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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개학식도 끝이 났다. 이럴 거면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후회해 봐도 이미 늦었다. 연호는 PC방에 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텅 빈 집에서 홀로 연호를 기다렸을 휴대폰은 하나도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외로울 틈이 없어 보였다.
부재중 통화 85건
모두 한 번호에서 걸려 온 통화 내역이었다. 연호의 휴대폰에는 저장되지 않은,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는 초 단위로 걸려 온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몇 십 분 사이에 이렇게 많이 걸려올 수가 없었다. 부재중 통화 내역을 모두 훑어 본 연호가 모르는 번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유진이 형이에요?」
답장은 금방 왔다.
「앞으로 휴대폰 잘 챙겨서 다녀요.」
「집이에요?」
그것도 한 번에 두 개나 왔다. 연호가 빠르게 답장을 했다.
「방금 왔어요.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남우 형 휴대폰 봤어요.」
「한남우가 효자네….」
개똥을 약에 쓸 수 있다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연호는 적극적으로 남우 찬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앞으로 메시지 보내도 돼요?」
곧바로 휴대폰이 울렸다. 유진의 답장은 간단했다.
「이미 하고 있잖아요.」
어제는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는데 오늘은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연호는 휴대폰을 끌어안고 바닥을 굴러다녔다.
여기서 연호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유진의 번호를 몰랐을 때에는 번호만 알아도 행복할 것 같았는데, 유진의 번호를 알게 되자 매일 연락하고 싶어졌다. 매일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자 이제는 매일 보고 싶었다.
“…사장님.”
빈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던 연호가 힘없이 사장을 불렀다. 사장과 아르바이트생이 동시에 시선을 주고받았다. 며칠 전 연호의 폭탄 선언 이후 당분간 연호를 지켜보기로 한 두 사람이었다. 연호가 드디어 그날의 진실을 밝히려는 건지도 몰랐다.
“우리 와이파이 고장 난 거 아니죠….”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그만 물어볼 거니?”
“…LTE가 이상한 건가?!”
“아니. 그냥 네가 까인 거야.”
연호가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얼굴로 형을 노려보았지만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연호의 이상 행동을 지켜보다 못한 형이 심문에 나섰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요즘 뭔 짓 하고 다녀.”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너 진짜 게….”
“어! 왔다!”
잠시 떠드는 사이 메시지가 도착했다. 연호가 재빨리 휴대폰을 확인했다.
「바빠요?」
「바빠요.」
바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유진은 몇 시간 만에 답장을 보내 왔다. 개강을 한 유진은 부쩍 바빠 보였다. 본격적인 선거 준비 때문이었다.
「왜 요즘은 배달도 안 시켜요? 치킨 먹을 시간도 없어요?」
「없어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쁜 건지 유진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배달을 시키지 않았다. ‘그럼 우린 어떻게 봐요?’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역시 개학식 날 어떻게든 대답을 들었어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통의 예약 전화 때문이었다. 배달이 아닌 매장으로 단체 손님이 오기는 오랜만이었다.
연호가 배달에서 돌아왔을 땐 형이 진작 서빙을 하고 있었다. 사장에게 들었던 것보다 손님들이 더 일찍 도착한 것 같았다.
“배달 더 없지.”
“네. 교대해 줘요?”
“됐어. 오랜만에 안에 있으니까 재밌다. 그것보다 잠깐 이리 와 봐.”
오늘 끝나고 뭐 하냐? 형이 연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이후 일정을 물었다.
“나랑 인생 상담 좀 하….”
형의 뒷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사장님.”
손님의 부름에 형이 이야기를 하다 말고 테이블로 달려갔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에 연호가 함께 시선을 옮겼다.
“저희 물티슈 좀 주세요.”
테이블에는 유진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물티슈는 연호가 갖다 줬다. 유진이 공손하게 물티슈를 받아 들었다. 연호가 좋아하는 상냥한 모습이었지만 이러니까 꼭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직원과 손님처럼 느껴졌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정정할 수도 없었다.
유진은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남우네 무리도 아니었고, 연호와 방학 내내 얼굴을 마주하던 사람들도 아니었다. 누가 됐든 그저 부러웠다.
