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죽이기 1부 1권
How to Kill a Cat
1. 고양이가 된 고시생
그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개처럼 유난을 떨지도, 비굴하게 굴지도 않았다. 우아하고 품위 있고 예쁘다. 커다란 눈이 구슬처럼 아름답다. 쫑긋한 귀와 발이 말랑말랑하다. 북슬북슬한 털은 너무나 부드러울 것 같고 야옹, 하는 소리는 귀가 다 간지럽다. 알 수 없는 엉뚱한 행동도 예쁜 아이의 어리광처럼 귀엽게만 보일 뿐이다.
하고 싶은 것은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는다. 종일 먹고 자고 자신을 치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고양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특별히 호기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애정을 바라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모든 것이 편안하고 느긋했다. 고양이는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딱히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애완동물 같은 것의 수발을 드는 것은 더더욱 질색인데도 이렇게 고양이 동영상을 보게 되는 것은 왜일까.
‘왜긴 왜야. 현실도피지.’
시간 낭비만큼 한심한 짓도 없다. 유인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영상이 끝날 때까지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끝나는 시간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초조함을 느꼈다. 영상이 끝나면 공부를 해야 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고양이가 뭐라고. 귀여운 거 하나로 먹고사는 것뿐인데.’
그가 자주 찾아보는 유명 유튜브 채널의 고양이가 화면 속에서 최고급 한우를 맛있게 먹어 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한우 같은 건 먹어본 적도 없었다.
‘그럼 내 인생은 고양이만도 못한 인생인가.’
연이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은 보통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학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이 아닌가. 주인에게 사랑받는 고양이를 볼 때마다 요상한 평안을 느끼던 마음이 별안간 암기에 찔린 듯했다.
머릿속의 계산기가 저절로 돌아갔다. 이 고양이 유튜브 채널은 몰라도 1년에 수억은 벌겠지? 이 고양이는 자기 밥벌이뿐만 아니라 자기가 거느린 인간 식솔들도 전부 먹여 살리고 있었다. 제 한 몸도 아직 건사하지 못하는 유인하는 분명 이 고양이보다 못하다.
사람을 상대로 해도 자존심이 상할 생각을, 고양이를 상대로 하고 있었다. 그것도 쪼잔하게 일일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숫자까지 따져가면서. 죄도 없는 고양이에게 배신감마저 들었다. 지금까지 나름 순수하게 고양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인하는 방금 한 사고 자체를 부정하려고 했다. 스스로 했다고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 반발심으로 생각했다.
‘나도 고양이 하나 기르면 되지.’
유튜브를 하는 것이다. 요즘 중학생들이 가장 가지고 싶은 직업 1위가 유튜버라고 한다. 그냥 예쁜 새끼 고양이를 하나 사서 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리기만 해도 돈을 번다는 것이다. 이 유튜버를 봐라. 얼마나 쉽게 돈을 버는가. 고작 이런 걸 자신이 못할 리가 있는가. 그렇게 상상을 부풀리다 보니 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그럼 다른 사람들한테 뭐라고 하지?’
그러자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짜증이 났다. 아직 누군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기는커녕 고양이도 없다. 그런데도 이미 모두에게 패배자 취급을 당한 느낌이었다.
‘아니야, 패배자.’
유인하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마저 부정했다. 스스로를 꾸짖었다. 마치 자신을 노려보듯 정면을 노려보았다. 아무도 내게 감히 그딴 말을 지껄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나조차도. 이건 절대 내 최선이 아니었다. 더 할 수 있다. 유인하는 그렇게 믿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앉아 있는 낡은 고시원의 책상은 칸막이가 충분치 못해 양쪽으로 마분지를 여러 장 덧대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안쪽으로 온갖 메모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보통은 시험에 나올 중요할 부분이 적혀 있었고 가끔은 동기부여가 되는 문구를 적어 붙여 놓기도 했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줄을 긋지 않은 부분을 찾기가 더 힘들다.
‘올해는 분명히 될 거야. 되기만 하면…. 돈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돈은 하나도 안 중요해. 돈으로만 치면 이 고양이보다 못한 사람 천지야.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지. 아니, 다른 사람들은 더해. 다른 사람이랑 비교하지 마. 공부하자, 공부.’
고양이 영상을 끄고도 집중력을 잃어 벌써 1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그래도 보통은 30분 선에서 끝나는데 오늘은 심했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젠장….’
유인하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러자 독서실의 누군가가 으흠! 하고 헛기침을 냈다. 유인하는 잠깐 고개를 돌려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찾았다. 눈빛이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워졌다. 그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나오는 한숨을 겨우 참았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많은 부정적 감정에 뒤이어 불안이 찾아왔다.
‘올해도 안 되면 어떡하지?’
작년 2차 시험에서 한 과목이 0.5점 차로 과락을 맞아 전체 점수가 합격자 평균을 넘었는데도 탈락하고 말았다. 아는 사람들은 너무나 아깝다고, 대단하다고, 합격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합격은 아니었다.
떨어진 것이 처음도 아니다. 성적이 많이 올랐으니 기뻐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작 0.5점이었다. 과락이었다. 그게 너무나 화가 나고 억울해서 올해는 마음잡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0.5점.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그게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하느냐는 말이다. 그 과목에서 0.5점만 더 맞았어도 여기서 또 이러고 있진 않았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에 조금만 더 보고 들어갔다면. 다시 시험을 볼 수 있다면. 그때 한 단어만 더 적었다면.
분명히 억울한데, 억울한 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불안이었다. 이런 불안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보다 더 최악의 상황에서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래서 유인하는 자신이 왜 이런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스스로에게 아무리 된다고 말해도, 그렇게 믿게 만들려고 해도 한 번 들기 시작한 의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시험에 도전한 많은 사람 중 적지 않은 수가 10년, 20년 계속 시험에 매달리거나 혹은 정신병자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라고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유인하도 분명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5년. 확신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안 될 일에 5년이나, 아니, 대학까지 합쳐 10년이나 쏟은 것인가. 그 의문을 마주하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의문이 솟아올랐다.
이유도 없이 이번 시험도 안 되면 어쩌나 불안하고, 그래서 내년도 지금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싶다. 그러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아냐.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올해는 될 것이라고,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도 생각의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윽박질렀다.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해, 이 병신아! 공부하라고!’
아무리 자신을 질책해도 고작 그 ‘0.5점’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허벅지를 손으로 꽉 쥐었다. 분명히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문제는 요새 아무리 해도 원래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어젯밤 정확히 언제 잠들었는지 떠올려보려는 것처럼. 결국 생각 전환에 실패했다.
‘젠장.’
기분을 크게 잡쳤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오랜 고시 생활의 낙이었던 고양이 동영상마저 이렇게 자신을 괴롭힐 줄이야. 속이 부글부글했다.
‘뭐 좀 먹자.’
배가 고파서 이러는 것이다. 배가 차면 다시 힘이 날 것이다. 유인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것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중구난방으로 남발하고 있었다.
유인하는 후드를 푹 눌러쓴 채 책상에서 일어났다. 독서실에는 책상이 주르륵 이어져 있었다. 불이 켜진 것도 있었고 꺼진 것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는 것인지 좌절한 것인지 책상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떤 사정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독서실의 게시판에는 몇 안 되는 공지사항보다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의 쪽지가 더 많이 나붙어 있었다. 책장을 살살 넘기라든가, 펜을 딸깍거리지 말라든가, 발걸음 소리를 조심하라든가, 지퍼는 밖에서 내리고 들어 오라든가, 코를 훌쩍거리지 말라든가, 심지어 커피를 매일 사 들고 들어오지 말라는 쪽지도 있었다. 상대적 박탈감이 든다나.
