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4)

55℃ 上

“연호 집에 안 가니?”

벌써 몇 시간째였다. 연호는 아까부터 빈 테이블 위에 엎어진 채 계산대만 노려보고 있었다. 연호의 퇴근 시간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 있었다. 연호가 그 자세 그대로 입술만 움직여 대답했다.

“가 봤자 할 것도 없는데 좀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내일 개학 아니니?”

엄마도 모르는 걸 사장이 알고 있었다. 연호가 오토바이를 구입한 후에도 계속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오전 수업만 해서 금방 끝나요.”

“너희 학교는 공부를 시키긴 하….”

“네! xx치킨입니다!”

아직 대화 중이었던 것 같은데 연호가 별안간 계산대로 뛰쳐나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벨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었다. 무려 전화기 알림 램프가 빛나는 걸 보고 달려 나간 거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반응 속도였다. 치타처럼 달려 나올 때는 언제고 정작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시큰둥한 얼굴로 주문을 받고 있었다.

…그냥 있기에는 눈치 보여서 저러나? 의아했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기에 사장은 연호를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같은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아, 이게 뭐야. 3월 다 돼서 웬 눈.”

배달을 다녀온 형이 투덜거리며 매장에 들어섰다. 날리는 눈발 때문에 배달을 다니는 내내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와! 눈!”

전화를 기다리느라 줄곧 계산대만 쳐다보고 있어서 몰랐다. 연호가 뒤늦게 좋아하자 시간을 확인한 형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너 왜 아직도 안 갔어. 심심하냐?”

“맨날 그렇죠 뭐.”

“나 끝나고 친구들 만나러 갈 건데 너도 갈래?”

할 일도 없는 주제에 연호의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곧바로 형의 응징이 이어졌다.

“어디서 바쁜 척이야. 야, 가자. 형들이 너 보고 싶댔어. 여자애들도 올 거야.”

“아, 놔요! 무거…. 전화, 전화! 전화 오잖아요! 내가 받을래요. 사장님! 내가!”

‘쟤 왜 저래요?’, ‘몰라. 아까부터 저래.’ 황당해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연호가 계산대를 향해 뜀박질을 했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형과 괜한 몸싸움을 하느라 숨이 다 찼다.

“여보! 세요!”

간신히 전화를 받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상대방은 아무 말도 없었다. 장난 전화인가. 연호가 미련 없이 수화기를 내리려던 그 때였다.

- 사장님 바꿔 주세요.

연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오늘 안으로 연락을 달라고 했으니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전화가 올 줄 알았다. 매장 마감을 코앞에 둔 지금에야 연락이 올 줄은 몰랐지만 어쨌거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연호가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숨기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사장님 지금 바쁘니까 저한테 얘기하세요.”

“나 안 바쁜데?”

눈치가 없어도 저렇게 없을 줄이야. 연호가 필사적으로 사장의 접근을 막아 냈다. 사장은 영문도 모르고 주방으로 쫓겨났다. 소란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유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장난치지 말고 사장님 바꿔요.

“장난 아닌데….”

- 강연호.

유진이 이름을 불러 주는 건 좋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겨우 전화 한 통 받겠다고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순순히 물러날 리가. 게다가 오늘 연호는 유진을 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이 정도는 누려도 되지 않을까. 연호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

“아까 누나들이 외상 한 것 때문에 전화한 거 아니에요? 결제하려면 단말기 필요해서 어차피 내가 가야 돼요.”

- 계좌 이체 할 거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딴에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머리를 굴려 봤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머리가 좋아질 리가 없었다. 연호는 결국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장님 바꿔 줄게요.”

그렇게 대답하는 연호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이번에도 유진을 착각에 빠지게 할 만큼 절절한 목소리였다. 유진이 싸늘하게 말했다.

- 수작 부리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요.

어쩔 수가 없었다. 유진은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았다. 마냥 연호를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네?”

-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하고 있는 건데.”

지금 연호는 아르바이트를 핑계 삼아 자신의 사심을 채우는 중이었다. 제 발 저린 연호가 어설프게 말끝을 흐렸다.

- 어디에 정신이 팔렸길래 그런 기본적인 생각도 못 해요.

“지금 무슨 소리….”

- 널 부른 것도 나고 계산을 하는 것도 나잖아. 그런데, 왜….

잘못이 있다면 아르바이트생에게 계산 의무를 넘겨 버린 사람들에게 있었다. 아니, 그걸 떠나서 애초에 유진은 연호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연호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늘 그랬다. 유진은 이번에도 선택받지 못했다.

“형 바쁜 것 같아서 그런 건데….”

연호는 이번에도 유진이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방해될까 봐….”

겨우 말 몇 마디에 유진은 또 다시 연호에게 속을 뻔했다. 이쯤 되니 사실은 유진이 연호에게 속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 정말? 나한테 방해될까 봐 그랬어요?

“당연하죠!”

-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요.

유진은 연호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분명히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아졌다.

만약 내 착각이 맞으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만 마음을 비틀었다.

- 네가 이러는 거 자체가 방해예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나아가 나를 싫어한다는 건 그야말로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 심정을 모르지 않았기에 이런 상황만큼은 죽어도 피하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심지어 이번이 벌써 두 번째였다. 연호는 또 다시 유진에게 내쳐졌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저 좋을 대로만 행동하던 첫 번째와는 달랐다. 오히려 노력하고 조심했던 만큼 지금이 훨씬 충격이 컸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연호가 눈물을 꾹 참으며 말했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분해서 그랬다. 그간의 설움이 물 밀 듯이 터져 나왔다.

“내가 사귀어 달라고 했어, 결혼을 해 달라고 했어. 이 정도 배려도 하면 안 돼요? 왜?! 방해는 무슨, 북한도 이러지는 않겠다!”

연호가 지금의 관계에 만족하는 이유는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질 리가 없음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유진도 연호를 좋아해 줬으면 싶었다. 유진이 나한테만 다정했으면 좋겠고, 그 예쁜 입술에 뽀뽀도 하고 싶었다. 같이 밥도 먹어 보고 싶었고, 십 분 이십 분이 아니라 한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럴 수 없으니까 포기했다. 그런데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 그냥 참았다. 참고 또 참았는데 그 결과가 겨우 이거라니.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그 새끼들이 그 지랄하는데도 형한테 방해될까 봐 꾹 참고 그냥 온 건데.”

- …지금 무슨….

“…아, 생각할수록 열 받네. 형 못 봐서 더 짜증 나잖아요!”

