가 처음으로 텀블링을 한 날이라든가.
그렇게 또 권시혁은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쓰다듬는 손이 떨어지니 나비는 야옹, 하고 다시 쓰다듬으라고 요구했다.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그는 휴대폰 카메라로 자신의 고양이를 찍었다. 아무래도 사진 같은 걸 안 찍다 보니 어설프기만 했지만 워낙 미묘라 잘 나왔다. 나비는 자신의 사진이 보고 싶은 것인지 휴대폰에 턱 발을 올렸다.
“어때?”
권시혁은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비는 또 눈을 한 번 깜박했다. 좋다는 듯했다. 권시혁은 그대로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 권시혁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한참 보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대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처음으로 개설해서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권시혁이 중얼거렸다. 그는 SNS 계정을 만드는 것도 사진을 올리는 것도 몇 번이나 돌아갔다. 옆에서 아닌 척 보고 있던 나비는 답답해서 죽을 뻔했다.
‘요즘 사람 맞아? 이런 것도 못 해?’
그렇게 타박하고 싶었다.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고양이로 사는 것은 묵언 수행을 하는 것이랑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차라리 안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 나비는 서재의 마호가니 책상에 누워 그루밍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원하던 바대로 이 남자를 유혹했을 뿐만 아니라 팔불출처럼 자신을 자랑하게 만들었다.
살면서 이렇게 생각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 같다. 아니, 이미 고양이가 되었던 시점부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생각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은 참 기분이 좋은 일이다.
털을 적당히 고른 나비는 나른하게 책상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 남자가 다시 사진을 찍는 것이 느껴졌다.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자고 있는 고양이를 권시혁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분 좋아….’
그 남자는 일을 마치고 나비를 품에 들고 일어났다. 이 부유감이 기분이 좋았다. 따뜻한 품이 자신을 지켜주는 것만 같아 안심이 되었다. 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래서 일어났을 땐 자신의 고양이방이라 조금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한밤중이었다. 집안이 춥진 않았지만 고양이는 따뜻한 곳을 좋아한다. 유인하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나왔다. 따뜻한 곳은 여러 군데가 있었다. TV 셋톱 박스나 밥솥이나 냉장고 뒤편, 충전기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 출신인 나비는 아무래도 그런 곳이 조금 꺼려졌다. 먼지가 많아서 재채기를 하고 말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전열기를 사줄까?’
나비는 잠깐 골몰했다. 역시 의사소통에 제한이 크다. 고양이가 된 것은 다 좋지만 5월이 됐는데도 여전히 춥게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게 문제다. 햇빛이 좋을 땐 언제나 거실에서 일광욕을 하며 몸을 덥혔다. 인간들은 전혀 춥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볼 때마다 밥솥이나 셋톱 박스에 올라가 있을까? 일단 그래 보자.
그러다가 아까 생각이 났다. 그 남자는 참 좋은 발열체다. 나비는 살금살금 그 남자의 침실로 갔다. 아무래도 고양이의 본능은 그를 사냥감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손쉽게 문을 열고 그의 침실 안으로 들어가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 자고 있는 그 남자가 보였다. 나비는 그의 뺨에 발을 올렸다.
‘역시 따뜻해!’
혹시나 그가 뒤척거리다가 깔리면 안 되니 이곳저곳 진맥을 하듯 그를 만져보다가 그의 목과 어깨 사이에 찰싹 달라붙었다. 곧 몸이 아주 따뜻해졌다. 저절로 목에서 그릉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누구랑 같이 자는 건 진짜 오랜만이다….’
대학을 들어가고 쭉 혼자서 자취를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붙어서 자는 건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것일까…. 고양이는 그대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환기를 시키는 와중에 집에 다람쥐가 들어오고 말았다.
“꺅!”
“끄악!”
“엄마! 어떡해!”
벌레 정도야 잡으면 그만이지만 중구난방으로 튀어 다니는 다람쥐를 사람이 어떻게 잡는단 말인가. 집이 넓고 천장도 높으니 더더욱 어려웠다. 다람쥐에게 날개라도 달린 것이 틀림없었다. 유인하는 그 남자의 방에서 늦잠을 자다가 눈이 번쩍 떠졌다. 밖에 나갔더니 낯선 냄새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거실 TV에 붙어 있는 다람쥐와 눈이 마주쳤다.
“먀! (다람쥐!)”
“꺅! 나비야!”
그러자 다람쥐뿐만 아니라 이 집 고양이도 날개가 달린 것처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다람쥐는 유인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가소롭군! 죽었어!’
나비는 다람쥐가 선반 위로 올라가면 자신도 올라가고 화병 위를 뛰어넘으면 화병 위를 뛰어넘었고 싱크대 위에 올라가면 싱크대 위로, 벽을 타고 올라가면 액자를 발 받침 삼아 점프를 했다. 처음에 나무 올라가는 것도 무서워하던 새끼 고양이는 없었다.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고 어디든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었다.
‘다람쥐! 다람쥐!’
다람쥐는 결국 구석으로 몰리고 말았다. 타고 올라갈 벽지도 없고 다 매끈매끈한 대리석뿐이다. 다람쥐가 오른쪽을 돌파하려고 하자 턱 하고 먼저 막았고 반대쪽으로 가려고 해서 다시 한번 진로를 선점했다. 다람쥐는 겁먹은 눈빛으로 유인하를 보고 있었다. 유인하는 잠깐 눈이 회까닥 돌았다.
‘다람쥐, 흐으….’
캬! 하고 나비는 포효를 내지르며 다람쥐를 덮쳤다. 몇 번의 사투 끝에 유인하는 의기양양하게 다람쥐의 머리를 앞발로 눌러 제압했다.
“먀! (어디 고양이님한테 덤비냐!)”
봐라! 나의 업적을! 이 집의 주인은 나다! 고개를 치켜들고 사람들을 찾았다.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칭찬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금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집안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그 남자도 돌아와 있었다.
나비는 정신을 차렸다.
‘이, 이건 아무리 그래도 쉴드 불가….’
비싼 그림도 몇 개 떨어졌고 화분이 엎어져 복도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장식용 화병도 박살이 났다. 부엌도 엉망이고…. 정원사가 다가와 다람쥐를 잡아 밖에 풀어주었다. 나비에게는 권시혁이 다가갔다. 칭찬이 아니라 혼날 걱정을 해야 했다.
‘혼나겠다!’
나비는 혼날 거라는 생각에 그의 손을 솜방망이로 마구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부드럽게 저항을 밀어내고 자신의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어디 안 다쳤어?”
그는 다람쥐에게 맞아 얼얼한 유인하의 뺨을 쓰다듬었다. 등에 먼지라도 묻은 것인지 손수 털어주었다.
‘안… 혼내나?’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 혼나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아니, 이런 것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걸 저질렀다가 집 밖으로 쫓겨난 적도 있었다. 고성과 짜증을 듣는 것은 물론이고. 그건 아무리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일이더라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어릴 때의 일이긴 하지만…. 잊었던 기억은 불쑥 떠올랐고 기분이 좀 이상했다. 권시혁은 차분히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부엌을 나왔다.
“나비야, 안 다쳤어?”
김 집사가 걱정을 하며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나비는 절로 고개를 들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우리 나비가 용하네. 다람쥐를 다 잡고. 아직 새낀데.”
그녀도 혼내지 않았다. 아니, 주인도 혼내지 않는데 고용인이라고 혼낼 수가 있겠는가. 나비는 다시 그 남자를 돌아보았다. 눈을 마주치니 그 남자의 무덤덤한 얼굴이 왜? 라고 묻는 듯했다.
“먀아…. (왜 안 혼내?)”
“쥐 같은 거 안 잡아도 돼. 쥐 잡으라고 데리고 온 거 아냐.”
그 남자가 마치 유인하의 질문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그렇게 대꾸했다.
‘그럼?’
처음엔 별로 관심도 없었던 주제에. 왜일까. 나비는 약간 심술이 났다. 그저 혼나야 할 걸 안 혼난 것뿐인데 말이다. 안 혼났다고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닐 테고…. 그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나비는 마지못한 듯 그의 턱에 이마를 비볐다. 고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남자의 냄새와 촉감이 좋았다.
“역시 냄새나네….”
“먀? (뭐?)”
아까 다람쥐 엄청 더러워 보이더니 뭔가 묻기라도 한 것일까. 그 남자는 무심한 얼굴로 고양이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를 욕실로 데리고 간 것이다.
‘설마!’
