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어, 회장님이다!”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유진이 총학생회장이 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처음 연호에게 회장님 소리를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지만, 설마 이 짓을 한 달 넘게 이어 올 줄은 몰랐다.
“왜요. 회장님 맞잖아요.”
“아무도 그렇게 안 불러요.”
“회장님을 회장님이라 부르지 못하고!”
길을 걷던 사람들이 힐끗 두 사람을 쳐다봤지만 유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유진은 학습 능력이 뛰어났고, 연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핫도그 먹을래요?”
“와! 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출출했던 연호가 냉큼 미끼를 물었다. 그렇게 유진은 연호를 데리고 나란히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런 일상이었다. 유진이 매장 앞에서 연호의 퇴근을 기다리는 광경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편의점 앞에 비치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호는 핫도그를 먹었고, 유진은 그런 연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한밤중에도 공기가 포근했다.
“형. 근데요.”
바야흐로 봄이었다.
“네.”
유진이 자연스럽게 연호의 입가에 묻은 설탕 가루를 닦아 주었다.
“오늘은 학생회 회의도 없고 학교 행사도 없는데 왜 집에 안 가고 도서관에 있었어요?”
왜긴, 공부하러 갔겠지. 연호는 오늘따라 당연한 걸 물었다.
“중간고사가 얼마 안 남아서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유진이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면에는 연호의 퇴근을 기다리려는 불순한 목적이 있었다.
만남이 잦아지면 연호가 질려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 회장이 된 유진은 바빴고, 또 바빴다. 더럽게 바빴다. 그나마 연호가 근처에 살아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횟수만 많을 뿐 깊이가 없었다. 하루 종일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마나 남았는데요?”
“2주요.”
…존나 많이 남았는데? 비록 연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연호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든 전부터 준비하는 편이에요.”
“와, 형은 준비성도 철저하구나….”
능력이 안 되니 준비도 그만큼 오래 걸릴 수밖에. 변변치 못한 속사정에도 연호가 눈을 빛내 왔다. 입술에는 또다시 설탕 가루를 묻힌 채였다. 유진이 다시 한 번 연호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고등학교도 곧 중간고사 아니에요?”
“아직 한참 멀었어요.”
“언제인데요?”
“…그러게요.”
…시험 일정도 제대로 모르면서 시험까지 한참 남은 건 어떻게 아는 거지. 유진은 의아해하면서도 연호의 입술을 지분거리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설탕 가루는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회장님.”
“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
연호를 나무라듯 어울리지 않게 마디가 굵은 엄지손가락이 꾹 입술을 눌러 왔다.
“뽀뽀하고 싶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진의 손바닥 위로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 별것 아닌 감촉에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편의점 테이블에 자리를 잡을 때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던 연호만 태연했다.
눈이 마주치자 연호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유진은 이 이상 어떻게 하지 못하고 가볍게 연호의 손을 쥐었다 놓았다. 스쳐 지나간 손길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왜 요즘은 우리 매장에서 아무것도 안 시켜요?”
“…누구 좋으라고.”
연호는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유진은 연호가 캠퍼스에 오는 걸 싫어했다. 연호에게는 전적이 있었고, 유진은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하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 알바 옮길까요?”
“어디로요?”
“음, xx 도시락 같은 데? 치킨이나 햄버거보다는 도시락이 낫잖아요.”
유진이 연호의 매장에서 배달을 시키지 않는 건 메뉴 문제가 아니었지만 굳이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유진이 치킨이나 햄버거 같은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연호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락 매장에서는 헬멧이나 마스크를 쓰지 못할 것이다.
“사장님 좋은 분 같은데 진짜 그만둘 거예요?”
“으, 그건 그런데….”
“요즘 배달 갈 때 마스크 잘 하고 있죠?”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이었다. 연호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누가 준 건데요. 매일 매일 하고 다녀요.”
두 사람이 사귀게 된 후 연호가 유진에게 가장 처음 받은 선물은 다름 아닌 검정 마스크였다. 연호는 마스크가 무거울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아무리 얇은 종이도 1,000장이 들어 있으면 무거울 수밖에 없는데, 유진이 선물해 준 마스크는 무려 1,000매짜리였다. 앞으로 최소 2년은 쓸 수 있는 분량이었다.
“잘했어요. 요즘 황사 심하니까 절대 빼면 안 돼요.”
“네! 핫도그 다 먹으면 바로 할게요.”
“지금은 안 해도 돼요.”
“왜요? 황사는 밤 되면 없어져요?”
황사는 낮과 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유진이 생각해도 너무 치졸한 이유였다.
“…네. 자정쯤에요.”
미성년자 근로 기준법에 의거한 연호의 퇴근 시간은 밤 10시였다.
“헐. 그렇구나….”
몰랐다는 듯 연호가 핫도그를 움켜쥔 채 진지하게 경청했다. 유진이 연호에게 처음으로 한 악의적인 거짓말이었다.
“황사 심해도 괜찮으니까 낮에 보고 싶은데.”
그러면 자연스럽게 유진의 집에 갈 구실이 생기지 않을까. 연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스크를 선물하던 유진의 말에 따르면 미세 먼지는 사람의 건강을 좀먹는 아주 위험한 존재였다. 유진에게도, 연호에게도 황사는 아주 좋은 핑계였다.
사실 연호가 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최근 연호는 자연스럽게 유진의 집에 쳐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형한테 존나 치근덕대고 싶어!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10대의 욕망은 꽤나 솔직하고 구체적이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유진이 얌전히 집에서 쉬고 있었으면 연호는 퇴근 후에 유진의 집에 갈 수 있었을 테다. 이 원대한 계획이 실패한 건 학교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도 집에 가지 않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유진 때문이다.
뭐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 연호의 넘쳐흐른 흑심에 오히려 유진이 허우적거렸다. 낮에 보고 싶다니, 역시 연호도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은 데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유진에게 질려 하는 것보다야 이편이 훨씬 나았지만 결국에는 유진에게 불만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유진은 대답 대신 애꿎은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유진은 당분간 계속 바쁠 예정이었다. 방학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엠티와 여름 농활, 해외 봉사 활동이 벌써부터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이 만날 시간이 부족한 건 비단 유진의 탓만은 아니었다. 연호는 오전부터 오후까지 학교에 가야 했고, 학교에서 실습을 나가는 날에는 하교 시간이 더욱 늦어졌다. 저녁에는 밤까지 아르바이트도 했다. 그런데도 유진은 이 모든 걸 자신의 잘못이라 여겼다. 정작 연호는 별생각이 없는데도 그랬다.
분명히 그랬는데,
“형?”
연호는 더 이상 아무 생각이 없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쁘게 웃고 있던 유진이 난처한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낮에도 보고 싶다는, 연호의 애 같은 한마디 때문이다.
아씨, 징징대려는 게 아니었는데. 어른스럽게, 안정감 있게, 어른스럽게! 연호가 소리 없이 외쳤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유진이 연호의 속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당황한 건 연호였지만 지금의 유진은 어딘가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뭐를요?”
연호의 질문에 유진이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직 이야기가 오고 갈 뿐, 확신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어서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국내가 아닌 국외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해외 봉사 활동은 불가능하겠지만 농활은 승산이 있었다. 아니, 꼭 해내야만 했다. 그래. 내가 더 열심히 하면…. 유진이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때부터였다. 그날 이후로 오히려 유진은 더더욱 바빠졌고, 짧게나마 이루어지던 퇴근길 데이트도 무산되고 말았다. 연호의 애 같은 투정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다.
***
“강연호!”
“아, 깜짝이야. 뭐야.”
난데없는 큰 소리에 연호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사람을 앞에 두고 대놓고 딴생각을 할 때는 언제고, 남우의 타박에도 한없이 당당하기만 했다. 남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 내 얘기 하나도 안 들었지.”
“들었어요. 다음 주에 처음으로 라디오 스케줄 잡혔다면서요.”
남우는 여전히 남우였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지 할 말만 해 대는 꼴이 그랬고, 하늘 모르고 치솟는 팬심이 그랬다.
“어, 다 들었네. 그래서 말인데….”
남우가 연호를 불러낸 본론을 꺼냈다.
“보이는 라디오라서 실시간 채팅도 달릴 수 있고, 한 줄 사연도 보낼 수 있거든. 근데 내가 하필 그때 딱! 수업이 있….”
“싫어요.”
“야. 아직 얘기 안 끝났거든.”
웬일로 아이스크림을 사 주나 했더니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계산적이기도 힘들 것 같았다. 우리 유진이가 반만 닮았으면. 연호는 처음으로 남우에게 배울 점을 발견했다. 앞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유진이 걱정이었다.
연호가 다시 한 번 기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비록 총학생회실이 있는 본관 앞 벤치에 앉아 있긴 하지만 이건 절대로 스토킹 따위가 아니었다. 남우와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와 있는 것뿐이었다. 물론 구체적인 장소는 연호가 정했지만 이 정도는 그렇고 그런 개수작에 불과했다.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역시 애 같다고 생각하려나. 연호는 남우의 투정을 흘려들으며 아이스크림 막대를 잘근잘근 씹어 댔다. 어른스럽다는 건 뭘까,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연호에게 대리 응모를 강요하는 남우를 보고 있으려니 고민은 점점 깊어만 갔다.
“와,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
“뭐라는 거야. 네가 뭔데요.”
“내가 요새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남우는 진심으로 억울해하고 있었다. 남우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네가 나 아니면 언제 이런 명문대 캠퍼스를 밟아 보겠냐? 기껏 지 생각해서 데리고 가 주려고 했더니.”
그래. 더 고민하지 말자. 이런 인간도 어른이랍시고 잘만 사는데 뭐. 남우가 의도치 않게 연호의 번뇌를 잠재워 준 순간이었다.
“삽질 중에 삽질이 뭔 줄 알아? 농촌 삽질이야. 너 이번에 가서 삽질 제대로 배워 놓잖아? 군대 가서도 탄탄대로야. 나만큼 네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는 줄 아냐.”
“아까부터 뭔 소리야. 내가 농촌에 왜 가요.”
“야, 내가 누구야. 총학생회 기획부 부장이야. 아직 승인 대기 중이긴 한데 이번에 중, 고등학생 대상으로….”
“어. 잠깐만. 나 전화.”
“내 말 안 끝났거든!”
단번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남우가 발악했지만 놀라울 만큼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개의치 않고 전화를 받는 연호는 누가 봐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그래 보였다.
- 어디예요?
“학교요!”
누군데 저러지? 남우가 가까이 다가오자 연호가 정색을 하며 자리를 피했다. …저 새끼가 진짜! 오기가 생긴 남우는 연호를 뒤쫓기 시작했다.
- 아직도 안 끝났어요?
“아니. 나 지금 형네 학교 와 있는데.”
추격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호가 여유롭게 학생회관에 다다른 사이 남우는 자연스럽게 낙오되었다. 이걸 남우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연호는 때마침 학생회관에 있던 유진을 발견했다. 유진은 전화 통화를 하며 학생회관을 나오고 있었다.
“형이다!”
며칠 만에 보는 유진이었다. 연호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유진을 덮쳤다. 유진이 얼떨결에 연호를 받아 냈다. 통화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채였다.
대낮의 캠퍼스는 보는 눈이 많았다. 유진에게 대학이란 아버지와 형을 아는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장소였다.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연호를 밀어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좋았다. 겨우 이런 것밖에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실망스러우면서도 처음으로 느껴 보는 성취감이 유진을 들뜨게 만들었다. 연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었다.
네가 기뻐했으면 좋겠어.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유진이 쑥스러운 얼굴로 조곤조곤 진심을 읊조렸다.
“지금 당장 만나고 싶었는데.”
“…….”
“운이 좋았네요.”
유진은 노력 없는 대가는 믿지 않았다. 운이 좋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더더욱 믿지 않았지만 사랑에 빠진 남자는 하나도 이성적이지 않았다.
“방금 허가받았어요.”
“뭐를요?”
수줍은 미소에 홀려 있던 연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유진은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가만히 연호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입술이 벌어지고 유진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강연호! 너 어디까지 갔어!”
남우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미친!”
“…남우 형이랑 같이 있었어요?”
“네. 잠깐 보자고 해서…. 그래서 무슨 허가를 받은 건데요?”
“둘이 만나는 거 왜 얘기 안 했어요?”
분위기상 중요한 이야기가 틀림없었지만 유진은 이미 그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연호는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하고 봤다.
“한남우 얘기하지 말라면서요.”
“…….”
“그래서 안 했는데….”
…형? 이 와중에 연호는 착실하게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이상 기온 때문에 한낮의 온도가 20도까지 올라간 날이었다. 심지어 미세먼지도 없었다.
유진은 고민했다. 연호의 마스크를 벗길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이상 추태를 부릴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답답하지 않아요?”
남우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동시에 답답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가 사라졌다. 유진의 선물이 떨어져 나가자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괜찮은데….”
“덥잖아요. 오늘은 미세먼지도 없대요. 이런 날은 하지 말아요.”
오랜만에 내비친 맨 얼굴이 어색한 듯 연호가 괜스레 뺨을 긁적였다. 유진은 그런 연호를 내려다보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방금 전의 행동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어른스럽지 못했다. 유진은 좀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나머지는…. 시험 끝나고 얘기해요.”
“아, 뭔데요. 얘기한 것도 없으면서 뭐가 나머지야!”
“공문 나오면 그때 한 번에 얘기할 테니까….”
남우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진이 연호의 휴대폰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일단은 시험부터 잘 치러요.”
“시험 아직 멀었는데.”
“…내일모레잖아요.”
“어? 삼 일 뒤 아니에요?”
“응. 아니에요.”
연호가 다급하게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어보나 마나였다. 유진은 연호의 학교 홈페이지를 즐겨 찾기까지 해 놓은 사람이었다. 시험은 삼 일 뒤가 아닌 내일모레부터가 맞았다. 유진이 기다렸다는 듯 연호를 잡아끌었다.
“데려다줄게요. 얼른 집으로 가요.”
덕분에 연호는 남우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말았다. 당장은 어떻게 해야 유진을 집 안까지 끌고 들어올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연호를 집까지 데려다준 유진은 끝내 연호에게 이끌려 집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알찬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연호의 시험 이틀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언제라고 잘 봤겠냐 만은 연호는 이번에도 시험을 못 봤고, 반대로 유진은 무사히 중간고사를 마쳤다.
“…그럼 놀아야지 왜 자꾸 회식을 하는 건데!”
그런데 중간고사가 끝났더니 이제는 회식이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식 때문에 번번이 유진을 만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자, 끝내 연호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로 그럴 게, 애당초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안 될 거라 생각했던 만큼 마침내 떨어진 승인 허가에 모두가 기뻐했다. 이 순간을 기념하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성인이라 할지라도 몇 십 명이 단체로 9박 10일간 외박을 하다 보면 사건 사고가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사고는 언제나 불시에 찾아왔고, 주최인 대학교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성인들도 못 미더운데 하물며 미성년자를 동반한 농촌 활동이라니. 온갖 좋은 말들로 버무려진 기획안은 승인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회식 왜 하냐며! 기껏 얘기해 줬더니…. 아, 진짜 존나 힘들었어. 그 짓도 오늘로 끝이다.”
유진이 바빴던 이유를 알게 됐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연호는 여전히 독수공방 중이었고, 그것도 모자라 남우를 버리고 간 대가로 라디오에 대리 사연을 내보내야 했다.
그렇게 끝이 났으면 제법 괜찮은 결말일 뻔했다. 연호가 남우의 대타를 뛰어 주던 그날, 재수 없게도 남우가 보낸 사연이 당첨되었다. 덕분에 연호를 향한 남우의 애정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연호가 자신의 행운의 마스코트인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야, 이거 어때. 괜찮냐?”