그렇게 독서실을 나섰다. 낡은 건물들과 어두운 안색의 사람들. 이 거리에선 언제나 가난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독서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시 식당을 찾아갔다. 5천 원짜리 식권만 내면 양껏 먹을 수 있는 식당이다. 좀 비싸긴 하지만 평소엔 이만한 식당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입맛이 쓰다. 아까 보던 고양이는 최고급 한우를 먹지 않았던가.
‘아니야.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봐. 고양이한테 한우를 먹이는 그 인간이 사치스러운 거야. 개념이 없는 거지. 세상에 못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돈으로 차라리 못사는 사람들을 도와라.’
그 유튜버는 말하는 것만 들어봐도 무식하고 천박한 티가 팍팍 났다. 그걸 보는 사람들이 고양이나 보고 좋아하는 거지….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이 고양이 먹이는 영상이나 찍어서 밥벌이하는 데서 이미 답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굳이 최고급 한우 같은 물질을 앞세워 그런 얄팍한 자신을 포장하려고 하는 것이다.
유인하는 합격 하면 작게라도 꼭 자신처럼 가난한 집 출신에 똑똑하고 노력하는, 그런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돕겠다고 결심했다. 합격만 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간단하게 자신이 그 유튜버라는 사람보다 훨씬 우월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만으로 그는 사치스럽고 개념이 없는 사람이고 자신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남을 도울 생각부터 하는 선인이 되었다. 실제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전의 유인하는 이런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 사고방식의 인간들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스스로 인지할 수 없는 건 고칠 수도 없다. 그래서 자꾸 그렇게 정신승리를 해나갔다.
‘그래, 날 위해서만 합격해야 하는 게 아니야. 돈 때문에 하는 거 아니잖아. 돈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야. 합격만 하면…. 합격만 생각하자.’
0.5점. 그건 자신이 이미 합격선을 넘은, 자격을 갖춘 자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1년 더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냐 아냐. 그 생각은 그만해. 지나간 일이야. 올해는 될 거야.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이제 고양이 동영상도 끊자. 공부만 해야 돼. 공부만 하면 돼.’
유인하는 세뇌를 하듯 몇 번이고 합격에 대해 생각했다. 합격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다. 합격만 하면…. 그러기 위해선 많은 걸 참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참을 것이다. 공부만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고시 식당에 도착한 유인하는 식권을 한 장 내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식권이 두 장 밖에 남지 않았다. 안 먹고 살 수는 없으니 당연히 사야 하는데도 선뜻 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식권이 줄 때마다 답답하기만 하다.
일주일 전 여기보다 더 저렴하던 고시 식당이 폐업하여 25만 원이나 떼먹히고 난 후부턴 식권은 10장씩만 샀다. 떼먹힌 돈을 언제 받을지 모르니 끼니를 줄여 여기서 하루 한 끼만 배가 터질 만큼 먹고 갔다. 돈을 떼먹은 그 쓰레기의 행방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 인간쓰레기도 경찰도 전부 무능하기만 해서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피해자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고 대책을 세우려고 했지만 다들 공부가 급해 결국 유야무야되었다. 한동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인하에게도 그것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이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야속하게도 배가 고프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분하고 이제는 비참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작년에 합격했어야 했던 자신이 이런 서러움까지 느껴야 한다는 게 너무나 억울하고, 그래서 다시 분노했다.
하지만 오늘은 영 이상하다. 유인하는 분명 지금 배가 터질 정도로 먹고 있는데도 벌써 서러웠기 때문이다. 속이 여전히 부글부글하다. 더 많이 먹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밥이 속에 안 들어가서 화가 났다. 공부도 제대로 못 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효율이 하나도 나지 않고 있었다. 자신마저 이러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젠장….’
게다가 오늘따라 외롭기는 왜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긴 왜 이렇게 쓸쓸한지. 세상 기댈 곳은 하나도 없고 혼자만 오도카니, 밝고 따뜻하고 정상적인 사회에서 유리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나만’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올해는 꼭 합격할 거야. 올해는 합격하는 게 당연하잖아.’
누군가가 필요했다. 위로해줄 누군가. 넌 합격할 것이고 전부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줄 사람. 그러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 유인하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런 사람은 이제 한 명밖에 없었다.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둘 다 유인하와 동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유인하는 전교 1등, 그는 2등이었다. 욕심이 없어 평범한 회사에 들어갔지만 적어도 공부가 뭔지 조금은 알고 유인하에 대해서도 잘 알아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옛날에는 그가 뭘 해주든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원래의 유인하는 그런 걸 일일이 따지는 성격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앞으로도 어디 가서 한턱 쏘겠다는 말을 호기롭게 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자신을 위축시키는 게 너무나 싫었다. 천하의 유인하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합격할 때까진 누구도 만나지 말자고 다짐한 상태였다.
‘전화 정도는 괜찮겠지.’
그래서 조금 망설였지만, 결국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언제나 유인화의 전화를 빨리 받았다. 유인하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꾸몄다.
“어, 야, 뭐 하냐.”
-인하야~, 진짜 오랜만이다. 나? 이제 퇴근했지. 잘 지냈어? 지금 뭐 해? 밥 먹었어?
친구는 너무나 반갑다는 목소리였다. 그의 말투에 혹여나 다른 사람들처럼 꺼려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있을까 면밀히 살폈지만 그런 건 없었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병신 같은 새끼.’
유인하는 자신에게 친절하고 호감을 표하는 그를 ‘병신 같다’고 생각했다. 고시 생활을 오래 하는 친구를 꺼려하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차라리 이해가 된다. 역시 이 새끼는 안 변하는구나 싶어 안도가 되었고 동시에 이런 새끼 밖에 자신에게 안 남았다는 것에 짜증이 났다. 벌써 괜히 전화했나 싶다.
“그냥 그렇지, 뭐.”
-1차는 잘 봤어? 아, 합격자 발표 났겠네.
“1차는 쉬우니까.”
-1차에서도 얼마나 많이 떨어지는데. 대단한 거지. 올해는 꼭 될 거야. 네가 안 되면 누가 되겠냐?
왜일까. 분명히 이런 말을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을 텐데 무조건 될 거라는 그의 말에 오히려 짜증이 났다.
“안 되면?”
유인하는 까칠하게 툭 쏘듯 말했다.
“네가 먹여 살려주기라도 하게?”
-그럴까?
“병신 새끼.”
지네 집이나 우리 집이나 피장파장인데 얼마 되지도 않는 자기 월급을 몇 사람이 갈라 먹으란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가 고작 그런 처지에 만족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날 뭘로 보고? 농담에도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다.
-공부 잘 안 돼? 많이 힘들어?
유인하는 절대 약한 소리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전화를 걸기 전부터 마음먹었었다. 잠깐 얘기만 하자고, 어차피 고시 생활의 고생 같은 건 같은 고시생이 아니면 잘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같은 처지의 고시생끼리 암울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허무하고 한심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괜히 전화했다는 생각은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생각했는데도, 얘만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친구도 없었다. 그는 어차피 어려운 일이나 힘든 일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조금은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여전히 별로 자기 성에 차지 않는 사람밖에 자신에게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냥… 나도 다른 애들처럼 의전이나 로스쿨 갈 걸 그랬나 싶어서. 그랬으면 지금 벌써 돈도 벌고 했을 거 아냐.”
-그것도 쉬운 건 아니잖아. 성우도 2년 하고 의전 갔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니 그것도 일리가 있다 싶으면서도 그래서 또 발끈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게 내가 준비하는 고시보다 어려울 리가 있냐, 그 새끼하고 내가 같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겨우 억눌렀다. 유인하는 반찬을 우걱우걱 입에 넣었다.
“너같이 그냥 회사 들어갔으면 지금 연봉이 얼마냐.”
-그래, 그렇겠다.
그가 순순히 인정해주니 더 울컥했다. 그래, 그러니까 말이다. 그냥 졸업할 때 얘처럼 눈을 낮춰서 회사에 들어갔다면 지금 이렇게는 안 산다는 것 아닌가.