목욕은 그렇게 자주 하지 않는다. 처음 데리고 왔을 때 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어차피 고양이는 깔끔한 동물이라서 그렇게 자주 씻지 않아도 되고 나비는 매우 깔끔하고 그루밍도 잘했기 때문에 아주 깨끗했다.
‘내가 물이 싫다는 건 아니야! 물이 싫은 건 아닌…!’
나비는 비명을 질렀다.
“캬아아아! (아아아악!)”
그 남자가 대뜸 샤워기 물부터 틀기 시작했다. 샤워기의 물소리가 매우 공포스러웠다. 고양이는 혼비백산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당황했다.
“아니, 잠깐만….”
물고기나 다람쥐가 아니라면 별로 날뛰는 구석이 없이 얌전했던 자신의 고양이가 물을 보고 난동을 피우니 그 남자의 무심한 얼굴에도 당황이 약간 서렸다.
“잠깐만. 빨리해줄게. 냄새난다니까.”
“먀아! 먀! (내가 그루밍 잘할게!)”
나비는 결국 꼬리부터 적셔오는 그 남자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그 남자는 나비의 조그만 앞발을 두 개 모아 쥐고 뒷다리로 서게 하여 온몸에 물을 묻혔다. 물을 적시니 고양이의 부피가 줄어들고 길이는 길어졌다.
얼굴이 물에 젖어 눈이 더 커졌다. 나비는 애처로운 울음을 냈다.
“야옹! (놔라, 이 남자야!)”
“야옹 했어?”
그 남자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가끔 고양이 말도 알아듣는 것 같더니 지금은 못 알아듣는다. 고양이 샴푸를 손에 짜서 금방 슥삭슥삭 씻어서 들고 나가니 고용인들이 집 안 청소를 하다 말고 돌아보았다.
“아유, 직접 씻기셨어요?”
“별로 안 힘들었어요.”
“먀아…. (힘들었어.)”
“다람쥐 잡을 때는 용맹하더니. 기운 다 빠졌네, 우리 나비.”
나비가 어질러 놓은 집을 청소하느라 다들 분주했다. 권시혁도 평소라면 바로 서재로 가서 해야 할 일을 했겠지만 지금은 일단 나비를 말리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푹신한 수건으로 감싼 나비를 선반 위에 내려놓고 드라이기를 틀어 털을 말렸다.
‘흐…. 기분 나빠. 자존심 상해. 굴욕이야.’
물에 젖은 새앙쥐 같은 꼴로 그 남자에게 전신을 마구 만져졌다. 그 남자가 쓰다듬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았는데 물에 젖었을 때는 기분 좋지 않았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앞발을 꽉 잡힌 것도 싫었다. 여러모로 목욕은 좋지 않았다. 깨끗한 게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다. 고양이들이 왜 목욕을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여러모로 굴욕적이다.
나비는 기분이 나빠서 그냥 축 늘어져 있었다. 털을 다 말리고 권시혁은 고양이와 고양이용 빗을 들고 서재로 가서 앉았다. 축 늘어진 고양이를 무릎 위에 놓은 채 간간이 뒤집어 가며 털을 빗겨주었다. 다른 고양이가 그루밍을 해주면 이런 기분이 들까? 한참 뒤에야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손에 이마를 비비니 그 남자가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기분 풀렸어?”
그래도 역시 이 남자에게는 고양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일까? 이 젊은 남자가 무엇에도 경거망동하는 법이 없으니 약간 도가 튼 것 같기도 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질문에 약간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분이 좋아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상한 오기가 생긴 나비는 그날부터 매우 고양이답게 주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책장 위의 물건을 발로 스윽 밀어 떨어뜨려 깬다든가, 일할 때마다 키보드 위에 올라가서 식빵을 굽고 있다든가, 휴지를 전부 뽑아 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역시나 한 번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무덤덤한 남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지, 그래도 짜증은 날 텐데.’
손을 할퀴었을 때도 짜증은커녕 아픈 티조차도 안 냈다. 진짜 도라도 닦는 건가, 이 남자…. 고양이는 자기 주인을 외계인을 보듯이 보곤 했다. 이상한 남자다.
‘불감증인가?’
역시 석남…. 그래서 마지막으로 밑져야 본전이지, 하고 그의 서재에 있는 일체형 컴퓨터에 몸통 박치기를 해서 엎어버렸다. 이건 화를 내거나 당황하겠지, 했는데 그는 나비가 다치진 않았는지 확인을 하고는 별말 없이 그 비싼 컴퓨터를 바로 세워 평소처럼 일을 했다. 귀퉁이에 금이 살짝 가긴 했다.
“이거 깨졌네요!”
김 집사가 오히려 깜짝 놀라 걱정했다.
“괜찮아요.”
그 남자는 정말 별것 아니라는 태도로 말했다. 그의 입장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가 일부러 자신의 물건들을 부수고 다녔다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이러는 것일까? 그게 더 짜증 나지 않나? 모르고 그러는 건 교정도 불가능하니까. 그래도 이건 화를 낼 것이다 생각하고 저지른 일인데도 그가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아서 더 놀랐다.
‘진짜 불감증인가? 하긴 할퀴어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하지….’
나비는 확인차 그의 손가락을 한 번 콱 물어보았다. 역시 반응이 둔하다. 쓰다듬어 주길 바란 것이라 생각한 걸까? 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고양이를 몇 번 쓰다듬고 다시 일을 했다. 다시 그의 검지를 깨물었다.
“왜 그래?”
그래도 아야, 소리가 한 번 안 나온다.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먀. (안 아파?)”
“안 아파.”
안 아플 리가 없는데? 피 나는데?! 유인하는 이상하다는 눈빛을 팍팍 담아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아무리 그래도 혼내야 할 일에 혼내지 않고 화내야 할 일에 화를 내지 않으니 나비는 이 남자의 머리통 속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감각이 이상한 건 아닌가 싶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참을성이 강한 남자인 것 맞는 것 같은데 또 싫은 걸 억지로 참는다는 느낌은 아니다. 그냥 자기 고양이가 뭘 하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고양이 나비는 그 부분이 제일 신기했다. 자신은 누군가 이렇게 성가시게 군다면 짜증이 나서 문자 그대로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왜 화를 안 낼까? 어떻게 화가 안 날 수가 있지?’
그러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좋나?’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 생각이 쑥스러우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왜일까?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은 제법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은 없었다.
‘이런 사람은….’
고양이는 대단하구나…. 말도 못 하는 고양이가, 한 대 때렸다고 어디 가서 신고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도 어떻게 이렇게 마음을 넓게 쓸 수 있는 거지? 다시 말하지만 유인하라면 이미 소리를 한참 지르고도 남았다.
‘이제 사고는 그만 쳐야겠다….’
이상한 오기 때문에 시작한 일인데 스스로가 갑자기 바보같이 느껴졌다. 뭘 확인받고 싶었던 걸까? 이 남자는 무시를 할 때도 묵묵하고 애정을 줄 때도 묵묵한 느낌이다. 그것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상해.’
나비는 그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무게가 있는 남자라는 건 이런 거겠지? 차분하고 성실하고, 허튼짓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석남이니 일중독이니 속으로 욕을 할 때도 있었지만… 조금 멋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게 역시 진짜 어른인 걸까? 이상한 기분이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라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이 남자는 유인하의 보호자였다.
아주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의지할 수 있는. 여기선 무엇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심할 수 있었다. 마음을 놓아도 되었다. 마음이 놓였다.
‘내가 어떻게 해도 버리지 않을 거구나….’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다. 나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서진 모니터를 보고 있는 그의 턱에 얼굴을 문질렀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
주말에도 권시혁은 일찍 일어났다. 운동은 주말에 몰아서 한다. 그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가 바로 일어났다. 가슴에서 뭐가 굴러떨어졌다.
고양이다.
하얀 얼굴과 앞발, 배를 가진 고양이는 사람의 가슴에 올라타 누워 자다가 무릎으로 굴러떨어졌는데도 태평하게 잘 자고 있었다. 참 고양이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고양이 같지가 않다. 권시혁은 어느샌가 습관이 된 것처럼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감촉이 참 좋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부드럽다. 만일 그에게도 스트레스라는 것이 있다면 이것으로 모두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커다란 침대와 고양이를 쓰다듬는 남자. 정적이고 평화로웠다. 권시혁은 나비가 문을 잘 열고 다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무 작아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것들은 잘 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새 자꾸 침실로 들어와 같이 자는 나비였다. 막상 처음부터 데리고 와서 같이 자려고 하면 도망가는데 말이다. 자다가 역시 주인이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일까. 괜히 기특해서 계속 쓰다듬었다. 새끼 고양이는 거의 종일 자야 한다더니 참 잘도 잔다. 좀 더 자라고 그대로 두고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 사진.’