“완전요. 장난 아니에요.”
“…보는 척이라도 해라, 좀.”
덕분에 연호는 남우가 공식 계정에 보낼 팬 메시지 작성을 함께하고 있었다. 행운의 마스코트라는 개소리를 듣고도 순순히 불려 나온 건 지난번처럼 유진을 마주칠까 싶어서였다.
의도가 불순한 탓인지 두 번의 우연은 없었다. 하필이면 오늘, 유진은 전혀 다른 동네에서 회식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회식을 해 봤자 학교 근처 고깃집이 전부였는데 이번 회식만 그렇지 않았다. 남우의 말에 따르면 높은 분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농활 가면 유진이 형도 와요?”
유진과 엇갈리는 순간들이 계속되자 연호가 처음으로 농활에 관심을 보였다.
“당연한 거 아니냐? 공부 못하는 티 좀 그만 내라.”
“내가 공부 못하는지 잘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요.”
“형이라고 하랬지. 넌 누가 봐도 공부 못하게 생겼어. 발랑 까져 가지고…. 야, 나한테만 얘기해 봐. 여자 몇 명이나 만나 봤냐?”
고등학생이 여자를 만나면 얼마나 만나 봤다고 저러는 걸까. 무언의 확신 어린 추궁에 연호가 자연스럽게 남우를 무시했다. 유진이 학교에 없는 줄 알았더라면 남우를 만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뒤늦게 후회해 봐도 소용없었다. 연호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남우에게 시달린 후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시험도 끝났겠다, 아르바이트도 쉬겠다, 연호는 또다시 시간이 많다 못해 넘쳐흐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유진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겠지만, 연호는 앞으로도 평생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사람의 온기를 알아 버린 마음이 그새를 못 참고 허전함을 토로해 왔다. 연호는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봤자 모든 건 유진으로 귀결되었다.
유진이 만났던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어른스러운 연인이 되고 싶었다. 의욕은 하늘을 찔렀지만 연호는 번번이 실수를 했다. 연호는 아직도 어른스러움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해 봤지만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유진이 직접 알려 줬으면 했다. 참다못한 연호는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애인이 회식을 할 때는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 게 예의라던 온라인 조언이 떠올랐지만 메시지는 이미 전송된 후였다.
다행히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연호가 안도하며 냉큼 전화를 받았다.
- 어디예요?
“집이요! 형 내가 메시지 보낸 거 봤어요?”
- 못 봤어요. 지금 잠깐 나온 거라…. 오늘은 학교 끝나고 뭐 했어요?
어쩐지 유진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술 마신다더니 많이 마신 건가, 그런 생각이 들만큼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가 유독 달콤했다.
“재미없었어요.”
대답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일차원적인 감상이었다. 조금 더 보강을 하자면 재미가 없는 데다 답답하기까지 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대로, 보고 싶으면 보고 싶은 대로 유진이 보고 싶었다. 이처럼 연호가 그리는 연애는 아주 단순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유진은 아직도 회식 중이었다.
빨리 보고 싶은데. 연호는 애가 탔다.
- …나도….
“회식 재미없어요?”
- 응….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아, 농활이요?”
연호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이번 총학생회에서 대대적으로 준비한 중, 고등학교 연계 활동에 대해서는 남우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농활은 연호에게 유진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남우라는 매개체를 통해 연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연호의 입장에서 농활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 …내가 전에 얘기한 적 있어요? 없는 걸로 아는데….
그걸 유진만 몰랐다. 유진은 그저 참고 있었다. 일이 확실하게 마무리될 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 들뜨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태연을 가장하는 사이, 남우에게 선수를 뺏길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형이 아니라….”
‘내 앞에서 남우 형 얘기하지 말아요.’
다시금 떠오른 과거 유진과의 대화에 연호가 정직한 반응을 보였다.
- 남우 형한테 들었어요?
“어…. 네.”
- …언제요?
“그때도 들었고 그 다음에도 들었고 오늘도 들었고…. 그냥 계속 들었는데. 만날 때마다 농활 얘기만 해요. 지겨워 죽겠어요.”
그간의 노력이 한낱 지겨움으로 치부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초였다. 연호가 거절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런 반응일 줄은 몰랐다.
이래서 참았던 거였다. 기대하면 실망할까 봐, 고작 이런 일로 실망하는 자신의 모습에 도리어 실망이 돌아올까 봐. 결국 이번에도 문제는 유진에게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 …남우 형 자주 만나네요.
유진은 빈말로도 주량이 센 편이 아니었지만 형은 달랐다. 형은 애주가였다. 그런 유민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였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유진은 무언가에 쫓기듯 열심히 술을 삼켰다. 애써 참아 왔던 술기운이 몰려오는 건 한순간이었다.
“좋아서 만나는 거 아닌데요.”
- 그럼 왜 만나.
너 뒷조사하려고요.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연호가 어설프게 침묵했다.
- 남우 형 얘기하지 말라는 말.
억지로 눌러 담아 온 묵은 감정들이 알코올에 희석되자 술기운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 그렇게밖에 이해를 못해요?
“네?”
-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예요? 이러니까 내가 꼭 방해하는 것 같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기적으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연애는 어려웠다. 아무리 좋아해도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었고, 상대방이 나와 같은 온도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나 공부 못하는 거 형도 알잖아요.”
그저 온전히 나를 내보이고,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일일이 서로를 알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 그게 무슨 상관이-.
“내가 못 알아들은 것 같으면 형이 먼저 좀 얘기해 주면 안 돼요? 방해는 무슨, 왜 그딴 식으로 말하는데!”
연호와 유진의 첫 다툼이었다. 수치스럽게도 표면적인 원인은 남우였다. 연호가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유진을 부르는 목소리 때문에 통화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급하게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연호가 소리 없이 절규했다.
…내가, 내가 형한테 화를 냈어! 연호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와, 씨, 어떡하지. 어떡해!
연호의 고뇌와는 상관없이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간지럽혔다. 연인 간의 다툼 정도야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연호는 나쁜 짓을 하다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곧바로 유진에게 메시지가 오지 않았더라면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 그러고 있을 뻔했다.
「형 회식 어디서 해요?」
「한남동 xx.」
아까 연호가 보냈던 메시지를 이제야 확인한 것 같았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전부인 메시지는 급하게 보낸 티가 났다.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 놓고는 메시지를 무시하지 못하고 성실하게 답장을 보내온 유진이 너무 유진다워서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착할 수가 있지? 심란했던 기분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연호는 연애 중이었다.
***
한남동으로 가는 길, 연호는 말로만 듣던 이태원을 지나게 되었다. 이태원에는 정말로 외국 사람이 많았다. 끊임없는 자동차의 행렬과 잦은 신호 대기에도 연호는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었다. 그러다 신호가 바뀌면 연호는 다시 속력을 냈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한 것까진 좋았는데 오토바이는 등받이가 없어서 몸을 기댈 수가 없었다. 연호가 최대한 앞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그나마 좀 편했다. 연호는 오토바이에 앉아서 유진을 기다렸다.
그 뒤로 유진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유진은 연호와 다퉜다고 해서 연락을 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니 아직도 식당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만 믿고 여기까지 왔다. 연호는 스스로를 어른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도 많이 참았다. 그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찾아온 것까진 좋았는데 역시 걱정은 되었다.
또 스토커 같다고 싫어하면 어떡하지. 두 사람은 이제 막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였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부분들이 더 많았다. 실제로 연호는 유진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면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오랜만에 바라본 유진은 여전히 예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저렇게 예쁜 걸 나만 못 보고 있었다니! 그동안 되도 않는 어른스러운 척을 하느라 꾹꾹 참아 온 시간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유진과 사람들이 서 있는 가게 앞으로 차가 마중을 나왔다. 유진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운전석이 아닌 뒷좌석에 올라탔다. 심지어 운전석에 타고 있던 사람이 대신 차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연호는 그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가만히 유진을 지켜보기만 했다. 어쩐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이유는 많았다.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연호는 괜히 헬멧을 만지작거렸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상대방이 전화를 건다고 해서 휴대폰이 바로 울리는 건 아니었다.
- 어디예요?
적어도 5초는 걸렸다. 혼자가 되자마자 연호에게 전화를 하는 유진을 바라보며, 연호는 5초짜리 불안을 집어삼켰다.
“형은 왜 맨날 어디냐고 물어봐요?”
- …내가 그랬어요?
“완전요.”
그래서 좋다고 하면 나도 중증인 건가. 시답잖은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유진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발걸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유진은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형 취했어요?”
“…잘 모르겠어요.”
“취했네, 취했어.”
정신없는 와중에도 유진은 예민하게 주변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통화상이라고 하기에는 연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생생했고, 발밑을 비추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거슬렸다.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데려다줘도 돼요?”
“…….”
“나 하나도 안 비싼데. 형은 무조건 공짜인데.”
연호가 오토바이에 기대앉은 채 자신 없이 까닥까닥 발을 움직였다. 유진의 시선이 오토바이에 앉아 있는 연호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장난을 치듯 까닥까닥 흔들리는 발, 오토바이를 사이에 두고 활짝 벌어져 있는 긴 다리, 헬멧 때문에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까지. 빈말로도 단정해 보이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그래서 연호다웠다.
아무래도 유진은 술에 취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데리러 온 연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리가 없었다. 연호는 다시 유진의 전화를 받아 준 것도 모자라 유진을 만나러 와 주기까지 했다.
또다. 또다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울렁거림은 유진의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오토바이 처음 타 봤어요.”
침실에 다다른 유진이 중얼거렸다. 연호가 유진 다음으로 좋아하는 주제였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대화를 이어 나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유진은 보기와 달리 엄청 무거웠다. 남우 같은 우락부락한 근육질이 아닐 뿐, 연호보다 10cm가량 큰 키에서 오는 골격의 무게는 무시할 바가 못 되었다.
연호가 유진의 집에 온 건 겨우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지만 오랜만에 오는 유진의 집에서는 여전히 유진의 냄새가 났다. 연호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냄새를 킁킁거리며 침대에 유진을 내려놓았다.
“물 마실래요?”
“응…. 아니….”
“…마신다는 거야, 안 마신다는 거야.”
취한 사람의 말은 믿을 만한 게 못 되었다. 연호가 문 앞에서 갈등했다.
“갈 거예요?”
침대에 엎드려 있던 유진이 눈동자를 올려 빤히 연호를 쳐다보았다. 이건 좀, 심장에 해로웠다.
“안 갔으면 좋겠어요?”
“응….”
“헐. 미친.”
유진이랑 있을 때는 되도록 이런 말투는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 놀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유진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애교가 많은 편이었다. 여기에 술기운이 더해지니 금상첨화였다. 평소보다 솔직한 모습에 연호가 용기 내어 아까의 일을 물어보았다.
“데리러 간 거 기분 안 나빴어요?”
“응.”
“내가 멋대로 찾아간 건데도?”
“응.”
“내가 형한테 화낸 건? 기분 안 나빴어?”
“응.”
“…형 지금 다 응이라고 하는 거지.”
“으응….”
“아씨, 뭐야. 형, 내가 누구예요.”
“…연호.”
대답을 마친 유진이 가만히 연호를 쳐다보았다.
“강연호.”
이런 미친. 외마디 욕설과 함께 연호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연호를 쳐다보고 있는 유진이 보였다.
“…뽀뽀해도 돼요?”
유진이 대답 대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어슴푸레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잔뜩 휘어지는 두 눈에 절로 애가 탔다. 먼저 달려든 건 연호였지만 입술을 열어온 건 유진이었다. 입술이 부딪쳤다. 그리고 키스했다.
유진의 체취가 배어 있는 침대 위를 뒹굴며 서로의 혀를 빨아 댔다. 숨결이 녹아들고 타액이 섞였다. 유진의 혀에서 알코올 맛이 났다. 유진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연호가 요령 없이 유진의 혀를 휘어 감았다. 유진이 화답하듯 혀뿌리를 강하게 빨아올렸다. 숨이 막혔다. 그래서 좋았다.
더, 더, 더…. 입 안 깊숙한 곳을 핥아 오는 유진 때문에 소리가 먹혀 들어갔다. 서로의 다리가 얽혀 들면서 열에 들뜬 상대방의 체온이 느껴졌다. 연호가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유진의 몸을 더듬었다. 기교도, 요령도 없었다. 그냥 만지고 싶으면 만졌다. 연호가 유진의 옷 속으로 서툴게 손을 밀어 넣었다. 유진은 순순히 제 몸을 내어 주는 대신 연호의 위에 올라탔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다. 헐떡이는 숨 너머로 연호의 위에 올라타 있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옛 추억이 떠올랐다. 연호와 유진의 자세가 지금과 반대이긴 했지만 그때도 딱 이런 상황이었다. 그날 연호는 유진 앞에서 다섯 번도 넘게 사정을 했다. 유진이 지금처럼 입을 맞춰 온 것도, 연호가 유진을 만진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으, 창피해. 연호가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얼굴을 가려 버렸다.
“뭐가 창피해요. 하나도 안 창피해.”
“…형도 내 앞에서 혼자 해 봐요. 창피하나, 안 창피하나.”
연호가 도통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 들었다. 당황한 유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였다.
“얼굴 보여 줘요.”
쪽, 쪽. 유진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연호의 손등에 입을 맞춰 왔다.
“응?”
조금 힘을 줘서 팔을 치워 내면 그만인데도 유진은 어쩌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입술을 붙여 왔다. 연호는 일부러 얼굴을 가린 채 실컷 입맞춤을 받았다. 처음 얼굴을 가렸던 이유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화났어요?”
이번에도 애가 타는 건 유진이었다. 시선을 피하는 것도 모자라 얼굴을 가리는 연호 때문에 가슴이 다 철렁했다. 왜지? 내가 너무 끈질기게 굴었나? 생각하면 할수록 짐작 가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문득 창피하다던 연호의 말이 떠올랐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이 허리를 일으켰다. 눈을 감고 있던 연호에게 침대의 출렁거림이 전해졌다. 곧이어 바지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에 이끌리듯 연호가 팔을 내리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연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장면은 반쯤 발기되어 있는 유진의 성기였다. 유진이 연호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자신의 성기를 어루만졌다.
연호에게 자위를 시키던 유진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연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뻐금거렸다.
역시 이 방법이 정답이었다. 연호가 얼굴을 보여 주자 유진이 안도하며 마저 성기를 쓸어내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느릿느릿 표피를 쓰다듬자 연호의 입이 자꾸만 벌어졌다. 유진이 손을 내려 연호의 젖은 입술을 쓰다듬었다. 가볍게 성기를 어루만지던 커다란 손이 본격적으로 성기를 쥐고 흔든 것도 그때였다. 유진이 연호를 내려다보며 자위를 시작했다.
한쪽 손으로는 성기를 흔들며 다른 쪽 손으로는 연호의 입술을 더듬었다. 마디가 굵은 엄지손가락이 입술 안쪽을 눌러 왔다. 부드러운 점막을 짓누르는 손길에도 연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 새로 침이 흐른다는 자각도 없었다. 당혹감과 흥분으로 혼탁해진 눈동자가 유진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연호의 시선을 한 몸으로 받아 내며 유진은 기쁜 듯이 웃었다.