나도 같이 치킨 먹을 줄 아는데. 연호가 뚱한 얼굴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형 왜 나 모른 척해요?」
메시지를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연호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 듯 사람들과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도대체 휴대폰을 어디에 둔 건지 유진은 휴대폰을 꺼내려는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와, 나한테는 맨날 휴대폰 챙기라고 했으면서!
분노한 연호가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메시지로 넘어간다는 안내 멘트가 나올 때쯤 유진이 뒤늦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알고 보니 휴대폰은 처음부터 유진의 테이블 위에 있었다. 연호는 처음으로 유진이 얄밉다고 생각했다.
「그런 적 없어요.」
「모른 척했잖아요.」
「안 했어요.」
「했어요!」
유진과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휴대폰 위로 불쑥 그림자가 졌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형이 수상쩍은 얼굴로 연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심 기대했던 연호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뭐야. 형이잖아….”
“…뭔지는 모르겠는데 기분 나쁘네.”
형이 연호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연호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두 사람은 은밀한 대화를 나눌 예정이었다.
“아, 뭐 해요. 앞에 자리 있잖아요!”
연호의 허리를 밀어내는 손길에 연호가 질색을 했다.
“미친. 강연호 허리 봐. 넌 똥배도 없냐?”
“아, 진짜! 손이나 떼고 말해요.”
“사장님.”
유진의 목소리에 연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유진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여기 물이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형이 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를 좀 할라 치면 유진이 자꾸만 주문을 해 대는 통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또 다시 배달 주문이 들어왔다. 연호는 사람들 속에서 웃고 있는 유진을 뒤로한 채 헬멧을 챙겨 들었다.
***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자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유진이 보였다. 매장 입구가 한눈에 보이는 장소였다. 유진의 발치에 담배꽁초가 여러 개 떨어져 있었다. 마치 연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여기서 뭐 해요? 나 기다렸어요?”
유진이 담배를 피우다 말고 연호를 쳐다보았다. 유진이 난간에 기대 서 있긴 했지만 여전히 연호보다는 눈높이가 높았다. 유진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유진이 연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그냥 해 본 말인데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연호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금세 웃는 얼굴을 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왜!”
“냄새 나요.”
“괜찮아요.”
연호가 개의치 않고 다가오자 유진이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진이 뿜어낸 담배 연기가 아슬아슬하게 연호를 빗겨나갔다. 가만히 연호를 쳐다보던 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스크나 벗어 봐요.”
“이렇게요?”
“헬멧도. 이따 들어갈 때 써요.”
실내에서 굳이 헬멧과 마스크를 쓰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의아했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일단은 벗기로 했다.
“원래 그렇게 둔해요?”
“아닌데. 나 운동 엄청 잘해요.”
“그런 거 말고. 누가 쳐다봐도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아서.”
연호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관심이 없었다. 모두에게 다정한 건 유진으로, 연호는 기본적으로 상냥한 편이 아니었다. 친절하지도 않았다. 철저하게 자기 사람만 챙겼으며 자기 사람에게만 관심이 많았다. 유진의 일행들이 연호를 쳐다보든 말든 연호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쫓아가도 모르고.”
“에이, 설마. 바로 알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때늦은 눈이 내리던 그날 밤, 유진은 매장에서부터 연호를 뒤따라갔다. 집 주변에 다다를 때까지 연호는 유진이 자신을 따라온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과의 불필요한 스킨십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호는 보기와 다르게 너무 허술했다. 도저히 혼자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 둔하네요.”
“대놓고 그러니까 별로 욕 안 같아요.”
“몸은 딱 생긴 대로던데.”
“…뭐, 뭐요?”
“귀 좀 빨아 줬다고 바로 쌌잖아요. 원래 그렇게 잘 느껴요?”
유진이 난간에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다. 연호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유진이 대뜸 인상을 썼다.
“그거 하지 말아요.”
“뭐, 뭐가요.”
“입술.”