권시혁은 휴대폰을 들었다. 자신의 침대라는 듯 방만한 자세로 자고 있는 고양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권시혁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한 고양이 사진은 금세 인기를 끌었다. 나비가 워낙에 미묘다. 한 번 사진을 올리면 좋아요 몇십만은 기본이었다.
나비 너무 예뻐요, 나비 사진 더 올려주세요, 보기 드문 미묘네요, 유튜브 채널도 빨리 만들어주세요, 등등 칭찬 일색이었다. 나이는 젊지만 이런 인터넷 문화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권시혁이었지만 대략 그런 말이란 것만 알아들었다. 나비의 귀여움이 사람들의 고통을 정화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나쁜 것은 아니겠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나비의 모습을 남기는 것은 참 뿌듯한 일이다.
‘유튜브는 어떻게 하는 거지?’
세수를 하고 나온 권시혁은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으며 평소대로 신문을 봤다. 그러고 나서 유튜브 영상 촬영을 어떻게 해야 하나 찾아보았다. 딱히 별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니 해도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마침 김 집사가 복도를 지나가자 불렀다.
“김 집사, 혹시 유튜브 할 줄 압니까?”
“네? 유튜브 채널도 만드시게요?”
나비의 인스타그램은 모든 고용인들도 팔로우하여 보고 있었다. 김 집사는 대번에 그렇게 물었다. 권시혁은 휴대폰을 내밀었다.
“사람들이 영상도 올려달라는데 어려워서요.”
“저도 그런 건 잘…. 재민 씨 부를까요?”
디지털 문해력이 비슷한 수준인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잠깐 휴대폰 화면을 함께 보며 채널을 만들려다가 결국 포기했다.
“재민 씨는 할 줄 알려나?”
“재민 씨가 제일 어리잖아요.”
고용인 중 가장 어린 김재민이 불려왔다. 그는 유튜브 채널용 계정을 개설하는 것부터 촬영 방법에 대한 설명까지 척척이었다. 머리가 아파진 권시혁은 김재민에게 말했다.
“그럼 촬영할 땐 재민 씨가 좀 해줄 수 있을까?”
“앗, 제가요?”
“월급 올려줄게.”
“네, 아싸!”
그렇게 권시혁은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비의 귀여움을 나누기 위해 유튜브 채널까지 개설했다. 권시혁은 밖에 나가기 전에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나비는 주인의 침대 한가운데를 떡 차지하고 방만한 자세로 자고 있었다. 다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잠시 휴대폰의 사진첩을 옆으로 계속 넘겨보았다. 나비 사진밖에 없다. 권시혁은 다시금 자고 있는 나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남자는 또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침대로 올라가 자신의 고양이 옆에 누웠다. 그리고 고양이를 끌어안고 사진을 찍었다.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액자를 만들어 침실 옆에 두면 좋을 것 같다. 저도 모르게 사진을 남기는 재미에 빠진 권시혁이었다.
권시혁이 운동을 하러 나가고 나비는 정오가 지나서야 일어나 침실을 나왔다. 그리고 거실로 가서 일광욕을 하기 위해 애용하는 진주색 소파 위로 올라갔다. 쉬는 시간이 되자 김재민이 고양이용 빗을 들고 다가왔다.
“나비야~, 털 빗겨 줄게.”
나비는 오냐, 오늘은 네가 한번 빗겨봐라, 하는 태도로 벌렁 드러누워 자신의 앞발을 핥았다. 고양이는 그 존재만으로 심신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으며 껴안고 있을 수 있다면 극락이 따로 없다. 그는 신이 난 표정으로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인스타에서도 너 진짜 인기 많은데 유튜브 하면 짱이겠다.”
“먀? (진짜?)”
그 남자가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사진을 올리는 것은 알았지만 인기가 많은 줄은 몰랐다. 나비가 말이라도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자 이 젊은 고용인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카메라를 켰다.
“미리 몇 개 찍어볼까? 사장님이 월급은 얼마나 올려주시려나~.”
“먀….”
내가 벌써 인스타그램 스타라니. 별로 실감이 안 난다. 고시 생활을 시작하며 SNS 같은 건 안 한 지 오래되었다. 그 남자가 자신을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니게 만들겠다 결심하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진짜 고양이 스타가 될 줄은 몰랐다.
‘아니지. 나처럼 귀엽고 똑똑한 고양이가 아니면 누가 스타가 될 수 있겠어?’
갑자기 으쓱한 기분이 든다. 그 인스타는 유튜브처럼 돈을 못 버나?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보는 거지? 유튜브는? 그거 하면 돈은 얼마나 벌 수 있을까?
‘아니, 고양이가 돈은 못 써도 한우는 먹을 수 있는데 한우 진짜 안 사주나?’
이제 이쯤 되면 사줄 만한데?!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까먹고 있었다. 아니, 애당초 그 남자를 꼬시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나비는 고개를 팩 들어 현관 쪽을 보았다. 그 남자가 오면 따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간 자신이 너무 그 남자에게 잘해줬다. 공짜는 없다는 것을 그 남자에게 가르쳐줄 때가 된 것 같다(나비는 자신이 사고를 치던 역사를 말 그대로 싹 잊고 있었다).
“나비야.”
정시에 퇴근을 하고 돌아온 그 남자는 자신의 고양이를 찾아 거실부터 왔다. 그는 몇 번이고 나비를 쓰다듬고는 안아 들더니 서재로 가 책을 가지고 왔다.
‘한우 내놔.’
자기가 잊어버린 것뿐이면서 돈이라도 떼먹힌 것 같은 심정이었다. 유인하는 그간 이 남자를 노예로 부리기 위해 갖은 애교를 다 부려 결국엔 이렇게 함락시켰다. 이제는 밀 때가 된 것이다. 그가 만져주는 건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 곤란하니 정신이 있을 때 그 남자의 무릎을 벗어났다. 그 남자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건 시위다.
“나비야.”
책을 읽으며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으로 소일하는 애늙은이 같은 젊은 사장님은 나비가 자신의 무릎에서 뛰어 내려가자 책에서 눈을 뗐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새하얬다. 이 호화로운 거실의 모든 것이 빛나는 듯하다. 이 집에 올 때보다 약간 큰 노란 고양이가 꼬리를 세우고 총총 걸어갔다.
“나비야.”
그가 한 번 더 자신의 고양이를 불렀다.
‘에이, 귀찮은 남자. 한우나 내놓으라고.’
그는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자신을 바람맞혔지 않은가. 이 정도는 당연하다. 한우도 안 사주는 남자니까. 나비는 그 남자가 자신을 찾아다니는 동안 서재의 책 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 남자는 곧 자기 고양이를 찾으러 왔는데, 서재까지 찾으러 왔는데도 못 보고 다시 나비야, 나비야, 하고 그 촌스러운 이름을 부르며 집안을 돌아다녔다. 이 대궐 같은 집에 찾을 곳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는 3층까지도 찾으러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결국 밤이 늦으니 몇 번 더 부르다가 자러 들어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문을 열어 둔 모양이다.
‘킥킥.’
저 남자도 결국 가소로운 인간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도 특별히 기분이 좋았다. 저런 남자를 코끝으로 부릴 수 있는 건 상당히 기분이 좋은 일이다.
‘뭐, 주인은 주인이니까.’
아니지. 내가 주인이고 저 남자는 집사.
‘맞아. 킥킥.’
태어나서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었나? 마음이 흡족하다.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았다. 고양이는 밤중에도 눈이 밝고 몸이 날렵해 자기 키의 몇 배가 되는 높이도 뛰어오르고 내리는 게 자유로웠다. 그는 곧 책장 사이를 빠져나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문득 컴퓨터가 보였다. 신기하지 않은가. 한 달 전까지의 일이 더 이상 현실 같게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 유인하가 고양이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고양이 나비가 인간 유인하의 꿈을 꾼 것인지. 별로 예전 일 같은 거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컴퓨터의 PIN 번호를 알고도 바로 써먹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써먹을 이유가 생겼다.
‘이 남자가 한우를 사줄 생각이 없다.’
그 남자 정도 되면 마음을 쏟는 것에 한우를 사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 것 아닌가(본인도 까먹고 있었지만). 그는 고급 고양이 간식과 사료에 아낌없이 돈을 쓰라고 김 집사에게 지시한 모양이지만 유인하는 1등급! 투쁠! 한우를 먹고 싶었다. 보통 사람들은 함부로 사 먹지 못하는 걸 먹고 싶었단 말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다고 일단 고양이인 자신이 사람 말을 써서 의사소통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던 끝에 묘안이 생각났다.
