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4)

69℃

외출의 증거인 손목 위의 휴대폰 번호는 도통 지워질 생각을 안 했다. 얼핏 보면 정말 타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유성 매직의 위력이었다.

이 와중에 남우는 눈치도 없이 계속해서 연락을 해 왔다. 다른 사람들의 뒤통수로 가득한 초점 나간 사진들을 보내기도 하고, 아이돌 출퇴근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다. 하물며 일요일 아침에도 연락이 왔다. 며칠 새에 남우에게 충분히 시달린 연호였다. 잠에 취한 연호가 남우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나 들킨 건 아니겠지?」

「쫄려 죽겠네;; 천유진한테 전화 왔는데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도 안나;;;」

「걔 진짜 사람 불편하게 하는 데 뭐 있음.ㅡㅡ」

「네가 잘못한 거 맞잖아요. 왜 유진이 형을 탓해요.」

남우가 유진을 들먹이자 연호가 잠결에 채팅 방에 소환되었다. 억울해진 남우가 열변을 토해 냈지만 연호는 유진의 변호를 마친 뒤 다시 꿈나라에 가 있었다.

「나중에 천유진이 물어보면 나 금요일에 병원 가고 있었다고 말해야 된다. 넌 나랑 우연히 마주친 거야.」

「알았지? 약속한 거다??」

덕분에 연호는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유진이 서울에 도착하기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동안 연호는 숙면을 했다.

“다 끝났어요?”

휴대폰이 채 울리기도 전에 연호가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첫 데이트를 앞둔 소년처럼 목소리에 설렘이 가득했다.

- 네. 지금 다 해산했어요.

유진의 주변이 아직 시끄러운 걸 보니 일정을 끝내자마자 바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 지금은 어디예요?

지금은? 어쩐지 어감이 미묘했다. 유진이 재차 물었다.

- 지금은 집이에요?

“네. 집인데요….”

- 집 앞으로 갈 테니까 그대로 있어요. 치킨 집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서 직진 맞죠?

데리러 오기까지 하다니! 역시 유진은 다정했다. 2박 3일 간 MT를 마치고 곧바로 연호를 만나러 오는 것만 봐도 그랬다.

오로지 연호의 설명에 의지한 채 연호의 집을 찾고 있을 유진을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간지러웠다. 참다못한 연호가 빌라 입구로 나와 유진을 기다렸다.

“우와, 진짜 형이다….”

유진이 정말로 연호를 만나러 집 앞까지 오다니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벌써 사흘이나 집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유진은 여전히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연호가 기억하는 한 유진은 늘 그랬다. 유진이 흐트러진 모습을 본 건 연호의 개학식 날이 유일했다.

“왜 나와 있어요.”

“마중 나왔어요.”

잔뜩 들떠 있는 연호와 달리 유진은 한없이 차분해 보였다.

“형 점심 먹었어요?”

“…아니요.”

유진이 연호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럼 밥 먹으러 가요!”

두 사람은 아직 함께 밥을 먹은 적조차 없었다. 연호가 유진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피자나 햄버거보다는 한식을 더 선호한다는 점 정도였다.

“생각 없어요.”

밥을 먹은 후에는 어디를 가면 좋을지 나름대로 코스를 짜 놓은 연호였다. 식사를 건너뛴다는 건 예정에 없었다.

“왜요? 어디 아파요?”

“원래 신경 쓰이는 일 있으면 잘 안 먹어요.”

평소보다 더욱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이 아무래도 유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연호는 끝내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아픈 건 아니라니 그거면 충분했다.

MT가 끝나자마자 연락을 하고 연호의 집 앞까지 찾아온 것도 사실은 유진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최대한 시간을 아끼려고 한 거면 어떡하지? 슬프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우리 집도 괜찮아요.’

유진의 그 한마디는 연호를 잠들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요일 아침부터 목욕을 하도록 만들었다. 며칠 새에 온갖 상상을 하며 유진을 기다린 만큼 새삼 억울해졌다.

“그럼 죽은요?”

이대로 보낼 줄 알고? 연호가 모른 척 태연하게 물었다. 일단은 유진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유진이 제 발로 연호의 집 앞까지 온 이상 연호는 유진을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아무것도 안 먹으면 배고프잖아요. 나 죽 진짜 잘 끓여요.”

그런 걸 화병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연호의 엄마는 자주 탈이 났고, 시중에서 파는 죽은 너무 비싼 데다 내용물이 많아서 속병이 난 사람이 먹기에는 다소 과했다. 연호가 죽을 잘 끓인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죽 싫으면 짜장 라면 해 줄까요?”

짜장 라면은 연호의 또 다른 특기 중 하나였다. 연호가 굴하지 않고 반응 없는 유진에게 대놓고 치근덕거렸다.

“지금 집에 아무도 없는데….”

노골적인 유혹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엄마 늦게 오니까 밤까지 있어도 돼요.”

이렇게까지 직설적인 유혹은 처음이었다. 요즘 고등학생은 다 이런 건지, 아니면 연호가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덤덤하게 유혹해 오는 모습이 또 다시 유진을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 집에 몇 명을 들였으면 이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유진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연호는 얌전히 유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있기는 한 걸까. 유진은 담배를 꺼내는 대신 처음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욕구를 꺼내 보였다.

“…올라가요.”

그 말을 끝으로 현관문이 닫혔다. 연호의 계획대로였다. 두 사람은 함께 계단을 올랐다.

***

연호가 일요일 아침부터 목욕을 해서 다행이었다. 그 김에 욕실 청소를 하고 내친김에 청소기까지 돌렸다.

먼저 집 안에 들어선 유진은 가만히 서서 문을 잠그는 연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집 구경에는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드라마 세트장 같은 유진의 집에 비하면 연호 집은 구경할 것도 없긴 했다.

“형. 욕실은 저쪽이에요.”

“…욕실은 왜요?”

“밥 먹으려면 손 씻어야죠! 귀찮으면 물수건 줄까요?”