뭔지는 모르겠지만 연호는 일단 입부터 닫고 봤다. 유진은 새 담배를 꺼낼지 말지 따위를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연호를 보고 있으면 초조해졌다. 연호를 생각하면 계속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결국 유진은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일 끝나고 뭐 해요?”
…설마 데이트 신청하는 건가! 연호가 흑심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해요!”
“잘됐네요. 곧장 집으로 가요.”
무슨 엄마도 아니고 입만 열면 저 소리였다. 휴대폰 챙겨라, 집에 일찍 들어가라, 집에 가라, 집에 가라, 집에 가라…. 마치 엄마처럼 연호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건 좋았지만 유진과는 좀 더 다른 게 하고 싶었다. 입을 맞추고 몸을 맞대고 싶었다.
경험이 없을 때는 몰랐다. 막연하게 함께 있을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연호가 한 번 성행위를 겪고 나자 욕망도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 갔다.
연호는 최근 들어 부쩍 유진의 꿈을 자주 꾸게 되었다. 꿈속의 유진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연호도 마찬가지였다.
‘나랑 자고 싶어요?’
그렇게 묻던 유진의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형.”
연호가 조심스럽게 유진을 불렀다.
“나 싫어하는 거 아니면요, 나랑….”
“…….”
“…형 전화 오는데.”
“괜찮으니까 말해요.”
“어, 그러니까, 형도 나 싫은 거 아니면 나랑….”
사….
연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유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레 놀란 연호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유진이 그런 연호를 내버려 둔 채 급하게 담배를 끄며 말했다.
“거기 있어요.”
“어디 가요?”
“들어오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유진이 연호를 피해 급히 매장으로 돌아갔다. 중요한 순간에 혼자 남겨진 연호가 멍하게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상황은 조금 달랐지만 어쩐지 그때의 유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호가 유진 몰래 학교에 갔던, 개학식 날이 떠올랐다.
연호가 슬쩍 매장을 엿봤다. 유진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배달을 나갈 때보다 여자가 훨씬 늘어 있었다. 설마 이러려고 못 들어오게 한 건….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나갔다.
문이 열리자 무수한 시선들이 쏟아졌다.
“…왔다!”
언뜻 듣기로는 연호를 반기는 것 같기도 했다. 당황한 연호가 뒤늦게 주변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방학 내내 치킨을 배달하던 유진의 일행이었다.
“요즘 많이 바빴어요?”
그들 중 하나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 왔다.
“별로 안 바빴는데요.”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하자 자기들끼리 무어라 수군거리는 게 보였다. 일찌감치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남자가 연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야, 네가 그때 걔라며? 패기 넘치게 번호 따 갈 땐 언제고 왜 연락을 안 해서 여자가 직접 찾아오게 만들어?”
연호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연호에게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연호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다.
“…연락이 없길래….”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전에 유진 대신 비상 연락처를 받아 갔던, 그때 그 사람이었다.
이제야 조금 상황 파악이 되었다. 반면 사장과 형은 주방 한편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며 연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도대체 강연호 저놈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건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솔직히 불공평하지 않냐? 여자가 고등학생이면 남자만 범죄자 취급 받는데 남자가 고등학생인 건 아무 소리 안 하잖아.”
몇몇 남자들이 합세하자 불공평을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러면 그럴수록 연호를 찾아온 여자가 주변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저기요.”
연호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유진이 넌 연상이 좋다고 했나?”
여자를 뒤따라 매장을 나가던 연호가 그대로 멈춰 섰다. 곧이어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랬었죠.”
“뭐가 좋은데?”
“안정감 있잖아요.”
이 상황에서 떠올릴 만한 장면은 아니지만 연호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내리던 손길이 자연스럽게 유진의 과거를 상상하게 했다. 그 대상이 연호보다, 아니, 유진보다 더 연상이었을 걸 생각하니 분하게도 잘 어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는 연호의 오해를 살 만한 행동으로 여기까지 찾아온 여자가 서 있었다. 연호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길게 대화를 나눌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연호의 대답은 하나였다. 연호는 사과를 했고, 당황해하던 여자도 끝내 사과를 받아들였다. 소란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로 시시한 결말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방금 전 유진의 행동이었다. 유진은 연호를 매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론은 같았다. 유진도 여자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던 것 같지만, 적어도 연호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되었다.
