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4)

끓는점 오름

영하의 기온에도 햇살은 따뜻했다. 연호는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엎드려 있는 연호에게서 끊임없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형!”

통화를 마친 유진이 침실로 돌아왔다. 잔뜩 신이 난 연호가 단번에 일어나 유진을 반겼다.

“초등학교 때 앨범은 없….”

방문을 닫는 유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기분 탓인지 창백해 보이기도 했다.

“형?”

유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연호가 나른한 몸을 일으켜 유진이 있는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유진은 여전히 방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연호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문고리를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진아!”

당돌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유진이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시선을 내리자 멀뚱멀뚱 유진을 올려다보는 연호가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니에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닌데.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평소에는 눈치도 더럽게 없으면서 이럴 때만 예리했다. 그 말은 곧 연호가 눈치를 챌 정도로 유진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는 뜻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유진이 연호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비단 연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유진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아닐 거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어야 했다. 유진은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옛 기억만 또렷해지는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연호가 바로 앞에서 앨범을 가리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차가워진 손끝에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유진은 그제야 손바닥이 패일 정도로 세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호가 말없이 유진에게 손깍지를 껴 왔다. 단지 그것뿐, 연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온몸으로 유진에게 다가올 뿐이었다.

연호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유진을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유진의 침대에서 연호의 살 냄새가 났다.

“어제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어요.”

햇빛 아래 잘 달궈진 따뜻한 몸이 유진의 품에 파고들었다. 잠시 멈칫거리던 유진이 어색하게 연호를 마주 안았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유진은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맨날 형네 집에서 자다가 간만에 내 방에서 자려니까 침대 사이즈가 적응이 안 돼.”

“그랬어요?”

“응. 큰일 났어. 어떡하지. 맨날 형네 집에서 잘 수도 없고….”

연호가 유진의 품에 안긴 채 웅얼웅얼 어리광을 부렸다. 세상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내가 대단히 특별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자면 되잖아요.”

마치 중독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영영 착각 속에 빠지고 싶었다.

“자고 가요.”

유진이 다리를 얽으며 연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상하체가 완전히 끌어안겨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된 주제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유진의 품에 갇힌 연호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혹시 어머니가 걱정하시면….”

“괜찮아요. 나 없으면 어지르는 사람 없어서 좋대요. 나 청소 열심히 하는데….”

열심히 한다고 해서 늘 결과가 좋은 건 아니다.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안 되는 일이 훨씬 많았다. 그건 유진이 가장 잘 알았기에 유진은 연호가 앞으로도 이 사실을 깨닫지 않기를 바랐다. 그걸 아는 건 유진 하나로 족했다.

“우리 집은 더럽혀도 되니까 자고 가요.”

“와, 나처럼 집안일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잘하긴 했다. 정확히는 잘하는 것만 잘했다. 연호는 객관적으로 요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정리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애정을 동반한 행위에만 능력을 발휘하는 게 틀림없었다. 연호는 먹는 걸 좋아했고, 유진은 깨끗한 걸 좋아했다.

“형은 언제 이렇게 컸어요?”

빤히 유진을 쳐다보던 연호가 신기해하며 유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유진의 졸업 앨범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형 아기 때 진짜 예뻤겠다…. 아, 지금이 안 예쁘다는 게 아니라….”

실언을 한 연호가 수습하려는 듯 유진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애초에 기분이 상한 적도 없었지만 유진은 굳이 연호의 고백을 막지 않았다. 유진은 칭찬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앨범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다음에 가져올게요.”

며칠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연호가 받아 온 졸업 앨범을 시작으로, 두 사람 사이에 앨범 열풍이 불었다. 유진의 집에서 자고 가는 걸 포함해 유진의 아기 때 앨범까지 획득한 연호가 유진 몰래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전부 계획대로였다.

“형은 아빠 닮았어요, 엄마 닮았어요?”

“두 분 다 안 닮았어요.”

“…어? 진짜? 하나도?”

“따로 따로 놓고 보면 닮긴 했는데…. 딱 봤을 땐 하나도 안 닮았어요.”

유진이 연호의 상의 속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연호는 유진이 양가의 장점만 물려받았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벌써부터 유진의 아기 때 앨범이 기대가 되었다.

연호의 기대에 부응하듯 등허리를 쓰다듬던 손이 티셔츠를 밀어 올리며 자연스럽게 앞으로 넘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연호의 몸이 크게 움칠거렸다. 아직 가슴을 만지기도 전이었다.

“아직도 아파요?”

“이제는 안 아픈데….”

연호가 유진의 생일 선물로 뚫은 가슴 피어싱에 적응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슴 피어싱은 귓바퀴나 귓불보다 훨씬 섬세한 관리를 필요로 했고, 덕분에 연호는 요양을 핑계로 유진의 집에서 자고 가는 날들이 많아졌다.

“아씨, 민망하단 말이에요….”

“뭐가 민망해요.”

“…좀 커진 것 같….”

…으으. 거기까지 말한 연호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뒷말을 얼버무렸다. 생각만 해도 열이 오르는지 유진의 손바닥에 감기는 연호의 맨살이 따끈따끈했다.

유진은 연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랑한 젖꼭지의 감촉을 떠올렸다. 유진이 연호의 갈비뼈를 쓰다듬었다.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허리를 지나 이번에는 장골을 더듬었다. 마침내 드로어즈에 다다른 유진이 밴딩 부분을 잡아 벌리며 속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자, 연호가 친히 허리를 띄워 바지와 속옷을 벗기는 유진의 손길을 도왔다.

연호는 올해 스무 살이 되었다. 성인이 되었다고는 하나 이래서는 전과 다를 게 없다며 연호가 투덜거렸지만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진은 누구보다 똑똑히 연호의 성장을 체감하고 있었다.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유진과 달리 연호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 결과가 늘 대단하지만은 않더라도 그랬다. 연호는 이제 곧 사회인이 된다. 수습 기간이 6개월이나 되는, 규모가 작은 회사였지만 유진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유진은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연호의 입사일이 다가오면 이제 대낮부터 침대 위를 뒹구는 일상도 끝이었다.

유연하게 흔들리는 허리 위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피어싱이 보였다. 비로소 연호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새겨 놓는 데 성공한 유진이 피어싱을 눈에 담으며 허리를 쳐올렸다. 성기가 내벽 깊은 곳까지 밀려들어오자 도리어 연호가 허릿짓을 멈췄다. 꼿꼿하게 올라 선 연호의 성기에서 쿠퍼 액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호가 입술을 뻐끔거리며 다급히 유진을 찾았다.

“형, 그, 그거….”

원하는 곳에 닿기 위해선 스스로 허리를 흔드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유진이 말없이 연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그거, 다시….”

유진이 대답하지 않자 애가 탄 연호가 삽입을 조르며 유진의 성기를 조였다.

“응? 빨리….”

연호가 애달아서는 끙끙거리며 어설프게 허리를 움직였다. 유진은 그런 연호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아, 혀엉….”

“응.”

“왜…. 왜 안 해….”

시간이 지날수록 연호는 ‘무엇을 할 때’ 유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섹스 시에 연호가 유진에게 매달리는 순간이 늘어났다. 단순한 우연으로 만들어진 상황이라기에는 그 빈도가 너무 잦았다.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으, 응….”

“그럼 왜 올라탔어.”

“아, 안, 돼. 빼지 마…!”

유진이 슬쩍 성기를 빼내려 들자 연호가 다급하게 구멍을 조였다. 원망스럽게 유진을 내려다보는 연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정하게 대해 줘야 하는데. 유진은 이따금 자신이 연호를 괴롭히려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호를 괴롭히는 데서 오는 미약한 죄책감은 그보다 더 큰 쾌감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진이 성기를 귀두 끝까지 빼냈다. 놀란 연호가 유진을 따라 허리를 움직이자 단단한 팔이 연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퍽! 유진이 연호의 허리를 잡아 누르며 아래에서부터 성기를 뿌리째 박아 넣었다.

“아, 아!”

기다렸던 만큼 쾌감이 배가 되어 돌아오자 연호가 버둥거리며 신음을 내질렀다. 습관이라는 건 참 무서워서 연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애태우는 유진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혼자서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지 않게 되었다. 유진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삽입 섹스에 완전히 익숙해진 몸이 게걸스럽게 쾌감을 쫓기 시작했다. 연호가 스스로 구멍을 조였다 풀며 말을 타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유진과 박자가 하나도 맞지 않았지만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연호와 박자가 틀어지려 할 때마다 유진이 연호의 허리를 잡아 누르며 강하게 삽입해 왔다. 연호는 이러다 허리가 부서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신없이 엉덩이를 흔들었다.

연호의 가슴이 들썩일 때마다 피어싱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연호는 더 이상 아프지 않다고 하지만, 지켜보는 유진의 입장에서는 아직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사실 생일 선물이라는 명목 하에 연호의 가슴에 피어싱을 뚫어 놓은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니긴 했다.