매장에 적막이 맴돌았다. 수화기 너머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진 역시 조용했다. 전화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소리를 제외하면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지난번에는 유진의 다리라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볼 수 없었다. 그것뿐일까. 낮에도 유진을 보지 못했다. 내가 다시는 양보하나 봐라. 연호가 악에 받쳐 물었다.

“형 지금 어디예요?”

지금이 아니면 유진이 다시는 연호를 만나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유진을 만나야 했다. 지난번처럼 다리가 아니라 제대로 얼굴을 봐 두고 싶었다.

“바로 갈 테니까 나 한 번만 만나 줘요.”

- …….

“한 번만요.”

- …….

“얘기 안 해 줄 거예요?”

- …일단 나와요.

“딴소리하지 말고 지금 어디 있냐고요.”

끝내 유진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연호에게는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남우 찬스가 있었다. 그게 뒷조사와 뭐가 다르냐고 한다면 쉽사리 반박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거기서 딱 기다려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호는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런 연호를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매장에 남겨진 두 사람이 멍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집에 가서 오토바이 키부터 꺼내 와야지. 연호가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아무 생각도 없이 나온 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눈발은 약했다.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얼룩진 바닥에는 그 어떤 눈송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눈이 쌓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들었다. 지금 연호에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리가 없었다. 연호가 있는 힘껏 바닥을 디뎠다. 이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긴 했다. 그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하던 연호는 끝내 제 발에 다리가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도 골목 한복판에서 꼴사납게 엎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호는 꽃샘추위에도 희석되지 않는 강한 담배 냄새가 나는 품에 끌어 안겨 있었다.

“괜찮아요?”

목소리는 뒤에서, 아니, 위에서 들려왔다. 언제나 남을 배려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저 다정한 목소리가 좋았다. 사실은 유진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연호는 유진에게 첫눈에 반한 건지도 몰랐다.

유진이 담배를 피우며 연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유진의 어깨와 머리카락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눈이었다. 쌓이려면 한참이 걸릴 것 같은 자잘한 눈송이가 유독 유진에게만 풍성하게 쌓여 있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오토바이는 무슨….”

볼이 홀쭉하게 팰 정도로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며, 유진이 빈정거렸다.

연호는 유진이 눈앞에 있는데도 유진의 존재를 실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게 여기는 연호의 집 주변이었다. 캠퍼스도, 배달지도 아니었다. 연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골목을 드나들었다. 학교를 갈 때도, 아르바이트를 갈 때도, PC방에 갈 때도 언제나 이 길을 지나다녔다. 이곳이 바로 연호의 일상이었다.

그곳에 유진이 있었다. 유진이 깊게 숨을 내쉴 때마다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평소에는 담배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유독 냄새가 진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유진이었다. 유진은 연호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물었다.

“퇴근 여섯 시라며.”

“…….”

“이 시간까지 안에서 뭐 했어요.”

“…….”

“왜 집으로 안 가요? 매일 이랬어요?”

연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후우…. 유진이 짜증 섞인 담배 연기를 토해 냈다. 하얗게 흩어지는 숨결이 꼭 눈송이 같아서 그마저도 예뻐 보였다. 마음이, 감정이 넘쳐흘렀다.

“강연호.”

“형, 좋아해요.”

연호가 유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인간적인 의미로도 좋고, 성적인 의미로도 좋아요.”

“…….”

“형이…. 좋아요.”

머릿속이 이 사람이 좋다는 생각으로 가득해서 도저히 진정이 안 되었다. 유진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던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고백이었다. 비로소 연호는 유진에게 고백을 했다. 유진에게 마음을 전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어코 전하고 말았다.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연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얼굴을 스치는 눈송이가 너무 차가웠다.

코끝에 스미는 담배 냄새에 조금씩 현실로 돌아왔다. 유진은 그 자세 그대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뿐이었다. 유진은 연호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담배를 피웠다. 한 개비를 모두 피우면 곧바로 새 것을 꺼내 입에 물었다.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진은 도통 진정을 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봐요.”

한참 만에 돌아온 답변에, 연호는 거짓말처럼 맥이 탁 풀렸다.

“…못 들었어요?”

“네.”

그마저도 유진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연호는 하는 수 없이 고백을 되풀이해야 했다. 이제 와서 못할 것도 없었다.

“좋아해요.”

“…….”

“형이 좋아요.”

“한 번 더.”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요.”

“더.”

“형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더.”

바람이 불자 저절로 눈발이 강해졌다. 그 때문인지 담배를 움켜쥔 유진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더….”

어느새 담뱃재가 뽀얗게 타 들어가고 있었지만 유진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어디가 고장 난 사람처럼 계속해서 같은 단어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쯤 되자 연호도 오기가 생겼다. 차라리 거절을 당하면 당했지 이대로 못 들은 척 넘어가는 건 어림도 없었다. 늘 그렇듯 방법은 있었다. 모른 척할 수 없을 때까지 얘기하면 되지. 단순하고도 명쾌한 접근이었다. 연호와 유진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했다.

“형, 좋아해요.”

“…더.”

“진짜 좋아해요, 유진이 형.”

유진이 질끈 눈을 감았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이 벅차서 이 이상은 심장에 해로울 것 같았다. 유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못 믿겠는데.”

…뭐 이 새끼야? 연호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할 뻔했다. 아무래도 끝까지 모른 척할 모양인 것 같은데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연호가 큰 소리를 냈다.

“내가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거지 그걸 왜 형이 못 믿고 지…. 난리예요!”

“목소리 좀 낮춰요.”

“아, 답답해 진짜. 꺼내서 보여 줄 수도 없고!”

그 말에 유진이 빤히 연호를 쳐다보았다. 유진의 시선이 얼굴부터 어깨, 가슴, 배, 사타구니, 다리까지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꼼꼼하게 연호의 몸을 훑었다.

“…그럼.”

진득한 시선에 담긴 열기가 뜨거웠다.

“보여 줘 봐.”

연호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계단! 형, 계단!”

유진의 집에 도착한 연호는 지나치게 천진난만했다. 그 어디에도 긴장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둘 중 하나였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거나, 아니면 정말 아무 생각이 없거나.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고르자면 후자가 나았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계단 처음 봐요?”

“아 씨, 뭔 소리예요. 2층 올라가 봐도 돼요?”

대답과 동시에 연호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조용한 집안에 경쾌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그렇게 볼 게 있다고. 연호는 숫제 뛰어다니기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유진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독립을 해서 지금까지 쭉 혼자 지냈다. 유진에게 집은 도피처일 뿐 안식처는 아니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면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고 그럴 때면 습관처럼 공부를 했다.