충격이었다. 만약 연호가 유진이었다면 연호는 그 길로 달려가 해명을 요구했을 것이다. 길바닥에 드러누웠을지도 모른다. 날 좋아해서 내 앞에서 자위까지 해 놓고 다른 여자에게 껄떡대다니,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러나 유진은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연호를 대한 것도 모자라 연호가 여자와 나가는 걸 보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못 믿겠는데.’
연호의 고백에 대한 유진의 반응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도대체 연호에게 얼마나 믿음이 안 가면 그럴 수 있는지 연호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이런 오해까지 받았으니 앞으로가 막막했다. 침울해진 연호가 땅을 보며 걸었다.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데 연호의 시야에 단정한 로퍼가 들어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담배 냄새도 함께였다.
“지금까지 같이 있었어요?”
유진이 밖에 나와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유진을 보니 이 와중에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연호는 얼굴을 존나 봤다.
“아니요. 금방 헤어졌어요.”
“그럼 왜 이제 온 거예요?”
“그냥 좀….”
‘혼자서 삽질하고 있었다’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순 없어서 연호가 어물쩍 대답을 흘리자 유진이 다시 한 번 물었다.
“혼자 있었어요?”
“네.”
“그럼 됐어요.”
유진이 깔끔하게 대화를 정리했다. 심지어 담배도 껐다. 유진은 더 이상 연호와 할 얘기가 없어 보였다.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가요.”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연호가 유진을 붙잡았다.
“형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무슨 일인지 안 궁금해요?”
잠시 연호를 쳐다보던 유진은 이내 연호가 환장할 만한 대답을 내놓았다.
“네. 안 궁금해요.”
“…왜?!”
“상관없으니까요.”
사실이었다. 유진은 연호에게 다른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유진은 선택받지 못하는 데 익숙했다. 감히 그럴 수 있으리라는 자신도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욕심이 났다. 이건 연호의 잘못이 아니었다. 주제도 모르고 욕심을 부리는 유진이 문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유진은 형처럼 되고 싶었다. 형이 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연호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지도 못하고 연호의 곁을 맴도는 것도 결국 같은 이유였다.
“왜 상관이 없어요!”
유진의 이런 마음을 연호가 알 리가 없었다. 상관이 없다는 말도 그랬다. 유진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연호에게는 네가 다른 사람과 사귀든 말든 상관없다는 얘기로 들렸다. 연호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진이었기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내가 그러는 것도 봤잖아요!”
“그러는 게 뭔데요.”
“호, 혼자, 하는….”
연호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갈 것처럼 작아졌다. 보다 못한 유진이 대신 문장을 완성시켜 주었다. 다만 표현은 조금 달랐다.
“내 앞에서 싼 거요?”
“…그, 그거요.”
“너 혼자 싼 거지 같이 잔 건 아니잖아요.”
“뭔 소리예요. 우리 같이 잤잖아요.”
“우리가요?”
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제 와서 모른 척하는 건가 싶어 화가 날 뻔했지만 연호는 뒤늦게 유진의 말을 이해했다. 잠을 잔다는 중의적인 표현이 가져온 의사소통의 오류였다. 연호는 또 다시 충격에 휩싸였다.
‘안정감 있잖아요.’
안정감은 무슨. 할아버지도 아니고! 연상이 좋다던 유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연호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겨 버리던 손길도 떠올랐다. 여기서 유진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아, 자긴 했네요.”
“…….”
“퇴근 시간 다 됐네요. 들어가요.”
유진의 과거를 상상하게 만드는 한마디였다. 연호는 유진보다 여섯 살이나 어렸다. 나이에서 오는 경험 차이는 쉽게 따라잡을 수 없었다. 질투와 패배감이 몰려들었다. 연호가 유진을 지나쳐 비틀비틀 걸어갔다.
연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조금 용기가 났다. 유진이 연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만약에.”