유진이 길게 혀를 내어 연호의 가슴을 핥았다. 말랑한 젖꼭지에서는 연호의 귀를 빨 때처럼 차가운 금속 맛이 났다.

확실히 연호는 전보다 젖꼭지가 커져 있었다. 가슴에 달아 놓은 피어싱 때문인지, 아니면 가슴 애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유진이 원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유진이 피어싱을 혀로 굴리며 젖꼭지를 빨기 시작했다. 밑에서는 계속해서 성기를 쳐올리는 채였다.

자극이 위아래로 가해지자 점점 머릿속이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었다. 연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연호의 몸이 조금이라도 밀려날라 치면 유진이 연호의 허리를 잡아 누르며 강하게 삽입해 왔고, 위에서는 하릴없이 가슴을 빨리고 있었다. 기껏 유진의 위에 올라타고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연호였지만, 어째서인지 스스로 허리를 흔들 때보다 훨씬 흥분했다. 단숨에 사정감이 차올랐다.

“혀, 형, 쌀 것 같, 아!”

유진이 연호의 가슴을 빨며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연호가 자신의 가슴에 매달려 있는 유진의 얼굴을 붙잡으며 사정했다.

“키스하고 싶어요.”

“…….”

“응? 혀엉…. 키스….”

연호의 애원에 유진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젖꼭지를 빨고 있던 입술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유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랫배 사이에서 비벼지던 연호의 성기가 크게 움칠거렸다.

커다란 손이 연호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아래로 내리게 했다. 유진의 얼굴이, 입술이 점점 가까워졌다. 거칠게 성기를 박아 올리는 허릿짓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눈빛에서 오는 괴리에 숨이 막혔다.

“아, 으읏…!”

입술이 닿기도 전에 연호가 먼저 사정했다. 쾌감에 몸부림치는 연호의 시선이 유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오직 유진만을 바라봐 주었다.

내 거야.

흉포한 마음이 치솟았다. 유진이 자신의 위에서 사정하는 연호를 끌어내렸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자 연호가 사정을 하는 와중에도 유진에게 매달려 왔다.

유진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오는 연호를 잡아 눕히며 허벅지를 벌리게 했다. 다리 사이로 방금 전까지 성기를 삼키고 있던 구멍이 잔뜩 벌어진 채 뻐끔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구멍이 허전할 틈도 없이 유진이 곧바로 성기를 박아 넣었다. 아래가 꿰뚫리면서 깊은 곳이 쑤셔지자 사정 하던 연호의 성기가 정액과 함께 맑은 액을 토해 냈다. 정액이라고 하기에는 색이 지나치게 묽었다.

마지막까지 성기를 박아 올리며, 유진도 사정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을 정도로 긴 사정이었다. 유진이 사정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연호가 기다렸다는 듯 먼저 입을 맞춰 왔다. 고작 입술이 닿았을 뿐인데 애정 어린 입맞춤에 가슴이 떨려 왔다.

살 것 같았다. 유진이 연호를 꼭 끌어안았다.

***

“뭐 해….”

누가 들어도 자다 깬 목소리였다. 연호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다. 저러다 어딘가에 부딪칠 것만 같았다. 유진이 제 앞에 있는 테이블을 옆으로 살짝 밀어 놓았다.

“왜 일어났어요. 배고파요?”

“아니. 형 없어서….”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데 성공한 연호가 힐끗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을 비롯해 각종 종이들이 널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무언가를 읽고, 쓰고, 고심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벌써 새벽 네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최근 들어 유진이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연호는 유진이 중요한 강연회를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유진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연호가 의자에 앉아 있는 유진 위에 올라탔다. 유진을 의자 삼아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를 잡는 모습이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연호가 불편할 법도 한데, 유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으며 도리어 연호에게 제 몫의 공간을 내주었다. 비로소 유진을 마주 보며 앉게 된 연호가 있는 힘껏 유진을 끌어안았다.

“졸려요?”

자다 깬 연호의 몸이 따끈따끈했다. 연호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응….”

“더 자요.”

“잘 거야.”

“이러고?”

“응. 나 신경 쓰지 마요….”

연호는 유진에게 언제 끝나는지를 묻는 대신 그의 몸 위에 완전히 늘어졌다. 이대로 유진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기다릴 작정이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면 유진은 곧잘 끼니를 거르거나 잠을 자지 못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유독 그 정도가 심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더니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연호가 유진을 품에 안은 채 스르륵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이 다시 노트북을 여는 게 느껴졌다.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꼭 자장가처럼 들렸다. 연호는 유진의 위에서 한참을 졸았다. 잠이 든 것도, 잠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닌 몽롱한 순간이 이어졌다. 문득 연호가 눈을 뜨자 허공에서 덜렁덜렁 흔들리는 자신의 다리가 내려다보였다.

떨어지면 아프겠다…. 연호가 무의식중에 잔뜩 힘을 주며 유진에게 매달렸다. 무게가 더해지자 유진이 잠시 멈춰 서서 연호를 고쳐 안았다. 연호는 코알라처럼 유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정확히는 그 상태로 옮겨지고 있었다.

“…근육….”

잠이 깬 건지 연호가 무어라 잠꼬대를 했다. 유진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형, 근육….”

등 뒤에 둘러진 연호의 손이 유진의 견갑골을 더듬거렸다. 체격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었지만, 다 큰 성인 남자를 들고 있으려면 근육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유진의 몸을 더듬는 손길은 그들이 침실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형은, 벗은 게 훨씬….”

이건 좀 궁금했다. 유진이 연호의 이어질 뒷말을 기다렸다.

“커다래….”

“…커다래요?”

유진의 물음에 연호가 잠결에도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커다랗다는 게 무슨 말이지. 설마 그래서 싫다는 건…. 유진이 심각하게 연호의 말을 곱씹었다.

“멋있어….”

아무래도 칭찬인 모양이었다. 유진이 안도하며 활짝 웃어 보였다. 연호는 여전히 잠에 취해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몸도, 크고….”

유진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골격이 큰 편이었지만 막상 옷을 입으면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어딘가 가련해 보이는 외모 탓이 컸는데,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매가 아니어서 더 그래 보였다. 같은 운동을 해도 유진의 형은 근육이 잘 붙는 반면, 유진은 그렇지 않았다.

유진이 유단자인 형을 따라 유도를 시작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형처럼 전국 대회에 출전할 정도의 실력은 못 되지만 확실히 기초 체력은 좋아졌다. 적어도 연호를 들어 올릴 정도는 되니, 형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유진의 입장에서는 이만하면 꽤나 성공한 셈이었다.

“고추도….”

잠에 취한 와중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객관적인 평가에 픽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서 성기가 작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유진은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릴 뻔했다.

“그런 얘기는 깨어 있을 때 해 주면 좋겠는데.”

“…….”

“자요?”

색색, 곤히 잠든 숨소리가 달았다. 연호가 아기 같지 않은 얼굴로 아기처럼 자고 있었다. 유진은 한참 동안 연호를 바라보다가 이내 연호 옆에 몸을 뉘었다.

아무것도 아니기를, 이제 그만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를. 유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바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느덧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연이은 외박으로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었던 연호는 유진이 지방에 내려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귀향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도 졸업했겠다, 입사 일도 확정됐겠다. 최근의 연호는 반 백수나 다름없었다. 원래도 시간이 차고 넘치는 연호였지만 요즘에는 더더욱 시간이 흘러 넘쳤다. 너무 많아서 유진에게 나눠 주고 싶을 정도였다.

고작 하루였지만 오늘이면 드디어 교수님을 따라 지방에 내려간 유진이 서울로 돌아온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아침부터 유독 운이 좋았다. 밥을 하려고 밥통을 열자 갓 지은 쌀밥이 들어 있었고, 냉장고에는 엄마가 연호에게 남기고 간 쪽지까지 붙어 있었다.

와, 뭐지? 나 오늘 생일인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진 연호는 엄마의 부탁대로 얌전히 심부름을 다녀왔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심부름을 다녀온 곳에서 홍시를 받아온 덕분에 도리어 기분만 더 좋아졌다. 제철을 맞이한 홍시는 달고 맛있었다. 더 먹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나머지는 엄마와 유진과 함께 먹을 생각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연호를 따라 하기라도 하듯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어 댔다. 연호가 빨래를 내팽개치고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 어디예요?

유진에게 온 전화였다. 연호가 바닥에 집어 던진 빨래를 주워 올리며 대답과 동시에 질문을 했다.

“집이요! 빨래 널어요. 형은 뭐해요? 밥은 먹었어요?”

- 방금 식사 마치고 지금은 택시 기다리는 중이에요. 일식집이었는데 나쁘진 않았어요.

연호는 여전히 유진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넘치는 애정이 귀찮을 법도 한데 유진은 차근차근 연호의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이제 올라오는 거예요?”