공부 외에는 별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유진에게 집은 침묵이 자연스러운 공간이었다. 이렇게 시끄러운 건 오랜만이었다. 아니, 현관에 다른 사람의 신발이 놓인 걸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나만의 공간에 타인을 들인 것까지 모두 다. 유진이 어색하게 연호가 벗어 던진 신발을 정리했다.

“뭐 해요. 안 들어와요?”

알아서 집 구경을 끝낸 연호가 1층으로 유진을 마중 나왔다. 이쯤 되니 연호가 집주인 같았다. 연호가 시키지도 않은 감상을 말했다.

“집이 뭐 이래요?”

“뭐가요?”

“뭐가 너무 없잖아요. 넓어서 그런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봐도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TV도, 어지럽게 널려 있어야 할 각종 살림살이도 없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해 먹은 흔적도 없었다.

2층은 더 심각했다. 2층은 방이 세 개나 있는 1층과 평수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2층에 있는 거라곤 1인용 소파가 다였다.

이건 집이라기보다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 사람은 있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는 인위적인 공간, 유진의 집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정작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이런 데서 혼자 살면 너무 쓸쓸할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감정에 연호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요?”

“뭐가요.”

“이상한 얼굴 하고 있어요.”

아직 불을 켜지 않은 탓에 집안이 온통 어두웠다. 그래서 그런지 유진이 꼭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연호를 보면서 웃는 것처럼, 그렇게.

연호가 입을 다물자 거짓말처럼 사방이 고요해졌다. 연호는 그제야 자신이 유진의 집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것도 단둘이었다. 연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배고파요?”

“…배고파서 그런 거 아니거든요!”

“먹을 거 없을 텐데…. 에너지 드링크 줄까요?”

유진이 냉장고에서 에너지 드링크를 꺼냈다. 유진의 말대로였다. 냉장고에 마실 건 있지만 씹어 먹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렇게 생긴 사람들은 이슬만 먹고 사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안 마셔요?”

“안 마실래요.”

먹는 건 마다하지 않는 연호지만 지금은 좀 힘들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 같은데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끝이 없었다. 침은 어떻게 삼켰더라? 눈은 어떻게 깜박이는 거였지? 이제는 별게 다 고민이었다. 긴장이 돼서 죽을 것 같았다.

평소보다 훨씬 산만한 모습이 연호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지만 유진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연호는 평소에도 충분히 산만했고, 지금도 산만한 건 매한가지였다. 유진이 보기에 연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연호가 태연한 척을 하면 할수록 유진만 초조해졌다. 어쩌면 연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건지도 모른다. 요즘은 자정이 넘어도 미성년자가 갈 수 있는 곳이 많다고 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끝도 없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유진은 이 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확인하고 싶었지만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유진이 여태까지 연호의 여자 친구에 대해 묻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제는 연호가 번호를 따 갔다는 유진의 후배까지 추가되었지만, 유진은 절대로 이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없었다.

연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마음에 두고 있든 없든 어차피 유진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유진에게는 이것뿐이었다. 어차피 결과가 같다면, 굳이 불편한 진실을 들여다볼 필요는 없었다. 알아봤자 유진만 힘들어질 게 뻔했다.

유진은 감히 연호가 자신을 선택해 주길 바라지 않았다. 그럴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그저 연호에게 있어 유진도 그중 하나라는 걸 확인시켜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거면 되었다.

“…이리 와요.”

그중 하나일수만 있다면. 유진은 자신이 우선시되지 않는 상황에 익숙했다. 유진이 침실 문을 열었다.

***

“형 지금 내 말 하나도 안 들었죠.”

“들었어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면서요.”

상황에 맞지 않는 철학적인 대화였다. 유진이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었음을 확인한 연호가 만족스럽게 마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맞아요. 왜 배만 고파도 막 정신없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형도….”

함께 침실에 들어온 것까진 좋았는데 연호는 도통 집중할 생각을 안 했다. 계속해서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누운 유진이 말없이 연호를 올려다보았다. 유진의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연호가 보였다. 연호는 유진에게 닿지 않기 위해 무릎으로 침대를 딛고 서 있었다. 그 자세로 잘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연호가 산만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침대 위에서도 산만할 줄은 몰랐다. 급한 건 유진뿐이었다. 유진은 한시라도 빨리 확인받고 싶었다. 증명받고 싶었다.

“이제 다 했어요?”

“어….”

연호가 어물쩍 대답을 흐렸다. 연호는 단순히 민망해하는 것뿐이었지만 유진은 연호가 민망해하면 할수록 초조해졌다. 참다못한 유진이 대놓고 연호를 채근했다.

“하기 싫어서 그래요?”

“아니요! 전혀!”

“그럼 왜 이렇게 서론이 길어요.”

유진은 연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실한 증거를 원했다. 연호의 말대로 사람의 마음은 꺼내서 보여 줄 수 없지만 신체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유진은 연호에게 신체 부위를 활용한 무언의 반응을 요구했다.

…사람이 너무 쪽팔리면 수치심에 사망할까 봐 그런다, 왜. 연호가 대답 대신 침대 시트만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그런 사례가 없었다 해도 연호가 최초의 사례가 될 수도 있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유진을 쫓아온 것까진 좋았으나 연호는 당장 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역시 좋아하는 것까진 아닌 것 같아?”

연호의 망설임을 알아차린 유진이 금세 날을 세웠다. 눈치가 백단이었다. 연호가 재빨리 반박하고 나섰다.

“내가 언제 그랬어요! …그냥 긴장 좀 풀려고 그런 거예요.”

그 말에 유진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손끝에 경련하듯 떨고 있는 입꼬리가 만져졌다. 이러니 티가 날 수밖에. 연호가 유진을 배려할 만했다.

실제로도 연호는 아까부터 유진과 눈을 맞춘 채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상대방의 긴장을 풀어 주는 것, 그게 연호의 방식인 것 같았다. 연호다웠다. 그래서 싫었다. 다른 사람들과 몸을 겹치면서 하나 둘 쌓아 왔을 일련의 습관이 유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 지금이, 그런 배려조차 절실한 자신이 싫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유진의 얼굴에 피어오른 짜증을 알아차렸다. 연호가 긴장하면 긴장할수록 유진의 짜증이 커져 가고 있었다. 참다못한 유진이 옆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팔을 뻗었다. 협탁 위를 더듬는 손가락이 담배를 찾고 있었다. 그건 곧 유진이 연호를 보고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연호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유진은 연호의 고백을 거절하지 않았다. 연호를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 기분이 나쁘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거면 되었다. 아니, 충분했다. 멀리서 희미한 그린 라이트가 연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래. 하자, 해.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 연호가 후다닥 바지를 끌어내렸다. 그래 봤자 골반이 조금 드러난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쪽팔렸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연호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울어져 있던 유진의 상체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라이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유진은 결국 담배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이 모든 움직임이 연호의 바로 아래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연호는 유진과 한 침대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충동적인 고백의 결과가 유진의 침대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좋아서 좋다고 했을 뿐, 유진의 반응을 잰다거나 특별한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대로 거절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다 오싹했다. 최악의 결말을 상상하고 나니 마침내 결심이 섰다. 연호가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제 연호는 자위를 해야만 했다. 쾌감은 나중 문제였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서 연호의 헛손질이 계속되었다. 유진은 말없이 연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기가 되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았다.