사실은 연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여자 친구와는 아직도 사귀는 건지, 후배의 번호는 왜 물어본 건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남자는 어떤 취향을 좋아하는지, 지금까지 몇 명을 사귀어 봤는지, 그중에 남자도 있었는지, 학교 선배들과는 아직도 어울려 다니는지, 유진이 연호의 기대와 달라도 유진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지.
감정보다 욕심이 앞섰다. 느긋하게 앉아서 타인과 교류하며 감정을 키워 나갈 여유 따위 없었다. 좋아한다는 낯간지러운 말보다는 어떻게 해야 이 사람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지가 더 듣고 싶었다. 유진은 연호에게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예요?”
“그건 또 뭔 소리예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새카만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유진에게 향했다. 연호는 이번에도 유진이 하지 못하는 걸 해냈다.
“나였으면 그 누나는 누구냐고 백 번은 더 물어봤을 텐데.”
“…….”
“형은 왜 그런 건 안 물어보고 다른 소리만 해요?”
유진은 왜 아무것도 묻지 않을까. 유진의 입장에서는 한참 어린 연호가 못미더울 만도 했다. 그럼 더더욱 연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그러나 유진은 그러지 않았다. 연호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건 단순한 신뢰의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뭔지 당장이라도 알아내고 싶었지만 연호 혼자 생각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아, 모르겠다.”
연호의 체념 어린 목소리에 유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냥 뭐든 다 말해 봐요. 내가 다 들어줄게요.”
혼자서 못 하겠으면 둘이 하면 될 일이었다. 아주 단순한 논리였다.
“아, 형 좋아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
연호는 유진이 못하는 걸 너무 쉽게 해냈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무서웠다. 그래서 더 가지고 싶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유진은 여전히 두려웠으며,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그래도.
유진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주말에.”
연호에게까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유진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집에만 있어요. 밖으로 나가지 말아요.”
“…그게 뭐예요?”
유진이 하도 뜸을 들여서 엄청난 이야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침 연호가 쉬는 날이긴 했지만 이건 무슨 벌칙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연호의 시큰둥한 반응에 유진이 다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뭐든 말하라면서요.”
“형 좋아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어요?”
“할게요. 다 할 테니까 뭐든 속 시원하게 말해 봐요.”
연호의 기대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지만 까짓 거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연호가 흔쾌히 수락하자 고작 말뿐인 약속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유진은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그럼 그때 봐요.”
“그때가 언젠데요?”
“일요일.”
“금요일에도 보고 토요일에도 보고 일요일에도 보면 안 돼요?”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연호는 여전히 성격이 급했다.
“안 돼요.”
“왜요!”
“내일 MT 가서 일요일에 와요.”
유진은 연호의 친구들처럼 입이 험한 것도 아니고 남우처럼 시비를 걸지도 않았지만 가끔 얄미울 때가 있었다. 연호는 두 번째로 유진이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번 달에 새터도 갔다 왔으면서. 연호가 뚱하게 유진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왔잖아요.”
“그래서 왔다고요? 나 보려고요?”
“그럼 내가 뭐 하러 왔겠어요.”
유진은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지도, 의미 없는 술자리도 좋아하지 않았다. 당장 내일 MT를 가야하는 데도 유진이 이곳에 온 건 딱 한 가지 때문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애, 하필이면 쓸데없이 예뻐서 벌레가 자주 꼬였다. 고백이고 뭐고 당장은 빼앗기지 않는 데 급급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그냥 나 보러 왔다고 하면 안 돼요?”
“…다음에요.”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연호가 이유도 묻지 않고 성급히 맹세했다.
“지진이 나도 밖에 안 나갈게요.”
다행히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맹세는 지켜지지 않았다.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
결전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진이 드디어 고백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려는 것 같았다. 오늘이 벌써 금요일이니 일요일까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미친, 고백했다고? 여섯 살이나 많은 대학생 누나한테?”
“모쏠 주제에 패기 한번 쩔어 주시고요?”
평소 이성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연호였기에 모두가 대학생 누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대학생 누나가 아닌 대학생 형이었지만, 연호는 굳이 이 사실을 정정하지 않았다. 뭐가 됐든 좋으니 연상에게 잘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근데 여섯 살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완전 잡아먹힐 것 같은데.”