‘내가 돈 때문에 구질구질하게 구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부글부글하다.
“지금 의사나 뭐 하고 있는 애들 옛날에 다 나보다 못 나가던 새끼들인데…. 요샌 진짜 자존심 상해서 못 살겠다.”
이런 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말하다 보니 1년 동안의, 아니, 고시 생활 동안 끌어모은 억울함이 솟구쳤다.
자신은 이런 처지로 이렇게 살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만큼이나 떵떵거리면서 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들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는가. 아니, 예전엔 어딜 가도 그들보다 더 대접받았다. 언제나.
유인하가 바라는 것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다. 유인하는 그저 남들만큼만 살고 싶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면 남들보다 ‘약간만 더’ 잘 살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그 정도 자격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자신만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된 것일까. 열심히 산 것도 죄란 말인가.
유인하는 자신의 식판을 노려보며 눈물을 참으려고 노력했다. 지금 청승맞게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도 화가 난다.
-누구?
친구가 물었다. 유인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뭐가?”
-누가 너보다 못 나갔는데?
“뭐?”
유인하는 이미 이때 당황했다.
그는 유인하에게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어렸을 때의 그는 유인하의 숭배자 중 첫 번째로 꼽히는 놈이었다.
-너 힘든 건 알겠는데, 우리 친구 아냐?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솔직히 네가 얼굴만 반반하지 잘 나가긴 뭐가 잘 나갔어? 우리 중에서 제일 흙수저에 쥐뿔도 없으면서. 지금도 그냥 고시생이지 벌써 네가 판검사야? 아니,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남들 무시하는 거 웃긴데, 넌 백수 주제에 왜 입만 떼면 자꾸 열심히 사는 사람을 무시해? 너만 사는 거 힘들고 너만 잘났어?
“…….”
유인하는 충격을 받아 아무 대답도 못했다. 예전이라면 그가 ‘감히’ 자신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화를 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새끼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는 것이 괘씸했다. 그는 유인하가 울라면 울고 웃으라면 웃던 그런 인간이었다. 병신이란 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이런 식으로 말대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끼마저도!’
지금까지 자신을 뭐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것도 모르고 이것저것 떠든 것인가. 치욕감에 머리털까지 솟는 느낌이다.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는데도 반박하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고 자존심 상하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한 편으로는 마치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 연락할 때마다 자꾸 애들 무시하는 거 이제 못 들어주겠다. 나한테만 그럴 땐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다른 애들 얼굴 볼 때마다 내가 다 미안하다. 우리 친구 아냐? 우리는 너 고시 오래 한다고 무시한 적 한 번도 없는데 넌 왜 우리 무시해? 이해가 안 된다.
착하다는 건, 아니, 대외적으로 착하다는 평을 가진 사람이 예전의 사정을 잊어버린 척 맞는 말만 하면 묘하게 반박하기가 힘들다. 유인하는 발끈했다. 현재 자신보다 사정이 나은 놈이 자신보다 도덕적으로도 우월한 척하는 게 아닌가.
“야, 너 왜 이래? 미쳤어? 내가 언제 그랬다고. 웃기네, 이 새끼가.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언제 애들 무시했다고 그래? 내가? 널? 피해망상 있냐.”
입을 다물면 모든 말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유인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런 타격도 없는 척 선을 그어 말했다.
-하아…. 그래, 괜한 말 했다. 그냥…, 그래, 인하 너도 힘들어서 그렇겠지. 오늘은 내가 잘못했다. 마음 쓰지 말고 하던 거 열심히 해. 끊는다.
먹고 죽을 돈도 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에 나이는 먹을 만큼 먹고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한 날백수 주제에 성격마저 꼬일 대로 꼬인 한심한 인간.
그게 다른 사람이 보는 자신일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새끼마저도? 유인하는 전화를 끊고 눈을 크게 뜨고 식판을 내려다보았다. 당장 박차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이걸 마지막으로 오늘은 굶어야 했다. 그래서 나갈 수가 없었다. 그게 어찌나 모멸감이 들던지….
유인하는 어차피 비슷하게 피폐한 다른 이용객들이 자신에게 신경을 쓸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니, 지금 친구와의 대화가 옆 사람에게 들리기라도 했다면 그들은 대놓고 비웃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들은 건실하게 제 몫 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고시한다고 유세 떨지는 않는다. 남들 눈에 그게 어떻게 보일지 정말 모르나? 병신이냐?
너무 분해서 손이 다 떨린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데 그게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그것도 그런 새끼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깔보더라도 그 새끼는 그러면 안 됐다.
남들 보지 못하게 얼른 눈을 비비고 수저를 다시 들었다. 설거지를 빠르고 용이하게 하기 위해 식판으로 쓰는, 직경이 30cm도 되지 않는 하늘색 플라스틱 접시였다. 김치물이 들어 누랬고 그 위엔 밥이고 반찬이고 구분 없이 잔뜩 쌓아 얼핏 봐선 개밥이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진짜 너무 서러웠다. 자신의 처지가. 이 모든 게.
‘난 개가 싫다고.’
그는 결국 통화 이후로 한 숟갈도 뜨지 못하고 그대로 음식을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갈 수 있는 곳이 2평도 안 되는 고시원 쪽방 말고는 없었다. 지금은 죽어도 그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유인하는 편의점으로 가서 소주 한 병을 샀다.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을 끊임없이 계산했다. 언제부터일까. 단돈 몇천 원도 마음 편히 쓸 수 없어진 게. 기억나지 않았다.
“살다 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정훈한테 무시를 당하네, 내가…. 개새끼….”
편의점을 나와 봉지로 술병이 보이지 않도록 한 채 인적이 드문 신림동 언덕길을 오르며 술병으로 나발을 불었다. 소주도 한 병밖에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취하려면 빨리 마셔야 했다. 그는 순식간에 소주를 마시고 소주병을 아무 데나 버렸다.
캭, 하는 소리가 났다. 뭐가 소주병에 맞은 모양일까. 평소라면 조금쯤 미안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돌아보지도 않았다.
유인하는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터벅터벅 걸었다. 이렇게 느리게 걸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해가 지니 공기가 더욱 쌀쌀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다고 무거운 패딩을 벗고 나온 것마저 한심하게 느껴졌다.
언덕길을 3분의 1쯤 올랐을 때 취기가 확 돌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는 게 기분 좋은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둔해지는 기분이다. 생각도 행동도. 안 그래도 빛을 못 봐 하얀 그의 얼굴이 취기에 붉어져 있었다.
정말 이대로 아무것도 안 되면 어떡하지?
1점 차든 0.5점 차든 불합격은 불합격이었다. 그런 것에 매달려서 고시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나이는 계속 먹고…. 고시 준비를 몇 년씩 한 걸 경력으로 쳐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안정훈의 말대로 그는 흙수저 중의 흙수저로 이제 형제들까지 포함하여 가족 5명이 모두 성인인데도 여전히 돈을 벌고 있는 건 아버지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한 달에 200만 원이 안 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유인하는 다른 가족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특별’했다. 얼굴도 잘생겼고 공부도 잘해 어딜 가나 주목을 받았다.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더라도 그가 전교에서 1등을 한다고 하면 가족 모두 목에 힘을 주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런 게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항상 자신은 대단한 누군가가 될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작년부터 부모님마저도 눈을 낮추면 안 되겠냐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유인하는 화를 냈다. 원래 합격할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공부이며 2차 시험을 한 과목을 근소한 차이로 과락한 건 다음 시험에서는 붙는다는 거라는 걸 소리 높여 강변하고 나면,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들이 알겠다며 물러서도 설명할 수 없는 자기혐오에 미칠 것만 같았다. 이렇게 말하고 안 되면? 언제부턴가 감정과 논리가 정반대로만 가는 것 같아 혼란스럽기만 하다.