유진이 조금 더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짧게 다듬어진 손톱 끝에 연호의 혀가 스쳤다.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든 살덩이의 감촉에 유진의 성기가 크게 움칠거렸다. 아랫배에 바짝 올라붙은 성기 끝이 희미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탁, 탁, 탁, 성기를 쳐올리는 소리에도 물기가 어렸다. 조금씩 쿠퍼 액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완전히 일어선 성기를 바라보던 연호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자 입 안이 경련하듯 꿀렁거렸다. 기다렸다는 듯 유진이 연호의 혀를 잡아 쥐었다. 손가락에 붙들린 연약한 살덩이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성기를 쳐올리는 손길이 빨라졌다. 자잘하게 돋아난 혀의 돌기를 쓸어내리며 점막을 비벼 대자 유진에게 깔려 있는 연호의 몸이 연신 움칠거렸다. 비록 기회는 적었으나 이제는 유진도 알게 되었다. 이 몸이 얼마나 예쁘고 솔직한지를, 유진은 아주 잘 알게 되었다. 이 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유진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직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을 마지막으로 더는 늘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윽…!”
화를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입 안을 헤집던 손길이 거칠어졌다. 연호의 기침에 유진이 다급하게 손가락을 빼내었다. 입 안 깊은 곳까지 닿아 있던 손가락에 질척한 타액이 묻어 나왔다. 유진이 불안한 얼굴로 연호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다는 듯, 연호가 유진에게 웃어 보였다. 됐으니까 하던 일이나 마저 하라며 유진을 재촉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연호는 너무 연호다워서 유진은 잔뜩 날을 세우던 것도 잊고 그대로 입을 맞추고 말았다.
입맞춤은 달았다. 좋았다.
언제나 그랬듯 또다시 아침이 찾아왔고, 연호는 오늘도 학교에 가야 했다. 대학교가 아니어서 유진이 대신 출석을 해 줄 수도 없었다. 연호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이제 곧 연호를 깨워야 할 시간이었다. 유진은 연호가 일어나면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몸은 좀 괜찮은지 확인부터 해야 했고, 고맙다고도 해야 했다. 아침도 먹여야 했다. 연호가 집에서 교복을 입고 나오면 다시 학교로 데려다줘야 했다. 연호가 학교를 마치고 나오면 그때야말로 제대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나와 함께 가 줄 수 있냐고, 너와 함께 가고 싶다고.
유진이 조심스럽게 연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숙취는 없었다.
***
“사장님은 어떤 애들이 좋아요?”
대화의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이제는 연호에게 익숙해진 사장이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니?”
“사장님은 많이 만나 봤잖아요. 그중에서 어떤 애들이 제일 좋았어요? 말 잘 듣는 애? 적극적인 애?”
여러모로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연호와 함께 음료수를 정리하던 형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음료수를 떨어트렸다.
“아, 뭐야! 발 찧을 뻔했잖아요!”
연호의 타박에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사장님이 설마…! 그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혹시 아르바이트생들 얘기하는 거니?”
“그런데요.”
“왜요! 강연호가 이상하게 말한 거 맞잖아요!”
사장의 한심스러운 눈빛에 형이 묻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호는 개의치 않고 사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당연히 성실한 애들이 좋지.”
성실하다. 연호는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성실하다는 건 유진 같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연호는 아니었다.
“성실해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 사람이 성실하면 되겠지? 그런 데 이런 건 왜 물어보는 거니?”
“너 다른 데 면접 보냐? 여기 그만둬?”
사장에게 대놓고 면접 팁을 물어보는 아르바이트생이라니. 사장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뭔 소리야. 내가 여길 왜 그만둬요. 사장님이 내 은인인데.”
“으, 은인?”
“아…. 아니다. 오작교인가?”
…방금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사장이 침착하게 연호와의 대화를 되짚어 보는 사이, 연호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형이 마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면접 보는 건 맞나 보다? 아직 1학기도 안 끝났는데 취직을 벌써 해?”
“당연히 안 하죠. 대외 활동 면접이에요.”
“네가? 왜?”
“연애하려고요.”
남자 친구가 9박 10일 동안 다른 사람들이랑 외박해서 감시하러 가요. 연호가 음흉한 속마음을 아름답게 포장했다. 이를 멋대로 오해한 형은 뜬금없이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왔다.
“네가 드디어 정신을…! 그래, 그래야지. 이상한 과거는 싹 잊고 새 출발하는 거야! 그렇죠, 사장님?”
올해 초에 발생한 연호의 이상 행동에 마음 졸이며 지켜보기를 몇 개월, 내심 연호를 걱정하던 두 사람이었다. 사장은 형에게 동의를 표하는 대신 생각지도 못한 걸 물어 왔다.
“혹시 xx 대학교에서 하는 거니?”
“맞는데요.”
정황상 연호의 이상 행동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장의 결론은 같았다. 연호는 아주 잘 지내고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바라는 점은 딱 한 가지였다.
“교복 단정하게 입고 피어싱도 빼렴. 말투도 조금만 부드럽게 하고.”
학교 선생님들을 비롯해 수도 없이 들어온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사장이 연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어서 연호는 진지하게 충고를 새겨들었다.
“그렇게 하면 성실해 보여요?”
“성실해 보이는 게 아니라 성실하잖니.”
“제가요?”
그럼. 확신 어린 대답에 연호가 가만히 사장을 쳐다보았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 내심 긴장하는데, 연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사장님도 나 좋아해요?”
낯짝도 두꺼웠다. 성실한 사람이 좋다는 사장의 말을 그대로 따라한 것뿐이었지만, 이면에는 그동안 찾아볼 수 없었던,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다는 확신에서 오는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역시 연호는 잘 지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봄과 여름의 경계가 불분명한 계절이었다.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체감하기도 전에 연호는 벌써부터 여름 방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유진과 함께할 9박 10일을 기대했다. 그 첫 번째 난관이 바로 면접이었다. 유진과 함께하려면 우선 대외 활동에 합격해야 했다.
***
“준비는 잘되어 가요?”
유진이 연호의 빈 접시에 피자를 덜어 주며 물었다. 따끈따끈한 치즈가 쭉 늘어나자 연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치즈를 따라 움직였다.
이게 그렇게 좋을까. 먹는 데에 큰 욕심이 없는 유진의 입장에서는 연호가 신기하기만 했다.
“완전요.”
기다렸다는 듯 자신만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쉽게도 그다지 믿음직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물론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정말 안 도와줘도 돼요?”
“당연하죠. 낙하산 반대! 부정 부탁 반대!”
…부정 청탁이겠지. 유진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내고자 하는 의도는 기특했으나 그뿐이었다. 유진은 연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관련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유진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것부터가 그랬다.
유진은 이번 대외 활동의 면접관이자 실행 위원인 동시에 책임자였다. 연호의 의사와 관계없이 연호의 합격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연호가 괜한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연호가 화덕 피자를 돌돌 말아 과자처럼 깨물어 먹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는 가리는 것도 없었고, 뭘 먹어도 참 맛있게 먹었다. 먹이는 보람이 있었다.
“파스타도 먹을래요?”
“형은요?”
“난 괜찮아요.”
“그럼 나도 안….”
“저기요.”
유진이 알아서 파스타를 주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호가 불만스럽게 피자를 우물거렸다. 단번에 연호의 불만을 알아차린 유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싫어요? 취소할까요?”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여기 로제 맛있다면서. 다른 거 먹을래요? 메뉴판 갖다 줄까?”
세심하게 연호를 살피는 다정한 태도에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 마저 피자를 씹어 삼킨 연호가 전례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형은 좀 조심할 필요가 있어요.”
“…내가요?”
“몰랐죠? 아까부터 직원 누나가 형만 쳐다본단 말이에요.”
유진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 하자 연호가 테이블 밑에서 유진의 종아리를 잡아당겼다. 덜컹, 피자와 리소토가 놓여 있던 테이블이 일순 큰 소리를 냈다.
“막 쳐다보지 마요. 관심 있는 줄 알면 어떡하라고.”
너나 잘하세요. 어느 영화의 명대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한 번쯤은 그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었지만 연호가 이럴 때마다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유진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수줍어하는 위의 사정과 달리 아래에서는 연호의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얽어 대고 있었다.
“더 먹고 싶은 거 없어요?”
“파스타 시켰잖아요.”
“갖고 싶은 건?”
“마스크 아직 많이 남았어요.”
“그런 거 말고요.”
“없는데.”
또 시작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유진은 매우 관대한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틈만 나면 연호에게 무언가를 사 주려고 들었다.
유진이 자신의 부족함을 돈으로 채우려는 경향이 있다면, 연호는 무언가를 받으면 그게 무엇이든 배로 돌려주고 싶어 했다. 다만 아직 고등학생이라 그럴 능력이 없는 게 문제였다.
“정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음, 직장?”
“일단 졸업부터 해요.”
“졸업하면 어디 꽂아 주게요? 형이 그러면 농담 안 같다니까요.”
개수가 좀 많긴 했지만 고작 마스크 선물에도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연호였다. 지금까지의 행동을 봐선 유진이 취업을 시켜 준다고 해서 순순히 응할 것 같지 않았다. 연호와 사귀면서 새롭게 알게 된 모습이었다.
“한 조각 더 먹어요.”
그러나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었다. 유진이 연호의 접시에 피자를 놔 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오늘도 애들한테 엄청 욕먹겠다.”
잠시 잊고 있었다. 연호는 오늘도 도서관에 가야 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진학반 친구들과 함께하는 자리였다.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대외 활동 준비에 특화된 그들은 연호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다. 유진이 피클 접시를 밀어 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왜요?”
“맛있는 냄새 난다고 지…, 난리예요. 맛있는 걸 먹었으니까 맛있는 냄새가 나지! 그죠.”
연호는 기분 좋을 때 티가 많이 났다. 애교스럽게 늘어지는 말꼬리가 그랬고, 은근하게 접히는 두 눈이 그랬다. 정말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준비하지 않아도 무조건 합격인데 왜 이렇게 열심인 걸까. 유진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었다.
“내일은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요?”
“내일도 볼 수 있어요?”
“응. 볼 수 있어요. 뭐 먹고 싶어요?”
“형이 좋아하는 거!”
애초에 유진은 먹는 것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감흥도 없었다. 그는 조금만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겨도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예민한 위장의 소유자였다.
“그럼 좀 멀리 가야 하는데 괜찮아요?”
좋아하는 음식도 없는데 좋아하는 식당이 있을 리가. 그런 것 따위 없었지만 유진은 여상하게 미끼를 던졌다. 이참에 연호를 데리고 교외로 나갈 생각이었다.
“나 합격하면 가요.”
심각하게 고민하던 연호는 끝내 유진의 유혹을 거절했다. 그깟 대외 활동이 뭐라고,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대학 진학을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래요. 꼭 가요.”
다시 생각해 봐도 참, 쓸데없었다. 유진은 이번에도 속마음과 달리 어른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연호가 좋다고 따라 웃었다.
***
농활 이야기가 지겹다던 연호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면접 날이 다가오기까지 연호는 누구보다 의욕적이었으며,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진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연호는 끝까지 유진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유진은 자신이 우선시되지 않는 상황에 익숙했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대외 활동의 장점은 많았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데다 취지 또한 건강했다.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못할지라도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취직을 목표로 특성화 고등학교에 다니는 연호에게는 이런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본격적인 취업 활동을 앞두고 있는 연호에게 이러한 대외 활동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장려할 만한 일이었다. 연호는 어렸고, 상대적으로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지금이 아니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해 봤는데, 나보다 좋으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연호는 유진을 좋아한다. 이제 이 정도는 유진도 알았다. 다만 연호의 감정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비슷한 맥락이었다. 연호가 유진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유진이 없는 9박 10일 동안 연호가 혼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유진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유진은 온갖 허울 좋은 말을 핑계 삼아 연호에게 농활에 함께 갈 것을 권했다. 유진의 치졸한 욕심을 배제하더라도 연호에게 좋은 기회임이 틀림없었으니까. 유진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이제 와서 고민해 봤자 이미 늦었다. 유진이 하는 말은 믿어 의심치 않는 연호 덕분에 면접 준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어느덧 연호의 대외 활동 면접 일이 되었다.
그것까진 좋았는데 당장 연호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면접 당일, 한 시간 전의 통화를 끝으로 연호가 사라졌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건 아니었지만 다행히 연호의 순서는 맨 마지막이었다.
“다음 지원자 들어오세요.”
지원자가 인사를 건네는 틈을 타 유진이 빠르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연호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밖에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다. 연호의 차례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면접관들 중 교수는 한 명뿐이었으며 연이은 면접으로 일찌감치 지쳐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형식적인 자리이니 좋은 말로 대충 구슬려서 돌려보내면 그만이었다. 연호와 연락이 되지 않는 시점부터 교수의 안색을 살피던 유진은 교수가 피곤한 한숨을 내쉬자마자 달콤하게 그의 노고를 극찬했다.
연호가 면접에 늦어서 불합격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유진은 연호가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연호와의 동행에 연연하는 자신이 역겹다고 생각했다.
교수를 내보내는데 성공한 유진이 자연스럽게 휴식을 유도했다. 사람들이 한숨 돌리는 사이, 유진이 조용히 면접실을 나왔다. 빈 강의실을 찾아 들어간 유진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전화였다. 대학가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없다고 했다. 119 출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연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 내가 모르고 있는 거면? 유진이 다급하게 강의실을 나왔다.
“선배! 여기 계셨어요? 지금 면접자 도….”
“미안한데.”
유진은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책잡힐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 머리를 숙일지라도, 나의 실수와 부주의로 사과를 하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유진은 그게 무엇이든 넉살 좋게 웃어넘길 수 있는 형 같은 성격이 못 되었고, 애초에 형은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대로 평생 형처럼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실수를 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느새 유진은 한 적도 없는 실수를 자처하며 사과를 하고 있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요. 면접 결과는 내일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나 먼저 가 볼게요.”
“네? 선배! 잠깐…!”
유진이 뒷말은 듣지도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스스로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당장은 연호부터 찾아야 했다. 찾아서 연호가 무사한지를 확인해야 했다.
“이렇게요?”
처음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땐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연호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듣고도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자신의 바람이 만들어 낸 착각인지 분간하지 못했던 것처럼, 유진은 이번에도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의심했다.
“아씨, 왜 이렇게 안 되지….”
복도 한가운데서 단추와 씨름을 하고 있는 연호가 보였다. 첫 번째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반팔 셔츠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 상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한낮이 되면 20도가 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하복을 입을 만한 계절은 아니었다.
“아니, 거기가 아니라…. 해 드릴게요. 잠깐만 있어 봐요.”
일 년 만에 입는 하복에 연호가 자꾸만 헛손질을 하자, 보다 못한 후배가 직접 연호의 교복 단추를 채워 주기 시작했다. 연호가 후배에게 냉큼 자신의 몸을 맡겼다.
“방금 마지막 면접자 도착했는데….”
“…….”
“선배 바쁘신 거면…. 선배?”
다행히 아픈 곳은 없어 보였다. 뛰어왔는지 연호가 셔츠 자락을 펄럭이며 제 몸의 열기를 식히려 들었다. 얇은 교복 셔츠가 펄럭일 때마다 연호의 맨살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면접자 들어오라고 해요.”
유진이 연호와 후배를 지나쳐 면접실로 들어갔다.
“어? 유…!”
닫힌 문 너머로 어렴풋이 연호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지금부터 유진은 철저하게 연호를 모른 척해야 했다. 그래야 모두에게 당당히 연호의 합격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연호가 무사한 걸 알자마자 합격시킬 생각부터 하다니, 유진은 다시 한 번 스스로가 역겹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면접자가 입실했다. 교수는 돌아갔고, 면접도 드디어 끝을 앞두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소원해진 상황에서 연호가 불합격할 이유는 없었다. 연호가 다짜고짜 면접관의 멱살이라도 잡지 않는 이상 합격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강연호입니다.”