“으앗!”

갑자기 귓가에서 이질적인 촉감이 느껴졌다. 유진이 연호의 귓불을 만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의 접촉은 하나도 좋지 않았다. 놀란 연호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이를 나무라듯 유진이 힘을 주어 연호의 피어싱을 잡아 당겼다. 피어싱이 박혀 있는 귓불이 자연스럽게 고통을 호소해 왔다. 아무래도 유진은 연호가 피어싱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막무가내로 피어싱을 잡아당길 수가 없었다.

“형, 나 거기 피어싱…!”

“알아요.”

“아! 자, 잠깐. 나 아픈…!”

“피어싱은 왜 했어요?”

유진이 나긋하게 물었다. 어느 때보다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연호의 피어싱을 잡아 돌리는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연호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형들이, 피어싱 하면…, 뒤에 태워 준다고 해서, 아!”

“…태워 준다는 게 오토바이 얘기하는 거예요?”

“네, 맞…. 아! 형, 아파, 요.”

유진이 손끝을 세워 연호의 피어싱 주변 살갗을 짓눌렀다. 성기를 만지던 손으로 유진의 팔을 밀어낼 수는 없어서 연호는 어쩌지도 못하고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연호의 귓불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유진이 느리게 연호의 귓불을 주무르며 말했다.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네요.”

“형, 잠깐만….”

“시킨다고 그걸 또 했어요?”

“그, 땐, 오토바이가 없어서, 아! 혀엉….”

연호가 애원하듯 말꼬리를 늘렸다. 기분 탓인지 유진의 손길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유진의 손가락이 귓불을 타고 귓바퀴로 올라갔다. 귓바퀴는 귓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차갑게 느껴졌다. 유진이 손가락 사이에 연호의 귓바퀴를 넣고 비볐다. 흐, 으…. 아직 고통이 가시지 않은 건지 연호가 앓듯이 신음했다.

귓바퀴를 주무르던 손가락이 느릿하게 연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천천히 귓구멍을 더듬는 손길에 연호가 자기도 모르게 유진의 손바닥에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잔뜩 괴롭혀진 귓불처럼 따끈하게 달아오른 뺨이 어리광을 피우듯 유진의 손에 비벼졌다. 무의식적인 행동인 것 같았다.

유진이 그대로 굳어 버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연호가 다시 한 번 뺨을 비볐다. 유진의 손바닥에 연호의 입술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말고 더 시킨 거 있어요?”

아주 잠깐 말을 하지 않은 것뿐인데 금세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연호가 그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내려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싫은 예감이 들었다. 연호가 대답했다.

“반대쪽도….”

그럴 줄 알았다. 역시 애나 어른이나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았다. 가만히 뒀을 리가 없지. 연호를 보고 있으면 흔적을 남기고 싶어졌다. 우습게도 유진은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반대쪽은 더 가관이었다. 귓바퀴만 두 군데가 뚫려 있었고, 귓불이 멀쩡한 대신 연골에 피어싱이 있었다.

“또.”

유진이 연호의 피어싱을 건드리며 말했다.

“더 시킨 건 더 없어요?”

“없, 어요.”

이 정도로 끝났다고? 쉽게 가시지 않는 의문에 유진이 손을 멈추자, 그새 유진의 손길에 익숙해진 연호가 알아서 고백을 해왔다.

“배꼽, 에다가도 하라고 했는…. 아!”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피어싱을 잡아당긴 유진이 잠시 손가락을 떼어냈다가, 다시 피어싱을 건드렸다. 손길은 여전했지만 확연히 줄어든 통증에 연호가 마저 뒷말을 이어나갔다.

“안 했어요.”

“…….”

“그건 진짜 싫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어둠 속에서 연호의 귀에 새겨진 타인의 흔적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육안으로도 연호의 피어싱이 잘 보이는 거리가 되었을 때, 유진이 비로소 손에서 힘을 풀었다.

가까이에서 연호의 얼굴이 보였다. 유진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연호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는지 연호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로 잠시 유진의 시선이 머물렀지만 그뿐이었다. 지금 유진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피어싱은 각도에 따라 그 빛이 달랐다. 유진이 연호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피어싱을 확인했다.

당황해하던 연호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적응했다. 귓불이 꼬집힐 때에 비하면 얼굴이 붙잡힌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덕분에 연호는 유진의 얼굴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늘 올려다봐야 하던 상대가 아래에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누군가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목덜미에서 유진의 숨결이 느껴지고, 코끝에서는 유진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언제 입을 맞춰도 이상하지 않은 거리감이었다. 연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진의 입술로 향했다.

…안 돼. 연호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연호는 지금 양손으로 성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정면에서 유진의 입술을 마주한 연호의 성기가 작게 고동쳤다. 유진의 말대로였다. 신체 반응은 감정을 대변했다.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더더욱 의식이 되었다.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손이 연호의 얼굴을 움켜쥐고 있었다. 마디가 굵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유진이 숨을 쉴 때마다 연호의 심장이 부풀어 올랐다. 천 속에 갇힌 성기도 함께 부풀었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았다.

“이거.”

턱 아래를 간질이는 유진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연호가 잠시 숨을 멈췄다.

“빼면 막혀요?”

“뭐, 뭐가요?”

“구멍.”

유진이 손가락으로 연호의 피어싱을 톡톡 건드렸다. 유진은 아까부터 계속 피어싱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유진이 무언가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인 건 피어싱이 처음인 것 같았다.

뚫길 잘했다. 잠시나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연호가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며 뿌듯하게 말했다.

“피어싱은 잘 안 막혀서 한 번 뚫으면 오래가요.”

“…….”

“형도 하게요?”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연호의 턱을 움켜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아팠지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넌….”

유진이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

“뭐든 참 쉽네.”