- 응. 나 먼저 올라가려고요. 어차피 내가 강연하는 것도 아니니까….

사실 이제 막 학부를 졸업한 유진이 지방에서 하는 강연회를 따라갈 이유는 없었다.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는, 아직 지도 교수도 정해지지 않은 유진이 강연회에 참석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아버지와 형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부자가 같은 업계에서 현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만큼, 유진의 행보도 자연히 정해져 있었다. 그가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는 이유는 두 사람과 같은 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듯, 유진은 일찌감치 사법 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하고 말았다. 사법 고시는 폐지되었고, 사법 고시 세대인 아버지와 형과 달리 유진은 반 강제적으로 로스쿨에 입학해야만 했다.

형은 우리나라 최연소 사법 고시 합격생이었다. 유진은 사법 고시가 폐지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걸 다행으로 여기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었다.

“그럼 서울역에서 바로 학교로 오겠네?”

- 응. 우리 학교에서 하는 게 마지막이에요.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아직 강연이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끝을 바라는 연호의 솔직한 투정에 유진이 작게 웃었다.

“빨리 와요.”

- 빨리 갈게요.

다정한 목소리에 젖은 빨래를 터는 손놀림이 경쾌했다. 유진이 예정보다 일찍 올라온다고 해서 강연회 시간이 앞당겨지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같은 도시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히 마음이 들떴다.

잠깐, 같은 도시? 통화를 마치고 마저 빨래를 널던 연호가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는 KTX 시간표부터 찾아보았다. 당연하게도 열차별 도착 예정 시간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연호는 유진이 도착하는 시간과 장소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데리러 갈까. 연호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역까지 가 본 적은 없지만, 내비게이션만 있으면 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마저 빨래를 너는 연호의 손길이 빨라졌다.

***

평일 대낮에도 서울역에는 사람이 북적거렸는데, 자동차는 그보다도 훨씬 많았다. 근처에서 접촉 사고가 발생한 덕분에 교통 체증까지 더해진 상황이었다. 교통 대란을 뚫고 간신히 오토바이를 세워 놓은 연호가 야심차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예요?”

이번에는 연호가 선수를 쳤다. ‘어디예요’는 통화를 할 때마다 유진이 연호에게 건네는 불굴의 고정 대사였다.

- 방금 내려서 택시 탔어요.

여상한 대답에 연호가 황급히 시간을 확인했다. 유진이 탄 기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 근데 사고 나서 차가 많이 막히-.

“벌써? 왜!”

빨리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도리어 타박이 돌아왔다. 유진이 잘못한 거라곤 연호에게 알려 준 것보다 30분이나 빨리 출발하는 기차를 탄 것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번 서프라이즈는 말 잘 듣는 유진 때문에 대실패로 돌아갔다.

- 왜? 내가 빨리 오면 안 될 짓이라도 하고 있었어요?

“또 말 그렇게 한다. 우리 유진이, 형이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연호가 대놓고 혼을 내자 유진이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연호의 훈육은 연호가 오토바이에 올라탄 후에도 계속되었다.

“대답해야 착한 유진이지.”

-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 유진이 대답도 잘해요. 기억력도 좋아요.”

- …알겠으니까 그만해요.

“오구, 그만하라는 말도 할 줄 알아요.”

- …안 그럴게요. 이제 그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지 말라는 건 더 하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법이다. 연호는 한참 동안 유진을 괴롭힌 후에야 훈육을 빙자한 장난을 멈췄다.

“집에 안 들르고 바로 학교로 갈 거예요?”

- 오늘이 제일 중요한 날이라 일찍 가서 얼굴 비춰야 해요.

“얼른 가서 해치우고 와요.”

- 해치워?

“해치워! 그리고 나랑 놀아. 오늘 자고 가도 돼요?”

하하, 휴대폰 너머로 유진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 같은 피곤한 목소리에 미소가 어리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연호가 기대감 속에서 유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 매일 자고 가도 돼요.

“어, 그러면 나 진짜 매일 갈지도 모르는데.”

- 응. 매일 와. 매일 와 줘.

진심을 담아 너스레를 떨자 유진이 진지하게 대꾸해 왔다. 사소한 장난이라도 연호가 주는 건 무엇 하나 흘리지 않고 감사하게 받아 주는 유진이 좋았다. 연호도 유진을 따라 슬슬 출발할까 싶어 오토바이 키를 찾는데, 유진이 잊지 않고 의례히 오늘의 할 일을 했다.

- 그래서 지금 어디예요?

어디긴. 서울역이었다. 사실대로 얘기하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랬다가는 유진이 연호에게 미안해할 게 뻔했다. 유진은 연호가 쏟아붓는 애정을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드는 사람이었다. 연호는 그런 유진을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엄마 심부름하러 나왔어요. 이제 집에 갈 거예요.”

따지고 보면 시간 순서가 조금 다를 뿐, 완전히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괜히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유진과 사귀기 전, 밖에 나가지 말라던 유진의 약속을 어겼을 때 느꼈던 찝찝함과 닮아 있었지만 당장 깨닫지 못했기에 연호는 대수롭지 않게 이를 무시해 버렸다.

두 사람의 통화는 유진에게 전화가 걸려 오면서 마무리되었다. 이제 연호도 곧 출발할 참이었다.

“아, 여기 계셨구나.”

평일 대낮에, 그것도 서울역에서 연호에게 아는 척을 할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연호가 출발을 하려다 말고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연호가 살면서 본 적 없는 완벽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컸다. 유진보다 조금 더 큰 키에 체격 자체가 남달랐다. 쳐다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계속 통화 중이셔서 한참 찾았어요.”

그런 주제에 정장이 잘 어울리는 도회적인 외모였다. 남자답게 잘생긴 시원한 이목구비와 어딘가 살가운 친근한 미소가 남자를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남자는 완벽한 어른 남자 같은 외양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마치 아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당연하게도 연호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연호가 미심쩍은 듯이 물었다.

“저 아세요?”

자신을 향한 경계어린 태도가 어색한지 남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것도 잠시, 이내 남자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믿음직스러운 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니요. 잘 모릅니다. 오늘 처음 뵈었으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논리에 말문이 막힌 연호가 가만히 남자를 쳐다보자,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로 화답해 왔다.

“더 궁금하신 건 차차 말씀드리고, 이제 그만 출발해도 될까요?”

연호가 대꾸 없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자 남자가 부드럽게 연호를 채근해 왔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화법이었다. 연호는 자기도 모르게 유진을 떠올렸다.

“기사님?”

다시 보면 볼수록 남자는 완벽한 성인 남성다운 모습이었다. 외모도 외모였지만 정중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모습이 연호가 꿈꾸는 어른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저 기사 아닌데요.”

“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

“1시에 xx 대학교로 사람 퀵 서비스 예약되어 있지 않나요?”

남자는 연호를 퀵 서비스 직원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헬멧과 마스크, 방한 기능에 특화된 검정색 점퍼와 여분의 헬멧까지 가지고 있으니 그래 보일 만도 했다.

“그건 모르겠고, 전 아니니까 퀵에다 전화해 보세요.”

“그럼 잠깐 실례 할게요.”

예의 바르게 목 인사를 건넨 남자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는 듯 남자는 연호에게 잠시 기다려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딱히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기에 연호는 순순히 남자의 부탁에 응했다. 여기에는 남자의 정중한 태도도 한몫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1시에 xx 대학교로 사람 퀵 서비스 예약한 천… 아, 네. 아직 서울역이요.”

마침내 통화가 연결되었다. 연호는 멀뚱히 서서 그런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얼마나… 30분이요? …앞에 사고가 나서 택시는 일부러 안 불렀어요. …네. xx 대학교까지요.”

xx 대학교면 유진의 학교이자 연호의 동네였다. 신기한 우연이었지만 그뿐이었다. 연호는 심드렁하게 남자가 통화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제가 이따가 강연회가 있어서….”

어, 그거 우리 유진이도 듣는 건데.

연호의 시선이 다시 남자에게 향했다. 생각해 보니 연호가 드라마에서 본 검사들도 하나같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연예인이었지만 눈앞의 남자 역시 충분히 연예인 같았다.

“제가 발표자라서 여유 있게 도착해야….”

남자는 유진과 같은 강연회를 듣는 것도 모자라, 유진이 들으러 가는 강연회의 발표자이기까지 했다.

유진이 형이랑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혼자서 가지고 있던 거리감이 줄어들었다.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통화는 끝내 남자의 퀵 서비스가 취소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통화를 마친 남자는 꽤나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착각했어요.”

남자가 연호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해왔다. 연호는 그런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유진과 아는 사이일 확률이 높은데다 연호와 목적지까지 같았다.

“저기요.”

연호가 오토바이 위에서 남자를 불렀다.

“타요.”

“네?”

“데려다줄게요.”

연호는 기왕이면 남자가 유진과 친한 사이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유진에게 제대로 칭찬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처음부터 동기가 불순한 선행이었다.