연호가 건네준 건 식당에서나 쓰일 법한 업소용 물수건이었다. 유진은 물수건을 받아 드는 대신 욕실로 향했다. 뒤늦게 연호의 집을 둘러보았다. 깨끗하다 못해 아무것도 없는 유진의 집에 비하면 물건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집안 곳곳에 업소용 비품들이 조잡하게 쌓여 있는 게 마치 창고 같았다.

“형 이거 입어요.”

식당에서 볼 법한 빨간색 앞치마였다. 앞치마에서는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지만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러니까 꼭 식당 온 것 같지 않아요? 우리 집 오면 애들 다 그 소리 하던데.”

애들, 유진은 이번에도 연호의 말에서 거슬리는 단어를 찾아냈다.

“엄마 식당에 창고가 없어서 집에 뭐가 좀 많거든요.”

연호의 엄마는 식당을 하는 모양이었다. 유진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연호가 유진에게 앞치마를 대 보았다.

“…예쁘다.”

구멍 난 앞치마가 잘 어울리면 얼마나 잘 어울린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호가 진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연호가 유진을 내려다보며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유진은 예쁘다는 말에 익숙했다. 익숙하다 뿐일까. 지겨울 만큼 들었다. 형에게 붙는 무수한 수식어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외모 칭찬일 뿐이지만 유진은 단 한 번도 그 말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칭찬은 칭찬이니까. 뭐든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실제로 유진이 외모 때문에 피해만 입은 건 아니었다. 연호가 유진에게 개수작을 걸어 온 것도 결국 유진의 얼굴 덕분이었다.

그때의 연호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유진은 그렇게 연호를 지나치지 않았을 테다. 이렇게 예뻐 죽겠다는 듯이 유진을 바라봐 주는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텐데. 내가 먼저 너를 알아봤을 텐데.

“어디 가요.”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연호를 붙잡았다.

“죽 끓여 줄….”

“됐으니까 이리 와요.”

언젠가 연호가 유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유진이 옷 아래에 숨겨져 있는 불룩 튀어나온 연호의 손목뼈를 쓰다듬었다. 놀란 연호가 황급히 유진에게 붙잡힌 팔을 빼냈다.

“어, 그게, 싫어서가 아니라….”

“뭐든 들어준다면서요.”

연호가 여전히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유진이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의 다리 위에 올려져 있던 앞치마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내가 하지 말라는 건 안 한다면서.”

어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연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요일에 학교 끝나고 뭐 했어요?”

“…어….”

“집으로 갔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호가 눈앞에서 다른 여자와 나가는 걸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던 유진이었다. 어차피 학교도 가야 하는 마당에 남우와의 짧은 외출 정도는 문제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요.”

그게 문제였다. 연호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들이 유진에게는 하나도 쉽지 않았다.

유진은 연호가 어떤 마음으로 남우를 따라나섰는지 모르고, 연호가 어떤 마음으로 유진을 기다렸을지도 알지 못했다. 유진이 아는 거라곤 단 하나, 연호는 언제나 유진을 착각하게 만들어 놓고서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기대를 부숴 버린다는 점이다.

“이럴 거면 약속은 왜 했어요.”

좋아한다며.

“겨우, 이런 식으로….”

날 좋아해 줘. 나만 좋아해 줘. 나만 사랑해 줘. 유진이 소리 없이 외쳤다.

“…그렇게 쉽게….”

“형.”

지은 죄가 있어 잠자코 듣고만 있던 연호가 처음으로 유진의 말을 끊었다.

“약속 어겨서 미안해요.”

“…….”

“근데 왜 나가지 말라고 했던 거예요?”

유진이 그렇게 말했을 때 연호는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다. 괜히 토를 달았다가 유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돌아설까 봐, 이런 것도 알아서 눈치채지 못하는 연호의 모습이 어리게만 느껴질까 봐 쉽게 묻지 못했다. 유진이 어렵게 꺼낸 그 한 마디가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 전혀 몰랐다.

“…그게 중요해요?”

“엄청 중요하죠.”

“그게 뭐가 중요한데요.”

“형은 꼭 그렇게 말하더라. 그게 뭔지 알아야 내가 제대로 사과를 할 거 아니에요.”

연호는 사과도 쉬운 모양이었다. 울컥한 마음에 처음으로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겨우 그 며칠도 못 참아요?”

일순 연호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관없었다. 한 번 고삐가 풀리자 마음이 주체가 안 되었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물 밀 듯이 터져 나왔다.

“가만히 좀 있어요. 여자 친구든 내 후배든 뭐든 다른 사람 좀 만나지 말아요.”

“형, 잠깐, 잠깐만요.”

“금요일에는 누구 만났어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

“여자예요, 남자예요.”

유진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진이 다가오면 그만큼 연호가 뒤로 물러났다. 채 몇 걸음도 가지 않아서 연호의 등 뒤에 딱딱한 물체가 닿았다. 냉장고였다.

“남자긴 한데…. 아니, 그게 아니라, 형 내가 다른 사람 만날까 봐 나가지 말라고 했던 거예요?”

맞아요? 연호가 유진을 채근했다. 머리가 아픈 듯 유진이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누르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맞으니까 조용히 좀 해 봐요.”

“왜? 내가 다른 사람 만나는 게 왜 싫은데요?”

“그럼 좋겠어요? 그 남자랑 만나서 뭐 했어요.”

“좋을 건 없지만 싫을 것도 없잖아요.”

“대답이나 해요.”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형이나 대답해요.”

냉장고와 유진 사이에 갇혀 있는 주제에 연호가 지지 않고 맞서 왔다. 도대체가 고분고분 넘어가는 적이 없었다. 연호는 늘 유진의 예상을 뛰어 넘었으며, 늘 유진을 당황시켰다.

“당연히…, 싫죠.”

“왜 싫은데요?”