유인하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하면 금방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이 이 나이가 되어도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처지일 줄은 몰랐다. 천원, 2천 원에 벌벌 떠는 건 엄마 같은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상해도 편의점에서 소주 1병밖에 살 수 없는 이 빌어먹을 상황이, 지긋지긋한 가난이 어른이 되어도 똑같을 줄은 몰랐다.
거기에 예전엔 유인하의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하던 친구조차도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박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겨우 버티고 있던 유인하의 드높은 자존심을 산산조각 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타인에게 기대려고 하는 마음이 잘못된 것이다. 전화 따위 하는 게 아니었다. 이런 건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나의 최선이 아닐 터이다. 분명히 더 할 수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왜 못 하지?’
그럼… 이게 내 한계라는 말일까? 전교 1등, 최고의 대학, 그리고 백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도, 최대한 느리게 걸었는데도 어느샌가 자신이 사는 낡은 고시원이 있는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다. 월세도 빠듯해서 점점 더 좁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그렇게 언제부턴가 이곳의 초라함이 유인하를 깊숙이 물들였다.
“들어가기 싫다….”
유인하는 고시원의 앞에 우뚝 서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짜 들어가기 싫다…….”
만약에 올해도 또 안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는데도 모든 것이 너무나 막막했다. 먹고 산다는 것쯤은 당연해야만 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당연하지가 않은 것일까. 자신은 분명 그 이상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도 왜 하루하루가 모욕적일까.
먀~.
그때 고시원과 옆 건물 사이에서 살아있는 무언가의 소리가 들렸다. 폐자재와 박스가 쌓여 있고 누군가 무단 투기한 쓰레기도 제법 있는 곳이었다. 그 사이에 고양이 한 마리가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어린 새끼 고양이였다. 더러운 곳에서도 홀로 때 묻은 곳 없이 예쁘다. 고양이는 유인하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사람 손을 제법 탄 고양이일까. 흔한 코리안 쇼트헤어 치즈태비였다. 아직 푸른 빛이 도는 호박색 눈동자와 자태가 예뻤다. 얼굴과 앞발, 배는 전부 하얬다. 모질도 괜찮은 게 잘 먹고 사는 모양이었다.
어째서일까. 고양이는 역시 귀엽다. 암울했던 마음이 약간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왜일까, 정말. 고양이는 도대체 무슨 특별함을 가지고 있길래 이런 걸까. 여전히 위로가 되는 것일까.
유인하는 고양이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았다.
“너 같은 고양이도 잘만 먹고 사는데 난 이게 뭐냐. 난 이게 뭐냐고오.”
이렇게 직접 만질 수 있으니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털이 무척 부드러웠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하다. 고양이는 아무에게나 만지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만질 수 있다는 게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고양이의 얼굴을 쥐고 양옆으로 흔들며 장난을 치니 고양이가 하얀 발로 허우적거리며 유인하의 손등을 잡았다. 역시 하는 짓이 너무 귀엽다. 얼굴을 놓아주자 고양이가 훌쩍 뛰어 유인하의 무릎 위에 올라탔다. 유인하는 약간 놀랐다가 웃었다. 기뻤다.
“너 무릎냥이구나.”
그는 그대로 고시원 입구의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고양이의 쪼끄만 귀가 귀여워서 자꾸 만졌다. 만지는 촉감이 너무나 좋았다. 고양이가 말랑말랑한 만큼 이쪽의 긴장도 말랑말랑하게 풀리는 기분이다. 얼마나 순한지 그냥 골골대면서 얌전히 있었다.
‘집에 계란은 있는데 주면 먹을까….’
쥐뿔도 없으면서 고양이 먹일 생각을 하고 말았다. 아차 했다. 그래서 유인하는 괜히 고양이에게 화풀이를 했다.
“야, 나한테 애교 떨어봤자 아무것도 안 떨어진다. 집사도 돈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거야. 난 돈 없거든. 내가 먹고살 돈도 없는데…. 야, 버림 안 받고 잘 살려면 너도 전략을 잘 짜야 돼. 현실적으로 생각해. 돈 많고 착한 사람을 물어야 한다, 어? 현실적으로 실속 다 따지면서 살아야 한다고. 내 말 알겠어?”
유인하는 술에 취해 몇 개월 되지도 않은 고양이에게 그렇게 설교했다. 고양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귀여운 얼굴이었다. 얘도 이렇게 귀엽고 애교가 많으니 곧 누가 주워서 기꺼이 집사 노릇을 해줄까? 그게 아니더라도 얘는 제 몫을 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통통하고…. 유인하는 무릎을 좀 더 세워 고양이와 닿는 면적을 넓혔다. 고양이가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나도 너 같은 고양이였으면 좋겠다. 돈 많은 집사나 물어서 한우 먹고 살게. 책임질 것도 없고 멋대로 살아도 귀엽다고 떠받드는데 얼마나 좋아? 사람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네가? 어?”
유인하는 고양이의 뒷덜미를 마구 주무르며 그렇게 을렀다. 유인하는 점점 더 취기가 올라 그대로 자신의 무릎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정말 사람으로 살기 싫다….”
그렇게 2평도 안 되는 고시원에 들어가기 싫어 한껏 몸을 구기고 쪼그리고 앉은 게 유인하가 완전한 사람으로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 되고 말았다.
*
“캬아아악!!”
날카로운 하악질이 들렸다. 고양이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차가운 콘크리트 계단 위 회색 옷가지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주변을 홱홱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고등어태비 하나가 위협적으로 꼬리를 낮추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고등어가 말하고 있었다.
너 뭔데 내 구역에서 얼쩡거려? 세상 그만 살고 싶냐? 묘생 접고 싶냐?
고양이는 목을 움츠려 접고 고등어를 노려보았다. 호박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캬아아!! (너나 꺼져, 못생긴 게!)”
그의 입에서도 날카로운 울음이 새어 나왔다. 응?! 고양이는 자신의 옷 위를 펄쩍 뛰었다. 둥글게 휜 등골을 따라 주황색 털 오라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먀?! (응?!)”
뭐야?!! 뭐야? 뭐야!!! 갓 3개월쯤 되어 키튼 블루(Kitten Blue)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호박색 눈동자의 치즈냥이가 옷에 머리를 들이밀고 지랄발광을 떨었다. 치즈냥이의 아래엔 회색 후드티와 기다란 트레이닝 바지, 신발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털을 잔뜩 세우고 혼비백산해서 고시원과 주변을 한껏 우다다 하고 다니던 새끼 치즈태비가 다시 사람의 옷 근처를 서성거렸다.
‘미친거아냐내가고양이가됐어진짜로어떡해나진짜고양이된거야시발꿈아냐?꿈이지?꿈일거야이게진짜일리가없어나어떡해잠깐만나고양이진짜고양이털이나있어내발봐미친분홍젤리’
작은 치즈냥이는 잠깐 정신이 나가 삐약거리며 본능적으로 옷에 스크래치를 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다.
“캬아아아!!! (야, 너 나 무시하냐? 죽을래?!)”
자신의 경고를 개똥으로 들은 새끼 치즈냥이를 향해 고등어가 돌진했다. 분수를 모르던 어린 치즈냥이는 그 구역을 다스리던 어른 고양이에게 참교육을 당하고 말았다. 발톱을 세운 앞발로 여러 대 맞고 비명을 질렀다. 치즈냥이는 곧바로 고시원의 창살 사이로 쏙 뛰어올랐다. 고등어는 날카롭게 울며 심한 말, 험한 말을 하고는 다시 사라졌다.
십년감수한 치즈냥이는 자신의 작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느끼며 움츠린 채 주변을 경계했다. 다른 고양이는 없는 것 같았다.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아파!’
고양이한테 맞아도 아픈 건 아픈 거였다. 작은 치즈냥이가 된 유인하는 다시 자신의 옷으로 돌아갔다. 맞아도 꿈이 깨지 않았다. 치즈냥이는 자신의 후드티에 있는 주머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 어떡해. 휴대폰!’