그렇게 연호는 별생각 없이 뒷자리에 남자를 태웠다. 계획대로라면 유진이 앉았을, 유진의 자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호는 남자와 함께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남자는 제일 먼저 연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고작 헬멧을 벗었을 뿐인데 남자는 마치 영화 속 주인공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대학가에서 보기 드문 완벽한 정장 차림에 사람들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쏠렸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호의를 보내거나 관심을 가지는 상황에 매우 익숙해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오토바이를 태워 주는데 의심조차 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연호는 유진과는 다른 의미로 남자가 신기했다.

남자가 연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몇 학년이에요?”

얼마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연호는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대학생도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게 3학년이라고 대답할 뻔한 연호가 알아서 대답을 정정했다.

“학생 아닌데요.”

“우리 학교 학생 아니에요?”

“네. 아닌데요.”

세상에는 연호처럼 대학생이 아닌 스무 살도 많았다. 연호의 불퉁한 대답에서 불쾌한 기색을 알아차린 남자가 금세 태도를 바꿔왔다. 남자는 사람을 대하는 일에 무척 능숙했다.

“지리를 너무 잘 알아서 당연히 우리 학교 학생일 줄 알았어요.”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납득이 갔다. 네, 뭐…. 연호가 대충 대꾸했다.

“바로 신관 앞에 세워 주셔서….”

연호는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신관에는 대강당이 있었다. 유진을 통해 알게 된 사실 중 하나였다.

“정말 고마워요.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 한잔하실래요?”

남자가 의례히 인사치레를 했지만 연호가 받고 싶은 호의는 따로 있었다. 연호는 남자가 유진과 아는 사이인지가 궁금했다. 그저 말솜씨가 없어 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고민 중이었다.

“어…. 아니요, 그게….”

“감사해서 그런 거니 부담스러우시면 거절하셔도 돼요.”

고민하는 연호를 눈치챈 남자는 그 이상 무리한 호의를 전하지 않았다. 배려하는 제스처가 몸에 익은 사람인 듯했다.

“잠시만요.”

때마침 유진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달라는 연호의 메시지를 이제야 본 것 같았다.

“저 잠깐 전화 좀.”

“아, 네. 편하게 받으세요.”

연호가 전화를 받기 위해 급하게 헬멧을 벗었다. 한 시간도 넘게 헬멧을 쓰고 있었더니 새삼 바깥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응!”

코끝까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리며, 연호가 밝게 대답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모습에 휴대폰 너머에서 유진이 웃는 게 느껴졌다. 연호도 유진을 따라 웃었다.

- 지금 봤어요. 무슨 일 있어요?

“어디쯤인가 해서요. 다 와 가요?”

- 조금 더 가야 돼요. 차가 많이 막히네요.

남자와 유진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조장하려던 연호의 서프라이즈는 이번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연호가 남자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나 학교니까 도착하면 전화해요. 끝나면 나랑 또 만나.”

- 그건 좋은데….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안에 들어가 있어요.

유진은 여전히 연호가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걸 싫어했고, 그걸 연호만 몰랐다. 자꾸만 어딘가에 들어가 있으라는 유진의 당부에 대답하는 것을 끝으로 연호가 전화를 끊었다.

“저기요.”

“…….”

“저기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남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놀란 얼굴로 연호 앞에 서 있었다. 그냥 서 있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연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뭐지? 연호가 의아해하며 남자를 마주 보았다. 한참 동안 연호를 쳐다보던 남자가 이내 어른스럽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음…. 방금 여자 친구예요?”

“아닌데요.”

정확히는 남자 친구였다. 쓸데없이 솔직한 연호의 대답에 남자가 더더욱 놀란 얼굴을 했다.

방금 전의 연호는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봐서는 안 되는 걸 본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같은 동성에게 색기 같은 게 흐를 리가 없으니 그의 기분 탓이 분명하겠지만, 남자는 쉽사리 연호에 대한 잔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커피는 됐고.”

“아, 네.”

연호가 남자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남자가 애써 이상한 생각을 떨쳐 내며 연호를 마주했다.

“커피 말고….”

연호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어떻게 운을 떼야 연호의 불순한 의도가 자연스러워 보일지 그저 어렵기만 했다.

남자가 기억하기로는 연호는 처음 보는 사람을 태우는 순간에도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줄곧 남자의 호의를 거절할 때는 언제고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연호가 어색하게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편하게 얘기하셔도 돼요.”

“…….”

“혹시 사례금으로 드리는 게 더 좋을까요?”

의도가 불순한 건 맞지만 돈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딱히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한 연호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네?”

“그쪽 이름이요.”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걸 보면 당연히 사례금을 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연호의 질문에 남자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도리어 당황한 건 연호였다.

“제 명함이에요.”

남자가 연호에게 명함을 건넸다. 살면서 어른에게 명함을 받아 본 적 없는 연호가 어색해하며 바라보고만 있자, 남자가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름도 나와 있고 연락처도 적혀 있으니 나중에 무슨 일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아무런 의심 없이 건네지는 타인의 호의에는 영 익숙하지 않았다. 연호가 머뭇거리며 명함을 받아 들었다.

“아마 저한테 연락할 일이 없는 편이 더 좋겠….”

“와….”

명함을 보고 있던 연호가 돌연 남자의 말을 끊었다. 연호는 그를 이상한 기분에 빠지게 했던 사랑에 빠진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짜 신기하네….”

“…….”

“이 정도면 운명인 것 같은데….”

연호가 남자에게 다 들릴 정도로 달콤한 말을 중얼거렸다. 남자가 멍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연호는 계속해서 명함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오늘 내가 태워 준 거 잊지 말아요.”

“…….”

“절대 잊으면 안 돼.”

연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겨우 그것뿐인데도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주머니에 명함을 집어넣은 연호가 또 다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연호의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응. 나 신관 앞에!”

반응을 보아하니 방금 전과 같은 사람에게 걸려온 전화인 것 같았다. 그래 봤자 목소리를 듣는 게 다일 텐데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연호의 눈꼬리가 잔뜩 휘어져 있었다.

그런데 여자 친구가 아니라고? 남자는 쉽사리 의문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형 안 보이는데.”

형. 정황 상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단어였다.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사람이 친형제일 리가 없었다. 친형제가 있는 남자는 누구보다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정은 하나, 여자 친구가 아닌 남자 친구인 경우였다.

“어, 보인다. 지금 갈게요.”

대답과 동시에 전화를 끊은 연호가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연호가 눈짓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기분 탓인지 남자를 바라보는 연호의 두 눈에 호의가 가득했다.

남자는 자신을 향한 호의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기분 탓일 리가 없었다.

“잠깐만요!”

확신과 동시에 남자가 연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감 넘치고 망설임 없는 손길이었다.

끽!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연호의 몸이 크게 앞으로 쏠렸다. 출발하는 연호를 가로막은 손이 급하게 연호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연호를 감싸 줄 것도 없이 처음부터 방해를 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자칫 사고가 날 뻔한 상황이었다.

단단하다 못해 딱딱한 남자의 팔이 연호를 받쳐 주긴 했지만 충격까지 완전히 흡수해 주지는 못했다. 오토바이 핸들 바에 짓눌린 명치가 욱신욱신 아파 왔다.

부산스럽게 연호를 살피던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명치가 아닌 다른 부위가 아릿하게 아파 왔다. 남자의 딱딱한 팔에 짓눌린 가슴이 아파 왔다. 정확히는 가슴 피어싱이 있는 젖꼭지 쪽이 아팠다. 피어싱을 한 부위는 거의 다 아물어 가고 있었지만 이런 외부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를 알아차린 건 연호만이 아닌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건 남자였다.

“이름을… 안 물어본 것 같아서요. 연락 줬을 때 이름은 알고 있어야 하니까….”

청산유수처럼 대화를 이끌어가던 남자가 처음으로 횡설수설했다. 연호의 가슴 피어싱을 의식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쪽팔리긴 했지만 어차피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이었다. 연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남자의 생각은 달랐다. 남자는 연호에게 당연히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연신 다정하고 친근하게 굴었다.

“큰일 날 뻔했네요. 괜찮아요?”

먼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연호가 대꾸 없이 자신의 가슴에 둘러져 있는 남자의 팔을 밀어냈다.

“그, 혹시, 찢어진 건….”

남자의 시선이 연호의 가슴으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남자는 연호의 얼굴과 가슴을 계속해서 번갈아 보고 있었다.

“됐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도….”

“놔요. 만지지 말아요.”

탁, 연호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어깨를 그러쥐는 남자의 손을 쳐 내자 남자가 놀란 얼굴을 했다. 마치 이럴 줄 몰랐다는 듯, 얼떨떨해 보이기까지 했다. 겨우 손을 쳐낸 정도로 이러는 걸 보면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거절 당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사고로 이어질 뻔한 작은 소란에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연호가 다시 허리를 곧추세우는 동안에도 남자는 여전히 연호의 옆에 서 있었다. 아직도 연호에게 볼일이 남은 것 같았다.