돌아온 건 연호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뜻 모를 소리였다. 그 말을 끝으로 유진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쉬웠다.

유진이 다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겨우 그것뿐인데도 유진이 엄청 멀리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연호가 본능적으로 무릎으로 침대를 기었다. 바지를 입고 있긴 했지만 유진의 앞에서 성기를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했다. 지금은 그저 유진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런 연호를 저지한 건 유진이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왜요?”

편안하게 침대에 앉아 있는 유진과 달리 연호는 무릎으로 침대를 딛고 서 있는 채였다. 그것뿐일까. 바지 속에 손을 넣고 있기까지 했다. 유진이 턱짓으로 연호의 하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싸는 거 보여 줘야죠.”

“…….”

“나한테 튀면 어떡해.”

주어가 불분명한 문장이었지만 연호는 그 뜻을 모를 만큼 어리지 않았다. 잊고 있던 현실을 상기시켜 준 유진 덕분에 연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 하자, 해. 빨리 하고 끝내 버리자. 연호가 비장하게 속옷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비로소 성기가 뿌리 끝까지 만져졌다. 다행히 아직 발기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형 나 싫어하면 안 돼요.”

연호가 바지 속에서 꾸물꾸물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징그럽다고, 기분 나쁘다고….”

“안 해요.”

유진이 중간에 말을 끊어 버렸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진답지 않은 단호한 태도에 가슴이 설렜다. 유진이 침대 헤드에 완전히 몸을 기대앉았다. 마치 영화라도 보러 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연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기대감도, 설렘도 없었다.

그저 필사적이었다. 지금 유진은 이 상황이 약간 무섭기도 했다. 유진이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유진이 다시 눈을 뜬 건 자의가 아니었다. 소리가 들려서 그랬다. 천 속에서 무언가 비벼지는 소리였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자위를 하고 있는 연호였다. 연호는 정말로 유진의 앞에서 자위를 하고 있었다. 차마 벗지 못한 바지 가운데가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연호는 불편한 자세로 끊임없이 성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한 건 유진이었지만 연호가 정말로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유진은 지금까지 연호를 의심하기만 했다. 연호의 고백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유진이 가장 믿지 못하는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나를 믿지 못하는데 남은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사람이 빛날수록 더 그랬다. 이런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할 리가 없어. 이런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대할 리가 없어. 네가 나를 좋아할 리가….

이를 부정하려는 듯 연호의 몸이 작게 들썩였다. 수치심인지 흥분인지 모를 고양감이 어설프게 연호를 자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로 발기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스스로를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유진의 집에, 그것도 유진의 침대 위에서 유진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성기가 점점 힘을 받고 있었다. 천 속에 갇혀 있는 성기가 답답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애가 탔다. 유진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으, 형….”

“…….”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요….”

연호가 간간히 숨을 참으며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주변이 시끄러우면 덜 민망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

“형….”

“못하겠으면 하지 말아요.”

일순 연호의 움직임이 멎었다. 유진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아났다.

“그럴 줄 알았어요.”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유진은 종종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얼굴로 미운 소리를 하곤 했다. 미운 소리라는 건 굉장히 순화된 표현이었다. 사실은 개소리에 더 가까웠다.

“내가 진짜…, 예뻐서 봐준다….”

투덜거리는 볼멘 목소리 사이로 달뜬 숨이 섞여 있었다. 이 와중에도 연호는 착실하게 흥분을 쌓아 가고 있었다. 모두 유진 덕분이었다.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유진의 목소리가 연호가 유진의 앞에서 자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부각시켜 주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해요?”

유진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밤처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척 생소하게 들렸다. 그래서 좋았다. 평소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유진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가는 이 순간이 그저 좋기만 했다. 문제는 비단 연호만 좋아한 게 아니었다. 연호의 성기도 유진의 색다른 목소리를 좋아했다. 성기를 죄어 오는 어설픈 쾌감이 뇌에 닿는 모든 자극을 성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몰라서, 물어요…?”

연호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자위를 하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흥분이 되고 있었다.

“난 말로 안 하면 몰라요.”

…말로 해도 안 믿으면서. 연호가 대답 대신 신음을 삼켰다. 점점 기분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당연히, 형 생각, 하죠….”

“어떤 생각 하는데요?”

연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진은 연호가 대답할 때까지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유진의 채근에 연호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형한테, 뽀뽀하고… 싶다는 생각….”

“또?”

“…속눈썹도, 만져 보고 싶고….”

그 말에 유진이 살짝 미소 지었다. 연호와 함께 침실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게 다예요?”

“…….”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연호의 대답은 하나같이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유진이 대답 없는 연호를 바라보았다. 연호의 하체가 잘게 들썩이고 있었다. 연호가 흥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꼭 그 사람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 종류의 좋아함도 분명히 있었다. 그중에서 유진이 가지고 싶은 건 좀 더 완벽한 형태의 애정이었다.

“나랑 자고 싶어요?”

“…아…!”

놀람과 흥분감이 거세게 밀려오자 연호가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도리어 연호가 지레 놀라고 말았다. 유진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 자세 그대로 연호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용히, 좀….”

“아무 말이나 해 보라면서요.”

“…형, 그만.”

연호가 뒤늦게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다. 주변이 시끄러우면 덜 민망할 거라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증거로 아까부터 연호에게 젖은 소리가 났다. 귀두 끝에서 쿠퍼 액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리 와요.”

연호가 말없이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초조해진 유진이 조금 큰 소리를 냈다.

“이리 와.”

“…튀면….”

“됐으니까….”

유진이 멋대로 연호를 잡아끌었다. 연호가 몸을 휘청거리면서도 성기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놓을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바지 벗고 내 위에 앉아요.”

“으…. 싫….”

“다리 더 벌리고….”

유진이 말을 하면 할수록 성기를 흔드는 연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를 지켜보던 유진이 다급하게 연호의 바지를 끌어내렸지만 당연하게도 벗겨지지가 않았다. 유진의 배 위에 강제로 앉혀진 연호의 다리가 한껏 벌어져 있는 탓이었다.

“혀, 형….”

연호가 헐떡이며 유진을 불렀다.

“…왜요.”

유진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나 이름, 불러 주면 안 돼요?”

“…….”

“한 번만…. 진짜, 한 번만….”

“…….”

“혀엉….”

유진의 가슴에 비벼지는 들뜬 엉덩이가 연호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다가올 쾌감에 연호의 말꼬리가 끝없이 늘어졌다. 유진이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안 돼요.”

지금까지 연호는 이런 식으로 손쉽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 왔을 테다. 저런 얼굴로, 저런 목소리로 애원하는데 얻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였다. 응석을 받아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으, 형….”