아무리 연호가 유진보다 어리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알았다. 지금 연호는 그 이유를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연호가 미약한 기대감에 기대어 유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애정을 갈구하는 흔들림 없는 시선이 유진을 옭아맸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뇌가 터질 것 같았다. 유진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데.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자각이었다. 유진이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멈춰 섰다.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쏠리는 것 같았다.

“형 지금 얼굴 엄청 빨개요.”

“…….”

“어디 아파요?”

형? 연호가 불쑥 유진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키 차이 때문에 뒤꿈치까지 들어야 했다. 불시에 연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놀란 유진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도망치길래 일단 잡고 봤다. 가히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려 있던 연호가 유진을 붙잡으면서 그대로 중심을 잃고 말았다.

사고는 언제나 순식간에 일어났다. 쿵! 유진이 연호와 함께 바닥으로 넘어졌다. 워낙 집이 좁은 터라 넘어지면서 상다리에 머리까지 찧고 말았다.

“…으!”

머리가 부딪치자 유진에게서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놀란 연호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형 괜찮아요? 잠깐 팔 좀 풀어 봐요.”

유진이 연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아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연호가 유진의 품에서 발버둥을 쳤다. 맨 바닥에 부딪친 등보다 그게 더 아팠다.

“…머리 울리니까 조용히 좀 해요.”

“머리 부딪쳤어요? 어디 봐요. 피는 안…. …형?”

유진이 대답 대신 연호를 세게 끌어안았다. 꿈쩍도 할 수 없는 탓에 연호가 눈동자만 굴려 자신의 밑에 깔려 있는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유진의 흰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파 보였다.

연호가 조심스럽게 유진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흠칫, 유진이 크게 몸을 움칠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유진은 이번에도 연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많이 아파요?”

연호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조심 손가락을 옮기다 보니 뜨끈하게 달아오른 뒤통수가 만져졌다. 다행히 혹이 나거나 찢어진 건 아니었다. 부딪친 충격에 잠시 열이 오른 것 같았다. 상처를 확인한 연호가 손을 떼어 내려는데 연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유진이 작게 웅얼거렸다.

“…조금요.”

“얼음찜질할래요?”

유진의 대답에 연호가 다시 유진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주인을 닮아 길게 뻗은 손가락이 다시금 유진의 뒷머리를 조심스럽게 헤집었다. 간지러웠다. 연호의 품에서는 구멍 뚫린 앞치마에서 나던 것과 똑같은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거기에 한 가지 냄새가 더 추가되어 있었다. 유진이 맡아 본 적 있는 냄새였다.

살 냄새였다. 유진이 연호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냥 지금처럼….”

“이렇게요?”

“…응.”

“아직도 아파요?”

“조금….”

유진의 가마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다독이듯 연호가 계속해서 유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유진은 온순한 아이처럼 연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겉으로는 유진이 연호를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유진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한남우한테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요.”

연호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유진의 팔에 힘이 들어갔지만, 연호가 앓는 소리를 내자 거짓말처럼 힘이 풀렸다. 연호가 계속해서 유진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 여자 친구 없어요.”

살면서 한 번도 없었지만 그런 얘기는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연호의 고백에도 유진은 쉽게 의심을 풀지 않았다. 유진이 연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하나도 귀엽지 않은 질문을 쏟아 냈다.

“…언제 헤어졌는데요?”

“없는 여자 친구랑 뭘 어떻게 헤어져요.”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있었잖아요.”

“아니라니까요?”

“여자 친구 선물도 들고 있었잖아요.”

유진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남우에게 들었거니 싶어 연호는 이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흘러 넘겼다.

“엄마 거였어요.”

“…….”

“어차피 잃어버려서 주지도 못했어요. 크리스마스 처음 챙겨 본 거였는데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 하면 안 되나 봐요.”

다음 날 급하게 선물을 준비했지만 끝내 환불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 삼자인 유진이 연호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해 주는 걸 보니 유진은 공감 능력까지 좋은 것 같았다.

“…그럼 작년 겨울 이후로 계속 여자 친구 없었어요?”

“없었어요.”

“남자 친구도?”

“네.”

“사귀진 않았는데 연락한 사람은.”

“없었다니까요.”

연호의 확신 어린 대답에도 유진은 집요했다. 무엇 하나 빠트리는 게 없었다.

“그럼 후배 연락처는 왜 물어봤어요?”

“외상 시켜 달라고 해서 비상용 연락처 받아 간 거예요.”

“관심 있어서가 아니고?”

“나 형 좋아한다니까요?”

“…….”

“또 궁금한 거 있어요?”

“남우 형이랑은 어떤 관….”

“미쳤어요? 사람이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어디서 그런 막말을….”

얘기를 하면 할수록 확신했다. 연호는 여전히 유진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았다. 처음에는 마냥 착하고 다정한,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그동안 유진이 자신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연호를 못미더워한 걸까. 그럼 연호를 믿지 않으면 될 텐데 어째서 연호를 밀어내지 않은 걸까. 의문은 여전했다. 궁금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았지만 모두 다 제쳐 두고 연호가 이 사람과 하고 싶은 건 딱 하나였다.

“유진이 형.”

“왜요.”

“내가 진짜진짜 잘할게요.”

연호는 그냥 이 사람과 연애가 하고 싶었다. 연호의 품에 갇힌 유진이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지만 연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백이라는 건 고백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긴장하게 만드는 신기한 능력이 있었다.

“앞으로는 형이랑 약속한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형이 하지 말라는 건 절대 안 할게요.”

“…….”

“땅에 발 닿을 일 없게 매일매일 업고 다닐게요. 그러니까….”

“…….”

“나랑 한 번만 사귀어 주면 안 돼요?”

“…….”

“나 형 진짜 좋아하는데….”

섬유 유연제와 연호의 체향이 뒤섞여 자꾸만 호흡을 방해했다. 유진이 간신히 숨을 들이마시는 사이 연호가 확실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형이랑 사귀고 싶어요.”

“…….”

“귀찮게 안 할게요. 애 같이도 안 굴게요. 그냥 옆에서….”