“안 비켜요?”

남자는 지금 막 사고를 낼 뻔하고도 또 다시 오토바이를 막아섰다. 사고의 위험에 예민해진 연호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물어보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연호는 유진에게 달려 갈 생각뿐이었다. 남자가 무엇을 묻는다 해도 일단 대답하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혹시….”

남자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강연호.”

연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유진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연호의 시야를 가로막은 남자 때문에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여기서 뭐….”

“천유진?”

역시 이 목소리는 유진이 맞았다. 반가움은 잠시, 연호는 가족 상봉에 밀려나고 말았다. 유진이 지방에 내려간 순간부터 연인과의 달콤한 재회를 꿈꾸던 연호였지만, 피는 물보다 진했다. 유민이 유진에게 호탕한 인사를 건넸다.

“며칠 전에 집에 왔었다면서. 형 얼굴이나 보고 가지 왜 그냥 갔어.”

“…….”

“어릴 때는 형, 형 하면서 잘만 따라다니더니.”

유진을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사람을 본 건 유민이 처음이었다. 연호는 오토바이 위에 앉은 채 두 형제의 재회를 지켜보았다. 명함에 적힌 이름이나 유민의 태도로 봤을 때 두 사람은 형제가 분명했지만 어째서인지 유진의 반응이 영 이상했다.

유진은 가만히 유민을 쳐다보기만 했다. 시선의 끝에는 연호가 있었다. 유진이 유민과 연호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둘이 아는 사이야?”

유민이 연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유진의 시선이 완전히 연호에게 향했다.

“강연호? 그게 이름이에요?”

유민은 스쳐 지나간 연호의 이름을 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정작 연호는 이름이 불린 것도 모르고 유진을 보고 있었다.

“유진이 형네 형 아니에요?”

역시 유진이 이상했다. 연호가 미심쩍게 물었다

“음, 맞긴 한데….”

“맞으면 맞는 거지 아닐 게 뭐 있어요.”

“그냥… 신기해서요.”

연호로서는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유민은 이번에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마치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는 듯, 이 상황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

유민이 유진에게 동의를 구했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민은 유진이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신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유민이 연호를 신기해하며 물었다.

“보통은 다들 유민이 동생이라고 부르거든요.”

“뭔 소리예요.”

“유진이네 형이 아니라 유민이 동생.”

유진을 부르는 것도 아닌데 이름이 불리기라도 한 것처럼 유진이 움칠 몸을 떨었다. 유민이 태연하게 뒷말을 이어 나갔다.

“뭐가 그렇게 신기하나 했더니 이거였네.”

…뭐라는 거야? 연호에게는 딱 그 정도였다. 한낮 개소리에 불과한 유민의 한 마디가 유진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유민과 함께 있는 연호를 바라보고만 있던 유진의 얼굴이 끝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유민이 동생.

이것만큼 유진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답은 금방 나왔다. 없었다. 유진은 유민이 동생이었고, 유민의 동생이며, 앞으로도 유민의 동생일 테다.

평생을 유민이 동생으로 불려 왔다. 천유진이라는 이름은 유민의 동생임을 증명하는 증거에 불과했다. 유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은 분수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적어도 연호에게도 알려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연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데 굳이 연호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꼭 알아야 하는 거야? 대체 왜?

도대체 언제까지?

누구도 답해 준 적 없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근본적인 의문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숨이 막혔다. 무서웠다. 가장 무서운 건 연호의 시선이 유민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안 돼.

이 이상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거야.

그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안 돼. 내 거야. 싫어. 안 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뭐야. 그게 다야?”

불퉁한 목소리가 오래된 상념을 무너뜨렸다. 계속해서 연호를 보고 있었는데도 이제야 연호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연호가 어이없는 얼굴로 유민을 쏘아보고 있었다.

“유진이 형이면 유진이 형인 거지 그게 뭐라고 신기하네 아니네….”

응. 그러게. 그러니까. 그게 뭐라고. 대체 그게 뭐라고. 유진이 애써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숨겼다.

“진짜 유진이 형네 형 맞아요?”

“…맞아요.”

이런 질문은 처음인 듯, 유민이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흐흠…. 유민을 살피는 연호의 두 눈에 의심이 가득했다. 유민이 유진의 형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나도 안 닮았는데.”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유민의 대답에 유진이 죄지은 사람처럼 움츠러들었다. 잘못한 건 없었지만 유민의 앞이라는 이유만으로 습관처럼 그러고 말았다. 평생에 걸쳐 만들어진 습관이라는 건 이토록 무서웠다.

“그렇구나…. 아쉽다.”

연호가 유감을 표했다.

“우리 유진이 형 닮았으면 훨씬 더….”

또 다시 연호의 콩깍지가 발휘되었다가 강제적으로 소강되었다. 연호는 백 마디 말 대신 유진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고작 그것뿐인데 연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해 보였다. 연호가 다시 유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유진이 형 어렸을 때 어땠어요?”

“네?”

“아씨, 좋겠다. 옆에서 맨날 봤을 거 아니에요….”

연호가 유민을 부러워했다. 유진을 동생으로 둔 유민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어땠어요? 그때도 지금처럼 예쁘고 착했어요?”

“예쁘기는… 했죠.”

유진을 주제로 한 대화가 어색한 듯 유민이 적당히 대답을 넘겼다. 비로소 듣게 된 유진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연호가 눈을 빛내며 유민을 쳐다보았다. 연호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자, 유민은 차마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억지로 기억을 더듬었다.

“음…. 고등학교 가기 전까지는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아씨, 그럴 줄 알았어요. 사람이 너무 착하기만 하면 안 되는데….”

연호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유진을 천사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연호는 안 그렇게 생겨서 의외로 순수한 면이 많았다. 유민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반문을 해 왔다.

“그래서가 아니라, 이거 때문에요.”

“그게 뭔데요?”

유민이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연호의 얼굴을 가리켰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연호가 멀뚱멀뚱 유민을 올려다보자, 유민이 부드럽게 웃으며 연호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

“부모님이 원래 딸을 갖고 싶어 하셔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유민이 연호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손가락을 떼어 냈다. 연호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온 손을 쥐었다 펴는 모습이 꽤나 익숙했다. 유진은 유민의 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저 행동은 유민이 시험이나 시합을 치러 들어가기 전에 하곤 하는 단순한 습관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중학생 남자애가 호신용 스프레이가 필요할 정도로….”

“형.”

그리고 유민은 언제나 이겨서 돌아왔다. 유진이 다급하게 연호와 유민 사이에 끼어들었다.

“연호랑 아는 사이였어요?”

“오늘 처음….”

“처음 보는 사람을 왜 함부로 만지고 그래요.”

처음으로 유민의 말을 끊고 일방적으로 제 할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정신없이 연호의 얼굴을 닦고 있었다. 꼼꼼한 손길과 달리 정작 연호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덕분에 연호는 반 강제적으로 유진의 코트로 세수를 당하고 있었다.

“…기분 더럽게….”

연호의 턱을 그러쥔 유진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앞이 보일만하면 얼굴을 문질러오는 유진의 코트 때문에 유진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연호는 유진을 밀어내는 대신 순순히 제 얼굴을 내주었다.

시야를 방해하는 코트가 사라지자 여느 때처럼 연호를 내려다보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유진은 연호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요.”

연호가 대답할 틈도 없었다. 유진이 연호를 붙잡았다.

“그만 가요.”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는 연호를 끌어내리는 손길이 다급했다.

“일단, 빨리….”

“천유진. 거기 서.”

무게감이 느껴지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유진을 옭아맸다. 유민의 한 마디에 유진은 본능적으로 멈춰 섰다.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다.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유민이 시키는 대로 발이 먼저 움직였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유민이 알고 있는 유진은 그 흔한 사춘기 한 번 겪지 않은 내성적이고 말 잘 듣는 얌전한 아이였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예의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호 씨랑 나랑 얘기 중인 거 안 보여?”

맞는 말이었다. 유진이 오기 전까지 연호와 유민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진이 오지 않았더라면 계속 그러고 있을 뻔했다. 연호의 손목을 쥐고 있는 유진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더해진 악력이 아팠는지 연호의 손목이 움츠러들었다. 옷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붙잡힌 손목이 하얗게 질려 있을 것이다.

다정하게 대해 줘야 하는데. 그러고만 싶은데.

유진이 황급히 연호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훨씬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로 연호의 손목을 쥐었다가.

“…해 봐, 그러면.”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잡아 벌리며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유진이 캠퍼스 한복판에서 손깍지를 껴 올 줄은 몰랐는지 연호가 놀란 얼굴을 했다.

“뭐?”

“얘기 중이라면서요. 마저 하라고, 지금.”

“…너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왜 이래?”