긴장했는지 다소 뻣뻣한 태도였다. 그렇게 준비해 놓고 겨우 인사도 제대로 못하다니, 노력한 시간이 아까웠다.
그러게 나한테 도와 달라고 했으면 됐잖아.
유진은 함께 인사를 건네는 대신 말없이 연호를 쳐다보았다. 인사를 마친 연호가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눈에 띄게 밝아지는 연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일순 눈이 부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층 긴장이 풀린 연호가 준비해 온 서류를 면접관들에게 나눠 주었다. 연호의 신상 정보와 지원 동기 따위가 적혀 있는 자기소개서였다. 요구한 적도 없는 영어 버전도 있었다.
“와, 일일이 뽑아 오신 거예요?”
“성실하시네.”
면접관들이 지원자의 서류를 준비해 두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스스로 서류를 준비해 온 연호의 태도에 면접관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진짜 고등학생 맞아요?”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인기 많죠?”
평소의 연호였다면 감흥 없이 지나쳤을 질문들이 유진의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가벼운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연호가 백 마디의 말 대신 유진을 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는 그저 성심 성의껏 웃어 보이라던, 사장의 조언대로였다.
대학생들이 면접관 흉내를 내 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교수까지 사라지자 눈치 볼 사람이 없어진 그들은 안락하게 면접관의 자격을 누렸다. 심지어 연호는 마지막 순서이기까지 했다.
“이상형이 뭐예요?”
면접을 빙자한 시답잖은 질문이 오갔다. 다행히 이번 질문은 좀 쉬웠다. 연호가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착한 사람이요.”
“에이,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왜 자주 보는데요?”
“우리랑 농활 안 갈 거예요?”
“네?”
“합격하고 싶으면 솔직하게 대답해야죠.”
이 정도면 그냥 작업이었다. 연호가 기를 쓰고 준비해 온 지난 시간들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강연호 씨.”
유진이 처음으로 연호를 호명했다. 연호가 면접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 있는 대화였다.
“면접 결과는 3일 내로 연락드릴게요. 이제 그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벌써요?”
“수고하셨습니다.”
유진이 딱 잘라 연호의 의문을 일축했다. 아, 맞다. 말대꾸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습관처럼 튀어나온 말대꾸에 연호가 머쓱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선배. 얘 이상형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연호를 마지막으로 아침부터 계속된 면접이 드디어 끝이 났다. 면접관들은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왔다. …이대로 나가면 되는 건가? 순식간에 흐트러진 분위기가 어색한 듯 연호가 힐끔 면접관들을 쳐다보았다.
“유진 선배!”
“…네. 얘기해요.”
유진이 연호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얘 손가락 긴 남자가 이상형이래요.”
“그게 왜!”
“넌 그 선배한테 그렇게 데여놓고 아직도…!”
“너 조용히 안 해?”
다른 사람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그들만의 이야기에 연호가 완전히 나갈 준비를 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느라 살짝 허리를 숙이자 아무것도 받쳐 입지 않은 맨 가슴이 들여다보였다.
“선배는 이상형이 뭐예요?”
“맞아. 저도 궁금해요. 선배는 그런 얘기 잘 안 해 주니까….”
얇은 교복 셔츠 너머로 연호의 허리가 비쳤다. 교복은 컸고, 쓸데없이 얇았다. 어쩌면 유진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선배?”
사람들 앞인데도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었다. 유진은 연호가 면접 실을 나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뒤늦게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얘기해 줄래요?”
“선배 이상형이요.”
그 상투적인 질문에 유진은 자연스럽게 연호를 떠올렸다.
“…어리고 섹시한 애요.”
유진이 연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잘 한 걸까. 최대한 착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는데 남들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지는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건 합격 여부였지만 무표정하게 연호를 쳐다보던 유진이 더 마음에 걸렸다. 연호가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PC방에 들러 자기소개서를 출력해 온 연호는 학교에 다다라서 뒤늦게 오탈자를 발견했다. 이럴까 봐 일찍 나온 거였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두 번째로 들른 PC방에서 컵라면 테러를 당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뻔했다.
당연히 화가 났다. 짜증도 났다. 그럼에도 화를 내지 않은 건 연호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연호에게 그러지 않았으니까. 컵라면 테러 사건의 주범은 연호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초등학생이었다.
라면 국물 때문에 동복은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식당 물품으로 가득한 집 안에서 어렵게 하복을 찾아낸 연호는 끝내 면접에 지각을 하고 말았다. 가장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실망했겠지. 비록 돈도 없고 공부도 못하는 별 볼 일 없는 고등학생이지만 연호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유진이 면접관으로 있는 자리이니 더더욱 잘 보이고 싶었다. 스스로 해내는, 멋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영어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영문 자기소개서까지 만들어 갔지만 영어 질문은커녕 자기소개서에 관련된 질문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면접관이 면접자에게 관심이 없으면 그럴 수 있다고 했다.
진짜 열심히 했는데…. 기대한 만큼 실망이 뒤따랐다. 복도를 걷다 멈춰 선 연호가 벽에 이마를 기대고 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속이 상했다.
“-잠깐만.”
그 자세 그대로 뒤에서 끌어 안겼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잠깐만요….”
허리를 끌어안은 커다란 손, 떨리듯 속삭이는 부드러운 목소리, 조심스러운 손길까지. 모두 다 연호가 좋아하는 것들뿐이었다.
쿵….
불이 꺼져 있는 빈 강의실 문이 열렸다가 금세 닫히었다. 찰칵, 동시에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연호는 유진에게 반쯤 안긴 채로 벽에 기대 세워졌다. 등 뒤로 둘러진 유진의 팔은 단단했고, 똑바로 마주한 품은 따뜻했다. 영문도 모르고 유진에게 끌려 들어온 연호였지만 도리어 기분만 좋아졌다.
애초에 연호가 농활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연호는 유진의 품에 갇힌 채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커튼 사이로 파고든 희미한 햇빛이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전구처럼 주변을 깜박이고 있었다.
“어디 아파요?”
빛과 어둠으로 얼룩진 시야가 난잡했다. 덕분에 유진을 보고 있는 것뿐인데도 어쩐지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요? 내가 왜 아파요?”
“머리 부딪친 거면 바로 병원 가야 되는데….”
대답을 기다릴 여유조차 없는지 유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부터 움직였다. 성적인 의도가 없는 커다란 손이 뒤통수부터 정수리까지 꼼꼼하게 연호의 머리를 살폈다.
“간지러워요….”
두피를 간지럽히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연호가 작게 웃었다. 가만히 연호의 웃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유진이 연호의 어깨로 손을 내렸다. 손바닥 아래로 얇은 셔츠가 만져졌다. 유진의 손이 천천히 연호의 몸을 쓰다듬었다. 등을 타고 내려온 손이 느릿하게 연호의 허리를 쓸어내렸다. 셔츠가 말려 올라가면서 연호의 맨살이 콘크리트 벽에 닿았다.
차가웠다. 연호의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여기? 여기 아파요?”
“그게 아니, 으앗!”
유진이 곧바로 연호의 교복 셔츠를 끌어 올렸다. 콘크리트 벽에 완전히 맞닿은 등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반면 연호의 맨살을 더듬는 손길은 따뜻하기 짝이 없었다.
유진이 직접 연호의 몸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유진에게서 성적인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등은 차가운데 가슴은 따뜻한, 상반되는 감각이 동시에 가해진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자극적인 일이었다.
끈질기게 가슴을 헤집던 손바닥의 열기가 떨어져 나갔다. 짓눌려 있던 젖꼭지가 본래의 모습을 찾아 탄력 있게 일어섰다. 돌기가 일어서는 감각에 젖꼭지가 간지러웠다. 당장이라도 손을 내려 벅벅 긁고 싶었다.
차마 그러지 못한 건 모두 유진 때문이다. 유진은 아까부터 꼼꼼하게 연호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상시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유진의 가마가 내려다보였다. 구부정하게 숙인 허리는 한눈에 보기에도 퍽 불편해 보였다.
유진이 자신에게 실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연호를 걱정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겨우 한 시간 남짓 연락을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모르는 엄마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빠에게 연호와 연락이 되지 않는 한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다.
날 걱정했구나. 속에서부터 무언가 울컥 차올랐다.
연호가 있는 힘껏 유진을 끌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 유진이 연호를 마주 안으며 연호를 들어 올렸다. 따라 들린 연호의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땅을 딛고 있었다. 유진은 비로소 연호를 품에 안는 데 성공했다.
애초에 다치지를 않았으니 다친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유진은 몇 번의 확인 끝에 연호를 내려 주었다. 유진에게 들려 있는 내내 발끝으로 바닥을 딛고 서 있던 연호였다. 다리가 다 후들거렸지만 더 이상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살갗을 벗겨 내기라도 할 것처럼 집요하게 만져진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딪친 건, 맞는데….”
이제는 목구멍 안쪽까지 뜨거운 기분이었다. 연호가 가라앉은 목을 다듬으며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학생이랑 부딪친 거라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옷만 버렸어요.”
“…….”
“형, 걱정했….”
이번에는 유진이 연호를 끌어안았다. 연호가 유진의 어리광을 받아 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형. 왜 그래요.”
왜냐고 물어도 유진도 몰랐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안심해서, 혹은 불안해서, 혹은 너무 좋아서. 감정이 주체가 안 되었다. 그저 닿고 싶었다. 만지고 싶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입을 맞췄다. 뒤엉킨 혀는 따뜻했고, 숨결은 달콤했다. 유진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연호의 혀를 빨았다. 빈 강의실에 젖은 소음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따뜻했다.
“솔직히 말해도 되는데.”
길고 집요한 입맞춤에 연호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장난기가 다분한 어투와 달리 연호의 입술은 형편없이 퉁퉁 부어 있었다. 구석으로 밀려난 책상과 의자를 정리하던 유진이 고개를 들어 연호를 쳐다보았다.
“형 교복 좋아하죠.”
“…….”
“와, 내가 진짜 놀라서….”
연호가 과장스럽게 놀란 척을 하자 유진이 꾹 입술을 닫았다. 정작 연호는 뒷정리를 하는 유진을 구경하며 강의실 의자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 보니까 막 주체가 안 됐어요?”
“…….”
“응? 그랬어?”
땀구멍도 없을 것처럼 생긴 사람이 그렇게 저돌적으로 달려들 줄이야. 연호는 달싹이는 유진의 입술을 바라보며 방금 전의 진한 입맞춤을 떠올렸다.
“다 치웠어요?”
“…거의 다 했어요.”
“그럼 얼른 가요. 나 완전 배고파. 고기 먹어야겠어.”
지은 죄가 있어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던 유진이 연호의 말에 후다닥 청소를 마무리했다. 연호는 의자에 반쯤 누운 자세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달랑달랑 다리를 흔들었다. 흔들리는 두 다리가 경쾌하기 짝이 없었다.
“형도 배고프죠.”
“괜찮아요.”
“아닌데. 형은 훨씬 더 배고플 텐데.”
이쯤 되니 유진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알면서도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장난에는 전혀 면역이 없었다.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 내가 쏜다!”
“소고기 먹을까요? 내가 살게요.”
“됐어요. 맨날 형이 사 주잖아요.”
연호가 유진의 카디건을 추켜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은 내가 사 줄게요!”
유진이 좋은 건 원래도 그랬지만 어쩐지 더더욱 애정이 넘쳐나는 기분이었다. 성적 쾌감을 동반한 애정 표현이 애정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형. 근데.”
이번에는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지 연호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유진을 불렀다.
“내년에는 안 하겠죠?”
잔뜩 부은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쉰 목소리가 유난히 처량하게 느껴졌다. 연호가 풀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형이 졸업하는구나….”
연호는 또다시 대외 활동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유진이 상투적으로 말했다.
“아직 결과는 모르는 거니까 벌써부터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네에….”
유진이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연호의 카디건을 추켜올려 주었다. 구겨진 교복을 가리기 위해 입혀 준 유진의 카디건은 연호에게 품이 커서 자꾸만 소매가 흘러내려 왔다. 소매 끝을 접어 주는 소소한 배려가 좋았는지 연호가 금세 웃는 얼굴을 했다. 실망 속에서 피어오른 미소가 어쩐지 처연하게 느껴져서 유진은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연호는 천성적으로 무언가를 숨기는 데 재능이 없었다. 여러 모로 유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연호의 자기소개서도 그랬다. 이런 걸 처음 해 본 건지 능숙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솔했다. 모범 답안은 아니었지만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고, 화려하진 않았지만 오탈자와 그 흔한 실수도 없었다. 요구한 적 없는 영문 자기소개서도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법이 없었다. 유진의 예상대로였다. 연호는 유진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유진이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이 연호의 합격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다.
연호와 함께할 9박 10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곧 여름 방학이었다.
***
“…이게 뭐야!”
고등학교 3학년은 명실상부하게 학교의 최고참이었다. 이런 대접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가정 통신문이요.”
마치 초등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연호가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왜요? 요즘은 가정 통신문 없어요?”
“요즘 가정 통신문은 안 이렇거든요?”
“그래요? 이번 주까지 보호자 사인 받아서 제출하면 돼요.”
“…알았어요.”
“사인은 여기에 받는 거예요. 앞장이 아니라. 알았죠?”
“그 정도는 나도 알거든요!”
설마 그 정도도 모를까. 연호는 툴툴거리면서도 가정 통신문을 잘 챙겨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 예상은 했지만 자기가 직접 읽어 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근데 진짜 신기하지 않아요? 어떻게 내가 방학하자마자 딱 맞춰서 출발하지?”
그야 유진이 처음부터 연호네 학교의 방학 일정에 맞춰 농활 일정을 짰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 유진은 이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와, 예쁘다. 아씨, 왜 이렇게 예뻐.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예쁘지? 이런 애인을 밖에 두고 학교에 가 있으려니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다. 연호도 빨리 방학을 해야 할 텐데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갔다. 연호가 다시금 방학식 날짜를 헤아렸다.
이미 여름 방학이 시작된 대학교와 달리 고등학교는 아직도 학기 중이었다. 시간도 많겠다, 연애 사업도 순조롭겠다, 연호는 마음껏 유진과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냐 하면, 그 외 것들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연호는 자신의 무지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
“거기 깃발 든 학생!”
미리 알았으면 좀 나았을까.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었을 테다. 연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왼쪽으로!”
처음으로 들어 본 깃발은 더럽게 무거웠다. 연호가 깃발을 들고 뒤뚱뒤뚱 움직였다.
“너무 많이 갔잖아. 다시 오른쪽으로!”
벌써 몇 번째였다. 이제는 짜증도 안 났다. 연호가 순순히 다리를 움직였다.
“좀만 더. 조금만…. 됐어, 거기!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시야를 어지럽히는 뜨거운 태양 너머로 카메라 플래시가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남자는 끝까지 셋을 세지 않았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사진에 잘 담겨야 하는 건 ‘청소년과 함께하는 농촌 체험 활동’이라고 적혀 있는 맞춤 현수막과 대학교 깃발이지, 참가자들의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농활 첫날, 연호는 청소년 대표라는 막중한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살면서 반장 한 번 못해 본 연호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지만 그건 동급생들과 함께 있을 때나 그랬다.
“오빠는 몇 살이에요?”
“너보다 많아.”
“우리 언니보다 많아요?”
“어. 많아.”
초등학생 사이에 낀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라니, 대표를 못 하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청소년의 범주에는 초등학생도 들어갔다. 연호가 카메라를 향해 오만상을 찌푸렸다. 찰칵! 연호의 속도 모르고 발랄한 셔터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일주일 넘게 아이를 떠나보내는 학부모들의 당부 인사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기념 촬영을 모두 마친 연호는 버스 안에서 눈물겨운 이별 극을 구경하고 있었다. 연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광경이었다.