“시끄러워요….”

사실 아주 간단한 거였다. 끊임없이 의심하며 확인하려 들었지만, 결국 본질은 하나였다.

“나 좀….”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었다.

“…나 좀 살려 줘요….”

지금까지 유진은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쌓아 올렸다. 어린애 하나가 유진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 놓기 전까지는 그랬다.

“…형 왜 그래요. 머리 아파서 그래요?”

“…….”

“나 좀 봐요. 형. 유진이 형.”

동성, 그마저도 유진보다 여섯 살이나 어렸다. 유진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아서 함께 있으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상대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유진은 연호를 믿을 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설사 사람의 마음을 읽는 기계가 발명된다 해도 유진은 쉽게 타인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유진의 문제였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그 사람의 신뢰도에 대한 객관화된 수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믿고 싶으면 믿는 거였다. 이로써 유진은 연호의 의중을 알아내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그저 지금은 이 달콤한 착각 속에 빠져 있고 싶었다.

쪽….

떨리는 입술이 연호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입술에서 무슨 느낌이 났는데…. 연호가 손을 올려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입술에서 느껴졌던 감촉은 연호의 착각이 아니었다. 부드럽게 연호의 손목을 감싸 쥔 유진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입맞춤만큼이나 한없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유진이 다른 쪽 손으로 연호의 뒷목을 감싸 안으며 천천히 고개를 내리게 했다. 연호의 얼굴이 점점 아래로 숙여지면서 자연스럽게 입술이 맞물렸다. 이번 입맞춤은 조금 더 길었다. 혀가 들어온 건 아니었지만 입술이 빨리는 기이한 감촉에 연호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닫았다. 연호가 입술을 닫자 유진이 입술을 떼어 냈다.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연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형, 아픈 거 아니었….”

뒷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연호의 입술이 벌어지자 유진이 다시 한 번 입을 맞춰 왔다. 쪽, 쪽, 쪽. 몇 번이나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던 유진의 떨림이 입술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연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대로 키스했다. 입술을 벌리고 들어오는 혀의 감촉이 생경했지만 연호는 망설임 없이 입을 벌렸다. 유진이 연호의 뒷목을 강하게 움켜쥐며 깊숙이 혀를 집어넣었다. 유진의 손과 입술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여전했지만 입맞춤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첫 키스는 상상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로맨틱하지도 않았다. 연호가 겪어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노골적이었다. 입 안 곳곳이 핥이고 혀뿌리가 뽑힐 정도로 혀를 빨렸다. 연호가 조금이라도 혀를 빼내려 하면 유진이 고개를 비틀며 좀 더 깊숙하게 입을 맞춰 왔다. 그 다급한 입맞춤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연호가 고스란히 혀를 내주자 유진이 필사적으로 연호의 혀를 빨아먹었다. 그 느낌이 꼭 잡아먹히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숨이 차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타액으로 완전히 축축해진 입 안은 어디를 어떻게 핥아도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연호는 숨이 막혀 하면서도 유진에게 떨어지지 않으려 들었다.

유진이 예민해진 혀 아랫부분을 핥아 올리자 연호의 허리가 무너지고 말았다. 쿵, 쿵, 맞닿은 부위를 통해 상대방의 성기가 천을 사이에 두고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연호가 간접적으로나마 유진의 성기를 느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단 유진이어서가 아니라, 타인의 성기를 경험한 것 자체가 처음이긴 했다.

연호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들려 하자 유진이 연호의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밀어 넣었다. 맞물린 혀처럼 두 사람의 다리가 얽혀 들었다.

“흐, 으…!”

유진이 흥분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연호가 입술이 틀어 막힌 것도 잊고 크게 신음했다.

한 번 닿기 시작하자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다. 유진이 기다렸다는 듯 연호의 뒷목을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아래를 비벼 왔다. 천을 사이에 둔 성기가 느릿하게 비벼질수록 연호의 허리가 움칠움칠 떨렸다. 성기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자극에 연호의 입술이 자꾸만 벌어졌다. 두 사람의 타액이 연호의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더럽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유진이 타액을 쫓아 연호의 뺨과 턱에 가볍게 입을 맞춰 왔다.

쪽…. 이번에는 귀였다. 귀를 빨리며 사정했던 일전의 경험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쾌감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축축한 마찰음과 피어싱 부근이 핥이는 감촉에 연호는 완전히 발기하고 말았다.

“혀, 형. 잠깐….”

“…….”

“아…!”

귀를 타고 내려온 혀가 연호의 목을 그대로 핥아 올렸다. 연호가 길게 목을 내민 채 온몸을 떨며 신음했다. 연호의 반응에 유진이 좀 더 농밀하게 목을 핥아 댔다. 청바지에 가로막힌 발기한 성기가 터질 듯이 아파졌다. 연호의 옷 속으로 유진의 손이 다급하게 밀려 들어왔다.

“팔 들어요.”

커다란 손이 허리의 맨살을 쓰다듬는 걸 알면서도 연호는 그저 굳어 있었다. 위아래에서 가해지는 연이은 쾌감에 어쩔 줄 모르고 굳어 있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유진이 밑에서 발기한 성기를 쳐올리며 연호를 채근했다.

“빨리….”

연호 혼자서는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알려 주는 사람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졌다. 연호가 유진의 말대로 팔을 들어 올렸다. 하필이면 연호는 오늘 따라 안 입던 셔츠를 입고 있었다. 딴에는 데이트라고 차려입은 거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방해될 수가 없었다. 연호가 겹쳐 입은 니트를 벗긴 유진이 짜증스럽게 연호의 단추를 풀었다. 연호는 어느새 유진의 위에서 상반신만 일으킨 채 멍하게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빠르게 단추를 풀어 내리는 유진의 손길에 울컥울컥 질투가 차올랐다.

“강연호.”

그런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유진이 연호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연호의 시선이 손목으로 향했다.

“너 이게 뭐야.”