이 상황에서도 물건이 아깝다. 이대로 두면 누가 챙겨줄까? 이런 구닥다리 폰을 누가 훔쳐 갈 것 같진 않지만. 유인하는 새로운 휴대폰을 장만할 형편이 안 됐다. 작은 고양이의 몸으론 휴대폰도 한참 무겁다. 옮길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창살로 올라가 마구 울었다. 반지하 층에 사는 앞집 고시생이 지금 이 시간에도 게임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평소 유인하가 참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아! 미친! 발정 났으면 다른 데 가라고!”
계속 우니까 곧 고시생이 험한 욕을 잔뜩 하며 창문을 벌컥 열었다. 고양이의 입장에서 사람이란 게 이렇게 큰 것이었다. 깜짝 놀란 치즈냥이는 얼른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래도 울었다. 곧 창문을 다시 닫으려던 수염이 듬성듬성 난 키 작고 뚱뚱한 안경잡이 고시생의 눈에 길에 떨어져 있는 유인하의 옷이 들어왔다.
“뭐야, 저거.”
그는 작은 주황색 고양이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바닥에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는 옷과 신발을 보고는 이상한 목소리를 냈다. 그는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더니 상의, 하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는 이상한 현장을 내려다보았다.
“신고해야 하나….”
마치 사람만 쏙 사라진 것처럼 옷과 소지품이 그대로 남아 있는 범상치 않은 광경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치즈냥이를 보았다. 그는 아무 이유도 없이 갓 3개월짜리 고양이를 발로 차려고 했다.
‘미친!!’
저런 돼지한테 걷어차였다간 1kg이 될까 말까 한 치즈냥이는 죽고 말 것이다. 그는 쏜살같이 도망갔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털이 솟구쳤다. 어쨌든 그 고시생은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관되고 싶지 않은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치즈냥이는 여전히 자신의 옷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사람이 오면 잽싸게 건물과 건물 사이로 숨었다. 오래된 박스가 켜켜이 쌓인 그곳은 좋은 은신처가 되어주었다. 평소엔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들이 너무나 크게 보였다. 코딱지만 하다고 생각했던 고시원의 창문조차 이젠 거대하다. 지금 바로 앞에 있는 박스조차도 건물만큼이나 크게 느껴졌다.
치즈냥이는 그때까지도 꿈에서 깨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한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곧 깨겠지….’
진실을 외면할 때 느껴지는 미묘한 마음의 불편함을 무시했다. 치즈냥이는 작은 택배 박스 안에 들어가 암모나이트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어 미친 듯이 배가 고파 잠에서 깨자 더 이상 이게 현실이라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굶주림은 언제나 현실 파악을 못 하는 고양이의 싸대기를 인정사정없이 쳤다.
박스 사이를 해치고 밖으로 나오니 이제 옷이 길에 없었다. 누가 치운 모양이다. 적어도 누가 훔쳐 간 것은 아니길 바랐다.
그는 얌전히 앉아 자신의 오른쪽 앞발을 들어 보았다. 앞다리와 가슴, 배까지 새하얬다. 꼬리는 노랗다. 요로 보고 모로 봐도 그냥 고양이다.
‘아무리 내가 고양이가 되고 싶었다지만 진짜로 고양이가 되다니.’
배에서 꼬르륵, 하고 정직한 소리가 났다. 이런 길바닥에 먹을 것이 있을 리가 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는 못 산다.
‘고양이도 고양이 나름이지…. 내가 길바닥에서 어떻게 살아?’
막(?) 고양이가 된 유인하가, 그것도 새끼 고양이의 스펙으로 어떻게 길바닥 생활을 해나가겠는가. 굶어 죽거나 아까와 같이 다른 고양이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객사할 것이 뻔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치즈냥이는 고시원의 유리문을 마주 보았다. 작은 고양이의 모습이 비친다. 제법 귀엽지 않은가. 뭐니뭐니 해도 고양이에게 최선의 선택은….
‘그래, 집사를 간택해야겠다!’
치즈냥이의 눈빛이 빛났다. 사람은, 아니, 고양이는 영리하게 살아야 한다. 하루하루 먹이를 사냥하면서 사는 것은 현재 새끼 치즈냥이의 입장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캣맘이나 캣대디가 주는 사료만 쫓아다닐 순 없었다. 누군가의 적선에 묘생을 맡기는 것만큼 불안한 일이 어디 있는가.
캣맘이나 캣대디의 보살핌을 받는 게 비정규직이면 집사를 간택하는 것은 정규직이 되는 것과 진배없다. 집사를 간택해야겠다. 그래, 기왕이면 아주 부잣집 집사로!
‘머슴살이를 해도 대감집에서 하랬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인간팔자가 묘팔자가 되었으니 묘팔자라도 상팔자로 만들어보자. 뭘 믿고 덥석 거기까지 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그 한우 먹는 고양이가 한남동에 산다는 것만 알았다. 무작정 한남동으로 출발했다.
이상하게 공부에 대한 걱정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갑자기 고양이가 되었다는 현실에 미쳐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팔자 펼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볍지 않은가. 5년 차 고시생보다 귀여운 새끼 고양이의 처지가 더 낫다고, 진심으로 믿게 된 것이다. 자그마한 치즈냥이는 큰 포부를 세우고 발걸음을 뗐다.
‘제일 좋은 집사로 고른다!’
*
작은 고양이의 몸으로 관악구에서 용산구까지의 여정은 멀고도 험했다.
‘어제 그거 그냥 먹을걸.’
치즈냥이는 자존심 때문에 버리고 나온 어제의 끼니를 몹시나 아쉬워했다. 버리고 나올 때도 후회할 줄 알았기 때문에 더욱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냐, 부잣집 고양이가 되는 거야. 부잣집 고양이….’
치즈냥이는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그는 세뇌하듯이 스스로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고양이가 되고 말았다. 지금 공부를 할 수가 있나, 뭘 할 수가 있나. 지난 일은 지나간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근래 이런 동기부여가 스스로에게 전혀 먹히지 않아 힘들었다. 근데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잘 먹혔다. 다시 기운을 차렸다. 의욕이 생겼다.
그도 그럴 게 부잣집 아들이 되는 건 사람이 정할 수 없는 거라지만 부잣집 고양이는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뭐라도 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지 않은가.
‘진짜로 부잣집 고양이만 되면… 그럼 만사 다 해결되는 거잖아?’
최근 상상했던 그 어떤 미래보다도 가장 밝고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래서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다. 새벽이라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었지만 차는 많이 다녔다. 갓 고양이가 된 주제에 치즈냥이는 종종 다른 고양이의 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전력 질주를 해서 그 구역을 벗어났다.
새끼 치즈냥이는 다 일어서도 키가 30cm도 안 될 것 같았다. 표지판도 보기 힘들고 원래 다니던 길도 알아보기 어려워 혼났다. 그래도 지하철역을 이정표 삼아 부지런히 움직였다. 사람의 몸으로 걸어도 두세 시간은 걸릴 길이었다.
아침에 출발하여 태양이 높이 떴을 즘엔 한강을 건넜다. 그때만 해도 강만 건너면 금방이라도 부잣집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는 대입 공부, 대학 들어가서는 잠깐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고 바로 고시 준비를 시작한 유인하가 한남동에 부촌이 있다고 해서 그게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제법 헤매고 다니다가 이태원역까지 갔는데도 그냥 허름한 빌라만 보였다.
‘저게 부잣집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이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발에 차일 것만 같았다. 굶주린 배를 붙잡고 종종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다시 길을 다시 헤매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었다. 너무 힘이 드니까 또 아까의 의욕이 삭 꺾였다.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역시 이건 꿈이겠지? 사람이 고양이가 되다니. 사람이 고양이가 돼서 부잣집에 들어갈 야망을 불태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야, 이건. 꿈….’