“뭘 그렇게 보냐?”
목걸이에 스태프 명찰을 단 남우가 벌써 다섯 번째 친한 척을 해 왔다. 맡겨 놓은 자리를 찾아가듯 남우가 자연스럽게 연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좁았다. 싫었다. 연호가 정색을 했다.
“아, 뭔데. 네 자리로 가요.”
“형이라고 하랬지! 좀만 더 들어가 봐. 몇 시간은 타야 되는데.”
남우가 좌석 안으로 커다란 몸을 구겨 넣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히 연호의 옆자리에 앉을 생각인 것 같았다.
“너희 부모님은 안 오셨냐? 고3이 공부 안 하고 이런 데 온다는데 뭐라고 안 하셔?”
뭐라고 하기는. 2주 넘게 집을 비워야 했던 공장 아르바이트도 단번에 허락 받은 연호였다. 연호가 가정 통신문을 건네자 엄마는 별다른 말 없이 사인부터 했다. 아주 깔끔한 일처리였다.
가정 통신문 맨 앞장에는 유진의 학교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다. 학부모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한 나름의 장치였다. 연호에게 가정 통신문을 돌려주던 엄마가 대학교 이름을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대학 가고 싶니?’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의아했지만 연호는 언제나 그랬듯이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의 행동을 너무 깊게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혼자서 지금까지 연호를 키워 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 감히 엄마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었다.
“여기 있었어요?”
오래된 상념을 무너뜨리는 다정한 목소리에 연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우 형, 학부모님들이 찾으세요.”
“나? 나를 왜?”
“멀미가 심한 아이가 있는데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셔서요. 우리보다는 형이 가서 직접 인사드리면 훨씬 안심하실 것 같아요.”
확실히 아이들은 손이 많이 갔다.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잘 자는 연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아, 이거 참 쉴 틈이 없네. 나 없으면 어쩌려고 이러냐? 야, 강연호. 들었지? 같이 못 앉아도 이해해라. 형은 너처럼 놀러가는 게 아니라서 어쩔 수가 없어요.”
“더위 먹었어?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꺼져요.”
“에이, 삐졌냐? 삐지기는. 서울 갈 땐 꼭 같이 앉아 준다, 내가!”
연호의 타박에 완전히 익숙해진 남우가 아무런 타격 없이 발랄하게 자리를 떠났다. 남우를 내보내는 데 성공한 유진은 승리의 여운을 만끽할 틈도 없이 부지런히 탑승객 명단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날을 기다려 왔지만 막상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유진을 대하려니 연호는 유진에게 어느 정도 아는 척을 하면 되는 건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단둘이 있을 때처럼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자각만 있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적당한 거리 조절이 어려웠다. 얼굴만 보면 입부터 맞추고 싶어지는 상대에게 적당히가 통할 리가. 유진을 보면 볼수록 치대고 싶어지니 차라리 눈에서 안 보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연호가 도착했을 때부터 유진은 줄곧 바빠 보였다. 연호가 구시렁대며 유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버스 좌석은 청소년 참가자와 성인 보호자 구성으로 채워졌다. 남우의 말에 의하면 대부분의 참가자가 친인척 관계라고 했는데, 덕분에 시작부터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짝꿍이 없는 건 연호뿐이었다. 버스가 출발한 후에도 연호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같은 버스에 있는 게 어디야. 합격해서 따라올 수 있었던 게 어디야! 연호가 씩씩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남은 일정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너무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평일 대낮에도 서울 시내는 번잡했다. 정체가 길어질수록 버스 안의 소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가뜩이나 머리만 대면 잘 자는 연호는 조용해진 버스 안에서 안락하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한숨 푹 자고 나니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드디어 서울을 벗어난 모양이었다. 늦게까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도 대부분이 자고 있었다.
“잘 잤어요?”
잠이 덜 깬 와중에도 유진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연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호가 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건네 온 걸 보면 유진은 줄곧 연호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깨우지….”
“잘 자길래. 물 마실래요?”
자고 일어나니 목이 말랐다. 유진이 곧장 생수병을 건넸다. 이제 막 뚜껑을 뜯은 새것이었다. 목을 축이고 나니, 연호는 자는 동안 잊고 있었던 허기가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일찍 나오느라 아침도 먹지 못했다.
“…핫도그….”
“휴게소 가서 사 줄게요.”
“응….”
“이거라도 먹고 있을래요?”
잠이 덜 깬 연호를 타이르는 유진에게서 달콤한 카카오 냄새가 났다. 초콜릿이었다.
“이게 다 뭐예요?”
“출발할 때 주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못 줬어요. 혹시 몰라서 멀미약도 샀으니까 가지고 있어요.”
뭘 얼마나 산 건지 넘겨받은 봉투가 제법 묵직했다. 봉투 안은 각종 주전부리와 멀미약, 이온 음료로 가득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멀미약이었다. 마시는 멀미약, 붙이는 멀미약, 빨아먹는 멀미약까지. 멀미약은 종류가 다양했다. 유진이 아니었다면 연호는 평생 알지 못했을 사실이었다.
“나 멀미 안 하는데.”
“그래도 가지고 있어요. 필요 없으면 버려도 되고.”
“버리긴 뭘 버려요. 형은 괜찮아요?”
“난 이미 붙이고 먹었어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편두통을 앓는다는 유진에게 예외는 없었다. 유진은 남의 차에 타면 멀미를 한다고 했다. 오토바이는 괜찮았던 걸 보면 역시 유진은 연호와 인연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연호가 뿌듯해하며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달콤했다.
도착하기까지 버스로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렸다. 긴 여정에 사람들이 나가 떨어져 가는 동안, 연호는 유진이 사다 준 과자를 까먹으며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들려서 핫도그와 통감자도 먹었다. 다들 예정보다 오래 걸렸다며 힘들어했지만 연호는 시간이 너무 금방 가서 아쉽기만 했다.
친척 간의 교류가 전무한 연호는 시골에 내려갈 일이 없었다. 수학여행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멀리 나와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소똥 냄새가 나는 한적한 시골 마을도, 이렇게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 본 것도 모두 다 처음이라 그저 어색했다. 초등학생들도 충분히 대하기 어렵건만 이장네 부부를 제외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그다지 살가운 성격이 못 되는 연호는 어른들과 애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정신없이 첫째 날을 마무리했다. 유진의 머리카락은 구경도 하지 못한 채였다.
기상 시간은 아침 여섯 시였다. 그 시간에 자 본 적은 있어도 일어나 본 적은 없는 연호가 눈도 못 뜬 채 국민 체조를 했다. 체조가 끝나자 잠투정을 부리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어려서 그런지 힘도 좋았다.
“유진이 형은요?”
“넌 여기까지 와서 천유진 타령이냐?”
“그러려고 온 건데요.”
계절이 바뀌어도 연호의 팬심은 여전했다. 남우가 투덜거리면서도 연호의 옆자리에 앉았다. 함께 버스도 타지 못한데다 방 배정까지 떨어져 있어서 내심 서운해 보였다. 연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응급실 갔어.”
“…유진이 형 아파요? 얼마나? 아, 아니. 어디로 갔어요? 여기 오토바이 없어요?”
“야, 야. 정신 차려. 천유진이 아니라 어제 멀미하던 애 때문에 간 거야. 밤에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대.”
솔직히 말하면, 안심했다. 유진이 아픈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와, 나 진짜 쓰레기 같네…. 연호가 미약한 죄책감에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아직 현실 파악이 안 되냐?”
“왜 또 시비야. 뭐. 왜.”
“너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야. 삽질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아침 많이 먹어 둬라.”
삽질은 무슨,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만큼은 알아서 잘 하는 연호였다. 제일 잘했다. 연호는 남우가 오늘따라 별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형은 아침 먹었으려나. 밤에도 들어오는 거 못 보고 잤는데…. 우리 유진이 피곤하겠다. 연호가 아랑곳 않고 유진의 걱정을 했다.
“…이게 뭐야!”
설마 남우의 충고가 실현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연호가 뙤약볕 아래에서 소리쳤다.
“진짜 삽질이잖아!”
“그럼 가짜 삽질도 있냐? 이놈아, 똑바로 안 해?!”
같은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초등학생들은 잡초 뽑기에 동원된 반면, 돌도 씹어 먹을 열아홉 살 강연호는 온갖 궂은일에 불려 다니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초등학생들을 보살피느라 정신이 없었으므로, 나이로 보나 성별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연호는 아주 써먹기 좋은 인재였다. 남우는 일찌감치 사라진 후였다. 개새끼, 이럴 줄 알고 저 혼자 도망간 게 틀림없었다.
“배고파서 못 하겠단 말이에요.”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밥 타령이야?”
“먹어도 배고픈데 어떡해요!”
“젊은 놈이 맥아리가 없어서는…. 다들 일로들 와! 새참 먹어!”
와아! 아이들이 온몸에 흙을 묻힌 채 환호성을 내지르며 달려왔다. 연호도 구시렁대며 아이들을 따라갔다.
종일 삽질만 했는데 아직도 햇빛이 쨍쨍했다. 유진이 없으니 시간이 안 가도 너무 안 갔다. 연호가 바닥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마치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흙냄새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른들의 구수한 사투리는 꼭 텔레비전을 틀어 놓은 것처럼 생소하기만 했다.
“왜 거짓말했어요?”
심장 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 머리를 높게 묶은 초등학생 하나가 참외를 오물거리며 연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자기 손보다 큰 참외를 통째로 들고서 먹고 있었다.
“우리 언니보다 나이 많다면서요. 아니잖아요.”
가만 보니 기념사진을 찍을 때 연호에게 말을 걸던 아이였다. 연호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너희 언니 몇 살인데.”
“스물세 살이요.”
…많아 봤자 중학생일 줄 알았는데. 연호가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네. 너희 언니가 더 많네.”
“거짓말한 거 맞잖아요!”
“미안.”
“앞으로 거짓말하지 말아요.”
아이가 연호를 나무라며 참외를 깨물어 먹었다. 참 맛있게도 먹는다 싶었다. 아이는 계속 참외를 먹으며 연호에게 질문을 했다.
“오빠는 왜 고등학생이에요?”
“그러게.”
“오빠도 몰라요? 우리 언니가 오빠 보고 왜 고등학생이냐고 그랬는데.”
왜냐고 묻는다 한들 연호가 알 리가 없었다.
“짜증난다고 그랬어요.”
…내가 뭐 잘못했나? 연호는 가만히 아이를 쳐다보다가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참외 맛있어?”
“네. 오빠도 먹고 싶어요?”
“응.”
“저 할머니가 줬어요.”
아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래되어 보이긴 해도 나무로 만든 평상까지 있어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워지는 광경이었다.
“할머니, 오빠도 참외 먹고 싶대요.”
아이에게 끌려온 연호가 어색한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 연호를 쳐다보는 사람들 중에는 아이를 닮은 여자도 있었다. 연호에게 짜증이 난다던 아이의 언니인 것 같았다.
멀리서 지켜볼 때만 해도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던 것 같은데 연호의 등장 이후 더는 아무런 이야기도 오가지 않았다. 이를 알아차린 건 연호뿐만이 아니었다.
“언니. 오빠 왔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언니라 불린 여자가 당황해하며 아이를 잡아끌었다.
“아, 왜애.”
아이가 눈치 없이 여자의 품에서 버둥거렸다.
방금 전까지 뒷담화하던 주인공이 나타났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이 작은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향했다가, 그대로 되돌아왔다. 느긋하게 참외를 깎고 있는 할머니와 무척 대조되는 풍경이었다. 반질반질한 참외를 받아 든 연호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연호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연호를 좋아하지 않았다.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외모와 퉁명스러운 언행은 어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지 못했다.
아, 맛있다. 혼자서 참외를 먹던 연호는 입 안에 퍼지는 단맛에 금세 밝은 얼굴을 했다. 형이랑 같이 먹고 싶은데…. 유진은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연호는 또 다시 유진을 생각했다.
유진의 소식을 알게 된 건 일이 끝나자마자 슬그머니 얼굴을 내민 남우 덕분이었다. 괘씸한 마음에 앞으로도 평생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지만 연호가 몰랐던 사실들을 알려 주는 바람에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연호는 남우의 가치를 유진을 통해 찾곤 했다.
“많이 아프대요?”
“아프니까 갔겠지. 버스에서 유난 떨 때부터 알아봤다, 내가.”
남이야 아프든 말든 어차피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남우는 걱정하는 척도 안했다. 아픈 아이보다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유진을 더 걱정하던 연호는 남우를 보며 다시 한 번 결심했다.
“천유진 없으니까 존나 꿀이네. 애들은 아직도 회의 중이란다. 다들 참 요령 없지 않냐.”
진짜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남우는 여러 모로 타인에게 타산지석이 되는 사람이었다.
“맞다. 너 오늘 삽질 존나 했다며? 군대 가서 예쁨 받으면 다 내 덕인 줄 알아라.”
남우는 그것도 모자라 연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꿰고 있기까지 했다. 소름끼쳤다.
“뭐라는 거야. 헛소리 그만 하고 너희 집으로 가요.”
“형이라고 하랬지. 애들 아직 회의 안 끝났다니까? 아, 귀찮은데 그냥 여기서 잘까….”
이러다 정말 자고 갈 기세였다. 안 그래도 같은 방 배정을 받은 유진보다 다른 숙소인 남우를 더 많이 보고 있는 연호였다.
“너 잘 데 없으니까 빨리 꺼져요. 애들 자는 데 방해 돼. 나도 잘 거야.”
실제로 아이들은 모두 일찌감치 잠들어 있었다. 하루 종일 바깥에서 뛰어다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한 연호도 피곤한 건 매한가지였다.
“아, 밀지 좀 말아 봐! 와, 존나 어둡네. 야, 같이 가자. 나 라섹해서 빛 번짐 있어.”
“가로등도 없는데 빛 번짐이 무슨 상관이에요. 제발 가라, 좀.”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연호는 간신히 남우를 내보는 데 성공했다. 꼴에 그것도 사람이라고 남우까지 사라지자 비로소 완전한 적막이 찾아왔다. 마치 빈 집에 혼자 있는 것 같았다. 이것만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가장 큰 방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자고 있었고, 연호와 같은 방을 배정 받은 대학생 형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전처럼 이 순간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건 유진이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유진의 이부자리까지 준비해 놓을까 했지만 그건 너무 티가 나는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연호가 낯선 냄새가 나는 이부자리에 몸을 뉘였다. 어차피 잠결에 이마저도 모두 걷어차 버릴 테지만 형식적으로나마 덮고 자기로 했다.
- 더워도 배는 꼭 덮고 자요.
- 금방 갈게요.
유진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연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잠이 들었다. 고된 노동은 최고의 수면제였다.
***
아씨…. 벌써 모기가 있나….
연호는 얼굴이 간질간질한 느낌에 무작정 손부터 올리고 봤다. 탁! 부딪친 면적이 제법 넓었다. 모기가 아니라 비둘기는 될 것 같았다.
…뭐? 비둘기?!
연호가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미안해요.”
커다란 손이 연호의 눈가를 덮어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놀랐어요?”
놀랐다. 좋은 의미로 놀랐다. 어울리지 않게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잡아 벌리자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유진이 보였다.
“혀엉….”
악몽을 꾼 것도 아닌데 절로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유진이 대답 대신 부드럽게 연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애는 잘 갔어요?”
“부모님 오신 것까지 다 보고 왔어요. 잘 도착했대요.”