그 남자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나비의 영상을 찍어 올리면서 다른 고양이 채널들도 간혹 보긴 하는 모양이었다. 나비는 자신이 봤던 그 한우 먹던 한남동 고양이의 영상을 봐서 유튜브 맞춤 추천에 뜨게 할 작정이었다. 일단 고양이가 한우를 먹을 수 있다는 것부터 알려줘야 할 것 같다. 분명히 관심이 없어서 모를 거다.
고양이는 일체형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전원 버튼을 눌렀다. 불이 환하게 켜져 고양이의 동공이 세로로 길어졌다. 고양이의 발이라도 키보드 정도는 칠 수 있었다. 그는 PIN 번호 120000을 치고 주인의 컴퓨터에 접속했다.
인터넷 창을 틀어 유튜브에 접속하니 그 남자의 계정으로 자동 로그인이 되었다. 그는 그 한남동 고양이의 한우 먹는 영상만 몇 번이고 클릭하며 재시청했다. 새로고침을 할 때마다 클릭하니 떡 하고 맞춤 추천에 제일 먼저 뜬다.
‘좋았어.’
나는 천재가 틀림없다. 볼 때까지 하면 분명히 볼 것이다. 드디어 한우 먹는 건가. 한우 먹는 고양이가 되는 것인가. 사람도 함부로 못 먹는 한우 1등급 투쁠을 먹는 고양이가!
그렇게 뿌듯해하며 유인하는 인터넷 창을 끄고 컴퓨터도 끄려고 했다. 그리고 문득 아무것도 실행하지 않은 바탕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그대로 있다가 마우스를 조작해 카카오톡을 실행했다. 그 남자의 계정으로 바로 접속이 되었다. 자신의 계정으로 접속해 보기 위해 카카오톡을 튼 것이지만 혹시나 싶어 120000에 00을 더해 쳐보았다.
‘아니, 해킹당하려면 어쩌려고….’
이번에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며 씨름하는 것을 보니 이 남자가 정말 인터넷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훤히 보였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자체는 이번에 처음 접해본 모양이다. 나이도 얼마 안 되는데 어디 절간에서 컸나….
대체로 일만 하고 아니면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시간이 되면 바로 잔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또 일을 했다. 그 남자가 그러는 게 나만 신기한 건가?
어차피 그 남자도 자신의 노예가 되었으니 자신이 그의 카카오톡에 로그인을 하는 게 뭐 큰 문제가 되겠나 싶었다.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자신은 고양이다.
‘권시혁….’
드디어 이름을 알았다. 그의 프로필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채팅 목록을 살펴보았다. 일 관련으로 보이는 많은 메시지들 중 상단에 어째 익숙한 프로필 사진이 보였다. 잘못 본 것인가 싶었다.
‘안정훈?’
홀연히 그 개인톡을 클릭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정말 유인하의 친구 안정훈이 맞았다. 고양이가 되기 직전 유인하와 통화했던 그 친구다.
그때의 불쾌감이 불쑥 치솟았다. 고양이가 되고는 처음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그것도 안정훈처럼 예전에는 자신에게 빌빌거리던 인간이 이제는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모욕감에 떨던 그 기분.
‘이 남자랑 아는 사이라고?’
어떻게? 바로 그 채팅방을 클릭해서 내용을 훑어보았다. 대체로 안부 인사만 오고 갔다. 주로 안정훈이 이 남자에게 형형거리며 친근한 척을 하는 느낌이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친하긴 한 모양이다. 엄마니 뭐니 하는 얘기도 있는 것 보니 집안끼리 아는 사이인 건가. 아니, 걔가 이런 남자랑 아는 사이였단 말인가? 지금껏 그런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이런 남자랑 이렇게 친한 사이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태평하게 산 거네.’
밑도 끝도 없이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스스로가 똑똑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앙심을 품기 시작했다. 단지 자신보다 못해 보이던 상대가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시샘과 질투가 눈을 흐렸다. 왜냐하면 유인하는 권시혁이란 남자가 가진 게 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저택에 사는 사람은 오직 그 남자뿐이다. 그런 그의 수발을 들기 위해 있는 사람만 15명이나 된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운영하는 회사라는 게 대단한 것이 틀림없다. 이 집에, 그가 타고 다니는 차에, 언제나 그를 보필하는 운전기사와 수행 비서들…. 한 사람의 인생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간단하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남자였다.
‘치사한 새끼.’
역시 그런 것이었다. 왜일까? 굉장히 화가 났다. 유인하는 안정훈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알고 있었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나가야 하는 처지. 없는 집구석에서도 혼자만 잘나서, 그치만 자신이랑 다르게 맹하고 착해서 한 수 아래의 만만한 친구. 그래서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지낸 것이기도 했다.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래, 그래서 화가 나는 것이다. 속임수에 당한 기분이다. 안정훈은 도대체 얼마나 있는 집안의 아들일까? 그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보기에만 그저 검소하게 살았을 뿐 대단한 부자였던 걸까? 설마 이 정도는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니겠지? 상상만으로도 분기가 하늘까지 솟는다.
지금까지 그가 대입이든 취직이든 자신이나 다른 사람만큼 불안해하지 않았던 이유를 드디어 안 것이다. 유인하에게 뭐든 갖다 바쳐도 아까워하지도 않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한 푼 한 푼 구태여 따지지 않던 태도도. 이런 대단한 집안과 서로 아는 사이일 정도이니 그도 티만 안 냈지 어마어마한 금수저였던 것이다. 그런 것을 친구들에게는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다.
‘아니야. 이 정도 집안 아들이면 고작 대기업 사원을 하겠어? 집에서 사업을 차려줬으면 차려줬지.’
그래,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안정훈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짜증이 났다. 유인하는 안정훈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라온 사진들을 전부 살펴보았다. 휴가 때면 꼬박꼬박 어디 놀러도 갔다 오는 모양이다. 부모님과 함께 멋진 외국의 해변에서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화목해 보이는 사진이다. 더 배알이 꼴렸다. 화목, 유인하는 사실 화목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
‘팔자 좋네. 이 둔탱이, 자기는 항상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으면서. 내가 힘든 거 보면서 지금까지 얼마나 비웃었을까.’
그래, 고등학교 때도 대학 때도 그랬다. 혼자서 있으면 빠질 것이 없었다. 하지만 가족이나 돈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던 안정훈은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심지어 그는 유인하가 아무리 괴롭혀도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그걸 유인하는 그가 바보 같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유인하에 대해 전부 알고 있었다. 커피 한 잔, 밥 한 끼를 아무렇지도 않게 턱턱 내는 그를 보며 어렸을 때는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게 우습고 만만하다고 생각했고 대학 이후부터는 자신도 호기롭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곤 했었다. 자신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보다 더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그 느낌은 마치 그가 자신의 것을 훔친 것처럼 화가 난다. 그런 모든 것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생각났다.
‘아냐. 마음을 넓게 먹자. 이제는 내가 더 가졌잖아? 그럼 된 거야. 어차피 이 새끼가 가져도 지금 나만큼 가졌겠어? 내가 이긴 거야. 난 한 번도 그 새끼한테 진 적 없어.’
나비의 발이 용케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메신저 앱을 꺼버렸다.
‘역시 정훈이한테는 자랑하고 싶다. 어떻게 자랑하지?’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어떻게 해야 그럴듯하게 자랑할 수 있을까? 다시 카카오톡 창을 열고 그 남자의 계정을 로그아웃하고 자신의 계정으로 로그인했다. 그리고 조금 당황했다. 고양이가 된 지도 한 달이 넘었으니 찾는 메시지가 제법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가장 위에 있는 것은 월세를 내라고 재촉하는 고시원 주인의 재촉 메시지였다. 월세를 내지 않으면 보증금에서 제하겠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 있는 것은 단체톡으로 2차 시험을 준비하는 스터디 모임에서 만든 것이었다. 유인하가 무단으로 불참석하여 유인하를 빼고 새로 단체톡방을 만들었는지 다들 톡방을 나갔다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그 뒤로는 광고 메시지가 있었고 그 뒤에 엄마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밥은 잘 먹고 있냐, 잘살고 있냐, 그런 메시지였는데 유인하가 바로바로 답장을 하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몇 주나 답장을 주지 않았는데도 따로 더 찾는 말은 없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라졌는데 이럴 수가 있어?!’