유민이 다가오려 하자 유진이 비키지 않고 연호로부터 유민을 막아섰다. 그것도 모자라 연호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는 모습이 유민에겐 아주 웃기지도 않았다. 황당해하던 유민이 돌연 걱정스럽게 유진을 쳐다보았다.

“설마… 아직도 그래?”

누가 들어도 사연 있어 보이는 목소리에 연호가 유민에게 귀를 기울였다. 유민이 유진을 안쓰러워하며 말했다.

“약에 부작용 생겼어?”

대학 입시를 앞두고 극도의 불면증에 시달렸던 유진은 몇 년 간 약을 복용했었다. 그 사실을 다른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형은 정말 좋은 사람이기만 한 걸까. 아니면 형을 부러워한 유진이 치졸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별것 아닌 한 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걸까.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이제 와서 지난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설령 유진의 착각이 아니었다 해도 유진이 겪어 온 지난 시간들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과거가 끝나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 쌓여 온 기억들이 계속해서 유진의 발목을 잡았다. 언제까지라고 묻는다면 아마 앞으로도 그럴 테다. 유진은 영원히 유민의 동생일 테지만, 언젠가는 이조차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꾸 내 얘기만 하고 있는 거 보면 둘이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나 봐요.”

동생을 걱정하는 형에게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유민은 유진의 말을 듣고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 쓸데없는 대화는 그냥 잊어버려요. 아니면 버리든가.”

유진이 다시금 연호의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연호가 끌려가듯 유진을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천유진!”

언제나 그래 왔듯 유진은 이번에도 형의 부름에 멈춰 서고 말았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유진은 감히 형에게 등을 보이며 완전히 돌아섰다. 과거를 없앨 수는 없지만 과거가 곧 미래는 아니었다. 유진은 처음으로 형을 등지고 앞을 향해 걸었다. 곁에는 연호와 함께였다.

고작 그것뿐인데 나쁜 짓을 한 아이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마치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 같았다. 연호의 손에 끼워진 손깍지가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유진을 따라가던 연호가 유진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저기요.”

연호는 뒤를 돌아 유민을 불렀다. 유민을 부르는 연호의 목소리에 앞장서서 걷던 유진이 그대로 멈춰 섰다.

“우리 유진이 형 예뻤던 거 알려 줘서 고마워요.”

…형, 가요.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끝이었는지 연호가 맞잡은 손을 흔들며 도리어 유진을 재촉했다. 유진이 반응하지 않자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연호가 다시금 유민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녕히 가세요.”

연호가 허리까지 숙여가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유진의 친형 앞이라는 자리에 걸맞은 정중한 인사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당장 둘만 있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유진은 자신이 어떻게 연호의 집까지 왔는지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알고 있는 건 연호의 엄마는 저녁에야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연호의 집은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둘만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둘이 어떻게 만났어요?”

연호의 집 현관문이 채 닫히기도 전이었다. 이미 강연회가 시작한 시간이었지만 유진은 강연회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역에서 만났어요.”

“역은 왜 갔어요? 엄마 심부름하러 갔던 거 맞아요? 거기서 만난 거예요?”

“어…. 맞긴, 한데….”

거짓말이구나. 대답을 망설이는 연호의 모습에 유진이 확신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연호는 끝내 사실을 고했다.

“형네 학교 가야 한다고 하길래…. 형이랑 같은 강연회 간다고 그러고….”

당연하게도 연호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유진은 한 번도 연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형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었다. 죽어도, 없었다.

“태워 줬어요.”

…하. 유진이 탄식했다.

“형이랑 아는 사람 같아서 태워 준 건데….”

“…….”

“가는 길이기도 했고….”

“…….”

“…앞으로는 그러지 말까요?”

칭찬 받을 생각에 들떠 있던 건 이미 오래전으로, 연호는 알아서 유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 연호에게 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정말? 정말? 그럴까? 유진은 자신하지 못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어?

유진은 지치지도 않고 끝없이 불안해했다. 의심했다. 결국 이 모든 불안의 근원은 딱 하나였다.

좋아해. 유진이 침음했다. 좋아서, 누군가를 너무 좋아해서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연호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유진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유진은 몰랐다. 설사 방법이 있다 해도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다. 사랑받는 감각도, 사랑하는 감각도, 사랑하며 느끼는 불안과 자책까지 모두.

전부 다 내 거야.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태워 주고 다닐 거예요?”

유진은 어쩌지도 못하고 애꿎은 연호의 어깨를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척하고 다닐 거고?”

“당연히 아니죠. 이번에는 그냥,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유진이 연호의 말을 곱씹었다.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왜 형이었어요?”

유진과는 뉘앙스가 달랐지만 연호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유진의 형을 마주치게 될 줄이야, 두 번은 있기 어려운 우연이었다.

“그러게요. 완전 신기하지 않아요?”

“정말 우연이었던 거 맞아요?”

“그럼요?”

“다른 마음 있었던 건 아니고?”

“뭐?”

“큰 남자가 좋다며. 형이 나보다 더 크잖아요. 형이 나보다….”

…나보다…. 유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입술을 닫았다. 연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지금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그렇고 그런 의미가 맞는지, 검증이 필요했다. 마침내 유진의 진심을 알아차린 연호가 뒤늦게 경악했다.

“와, 사람을 어떻게 보고! 내가 형을 두고 왜!”

“…둘이 만났잖아요.”

“그건 진짜 우연히…! 형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야. 아니라고!”

“그걸 어떻게 믿….”

“왜! 왜 못 믿는데! 내가 형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

“설마 몰라? 진짜 몰라? 그걸 왜 몰라!”

억울함을 이기지 못한 연호가 패악을 떨자 유진의 기세가 한층 수그러들었다. 비로소 둘만 있게 된 두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듯 유진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아니,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유진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요?”

“몰라요. 기억도 안 나.”

객관적으로도 유민은 잘생겼고 어른스러웠으며 신사적이었지만 그게 다였다. 유진의 형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유민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연호가 불퉁하게 쏘아붙이자 마침내 유진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왔다.

유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유진이라 해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연호가 유진을 마주 안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 완전 서운할 뻔했어.”

“…….”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응.”

“아까는 어떻게 만난 거냐면…. 아야!”

유진이 힘을 주어 안자 연호가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놀란 유진이 황급히 떨어져 나갔다.

“아으….”

연호가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급정거를 하면서 유민의 팔에 짓눌렸던 가슴 피어싱이 따끔거렸다.

“미안해요. 아팠어요?”

유진이 걱정스럽게 연호의 안색을 살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유진의 모습에 마음이 저절로 약해졌다. 연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형이 그런 거 아니에요. 아까 형네 형 때문에….”

“…지금 피어싱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어, 맞는데….”

연호의 피어싱은 가슴에 달려 있었다. 이를 고하는 연호의 태도는 한없이 태연하기만 했다.

가슴에 있는 피어싱이 왜 아픈 건데?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은 건 연호뿐이었다.

“형?”

유진은 대답 대신 다짜고짜 연호의 상의를 끌어 올렸다. 연호는 체온이 높은 편으로,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연호의 맨살이 따끈따끈했다. 그중 유독 붉은색을 띠는 부위가 있었다. 연호의 한쪽 가슴이 전체적으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세히 보니 피어싱이 달려 있는 젖꼭지가 살짝 부어 있었다. 이건 젖꼭지에 직접적인 자극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생길 수 없는 흔적이었다.

혼란스럽던 머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이때의 유진은 누구보다 이성적이었다.

형은 연호의 가슴에 피어싱이 있다는 걸 알았을까. 아마 알았을 테다. 겉보기에는 모르겠지만 연호의 가슴을 만져 봤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말랑한 젖꼭지에 달려 있는 금속의 감촉은 절대로 무시할 만한 게 못 되었다.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실제보다 더한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연호의 가슴에 피어싱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별로 안 아파요.”

연호가 아프지 않다면 그걸로 될 일이었다. 연호가 아프지 않다면 그것보다 더한 다행은 없을 테지만 지금의 유진은 무엇이 다행인지 알지 못했다.

“나 괜찮…. 으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연호가 바닥으로 밀쳐졌다. 쿵! 큰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 아프지는 않았다. 있는 힘껏 밀린 연호는 정작 눈을 떴을 때 유진의 품에 안락하게 안겨 있었다. 맨바닥에 여과 없이 부딪친 건 연호의 등 뒤에 둘러진 유진의 팔이었다.

유진이 괜찮은지를 물어보려던 연호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유진이 다짜고짜 연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겉옷이 벗겨지더니 곧바로 맨투맨이 얼굴 위를 빠져나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속에 입은 반팔 티셔츠까지 모조리 벗겨지자 이번에는 바지 버클이 붙들렸다. 무작정 바지 버클을 풀어 헤치는 손길에 연호가 다급히 유진의 손을 붙잡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왜?”

유진이 자신을 가로막은 연호의 손을 내려다보며 자조적으로 물었다.

“나한테 보여 주면 안 될 짓이라도 했어?”