“…헐. 존나 좋은데?”
“미친놈들이 뭐라는 거야.”
성적인 농담에 습관처럼 정색을 하긴 했지만 연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살색 영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고기를 한 번도 안 먹어 본 놈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 본 놈은 없다고 했다. 연호가 딱 그 꼴이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모든 게 처음인 연호와 달리 유진은 모든 면에서 경험이 많아 보였다. 비단 성경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진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연호보다 넓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이 엄청난 경험의 차이가 유진으로 하여금 연호를 못미덥게 여기는 요인일 수도 있었다.
사람 인생이 게임도 아니고 단기간에 경험치를 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친구들의 조언이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하나라도 더 듣고 봤다. 그런 연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이번 토요일 오후 다섯 시에 팬 미팅을 앞두고 있는 남우였다.
「(사진)」
「(사진)」
「(사진)」
「여기서 뭐가 제일 낫냐? 적당히 튀어 보이면서 무난한 댄디 룩으로.」
팬 미팅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팬심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4번.」
「4번? 사진 세 장밖에 안 보냈는데. 맨 마지막 거?」
「ㄴㄴ. 4번. 그냥 벗고 가요.」
「야!!!」
「뭘 입어도 얼굴이 탈락.」
연호는 얼굴에 굉장히 민감했다.
「안되겠다. 옷 사러 가자.」
메시지가 도착했지만 무시했다. 연호의 신경은 온통 한곳에 쏠려 있었다. 지금 유진은 동해 바다 어딘가에서 누나들과 함께 백사장을 뛰어다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유진에게 연락이 없었다.
「MT 가면 뭐 해요?」
「술 먹지! 게임 하고 술 먹고 게임 하고 술 먹고….」
아, 괜히 물어봤다. 연호의 머릿속에서 유진이 누나들과 함께 러브 샷을 했다. 1단계, 2단계, 3단계…. 학교 선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알게 된 잡지식이 연호의 상상을 부추겼다.
「MT 가잖아? 새벽에 꼭 둘씩 없어져. 이거 백 퍼다.」
「대학 생활 궁금하냐? 형이 어드바이스 좀 해 줘?」
「네가 나한테요?」
고등학생을 상대로 으스대는 꼴이 아주 기도 안 찼다. 연호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남우가 선뜻 미끼를 던져 왔다.
「MT 가면 제일 재밌는 게.」
「새벽까지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하는 진실게임이거든.」
「우리 과 여자들은 생존률이 90%야.」
「왜겠냐?」
「…유진이 형?」
빠른 입질이었다. 남우의 예상대로였다.
「천유진이 MT까지 가서 고백을 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받았다!」
「정답! 다음 문제, 천유진이 과 CC를 한 횟수는?」
「0번! 안 했다! 아무하고도 안 사귀었다!」
연호가 사심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다행히도 유진은 한 번도 학과 CC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상형을 물으면 연상이 좋다고 대답할 뿐, 유진의 연애는 줄곧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누군가 학교 근처에서 유진이 다른 사람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목격할 때까지는 그랬다.
「누구랑 있었는데요?」
「궁금하냐?」
「아, 빨리요. 그래서 누구였는데요?」
「투 비 컨티뉴드..☆」
…이 새끼가 진짜! 연호가 수업을 듣다 말고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했다.
「천유진 스토커 그만둔 거 아니었냐?」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면서요.」
얼마 전에 남우가 연호에게 한 말이었다. 이로써 연호가 남우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했다. 연호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던 만큼, 남우는 방금 전 대화로 내심 감동을 받았다.
「야, 내가 특별히 오늘 하루만 멘토 해 준다.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봐!」
꼴 같지도 않았지만 남우는 저래 봬도 유진과 중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데다 대학생이기까지 했다. 배달을 시킬 시간도 없이 바쁘다는 유진이 떠올랐다. 유진은 연호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앞으로도 알 일 없는 세계에 속해 있었다. 남우에게 이야기를 들어 두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한남우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니…! 얄팍한 자존심이 연호를 붙잡았지만 손가락은 이미 메시지를 적고 있었다.