이런 모욕감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떠올랐다.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자신을 무시했는지. 부모, 형제, 친구들, 고시원 주인이나 앞집 사람, 학원 선생들과 학원생들, 스터디원들 등등. 예전이라면 절대 그럴 수 없었을 텐데.
나비는 다시 그 남자의 계정으로 로그인해서 그 남자가 올린 사진들을 전부 다운로드 받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해서 자동 로그인이 된 계정을 통해 구글 드라이브에서도 사진을 몇 개 골라냈다. 그 남자가 만든 인스타그램에서도 사진을 골라서 다운로드를 받은 뒤 다시 자신의 카카오톡 계정으로 들어가서 프로필을 업로드했다.
이 집은 특히 거실이 무척 아름다웠다. 3층 높이의 천장까지 이르는 창으로 정원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거기엔 아름답고 글래머러스한 소파가 여러 개 있었는데 전부 진주빛으로 빛나는 천으로 마감이 되어 있었고 틀과 테는 전부 고급스러운 황금색이다. 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소파 위에서 석양빛을 맞으며 털을 고르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서로 아는 사이라도 집까지 오는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 손님 오는 걸 본 적이 없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도 아니니까.’
그리고 <내 고양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프로필 메시지를 업로드했다. 나비는 자신의 작은 심장이 마구 쿵덕거리는 걸 느꼈다. 거짓말이 아니다. 진짜였다. 죄책감을 느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찝찝할 것도 없다.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래, 자세하게 설명해줄 순 없지. 이 정도만 하자.’
나비는 여전히 불안하게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느꼈지만 그대로 자신의 계정을 로그아웃했다. 컴퓨터를 껐다. 그리고 서재를 나가 그 남자의 침실로 갔다. 역시 문이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그의 침대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의 얼굴로 다가가 앉았다. 자는 얼굴마저도 무뚝뚝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이제 당신 게 내 거잖아?’
나비는 그의 가슴 위에 올라가 그의 가슴 위에 네 발로 서서 그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서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당신은 이제 날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거짓말이 아니다. 나비는 한참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나비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그대로 그의 가슴 위에 둥그렇게 몸을 말고 누웠다.
*
그 남자는 키도 크고 체격도 큰 훤칠한 남자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거망동하는 법이 없어 언제나 제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인다. 그는 평소의 그 과묵한 얼굴로 복도의 끝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간식을 들고 있었다.
“나비야.”
그리고 그 옆에는 김재민이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다른 갤러리들도 많다. 유인하는 복도를 투명한 랩으로 막아 놓은 것을 발견했다. 보통 사람의 무릎까지 오는 높이다.
‘날 바보로 아나?’
나비는 그걸 훌쩍 뛰어넘어 그 남자에게 가서 간식을 쟁취했다. 별것도 아닌 것으로 사람들이 소란을 피웠다.
“오오, 역시 우리 나비!”
간식을 짭짭 먹으며 그런 인간 노예들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그 남자가 그를 놓고 복도의 반대편으로 갔다. 고용인들이 투명 랩을 더 높은 곳까지 설치했다.
“하악! (짜증나게 뭐 하는 거야!)”
나비는 하악질을 한 번 했다. 다들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양이를 보았다. 나비는 벽의 울퉁불퉁한 부분을 밟고 도움닫기를 하여 랩을 훌쩍 넘어 그 남자에게 가서 다시 간식을 짭짭 먹었다. 고양이의 몸놀림은 참으로 날렵하고 놀랍다.
“진짜 나비는 천잰가 봐요.”
오오, 다들 우러러보는 눈빛으로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는 그런 인간들 따위 관심 없다는 듯이 간식만 먹을 뿐이었다.
“그러게요.”
그 남자가 차분한 어조로 그렇게 대꾸했다. 하지만 쓰다듬는 손길은 분명 기특한 마음을 담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뭐, 가끔은 괜찮나?’
밥값을 한다는 느낌이라면 괜찮다. 유튜브에 올릴 모양이다. 나비는 고롱거리면서 배를 드러냈다. 그 남자가 배를 왕창 쓰다듬어 주었다. 다들 랩을 정리하고 그 남자는 운동을 하러 잠깐 나가고 유인하는 낮잠을 자러 거실로 갔다. 애용하는 스툴 위에 누워 한참 잠을 잤다.
“먀…? (응…?)”
뭔가 맡아본 냄새가 난다. 바깥의 냄새다. 가슴이 두근하고 뛰었다. 눈을 번쩍 떴다. 저번에 다람쥐가 들어왔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물의 냄새가 났다. 일어나 보니 거실에서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이 하나 열려 있었다. 연못의 냄새다.
‘물고기!’
나비는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바깥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바로 스툴에서 뛰어내려 정원으로 나갔다. 전처럼 돌 위로 올라가서 커다란 잉어들을 보았다.
‘물고기!’
이제 좀 컸다. 물고기 따위에게 지지 않는다. 하등한 물고기. 물은 싫다. 하지만 물고기는 좋다. 나비는 오른발잡이였다. 오른쪽 앞발을 들었다. 발톱을 드러냈다.
‘물고기! 죽어라, 물고기!’
찰박찰박! 커다란 잉어의 등을 내려칠 때마다 잉어가 몸부림을 치며 물이 튀었다. 그리고 드디어 잉어 한 마리가 연못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비의 눈이 빛났다.
‘물고기!’
나비는 살아있는 잉어를 물어서 들어 올렸다. 잉어가 원체 커서 무겁다. 꼬리가 질질 끌린다. 거기다 한 번 퍼덕일 때마다 몸이 다 휘청한다. 하지만 다 잡은 사냥감을 버릴 수는 없다. 나비는 물고기를 물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꺅, 엄마야! 사장님! 김 집사님!”
누군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때는 나비도 정신을 차렸다. 뭘 한 것인가.
‘뭐 하려고 먹지도 않는 물고기를….’
입안에서 비린내가 났다. 역할 줄 알았는데… 조금 맛있을 것 같기도 하고. 고양이가 되니 비린 것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해산물 같은 거 원래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운동에서 돌아온 그 남자가 자신의 고양이를 발견했다. 연못에서 관상용 잉어를 잡아서 거실로 돌아온 고양이였다.
“나비야.”
조금 놀란 건가? 무표정해서 놀라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나비는 장난기가 돌았다. 그 남자에게 다가가서 보란 듯이 그 남자의 발 앞에 잉어를 두었다. 그리고 네 발을 모아 앉아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먀. (먹어.)”
고양이의 눈빛이 장난기로 초롱초롱하다. 전에는 보은이랍시고 장난감 같은 걸 방문 앞에 뒀을 때는 썩 신통치 않았던 그 남자였다. 뭍에 나온 커다란 잉어가 한 번 펄쩍 뛰어올랐다.
“먀! (먹어!)”
“…이거 난 못 먹는데.”
역시 고양이 말 알아듣는 거 아닌가, 이 남자.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남자치고는 곤란한 얼굴로 잉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거 그래도 먹는 척해야지 고양이가 안 삐진다던데 진짜일까요?”
그 남자가 진지하게 김 집사에게 물었다. 서재에 고양이 관련 책이 늘어나고 있었고 그에 따른 지식이 늘어나고 있는 권시혁이었다. 김 집사는 당황했다.
“드시게요?”
“아뇨.”
나비는 그 말을 알아듣고 풉 하고 웃을 뻔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웃을 수 없어서 먀, 하고 사악한 소리를 냈다.
“…….”
이 남자는 자신의 고양이를 보고 잉어를 보고 다시 자신의 고양이를 보았다. 그는 잉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을 벌렸다가 한 번 다물며 먹는 척을 했다. 그리고 나비의 얼굴을 봤다. 됐지? 하는 얼굴인가 보다. 그리고 장갑을 끼고 온 정원사에게 잉어를 넘겨주었다.
‘킥킥킥.’
나비는 웃겨서 데굴데굴 구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남자가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유쾌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
“먀아~. (당신 정말 내가 좋구나.)”
기분이 좋아진 유인하는 그의 발치에 몸을 비비며 골골거렸다. 그가 나비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니 나비는 항상 그러듯 그의 턱에 얼굴을 문질렀다. 그 남자가 말했다.
“역시 냄새나네.”
“먀?”
“목욕해야겠다.”
“먀?!”
무뚝뚝한 주인을 조금 놀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비는 결국 냥빨을 당하고 말았다.