“…….”

“유, 진이, 형…. 아…!”

이름을 불렀다. 유진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절절하고 애처로운 목소리가 유진에게 매달렸다. 유진이 형, 혀엉…. 연호는 절정을 앞에 두고 계속해서 유진을 찾았다.

연호는 유진을 보며 흥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뱃속이 들끓었다.

퍽!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순 큰 소리가 났지만 금방 매트리스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어느새 연호는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놀란 연호가 움직임을 멈춘 채 느리게 두 눈을 깜박여 봤지만 감각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사정을 앞두고 있던 연호였다. 당장 현실 감각이 무뎠다.

그런 연호를 현실로 되돌려 준 건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이었다. 강한 힘으로 짓눌린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파 왔다. 시선을 내리자 연호의 어깨를 움켜쥔 커다란 손이 보였다. 연호가 그 손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유진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호 밑에 있던 유진이 위에서 연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호가 밑에서 멍하게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음영이 져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진의 숨이 거칠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유진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왔다.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연호를 향해 다가왔다.

키스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대신 귀를 빨렸다. 생각지도 못한 자극에 연호가 자지러졌다. 잠시 잊고 있던 쾌감이 도화선이 되어 연호를 단숨에 절정으로 이끌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부드럽게 귓바퀴를 핥아 왔다. 연호가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 본 애무였다. 유진의 혀가 귓바퀴를 지나 안쪽으로 내려왔다. 미끄러지는 혀의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강연호….”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연호의 이름을 속삭여 왔다. 동시에 구멍이 핥였다. 반 강제적으로 멈춰져 있던 쾌감이 배가 되어 전신을 강타했다. 단번에 사정감이 몰려왔다.

“나, 쌀 것 같…!”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에 유진이 능숙하게 연호의 바지를 벗겼다.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벗겨지고 맨다리가 드러났다. 발목에 바지가 걸리자 유진이 신경질적으로 바지를 잡아 던졌다.

던져진 옷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공기 중에 노출된 성기가 연신 쿠퍼 액을 토해 내며 울어 댔다. 연호가 다급하게 성기를 움켜쥐었다. 그것만으로도 발가락이 굽고 허벅지가 경련했다.

유진은 계속해서 연호의 귀를 빨았고, 연호는 정신없이 성기를 쳐올렸다. 이제는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연호가 입술을 뻐끔거리며 황홀감에 젖어 헐떡거렸다. 어느새 유진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연호를, 연호의 입술을 쳐다보고 있었다. 연호가 유진의 시선 속에서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흐으, 아, 아, 아…!”

지나친 쾌감은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이대로 죽어 버릴 것 같은 작열하는 쾌감이 무서웠다. 연호가 정액을 토해 내며 자기도 모르게 몸부림을 쳤다. 유진이 허벅지로 연호의 몸을 가두었다. 연호가 유진의 밑에 깔린 채 줄줄이 정액을 뱉어 냈다. 유진은 이 모든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사정을 마친 후에도 쾌감의 여파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유진이 연호의 피어싱을 만지작거리자 연호가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싸는 거 못 봤는데….”

유진은 거짓말을 잘했다. 거짓을 사실처럼 고하는 다정한 목소리에 초점 잃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유진이 피어싱을 잡아 돌리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다시 해 봐요.”

여기까지가 연호가 기억하는 가장 선명한 기억이다.

***

노래의 첫 소절이 울려 퍼지기도 전이었다. 연호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짐승 같은 반사 신경이었지만 정작 휴대폰은 발밑에서 찾았다.

- 어디냐?

알람을 껐다고 생각했는데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긴 어디야. 침대 안이지….”

일단은 대답부터 하고 봤다. 누가 들어도 자다 깬 목소리였다.

- 대박. 야, 강연호 오늘 개학한 거 모르나 봐. 이 새끼 지금 집인 듯.

휴대폰 너머로 친구들이 요란을 떨어 댔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연호는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휴대폰에 귀를 기울인 채 멍하게 대화를 곱씹는데, 시끄러웠는지 옆에서 몸을 뒤척이는 게 느껴졌다.

…잠깐. 옆에 누가 있다고? 연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연호에게 등을 보인 채 잠들어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주마등처럼 전날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끝내 연호가 어떻게 잠이 든 건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굳이 확인해 볼 필요는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지금의 모습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 아, 일어나라고! 첫날부터 째는 사람 있으면 일찍 안 끝내 준다 했다고!

친구의 고함에 또다시 유진이 몸을 뒤척였다. 연호가 황급히 전화를 끊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런데도 전화가 계속 왔다. 미친 듯이 왔다.

해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후에야 간신히 잠이 든 유진이었다. 그 정도는 소음도 아니었지만 연호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끊임없이 울려 대는 휴대폰을 부여잡고 연호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그때까지도 유진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연호가 집을 나설 때까지도 그랬다.

그렇게 유진은 침대에 홀로 남겨진 채 아침을 맞이했다. 연호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쯤이었다.

“미친. 강연호 왔다.”

“너 교복은?”

“입으려고.”

특성화 고등학교라서 학년이 바뀌어도 반은 그대로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고작 해야 화장실에 갔다는 핑계가 전부였지만, 친구들이 알아서 연호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연호는 개학 첫날부터 아무에게도 혼나지 않을 수 있었다. 혼내지 않은 사람에는 연호의 엄마도 포함되었다. 엄마는 연호가 외박을 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연호가 엄마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집에 들어섰을 때였다. 언제나처럼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엄마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분명히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 씁쓸했다. 이러다가는 엄마를 탓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연호는 엄마를 생각하는 대신 유진을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연호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자고 있는 유진은 마치 천사 같았다. 너무 예뻐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아깝기까지 했다. 연호는 그 생각 하나로 유진이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집을 나섰다. 세수랑 양치도 집에 가서 했다.

어차피 오전 수업만 하면 되니까 뭐. 연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안일하다면 안일한, 연호다운 생각이었다.

맞다. 형네 집에 먹을 거 하나도 없던데. 금세 기분이 좋아진 연호가 실실 웃으며 휴대폰을 찾았다.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형. 일어났어요? 학교 끝나면 형한테 가도 돼요? 나랑 점심 같이 먹어요…. 등등.

할 말은 많은데 전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교복을 갈아입다가 집에 두고 온 건지도 몰랐다. 아침부터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근데 강연호 부처님 같지 않냐?”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심각해진 연호를 두고서 친구 하나가 실없는 농담을 해 왔다.

“저렇게 생긴 부처님은 좀….”