아이가 집에 가야 할 정도로 아픈 줄도 모르고, 연호는 유진이 아픈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심 아침의 일이 마음에 걸렸던 연호가 뒤늦게 안도했다.
“오늘 일 많이 했다면서요.”
“응…. 삽질….”
“다들 칭찬하던데. 놀지도 않고 열심히 한다고. 그랬어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꼭 자장가처럼 들렸다.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천천히 연호의 눈이 감겼다. 흔들어 깨우면 될 테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유진이 어쩌지도 못하고 연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이제야 겨우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연호는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유진은 첫날부터 지금까지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어린이, 그것도 가장 어린 참가자가 아픈 바람에 시내 병원까지 급히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를 동반한다는 건 일반적인 농촌 봉사 활동보다 훨씬 더 막중한 책임을 요구했고, 유진은 톡톡히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요?”
유진이 작게 속삭였다. 연호를 깨우려는 건지, 아니면 재우려는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을 만큼 조그만 목소리였다. 유진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자는 거예요?”
유진이 없는 동안 연호가 어땠냐고 하면, 유진의 예상대로였다. 연호는 똑같았다. 유진이 없어도 여전히 잘 지냈고, 앞으로도 잘 지낼 테다. 알고 있었다. 그 정도 주제 파악은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우습게도 확인 사살이라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호야.”
언제까지 내 옆에 있어 줄 거야? 사랑 받는 감각을 알아 버린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끝없는 불안을 낳았다. 유진은 불안을 노래하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달콤한 목소리를 냈다.
“계속 잘 거야?”
“…….”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우리 유진이 완전 보고 싶었지…. 와 씨, 나 잠 다 깼어….”
자다 깬 연호가 가까이 다가온 유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 다른 사람….”
뒤늦게 주변을 의식한 연호가 다시금 떨어지려 했지만, 유진은 더욱 힘을 주어 연호를 마저 끌어안았다.
“아직 안 왔어요.”
“아직도?”
“응. 술 마셔요.”
그러라고 사다 준 술이니까.
“그럼….”
연호가 유진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유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나랑 놀다 자도 돼요?”
“응.”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유진에게 즉답이 돌아왔다. 겨우 그것뿐인데 연호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부스스하게 웃었다. 본인도 인지하지 못했을 뿐, 연호는 줄곧 긴장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연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배달원이 아닌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어른들을 만났다. 그들은 연호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았지만, 적어도 아르바이트를 할 때처럼 자신들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굴지도 않았다. 함께 농사일을 하며, 연호를 동등하게 대해 주었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즐겁기도 했다.
하루 종일 어떻게 참았는지, 연호는 한참 동안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모두 연호 혼자 보고 느낀 것으로, 그 속에 다른 사람의 존재는 없었다. 사람들 말대로였다. 사람들로부터 다가가기 어렵다는 오해를 받고 있기에 연호는 철저히 혼자였다. 아직까지는 그랬다.
“낮에 참외 먹었는데 엄청 맛있어서 형 생각났어요.”
“그랬어요?”
“완전, 엄청 났어. 내일은 꼭 같이 먹어요.”
농활이 끝날 때쯤이면, 아니, 내일만 되어도 모두가 조금씩 알게 될 테다. 연호는 결국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유진은 또 다시 불안해지겠지. 새로운 불안이 추가될 날이 머지않았다.
“그리고 나…. 으응….”
연호는 아직 유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은 것 같았지만,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맞췄다. 열심히 떠들어 대는 입술을 핥으며 얼굴을 쓰다듬자 연호가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려 왔다. 아이 같지 않은 얼굴로 아이 같이 웃는 뺨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졌다.
자다 깬 아이의 몸은 뜨거웠다. 입 안도 마찬가지였다. 살아 있는 온기를 쫓아 정신없이 혀를 섞었다.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 뒤통수를 붙잡아 밀려나는 연호의 몸을 단단히 고정시킨 유진이 연호의 위에 올라탔다.
입맞춤이 깊어졌다. 미세한 돌기가 돋아난 혓바닥을 길게 핥아 올리자 연호의 혀가 파들파들 떨어 댔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혀를 잡아 강하게 빨아올리자 연호의 얼굴이 저절로 딸려 올라왔다. 유진이 부드럽게 연호의 몸을 짓눌렀다. 입술은 여전히 붙어 있는 채였다.
하아…. 녹진하게 풀어진 몸이 나른한 신음을 토해 내며 다리를 얽어 왔다. 천을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 몸 그 어디에도 뜨겁지 않은 곳은 없었다. 달아오른 몸은 따뜻했고, 집요한 입맞춤을 버거워하면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입술은 사랑스러웠다.
헐떡이는 숨을 모조리 삼키며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창가 쪽에 누워 있던 연호는 어느새 벽 끝까지 밀려나 있었다. 벽과 유진의 사이에 갇힌 연호가 답답한 듯 고개를 비틀었다.
그 찰나를 견디지 못하고 입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마치 연호가 도망치기라도 할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골격이 큰 딱딱한 몸이 연호를 짓눌러 왔다. 벽에 가로막힌 연호가 유진을 버거워하며 입맞춤을 받았다. 유진이 연호를 잡아 누르며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간간히 토하는 숨은 모조리 유진에게 빨려 들어갔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평소보다 흥분한 유진이 느껴졌다. 두 개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나뒹구는 가운데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유진의 머리카락을 스치던 달빛이 조금 더 아래를 비추는 순간, 연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유진을 넘어트렸다.
“혀엉, 나….”
연호가 간신히 소리를 내어 유진을 불렀다.
“간지, 러워….”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잔뜩 젖어 있었다. 유진이 자신의 위에 올라탄 연호를 꽉 끌어안으며 물었다.
“어디가요….”
“아, 안에…!”
“안에?”
“으응, 간지러워, 안에, 간지러….”
유진이 연호의 상의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여기?”
예민한 젖꼭지를 잡아 돌리며 묻자 연호가 기쁘게 허리를 떨어 대면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등도, 허리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유진이 연호의 엉덩이에 다다른 순간.
“아, 피곤해.”
“야, 애들 벌써 다 자나 봐. 코 고는 소리도 나는데?”
“무슨 초딩들이 저렇게 코를 고냐.”
하아, 하아…. 달뜬 숨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바깥의 부산스러움에 두 사람의 행동이 멎었다. 소리가 더 가까워지기 전에 유진이 연호에게서 떨어졌다. 잊지 않고 연호의 흐트러진 티셔츠도 정리해주었다.
구석에 밀려나 있던 이불을 가져온 유진이 연호를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아직 쾌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연호가 멍하게 유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연호는 한 마리의 애벌레가 되어 맨바닥에 납죽 눕혀졌다.
“잠깐만 기다려요.”
유진이 눈만 내놓은 연호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금방 올 테니까….”
눈가에 닿는 입술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연호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얼굴을 피하려 들자 떨어져 나가던 유진이 잠시 멈칫하더니 그대로 달려들었다. 코밑까지 씌워진 이불 때문에 직접 입술에 닿지는 못했지만 얇은 여름 이불임을 감안하더라도 유진의 입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낙인 같은 입맞춤을 남기고 유진이 방을 나갔다. 밖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점점 이성이 돌아왔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잔뜩 발기한 성기가 괴로웠다. 혼자 남겨진 연호가 이불 속에서 슬쩍 허벅지를 꼬았다.
“쟤도 벌써 자네.”
“그래도 고등학생이라 체력 쩔더라. 남우 형 몫까지 혼자 다 했잖아. 하여튼 그 새끼는….”
다리를 꼬고 있었던 것뿐인데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오자 죄를 진 사람처럼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불을 덮고 있는 데다 벽을 보고 누워 있어서 연호가 발기했다는 사실을 들킬 일은 없었지만 마음만은 그러지 못했다.
심장 소리 때문에 주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연호는 잔뜩 긴장한 채 사람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짧은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느려져 갔다. 연호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으라는 유진의 충고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연호는 숨 쉬는 것도 잊고서 조용히 욕실로 향했다. 엉거주춤 걷고 있는 연호의 뒷모습은 누가 보아도 이상한 생각을 들게 했다. 사람들이 갓 씻고 나온 욕실에서는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났다. 살면서 욕실이 이렇게 반가운 날이 올 줄이야. 아직도 발기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연호가 곧장 바지를 내렸다. 지금은 그저 사정이 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싸고 싶었다.
“여기 있….”
잠그지 않은 욕실 문은 너무 쉽게 열렸고, 연호는 성기를 내놓은 채 정면으로 유진과 마주치고 말았다. 살면서 이렇게 쪽팔릴 수 있다는 걸 연호는 이날 처음 알았다. 유진의 앞에서 자위를 하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연호가 뒤늦게 성기를 가렸다. 그럴 것 없이 바지를 추켜올리면 됐을 테지만 당장은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너….”
단정하지 못하게 허리에 두른 카디건은 전혀 유진답지 않았다. 입고 있던 카디건을 허리에 두르고 있는 걸 보면 유진의 사정도 연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찰칵, 욕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문은 또 왜 안 잠그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냉정한 질책에 연호가 입술만 달싹거렸다. 유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두 명이 안 왔어요.”
“…….”
“곧 출발한다는데….”
성큼성큼 다가온 유진이 성기를 가리고 있던 연호의 손을 치웠다. 연호의 발기한 성기를 내려다보는 기다란 속눈썹 위로 오렌지 불빛이 걸리었다. 연호가 멍하게 유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깜박깜박, 춤을 추듯 부드럽게 팔랑거리는 속눈썹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으, 읍!”
얼굴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다. 커다란 손이 입을 틀어막는 동시에 아래에서 축축한 쾌감이 가해졌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긴 사정을 마친 연호가 바닥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연호를 받쳐 주는 유진의 입가에 진득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우습게도 몸속이 찌르르 울렸다. 사정을 마친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연호가 차마 유진을 보지 못하고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자신은 짐승이 틀림없었다. 문득 유진의 하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만.”
카디건으로 가려지지 않는 불룩한 바지춤이 보이자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유진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왜….”
“시간 없어요. 안 돼.”
연호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유진의 바지춤을 힐끔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연호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연호는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연호가 욕실 문을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방을 배정 받은 나머지 두 사람이 돌아오는 바람에, 더 항의하지 못하고 얌전히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씩씩거리며 유진을 기다리기를 몇 분, 탈력감에 지친 연호가 졸기 시작했다. 배를 덮고 있던 이불은 진작 내팽개쳐져 있었고, 방 안의 모두가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풀벌레인지 귀뚜라미인지 모를 울음소리가 점점 현실과 꿈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잠에 취해 있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등 뒤가 따뜻해진 것 같기도 했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서는 희미한 담배 냄새가 묻어났다.
연호가 온기를 쫓아 품속을 파고들었다. 꽉 맞물린 몸에서는 유진의 냄새가 났다. 좋았다.
***
첫날부터 환자가 발생하는 거한 신고식을 치르자 거짓말처럼 평화가 찾아왔다. 새벽 여섯 시에 시작되는 단체 국민 체조는 이제 모두의 일과가 되어 있었고, 이름 모를 벌레들과 낯선 동물의 등장에도 조금씩 무뎌져 갔다.
다양한 연령층이 섞여 있는 단체 생활에도 익숙해졌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하는 일이 처음처럼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초등학생들과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농활의 목적은 오로지 유진으로, 농활에 대한 아무런 기대가 없던 연호는 생각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진과 둘이서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예상보다 적긴 했지만 그건 그거대로 스릴이 넘쳤다. 서로만 알아볼 수 있는 은근한 신호가 그랬다.
“노비들이 왜 봉기를 일으켰는지 알겠어.”
정작 연호를 꼬셔 대던 남우는 하나도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농사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서 게임 퀘스트마냥 날마다 새로운 과제가 부여됐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시멘트 나르기였다. 여름 장마를 대비하기 위해 마을 회관에서 단체로 주문한 유지 보수용 시멘트가 도착한 것이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그것보다 더 기가 막힌 건 시멘트는 한 포대가 약 40kg이었다.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우리는 이 날씨에 시멘트나 나르는데!”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입 다물어요.”
“천유진은 앉아서 과일이나 처먹고! 내 입은 주둥이야? 나도 과일 먹을 줄 안다고!”
남우가 울분을 토할 만도 했다. 유진은 농활 내내 절대적인 치외 법권을 자랑했다. 유진은 농사일에 차출되는 대신 각종 과일에 둘러싸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져오는 소소한 민원들을 해결해 주고 있었다. 낡은 수첩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새 수첩에 옮겨 적어 준다거나, 각종 고지서를 대신 처리해 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노는 것도 아니고 일만 열심히 하네, 뭐.”
“넌 이 와중에도 천유진 편을 들고 싶냐? 억울하지도 않아?”
“할머니들이 유진이 형이 좋다는데 어떡하라고요.”
억울하기는. 좋기만 했다. 유진은 툭 하면 끼니를 걸러서 걱정이었는데 농활에서는 그럴 염려가 없었다. 할머니들이 쉴 틈 없이 유진을 먹이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유진의 손에는 주먹만 한 복숭아가 통째로 들려 있었다.
“됐으니까 일어나요. 놀지 말고 일 해.”
이 더운 날 유진에게 시멘트를 나르게 할 수는 없었다. 유진이 도와주러 오기 전에 얼른 끝내야 했다. 연호가 자진해서 창고로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시원한 창고에 있다 나오니 바깥이 더 덥게 느껴졌다. 화장실에 간다던 남우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역시 사람은 고쳐 쓸 수 없었다. 연호가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몸의 열기를 식혔다.
“오빠 찌찌 보여요.”
시야 끝에 높게 묶은 머리카락이 걸리었다. 첫날부터 꾸준히 연호에게 말을 거는 아이였다. 아이에게 익숙해진 연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보지 마.”
“선생님이 아무데서나 옷 벗으면 안 된다고 그랬어요.”
“안 벗었는데.”
“찌찌 보이잖아요!”
찌찌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연호가 멋쩍게 티셔츠를 내렸다.
“또 오빠한테 가 있었어?”
아이의 언니가 다가왔다. 툭 하면 연호의 주변을 맴도는 아이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는 사이였다. 이제는 완전히 얼굴이 익은 여자가 연호에게 눈인사를 건네 왔다. 연호가 어색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언니가 오빠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왜 오빠라고 해?”
“어?”
“연호야, 라고 해야지.”
맞는 말이었다. 아이는 여자에게 호칭을 정정할 것을 요구했다.
“…연호야…?”
아이의 고집에 못 이긴 여자가 조심스럽게 연호의 이름을 불렀다. 연호가 반응 없이 멀뚱멀뚱 여자를 쳐다보기만 하자 아이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 해야죠!”
“네.”
연호가 고분고분 아이의 말에 따랐다. 아이가 어떤 고집을 부려도 순순히 응해 주었다. 지레 겉모습만 보고 연호를 어려워하던 여자가 조금씩 말을 걸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저기, 이거….”
형식적인 날씨 이야기를 하던 여자가 대뜸 연호에게 종이컵을 건넸다. 종이컵에는 정체 모를 새카만 액체가 담겨 있었다.
…어쩌라는 거지? 들고 있으라는 건가? 연호는 섣불리 종이컵을 받아 드는 대신 여자의 뒷말을 기다렸다. 때마침 연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 정도 높이에서 연호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여기 서서 뭐 해요?”
민원 처리는 모두 끝난 건지 유진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접시에는 참외를 비롯한 각종 과일들이 예쁘게 놓여 있었고, 얼음을 띄운 시원한 매실차도 있었다.
“아, 제 동생이 너무 귀찮게 굴어서….”