*
권시혁은 여느 때처럼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일요일도 역시나 일찍 일어나는 그였다. 어렸을 때부터 규칙적으로 사는 것이 몸에 맞았다. 그가 몸을 일으키니 또 가슴에서 뭐가 굴러떨어졌다. 자신의 가슴 위에 올라타서 자는 걸 좋아하는 나비였다. 어제는 목욕을 시켜서 안 올 줄 알았다.
“냐아!”
이번엔 나비도 깼다. 짜증을 낸다. 동그란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앞발을 잠깐 허우적거렸다. 너무 가벼워서 항상 올라온 줄도 모른다. 일어날 때는 조심한다는 게 자꾸 잊는다.
“알았어. 미안해.”
권시혁은 사과의 뜻으로 고양이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었다. 몇 번 쓰다듬으니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골골거렸다.
“미요오, 냐아. (아, 거기 거기.)”
목과 턱을 쓰다듬어 주니 왼쪽 뒷다리 하나를 까닥거리면서 좋다는 티를 냈다. 권시혁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귀여워….”
이제는 확실히 귀엽다는 게 무엇인지 학습했다. 그건 저도 모르게 자꾸 손이 간다는 것이었다. 만지고 상태를 확인하고 귀여운 것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만족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충동이다.
아침이라 더 귀엽다. 나비는 ‘내가 귀여운 것 이제 알았느냐.’ 하는 얼굴로 권시혁을 올려다보았다. 권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박색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권시혁은 얼른 휴대폰을 찾아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왼손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아주 귀엽다. 흡족한 아침이다.
“먀. 미야아? (한우 언제 사줄 거야?)”
귀엽다면 한우를 바쳐라. 나비는 그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러다 보면 사줄지도 모른다. 아주 가끔은 고양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 그였다. 그 남자는 평소대로 무심한 얼굴로 나비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들어 올려 다시 사진을 찍었다.
“귀여워.”
말이 많은 나비였다. 그 모습도 귀엽다. 그는 이제 아침마다 습관적으로 몇 장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귀여운 것은 널리 알리는 것이 맞다.’
그에게는 이것 또한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실하게 행했다. 그가 일에 성실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충실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이 남자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나비 사진을 보고 귀엽다고 하는 건 자신이 다 뿌듯해서 기분이 좀 좋았다. 신기하다.
이 작고 앙큼한 고양이가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한 그의 마음에서 물장난을 친다. 그런데도 싫지가 않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는 그런 나비의 주인인 자신의 상태에 만족했다. 나비가 주인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원래 별생각이 없는 남자다. 그는 고양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간단하게 씻고 준비를 한 후 고양이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집 잘 지키고 있어. 나갔다 올게.”
그리고 그는 고양이의 뺨에 입을 맞췄다. 얼굴에 닿는 털이 참 부드러웠다. 나비는 캬아, 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앞발로 치지는 않았다. 나비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나비는 그 자리에 앉아 고양이 세수를 했다.
‘아, 무슨 뽀뽀를 하고 난리야.’
주인과 달리 생각도 물욕도 잔뜩인 고양이는 호불호도 심하고 희로애락도 강했다. 그 남자의 뽀뽀 느낌을 지우기 위해 한참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방으로 가서 배를 좀 채웠다. 그 남자가 나가고 나면 전체적으로 청소를 시작한다. 이렇게 큰 집은 아무래도 손이 많이 가긴 하는 모양이었다.
“야옹.”
“어머, 나비야, 왔어?”
나비는 자신이 거느린 노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가 쓰다듬음을 명령했다. 그녀는 그를 무릎에 올리고 쓰다듬어 주었다. 유인하는 오늘은 특별히 꾹꾹이를 해주며 그녀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 거실에서 햇빛을 받으며 털을 고르고 배가 고플 땐 밥도 실컷 먹고 낮잠도 잤다. 우아하게 집안을 한 바퀴 돌며 자신이 가진 것을 느긋하게 구경하기도 했다. 차라도 한잔하면 딱일 것 같다.
‘그럼, TV나 볼까?’
그 남자가 매일 책을 읽는 소파에 턱 앉아 리모컨을 눌렀다. 커다란 액자인 줄 알았던 TV 화면이 켜졌다. TV 정도 켜는 것이야 사람들도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나비가 TV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아니 노예들이 미리 TV를 틀어 놓고 가기도 했다. 요새 인기 있는 드라마가 나오기 시작했다. 극락이 따로 없다. 전이라면 꿈도 못 꾸는 호사가 아닌가. TV를 보며 시간 낭비를 해도 된다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TV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술술 간다. 그는 열중하여 TV를 보고 있어 주인이 다시 돌아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일요일도 성실하게 운동을 하고 돌아온 그가 유인하가 누워 있는 소파에 앉았다.
이제 이 남자도 유인하의 노예 리스트에 등재되어 있기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 비싼 컴퓨터를 깨 먹어도 혼내지도 않는 남자다. 얼마든지 제멋대로 굴어도 되는 것이다. 권시혁이 옆에 와서 소파에 앉아 쓰다듬어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옆으로 누워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가끔 네가 사람 같다니까.”
“…야옹.”
이 둔한 남자가 예리한 말을 다 한다. 뜨끔한 나비는 일부러 야옹 하고 울며 그의 손이 이마를 비볐다. 한쪽 눈을 감으며 야옹야옹 우는 것이 참으로 고양이답다. 권시혁이 손가락을 모아 부리처럼 만들어 몸을 콕콕 찌르며 장난을 쳤다. 나비는 앞발을 휘저으며 그 장난을 받아주었다.
‘어휴, 나이 잘 먹은 남자가 유치하게.’
그걸 받아주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나비였다. 놀아주고 싶으면 잠자리 장난감을 가지고 오란 말이다. 그때 요리사가 부엌에서 나와 권시혁한테 물었다.
“한우 사 오신 거 어떻게 해드릴까요?”
권시혁이 뭔가를 직접 사 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그럴 일이 좀 있었다. 그가 대꾸했다.
“스테이크로 해주세요. 한 팩은 나비 줄 거니까 남겨주세요.”
나비는 권시혁의 장난을 받아주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동공이 좁아지며 눈을 반짝 떴다.
‘동영상 봤구나! 드디어 이날이 왔다!’
*
초보 유튜버이자 SNS 이용자인 권시혁은 유튜브에 올린 나비의 영상을 확인하려다가 맞춤 영상 추천에서 어떤 고양이가 한우를 먹는 영상을 발견했다.
“…….”
나비는 이미 고양이가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고급품으로만 쓰고 있었다. 하지만 보자마자 남의 집 고양이는 한우를 먹는데 우리 나비도 안 먹을 수 없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런 게 분하다니. 내 고양이가 남의 집 고양이보다 못하는 게 있다는 개념이 싫었다. 나는 최고를 안 써도 상관없지만 내 고양이는 최고를 쓰게 하고 싶은 마음이라.
뭔가를 바라는 것도, 그래서 물건을 직접 사는 것마저도 오랜만이다. 그래도 나비한테 준다고 하니 당연하게만 느껴진다. 신기할 따름이다.
카메라를 켜고 한우를 접시에 담아가니 과연, 우리 똑똑한 나비는 카메라 앞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먀~.”
기분이 좋은 얼굴이다. 오늘따라 말도 많다. 고양이면서 이게 좋은 것은 아는가? 아니, 그래서 더 잘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동물은 원래 도리대로만 사는 법이다. 권시혁은 칠이 된 고급 나무젓가락으로 한우 조각을 들었다.
“나비, 손.”
고양이는 강아지처럼 주인의 말에 재깍 반응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귀찮은 짓까지 해야 돼?’라는 얼굴로 한 번 권시혁의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권시혁의 손 위에 작은 솜방망이를 우아하게 올렸다.
“왼손.”
1초가 지나고 턱 하고 왼발을 올렸다. 권시혁은 잠깐 왼발의 젤리를 만지작거렸다. 몰랑몰랑하다.
“앉아.”
1초가 지나고 척 하고 앉았다.
“돌아.”
이번에도 1초가 지나고 스윽 한 바퀴 돌았다. 그런 모습들에 고양이다운 우아함이 있었다. 고양이답지 않으면서 한없이 고양이다운 재주에 나비의 팬들은 난리였다. 역시 뿌듯하다.
실시간 스트리밍 화면에는 노을이 멋지게 비치고 있는 정원의 모습이 훤히 보이는 프렌치 스타일의 창문, 옆에는 천장까지 닿는 흑단 나무로 만든 책장과 각종 고급스러운 장식물, 화분이 보였다. 마호가니 책상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의 옆에는 고급 필기구와 지류가 자연스럽게 비치되어 있었고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도 고급 가죽을 사용한 사장님 의자다.