몇 시간 전 부잣집 고양이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땐 그게 정말 똑똑하고 대단한 생각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냥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그렇지 않은가?
아스팔트 바닥을 종일 돌아다녀 젤리가 다 상한 것 같다. 잠깐 쉬면서 발바닥을 혀로 핥았다. 본능적이었다. 맛이 이상했다. 그러다 아차 하는 사이 인적은 하나도 없고 담벼락만 몇 미터나 되는 이상한 동네에 들어오고 말았다.
‘서울에 이런 데가 있나?’
고개를 쭉 빼도 고양이의 몸으론 담벼락의 끝을 볼 수가 없었다. 너무 높았다. 유인하는 단순히 서울에 있는 부촌이라고 하면 아파트 단지일 거라 생각했다. 한 채에 몇십억씩 하는 아파트 단지가 있어 그런 단지 입구에서 야옹거리면 불쌍하게 여겨주는 사람 한 명쯤은 나오겠지. 하지만 여기는 말 그대로 주택가였다. CCTV만 한 거리에 수십 개씩 달려 있었다.
‘여기 이태원 아닌가?’
대학생 때 한두 번 와본 적이 있었다. 이국적이거나 신기한 것도 많았다. 그래서 주거 지역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여기는 달랐다. 이 한낮에도 사람 하나 안 다닌다니. 언덕도 가파르고 차도 다니지 않았다. 들어온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버스 같은 건 하나도 안 온다. 하지만 간혹 서 있는 차가 으리으리하다.
‘설마…, 여기가 진짜 부촌인가!’
유인하는 이런 곳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기 때문에 이런 곳이야말로 ‘진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마치 환상 속의 나라처럼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그런 곳처럼.
‘그래, 여기가 바로 그 한남동! 아무 고양이나 한우를 먹지는 않지!’
이런 곳이 있었구나. 이런 데가 말로만 듣던 진짜 부자들이 사는 곳이구나. 그래, ‘진짜 부자’가 닭장 같은 아파트에 살 리가 없잖아? 왜 이때까지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여기가 ‘진짜’인 것이다. 유인하는 지금까지 자기가 생각해왔던 부유함의 개념이 깨지는 걸 느꼈다. 입을 딱 벌렸다. 의아하게만 보이던 이 높은 담벼락이 그때부터 아주 특별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바보 아냐? 다른 사람들은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있으면 그게 부자인 줄 알겠지?’
역시 ‘진짜’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걸 세상에서 자신만 알아차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유인하는 배고픔도 잠깐 잊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마치 성처럼 담벼락이 높았다. 한 집의 크기가 엄청 컸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주택이라니!
처음 도전하는 거라 긴장하긴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고양이라고 나무는 탈 수 있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 높은 담 위를 걸어 다니며 대감집(?)들을 하나하나 둘러보기 시작했다.
과연, 과연! 달랐다. 지은 지 조금 된 것처럼 보이는 집마저 아주 관리가 잘 되어 고즈넉한 맛이 있었다. 신식으로 지어진 저택은 무슨 현대 미술 작품 같았다. 정원의 잔디와 나무 하나하나마다 사람의 손이 닿은 것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부유함이라는 것 아닌가!
“먀아. (우와.)”
유인하는 한참 동안 감탄을 금치 못하며 이곳저곳 구경 다녔다. 개들은 유인하를 보자마자 짖었다. 그런 곳은 얼른 피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언덕 위로 올라갔다. 신림동의 언덕을 오를 때와는 달랐다. 지저분한 상점이나 오래된 간판도 없다. 뒤돌아보면 지나온 대감집들이 주르륵 내려다보였다.
‘고양이라서 이런 것도 이렇게 보는구나.’
사람이라면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역시 고양이는 참 대단한 생물이다. 이런 곳에는 도대체 누가 사는 걸까? 유명한 사람일까? 그는 담장 위를 총총 걸어가다가 고풍스러운 하얀 주택을 발견했다. 정원이 아주 넓었고 담벼락을 따라 높은 나무가 잔뜩 심겨 있었다. 정원의 가운데 있는 물이 흐르는 기암과 연못이 호화스러웠다. 바깥과는 아주 다른 세상이 있었다.
‘물고기!’
치즈냥이는 저도 모르게 꼬리를 살랑거리는 물고기에 끌려 그 집 정원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잔디밭에 사뿐 내려앉아 연못으로 갔다. 물고기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새끼 고양이의 몸보다 배는 클 것 같다. 고양이가 다가가자 잉어들도 다가왔다. 그는 솜방망이로 잉어의 등을 팍팍 쳤다.
‘물고기! 물고기!’
고양이의 사냥 본능이란. 물이 몸에 닿는 것은 싫었다. 하지만 물고기는 좋았다. 별로 잡아먹을 건 아니었다. 그냥 가지고 놀고만 싶었다. 새끼 고양이는 잠깐 정신을 잃고 알록달록한 잉어에게 마구 솜방망이를 날렸다. 등을 발톱으로 찔린 잉어는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가 다시 다가왔다.
“먀…! (악…!)”
잉어는 괜히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잉어는 그대로 펄쩍 뛰어 정확하게 작은 치즈냥이의 머리를 덥석 물었다. 그는 그대로 연못 속으로 끌려갔다.
‘잡아 먹힌다!’
세상에, 고양이가 물고기에게 잡아 먹힐 줄이야! 혼비백산한 새끼 고양이는 마구 발버둥을 친 끝에 연못에서 튀어 올랐다. 얼른 뭍으로 나와서 비명을 질렀다.
“ 미야아아아아! (아, 젖었어! 물 싫어!)”
고양이 특유의 날카로운 비명이 정원을 울렸다. 죽을 뻔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몸을 털었다. 새끼 고양이는 앞발 하나를 들고 몸을 다시 파르르 털었다.
안 그래도 변덕스러운 4월의 날씨는 고양이에게 제법 쌀쌀하게 느껴졌는데 연못에 빠지고 해도 떨어지니 급격히 추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름도 살살 끼고 바람도 분다. 물고기에게 정신이 팔려 이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얼른 현관으로 달려갔다.
“먀~. (누구 없어요?)”
커다란 집이라 관리하는 사람이라도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야옹거려도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커다란 집에 비하여 고양이가 너무 작았다. 그때 마침 지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치즈냥이는 덜덜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대문이 열리고 차가 땅 밑에서 불쑥 올라오는 것처럼 보였다. 커다란 검은색 세단은 중후한 배기음을 내면서 현관으로 다가왔다. 차를 현관 앞에 대자 운전석 문이 열리고 양복을 입은 남자가 먼저 내렸다. 그리고 그는 뒷좌석으로 가 정중하게 문을 열었다.
분위기만 봐선 나이 많은 회장님이라도 내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매우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키가 훤칠하게 컸으며 대리석 조각처럼 무표정했다.
“그럼 쉬십시오, 사장님.”
“들어가세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낮아서 무게감이 있었다. 운전사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양이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동공이 길어졌다.
‘많이 봐줘도 30대 중반인데? 사장이라고?’
그럼 이 젊은 남자가 이 으리으리한 집의 주인인 모양이다. 고양이는 이렇게 젊은 남자가 이런 집의 주인이라는 것에, 무려 사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아무리 이 아저씨, 저 아저씨 예의 삼아 사장님이라고 부른다지만 저런 차를 타는 남자는 진짜 사장님일 거 아닌가.
‘재벌…인가? 설마 자수성가?’
심지어 얼굴도 잘생겼다. 그렇게 작은 고양이 하나가 이 젊은 남자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평하고 있었다. 아마 인간일 때 이 남자를 보았다면 한동안 배가 아파 잠도 못 잤을지 모른다. 다른 고시생들과 이 사회의 빈부격차와 불평등에 대해 한참을 토론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고양이인 자신의 집사가 될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그동안 그 남자가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어쩐지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몹시 무뚝뚝해 보이는데도. 아니, 그래서 마음이 더 끌렸다. 무심함은 무해하게 보이니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인데도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역시 유명한 사람일까?