금요일에 마주친 학교 선배의 휴대폰 번호였다. 아직 쾌감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연호가 느리게 두 눈을 깜박였다.

“휴대폰 번호인데요.”

…보면 모르나. 연호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능숙하게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는 것도 모자라 이런 상황에서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있는 유진이 영 못마땅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봤겠어요?”

010으로 시작하는 숫자의 나열을 유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얘기를 지금 꼭 해야 돼요?”

“얘기해요.”

“그걸 지금 왜….”

“빨리.”

천 속에 갇혀 있는 성기가 답답함을 호소해 왔다. 차라리 빨리 얘기하고 끝내 버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연호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아는 형인데 졸업하고 처음 봤거든요.”

졸업을 하고 처음 봤다는 건 연호와 같은 학교를 다녔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토바이를 빌미로 연호에게 피어싱을 시킨 학교 선배들 중 한 명일 수도 있었다.

“휴대폰 번호 바꿨다고 해….”

…서….

뒷말이 채 이어지지 못한 건 손목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이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붙잡힌 손목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당황한 유진이 손에서 힘을 풀었지만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마저 말해요.”

“그게 다인데….”

“…….”

“형. 나 손….”

손목의 통증은 사라졌지만 유진이 집요하게 살갗을 문질러 왔다. 숫자를 파내기라도 하려는 듯 손목 안쪽을 긁어 대는 통에 연호의 피부가 금세 붉어졌다. 연호는 피부가 약했다. 이 또한 유진은 몰랐던 사실이었다. 여러모로 흔적이 잘 남는 몸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건 유진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디서 이딴 걸….”

묻고 싶은 게 많았던 것 같은데 당장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너무 분했다. 초조했다. 유진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 애인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직 연호만이 태연했다.

“이게 왜요? 진짜 별일 아니었는데.”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형이 판단할 문제도 아니지.”

불퉁한 목소리와 함께 연호가 기어코 쐐기를 박았다.

“애인도 아니면서.”

“…너….”

“대답도 안 했으면서 막 뽀뽀부터 하고.”

연호는 유진의 대답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연호에게 입을 맞추는 내내 떨고 있던 유진이 연호를 싫어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유진은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다. 연호가 유진을 채근하는 대신 빤히 유진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시선 속에서 의심과 불안, 그리고 애정. 연호를 향한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유진을 점점 짓눌러 왔다. 유진이 입을 연 건 한참 만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이딴 거 달고 오지 말아요.”

“네.”

자신 없는 목소리에 연호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학교 선배든 뭐든 다 안 돼요.”

“네.”

그 모습에 오히려 신뢰가 떨어졌다. 연호가 유진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어서 더 그랬다. 여전히 믿음은 안 갔지만 그래도 믿고 싶었다.

“…나랑 사귀는 동안에는 나하고만 사귀어야 돼요.”

유진이 평소에 연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연호가 유진의 뜻 모를 소리에 얼굴을 찌푸리자 유진이 다급하게 변명을 했다.

“차라리 내가 싫어지면, 얘기해요. 그럼 알아서….”

이 또한 개소리인 건 매한가지였다. 연호가 무어라 반박하기 전에 유진이 알아서 말을 바꿨다.

“아니, 그냥…, 나만 좋아해 줘요.”

연호의 고백에 대답을 해 주는 것뿐인데도 유진은 이상한 소리만 잔뜩 늘어놓았다. 하나도 멋있지 않았다. 연호가 생각했던 유진의 이미지와는 아주 많이 달랐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죠.”

“…약속한 거예요. 이번에는 절대 어기면 안 돼요. 절대로….”

네. 연호가 대답과 동시에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은 부드러웠고 입맞춤은 가벼웠다. 가슴이 떨렸다. 유진이 멍하게 연호를 올려다보았다.

“한 번만 더 믿어 봐요. 내가 진짜진짜 잘할게요.”

쑥스러운 듯 수줍게 웃고 있는 연호를 보고 있자니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됐든 괜찮을 것 같았다.

유진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연호의 손목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

갑자기 손목 안쪽이 깨물렸다. 잘근잘근 피부가 씹히는 느낌은 하나도 유쾌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유진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픈 건 처음뿐이었다. 그새 요령이라도 생긴 건지 이제 유진은 아프지 않게 살가죽만 깨물어 댔다. 그러다 불시에 이빨 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깨물곤 했는데, 연호가 팔을 움츠리려 하면 혀가 그 부근을 질척하게 핥아 댔다. 자국을 남기듯 살갗을 깊게 빨아들이기도 했다.

입을 맞추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연호가 어색하게 하체를 꼬았다. 유진의 시선이 연호의 하반신에 닿았다. 유진이 연호의 손목에 입술을 붙인 채 물었다.

“…어머니 몇 시에 와요?”

연호는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만큼 어리지 않았다. 연호가 쑥스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밤에 오는데….”

“다른 가족들은.”

“없어요.”

그러면서도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성실한 태도를 선보였다.

“그럼….”

유진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효율적인 사람이었다. 유진이 연호의 허리를 더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나랑 잘래요?”

“…….”

“자고 싶어요.”

연호의 옷 위를 쓰다듬는 손길이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조심할 것도, 고민할 것도 없었다. 연호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허리를 어루만지던 손이 연호의 허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어느새 연호는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그 위에 올라탄 유진이 연호의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허리 들어 볼래요?”

연호가 시키는 대로 엉거주춤 허리를 띄우자 이번에도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벗겨졌다. 셔츠 한 장과 양말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꼴이었다. 발기한 성기가 유진 앞에 고스란히 나와 있었지만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유진이 허벅지를 잡아 벌리며 연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진을 올려다보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다시 봐도 이곳은 연호의 집이 맞았다. 잔뜩 흥분한 유진이 연호 위에 올라 타 있는 이곳에서 연호는 매일 하루를 시작하고 끝마쳤다. 여러모로 현실감 없는 상황이었다. 연호가 유진의 앞에서 자위를 할 때에도 지켜보기만 하던 유진이었다. 적극적인 유진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 집에서 수도 없이 유진을 생각했다. 열아홉 살 청춘을 번뇌에 빠트렸던 은밀한 상상이 바로 눈앞에서 실현되려 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유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 스스로가 창피하기도 했다. 연호가 차마 유진을 보지 못하고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나 봐요.”