“종교 전쟁 날 것 같은데.”

“아, 뭐래. 얼굴 말고 귀를 보라고! 뭔가 부처님 귀 같지 않냐? 존나 부었어.”

이쯤 되면 반격이 들어와야 하는데 연호는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호에게 향했다. 연호는 붉어진 얼굴로 말없이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연호는 짙은 스킨십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타인과의 접촉에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배타적인 편이었다. 연호의 반응을 재밌어 하는 친구들이 장난삼아 몸을 겹쳐 올 때도, 남우가 친한 척을 하며 가볍게 몸을 붙일 때도 그랬다.

그런 연호가 밤새도록 귀를 빨렸다. 연호는 그것만으로도 몇 번이고 사정에 도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진이 연호의 귀를 제외한 다른 신체 부위를 만지는 일은 없었다. 그저 연호가 스스로 사정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유진은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했다.

연호의 유별난 반응 덕분에 분위기만 이상해졌다. 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었다.

몸도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자 괜히 성기가 쓰라렸다. 연호가 책상에 엎드린 채 엉거주춤 다리를 벌렸다. 밤새도록 혹사당한 성기는 천이 쓸릴 때마다 극한의 고통을 호소해 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학교에서 화장실도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아아, 알립니다. 3학년 A반, 3학년 A반 강연호 학생은 지금 당장 교무실로 내려오세요. 다시 한 번 알립니다. 3학년 A반 강연호 학생은 지금 당장….]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는 듯 교내 방송에서 연호가 호명되었다.

“헐. 강연호 걸렸나 본데?”

“명복을 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어 댔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기에는 연호부터 찔리는 게 많았다. 연호가 투덜대며 어기적어기적 교실을 나섰다. 걸을 때마다 성기가 천에 쓸려 따끔따끔 아려 왔다.

“빨리빨리 안 오지!”

교무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교사의 호통이 이어졌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여전히 속도를 낼 수 없는 연호가 느릿느릿 교무실에 들어섰다.

“허구한 날 휴대폰만 붙잡고 살면서 왜 이럴 때만 휴대폰을 놓고 다녀?”

이런 걸로 혼이 나는 건 또 처음이었지만 정말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아니에요. 무턱대고 학교로 찾아온 제 잘못이죠. 죄송합니다, 선생님.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아이고, 괜찮습니다. 사람 목숨으로 장난치는 놈들이 나쁜 놈들이죠. 강연호 넌 인마, 그렇게 오토바이 타지 말라고 했는데 그걸 기어코 사? 가족들한테 걱정이나 끼치고! 앞으로도 계속 탈 거야?”

연호는 이 순간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진이 연호의 학교 교무실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강연호 이 새끼 대답 안 하지!”

돌돌 말린 교과서가 연호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치자 멍청하게 유진을 쳐다보고 있던 연호가 맥없이 밀려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이 연호 앞을 가로막았다.

“연호 무사한 거 확인했으니 이제 교실로 돌려보내도 될까요?”

“아, 네, 뭐…. 뭐 해? 얼른 교실로 가.”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 찰나의 순간을 끝으로 유진은 다시금 등을 돌렸다. 비록 유진은 끝까지 연호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연호는 유진과 교사가 대화를 나누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몇 번이나 눈을 비벼야 했다.

당연하게도 대화 중간중간 연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교사에게 연호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유진은 마치 연호의 보호자처럼 보였다.

“오토바이 번호까지 알고 있는 거 보면 단순 보이스 피싱이 아닌 것 같은데…. 당분간 사촌 형님이 조심 좀 시켜야겠어요. 연호 저놈이 애는 순한데 워낙 선배들이 길을 잘못 들여 놔서….”

“네. 조심할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지금 교무실에 있는 건 치킨 테러를 당하고도 연호를 배려하는 여유를 부리던 그때의 유진이 아니었다. 늘 단정하던 머리는 막 자다 일어난 듯 결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급하게 구겨 신느라 모양이 찌그러진 신발이 집을 나올 당시 유진이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옷도 잠잘 때 입고 있던 그대로였다.

“우리 학교에는 왜 온 거예요?”

연호는 잽싸게 유진의 곁에 따라붙었다. 지금까지 교실에 돌아가지 않고 줄곧 유진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기다린 보람도 없이 유진이 그대로 연호를 지나쳤다.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연호가 거의 뛰다 시피 유진을 쫓아갔다.

“형. 형! 유진이 형!”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 봐도 소용없었다. 유진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앞만 보며 걸었다.

"야! 천유진!"

멀어져 가는 유진의 뒷모습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큰 소리로 외쳤다.

“나 안 싫어할 거라며!”

거짓말처럼 유진의 걸음이 멎었다. 연호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달음에 유진에게 달려갔다.

“잡았, 다.”

연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유진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객관적으로도 그다지 강한 악력은 아니었다. 떨쳐 내려면 얼마든지 떨쳐 낼 수 있었지만 유진은 순순히 연호에게 붙잡혔다.

“형이 왜 우리 학교에 있어요?”

“…….”

“…근데 내가 여기 다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얘기했었나?”

유진을 기다리는 내내 하나 둘 쌓여 가던 의문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지만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촌 형이라는 건 또 뭐고…. 나 오토바이 산 건 형이 어떻게 알아요?”

유진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연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나 말한 적 없는데…?”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제는 우리 집 앞에 있지 않았어요?”

연호가 유진의 대답을 기다리듯 빤히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유진이 연호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아요.”

…맞아? 맞다고? 당황한 연호와 달리 유진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비록 몰골은 그렇지 않았지만 유진은 어느 때보다 당당했다.

당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잘못한 게 없었다. 유진이 여상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서 그게 뭐?”

따지고 보면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연호의 집 주소를 제외하면 남우라는 매개체가 있는 이상 이 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저 유진이 연호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없고, 연호도 유진에게 직접 이야기해 준 적이 없을 뿐이었다.

항간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뒷조사라고 불렀다. 연호가 알고 있는 상식에서는 그랬지만 정작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연호가 유진에게 스토커 취급을 받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반응이 다른 건 연호도 마찬가지였다. 연호는 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화를 내지도, 멸시하지도 않았다. 유진이 너무 당당한 것도 이유였지만 사실은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와, 진짜 불공평하다.”

이런 관심조차 기쁘다고 하면 그게 더 스토커 같아 보이려나. 연호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난 기분이 하나도 안 나쁜 거 보면 이게 다 내가 형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거든요.”

“…….”

“근데 형은….”