‘그래, 이 정도라면 날 데리고 사는 데 부족함은 없겠지!’
유인하는 그렇게 판단하고 얼른 앞으로 나섰다.
“야옹~! (날 키워라~!)”
운전석에 탄 운전기사는 차를 몰고 가버렸다. 젊은 사장님이 집에 들어가다 말고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폭삭 젖은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발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며 야옹거리고 있었다. 그는 일단 더러운 고양이가 집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도록 현관문을 닫았다.
“…….”
“야오옹….”
치즈냥이는 최대한 처량해 보이는 작전을 썼다. 남자는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를 발견하고도 별달리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대리석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작은 고양이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 커서 인상적이다. 표정 변화가 일절 없어 대하기 많이 어려울 것 같은 인상이다. 역시 어딘가 안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인하는 점점 초조해졌다.
‘이 남자는 심장도 없나!’
고양이는 추위를 많이 탄다. 이렇게 젖어 있는데 일단 고양이 목숨은 살리고 봐야지! 치즈냥이는 필살기를 쓰기로 했다. 젖어서 약간 미안하긴 했지만 꼬리를 살랑 세운 채 그의 발치에 몸을 갖다 비볐다. 고양이가 이럴 때 얼마나 귀여운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리고 치즈냥이는 동그란 얼굴을 들어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야옹, 하고 울었다.
남자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이 작은 치즈냥이의 뒷덜미를 잡았다. 뒷덜미를 잡히니 그대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먀? (어? 어어?)”
젖어서 이렇게 잡는 거겠지?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설마 이대로 내쫓을 생각인가.
“야옹….”
새끼 고양이는 목덜미를 잡혔지만 그의 얼굴을 보려고 노력했다. 다시금 처량함을 응축하여 눈빛으로 쏘았다. 어린 생물의 울음소리는, 그것도 고양잇과 동물의 울음소리는 귀엽고 가여운 법이다.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직접 대문을 열고 고양이를 냅다 내쫓으려고 했던 남자는 그 전에 고양이를 더 들어 올려 얼굴을 한 번 보았다. 그는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야옹. 야옹. (살려줘. 키워줘.)”
“…….”
그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검디검은 눈동자는 그저 지그시 고양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치즈냥이는 절대 들킬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자신의 속이라도 꿰뚫어 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남자는 한숨을 짧게 쉬더니 커다란 대문을 닫았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고양이는 추워서 덜덜 떨고 있었지만 쾌재를 불렀다.
‘내 묘생도 이제 펴는 것인가!’
*
3층 높이의 높은 천장. 화려한 샹들리에. 햇빛에 반사되는 푸른 잔디와 나무, 꽃과 연못이 훤히 보이는 전면 창. 아름답게 배치된 미술품과 가구는 서로를 구분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넓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호화롭다.
“먀~.”
새끼 고양이는 꺄륵 웃으며 햇살이 잔뜩 들어오는 거실의 진줏빛 스툴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유연한 새끼 고양이는 앞발 두 개를 앞으로 쭉 뻗고 허리를 반 바퀴 돌려 배는 하늘을 향한 자세로 반달 모양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분홍색 육구와 배가 드러났다. 작은 치즈냥이가 배를 방만하게 드러내며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이게 바로 돈의 맛이구나!’
이런 곳이야말로 아무나 올 수도, 알 수도 없는 특별한 곳임이 틀림없었다. 이 자본주의 사회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 상위 0.1%. 갑. 승리자. 그런 사람들은 이런 것을 누리는 것이었다. 작은 고양이는 바로 자신이 모두가 원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역시 부잣집 고양이가 짱이야!’
집사를 간택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니! 고양이란 생물은 정말 사기캐가 틀림없다.
그 묘한 젊은 남자가 고양이를 집에 들이자마자 이 대궐 같은 저택에는 곧바로 고양이방이 생겼다. 그 방 또한 천장이 매우 높아 개방감이 훌륭했다. 남색 벽은 사각형의 틀이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 있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게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복도와 마찬가지로 액자도 제법 걸려 있다. 액자 틀이 황금색이다. 높은 천장에는 하얀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는데 금빛 봉에 사방으로 꽃같이 작은 조명들이 무수히 뻗어 있었다. 엄청 예쁘다.
넓기는 또 어찌나 넓은지. 몸집이 작아져서 가늠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유인하의 고시원 방이 20개는 족히 들어갈 수 있는 넓이였다.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은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양이용 고급 매트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각종 고양이 가구가 비치되어 있었다.
캣타워는 2m가 넘을 것 같다. 캣폴도 마찬가지다. 천장과 벽을 자유롭게 노닐 수 있도록 벽에는 선반과 봉 등 고양이가 발 받침으로 쓸 수 있는 것들이 잔뜩 있었다. 스크래처와 캣휠이 있는 것은 당연하고 은신처로 쓸 수 있는 계란 모양의 회색 동굴과 나무 박스, 화장실도 여러 개 있었다. 물과 사료는 매일매일 새롭게 준비되었다.
‘이게 다 얼마짜리일까?’
이게 바로 부잣집 고양이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다. 호사라는 게 이런 거구나. 유인하는 살아생전 이렇게 좋은 물건들을(비록 고양이용이지만)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니, 유인하만 가져본 적이 없었겠는가.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유함의 발치에도 못 미칠 것이다. 그 사실만 생각하면 왜 이렇게 유쾌, 상쾌, 통쾌한지!
‘다들 내가 가진 걸 보면 얼마나 부러워할까!’
유인하의 마음은 마치 하늘 위 구름처럼 들떴다. 창밖으로 깨끗하게 정돈된 아름다운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이게 바로 많은 것을 가진 기분이란 건가. 훗….
주어진 방 말고 다른 곳도 열심히 돌아다녀 봤는데 이 집은 무려 3층까지 있고 지하층도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면 뒤에는 남산, 앞에는 한강이 훤히 보였다. 고급 목재로 된 계단은 우아하게 1층 현관부터 2층을 잇고 있었는데 거기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평생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현실적으로 이런 집은 평생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못 산다! 다시 태어나서 또 모아도 못 산다!’
역시 고양이! 거기다 가장 기분 좋은 것은 깨끗한 유니폼을 입은 남녀 15명이 자신을 항상 깍듯이 받든다는 것이었다. 이 집 주인은 그 젊은 사장 하나로 다른 가족은 같이 살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즉! 이 으리으리한 저택의 2인자는
바로 그의 고양이, 유인하였다!
과연, 고용인들은 무뚝뚝한 그 남자보다 애교 많고 재주 많은 새끼 고양이가 훨씬 모실 만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첫날부터 그를 동물병원에 데려가고 좋은 물건을 잔뜩 사주었다. 고양이가 쓰는 전용방도 그들이 꾸며준 것이다.
인간 출신(?)인 유인하가 동물병원에 가서 주사 좀 맞는다고 점잖지 못할 일은 없어야 했지만, 항문에 체온계를 꽂을 땐 깜짝 놀라 채신머리를 잊고 날뛰기는 했다. 쪽팔린 일이다. 그 일을 잊기 위해 지금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쪽팔린 일은 왜 이렇게 잊기가 힘든 걸까?
‘그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누구는 평생소원이 서울에서 집 한 칸을 마련하려는 거라는데 고양이 유인하는 그걸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해냈다. 대박도 이런 대박이 없다. 이런 집을 사려면 로또 1등을 10번쯤은 맞아야 할 것이다. 이런 건 분명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거겠지?
“손. 손 해봐, 손.”
역시나 세계의 지배자, 위대한 고양이. 고용인들은 새끼 고양이를 보자마자 곧바로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일을 하다가도 짬짬이 고양이를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했다. 그것을 노동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귀여우니까!’