「옷 사러 어디로 갈 건데요.」
「너 가는 데 소개 좀.」
…근데 유진이 형이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잠시 고민했지만 의외로 결론은 쉽게 났다. 연호는 지금 학교에 있었고, 내일도 학교에 와야 했다. 즉, 애초에 유진과의 약속은 성립이 불가능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연호는 이상한 데서 똑똑했다.
***
“…야, 너….”
목까지 잘 잠근 교복 셔츠 위에 맨 짙은 남색 넥타이와 단정한 조끼 차림이 꽤나 어색해 보였다. 본인도 어색해하는 게 느껴질 정도니 남이 보기에는 더 그래 보였다.
어쩔 수 없었다. 연호는 최근 오토바이를 구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교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최근 연호가 또다시 행실이 좋지 않았던 졸업한 선배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생각한 교사들이 집중 단속을 시작한 것이다. 모두 유진 덕분이었다.
“꼭 그거 같다.”
“뭐요.”
“교복 플레…. 아, 왜! 아프잖아!”
“개소리 하지 말고 옷이나 골라요.”
…칭찬이었는데 왜 저래? 남우가 반성하는 기색 없이 툴툴거리며 옷가지를 뒤적거렸다.
“야. 너 진짜 여기서 옷 사는 거 맞아?”
“왜요.”
“너 이런 거 입은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남우는 안 그렇게 생겨서 눈치는 더럽게 빨랐다. 연호는 침묵했고,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남우가 악을 썼다. 연호가 귀찮아하며 남우를 달랬다.
“여기 예전에 알던 형들이 알려 준 데예요. 내 친구들도 여기 자주 와요. 나만 안 사는 거예요.”
“넌 왜 안 사는데!”
“인터넷이 더 싸잖아요.”
수긍할 수밖에 없는 한 마디였다. 남우는 금세 설득되었다.
“이거나 대 봐요.”
연호가 셔츠 하나를 뽑아 들었다.
“입어 보고 올게.”
남우가 수줍게 탈의실로 향했다. 굳이 입어 볼 필요까진 없어 보였지만 지금부터 잘 구슬려 놔야 유진에 대한 이야기도 잘 털어놓을 것 같았다. 연호는 순순히 남우를 기다리기로 했다.
“…강연호?”
연호의 이름이 들리는 걸 보니 남우가 벌써 옷을 다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밖에 나와 있던 연호가 다시 매장으로 들어가려 하자 누군가 다급하게 연호를 붙잡았다.
“강연호 맞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남자의 귓바퀴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피어싱은 연호의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공부한다더니 옷 사러 왔냐? 왜 그동안 못 봤지?”
그는 작년에 졸업한 연호의 학교 선배로, 이 매장 역시 그가 알려 준 곳이었다. 직장이 서울이 아니라고 해서 서울에 오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 너무 안일했다.
“공부한다고 스마트폰도 없애더니 잘돼 가냐?”
“그냥, 뭐….”
“오토바이 타고 싶으면 연락해라. 형이 오랜만에 태워 줄게. 야, 형 요새 좋은 거 타고 다녀. 그때랑은 비교도 안 돼.”
형들은 ‘적당히’라는 걸 몰랐다. 연호에게도 오토바이 그 이상의 일탈을 바랐다. 연호는 형들이 졸업을 하자마자 공부 핑계를 대며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었다. 설마 이런데서 마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형 번호 바꿨다. 알려 줄 테니까 휴대폰 줘 봐. 너 그럼 2G폰 쓰냐?”
2G폰은 수험생의 상징이었고, 공부를 할 리 없는 연호의 휴대폰은 당연하게도 2G폰이 아니었다. 당황한 연호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뭔가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간신히 선배를 따돌린 연호가 다시 매장으로 돌아왔을 때 남우는 이미 계산을 마친 뒤였다.
“와, 몸 존나 좋으시네. 운동 몇 년 하면 이렇게 돼요?”
“원래 좀 근육이 잘 붙어요. 체질이에요, 체질. 저 운동 하나도 안 해요.”
팬 미팅을 앞두고 매일매일 헬스장에서 살고 있는 새끼가 할 말한 말은 아니었다. 연호가 힘껏 남우를 비웃었다.