“다리 아플 텐데 앉아서 얘기해요. 이리 와요.”
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호가 졸졸 유진을 쫓아갔다. 쟁반을 내려놓으며 힐끗 여자를 돌아본 유진이 연호가 자리에 앉자마자 잽싸게 매실차를 건네 왔다.
“이게 뭐예요?”
“마을 분이 직접 담근 매실차예요. 달게 탔으니까 과일 먼저 먹고 마셔요.”
유진이 포크를 건네주며 말했다. 화려한 꽃무늬가 일품인 포크 끝에 먹기 좋게 잘린 참외 조각이 꽂혀 있었다. 남우가 중간에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더 일찍 끝났을 텐데. 연호가 속으로 남우의 욕을 하며 포크를 받아 들었다. 팔을 들어 올리는 사소한 동작에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성가셨다. 연호가 티셔츠를 끌어 올려 얼굴을 닦았다. 얇은 티셔츠 아래 가려져 있던 맨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가슴을 지나 아래로, 더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품이 넉넉한 반바지는 굳이 벗기지 않고도 쉽게 안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자리를 비웠다고 그새 이장이 유진을 찾았다. 유진이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잠깐이었다. 유진은 잠시 동안 연호를 혼자 내버려 둔 채 미처 건네지 못한 종이컵을 들고 있는 후배를 지나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호는 혼자 평상에서 참외를 먹고 있었다.
유진이 돌아왔을 땐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다가가기 어렵다던 연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유진이 온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뒤늦게 유진을 발견한 연호가 별안간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하, 한남우가 어디 있지.”
너무 대놓고 피해서 몰랐다. 처음에는 기분 탓일 거라고 생각하던 유진이 빠르게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연호가 유진을 피하고 있었다. 대체 왜?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쁜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서, 유진은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연호는 유진을 좋아한다. 비단 연호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정말 그럴까? 유진이 반문했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을 피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 거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피해야 하는 이유가 뭐지?
좋아하는 사람을 피해야 할 만한 짓을 했다거나, 그 사람이 싫어졌다거나. 당연하게도 좋은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굳이 골라야 한다면 유진은 차라리 전자이길 바랐다. 유진이 싫어진 게 아니라면 뭐든 괜찮았다. 그거면 되었다.
유진이 연호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
‘남우 선배랑 친한가 봐요.’
시작은 남우였다. 남우의 존재는 연호와 사람들 간의 공통된 연결 고리에 불과했지만, 공공의 적 앞에서는 그 무게가 달라졌다. 한남우라는 공공의 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단합을 도모하고 결속을 다지게 만들었다. 시원한 뒷담화가 전에 없던 친밀감을 만들어 주었다. 한층 가까워진 사람들은 연호에게 줄곧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유진 오빠랑 친하죠.’
확신 어린 말투에 내심 으쓱했던 것도 잠시, 충격적인 증언들이 뒤따랐다.
‘유진 오빠가 원래 저랬나? 좀 변한 것 같지 않아?’
‘나도 그 생각 했는데! 뭔가 대하기 편해졌지!’
‘어, 진짜! 전에는 철옹성 같았다면 지금은 돌탑 정도? 이제는 열 번 찍으면 기스는 날 것 같다.’
최근 들어 유진은 분위기가 한결 유해졌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전에 없던 인간미가 넘쳐흐른다는 호평도 자자했다. 연호에게 유진은 언제나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으므로 딱히 공감은 가지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유진이 달라지긴 한 모양이었다.
‘유진 오빠랑 엄청 친한가 봐요. 덕분에 좋은 구경하네.’
변화는 연호가 옆에 있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진과 연호의 친분에 대한 확신은 절대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다. 연호는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다.
죽 쒀서 개 줬다.
충격에 휩싸인 연호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자신만 볼 수 있는 유진의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기로 했다. 물론 효과는 없었다.
역효과만 있었다. 애초에 농활이라는 것 자체가 단체 생활이었다. 둘만 있는 시간은 극도로 적었고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였다. 연호가 불가능과 씨름을 하는 사이 잠깐 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유진은 전보다 훨씬 착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유진을 피하면 피할수록 더욱 그랬다.
“참외 받았는데 깎아 줄까요? 같이 먹어요.”
“내가 할게요. 앉아 있어요.”
“덥지 않아요? 매실차 타 줄까?”
모두에게 벽을 세우는 게 느껴져서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듣던 유진은 섬세하고 배려심 넘치는 다정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모두 연호 덕분이었다.
…안 돼. 그만해! 이런 건 둘이 있을 때 하라고! 유진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도 연호는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애초에 둘만 있을 틈이 있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왜. 뭐.”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인성은 이미 망했지만 눈치라도 있으면 좀 나았을 텐데. 연호의 날 선 반응에도 남우는 개의치 않고 제 할 말을 떠들어 댔다.
“창고 청소 너 시켜서 그래? 남자가 뭐 그런 거 가지고 삐지냐? 나 벌레 싫어하는 거 알잖아.”
“…….”
“야. 진짜 삐졌냐? 야, 강연호. 야아.”
남우의 손가락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연호의 팔을 찔러 댔다. 그릇을 치우던 연호가 들고 있는 그릇을 보여 주며 친히 경고했다.
“이거 안 보여? 하지 마요. 만지지 마.”
“이게 뭐 만진 거냐?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면서….”
“아, 좀. 떨어트릴 뻔했잖아요.”
“진짜 그거 때문이야?”
다 안다는 듯, 남우가 능글맞게 웃으며 연호를 다독였다.
“그래, 그래. 한창 많이 할 때인데 얼마나 답답하겠냐. 야, 형이 고등학생 때는 매…. 악!”
퍽! 경멸스러운 마음을 가득 담아 있는 힘껏 남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남우를 향한 순수한 분노 이면에는 약간의 화풀이가 섞여 있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유진이 구워 주는 고기만 집어먹던 남우였다. 잘 처먹어 놓고 이제는 헛소리까지 하다니, 남우의 배 속에 들어간 고기가 아까웠다.
농활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고기가 장식했다. 고기를 둘러싼 예상치 못한 사건도 있었다. 바로 갓 구운 버섯의 인기였다. 이장이 가져다준 싱싱한 버섯은 편식으로 학생회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던 저학년 아이들을 신세계로 인도했다.
“그럼 좀 쉬다가 여덟 시까지 마을 회관 앞으로 와. 다들 늦지 말고!”
저녁 해가 길어지는 계절이었다. 뒷정리를 마친 사람들이 마지막 행사를 앞두고 뿔뿔이 흩어졌다. 연호는 계속 유진을 찾고 있었다. 이제 겨우 개인 활동 시간이 생겼건만 아까부터 유진이 보이지 않았다. 연호가 하는 수 없이 남우를 찾아갔다.
“유진이 형 어디 있어요?”
“내가 천유진 비서냐?”
연호가 망설임 없이 돌아 나가자 남우가 툴툴거리며 유진의 행방을 알려 주었다.
“잠깐 시내 갔어. 고기 먹었으면 됐지 뭘 또 한다고…. 완벽주의도 그 정도면 병이다, 병.”
“늦는대요?”
“이장님 차로 갔으니까 금방 올걸. 어차피 여기로 올 거긴 한데…. 그놈의 천유진 타령 지겹지도 않냐?”
“하나도 안 지겨운데. 유진이 형 얼굴이 제일 재밌는데.”
“와, 너 데리고 온 건 나거든?”
“남우 형, 이제 그만해요. 그만하면 됐어요. 보는 우리가 다 눈물이 나네….”
나이로도, 학번으로도 남우를 이길 수 없던 후배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우를 놀려 댔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남우를 공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연호는 어느새 중요한 정예 멤버가 되어 있었다.
“안 마셔?”
“저 미성년자인데요.”
아, 맞다. 쟤 고등학생이지. 자연스럽게 술판을 벌이던 사람들이 뒤늦게 연호의 나이를 인지했다.
“우리가 다 보호자인데 뭐 어때요. 마셔, 마셔.”
“안 마실래요.”
술은 맛이 없었다. 연호가 고민도 않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남우가 친히 채워 준 술잔이었다.
“저 새끼는 할 거 다 하고 다니면서 꼭 내 앞에서만…. 강연호 너 진짜 이러는 거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해도 오토바이 한 번을 안 태워 주더니 이젠 겸상도 안 하냐?”
“오, 오토바이. 일진이네, 일진.”
연호는 줄곧 미성년자였지만 형들과 어울려 다니는 동안 음주 가무에 노출될 기회가 많았다. 맛이 없어서 싫어할 뿐, 못 마시는 건 아니었다. 귀찮은데 그냥 마실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남우가 시끄러웠다. 자꾸만 들러붙는 통에 귀찮기도 했다. 연호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는 사이 바닥에서 소주병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연호는 자연스럽게 술자리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뒷담화와 음담패설, 장난인 척 서로를 향한 날 선 비방까지. 술기운을 빙자한 적나라한 욕망들이 오고 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소주병이 거침없이 다음 타자를 지목했다. 드디어 연호의 차례였다. 기다렸다는 듯 남우가 숨도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가장 최근에 한 게 언제냐?”
저녁상을 치우면서 연호와 나눴던 대화에 기반한 적재적소 주제 선정이었다. 연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여기 오기 전에 했는데요.”
“누구랑? 여자 친구?”
“뭔 소리야. 혼자 한 거 물어본 거 아니었어요?”
“아가야, 형님들은 사람이랑 한 것만 쳐 준단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어디서 했다고?”
모두가 잠든 숙소 화장실에서 유진의 입에다 사정을 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찔리는 바가 있는 연호가 부자연스럽게 입을 닫았다.
“어, 뭐야. 수상한데? 야, 말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육하원칙으로 말해라.”
“알고 보니까 며칠 안 된 거 아니야?”
“…….”
“야, 어디 가! 쟤 잡아!”
잽싸게 자리를 빠져나가던 연호가 그만 다리가 붙들리고 말았다. 한바탕 소란으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술잔이 쏟아졌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연호가 대충 티셔츠를 끌어 올려 젖은 손을 닦았다. 거짓말처럼 그 상태로 그대로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연호가 얼떨떨한 얼굴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
“…….”
가만히 연호를 내려다보던 유진이 이내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들떠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혀, 형. 오셨어요?”
연호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 듯 후배들이 어색하게 유진을 반겼다. 유진이 대꾸 없이 바닥에 짐을 내려놓았다. 양손 가득 들려 있던 봉투가 빵빵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었어요?”
유진이 바닥에 뒤엉켜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여상하게 물었다. 상냥하고 다정한 평소의 유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아, 뭐…. 술 먹으면서 하는 얘기야 뻔하죠.”
“무슨 얘기인데요?”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화를 내는 법이 없는 유진은 돈까지 잘 써서 모두가 좋아하는 선배였지만, 그만큼 어려웠다. 아무리 같은 남자끼리라고 해도 이런 종류의 대화를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냥 남자들의 대화를 좀….”
유진의 시선이 다시 연호에게 향했다. 남우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연호의 주변에 제각각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포위라도 당한 것 같은 꼴이었다.
“남자들의 대화….”
유진이 후배의 말을 그대로 따라 읊더니, 알겠다는 듯 긴 눈매를 휘어 트리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이상한 생각을 들게 하는 묘한 미소였다. 상대가 상대인 데다 남자치고 지나치게 예쁘장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왠지 선배는 이런 얘기 안 좋아할 것 같아요.”
“어, 어. 맞아. 이런 얘기 꺼내면 안 될 것 같고 막.”
연호도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유진이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연호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닦느라 말려 올라가 있던 티셔츠가 스르륵 내려오는 꼴이 못 견디게 거슬렸다.
“아닌데.”
유진이 연호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긋한 어투로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섹스.”
“…….”
“남이 떡 친 얘기는 안 궁금해서 그렇지…. 늦지 말고 마을 회관 앞으로 와요.”
이상했다.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이상했다. 유진이 떠난 후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묵 속에서 뒷정리를 했다. 당장은 어딘가 찝찝했지만 이 기분도 오래가지는 않을 테다. 그도 그럴 것이, 농활 마지막 밤이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
예정에 없던 불꽃놀이였다. 곳곳에서 자잘한 불빛들이 빛을 내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한 번쯤 불꽃놀이가 해 보고 싶었던 연호의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연호는 잔뜩 신이 났다.
처음 도착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밤이라니,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연호를 포함한 모두가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어둠을 어지럽히는 불빛과 코끝을 간질이는 탄내 사이로 벌써부터 이날을 추억하려는 감성적인 이야기들이 오갔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폭죽을 만지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유진이 보였다. 유진이 이곳의 책임자인 이상 응당 유진이 해야 할 일이 맞았지만, 연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호가 유진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을 보고 있었으면서 연호가 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유진은 놀란 기색 없이 연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유진을 올려다봤을 뿐인데 별이 보였다. 고개만 들면 누구나 별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연호는 이날 여름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일이면 벌써 끝이네요.”
연호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아, 가기 싫다…. 형 맨날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유진을 열심히 피해 다닐 때는 언제고 갑자기 다가와서 한다는 말이 저거였다.
“형 우리 다음에 또 와요.”
회관 앞에 모여 있는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마지막 밤을 추억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라도 한 건지 연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너무 달았다.
“그땐 둘이서 와요. 꼭! 무조건!”
너무 달아서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유진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왜?”
“어? 왜?”
연호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유진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왜냐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왜 이렇게….”
예쁜 말을 해? 연약한 진심을 삼킨 유진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나한테 미안할 짓이라도 하고 다녔어요?”
펑! 몇 백 발짜리 대형 폭죽이 피날레를 알렸다. 모두의 시선을 앗아 갈 만큼 화려한 폭발음이었다. 유진의 얼굴 위로도 불빛이 드리웠다. 연호가 가만히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날 선 유진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연호가 몇 번이나 겪어 왔던, 연호가 좋아하는 유진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었다. 연호는 화를 내는 대신 제일 먼저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보았다. 유진에게 실수한 건 없는지, 잘못한 건 없는지를 고민했다.
연호가 아는 유진은 누군가에게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원인은 연호에게 있을 것이다. 연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역시나, 원인은 연호에게 있었다.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연호가 유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티 났어요?”
이번에도 연호는 일방적이었다. 당사자인 유진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무작정 유진을 피하려고 들었다. 주변의 이야기를 무시하기에는 너무 신경이 쓰였고, 유진에게 말을 하자니 스스로가 너무 애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혹시라도 유진이 주변을 의식하고 연호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을까 봐 걱정도 됐다.
결국 요지는 연호가 유진을 피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지만, 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티가 났냐는 조심스러운 한마디는 연호가 유진에게 미안할 짓을 했음을 확신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연호가 유진을 피했고, 그래서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유진에게 이실직고를 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어디 얘기할 만한 데 없나. 대답 없는 유진을 세워 둔 채 연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불꽃놀이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폭죽 주변에만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구석진 곳에 위치한 창고는 평소보다 훨씬 으슥하게 느껴졌다. 창고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연호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유진을 끌고 창고로 향했다.
“생각보다 별로 안 어두운데요? 치워 놔서 다행이다.”
시멘트부터 시작해 오늘 저녁 식사 전까지도 창고에 드나들던 연호였다. 이제 열쇠 위치 정도는 눈 감고도 알았다. 창문을 열어 놓은 덕분인지 따로 불을 켜지 않아도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오히려 둘만 있을 수 있어서 좋기만 했다.
“와, 진작 올걸. 너무 늦게 알았다. 그죠.”
“…….”
“형 근데 왜 이렇게 말이 없… 어?”