유진이 울긋불긋한 연호의 손목에 입을 맞추며 얼굴을 가린 팔을 치워 냈다.

“…보고 있어요.”

“계속 봐요.”

쪼는 듯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작열하는 입맞춤 속에서 연호가 시키는 대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창피하고 죄스러운 마음은 여전했지만 그보다는 달콤한 마음이 더 컸다. 유진을 빤히 올려다보던 연호가 적극적으로 함께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또 다시 입술이 맞물리고, 숨결이 뒤섞였다.

두 사람의 연애 첫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

오늘도 세상은 평화로웠다. 평일 대낮 도로는 한산했고, 연호를 포함한 몇 명의 승객이 전부인 버스는 이대로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연호는 실습을 마치고 동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얼마 전부터 진학반 학생들을 제외한 3학년 학생의 사회 실습이 시작되었다. 실습이라고 해 봤자 아직까지는 오리엔테이션을 듣는 게 다였지만, 그마저도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이래서야 취직은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당장은 학생이 아닌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변화는 조금씩, 천천히 다가왔다.

열아홉 살 봄, 연호에게 애인이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생애 첫 기적 앞에서 연호는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 어디예요?

전화 통화를 할 때 유진의 첫 마디는 언제나 ‘어디예요?’로 시작했다. 연호가 유진이 잠재적인 의부증 환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다른 근거로는 부재중 통화가 있었다. 이미 전적이 있듯이 유진은 연호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했다.

“나 실습 끝났어요.”

그러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해 주기를 바랐다. 혼자 엄마를 기다리며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빠를 더듬던 지난날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했다.

- 그래서 지금 어딘데요?

유진이 개의치 않고 다시 한 번 위치를 물었다.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어딘가 강압적인 말투였다.

“후문에 있는 편의점 앞이요.”

- 언제 거기까지 갔어요.

“형 보고 싶어서!”

연호의 적극적인 애정 표현에도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연애 초창기인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알지 못했는데, 유진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런 걸 싫어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너무 오버했나. 민망해진 연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휴대폰 너머에서 들썩이는 숨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 금방 갈게요.

유진이 뛰고 있었다. 유진은 연호처럼 쉽게 끓어오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영원히 끓어오르지 않을 사람도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 건너편 신호가 바뀌었다. 연호에게 달려오고 있을 유진을 위해 연호도 뛰기 시작했다.

- 어디예요?

이번에도 첫 마디는 같았다. 연호가 경영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형은 어디 있어요? 안 보이는데.”

- 교복 입고 있는 거 아니에요?

“맞는데. 나 안 보여요?”

- 음…. 혹시 안에 있어요?

“네!”

편의점 안에 들어가 있냐는 유진의 질문을 연호는 자신의 상황에 맞춰 해석했다. 실제로 연호가 캠퍼스 안에 있는 건 맞으니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30분 넘게 허탕을 친 후에야 서로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짜증과 초조함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일전에도 연호는 혼자 캠퍼스에서 유진을 기다리다 번호를 따인 적이 있었다. 그런 연호를 30분이나 혼자 돌아다니게 뒀으니, 연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내내 유진은 온갖 상상에 시달려야 했다.

몇 가지 오해가 풀렸다고 해서 모든 고민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유진은 여전히 불안했으며, 두려웠다.

“내가, 금방 간다고 했잖아요. 그새를 못 참고…!”

30분 내내 뛰어다닌 유진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기껏 머리 손질을 하고 나온 보람이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찌푸린 얼굴, 살짝 헐떡이는 숨이 연호에게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유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유진이 말을 하다 말고 대뜸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혼자 있었어요?”

“혼자 있지 그럼 누구랑 있어요.”

“누가 길 물어본 건….”

“뭔 소리예요. 대학교에서 고등학생한테 누가 길을 물어봐. 형은 어디 있었어요?”

연호가 정류장을 지나치지만 않았더라면 유진의 계획대로 두 사람은 우연히 버스 정류장에서 재회했을 것이다. 요즘은 학교 홈페이지만 들어가도 학년별 일정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유진 같은 외부인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이니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이었다. 보안을 위해서라도 학교에 따로 건의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잠깐 서점 들렀어요.”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연호에게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 역시 유진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유진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겉에 이런 거 입어도 괜찮아요?”

내심 기대했건만 연호는 오늘도 교복 같지 않은 교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딴에는 데이트랍시고 열심히 꾸미고 나온 것 같았다.

“요즘 실습 기간이라 검사 안 해요.”

단정한 교복 차림인 연호를 유진은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남우만 봤다. 유진과의 약속을 어겨 가며 단둘이 만난 것도 모자라 유진이 모르는 연호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래요.”

학교 홈페이지에 글이라도 올려야 하나. 유진이 조용히 대책을 강구했다.

“우리 학교 교복 완전 구리지 않아요?”

제대로 된 교복 차림을 본 적이 없어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유진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연호가 습관처럼 투덜거렸다.

“졸업하면 당장 버려야지. 지겨워 죽….”

“안 돼요.”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꽤나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연호가 눈을 빛내며 유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요? 뭐가 안 되는데?”

유진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연호가 이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몸을 붙여 왔다. 유진은 온몸으로 치대 오는 연호에게 약했다. 연호가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굳이, 버릴 것 까지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연호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

한참 만에 입을 연 연호는 그동안 본 적 없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취향이었어요? 좀 징그러운….”

“그런 거 아니에요.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요.”

철컹철컹, 백 마디 말보다 양 손목을 교차하는 퍼포먼스가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는지 유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만해요.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왜요? 회의 저녁부터 아니에요?”