주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다니. 역시나 훌륭한 노예들이 아닌가. 거울을 봤는데 과연 나(?)다 싶을 정도로 미묘였다. 아직 푸른 기가 남아 있는 호박색 눈동자를 가졌고 귀부터 꼬리까지는 예쁜 주황색, 얼굴부터 앞발, 배까지는 새하얀 털을 가진 깜찍한 고양이였다.
“냐! (날 모셔라, 노예들아!)”
“아유, 귀여워라. 개냥이가 따로 없네.”
가장 나이가 많은 집사 아주머니와 젊은 남자 정원사가 유인하를 특히나 귀여워했다.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예뻐해 주고 귀여워해 주는 게 이렇게 으쓱하고 기분 좋은 일인지 처음 알았다.
고양이 사료나 간식을 원래 인간인 자신이 먹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런 건 기우였고 완전 맛있었다. 고기 맛이 난다. 고양이라서 이런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먹어도 맛있게 느껴지는 것일까? 모르겠다.
고양이 장난감도 마구 쫓아다니다 보면 인간 시절 때도 한 번 하지 못했던 PT를 다 받는 기분이다. 넓은 공간에서 몸을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게 기분 좋았다. 삼시 세끼뿐만 아니라 먹고 싶을 땐 먹고 싶은 걸 잔뜩 먹고 자고 싶을 때 잔뜩 자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이었다.
천국! 극락! 발할라!가 바로 여기 있었다.
인간살이를 할 때도 이런 융숭한 대접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부잣집 고양이가 되는 것이 먹고 사는 거 걱정하며 매일이 자존심 상하는 일투성이인 인간의 삶보다 훨씬 나았다.
로또를 10번 맞아도 못 살 집을 이 집 주인보다 더 오래 쓰는 것이 바로 유인하였다. 고용인들의 떠받듦을 받는 것도 그보다 유인하가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전부 지금의 유인하가 가진 것들이다.
집안일을 하는 젊은 남자 고용인 하나가 조신하게 무릎을 꿇고 잠자리 모형이 달린 고양이용 낚싯대를 흔들며 유인하를 모셨다.
‘역시 냥팔자가 상팔자구나!’
꺄르륵. 유인하는 앞발로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는 잠자리 날개를 팍팍 쳤다. 한 대 칠 때마다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죽어라! 잠자리! 죽어라!’
사냥을 할 때면 집중력이 비상하게 올라가고 사냥에 성공하면 의기양양한 기분이 든다. 유인하는 번개같이 잠자리를 물어뜯었다. 그대로 인간 노예와 잠깐 줄다리기를 했다. 겨우 잠자리를 고양이의 입에서 구출한 고용인이 말했다.
“그나저나 냥줍 같은 걸 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원래 고양이를 좋아하셨나?”
“현관 앞에서 울고 있더래. 집안에 들어온 건 함부로 쫓아내는 게 아니라고.”
“그런 걸 믿으세요?”
“뭐,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으시잖아.”
유인하는 그 말에 귀를 쫑긋했다. 사냥 본능이 가시고 잠자리를 앞발로 성의 없이 치고 있었다. 대꾸를 한 중년의 집사가 고양이의 귀를 긁었다.
“나비가 제대로 집사를 정한 거지. 아이구, 똑똑해라.”
“먀! (촌스러!)”
나비가 질색하여 울음소리를 냈다. 집사는 그것도 모르고 어이구, 귀여워라~ 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호화로운 저택의 2인자이자, 이 많은 인간들을 거느리고 있는 위대한 고양이의 이름이 하필이면 흔하디흔한 ‘나비’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주인 양반이 네이밍 센스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성의가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하는 짓을 봤을 땐 성의가 없었던 것이 맞을 테지만.
‘말만 통하면! 요새 예쁜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레오나 백호나, 범이 같은 거…!’
그러면서 이 작은 치즈냥이는 자신보다 훨씬 큰 고양잇과 동물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비도 아직 그 남자의 이름을 알지는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사장님’이라고만 불렀다. 하고 다니는 것은 점잖고 나이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많아 봤자 서른다섯이나 여섯 정도는 될까? 모르겠다. 대학교 1, 2학년 때만 해도 30대라고 하면 무슨 아저씨처럼 느껴지는 법이지만 이제 자신도 서른이 금방이라서 그런지 그 정도로 나이가 많지는 않은 것 같으면서도, 또 따져보면 조금 차이가 나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잘생긴 남자는 나이를 알아보기 힘들다.
그는 키가 매우 컸다. 지금은 키가 30cm도 되지 않게 되어 가늠하기 힘들지만 다른 사람과의 키 차이를 보면 확연했다. 못해도 190은 훌쩍 넘을 것이다. 체격도 훤칠했다. 양복이 잘 어울렸다. 있는 집 자식이라 그런지 언제나 행동에 여유와 품위가 있었다. 잘생긴 얼굴이지만 선이 굵은 남자다운 인상이었다. 지적으로 보이면서도 무뚝뚝하고, 그래서 진중해 보였다.
내내 공부만 해서 그런지 나이가 몇 살이든 여전히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처럼 사는 인간들만 보다가 그런 남자를 보니 뭔가 ‘어른 남자’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게 좀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아니, 제법 돈을 벌고 제 밥벌이를 하는 친구들이나 가장인 아버지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너무나 젊은 그가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약간 반감도 들었지만 그건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그가 가진 게 자신이 가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재미없어, 나비야?”
새끼 치즈냥이가 한창 무릎 위에 올라와 재롱을 피우다가 휙 가버리니 남자 고용인이 안타까운 소리를 내며 더욱 열렬하게 낚싯대를 흔들며 고양이를 다시 유혹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비는 유유하고 도도하게 걸어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호화스러운 커다란 창문을 통해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했다. 며칠 전 사냥하려다가 되려 사냥당할 뻔했던 커다란 잉어들이 보인다.
‘물고기!’
새끼 고양이는 창문으로 튀어가 창문을 발톱으로 막 긁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진주색 스툴 위로 돌아왔다. 진지한 생각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고양이의 본능이 눈을 흐렸다. 나비는 방금의 일이 일어나지 않은 척 진지하고 우아하게 자신의 앞발을 핥았다.
‘미신?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거 안 믿을 거 같게 생겨서는. 물론 그가 고양이를 좋아해서 자신을 집안에 들인 것은 아닌 게 분명해 보였다. 미신이나 성의 없는 작명이 굳이 아니더라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것을 보면 뻔하다. 이 집의 고용인 15명 모두 하루도 안 돼서 고양이 유인하의 매력에 흠뻑 넘어가 해롱거리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그 남자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 남자는 냥줍을 한 당사자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는 법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말이다.
‘아니, 솔직히 인간적으로 그래도 되는 거냐고.’
냥줍과 집사 간택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따르자면 집사는 고양이를 물고 빨고 정신을 못 차려야 하는 게 기본이다! 특히나 지금 유인하는 매우 귀여운 새끼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나. 정신을 못 차리면 더 못 차려야지 이렇게 덤덤한 건 냥줍을 당한 고양이로서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기분이 나쁘다. 왜? 충분히 귀엽다는 생각이 안 드나? 줍고 보니 별로 안 예쁘다 이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이렇게 예쁜데? 아무리 찾아봐도 안 귀여운 구석이 없는데?’
나비는 자신의 분홍색 젤리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고용인들은 다들 좋은 사람(노예)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한우를 먹여줄 수는 없었다. 이런 부잣집에 살아도 주인이 좋아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한우를 먹기 위해서는 주인의 사랑이 필요했다. 유인하는 결심했다.
‘꼬신다!’
나비는 한우가 먹고 싶었다. 자신이 그 유튜버 고양이보다 못한 게 뭔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역시 한우도 먹는 특별한 부잣집 고양이가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