유진이 대뜸 연호를 끌어안았다.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 유진이 어깨에 얼굴을 내렸다. 깊게 숨을 들어 마시자 연호의 살 냄새와 함께 창고 특유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유진이 연호의 살갗에 좀 더 깊숙이 얼굴을 파묻으며 심호흡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유진을 마주 안았다. 연호의 팔이 유진의 허리에 둘러졌다. 안도한 유진이 긴 침묵 끝에 용기를 냈다.
“말해요.”
…이렇게 심각하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유진의 유별난 반응이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동적이었다. 유진은 언제나 연호에게 귀를 기울여 주었다. 피곤해서, 바빠서, 혹은 귀찮다는 이유로 연호를 등한시하는 일은 없었다. 연호가 고해 성사를 하듯 자신의 치기 어린 투기를 고백했다. 유진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게 다예요?”
“그게 다인데요.”
연호의 말에 따르면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형이 너무 좋아서 질투 나서 그랬어요. 아무한테도 안 보여 줄 거야! 나만 볼 거야!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믿을 수 없을 만큼 황당한 이야기였다. 설마, 설마 저런 이유로 그랬겠어? 유진은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의심했다.
“…그걸 믿으라고?”
언제와 같은 결론이었다. 유진은 연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 왜? 내 말 안 믿겨요?”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다 한 건데.”
“정말 괜찮으니까….”
애초에 유진은 연호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온전히 사랑 받는 감각을 알아 버린 지금도 괜찮을지는 확신하기 어려웠지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테다. 유진이 연호에게 진실을 요구했다.
“진짜 그게 다라니까요? 내가 형을 왜 피할 이유가 뭐가 있어!”
“괜찮으니까 얘기해요.”
유진이 생각하는 미안한 짓과 연호가 생각하는 미안한 짓은 형태만 같을 뿐, 본질적으로 다른 단어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은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실랑이를 벌였다. 연호가 항변했다.
“왜! 왜 못 믿겠다는 건데!”
“너 같으면 믿겠어요?”
연호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건 연호가 제일 잘 알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유진에게 직접 들으니 충격이 배가 되었다.
안 돼. 서운해하지 말아야지. 서운해하지 말…. 그게 되겠냐고! 상처를 떨쳐 내려는 듯 연호가 포효했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창문이 열려 있던 걸 잊고 있었다.
“저쪽에서 났는데….”
연호가 뒤늦게 소리를 죽였지만 소용없었다. 인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에서는 창고를 잠글 수도 없었다. 창고는 더 이상 잠겨 있지 않았고, 좁았다. 시멘트를 포함해 온갖 잡동사니가 넘쳐 나서 몸을 숨길만한 장소도 없었다. 남자 둘이 창고에서 밀담을 나누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핑계도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아요.”
연호의 입장에서야 괜찮기는 했다. 농활이 끝나면 연호와 다시는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괜찮지 않은 건 유진이었다.
“내가 오자고 해서 왔다고 해요.”
“내가 오자고 했잖….”
“내가 불러낸 거고, 내가 오자고 한 거예요.”
방금 전까지 연호에게 매달려 있던 유진은 가까워지는 말소리에도 침착하기만 했다. 유진이 연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넌 그냥 끌려온 거야.”
이건 강요나 마찬가지였다. 연호가 유진을 말리기도 전에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 미친! 깜짝이야!”
“와, 잠깐. 너희 설마!”
한 명이 아닌 여러 명 목소리였다.
“…조용히 해. 목소리 낮춰.”
“이제 와서 CC 탄생이냐….”
“아, 조용히 하라고!”
두 사람은 의도치 않게 농활 커플의 탄생을 함께하고 있었다. 축하할 일이었지만 어쩐지 허무했다. 농활 첫 커플이 된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바짝 긴장하고 있던 연호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멀어져 갔다. 내내 숨죽이고 있던 연호가 다짜고짜 유진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나쁜 말은 입에 담지도 못할 것 같은 얼굴로 유진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연호가 지켜본 유진은 신중하면서도 무모했고, 이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하나도 이성적이지 못했다.
“아…. 형 진짜….”
다른 사람들은 영영 몰랐으면 좋겠는데. 연호가 유진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유진은 당혹감에 두 눈을 깜빡거리면서도 순순히 얼굴을 내주고 있었다.
“이럴 땐 형이 나한테 끌려왔다고 해야지. 틀린 말도 아니고….”
“…….”
“어휴, 진짜….”
예뻐 죽겠네. 연호가 더는 참지 못하고 유진에게 뽀뽀를 했다. 펑! 밖에서는 아직도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CC 탄생을 축하하는 환호성도 들렸다.
“나 못 미더운 거 아는데요.”
“…….”
“내가 진짜진짜 잘할게요. 형이 싫은 건 다 고칠 테니까 잘못하는 거 있으면 알려 줘요. 다시는 안 그럴….”
…게요….
뒷말은 유진에게 먹혀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입술이 도장을 찍듯 꾹꾹 입을 맞춰 왔다. 입을 맞추느라 자연스럽게 감겨 있는 두 눈이 마치 나만 볼 수 있는 특권처럼 느껴졌다. 연호가 함께 입술을 맞대자 부드러운 점막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유진이 고개를 내리며 좀 더 가까이 입술을 붙여 왔다. 혀를 섞는 것도 아니고 고작 입술을 붙이고 있을 뿐인데 조금씩 숨이 가빠졌다.
기대감이 일었다. 혀가 얽히고 점막이 비벼지는 깊은 입맞춤이 하고 싶었다. 좀 더 농밀한 스킨십이 하고 싶었다. 유진과 마지막으로 했을 때가 생각났다. 유진은 만져 보지도 못하고 연호 혼자서 사정을 하고 끝이 났다. 다른 사람들이 벽을 사이에 두고 자고 있기 때문에, 소리조차 마음껏 낼 수 없는 열약한 환경이었다.
사실은 그래서 더 흥분했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간격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가볍게 입술을 맞추는 대신 연호가 혀를 내밀어 유진의 입술을 핥았다. 부드럽고 폭신한 감촉에 입 안에서 점점 침이 고였다. 유진의 입술을 할짝거리던 연호가 입술을 가르고 혀를 집어넣었다.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살덩이가 연호의 혀를 강하게 빨아 왔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달려드는 연호를 온몸으로 받아 내며 유진이 연호를 품에 안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두 사람을 지탱해 주는 등받이가 생기자 안심하듯 입맞춤이 깊어졌다. 혀가 비벼지고, 깨물렸다. 혀뿌리가 뽑힐 듯 세게 빨릴 때에는 참지 못하고 하체를 비비기도 했다.
밖에서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불꽃놀이….”
낮아진 목소리가 연호의 귓가를 스쳤다. 젖은 입술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귓불과 귓바퀴의 피어싱을 건드리는 아릿하면서도 짜릿한 감각에 저절로 허리가 떨렸다.
“안 봐도 돼요…?”
물론 연호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유진과 이러고 있는 게 더 좋았다. 연호가 고개를 내저으며 좀 더 가까이 하체를 붙여 왔다. 꽉 맞물린 다리 사이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유진의 입술이 연호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하고 싶다며….”
“으, 응….”
“잠깐만….”
유진이 연호를 안은 채로 자세를 바꿨다. 떨어진 입술이 아쉬운 듯 연호가 그새를 못 참고 유진에게 입을 맞춰 왔다. 그 모습이 꼭 강아지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했다.
“이러면, 볼 수 있으니까….”
유진이 연호를 창문 쪽으로 향하게 했다. 창밖을 볼 수 있게 된 대신 유진을 보지 못하게 된 연호가 비스듬히 고개를 꺾어 왔다. 유진이 비틀린 키스를 하며 뒤에서부터 연호를 끌어안았다.
“형….”
“응.”
“혀엉….”
“응.”
기껏 준비해 놨더니 연호는 구경은 하지도 않고 계속해서 유진을 보려고 들었다. 부드럽게 연호의 턱을 그러쥔 유진이 연호가 정면을 보게끔 했다. 대신 뒷목에 입을 맞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성적인 접촉에 연호의 목덜미에 솜털이 곤두섰다.
솜털이 있는 부분은 목덜미뿐만이 아니었다. 엉덩이에도 있었다. 유진은 자연스럽게 연호의 탱탱한 엉덩이를 주물렀다. 펑! 퍼엉! 지금 터지고 있는 불꽃은 유난히 소리가 크고 무늬도 화려했다. 연이어 폭죽이 터졌다. 연호의 엉덩이를 더듬는 유진의 손길도 점점 빨라졌다.
“혀, 형. 나, 안에….”
“또 가려워요?”
“으응. 으, 응….”
연호는 참을성도 없고, 예민했다. 한 번 배운 건 그게 뭐든 잊지 않았다. 특히 쾌감에는 더욱 그랬다. 유진이 엉덩이를 주무르며 연호의 뒷목에 입술을 내렸다. 헐렁한 티셔츠를 잡아 벌린 유진이 좀 더 안쪽에 입을 맞췄다. 더, 좀 더. 어느새 연호는 한쪽 어깨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한계까지 늘어난 티셔츠는 더 이상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곧게 뻗은 등허리에 입을 맞추다 손을 올려 보이지 않는 가슴을 더듬었다. 기다렸다는 듯 말랑한 젖꼭지가 만져졌다. 연호를 만지는 유진의 손길에 짜증이 어렸다.
“피어싱 안 할래요?”
유륜을 쥐어짜듯 손가락에 힘을 주어 젖꼭지를 비틀자 연호가 가늘게 허리를 떨었다. 달콤한 신음이 애처로웠다.
“더, 뚫을 데, 응…. 없는데….”
“귀 말고.”
“그, 럼….”
“여기.”
젖꼭지가 가차 없이 잡아당겨졌다. 연호가 길게 신음했다. 유진은 잊지 않고 반대쪽 젖꼭지도 잡아당겼다.
“여기도.”
“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연호는 객관적으로 피어싱이 잘 어울렸다. 셔츠를 목까지 채우는 것보다는 적당히 풀어 헤치는 편이 더 나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지저분한 귓바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진이 연호의 가슴 피어싱을 권한 건 비단 심미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가슴에 피어싱을 달아 놓으면 아무데서나 휙휙 벗지는 않겠지. 젖꼭지를 만지는 손끝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말랑거리던 젖꼭지가 어느새 빳빳하게 솟아 있었다. 아래에서는 발기한 성기가 연호의 엉덩이를 찌르고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연호의 뒷목이 내려다보였다. 연호가 헐떡이고 있었다. 예뻤다.
유진이 허릿짓을 하자 밀려나지 않으려는 듯 연호가 손바닥으로 벽을 짚고 섰다. 유진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대신 불꽃놀이가 보였다. 현실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나지막한 신음에 안이 간지러웠다. 몸속이 다 근질근질했다. 긁어 줬으면 했다.
“혀엉….”
바라는 게 있어서인지 저절로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듣고 있다는 대답 대신 유진이 뒷목에 입을 맞춰 왔다.
겨우 입술이 닿은 것뿐인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평소보다 훨씬 예민하게 느껴졌다. 문득 창고를 잠그지 않은 게 생각났다. 어차피 안에서는 잠글 수도 없었다. 앞문과 뒷문이 모조리 잠겨 있던 대학 강의실과는 차원이 다른 상황이었다.
“형, 밖에…!”
급하게 유진을 부르려는데 밖에서 큰 소리가 났다.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커다란 폭죽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잘 보고 있어요?”
알고 있다는 듯 유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연호의 귀를 핥아왔다. 정작 유진은 연호와 전혀 다른 바깥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밖에서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동시에 그보다 더한 쾌감이 몰려왔다. 유진이 뒤에서 더욱 몸을 밀착해왔다. 맞닿은 부위가 점점 뜨거워지면서 연호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불꽃놀이, 하고 싶어 했잖아요.”
한 번도 불꽃놀이를 해 본 적 없다는 연호를 위해서인지 유진은 아직도 연호의 뒤에 서있었다. 그래서 애가 타면서도 더 흥분이 되었다. 좋았다.
유진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하는 생각이 있다. 원래 다 이런 건가? 생각해 보면 유진과 처음 입을 맞췄을 때도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유진과 함께하면 할수록 성적 욕구가 왜 인간의 3대 욕구인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전신을 강타하는 쾌감도 쾌감이지만, 늘 차분하고 단정한 유진의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후 몇 번인지 입맞춤이 오고간 후에야 두 사람은 마지막 밤을 기념할 수 있었다. 불꽃놀이는 이미 오래전에 끝나 있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하게 취해 있어서 두 사람은 아무런 방해 없이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 연호는 업혀 있었다.
유난히 길고 더운, 여름밤이었다. 유례없는 무더위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뭐 해요?”
“…자.”
“자는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해요.”
보면 볼수록 논리적인 아이였다.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연호는 끝까지 아이를 이길 수 없었다.
버스 탑승을 앞두고 평상 위에 늘어져 있던 연호가 비척거리며 허리를 일으켰다. 내내 까치발을 들고 서 있던 종아리에 툭하면 쥐가 나서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왜?”
간신히 허리를 세우고 앉은 연호가 힘겹게 물었다. 연호의 뒤로는 숙취로 고생하는 좀비들이 뒤엉켜 있었다. 알 만하다는 듯, 아이가 잔소리를 했다.
“어제 뭐 했어요?”
“…어?”
“우리만 쏙 빼놓고 어른들끼리 노니까 좋아요?”
깜짝 놀랐다. 아이가 전날 밤 일을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도 연호는 죄 지은 사람처럼 놀라고 말았다. 연호가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며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술로 밤을 지새운 사람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뭐 할 거예요?”
“버스 타야지.”
“나도 알아요. 집에 가서 뭐 할 거냐고요.”
그것까진 생각 안 해 봤는데. 연호가 고민했다. 아주 잠깐 동안만 했다.
“애인 만나러 갈 거야.”
충격에 휩싸인 아이의 두 눈에 일순 커다란 눈물이 맺혔다. 놀란 연호가 아픈 것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아파? 언니 불러 줘?”
“…….”
“자, 잠깐만 있어 봐. 언니 데려올….”
“결혼할 거예요?”
아이가 울먹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지 모르겠지만 연호의 티셔츠를 움켜쥔 손이 퍽 진지해 보였다. 아이의 안색의 살피던 연호가 고민도 않고 대답했다.
“응.”
“…….”
“결혼할 거야.”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한 10년 뒤에는 동성 간의 혼인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연호는 유진에게 흰 턱시도를 입혀야겠다고 다짐했다. 상상만 해도 코피가 나올 것 같았다.
“근데 그건 왜….”
으아아아아아앙!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의 영향인지 줄곧 어른스럽던 아이가 돌연 울음을 터트렸다. 엄청난 굉음에 숙취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좀비마냥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에 탈 준비를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허둥지둥 달려온 언니가 무슨 일이냐며 아이를 달래 봤지만 소용없었다. 실연을 당한 아이가 울먹거리며 외쳤다.
“오빠 결혼한대!”
결혼? 결혼한다고? 누가? 서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곳곳에서 수군대기 시작했다. 날벼락을 맞은 연호가 어쩌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짐을 싣던 유진이 연호를 붙잡았다. 뛰어왔는지 가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떨리는 숨, 뜨거운 체온, 흰 턱시도. 어제와 미래가 뒤엉켜 난잡한 상상을 만들어 냈다. 놀라서 달려온 유진을 앞에 세워 둔 채 연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 할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진을 바라보는 연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10년 후면 정말 할 수 있지 않을까.
빵, 빵! 탑승 준비를 마친 버스가 클랙슨을 울리며 소음을 보탰다.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아직도 평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짐을 챙겨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유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애정 가득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유진을 올려다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름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연호는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