이 초보 유튜버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키가 크고 훤칠한 남자로 짙은 남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게 고급 제품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시계도 범상치 않다. 원래 진정한 명품은 맞춤 제작이라 제품명도 따로 없다.
그는 어깨가 굉장히 넓고 키도 크며 목이 시원하게 길며 목젖이 뚜렷한 데다가 근육질의 몸과 길쭉한 팔, 큰 손을 가져 남성적인 매력이 크게 있었고 살짝 턱이나 입술까지 드러날 때마다 분명히 미남일 것이라 입을 모아 추측했다. 특히나 목소리가 차분하고 멋있어 집사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채널의 주인공인 고양이 나비는 전~혀 그 가능성에 대해 고려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 남자의 부유함과 얼굴을 숨겨도 드러나는, 흔치 않은 남성적 매력 또한 촌스러운 채널명을 앞세운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계정이 흥하는 요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권시혁은 드디어 나비에게 1++의 고급 한우 치마살을 먹여주었다. 나비는 엉덩이를 붙이고 네 발을 모아 얌전히 앉아 고개를 들고 신선하여 색깔이 아주 선명한 소고기를 냉큼 삼켰다.
“맛있어?”
요새 그렇게 튕기며 앙큼한 짓은 다 하던 나비도 한우를 먹을 땐 얌전하다. 한 조각 입에 넣어주니 몇 번 씹다가 그냥 넘기고 또 달라고 야옹거렸다.
“너무 많이 먹이면 안 돼요, 사장님.”
복도를 지나가던 김 집사가 걱정을 얹어 말했다. 권시혁도 그걸 아는데 잘 먹으니까 안 줄 수가 없었다. 이런 게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단 느낌일까.
“이렇게 잘 먹을 줄 알면 진작 사줄걸.”
권시혁이 말하자 마치 말이라도 알아들은 것처럼 고양이가 눈을 크게 뜨며 야옹, 하고 대꾸했다.
“알았어.”
권시혁은 나비의 조그만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결국 정량의 두 배를 주고 나서야 한우 먹이는 것을 멈췄다.
‘아, 몸이 작아지니까 1등급 투쁠 한우를 배 터지게도 먹을 수 있구나.’
물론 저 남자는 서울 한복판에 이런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니 고양이든 인간이든 한우를 배불리 먹이는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역시 인간 노예는 고양이 하기 나름이다. 꺼억, 하고 트림마저 우아하게 하고 난 나비는 잠깐 그 남자가 그릇을 치우는 사이 컴퓨터 화면을 보았다.
이것도 내 프로필에다 올릴까? 나중에 클라우드 뒤져서 올릴 만한 사진 찾자. 나비는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오늘 밤에 몰래 자신의 카톡 프로필을 업로드할 생각도 했다. 분명히 누구라도 보면 부러워할 것이다. 사진에는 다 담을 수 없는 이 부유함을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 되지 않게 자랑할 수 있을까? 유인하는 잠깐 그런 고민을 했다.
‘내 적성이 정녕 유튜브 스타였단 말인가….’
그리고 그는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일에든 무덤덤하기 짝이 없던 그 남자가 인스타그램에 유튜브 계정까지 개설하더니 자신의 고양이를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물론 전이나 후나 겉으론 달라진 게 없긴 한데…. 유인하도 그 남자가 자신에게 빠지도록 열과 성을 다해 밀당(?)을 했지만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 남자도 언젠가… 무릎을 꿇고 낚싯대를 흔들려나?’
무뚝뚝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낚싯대를 흔드는 그 남자라. 현실감은 없지만 상상이 안 되는 건 아니고…. 고양이의 작은 머리통 안에서 무표정한 남자가 성의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를 태도로 낚싯대를 흔들고 있었다.
나비는 속으로 킥킥 웃고는 다시 유튜브 화면을 확인하고 감탄했다.
‘고시가 아니라 진짜 유튜브를 했어야 했다.’
백만은 금방이겠는데? 역시 나의 미모 덕분이다. 고양이가 한우 먹는 것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 이 한남동 어디 산다는 이웃집(?) 고양이가 한우를 먹던 것도 5백만 뷰가 넘긴 했다.
‘솔직히 걔보단 내가 더 어리고 예쁘지!’
훗…. 그런 양아치 같은 멍청한 고양이보다 더 유명해지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모르긴 몰라도 이 미모와 빛나는 지성이 합쳐진 고양이가 이 세상에 나비 빼고 어디 있겠는가. 이 사람들을 봐라. 카메라 앞에서 나비가 오른발을 들면 그것대로 난리가 났고 왼발을 들면 또 그것대로 난리가 났다. 고양이의 입장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가소로운 존재인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게다가 인간 출신 고양이 나비는 똑똑할 수밖에 없었다. 손이면 손, 발이면 발, 못 하는 게 없었고 카메라 앞을 벗어나는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개처럼 허둥지둥하지 않고 느긋하고 요염하니 귀엽다.
고양이는 발로 키보드를 탁탁 쳤다.
<ㄲㅇㄹㅇㅁㅊㅎㄴㅇㄷㅇ>
그러니 실시간 채팅창은 또 난리가 났다. 나비님이 알고 저러는 것이 분명하다, 나비님은 천재다, 배운 고양이, 등등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비야, 네가 친 거야?”
권시혁은 그릇을 부엌에 두고 돌아와서 그렇게 물었다. 고양이는 모르는 척 키보드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하여튼 자신의 고양이지만 정말 놀라운 고양이다. 그는 고양이를 두 손으로 안아 들어 눈을 마주쳤다.
“진짜 네가 한 거야?”
“먀. (그럼 내가 했지, 누가 했겠냐.)”
“역시 우리 나비.”
권시혁은 나비의 입에 거리낌 없이 입을 맞췄다. 여전히 무표정하긴 한데. 과연 몇 주 전까지 고양이 같은 것엔 관심 없다는 듯 본체만체도 하지 않던 그 무뚝뚝하고 거만한 남자가 맞나 싶다. 고양이는 그의 얼굴을 솜방망이로 잡았다.
‘헹! 내가 그렇게 좋단 말이지?!’
그는 고양이를 다시 카메라 앞에 내려놓았다. 의기양양한 기분은 들었지만 아무래도 이 남자에게 뽀뽀를 당하는 건 기분이 이상하다. 고양이는 카메라 앞에서 고양이 세수를 했다. 역시 가소로운 인간들이 활자로 환호성을 질렀다.
유튜브 채널 <나비네>를 시작한 지 2주일 정도 흘렀다. 나비는 도저히 이 남자의 촌스러운 네이밍 센스를 참아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미 인기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소유하고 있었고 첫 번째 영상이 대궐 같은 저택의 마당에서 강아지용 어질리티를 하는 영상이라 첫 영상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물론 그 강아지용 어질리티는 여전히 정원에 설치되어 있었다. 전문 훈련사까지 불러서 가르쳐주었다. 집에서 장난감 가지고 노는 것보다 훨씬 재밌었다.
‘돈 많은 남자라 아주 시원하게 잘 지르던데?’
이 많은 돈을 가지고도 별로 쓰는 꼴을 못 봤는데…. 이 남자, 젊고 잘생겼지, 잘은 모르지만 이 나이에 이런 집까지 있는 무슨 사장님이라지, 남 부러울 것 없고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졌을 것 같은데 매일 하는 짓이라고는 일일일. 거기다가 매사 웃는 법이 없어 딱딱하고 무뚝뚝하게만 보여 이런 남자가 암만 재산을 쌓아놓은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는데, 그게 다 언젠가 고양이(나)에게 갖다 바치기 위한 것이었나 보다.
<ㄱㅇㅇㅁㅅ>
타다다닥. 나비는 다시 타자를 쳤다.
“나비야, 그거 알고 하는 거야?”
잠깐 사람이 자리를 비웠는데도 주인공인 나비가 가운데 떡 앉아 있으니 이미 채팅창은 <고양이 만세>로 가득했다. 누군가 후원금과 함께 메시지를 보내자 노랗게 표시가 되었다. 권시혁이 그것을 읽었다.
“‘나비는 사람 말 아는 게 분명합니다. 한국에 있을 애가 아닙니다. 세계고양이협회 이런 데….’ 제가 한국에 있기 때문에 나비도 한국에 있어야 합니다.”
이런 거 해본 적이 없는 남자가 분명했다. 농담을 못 알아듣는다. 나비는 ‘먀?’ 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진짜 못 알아듣는 거냐. 다시 후원금과 함께 나비가 몇 살이냐는 질문이 올라왔다.