“뭐? 무슨…!”

“손 치워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싸늘한 유진의 모습에 연호가 더욱 힘을 주어 유진의 손을 붙잡았다. 그걸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유진을 막아서는 연호의 손길에 유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강연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하나도 다정하지 않았다.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연호를 내려다보는 유진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손, 치워.”

…갑자기 왜? 유진은 여전히 연호의 바지 버클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있었다. 강하게 연호를 압박해오는 유진의 손길에 연호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떼어 냈다. 연호의 손이 떨어져나가자 유진이 곧장 바지 버클을 풀었다.

남아 있던 바지가 벗겨지고 속옷이 벗겨졌다. 연호는 순식간에 맨몸이 되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거라곤 피어싱과 양말이 전부였다. 오래된 빌라는 외풍에 취약했고, 아무것도 입지 않고 맨 바닥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고스란히 한기가 전해졌다.

추웠다. 머리카락이 삐쭉 서는 기분이었다. 유진은 떨고 있는 연호를 아랑곳 않고 확인을 하고 있었다. 목덜미부터 손목 안쪽, 아랫배, 허리, 허벅지까지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온몸에 유진의 시선이 들러붙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적인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그 이상한 기분은 유진에게 하체가 완전히 드러났을 때 가장 극대화되었다. 유진이 연호의 다리를 잡아 벌리며 허벅지 사이에 자리를 잡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성기와 엉덩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호는 유진이 왜 이러는지 알지 못했다.

“더 세워 봐요.”

툭, 기다란 손가락이 무심하게 연호의 성기를 건드렸다. 연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내려 성기를 가렸다.

“손 치우고.”

곧바로 저지당했다. 연호의 손을 치워낸 유진이 마저 연호의 하체를 살폈다. 성기가 점점 모양을 갖춰가는 덕분에 확인이 훨씬 용이해졌다. 연호의 성기를 훑어보던 유진이 마지막으로 엉덩이 사이에 파묻힌 메마른 입구를 확인했다.

…설마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는 건가.

덕분에 연호는 허리가 들린 채 유진 앞에서 엉덩이를 내놓고 있어야 했다. 이 정도면 몸이 폴더처럼 반으로 접혀 있는 수준이었다. 얼굴로 피가 쏠린 탓도 있었지만 성적인 흥분 없이 혼자 맨몸을 드러내고 있으려니 도저히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혼란스럽기도 했다. 만약 유진이 정말로 연호의 외도를 의심하고 있는 거라면, 연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정작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무심하게 연호의 엉덩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무감각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연호만 민망해졌다. 계속해서 입구를 더듬는 손길에 성기가 조금씩 힘을 받고 있었다. 단순한 생리 반응에 불과했지만 연호를 둘러싼 싸늘한 주변 분위기를 생각하면 충분히 창피할 만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기를 세우고 있는 꼴이라니. 사람이 너무 창피하면 그대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연호는 처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유진이 구멍을 잡아 벌렸을 땐 입에서 절로 신음이 나올 뻔했다. 연호가 황급히 허벅지를 모았다. 아니, 모으려고 했다.

차라리 가만히 있을 걸 그랬다. 그 사소한 행위는 도리어 허벅지가 활짝 벌려지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연호가 차마 발기한 성기를 마주하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유진은 이미 연호의 발기한 성기를 발견한 후였다.

“나랑 싼 게 마지막이에요?”

유진이 대뜸 연호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성기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자극에 연호의 몸이 크게 움칠거렸다.

“그럼 묽을 거고.”

“아…!”

유진이 세게 연호의 성기를 쳐올리며 말했다.

“그 후에 더 쌌으면….”

“아, 형! 잠깐…!”

“…그래도 묽겠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진의 손이 연호의 성기에서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정액의 농도를 확인할 필요가 없어진 탓이었다. 어중간하게 자극당한 성기가 애처롭게 덜렁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유진은 연호의 성기에 더 이상 볼일이 없었다. 연호가 애타게 허리를 들썩거렸다.

“가만히 있어요.”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메마른 입구를 쓸었다. 꽉 다물린 입구는 도저히 외부의 침입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유진은 몇 번이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 후에야 손가락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가슴이었다. 유진의 시선이 다시 연호의 가슴으로 향했다. 제 멋대로 혼자 부어 있는 젖꼭지가 거슬리다 못해 짜증이 났다. 유진이 피어싱을 잡아당겼다. 부어 오른 젖꼭지가 피어싱에 딸려 올라왔다. 마치 섹스를 할 때처럼 속살의 움직임을 연상시켰다. 피어싱을 잡아당기는 유진의 손길이 점점 거칠어졌다.

“왜 이렇게 부었어요?”

유진이 손가락으로 연호의 젖꼭지를 튕겼다. 퉁, 단단한 손톱이 금속의 피어싱과 부딪치면서 희미한 진동을 만들어 냈다. 부어 오른 젖꼭지에 가해지는 자극에 연호의 성기가 크게 꺼덕였다.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맨몸은 아주 약간의 신체 변화조차 낱낱이 보여 주고 있었다.

“아래는 또 왜 세우고 있고.”

“형이, 만지니까…!”

“다른 사람한테도 이랬어요?”

연호의 성기를 그러쥔 유진이 젖꼭지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여상한 말투에 연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부드러운 표피를 쓰다듬던 유진이 힘을 주어 성기를 쳐올렸다. 반동처럼 연호의 젖꼭지가 빳빳하게 솟아올랐다. 유진이 혀를 내어 퉁퉁 부은 젖꼭지를 핥기 시작했다.

“형이 여기도 만졌어요?”

“무슨! 그런 거 아니…! 아!”

젖을 빠는 아이처럼 쪽쪽거리며 가슴을 빨아 대자 연호의 목소리가 점점 달콤해졌다. 유진의 손바닥에 부딪치는 성기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고동치고 있었다. 쿠퍼 액을 뒤집어 쓴 성기가 손바닥에 비벼질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났다. 역시 연호는 너무 잘 느꼈다.

“…조금만 만져 줘도 질질 싸기나 하고.”

유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비릿한 목소리였다. 일순 연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았다.

“젖꼭지는 커져서는….”

성기를 쳐올리는 손길에 박차를 가하자 연호가 도리질을 치며 간신히 신음을 참았다. 막상 신음을 참으려는 모습을 보자 그건 또 그거대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진이 손톱을 세워 연호의 귀두를 짓이겼다. 안에서 정액을 파내기라도 할 듯 예민한 귀두 끝을 쑤셔 대자 연호의 입에서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혀, 형! 그만! 시, 싫어…!”

“…연호야.”

언뜻 다정해 보이는 목소리와 함께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연호의 성기를 괴롭히던 손이 드디어 멈춰 있었다.

“입으로만 싫다고 하면 누가 믿어요.”

성기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몰랐다. 메마른 구멍으로 손가락 여러 개가 단숨에 밀려들었다. 퍽! 겨우 손가락이 들어온 것뿐인데 아래에서 커다란 마찰음이 났다. 억지로 벌어진 입구가 홧홧하다 못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한 번에 내벽을 열고 들어온 손가락이 익숙하게 길을 내기 시작했다.

“참아.”

유진이 내벽을 넓히며 연호의 성기를 쳐올렸다. 앞뒤에 가해지는 자극에 어쩔 수 없이 사정감이 몰려왔다. 유진이 강제로 연호의 사정을 종용하고 있었다.

“싫, 어! 형, 그, 아!”

오로지 연호의 사정을 위한 행위였다. 의도하지 않아도 자꾸만 신음이 섞여 나왔다. 연호가 신음을 떨쳐 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 잠깐, 아앗!”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내벽을 비빌 때마다 통증보다 더한 쾌감이 피어올랐다. 섹스에 동반되는 통증과 쾌감은 한 끗 차이여서, 연호는 자신이 느끼는 이 감각이 통증인지 쾌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아…!”

몇 번 쑤셔 주지도 않았는데 내벽이 금세 흐물흐물하게 손가락에 들러붙었다. 유진은 부드럽게 풀어진 내벽을 강하게 쳐올리며 고개를 숙여 연호의 뺨에 입술을 내렸다. 낮에 유민의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였다. 뜨거운 혀가 연호의 뺨을 핥았다. 뺨이 핥아지고 성기가 만져지면서 내벽이 쑤셔지자 이대로 온몸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연호가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시, 싫…! 아, 아…!”

허무할 만큼 빠른 사정이었다. 유진은 사정하는 연호를 지켜보며 정액을 토해 내는 연호의 성기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극도로 예민해진 성기가 연이은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묽었다. 유진이 자신의 손가락에 엉겨 붙은 연호가 토해 낸 점액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치 확인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확인이라니. 대체 뭐를?

연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렸다.

“…이제….”

갓 사정을 마친 연호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제 다 됐어요?”

얼굴이 보이지 않자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무 일도 없는 거 알았냐고.”

“…….”