연호는 아직도 유진의 차가운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스토커, 게이, 거기에 뒷조사까지. 살면서 평생 관련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생소한 단어들을 연호에게 쏟아 내던 냉랭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쓸데 많거든요!”

“그딴 건 어디서 배워 왔어요? 침대 매너가 좋아도 너무 좋잖아요.”

유진은 연호의 말을 끊은 것도 모자라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말속에 숨어 있는 유진의 진심을 찾아내기 위해 연호는 잠시 생각에 잠겨야 했다. 결국 지난 크리스마스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뤄졌다.

“형 자는데 안 깨우고 나 먼저 나간 거 얘기하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이야기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민망한 일이었다. 연호는 이번에도 정확하게 정답을 맞혔지만 유진의 기분은 나아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 더러워 보였다.

“그게 왜요? 형도 일찍 일어났어야 했어요?”

“…….”

“형 더 자라고 최대한 조용히 나간 건데.”

“…….”

“어차피 형한테는 메시지 보내 놓으면 되니까….”

“내 번호 알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몰랐다. 그 대단한 진리를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연호가 뒤늦게 유진의 눈치를 보았다.

얘를 어떡하면 좋지?

차마 자신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애한테 진심으로 화를 낼 수는 없어서 유진은 어쩌지도 못하고 혼자서 화를 삭여야 했다. 연호는 이런 상황에서도 유진의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유진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는 것도 모자라 은근슬쩍 유진에게 몸을 붙여 오고 있었다.

“혀엉.”

연호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유진의 팔을 슬쩍 잡았다. 어이가 없어서 뿌리쳐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유진이 거부하지 않자 연호가 유진의 팔을 완전히 끌어안았다.

유진은 이번에도 연호를 밀어내지 않았다. 자신이 생긴 연호가 유진에게 안기듯 매달려 왔다.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감히 다음을 기약하는 의미 없는 사과였다. 말의 무게는 가벼웠으나 그래서 더 간지러웠다.

유진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다만, 유진을 보고 있는 연호가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유진이라고 해서 크게 상황이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그렇게 우스웠다. 지금 유진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건 유진이 가장 잘 알았다.

“다음부터는 절대 안 그럴게요.”

이런 어린애한테.

“혀엉. 화 많이 났어요? 잘못했어요.”

이런 어린애 때문에 내가.

유진은 침음했다. 유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불안했는지 연호가 뒤꿈치를 들면서 유진의 얼굴을 살피려 들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됐다. 유진은 그걸 알면서도 연호를 말리지 않았다.

“근데 매너가 꼭 필요해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단숨에 거리를 좁혀 오는 모습은 유진으로 하여금 형을 떠올리게 했지만, 전처럼 불쾌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안다. 연호는 유민과 닮지 않았다. 유진은 연호처럼 단순하고 멍청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연호의 과거가 심히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연호가 해명 아닌 해명에 나섰다.

“아니, 솔직히 우리가 같이 뭘 한 건 아니잖아요. …나 혼자 다 했지.”

“그래서요.”

“뽀뽀 한 번 못 하게 했으면서 챙길 것만 더럽게 많아서요.”

이래서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했다. 비로소 드러난 연호의 진심에 유진이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유진이 웃자 연호도 따라 웃었다. 연호는 아이 같지 않은 얼굴로 아이같이 웃곤 했다. 유진의 팔에 매달린 채 유진을 올려다보며 좋다고 따라 웃는 모습이 새삼 연호의 나이를 실감 나게 해 주었다. 이럴 때 보면 연호는 정말로 어린 티가 났다.

물론 실제로도 어리긴 했다. 비록 사복인지 교복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어설프게 매여 있는 넥타이와 교복 조끼가 연호의 신분을 가늠케 했다.

어제는 그렇게 예쁘게 울어 놓고 아직 고등학생이라니. 유진이 자연스럽게 연호에게 손을 대었다. 퉁퉁 부어 오른 귓불은 어딘가 울퉁불퉁하기까지 했다. 유진에게 깨물린 흔적이었다. 유진이 연호에게 남겨 놓은 자신의 흔적을 되짚으며 연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부었네요.”

“으, 알면 하지 마요. 애들이 부처님 귀 같다고 뭐라고 했단 말이에요.”

연호는 투덜거리면서도 유진에게 순순히 귀를 내주고 있었다. 그게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해서 연호의 귀를 만지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작 반나절을 같이 있었을 뿐인데 귀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했다. 연호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대답은 언제 해 줄 거예요. 확인도 시켜 줬잖아요.”

“…….”

“또 못 봤다고 하기만 해, 진짜.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그러면 안 돼요.”

전날 행위로 연호는 유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유진은 눈이 나쁜 게 틀림없었다. 차고 넘치는 연호의 시력을 나눠 주고 싶은 정도였다.

“휴대폰은 어디 있어요.”

“집에 있겠죠 뭐. 말 돌리지 말고요. 대답은요.”

“휴대폰부터 찾아요.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고.”

“형네 집으로 가면 안 돼요? 대답은 형네 집에서 듣는 걸로!”

“안 돼요.”

“왜!”

“학교 가야 돼요. 너처럼.”

유진은 보기보다 뒤끝이 있었다. 지은 죄가 있는 연호가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유진이 연호의 귓바퀴를 만지며 물었다.

“대답 듣고 싶어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내가 거절할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랬다. 유진은 연호를 밀어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받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답을 듣고 싶은 건 모두 다 유진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그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테니까. 만약 유진이 연호를 부담스러워한다면 부담스럽지 않게 하면 될 일이었다. 연호를 싫어하는 거만 아니면 되었다. 연호가 가장 듣고 싶은 대답이기도 했다. 유진이 자신을 좋아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이렇게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이미 확실하게 마음이 선 연호와 달리, 유진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수만 가지 생각을 했다. 무수한 고민 끝에 유진이 내린 결론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다.

어쩌면 연호는 유진에게 거절당해도 금방 털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꼭 유진이 아니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진은 그렇지 않았다. 유진은 태어나서 자신의 걸 온전히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유진 없이도 완벽한 가정이었다. 형은 완벽한 가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유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부모님도, 가족도, 애정도, 기대도, 관심도 모두 형의 것이지 유진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유진은 한가하게 서로를 알아가고 차근차근 관계를 쌓아 올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우선은 가져야 했다. 일단은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유진이 처음으로 느껴 본 이 맹목적인 애정은 ‘연호에게 여자 친구가 있어도 상관없다’는 위험한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연호가 유진의 후배에게 관심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연호에게 유진이 1순위가 아니더라도 유진의 대답은 하나였다.

“형?”

나는, 너를….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품안에 있는 연호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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