연호는 유진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교수님이 보자고 하셔서요.”

그는 학부 시절 유민의 담당 교수로, 유민을 자신의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유진이 자신의 영광을 망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유진의 총학생회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언제요?”

아무래도 장난이 아닌 모양이었다. 연호가 양손을 내려놓으며 어른스럽게 물었다. 연호는 유진보다 여섯 살이나 어렸지만 유진이 얼마든지 의지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애인이 되고 싶었다. 이 정도쯤이야 뭐,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20분 있다가요.”

“장난해요?”

그러나 당장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걸 왜 이제 말하는데!”

연호가 날뛰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날뛰어도 이미 정해진 약속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건 유진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나가 봤자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안 봐도 뻔했지만, 지금까지 형이 해 온 것 중에 유진이 하지 않은 건 없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건 유진이 해야 하는 일이 맞았다.

그랬는데, 교수가 들려주는 형 이야기에도 유진은 계속해서 같은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불만스럽게 꾹 다물린 입술과 점점 멀어져 가던 잔뜩 풀 죽은 뒷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유진이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끊고, 다시 걸었다. 계속해서 걸었다. 몇 번을 걸어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낮에 그런 식으로 헤어진 뒤로 연호는 유진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예상보다 술자리가 길어지긴 했지만 사귀게 된 이후로 연호가 이렇게까지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정작 연호를 돌려보낸 건 유진이었다. 일방적인 통보이긴 했으나 끝내 교수의 약속을 거절하지 않은 것도,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형의 흔적을 뒤쫓기로 결정한 것도 모두 유진의 결정이었다.

그러지 말 걸 그랬다. 낮에 있었던 일로 실망한 연호가 유진의 전화를 피할 줄 알았더라면, 유진은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테다. 시험이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 습관처럼 찾아오는 편두통에 이제는 신호음이 더해졌다.

불안했다. 멀리서 연호가 살고 있는 빌라가 보였다. 혹여나 층수를 틀릴까 봐 유진은 빌라 앞에 완전히 멈춰 선 후에야 연호의 집을 찾았다. 연호의 방을 비롯한 집 전체에 불이 꺼져 있었다. 시간이 벌써 자정이 넘어가고 있으니 지금쯤 자고 있는 건지도 있었다.

그걸 확인해야 했다. 유진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을 때까지 걸을 생각이었다.

- …여보… 세요….

규칙적으로 반복되던 신호음이 끊어지고, 잠에 취한 목소리가 더듬더듬 전화를 받았다. 유진은 그대로 담배를 놓칠 뻔했다. 손가락 사이로 담뱃재가 떨어졌지만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어디예요?”

겨우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유진은 숨 쉬는 것도 잊고서 가만히 연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 집, 이요….

“자고 있었어요?”

- 아니….

아니야. 자고 있었다고 해. 자고 있었잖아. 전화는 자느라 못 받은 거잖아. 익숙한 두통 너머로 유진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 형은 지금 끝났어요…?

“…좀 전에요. 뭐 하고 있었어요?”

- 그냥 잠깐, 눈 감고 있었는데…. 몇 시지….

말끝마다 졸음이 뚝뚝 묻어나는 데다 중간중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연호는 정말 자고 있었던 게 맞는 것 같았다. 유진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깨워서 미안해요.”

미친 것 같았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늘 바라기만 해서 몰랐다. 갖고 싶은 걸 가져 본 적도, 선택 받아 본 적도 없는 유진은 처음으로 갖게 된 나만의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선택받았다는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 아닌데. 나 안 자고 있었는데.

자다 깬 지 얼마나 됐다고 연호가 금세 장난을 걸어 왔다.

- 형이 왜 미안해하지?

거짓말처럼 시야가 밝아졌다. 연호의 방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고작 등 한 개가 켜진 것뿐인데 어쩐지 눈이 부셨다. 유진이 느리게 두 눈을 깜박였다.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두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유진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낮에도, 내가 먼저 가 버리고….”

- 형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뭐, 그럴 수도 있죠.

변한 건 없었다. 유진에게는 어려운 일이 연호에게는 쉬웠고, 유진은 여전히 연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쉽게 다가온 만큼 쉽게 떠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자신과 다른 연호의 존재에 안도하는 순간이 생겼다. 두 사람이 사귀게 된 이후 유진에게 찾아온 변화 중 하나였다.

- …와, 전화를 뭐 이렇게 많이 했어요? 역시 형은 좀 기질이 있어.

이제야 휴대폰을 확인했는지 무수한 부재중 기록에 연호가 예의 그 의부증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도 딱히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장난스러운 한마디가 근본을 꿰뚫었다. 연호의 말이 맞았다. 유진을 둘러싼 복잡한 감정을 모두 걷어 내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딱 하나였다.

“…응.”

보고 싶어. 나머지는 모조리 삼켜 버렸다. 자신 없이 늘어지는 말꼬리가 마치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 같았다.

- 어디예요?

연호가 유진을 귀여워하며 유진의 성대모사를 했다. 당연하게도 유진은 눈치채지 못했다.

- 아직 집에 안 갔으면….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지 연호가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였다.

- 내가 핫도그 사 줄까요?

유진이 자기도 모르게 불 켜진 연호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유진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지만 창 너머 연호의 인영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필이면 대상이 핫도그여서 그렇지 말의 요지는 ‘술 한잔할까요’와 다르지 않았다. 은근한 유혹이 이렇게 섹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유진은 연호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런데도 가슴이 떨렸다. 이 모든 게 너무 연호다워서 자꾸만 가슴이 떨렸다.

어쩌면 연호는 유진이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빨리 준비를 마칠 수는 없었다.

“어!”

유진을 발견한 연호가 반사적으로 큰 소리부터 내고 봤다. 이를 나무라듯 동네 개 한 마리가 우렁차게 짖어 댔다. 소리는 죽였지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는 없었다. 연호가 활짝 웃으며 유진에게 달려왔다.

“우리 유진이는 밤에 봐도 예쁘네.”