“처음 발견했을 때 3개월쯤이라고 했으니까 이제 5개월쯤 됐을 겁니다. 아, 유튜브 왜 시작했냐구요. 나비가 너무 똑똑해서 혼자만 보기 아깝더라구요.”
그래도 제법 이야기가 잘 오갔다. 그는 분주한 채팅창을 어렵게 읽다가 뭔가를 보았다.
“땅콩? 땅콩 수확이요? 그게 뭔가요?”
헛! 나비는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채팅창을 보았다. 채팅창에는 역시나 쓸데없이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인간이 있었다.
“아, 중성화요. 아직 어려서…. 해야 한다 만다 말이 많더라구요. 웬만하면 나비한테 칼 대고 싶지는 않은데….”
“먀! (절대 싫어!)”
“그래, 그래.”
권시혁은 애늙은이 같은 태도로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천재 고양이 나비에 대한 호구 조사가 이뤄지다가 점점 이 남자에 대한 질문도 많이 올라왔다.
“저요? 회사 다닙니다. 일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나비 덕분에 요새 인생이 행복합니다.”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그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서 진심이 느껴졌다.
‘뭐야, 진짜….’
사고도 많이 쳤는데…. 유인하는 고양이가 된 이래 처음으로 괜시리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이 남자가 자신의 인간 노예 1호라지만… 쑥스럽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떨어지자 다시 그 손에 재빨리 다가가 이마를 치댔다. 그는 다시 머리부터 꼬리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짜릿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골골골골 소리를 내며 발랑 드러누웠다. 스트리밍이 끝날 쯤엔 해가 지고도 한 시간이 지났다. 권시혁은 나비를 들고 일어났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읽던 책을 들고 거실로 갔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양이를 자랑하기 위해 사진과 영상을 올렸다고 하면서도 그게 단 1명이든 몇십만 명이든 크게 차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도 덤덤했다.
원래 가진 게 많은 남자라서 그럴까? 그래서 이토록 마음에 여유와 무게가 있는 것이라면 나비는 진심으로 그가 부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솔직하게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부정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 감탄에 가까웠다.
정원에는 정원을 볼 수 있도록 고즈넉한 불빛이 군데군데 켜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한쪽 무릎에 고양이를 올리고 쓰다듬으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훌륭한 고양이 집사가 되는 법>이라는 책이다.
‘난 원래 사람인데.’
라고 생각하는 고양이가 책갈피의 고리에 냥냥펀치를 날리면서 생각했다. 곧 흥미를 잃었다. 고양이는 주인의 손길이 기분 좋아 한동안은 고롱거리며 자세를 잡고 있다가 이내 그의 손을 툭툭 치며 장난을 쳤고 그 뒤엔 그의 가슴을 타고 올라가 그의 턱에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
“그래.”
그는 책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대로 고양이를 한 팔로 품에 안고 쓰다듬으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귀신같이 잘 시간에 맞춰 책을 덮었다. 그 뒤에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까.”
그제야 그는 자신의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잠깐 고양이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애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침실로 갔다. 그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은 작은 고양이의 등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고양이의 그릉거리는 소리가 더 커지고 있었다.
‘아앙~, 너무 기분 좋아~. 거기…!’
정말 다른 사람은 안 그런데 이 남자의 손은 무슨 마약이라도 발라 놨는지 너무 기분이 좋다. 책을 읽을 때도 한참 만져졌지만 책을 놓고 자신에게 집중하니 더 기분 좋았다. 침대에 내려놓아졌을 땐 세차게 울면서 그를 따라갔다.
“잠깐만. 씻고.”
나비는 욕실 문 앞에서 계속 야옹거리며 울었다. 문에 스크래치를 하기도 했다. 그는 빨리 씻고 나왔다. 그가 다시 나비를 안아 들었다. 그가 웃었다.
“잠깐 씻는 것도 못 기다려?”
이 남자가 웃다니. 웃는 소리 처음 들었다. 고개를 얼른 들었지만 그의 웃는 얼굴은 이미 가버렸다. 나비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그의 손가락을 살짝 물었다.
“왜?”
만지려고 하니 자꾸 깨물기만 해서 그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사람 말을 알아들어도 사람 말을 할 수는 없는 나비는 다시 웃어 보라는 의사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자신의 고양이가 웃어 보라고 하면 이 무뚝뚝한 남자는 기꺼이 다시 웃어주지 않을까?
그 남자는 불을 끄고 침대로 올라갔다. 헤드등만이 주홍색 불빛을 냈다. 주황색 고양이가 더 주황색으로 보인다. 그는 고양이를 자신의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옆으로 누워 자신의 머리를 괴고 지그시 서로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을 잠깐 가지더니 또 뽀뽀를 했다.
“사랑해.”
권시혁이 말했다. 말한 본인도 고양이의 얼굴에 입을 맞춘 채로 한 번 눈을 떴다. 놀란 것이다. 이런 말을 한 것은 태어나 처음이다. 나비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가슴이 간질거렸다. 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다가 불쑥 튀어나온 말이 이것이다.
‘사랑한다는 게 이런 건가.’
사랑한다는 말은 일종의 맹세였다. 앞으로도 널 보살펴주겠다는, 그러면서 동시에 이대로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는 요구이기도 했다. 심지어 상대는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는 동물이다. 권시혁이 내쫓지 않는 이상 집을 나갈 수도 없다. 소유욕인 것이다.
[너 같은 건 사람도 아니야.]
[당신 같은 아이를 보고 부처라 했겠지요.]
결국 자신도 인간이었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어떤 식으로 이름을 붙이든 알맹이는 바뀌지 않는다. 그들의 말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욕망을 느끼는 순간 그들의 말이 생각나는 것을 보면 역시나 자신도 다른 인간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존재였다.
생각하는 만큼, 시간을 들이는 만큼, 소중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만큼 애정이 생기고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그게 누가 봤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미물일 뿐이더라도.
‘상관없어.’
이렇게 소중한 것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소중한 것이 생기는 것이야말로 고통의 근원이라 말하던 사람도 있었다.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비난하던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말들은 당시 어떤 실재도 가리키지 않는다. 말일 뿐이다. 운명처럼, 다가오면 거부할 수 없다. 원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만이다. 순리대로 복종하는 것이 언제나 옳았다. 권시혁은 입술을 떼고 한 번 더 나비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헤드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고양이는, 그러니까 나비는 그대로 우뚝 앉아서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보고 있다가 어둠 속에서 이제 눈을 감고 있는 그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진짜 이상했다.
이 두 달, 사람일 때도 받아 보지 못한 갖은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런 대저택에, 모시는 사람만 십 수 명이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아무리 제멋대로 굴어도 혼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혼내기는커녕 사고 치는 것마저 다들 좋아하고 자신을 사랑해준다.
심지어 매일매일 그저 묵묵히 일만 하던 이 남자마저도 이제는 자신 때문에 인생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어봐서 그럴까?
‘기분 진짜 이상해….’
문득 인간이었던 옛 기억을 떠올렸다. 2달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로 유인하라는 인간이 고양이가 된 것인지 아니면 고양이 나비가 인간 유인하였다고 착각한 것뿐인지 구분이 안 된다.
보상을 독촉하지 않는 사랑,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이런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그 사랑을 받고 나서야 알았다.
나 때문에 행복하다는 이 남자의 말이 기뻤다.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좋아서 털이 곤두섰다. 심장이 뛰었다. 조금 울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나도 당신이 좋아.’
무뚝뚝하고 무표정하고 인터넷 같은 거 할 줄도 모르고 네이밍 센스는 최악에 일중독에다가 좀 애늙은이 같지만.
고양이로 변한 것은 유인하 인생 최고의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이런 집에서 이런 호사도 누리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잔뜩 생기고 그 누구도 자신을 한심하게 보지 않는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해주었다. 여기는 따뜻하고 밝고 행복한 곳이었다. 유인하가 언제나 속하길 바라던 그런 곳이다.
벌써 두 달이 흘렀다. 이제는 누군가 알아차리고 자신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런 구질구질한 기억은 역시 꿈이나 환상인 게 틀림없었다. 자신은 처음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고양이인 게 나았다.
‘그땐 항상 외로웠어, 항상…. 아무라도 좋은 게 아니야. 그래서 혼자였어. 당신도 그런 거지? 그러니까 내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거야. 내가 필요한 거야. 나도 당신이 좋아. 당신 고양이로 평생 살고 싶어. 당신이 좋아. 당신이 좋아….’
나비는 주인의 뺨에 이마를 비볐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등을 대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2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