“내가, 싫다고 했는데 계속 하고….”

“…….”

“…그만하라고, 했는데….”

뒷말은 채 어이지지 못했다. 연호가 끝내 입술을 닫아 버린 탓이었다. 생전 그런 적이 없던 연호였기에 변화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유진은 그런 연호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상황을 인지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연호가 냉기가 흐르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유진은 겉옷조차 벗지 않은 채였다. 주변에는 연호가 입고 있던 옷가지가 이리저리 널려 있었고, 연호는 이제 막 강제로 사정을 당한 참이었다. 입구 주변이 잔뜩 부어 있어서 한 눈에 보기에도 아파 보였다. 늘 따뜻하게 데워져 있던 몸은 사정을 마치고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살짝 부어 있는 게 전부였던 젖꼭지에는 미약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처음만 해도 없었던, 유진이 만들어 낸 흔적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유진은 스스로 구역질을 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연호의 팔을 치워내고 싶었지만 양손에 정액이 묻어 있어서 차마 연호를 만질 수도 없었다. 유진이 어쩌지도 못하고 연호의 안색을 살폈다. 그랬다고는 하나 입술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언제나 유진을 바라봐 주는 애정 어린 두 눈도, 유진에게 웃어 줄 때마다 말갛게 피어오르는 미소도, 유진의 냄새를 쫓아 강아지처럼 킁킁거리는 콧방울이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뒤늦게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후였다. 유진이 다급하게 연호의 정액을 닦았다. 정액이라기에는 다소 묽은 액체가 유진의 코트 위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맨 바닥에 누워 있는 연호는 추워 보였다. 유진이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연호의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풀썩, 연호의 얼굴 옆에서 작게 바람이 일었다. 한 번이 아니라 또 그랬다. 계속 그랬다.

풀썩…. 그 행위가 몇 번이고 되풀이 되자 연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고개를 돌리자 연호의 얼굴 옆으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호가 입고 있었던 옷가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연호에게 옷을 입혀주려던 유진이 무엇 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실패한 흔적이었다.

유진은 아까부터 연호의 옷가지를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볼품없이 떨리는 손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연호가 고개를 들어 유진을 쳐다보았다.

“…형.”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호가 다시 한 번 유진을 불렀다.

“형.”

“…….”

“유진이 형.”

“…응….”

대답은 한참 만에 나왔다. 그마저도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처럼 작은 목소리였다. 마침내 연호의 옷을 집어 올리는데 성공한 유진이 연호에게 옷을 덮어주었다. 유진의 손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왜 울어요.”

“…….”

“응? 우리 유진이 왜 울어.”

미안해.

유진은 침음했다.

“우리 유진이 누가 울렸어.”

“…….”

“누가 우리 유진이를 울렸을까….”

미안해.

유진이 뚝뚝 눈물을 흘리며 연호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싫어하지 말아 줘. 미워하지 말아 줘.

연호가 천천히 유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를 좋아해 줘. 나만 사랑해 줘.

눈물이 계속해서 유진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연호의 손바닥이 금세 축축해졌다.

네가 나를 싫어하면 난 죽을 거야.

연호가 부드럽게 유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런 보람도 없이 유진의 눈에서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미안, 해요….”

유진이 연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유진의 사과만큼이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연호의 손바닥을 적시던 눈물이 이제는 손목을 타고 흘러 내렸다.

“…헤어지자는 거 빼고 다 할게요.”

“…….”

“그것만, 아니면….”

유진의 눈물에 연호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혼란스럽기만 하던 마음이 잦아들고 유진에 대한 생각만이 또렷해졌다. 처음으로 마주한 타인의 눈물을 바라보며, 연호는 유진을 생각 했다.

연호가 유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많았지만, 유진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유진이 착하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누구에게나 상냥하며 다정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먼저 배려한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유진은 연호가 몰랐던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유진과 사귀지 않았더라면 평생 알지 못했을, 유진이 틈을 내준 사람만 볼 수 있는 모습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봤을 때, 어쩌면 유진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유진이 착한 사람처럼 구는 건 그에 대한 반증일 확률이 높았다. 이 모든 건 연호의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심을 파헤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차차 알아 가면 될 테다. 만약 사실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유진에게 실망했냐고 묻는다면 연호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지. 저렇게까지 노력하고 있는 거잖아.

연호는 아직도 유진에 대해 전부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유진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알게 되었다.

연호가 유진의 눈물을 닦아 주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괜찮아요.”

연호의 덤덤한 고백에 유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산산이 흩어졌다. 연호가 유진과 시선을 맞춘 채 다시 한 번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좀 놀라긴 했는데 이제 좀 괜찮아 졌어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유진이 또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야.”

“…….”

“진짜 괜찮은데….”

다시 생각해 봐도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지만 한편으로는 유진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지금 유진은 연호가 바람을 피운 줄 알고 저러는 거였다. 물론 어떻게 하면 생각이 그렇게 흘러갈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였지만 더 이상은 처음처럼 당황스럽지가 않았다.

결국 그만큼 내가 좋다는 거 아닌가?

바꿔 말하면 연호를 향한 애정 표현이지 유진이 어디 가서 바람을 피우고 온 게 아니었다.

만약, 정말 상상하고도 싶지 않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연호는 절대 이 정도로 그치지 않을 테다. 연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유진처럼 울면서 사과를 하는 일도 없을 테다. 오히려 연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진을 다시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 같았다.

나만 볼 수 있는 모습. 나만 봐야하는 모습. 나에게만 향하는 애정. 나에게만 향할 애정.

다 내 거야.

연호는 자신의 위에서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진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형. 나 추운데.”

유진의 몸이 움칠거렸다. 연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진에게 엉겨왔다.

“완전 추워. 내 방으로 가자. 보일러도 틀래.”

연호가 자연스럽게 목에 팔을 감아오자 유진이 도리어 연호를 밀어냈다.

“…옷에….”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유진의 코트에 허여멀건 액체가 묻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놀란 연호가 질색을 했다.

“그, 그걸 왜 옷에다 닦아요! 코트잖아!”

그게 뭐 어떠냐는 듯 유진이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울고 있는 유진은 예뻤지만 동시에 가슴이 아팠다.

“…됐으니까….”

유진의 눈물을 닦아 준 연호가 양팔을 벌리자 유진이 조심스럽게 연호를 안아 들었다. 연호가 코알라처럼 유진의 몸에 매달렸다. 유진은 연호를 꽉 끌어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체격 차이가 있다지만 성인 남자를 들어 올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유진은 묵묵히 연호의 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천 아래에서 고동치는 단단한 근육의 움직임이 좋았다. 연호는 유진에게 들린 채 마음껏 유진의 몸을 더듬었다.

보일러를 켜지 않은 방은 거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공간이 더 좁아서 덜 추운 것 같기는 했다. 맨살에 서늘한 이불이 닿자 연호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유진이 더욱 세게 연호를 끌어안았다. 연호의 목덜미에 차가운 무언가 닿았다. 유진의 눈물이었다.

“형.”

“…….”

“유진이 형.”

“응….”

“우리 유진이 눈 아프겠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연호의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미안해요.”

“응.”

“미안해요. 미안해….”

온 힘을 다해 안겨 오는 유진을 마주 안으며, 연호가 웃었다. 그런 스스로가 쓰레기처럼 느껴졌지만 알면서도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연호가 유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숨기며 물었다.

“나 좋아해요?”

“응.”

“형도 나 많이 좋아하는구나….”

“응.”

확신에 찬 대답이 돌아왔다. 유진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잘할게요.”

그런 보람도 없이 유진의 목소리가 금세 떨려 왔다.

“내가 더 잘할 테니까….”

역시 연호는 유진이 좋았다.

“…노력할 테니까….”

단 한 번도 연호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유진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유진이 좋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런 사람이 도대체 나를 왜 좋아하는 걸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연호는 유진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키도 유진이 더 컸고, 경제적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유진은 공부마저 잘했다. 얼굴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인기도 많았다. 누가 봐도 유진이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연호를 좋아한다. 덕분에 연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엄청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연호는 여전히 유진이 자신을 좋아해 주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궁금하지만 알고 싶지는 않았다. 설사 유진이 사실을 말해 준다 한들 연호는 의아해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불안해하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아마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일 테다.

형은 왜 불안해하는 걸까.

나는 왜 불안한 거지.

행복하지 않을 때는 이대로 영영 행복해지지 않을까봐 두려웠고, 행복한 지금은 이 행복이 사라질까봐 불안하다. 이 이상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자신할 때마다 최고 기록을 갱신하는 요즘이, 연호에게는 살면서 가장 불안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사랑받고,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한다고 해서 늘 행복할 수만은 없겠지만 사랑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연호가 이 이상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을 테다. 연호는 감히 유진에게도 자신이 그런 사람이길 진심으로 바랐다. 서로를 마주 안은 품이 따뜻했다.

아, 행복하다. 연호가 유진을 세게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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