만났다. 그것뿐인데 이게 뭐라고 살 것 같았다. 곧 시작될 선거도, 선대 학생회장인 유민의 그림자도, 혹여나 유진이 이를 망칠까 봐 두려워하는 주변의 염려도 그냥 다 괜찮을 것 같았다.

“형, 형. 여기 봐요.”

연호가 대뜸 자신의 목덜미 부근을 가리켰다. 후드 티 속에 셔츠를 덧대 입는 바람에 셔츠 깃이 살짝 삐져나와 있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특별한 건 없어 보였다.

“목이 왜요?”

“이거 사실….”

교복이에요. 교복 셔츠. 누가 들을 새라 연호가 작게 속닥거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교복 셔츠를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도대체 교복은 왜 입고 나온 걸까? 유진이 진지하게 물었다.

“교복은 왜 입고 나왔어요.”

“형이 좋아하니까!”

“안 좋아한다니까요.”

사실은 수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한 연호의 꼼수에 불과했지만 굳이 이 사실을 유진이 알 필요는 없었다.

“나는 좋아하는데. 우리 유진이가 제일 좋은데.”

대신 틈만 나면 개수작부터 부리고 봤다. 유진이 이런 식의 애정 표현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연호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자다 깨서 힘이 넘치는 연호가 당황한 유진을 끌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공약대로 유진에게 핫도그를 사 주기 위해서였다.

“진짜 안 먹어요?”

“원래 신경 쓰이는 일 있으면 잘 안 먹어요.”

“…그럼 괜히 왔잖아요.”

연호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유진이 아랑곳 않고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내일 아침거리 사러 왔다고 생각하면 되죠.”

“아침은 먹을 거예요?”

“나 말고 네가요.”

“나 아침 안 먹는데.”

“내일만 먹어 봐요.”

끝내 유진은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다. 자기가 사겠다며 설쳐 대는 연호를 대신해 계산을 마친 유진이 묵직한 편의점 봉투를 챙겨 들었다.

“목마르다….”

자다 깬 이후로 쉬지 않고 떠들어 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유진이 봉투에서 연호가 고른 음료수를 찾았다.

“제대로 고른 거 맞아요?”

우엉과 연근이 그려져 있는 병 음료는 보기만 해도 맛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뜨겁게 데워져 있기까지 했다. 유진에게 우엉차를 받아 든 연호가 자연스럽게 뚜껑을 땄다.

“당연하죠. 이거 꽤 맛있어요.”

순 피자나 콜라만 마실 것처럼 생겨서는 저런 것도 좋아하는구나 싶어 의외였다. 딱 그 정도였다. 유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큰길만 해도 사람이 종종 지나갔던 것 같은데, 골목에 들어서자 더 이상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마치 세상의 끝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나 아르바이트 많이 해 봤거든요.”

따뜻한 우엉차를 홀짝이던 연호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식당에서도 했었고 중국집에서도 해 봤는데 손님들한테 좋은 소리 들어 본 적이 없었어요.”

처음 연호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하나도 살갑지 않은 태도와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 한마디도 지지 않는 것도 모자라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날카로운 눈매까지. 연호의 말이 충분히 납득이 갔다.

“특히 남자 손님들이랑 많이 부딪쳤는데.”

그럴 것 같았다. 남우의 진상 짓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했던 걸 보면 다른 손님에게도 예외는 없었을 것 같았다.

“형한테 치킨 쏟았을 때 당연히 맞을 줄 알았거든요. 보통 그러면 남자 손님들은 손부터 나가서….”

생각해 보면 남우도 그랬다. 다행히 유진이 막아 줘서 별일 없이 끝났지만, 유진이 아니었다면 연호는 호되게 당했을 게 뻔했다. 남우 같은 덩치를 연호가 완력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처음에 한남우랑 시비 붙었을 때도 좀 쫄았는데. …이 얘기 한남우한테는 절대 하지 말아요.”

내심 걱정이 되는지 연호가 거듭 당부했다.

“그래서 형한테 이거 받았을 때 진짜진짜 좋았어요.”

내가요? 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물을 뻔했다. 유진이 기억하는 한 유진은 연호에게 따로 시간을 내서 무언가를 사 준 적이 없었다. 그때의 연호는 유진에게 필요한 사람도, 도움이 될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상대에게 유진이 잘 보일 필요는 없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고, 나도 형처럼 되고 싶고….”

연호가 말하는 유진의 모습은 철저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졌다.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예민하게 주변을 살폈다. 언제나, 끊임없이 노력했다. 유민처럼 누구와도 쉽게 친해질 자신이 없으니 유진은 유진 나름대로 살 길을 모색한 것뿐이었다.

“형?”

유진이 더는 듣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유진이 연호의 애정에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건 언젠가 이 관계가 끝날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연호를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많았다. 시작이 연호였으니 끝을 내는 것도 연호라고 생각했고, 유진은 그런 연호를 붙잡아 둘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더, 노력해야 했다. 설령 연호가 좋아하는 모습이 유진의 노력에 의한 결산이라면, 앞으로도 유진이 노력하면 일이었다. 어쩌면 유진의 팔자가 그런 건지도 몰랐다. 이제는 유진이 노력해야 할 대상이 바뀐 것뿐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연호에게서 쓴 약 냄새가 났다. 냄새만 맡았는데 벌써부터 맛이 없었다.

“왜 그래요?”

유진이 모르는 곳에서 유진이 모르는 추억을 곱씹으며 저딴 걸 사 마셨을 연호를 생각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유진이 다급하게 연호를 붙잡았다. 연호의 손등을 덮어 버릴 정도로 커다란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유진이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연호가 유진의 손을 감싸 안았다.

따뜻했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명쾌해졌다.

“…좋아해요.”

유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체온을 놓치지 않기로 했다. 노력하기로 했다. 다행히 유진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좋아해요.”

이 순간이 영원히 끓어오를 수 있도록, 그렇게.

<끝, 외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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