만족스러운 쇼핑을 끝낸 남우가 연호를 끌고 햄버거 가게에 데려갔다. 햄버거는 당연히 남우가 샀다. 이걸로 얼마나 유세를 부리는지, 남우는 연호가 한바탕 난리를 친 후에야 입을 닫았다.
참 오래도 걸렸다. 이제 연호는 본격적으로 대학 생활과 유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생각이었다. 제 할 일을 모두 마친 남우만 태평했다.
“와 씨, 너 타투도 했냐? 어린 게 발랑 까져 가지고.”
“아, 씨! 뭐야, 손 안 치워요?”
“뭐야, 번호네? …너 설마 번호 땄냐?”
“아니거든요!”
연호의 손목 안쪽에 휴대폰 번호로 보이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매장에서 빌린 매직으로 받아 적은 학교 선배의 연락처였다. 손바닥에 적지 않은 건 암을 유발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연호는 볼펜으로 손바닥에 낙서를 하면 암에 걸린다는 루머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냥 학교 선배 만나서 번호 받은 거예요.”
“그걸 왜 팔에다 적어? 너 휴대폰 없냐?”
“별거 아니니까 마저 얘기나 해요. 그래서 유진이 형이 누구 차에서 내렸는데요.”
잠시 잊고 있었다. 연호의 본진은 천유진이었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는 게 이 바닥이었지만 기분이 좀, 그랬다. 남우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누구겠냐. 당연히 여자지.”
“…어떤 스타일이었어요? 귀여웠어요? 아니면 청순?”
“땡.”
효과음이 유난히 경쾌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우가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존나 섹시한 스타일.”
섹시한 스타일, 안정감 있잖아요, 섹시한 스타일, 섹시한 스타일, 안정감 있잖아요…. 연호의 머릿속에서 남우와 유진의 목소리가 마구 메아리쳤다. 연호는 좌절했다.
“근데 너 설마 여자 친구 생겼냐?”
“아니요. 남자 친구 갖고 싶은데요.”
“야, 네가 그러면 하나도 농담 안 같거든? 아, 존나 놀랐네. 너 혼자 생긴 줄 알았잖아.”
혼자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게 퍽 남우다웠다. 남우가 재차 확인에 나섰다.
“너 크리스마스 때도 여자 친구 없었던 거 맞지?”
“맞으니까 크리스마스 얘기 좀 그만해요. 크리스마스 완전 싫어.”
“근데 너 그때 여자 친구 줄 선물도 사지 않았냐?”
“…여자 친구 줄 선물 아니었으니까 그만 좀 물어봐요.”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유난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자각하지 못한 짝사랑 상대에게 스토커 취급을 당했고, 처음으로 준비한 엄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선물을 다시 준비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크리스마스를 챙긴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잔뜩 혼만 났다.
다시 떠올려 봐도 결론은 같았다. 역시 연호는 크리스마스가 싫었다. 정말 싫었다. 연호가 말없이 감자튀김을 먹었다. 아쉽게도 남우의 헛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이상하네. 천유진 말은 다르던데.”
“유진이 형이 왜요?”
“너 여자 친구랑 아직 잘 지내냐던데? 감자튀김 더 안 먹어? 나 먹는다?”
“…그건 또 뭔 소리야. 다 먹어요, 다. 네가 유진이 형한테 이상한 소리 한 건 아니고?”
“형이라고 하랬지! 몰라. 무슨 얘기 하다가 그랬는데 잘 기억도 안 난다. 너 근데 진짜 남자도 돼?”
유진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였을까. 대답 없던 유진이 타이밍 좋게 답장을 보내 왔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었다. 메시지가 줄줄이 도착했다.
「아르바이트도 없는데 집에만 있느라 심심하진 않아요?」
「일요일에 가고 싶은 데 있으면 말해요.」
「우리 집도 괜찮아요.」
심심할 리가 없었다. 연호는 밖에서 유진의 뒷조사를 하며 아주 보람한 휴무일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니 어쩐지 유진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호가 알 수 없는 찝찝함에 답장을 망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